신선한 미풍
잘못된 신앙에 대한 경고【 間違った信仰への警告 】다카하시 신지님의 말씀과 수제자의 해설 본문
高橋信次先生・園頭広周先生が説かれました正法・神理を正しくお伝えいたします
다카하시 신지. 소노가시라 히로치가 선생님이 설명하신 정법 신리를 올바르게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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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shoho2.com/s2-14imanazesyohoka.html
위, 출처에 기재된 소개말입니다.
아주 오랫 만에, 글을 올립니다. 몇 개월 되었습니다. 일본에 계신 올해 60 몇 세 되시는 분께서,
글을 올려 주시어서, 저는 복사를 해서, 번역해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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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法誌 No.165 1992年 5月号 より
정법지 No.165 1992년 5월호에서
高橋信次先生の言葉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말씀
【 間違った信仰への警告 】
잘못된 신앙에 대한 경고
心の指針 はしがき より
마음의 지침 머리말에서
現代の仏教、キリスト教の神理は、ながい歴史的な過程のなかに埋没してしまったといってもいいすぎ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時の権力者や、宗教家たちの智と意によって解釈され、学問、哲学と化し、人びとの心から遊離してしまったからです。本来、仏教もキリスト教も、人びとの心から」遊離するようなそんなむずかし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教えそのものは、人間とはこうしたものだということを、誰にもわかりやすく説いているものにほかならないからです。知情意の情とはどういうものかといいますと、情とは心です。心があってはじめて、知は智慧となり、意は大我となるのです。その情が不在となり、仏教もキリスト教も智と意で勝手に解釈され、自分の都合のいいように書き改められたものですから、いよいよもって、民衆の心から離れていったわけです。
현대의 불교, 그리스도교의 신리(神理)는, 오랜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매몰(埋沒)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권력자나, 종교가들의 지(智 :세상적인 지식. 혹은 지혜)와 의(意: 뜻)으로 해석되어, 학문, 철학으로 변하고, 사람들과의 마음으로부터, 유리(遊離)되는 것과 같은 그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르침 그 자체는, 인간(人間)이란 이러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누구나 알기 쉽게 설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정의(知情意)의 정(情)이란 어떠한 것인가냐고 하면, 정(情)이란 마음(心)입니다. 마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지(知)는 지혜가 되며, 의(意)는 대아(大我)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정(情)이 부재(不在)가 되어,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지(智)와 의(意)로 제멋대로 해석되어, 자신의 처지에 좋은 식으로 고쳐 섰던 것이기 때문에, 점점더, 민중(民衆)의 마음에서 멀어져 갔던 것입니다.
もっとも、それにはそれだけの理由があります。人間は、五官や、六根に左右されるように一面においてできているからです。うまいものを食べたい、いい家に住みたい、偉くなりたい、金を儲けたい、といった自己保存の念が社会生活を営むことによってますます強くなっていったからです。闘争と破壊---その原因をたずねれば、みんなこうした欲望にふりまわされたところにあります。ところが、こうした欲望や本能というものは、人間の生活がこの世だけと自ら限定してしまうところに根本的な理由があったといえましょう。手にふれるもの、眼に見えるもの、耳で聴くものなど感覚の世界にしか人間は、これを認識す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に、人は現世に執着を持つ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
하기는, 그것에는 그것만큼의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오관(五官)이나, 육근(六根)에 좌우되도록 사물의 일면(一面)에 있어서 그렇게 만들어져 때문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위대해지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라고 한 자기보존(自己保存)의 생각(念)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의해서 더욱더 강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투쟁(鬪爭)과 파괴(破壞)---그 원인(原因)을 찾으면, 모두 이러한 욕망(欲望)에 휘둘렸던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欲望)이나 본능(本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활(生活)이 이 세상뿐다 라고 스스로 한정(限定)해 버리는 것에 근본적인 이유(理由)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에 대는(닿는) 것,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과 같은 감각(感覺)의 세계(世界)밖에 인간은, 이것을 인식(認識)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현세(現世)에 집착(執着)을 갖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しかし、人間は死んでも来世に生きつづけていることを知れば、人びとの人生観はかわるはずです。すなわち、あの世は厳然としてあるのであり、あの世こそ本当の人間の住む世界であり、この世は人間修行の場であり、そうして人間はあの世とこの世の転生輪廻をくり返すことによって、魂の浄化、仏性である己の本性に目覚めるものなのです。苦しみ悲しみの原因は、神性仏性の己自身の「心」から離れた想念行為の結果であり、その苦しみから解放されるには己の心を直視し、心そのものの実体を認識する必要があります。
하지만, 인간은 죽어도 내세(來世)에서 삶을 계속 하기 있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의 인생관(人生觀)은 바뀔 것입니다. 즉, 저 세상(あの世)은 엄연히 있는 것이며, 저 세상(あの世)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사는 세계이며, 이 세상(この世)은 인간 수행(人間修行)의 장소(場)이며, 그리하여 인간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전생윤회(轉生輪廻)를 되풀이하는 것에 의해서, 영혼(魂)의 정화(淨化), 불성(佛性)인 자신의 본성(本性)에 눈뜨는 것[본성을 깨닫는 것)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슬픔(苦しみ悲しみ)의 원인(原因)은, 신성(神性) 불성(佛性)의 자기 자신의 「마음(心)」에서 떨어진(멀어진) 상념행위(想念行爲)의 결과이며, 그 괴로뭉에서 해방(解放)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心)을 직시(直視)하고, 마음 그 자체의 실체(實體)를 인식(認識)할 필요(必要)가 있습니다.
本書は、そうした意味で「心」とは何か、「正法」とはどういうものなのか、「人間」とはいかなる存在かを概念的ではありますが、そのポイントをしぼって書いたものです。本書を手にされた読者は、本書の真意をつかみ、調和のとれた生活と、平和な社会を築くための心の糧とされんことを願ってやみません。
본서(本書)는, 그런 의미에서 「마음(心)」이란 무엇인가, 「정법(正法)」이란 어떠한 것인 것인가, 「인간(人間)」이란 어떠한 존재(存在)인가를 개념적(槪念的)으로는 있습니만, 그 포인트(ポイント:요점)를 맞추어 쓴 것입니다. 본서(本書)를 손에 든 독자(讀者)는, 본서(本書)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고, 조화(調和)를 이룬 생활과, 평화(平和)로운 사회(社會)를 구축하기 위한 마음의 양식(糧)으로 삼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昭和48年11月吉日 高橋信次
소화48년(1973년) 11월 길일 다카하시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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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の指針 心と大自然]
마음의 지침 마음과 대자연
裏山の斜面の残雪も消え、黒土の表面に、フキノトウが顔を出していた。春の匂いがのどかにただよっています。
뒷동산의 경사면의 잔설(殘雪:녹다 남은 눈)도 사라지고, 대지(黒土:토지)의 표면에, 머위의 어린 꽃대(フキノトウ)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봄내음(春の匂い)이 평화롭게 감돌고 있습니다.
昨年の秋、友人からいただいた大きな庭石を入れたとき、掘りかえされたはずのフキの根がまだ残っていたようでした。傘をひろげたようなフキの葉が、今年も庭の片隅を飾ってくれるかと思うと、その生命力の強さに私はおどろきました。
작년 가을, 친구에게서 받은 큰 정원석(庭石)을 들여놓았을 때, 파헤쳐진 틈새에 머위의 뿌리(キの根) 아직 남아 있었던 듯 합니다. 우산을 편 듯한 머위의 잎(葉)이, 금년에도 정원의 한모퉁이를 장식해 주겠구나라고 생각하니, 그 생명력(生命力)의 감함에 저는 감탄하였습니다.
数日前まで、霜柱の立っていた庭です。その冷えた土の中で今までじっと辛抱して、耐えて来たのです。不平もいわず、黙々と、時の来るのを待ちつづけてきたのです。
수일전까지, 서릿발(霜柱)이 서 있던 정원(庭)입니다. 그 차가운 땅속에서 지금까지 꾹 참고(辛抱), 견뎌 왔던 것입니다. 불평(不平)도 하지 않고, 묵묵히, 때가 올 것을 계속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私は、まだぬくもりも浅い黒土のなかから、春の陽ざしを求めてゆらめいているフキノトウに心をひかれました。
저는, 아직 온기(ぬくもり)도 없는 대지(黒土:토지) 속에서, 봄(春)의 햇살을 찾아서 흔들거리고 있는 머위의 어린 꽃대(フキノトウ)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あと一週間もすれば、小さなつぼみも緑の葉をひろげるでありましょう。
앞으로 일주일정도 지나면, 작은 꽃망울도 푸른 잎을 펴겠지요.
庭石に腰をおろし、大自然の摂理と人生について思索をめぐらしてゆくと、この両者の間には垣根はなく、自然は人間の生き方を身をもって教えていると思われてきます。
정원석(庭石)에 걸터앉아, 대자연(大自然)의 섭리(攝理)와 인생(人生)에 대해서 사색(思索)을 이리저리 해 보니, 이 양자(兩者)의 사이에는 울타리(垣根)는 없고, 자연(自然)은 인간의 생활태도(生き方:생활방식)를 몸소 가르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1968年3月、私は、人間とはいったい何者なのか、そして人間はいったい、何のために生まれ、なぜ仕事をし、苦しみを背負い、老いて死んでゆくのであろうか、という問題について、様々な角度から追及していたころのことを思い出していました。
1968년 3월, 저는, 인간이란 어떠한 누구(何者: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인간은 대체, 뭣 때문에 태어나서, 왜 일을 하고, 괴로움을 짊어지고, 늙고 죽어 가는 것일까, 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로 추급(追及:추적:추궁)해 갔던 바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ふと斜め右に目を向けると、黒土が妙に盛り上がりながら、芝生のある方向に進んで行きます。もぐらの移動でした。都会ではみられぬのどかな風景です。
문득 경사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자, 대지(黒土:토지)가 묘하게 부풀어오르면서(높아지면서), 잔디밭(芝生)의 어느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두더지(もぐら)가 이동(移動)했습니다. 도시(都会)에서 볼 수 없는 한가로운 풍경(風景)입니다.
空にはひばりが鳴き、雀がさえずっています。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울고, 참새가 지져지고 있습니다.
澄んだ空気と、緑と、赤い太陽の下に自分を置くと、いかにも大自然に包まれ、生かされている己を発見して、喧噪の都会では味わえぬ感覚を覚えます。
맑은 공기와, 신록(綠)과, 붉은 태양 아래에 저자신을 맡기자, 정말로 대자연에 감싸여, 되살아는 나를 발견하고, 시끄러운 도시(喧噪の都会:소란한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감각을 느겼습니다.
自然のこうした美しい環境というものは、太陽の熱・光のエネルギーによって育まれる。太陽の偉大さに、いまさらながら脱帽せざるを得ません。
자연의 이러한 아름다운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의 열과 빛의 에너지로 키워진다. 태양의 위대함에, 세삼스럽지만 경의(脫帽)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私たちの肉体舟は、その環境に適応して保存されるようにつくられています。
우리들의 육체배(肉體舟)는, 그 환경에 적응(適應)하고 보존(保存)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寒い冬は、その寒さに耐えられるように、皮膚はちぢみ、体内温度をコントロールし、反対に暑くなれば、皮膚は膨張し、毛穴から汗を出し、放熱作用をつづけています。
추운 겨울(冬)에는, 그 추위에 견디어낼 수 있도록, 피부(皮膚)는 수축하고, 육체온도(肉體溫度)를 컨트롤(조절)하고, 반대로 더우면, 피부(皮膚)는 팽창(膨脹)하고, 모공(毛穴)에서 땀을 내고, 방열작용(放熱作用)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内臓諸器官は常に活動を続け、人体という安定された小宇宙を維持しています。
내장의 모든 기관(內臟諸器官)은 늘 활동을 계속하며, 인체(人體)라고 하는 안정(安定)된 소우주(小宇宙)를 유지(維持)하고 있습니다.
肉体の諸機能を静かにふりかえりながら、ながめてみると、そこには、〝 神秘 〟という以外、いいようのない偉大な働きを想像することができます。
육체(肉體)의 모든 기능(諸機能)을 조용히 뒤돌아보면서(돌이켜 보면서), 바라보면, 거기에는、〝 신비(神秘) 〟라고 하는 것 이외에,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작용(기능:働き)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すなわち、大自然の環境をつくり出している眼に見えない力、全能のエネルギーこそ、神の心の現れでなくて何といえるでしょうか。
즉, 대자연의 환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힘(力), 전능한 에너지야말로, 신(神)의 마음의 표현(現れ)이 아니라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そうして、その心の現れこそ、慈悲であり、愛の姿といえるでしょう。
또한, 그 마음의 표현(現れ)이야말로, 자비(慈悲)이며, 사랑의 모습(愛の姿)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ところで、その心について私たちは、これをどこまで理解しているでしょう。おそらく、心とはこうだと、はっきり答えられる人は少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그런데, 그 마음에 대해서 우리들은, 이것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나요? 아마, 마음이란 이렇다 라고, 확실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은 것이 아닌가요?
あの人は精神状態が悪いとか、心の広い人だと簡単にいうけれども、では精神とは、心は、となると説明に窮します。
저 사람은 정신상태(精神狀態)가 나쁘다든가, 마음의 넓은 사람이다 라고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럼 정신(精神)이란, 마음(心)이란, 막상 하려면 설명하지 못합니다.
万物が生命と同居してる事実は誰も否定できません。
만물이 생명과 동거(同居)하고 있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否定)할 수 없습니다.
物理学では、物質がエネルギーと同居している事実を証明し、エネルギーとは仕事を為し得る能力であるとしています。
물리학(物理學)에서는, 물질이 에너지와 동거하고 있는 사실을 증명하고, 에너지는 일을 해 낼 수 있는 능력(能力)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そうしてその結果、物質はエネルギーであり、エネルギーは物質であるとさえいうことが出来るのです。
또한 그 결과, 물질(物質)은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물질(物質)이라고까지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目に見られるちがいは、物質という集中された次元と、拡散されたエネルギーの次元の差だけであり、しかも両者は常に併存してるということがいえましょう。
눈(目)으로 볼 수 있는 차이(差異:ちがい)는, 물질이라고 하는 집중(集中)된 차원(次元)과, 확산(擴散)된 에너지의 차원(次元)의 차이(差)뿐이며, 게다가 양자(兩者)는 항상 병존(竝存:함께 존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また、物質は不変であり、エネルギーは不滅であるという事実も実証されています。
또, 물질은 불변(不變)하며, 에너지는 불멸(不滅)이라고 하는 사실도 실증(實證)되어 있습니다.
たとえば、密閉したコップの中にマッチ棒を入れて燃焼させても、全体の重さは変わりませんし、マッチ棒はコップ内の酸素によって燃え、炭素や炭酸ガスに変化しても、全体の重さの変化はおきな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예를 들면, 밀폐된 컵 속에 성냥개비를 넣고 연소(燃燒)시켜도, 전체(全體)의 무게는 변하고 않고, 성냥개비는 컴 속의 산소(酸素)로 인해 불타고, 탄소(炭素)나 탄산(炭酸)가스로 변화(變化)해도, 전체(全體)의 무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私たちの肉体も大自然の中で存在している以上、大自然の法則を無視することは出来ないでしょう。
우리들의 육체(肉體)도 대자연(大自然) 속에서 존재(存在)하고 있는 이상(以上), 대자연의 법칙(法則)을 무시(無視)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生老病死という掟を誰も破ることは出来ない事実を知れば、自明の理といえます。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규칙(掟)을 누구도 어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 자명한 이치(自明の理)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명의 이치> = 일부러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 자체가 명백한 논리이다, 란 뜻.
形あるものはいつの日か崩れ去る。しかし肉体も他の物質と同じように、次元の異なった何者かと同居して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
형체(形)가 있는 것은 어느사이엔가 완전히 무너진다. 하지만 육체(肉體)도 다른 물질(物質)과 마찬가지로, 차원(次元)이 다른 누군가와 동거(同居)하게 될 것입니다.
これを、魂、あるいは意識と名づけてみてもいいでしょう。ちょうど、物質がエネルギーと共存しているようにです。
이것을, 영혼(魂), 혹은 의식(意識)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물질(物質)에너지와 공존(共存)하고 있는 것입니다.
肉体舟は肉体細胞諸器官の生命活動により安定していますが、舟の責任者は五体を支配する船頭さんである魂・意識の活動によって、生活を営んでいるといえましょう。
육체배(肉體舟)는 육체세포(肉體細胞)의 모든 기관(諸器官)의 생명활동(生命活動)에 의해서 안정(安定)되고 있지만, 배(舟)의 책임자는 오체(五體)를 지배하는 선장님(船頭さん)인 영혼(魂)・의식(意識)의 활동에 의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肉体舟の欠陥は、五体の各諸器官と船頭さんである意識の相互関係がアンバランスになったときに起こるのです。
육체배(肉體舟)의 결함(缺陷)은, 오체(五體)의 각 모든 기관(各諸器官)과 선장님(船頭さん)인 의식(意識)의 상화관계(相互關係)가 언발런스(불균형)하게 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私たちの記憶も、既刊の著書の中でたびたびふれたように、頭脳がそれをするのではなく、魂・意識が記憶しているのです。
우리들의 기억(記憶)도, 기간(既刊:책 따위가 이미 간행됨)의 저서(著書) 중에서 자주 접했던 것처럼, 두뇌(頭腦)가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魂)・의식(意識)이 기억(記憶)하고 있는 것입니다.
つまり、肉体舟と意識・魂という次元の異なった世界のものが不二一体となって、生命活動をしている、といえるでしょう。
즉, 육체배(肉體舟)와 의식(意識)・영혼(魂)이라고 하는 차원(次元)의 다른 세계(世界)의 것이 불이일체(不二一體)가 되어, 생명활동(生命活動)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永遠の生命とは、この世とあの世を超えて、いっさいの記憶を持ちながら生き続けている魂・意識の自分であるわけです。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란, 이 세상(この世)과 저 세상(あの世)를 초월하여, 일체의 기억(記憶)을 가지면서 계속해서 살고 있는 영혼(魂)・의식(意識)의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肉体の生死にとらわれると、死はすべての終わりを意味しますが、肉体を離れた自分を認識し、体験すると、そこに、死のないことに気づきます。ただ、生きている間にこのような体験を持つ者は、ホンの一部にかぎられているため、想像は出来ても、信ずるところまでは、なかなか、いかないようです。
육체(肉體)의 생사(生死)에 사로잡히면(얽매이게 되면, 구애되면), 죽음(死)은 모든 것의 끝장(마지막: すべての終わり)을 의미하지만, 육체(肉體)를 벗어난 자기 자신을 인식(認識)하고, 체험(體驗)하면, 거기에, 죽음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단,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러한 체험(體驗)을 갖는 사람은, 정말로 일부(一部)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想像)은 할 수 있어도, 믿는 데 까지는, 상당히, 힘든 것입니다.
しかし、信じる信じないにかかわらず、人間は、肉体が滅びても死ぬことはないし、死はあの世への誕生といってもいいのです。
하지만, 믿고 안 믿고에 관계없이, 인간(人間)은, 육체(肉體)가 멸망해도 죽는 것은 아니고, 죽음(死)은 저 세상으로의 탄생(誕生)이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私たちは旅行をするときに、いろいろな乗り物を使います。飛行機で飛んだり、自動車に乗ったり、電車を利用したりして目的地に着きます。乗り物はそれぞれちがっていますが、乗っている自分自身は少しも変わらないのです。
우리들은 여행(旅行)을 할 때에, 다양한 탈 것을 사용합니다. 비행기(飛行機)로 날아가거나, 자동차(自動車)를 타거나, 전차(電車)를 이용하거나 해서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합니다. 탈 것은 저마다 다르지만, 타고 있는 자기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魂の永遠の生命、つまり転生輪廻もこれと同じで、自分の過去世は中国で、インドで、あるいは日本人として、生まれ変わって生き続けていますが、自分自身は少しも変わっていないのです。
영혼(魂)의 영원(永遠)한 생명(生命), 즉 전생윤회(轉生輪廻)도 그것과 마찬가지이며, 자신의 과거세(過去世)는 중죽(中國)에서, 인도(印度)에서, 혹은 일본인(日本人)으로, 다시 태어나서(환생해서)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過去世の記憶をよみがえらす人は非常に少ない。ほとんどの人は現在の生活だけが絶対であると思っています。ましてや未来について語る人は絶無に近い。そのために、無意味な人生を送ってしまっているのです。
과거세(過去世)의 기억(記憶)을 되살리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現在)의 생활(生活)만이 절대(絶對)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미래(未来)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문에, 무의미(無意味)한 인생(人生)을 보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過去世の記憶の断絶は、一つには現世は修行の場であり、もう一つは次元の相違がそれをさせているといえます。過去世の記憶がオギァと生まれてすぐにわかってしまうならば、この世に生まれた意義は少なくなります。
과거세(過去世)의 기억(記憶)의 단절(斷絶)은, 한 가지로는 현세(現世)는 수행(修行)의 장소(場)이며, 또 한 가지는 차원(次元)의 상위((相違:서로 다름)가 그그것을 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세(過去世)의 기억(記憶)이 응애하고 태어나자마자 알아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この世)에 태어난 의의(意義)는 적어지게 됩니다.
もう一つは、ある一定の年令に達しても、なおかつそうした記憶が浮かんでこないというのは、自分の心の中に次元差をつくっているためなのです。次元差とは断絶という壁であり、スモッグです。
또 한 가지는, 어떤 일정(一定)한 연령(年齡)에 도달해도, 게다가 이러한 기억(記憶)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차원의 차이(次元差)를 만들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차원의 차이(次元差)란 단절(斷絶)이라고 하는 벽(壁)이며, 스모그(smog:연무)입니다.
そのスモッグは、私たちの思うこと、行うことの、片寄った生活行為がつくり出したものです。
그 스모그(smog:연무)는, 우리들의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의, 한쪽으로 치우친 생활행위(生活行爲)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私はその事実を知ったのです。
저는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私は幼い頃から生命の神秘に疑問を持ち、自然科学を通して、精神のあり方について、追及して来ました。追究するたびにさまざまな体験が積まれ、体験を通して、生命のナゾが明らかになって来たからです。
저는 어릴 때부터 생명(生命)의 신비(神秘)에 의문(疑問)을 가지고, 자연과학(自然科学)을 통해서, 정신(精神)의 바람직한 상태(본연의 자세 :あり方)에 대해서, 추급(追及:추적 추궁)해 왔습니다. 추궁(追究)할 때마다 다얗한 체험(體驗)이 거둡되고, 체험(體驗)을 통해서, 생명(生命)의 수수께끼(ナゾ)가 밝혀져 왔기 때문입니다.
これらについては拙著、『心の発見』神理篇、科学篇、現証篇、それに『心の原点』を参考にしていただければ、ご理解願えると思います。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졸저(拙著),『마음의 발견(心の発見)』신리편(神理篇),과학편(科学篇), 현증편(現証篇), 거기에, 『마음의 원점(心の原点)』을 참고해 주신다면,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ともかく私は、こうした体験の中から、人間は魂という意識を持って生きつづける永遠の生命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り、限られた短い肉体人生に与えられた己の役割に、全力を挙げてゆきたいと考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어쨓든 저는, 이러한 체험(體驗) 속에서, 인간(人間)은 영혼(魂)이라고 하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삶을 이어가는 영원한 생명(生命)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한정된 짧은 육체인생(肉體人生)에 주어진 자기의 역할(役割)에, 온 힘(全力)을 다해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魂について、さらに明らかになった点は、魂を動かしているものは心であり、心は意識の中心に存在するということでした。
영혼(魂)에 대하여, 더욱 밝혀진 점은, 영혼(魂)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心)이며, 마음(心)은 의식(意識)의 중심(中心)에 존재(存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私たちが生活の場の中で、さまざまな行為を指示するものは、意識の中心である心であり、心以外のものは何もないということです。
우리들이 생활(生活)의 장소(場) 속에서, 여러 가지 행위(行為)를 지시(指示)하는 것은, 의식(意識)의 중심(中心)인 마음(心)이며, 마음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もっとも私たちの肉体舟は、植物性神経の働きで心臓や内臓器官が動いており、肉体舟全体の行動は、魂の中心である心が支配しています。したがって、心臓や内臓は心とは関係がないとみる人もいるかも知れませんが、心の動きは内臓諸器官に大きな影響を与えています。
다만 우리들의 육체배(肉體舟)는, 식물성 신경(植物性神經)의 작용(働き)으로 심장(心臓)이나 내장기관(内臓器官)이 움직이고 있으며, 육체배 전체(肉體舟全體)의 행동(行動)은, 영혼(魂)의 중심(中心)인 마음(心)이 지배(支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장(心臓)이나 내장(内臓)은 마음(心)과는 관계(関係)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음(心)의 움직임은 내장기관(内臓諸器官)에 큰 영향(影響)을 주고 있습니다.
植物性神経、つまり自律神経は神から与えられたエネルギーを吸収しながら活動していますが、また、心の波動を強く受けて動いています。
식물성신경(植物性神經), 즉 자율신경(自律神經)은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에너지를 흡수(吸收)하면서 활동(活動)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마음(心)의 파동(波動)을 강하게 받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この点については拙著『心の原点』を参考にされるといっそう理解が深まるでしょう。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拙著) 『마음의 원점(心の原点)』을 참고로 삼아주시면 한결 이해(理解)가 깊어질 것입니다.
病気の80%は心因性なのです。
병(病氣)의 80%는 심인성(心因性)입니다.
※<심인성> 어떤 병이나 증세가 정신적, 심리적 원인으로 생기는 특성
怒ったり、悲しんだり、愚痴ったり、こうした自己保存が重なると、肉体のさまざまな障害が現れ、病気になってゆきます。
화를 내거나, 슬프거나, 투덜대거나(푸념하거나), 이러한 자기보존(自己保存)이 거듭되면, 육체(肉體)의 여러 가지 장해(障害)가 나타나서, 병(病氣)이 되어 갑니다.
心が片寄ると、自分だけの問題なら病気となって現れますが、対外的に影響を与える場合は、事業不振、家庭不和、公害、災害などに発展してゆきます。
마음(心)이 편협(片寄る)면, 자기 자신만의 문제(問題)라면 병(病氣)이 되어 나타나지만, 대외적(對外的)으로 영향(影響)을 끼치는 경우는, 사업부진(事業不振), 가정불화(家庭不和), 공해(公害), 재해(災害) 등으로 발전(發展)해 갑니다.
物質文明が発達するにしたがって、人間は普遍的な自分自身の心を失い、物質文明の虜になってしまいます。
물질문명(物質文明)이 발달(發達)함에 따라서, 인간(人間)은 보편적(普遍的)인 자기 자신(自分自身)의 마음(心)을 잃어 버리고, 물질문명(物質文明)의 포로(虜)가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物質文明は誰のためにあるのか、文明のためか、人間のためなのか・・・・・・。
물질문명(物質文明)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문명(文明)을 위해서인가, 인간(人間)을 위해서인가・・・・・・?
人間はいつのまにか主客を転倒し、文明に奉仕する人間になり下がっています。愚かというほかありません。
인간(人間)은 어느새 주객(主客)을 전도(轉倒)하고, 문명(文明)에 봉사(奉仕)하는 인간으로 영락(零落)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다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なぜこうなるか、理由はほかでもない「足ることを忘れた欲望」の追求にあるからです。
왜 이렇게 되는가, 이유(理由)는 다름이 아니라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足ることを忘れた欲望)」의 추구(追求)에 있기 때문입니다.
欲望のためには手段を選ばず、すべてに自己中心的な考えが根底にあるので、世の混乱はいつになっても治まらぬというのが、現実でありましょう。
욕망(欲望)을 위해서는 수단(手段)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 자기중식적(自己中心的)인 사고(考え:思考)가 근저(根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世)의 혼란(混亂)은 언제가 되어도 치료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현실(現實)인 것입니다.
大自然を見ると、私たちの眼前にひらかれている姿は、法のルールにしたがって、動物も植物も鉱物、も互いに調和されています。
대자연(大自然)을 보면, 우리들의 눈앞(眼前)에 펼쳐져 있는 모습(姿)은, 법(法)의 룰(rule :규칙)에 따라서, 동물(動物)도 식물(植物)도 광물(鑛物)도, 서로 조화(調和)되어 있습니다.
自然は、正しい循環の法、ルールを示し、足ることを知った中道の神理を教えています。
자연(自然)은, 올바른 순환(循環)의 법(法), 룰(rule : 규칙)을 나타내고, 만족함을 안 중도(中道)의 신리(神理)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動物は酸素を吸って炭酸ガスを吐き、植物は炭酸ガスを求めて酸素を吐きます。動物は植物を求め、植物は動物の排泄物を栄養源にして育ってゆく。両者の相互共存。これは天の摂理です。
동물(動物)은 산소(酸素)를 흡수하고 탄산가스(炭酸ガス)를 내뿜고, 식물(植物)은 탄산가스(炭酸ガス)를 찾고 산소(酸素)를 내뿜습니다. 동물(動物)은 식물(植物)을 찾고, 식물(植物)은 동물(動物)의 배설물(排泄物)을 영양원(營養源)으로 해서 성장해 간다. 양자(兩者)의 상호공존(相互共存)。 이것은 하늘(天)의 섭리(攝理)입니다.
肉食動物は草食動物をやたらと殺しません。腹がいっぱいになれば、目の前の獲物も見送ってしまう。彼らは足ることを知り、自然の環境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ます。したがって、彼らの生活は、人間が踏み込んで荒らさぬかぎり、半永久的に維持されてゆきましょう。
육식동물(肉食動物)은 초식동물(草食動物)을 무턱대고(마구) 죽이지 않습니다. 배(腹)가 불게 되면, 눈앞의 먹이(獲物:사냥감)도 그냥 보내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만족할 줄을 알며, 자연(自然)의 환경(環境)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生活)은, 인간(人間)이 뛰어들어 망치지 않는 한(황폐하게 하지 않는 한), 반영구적(半永久的)으로 유지(維持)되어 갈 것입니다.
人間はこうしたルールを忘れ、欲望充足に明け暮れています。
인간(人間)은 이러한 룰(rule :규칙)을 잊고, 욕망충족(欲望充足)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そのため、大気は汚染され、河川や大洋までが、工業排水でよごれ、動、植物の生存ばかりか、人間の生存すらおぼつかぬような状態をつくり出しています。
그 때문에, 대기(大氣)는 오염(汚染)되고, 하천(河川)이나 대양(大洋)까지가, 공업배수(工業排水)로 더러워지고, 동식물(動植物)의 존재(存在)뿐만 아니라, 인간(人間)의 존재(存在)조차도 불안하게 하는 상태(狀態)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これらは等しく、足ることを忘れた利益追求の人間の在り方に問題があり、今や人類は、大きな壁に突き当たっている、といえるでしょう。
이는 마찬가지로, 만족할 줄을 잊은 이익추구(利益追求)의 인간(人間)의 본연의 모습(在り方)에 문제(問題)가 있으며, 지금이나 인류(人類)는, 큰 벽(壁)에 부딪치고 있다(크나큰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結果は原因なくしてあり得ないし、現実の現象に対して私たちは、まずその原因を取り除くことからはじめねばなりません。
결과(結果)는 원인(原因)이 없고서는 있을 수가 없고, 현실(現實)의 현상(現象)에 대해서 우리들은, 우선 그 원인(原因)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つまり、行為をつくっている心の在り方を正す必要があるでしょう。
즉, 행위(行爲) 만들고 있는 마음(心)의 본연의 모습(在り方)을 고칠 필요(必要)가 있는 것입니다.
拙著『心の原点』では、諸相の根源はどこにあるか、そして人間の在り方、生きる目的、苦しみの原因などについて、つまびらかにしたつもりです。本書を一読されれば、大自然と人間の関係を、ひと目で見渡すことが可能と思います。
졸저(拙著) 『마음의 원점(心の原点)』에서는, 제상(諸相:제반 양상, 여러가지 모습)의 근원(根源)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인간(人間)의 본연의 모습(在り方), 사는 목적(目的), 괴로움의 원인(原因) 등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힐 작정입니다. 본서(本書)를 한 번 읽으시게 되면, 대자연(大自然)과 인간(人間)의 관계(關係)를, 한눈에 멀리 넓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可能)하다고 생각합니다.
ともかく私たちは、まず、自分にウソのいえぬ己の心に忠実になることを心がけねばなりません。
어쨓든 우리들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心)에 충실(忠實)해 질 것을 명심(유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そうして、自己保存、自我我欲という心の公害を取り除かねばなりません。
또한, 자기보존(自己保存), 자아아욕(自我我欲:다른 사람에 개의치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망)이라고 하는 마음(心)의 공해(公害)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心の公害は、他人は取り除いてくれません。何となれば、自分の肉体舟の支配者は他人でなくて自分だからです。心の王国の支配者は己であるという自覚を持つ必要があるでしょう。
마음(心)의 공해(公害)는, 타인(他人)은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체배(肉體舟)의 지배자(支配者)는 타인(他人)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왕국(王國)의 지배자는 자기 자신(己)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自覺)을 가질 필요(必要)가 있는 것입니다.
自分を含めて、自分の周囲で起こったさまざまな諸現象の原因は、他人ではなくて自分にあることを悟るべきです。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의 주위(周圍)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여러 현상(諸現象)의 원인(原因)은, 타인(他人)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今日の社会の混乱と公害問題に人びとが悩むのも、もとはといえば、個人個人の心の公害から端を発していることを知るべきです。
오늘날의 사회(社會)의 혼란(混亂)은 공해문제(公害問題)에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도(고통을 받는 것도: 悩むのも), 근원을 말하자면, 개인개인의 마음(心)의 공해(公害)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原因と結果の法則は崩すことは出来ません。しかし、この法則を知って調和と明るい世界、環境をつくろうとするなら、この法則の偉大さに気づき、人生の目的は期せずして達成されることでしょう。
원인(原因)과 결과(結果)의 법칙(法則)은 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법칙(法則)을 알고 조화(調和)와 밝은 세계(世界), 환경(環境)을 만들려고 한다면, 이 법칙(法則)의 위대함을 깨닫고(알아차리고), 인생(人生)의 목적(目的)은 예기치 않게 달성(達成)될 것입니다.
1968年7月、心と行いについて、私の心の窓が開かれたとき、私はこうした問題について多くのことを知りました。
1968년 7월, 마음(心)과 행위(行い)에 대해서, 제 마음(心)의 창(窓)이 열리었을 때, 저는 이러한 문제(問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私たちの心の中につくり出されたさまざまな心の曇りを除いてゆき、平和な人生を送ることが出来たならば、人びとは人生の偉大な価値を自ら悟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
우리들의 마음속에 만들어 낸 다양한 마음(心)의 흐림(曇り:구름, 떳떳하지 못함, 우울함, 어두움 뜻이 있음)을 제거해 가며, 평화(平和)로운 인생(人生)을 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인생(人生)의 위대(偉大)한 가치(價値)를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庭石に腰をおろし、人生の不安から解放された自分自身を、フキノトウをながめながら、私はしみじみ思うのでした。
정원석(庭石)에 걸터앉고, 인생(人生)의 불안(不安)으로부터 해방(解放)된 저 자신을, 머위의 어린 꽃대(フキノトウ)를 바라보면서, 저는 절실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지님의 말투와 그분의 수제자이신 히로치가님의 말투가 확연히 다릅니다.
신지님은 전생에 석가모니이며, 아래분은 사리자입니다. 또한 가브리엘천사이기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글을 보시는 분 자유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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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園頭広周 先生 解 説 ]
소노가시라 히로치가 선생님의 해설
21世紀はホンモノの時代になります。ホンモノの時代とは、人間が大自然と調和して生きる時代ということです。
21세기는 가짜가 아닌 진짜의 시대가 됩니다. 진짜의 시대(ホンモノの時代)란, 인간(人間)이 대자연(大自然)을 조화(調和)을 이루며 살아가는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大自然と調和した宗教 대자연과 조화된 종교
大自然と調和した教育 대자연과 조화된 교육
大自然と調和した政治 대자연과 조화된 정치
大自然と調和した科学、等々 대자연과 조화된 과학, 등등
ですから、食べる物も着る物も、住居も、われわれの生きることの一切が大自然とマッチしたというよりは、われわれは大自然をそのまま生きる、そのまま生かすという時代となるということです。
그러므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주거(住居)도, 우리들의 살아가는(生きる) 일체(一切)가 대자연(大自然)과 매치(マッチ: match: 서로 맞음, 어울림, 조화됨)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우리들은 대자연(大自然)을 그대로 생활을 영위한다(生きる), 그대로 활용한다(生かす)고 하는 시대(時代)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20世紀は、人間が自然を征服できるという発想で開かれた世紀でした。それが今、自然破壊といわれている現象です。
21세기는, 인간(人間)이 자연(自然)을 정복(征服)할 수 있다고 화는 발상(發想)에서 시작했던 세기(世紀)였습니다. 그것이 지금, 자연파괴(自然破壞)라고 불리고 있는 현상(現象)입니다.
20世紀は、大自然に反した宗教、教育、政治、科学等の時代でしたから、見た目にはいろいろ進歩しているように見えていても人間の心の中には安らぎがなく虚(むな)しさがあるのです。
20세기는, 대자연(大自然)에 반한 종교(宗教), 교육(敎育), 정치(政治), 과학(科學) 등의 시대였기 때문에, 겉보기로는 여러 가지로 진보(進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어도 인간(人間)의 마음속에는 평온함이 없는 공허(空虛)함이 있는 것입니다.
いくら信仰していても心に安らぎがないのは、それは大自然にそむいた間違った信仰をしているからです。だから本当の信仰をするには、大自然に目を向ける、人体の神秘さに驚くということから始め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ですから高橋信次先生は、
아무리 신앙(信仰)하고 있어도 평온함이 없는 것은, 그것은 대자연(大自然)에 거스른 잘못된 신앙(信仰)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信仰)을 하기 위해서는, 대자연(大自然)으로 눈을 돌리고, 인체(人體)의 신비함(神秘さ)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은(先生は),
「神を知りたかったら大自然を見なさい。自分の身体を見なさい」
「신(神)을 알고 싶다면 대자연(大自然)을 보십시오. 자신의 신체(身體)을 보십시오」
といっていられました。ですからこの号には皆さんの心を大自然に向けることについて書いていられることを紹介しました。
라고 말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號)에서는 여러분의 마음(心)을 대자연(大自然)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 쓰고 계신 것을 소개했습니다.
幸福になるには、いま与えられている神、大自然の恵みに、先祖、父母、周囲の人々の恩恵に、そうして、いま生きている肉体に感謝することから始め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最近の宗教はそういうことを教えていませんし、特に霊能力を煽り立てる宗教は絶対にそういうことをやってはいません。
행복(幸福)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주어져 있는 신(神), 대자연(大自然)의 은혜(恵み)에, 선조(先祖:조상), 부모(父母), 주위(周圍)의 사람들의 은혜(恩惠)에,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육체(肉體)에 감사(感謝)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종교(宗敎) 그러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영능력(靈能力)을 부추기는 종교(宗教)는 절대(絶對)로 그러한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不幸だと思っている人達は、自分が不幸の原因を持っているとは気づかずに、他の人が自分を不幸にしていると考えますから、他の人に対して攻撃的になります。
불행(不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을 가지고 있다고는 깨닫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불행(不幸)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공격적(攻擊的)으로 됩니다.
不幸な人を幸福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幸福感を持ってする信仰が正しい信仰であり、正法会は、常に何らかの点において幸福感を持っている人達の集まりにし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す。
불행(不幸)한 사람을 행복(幸福)하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되지만, 행복감(幸福感)을 가지는 신앙(信仰)이 올바른 신앙이며, 정법회(正法會)는, 항상 어떠한 점에 있어서 행복감(幸福感)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うわさや中傷を流して会を混乱させている人達があるのは、そういう人達は皆自分の心の中に不幸だという意識を強く持っている人達です。自分の心の中が空虚であるから、いくら正法の話を聞いても自分の心の中の空虚さを満たすことができないと、少し変わったことをいう人があると、そっちの方へ移ってゆくのです。
소문(うわさ)이나 중상(中傷)을 흘리며 모임(会)을 혼란(混亂)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은 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불행(不幸)하다고 하는 의식(意識)을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마음속이 공허(空虛)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법(正法)의 말(話)을 들어도 자신의 마음속의 공허함(空虚さ)을 채울 수 없다며, 좀 특이한 것(유별난 것(少し変わったこと)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으로 마음이나 관심이 대상이 바뀌어 가는 것(移ってゆく)입니다.
今まで「自分は不幸だ」と思いつづけてきた人が運命を転換しようと思う時、まず一番最初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今ある幸せに気付いて感謝する」ということからです。
지금까지 「나는 불행하다(自分は不幸だ)」라고 계속 생각해 왔던 사람이 운명(運命)을 전환(轉換)하려고 생각할 때, 우선 가장 맨처음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지금 있는 행복(幸せ)을 깨닫고(気付いて) 감사(感謝)한다」고 하는 것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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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맺음말, 얼마 안 되는 글인듯 하지만, 저는 한 자리에 앉아서 6시간 걸려서,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읽고 잘 소화를 시키시고, 움직이시면 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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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UP
4.19 nagasakioosakisantakuhehoumon
이 칸의 내용은, 일본에서, 글을 올려 주신 분이,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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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출처 : http://www.shoho2.com/s2-14imanazesyohoka.html
※일본의 원본의 홈페이지 : http://www.shoho2.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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