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2장 위대한 깨달음 『인간 석가』(다카하시 신지 저서)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2장 위대한 깨달음 『인간 석가』(다카하시 신지 저서)

어둠의골짜기 2010. 3. 14. 20:04

『인간석가』

「2장 위대한 깨달음」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자
36년 동안 고타마이 마음 속에 있던
고뇌와 상념이 사라졌다.
고타마는 기쁨과 감동에 사무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황금빛의 고운 입자가
고타마의 주위에 무수히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저자: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깨달음>

 

  이레째 밤을 맞이했다. 고타마는 무위의 경지에 들려고 누웠다. 지난 밤의 감격이 밀려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흘렀다.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출가 6년 동안의 시간을 되돌아보기로 하고 명상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명상에 잠기면 고타마의 마음은 우루벨라의 숲처럼 조용하고 편안해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명상을 풀고 눈을 뜨니 동쪽 하는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룻밤이 눈 깜박할 사이에 흘러간 것이다. 고타마가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려는데 앉아 있는 자신의 몸이 점점 커져갔다. 비와 이슬을 막아주던 보리수를 벗어나 가야 다나의 땅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고타마의 의식이 점점 넓어지면서 대지가 멀어져 갔다. 그러나 대지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타마의 의식은 땅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보리수나무와 우루벨라의 숲,가야 다나의 땅이 한눈에 생생하게 보였다.
  고타마의 의식 확대는 그 속도를 더해 갔다. 샛별이 그의 발 밑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편 고타마의 육체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잠기지 전의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의식은 우주가 한눔에 보일 정도로 확대되었다. 온 세계가 아름다운 별과 함께 고타마 앞에서 숨쉬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생명의 움직임이 손바닥에 잡힐 듯 느껴졌다. 숲이나 강, 도시, 지구와 별, 모든 천체들이 신의 의사에 따라 호흡하고 있었다. 밝은 빛으로 가득 찬 하나의 영상을 보는 듯했다. 멀리서 보기만 하는데도 살아 있는 생명체의 입김이 고타마의 귓가에 느껴졌다. 영상은 그의 의식 속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었구나!"
  고타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36년 동안 쌓였던 어두운 상념의 구름과 조화롭지 못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광명으로 바뀌었다. 고타마는 대우주의 의식과 마침내 한 몸이 도었다. 삼라만상의 탄생, 우주와 인간, 신의 존재, 인간의 자세, 영혼의 전생윤회 등이 분명해졌다.

 

  고타마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주가 있기 전에는 광명이라는 신의 의식만이 존재했다. 신은 뜻을 품어 의식계의 우주와 물질계의 우주를 창조했다. 의식계의 우주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생각이나 신념, 감정을 포함한 마음의 세계를 말한다.
  의식 세계는 하늘이나 바다, 나무, 대지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 세계를 움직인다. 이것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 이 두 세계는 빛과 그늘처럼 필연적인 관계로 영원히 조호라움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신의 의식은 두 세계의 사이에 중도(中道)의 법(法) 질서 속ㄷ에서 떨어져 나온 분신으로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태어났다.
  인간은 육체를 취하지 않은 상태로 의식계라는 실재(實在)의 우주에서 태어났다. 그후 신의 뜻인,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어 물질계로 내려왔다. 인간 이외의 동물, 식물, 광물도 인간과 같은 과정을 거쳐 대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생명을 가진 물체는 실재계(實在界=意識界)와 현상계(現象界=地上界)사이를 윤회한다.
  지구에 생물이 살게 된 지도 수억 년이 지났다. 지구상의 최초의 생물은 미생물이었다. 그것들은 태양의 열, 대지, 해수(海水),공기, 우주 공간 등의 상호 작용에 의해 탄생하였다. 미생물에 이어 식물이 발생했고, 동물이 대지를 어슬렁거렸다. 파충류 시대를 맞이하면서 한동안 지구는 황량한 모습으로 변했고, 공룡의 시대가 끝나자 인간은 번성하게 되었다. 인간은 황량한 대지를 개간하여 동물과 식물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했다.
  인류는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자연도 그러했다. 당시의 인간 중에는 500세를 넘어 1,000세를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인류의 수는 먼지처럼 늘어났다. 자손이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자손을 낳았다. 그것은 인간의 전생 윤회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간은 차원이 다른 세계와 의식을 자유로이 교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고도로 발달하여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으며 지하에도 대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문명은 계속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사이에 자아가 생겨나고 국경이 생기면서 전쟁이 벌어졌다. 욕심, 시기, 경계는 인간의 부조화를 만들었고 신의 빛을 차단했다.
  대지는 분노하여 넘실댔고 검은 구름은 세상을 뒤덮었다. 화산이 폭발하고, 바다와 육지는 서로 바뀌었다. 불과 몇 명에 이르는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땅이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인류는 번영과 멸망을 되풀이했다. 인류가 있은 후로 여러 번 반복된 천재지변(천재지변)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이 나누어준 창조의 능력을 행사하게 된 인류가 욕심과 그릇된 마음으로 조화를 무너드리고 악업을 쌓음으로써 불러일으킨 업보이다.
  인류가 지상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과 사명은 2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인류는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영혼은 그로 인해 영원한 진화를 도모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소우주(小宇宙)를 형성하고 있다. 소우주란 대우주의 축소를 말한다. 대우주에 전개된 무수한 별들은 인간의 육체를 형성하고 있는 빛의 수(세포 수)와 비슷하다. 태양계는 태양의 중심으로 아홉 개의 혹성(或星)과 3만 수천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고 태양의 둘레를 순환한다. 작은 물질의 세계에도 핵을 중심으로 음외전자(陰外電子)가 그 둘레를 돌고 있다. 작은 세계와 대우주는 같은 법칙 안에서 순환하고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작은 세포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이 몸을 구성한다.뇌,심장,간장,췌장,위장 등의 집단은 태양과 아홉 개의 혹성[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해왕성,명왕성,천왕성]을 의미하며, 나아가 대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무수한 성운군(星雲群)과 같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육체는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영혼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영혼은 신의 의식에 따라 물질 세계와 의식 세계를 순환하면서 영원히 살아간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악을 행한다. 신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를 자신인 양 착각하여 육체에 사로잡힌 표면 의식이 평화로운 본심을 잠재 의식 속에 가두어버리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행동만 할 수 있게 만들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이 인간의 악과 불행을 예측 못 했을 리 없다. 신은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준 것이다. 행복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성장하면 자신의 인격과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다 부모와 자식은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고 서로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신도 주체성을 가진 인간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조화라는 중도(中道)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간이 자유 의지를 함부로 행사하고 중도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면 신은 인간에게 그만큼의 불행을 안겨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과 안간의 관계가 유지되고 조화로움을 위해 전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깃들면 오관(五官)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오관이란 시각[眼], 청각[耳], 후각[鼻], 미각[舌], 촉각[身]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 오관에 마음이 이끌려 아름다운 것을 보면 탐이 나고 좋은 향기에 마음이 끌린다. 달콤한 말에는 귀가 솔깃해지고 맛있는 음식에 혀는 즐거워한다.
  인간이라면 괴로운 쪽보다는 안락한 쪽을 택한다. 육체의 오관은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없으면 인간의 육체는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렇다고 오관에 마음을 빼앗기면 욕망이 쌓이기 마련이다. 욕망의 뿌리는 오관에 사로잡히는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모든 욕망, 싸움, 부조화, 악의 근원은 오관에 마음이 빼앗긴 육근(六根)이란 번뇌에 있다.
  모든 불행은 육체에 사로잡힌 마음의 움직임, 즉 가르마[業=원죄 의식]의 상념 행위에 의해서 그 가지가 뻗어나간다. 업은 집착이다. 집착은 오관에서 비롯한 육체을 위한 생각이 점점 커지면서 자라게 된다. 지위, 명예, 돈, 정욕 그 밖의 여러가지 욕망이 인간의 신성과 불성을 변질시킨다.
  인간은 그의 업의식(業意識)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순환하는 동안에 수정하는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영혼은 새로운 업을 덧붙이면서 윤회한다. 때문에 인류는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자신의 업부터 맑고 깨끗하게 수정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면서 신성한 마음에서 차츰 멀어져갔다.
  인간의 영혼에서 신성과 불성을 떼어낼 수 없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지상의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매체물이며 인간은 이 매체물을 조화시켜 나갈 임무를 신으로부터 이미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남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스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과 문화는 인간 사회에만 있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의 세계에는 없다.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만들고 사용하는 일이 지극히 적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다. 동물이나 식물도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전생윤회를 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동물이나 식물이 될 수 업고 물과 흙이 될 수 없다.
  인간이 신의 자식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업을 수정하며 본래의 신성을 되착지 위해서는 신의 마음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세계에 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생로병사의 집착에서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마음은 중도라는 조화의 대우주 속에 흐르고 있으며 그 흐름에 자신의 영혼을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다. 결코 한쪽으로 기우는 법이 없다. 인류가 불어나도 공기나 물의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태양의 광열도 그 방사하는 질량을 바꾸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도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남녀의 비율은 거의 일정하다. 전쟁이나 재해 등으로 생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남녀의 비율은 균등을 유지한다. 인간의 육체도 휴식과 운동이라는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밤에 잠을 이루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면 몸이 쉬 피로해져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들은 나름대로의 중도가 있다. 그 중도를 벗어나면 생활을 할 수 없게 형성되어 있다. 슬픔이나 괴로움과 같은 우울한 감정들은 모두 중도에서 벗어난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중도의 마음은 일상 생활에서 겪었던 생각이나 행동을 반성하고 그 반성을 실천함으써 얻어진다. 실천에는 많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지혜를 쌓아 실천하면 업의 수정을 빨리 이룰 수 있다. 반성의 척도에는 여덟 가지의 규범이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政) 등의 '팔정도'가 그것이다. 이 규범을 척도로 삼아 잘못된 마음을 들여다보고 수정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승화되어 간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의식이다. 중도의 마음에 접하면 이러한 섭리가 분명해지고 신의 의식 안에서 영원히 평안을 느낄 수 있다. 의식이 우주만큼 확대하면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태양을 비옷한 모든 별들이 자신의 의식 속에서 회전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중심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본디 우주만한 의식을 지닌 채 생활하고 있다. 육체를 취함으로써 그 의식이 조그맣게 굳처져 버렸기 때문에 우주대의 의식을 상실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그맣게 굳어버린 인간이라도 신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환경을 아낌없디 제공해 준다. 인간이 괴로운하고, 길 위에서 방황하고, 악의 유혹에 빠져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도 신은 멀리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신다. 시간이 되면 구원의 손을 내밀어 인간을 구해 준다. 태양과 물, 공기, 대지, 식물 모든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처럼 신은 인간을 위해 걱정하고 무한의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
  인간은 그 자비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은함으로써 인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 숨쉬는 신성을 자각하게 된다. 신은 평등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신의 마음과 같은 태양은 모든 만물을 차별하지 않고 빛을 뿌린다.
  모든 생명체에게 있는 능력의 차이. 힘의 차이는 모두 과거의 세계와 현 세계에서의 경험과 노력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신이 인간을 차별 대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계급이 있고 빈부의 차가 있는 것도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불러오고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만든다.
  태양계 천체의 모습처럼 인간에게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태양계가 유지되고 사회가 안정된다. 중도(中道)에 접한다는 것은 자신을 아는 가장 빠른 지름길에 들어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자신을 알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파괴는 끊임없이 커져만 가는 욕망 때문에 되풀이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욕망과 시기에 휩싸이는 일은 없어진다.
  인간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신앙을 찾는다. 육체를 괴롭혀서 고행을 쌓으면 구원을 방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를 하면 구원을 받고 평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는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고행은 육체에 마음이 붙들리게 하고, 기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력 신앙은 인간의 신성(神性)을 상실케 한다.
  중도 신리는 자신을 믿고 팔정도라는 규범을 생활 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살아난다. 인간의 진정한 안심은 자기 만족이나 도피가 아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보고 올바른 자이가 확립된 후에야 마음이 평안해진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다. 신은 천지를 창조했다. 인간 또한 자신의 천지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육체를 함부로 괴롭히거나 맹목적인 신앙에 몸과 마음을 맡겨 자기 만족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세상은 바야흐로 암흑의 시대댜. 인류는 중도의 신리를 상실하고 미로의 숲 속을 헤매고 있다. 미로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정법이란 법등을 밝히고 대자연의 중도에 눈을 떠야 한다. 정법은 자비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그 힘을 믿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의 무한한 광명이 찾아올 것이다.
  고타마는 비로소 인간의 가치를 깨달았다. 인간과 자연은 본디 한 몸으로 같이 호흡하고 신의 뜻과 함께 각자 주어진 시간을 영유해 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그 자연과 모든 생명체는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질을 물질로 보고 있는 한, 마음의 세계를 느낄 수 없고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없다. 먼저 물질에서 벗어나 물질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실재(實在)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물질의 참다운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물질과 의식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은 인간의 마음이 물질에서 떠나 객관적으로 물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얻어지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이다.
  고타마는 여러 천사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고 행복했다. 갑자기 깨닫게 된 진리에 사무쳐 뜨거운 눈물이 흘렸다. 황금빛의 고운 입자가 고타마 주위에 무수히 쏟아졌다. 그가 앉은 자리는 빛으로 눈부셨다. 하늘 저편에서는 천녀(天女)들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고타마의 깨달음을 축하하는 웅장한 노래 소리였다. 고타마는 그 노래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면서 법열에 정었다.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악마의 검은 그림자마저 빛의 에너지로 바뀌자 고타마는 우주가 자신의 몸처러 느껴졌다.
  명상의 극에 도달하면 시간이 경과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시간은 우박처럼 삽시간에 떨어진다. 시간이란, 지금이라는 순간을 의미할 뿐이며 대자연의 윤회는 원형과 같이 시작과 끝이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고타마의 마음은 터질 것 같은 감동으로 가득 찼다. 몸은 흠칫 떨며 명상을 풀었다. 우주만한 깨달음에서 작은 현실의 육신으로 돌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텅 빈 공허함처럼 느껴졌다. 투명하고 푸른 하늘은 우루벨라의 숲을 부드럽게 포옹하듯 원을 그리면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햇빙ㅊ이 보리수의 작은 잎새를 뚫고 고타마에게까지 내려앉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싱싱하게 약동하고 있었다. 대지, 나무, 잡초, 보리수나무 가지에 터를 잡은 새들도 모두가 자신의 생명을 즐기면서 고타마를 바라보는 듯했다. 고타마는 그들에게 답례하듯 자비의 에너지를 보냈다.
  '지금의 내 심경을 알아줄까? 인간이란 이런 것이라고 그 실상을 설명한들 누가 과연 나의 심정을 알아줄까? 대체 지금의 내 심경을 누구에게 말해야 알아줄까? 인간이란 이런 것이라고 그 실상을 설명한들 누가 과연 믿어줄까~~~~"
  고타마는 문득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만두었다.
  고타마는 마침내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했다. 전생 윤회의 업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깨달았다. ★영원한 생명이란 생로병사가 없는 세계와 다름없는 것이다.  ★육신 안에 살아 숨쉬는 다른 한 사람의 자신이 있으며, 그 생명은 윤회에서 해탈한 영원한 생명이었다. 또 대우주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의 실상이었다.
  태어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자신을 똑똑하게 인식했다. 둘로 나누어진 자아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서로에게 다닐 수 있었다. 고마타믄 모든 생명체가 취해야 하는 과거, 현재, 미래 사이를 윤회하는 업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육체는 부모와의 인연에 의해서 얻어진, 삶이라는 강을 거넌기 위한 단순한 나룻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과거에도 자신이었고 현재에도 자신인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의 영혼의 불변성을 영원히 바꿀 수도, 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경우에도 같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동물은 어디까지나 동물로서 영생한다. 원숭이가 인간이되고 인간이 개다 되는 경우는 없다. 원숭이는 원숭이일 따름이고 개는 개로서의 진화 과정에 놓여 있다. 따라서 만생 만물은 신의 의사에 따라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스스로 생각하는 마음과 행동이 지어낸 것이다. 자연의 법칙인 중도라는 궤도를 이탈했디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는 팔정도의 상념 행위를 스스로 포기하면서부터 괴로움은 시작된다. 중도의 마음은 가장 인간답고,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 태도이다. 고타마는 자신이 깨달은 우주의 섭리를 누구에게 설법해야 할지, 설령 한다 할지라도 이해를 해줄 것인지 걱정이 앞섶다.
  고타마는 넓고 맨질맨질한 보리수의 밑동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고요한 숲 속을 거닐자 새들이 종종걸음으로 허공과 땅을 날래로 걸으며 따랐다. 고타마가 멈추어 뒤를 도랑보면 새들도 멈췄다. 고타마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작은 새들이 날개를 접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온한 모습으로 고타마 옆에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고타마와 함께 기거한 보리수의 식구들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즐겁게 해준 친구들이었다. 어깨와 머리 위에 앉아 말을 건네왔다.  고타마도 흥에 겨워 무슨 말이든 했다. 작은 새들에게도 감정이 있어서 어느 한 놈을 특별 대우하면 다른 새들의 목소리나 태도가 달라지곤 했다. 다시 평등하게 대하면 그들의 태도도 금방 바뀌어 평온해진다.
  고타마는 보리수 옆에서 생활하는 동안 새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를 침범하지도 침범당하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밝은 모습이었고 기운에 찬 모습이었다. 고타마는 작은 새들을 바라보다가 인간 사회를 생각했다.
  서로 잔인하게 헐뜯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비열한 인간들을 생각했다. 전쟁에서의 살인은 정의로운 것이며 많은 죽음이 승리를 불러왔다면 국민들에겍 희열을 안져준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인간이 새들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타마는 네란자라 강가로 내려갔다. 천천히 흐르는 강이 물줄기는 어제도 그제도 변함이 없다. 허리까지 담그니 물의 찬 기운이 핏줄에까지 느껴졌다.고타마는 한잠도 이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로하지 않았다. 두 손에 물을 담아 머리며 얼굴을 훔쳤다. 물은 고타마의 마음을 상쾌하게 적셔주었다.
  이 강물은 인도양에 흘러들어 큰 바다가 괸다. 바닷물은 다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와 네란자라 강물이 된다. 물은 이런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본질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고타마는 강물 속에 몸을 담근 채 대자연의 큰 계획 속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고타마는 강물의 '시간'을 잡고 있다.
  말하자는 고타마는 시간을 붙잡고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은 그 속에 있으면 느낄 수 없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반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고타마에게 위대한 깨달음이 있었던 지난 밤의 감격이 밀려왔던 것이다. 해가 지자 고타마는 마른 풀잎과 섶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연기가 느릿느릿 석양빛을 좇아 하늘로 올라갔다. 바람이 잠잠한 조용한 밤이었다.
  고타마는 망고 껍질을 벗기면서 수자타(추다다)가 불렸던 '가야금 줄은 알맞게 조여야 소리가 좋아~~'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고타마는 마음의 조화에 대한 한 가닥의 걱정이 있었지만 마음을 가라앉이니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같은 심경이 들 수 있었다. 깨달음이 있은 후로 고타마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의 조화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고정된 모습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만남>


  고타마가 깨달음을 얻은 지 벌써 열사흘이 지났다. 반성의 지관(止觀)을 시작한 지는 스무하루째가 되는 셈이다. 그는 마음의 조화를 이르는 데 언제나 자신이 있었지만, 그 조화를 풀고 싶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고타마는 마음의 조화를 이룬 지금의 상태에서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면 더한 행복은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스무하루째 밤을 맞이한 고타마는 마음의조화를 풀지 않기위해 식사와 수면을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명상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고타마의 눈앞에 갑자기 환해졌다. 황금빛 광명 속에 브라흐만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여윈 그가 하얀 비단옷을 입고 서 있었다. 아몬이라는 브라흐만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깊어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마흔두셋 정도로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고타마는 그의 정체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금빛 속에 장엄하게 서 있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몬의 양쪽 옆에는 두 분의 브라흐만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타마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인자를 웃음을 지었다. 그 눈빛은 고타마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고타마는 눈부신 세 브라흐만을 바라보았다. 바라볼 수록 아름다웠다. 고타마는 자신이 범천계(梵天界)로 올라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몸이라는 브라흐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타마야, 왜 죽음을 생각하느냐? 그런 생각은 하지 말거라. 만일 지금 죽는다 해도 너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우주 밖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낮았지만 위엄과 자비로 가득 차 있었다. 고타마는 조금 전까지 품었던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 목소리의 파장에 밀려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너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깨달음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그걸 네가 모를 리 없다."
  아몬의 목소리는 고타마의 귓바튀에서 맴돌았다. 고타마는 고개를 떨구었다. 정좌를 한 채 두 손을 땅에 붙이고 상체를 엎드려 브라흐만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 알았는가?"
  "브라흐만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지만, 저의 깨달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위대한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설법한대도 그들이 이해할 리 만무합니다. 그냥 이대로 죽게 해주십시오."
  "바보같으니라구~~"
  아몬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티끌만한 타협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긁은 목소리였다.
  "네가 중생을 일깨우지 않고 누가 한단 말인가. 잘 생각해 보아라. 자비심은 반드시 중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불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법은 마음의 태양이다. 마음의 태양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신리의 등불을 다시 한 번 밝혀야 한다. 신리의 등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너는 실재계(의식 세계)에서우리와 함께 지냈을 때 그것을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돌아온다 해도 네가 살 집은 없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네가 모를 리 없다."
  고타마는 고개를 숙인 채 브라흐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죽에 닿기만 해도 찢어질 듯 날카로운 말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에는 자애가 넘쳤다. 고타마는 그의 말에 아찔해졌다. 후퇴할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중생 제도를 약속하고 나왔으면 그 역할을 다하지 않고서 생명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타마는 이 지상에 태어나기 전 그들과 했던 결심이 마음 한 구석에서 꿈틀거림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브라흐만님. 부족하지만 해보겠습니다."
  "이제야 이해했구나. 이제 그대는 위대한 대지도령(大指導靈)이오."
  아몬이 고타마를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정중하게 바뀌었다.
  "나는 당신의 친구 아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도왔습니다. 내가 지상에 태어날 때에는 당신이 내 영혼을 도왔고, 당신이 지상에 태어날 때에는 내가 당신이 곁에서 돕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런 사실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남은 생애의 사명을 무사히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어떠한 협력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아몬은 말을 끝내자마자 광명 속에서 환하게 웃음지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지니게 되면 좀처럼 자신의 본성을 개닫기 힘든 법이다. 마음이 오관에 흔들이기 때문이다. 팔을 꼬집으면 아프고, 소음을 들으면 얼굴을 찡그리게 마련이다. 인간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실재계(實在界)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 현혹되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돌아가기 쉽다. 저승에 돌아가서는 후회를 하게 된다.
  여래(如來)라고 일컫는 사람 가운데에도 이런 실패를 저지른 경우가 있었다. 그만큼 이 세상(色界:物質界)은 쉽고도 어려운 곳이다. 중생 제도의 일념에 몰두하는 경우에도 중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보면 니치렌[日蓮]이 그랬다. 본래 니치렌은 보살이었다. 보살의 마음은 본디 광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살의 세계에서 살 수 없다. 니치렌은 <법화경(法華經)>을 알리고 가르치기에 급급한 나머지 다른 종파를 배격했다. 염불무간지옥(念佛無間地獄), 선천마(禪天魔)라고 몰아세우며 남의 종단을 맹렬히 비난했다.
  한 번은 사도[佐渡]섬으로 유배될 때, 폭풍우를 가라앉혀 준 용을 숭상하기도 했다. 용은 정법을 지키는 하늘에 있는 착한 신들 중의 하나이다. 용은 팔대용신(八代龍神)이 산하에 속해 있으며 팔대용왕(八代龍王)의 수족이 되어 정법 수호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팔대용왕은 보살이 되기 위한 수행 과정에 있는 제천선신이다. 조난을 막아준 것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부처님척럼 숭배해서는 안 된다.
  니치렌은 이와 같은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니치렌은 지옥에서 약 600여 년 동안 이승에서 지은 악업의 때를 벗기는 고행을 치러야 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인간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못을 저질러 버린다.
  아몬의 날카로운 말씨가 정중한 사랑의 어조로 바뀐 것은 고타마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을을 뿐만 아니라 꺼져가는 법에 등불을 밝히겠다고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몬은 후에 이스리엘에서 태어나 사랑을 베푼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세의 이름을 아몬이라고 했다. 이승(현실 세계)의 이름이 그대로 저승(실재계)에서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고타마는 고개를 숙인 채, 비록 짦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가슴에 품었던 좁은 생각을 뉘우쳤다.
  그라이오라는 브라흐만이 정중하게 말했다.
  "고마타님, 이제 고개륻 드세요. 36년 동안 당신을 지켜왔지만 한 번도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당신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지금 고타마님은 광명에 싸여 눈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잘 정진해 주셨습니다. 여러 고통을 이기고 해탈해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로 기쁩니다. 지금의 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귀여운 아들을 찾아헤매다가 지구 끝에서 만난 기분입니다."
  그라이오는 울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그는 울음을 쏟아냈다. 고타마는 고개를 들었다. 그라이오와 아몬의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브라흐만은 자신을 모세라고 소개했다. 짙은 눈썹과 벌어진 어깨가 그의 성격을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모세도 그라이오와 아몬의 말에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타마의 마음은 겨우 진정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미묘한 것이어서 진정되었다 싶으면 어느새 또 일렁거리게 마련이다. 고타마의 마음에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일렁였다.
  바로 그순간이었다.
  "죽음은 현실 도피이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서 도망칠 수 없다. 마음은 자신의 우주이기 때문이다. 도망쳐 봐야 그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시 만나게 마련이다. 육체가 있든 없든 마음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너희 지혜와 용기로 중생들의 고통을 해방시켜 주고 삶의 보람을 주어야 한다. 다시는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
  아몬이 고타마를 다시 꾸짖었다.
  고타마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지금부터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반드시 헤쳐나가리라. 그는 아몬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서만 열반에 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당신의 체험은 모두가 신리(神理)입니다. 많은 중생은 당신을 거울삼아 인생의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것입니다. 정도에서 벗어난 생활은 비록 즐거울지라도 이내 괴로움으로 통하게 마련입니다.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이요, 즐거움은 괴로움을 지어내는 씨앗인데 중생은 이 이치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는 자는 필사적으로 이치를 탐구하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현실과 적당히 타협을 하게 됩니다. 생명을 쉽게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살하는 행위 이상으로 인간에게 독이 되는 없은 없습니다.
  당신의 체험은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중생의 눈과 마음을 뜨게 한고 내재된 지혜를 끌어낼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어지럽고 더러운 함흑의 시대입니다. 당신이 깨달은 신리는 지금이 아니면 펼 수 없습니다. 지금을 놓치면 중생의 마음은 악마의 손아귀에 넘어가 인류는 곧 멸망할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가는 길에 산이 생기면 그 산을 없애고 계곡이 생기면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고 중생들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몬은 간절한 마음을 고타마에게 옮기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빛을 쏟아 보냈다.
 "잘 알겠습니다. 이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쳐서 신리의 법들을 밝려 중생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겠습니다."
  고타마가 간절하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자 브라흐만은 실재계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 우루벨아의 숲은 다시 암흑으로 가득 찼다. 마치 아무 일도 업었다는 듯이 고요했다.

 

 


  <범천계로 올라가다>

 

  숲은 너무 고요했다. 힘없이 타고 있는 모닥불도 아무런 소리를 만들지 않았다. 정좌하고 있던 고타마는 모닥불에 섶을 집어넣었다. 불길은 다시 힘차게 타올라 암흑을 밝혔다. 우루벨라의 숲에는 고타마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긾은 잠에 빠져 있는 거 같았다. 어둠이 진해질수록 숲은 고요했다. 밤이 깊었으므로 고타마는 포교의 계획은 아침부터 새우기로 하고 몸을 눕혔다.
  눕자마다 고타마의 몸이 이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그의 몸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잠시후에 다른 한 사람이 육체에서 빠져 나왔다. 의식이 고타마는 광명의 둠 속에서 굉장한 속도로 상승하여 돔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의식의 고타마는 시야가 열러 눈부신 초록의 잔디가 펼쳐진 언덕 위에 섰다. 육체의 고타마는 보리수 아래에서 여전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초록이 꿈틀거리는 언덕은 지상계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언덕은 구릉처럼 몇 겹의 경사를 지으면서 펼쳐져 있었다. 언덕의 가장자리엔 숲이 놓여져 있었다. 그 숲은 언덕과 마찬가지로 활기찬 생명력이 한눈에도 느껴졌다.
잔디의 색은 진초록빛 물감을 부은 결과 한가지였다.
  한 발자국을 내밀기가 망성여질 정도로 잔디는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하늘의 중앙에는 황금빛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현실의 태양은 작열하는 붉은 화염 정도로 보이지만 실재계의 태양은 평화와 부드러운 빛을 쏘아대고 있는 존재로 보였다.
  고타마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한참 동안 황금빛 태양에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고타마는 태양 아래서 태양 아래서 보냈던 자신의 오랜 세월이 화면처럼 순식간에 지나가자 그립고 반가운 감회가 그의 온몸을 따뜻하게 사로잡았다. 그런 고타마의 둘레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고타마는 그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들 중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들의 피부는 하나같이 유리처럼 곱고 밝았다. 고타마는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걸었다. 걸음을 멈췄던 곳에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 시대의 의상을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대 중국의 화려한 의복들 입은 사람도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세계 각국의 인종이 한 자리에 모여 고타마을 환영하고 있었다.
  청중 가운데서 아몬, 그라이오, 모세 세 분이 모습을 나타내며 고타마를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앞서 범천계(梵天界)에 돌아온 세 분과 범천계의 사람들이 고타마을 초청해 준 것이었다. 아몬은 고타마를, 청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으로 안내했다. 신록의 잔디가 깔린 집회장이었다. 그곳을 에워싼 몇천명의 보사타(빛의 천사)들이 각기 다른 복장과 표정으로 고타마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바라보니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반가움의 탄성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고타마는 36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감회가 들었다. 반가운 나머지 사람들의 눈망울이 젖어 있었다.
  고타마는 높은 언덕 위에 서서 그들을 한번 바라본 후 36년만에 범천계에서 설법을 시작했다.
  "모든 만물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나고 인연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인간의 영혼은 신리에서 비롯되며 신리에 따라 영원한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진화 과정 동안 인간은 신리에서 벗어난 생활을 합니다. 어긋난 행위의 원인은 마음의 그늘에 있습니다.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은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육체의 오관에 의해 느겨지는 감정에 기울다 보면 마음이 그늘이 생깁니다. 인간이 모든 고뇌와 슬픔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팔정도라는 중도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생활하고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육체의 오관은 집착을 만들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의 평안을 구하려면 먼저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생활, 집착에서 벗어난 생활, 인간으로서의 신리에 따른 생활을 해야겠다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인류는 모두 한 형제라는 사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지상계의 인간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명은 참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고타마의 말은 고요한 대기 속에서 거대한 파동이 되어 퍼졌다. 고타마의 목소리는 지상계의 목소리와는 다는 장엄한 종소리 같았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빛의 입자가 되어 모든 청중들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약 한 시간에 걸친 설법은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났다. 청중들은 설법이 끝났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침묵이 흐른 뒤에 천지가 깨질 듯한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청중들은 감동에 젖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타마는 아몬과 보사타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보리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자신의 육체로 돌아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유체 이탈 현산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현상 세계나 다름없는 감각으로 한동안을 지낸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꿈 속에서 현실과 같은 경험을 하곤 한다. 또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유체 이탈을 한다. 영혼의 이탈에도 여러 단계의 차원이 있어서 사람마다 그 영혼의 급수에 따라 영시(靈視)의 범위, 체험의 범위가 달라진다.
  실재계의 태양은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해서 수백, 수천 가지의 빛을 비춘다. 그 황홀한 태양을 보았다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 사람이 보았다는 태양의 빛깔이나 마음의 상태를 보면 어느 계층이 태양인지 판단할 수 있다.
  고타마는 영혼의 이탈을 한 시간 동안이나 체험했다. 예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필라성에서 명상에 잠겼을 때 가끔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의 영혼 이탈은 있었다. 꿈에서 그는 많은 중생들 앞에서 법륜을 설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카필라에서의 경험은 그저 꿈과 같은 것이었으며 지금의 것은 낮에도 당당하게 빛나는 광자체(영혼의 몸)의 자신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설법을 한 것이다.
  반성의 명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믿을 수 없는 여러 현상에 대해 고타마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천계(梵天界)의 아름다움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천녀들의 우아한 기품과 발걸음은 지상 여인으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피부는 벚꽃처럼 희고 눈동자는 햇살을 가득 안고 있는 강물처럼 빛났다. 사람들의 복장은 저마다 달랐으나 이질감은 전혀 없었으면 자유로웠다.
  동물들고 고타마의 설법을 들었다. 현실 세계와는 다르게 인간과 동물의 벽이 없고 차별 없이 생활하여 서로의 마음이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자신으로 돌아온 고타마는 자신이 죽은 후에 돌아갈 곳이 범천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다. 동시에 육체를 이탈한 영혼이 자신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육체는 어디까지나 삶의 강을 건너가는 배에 지나지 않으며, 영혼의 자신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겼다.
  위대한 영혼을 가졌다 할지라도 육체의 옷을 입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님이 되어 잘못된 인생을 걷는다.

 

 

  <정법(正法) 유포(流布)의 길>
 

  육체는 부모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 인연은 본능의 힘이며 지상계에 적합한 육체를 계속 보존해 갈 수 있도록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다. 육체는 영혼이 지상에서 살기 위해 입는 일시적인 옷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지상계에서의 탈의를 의미하며 탄생은 영혼과 육체가 합일을 의미한다. 영혼의 조상과 육체의 조상과의 인연에 의해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영혼의 조상을 알게 되면 전생의 세계를 기억해 낼 수 있다.
  전생의 세게에서는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인생을 보냈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말하하면 그것은 전생의 모습이 잠재 의식 속에 고스란히 녹화되었다가 다시 재생되어 보이는 것이다.
  고타마는 자신의 전생을 더듬어 갔다. 고타마가 출가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어미니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마야를 찾아보았다.  마야은 보살계(菩薩界)에 살고 있었다. 훌륭한 성도의 모습이 된 고타마를 마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워했다. 그의 전도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도 했다.
  육체에 사로잡혀 지위나 명예, 욕망에 눈이 멂년 지옥에 떨어져 힘든 영혼의 수행을 겪어야 한다. 많은 중생은 집착과 육체에 사로잡힌 생활로 말미암아 소중한 인생을 실패로 마감한다. 그러므로 전생윤회의 과정은 전진과 후퇴의 반복이며 마음의 진화는 도무지 달성되지 않는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약하고 슬픈 것이 인간이다.
  다행히도 고타마는 영혼과 육체, 생명과 전생(轉生), 영원한 윤회(輪廻), 그리고 인생의 목적과 사명이라는 것을 마음과 육체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소중한 깨달음을 중생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상실된다.
  육체의 집을 짓는 독충은 마라[惡魔], 아수라[阿修羅], 긴나라, 마고라, 나가[蛇, 龍] 같은 악령이다. 아무리 이름 높은 악령이라 할지라도 자비 앞에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타마는 알았다.
  지상계에 태어나 악에 물든 인간은 저승으로 돌아가 참혹한 지옥의 수행을 거친 후에야 다시 깨끗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현상계에 태어나 또 다시 악에 물드는 것도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집을 짓고 사는 마라나 아수라의 잘못이다.
  이런 사실을 중생에게 알려 자비심이 얼마나 소중하며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상계는 빛과 어둠이 대조를 이루고 있으므로 누구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
  인간은 빛과 어둠의 양면을 경험함으로써 진정한 마음의 밝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을 얻어야만 지상의 천국은 건설되는 것이다. 고타마는 개달음의 중대함을 마음 깊이 새겼다. 우루벨라에서의 스무하루 동안이 고타마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지나간 36년 동안의 불안과 회의, 고뇌를 끝냈다. 고타마는 생사를 초월할 수 있게 되었고 악마에게 이겼다. 그는 어떠한 것에도 겁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고타마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었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왔다. 보리수 가지에 둥지를 튼 새들은 하나같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붉은 해가 솟아올랐다. 불덩어리 같은 태양의 가운데에는 범천계에서 보았던 황금빛 태양이 환하게 숨쉬고 있었다.
  고타마는 깨달음을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 할지 생각을 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 한단 말인가?"
  걱정이 앞섰다. 출가 후 6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수행자들만 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만났던 수행자들은 대부분 4년이나 5년 동안 다시 만나지 않았으니 고타마가 그를 알지라도 상대방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고타마는 친근한 수행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다름 아닌 아라라 카라마 선인(仙人)이었다. 6년 전 고타마는 3개월 동안 그 밑에서 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었다.
  경치가 뛰어난 바이샬리 교외에 있는 그의 수행장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름다운 풍경과 아라라 카라마 선인의 모습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고타마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아, 가끔 불현듯 떠올랐었다.
  아라라 카라마 선인은 학자였고 마음이 깨끗한 현자였다. 3백 명에 가까운 제자들은 그의 사상이나 학문보다는 인품에 끌려 있었다. 고타마가 처음 입문하여 두 달이 되었을 때 아라라 카라마 선인은 조용히 고타마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나의 후계자로 공부해 줬으면 하네. 부족하지만 나의 경험과 지식을 모두 자네에게 전해 주고 싶네."
  고타마는 선인 밑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바로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는 자신이 비록 휴계자로 뽑혔지만, 깨닫지 않고서는 춝의 뜻을 이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타마가 깨달음의 경지를 전달할 위치가 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아라라 카라마 선인이었다.
  고타마는 마음을 조화롭게 하고 명상에 잠겼다. 그러자 아라라 카라마 선인이 있는 바이샬리 마을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때 자신의 수행 장소였던 아누푸리야의 숲도 보였다. 아라라 카라마 선인의 수행장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선인은 보이지 않았다. 6년 전 고타마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120세였다. 그의 절제와 온순한 인품이 장수를 누리게 한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브라흐만의 목소리가 멀리서 다가왔다.

 

 

   <붓다>

 

  "아라라 카라마 선인은 일 주일 전에 타계하여 지금 이 세상(저 세상에서보면 이승은 저 세상이 되고 저승은 이 세상이 된다)에 와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찾기 힘들 것입니다."
  아몬이 목소리였다. 고타마는 한동안 서운한 마음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고타마, 아니 붓다여, 그대는 정도를 깨달아 이젠 붓다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깨달은 불법을 제일 먼저 전해 줄 사람은 아무래도 6년 동안 같이 생활하며 수행했던 다섯 명의 크샤트리아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미가다야라는 곳에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으로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붓다는 아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감았다. 미가다야에서 수도하고 있는 다섯 크샤트리아들이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적당한 장소에 자리잡고 참선을 하고 있었다. 붓다는 아몬이 일러준 대로 그들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아몬은 고타마를 붓다라 불렀다. 붓다는 신의 마음과 일치된 관자재력(觀自재力)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관자재력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꿰뚫어보는 초능력을 말한다. 관자재력을 가지면 사람의 전생, 저승의 생활, 현재의 마음 상태, 미래도를 지도처럼 확실하게 볼 수 있다. 또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 민족, 국가에 대해서도 과거, 현재, 미래를 개인의 것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당시 인도에서는 관자래력을 아포로키티슈바라라고 했다.
  보살이 되어야만 취할 수 있는 관자재력은 현상 뒤에 숨은 실상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넓지 않다. 보살에도 단게가 있다. 위로 올라갈수로 투시력, 이해력이 깊어지고 사물이 진실이 분명해지며 원인과 결과, 진짜와 가짜, 그리고 심오한 신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붓다의 능력은 관자재력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며 신의 능력에 버금가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는 신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리를 갖춘 예수는 신의 아들이며, 관자재력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사람을 이끌었다. 예수는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는 악마의 횡포가 너무 심한 나머지 사람들의 마음의 악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예수로서는 '사랑'을 심어주는 일이 더 시급했던 것이다. 예수의 역할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으며 불법 전체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불법과 자비에 관한 것은 붓다의 역할이었다. 그 일의 분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변함이 없다.
  불법(佛法:正法)에는 문증(文證), 이증(理證),현증(現證)의 세 가지가 있다. 문증이란 마음과 자연의 짜임새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이증은 그것들의 과학적인 증명이며, 현증은 영적 현상을 증명하는 것이다. 불법은 대자연을 기반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의 증명은 붓다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붓다와 예수, 모세는 3천 2백 년 동안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붓다는 불법을 알렸으므로 문증에, 병든 중생을 구제하고 사랑을 베푼 예수는 이증에, 수많은 기적을 남긴 모세를 현증에 해당된다. 물론 이 세 가지의 증명은 세 분이 동시에 한 일이다.
  붓다는 아몬을 비롯한 두 분의 브라흐만이 던져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암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과 사명을 밝혀주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붓다의 임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긴 붓다는 우루벨라의 숲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동냥을 할 때 쓰는 바리와 사슴 가죽체 그리고 물을 담는 대나무 통, 며칠 동안 먹을 식량뿐이었다. 길 떠날 채비를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기껏해야 5분이었다.
  모다불의 불씨를 다시 확인하고 붓다는 20여 일 동안의 정들었던 모리수 고목을 둘러보았다. 손끝에 닿은 보리수는 자신의 몸처럼 느껴졌다. 그늘과 따뜻함, 깨달음을 주었던 보리수에게, 한 번의 포옹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붓다는 보리수를 남겨두고 네란자라 강가로 내려가 먼지와 때로 얼룩진 승의(僧衣)를 빨았다. 강은 언제나 붓다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붓다는 그늘에 앉아 옷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책상다리를 하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문득 강이 없다면 지상의 생명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지에 강이 없다면 나무도 풀도 짐승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강물은 인간의 혈관과 같은 것이다. 강은 육지의 곳곳을 흘러 활기찬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붓다는 지금가지 목을 축이고 몸을 씻는 데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네란자라강을 새삼스럽게 유심히 바라보았다.
  갓 마른 승의를 입은 붓다는 상쾌한 기분으로 발길을 옮겼다. 크샤트리아와다른 무사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고 긴장되었다. 브라흐만과의 대화, 악마와의 대결, 우주와 일체가 된 체험, 모두가 기상천외한 사건들이었다.
  과연 그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까, 하는 불안감이 치밀었다.  불안감은 현실에 사로잡힌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왔다. 집착을 벗어던지고 정도에 따른 생활을 하면 무슨 일이든 원만하게 풀리게 마련이다.
  붓다는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벌써 36년의 시간을 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36회나 경험했으며 게절의 윤회를 지구와 함께 체험했다. 36년 동안 붓다이 눈에 비친 자연은 법(법;달마)의 모습이었다. 자연은 마음으로 효현하고 가르친다. 사계절의 윤회는 마음이라는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인다.
  자연은 인간이 자비와 사랑으로 다가가면 친구가 되어주고 위대한 스승이 되어준다. 자연의 마음을 알고 싶으면 먼저 어린이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비심,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홍수나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제멋대로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의 마음에 접근해보면 천재지변의 원인과 결과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사색에 잠겨 있는 붓다의 심경은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난 대자연 그대로의 마음이었다. 그런 붓다 자신도 불과 몇 주일 전만 해도 인생의 마지막 낭떠러지까지 몰려 생사의 기로에 섰던 것이다. 브라흐만의 등장으로 인해 전생의 자신을 알게 되었고, 전생에서 체험한 위대한 지헤를 언제 어디서나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더욱 믿음직스러운 것은 브라흐만의 존재였다. 마음으로 전파를 보내기만 하면 언제든지 해답과 가르침을 보내왔다. 붓다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상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깨달음의 기쁨은 체험을 한 자만 알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의 밝고 어두움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붓다는 브라흐만의 밝은 빛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법이야말로 부사다가 오랜 세월을 찾아헤맨 마음의 고향이었다. 정법은 신의 마음에 따른 올바른 질서이다. 그 질서를 마음 속에 확립시키는 길은 팔정도라는 척도에 의존하는 생활이며, 그 척도에 의한 생각이 온갖 업과 비뚤어진 성격을 바르게 잡아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때묻지 않은 순백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 성장하면서 전생에 지녔던 선과 악에 끌려 또 다시 새로운 업을 짓게 되어 성격을 형성해 간다.
  '고타마, 그대가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중생의 마음에 법등을 켜는 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
  아몬이 말이 붓다의 마음을 다시금 잡아 죄었다. 자신이 깨달은 정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길을 떠나다>

 

  네란자라강의 표면이 햇빛에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다. 넘실대는 빛의 주름은 조용히 숨쉬고 있는 바람을 따라 움직인다.
  붓다는 그동안 정이 들었던 우루벨라를 떠나면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지저귀는 새, 사슴들과 이별을 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이별이었기에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짧은 시일일지라도 깨달음을 이룬 곳이었던만큼 미련이 남았다. 서운한 마음을 떨치고 붓다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섯 명의 무사가 있는 미가다야로 가기 위해 네란자아 강둑을 따라 걸었다.
  붓다는 문든 브라흐만이 말했던 곳에서 과연 다섯 무사들이 수행하고 있을까?  영혼의 눈으로 보았던 그곳이 정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자 붓다의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벨라의 숲을 나가 라자그리하 마을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산골짜기를 통과하면 마가다 국경의 강가강(강)이 나옵니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면 캇시국에 이릅니다. 캇시국의 수도 바라나시에 가서 이시나파다를 찾으십시오. 그곳이 바로 다섯 무사들이 수행하고 있는 미가다야입니다. 저를 믿고 가 보십시오. 결과를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붓다는 혼자말로 대답했다. 그 모습은 자신이 질문하고 답하는 듯 실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브라흐만이 목소리는 의식속에서만 들여온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모습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붓다는 이제 브라흐만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듣고 어린이처럼 고분고분 복종하게 되었다.
  그토록 찾아헤맨 진리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산중을 헤매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우루벨라에 처음 왔을 대의 고타마는 몸과 마음이 모두 송장처럼 굳어 있었다. 불과 한 달 남짓해서 우루벨라를 떠나는 지금은 광명에 싸인 붓다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붓다의 마음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처럼 평온하고 티끌만한 집착도 미련도 없었다. 발걸음은 참새처럼 가벼웠다.
  브라흐만이 일러준 재로 걷자 라자그리하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붓다는 한숨 돌릴 겸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의 사로몬(수행자)이 붓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좋은 날씨입니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들 중 한 사람이 허물없이 말을 걸었다.
  '우루벨라의 숲에서 수행을 하고 오늘 길입니다."
  대답을 한 붓다는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둘 다 40세 전후반처럼 보였다. 한 사람은 얼굴이 길어 말과 닮은 모습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둥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을 건네온 쪽은 말을 닮은 사람이었는데 입이 튀어나온 걸 보니 아무래도 수다쟁이일 것 같았다. 그의 기운 넘치는 모습은 수도에 온 마음을 다해 정진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를 기르고 옷만 바꿔 입으면 장사꾼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붓다는 이 두 수행자에게 정도를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참았다.
  "저는 바라문 출신이며 도를 이루기 위해서 그 어려운 육체 고행도 마다 않고 수행을 쌓고 있습니다만 앞길은 캄캄합니다. 출가한 지도 벌써 십 수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마가다, 밧지. 캇시, 코살라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지금은 가야 다나의 수행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말은 닮은 긴 얼굴이 말했다.
  "가야 다나라고 하면 우루벨라 캇사파 성자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붓다도 한때는 우루벨라 캇사파를 찾아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라자그리하의 성주 빈비사라왕으로부터 캇사파가 위대한 선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만날 날이 있겠지, 하고 미루어오면서 지금까지 찾아가지 못했다. 붓다는 가야 다나의 수행장으로 간다는 그들의 말에 새삼 그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후이후이교 수행을 하고 있습니까?"
  붓다가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스승님과 그분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내 이름은 우파사입니다. 저는 지금 산자 스승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화신(火神)의 공덕이 어디에 있는지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저에겐 스승이 없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제 자신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육체를 힘들게 함으로써,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모든 집착을 버린 후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깨달음을 얻었으며,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붓다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행동도 부자연스럽고 서틀렀다. 우파사 옆에 안자 있던 둥근 얼굴의 남자가 붓다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붓다의 얼굴을 뚫어지게 처다보았다.
  "하, 그럴 수도 있겠군요."
  짧은 대답을 남기며 그는 우파사의 팔을 끌어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말하는 것은 간단한 것 같지만 어렵다. 생각을 그대로 쏟아 버리면 상대방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살피고 생각할 여유를 주면서 이야기해야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만나 사람에게 다짜고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고 결정을 내리듯 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요거이 내용이 바로 치과 그 의사가 아닌 카운터에 앉은 그 불친절하고 시건방지게 떠든 그남자 이야기와 유사하다...답이 여기 있었군...]

  붓다는 좀더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이야기했어야 했다고 뉘우쳤다. 수행자를 만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조급하게 개달음을 내뱉어버린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반감을 일으켜 실패로 돌아갔다. 성급한 마음이 일을 망치고 말았다.
  붓다는 자신의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깨달음에 대한 자만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앞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연은 말이 없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를 몸으로 가르치고 있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지식을 많이 습득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넓고 깊어질수록 모든 만물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마음이 겸손의 마음이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닌 것이다. 우주와 일체된 마음이야말로 붓다의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붓다도 육체의 자신으로 돌아오면 눈앞에 벌어진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 깨달음은 자기 개인의 문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아닌 모든 중생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어리고 작은 아이라 할지라도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장차 어른이 되어 미로에 빠진 인간을 구하는 구세주가 될지도 모른다. 이는 불과 같다. 작은 담뱃불 하나가 산을 태우고 도시를 태울 수 있다.
  '뭐든지 서두름년 안 된다. 작은 일에도 신중히 생각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자. 과정을 즐기면서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붓다는 스스로 다짐했다.

 

 

   <마음의 눈>


   붓다는 여행을 계속하였다. 동굴과 바위산을 거처로 삼아 탁발을 하면서 끼니늘 때웠다. 여러 번 수도승과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붓다는 몇 년 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가엾고 딱한 생각이 들었다. 한 수행자는 무더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바위 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좌선의 목적이 깨달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한게에 도전하기 위한 것인가. 붓다는 차마 혹독한 육체 고행을 하는 수행자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완고한 고집을 버려야 한다. 혹독한 육체 고행은 오히려 번뇌를 불러 일으켜 육체를 망가뜨릴 뿐이다. 붓다는 육체 고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말을 건네려고 걸음을 멈췄지만, 중도를 아무리 쉽게 설법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윽고 붓다는 라자그리하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6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수행자들이 6년 전과 다름없이 육체 고행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두들 육체를 힘들게 하면서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고 구원을 받겟다는 의지에 가득 찬 표정이었더. 어느 집단의 주위에는 이상한 기운마저 서려 있었다. 황금빛이나, 녹색, 자색 등의 조화를 나타내는 빛을 발하는 수행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몸에서 피어오르는 정기를 볼 수 없다. 제3의 눈이나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 그 빛을 보고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육체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 노여움, 시기, 질투, 불만 등이 마음을 지배하면 붉은색, 검은색, 회색의 빛이 새어나온다. 반대로 자비와 사랑, 겸손이 가득하고 욕망이 적은 사람에게는 황금색, 녹색, 자색 등이 나타난다. 따라서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나 생각을 절대 속일 수 없다.
  정기의 색채는 그대로 저 세상을 반영한다. 색채에 해당하는 저 세상의 마왕, 지옥 영혼, 동물 영혼을 불러들이게 되며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질병이나 사고, 자살 등은 지옥에 있는 악령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름답고 평안의 깃든 녹색과 황금색을 가진 사람은 저 세상의 천사가 늘 뒤에서 이끌어주기 때문에 평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육체 고행에 몰두하고 있는 수행자들의 등 뒤에은 마왕이나 동물 영혼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육체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초능력은 정법을 실천하기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은 방편을 목적으로 알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행장은 눈으로 보아도 이상한 광경이 많았으며 마음의 눈으로 보아도 동물의 영혼이나 귀신들이 붙어서 그들의 고행을 부채질 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행장에는 그들의 집착과 눈에 보이지 않는 지옥 영혼들이 만들어내는 죽은 영혼의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붓다는 수행자들 중 하나를 붙들고 육체 고행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고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을 가르쳐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만났던 수행자들과의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듣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은 쓸모 없는 짓이다. 인연이 없는 자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이 말은 수행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정법을 배워 많은 지식을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바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정법은 믿음과 실행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 위에서 굴러가는 것이다. 믿음이 섰으면 우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실천하면 여러 가지 환경에 따른 문제에 부딪쳐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해답을 찾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 해답이 찾아온다. 의문이 풀리면 이해는 더욱 깊어지고 몸과 마음은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와 같이 믿음과 실천은 지식의 깊이와 폭을 넓혀 주고 깨달음으로 인도해 준다.
  붓다는 수행장을 지나면서 언젠가는 이곳에 와서 정도를 설법하리라고 다짐했다, 라자그리하의 북문을 나선 붓다는 곧장 날란다로 향했다. 그는 그 마을에 사잔이라는, 논쟁을 좋아하는 수행자가 있다는 것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는 혹시 그를 만나게 되더라도 논쟁은 피하겠다고 다짐했다. 붓다는 다행이 그를 만나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을 빠져나온 붓다는 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파라리가마에 도착하니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바이샬리 마을이 나타났다. 거리의 모습도, 상점들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붓다는 동냥을 하면서 아무에게도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유행(遊行)은 무척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리를 거닐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생활에 찌든 모습은 옛날의 고타마로 데려다주었다. 옛날의 심정으로 돌아가니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얼굴의 긴장도 풀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붓다의 여유 만만한 기분이 싹 가셨다.
  '이제 나는 깨달음을 이루고 다섯 무사들에게 정도를 알리고 깨달음을 전하려 가는 몸이 아닌가? 유행의 게으른 즐거움에서 벗어나자.'
  붓다는 잠시 동안 벗어난 마음을 다스렸다.
  사회는 분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놀고먹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각자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한다.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일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거나 놀고먹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의 조화는 무너지고 빈부의 차가 심해진다. 이윤 추구가 인간의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사회는 조화로워질 것이다.
  붓다는 암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하고 이끌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 임무는 사회 생활를 중도(中道)라는 궤도에 올려놓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잊어버린 채 유행 그 자체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될 일이다.
  붓다에게는 불행과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이 맡겨져 있다. 그들 수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구름이 끼어서는 안 되며 언제나 둥글고 따스하고 진솔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붓다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현재의 상념과 행위는 결코 도피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 주어진 사명 앞에서 생겨나온 용기와 자신감임을 알았다.
  붓다는 파다리가마와 캇시국을 지나 마침내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최초의 제자>

 

  바라나시는 상공없이 발달한 도시였다. 인구는 약 10만 명 정도가 되었다. 오늘날의 도시에 비하면 형편없는 것이지만 당시로는 번창한 도시였다. 집은 주로 흙집이었으며 옹기종기 밀집되어 있었다. 도시에서 조금만 교외로 시선을 돌리면 펼쳐진 들판가 숲에 가 닿을 수 있다.
  흙집은 대부분 창문이 작았기 때문에 집 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더위와 먼지를 막는 데는 나무로 만든 집보다 안전하고 좋았다. 도로 양편에 줄지어 자리를 잡은 노점상들이 작은 시장을 만들었다. 온갖 물건이 진열되어 손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비단이었다. 붓다가 어린 시절에 입던 의복도 갓시산(産) 비단옷이었다.
  바라나시에는 오래 전부터 정통파의 바라문이 많았으며 거리에서도 쉽게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비단옷을 몸에 걸치고 거리를 유유히 활보한다. 그들이 행차하면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기를 비켰다. 크샤트리아, 상공업자, 시민들은 모두 그들에게 특별한 예의를 갖추었다.
  붓다는 바라나시의 거리를 묵묵히 걸어갔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거지의 모습이었다. 옷은 비바람에 낡고, 땀과 먼지로 더러워졌다. 들판에 아무렇게나 눕고 동굴에 기댔던 까달에 소매가 닳았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깊게 자란 턱수염도 한몫을 했다. 수행자인지 거지인지 그 초라한 행색으로는 쉽게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거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안정된 눈빛과 침착한 발걸음이었다.
  붓다는 성큼성큼 한눈 팔지 않고 앞을 보며 걸어갔다. 누더기를 걸친 붓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지나가는 모습은 세상의 모든 번뇌를 초월한 신선의 거동을 연상시켰다. 붓다에게는 아첨이나 꾸밍, 우월감, 열등감은 일절 없었다. 오로지 팔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아 보고 생각하며 말할 따름이었다. 순간순간 지나가는 시가늬 흐름 속에서 정도를 마음에 새긴 붓다의 생각과 행동에는 작은 오차도, 빈틈도 없었다.
  다섯 무사가 있는 미가다야는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었다. 바이샬리의 교외 아누푸리야의 숲과는 달리 그소에서는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 모여 도를 닦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육체 고행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시의 수행은 대부분이 육체 고행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다른 힘을 의지하려는 타력 신앙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스르로 신을 찾아 구하는 인간의 갈망은 극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되풀이되는 전쟁,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찾을 수 없었던 당시의 사회가 육체 고행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진솔했고 순진했다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비록 육체 고행은 잘못된 것이지만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신을 갈구하는 그 노력 만큼은 높이 평가해 주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어떠한가. 이미 타력이 되었으며, 신앙도 대중의 마음에 이끌려 이윤 추구에 빠져 있지 않은가. 사찰은 관광이 대상이 되었으며 불당은 죽은 사람을 두고 돈을 버는 장의사 노릇을 하고 있다. 신앙은 이름뿐이며 마음을 상실한 껍데기들이 판을 치는 암흑 시대로 전략하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일하며,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인간은 돈을 찾아헤매고 있다. 인간이 마음을 상실하면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지옥의 늪으로 빠니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미가다야의 기후는 온화했다. 햇살은 부드러웠으며 밀림이나 습지도 없었다. 수행 도중에 갑자기 나타날 야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행자들은 동굴이나 바위, 거목을 찾지 않고, 들판이나 평지에서도 안심하고 참선을 할 수 있었다. 어릴 적에 상인과 크샤트리아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미가다야의 땅을 밟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붓다는 들었던 대로 다른 곳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다섯 무사들의 수행장은 근처에 있었다. 붓다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붓다는 바라나시에서 탁발을 하면서 이틀을 보냈다. 이틀 동안에 밤마다 참선을 하여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브라흐만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미가다야의 수행장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고 있다. 물 표면에는 언덕의 푸른 그림자가 내려와 있었다. 코스타니야와 무사들은 강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래와 풀이 깔린 숲 속에 있었다. 붓다는 그들을 한동안 멀리서 바라본 후 걸음을 옮겼다.
  코스타니야는 붓다를 보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돌려 밧데아게게 귓속말로 무슨 말을 전했다.
  "오랜만이구나. 이제야 너희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붓다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코스타니야는 물론 아무도 붓다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먼 길을 찾아온 이유를 모를 뿐 아니라 아직도 그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코스타니야, 너는 분명 내 말이 들린 터이다. 내 얼굴을 보아라. 나는 마침내 깨달음을 덩더 붓다가 되었다. 너희들의 수행이 잘못된 것임을 랄여주려고 이렇게 온 것이다. 너희의 수행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다. 번뇌를 없애기 위해 육체 고행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육체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 육체와 마음을 모두 망가뜨린다."
  붓다가 이제까지 말하자 코스타니야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제 우리의 스승도 왕자도 아니오. 우리는 지금 수행을 하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가시오. 타락한 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수치스러우니 어서 다른 곳으로 가시오."
  "코스타니야,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거라. 나는 예전의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니다. 너는 조금 전에 아사지 등에게 '고타마가 혼자 수행하는 것이 겁나서 우리에게로 왔다. 아무도 상대하지 말아라. 우리들은 카필라서의 크샤트리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고타마는 스승도 아니고 왕자도 아니니 그의 신변을 돌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밧데아, 코스타니야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사지와 밧데아가 놀라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 중에 가장 생각이 깊은 코스타니야도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슈바라다. 너희들의 행적과 마음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우루벨라를 떠날 때는 슈바라가 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수행하려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의문덩어리만 자리잡고 있다. 만약 깨달음을 얻었다면 내 마음 속을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내 말이 맞지 않은가? 코스타니야, 네 얼굴에는 평화가 없고,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차 캄캄한 암흑 같구나~~"
  붓다의 말은 코스타니야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반발하고 싶지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붓다 앞에서는 아무말고 할 수 없었다. 코스타니야는 고타마를 다시 보았다. 위엄이 있는 말과 모습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6년 동안 찾아헤맸던 진정한 스승을 이제야 만났다는 생각이 코스타니야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풀려 어린아이의 것처럼 유순해졌다.
  "고타마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타마님께서 수행을 포기하고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다. 코스타니야, 사과할 필요 없다. 너희들이 내 곁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6년 동안의 수행은 가혹한 육체 고행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수행을 계속했다면 내 육체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한 것이다.
  나는 우루벨라의 목장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노래를 듣고 육체 고행의 잘못을 느낄 수 있었다. 육체가 건강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 방식과 행동을 바로잡고 중도에 따른 생활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익을 수 있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코스타니야, 마음과 행동을 중도를 척도로 삼아 올바르게 생활해야 한다.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밎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는데,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들어 보아라."
  붓다는 차근차근 설법을 풀어나갔다.
  아사지와 밧데아도 붓다의 말을 수긍했다. 육체 고행의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타니야는 붓다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지적하신 대로 저에겐 아직도 납득이 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타마님은 한낱 평범한 수행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타마님과 헤어진 후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타마님의 눈부신 모습과 마음을 읽는 능력은 바로 제가 찾아헤매던 신의 마으미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의 고타마님은 지난날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십니다. 이제 저의 마음은 편안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은 처음입니다. 부디 저를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코스타니야는 두세 발자국 뒤로 물러선 후 큰 몸을 잔디밭쪽으로 굽혀 붓다의 둘레를 세 바퀴 돈 다음 넙죽 엎드려 절을 드렸다. 이렇게 해서 붓다에게 다섯 명의 제자가 탄생했다.
  붓다는 브라흐만이 일러준 대로 미가다야 땅을 밟고 다섯 크샤트리아를 만났고 그들을 처음으로 제자로 만들었다.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떠나날고 했던 아몬의 말이 떠올랐다.
  붓다는 다섯 무사들과 함께 지난 6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요한 시간이었다. 비록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했으나 카필라 생활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마음의 스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의 제자이며 그 관계는 목적을 함께하는 것인만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굴고 튼튼한 인연으로 결속된 것이라고 붓다는 생각했다.

 


 

  <제자들의 눈물>

 

  아포로키티슈바라는 관자재력(觀自在力)이라는 뜻이다.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이나 혼자 생각까지도 읽을 수 있다. 관자재력은 인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과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 서로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 능력은 영혼의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키워진다.
  일반적으로 관자재력을 지닌 사람을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석가는 가장 위대한 능력을 가졌다. 고대 인도어로 석가를 붓다라고 말하는데 신의 마음과 상통한 능력을 지녔음을 뜻한다. 불(佛) 혹은 불타(佛陀)라는 명칭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자재력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도 있다. 그 능력이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축적된 것이라면 전생이 없는 사람응 이 생에서 아무리 정법을 실천해도 관자재력을 얻기가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관자재력을 갖춘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자신을 수호해 주는 영혼과 이끌어가는 영혼이 항상 지켜보면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앞에서도 이미 거론한 바 있지만 정법을 실천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몸이 조화로워야 한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바른 것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앎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조화롭게 하는 것은 관자재력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점을 혼동하여 수행자들은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포기하게 된다.
  다섯 명의 크샤트리아들은 붓다의 설법에 마음의 귀를 열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순식간에 읽는 아포로키티슈바라에 대한 것들을 바라문의 경전인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코스다니야만은 여전히 고타마에 대한 의문이 남아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깨달음은 뒤로 미루더라고, 마음이 평안해야 하지 않는가, 대체 무슨 연유란 말인가.'
  코스다니야는 그동안 자신이 전념해 온 수행 방법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타마님, 고타마님은 지난난 우루벨라의 숲에서 수행자자 지켜야 할 규율을 어기고 비린내 나는 우유를 마셨습니다. 그것으로 수행을 포기하셨구요. 그런데 지금은 슈바라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저희들도 그동안 엄격한 육체 고행을 견디며 수행에 정진했습니다. 헌데 저희들은 왜 슈바라가 되지 못한 겁니까?"
  코스타니야는 고개를 숙이고 질문했다. 어조와 모습은 공손했지만 수행의 결과가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붓다는 그의 마음과 네 사람의 마음도 읽은 다음 말을 시작했다.
  "너희 마음에 있는 의문을 잘 알고 있다. 나도 지난날엔 너희와 같은 의문에 잠긴 적이 있었다. 이제 그 의문은 풀릴 것이이다. 지금 당장 알고 싶다면 고타마라고 부르지 말고 붓다라고 부르거라. 나는 이제 붓다가 되었으니~~"
  붓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붓다~~~"
  그들은 큰 몸집을 조그맣게 접으며 진심으로 '붓다'에게 대답했다.
  석양이 서쪽 하늘에서 전체로 서서히 번져갔다. 강에 닿은 석양은 깊이만큼 젖어 있었다. 붓다는 하늘로 가 있던 시선을 다섯 크샤트리아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수행을 계속해 왔다. 미가다야의 나무를 보아라. 줄기가 굵으면 그 뿌리도 넓게 퍼져 있을 것이다. 줄기에서는 가지가 나오고 가지에서는 다시 실가지가 뻗어나와 푸른 잎을 만들고 무성한 숲을 만든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수목도 있다. 만일 가지가 줄기보다 더 굵고, 줄기보다 뿌리가 더 가늘면 어떻게 되겠느냐? 잎이 가지보다 무겁고, 꽃이 가지보다 더 무거우면 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뿌리와 줄기, 줄기와 가지, 가지와 잎사귀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바람이 불어도 가지는 단단한 뿌리 때문에 안정을 잃지 않는다.
  나무는 우리에게 중도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길도 마찬가지다. 마음이라는 줄기와 법이라는 뿌리를 잃어버리고 오관(五官)이라는 잎사귀의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붓다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경청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중도에서 벗어난 생활을 보냈다. 왕자로 태어나 불편한 것 없이 편안한 생활을 누렸다.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졌고, 커다란 의문이 생겨났다.
  성 밖의 사람들은 굶주림에 울부짖었지만, 성 안의 사람들은 그들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화로운 생활을 보냈다. 같은 생명을 지닌 인간인데, 노예가 있고 주인이 있다. 이런 불공평한 제도는 누가 만들었으며 왜 있는 것일까. 하늘의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빛을 비춘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대지든, 어디든 공평하게 빛을 내려준다. 인간 사회에만 있는 불평등에 대해서 생각했다.
  카필라에서의 생활은 의문에 둘러쌓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시간이었다. 나는 친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친어머니라고만 믿었던 분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카필라와 이웃 나라와의 전쟁이 있었다.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군사들을 양성하고, 첩자를 보내 염탐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도 전쟁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나날을 나늘 불안하게 만들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이름을 딴 별장들과 사랑스런 아내가 나를 반겨주었지만, 마음은 늘 편안하게 쉴 곳을 찾아헤맸다. 깨달음은 이러한 환경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카필라를 떠나 너희와 함께 한 6년의 시간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동냥이나 과일 채집도 익숙해지자 힘들지 않았다. 여러 수행장을 돌아다니면서 실망을 했었고, 번뇌를 없애기 위해 매일 육체 고행에 열중했다. 육체 고행을 할수록 육체에 대한 집착이 생겨 정도와는 멀어졌다.
  나는 너희들이 우루벨라를 떠난 후 혼자서 내 생애를 반성하면서 깨달았다. 카필라의 풍요로운 생활과 가혹안 육체 고행은 깨달음과는 지극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이다."
  붓다의 말은 다섯 크샤트리아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게 했다. 그들은 가기 생각에 잠겼다. 눈을 지그시 감았고, 고개를 끄덕였고, 카필라의 지난 생활과 함께 수행한 시간에 대해서도 회상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해온 수행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다.
  설법을 멈춘 붓다는 코스타니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코스타니야, 카필라성에 있을 때 궁녀들이 연주하던 가야금 소리를 기억하느냐? 가야금 줄을 세게 조이면 어떻게 되고, 느슨하게 하면 그 소리는 어떻게 들리겠느냐?"
  "~~~~~~~"
  갑작스런 붓다의 질문에 코스다니야는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한참을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세게 조이면 줄이 끊어지고, 줄을 느슨하게 하면 가야금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가야금 줄은 적당히 조여야 고운 소리가 날 것입니다."
  "그렇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야금 줄처럼 세게 조이면 끊어져버린다. 혹독한 육체 고행을 통해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번뇌를 만든다. 육체는 힘이 없어 무너지고 마음은 집착으로 가득 차게 된다.
  육체는 인생을 항해하는 배[舟]에 지나지 않다. 그 배를 움직이는 마음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인간은 육체의 오관이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이끌려 다닌다. 둥근 마음을 상실하면 질투, 시기, 원망, 노여움, 욕망 등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참된 자신이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괴로움은 자신의 마음과 행위가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어나서 병들고 늙어서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생활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택해야 한다. 마음을 상실한 채 육체 고행을 통해 번뇌를 없애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육체의 오관은 모든 현상을 보고 느끼지만 판단은 마음이 한다. 그 판단은 현상이나 환경에 의해 현혹되어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하여 생각과 행동이 마음에서 벗어나기 쉽다.
  자신을 나타내는 멋있게 보이기 위해 거짓말흘 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진 거짓말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원래 마음은 깨끗한 것이다. 자신이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인간이 신의 자식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둥글고 풍부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교육, 습관, 환경,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그 둥근 마음은 비뜰어지고 망가진다. 평안한 마음은 불안해져서 늘 뭔가를 찾게 된다.
  나는 마음의 평안을 찾아 출가하여 그대들과 6년 동안 우루벨라의 숲에서 엄격한 수행을 했다.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깊은 명상과 참선에 빠졌었다. 그런 생활을 반복했지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건네준 우유 한 잔을 마신 사건을 계기로 그대들은 내가 타락했고 수행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평소에 쌓였던 불만을 털어놓으며 우루벨라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네란자라 강둑을 딸 멀어져가는 그대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열매만 먹으며 수행을 계속한다면 육체는 어느 순간에 허물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망가진 후에 무슨 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건강을 회복한 후에 자신을 되돌아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후에 죽음을 각오하고 보리수 고목 밑에서 지난 36년 동안의 내 생각과 행동을 반성했다. 중도를 척도로 삼아 반성을 마친 후에야 삶과 죽음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로병사는 하나의 괴로움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에서 해탈하는 길은 생각과 행동을 팔정도라는 중도로써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로잡아 바르게 생활하는 데 있음을 알았다."
  붓다의 설법은 빛으로 얽은 그물과도 같았다. 듣는 자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 빛은 길이 없어도 마음 어느 곳이든 흘러들어가 빛났다.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의 마음은 뜨거운 감정으로 가득 찼다. 6년 동안의 잘못된 수행에서 눈을 뜬 그들을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느꼈다.
 주위는 벌써 어두워졌다. 이웃 수행자들의 땔감 꺽는 소리가 들려오자, 붓다는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는 그들에게 말을 던졌다.
  "이제 얼굴을 들어라. 벌써 어두워졌구나. 땔나무를 모아 불을 지핀 후에 다시시 설법을 시작하자꾸나."
  붓다의 말에 그들을 고개를 들었다. 코스타니야와 아사지, 밧데아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었고 감격과 감동에 젖은 표정은 쉬 변하지 않았다.
  "에, 저는 땔감을 구하려 가겠습니다."
  아사지는 대답을 하면서 일어서자마자 다리가 마비되어 넘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무릎을 끓고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두 손으로 다리를 잡으며 간신히 일어나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코스타니야는 불씨를 얻으러 이웃 수행장으로 달려갔다.
  오목한 장소에 모닥불을 지피고 다섯 사람은 원을 만들어 앉아 붓다의 가르침을 기다렸다. 모닥불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그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반짝거렸고,얼굴은 생기가 돌았다. 길 잃은 어린 양처럼 암흑과 불안에 헤매던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햇빛에 그을린 그들의 얼굴엔 평안과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붓다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들의 등뒤로 후광이 비치며 환하게 웃고 있는 보살의 모습이 똑똑하게 드러났다.
  "붓다님, 황금색이 연한 빛이 붓다님을 싸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까요?"
  아사지가 눈에 비친 이상한 현상을 보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나머지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아사지, 그대으 눈에도 보이는가? 이 광명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정직을 마음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고 생활하며 남에게 자애를 베풀고 만족할 줄 알며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조화의 마음으로 안정될 때에는 마음의 구름이 없기 때문에 광명에 싸이게 된다. 그대들의 둘레에도 광명이 내려 있다.잘 보아라."
  아사지는 옆에 앉은 밧데아를 바라보고 그의 빛을 확인했다. 네 사람의 머리 둘레에는 황금빚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사지는 볓 번이나 눈을 비비고 깜박거리더니,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감동을 누를 길이 없어 그만 우을믕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 뒤로 환하게 빛나는 황금빛에는 저 세상의 천사들도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모습이 붓다의 마음의 눈에 환하게 보였다. 깨달음을 처음 얻었을 때 보았던 브라흐만과 비스한 옷을 입은 천사들의 자비에 넘친 모습이었다. 붓다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는 암흑에 빠져들었다. 세상은 모두 평안한 잠에 빠져 고요했다. 모닥불이 불긺나 밤의 휴식을 거부하는 듯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사로몬들이여, 마음을 가다듬고 내 말을 들어라."
  그들들 둘러보며 붓다는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천국에서 이미 부모를 선택해서 육체와 인연을 맺은 후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난 환경도 모두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들을 하지도 못하고 죽는다. 재산이나 명예나 지위는 이 세상에 국한된 것이다. 사람들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급급해 하며 살아가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다. 맨몸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죽는다.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죽으면서 재산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진리를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마음까지 가난해지고 풍요로운 집안에서 태어나면 교만과 사치로 마음이 가득 차 타락한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욕망이 태산과 같아서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며 생을 보낸다. 인간이란 어리석고 우둔하다. 사로몬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사실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의 마음을 묶는 쇠사슬을 푸는 데는 올바른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다스리는 길밖에 없다. 비뜰어진 생각과 행동을 버려야 한다.
  미가다야의 자연을 둘러보아라. 산과 하늘, 나무 모든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물의 생활은 언뜻 보기에 약육강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호랑이나 하이에나는 배가 부르면 먹이가 코앞에 와도 결코 덮치지 않는다. 초식 동물이 많아지면 풀과 나무가 멸종되지만, 초식 동물이 없으면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자연은 서로 의존해 가면서 전체으 조화를 이룬다. 동물들의 약육강식의 모습만을 보고 인간 사회에 대입시키려고 하면 무리가 따른다.
  인간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나아가 자연, 세상과 조화를 이루러야 한다. 인간에갠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서로를 헐뜯으며 싸운다. 맹수들이 서로 살생하는 것은 자신이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법은 대자연의 모든 생명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인간 사회도 이기심, 욕심을 버리고 인류는 모두 한 형제라는 것을 느끼고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면 실천으로 옮기기 어렵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척도가 필요하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해야 한다. 바르다는 것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중도를 말한다. 상대방이 하는 말,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과 견해에 편견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 중심이 되어 남을 힘들게 하고 자신의 마음에도 상처를 만든다.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늘 객관적인 입장에서 올바른 판단과 말을 해야 한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전념해야 한다. 오관을 통해서 마음 속에 일어나는 현상,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한쪽으로 기울어져선 안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며 창조의 진원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마음 속에 나쁜 생각을 품고 있으면 언젠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게 된다. 그 나쁜 생각은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자신에게 이익이라면 남의 불행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언제나 중도의 마음을 지니고 노여움, 시기, 질투, 불만을 자신에게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산다면 마음은 평안해질 것이다.
  일을 할 때도 바른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인간에개는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직업이 있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직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일을 통해서 많은 것을 경험하려고 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일이나 직업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험을 만드는 학습장이다. 인간은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다.
  일을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되고 행복을 얻을 수 있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짐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은혜를 베품으로서 결실을 맺는다. 농부는 땀 흘린 만큼 수확을 거두어들인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고 생각하면 , 일은 고통이 된다. 기쁘게 일을 하면 보람은 더욱 커지고 일을 해서 얻은 이익은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못 본 체하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스스로 괴로움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일이라해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바르게 살고 바른 자세로 중도에 정진하며 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바른 길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울어진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나진 않았는가. 반성을 통해서 마음의 때를 벗기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때때로 반성해야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철저하게 자신과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지난 36년 동안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하나, 반성을 통해서 마음의 구름을 벗기고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더. 그대들도 지금부터 오늘깢의 인생을 남김없디 흝어보고 팔정도에 거스른 생각과 행동이 있다면 진심으로 신에게 용서를 빌고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라. 반성은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튼 수행자에게 부여된 신의 크신 자비이다. 짐승들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알겠는가?"
  붓다의 말은 끝이 없는 실타래에서 풀려나오는 실처럼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것은  다섯 명의 수행자의 가슴에 빛이 되어 스며들었다. 그들의 머리 뒤에 비친 빛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사로몬들은 그동안의 수행의 잘못과 정법의 위대함을 느기며 옷깃을 여몄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올바른 마음과 행동을 만들어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붓다님, 저희들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코스타니야는 말을 마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완고하게 굳었던 그의 마음에 붓다의 자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코스타니야의 큰 몸체가 흐느꼈다. 그의 통곡은 고요히 잠든 숲을 깨우고 대지를 흔들어댔다. 네 명의 사로몬들도 붓다의 설법에 감격하여 온몸으로 울었다.
  "코스타이야, 잘못을 진솔하게 시인하는 그 마음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 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붓다는 오른손을 들어, 울고 있는 코스타나야에게 자비의 빛을 넣어주었다. 우루베라에서의 실수는 코스타니야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네 사람 모두 고타마의 행동에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코스타니야화 함께 행동한 것이다. 만약 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한 모금의 우유가 무엇을 의미했으며 6년의 고행이 잘못된 것이라고 깨달은 고타마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면 코스타니야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들은 마음 속 깊이 우루벨라에서의 사건을 반성했다. 코스타니야는 붓다의 자비로운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윽고 마음이 진정되었다.
  "지금의 말씀을 명심해 중도의 마음을 척도로 삼아 수행에 임하겠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저를 버리지 마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아사지도 일어서며 붓다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부터 팔정도에 맞추어 지난날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반성하고 오겠습니다."
  아사지가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지자, 밧데아, 마하 나마, 우파카도 명상의 장소를 찾아 제각기 붓다의 곁을 떠났다. 코스타니야만이 붓다 곁에 남아 명상에 들었다.

 

 

  < 인간은 눈먼 장님과 같다>

 

  명상은 단순히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 경지에 드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때를 그대로 둔 채 무상에 들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명상에 잠긴 마음에 명예와 권력과 재산에 대한 욕심이 함께 있으면 그 욕심에 상응하는 악마를 불러들이게 된다. 일이나 염불에 전념하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무상은 자신을 반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다섯 명의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대로 팔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아,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잘못을 반성했다. 마음의 평안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고 신의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코스타니야는 카필라성의 뛰어난 무사였다. 그에게는 남을 멸시하는 버릇과 거만한 성격이 있었다. 윗사람에게는 굽히고 아랫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붓다 곁에서 반성의 명상에 잠긴 코스타니야는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가 진정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붓다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자신을 샅샅이 뒤졌다. 완강한 성격과 집착이 언제부터 자라났으며 현재는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추궁했다. 나머지 제자들고 코스타니야처럼 생각과 행동을 모두 반성하고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두번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안겠다고 다짐했다.
  이틀날 저넉 무렵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발산되는 후과이 더 커졌으며 환하게 빛났다. 마음의 구름이 벗겨진 틈새로 광명이 흘러들었던 것이다. 후광의 크기는 사람의 마음의 조화도에 비례한다. 조화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이르어진다. 어떠한 보석이라도 세공을 하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다.
  다섯 제자는 붓다를 둘러싸고 앉아 각기 반성의 진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코스타니야가 붓다에게 아뢰었다.
  "불평 불만이 많은 저를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서야 본래의 저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불만이 많았던 그도 겸손한 자세로 돌아왔다.
  "코스타니야, 그대의 불손한 태도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게 하였다. 불평 불만은 인간의 마음을 나쁜 길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상대방의 마음과 행동을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면 불평이나 불만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중심적이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마음가짐은 불평과 화를 만들고 온갖 질투와 욕심의 화신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루벨라의 사건은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 큰 계기가 되었다. 정도를 구하고 항상 노력하는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기뻐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붓다의 체험이 담긴 설법은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크샤트리아는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밀려오는 감동과 자책감을 동시에 억누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에는 별들이 흐트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따금 긴 꼬리를 남기면서 별이 떨어졌다. 밤이 깊어가도 붓다의 설법은 계속 되었다.
  "인간은 눈먼 장님과 같아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조화의 길이 열릴 것이나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남을 바라볼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조화는 거기에서 생겨나며 괴로움과 슬픔도 자신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여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생활이야말로 마음을 풍족하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길은 당장 실천해야 하며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덧없으며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마치고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날마다 하루의 인생에 감사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살아야 한다. 날마다 마음과 행동이 충실해야 한다.
  선정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 일체를 정도에 비추어보는 반성을 통해 마음 속의 구름을 벗기는 일이다. 마음에 구름이 끼어 있으면 평안이 찾아올 수 없고 광명의 빛을 느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구름 낀 마음은 어두운 세계와 통하며, 불안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하면 마라, 긴나라, 마고라, 아수라 등의 지옥 영혼을 불러들여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된다.
  마음 속에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집착은 올바른 마음과 행동에 대한 자각을 잃게 하여 일생을 망친다. 일체의 집착에서 떠나 마음이 평안해지면 참선은 실재계로 통하여 삼매(三昧)의 기쁨에 잠길 수 있으니 오늘부터 여덟가지의 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고 정진하기 바란다."
  찬찬하게 흘러나오는 신리의 말은 쉴새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그칠 줄 몰랐다. 붓다는 한숨을 돌리고 다섯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붓다의 설법을 한 마디로 빠뜨리지 않고 마음에 새겼다. 그들에겐 지난 6년 동안의 육체 고행이란 시간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탐구해 온 신리가 하루 이틀 만에 이해될 리는 없다. 그들의 편안한 얼굴에는 조급함이 서려 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하 나마가 입을 열었다.
  "붓다님, 저 같은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설법을 듣고 있자니 제 인생에서 지금까지 무엇 하나 잘 한 짓이 없어 환멸을 느낍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인들에게도 오만 심술을 다 부렸으며,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겐 관대했지만 남에겐 엄격했습니다. 제 자신이 싫습니다. 어떻게 참회를 해야 좋겠습니까?"
  마하 다나의 말에 나머지 네 명의 수행자들도 동감의 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하 나마, 그대는 자신의 결점을 빨리 찾아내었다. 바른 길을 모르는 자는 자기의 잘못된 점을 찾지 못하며, 같은 번뇌를 되풀이할 뿐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려 하는 것은 훌륭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올바른 마음과 행동을 쌓아가면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고통을 다스릴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광명에 싸인 훌륭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재산이나 능력에 의해서 인격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생활이 가난하고 힘들어도 마음이 풍족한 사람도 있으며 반대로 생활이 풍족하여도 마음이 메마르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 만족할 줄 모르고 욕심에만 눈이 먼 자들의 마음 속에는 많은 고통의 독을 만들고 있다. 마하 나마야, 지금의 겸손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붓다는 마하 나마의 솔직한 고백에 기뻐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마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그 자리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붓다가 내려준 자비의 빛에 젖어버린 것이다.  
  도를 구하는 자의 마음은 어린이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다. 붓다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그득ㄹ에게 신의 영광을 내려 인간의 가치를 아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법의 길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노력과 용기와 지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스승이 있어도 자신이 깨우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으로부터 평등하게 지혜를 부여받아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과 길이 주어진다. 자비의 빛은 달빛처럼 은은하게 길을 밝혀줄 수 있지만 그 길을 걷는 나그네는 두려움에 떨 수도 있고, 씩씩하게 걸을 수도 있다. 어두운 길을 계속 헤매느냐, 깨달음을 얻어 밝은 길을 걷느냐는 나그네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섯 명의 수행자는 붓다의 지도를 받으며 선정에 들어 반성의 명상에 들어갔다. 다섯째 날이 되자 그들 중에 가장 가아한 코스타니야가 처음으로 마음을 문을 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전생윤회의 과정을 깨달았으며 전생에서도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방황하는 중생들을 가르쳤다는 기억을 전생에 태어난 언어로 말했다. 그는 인생의 목적과 사명에 눈을 떴고 아라한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붓다의 제자 중에서 첫 번째로 탄생한 아라한이었다.
  엿새째 날엔 아사지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잇달아 밧데아가 그 경지에 이르러 고대 인도어로 말을 했으며 그 법열이 붓다의 가슴에 와 닿았다.
  남은 사람은 우파카와 마하 나마 둘뿐이었는데 이 두 사람도 이래째 날에 마음의 기근이 정리되어 아라한이 되었다.
  붓다의 제자들은 일 주일 동안의 반성과 실천으로 마음의 문이 열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카필라 시절에도 언제나 붓다 곁에 있었으며 전쟁터에서는 붓다를 호위하는 군사로서 임무를 다했다. 모두 힘이 좋았고 무술이 뛰어난 무사였다.
  붓다가 출가를 하자 부왕 슈도다나는 맨 처음으로 다섯 무사를 떠올렸고, 붓다를 평생 동안 지키며 수행을 도와주라는 임무를 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왕의 보살핌은 오히려 붓다의 깨달음을 지연시킨 원인이 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정도의 첫 번째 과정은 자신을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친구나 보살핌이 필요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과 기회를 빼앗기는 경우도 종종 되었다. 늘 집단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자신으 생각에 어긋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몸이 아플 때는 밤잠을 자지 않고 간호해 주었다. 약초를 구하려 산짐승이 있는 위험한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었다. 크샤트리아들은 모두 젊고 힘이 남아돌았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탁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집은 자기에게 호감을 가져 손에 들지 못할 정도로 보시를 많이 해준다. 또 어느 집에은 미인 자매가 있어서 같은 시간에 가면 문간에 서서 기다렸다가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탁발은 수행 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일과였지만 때로는 나쁜 생각을 지피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붓다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다섯의 모습을 보고 바른 마음을 알리는 데 자신감이 생겨났다.
  아라한들은 붓다를 위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움막을 지었다. 그들은 낮에는 탁발을 하고 하루하루를 만족하면서 보냈다. 식량을 저축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반성의 선정에 빠져 조화의 마음을 더욱 다져나갔다.
  그들은 바라문 수행자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바라문 수행자들은 움막을 보고 다섯 명의 제자와 스승이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붓다의 설법을 들으려 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움막과 다섯 명의 제자는 다른 교단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초라한 풍경이었다. 그 풍경은 다른 수행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붓다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
  육체의 오관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외형에 마음을 빼앗긴가. 겉모습을 보고 그 내용까지 판단하고 평가해 버린다. 당시의 바라문 계급은 지식층이었으며 바라문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에 젖어 있었다. 더욱이 바라문 교단은 다른 교단을 이끌고 있었으며 누구나 그렇게 인정했다. 바라문교 이외에는 모두가 나쁘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세에는 기울어져도, 진실한 것에서는 눈을 돌리는 나쁜 습관이 그들에겐 있었다.
  다섯 명의 아라한은 근처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붓다의 설법을 들을 것을 권유했지만 그들은 모두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이어서 계속 -----------

-----------출처 : 인간석가, 원문의 저자 : 高橋信次 (다카하시 신지) ,「제 2장 위대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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