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3장 연생(緣生)의 제자들『인간석가』(다카하시 신지)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3장 연생(緣生)의 제자들『인간석가』(다카하시 신지)

어둠의골짜기 2010. 3. 14. 20:20

『인간석가』

3장 연생(緣生)의 제자들

우루벨라 캇사파는
불의 화신 아그니를 모시고,
엄격한 육체 고행으로 자신을 다스렸지만
마음 속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엄격한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 불안했고 경쟁심만 일어났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붓다의 설법을 들으며 캇사파는
깨달음의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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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저자 :다카하시 신지 (高橋信次)
 

  <야사의 고민>  
 

  붓다는 미가다야에서 세 번째 보름달을 맞이했다. 밤 하늘에 자리잡은 크고 둥근 보름달은 다른 세상과 연결하는 통로처럼 신비하게 보였다. 둥글게 부풀어오른 달은 손을 펼치면 금세 다가와 품에 안길 것 같았다. 뜨거운 태양이 비추는 생명의 빛과는 달리 어두운 하늘에 뜬 달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여 붓다를 고요한 감정에 빠지게 했다.
  붓다는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깨끗한 선을 가진 보름달을 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감상에 젖었다. 달빛은 붓다의 온몸을 안았다. 붓다는 아름다운 달을 쉬지 않고 바라보았다. 달빛은 붓다의 마음을 안고 허공으로, 끝없는 하늘로 데려가 주었고, 어느새 달과 붓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날이 밝자 강은 안개를 촉촉하게 적셨다. 우루벨라의 숲에서 했던 것처럼 그는 이른 아침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산책은 자연과 대화하는시간이다. 나무와 풀, 안개 속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시작하는 시간이면서 계획을 세우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유달리 안개가 빽빽한 아침이다. 수면에 비치는 푸르른 나무의 색도 그 모습을 감추고 안개 숲에 묻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이 안개에 가려 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붓다는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몇 발자국 앞밖에 볼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붓다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청년 옆에는 신발이 가련런히 놓여 있었다. 붓다는 청년이 고민에 빠져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슬에 젖은 청년의 옷은 그가 오랫동안 그곳 선택의 문 앞에 앉아 고민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넋을 잃은 듯한 청년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붓다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젊은이, 무슨 연유로 그리 힘들어하는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축는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목숙을 버리지만 죽어도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오. 고통이나 두려움이 다가오면 도망가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시오. 자신을 들여다보고, 고통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생각해 보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오. 한순간의 판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이 보이오. 하지만 죽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소. 고통이나 두려움이 다가오면 도망가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시오. 그러면 문제는 반드시 해결이 될 것이오."
  청년은 놀라 붓다를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청년은 갑자기 일어나서 옷깃을 여미고 무릎을 끓었다.
  "브라흐만님, 저는 너무 괴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부디 저를 살려주십시오."
  청년은 밤새도록 강둑을 헤매다 지친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고생이란 모르고 자랐을 듯한 청년은 흐느껴 울며, 붓다를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며 매달렸다. 그는 밤새도록 괴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결심하고 있었다. 죽음을 결심하면서 세사의 모든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붓다가 브라흐만으로 보였던 것이다.
  붓다는 발 밑에 엎드려 흐느끼는 청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브라흐만이 아니라 붓다다. 괴로워하는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너의 고뇌는 마음에 있으니, 밖을 보지 말고 안을 들여다보아라. 마음을 밖으로 돌려놓고 고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고뇌의 원인이 무엇인지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자비에 가득 찬 붓다의 말이 청년이 마음에 깊이 자리잡았다. 청년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붓다에게 애원했다.
  "저는 바라나시의 교외에 사는 장자의 외아들 야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우파시카이고, 어머니는 아파사카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좋으신 부모님 밑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저희 마을에 출입하는 아름다운 무희(舞姬)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인데 어제 저녁, 보아서는 안될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같은 악단에 있는 약사와 몸을 섞고 있었습니다. 처음 그 장면을 본 순간 그녀가
아닐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였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기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습니다. 숨이 막히도록 달렸습니다. 집을 나와 무작정 뛰었습니다. 이곳에 멈춘 저는 강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붓다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저는 브라흐만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붓다님의 말씀은 자비로 가득 차 죽음을 결심하던 제 마음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붓다님, 제 마음에 자리잡은 이 고통을 벗겨주십시오."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듯 애원하였다.
  "야사야, 사랑하는 마음은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사랑은 올바른 판단을 잃게 만든다. 이룰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만족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끌려다닌다. 너는 보아서는 안 될 무희의 불륜을 목격하고 마음이 괴로워 죽음까지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변화는 변덕꾸러기다. 마음을 밖으로 돌려 욕심의 늪에 자신을 두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이나 사람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부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순간 인간은 죄와 고통을 만든다. 마음을 상실한 자들은 잠시의 쾌락에 몸을 맡긴 채 고통이나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고통은 다시 생겨나고 더 커진다. 야사야, 무희를 알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가거라. 그때는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뿐이지 않았느냐, 제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리듯 인간도 늙으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하고 만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곧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정도를 깨우치고 실천하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육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이야말로 영원한 자신이라는 것이라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눈으로 보이는 션상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서는 안 된다. 네 여자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눈으로 본 것이니 언제가는 이 세상에서 살아질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물건이라도 죽은 후에 들고 갈 수 없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현 세상에서 경험한 마음의 기쁨뿐이다. 때문에 마음을 평화스럽고, 어떤 환경에도 변하지 않는 부동심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야 눈앞이 밝아졌습니다. 저의 어리석었던 행동이 붓다님의 말씀으로 인해 확실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소원이니 제발 저를 제자로 거두어주십시오. 붓다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습니다."
  야사는 붓다가 설법한 자비 넘치는 신리에 의해 눈이 밝아졌다. 고뇌가 흘렀던 야사의 눈에 광채를 되찾았다. 괴로움의 눈물이 환희에 가득 찬 눈물로 바뀌었다.
  빽빽한 안개는 아침 햇살에 서서히 밀려가고 있었다. 야사의 마음을 아야기하는 듯이, 안개는 기류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갔다. 붓다와 야사는 언덕에 앉아 강을 들여다보았다.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장난스럽게 놀고 있었다.
  붓다는 야사의 손을 잡고 움막으로 향했다. 움막에는 다섯 아라한들이 아침 명상에 잠겨 있었다.
  "코스타니야, 이 청년은 바라나시의 교외에 사는 야사다.. 앞으로 같이 수행을 할 것이니 좋은 친구가 되어주어라."
  그들은 갑작스러운 야사의 등장에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 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친하게 지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야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사의 모습에서 괴로움이나 번뇌를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힘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바리나시의 말투는 미가다야보다 세련되고 부드러웠다. 야사의 몸짓은 다섯 아라한과 대조적으로 부드럽고 섬세했다.
  이렇게 해서 붓다에게 여섯 명의 제자가 탄생했다. 붓다와 여섯 제자들이 유행(遊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움막 밖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붓다는 인기척을 좇아 밖으로 나왔다. 상인 같아 보이는 사내가 붓다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근처에서 얼굴이 하얀 청년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로몬님, 보았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붓다는 그들에게 물었다.
  "제 주인인 우파시카님의 귀중한 외동아들입니다. 그의 부모님과 저희들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를 찾는 중입니다."
  사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도록 청년을 수색한 탓에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붓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내 제자들에게 한번 물어볼 테니 기다리시오."
  붓다는 움마긍로 들어가 야사에게 말했다.
  "야사, 네 가족들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 가거라."
  "저는 죽은 몸입니다. 붓다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준 후로 저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곳에서 새롭게 살고 싶습니다. 여기서 살게 해주십시오."
  야사는 붓다와 다섯 아라한에게 합장한 채 바위처럼 굳어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붓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야사를 움막 한쪽에 숨겨둔 채 다섯 아라한을 데리고 상인들이 있는 강둑으로 내려갔다.
  "제자들도 청년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거, 큰일났습니다. 강둑에서 도련님의 신발을 반견했습니다. 아무래도 물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불쌍한 도련님."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아들을 잃은 양 슬퍼했다. 붓다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한 청년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에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다섯 아라한들도 붓다와 같은 생각이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강 아래쪽으로 향했다. 붓다는, 언젠가는 야사의 부모님께 사정을 털어놓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에 달렸지만 부유한 집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만큼 야사의 출가는 부모님에게 크나큰 충격이 될 것이 틀림없다.
  움막 구석에 숨어 있던 야사는 붓다가 돌아오자 간청했다.
  "저는 절대 집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부모님께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제자로 남게 해주십시오. 두 번 다시 같은 고민에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야사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려들지 않았다. 붓다는 야사의 부모님과 친척들을 고려해서 일단은 집에 돌아가 가족을 안심시킨 후에 돌아오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야사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붓다가 야사의 뜻을 인정하고 제자로 같이 지내기로 다짐한 날 오후였다.
  야사의 부모는 마을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신발이 놓였던 강가에 와서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같이 온 마을 사람들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었다. 어제까지 그토록 건강했던 젊은 목숨이 강물 속에 모습을 감추고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야사의 육체는 강물 속에 숨겨져 흐르는 물이 되고 말앗다. 야사의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은 영원한 잠 속에 숨어버린 야사의 명복을 빌 따름이었다.
  붓다는 멀리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비의 빛을 던져 주었다.
  바로 이때였다. 낡은 수행자의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파시카와 아파사카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청년의 머리는 이제 막 삭발한 것처럼 파랬다. 아무도 그가 야사라고는 알아보지 못했다.
  야사는 조용히 무릎을 끓고 앉아 강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양친의 등 뒤로 가까이 가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오늘 다시 태어나 이렇게 수행자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밤새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야사는 마을 사람에게도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아파사카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 야사의 손을 꼭 불들었다. 기쁜지 슬픈지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야사야, 네가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줄은 몰랐구나. 이 어머니에게 다 이야기해 보려무나. 무엇이든지 소원은 다 들어줄테니까. 자 어서 솔직하게 다 털어놓거라."
  아버지 우파시카는 야사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고는 조금전까지 침통했던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들의 출가는 일시적인 감상일 것이라 여기고 야사를 구석구석 흝어보는 것이었다.
  "아버지, 오랫동안 고생만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늘까지 저를 이토록 키워주신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는 저를 죽음에서 구해 주신 영혼의 아버지, 코사라국 카필라의 왕자, 고타마 붓다님의 제자로서 일생을 바쳐 불쌍한 사람들을 제도하면서 살아갈 작정입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고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쏟아져나오자 아버지 우파시카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무슨 말이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너는 내 대를 이을 몸이다.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다. 자 집으로 돌아가자. 함께 가야 한다!"
  우파시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곘습니다. 저는 출가를 한 몸이고, 붓다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야사는 아버지의 말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얼굴 모습과는 걸맞지 않게 끗끗한 그의 신념 앞에 양친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 아파시카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가눌 길 없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 각오가 그렇게까지 단단하다면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붓다라는 분을 만나보고 싪다. 내게 안내하거라."
  아버지 우파시카는 야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야사를 설득해 보아야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까지 아들의 결심을 굳히게 한 붓다라는 분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직접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야사는 일어서서 붓다가 있는 움막으로 부모를 안내했다.
  붓다의 움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슬이나 비를 피랗 정도의 간단한 것이어서 야사가 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하지만 야사를 이렇게까지 귀의시킨 붓다라는 분은 틀림없이 위대한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움막 안은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움막 가장자리에 붓다가 앉아 있었다. 야사의 소개로 야사의 부모는 예의를 갖추고 붓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붓다는 이미 부모의 마음을 환히 내다보고 있었으며 우파시카가 질문을 하기 전의 사물의 인연,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마음과 육체의 문제, 인생의 목적과 사명에 대해서 차레차레 설법해 나갔다. 그리고 인간이 해탈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실천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움막 안은 어두워졌다. 붓다의 설법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으며 태양은 어느새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우파시카와 아파사카는 붓다의 설법에 마음으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야사의 다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야사의 부모는 집에서 생활하면서 수행을 하기로 했다. 그들은 아들의 출가을 웃으며 승낙했고 붓다에게 아들이 장래를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야사의 부모는 속세에서 수행하는 첫 번째 제자가 되어 팔정도에 정진하게 되었다. 우파시카와 아파사카는 이를 계기로 붓다의 정법을 널리 알리는 일에 경제적인 측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야사의 부모는 아들을 붓다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머니 아파사카는 매일 움막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맛있는 음식과 과일을 가져왔다. 며치 동안 아파사카가 움막을 찾는 일이 계속되자 남편 우파시카는 야사와 수행자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도 마음만은 매일 움막에 찾아가 붓다의 설법도 듣고 아들의 건강한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건뎠다.
  야사는 어릴 적부터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배웠던 까닭에 붓다의 설법을 잘 소화해 냈다. 붓다는 그런 야사의 모습을 흡족하게 여겼다. 야사는 출가한 지 열흘 만에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스로의 생활을 바로잡고 집착에서 떠난 야사의 마음은 아름다웠으며 마음의 문을 여는 기회가 의외로 빨리 왔다. 자신의 사명과 자각에 눈뜬 야사의 마음은 다른 다섯 명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사로몬이 되었다.

 

 


  
  <너희들의 신앙은 바람과 같구나>


  야사는 다섯 아라한들과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붓다는 제자들과 앞으로의 전도 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나는 가까운 시일 안에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로 떠난다. 야사는 바라나시에서 붓다 스트라(깨달음에의 길)를 펴 제자들을 모으도록 하여라. 코스타니야와 너희들은 떠돌아다니면서 나의 가르침을 설법해야 하므로 우기(雨期)에 더욱 자신의 마음을 닦아 깨달음을 확고하게 만들어라."
  "네, 알겠습니다."
  코스타니야가 일동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야사는 마을 친구들에게 인생의 무상과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설법하면서 라자그리하까지 가겠다고 붓다에게 약속하였다.
  일년 중에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시기가 지나가고 포교를 널리 알리는 시기가 되었다. 그 무렵에 붓다의 설법을 들어 교인이 된 자는 거의 80명에 이르렀다. 야사의 사건 이후 사람들이 붓다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과 붓다의 적극적인 정법 포교가 자세를 확장시시켰다.
  붓다가 지시한 때가 되자 여섯 명의 아라한들은 계획대로 각기 제자들을 이끌고 미가다야를 떠났다. 그들의 정법을 알리고 다니자 불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정법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겐 관대한 것이 특징이다.
  관대한 마음은 본디 사랑하는 마음이며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용서하는 하늘처럼 넓은 마음이다. 붓다로 인대 귀의한 사람 중에는 그 관대한 마음을 기회로 삼아 나쁜 짓을 벌이는 사람도 있었다.
  붓다가 제자로 받아들이는 조건에는 여러 가지 관문이 있었다.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와도 한 달 동안은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이 진실로 굳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또 마음과 몸의 균형이 맞지 않는 자도 해당되지 않았다. 붓다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는 말법으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자각과 의무와 책임감에 불타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결심한 자라도 연약한 자들은 붓다의 제자로서 견디기 힘들었다. 붓다의 제자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게으르지 않고 늘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고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붓다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우선 일 주일 도앙ㄴ 산중에서 자신의 지나간 인생을 반성하고 마음이 맑고 풍부해진 자만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에게 후광이 비치면, '붓다에 귀의하는가,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는가. 승단에 귀의하는가, 이 세 가지 서약을 받고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세 가지 서약을 요약하면 불(佛),법(法), 승(僧)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데 있다. 그것은, 붓다와 정법을 믿고 붓다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는 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수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았으며, 믿는 자, 따라오는 자는 차별 없이 받아들었다. 그 대신 입문한 자에 대한 교육은 엄격했다. 제자들이 탄 배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혀 바다에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예수가 나타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의 신앙은 바람과 같구나.'라고 훈계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마음을 깨닫고 자신의 얕은 신앙과 연약한 마음을 부끄러워했다. 그 외에도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을 지적하여 '너는 왜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하고 엄하게 추궁하기도 했다.
  붓다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른 모습이다. 붓다는 자신의 제자를 받아들일 때는 엄격하나 입문한 뒤에은 제자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일일이 지적하거나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법을 아은 것은 본인의 책임이며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불, 법, 승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서약을, 붓다는 라자그리하에 도착하는 즉시 제자들에게 지시할 계획이었다. 지금까지의 제자 80명에게는 서약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교화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설법할 기회가 많아질수록 제자들은 늘어날 것이며 정직한 교단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의 서약은 필수 조건이라고 붓다는 생각했다.
  붓다가 라자그라하로 간 것은 우루벨라 캇사파의 배화교(拜火敎)를 설득시키기 위해서였다. 붓다 일행은 바라나시에서 잠시 설법을 한 뒤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강가강의 둑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우기가 지난 뒤라 대지는 푸르름으로 뒤덮이고 태양의 열기도 따가웠다. 가뭄에는 대지가 건조해서 유행하기 힘들지만 우기가 지난 뒤라 대지는 촉촉하게 젖었고 공기도 맑아 한낮의 햇볕도 견딜 수 있었다.
  사로몬의 일단의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바라나시는 상공업의 중심지인 동시에 바라문 계급이 많이 사는 도시였다. 마하 바라문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수행이나 제사를 지내면서 매일 부준한 나날을 보냈다. 야사는 마하 바라문인 바바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야사는 바바리의 집을 방문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설법했다.
  수년이 지난 후에 붓다가 마가다국의 그리드락터에서 생활 할 때 바바리의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유학을 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붓다의 일행은 야사를 선발대로 삼고 바라나시의 교외 산길을 거닐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파다리가마에 이르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들은 행군 도중에 참선을 하기 위해 나무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 붓다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명상중인 붓다에게 말했다.
  "수행자님, 이 근처에서 한 여인을 못 보셨습니까? 틀림없이 이 쪽으로 왔는데, 안 보이네요. 그 여자를 봤다면 알려주십시오."
  붓다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대들은 그 여자를 추적하여 무슨 기쁨을 얻는가. 나는 그대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바라나시에서 떠돌아다니던 여자를 데리고 이 산중에 놀러왔다. 평소에 함께 놀던 여자와는 달리 그녀는 물건을 훔치고 도망쳤다. 그런 가엾고 형편없는 여자를 찾아낸들 무슨 위안이 되러 것이며 그대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겠는가 잘 생각해 보아라."
  붓다의 말이 끝나자 사내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은 처음과 달라졌다. 붓다 앞에 무릎을 끎고 엎드렸다. 자신들으 마음을 들여다보고 하나하나 지적하는 붓다 앞에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란 대개 좋은 면은 보이고 싶고 나쁜 면은 숨기려 한다. 자기의 입장만을 생각하려 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거짓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바라문 교전을 공부하고 있었다. 슈바라의 경지에 이르면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 과거 등을 모두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사람이 슈바라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행방을 하필이면 슈바라에게 물었던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느꼈다.
  그들의 가정은 모두 유복했으며 젊음을 즐기는 한량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붓다의 말은 깨달음을 주었다. 청년 가운데에는 어리석은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그 자리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결심한 자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바라나시의 수행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자아와 집착이 강한 그들은 붓다의 교화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몇 년 후에 야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바라나시에서 붓다가 가르쳐준 깨달음의 길에 이르기 위해 전념한다. 이미 마을마다 붓다의 위대한 능력이 널리 퍼져 있어서 한 번만이라도 그의 설법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야사의 설법은 진솔하게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야사는 미남인데다 말하는 솜씨도 뛰어났다. 붓다에게 귀의한 자들 중에는 비구니들도 많았는데 야사는 그 비구니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비구니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것을 깨달은 야사는 얼굴에 흙을 바르고 다니기도 했다. 근 붓다의 여섯 번째 아라한답게 항상 긍지를 가지고 생활했다. 결코 눈을 밖으로 돌려 마음을 파는 일이 없었다. 마음의 눈을 밖으로 돌리면 욕망, 지위, 명예 등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가도 한번 유혹에 빠지면 가속도가 붙어 급속히 빠져든다.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배의 고통을 겪어야만 수행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야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일체의 유혹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구니들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야사는 발가락의 때만큼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붓다는바라나시의 산에서 교화된 청년들과 야사의 친구들을 데리고 파라리가마에 도착했다. 처음 다섯 크샤트리아를 찾아 우루벨라를 떠났을 때처럼 불안한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으며 용기와 자신감으로 넘쳤다.
  그는 파다리가마에 도착하자마자 설법을 시작했다. 지나가던 수행자들도 걸음을 멈추고 설법에 귀를 기울였으며 사람들은 날로 늘어났다.
  바라나시를 떠난 지 두 달 쯤 되었을 때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날란다 마을에 도착했다. 정오의 태양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우기가 지나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길은 불에 달군 양철처럼 뜨거웠다.
  일해은 묵묵히 길을 걸었다. 라자그리하성의 북문으로 통하는 산길을 내려가 성문에 다다른 것은 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 무렵이었다.
  붓다는 라자그리하에 도착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곳은 카필라성을 떠나 처음으로 머물렀던 수행장이 있는 곳이었다. 반다바의 수행장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산은 푸른 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에 익은 수목들도 7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섯 크샤트리아들과 같이 수행했던 동굴도 변함이 없었다.
  타다 남은 참나무 가지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동굴 속에 앉아 있으니 붓다는 옛날의 자신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7년의 세월은 긴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꿈결처럼 짧게 느껴졌다. 젙은 솔가지에 불을 붙였다. 송진이 붙어 있는 탓인지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불길을 보고 있으니, 언제 깨달믕의 경지에 이를지 모른다는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앞서 불덩이를 집어서 암벽에 던졌던 7년 전 자신이 모습이 보였다.
  붓다는 나뭇가지를, 예전을 떠올리며 바라보았다. 부러진 나뭇가지도 붓다를 바라보았다. 붓다는 그것을 가만히 집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신이 무엇이며 깨달음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신이나 깨달음은 현실의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공중을 날아다녀 도저히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으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우주즉아(우주즉아)를 경험하고 보니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 가운데에 있으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 생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착각이 컸던 만큼 깨달음을 얻은 기쁨도 컸다.
  붓다는 반다바의 수행장에서 앞으로의 교화 활동에 대해서 제자들과 의논했다. 여섯 명의 아라한들은 붓다가 계획한 일정에 따라 순회 법회를 열고, 반성의 명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생활했다. 붓다는 혼자 우르벨라의 숲으로 가서 앞으로 찾아올 제자들에 대한 브라흐만의 지시를 받았다.
  한 번은 붓다가 반다바산(山)의 동굴 속에서 밤이 깊도록 명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제자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지 오래였다. 붓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브라흐만은 언제나 길을 가르쳐주는 아몬이었다. 아몬은 조용히 서 있었다.
  "붓다여, 법을 잘 이해하여 여기까지 잘 정진해 주었습니다. 지금의 마음,처음 시작하는 마음을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바라문교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각별하게 지도하십시오. 가야 다나에는 붓다의 제자가 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가야 다나로 향하십시오."
  붓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브라흐만이 대변해 주었다.
  "아몬님, 언제나 저를 인도해 주시고,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의 마으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붓다의 말이 끝나자 아몬의 모습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브라흐만의 모습은 언제나 숭고했다. 말은 엄격하지만 언제나 자비와 사랑에 넘치는 태도로 붓다의 앞길를 밝혀주었다. 의문이 생기면 바로 해답을 내려주고 미로에 빠지면 손을 내밀어주었다. 붓다는 절로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 병을 고치다 >


  다음 날 아침 붓다는 모든 제자들을 동굴 앞에 모은 후 설법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제 우루벨라로 떠날 것이다. 얼마 동안 여러분과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바라문 계급의 사로몬, 사마나들이 까다로운 논쟁을 걸어올 것이다. 절대로 그들의 논쟁에 말려 들지 말아라. 상대방의 감정을 돋우면 말하는 사람도 또한 마음에 풍파가 일어나 상대를 굴복시키고 싶어진다.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평안한 마음을 해치는 짓이 된다. 절대로 그대들이 논쟁을 걸어서도 안 되고, 상대방의 논쟁에도 걸려 넘어지지 말아라.
  어떤 말을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짧은 논쟁으로 인해 마음 속에 앙금을 남겨서는 더욱 안 된다. 앙금은 마음 속에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노여움을 일으켜 괴롭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겨운 일을 보고 듣더라도 마음 속에 악의 씨를 뿌리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것만 마음에 새기고 자신의 수행에 힘써라. 거목은 결코 바람과 맞서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 살아가므로 넘어지지 않는다.
  중도의 마음은 거목처럼 자연에 거역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있다. 우리는 이에 보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있다. 그들을 위해 앞장서서 그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내가 우루벨라로 떠나 있는 동안에도 너희들은 수행을 쉬지 말고 건강과 마음을 지키도록 하여라."
  80여 명의 제자들은 붓다의 설법에 감동하여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코스타니야는 붓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걱정되었다.
  "붓다님, 이번 여행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혼자 떠났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부디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고맙지만, 너희들은 새로 입문한 제자들을 지도하고 보살펴야 한다. 너희에겐 그 딜이 더 중요하다. 머지않아 전생에서 함께 정도를 설법했던 사도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때까지 너희들은 현 세계의 선배로서 노력을 다해 그들을 인도해 주어라."
  "네,알겠습니다."
  붓다의 말에 선뜻 대답을 했지만 코스타니야는 전생에서 함께 정도를 설법했다는 사람이 올 거라는 말을 듣고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라한들에게 주의 사항을 모두 일러준 붓다는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여행에 필요한 탁발용 바리때와 물, 약초 분말, 독사나 독 있는 벌레에 물렸을 때 바르는 지렁이 즙액, 음식을 요리할 조그마한 질그릇 등을 챙겼다. 이것들을 한데 묶어서 어깨자 매자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제자들은 라자그리하의 남문까지 붓다를 배웅했다.
  붓다는 남문에 이르러 한 가닥 감회에 사로잡혔다. 바로 수개월 전만 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낱 수행자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을 마중하고 배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의 스승이 되고 보니 붓다는 새삼 자신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흐리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의 마음은 늘 맑게 갠 하늘처럼 넓고 훤할 뿐이었다.
  붓다는 자신의 옷을 흞어보며 산중에서 산적을 만나더락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이 될 물건이라곤 한 조각도 없으니 도적들은 쳐다보기조차 안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 편안한 자유 때문에 '거지 맛을 사흘만 보면 그만 둘 수 없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제자들과 헤어진 지 닷새째 되는 날 붓다는 산과 강, 마을을 지나 우루벨라에 도착했다. 닷새 동안의 여행은 그야말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그는 중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 설법의 요령, 앞으로의 계획들을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붓다는 낯익은 보리수 거목을 등지고 앉아 수개월 전의 수도 생활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얼마 동안 거기 체류하면서 가야 다나의 생활을 살펴보기도 작정했다.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한때의 친구처럼 지내던 동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9개월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동물들고 저마다 성장하여 주거지를 옮겼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새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문득 궁금해진 붓다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공교롭게도 하얀 새똥이 붓다의 얼굴에 떨어졌다. 아차 싶었지만 붓다는 이내 친한 친구라도 만난 기분이 들어 기쁨이 복받쳐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 모닥불의 흔적도, 모아두었던 나뭇가지들도, 보리수 거목 뒤에 구덩이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붓다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노숙 준비를 했다. 여행 도중에 보시받은 망고와 사과, 쌀 등은 나흘이나 닷새 정도는 거뜬히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지참물들을 모두 정리한 붓다는 숲가에 흐르고 있는 네란자라강으로 내려가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몸을 씻었다. 마음의 짐을 벗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상에 잠겼을 때 벗이 되어준 새끼사슴이 모습이 떠올라 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새끼사슴은 곧잘 수행중의 붓다에게 다가와 코를 벌름거리며 먹이를 졸라댔다. 붓다가 잠들어 있으면 옆에 앉아 붓다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도 한 귀여운 녀석이었다.
  붓다는 9개월 동안이나 헤어져 지냈으니 그동안 행여 사냥꾼들에게 붙잡히진 않았을까, 하이에나 같은 짐승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숲을 거닐며 사슴 소리를 흉내내 보았다. 여러 번 큰 소리로 불렀지만 새끼 사슴은 며칠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숲 속까지 뒤져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붓다는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나뭇잎 사이로 얼굴을 보여달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끝내 새끼사슴은 볼 수 없었다.
  동물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언제 자기보다 강한 자의 습격을 받을지 모를 일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종족을 보존한다. 어미는 새끼를 낳으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기르는 데 힘을 바친다. 새끼사슴은 잡아먹혔을까 살아 있을까? 붓다는 새끼사슴이 건강하게 살아 있기를 빌었다.
  붓다가 우루벨라에 도착하여 네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그는 탁발해 온 식량이 다 떨어지자 세자니 마을로 내려갔다.
  붓다와 알음이 있던 마을 사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오랫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으시긱에 어디 먼 곳으로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오."
  그는 붓다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집 안으로 모셨다.
  붓다는 인정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탁발을 하러 마을에 내려올 뿐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붓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처음 그들에게 붓다는 단지 수행승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종 얼굴을 마주쳐 친근하게 마음 속에 정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붓다가 새끼사슴의 행방을 걱정했던 마음과도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사람과 자연, 이섣들이 서로 수놓는 마음은 모든 생명의 마음에 깊숙이 자라고 있는 자연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인정이 넘치는 마을 사람의 인산에 붓다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피었다. 붓다는 방의 가장자리에 앓아 누워 있는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얹엇다. 그러자 노인의 몸에 번져 있던 병이 금세 물러나고 굳은 허리와 다리가 펴지면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붓다에게 합장했다. 집 안 사람들은 그 모습에 놀라 붓다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사했다. 그들은 쌀과 야채를 붓다의 바리때에 넣어주고 보리수가 있는 곳까지 들어다주었다.
  "고타마님, 모래부터 가야 다나에서 축제가 있는데 같이 가시겠습닉까?"
  예전이 고타마와 외모는 변함이 없지만 내면이 달라진 것을 마을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붓다는 그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틈을 내어 가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붓다가 우루벨라에 다시 돌아온 목적은 가야 다나에서 벌어지는 축제에서 우루벨라 캇사파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저희들도 해마다 그 축제에 참가하고 있습죠. 다른 나라의 수행자들도 많이 온답니다. 구난다 캇사파님도 축제 때가 되면 저희 집에 들르신답니다. 그분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고타마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사례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틈이 나면 집에 찾아가겠습니다."
  "천만에요. 환자를 고쳐주셨는데,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이런 일은 언제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농부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는 바로 9개월 전 붓다가 대각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해주었던 노래를 부른 추다다의 소작인이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한 인연이 생기면 거기서 가지를 뻗은 또 다른 인연이 생긴다. 그 실타래는 현실 세계의 오관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실재계에서는 만나게 된다. 세상은 넓지만 좁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끼리 바둑판이 줄 모양 어디에선가 서로 만나도록 틀이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돌아간 뒤 붓다는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를 걱정했다. 만일 비라도 오면 축제가 연기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붓다는 될 수 있으면 날씨가 축제를 망치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붓다는 내일 밤 우르벨라 캇사파의 숙소에서 잠을 자고 모래 축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우루벨라 캇사파에 대해서는 7년 전에 라자르하성에서 빈비사라왕으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한 번쯤은 만나고 싶다 생각했지만 기회가 나지 않았다. 붓다는 오랜 동안 간직하고만 있던 작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기쁨에서인지 마음이 들뜨고, 흥분되었다.
  그를 만나면 우선 이런 점을 지적하고, 대화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개하리라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브라흐만의 말대로 우루베랄 캇사파가 전생에서 과연 붓다의 제자였는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있었다.
  붓다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마음을 진정시켜 곰곰히 생각했다. 결국 그와 만나서 결론을 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붓다는 여느 때와는 달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나처럼 붓다는 지저귀는 새 소리에 잠을 깼다. 싱그러운 아침 공긱를 아랫배 가득히 채우고 나서는 짐을 챙겨 가야다나로 서둘러 떠났다.
  붓다가 산 아래에 닿으니 캇사파의 형제들이 제사 도구들을 산 위로 나르고 있었다. 붓다는 게곡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중턱까지 올라서서 밑을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네란자라강이 아침 햇살에 은비늘을 반짝이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붓다는 눈 아래 전개되는 황홀한 경치에 빠져들어갔다. 자연의 품에 안기니 신의 위대한 자비와 사랑이 몸 속까지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갑자기 가파라졌다. 커다란 돌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어 길이 끊기기도 했다. 붓다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지팡이로 짚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숨을 헐떡이며 올라갔다. 먼지로 더럽혀진 옷은 땀에 젖어 물걸레처럼 되었다. 붓다는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산정에 오르니 이웃 나라 수행자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명상에 잠겨 있는 자, 물구나무서기로 긴 시간을 견디고 있는 자, 타오르는 불 길에 팔뚝을 태우고 있는 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곳은 마치 도술사의 집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저런 수행이 육체를 단련하기 위한 것이라면 모르되 깨달음을 위한 것이라니 죄다 헛일이었다. 붓다는 육체 고행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들에게 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묵묵히 그들 앞을 지나갔다.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다. 평지의 중앙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제단 가까이에 앉아 있는 한 젊은 수행자가 늙은 수행자에게 말했다.
  "불의 축제는 질병과 마귀를 쫓는 행사입니다. 이 축제는 영험이 뛰어나므로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우리도 불의 신을 모시고 질병과 재난의 마귀들을 쫓아내어 사람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젊은 수행자는 제법 설법조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의 말에 늙은 수행자는 맞장구를 쳤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 대답 같았다.
  "그렇군요."
  젊은 수행자는 이곳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듯싶었다. 늙은 수행자는 견학하러 축제에 처음으로 온 바라문 출신의 수해자처럼 보였다.
  붓다는 네란자라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에 흠뼉 젖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을 손바닥 위에 얹어놓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올바른 판단도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펴본다면 더욱 정확해질 것이다. 마음의 상태는 크고 높은 곳을 발판으로 삼아야 하며 그러면 사람들의 습관적 생활의 잘못도 똑똑하게 알 수 있게 되리라.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높은 차원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법에 의지하고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극복하는 길밖에 없다. 붓다는 '높은 곳에서 보면 시야가 넓어져 무엇이든지 잘 볼 수 있으며 마음이 넓어지면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 구렁이 동굴 >


  붓다는 우루벨라 캇사파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회소에 가서 키가 작고 빼빼 마른 수행자를 붙들고 하룻밤 묵고 갈 것을 청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내일 라자그리하 마을에서 열릴 축제를 구경하러 온 수행자입니다. 여기서 하룻밤 묵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그만 사나이는 초면인 붓다를 요모조모 살펴본 다음,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본부라고 여겨지는 움막으로 들어갔다.
  집회소 주위에는 많은 제자들이 분주히 오가면서 일을 하고 있다. 제단을 세우는 자, 재물을 그릇에 담는 자, 모닥불 준비를 하는 자들이 붓다 앞을 분주히 오가고 있다. 붓다는 그들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비켜 선 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캇사파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붓다는 시치미을 떼고 시선을 거두었다.  마른 사나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후에 붓다 앞에 나타난 사나이는 마른 사나이가 아닌 어깨가 딱 벌어지고 눈매가 날카로운 커다란 사나이었다.
  "당신이오?"
  깔아뭉갤 듯한 말투를 내뱉으며 무례하게 붓다를 위아래로 흝어보았다.
  "지금 바빠서 숙박을 운운할 경황이 없습니다. 신도도 아닌 것 같고, 어디서 온 수행자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신도들과 수도승들의 숙사가 채워졌소. 빈 자리가 없으니 어디 근처에서 노숙이라도 하시오."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다.
  큰 사나이의 말대로 붓다는 이곳 신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한낱 수행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옷은 땀과 먼지로 얼룩졌으며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이었다. 그들 눈에는 그야말로 거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의 잠자리까지 신경을 쓸 마음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수행자임에는 틀림어 없지만 붓다의 본체를 꿰뚫어볼 만한 안목은 없었다.
  붓다의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으며 오히려 작은 편이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키가 컸으며 남자는 170센티미터에서 2미터에 가까웠고, 여자는 155센티미터에서 170센티미터 정도였다. 붓다도 고타마 싯다르타 시절에는 체격이 좋았다. 식욕도 왕성했으며 힘도 쎘다. 힘을 겨루는 씨름 따위를 할 때 상대가 아무리 큰 사나이라도 호락호락 넘어지지는 않았다.
  출가 후 6년 동안 고타마는 육체 고행과 수행으로 몸은 망가지고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9개월이 지난 지금은 무엇이든지 잘 먹고 체력의 회복을 위해 신경을 쓰니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카필라 시절의 단단한 몸으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더욱이 붓다는 과거의 활동적인 기품에서 정적인 인품으로 완전히 변했다. 사물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침착성과 자애심이 곁들여 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자라면 붓다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덩치가 큰 사나이는 키가 작고 초라한 행색을 한 붓다를 보고 아에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다.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무리를 해서라도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붓다는 허리를 굽혀 다시 부탁했다. 큰 사나이는 일단 붓다의 청을 다시 받아들여 본부를 다녀왔으나 대답은 전과 다름 없었다.  붓다는 본부 움막에 가서 우루벨라 캇사파를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안으로 들어간 그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광장의 중앙에 설치한 제단이 겨우 제 모양을 갖추었다. 제단 뒤에은 불을 붙일 나무를 보기 좋게 높이 쌓아올렸다. 제단 앞에는 우루벨라 캇사파가 기도를 올릴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들에게 불은 신을 상징했다.
  태양도 불덩어리이며,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 입자(粒子)는 열입자이 조건에 의해서 여러 가지의 물질을 만들고 있다. 불이 없으면 물질 세계는 형성될 수 없으며 불은 에너지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불을 매체로 한 신앙이 당시의 인도에서는 매우 성행하였으며 서아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또한 배화교(拜火敎)의 일종이다.
  오늘날의 일본에서도 불을 피우는 행사가 많다. 불에는 조명, 마중불, 배웅불, 정화불, 영력을 강화하는 불 등이 있어서 신령 행사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불은 만물을 살려 창조하는 생명의 등불이라고 할 수 있느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신을 상징한다고 받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열도 에너지도 한갓 형상에 지나지 않으며 열에너지만으로 물질은 성립하지 않는다. 온갖 에너지가 존재해서 서로 모이거나 분산을 되풀이해야 열에너지의 존재가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열입자를 비롯한 우주에 가득 찬 에너지, 그 에너지를 영원히 살리고 있는 위대한 의식, 위대한 뜻이 중요한 것이다.
  태양은 만물을 살리는 근원임에 틀림없지만 태양 속에 숨어 있는 신의 의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칫 물질에 사로잡힌다. 불은 열을 낳고 빛을 낳으며 바람을 일으키고 물질을 변화시킨다. 불은 신의 다른 모습이라는 사고 방식이 어느새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캇사파의 신앙은 불의 축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불을 악마을 쫓는 신이라고 민고 있는데 캇사파의 많은 기적이 일어나 신도들이 많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기적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다.
  교조라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과거 중 한두 가지 일을 지적당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잘못을 빌고 무릎을 굽힌다. 그때 사람의 마음은 투명하고 맑아진다. 질병이나 재난의 대부분은 마음의 구름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그 구름이 걷히면 질병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본인과 가족들은 오랫동안 앓던 병이 일시에 나았기 때문에 교조의 능력에 감격하여 맹렬한 신앙을 가지고 그에게 빠져든다.
  이런 유형은 교조의 신통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병을 고친 것이다. 그런 진상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교조를 떠받든다. 교조 자신도 어떻게 해서 병이 나았는지 그 진상을 모른다. 자신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만심에 빠질 분이다.
  기적이 두 번째 유형은 교조의 배후에 동물령이나 마왕이 붙어 있는 경우이다.
교조의 주위에서 살고 있는 악령은 오래 묵은 큰 것이 많다. 대부분의 환자에겐 악령이 붙어 있는데 교조의 악령보다는 작은 것들이다. 이런 사실을 교조나 환자는 알리가 없다.
  교조는 가끔 자신의 등 뒤에 능력이 뛰어난 신령이 있다는 속삭임을 받기도 하고, 신이라고 자칭한 영혼을 보지만 그 정체를 확실하게 모른다. 그러나 교조는 뒤에 숨어 있는 동물령이나 마왕은 여러 가지 일을 적중시키기 때문에 교조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환자가 나나타면 교조 뒤에 숨어 있는 악령이 환자의 악령을 내려다본다. 자기보다 급수가 낮은 상대라면 그 악령에게 잠깐 환자에게서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 환자의 몸에서 잠시 떨어져 돌아다닌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악령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병을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난 셈이 되는 것이다. 악령의 세계는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며 힘이 약한 자는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다. 동물의 세계와 같다.
  이런 기적으로 인해 새로운 종교가 탄생해서 성황을 이루게 된다. 질병이나 재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병을 고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다. 육체적인 병은 의사나 본인이 요법으로 낫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빙의령은 기적적으로 환자의 병을 낳게 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환자의 마음에 신리의 법등을 밝혀준다. 마왕이나 동물령에게는 신리를 설법한 능력이 없다. 따라서 그들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또한 교조의 가르침이 일관성이 있게 진행되는가, 성격이 변덕스러운가. 모습이 사치스러운가를 살펴보면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있다. 천사는 화를 내거나 사치스러운 치장을 하지 않는다. 착한 영혼은 악령을 훈계하기도 하며 본인에게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가르쳐 괴로움이 원인을 찾아내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지도해 주기도 한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많은 교조 중에서 실력자로서 그 영적인 능력과 인격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을 예배하는 신앙만은 잘못된 것이다.


  붓다는 캇사파를 직접 만나 하룻밤 묵고 갈 것을 부탁하려 기다렸지만, 캇사파는 움막 밖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하늘에 걸린 불덩어리 같은 태양도 어느새 서쪽으로 잠겨 있었다.
  해가 지자 차가운 바람이 붓다의 몸을 파고 들었다.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놓고 수행자들이 둘러않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자랑으로 이야기를 일관하는 자, 교조를 칭찬하는 자, 마을에서 일어난 온갖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그들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움막 밖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붓다는, 캇사파가 어떤 사나이를 데리로 나타났으므로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붓다는 아침 나절에 캇사파를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단단한 체격과 온화한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붓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캇사파를 불러 세웠다.
  "저는 라자그리하의 반다바에서 수행을 하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입니다만 오늘 밤 여기서 묵고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붓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회답을 기다렸다. 우루벨라 캇사파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다. 캇사파도 이미 카필라성의 왕자인 고타마 싯다르타의 소문을 빈비사라왕으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슈바라가 된 사실도 마을 사람들을 통해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마음에는 본능적으로 적개심이 꿈틀거렸다.
  '이런, 어려운 손님이 찾아왔군.'
  캇사파의 마음이 흔들렸다.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움막 속을 다시 들어가 버렸다.
  "저쪽에서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오. 수행자들과 의논을 할테니~~~"
  붓다는 우루벨라 캇사파의 당황해 하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간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퉁명스런 말투로 붓다에게 일러주었다.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마침 제사 도구를 보관해 두는 동굴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그곳에서 주무시도록 하시오."
  남자의 말에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붓다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처음 당하는 일이라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남자는 붓다를 동굴 입구까지 안내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동굴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캄캄한 어둥미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붓다는 산정에서 불씨를 얻어와 동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치켜들고 동굴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짐승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짐작했던 대로 그곳에는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붓다를 일부러 동굴로 안내한 것이다. 무작정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구렁이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동굴 밖에서 잘 수도 없었으므로 붓다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치켜들고 다시 한 번 동굴을 살폈다. 구렁이는 동굴 가장자리에 있는 고목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았다. 구렁이는 몸통이 직경이 17~18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사람 한 명쯤은 한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붓다는 마음을 가라앉혀 구렁이의 의식에서 적개시믈 버리도록 설득한 후, 동굴 입구에 지펴둔 모닥불 옆에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동굴의 흙은 부드러웠으므로 나뭇가지로도 쉽게 파졌다. 몸이 일부만 오목하게 눕힐 수 있을 정도만 땅을 파도 충분한 잠자리가 완성된다.
  큰 구렁이는 붓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붓다는 오목하게 파진 잠자리에 풀을 깔고 발치에은 커다란 숯불덩어리를 세 군데 두고 잠을 청했다. 구렁이는 독사는 아니지만 고약한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붓다는 꾹 참으며 새벽이 올 때까지 잠을 청했다.
  구렁이는 간밤의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디 않은 것 같았다. 붓다가 일어나도 똬리를 풀지 않았다. 구렁이는 고개를 파묻고 눈만 붓다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처럼 고개를 높이 쳐들지도 않았다. 붓다의 발치에 있던 숲불은 이미 사그라져 검게 변해 있었다.
  붓다가 동굴 밖으로 나오니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반짝이던 별빛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안개가 산기슭에서 강물 위로 번져 흘렀고 사방으로 뽀족하게 늘어선 산들은 구름바다 위에 지어진 궁전 같았다. 안개는 느릿느릿 흘러가고 산도 의젓한 모습을 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서 있느니 현실과 천국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국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현실이구나. 저 세상, 이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세상의 차이는 마음 두기에 달렸지 않은가.'
  마음이 시끄러우면 아름더운 산과 물, 자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이 안정되고 조화를 이루면 현실을 움직이고 있는 배경도 이해할 수 있고 현상계와 실재계에 연결된 끈도 볼 수 있게 되리라. 붓다는 동굴 앞에 서서 천상게에서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흙을 털고 동굴을 떠나 산정의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이른 시간부터 마을 사람들이 공양물을 가지고 모여들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온갖 재물들이 차려져 있었다. 캇사파의 몇몇 제자들은 제단 둘레에 멍석을 깔고 있었고, 몇몇 수행자들은 제단 둘레에 멍석을 깔고 있었고, 몇몇 수행자는 벌써 제단 앞에 끓어앉아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붓다는 동굴 반대편에 있는 인적이 없는 연못가로 내려가 명상에 들어갔다.
  마음이 조화롭게 되자 붓다의 의식은 점점 확대되어 가댜 다나와 자신의 육체가 아득히 멀어져 작게 보였다. 가야 다나와 붓다의 육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신이 대우주의 마음과 조화되어 커진 것이다. 후광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빛은 마음의 조화도에 비례한다.
  붓다는 물질의 육체와 확대되어 가는 의식이 자신을 찬찬히 비교해 보면서, 육체에 매달린 집착이 어리석음과 가엾음을 확인했다. 그는 집착이나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조그마한 인간의 모습을 다시금 새롭게 보았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을 가지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선과 악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든 각자의 자유 의사에 달려 있다. 생명을 소중히 하고 싶으면 선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쉬운 쪽을 택하고 어려운 일을 멀리하기 일쑤다. 육체를 지니면 육체가 느끼는 쾌락과 불쾌감이 마음으로 전달되어 인간을 조그맣게 만들어버린다. 인간의 운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산정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성대한 행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산길도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 우루벨라 캇사파의 귀의>


  붓다는 명상을 풀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몸 속 구석구석을 돌며 활력을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축체가 벌어지는 산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길은 예상햇던 것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산정에 도착하니 제단 앞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는 불에 타고 있었고, 그 불길은 서서히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불을 둘러싸고 맨 앞줄에는 우루벨라 캇사파의 제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마을 사람들이 무릎을 끓고 앉아 불의 신인 아그니(Agni)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수행자들은 나발이라는 상투를 머리에 감아올려, 하나같이 가혹한 육체 고행을 쌓아온 늙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마왕의 눈 같은 살기가 느껴졌는데, 장작더미의 불길은 작은 움직임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의식은 바라문교의 경전인 <베다>에 기록되어 있는데, 신성한 불을 피워 아그니라는 불의 신을 받들기 위함이었다. 신도들은 대부분 마가다국 사람들과 동쪽의 이웃 나라인 앙가국 사람들이었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자신을 슈바라라라고 칭했으며, 신도들도 모두 그렇게 믿고 따랐다.
  그들의 수행 방법인 육체 고행은 도저히 인간이 하는 짓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스러운 것이었다. 겨울이 시간이 되면 히말라야 가까운 산으로 들어가서 얼음 속에 몇 시간이고 몸을 담그기도 하고 반대로 활활 타오르는 불가에 알몸을 대어 피부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견디기도 한다. 불사신이라고 할 만했다. 육체 고행은 그들의 필수 과목이었으며 많은 신도들은 초인적인 그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행사는 무르익어 이윽고 기도의 대합창이 가야 다나에 울려퍼졌다. 낭랑하게 산야를 울리며 퍼지는 기도 소리는 인간을 환상의 세게로 끌고 가는 듯했다. 리듬은 단조로왔지만 그 항창 소리와 선율에 예민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 합창 소리를 들으며 온갖 잡념을 버리고 선율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장사꾼들은 축제 행사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장소를 골라잡고 전을 벌이고 있었다. 보자기나 자리를 깔아놓고 그 위에 과일과 야채, 옷가지를 진열해 놓았다. 붓다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물거르개를 보며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작은 루비 한 개를 지불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뱀장수는 코브라를 가지고 온갖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꼬쟁이와 대나무 피리로써 코브라를 마음대로 부렸다. 코브라는 그가 시키는 대로 전후 좌우로 몸을 꿈틀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독사답지 않게 애교가 넘쳐흘렀다. 뱀장수의 애정이 포악한 독사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애정 앞에서는 어떠한 동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파충류를 보면 여느 동물과는 달리 혐오감을 갖는다. 조그마한 뱀 한 마리만 보아도 얼굴을 찡그린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파충류에게 심하게 시달려온 전생이 있기 때문이다. 파충류는 인류보다도 약 5억 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았다. 최초에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지만 점점 그 몸집이 커져서 파충류 전성 시대에은 사람의 두 세 배 되는 동물까지도 한 입에 삼키는 거대한 놈까지 있었다.
  뱀에 대한 인류의 수난 경험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조그마한 것 한 마리만 보아도 전생의 악몽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신이 만들어낸 생명이다. 분별 없는 공격의 본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조금씩 변하듯이 그들도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뱀은 오래 전부터 악을 상징했다. 그는 음습한 곳을 좋아하고 먹이에 슬그머니 접근하여 덮친다. 그 긴 몸으로 먹이를 징징 감고 숨통을 죈다. 한번 물면 죽어도 놓치지 않는 집요함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벰에게서는 도무지 장점을 찾아낼 수 없다. 그 잔인함과 집념은 악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인간이 악에 오염되면 뱀처럼 된다고 말도 뱀의 성질을 꼬집은 것이다. 이토록 인류는 뱀에 시달려왔고 그들을 멀리했다.
  산정의 대합창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불의 신을 참배하려는 마을 사람들이 줄을 이어 몰려들고 있었다. 참배가 끝난 사람들은 주변에 늘어선 노점상으로 몰려가 시끄러운 시장을 이르고 있었다.
  붓다는 그 인파 속에 묻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준비해 온 물품을 서로 교환했다. 닭과 옷을 교환하고 과일과 쌀을 교환했다. 닭과 옷의 교환, 망고와 계란, 쌀과 그릇을 교환하는 상거래였다.
  당시에는 화페가 없어서 모든 생활용품을 물물 교환해야 했다. 교환을 해야 필요한 물건을 차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환품에 가격을 높이 책정한다. 한쪽에서 터무니없이 가격을 책정하면 다른 한쪽은 기를 쓰고 가격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여도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삼자가 개입하여 자신의 지참품을 들어 보이면서 흥정을 붙인다. 사람들은 서로 물건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 언성을 높이고, 과장된 몸짓으로 바뀐다. 축제의 한 구석을 차지했던 장터는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한 싸움터로 변한다.
  이렇게 되면 대합창은 상거래의 소음 속에 묻혀버려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행사를 진행하는 측에서는 이 점을 미리 생각하여 산정이 인파로 뒤덮힐 무렵이면 막을 내린다.
  마을 사람들의 신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에 감은 터번의 천이 비단인가 무명인가에 따라서도 알아볼 수 있으며 몸의 장식품을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수드라(노예)는 터번을 감지 않는다. 탐나는 물건이 있어도 주인인 크샤트라아(무사)나 바이샤(상공업자)의 옆에 가만히 참고 서 있어야 한다. 그들에겐 그런 행동이 당연한 것이며 생활인 것이다. 마음 속으로 모순과 불공평한 현실에 때때로 반항심이 불끈거리기도 하지만 그들은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만약 반항을 하다 주인에게 맞아죽어도 호소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아무런 표정 없이 덤덤하게 주인의 그림자를 지키고 있는 노예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들에게도 평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무렵 우루벨라 캇사파는 대제의 기도를 마치고 제자 한 사람에게 동굴의 상황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는 간밤에 붓다가 구렁이으 밥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굴 안의 구렁이는 갓사파가 사육하고 있었다. 돼지나 닭을 던져주며 키워 왔던 것인데 붓다가 동굴에 들어갔을 때는 구렁이가 며칠째 굶주린 상태였다. 그러니 구렁이의 밥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굴을 다녀온 제자가 캇사파에게 보고했다.
  "동굴 안에는 잠자리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출입문이 단단히 잠가져 있었는데 그 수행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렁이는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머리를 몸에 파묻은 채 조용했습니다. 보아하니 수행자는 간밤에 구렁이에게 잡아먹힌 듯합니다."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캇사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쌍하게 되었구나. 라고 말했다. 그는 제자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누가 혹시 아침에 고타마를 본 적 있는가?"
  고타마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므로 제자들은 침묵을 지컸다. 침묵을 깨며 장로급으로 보이는 제자가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듯 말했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캇사파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붓다는 인파 속에서 캇사파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폈다. 축제가 끝났으므로 서서히 그를 만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별안간 그의 눈에 나타나면 큰 충격을 주어 나쁜 결과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우루벨라 숲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침이 되자 붓다는 축제가 열렸던 가야 다나로 갔다. 마침 집회가 끝나고 대화의 장이 열리고 있었다. 붓다는 우루벨라 캇사파에게 하룻밤 묵을 장소를 마련해 준 데 대해 감사를 전하기 위해 그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붓다의 모습을 본 순간 캇사파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두려움과 긴장으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그는 입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하루가 지난 후에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붓다가 공손하게 감사를 표하자 주위에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캇사파 스승의 반응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캇사파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오랫동안 많은 제자들을 거느려 온 교주답게 이내 밝은 몸짓을 되찾고, 얼버무리면서 자신의 체면을 수습했다.
  "이리 와 앉으십시오. 참으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축제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무례한 대접을 한 것 같습니다."
  붓다는 주위의 제자들에게는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고 캇사파를 잠시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자신을 아라한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진짜 아라한이 아니오. 아란한이 경지에 이른 자라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수행자라 해도 불행에 빠뜨리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두려워했으며 내가 축제에 참석하는 것이 싫었소. 나에게 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오. 아라한이라면 승부에도 집착을 갖지 않으며 공포심도 가지지 않소. 사람들과 제자들 앞에서는 선량한 얼굴을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든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라한이오? 대답해 보시오."
  상황이 고약해지자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과 수행자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스승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지 모두 조용히 자리를 떴다.
  캇사파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붓다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대로 돌이 되어 캇사파의 마음에 무겁게 쌓였다. 캇사파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생각과 행위를 반성했으며, 마음에 켜진 불빛이 커다란 원이 되어 물결처럼 퍼지는 것을 느꼈다. 붓다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처럼 도리에 맞는 말을 하는 수행자를 만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캇사파는 붓다에게 용서를 빌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는 스스로를 아라한이리고 불렀습니다. 이 늙은 수행자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조금 전의 위세 당당하던 그의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캇사파는 진지한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왔다. 고개를 떨군 채 그는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땅에 짚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발 저를 제자로 거두어주십시오. 이 늙은 몸을 제자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붓다의 손을 꼭 붙들고 애원했다. 붓다는 그가 여태까지 저지른 모든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신리의 위대함과 마음의 존엄성에 대해 설법했다. 캇사파는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마음의 존엄성에 대해서 눈을 떴다.
  "지금의 기분은 알겠습니다만, 스승을 잃은 제자들을 어떻게 할 것이오. 제자들의 입장도 생각해서 잘 처신하십시오."
  붓다가 울음에 잠겨 있는 캇사파를 타일렀다.
  "제자들에게 저의 심정을 알리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붓다님을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그는 눈물을 닦고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마음의 짐을 벗은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며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머리 둘레에는 후광이 뚜렷이 나타났다.
  붓다는 혼자 광장에 남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평화를 찾고 평안한 삶을 보낼 수 있도록, 브라흐만에게 기도를 드리며 진심으로 감사를 올렸다.
  "붓다, 당신의 설법은 참으로 훌륭했소. 자신을 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그때, 불현듯 나타난 브라흐만은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이내 사라져버렸다. 붓다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브라흐만의 협력에 감사했다.
  캇사파는 5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한 곳에 집합시킨 후 큰소리로 말했다.
  "수행자들이여,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지금 이순간부터 불의 신인 아그니의 신앙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소.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갈구해 왔던 의문을 환하게 풀어주었소. 붓다의 제자가 되겠다는 나의 결심은 확고하오. 그의 가르침에 귀의하겠거니와 나의 뜻에 찬성하는 수행자들은 나를 따르시오."
  나이에 맞지 않게 찌렁찌렁한 목소리였다. 수행자들은 뜻밖의 말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아그니신(神)을 믿고 조교인 우루벨라 캇사파를 따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회장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수행자즐이 아그니신을 믿었던 것은,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 믿고 따르던 교조가 갈구해 온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었다면 그들 역시 붓다에 귀의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도리인 것 같기도 했다. 막상 캇사파의 곁을 떠나 다른 수행의 길을 찾는다 해도 캇사파 이상으로 기대를 걸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캇사파의 신앙은 일국의 임금까지 미도 따를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 캇사파가 붓다에 귀의하겠다고 말하니 그의 생각에 무슨 착오나 잘못이 있을 턱이 없다고 여겨졌다. 캇사파의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은 앞으로 직접 배워보기로 하고 일단은 스승의 말을 믿고 함께 귀의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붓다 앞으로 돌아와 무릎을 끓었다.
  "붓다님, 보신 바와 같습니다. 모두 제자로 거두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캇사파는 엎드려 붓대의 대답들 기다렸다. 붓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자로서의 조건을 제시했다.
  "깨달음의 길을 찾으려 한다면 그 길을 가르쳐주겠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팔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고 자신이 체험한 상념과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반성하여 잘못된 부분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후에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캇사파의 지시하에 7일 동안 숲 속에서 각자 마음을 바르게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루벨라의 숲을 떠나 라자그리하의 교외 반다바 다나에 가 있겠습니다. 8일 째 되는 날 아침 그곳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 삼보(三寶)의 의의 >


  우루벨라 캇사파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예, 잘 알겠습니다. 서둘러 시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드린 후 캇사파는 제자들에게 아그니의 제단을 산골짜기에 버리게 하고 동굴 속의 그 구렁이도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그는 붓다와 함께 우루벨라의 마을을 향해서 하산했다. 하산하는 도중에 그는 몇 번이고 되둘이해서 붓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불의 화신인 아그니에게 올리는 제사에 대해서는 그들도 예전부터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육체 고행을 해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는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한 자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엄격한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지고 경쟁심만 일어나 정신이 이상해지는 자도 나타났다.
  캇사파는 이런 현상들을 모두 제자들의 수행 부족에서 빚어진 사고로 여겼을 뿐 그 원인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그니 축제의 오랜 역사적 습관이 이런 그릇된 신앙을 지속적으로 성행시켜 온 원인이기도 했다.
  신앙의 형태가 형식이나 틀에 박힌 진행 의식을 취하게 되면 내용보다는 겉모양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러면 진정한 마음을 알 수 없게 된다. 긴 역사로 흐르는동안 바라문이 형식적인 학문이 되어버린 것도, 오늘날의 불교가 사찰과 전통 속에 묻혀버린 것도, 마음이라는 내용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을 더 중요하게 여겨온 데 그 원인이 있다.
  이런 일은 첫째, 지식과 지혜가 혼동되어 그 구별이 모호해진 때문이지만 더 큰 원인은 인간이라는 것은 자칫 환경에 지배되어 눈이 보이는 외형에 사로잡히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렵고 고토스러운 일보다는 쉽고 편안한 일을 택하고 싶어하며 가난한 생활보다는 풍족한 생활을 추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습성이 몸에 익숙해지면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눈이 멀고, 나중에는 진실과 거짓의 구별마저 불가능해진다. 결국, 인간의 본성인 신성과 불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루벨라 캇사파의 신앙는 불의 신을 믿는 신앙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 형태가 습관적인 행사로 바뀌어, 보여주기 위한 신앙으로 변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많은 제자들이 행사화된 신앙에서 갑자기 붓다의 길에 귀의한 자신들의 변화에 조금은 당혹했다. 하지만 남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마음의 본모습은 끝내 알 길이 없으며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루벨라 캇사파의 결심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과 교주의 체통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붓다에게 대항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진실하게 믿고 있던 아그니신마저 미련 없이 팽개쳐버리고 붓다에게 귀의한 것이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아무리 볼품 없는 수행자라도 불행에 빠뜨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또한 승부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포심도 가지지 않는다."
  붓다의 이 말이 캇사파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아라한이라고 생각했으며 슈바라라고 신도들에게 인식시켜 많은 제자들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붓다 앞에서는 작은 사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캇사파는 비록 교조의 위치에 있었으나 항상 수행자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많은 것을 배우고 뉘우쳐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진취적인 마음이 붓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한 것이다.
  붓다에 귀의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의 참다운 수행자가 되었다. 스스로의 용기에 의해 교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캇사파와 그의 제자 몇 사람이 라자그리하의 마을까지 붓다를 배웅했다. 나머지 제자들은 각기 숲속의 적당한 장소를 찾아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지은 마음의 때를 벗기기 위한 명상적 반성에 들어갔다.
  스스로에게 일 주일 동안, 불, 법, 승에 귀의할 것인가를 물은 후 결심이 확실하게 서면 붓다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불, 법, 승 귀의의 조건은 마음의 존엄성과 붓다의 제자로서의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 조건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세 가지이다.
  붓다[불]에 귀의하는가.
  달마[법]에 귀의하는가.
  승단[승]에 귀의하는가.
  붓다이 경지는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영혼의 길고 긴 전생윤회의 세월이 쌓여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붓다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붓다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믿는 심신 신앙을 신의 길일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마음이기도 하다.
  물건을 생산하는 것도 팔린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가정 안에서의 생활도 서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잠시도 살 수 없다. 극단적인 예가 자신을 믿지 못해 목숨을 버리는 자살이다.
  마음의 세계는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해 진행되고 유지된다. 특히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10퍼센트 정도밖에 작용되지 않으므로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의 세상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신의 자식이기 때문에 신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을 볼 수 없다. 신을 볼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는 석가, 예수, 모세 세 사람뿐이다.
  영적 차원이 높아져서 신을 보았다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저 세상의 천사를 보았거나 아니면 가짜 신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은 저 세상에서도 인간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없다. 신은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과 만물의 에너지 속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석가, 예수, 모세가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신의 의사를 아무런 문제 없이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부여된 권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주가 처음 만들어진 창세기부터 약속된 일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의 무제는 석가, 예수, 모세 이외의 모든 인간들에게는 죽은 후의 세상에서도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믿는다는 것은 모든 만물을 지배하는 신을 믿는다는 것과 같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그만큼 위대하고 권위있는 것이다.
  다음에 달마란 붓다가 설한 정법을 말한다.모든 만물은 모두 정법이라는 신의 마음에 의해서 순환되며 신의 자비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정법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은 붓다뿐이다. 붓다의 제자가 되는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정법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 번째로 승단은 중도라는 팔정도를 일상 생활에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결심의 문제다. 팔정도를 스스로 깨닫고 실천을 해야 하는 길이다. 각자의 신성, 불성을 깨닫기 위해 중도를 기준으로 삼아 생활하여 조화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고 형식에만 사로잡힌다면 붓다의 제자가 될 자격은 사라진다.
  승단의 길은 그만큼 어렵고 엄격하다.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준엄하고 철저해야 한다. 반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쌓아온 업을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릴 수 있는 자여야 한다. 그래서 승단에 귀의함으로써 붓다의 제자가 된 데 긍지와 명예를 저버리지 않고 정진하겠다는 맹세 조항을 끝에 넣은 것이다.

 

 

 

    < 제자들의 깨달음 >


  우루벨라 캇사파에겐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한 사람은 난데야 캇사파였고 또 한 사람은 구난다 캇사파였다. 가야 다나의 계곡 하류에 있던 난데야 캇사파는 형이 소중하게 다루는 제단과 제사 도구들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형에게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며 걱정했다.
  그는 막내 구난다 캇사파의 수행장을 찾아가 동생을 재촉하여 가야 다나의 산정으로 달려갔다. 산정에는 형은 물론 제자들도 제단도 없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그토록 훌륭한 형이 어찌된 일인가? 산적들이 침입을 당한 걸까?"
  난데야 캇사파는 덜컥 겁이 났다. 그들은 함께 간 제자들과 산을 샅샅이 뒤졌다. 산적들의 습격을 받았다면 핏자국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고 형의 숙소도 마땅히 흐트러져 있어야 할 텐데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서둘러 산을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형의 행적을 물어보니, 젊은 수행자를 따라 라자그라히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하산했다는 것이었다.
  "형이 네게 라자그라하로 간다고 한 적이 있는가?"
  "어쩌면 축제가 끝났으므로 빈비사라왕의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닐까? 잠깐만, 라자그리하로 갈 때는 언제나 우리를 불렀잖아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슨 긊한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구난다도 형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토록 소중하게 아끼던 제자 도구를 버린 것이다. 둘은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말을 탔다.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직접 라자그리하로 달려가서 형의 모습을 두 눈을 확인하는 길밖에 없었다.
  라자그리하에 도착한 그들은 형의 행방을 찾아헤맸다.  마을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보기도 하고 수행장마다 찾아다니며 알아보기도 했지만 우루벨라 캇사파와 비슷한 사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은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산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형은 머리를 밀고 노란 승복 차림으로 제자들과 함게 명상에 잠겨 있지 않은가! 둘은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이 어째서 저런 꼴로 여기까지 와서 명상에 잠겨 있단 말인가. 저 수도승이 정말 나의 형이란 말인가~~~~"
  그들은 한참을 장승처럼 서 있다가 형에게다 다가갔다.
  "형님, 접니다. 구나다입니다."
  갓사파는 흠칫 놀라는 얼굴이었으나 두 동생의 얼굴을 확인하자, 몇 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사이처럼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구난다구나. 이런 난데야도 왔구나. 잘 왔다. 자, 어서 여기에 앉거라."
  "형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희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떠나시다니요. 더군다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아끼던 제사 도구들을 버리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구난다의 물음에 우루벨라 캇사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너희들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하산한 일은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그렇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나의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오만, 노여움, 질투 등의 악한 상념은 불의 화신 아그니를 모시는 기도로써는 소멸시킬 수 없었다. 평온한 마음을 갈구하면서도 내 마음은 언제나 오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 한 분밖에 없는 위대한 붓다를 만나서 나는 내 마음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나이에 나는 다행스럽게도 진짜 붓다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붓다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반성의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둘은 형이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렇게 거만하고 위세가 당당했던 형이 이렇게 욕심이 없고 순수한 모습으로 변하다니! 형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리만치 달처럼 맑고 차분한 목소리는 두 아우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형님, 붓다의 가르침이란 어떤 것입니까?"
  난데야는 지금까지 가졌던 의혹이 어느새 사라지고, 형을 이렇게 변화시킨 붓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그의 가르침을 알고 싶어졌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부모의 인연에 의해 태어났으므로 형제가 되었다. 기쁨과 슬픔도 원인과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을 생각해서 괴로워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이니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쁜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기쁨과 슬픔은 육체와 마음을 통해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아그니 화신을 모시고 병마, 아수라, 긴나라, 마고라 등의 수호를 받는다 한들,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중도에서 벗어나 있다면, 괴로움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강해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를 쫓아낼 힘은 올바른 중도의 생활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붓다의 가르침은 중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고 매일 올바른 생활을 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아우는 형으 말을 새겨들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구난다 캇사파는 형의 말이 끝나자마다 자신도 형을 따라 아그니신을 버리고 붓다에게 귀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을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형을 받들어 배화교를 알리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구난다였다.
  구난다는 형의 말을 듣는 중에 지금까지의 굳은 결심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어느새 붓다의 환한 모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저희도 붓다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어떤 분인지 형님의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이 눈으로 직접 만나뵙고 싶습니다. 형님을 이렇게까지 바꾸어놓으신 그 위대한 붓다님을 만나면 저희들의 마음도 틀림없이 바뀔 것입니다."
  구난다는 눈에 광채를 띠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내 동생들이구나. 네 생각이 그렇다면 붓다에게 말씀드려 너희들을 소개해 주겠다. 너희들도 틀림없이 거두어주실것이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웃으며 동생들을 붓다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붓다는 여러 수행자들 앞에서 설법을 한 후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셋이 붓다에게 다가갔다. 붓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세 사람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처럼 말했다.
  "형인 우루벨라 갓사파가 신의 신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고 생활하는 것 이외에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소.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불러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적이 있었소? 신리는 오직 정도를 실천하는 한 가지 길 뿐이오. 그대들도 형과 같은 결심을 하고 있으나 모두 제자들이 있으니 잘 상의해서 결정 하도록 하시오."
  붓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서는 설법을 하기 위해 수행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형님, 틀림없는 붓다입니다. 형님이 하신 말씀까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먼 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둘은 형의 손을 잡고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내뱄었다.
  "잘 됐다. 잘 된 일이다.  우리 다 같이 지난날을 모두 잊어버리고 첫걸음부터다시 시작하자. 그래서 붓다 스트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껴보자. 닷새 후에 나의 제자들이 이곳에 오기로 했다. 자신에게 거짓말할 수 없는 선한 마음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한 후에 붓다를 만나뵙도록 되어 있다. 이제 너희들도 돌아가 제자즐과 의논해서 붓다 스트라에 귀의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여라."
  그들은 가야 다나의 마을로 돌아가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우루벨라 캇사파가 개종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끝으로 그들의 결심을 밝혔다.
  "우리 형제를 따르고 싶은 사람은 함께 오도록 하시오."
  우루벨라 캇사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자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아그니의 신이야말로 절대적이며 만물은 타오르는 불이 있으므로 생존할 수 있다. 그 불을 버리다니 되가나 할 말인가.나는 죽어도 아그니의 화신만을 버리지 않겠다."
  한 늙은 수행자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팽팽하게 맞셨다.
  이에 대해서 어떤 제자는 반대했다.
  "캇사파 평제들을 이렇게까지 개종시킨 것을 미루어보면 붓다라는 분은 예사 인물이 아니다. 진짜인지 가까인지 일단 만나보고 난 뒤에 진로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늙은 캇사파 형제들이 마치 어린애 같은 눈빛으로 붓다 스트라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치켜세우면서 아그니 화신을 버리겠다고 하자, 자신들도 그들을 쫓아 반성의 명상을 해서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도 헛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캇사파 형제를 합친 970명의 수행자들이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살박을 하고 노란 승복을 몸에 걸치고 라자그리하의 마을로 이동했다.
  이 소문은 멀리 퍼져나갔다. 산중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로몸과 사마나들의 귀에 들어갔다. 붓다를 한번 만나보겠다고 재빨리 대열에 끼여드는 자들도 나타났다.
  마가다 국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마가다 국왕은 수년 전에 고타마 싯다르타를 처음 만났을 때, '위대한 붓다가 될 분이다'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슈바라가 되어 자기가 믿고 있던 캇사파까지 귀의시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좀이 수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반다바산은 수행자들이 몰려들어 갑자기 성시를 이루었다. 불과 얼마 전가지만해도 겨우 다섯 명뿐이었던 제자가 10명, 80명이 되더니 지금은 무려 1,700명이라는 수로 불어나 산을 가득 채울 지경이 되었다.
  붓다에의 귀의는 기하급수적으로 산법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로 10년간 지속되면 붓다 교단은 민족적인 대집단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인간은 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붓다 스트라가 전 인류에 알려지는 것은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교단의 확대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말하면 붓다에 귀의한다는 것은 출가을 의미하고 있었다. 일상 생활을 버리고 수도승으로 자신의 직업을 바꾼 것이다. 산 속에는 항상 나무 열매가 있었으므로 먹을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옷도 한 벌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입산하는 수도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간 사회는 흔들리고 경제는 궁핍해지게 마련이다.
  붓다 스트라의 본래 목적은 색심불이(色心不二), 즉 물질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물질과 마음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물질과 마음의 빈틈없는 순환 법칙을 알려주고 올바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출가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그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가정을 버리지 않고서도 신의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출가하는 사람이 수를 줄이기로 했다.
  출가자의 수가 늘어나 집단화가 되어버리면 서로 의존하는 사회 구조는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팔정도의 정업(正業)은 이런 이미에서 그 가치가 한결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직업의 목적이 상호 부조의 조화와 생활 환경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에게 엄격한 세 가지 조건을 만들어 제자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함부로 출가하기를 권유하지 않고, 야사의 부모처럼 일상 생활을 하면서 신리를 실천해 가도록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의 인도는 전쟁의 시대였지만 문명은 발달했다. 인도 미술은 기원전  2,500년에서 1,500년 경까지 인더스강 하류에서 번창했다. 후에 아소카 왕조에 이르러 불탑이나 석주 등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미술품들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는 기원전 2,000년경 인도의 북서부에 이주해온 아리아인이 자연 현상을 찬미한 서정시가(詩歌)들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인도의 역사는 길고 문화적 가치는 높다.
  그런 인도가 오늘날에 와서는 서양 문명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5억을 헤아리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활이 터전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식민지 생활에 원인이 있었지만, 무기력한 생활 습관이 몸에 베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지구상의 양대 문명을 살펴보면 서양 문명이 합리주의와 사고 방식에서 발전해 온 데 비해서 동양 문명은 잘못된 신앙에 침식되어 현실적으로서는 서양보다 훨신 후퇴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서양의 합리주의가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오늘날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고 있는 기계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편리를 지나쳐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앗아갈 실정이다. 욕망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은 혼란과 파멸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동양과 서양 어느 쪽을 보아도 인류의 조화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음이 없는 기게  문명도, 기계 문명이 없는 무기력한 정신주의도 인류를 구제할 수 없다. 인류를 구제할 길은 마음을 깨닫고 올바른 생활을 하는 길뿐이다.
  붓다가 가르치는 정법은 결코 새로운 이념도 사상도 아니다. 모세의 시댕도 자연은 인간에게 정법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붓다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날로 늘어났지만 붓다는 출가자를 결코 무제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제자가 늘어나도 처음 설법했을 때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고 수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육체의 인간은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거만과 오만에 빠진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따뜻한 손길을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누구든지 밟고 일어서려 한다. 신앙에서도 이런 모습은 드러난다.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교조의 능력이 신도들을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악마는 인간의 약한 마음을 지집고 들어와 조금식 자리를 잡다가 모두 차지해 버린다.
  인간의 마음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변한다. 어제 다짐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없고 늘 새로은 마음만이 존재한다. 현재의 바람도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마음을 앞으로 전진하든지, 뒷걸음치든지, 멈추어 있는 것 세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붓다는 반다바산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이윽고 설법이 시작되었다. 붓다의 굵고 낮은 목소리는 파장이 되어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키면서 숲과 대지로 퍼져나갔다.
  "사로몬 여러분! 여러분들의 눈은 불타고 있습니다. 정열로 가득 찬 눈으로는 사물을 올바르게 보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있는 한 올바른판단을 할 수 없으며 평안의 경지에 이룰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귀는 불타고 있습니다. 그 불타는 귀로 남의 말을 올바르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마음이 그런 욕마의 귀를 만들어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히지 않는 한 올바른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려분의 입은 증오로 불타고 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상대방과 논쟁을 하게 됩니다. 대체 자비의 마음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말 속에 자비가 있으면 상대방의 마음에 불을 지르지는 않을 것이고, 올바른 말이 상대방에게 바르게 전달되면 조화호워질 것입니다. 그 증오의 불이 꺼질 줄 모른다면 욕망의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냄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 불을 지르게 합니다. 향기에 끌려 악이 소굴로 들어가 스스로의 본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의 오관은 마음에 불을 지릅니다. 마음은 그럴수록 오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불을 예배히고 다음 세상의 행복을 기도해도 올바른 마음을 상실한다면 고뇌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고뇌른 육체 고행에 의해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육체고행과 남에게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항상 불안에 떨고 불행해질 것입니다.
  욕망으로 불타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길은 팔정도를 척도로 삼아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하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온갖 불의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하지 않은 불씨는 또다시 불을 일으킬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둥글고 넉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이 나면 연기나 날 것입니다. 연기는 마음을 덮고 신이 빛을 차단할 것입니다. 인간이 욕망을 버릴 때 마음은 자비의 빛으로 충만해져 광명의 세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광명의 세계를 실재계라고 합니다.  그곳은 머지않아 여러분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세계입니다. 육체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될 이승의 나룻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육체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몸과 마찬가지로 죽은 후의 세상에도 몸은 존재합니다. 지금은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다른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붓다의 설법은 엄숙했지만 자비이 빛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빛의 물결이 되어 반다바산을 뒤덮었다. 나무도, 숲도 빛이 움직임에 휩싸여 아름답게 빛났다. 수행자을이 모여 있는 설법장은 하늘나라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평화롭게 보였다. 캇사파 삼형제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감격했다.
  "저 세상으로 돌아갈 여러분의 마음과 육체는 지금의 육체 속에 함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길 위에서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이 세상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되어 있으며, 서로 약속된 인연에 의해 태어난 사실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우루벨라의 숲에서 라자그리하까지 오기 위해서 말을 타기도 하고, 코끼리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합니다.무엇을 타고 오든 라자그리하에 도착할 것이고, 사람 또한 변화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육체도 인생을 건너기 위한 말이나 코끼리, 수레와 같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교통 수단에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십 년 동안 믿어온 신앙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제자가 된 캇사파 형제는 참으로 용기가 있고, 훌륭한 수행자들입니다. 자신의 단점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고치는 자야말로 욕망으로 타오른는 불꽃을 없앨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욕심을 버린 후에 새 몸과 마음로 바른 길을 걸으러 하는 자에게 신은 아낌없이 자비의 빛을 뿌려 줄것입니다."
  붓다의 설법은 끝이 났다. 수행자들의 얼굴에는 싱싱하게 생기가 돋아났다.설법이 끝났지만 누구 하나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수행자들은 붓다의 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저마다 반성의 명상에 들어간 것이었다.
  라자그리하에 모인 붓다의 제자는 1,700명에 이르러 큰 승단을 이르고 있었다. 예측할 수 없이 늘어나자 붓다는 승단을 이룬 수행자들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여인의 통곡 >

  붓다의 제자가 된 우루벨라 캇사파 삼형제의 소문은 마가다국의 수행자들은 물론 많은 중생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캇사파의 이름은 마가다뿐만 아니라 멀리까지 알려져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그의 수행장을 한 번쯤은 들렸었다.
  캇사파를 찾아간 어떤 수행자는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어 불의 신 아그니를 신봉했다. 제자가 되지 않았지만 좋은 지도자로 삼고 그를 따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수행자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일 년에 몇 번 있는 행사에 참가했다. 수행자와 중생들뿐만 아니라 마가다국의 빈비사라왕도 그를 신임하여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초대하여 신관의 신분으로 행사를 이끌도록 했다.
  그런 캇사파 형제가 아그니를 버리고 이름 없느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멀리 퍼져 갔다.
  도대체 고타마란 어떤 인물인가, 남의 마음을 순간에 읽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고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적절하게 지도하고 있다니 말이다. 병자가 있으면 병을 고쳐주고, 그가 보여준 많은 기적들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붓다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올바른 생활 방식을 가르쳐 주는 데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중생이나 , 바라문의 수행자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캇사파 삼형제는 모두 100세를 넘기고 있었다.  그들 중 큰 형인 우루벨라 캇사파는 150세였다. 그의 스승인 붓다는 이제 겨우 36세였다. 믿음이 세계에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100년을 넘긴 캇사파의 인생과 붓다의 36년 동안의 세월은 현저히 차이가 난다. 그들의 관계는 상식적인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점에 붓다의 위대함이 있으면 캇사파의 용기 있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반다바산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는 캇사파 형제의 진지한 모습은 다른 제자들과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붓다가 모든 집착은 괴로움을 만든다고 설법하고 있을 때 우루벨라 캇사파는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면서 감격과 감사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법이 끝나자 그는 뜨거운 가슴을 쥐어 잡고 외쳤다.
  "붓다, 내 가슴 속에 불타고 있던 모든 집착이 말끔히 사라지고 기쁨이 샘솟고 있습니다. 아, 이 가슴 뜨거운 상쾌함이란~~~, 붓다님, 저를 구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욕심을 마음에 가득 품고서 이 나이가 되도록 어두운 밤길를 걷듯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편안하고 넓은 하늘의 마음으로 저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고 고맙습니다."
  150세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의 모습은 젊음과 생기가 넘쳐흘렸다. 마음의 때를 벗긴 기쁨이 온몸으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붓다는 우루벨라 캇사파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캇사파여, 그대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났다니 잘 된 일이오. 지금의 그 마음과 행동을 소중하게 여겨 잊지 않도록 하시오. 육체를 통해 두 번 다시는 악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마음가짐과 생각을 하겠으며, 매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겠습니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합장한 손을 그대로 머리 윙 얹은 채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감격과 눈물로 목이 매어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있던 다른 수행자들도 모두 눈물을 흘렀다.
  조그마한 개인이라는 데투리에서 벗어나 인류는 모두 한 형제라는 위대한 지혜를 모르는 자는 도달할 수 없는 법열을 늙은 캇사파는 마음 속에서 체험했다. 붓다는 캇사파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을 얹고 가만히 축복의 빛을 비춰주었다.
  붓다의 모습은 자비의 빛으로 가득 찬 브라흐만과 같았다. 캇사파의 어깨 위에 진주처럼 반짝이는 액체가 떨어졌다. 그것은 빛으로 충만한 캇사파의 법열에 붓다가 내려주는 자비의 물방울이었다.
  붓다의 설법에 의해서 인생이 무엇인가을 알게 되고 삶이 목적을 깨달은 자들과 불치병을 나은 환자 등 출가를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했다. 가혹한 계급 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부르짖는 붓다의 가르침은 농부, 승려, 상공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땅과 직장을 팽개치고, 무기를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일손을 잃은 부인들의 불평과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코스타니야가 탁발을 하려 마을로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고타마라는 수행자는 내 남편을 빼앗아간 고약한 수행자요. 내 남편을 돌려주시오. 나도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갈 테니, 어서 나를 데려가 주시오."
  그녀는 코스타니야의 발목을 잡고 울부짖었다. 코스타니야는 탁발은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는 붓다에게 돌아가 상활을 보고했다.
  "코스타니야, 일터와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가족을어려움에 몰아넣는 것은 정법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함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정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출가자들은 모두 가정으로 돌려보내 재가이 몸으로 정법을 실천하게 하여라."
  붓다는 나무 그늘을 찾아 조용히 명상삼매에 들어갔다.
  코스타니야가 수행자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가정과 처자를 버리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출가한 자는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누구 하나 돌아서는 자가 없었다.
  붓다는 선정삼매를 풀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세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한다. 우선 일 주일 동안, 여덟 가지 정도를 척도로 삼아 지난날의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나를 찾아와야 한다. 붓다[佛]에 귀의하는가, 달마[法]에 귀의하는가, 승단[僧]에 귀의하는가 등의 세 가지 약속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자만을 제자로 받아들일 것이다. 일 주일 동안 반성 수행을 하면 마음 속의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 빛을 보고 판단을 할 것이다. 일 주일 동안 수행을 했지만, 빛이 보이지 않는 자는 돌아가게 하라."
  붓다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그의 힘있는 말은 제자들의 마음을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가다듬게 했다. 세 가지 조건이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선언되었던 것이다.
  세 가지 조건을 만든 것은 정법이 널리 전파되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릴 염려와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미리 짐작했디 때문이다. 본디 정법은 올바른 생활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인만큼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을 무시한 수행은 정도에서 벗어난 행위이다. 따라서 출가자의 수를 줄일 뿐 아니라, 생활을 버리지 않고도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아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손님과 주인 >

  붓다는 자신의 교단에 입문하고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출가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반 가정 주부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적지 않은 불평과 원성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원성이야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설명하면 금방 가라앉힐 수 있는 일이기 하나 남편을 잃은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곧 수습이 될 것이며 바른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갓 입문한 출가자들도 깨달아 각자의 지브오 돌아가는 자들도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어느 날이었다.
  붓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굴 안에서 자신의 생활과 지도 방법에 무슨 잘못은 없는가? 혼자서 반성을 하면서 명상에 잠겨있었다. 제자들은 숲 속에서 무리를 짓고 않자 서로 자신의 결점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흥분한 바라문 수도자가 고함을 지르면서 제자들에게 뛰어왔다.
  "여기 책임자 어딨어! 나는 바라도 바자의 마하 바라문이다. 내 제자들을 빼돌린 고타마란 작자는 어디 있느냐!"
  밧데아가 이 난데없이 뛰더든 바라문 수도자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수행자님, 당신의 제자들이 붓다에 귀의한 것은 바른 길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밧데라는 카필라서의 크샤트리아 출신으로서 다섯 아라한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침착하게 바라문 수도자를 달래며 말했다. 그러자 수도자는 흥분을 가라않히기는커녕 더욱 열이 오른 시뻘건 얼굴로 거친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었다.
  "네가 고타마인가?"
  "아닙니다. 저는 고타마의 제자인 밧데아입니다."
  "너 같은 녀석과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 코타마가 아니면 내 말은 통하지 않으니 어서 고타마을 데려와라. 나는 마하 바라문이다. 비린내 나는 풋내기 너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라문 출신도 아닌 녀석이 수도자라니 될 말이냐! 너희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 거지 같은 녀석들아!"
  온갖 욕설읗 다 들어도 밧데아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수도자의 흥분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붓다는 아까부터 이 소란을 동굴 속에서 듣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제가바로 고타마입니다. 마하 바라문이라고 하겼지요?"
  밧데아는 붓다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붓다 옆에 엎드려 합장하며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서 사태를 수습하여 붓다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자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다른 제자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염려하며 바라문 수도자를 에워싼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이 분은 행패를 부린 분이 아닙니다. 자, 어서 제자리고 돌아가서 하던 일을 하시오."
  자식들을 타이르는 듯한 붓다의 목소리는 제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제자들이 멀리 사라지자 붓다는 아직 흥분을 가라앚히지 않고 있는 바라문과 단 둘이 되었다. 바라문 수도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붓다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 자가 붓다인가?'
  그는 속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붓다라고 하기에는 보통 사람과 별로 다른 점이 없으며, 수백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자도자치고는 너무나 소탈하고 친근하게 느껴져 당황했다.
  부드러운 인상과 소박한 모습이 듣기와는 너무 달라서 바라문 수도자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붓다를 따라간 제자들의 행동에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그는 다른 수행자들보다 자신의 실력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제자들이 나를 버리고 고타마 붓다를 쫓아갔지만 그는 바라문 출신이 아니다. 석가족의 왕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바라문계급보다 한 단게 아래인 크샤트리아에 지나지 않는다. 내 제자들이 고타마의 제자가 된 것은 아마도 그가 협박을 했기 빼문일 것이다.'
  바라문 수도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붓다의 수행장을 찾았다. 그런데 막상 고타마를 대하고 보니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게로 자신의 마음이 끌려들어가서 평온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 이리고 앉습니다."
  붓다는 그를 재촉하여 풀밭에 앉았다.
  바라문은 여기서 붓다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붓다를 만나기 전의 발끈했던 마음으로 붓다를 노려보았다. 붓다는 그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기면서 조용히 그가 앉기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그는 거만하게 양반다리를 하고앚자마자 입을 열었다.
  "슈바리니 붓다니 하고 네 입으로 떠들고 있는 모양인데 바라문 출신도 아닌 주제에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냐! 그 입으로 내 제자들을 빼돌렸단 말인가? 속임수도 여러 가지지만 너처럼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오만한 허풍선이는 처음이다. 요즘에는 바라문 계급도 아닌 것들이 신의 사자라고 자칭하고 다닌다더니 바로 네가 그렇구나. 오늘 너의 그 가면을 벗겨줄 테다. 그게 싫으면 어서 내 제자들을 돌려주거라."
  붓다는 흥분한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붓다는 잘못 대꾸했다가 불길에 기름을 뿌리는 격이 될까 싶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어서 밀면 되밀려오고 달래면 기세가 더욱 등등해서 반발해 온다. 이런 때는 감정의 물결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느 수밖에 없다. 분노에 찬 사람은 온 몸이 불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시 동안 참고 기다리면 화를 피할 수 있다.
  붓다 앞에 있는 바라문 수도자의 경우는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시간과 함께 그의 온몸의 분노가 지나가기를 바라면 된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면 노여움이 빠져나가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져서 이서의 눈이 뜨이며 혼자 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생길 것이다.
  "고타마, 너는 스스로 슈바라라고, 붓다라고 떠들고 다니는데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 네 제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대답해 봐라."
  그는 어개를 들썩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어때, 이제 대답을 못하겠지? 바라문 출신도 아닌 주제에 네가 수행을 알겠느냐? 너는 한낱 크샤트리아에 불과하다. 크샤트리아면 크샤트리아답게 처신해라. 너는 사미(출가해서 바라문의 수행을 마친 소년)의 경험도 없고, 사마나(중녀의 수행)의 수행도 없으며, 하물며 바라문 최고의 수행인 사로몬(노인이 되어 각지를 유행하는 수행이 죄종 단계)이 수행도 거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로몸의 수행을 쌓았다고 떠들고 있는데, 수행의 단계를 제대로 밟지도 않은 네가 무슨 붓다고 슈바라냐? 터무니없는 일이다."
  바라문 수도자의 노여뭉의 불길은 더 솟구쳤다. 노여움 때문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대로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태세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붓다의 제자들은 가슴을 조이면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우려한 몇 명의 제자들은 무먹을 쥐고 뛰어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붓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라문님, 진정하십시오.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내 말을 바르게 들을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나에겐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훌륭한 귀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해라. 슈바라니 붓다니 하는 소리로 이 상황릉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붓다가 아무런 변명의 대꾸도 하지 않자, 그의 마음은 승리의 우월감으로 가득 찼다.
  "내 제자들을 어디에 숨겼느냐? 바라문이 아닌 사람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느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자격도 없는 엉터리 수행자가 무엇을 알겠어. 내 제자들은 어디 있느냐?  네 말은 이제 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서 내 자자들을 내놓아라."
  그는 턱을 치켜들고 붓다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붓다는 사나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감쌌던 노여움의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않고, 우월감으로 바뀐 순간을 포착해 붓다는 침착하게 말을 했다.
  "수행자님, 당신의 집에는 친구들과 수행자들이 자주 찾아 오겠지요?"
  수도자는 뜻밖에 자신에 관한 말을 꺼내자 훔칫 놀라 붓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겐 대접을 합니끼?"
  바라문은 붓다의 물음에 어깨가 우쭐해졌다.
  "그야 당연하지. 명색이 바하 바라문의 집안이니 언제나 손님이 많지 않겠는가, 내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겐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핮. 그것은 조상 대대로 이어진 풍습니다. 또한 좋은 공덕을 쌓기 위함이지."
  "만약 손님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음식을 준비하고 차린 내 것이지."
  "그렇다면 아까부터 당신은 나에게 오만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는데 나는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가져가십시오."
  수도자는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지 슬그머니 일어나서 숲길을 내려갔다.

 

 

 

    < 사랑의 십자가 >

  붓다는 멀리서 걱정스레 바라보는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이렇게 설법했다.
  "사로몬들이여, 내 말을 잘 들어라. 참다운 수행자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다스려야 한다. 흥분한 사람에게 큰 소리로 대답하는 것은 언쟁을 불러오게 된다. 상대방에게 독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 독은 괴로움과 슬픔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아직 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바라문 수도자의 이론적인 공격을 받아도 상대를 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라.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치욕을 당해도 참고 견디며 자신의 마음에 악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언제나 중도의 마음을 잊지 말고 마음의 척도로 삼고 수행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높이고, 넓은 마음을 만들며,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제자들은 바라문 수도자의 사건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이쑈었다. 그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새삼스럽게 팔정도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바라문 수도자를 덮칠 자세를 취하고 있던 제자들은 팔정도를 잊었던 자신을 뉘우쳤다. 바라문 수도자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던 자신을 바라본 것이다. 붓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제자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감정까지 격해지는 것은 팔정도라는 중도의 법칙에 어긋나느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바람이 일면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된다. 노여움과 슬픔은 주위의 상황을 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노여움과 슬픔을 만든다.
  인간은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한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감정에만 마음을 맡기는 사람은 불행해진다. 무엇에 감동하고 기뻐하는 감정과 슬퍼하는 감정은 다 같은 영역에 있지만 출입구는 다르다.
  심장이 팔팔 뛰는 노여움은 감정의 표면적인 부분에서 생겨난다. 가슴이 찡하고 타오르는 감동이나 감격은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이성과 연결된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표면 의식과 잠재 의식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마음에는 본능, 감정, 지성, 이성, 상념이라는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은 표면 의식과 잠재 의식으로 갈려져 있지만 잠재 의식의 깊은 부분에 이르면 다섯 기능은 하나로 합쳐져서 같은 영역이 된다. 가령 표면 의식이 바다 위로 드러난 섬이라고 한다면 바다 밑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섬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섬의 개념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은 개개인의 감정이나 선악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자연이 비를 내리고 바람을 불게 하며 흙을 기름지게 하는 것도 순환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법은 과학적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법에 따른 마음과 행동을 취함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은 감정에 사로잡혀 쉽게 화를 내면 그만큼 마음에 괴로움을 만든다. 노여움에는 노여움이, 슬픔에는 슬픔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되돌아온다.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스승을 존경하고 위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승에 의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의 기쁨을 얻었다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스승을 보호하는 것은 자연의 도리가 아닐 수 없다.
  스승을 지키는 것은 감사의 표현이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지나쳐서 스승에게 해를 가하는 상대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은 사랑의 행위라고 볼 수 없다.
  미움이 섞인 사랑은 바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연이 부여한 자비의 마음에 적합한 사랑만이 정법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지상의 모든 생명에게 자비의 은혜를 주고 있다. 살아갈수록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사랑은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며 신의 마음을 잊지 않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봉사와 공양, 희생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그의 제자인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고 있었다. 체포 당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피했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희생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들의 식생활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물과 식물의 희생이 있으므로 우리 인간이 살아 숨쉬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은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 이들이 만일 인간에게 먹히기를 거부한다면 인간은 굶주려 죽을 것이다. 동물과 식물은 인간에게 몸을 희생하므로써 지상에서의 목적을 달성하고 또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후 있는 기회를 얻는다. 우리들은 이 음식에 감사히 먹어야 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도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옷을 만드는 사람, 신을 만드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 집을 짓는 사람 등 각자의 일을 통해 몸을 희생함으로써 사회와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공양하는 사랑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베푸는 자가 없으면 이 세상은 내일이라도 당장 무너져버릴 것이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사랑'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2천 년 전의 유대인이든 오늘날의 인류든, 자기 보존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에만 눈이 어두워 마음의 빛을 잃고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의 공양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실을 소홀히 하면서 자신이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살아간다면 조화는 근본부터 무너지게 마련이다.
  인류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태어났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만물의 자비를 받으며 생활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목적을 잊어버리고 자기 보존과 욕망에 빠져 있는 한 앞길은 멸망의 늪일뿐인 것이다. 우리들은 신으로부터 이어받은 자비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붓다에 대한 비난과 중상은 제자들이 늘어나자 더 심해졌다. 바라문 수도자의 사건처럼 여러 계층에 혼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이 대자연의 섭리이며,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긋난 행위인가를 깨달은 출가자들이 하나 둘씩 귀가함으로써 붓다의 명성은 다시 올바르게 나라 밖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제자들도 붓다의 가르침대로 수행에 전념하며 자신의 결점을 수정해 갔다. 다섯 명의 아라한과 야사 등의 선배들은 붓다가 설법한 정도와 자신의 체험들을 후배들에게 들려주었다.
  제자들은 새벽에는 반다바산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서 탁발을 했고, 얻은 것에 감사하면서 만족하며 은혜를 베푸는 생활을 했다. 낮에는 숲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폈고 밤에는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하루의 일과를 되돌아보고 잘못을 반성하며 명상에 잠기는 일과를 되풀이했다. 승가(僧伽) 조직은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갔으며 붓다를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운영되어 갔다.

 

 

 

   < 빈비사라왕과의 재회 >


  붓다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날개를 달고 퍼져나갔다. 소문은 마가다국의 빈비사라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바쁜 빕무에 쫓겨 붓다를 다시 만날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왕은 고타마가 깨달음을 얻어 슈바라가 되었을 때 반드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은 조급한 마음을 달래면서 붓다를 만날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왕은 무사를 반다바산으로 보내 라자그리하성으로 붓다를 초대했다. 예의를 갖추며 왕의 말을 전하는 무사를 보고 붓다는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왕의 마음을 흔쾌히 받아들인 붓다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하산했다. 숲길을 걸어 산을 내려오니 이미 왕의 명을 받든 무사들과 바라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은 붓다 일행을 앞뒤에서 호위하며 왕궁으로 안내했다.
  라자그리하 교외에 이르니 호위를 받으며 붓다를 마중 나온 빈비사라왕의 모습이 보였다. 왕은 몸소 어가(임금의 타느 수레)에서 내려와 붓다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왕은 측근들과 붓다의 제자들은 두 분의 재회를 끓어앉아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이 길고 키가 큰 왕이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위대한 임금님, 오랜만에 뵙니다. 언제나 건강한 몸으로 나라일에 전념하고 계심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나야말로 붓다의 덕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대의 깨달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다시 만나게 된 것을 더없는 영관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왕은 감격과 흥분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붓다를 맞이 한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지만, 붓다는 옛 친구를 만난 듯하여 왕이 내민 손을 꼭 잡고 놓을 줄 몰랐다.
  연로한 우루벨라 캇사파 형제들도 풀밭에 앉아 있었다. 왕은 그들을 알아보고 교조로서 모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한 인사를 건네었다.
  "여러분들도 참 잘 오셨습니다. 언제나 밝은 모습을 뵈오니 참으로 기쁩니다. 붓다의 제자로 입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훌륭한 분들이과 느꼈습니다. 선인이라고 불리던 여러분들께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큰 의문을 가지기도 했지만,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는 진솔한 그 마음에 참으로 감탄했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우루벨라 캇사파는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말했다.
  "붓다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스승입니다. 늦은 나이에라도 진찌 붓다를 만나 제자가 된 것이 제게는 다시없는 기쁨입니다. 마음은 평화롭고 세상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캇사파는 감사의 말과 함께 붓다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왕에게도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임금님, 저는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빈비사라왕은 캇사파의 말에 새삼스레 고타마 붓다가 위대하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꼈다. 왕 뒤에 있던 크샤트리아와 바라문들도 우루벨라 캇사파의 말을 직접 들은 후 붓다의 소문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가지 불의 신 아그니를 믿으며 불을 숭배해 왔습니다. 아그니신을 모시는 동안 저를 믿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더불어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임금님,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보살핌과 지원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불은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불 자체를 믿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불타면 걱정과 고통을 불러옵니다. 노여움이나 비난, 질투,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불평 등은 마음이 불타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그니신을 믿은 것은 내세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불길이 밑바닥에 깔린 신이 뜻을 알지 못하고 불을 숭배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고통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목숨이 있는 자는 육체의 오관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그니 신에 대한 숭배는 오관에 불을 당기는 행위었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가 다 겪어야 하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것'에 집착을 만들게 했습니다.
  제가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붓다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은 붓다의 크신 자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밝은 빛이 비치는 붓다의 법에 의해서 인간의 본모습과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을 신앙하는 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를 뿌리는 짓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붓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저의 아우들이나 제자들도 같을 것입니다. 붓다에 귀의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기쁨은 누구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우루벨라 캇사파의 눈망울에는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붓다는 눈을 감은 채 캇사파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진실이 넘치는 한마디 한마디를 마음 속에 새기고 있던 빈비사라왕은 캇사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붓다에게 말했다.
  "고타마 붓다, 나 같은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됩을 가르쳐 주십시오."
  크샤트리아와 바라문들도 왕처럼 마음 속에 쌓였던 것들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붓다의 법이란 과연 무엇인지 직접 붓다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어졌다. 붓다의 설법은 왕에게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것이었다.
  제자들과 우루벨라 캇사파는 붓다에게 합장했다.
  붓다에게 진심으로 합장하고 있는 모습은 빈비사라왕이 그때까지 한 번도 보도 듣도 못 했던 일이었다. 빈비사라왕은 대국의 국왕이며, 보통 국왕과는 달리 문예와 무술 양면에 걸쳐 재능이 뛰어났으며 국민의 믿음이 두텁기가 이를 데 없는 왕이었다.
  갑자기 힘든 일이 생기면 모든 국민들이 한 마음오 단결하여 나라를 지키고 국왕을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왕 또한 전쟁이나 재해로 말미암아 국민의 생활이 어려워지면 성안에 있는 창고문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어느 나라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왕은 늘 신경을 쓰며 배려했다.
  이러한 정치의 정신적 기둥은 왕의 돈독한 신앙심에 달려 있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남달리 강했으며 바라문교를 중시하고 있었지만 형식에 사로잡힌 종단 조직과 행사에 대해서는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왕은 신을 추구하는 신앙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합리적이고 납득이 되면 종파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가까이하였다. 부하나 상인들로부터 훌륭한 수도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수도자를 성으로 초대하여 설법을 들어 마음을 키웠고, 그 대가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해서 왕이 주위에는 바라문의 수행자를 비롯하여 지난날의 우루벨라 캇사파 등과 같은 수행자들이 수십 명이나 출입하고 있었다.
  6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왕은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엇다.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자신의 성 안에 머물게 하여 신리를 이야기하면서 신앙의 근본을 깨닫고 싶었다. 하지만 왕의 바람은 고타마의 강한 의지 앞에 무너졌던 것이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깨달음의 길을 떠나겠다는 고타마의 강한 모습에 큰 감명을 받은 왕은 마음 속으로 고타마가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반드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왕은 오래 전에 기대했던 대로 깨달음을 얻어 많으 제자들을 거느리고 신리를 설법하는 붓다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고 보니 기품과 큰 그릇임을 느껴졌다.
  붓다의 체구는 크지 않지만 붓다와 마주 앉은 왕은 자신이 그지없어 조그맣게 느껴졌다. 반면에 붓다는 하늘을 찌르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왕은 잠시 붓다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붓다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본 뒤 인간으로서의 사는 길을 설법했다.
  "임금이시여, 우리의 육체는 인생 항로를 건너가는 나룻배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이라는 선정이 있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선장인 마음이 없다면 고민도, 슬픔도 즐거움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음이 있으므로 온갖 생각이 일어나고 욕망을 같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육체의 오관과 살아온 환경이나 교육 정도와 사상, 습관을 통해서 본디 둥글고 순수한 마음을 변질시켜 괴로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육체라는 것은 본디 즐거움과 슬픔의인생을 항해하기 위한 베에 지나지 않으며, 배를 움직이는 마음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신입니다. 육체의 오관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관을 통해 받아들인 현상에 사로잡혀 진짜 자신을 잊어버리고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좋은 인연에 의해서 좋은 만남을 맞을어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중도의 길을 실천함으로써 평안한 마음을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고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해탈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해탈의 길은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가 하는 말을 올바르게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을 하는 이상 상대의 말을 올바르게 들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하는 말에 따라 노여움이 생긴다든가 아첨이나 원망, 질투, 비방 등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 중심의 마음으로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며, 그런 감정이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은 올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써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한 말로 말미암아 그 마음은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됩니다. 또 자기가 한 말로 말미암아 오해의 원인을 만들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말은 언제나 올바르게 전달되어 상대의 마음에 조화를 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밖을 향하고 있으면 욕망이 일어나서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고, 마음이 안쪽을 향하고 있으면 사물이 올바르게 보여 괴로움이 씨를 뿌리지 않게 됩니다. 해탈은 이러한 올바른 마음의 척도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이런 가운데 이 세상의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붓다의 설법은 청중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많은 사로몬들은 붓다의 육체에서 엷은 황금색의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합장했다. 왕도 그 빛을 눈으로 확인했다. 빛을 보자 왕도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빛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되는 것이엇다. 조금 전가지만 해도 왕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합장하는 모습에 의문과 부자연스러움을 느꼈지만 그스로 체험을 하자 그 의문은 사라졌다. 왕은 감격에 겨워 붓다에게 고마움을 효했다.
  "귀중한 설법 잘 들었습니다. 나의 영혼을 흔드는 말씀을 통해 백성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내가 해야 할 임무를 잊지 않고 이루어나가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도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왕의 예의 있는 말은 붓다의 제자들에게 긍지와 용기를 주었다. 이렇게 해서 붓다의 가르침은 라자그리하 백성들이 마음에 법을 밝히는 등이 되어 환하게 비추었다.
  며칠 후 왕의 부하가 반다바의 수행장을 찾아왓다.
  "저는 마가다국에 사는 가란다라는 바이샤(상인)입니다. 예전에 라이잔과 함께 붓다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벼워졌습니다. 왕의 희망도 있고, 붓다가 오랫동안 마가다국에 머물러 계실 수 있도록 정사(精舍)를 기중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저를 붓다에게 안내해 주십시오."
  코스타니야는 그의 말씨며 복장을 보고 대단한 부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붓다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가란다는 붓다의 모습을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라자그리하에서 했던 설법에 대한 감사의 인사말을 올린 다음 빈비사라왕의 뜻을 전하고 제가 신도로서의 입문을 허용해 줄 것을 부탁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땅은 라자그리하의 북문에서 북동에 걸친 가란다촌 일대입니다. 그 대나무 숲이 있는 곳이 붓다의 정사로 적당한 곳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붓다의 지시대로 바로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제 뜻을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붓다는 가란다의 마음이 담긴 기증임을 확인하였다.
  "정사의 기중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가란다촌의 대나무 숲은 아주 훌륭한 장소입니다. 그리트락터의 수행장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고, 날란다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저도 몇 번 유행길에 밟았던 낮익은 곳입니다."
  붓다는 흔쾌히 정사의 기증을 받아들였다.
 

 

 


    < 죽림정사 >

  가란다 부자는 정사의 기증이 붓다에게 받아들여지자 절로 마음이 편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때까지는 '과연 붓다가 이 기증을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붓다가 정사의 기증을 그렇게 수월하게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라 너무 기뻤다.
  "제 마음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임금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얼마 있다가 붓다를 비롯한 제자 여러분에게 식량을 조금 드릴까 합니다. 그때 정사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들은 뒤 목공들을 시켜서 곧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붓다께서 현장을 살펴봐 주십시오. 그러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가란다는 만족에 겨워 얼굴 가득히 피어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넙죽 절을 올렷다.
  우루벨라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인만큼 그 인연이 특별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 자신도 모르게 당시의 상홛들이 감회 깊게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어두운 암흑을 걷는 가시밭길이었으며,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죽음의 벼랑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붓다가 되고 보니, 대자연의 틀과 인간의 고뇌가 분명해졌고 삶과 죽음의 공포와 슬픔과 기쁨이 의미도 환하게 이해가 되었다.
  붓다에게 가장 큰 의미를 안겨준 것은 깨달음을 이름으로써 천상계의 브라흐만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졌으며, 그로 인해 이 세상에서 36년 동안 겪은 경험보다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붓다는 가란다의 기증 의사도 이미 브라흐만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대가 법을 설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포교에 필요한 것은 모두 선물받게 될 것입니다."
  브라흐만의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제자들의 수가 천명에 이르니 포교를 위해서도 거점이 필요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받아들여서, 일반 사람들로부터 '저래도 붓다의 제잔가?'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야외에서, 생활을 각자 따로따로 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출가란 이름뿐인 허울에 불과한 것이고, 붓다가 설법한 정법이 구석구석 올바르게 전달되고 실천된다고는 보장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전도(傳道)의 거점이 필요하지 않으 수 없었다. 출가한 사람들의 집단이 늘어나 공동 생활를 할 수 있는 곳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붓다의 정법을 전해 듣고 모여온 사람들은 여러 계층이었다. 바라문 계급이 있는가 하면 상인, 무사 그리고 노예도 있었다. 하지만 신분이나 계급이 차별을 둘 수는 없었으며, 조직적인 생활 훈련이 필요했다. 특히 수드라는 자자손손 노예의 신분이었으므로 열등 의식이 강했다. 그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집단 생활은 필요했다.
  인간은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그것은 마치 태양이 온 세상을 모두 구석구석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평등이야말로 신의 뜻이며 천국의 기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의 구별이 잇다. 때와 장소에 따라 각자의 경험과 지식, 적응력, 취미 등이 달라지므로 자연히 그에 따른 능력이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각자의 역할을 말한다. 이런 사실은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인체의 구조가 증명해 주고 있다.
  인체가 정밀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인체 내부의 여러 기관이 저마다 자기만의 성질을 가지고 제 기능을 다하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신체 기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결함이 생기면 몸 전체의 활동에 지장이 생겨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인간 사회에서 각자 맡은 역할도 인체의 각 기관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연이 가르치고 있는, 인간의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정신이다. 따라서 상대적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사회를 혼란으로 이끄는 요인일 따름이다.
  당시의 인도 사회는 계급 의식이 엄격했는데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번 노예로 태어나면 자손들도 영원히 노예로 살아야 했으며, 스스로 독립하여 생활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힘든 육체 노동으로 살아야 했다.
  인도에 존재하는 교단의 수는 수만에 이르렀지만 노예를 받아들이는 교단은 한 군데도 없었다. 노예로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노예는 인간의 얼굴을 한 온갖 힘든 일을 해야 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 미천한 존재였다.
  붓다는 이 불평들한 제도를 없앴다.
  노예도 인간의 자녀이다. 차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주인을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된 노예를 만나면 데려와서 입문시겼다. 그들 그대로 방치해 두면 다시 수드라의 노력에 시달리거나 산적들에게 맞아죽을 것이다.
  붓다의 교단은 인종 차별이 없었고, 게급 제도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당시에은 특이한 교단으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바라문(학자), 크샤트리아(무사), 바이샤(상공인), 수두라(노예)등 네 계급의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들 것이라고 이미 범천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붓다 자신도 출가 이전부터 계급 제도의 모순을 느끼고 있었던만큼 이러한 상황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교단이 발족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부에서는 붓다의 뜻이 전달되지 않고 제자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차별하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그럴 때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주의를 받앗다. 붓다는 차별한 자를 즉시 불러 진심으로 타일렀다. 그러면 당사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을 깨닫고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붓다의 제자들 사이에 생긴 차별 파문은 브라흐만의 도움에 의해서 차츰 사라졌다.
  붓다는 자신을 늘 지켜주는 브라흐만인 아몬이 내려준 자비에 감사했다.
  아몬과의 만남은 마음의 문이 열렸을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으나,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마음의 지도자자로 알게 모르게 고타마의 삶을 인도해 주었다. 붓다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 전에, 장님 같은 인생을 걷고 있을 때부터 아몬은 이미 고타마의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려주기도 했고 의문에 부딪쳤을 때에는 해답을 암시해 주기도 했다.

※ 즉 이말은, 나에게도 모든 인간에게는...
마음의 문이 열린 상태가 아니라도...늘 옆에 수호령이나 지도령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말이다..........그렇죠?? 수호령님
와~~진짜다...옆에 게신다..느낌이 온다..
지금 옆에 계시죠?? 우와~~~~~~~~~~~곁에 계시네..
내 마음이....생각이......조화되었을 때..느껴진다. 감사드려요...
  아몬은 코타마가 출가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게 된 뒤에는 계속 길을 안내해 주었다. 아몬이 늘 곁에 있었기에 붓다의 마음은 평안해졌고 정법을 알리려 떠난 길에서도 두렵지 않았다. 브라흐만의 자비와 사랑에 온몬이 훔뻑 정어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아몬의 예언이 하나하나 현실로 나타났다. 정법 포교에 체제가 가란다의 정사 기증에 의해서 확실히 자리를 잡고 탄탄한 윤곽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란다는 라자그리하성으로 돌아가서 빈비사라왕에게 보고 했다. 가란다는 대나무 숲에 정사을 세우기 위해 붓다의 제자인 우루벨라 캇사파와 코스타니야, 야사 등과 의논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정사는 금방 완성되었다.
  가란다의 막강한 재력이 많은 목공들을 동원할 수 있었으므로 예정보다 빨리, 그러면서도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가란다에 의해서 세워진 정사에 왕은 붓다의 제자들을 초청하여 안팎을 안내했다.
  "붓다, 이 정사의 이름을 지으셔야지요."
  왕은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정사의 모습은 마음을 수얗하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붓다는 왕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벨르베나[죽림정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왕을 비롯하여 가란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보시는 마음 속에 깊숙히 박혀 있는 욕심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많은 중생은 금은보화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자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욕망을 더 강하게 부추기고 부채질하는 자극제가 될지언정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나 명예는 어디까지나 생활이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의 기둥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사물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없어집니다. 사용해서 없어질 수도 있고 잃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욕망은 그런 무상한 것을 좇아 자신의 마음 속에 괴로움과 슬픔의 곰팡이를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할 줄 알고, 욕망이라는 초라한 마음을 제거하는 행동이야말로 마음을 풍족하게 합니다. 이번에 이 죽림정사이 기증은 많은 중생들의 마음에 법등을 켜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베푸는 가란다의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보시를 한 사람과 같으며 많은 덕을 입을 것입니다."
  왕도 가란다도 붓다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서 마음 속에 되새기는 것이었다.
  붓다는 생활이 어려워서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며 보시를 하는 행위가 생활 속에 자리잡아, 보시를 못하는 자는 은혜도, 구제도 받지 못한다는 사고 방식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런 사고는 특히 바라문 계급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였다. 그들은 실제로 중생들의 보시 위에 방석을 깔고 앉아 권력자의 위세까지 부리는 나쁜 행위를 일삼았다.
  붓다는 우선 이러한 비뚤어진 사고 방식을 없애고 인간 평등의 마음은 소중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알리는데 힘쎴다.
  왕과 가란다는 붓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자칫하면 권력, 명예, 재력에 눈이 팔려 그 안에서 거만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놓인 자신들을 다시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붓다는 왕의 정성스런 접대를 받고, 제자들과 함께 벨르베나[죽림정사]로 향했다. 그들은 이제까지만 해도 숲 속이나 동굴, 혹은 마을 어귀에서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벨르베나라는 훌륭한 건물이 비라람을 막아줄 것이고, 보호해 줄 것이다. 그곳에서의 공동 생활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랄 것 없이 땀과 먼지를 뒤집어쓴 그 얼굴과 때가 줄줄 흐르는 승의 를 입은 그들의모습은 새 건물에서 살아야 할 사람으로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정사가 완공되고 붓다와 제자들이 정사로 옮겨 앉음으로써 승가의 형태는 우선 갖추어진 셈이었다. 제자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우루벨라 지방, 라자그리하의 도시, 날란다, 멀리는 바라나시의 수도, 찬바, 바이샬리까지 다니며 붓다의 법을 전도 하였다. 전도는 혼자서 할 때도 있고 대여섯 명이 어울려 며칠 동안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벨르베나로 돌아와 붓다의 지시를 받고서는 또다시 전도의 길을 나섰다.
  포교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제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정사는 그때마다 새로운 건물을 지어 넓혔지만, 머지않아 죽림정사의 수용 능력도 한계에 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또 가란다처럼 기증자가 나타나 새로운 정사가 세워질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로부터 포교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성과를 올린 자도 있고 실패담을 늘어놓은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포교의 성공과 실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제자들의 포교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면서 자상하게 지시를 내렸다.
  붓다 자신도 항상 팔정도를 척도로 삼아 반성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조그만 잘못이라도 엄하게 다스렸다. 아주 작은 악이라 하더라도 가만히 두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자라 마음과 행동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붓다가 37세가 된 해의 비가 많이 내리는 가을이 되었다. 많은 제자들이 모두 벨르베나에 모여 각자 맡은 곳으 전도 상황를 붓다에게 보고하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도에 대한 이야기와 정사에서 생긴 여러 문제들을 토론했다.
  그들은 식량 비축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정사가 생기면서 제자들도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정착해서 생활르 하므로 식량을 비축해야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식량 저장에 대한 의견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졌다.
  붓다는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장마철에 필요한 만큼만 탁발로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분을 비축할 필요는 없다."
  붓다의 말은 예전에 길거리나 숲에서 노숙하던 생활을 회상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었다.
  우기가 되면 식량이 부족해진다. 이 때문에 산중의 수행자는 우기 동안 살아갈 만큼의 식량을 모았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탁발을 해도 보시의 양은 적어지게 마련이다. 마을 사람들도 우기에는 식량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산이나 들 속에서 과일을 구하는 것도 우기에는 홍수나 산사태가 일어나 위험하므로 아무렇게나 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가란다가 식량을 보조해 주었지만 그것에 의지하고 만족해서는 안되는 일이라, 탁발하여 먹을 것을 해결하는 걸식 생활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기 동안만이라도 식량을 확보하고 전도의 일을 보다 활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붓다는 정사로 옮긴 뒤에도 종래의 산중 생활과 다름없이 필요 이외의 식량을 비축하지 않기를 원했다. 생활에 그다지 지장이 없는 한 식량을 비축하지 말하고 지시했다.
  붓다의 지시대로 제자들은 식량을 비축하지 않았다. 만일 남는 식량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두 번째 문제는 전도중에 바라문 계급의 수행자들과 곧잘 논쟁을 벌이게 되는 일이었다.
  붓다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수행자들이여, 마가다국을 비롯해서 캇시국, 코살라국, 밧지국 등에서 수행하고 있는 바라문들은 예로부터 전래되어 온 < 베다 >나 우파니샤드의 경전을 습득하여 지식이 풍부한 자들이다. 그에 비해 여러분들은 붓다의 법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라문이나 그 밖의 수행자들로부터 학문적인 공격을 받으면 이성을 잃고 언쟁을 일으켜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러니 시비를 걸어오는 자가 있으면 절대로 그와 맞서서는 안 된다.
  인내의 마음을 잊지 말고 정도에 따라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생활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또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져서 괴로움을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 붓다의 법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큰 지혜[마하 반야]는 그러한 생활이 축적되어야만 열리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또 다른, 나의 전생의 제자들이 인연을 얻어 제자로 입문해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 여러분들은 선배답게 자기 자신을 단단히 하여 부끄럽지 않은 생활과 중생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등불에 비친 붓다의 모습은 당당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날로 익어가는 붓다의 인품을 우러러보고 제자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행복감에 젖었다.
  붓다의 말은 간단하고 누구든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깊고 넓은 신의 진리가 담겨 있었다. 사상, 종교, 정치라는 것은 자칫 인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이성을 잃게 만든다. 사상은 마음에 독을 먹이고, 종교는 마음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며, 정치는 인생의 목적과 수단을 흐리게 하여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특히 사상은 종교와 정치를 움직이는 힘으로,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옮고 그름조차 구별하지 못해 여러 가지 집착을 만든다. 사상이라는 것은 한 가지만의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생각은 인습이나 전통, 민족의 체질, 한 시대의 학문 등이 서로 얽혀 생기는 것이므로 한 시대를 좌우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사상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사를 훑어보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느지 알 수 있다. 종교나 정치는 한 시대를 움직이는 사상을 토대로 하여 강하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며, 만일 그 사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은 사상과 현실이 대립하여 싸움의 원인을 만든다.
  마호메트란 사람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평화를 구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사상의 근본에는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물의 개인적인 생각이 끼어들기 때문에 사상과 현실이 멀어지는 것이다. 사상가, 종교가, 정치가들이 한결같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그들이 옳지 않은 생각이 끼어들어 신의 진리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정법은 대잔연의 몸으로 가르피는 생활의 방법이다. 자연은 이술방울만한 작은 다툼도 하지 않는다. 신앙인이 서로 입게 거품을 물고 입씨름을 하다 나중에는 몸싸움까지 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몸에 베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아버지와 아들 >

  고타마가 우주즉아(宇宙卽我)의 경지를 얻어 붓다가 된 지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붓다의 마음은 시궁창에서 피는 아름다운 연꽃과 같았다.
  카필라성도 왕의 자리도, 양친과 친척도,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 나후라까지도 비정하게 팽개치고 출가한 몸이었지만 그때는 작은 집착도 없었으며 낡은 승의는 마음의 평안을 그대로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왕의 옷차림은 아름답고 권위를 느끼게 하지만 옷을 벗기고 마음을 들여다보면 거짓과 불안으로 가득차 있다. 사물이 진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시간에 쫓기는 바쁜 몸으로 일생을 마치고 만다.
  6년의 고행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음은 평안으로 가득 차 있고 표현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법열의 경지에 이르렀다. 마음의 평안, 바라밀다[보살]의 경지는 시궁창에서 피는 연꽃과 같았다.
  사람의 육체는 눈꼽, 코딱지, 대변, 땀, 때, 가래 ~~~어디를 보아도 깨끗한 것이 없다. 더럽고 추한 육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눈을 떠 빛을 발산하게 되면 시궁창에 핀 연꽃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오물이 범할 수 없는 눈부신 꽃으로 피울 수 있다. 즉 하늘과 땅을 꿰뚫는 지혜의 샘을 열수 있다.
  고타마는 왕위를 버리고 바라밀다의 꽃을 피웠다. 슈바라라는 붓다의 경지에 도달했다. 아내 아소다라와 나후라이 입장에서 보면 고타마는 비정한 남편과 아버지로 여겨지겠지만, 때가 되어 법의 가치을 알게 되면 카필라를 떠나 출가한 붓다의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고타마가 붓다가 되어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도를 가르친다는 소문이 이미 먼 북동의 나라 카필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알려져 있었다.
  나후라는 일곱 살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아들이 태어나자 마자 고타마는 카필라를 떠나 깨달음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후라는 아버지의 모습을 어머니 아소다라와 슈도다나왕과 마하 파쟈파데, 궁녀들로부터 듣고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소다라에게도 남편은 먼 과거 속에 묻힌 추억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설사 건강하게 살아있다 하더라고 다시 자기 품으로 돌아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나후라였다. 씩씩하게 자라 장차 카핖라성을 지키고 자신을 안심시켜 줄 아들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잊은 것도 아들 나후라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시타 이시(아사다바 선인)의 조카인 카차나는 마가타를 여행하다가 붓다의 제자들을 만나 붓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카필라의 슈도다나왕에게 말해 주었다.
  "임금님, 고타마님의 위대한 스승이 되어 많은 제자들을 두고 있으며, 그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마가다국에서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고타마는 환자를 고쳐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합니다. 명성을 떨치던 교조도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빈비사라왕도 그의 설법을 듣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늙은 슈도다나왕은 눈을 반짝이면서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놀라움과 기쁨으로 어쩔 바를 몰라했다.
  "뭐라고, 빈비사라왕까지도 싯다르타의 설법을 들었다고?"
  "임금님, 그리고 어떤 부자가 라자그리하성의 북문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벨르베나를 기증하여 고타마님은 거기서 많은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구나. 코스타니야와 아사지도 함께 있겠구나. 함데 왜 한 번도 연락을 주지 않았단 말인가. 어쩌면 그들은 고타마와 함께 있지 않는 것일까? 다섯 무사들의 소식은 들었는가?"
  왕은 아들이 훌륭한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빨리 만나서 그의 설법도 듣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썩거렸다.
  왕은 카차나의 얼굴이 점점 세상을 떠난 아시타 선인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시타 선인은 37년 전에 어린 고타마 싯다르타를 처음 봤을 때, '이 아이는 커서 많은 나라를 거느린 대왕이 되든가, 집을 떠나 슈바라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게 될 인물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슈도다나왕은 고타마가 슈바라가 되는 것보다는 자신의 뒤를 이어 샤카족의 이름을 전 인도에 떨쳐주기를 바랐었다. 그 희망은 이미 무너졌지만, 지금은 슈바라가 되어 빈비사라왕까지도 자기 아들의 설법을 경청하는 상황이 되었다.
  "카차나여, 너의 숙부는 위대한 수행자였단다. 싯다르타가 슈바라가 되리라는 것을 일찍이 예언했었다. 고타마가 카필라를 떠났을 때는 세상이 캄캄하게 느껴졌었다. 아시타 선인은 참으로 훌륭한 수행자였다. 나는 곧장 너의 숙부로부터 바라문학을 배웠단다. 너도 숙부에 뒤지지 않은 훌륭한 바라문이 되어라."
  카차나는 갑자기 숙부의 칭찬을 듣게 되자, 어릴 때 자기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던 숙부의 모습이 떠올라 그리움에 젖었다.
  "아시타 숙부님 덕택으로 이렇게 임금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때 고타마를 안고 아시타 선인은 눈물을 흘렀지. 내가 어째서 눈물을 흘리느냐고 물으니 아시타는 '왕자님이 성장할 때까지 저는 살 수 없습니다. 이승에서 만난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원통해서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흰 수염의 얼굴을 싯타르타에 가까이 갖다대면서 엉엉 울었다. 그때 나는 선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구나."
  왕은 오래 전 일을 회상하면서 눈믈을 글썽였다.
  "임금님, 저도 슈바라[붓다]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임금님께서 제 앞길을 부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까지 제 자신을 단단하게 수련하겠습니다."
  카차나가 돌아간 뒤 왕은 파쟈파데를 불러 싯타르타를 카필라도 초청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의논이라기보다는 왕이 일방적인 이야기였다. 아들의 성공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아들의 설법을 직접 듣고 싶은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아무런 생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붓다가 출가한 후 왕은 지나가는 시간과 함께 늙어, 7년 전의 기력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싯다르타의 이복동생 난다는 학문과 무술에 뛰어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왕의 후계자는 난다였다. 슈도다나는 난다의 뒤를 이어 나후라에게 왕위를 물려줄 계획이었지만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임금님, 저도 붓다를 만날 날이 기다려집니다. 나후라도 벌써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얼굴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난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꼭 부르도록 합시다. 아소다라 , 너도 같은 생각이겠지?"
  파쟈파데는 아소다라에게 물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우리 나후라를 위해서라도 초청해 주십시오."
  파쟈파데의 말을 듣고 아소다른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 결심한 일은 두 번 다시 바꾸지 않는 완고한 고타마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붓다로서 맞아들여 설법을 들을 수는 있겠으나 카필라성에 머물러 옛날과 같은 생활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의 부부 관계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단지 꿈을 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단념했다.
  "지금 고타마는 슈바라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우리들의 마음을 알고 있을 게다. 우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왕은 마음은 이미 싯다르타가 카필라로 돌아와 함께 생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왕은 여느때와는 달리 힘이 솟아솟았다. 왕은 수그로 다나, 도로 다나, 암리트 다나 삼형제를 불러 누구를 싴며 붓다를 초청할 것인가 의논했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많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죽림정사라는 곳에 있다. 나는 꼭 붓다를 불러 그의 설법을 듣고 싶다.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글쎄요, 제가 그 일을 맡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
  수구로 다나가 나서며 말했다.
  "너는 나이가 70을 넘었으니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마음만으로 갈 수 없는 먼 길이다. 무척 힘들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가봐야 싯다르타 왕자는 쉽게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거절이라도 당하면 큰일입니다."
  막내동생인 암리트 다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들 형제보다 오히려 찬다카를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말했다.
  "싯다르타 왕자를 어릴 때부터 돌보아주고 친한 사이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우파는 어떻습니까? 우파는 발걸음도 빠르고 아직 젊어서 좋을 것 같습니다. 찬다카는 7년 전에도 고타마의 심부름을 했고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는 것 같아서 가련한 생각이 듭니다."
  왕은 도로 다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파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우파의 키는 크지 않았지만 적당한 살집의, 힘이 넘치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우파는 왕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명령을 기다렸다.
  "네가 마가다국 라자그리하에 심부름을 다녀와야겠다."
  "네, 명령만 내리십시오."
  "너도 알다시피 라자그리하에서 싯다르타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다. 그를 카필라성으로 제자들과 함께 초대하고 싶구나. 그 일을 네가 맡아주어야겠다. 어때, 갈 자신이 있는가?"
  "네, 언제든지 떠나겠습니다."
  우파는 시원스레 대답했지만 마음 속으로 걱정이 앞섰다. 그때까지 찬다카가 몇 번인가 맛본 실패의 쓴 경험을 알고 있는 그였다. 찬다카는 왕의 심부름을 갔을 때마다 완강한 왕자의 거절에 부딪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우파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하여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파는 전에 싯다르타의 수행장으로 식량과 의복을 가져간 적이 있었다. 맨 처음에는 찬다카와 함께 갔지만 두 번째와 세번째는 혼자서 갔다. 그때 모두 거절을 당하여 가지고 간 식량과 옷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왕의 뜻을 전하는 심부름에 지나지 않지만, 카필라성으로 한 번 내왕해 달라는 분부여서, 어쩌면 왕의 기대가 무산될 수도 있다고 우파는 생각했다.
  "임금님, 저는 왕자님게 식량과 의복을 몇 차례나 가져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루벨라의 지리며 아누푸리야의 숲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가져간 물건을 전해 드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짐도 없고 임금님의 뜻을 전하는 것 뿐이니 왕자님은 반드시 수락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왕의 위엄에 짓눌려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꼭 수락을 받고 와야지. 잘 부탁한다."
  "네~~~~~~."
  마음씨 착한 우파는 왕실에서 물러나자마자 큰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이젠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되든 안되든 부딪쳐보는 길뿐이다. 그는 아랫배에 불끈 힘을 주었다.
  우파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여행 떠날 준비를 하고 밤이 새기 전에 카필라성을 빠져나와 마가다국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행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에는 여관이라는 것이 없었다. 지금의 민박집과 같은 작은 집에 들어가 우파는 피로를 풀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미리 그 지방의 상인에게 연락해서 숙박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민박 숙소도 없는 곳이 있었다. 그럴 때는 아무 집이나 찾아가 잠자리를 청하거나 길거리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우파는 이런 여정을 거쳐 날란다에 도착했다. 수행자를 붙들고 물어보니 붓다가 있는 곳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식량이나 의복을 가지고 찾아나섰던 몇 년 전에 고타마를 찾을 때,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음을 떠올렸다.
  "카필라성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밧데아는 카필라의 크샤트리아였던 까닭에 우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파를 보자마자 그리운 옛 정의 뭉클 치솟았지만 붓다에겐 이름을 대지 않고 그냥 사람이 찾아왔다고만 보고했다.
  "무슨 용무인지 모르지만 이쪽으로 올라오시오."
  붓다는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나 카필라에서 우파가 사자로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우파가 왔구나."
  밧데아는 붓다에게 보고를 끝내고 막 방을 나서려는 참이었는데, 깜짝 놀라 돌아보다가 그만 기둥에 이마를 딱 들이받고 말았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어떻게 우파라는 것을 알았는지 물었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우파는 붓다 앞으로 나아가서 얌전하게 끓어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내어 짚고 엎드리는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우파야,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 주어서 고맙구나.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너의 용건은 좀더 시일이 지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구나. 부왕에게 잘 여쭈어라. 부왕도 아소다라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럼데 너도 늙었구나."
  우파는 말할 틈을 잃었다. 우파가 해야 할 말을 붓다가 먼저 다 해버렸기 때문이다. 우파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넋나간 얼굴로 붓다를 바로보았다. 한동안 말문이 막혔던 그로서는 새삼스럽게 안부 인사를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왕자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임금님도, 아소다라님도, 나후라님도 모두가 다 왕자님께서 카필라성으로 돌아가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왕자님,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저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붓다는 우파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제자들을 생각하면 당장 벨르베나를 떠날 수가 없었다. 교단이 생긴 지 겨우 일 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었고, 게다가 날마다 새로운 제자들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에게 정법을 가르쳐 교단의 질서가 확실하게 몸에 벨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는 귀성 못 하는 사연을 편지에 적어 우파에게 주었다. 우파가 카필라로 돌아가서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파는 붓다의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우파의 눈에 비친 붓다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가혹한 고행 시절보다 안색이 훨씬 좋아졌고, 상대를 냉정하게 내쫒던 무서운 태도는 티끌만큼도 없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넓은 붓다의 포옹력이 우파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우파의 마음은 가벼웠다. 왕의 명령을 받았을 때는 부담감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나 붓다를 뵙고 카필라성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큰 임무를 완수한 자신감과 상쾌함으로 가득 찼다.
  우파는 붓다의 이야기를 전하며 왕에게 편지를 드렸다.
  왕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힘없이 말했다.
  "수고가 많았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제 푹 쉬도록 하여라."
  우파가 물러나자 왕은 침소로 돌아가서 방문을 잠갔다. 의자에 몸을 묻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에 잠겼다.
  '이번에도 허탕이라니~~~~ 지난 7년 동안 싯다르타를 잊은 적이 한시도 없었다. 어째서 싯다르타는 내 마음을 조금도 살펴주지 않는단 말인가. 나의 초대에 그리 쉽게 승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이미 출가한 몸이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몸이니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잠시 들러서 얼굴만 보여주는 것도 안 된말 말인가.'
  왕은 우파의 모습을 본 순간에는 실망에 빠지지 않았지만 그의 보고를 들면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점점 멀러져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고독에 빠져들었다. 왕은 굵은 눈물을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창 밖으로 보이는 먼 숲이 물속에 잠기는 것을 느꼈다.
  야소다라는 여자의 예리한 직감으로 남편의 귀성은 가망이 없는 일이라고 단념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파의 보고들 듣고 나서도 그다지 마음의 동요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려려니 하면서 나후라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나후라만은 자기가 교육을 시켜서 바라문학과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하리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키우리리고 새삼 결심을 다지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나후라가 아버지 붓다에 대해 물었다.
  "아버님은 일이 많아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얼굴을 뵙고 싶겠지만 제가 늘 가까이 있으니 안심하고 공부에나 열중하세요."
  아소다라는 나후라를 남편으로부터 멀리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나후라마저 아버지의 일을 걱정하고 동정과 관심을 갖게 되면 남편과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후라까지 내 곁을 떠난다면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단 말인가.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이 세상에 만일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계신다면 내 삶을 짓밟는무자비한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 여자들의 소망은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 아닌가? 이 작은 소망마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소다라는 나후라를 잠재우고 창가에 기대어 섰다. 어둡고 무거운 마음과는 달리 밤 하늘의 별들은 아름다운 빛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순간 별 하나가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졌다. 아소다라는 자기의 품에서 남편 고타마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로부터, 버리는 신도 있으며 거두는 신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거두는 신을 믿고 나후라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하느님, 부디 이 조그마한 소망을 거두어주십시오. 더 이상 불행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소다라는 잠든 나후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달에게 간절히 빌었다. 크고 둥근 달이 금방 일그러졌다. 그녀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달을 일그러뜨린 것이다.
  한편 마하 파쟈파데는 고타마가 귀성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의 숨울 쉬었다. 현재 상태로는 왕의 후계자 문제로 논란의 소지가 없지만 만일 싯다르타가 슈바라가 되어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병자를 고치며 상대의 마음을 바꾸어 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돌아오는 날에는 주위에서 왕위 계승 문제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붓다라고 해도 사람의 자식이며,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하 파쟈파데는 마음 속으로 붓다가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돌아오지 말랐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다행이도 코타마가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우파가 다녀온 뒤로 카필라에서는 붓다의 이야기가 금기가 되었으며 싯다르타의이름을 누구 한 사람 입에 담는 자가 없었다.

 

 

 

     < 기적>
 
  서른 여덟 살이 되는 새해를 맞아 붓다는 거실에서 선정삼매에 들어 있었다. 올해에는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조화로운 상태를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더욱 세밀한 자기 성찰과 굳은 결의를 다디기 위함이었다.
  지난 해에는 우루벨라 캇사파 형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귀의하였으며, 거시에다 벨르베나의 기증, 제자들의 교육 등이 겹쳐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에 시달려야 했었다. 올해도 역시 분주한 생활이 이어질 것이다. 분주한 나날이지만 더욱 넓은 마음을 확립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붓다는 장님같이 인생을 걸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전생에 가장 잘못되었던 행동는 중생들을 짓누르고 명령했던 왕으로서의 업이었다. 강한 자아, 욕망에의 몸부림, 자율심의 부족, 잘못된 지시 등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자신의 현재 모습과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전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붓다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마음의 세계는 민감하며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린만큼 제자들과 여러 재가 신도들에게 정도를 가르치는 데에는 한치의 잘못이 없는 설법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날 선정에 들어가나, 브라흐만이 다가와 말했다.
  "근간에 당신이 전생 제자 세 사람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붓다의 신리를 깨닫고 장차 교단의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천상계에서 붓다에게 지시를 주는 브라흐만이나 보사타들은, 붓다가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기 이전인 저 세상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들이다. 그들은 모두 정법을 펴는 친구들이다.
  붓다는 설령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아몬의 지시라 할지라도 반드시 정도에 비추어 다시 한 번 잘 살펴본 후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왜냐햐면 붓다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브라흐만의 목소리를 흉내낸 마왕이 나타나 지시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붓다에게 말을 건넨 목소리는 틀림없는 아몬의  것이었으며 범천계를 지도하고 있는 브라흐만이었다.
  "아몬, 언제나 올바른 지도를 해주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아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붓다, 그겅은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법에 의지하여 정진하고 있는 이상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우리들은 중생들의 마음에 법등을 밝혀주는 붓다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아몬은 말할 때 사투리가 섞인 발음을 했다.
  지상에서 물질에 싸여 생활을 하면서 깨달믕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천상계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만큼 깨달음을 얻은 붓다를 높이 우러러보며 모두들 기꺼이 그를 돕고 여러 가지 계시를 내려주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고,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중생들의 모습이다. 번뇌와 집착을 버리면 자신이 나아갈 앞길이 분명하게 보인다. 번뇌를 끊는 길은 마음을 바른 길로 향하게 다스려야 한다.
  육체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영원히 지닐 수 없는 물건이다.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중생에게 길을 안내해 주고, 고뇌의 늪에 빠진 부조화한 중생에게 자비의 빛을 주는 것이 붓다의 역할이었다.
  붓다는 명상을 풀고 아몬의 예언을 상기하였다. 새삼스럽게 지금 자신의 처지가 그지없이 감사하게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지면 자신감이 생겼다.
  빈비사라왕의 명령에 의해 붓다에게 죽림정사가 기증되었다는 소문은 중인도를 시작으로 전 인도에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붓다의 이름은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붓다에게 귀의하는 사람이 수도 늘어났다.
  도를 찾아 수십 일이나 걸려 제자로 입문하는 늙은 사로몬, 젊은 수행자가 속속 몰려들었다. 한편에서는 붓다가 유명해질수록 이를 질투하여 비난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늘도 강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유행중에 제자들 귀에 붓다에 대한 욕설이 들려왔다. 제자들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인욕(인욕)이란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오로지 포교와 수행에 정진했다.  붓다의 설법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제자들은 남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인간의 가치는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와, 자기의 욕망을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에 처했을 때 그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아사지는 이 붓다의 말씀을 항상 마음 속 깊이 새고 있었다. 양극단의 환경에 처했을 때의 인간의 심정을 잘 알려주고 있으며 올바른 중도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표현한 말이었다.
  아사지는 라자그리하성의 교외를 유행하는 도중에 붓다에 대한 나쁜 말을 들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정도에 따른 올바른 생활을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결코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흔들이는 일은 없었다.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 소리에 눈을 뜨고 유행을 떠나는 일과가 매일 반복되었다.
  아사지가 도착한 라자그리하이 한 마을에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농가에서는 죽을 쑤는 연기가 희뿌연 새벽 하늘에 여릿여릿 피어올랐다.
  여느 때처럼 아사지가 한 농가에 이르자 집 주인이 문간에 서 있었다. 주인은 아사지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엔 아내와 함께 공양을 하지 못합니다. 배가 너무 아파서 괴로워하며 누워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쉰 살은 넘긴, 뼈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농부는 못 먹을 것이라도 씹은 듯 우거지상을 지으며 아사지를 바라보았다.
  "그거 참 딱하게 되었군요. 공교롭게도 제가 지금 약초를 가진 게 없는데~~~~."
  아사지는 당황하다가 이내 붓다를 떠올렸다. 붓다는 제자들의 복통이나 요통을 호소해 오면 곧잘 아픈 부위에 두 손을 대어 고쳐주곤 했었다.
  처음에는 붓다의 능력에 놀라 당황했지만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니, 붓다의 두 손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빛이 아픈 부위에 쏟아져 들어가자 병이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사지는 자신도 붓다가 했던 것처럼 하면 혹시라도 병이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 제 아내를 돌봐주세요. 반새 한숨도 못 잤답니다."
  아사지는 그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어두컴컴하였지만 현관은 제법 넓었다. 현관에는 농기구가 여기저기 아푸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방 안 한쪽 구석에 켜져 있는 등잔의 불빛이 희마하게 방 안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고 눈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사지는 아랫목으로 가 누워 있는 여자의 등 밑에 왼손을 조심스레 넣고 오른손은 위장 근처에 가볍게 올렸다. 아사지는 눈을 감고 붓다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여자의 배에 빛이 쏟아져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농부는 아사지 옆에 앉아 아내이 얼굴을 조마조마하게 바라 보았다.
  잠시후 방안을 가득 채웠던 앓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여자는 어느새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아사지를 향해 합장했다.
  "아사지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아사지님은 붓다의 위대한 제자입니다. 저희 같은 농사꾼들도 붓다의 가릠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려운 수행을 해야겠지요?"
  "세상을 비추는 태양은 바라문 계급뿐만 아니라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에게도 빛을 평등하게 비춥니다. 붓다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배울 수 있습니다. 일상 생활을 법에 의지하여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저희들도 붓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인드라신이나 아그니신을 모시지 않아도 됩니까?"
  당시의 인도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라문이나 후이후이교에도 신을 보시는 제단이 있었다. 신도들은 그 앞에서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거나, 병든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런 사람들은 재단을 보며 의지한다. 어쩌면 마음이 불안한 그들에겐즌 당연한 행동일지 모른다. 그런 제단과 같은 매개물이 없다면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한 기분이 나지 않고 신에게 의지할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며, 습관이 집착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 체 일생을 고뇌 속에서 보낸다.
  "참다운 구원은 마음과 행동에 있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아무리 올려보아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규제한 여덟 가지의 올바른 지침을 지키는 것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길입니다."
  아사지는 이렇게 말하고 그 집을 떠났다.
  여자의 복통은 부인과 질환이었는데 아사지의 치료로 다음 날에는 툴툴 털고 일어나 일을 햇다. 후에 부부가 함께 재가신도가 되어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밖으로 나오니 태양은 이미 하늘에 걸려 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사지의 마음은 가벼웠다. 집착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여행하는 그의 발걸음 앞에은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라자그리하의 수행자는 거의가 바라문교 신봉자들이었다. 육체 고행을 하는 자들은 숲 속이나 농가의 추녀 밑에서 생활했다.
  마하 바라문인 아산자의 제자 가운데 날란다 출신의 우파데사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바라문교의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비롯해서 모든 성전을 배운 영리한 학자이기도 했다. 바라문 경전이나 그 밖의 여러 교리를 깨우쳤지만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짜 슈바라를 만나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이곳 저곳 스승을 찾아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에게는 2백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는 바라문교를 중심으로 자신이 익힌 이론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지만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마음 속은 언제나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파데사에게는 고리타라는 친구가 있었으며, 우파데사와 마찬가지로 아산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스승의 교리에 모순을 느끼고 있던 터라 진짜 슈바라가 나타났다는 여러 수행자들의 말을 믿고 그 슈바라를 찾아나섰던 것이다.
  붓다의 출현을 예언한 바라나니 교외 가파리의 바라문인 바라리나와 코살라국 아시타 이시는 수행자들 가운데에서 유명했다. 그들이 예언이 널리 퍼저감에 따라 '나야말로 진짜 슈바라다'고 스스로를 높이는 수행자들이 나타났다. 아산자, 푸두나코살라, 니간다 등의 수행자들은 저마다 슈바라를 자칭하면서 한 무리씩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리타와 우파데사도 이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 보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법에는 모순이 없다. 일관된 도리가 있을 뿐이다.
  우데파사는 보편적인 신의 진리를 찾아 나섰다. 바라문 경전에는 '32상을 구비한 자야말로 붓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우데파사는 슈바라는 외모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짜 슈바라라는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적인 것이 밖으로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외모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스스로 슈바라라고 말하는 자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일을 두고 볼 일이지, 그 자리에서 믿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산자이 수행장에 찾아갔을 때도 그는 오랫동안 머물면서 가르침을 배우고 연구하며 수행을 쌓고 있었다.
  아사지는 농가에서 아침 보시를 얻어 수행자가 기다리고 있는 라자그리하의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걸어가면서 내내 환자 걱정을 했다.
  우파데샤는 큰 나무 밑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저쪽에서 걸어오는 젊은 아사지의 움직임과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파데사는 여느 수행자와는 달리 침착하고 환한 아사지의 얼굴에서 시선을 땔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우파데사는 이렇게 직감하고 한 마디 중얼거렸다. 아사지가 그 앞으로 지나갔다. 우파데사는 아사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만 말을 건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아사지의 뒤를 밟으며 말붙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사지는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으며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우주만큼 넓은 마음을 만들기 위한 보살의 길에 정진하고 있었다. 아사지는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이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논쟁을 걸어오면 마음이 흐트러지기 쉽다.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예정한 선정이 장소를 피해서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따른 자는 집요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사지는 할 수 없이 큰 나무의 그늘을 찾아가 앉았다. 그리고 탁발한 죽을 먹으려는데, 뒤를 따르던 자가 말을 걸었다.
  "수행자님, 제발 여기에 앉아서 아침 공양을 하십시오. 저는 바라문 출신의 우파데사라는 수행자입니다. 제 청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우파데사는 자기보다 연하로 보이는 아사지에게 풀로 깐 방석을 깔아주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아사지는 우파데사의 말씨와 태도 등을 보고 논쟁을 걸어올 수행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무 데나 상관없으니 수행자님이 앉으십시오. 저는 연상의 수행자로부터 방석을 양보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아사지는 그가 사람을 잘못 보고 착각했을 거라 생각하고 방석을 사양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이 방석을 깔고 앉으십시오. 이제까지 여러 곳에서 수행하며 많은 수행자를 만나보았습니다만 당신처럼 평안한 얼굴과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수행을 쌓으면 그 같은 경지에 이룰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우파데사는 아사지 앞에서 무릎을 끓고 가르침을 청했다. 아사지는 할 수 없이 방석 이에 앉으며 수행자에게 부디 고개를 들어라고 말했다.
  우파데사는 머리 위에 두 손을 합장하고 손윗사람에 대한 예를 올렸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공양을 드시면서 천천히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우파데사는 고개를 들어 아사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사지가 말을 이었다.
  "저는 북국인 카필라성 출신이며, 샤카족의 왕자인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아사지라는 사람입니다. 왕자님의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그의 신변을 보호해 온 지 벌써 8년이 됩니다. 그동안 가혹안 수행을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왕자님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정도를 설법한지 벌써 일 년 반이 지났습니만, 저는 아직도 붓다의 법을 당신에게 가르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신처럼 겸손한 제자가 있다는 것은 그 스승이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붓다의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들려주십시오."
  우데파사는 아사지를 만나 붓다의 이야기를 듣자, 그때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그리움과 기쁨이 가슴 속에 치밀어올랐다.
  아사지는 붓다의 법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궁리하면서 설법을 시작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혀로 느끼는 맛, 그리고 코로 맡는 냄새, 피부로 느끼는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집니다. 현재에 묶어둘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라지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집착은 삶을 살아가는 데 고통을 낳고, 시간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슬픔을 만들어냅니다. 시간은 항상 흐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고 한탄한다면 더 불행해질 것입니다. 늘 건강하게 살고 싶어도 병에 걸리기 됩니다.
  세상은 욕망을 채우지 못했을 때 느끼는 괴로움과 친한 사람과 이별, 사별했을 때의 슬픔, 온갖 고뇌로 가득 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뇌는 원인과 결과이 법칙에 의해 만드러지는 것입니다.
  우파데사는 눈빛을 반짝이며 아사지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귀에 담았다.

 

 

   
    < 전생의 제자들 >


  아사지는 붓다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계속했다.
  "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설법합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거의 대부분이 인드라, 야마, 알카, 바르나, 바르라, 마유, 아그니, 찬드라, 마도라 등 여러 신을 모시고 풍부한 수확과 가정의 안전, 욕구 충족 등을 비는 타력 신앙으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혹독한 육체 고행으로 암흘 속을 헤메고 있습니다. 마음과 행동의 기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수행자들 가운데에는 긴나라, 마고라, 가루라, 아크샤, 나가 등을 믿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붓다는, 대우주의 달마[법]는 인간이 지식과 야욕이 끼어들 수 없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이며, 이 법이야말로 마음과 행동의 척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자연의 섭리야말로 마음과 행동의 척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자연의 섭리야말로 정법인 것이며, 그를 본받은 생활을 통해서 인간은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생만물은 상호 의존의 관계 속에서 생명이 유지되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초목은 물, 태양, 비료, 그 밖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자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식물, 동물을 비로소한 대자연계가 존재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보존하려고 하면 이 자연계의 조화는 보전될 수 없습니다. 붓다가, 정법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중도이며, 그 중도를 인간이 마음과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생활할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 팔정도입니다. 이 팔정도를 일상 생활의 척도로 삼고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나가야 하며 과거에 저지른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반성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정화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데파사는 아사지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마음 속에 구름처럼 끼여 있던 의문이 한꺼번에 걷히는 것을 느꼈다. '붓다야말로 진짜 지도자다'는 생각과 함께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속에 치밀어올랐다.
  "아사지님, 고맙습니다. 저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어떻게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저를 붓다에게 인도해 주십시오. 제겐 고리타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아산자의 제자로 있습니다만 진짜 붓다를 만나면 함께 입문하기로 굳게 약속한 사이입니다. 부디 그 친구와 함께 입문하고 싶은 저의 희망을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고리타의 수행장으로 달려가서 그에게 이 엄청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뵐 수 있도록 약속해 주십시오. 부디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그는 아사지를 향하여 합장을 했다.
  우파데사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찾아헤매던 스승을 만나게 된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당장 아사지를 따라 붓다의 품속으로 뛰어들고 싶기도 해쑈다.
  "우파데사님, 지금 바로 돌아가서 붓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모래 이 시각에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모레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우파데사의 머리 둘레에 연한 황금빛이 달무리처럼 아름답게 어렸다.
  아사지는 우파데사의 마음 속에 법등이 켜진 것을 마음이 눈으로 보고 기뻐했다.
  "모레, 친구와 함께 나와서 다시 뵙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우파데사는 아사지에게 절을 한 번 올리고 자리를 떴다. 부드러운 바람이 우파데사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우파데사를 배웅이나 하듯 바람이 잎새을 흔들며 상쾌한 소리를 만들었다.
  우파데사는 날란다의 수행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 바삐 고리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설레이고,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수행장으로 달려갔다. 수행장에 이르니 고리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많은 후배들 앞에서 바라문교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고리타도 우데파사와 마찬가지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우파데사는 부드러운 얼굴이지만 고리타의 눈은 날카로운 편이어서 행동이나 모든 것이 빨라 보였다.
  제자 하나가 고리타 곁으로 가서 우파데사의 내방을 알렸다. 고리타는 금방 이야기를 중단하고 우파데사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있었어?"
  "그래, 여전하지. 너는 언제 보아도 기운이 넘치는구나. 여기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설법 솜씨는 여전히 대단하구나."
  "천만에, 우데파사 네 화술에 비하면 어림없지. 모든 것이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소리내어 웃었다.
  "고리타, 굉장한 소식이 있어. 우리가 찾던 위대한 성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더. 아사지라는 수행자를 어제 라자그라하의 숲에서 만났어. 그가 내일 우리를 붓다에게 안내해 주기로 했어. 우리 함께 가자."
  우파데사의 얼굴은 진지했다. 보통 때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고리타는 묵묵히 우파데사의 반작이는 눈빛을 응시하면서 이번에는 진짜 붓다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감하였다.
  "우파데사, 그것 참 잘 됐다. 내가 그 수행자의 말을 듣고 오랜 의문이 풀렸다니,그 스승은 진짜 슈바라일 거란 예감이 드는구나. 당연히 함께 가야지."
  둘은 형제처럼 다정했다.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사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많은 수행자를 만났지만 마음에 빛을 채워주는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찾아갈 때마다 기대를 했지만, 실망만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른 듯싶었다.
  우파데사의 말을 들은 고리타도 붓다를 만납고 싶은 생각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물론 그날 밤 제자들 몰래 살그머니 수행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가는 곳은 붓다가 있는 라자그리하였다. 나무로 가득 차 미로 같은 산길도, 붓다라는 마음의 등불이 안내해 주고 있기 때문일까, 그들은 두렵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붓다란 어떤 분일까? 슈바라의 경지란 어떤 것일까? 여태까지 만나본 수많은 수행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지만 그 누구도 해당하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감싸안으며 이해하는 위대한 인물을 상상하면서 걷는 그들으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번지기 시작했다. 밝아오는 새벽 하늘의 둘을 내려다보든 듯 했다.
  "고리타, 좀 쉬어가자. 밝은 모습으로 슈바라를 만나기 위해서는 좀 쉬었다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그래, 그렇게 하자. 피곤한 모습으로 뵙는 것은 오히려 실례가 될 거야. 여기까지 왔으니 좀 쉬어도 정도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둘은 숲 속에서 동굴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들은 드러누웠다. 우파데사는 흥분이 가라않지 않았는지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아사지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풀밭에 주저 앉아 아사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도 이루지 않고 밤새 걸어왔지만 둘은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혈색도 더 좋아졌고 힘이 솟아났다.
  오래지 않아 아사지는 약속한 장소에 나타났다.
  "붓다는 두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사지님, 그저께는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오늘도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우데파사는 옆에 서 있는 고리타를 소개했다.
  고리타도 아사지의 모습을 보며 이런 제자의 스승이라면 붓다가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 고리타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사지는 서둘러 붓다가 계신 죽림정사로 둘을 안내하였다. 기증받은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넓고 아름다운 경관이의 죽림정사를 본 두 사람의 눈을 둥그레졌다.
  천 명이 넘는 수행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으므로 큰 규모임엔 틀림없지만 당당한 외관에 비해 소박하고 검소함이 느껴졌다. 더욱이 여느 수행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을 모시는 종교적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으며 수행자들의 집합 장소에 걸맞는 분위가가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림정사라는 이름처럼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붓다의 수행장은 인간의 마음을 살펴보는 분위기를 자아내어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사를 들락거리는, 검소한 복장의 수행자들의 밝고 부드러운 몸짓이 눈에 띄었다. 아사지는 간부의 한 사람인 듯했다. 그를 스치는 수행자들마다 모두 한 번씩 절을 올렸다.
  붓다의 거실에 이르자 둘은 굳어졌다. 인사를 올리고 붓다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둘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던 붓다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의 우파데사, 저쪽이 고리타군요. 잘 오셨습니다. 두분은 지금까지 여러 곳을 찾아헤메었군요. 스승을 만났으니 이젠 다행입니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않고 걸어왔는데도 피로해 보이지 않는군요."
  검소한 옷차림과 꾸밈없는 말씨와는 달리 붓다의 위엄 있는 모습에 둘은 압도당하여 입이 얼어붙은 듯했다.
  "붓다님. 저희들을 제자로 거두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우파데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는 붓다를 보는 순간 옛날의 스승을 만난 것 같은 감회에 사로잡혀, 끓어오르는 감격을 가까스로 참았다.
  고리타도 아까부터 가슴 속에서 일렁거리는 감격의 파도를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는데, 우파데사가 제자로 거두어 달라는 말을 하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이런 모습은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오랜만이라고 엉엉 우는 것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붓다의 볼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지금까지 체험한 고생은 모두 헛수고가 아니었다. 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일상 생활 속에 살려나가면 지금까지 익힌 지식은 지혜가 되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앞으로는 단단히 수행하기 바란다. 두고 온 제자들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고 결정을 내린 후에 다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파데사와 고리타는 따뜻한 말씨에 감격하여 대답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만나고 돌아오겠습니다."
  대답을 했지만 둘은 붓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붓다의 제자가 된 그들은 서둘러서 날란다의 수행장으로 향했다.
  우파데사는 아버지 데사와 사리에게 죽림정사에 있는 붓다의 제자가 된 사연을 알렸다. 아들의 느닷없는 소리에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아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는, 위대한 붓다에 귀의할 수 있게 된 아들의 전도에 기쁨과 기대를 걸었다.
  "잘 됐구나. 슈바라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이젠 너도 소원을 성취한 셈이로구나. 앞으로는 몸과 마음을 더욱 단련해서 훌륭한 수행자가 되거가. 아산자 스승에겐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정중한 인사를 올린 다음에 하직하도록 하거라."
  어머니 사리는 언제나 자식에게 예의바른 행동을 하도록 가르친 훌륭한 부인이었다.
  "스승님, 제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이 제게 인생에 대한 의문을 안겨주셨습니다. 만약 의문이 없었다면 저는 다른 수행자와 다를 바 없이 어두운 기릉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 의문을 풀어준 붓다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찾아헤매던 분입니다. 저는 라자그리하로 떠나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우파데사는 아산자에게 붓다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고 승낙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산자는 우파데사의 청원을 기분 나쁘게 여기며 파문 조치를 내렸다.
  아산자도 봇다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들이 우파데사를 따라 붓다의 제자가 되기 위해 떠난다는것을 알고 나서 분노로 가득 차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산자는 우파데사의 형인 바라다니야 바샤바를 불러 동생의 무례를 호되게 꾸짖고 바라문의 방침에 따른 무거운 징벌을 내렸다. 당시의 바라문은 오늘날의 불교처럼 각 종파로 갈라져 서로 자기 종단의 세력을 확장하며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종파 교리야말로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아산자가 거느리고 있던 바라문도 마찬가지였으며 남을 보면 반성하는 태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아산자는 두뇌가 명석하고 화술 또한 뛰어났지만, 마음이 좁아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에 더 어울린 인물이었다. 그의 설법을 한 번 들으면 이해가 되었지만 몇 번 들어보면 말만 거창하게 구사한다는 인상을 받아 그의 곁을 떠나는 자가 많았다.
  아산자는 제자들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서약서를 받아 놓았다. 그는 성격이 강하고 전투적이어서 외관으로 봐서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엿볼 수도 있었으나 마음의 헤아림이 없어 신도들을 잘 이끌지 못했다.
  우파데사와 고리타는 그런 스승 밑에서 바라문을 공부하고 있었으나, 스승의 교리와 행동에 모순을 느껴 진작부터 슈바라를 찾고 있던 터였다. 붓다를 만나 귀의하기로 결심한 우파데사는 스승의 분노를 각오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산자는 종교가의 태도라고 말할 수 없는 신경질적이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우파데사를 내몰았다.
  신앙이 광신이 되고 사상과 교리에 굳어지면 주위의 상황과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폭언도 맹신도들에게는 좋은 모습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그런 상태에 이르면 신앙은 끝난 것이다. 그는 약장수와 다를 바 없다.
  신앙의 세계는 사상과 자신의 주장이 따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더라도 세월이 흐르는 사이, 하나의 규율이 생기고 그 규율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이것을 없애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교리의 모순이 있으면 있을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교리의 모순을 인정하게 되면 그 신앙은 근본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의 기준에 맍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멀리하는 길밖에 없다.
  특히 신앙은 생활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정치와 결합하기 쉽다. 신앙과 정치가 수레바퀴처럼 함께 움직일 때, 이를 이끄는 지도증의 마음이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에는 관신적 집단이 되기 쉬우며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동서양을 막록하고 수없이 일어났으며 지금도 분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보면 잘못된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도 남는다.
  당시의 인도는 온갖 종파가 서로를 비난하는 어지럽고 혼란스런 사회였다. 피로써 피를 씻는 전생의 연속이었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는 싸움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붓다는 이러한 가운데 주의와 주장은 정법이 아니며 정법을 이해 못 하는 자가 나타나도 인욕이라는 두 글자를 잘 지켜 분쟁에 휘말려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우파데사는 아산자의 맹렬한 비난을 태연스레 받아넘기고 형의 충고도 조용히 물리친 후 고리타와 그들의 후배들과 제자들을 거느리고 붓다에게 귀의했다.
  붓다는 둘을 가까이 앉히고, 죽림정사의 제자들을 한 곳에 불러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 새롭게 귀의한 수행자들을 소개하겠다. 이쪽이 우파데사이고 그 뒤에 앉아 있는 수행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우파데사는 머지않아 여러분들에게 법을 가르치고 여러분들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또 우파데사의 왼쪽에 앉아 있은 수행자는 고리타라고 하며 우파데사의 절친한 친구이다. 어릴 때부터 수행의 친구이며 동지다. 우파데사와 마찬가지로 곧 아라한이 되어 여러분을 지도하게 될 것이다. 이분들은 모두 오늘로부터 붓다에 귀의하였고, 붓다의 달마에 귀의했으며, 승단에 귀의했다. 여러분들도 단단히 법에 의지하여 수행에 더욱 힘쓰기 바란다."
  붓다의 말을 듣고 선배 제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오늘 들어온 제자가 선배를 지도하게 된다는 붓다의 말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선배가 후배를 지도하는 것이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느 습관이다. 언제까지나 선배가 후배를 평생 지도할 수는 없다. 선배를 공경한다는 것과 선배가 죽을 때까지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영혼의 능력에 따라서는 후배가 선배를 가르칠 때도 있다. 이런 일은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우파데사와 고리타는 붓다가 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마음이 죄어오는 것처럼 느꼈다.

 

 

   
    < 지옥 영혼을 위한 공양 >

  우파데사와 고리타는 붓다에 귀의함으로써 지난날을 반성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수행에 임하겠다고 여러 제자들 앞에서 결심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죽림정사의 청소는 물론, 함께 붓다에 귀의해 온 자신들의 제자의 옷을 세탁하는 일까지 거둘었다. 어제까지만해도 제자들이 그들의 신변을 돌보자었는데 오늘부터는 모두 같은 붓다의 제자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사람은 힘들었지만 참고 견디었다.
  설법이 있는 날엔 붓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신리를 한마디라고 놓칠세라 정신을 집중하고 듣고 마음에 새겼다. 그런데 두 사람의 태도가 진지할수록 주위의 선배 제자들의 불만은 더 크게 쌓여갔다. 그들은 붓다가 앞에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으로는 두 사람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이 무렵 야사는 고향 바라나시로 돌아가 붓다의 법을 가르쳤다. 바라문에서부터 수드라엑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야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귀의시키려고 노력했다. 한 고장에 귀의자가 많아지면 붓다를 초청할 수 있기 때문에 야사는 부모님과 함께 밤마다 머리를 맛대고 의논했다.
  그곳에서 야사의 이미지는 좋았다. 야사의 남자다운 용모와 이름 있는 집안의 외동아들이라는 조건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다 그가 설법하는 붓다의 가르침은 남녀, 계급의 차별이 없었으므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여성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적지 않았다.
  야사가 출가한 이유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그런만큼 여성에 대해 야사는 엄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어떤 유혹에도 그는 넘어가지 않고 금욕을 지켰다. 비록 자신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마음의 바늘을 항상 정도에 맞추어 생활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야사는 여덟 가지의 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고 마음과 행동을 다스려나갔으며, 하루도 고삐를 늦추지 않앗다. 그는 마음이 구름이 걷히지 않을 때는 마가다의 죽림정사에 있는 붓다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우루벨라 캇사파는 예전에 믿었던 아그니 화신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150세를 넘긴 연륜이 붓다의 위대한 법을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뒤늦게나마 겨우 얻게 된 올바른 불법이 비로소 평안한 마음을 얻게 해주었다.
  그는 죽림정사가 있는 숲 속에서 묵묵히 명상에 잠겨 삼매의 경지에 빠졌다. 두 명의 후배도 그와 마찬가지로 수행에 정진하고 있었다.
  죽림정사 교단에서 활약하는 주된 지도자는 코스타니야와 아사지, 밧데아, 마하 나마 등 카필라성 시절부터 붓다와 함께 생활해 온 제자들이었다. 이들이 다른 수행자들을 돌보며 지도했다.
  우파데사와 고리타의 등장으로 죽림정사의 수행자들 사이에 동요가 심하게 일어났다. 두 사람에 대한 비난의 말들이 일기 시작하더니 점점 확대될 기세를 보였다.
 
코스타니야가 재빨리 붓다에게 물었다.
  "붓다, 아산자의 제자들이 들어온 후, 고참 수행자들 사이에 불만이 가득 찬 소리가 들립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붓다는 이미 이러한 교단으 흐름을 읽고 있었다. 붓다는 코스타니야에게 저녁 설법 시간에 모두들 빠짐없이 참석케 하도록 지시했다.
  코스타니야는 붓다의 방을 나서자마자 '오늘 밤 집회에서는 중대한 발표가 있으니 모든 수행자들은 집합하라'는 회람을 돌렸다.
  수행자들은 중대한 발표란 무엇일까, 저마다 궁금증을 안고 집회장으로 모였다. 집회 전에 제자들은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체험담과 신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로몬들의 얼굴은 모두 밝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빨리 아라한이 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쫓겨 반성의 명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학대하며 괴로워하는 자도 있었다. 선배나 친구들보다 이것저것 지도들 받으면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있었지만 제자들이 많아질수록 수행의 속도는 차이가 많았다.
 

붓다가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드려냈다. 광장에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인간은 누구나 전생윤회를 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저 세상과 이 세상 사이를 오고 가는 전생윤회의 과정에 우리들은 살고 있다. 마음을 잃기 쉬운 이 세상에서 영혼을 위해 새로운 체험을 학습하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에는 낙고 여린 믿으으로 일찍부터 나에게 귀의한 자도 있다. 또 전생에서 넓고 풍부한 마음을 지닌 사로몬들도 있다. 전생에서 나와 인연이 닿아 정도를 배웠고, 이생에서 선배와 후배로 구분하여 그 사람의 영혼의 크기를 저울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파데사와 고리타 두 사람은 전세에 붓다의 제자로서 보살의 깨달음을 이미 이루었었다.
  사로몬들이여, 금세에서 일찍부터 붓다와 인연이 닿아 귀의한 자는, 팔정도를 행동의 척도로 삼고 날마다 수행에 정진하였다면 이런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마음 속에 전생의 체험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위대한 지혜의 문은 누가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열어야 한다. 여러분이 법을 실천할 때 그 문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주인은 스승이 아니라 자신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위대한, 내재된 지헤에 도달함)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조화로운 평안의 경지, 피안(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사로몬들이여, 금세에 한정하여 선배와 후배 사이를 불평불만해서는 안 된다. 불평 불만은 자기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욕망은 마음을 왜곡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고 스스로 고뇌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런 작고 좁은 마음은 가져서는 안 된다. 금세에서 제자로 일찍 입문한 자들은 후배들에게 보다 겸허한 마음과 행위로써 대해야 할 것이며 자기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의 설법은 모든 제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불만을 토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붓다의 법에서 벗어났던 자들도 자신들의 마음이 좁고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사로몬들이여, 나는 과거 여섯 부처의 전생을 통해서 중생들의 마음에 법등을 밝히고 조화롭게 만들었다. 여러분들은 전생의 인연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도 제자가 되었다. 우파데사와 고리타는 내 여섯 부처의 전생을 모두 빠짐없이 체험한 제자들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여러 스승을 찾아헤매면서 불법을 찾다가 이제 겨우 나와 인연이 닿은 것이다. 그런 연유로 우파데사와 고리타의 육체에서 비치고 있는 빛은 충만한 형태를 가진 것이다. 여러분들도 법을 믿고 생활에 정진한다면 자신의 누능로 그 광명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붓다가 여기까지 말하자 아사지가 일어나서 물었다.
  "제가 우파데사를 처음 만났을 때, 머리 둘레에서 엷은 황금색 빛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의 그 빛은 훨씬 커져서 몸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후광의 크기에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붓다는 아사지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사지야, 장마철이면 가가다국의 하늘은 구름이 덮여 햇빛을 볼 수 없다. 또 장마철이 지나더라도 이따금 구름이 끼면 햇빛은 가려진다. 붓다의 법을 의지하고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바르게 하여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의 구름이 벗겨지고 반성과 선정의 정도에 따라 빛의 크기는 차이가 나는 법이다. 우파데사, 고리타는 이미 오랜 전생으로부터 붓다의 법에 귀의하여 수행에 정진하여 왔으므로 마음이 구름이 벗겨져 있다. 머지않아 아라한이 될 것이며, 더욱 수행을 쌓아 보살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붓다의 설법은 아시지의 질문에 의해서 더욱 실감 있게 수행자들에게 전달되었다. 붓다의 모습은 제자들이 밝힌 등불에 비쳐 어두운 죽림정사 광장에 우뚯 솟다 있었다. 그리고 그 몸에서는 후광 이외에도 여러 줄기의 강한 빛이 사방으로 빛났다. 지평선에서 붉게 솟아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 붓다의 빛은 환하게 수행자들을 비추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붓다의 빛을 처음 목격하는 자도 있었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퍼지는 강한 빛에, 감탄과 존경의 마음으로 사로잡혔다.


  붓다의 설법이 있은 지 이레가 지났다.
  고리타는 붓다의 법을 단단히 마음 속에 새겨,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과거를 하나하나 둘춰내 반성하고 마음의 구름을 벗겨나갔다. 이레째 되는 날 갑자기 눈앞에 선명한 광명으로 충만하더니. 여때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격이 전개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떠한 풍경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고리타는 이 경험을 한 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삶의 기쁨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여러 현상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붓다의 위대한 모습을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리타는 친구인 우파테사에게 그 심경을 털어놓았다.
  "우파데사, 나는 어제부터 붓다의 빛에 싸여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삼매의 경지를 알게 되었다네, 아사지가 말하는 것처럼 붓다의 후광은 몸 전체에서 나오고, 그야말로 위대하다는 형용사 이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네. 우파데사,너의 몸에서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엷은 빛이 발산되고 있고 오른편에는 브라흐만 같은 분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네."
  고리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한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눈을 끔벅이며 우파데사의 오른족에 서 있는 빛의 천사를 몇 번이나 응시하였다.
  "너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축하하네, 나는 아직 마음의 때가 너무 많아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네. 아직 법의 실천이 부족한가 보네." 
  우파데사는 고리타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축하애 주었다. 동시에 자신을 반성했다.

  며칠 뒤의 일이었다. 고리타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떤 세계에서 생활하고 계실지 무척 궁금했다. 그는 눈을 감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러자 살아 계실 때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가 보인다. 혼자 쓸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어디가 불편한 것일까?"
  고리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어두운 곳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고리타의 집 근처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물을 마시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리타는 일어나 그릇에 물을 담아 어머니께 드렸다. 그런데 물이 가득 찬 그릇을 어머니 입술까지 가져가면 물이 불로 변해 버렸다.
  고리타는 몇 번이나 물을 떠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어머니에게 물을 드리고 싶었지만 번번이 불로 바뀌어버렸다.
  고리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붓다에게 자신의 체험을 말씀드리고 그 이유를 물었다.
  "고리타여,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다니 축하한다. 참으로 잘 정진했다. 그리고 그대의 어머니는 생전에 바라문 가문의 출신으로 많은 신자들로부터 보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었고 은헤를 베풀지 않았으며, 자아가 강하고 허영심이 많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불로 가득 찬 지옥에 있는 것이다."
  붓다는 고리타의 눈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붓다의 말을 들은 고리타는 한참 동안 엄청난 충격에 빠져 입을 열지 못했다. 고리타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어 붓다에게 물었다.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를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제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겠습니다.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고리타는 어머니는 자아가 강했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실을 고리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만큼 어머니의 불행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붓다의 제자가 되어,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은 전생의 약속에 의해서 맺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를 구할 수만 있다면 구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고리타여, 어머니는 어머니의 생명이고, 네 생명은 너 자신의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육체를 얻어지만 영혼은 별개라는 것을 알야야 한다. 강가강 위에 배들이 떠 있다. 하지만 배를 움직이는 뱃사공은 다 다르다. 이처럼 육체를 움직이는 마음의 뱃사공도 별개인 것이다."
  "육체는 얻었지만 영혼은 별개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육체는 인생 항로를 건너는 배에 지나지 않다.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일생 동안의 체험을 영혼은 남김 없이 수록한다. 후에 육체에서 벗어나 자신이 체험한 내용과 연결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어머니께서 지옥에 떨어진 원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리타는 이해했다.
  "붓다, 그러면 어떻게 공양해야 좋겠습니까?"
  "너의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지은 죄에 맞는 세계로 가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죄의 대가가 보상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 것이며, 마음의 구름이 벗겨졌을 때 비로소 광명의 세계로 승천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당사자 자신에게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육체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은혜는, 어머니가 하지 않았던 보시행(布施行)을 일 년에 사흘쯤은 해드려라. 그리고 어머니가 왜 지옥에 떨어졌는가를 알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올바른 기준을 잊어버리고 오관에만 마음이 붙들여 번뇌의 인생을 보낸 자는 그 마음에 맞는 세계에 가게 마련이다.
  인연이 원인과 결과는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은 죄이므로 살아 있는 후손들이 정법을 몸소 실천하고 설명해 주면 지옥령들이 반성이 빨라지니 그대가 법을 의지하여 더욱 정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리타는 자신이 완성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구출할 길이 없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겼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붓다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어머니로부터 육체를 얻었기에 가능한 것이니 어머니에 대한 공양이야말로 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리타여,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공양은 정도의 생활을 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며, 하루하루를 밝게 생활하는 길뿐이다. 붓다의 법을 공양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져 고뇌에 허덕이는 자에게는 마음의 양식이 된다."
  붓다의 설법을 고리타뿐만 아니라 여러 제자들도 함께 듣고 있었다. 그들도 자기 확립이야말로 조상에 대한 최대 공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승의 지옥계는 악으로 가득 찼으며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승이 가족이나 친한 사람에게 구원을 얻으려고 집요하게 접근하려 한다. 낮선 사람에게 손을 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은 드물다. 친한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옥은 4차원이 세계다. 3차원의 세계인 현실 세계에서는 지옥이 보이지 않지만 4처원에서는 3차원이 잘 보인다.
  지옥령은 가정이 밝을 때에는 그 빛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어두운 상념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가정이 어둡고 노여움이나 불만이 가득하면 그 가정에 안주할 수 있게 되어 가족들의 의식 속에 침입하여 지옥에서의 고통을 벗어나려고 한다.

  이승과 저승의 관계는 인간의 마음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이승이 혼란하면 저승도 시끄러워지고 이승이 평화로우면 저승도 조용해진다.
  즉 조상을 진정으로 공양하는 길은, 우선 가정이 명량하고 밝아져서 조상의 영혼에 반성의 빛을 보내줄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또 가정이 밝아짐으로써 지옥에 있는 영혼의 수도 줄어들고 이 세상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빈도도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지만, 사람들이 육체에 집착하여 많은 번뇌에 사로잡혀 자기 보존을 위해 사는 동안에는 조상을 공양하는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불단에 재물을 차려도 지옥령은 먹을 수 없다. 어려운 경문을 독송하여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있다. 조상 공양은 지옥령을 천상계로 승천시키는 데 그 뜻이 있는만큼 어디까니나 살아 있는 가족들이 붓다가 설한 정도를 잘 지켜 그들에게 반성의 빛을 보내주어야 한다.
  우란분제의 사흘 공양이 갖는 원래 의미는, 여러 가지 일로 일에 쫓겨 봉상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 1년을 통해서 적어도 사흘 동안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보시하는 데 있던 것이다.

 

 

 

        < 전염병>

  한편 우파데사도 법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자신이 걸어온 상념과 행위의 잘못을 엄격하게 반성하여 마음을 다스렸다.
  어느 날 붓다가 우파데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우파데사, 그대는 지금까지 체험한 지식이 법의 실천에 의해 지혜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 마음의 구름도 활작 개어 삶의 기븜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쁨에 젖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음 속이 확 트이고 붓다의 가르침이 제 마음이 비뚤어짐을 바로잡아 깨끗이 씻어주며, 붓다를 생각하기만 해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샘이 솟아오릅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파데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붓다의 자비로운 말씀을 듣고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마음 감동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붓다는 우파데사의 마음 속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그가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것을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우파데사, 그대는 바라문 계급 특유의 논쟁적인 지식을 몸에 익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지식의 껍질을 벗고 좁은 마음을 법등으로 크게 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상계의 모든 일들을 지식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붓다의 법을 진심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정도의 생활은 솔직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인만큼 나타난 결과에만 마음이 빠지게 되면 아무리 풍부한 지식이 있다하더라도 진실을 파악하기가 어렵고 판단을 그르친다."
  이렇게 말하고 난 붓다는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을 우파데사의 머리 위에 가져가 빛을 넣었다.
  손바닥을 쬐는 순간 우파데사의 몸에 진동이 일어났다. 그의 몸은 따뜻한 열기로 둘러싸였다. 붓다의 손바닥에서 쏟아져나오는 빛 때문이었다.
  빛을 받은 우파데사의 입에서 전생의 고대어가 쏟아져나왔다. 그 고대어는 줄줄이 이어져 그칠 줄을 몰랐다. 붓다의 의식도 전생으로 달려가서 우파데사를 안고 서로 고대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운 회포를 풀었다. 그때는 이러했고 저때는 저리했다는 등 전생의 옛 일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화엄경십지품>에는, '그는 여러 가지 옛날 주소를 기억한다. 일생을 기억하고, 2. 3, 10, 100본의 생을 기억하고, 파괴의 가르마, 생성의 가르마, 파괴와 생성의 가르마, 백 가르마, 천 가르마, 억 가르마, 수백억 무수의 가르마을 기억한다'고 기록하여 영도 현상(靈道現像)과 전생의 기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전생윤회는 여러 가지 경험의 연속이며 어느 때는 군이으로, 어느 때는 농부로, 또 어느 때는 승려로 이승의 삶을 살아오면서 영혼의 발전을 도모해 왔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신의 마음을 이해해 가는 것이지만 졍우에 따라서는 신과 부처의 마음을 거슬러 잘못된 길을 걷게 되기도 한다. 항상 신불의 뜻에 부합되는 생활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유아의 마음은 집착이 없어 신의 마음에 가깝지만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스스로 생활할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신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정법이다.
  '가르마'란 오온(五蘊)의 생활 행위를 말한다. 오온의 생활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한다. 색(色)은 현상 세계를 의미하고, 수(受)는 그 세계를 인식하여 받아들이는 오관을 말한다. 상(想)이란 오관에 바탕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하며, 행(行)이란 오관에 바탕을 둔 생활 행위를 말한다. 식(識)은 모든 관념 인식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오온의 생활이란 육체의 오관이 만들어내는 가르마의 생활이다. 가르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신의 마음을 구할 수 없다.
  <십지품>은 전생의 기억을 가르마로써 설명하고 있지만, 신리에 비춘 생활 행위는 가르마을 초월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생사의 고통이 없기 때문에 설명이 불충분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우파데사는 전생이 기억이 되살아나자 그동안 헤어졌던 부모님을 다시 만난 듯한 감격과 기쁨에 젖어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지혜의 문을 열어 나갔다.
  붓다의 예언대로 우파데사도 고리타도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婆羅蜜多)하여 자기 완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죽림정사 수행자들의 옷은 언제나 초라했으면 한 벌로 일년을 살았다.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옷은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붓다가 그런 습관에 젖어 있었으므로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붓다의 버릇을 따르고 있었다. 목욕이안 세탁은 각자 마음대로 했으니 대부분 지저분 한 상태로 지냈다.
  붓다는 피로가 쌓여 병이 났다. 쉬지 않고 제자들에게 설법을 계속해 온 것이 큰 원인이었지만, 비위생적인 생활도 한몫을 했다. 붓다는 몸이 불편한 것을 기회로 삼아 조용하게 자신을 반성하며 휴식을 취했다.
  붓다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빈비사라왕의 귀에 들어갔다. 왕은 즉시 자신의 주치의인 시바카를 붓다에게 보냈다.
  "붓다가 가르치는 법은 우리들 마음에 평안을 주고 어두운 인생에 빛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신 임금님의 염려는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임금님의 분부를 받들고 찾아왔습니다. 붓다의 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부디 몸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시바카는 붓다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고맙소.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쉬지 않고 설법을 하고, 음식을 제때 먹지 못해서 몸이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푹 쉬었더니 이젠 괜찮습니다."
  붓다가 일어나려고 하자 시바카는 황급히 붓다의 어깨를 누르며 말렸다.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누워 계십시오."
  붓다는 이미 회복되어 안색이 좋아졌지만 시바카는 가져온 약초로 만든 환약을 붓다에게 권했다.
  며칠 뒤 시바카는 다시 붓다를 찾아 왓다. 붓다는 완쾌되어 방에 앉아 있었다.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것은 참으로 큰일입니다. 집단 생활은 특히 위생 문제를 소중히 다르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전염병이란도 들게 되면 많은 희생자를 만들 것입니다.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럽습니다만 지금과 같이 땀내 나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가는 몸이 쇠약해졌을 때 매우 위험합니다. 방도 청결하지 않고 주변 환경 역시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전염병은 청결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의사의 입장에서 청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제발 저에게 그 일을 시켜주십시오."
  시바카는 붓다의 검소한 생활은 집착을 떠난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소와 불결은 다르다. 의사의 입장에서 붓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마운 일입니다. 왕을 치료하는 당신이 저희를 위해서 봉사해 주신다면 모두들 좋아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지시해 주십시오."
  시바카는 우선 밧데아와 상의해서 화장실 개선부터 착수했다. 폭 2미터, 길이 2미터의 구덩이를 20미터 길이로 파서 그 위에 이동식 판잣집을 세웠다.
  오물이 구덩이에 가득 차면 흙으로 덮고 다른 적당한 장소에 구덩이를 판 다음 판잣집을 이동시켜 화장실로 사용했다.
  화장실이 생기기 전에는 각자 적당한 장소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 습관이었다.
사람이 적을 때에는 그대로 괜찮았지만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정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해결한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개중에 급한 사람은 정사 근처에서 일을 보고 만다. 그런 일이 늘어나자 악취가 정사 안까지 스며들었다. 참선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더욱이 정사 주변은 악취와 함께 병균의 소굴이 되어 전염병이 원인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우선 화장실의 개선이 시급했던 것이다.
  다음은 승의(僧衣)의 개선이었다.
  죽은 수행자의 옷을 벗겨 입는 자도 있었으니 그 비위생적인 생활 태도는 심각했다. 제자들은 빈비사라왕의 보시에 의해서 항상 세탁된 깨끗한 승의를 갈아입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의복을 소중히 여겼다. 오늘날처럼 대량 생산이 되지 않았다. 한 조각의 천도 손으로 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노예들은 옷을 거의 입지 않고 일을 했으며 농부들도 거의 맨몸으로 일을 했다. 인도는 남쪽에 있는 더운 나라였으므로 의복을 걸치지 않아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사람들도 옷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계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복장은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의복만 보아도 어떤 계급인지 알 수 있었다.
  붓다의 제자들도 옷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들은 사물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물이나 귀중품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시바카가 캇시산(産)의 좋은 비단을 가져왔다. 그 비단은 날란다의 병을 고쳐준 답례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비단은 빈비사라왕이 입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비단이었으므로 시바카는 자신의 입기에 너무 과분한 듯싶어 적당한 사람을 생각하다가 붓다를 떠올린 것이다.
  "붓다님,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시바카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언제나 저희엑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소원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꼭 부탁으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요."
  "붓다는 이 지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초라한 옷을 두르고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이 비단은 어떤 분으로부터 답례로 받은 물건입니다. 제가 입기에는 너무 과분하고, 붓다께서 입으시면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시바카는 보자기를 풀고 비단옷을 꺼내어 붓다에게 바쳤다. 붓다는 시바카의 선물을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단옷을 입었다. 시바카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다.
  이 소문이 라자그리하의 부자 상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때부터 승의를 보시하는 것이 갑자기 인기를 끌었다. 이리하여 붓다의 제자들은 시바카의 뜻대로 항상 청결한 복장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붓다 교단은 우파데사와 고리타 두 제자가 합세함으로써 더욱 전교 활동이 활발해졌다.
  불법 포교가 적극적일수록 입문자의 수도 당연히 늘어나게 마련이다. 1주일간의 반성과 명상을 마치고 삼보에 귀의하는 자의 수가 날로 늘어났다.
  붓다는 우파데사와 고리타를 불러 말했다.
  "같은 이름이 많고, 너희들 자신도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다는 뜻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개명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저도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때를 벗기고 평화를 얻었으니 새로운 마음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지고 싶습니다.'
  우파데사는 '날란다의 우파데사'라고 불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을 붓다에게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우파데사, 그대의 모친은 마하 바라문의 부인으로서 남편을 잘 섬기고 중생에게 자애심을 베풀었으며 아이들도 잘 키웠다. 그대의 모친은 라자그리하의 마을에서도 소문난 현모양처다.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사리불[샤리부트라]'이라고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에, 어머니처럼 자애심이 풍부한 분의 이름을 이어받아 훌륭한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파데사는 붓다가 자기 어머니의 일까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는데 놀랐다. 슈바라의 위대한 초능력은 알고 있었디만 이런 개인적인 것까지 알아맞히니 놀랍고 기뻤다. 붓다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어 뿌듯했다.
  한편 고리타는 '목건련[몽가라나]'이란 이름을 받았다.
  사리불은 개명 후 날란다에 계시는 어머니를 유행(遊行)에 찾아가 뵈었다. 어머니는 변함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아들을 맞이하였다.
  "참 잘 왔다. 예전보다 얼굴이 한결 좋아졌구나. 어때, 수행은 힘들지 않느냐?"
  "어머니도 건강하시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어머니, 붓다로부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사리불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붓다는 어머니가 마음이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파데사, 너는 참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복을 누리고 있구나. 나도 기쁘기 한량없다. 부디 몸조심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되어서 낡은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붓다의 정도를 가르쳐주어라. 네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는 기쁨을 누를 길이 없었다. 바샤바도 아산자 밑에서 수행하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네가 있는 데로 찾아가겠다고 벼르고 있단다."
  "형이 그런 말을 하셨단 말입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형도 틀림없이 정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지름길이며 중생을 제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체험으로 깨달은 것인만큼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전생에서도 붓다 밑에서 정도를 정진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붓다와 손을 잡고 전생의 추억담을 나누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 붓다는 참으로 위대한 분입니다. 슈바라의 경지라는 것은 직접 만나 가까이에서 보지 않고서는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은 편안하며 지금까지 배워 온 지식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지혜가 마음 속에 있다는 거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마음 속에 품어왔던 모든 의문이 다 풀렸으니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리자(舍利子:사리불)는 자신이 맛본 법열의 경지를 어머니에게 알려드리려고 애을 썼지만 만분의 일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좋아진 아들의 모습과 넓어진 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우파데사, 너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싱싱해졌구나. 무거운 짐을 내려옪은 듯한 환한 너의 얼굴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너무 기쁘구나."
  어머니 사리는 아들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리고 갑자기 무엇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붓다의 법을 아버지께도 가르쳐드려라. 네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 붓다의 가르침을 들으시면 아버지의 마음도 바뀔 것이다."
  "어머니, 붓다는 여느 스승처럼 어려운 말로 설법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법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일상 생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가르치고 있으며 알아듣기 쉬운 것이 특징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어머님도 아버님도 붓다의 법을 반드시 알게 되어 일상 생활 가운데 숨어 있는 영원한 생명과 인연을 이해하시게 될 기회가 올 것입니다."
  사리불은 유행중이 아니었으면 며칠 동안 머물러 부모님과 형에게 붓다의 법을 설명해 드리고 싶었다. 가족이 모두 붓다에 귀의하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기회로 넘기고 어머니의 곁을 떠나 죽림정사로 돌아왔다.

  동료들은 그를 우파데사라 부르지 않고 사리불이라고 불러주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들려서 어색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익숙해졌다. 고리타였던 몽가라나도 동료들의 부름에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어서 계속 -

----※출처: 『인간석가』원문의 저자 :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 ...「제 3장 연생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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