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6장 승단 생활-『인간석가』(高橋信次)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6장 승단 생활-『인간석가』(高橋信次)

어둠의골짜기 2010. 3. 16. 05:43

6장 승단 생활

죽림정사에서 생활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누구 하나 자신의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하였다.
붓다의 설법이 끝나념 제자들은
조용한 곳을 찾아 선정에 들었다.
붓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설법중에 잘못한 것이 없었는지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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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타베나의 기증>
 
  코살라국의 수도 쉬라바스티에는 큰 부자 아사다 판데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명 수닷타로 불리우며 마하 코살라 국왕의 신뢰도 두터웠고 많은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수닷타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워 구제 활동에 힘을 쏟고 있었다.
  어느 날 수탓타는 마가다국에 사는 의형 가란다의 집을 찾아갔다. 그가 대문에 들어서자 많은 하인들과 소작인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빈비사라왕의 일행이라도 오는 것일까?
  평소에는 그가 오며 반기던 사람들이 그날은 영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잠시 서 있었을 때 누군가 어깨들 두드렸다. 의형 가란다였다.
  "참 오랜만이구나. 코살라의 아우님. 오늘은 너무 바빠서 아우를 차분히 환영하지 못해서 미안하게 되었구나. 먼 길에 피로할 텐데 우선 편히 쉬게나."
  수닷타도 가볍게 고래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형님, 무슨 잔칩니까? 빈비사라 임금님이라도 오시는 겁니까? 온 집 안이 분주한데 제가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다. 오히려 마침 잘 왔다. 임금님이 아니라 붓다가 오신다. 붓다의 제자들에게 식사 공양을 올리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이 그날이다. 그 수가 무려 1천7백 명이나 된다는구나. 그 많은 제자들을 먹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지."
  수닷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포로키티슈바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아포로키티슈바라가 나타났다."

  아포로키티슈바라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라문교의 <베다>나 <우파니샤드>에 씌어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는 능력, 즉 깨달은 사람 붓다를 가리키고 있다.
 
  "코살라국의 마하 바라문의 예언자들로부터 위대한 슈바라가 출현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습니다만 사실이었군요. 정말 좋은 기회를 만난 것 같습니다."
  수닷타는 진작부터 그 붓다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만큼 의형의 말에 가슴이 뛰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수닷타는 안으로 안내되었다. 둘은 마주 앉아 다과를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형님,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고뇌 원인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을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활 행위는 팔정도(八正道)가 온갖 고뇌를 해결하는 유일한 척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고뇌의 원인은 위선적인 자아라는 자기 보존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에 그 원인이 있다. 나는 붓다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길이라고 확신하며,지금과 같은 마음 평안한 생활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렇군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본성은 분명히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본심이 소중하든 것이군요."
  '그렇단다. 바라문 계급만이 신의 사자라는 가르침에는 잘못이 있다는 거야. 지금까지 바라문 계급만 떠받들어 왔는데 붓다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며 차별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옳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해. 바라문 출신인 유명한 우루벨라 캇사파 대성선(大聖仙)도 붓다에 귀의하고 말았다. 훌륭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 자기가 받들던 아그니 화신을 버리고 제자를 몽땅 이끌고 붓다에 귀의했다는 것은 여간 훌륭하고 용기 있는 일이 아니야."
  "그랬던가요? 우루벨라의 수행장인 가야 다나를 버리고 붓다에 귀의하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붓다는 진짜겠군요. 붓다는 어느 나라 출신입니까?"
  "아우님과 같은 코살라국이지. 카필라서의 고타마 싯다프타라는 왕자란다. 바라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크샤트리야 출신이지. 깨닫기까지 몹시 고생을 하신 모양이야."
 
  수닷타는 이내 얘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일찍부터 바라문 계급에서 슈바라가 나타랄 것이라고 들어왔고, 또 그렇게 기대해 왔었는데, 형식과 우월감에 빠진 화석화된 바라문에서는 역시 슈바라가 나타나기는 틀렸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행도 타력적이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자세로는 이미 신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단한다고 볼 수 없었다.
  붓다는 틀림없이 붓다일 것이다. 그 붓다를 꼭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수닷타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붓다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도 만나뵙고 싶습니다."
  수닷타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가란다가 말했다.
  "대나무 숲인 벨르베나의 정사(精舍)에 계시지. 빈비사라왕의 발원도 계셨고, 나도 마가다에서 위대한 붓다가 법을 설할 장소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지어드린 정사야. 아우님도 쉬라바스티에 정사를 하나 지어 기증함이 어떻겠느가? 중생들이 붓다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말이다."
  "형님, 저도 이제 막 그런 생각을 하던 중입니다. 내일 아침 죽림정사에 가서 붓다를 꼭 만나뵙겠습니다. 형님, 마가다까지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금은보화보다 더 값진 것이 진실한 법을 설하는 붓다와 만나는 것입니다. 법등을 켜눈 분이야말로 나라의 보배입니다.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수닷타는 붓다의 이야기를 듣고 붓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감격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뇌리를 분주하게 스친 것은 정사를 세우는 장소, 규모, 방법 등이었다.
 
  하룻밤을 가란다와 함께 지낸 그는 첫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죽림정사로 달려갔다.
  이승을 머금은 들풀같이 수닷타의 발목을 훔뻑 젹셨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른 새벽 죽림에 한 발자국 들어서니 무슨 요술나라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고적한 기분과 야릇한 고독감이 몸 속으로 들어왔다.
  수닷타는 일상 생활은 많은 사람 속에 묻힌 아무런 불편이 없는 안락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고독을 느길 수 있는 시간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나 잠자리에 빠지는 순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이처럼 그의 주위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으므로 안개에 싸인 죽림정사의 환상적인 정경이 그에게는 신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인간의 고독을 느꼈다.
  대나무 잎들이 밤이슬을 머금고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인가, 아니면 사람 속에 묻힌 존재인가? 진실한 인간은 도대체 어느 쪽에 속해 있는 것일까?
  문득 앞쪽을 보니 희미한 사람이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한 수행자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착각인가? 그 수행자의 머리 둘레에 환하게 광채가 서려 있었다. 여느 사로몬과는 달랐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분이야말로 바로 붓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육신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사로몬 앞으로 다가갔는데 절로 입이 열렸다.
  "붓다, 붓다, 슈바라, 슈바라~~~~~~"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붓다는 여기에 대꾸하듯 입을 열었다.
  "오, 마하 바이샤여, 이른 새벽에 마침 잘 오셨소. 지금 숲속을 산책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났습니다. 당신은 코살라국의 아사다 핀데가님이시군요."
  수닷타는 그가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의아했다.
  "예, 예, 저는 아사다 핀데가라고 불리는 수닷타이며 가란다는 제 형입니다. 붓다님을 만나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그는 말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려 합장했다. 붓다는 수닷타의 진지한 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어서 일어나서 정사로 갑시다. 법을 설하는 자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은 크고, 법등을 가슴에 켜는 사람은 천상계에 오를 것입니다. 그대의 형은 훌륭한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코살라국에 정사를 기증하고 싶습니다. 코살라국 쉬라바스티의 중생들에게도 정법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의 보시를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닷타여, 법을 설하는 붓다에게 그 환경을 제공하는 분은 대흑천(大黑天)이라고 하며 그 공덕은 큰 것입니다. 자손은 번영하고 그 집안 사람들에게 법은 평안이 되어 확산될 것입니다. 또한 생이 바뀔 때는 천국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수닷타는 위대한 붓다의 말씀들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는 정사 건설의 협의를 마치자 가란다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형님, 붓다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소문 그대로였습니다. 상업 관계의 용건은 뒤로 미루고 빨리 돌아가서 정사를 세을 터을 찾아보겠습니다. 죽림정사의 구조를 배우기 위해서 목수를 보낼 테니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말 훌륭한 보시를 결심했다. 하지만 귀가는 좀 빠르다. 며칠 더 묵고 여독을 푼 다음에 돌아가도 늘지 않잖아."
  "형님, 아닙니다. 조금도 피로하지 않아요. 이것도 붓다를 만나뵌 공덕입니다."
  코살라국으로 돌아온 수닷타는 서둘러 지을 터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둘러보니 쉬라바스티의 교외가 가장 풍광이 좋은 적임지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국왕의 의형뻘 되는 태자의 소유였다.
  그는 곧장 태자를 만나 땅 일부를 양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그는 붓다의 이야기, 법의 위대함과 중생 구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수닷타의 열기와는 반대로 태자는 당을 넘겨줄 의사거 없을 뿐 아니라 끈질긴 수닷타의 요구에 역정가지 내고 말았다.
  "수닷타, 너는 진드기 같구나. 샤카족 고타마 싯다르타 때문에 내 영토를 내놓으란 말인가? 나는 코살라국의 파세나테왕의 의형이다. 사리를 잘 분간해서 말을 해라. 고타마가 나에게 땅을 주겠다면 모르지만 너의 말은 그 반대가 아닌가. 곡 필요하다면 필요한 땅에 금은재화를 깔아라. 그러면 너에게 팔겠다. 어때, 그렇게라도 해볼 텐가?"
  태자는 대국의 체면을 내세워 거절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술책가였으며 밀고 당기면서 상대방의 속을 떠보는 정치가였다. 전쟁의 난세에는 그런 무사들이 도처에 있다.
  수닷타는 태자의 기질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처럼 완고하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태자님. 제가 필요한 만큼의 보물을 깔겠습니다. 내일 가져올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태자는 끈질긴 수닷타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심술 사납게도 이렇게 덧붙였다.
  "너도 참 이상한 녀석이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 만일 약속대로 못 하면 네 목은 없다. 알아들었냐! 수닷타."
  하룻밤을 샌 그는 여러 대의 수레에 금은재화를 가득 싣고 차레차례 태자 앞에서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광경에 태자도 숨을 죽였다. 보화가 눈앞에서 산더미를 이루었다. 금은뿐만 아니라 온갖 보석이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수닷타가 재력가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엄청난게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재보를 아까운 빛도 없이 마치 물을 붓듯 땅에 쏟아놓고 있었다. 수닷타의 표정을 냉정 그대로였다.
  태자는 두 번 놀랐다. 수닷타는 목숨을 걸고 있었다.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수닷타, 알았다. 그만두어라. 네가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마음에 나도 굴복했다. 그 재물은 건축비에 쓰도록 해라. 네가 필요한 대로 터는 얼마든지 써도 좋다."
  태자는 말을 마치자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광명은 충만하다."
  붓다의 법이 어김없이 증명되어 살아났다. 수닷타는 그것을 몸으로 체득하였다. 터가 결정되었으니 이젠 정사의 건설이다. 그는 의형 가란다에게 말을 타고 달려가서 죽림정사를 지은 목공들을 모아 왔다.
 
  공사 책임자는 붓다의 분부에 따라 목건련으로 결정하였다. 붓다가 절을 짓는다는 소문이 나자 절 건축에 소요되는 자제가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중생들은 너도 나도 참여했다. 제타베나는 이렇게 해서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훌륭하게 완성되어 갔다.
  건축 공사가 크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사고도 나게 마련이지만 그런 인명 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사 건설에 반대했던 제타 태자까지도 스스로 대문을 기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세나데왕도 열렬한 지원자가 되었다. 코살라국왕의 협력은 당연히 전 코살라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카필라성의 슈도다나왕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갔다. 그 말을 왕에게 전한 사람은 아시타 선인의 조카인 카차나 수행자였다. 부왕은 싯다르타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기억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가던 아들의 모습이 다시금 크게 되살아나서 다시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이 솟구쳤다.
  그는 당장에 싯다르타에게 사자를 보냈다. 사자의 용건은 간단했다.
  '꼭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붓다의 회답은 출가 직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만날 시기는 아직 멀었습니다."
  역시 거절이었다.
  붓다는 부왕의 소원을 거절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주위에 신도와 귀의자들이 너무 많이 불어나 그들을 받아들이고 설법하는 일에 모든 일과가 잡혀 있었다. 더 주변이 안정된 뒤에야 귀성하여 부왕과 가족을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붓다는 부왕의 사자에게도 그 심정을 써 보냈다. 하지만 부왕은 또다시 붓다에게 거절당한 것이 너무 서운했다. 부왕의 속마음에는 아직도 붓다에 대한 집착이 있었으며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다.

 

 


    < 우기(雨期) >

  인도는 인도양으로 튀어나온 역삼각형의 반도를 이루고 있으며 그 땅 넓이가 약 442만 평방킬로미터에 인구는 6억에 이른다. 인도는 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다. 북쪽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 동쪽은 아라칸요마 대밀림 지대, 서쪽은 볼모지 힌두쿠시와 술라이만산캑이 병풍처럼 큰 장벽을 형성하고 있다.
  지형이나 지질상으로 보면 인도는 남부의 데칸고원, 중부의 힌두스탄고원,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등 셋으로 구분된다. 이 지역은 서로 기후 풍토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생활 양식이나 언어 등도 여러 갈래다.
  가장 오래된 민족은 스리랑카와 중부 인도의 밀림 지대에 터을 잡고 사는 미개족 푸로도오스트랄로드이고 남부에 주로 정착한 드라비다계가 살고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에는 아리아계가 북서부 지방에 진출하고 있다. 또한 티베트, 버마계, 몽골로이드계가 동부에 이주하고 있으며, 그 인종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
  그로 인해 언어학적으로 인도어는 800종 이상이나 된다. 그러나 오늘날 공인된 언어는 70종이고 그 주요한 것은 15종으로 집약되어 있으며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언어는 대별하여 구라파어(아리아어), 드라비다어, 문다어 등 여러 언어, 티베트어, 미얀마어가 있으며, 그 중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언어는 아리아어와 스리랑카어와 스리랑카와 데칸고원을 중심으로하는 드라비다어이다.
  이렇게 여러 언어가 한 나라 안에 잡다하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의사 소통이 힘들고 분쟁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인도는 항상 전란에 휩싸여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인도 고대사는 아리아인의 펀자브 이주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약 2,000년에서 1,500년 전의 옛날이다. 그 이전에는 이집트, 그리스, 이란 등지에서 이동하여 왔다. 펀자브는 서파키스탄의 북부에 해당하는데 아리아인은 여기서 우선 농경 민족으로 정착하여 다시 인도의 북부, 서부로 이주해 왔다. 아리아인은 자연 현상 속에 신을 인정했고, 그후 바라문교의 근본 경전인 리그<베다>를 만들었으며 인더스, 갠지스강 하류 지대에 진출했다.
 
  바라문교의 근원을 보면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 아가샤 대왕의 태양을 신으로 받드는 신앙이 지금의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후 아몬<예수의 전신>이 나타나서 이것을 계승하였고, 다시 그레오 파로타에 이어졌으며, 그후 아폴론에 전달되어 서파키스탄을 경유하여 인도에 정착했다.
  '아몬'이란 사람 이름이다. 그 뜻은 본래 왕, 신, 태양, 우주신을 가리킨다. 그 때문에 아몬은 신을 나타내는 자로 불렸다.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를 붓다, 혹은 풋다로 호칭한 것과 같은 경우다. 붓다란 불(佛)이며 불은 신의 마음을 구현한 사람을 가리킨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고대 인도어로는 나모아미붓다이다. 나모란 나무[南無]라는 뜻으로 이것은 신에 귀의한다. 귀명한다는 뜻이다. 아미는 아미타[阿彌陀]를 말하며 아몬은 지금부터 약 4천 수백여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도를 설교한 위대한 빛의 대지도자라는 뜻이다.
  아미다의 어원은 아몬, 아멘, 아미와 같이 그 신앙이 각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 발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여 인도에 와서는 '아미타'가 되었다.
  붓다는 불(佛), 즉 글자 그대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고대 인도어로는 '다보'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직역하면 신불에 귀의한다. 귀명한다는 뜻이다. 아미타여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몬을 가리키는 말로 아몬은 그후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태어나게 된다.
 
  아미타 신앙은 으레 서방 정토(西方淨土)가 등장한다. 그곳은 인도에서 보면 서쪽 방향, 즉 아리아인의 서에서 동으로 이주하여 인도에 정착하였으므로 아몬신이 원류인 이집트와 이스라엘 방향을 가리킨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정토는 중동이다.
  아미타 신앙은 중국에서 한국,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서방정토의 방향이 상실되었고, 서방 정토란 이 세상에는 없는 땅, 마치 저 세상 천국을 뜻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알고 있어도 좋다.
  그와 같은 비유로 당천축(唐天竺)도 마찬가지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래한 까닭에 불(佛)의 위치는 천축이라는 구름 위의 극락을 가리키게 되었다. 인도로 가는 길에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이 버티고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세월이 지나면서 당천축은 구름 위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상상은 발달해 갔다.

  이처럼 불교든 바라문교든 그 근원은 하나이며, 그 근본 교리는 자연(自然:神)의 의지가 구현(具現:자비 사랑)하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 어느새 형식화되어 마침내 카스트 제도를 낳게 되었다.
  즉 리그<베다>가 인도에 정착하게 되니 신관(神官)인 바라문 세력이 권세를 쥐게 되었고 신관, 무사, 서민, 노에라는 네 계급의 엄격한 계급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위대한 성자가 나타났을 때는 인간의 마음도 통일되어 조화가 넘치는 사회가 되었지만 그 빛의 승천하고 나면 차츰 수라장이 되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인류는 이를테면 말법(末法)과 정법(正法)의 되풀이를 거듭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왜 인류 사회는 이렇게 구제되지 못하고 혼란한 세상으로 남아 있을까?
  누구가 가지는 의문이다.
  그 한 가지 이유로 인류의 가르마[業]를 들 수 있다. 가르마란 업(業)이며 사물에 집착하는 상념과 행위에 이한 악순환을 의미한다. 이 가르마가 전생의 과정에서 마땅히 수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시정되지 않는 한 윤회하는 것이므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의 파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원래 가르마라는 것은 연(緣:조건)에 따라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인만큼 나타나지 않는 한 이해도 할 수 없고 수정도 불가능하다. 그 나타나는 현상이 크게 발전하면 말법이 되고 그만큼 사회도 혼란의 극에 이른다.

  더욱이 가르마를 가르마로 인정하지 못한 채로 간과해 버리면 새로운 가르마를 탄생키켜 혼란을 가증시키는 일도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말법과 정법의 시대는 역사적으로 늘 되풀이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과거에의 가르마가 그대로 곧바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
  만일 그대로 나타난다면 인류는 이미 엣날에 멸망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일은 없다. 인간은 현상계와 실재계를 왕래하는 윤회 속에 살고 있는 존재이며
그런 과정 가운데 현상계의 가르마는 실재계에서 어느 정도 수정을 받은 다음 다시 이 지상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만큼 미수정의 부분을 어떻게 슬기롭게 고쳐나가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데 수정이 잘 되는 시대는 정법이라하고 맹목에 빠지는 시대를 말법이라고 한다.
  말법은 이와 같이 마음의 부재 시대를 가리키고 있지만 혼란한 또 한 가지는 인구 증가를 들 수 있다. 1백 년 전과 오늘을 비교해 보면 또한 그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그처럼 향후 50년이나 100년 후의 인구도 증가는 하지만 결코 감소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싸움이 불씨는 대부분이 사상과 생활권의 문제로, 분쟁은 인구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토와 식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증가하면 그 증가한 분량만큼 식량 증산이 요구된다. 옷과 주거 문제도 늘어나야 한다. 이해가 상반되면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해란 직접적으로는 생활권이며 생활권의 수레바퀴는 사상이고 정치이다. 따라서 사상과 정치가 융화하고 해결되지 않는 한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정법이 그 문제에 그 관심이 깊은 이유도 거기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인간의 마음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 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 문제와 얽혀 인구 문제의 근저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영혼의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며 지상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영혼이 새로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영혼은 지상의 생활 경험이 얕다. 경험이 얕으면 지상 생활에 사로잡히는 집착도 한결 강하다. 지구상에서의 생활 경험이 깊은 인간은 조화의 뜻을 이해하는 것도 빠르지만 경험이 얕은 자는 그 척도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개인의 일생을 보아도 같다. 유년기와 소년기는 마음이 순진하고 사회의 물정도 잘 모른다. 그 때문에 자기 중심적이 되기 쉽다. 청년, 장년, 노녕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 생활의 전모가 이해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실상도 파악기가 쉽다. 
  인간의 영혼도 나이와 지식, 경험은 일단 체쳐놓고도 이성이나 지성이 발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영혼의 전생 과정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상 생활의 경험이 얕은 사람과 깊은 사람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 역시 사회가 조화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와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인구가 증가하고 정치적, 경제적, 혹은 종교적으로 분쟁이 잦아지는 것도 이와 같은 인간의 영혼의 단계에 원인이 있는 것이며 정법과 말법이 시계추처럼 되풀이 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도 이런 데에서 인과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인구 문제가 막다른 골목길에 부딪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건 먼 장래의 문제가 아니다. 장래란 인류의 긴 역사를 볼 때 시간적 거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 시대가 오면 지구상이 영혼의 급수가 총체적으로 상승하여 이른바 보살계(菩薩界)라는 세계가 새로 생겨날 것이다. 이런 일은 이미 실재계에서 계획된 미래도이며 현상계는 그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보살계란 보살심(菩薩心)을 가진 자가 저마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서서 인류를 조화로 이끌어가는 세계다. 붓다가 태어났던 2,500여 년 전, 혹은 예수가 사랑을 전파한 2,000년 전, 그리고 오늘날 다시 정법이 전도되고 있는데 정법의 전도는 장차 도래할 지상의 불국토를 향한 이를테면 한기초 작업들인 것이며 금세의 인간은 미래의 지상의 보살계를 위한 첨병으로서의 임무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정법과 말법이 반복되는 역사를 보면 인류는 영원한 유랑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존재로 오인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판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자기 모순이 투쟁을 통해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사고 방식도 잘못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비록 어린 영혼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알 수 있다. 사람은 단지 육체라는 옷을 입게 되면 육체에 마음이 가려 사물의 시비가 분명하지 않게 될 뿐이다. 육체 생활의 경험을 쌓음으로써 육체의 허망함이 차츰 극명해지고 육체를 지닌 채 마음의 위대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마음과 육체가 보다 선명해질 수록 마음과 육체가 조화되는 멋진 체험을 할 수 있게 되고 영혼은 곧 색심불이(色心不二:色不異空)의 경지에 도달한다.

  비구름이 그리드락터산(山)을 뒤덥기 시작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면 지상은 삽시간에 잿빛에 싸인다. 바람이 불고 수목들이 부산해진다. 붓다는 큰 바위를 등지고 선정에 빠졌다.
  그는 멀리 떨어진 쉬라바스티라는 도시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쉬라바스티는 카필라성 근처에 있다.
  목건련이 지휘하는 건축은 한창 진행중이었다. 붓다는 건축의 진행 상활을 투시하고 있었다. 최근에 보고에 의하면 파사나데왕을 위시하여 국왕의 의형 제타도 많은 건축 자제를 희사하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사의 동쪽 문은 제타가 기증했으며 지금 짓고 있는 정사는 카필라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어서 붓다도 감회가 깊었으며 사찰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붓다가 쉬라바스티의 도시를 투시하고 있을 때 사리불이 다가와 두꺼운 승복을붓다의 어깨에 걸쳐주엇다.
  "가까이에 비고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산해서 죽림정사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붓다는 눈을 뜨고 앞쪽을 응시한 채 대답한다.
  "길을 떠났던 제자들이 모두 죽림정사에 돌아와 있다. 해가 지기 전에 하산을 서두르자."
  주위는 이미 어두워기 시작했다. 구름이 하늘을 덮고 금방이리도 비를 퍼부을 듯했다.
  "우기가 지나면 코살라국으로 떠나갈 것이다. 그때 동행자를 자네가 고르도록 하라. 이번에는 좀 긴 여행이 될게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붓다가 뒤돌아보며 사리불에게 말했다.
  "코스타니야와 상의하여 곧 사람을 뽑겠습니다. 인선이 끝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사리불로 이름을 바꾼 우파데사는 붓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산 도중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바싹 말랐던 붉은 땅위에 폭우가 기세 좋게 내리면서 대지를 순식간에 모래 먼지로 뒤덮었다. 얼굴을 감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비는 이내 장대 같은 폭우로 변해 걷기가 곤란해졌다. 우기는 늘 있는 일이었다. 산길은 금세 폭포가 되고 강이 된다. 평야 지대는 홍수로 사람도 짐승도 떠내려간다. 건기에는 평온하던 초원 지대로 우기에는 탁류의 강이 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여러 지리에 밝지 않고서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붓다 일행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굵은 비가 마구 쏟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죽림정사로 가는 길을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 없었다.
  그때 문득 붓다가 말했다.
  "야사는 예정대로 정사에 도착했을까?"
  "야사의 제자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바라나시로 떠났던 사람들이 벌써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야사는 한 이틀 늦게 돌아온답니다. 오늘이나 내일쯤에는 죽림정사에 도착할 것입니다."
  코스다니야가 대답하였다. 크샤트리아 시절의 코스다니야는 눈빛이 날카롭고 체격이 좋았다. 그는 겉보기에도 비범한 인상이었다. 그런 코스다니야도 지금은 완벽한 수행자의 풍모를 지니게 되었다.
  '법은 내가 갈 길이다. 그 길 이외에 길은 없다.'
  그는 설법하는 동안 어느새 부드러운 수행자 코스다니야로 바뀌어 있었다. 마음이 바귀면 사람도 바뀐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현상의 근본이다. 붓다와 함께 12년 동안 수행 정진한 결과였다.
  제자 바라다니야는 붓다보다 먼저 죽림정사에 돌아와 붓다의 귀환을 제자들에게 두루 알렸다. 그래서 모두들 붓다를 마중하려 나갔다.
  노란 승의를 입은 무리가 정사 입구의 길 양쪽에 한 줄로 늘어서서 무릎을 끓었다. 붓다는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대숲 사잇길을 지나 여러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여러분, 수고가 많았다. 비 맞지 말고 모두 들어가자."
  아사지가 흙투성이가 된 붓다의 발을 씻기고 자리를 안내했다. 제자들도 차레대로 정렬하여 붓다 앞에 정좌했다. 빗줄기가 점점 더 세차게 지붕을 두들겼다.
  "도중에 병에 걸렸거나 독사에 물려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까?"
  붓다는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수천 수백여명의 사로몬들은 서로의 얼굴을 처다보며 모두 무사하다는 뜻을 밝혔다.
  "여러분들도 긴 여행에 많이 피로했을 것입니다. 할 얘기는 많지만 오늘은 푹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마음의 조화가 깃드는 것이 법의 근본입니다. 여행중에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기 동안에 보다 넓고 자비로운 자신을 완성하기 바랍니다. 여러 의문에 대해서는 내일부터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대강당은 등불이 켜져 환했다. 붓다의 얼굴도 불빛으로 밝았다. 그보다는 붓다의 몸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황금빛 후광이 한결 밝게 돋보였다. 그것을 보는 사로몬들의 손은 저절로 합장을 했다.

 

 

    < 죽림정사에서의 설법 >
 
  정사 안은 붓다의 광명이 충만하여 생동감이 넘쳤다. 대법당에 모인 수천 수백 명의 사로몬들은 붓다 앞에서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사라자, 코스다니야, 피팔리 야나, 그대들은 각 조별로 책임자를 모아 내일부터의 활동 예정표를 짜고 우기중에 각 지방의 책임자를 결정하기 바란다. 그 협의만 끝내고 오늘은 전원 휴식을 취하도록 하여라."
  붓다는 그렇게 지시하고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리불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붓다의 지시에 따라 예정표 짜기에 들어갔고 사로몬들은 제각기 자기 방으로 흩어져 갔다.
  죽림정사의 일상 생활 즉 부엌일, 청소, 세탁 등이 사로몬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특별히 당번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열 사람, 스무 사람이 서로 동아리를 짓고 '나는 부엌일, '나는 청소' 하는 식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저마다의 담당 부서가 할당되었다.
  신참이니까 화장실 청소나 궂은 일을 시키는 따위의 일반적인 통례와는 달랐다. 그래서 고참이라도 손이 놀 땐 방 청소, 부엌의 식사 준비까지 해치웠다. 여느 교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석가 교단만의 특색이었다. 붓다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였고 그 자유를 계율이나 제도로 구속함으써 불심을 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붓다는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서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형식에 흐르는 일은 극도로 피하고 자중하였다. 사로몬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기대함으로써 각자의 창의력과 노력, 인간 평등의 가치관을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비는 점점 그 기세를 더해 갔다. 길은 강이 되어 광란의 짐승처럼 변했다. 자연의 맹위 앞에 삼라만상은 꼼짝 못 하고 기가 꺽여 오직 시간의 흐름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붓다는 격렬하게 퍼붓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아직 정사에 도착하지 못한 야사 일행을 걱정하면서 옆으로 누웠다.
  이른 새벽 눈을 뜬 붓다는 밤새 쏟아지는 빗소리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정삼매에 들어갔다. 삼매경에서는 지붕의 소란스러운 빗소리도 리듬이 되어 마치 음악처럼 감미롭게 들린다. 광란의 폭우와 달리 마음의 수면은 평온과 정숙의 극치를 이룬다. 붓다는 하늘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하모니는 지난날 수행중에 동굴 속에서 듣던 바로 그 선율과 닮았다. 당시도 우기였다. 몸은 말랐고, 앞길은 암담했으며 불안으로 지새던 시절이었지만 일단 선정에 들면 폭우도 천상의 음악 소리가 되어 싯다르타의 마음을 환하게 어루만져주었다.
  붓다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이윽고 방문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들어와요."
  붓다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사지였다.
  "간밤에 잘 잤는가."
  "네, 오랜만에 지붕 있는 집에서 잔 탓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카필라성의 생활과는 다른 평온한 일상 행활이 너무 즐겁습니다. 이런 은혜를 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12년 전만 해도 아사지는 카필라성을 경비하던 크샤드리아였다. 체력고 무술도 뛰어났다. 그는 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외국 스파이나 게릴라에 대한 경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눈은 늘 날카로웠으며 마음도 늘 감시의 눈초리로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의 생활에는 도무지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모를 꾸밀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태어날 때의 천진난만한 아이가 거기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아사지여, 생각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생활은 인생의 가치를 바꾸고 보다 마음을 풍부하게 해준다. 법은 실천 속에서 살아나며 거기서 법등이 켜지고 영원한 생명을 깨닫게 된다. 마음에 법등이 없는 자는 잘못된 생각과 행위에 의해 고뇌의 인생을 살게 된다.
  붓다 승단의 목적은 물질을 잘못 보는 그릇된 가치관으로 신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 보다 많은 중생에게 마음의 양식을 주는데 있다. 그 광명은 태양처럼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공평한 것이 되어야 한다. 늘 법등을 마음에 밝혀야 하며 결코 자기 만족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사지는 붓다 앞에 무릎을 끓고 깊이 고개를 묻었다.
  "해와 같은 마음으로, 미망에 허덕이는 모든 중생에에 평안의 법등을 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붓다으 법어를 받아들였다.
  "야사와 목건련 등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들 법당에 모였습니다. 설법 준비가 되셨는지요."
  "야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붓다는 사로몬들을 헤아리면서 회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붓다의 방과 법당 사이에는 낭하가 이어져 있었다. 비는 낭하에까지 뿌려 그의 발길을 적시고 있었지만 붓다가 걸어가는 바닥은 말라있었다. 아사지는 붓다를 호위하듯 뒤따르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서는 붓다를 본 사로몬들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붓다는 사로몬, 사마나들의 모습을 들러보면서 여행중에 닦은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를 마음의 눈으로 확인한다. 이어 붓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로몬들이여, 고개를 드시오."
 
  회장의 맨 앞줄에는 야나, 우루벨라 캇사파 형제, 테샤바, 사리불, 코스다니야, 아사지, 도다카, 밧데아 등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 각기 그들의 머리에서는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또한 몸 전체가 광명에 싸이기도 했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로몬들의 머리 둘레에도 엷은 광명이 비치고 있었으며 회장 전체가 환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붓다의 뒤에는 몇 사람의 브라흐만이 내는 빛과 붓다가 내는 후광이 합쳐져서 눈부실 지경이었다.
  사로몬들은 어제처럼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동안 여러분이 법에 의지하여 떠돌아다님으로써 조화로운 삶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을 보니 참으로 큰 보람이 느껴집니다. 더욱 분발하여 정도에 정진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아 속에는 선한 나와 위선적인 나, 둘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모든 고뇌는 선한 나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이고 거짓인 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위선적인 자아는 얼핏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크나큰 집착의 짐이 되어 고뇌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고뇌의 원인, 고뇌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인생은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보호의 욕망을 일으키고 있는 위선적인 자아를 억누르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한 자아인 불성을 자각해야 합니다.
  사로몬들이여, 비를 맞는 초목을 보십시오. 저 곧게 뻗어 올라간 대나무를 보시오. 그들은 자연의 비바람을 잘도 견뎌내고 늠름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자연에 거역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튼튼한 뿌리를 대지 속에 단단히 박고 있으므로 그 어떠한 폭우에도 끄덕없이 견딜 수가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서로 양보하며 돕고 있습니다.
  그 어떤 부조리한 현상을 보거나 듣더라도 법에 비추어 판단하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거나 잘못된 행동에 흐르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은 법의 실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붓다의 설법은 법에 귀의하여 정진하고 있는 사로몬들의 마음 속에 든든한 뿌리를 내리게 하고 있었다. 붓다의 설법을 계속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의 기준을 오관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은 마음이며 중도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에서 말하거나 생활을 계속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항상 고뇌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 없게 됩니다.
  중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선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살면 마음이 평안하고 그 기쁨은 자신과 일체가 되어 마치 자신의 그림자가 자신에서 떠나지 않듯이 빛이 자신과 일체가 되어 법으로 인한 기쁨과 희열 속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폭력을 당하거나 모욕이나 원망의 화살을 받으면 거기 마음이 빼앗겨 그만 마음의 파장이 커져서 화를 내지만 그렇게 해서는 노여움의 감정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노여움은 노여움으로 풀 수가 없습니다. 끝없는 용서가 자비이며 그 자비로 풀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번뇌의 화염에 마음을 태우는 일 없이 늘 법을 기둥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용기와 노력과 지혜로 마음 속의 거짓 자아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한 자아로만 산다면 머지않아 빛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만족할 줄 알 때 비로소 위대한 보배를 손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보배라는 것은 여러분이 끝없이 생을 바꾸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모든 인생의 지혜이며 평안의 원천입니다. 그 보물의 창고문을 열어야 합니다.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그 문을 열어야 풀립니다.
  이럴 때 인간은 생명의 영원성을 깨닫게 되고 눈앞에 전개되는 현상, 즉 물질은 허무한 것이며 그 무상의 실체는 영원한 생명을 종횡으로 엮고 있는 실 같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삶을 멀리하고 정도를 걷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마침애 지혜의 문을 열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활을 만드는 사람은 곧고 단단한 화살을 만들어야만 비로소 완전한 힘을 발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도 마음을 곧고 굳게 바로잡음으로써 비로소 확립할 수가 있습니다. 입으로만 번드르르한 말을 늘어놓을 뿐 실천이 따르지 않는 자는 향기 없는 퇴색한 꽃과 같은 것입니다. 꿀이 없는 퇴색한 꽃에는 나비로 꿀벌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꽃은 싱싱하게 피어 있을 때 비로소 나비도 꿀벌도 찾아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물을 함께 공생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만이 그 사람을 살리고 그 주변을 밝게 하고 번영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아름답고 둥근 마음을 환하게 밝힘으로써 중생들에게 법등을 나누어주어햐 합니다. 우파라, 얀란, 라가라, 파시키츠와 같은 꽃들은 아름답고 향기도 풍부하지만 법의 향기는 비할 데 없이 그 품격이 높고 숭고한 것입니다. 그 법의 향기를 발산하기 위해 각자 자신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지금 이곳에는 그동안의 여행중에 불편한 잠자리를 체험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피안이라는 지혜의 언덕에 오르지 못한 자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정법을 깨닫지 못한 자는 무명의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므로 고뇌와 미망의 삶을 길고 지루하게 견디지 않을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행중에 자기보다 훌륭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동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동행자와 함께 가면 자기 마음의 자리가 어지럽게 되고 조화롭지 못한 길고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쁜 친구는 맹수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산과 들에 있는 맹수는 여러분의 육체나 물어뜯지만 나쁜 친구는 여러분의 그 소중한 마음까지 물어뜯거나 독을 뿌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은 나쁜 친구의 접근을 막는 일입니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그 대목에 이르자 곁에 앉아 잇는 친구의 얼굴을 서로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붓다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정사 밖에서는 계속해서 빗소리가 들렸다. 비는 장대같이 쏟아지다가 때로는 안개같이 흩날리기도 했지만 붓다의 설법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비는 다시 세차게 퍼부었다. 법당이 뒷자리에서 몇 사람의 제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비에 훔뻑 젖은 야사의 모습이 붓다의 눈에 들어왔다.
  "오오, 야사, 이제 돌아왔구나."
  평소 의리 깊은 사내로 정평이 난 야사는 젖은 그대로 붓다 앞으로 나가 깊은 예를 갖추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니 그저 기쁠 뿐입니다."
  "야사야, 잘 돌아왔다. 어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어라. 그대들도 노고가 많았다."
  붓다는 야사와 동행했던 제자들의 노고를 달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필라의 바라문들도 붓다에 귀의하셨군요. 바바리님도 무척이나 만족하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야사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붓다에게 인사를 올렸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있던 법당 안의 제자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뚫고 무사히 귀가한 야사 일행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야사는 그동안 캇시국의 바라나시를 무대로 많은 재가의 중생들고 바라문 수행자들에게 붓다의 법을 전도해 왔다.

  일행은 야사지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산뜻한 모습으로 회장에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붓다의 설법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리 귀여운 처자식이 있고 많은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만족할 줄 모르고 욕심이 넘치면 괴로움은 끝이 없습니다. 자기의 육체는 자기 것이면서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늙거나 병들면 그 육신은 이 땅에 두고 떠나야 하는 유기물입니다. 하물며 귀여운 처자식이 어찌 내 소유물이며 내 재산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전생윤회의 과정에 인연에 있어서 주어진 것이며 저마다의 연생(緣生)에는 저마다의 사명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대들의 영원한 소유물은 그대들의 생명이요 마음뿐입니다. 그 이외에는 어느 것 하나 자기의 소유물은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귀여운 자신의 아들이라도 어른이 되면 부모의 생각과는 달라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들은 아들로서의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영혼은 부모와는 무관한 별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마치 태양과 같은 무상의 자애심을 아낌없이 쏟고 있습니다. 자식은 자신을 낳아서 길러주신 위대한 어버이의 자비와 사람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 또한 인간의 도리요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보은이란 행위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효도는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며 만일 이것이 없어진다면 인간 사회는 무너집니다.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이상,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법을 실천하는 길이며 불국토의 대도가 열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생 만물은 상호 협조에 의해서 조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평화와 안정이 생깁니다
  지혜있는 자는 지식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일수록 지식에 빠져 거만하게 됩니다. 바라문 수행자들 가운데 <베다>나 <우파니샤드>의 경전에 통달하여 지식은 풍부하지만 실천이 없기 때문에 그 지식의 틀 속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경전 속을 헤매는 자가 많습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반야바라밀다의 경지에서 솟아납니다. 법의 실천에 의해서 획득한 평안, 감사, 조화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식의 틀을 아무리 넓혀가도 마음이 풍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미망과 불안과 혼란을 더해 갈 뿐입니다. 지식은 지혜의 한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지혜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붓다의 설법은 한층 더 기백이 찼고 핵심에 접근해 갔다. 회장은 깊은 정적에 잠겼고, 빛의 파장만이 주변의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붓다의 설법은 계속되었다.
  "지혜가 나타나는 것은 법의 실천에 있습니다. 마음 속에 지어낸 조화롭지 못한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지 않는 한 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름을 걷어내는 길은 법의 자(尺)로써 자신의 사념과 언동을 되밟아보고 잘못을 수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반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는 마음 속에서 어두운 상념의 구름을 짓지 않도록 늘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도를 걷는다는 것은 번뇌에서 벗어나고 거짓된 자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본래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 정도를 걷는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밖으로 향하면 쾌락적인 삶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는 고뇌의 세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악업의 결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산에서 피웠던 모닥불의 잿더미 속에 숨어 있던 불씨처럼 언제 바람을 만나 산불로 번질지 아무도 모르는 이치와 같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자들은 항상 지위나 명예의 욕망에 사로잡혀 물질, 재보, 정욕에 대한 집착심 때문에 늘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사로몬은 지위, 명예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이타심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자기 보호 욕망을 버리고 항상 평안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법의 물을 마신 자는 그 마음이 깨끗이 씻겨 있으므로 집착심이 없고 평화 속에 안정됩니다.
  그리드락터의 바위산을 보십시오. 저 바위산은 그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습니다. 자연 속에 안주하고 있으므로 바깥일에 흔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도 그처럼 비난, 모욕, 칭찬 등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한쪽으로 마음이 흔들리면 다른 한쪽에서도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언동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르게 도에 정진하며, 바르게 마음에 염두를 두고, 그리고 항상 둥글고 넉넉하게 반성을 하며 선정삼매경을 즐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쾌락에 빠지는 탐욕을 버려하 하고, 그 어떠한 난관에 부닥쳐도 그 원인을 규명하여 원인의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며, 마음 속에 법들의 불을 항상 밝히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철저한 생활을 하는 자들 중에서도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하는 자는 드물고 무상한 물질 세계에 저도 무르게 집착하여 헤매는 자가 그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배운 위대한 지혜에 의해서 모든 일에 만족할 줄 알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으며 저 하늘처럼 밝고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 의해서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들이여, 백만 권의 책보다 평안한 마음 하나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 명심하십시오. 오직 자비심이 있을 뿐입니다. 한편 마음 속의 위선자인 자신을 눌러 이기는 일이란 전쟁에서 백만 대군을 무찌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큰 강둑도 개미 구멍 하나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며, 위대한 마음은 미망의 구름 한 점에 의해 캄캄해집니다.
  지혜 있는 자는 우선 이 세상의 업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 세상은 노여움과 우둔함과 의심으로 가득 찼으며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업에 붙들려 그 불똥이 붙으면 미망과 번뇌의 불길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한 마음이야말로 각자 자신의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공이야말로 영원불멸의 자기 자신입니다. 그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도 업의 불길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평안과 조화는 진심으로 자신의 기쁨을 남에게도 미치게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법에 의지하여 자기 자신을 확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업화에 불이 붙어도 그 불을 끌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불법 전도에 나서서 법의 씨를 뿌린들 마음을 개간하는 데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흡사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수확은 보잘것 없을 것입니다. 지혜, 노력, 용기, 이것이 자기 자신을 확실히 세우고 중생을 미망의 늪에서 피안으로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됩니다. 선악 어느 쪽의 결과가 나오더라고 그 모든 책임은 자신이 생각과 행동에 있습니다. 결코 남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수행 목적은 자신에게 이기는 것이니 남에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여기서 일단 말을 중단하고 한숨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제자들을 훑어 보았다. 신리의 씨앗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뿌려졌으며 이미 마음 속에서 싹이 트는 제자들도 있었다. 아직 그 설법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소화시키기에 애를 쓰는 제자들도 있었다.

  법당은 붓다의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붓다의 설법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설법이 중단되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소리를 높이며 무성한 대나무 숲을 두들겨댔다.
  법당 밖은 바람까지 동반한 빗줄기가 광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당 안은 정적 바로 그것이었다. 그 명암의 대조는 밖은 지옥이고 안은 천상계의 정토에 비유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광란하는 외계에 싸여 있으면서도 죽림정사의 법당은 파도 하나 일지 않는 해탈의 심경과는 흡사하였다. 마치 붓다를 보는 것 같았으며 사로몬들 가운데에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바로 법이라고 깨닫는 자도 있었다.
  한참 만에 붓다는 전도 여행에 대해 말을 이었다.
  "목건련의 보고에 의하면 쉬라바스티의 정사로 이 우기가 지나면 완성될 것 같다. 우기가 걷히는 대로 불법을 전하는 여행을 계속하면서 쉬라바스티로 떠나가거라. 이 죽림정사에는 나이 많은 우루벨라 캇사파 형제와 그의 제자만 남아서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예, 잘 알았습니다. 저희 형제는 늙었기 때문에 쉬라바스티까지 수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비에 넘치는 분부대로 선정삼매를 계속하여 심성을 닦아가겠습니다."
  세 사람의 캇사파는 자신들도 좀더 젊었더라면 일행에 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잠겼다. 장로 격인 우루벨라 캇사파가 앞으로 나왔다.
  "붓다님, 정사는 저희들이 남아서 잘 지키겠습니다."
  그들은 최상의 삼배로 예를 올렸다.
  "잔류할 사람들은 그대가 결정하거라."
  "알았습니다. 최근에 입문한 수행자들 가운데에서 선별하도록 하겠습니다."
  캇사파 형제는 가야 다나의 대선인(大仙人)으로 아그니 앞에 불을 피우고 큰 제를 올리는 배화교(拜火敎)의 교조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을 만큼 조화와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럼 캇사파의 지명을 받은 수행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원 코살라국 전도에 동참하도록 한다. 우기 동안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장기 여행에 대비한 체력을 기르도록 하여라 피팔리 야나, 사리자, 아사지, 밧데아, 야사, 바드리카, 코스다니야는 내 방으로 와라."
  붓다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여행 조를 짰다. 각 조의 조장을 임명하고 수행의 방법을 간부들에게 상세히 지시했다. 제자들은 누구나 새로 맞게 될 쉬라바스티의 정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엄격한 국경 출입 통제도 사로몬에게는 어느 나라에서나 관대했다. 그래서 우기가 지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었다. 회의는 세밀한 부분까지 언급하였다.

  10여 일이 눈 깜박한 사이에 지나갔다. 줄기차개ㅔ 퍼붓던 장대비는 어느새 가랑비로 변했다. 그 틈을 기다리기라도한 듯 쉬라바스티에서 사자가 왔다. 선정삼매에 잠긴 붓다의 방으로 사리불이 그 사자를 데리고 왔다. 사자는 아사다 핀데가가 보낸 사람이었다.
  "저는 아사다 핀데가의 하인 우라야입니다. 쉬라바스티의 정사가 완공되어 붓다의 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코살라국의 파세나테 임금님도 붓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림 일정을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라야, 원로에 수고가 많았다. 출발은 두 달쯤 후가 될 것이다. 설법을 하면서 가야 하기 때문에 도착할 날짜는 잡을 수가 없으니 후일 다시 정해서 연락하기로 하겠다."
  "잘 알았습니다. 정사의 배치도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붓다 앞에 비단천에 그린 정사의 배치도를 폈다.
  "동문은 터를 내놓으셨던 제타 태자님께서 직접 보시 제작하신 훌륭한 문입니다. 붓다를 맞아들이기에 잘 어울리는 문이라고 다들 좋아하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에 수행자들의 숙박소가 있고 붓다님의 거실은 동남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설법장으로 쓰일 큰 강당이 위치하고 동쪽에 창고가 있습니다."
  붓다는 배치도를 흝어보면서 아주 훌륭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붓다의 마음은 벌써 쉬라바스티로 달려가고 있었다.
  "허나 정사의 이름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야사다 핀데가님은 붓다님게 여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고을 이름이 좋을까? 아니면....."
  붓다는 당장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제타 태자님의 이름을 따 제타베나라고 지으면 어떨까요."
  "그거 좋겠습니다."
  이래서 정사 이름은 제타베나로 간단히 결정되었다. 붓다는 옆에 앉아 있는 사리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사리불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빙긋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라야, 먼 길에 피곤할 테니 오늘은 여기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쪽과는 달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겠지만 푹 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 누이가 라라그리하에 살고 있습니다. 붓다님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누이 집에 묵도록 정해 놓았습니다."
  "수닷타(아사다 핀데가)는 그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양하지 말고 누이 집에는 내일 가도록 해라."
  "주인님께서도 붓다님게 간 이상 법을 하나라도 더 듣고 마음의 양식을 삼으라고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그랬을 테지. 그래도 사양하면 이곳 밥맛이 입에 맞지 않아서겠지."
  붓다는 머뭇거리는 우라야의 얼굴을 보고 껄껄 웃었다.
  "아닙니다. 입에 안 맞다니요. 저는 이곳에 심부름 온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행복합니다."
  우라야는 붓다가 엄숙한 분이라고 예상하고 이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자 자상하고 인정도 많고 농담도 해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리자. 제자들에게 우라야를 숙소까지 잘 안내하도록 하려무나."
  "예, 잘 알았습니다."
  사리불은 우라야를 데리고 붓다의 방을 나왔다. 먼저 우라야에게 야채죽을 대접했다. 그는 맛이 좋다며 몇 그릇을 비웠다. 정사의 경내를 안내하는 가운데 사리불은 붓다의 법을 쉬운 말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라야는 잠자는 것도 잊고 사리불의 이야기에 매달렸다.
  우라야는 이튼날 붓다의 설법을 들었다. 그 이튼날도 들었다.
  결국 우라야은 사흘 동안이나 정사에서 묵고 지냈다. 사흘 동안에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을 깨닫고 반성의 기회를 밥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붓다에게 깊은 감사의 삼배를 올리고 사흘 후에야 죽림정사를 하직했다.

 

 


< 쉬라바스티로 전도 여행을 떠나다 >

  사리불, 피팔리 야나 등을 조장으로 36개조의 조가 짜여져 쉬라바스티로 떠나는 전도 여행 일정이 잡혔다. 도주의 숙박은 숲 속의 야영지에서 하기로 했다. 지금처럼 여인숙이나 민박 같은 것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편성된 조가 많았으므로 일정에 따라 도중에 서로 장소가 겹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 점에 대해 면밀한 계획을 세워 서로 중복되지 않도록 조별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붓다 승단의 회원들은 여행을 떠날 때 식량이나 숙박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 점에 대해서는 매우 홀가분했다. 식사는 걸식으로 정해져서 식량 휴대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그곳 풍토에 맞는 음식을 보시받았다. 영양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었다. 당시 인도 승려들은 천국에 가까운 특대를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로몬들이 문간에 서기만 하면 중생은 반드시 보시했다. 조석으로 드리는 음식 공양을 신에 대한 큰 공덕으로 여겼으며 보시를 통해서 영생의 안락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다.
  바라문의 전통은 서방에서 전래된 이래 꽤 오래 되었으며 수행 목적은 관자재보살이었다. 위대한 영적 능력을 지니고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문명의 발달하지 못했고 자연의 어려운 조건을 극복해야 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연과의 깊은 이해와 교류를 통해서먼 비로소 그 어려운 조건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신에게 빌고 신의 힘에 매달리거나 나아가 신 그 자체가 되어 오직 자연 환경을 극복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지식만이 깨달음으로는 관자재보살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그니, 야크샤, 마고라, 긴나라, 나가 등을 믿고 함부로 영력만을 좇아 나쁜 길로 빠지는 자가 많았다.
  붓다는 함부로 영적 힘만을 추구하는 지도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마음의 안정은 관자재보살에 이르러 비로소 그 목적이 달성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긴 시간과 수행의 도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수행이라는 것은 완성이 없다.
  팔정도의 법에 맞는 생활을 하는 길만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조화를 잃지 않는 기초가 된다고 지도했던 것이다. 육체는 영혼이 타고 가는 배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을 소홀히 해서는 인간 생활을 기약할 수 없다. 색심(色心)이 불이(不二)랄는 중도의 목적은 마음과 육체의 조화에 있으므로 생활을 떠난 마음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어려운 자연 조건을 극복하는 길은 그 조건을 혁파해 가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과 지혜로써 정비해 가는 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자연 조건은 바로 신의 조건으로 순일하게 받아들여졌으므로 그 조건을 극복하는 길은 육체를 떠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즉 자연 조건의 극복은 영적 능력의 개발에 직결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마음은 그 과정의 중요한 수행을 태만히 하게 되고 생활을 무시하게 되었으며 함부로 영적 능력만 좇게 되었던 것이다.
  악마의 밥이 되어 폐인의 된 인간을 허다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지식에 빠져 민중의 머리 위에 군림한 바라문 계급의 설득력이 실추된 것도 계급 의식과 권위에 안주하여 마음을 상실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지식에 기울어지는 것도, 또한 영적 능력에 치우치는 것도 중도가 아니다. 중도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색심불이의 생활이며 그것은 현실적인 노력과 풍부한 마음의 합작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붓다를 비롯한 승단의 수행자 생활은 사로몬이라는 바라문의 최종 단계의 수행을 의미했으며 걸식과 전도 유행이 기본이었다.
  승단의 수행자들은 20대, 30대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이가 좀 든 사람은 우루벨라 캇사파 형제 등 겨우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바라문의 사로몬이라면 이미 말한 것처럼 60대 이상이 고령자여서 그들의 걸식과 유행에 대해서 시민들은 전통적으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즉 사로몬이 문간에 나타나면 농가에서나 가게에서 아낌없이 보시했다. 하지만 붓다 승단의 수행자들은 젊은데다가 바라문 종단에 비하면 아직 사마나 정도의 존재였다. 붓다 자신도 나이로 따지면 아직 사마나였다. 이 때문에 바라문이 많은 지방에서는 걸식이 어려웠다.
  사마나의 수행은 이미 말했지만 자기 돈으로 부담했으며 그 단계에서 걸식은 드물었다. 물론 승려에 대한 공경심은 돈독해서 공양을 부탁하면 대개는 응해 주었지만 무조건 환영하지는 않았다.
  보시란 평온한 생활에 대한 감사의 보은이었다. 평온한 생활은 신의 사자인 바라문의 제사에 공양함으로써 약속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도 연령적으로 신에 가까운 사로몬에게 바치는 보시의 공덕을 가장 크고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 이유로 젊은 승려가 대부분인 붓다 승단의 걸식은 거절당하는 일이 있어서 수행은 결코 평탄한 것이 못 되었다. 물론 붓다의 법이 전도된 고을에서는 젊은 수행승이 문간에 나타나면 환대받기도 했지만, 낯선 고장에서는 어디를 가나 푸대접받기 일쑤였으므로 산 속에 들어가서 과일을 따먹고 허기를 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쉬라바스티까지의 여정은 걸식과 포교의 연속이었다. 일정은 50일간 36개조의 그룹이 저마다 코스를 밟아가면서 쉬라바스티로 향했지만 조에 따라서는 역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붓다는 사리불이 조와 함께 날란다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이 그룹에는 바바리의 제자였던 마이트레이어와 포사라, 도데야가 끼여 있었다. 그들은 사리불의 지휘하에 움직였으며 가는 도중 날란다에서 가두 설법이 계획되어 있었다.
  마이트레이어, 포사라, 도데야 등은 종을 치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날란다는 사리불과 목건련의 출신지이기도 했으므로 사리불과 그의 제자들은 저마다 부모, 형제, 친구,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붓다의 설법을 알렸다. 비가 갠 날란다의 숲은 신록이 눈부셨다.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붓다는 옆에 앉아 있는 사리불에게 말했다.
  "내일 저녁부터 마음 광장에서 설법한다. 내알 아침에는 첫 닭이 울 때부터 걸식을 하고 모두들 마을 사람들에게 설법이 있다는 것을 광고하고 안내하기 바란다. 마이트레이어와 포사라는 설법 장소에서 종을 치고 설법의 시작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붓다는 마이트레이어에게 눈짓으로 다짐을 주었다. 그녀는 붓다를 똑바로 보고 대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바바리님의 설법이 있을 때도 저희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종과 북들 쳤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두 비구니는 겨우 20살밖에 안 된 앳된 처녀였지만 언행은 매우 침착하고 똑똑했다. 바라문 가문에서 성장한 풍습과 법도가 몸에 베었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다음 날 아침에 그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났다. 그는 숲에서 빠져나와 마을로 들어갔다. 이른 새벽이라 사방은 아직도 어둡고 캄캄했으며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농가에서는 하얀 연기가 여릿여릿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척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붓다가 농가 앞을 지나가는 어느 집 가정 주부가 오지그릇에 담긴 죽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마치 붓다가 집 앞으로 지나갈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린 듯했다.
  "바라문님, 바라문님, 저희 집 보시를 받아주세요. 제발 죽 공양를 그 바리때에 담게 해주십시오."
  그녀는 오지그릇을 받들고 붓다 가까이 다가갔다. 붓다는 멈추어섰다.
  "정말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붓다가 왼손에 들었던 바리때를 내밀었다. 여인은 붓다의 바리때를 받아서 오지그릇의 죽을 부었다. 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 냄새가 식욕을 불러일으켰다.
  붓다는 여인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바리때에 담긴 죽은 쌀과 야채에 소금이 섞은 아주 조잡한 음식이었다. 옛날 궁궐에서는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었던 죽이었다. 하지만 농부들의 먹을거리는 이런 죽이나 밥, 피, 산과 들에서 나는 야생초들이 대부분이었다.
  쌀이 섞인 죽을 먹을 수 있는 농가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형편이 궁하면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었다. 먹을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 형편에 고기는 수행 6년 동안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거친 죽이 나와도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붓다의 비라때에 죽을 부은 후 무릎을 땅에 끓고 붓다를 처다보았다. 붓다는 아주 젊었다.
  그녀는 사로몬인 줄 알고 보시했지만 수행자가 너무 어린데 놀랐다. 여자가 죽을 줄 때 그는 틀림없이 노숙한 바라문 고승이었다. 그는 마치 대지의 거목처럼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반신반의하면서 쳐다보자 갑자기 붓다의 얼굴에 찬란한 광채가 감싸였다. 그순간 여인은 땅에 얼굴을 묻었다.
  "슈바라, 슈바라, 슈바라아님....."
  그녀는 더듬거리며 입술을 떨었다.
  "여인이여, 그대 마음의 보시를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진심으로 보시한 그대에게 행복이 돌아가리라. 남편을 잘 받들고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것이며 행복한 인생을 살기 바라노라."
  붓다는 합장하고 있는 부인에게 따뜻한 말을 던졌다.
  "슈바라님, 고맙습니다. 뭔가 몸에서 무거운 것이 쑥 빠져나간 듯합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붓다는 발걸음을 돌렸다. 부인은 붓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합장했다.

 

 


    < 붓다의 가두 설법>

    날란다 시가는 번화했다. 붓다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저마다 종과 북을 치면서 시내를 돌았아. 행인들과 바라문의 승려들도 종 소리, 북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보냈다.
  붓다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외쳤다.
  "오늘 밤 붓다의 설법이 있으니 귀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들으시오."
  설법 시간이 가까워지자 광장에는 여기저기서 온갖 계층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붓다가 설법하기에 앞서 날란다 출신의 사리불이 나서서 붓다의 가르침이 내용과 자신이 붓다에 귀의하게 된 동기며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청중은 붓다가 카필라 출신이며 슈바라가 되어 중생에겍 도를 설법하고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붓다에 대한 호기심은 유달리 컸다.
  '도대체 붓다는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말을 할까?'
  바라문 출신 승려들도 큰 호기심으로 모여들었다.
  청중 중에는 바라문의 높은 콧대를 앞세워 만일 붓다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할 경우에는 한번 크게 골탕을 먹이리라 벼르고 있는 자들도 끼어 있었다. 사리불의 소개가 끝나자 마침내 붓다의 설법이 시작되었다.
  "중생들이여, 길을 걷는 나그네를 보십시오. 나그네는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로 행선지를 향해 갑니다. 만일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이 없다면 초목이 울창한 들과 산을 헤치고 가야 할 것이며 그 어려움이 아주 클 것입니다. 하지만 선배들의 지혜로 길이 둟였으면 밤중에도 횃불을 밝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항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선배들의 가르침이 지혜의 등불이 되어 고난을 피할 수도 있고 보다 밝고 풍요로운 일생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의 일생을 캄캄한 밤길을 헤매는 것처럼 번뇌에 시달리며 괴로워합니다. 홰 그대들은 평온한 삶의 길을 택하지 못합니까? 번뇌에 사로잡혀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선인들의 가르침이 후세에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했을 뿐더러 후세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왜곡시켜 버렸기 빼문에 광명은 없어지고 길도 잃게 되었습니다. 지식과 의지라는 것은 본래 욕망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마음에 없으며 어느 방향으로든 빗나가게 됩니다.
  동물 중에도, 원숭이라는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잔재주가 있으므로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면 쉽게 생포할 수 있습니다. 주둥이가 작은 항아리를 나무 밑둥에 끈으로 단단히 매어두고 그 속에 과일을 담아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는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고 과일을 탐내지요. 마침내 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넣어 과일을 움켜쥐고서는 손을 빼지 못합니다.
  과일은 놓으면 쉽게 손을 뺄 수 있는데도 원숭이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욕망에 눈이 어두어진 원숭이는 결국 인간에게 잡히고 맙니다. 인간의 괴로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욕심을 버리면 파멸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산과 들에은 과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숭이는 욕심 때문에 비극을 자초하고 맙니다. 지혜로운 자는 물질에 사로잡힌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의 주인공인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중생들이여, 육체의 오관에 걸리는 일체의 사물은 무상한 것임을 명심하고, 선한 자아인 마음의 법도에 따라 살아야 하며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 올바른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 인간은 누구나 불자가 될 수 있으며 조화로 충만한 평등한 사회가 구축되어 갑니다. 대자연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생활 조건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평등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욕망에 사로잡혀 높은 담장을 쌓고 온갖 계급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설법에는 늘 비유가 있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문맹자가 많았으므로 여러 예를 들어 가면서 불법을 해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인 청중은 붓다의 열성 어린 설법에 감동하여 누구 하나 도중에 자리를 뜨는 자가 없었다. 붓다의 제자들도 청중 속에 섞여 붓다의 설법을 한 마디라고 놓칠세라 열심히 새겨듣고 있었다.
  이윽고 붓다의 설법이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었다. 바라문 수행자 하나가 흥분한 어조로 대들었다.
  "고타마여, 당신의 제자들은 모두 슈바라니, 붓다니 하면서 고타마을 존경하고 있지만 그런 칭호는 세인을 미혹시킨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나야말로 진짜 슈바라다, 붓다다'하고 뽐내는 , 자칭 붓다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바라문출신의 살몬이지만, 성직자도 아닌 무사 계급 출신의 고타마가 슙라나 붓다를 사칭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고타마 당신의 입으로 직접 여기에 대한 해답을 듣고 싶다. 어떤가?"
  바라문 수행자는 성난 얼굴로 붓다를 쏘아보았다. 붓다는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듯 웃으면서 대꾸했다.
  "바라문 출신의 사로몬이여, 하늘의 태양은 당신을 위해서만 있는 것입니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에게도 해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렸습니까?"
  "......."
  "태양은 하나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흡사 바라문 계급에만 해가 있고 나머지 사람에겐 해가 없다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소? 대자연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인간은 출생이나 계급에 따라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컨대 얼마나 정도를 좇아 살면서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해 주는가에 따라 성자가 되는 것 아닌가요?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틀린 견해와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니다. 우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해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남의 이야기를 듣고 질투심을 불러 일으켜 자기 자신을 어두운 굴 속으로 끌어들이고 맙니다. 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망고 열매을 보시오. 저 망고의 맛을 당신은 먹어보지도 않고 알 수 있겠소?"
  붓다가 가리치는 망고나무를 쳐다본 수행자는 붓다의 물음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망고의 맛을 알 수 있습니까?"
  붓다가 재차 수행자를 다그쳤다.
  "으음, 저 망고는 모양새를 보니 좀더 시링이 지나야 맛이 들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어쨓다는 건가?"
  "사로몬,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설법하는 것을 실천하라는 뜻이오. 그러면 법의 맛을 알게 되지 않겠소? 소문이나 듣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전에 우선 실천해 보고 판단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망고의 맛처럼 단지 신지 알게 될 것이오. 법이란 실천해 보고 난 연후에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습득한 학문을 생활에 실천하여 체험함으로써 지혜로 승화시키는 것이 슈바라에 이르는 길입니다."
  바라문 수행자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무지한 자신을 깨닫고 붓다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길로 붓다 승단에 귀의했다.

  이번 가두 법회로 많은 바라문 수행자들이 귀의하였다. 또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붓다의 설법에 눈을 뜨고 생활 속에서 정법을 살려나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다.
  붓다 잀행은 이와 같이 많은 중생들에게 법을 설파하면서 파타리가마를 지나 밧지국의 바이샬리 마을에 당도했다. 죽림정사를 떠난 지 어느새  보름이 지났다. 그러나 정착지가 없고 살아 있는 바로 그곳이 수행장이라는 것을 깨달은 붓다로서는 결코 긴 여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제자들 가운데는 죽림정사야말로 자신이 수행장이라고 여기고 '이번에 죽림정사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저지른 여러 가지 사념과 행위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 수정하리라'하고 죽림 정사에 대한 향수에 젖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말했다.
  "사로몬들이여, 그대들의 수행장은 죽림정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이 가는 곳마다 그대들의 수행장이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있는 바이샬리도 그대들에게 '지금'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안겨주는 훌륭한 수행장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자신을 두어라. 지금 이 순간을 바로 잡지 않으면 앞으로 갈수록 더욱 큰 짐이 되어 항상 고뇌와 동거하게 되리라. 장소에 따라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변한다면 마침내 하루 해가 저물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캄캄한 암흑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최고의 시간'이라는 점을 명심하여라. 내일이 있다는 마음을 버려라. 내일이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해이하게 하고 오늘을 허송하게 만든다. 이런 자들이야마로 어리석고 못난 인생을 보내고 만다. 그대들 모두가 그대들의 짐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붓다여,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장소', '지금이라는 시간' 을 최고의 수행장으로 알고 법에 정진하겠습니다."
  목건련의 제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감복했다. 일행 중에 나체족 수행자들이 끼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붓다에게 질문했다.
  "고타마, 당신의 이론은 다른 수행자들로부터 들어 이미 알고 있었으니 직접 설법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의 스승은 일체의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그 살생에 대해서 고타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르쳐 달라."
  너무나 거만하고 불손한 태도였으므로 사리불의 제자들은 말했다.
  "리차브족 수행자여, 당신은 당신의 스승에게 늘 지금과 같은 태도로 대하시오? 붓다는 우리들의 스승이오. 정중한 말과 공손한 태도로 질문하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가 아니오?"
  그들이 십여 명이 거친 나체족 수행자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하지만 리차브족의 수행자들은 그런 충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적의에 찬 눈초리로 붓다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붓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리자, 그리고 수행자들이여, 진실을 바로 익혀 차별 없는 평등한 견해를 확립하고 있는 수행자는 겸허하고 뽐내지 않으며 결코 잘난 체하지 않고 법을 마음의 양식을로 삼고 성장해가고 있다. 진실을 바로 익힐 수 없는 수행자는 자신이 믿고 걸어온 길만이 생각하여 맹신, 광신, 미신의 생활에 빠져 있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의문에 대한 해답도 얻지 못하고 작은 지식으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바보 같은 수행을 그대들도 경험해 왔지 않는가.
  벨라의 제자들이 벨라를 스승으로 받들고 존경하는 것이나 그대들이 나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는 것이나 거기에는 하등 다름이 없다. 올바른 법을 지식으로서 이해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생활했을 때 진실의 지혜가 마음 안에서 우러난다. 그리하여 보다 진실한 법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망고의 맛도 직접 먹어 봄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리라. 설익는 망고를 먹으며 쓴맛이 입을 혼미하게 하여 진짜 맛을 알지 못하게 된다. 때를 기다려 잘 익은 망고를 입에 넣었을 때 비로소 망고의 진미를 알 수 있다.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자비이다. 함부로 감정적이 되어 '망고는 맛있다'고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잘 알았습니다. 제게 자비가 없었음을 알겠습니다."
  사리불은 붓다의 설교를 가슴에 새겨, 후에 다른 제자들 사이에 유사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즉가 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열쇠로 간직하였다. 붓다의 눈은 마하 벨라이 제자들에게 옮겨졌다.
  "마하 벨라의 제자들이여, 무익한 살생은 정법이 아니오. 이 땅에 생을 얻어 살아가는 생명 그 자체는 모두 그들에게 부여된 귄리입니다. 하지만 나체 수행자들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체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 그 육체를 유지하고 있는지 한번 말해 보시오."
  붓다는 겸손하게, 나체 수행의 장로 격인 바바리타에게 물었다. 붓다가 늘 하는 질문이다. 바바리타는 대답했다.
  "전도 여행에서 얻은 감자죽,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과실을 먹고 육체를 유지한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혹 과실을 썩히거나 공양 죽이 많아서 버리는 일은 없습니까?"
  "그야 있지. 너무 많을 때는 과식이 육체를 망치기 때문에 버릴 경우도 있다. 썩어서 버린 과실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왜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바바리타는 노여움으로 떨고 있었다.
  "바바리타여, 성내지 마시오. 마음 속에 파도를 일으키면 내 말도 올바르게 듣지 못하게 됩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들어야 하오. 그대들이 살생에 대해서 질문하였기 빼문에 나는 거기 대답하고 있을 뿐이오.
  감자는 감자의 생명을 지니고 있소. 죽은 죽으로서 역시 생명을 지니고 있소.쌀도 감자도 이 대자연의 흙을 모체로 영양을 흡수하여 햇빛의 은총에 의해 싹이 터서 공기를 숨쉬면서 성장하여 초록으로 자연을 장식하고 있소. 이리하여 쌀도 감자도 항상 순환을 거듭하면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제공합니다.
  그대들의 피와 살이 되는 감자나 죽도 그대들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음식물을 소중히 여기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낟알의 쌀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니다. 농부들의 피땀의 결정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들이 나체 수행에서는 모기나 파리들의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쌀도 감자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대들 나체 수행승들이여, 바르게 듣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는 것은 수행승으로서는 당연한 덕목이지만 그대들이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오? 만일 자유라고 한다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고뇌는 어떻게 제거하고 있습니까?  오관 가운데 눈과 귀와 입이 아무리 조화되어 있다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마음 속에서 온갖 사악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고뇌가 될 것이오. 마음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곧바로 행동한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그 마음 속의 고뇌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외형을 올바르게 하더라도 알맹이를 잃은 외형으로서는 진리의 길을 찾기란 불가능 한 것입니다."
  붓다의 제자들은 물론 나체 수행자들도 마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바리타가 말했다.
  "슈바라, 감사합니다. 슈바라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실입니다. 저희는 무살생을 주장하는 자이나교야말로 신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여 오늘날까지 나체가 되어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형이었을 뿐 마음 속은 언제나 파도가 잠잠할 날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소홀히 해왔습니다. 그래서 고뇌에서 해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집착을 버렸다는 것은 나체의 외형이었습니다.
  고타마님이야말로 진실로 슈바라입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발 저희들을 제자로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드는 허드렛일이라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들은 제자로 입문시켜 주십시오."
  도를 찾아 노력해 온 사람답게 바바리타의 이해는 빨랐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와 함께 생활해 온 나체승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 붓다에 귀하겠다는 초발심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바바리타여, 내가 설하는 법을 잘 이해하여 실천하는 자는 누구나 다 동지요 친구이니라. 잘 이해하여라. 잘 실천하여라, 언젠가 그대들도 마음의 세계를 열리라."
  "슈바라, 감사합니다. 법을 잘 이해하여 잘 실천하겠습니다. 고타마 슈바라의 가르침을 지키겠습니다." 
  당시 바라문 계급 출신의 수행자들은 깨달은 자를 '슈바라'라고 불렀다. 관자재력(觀自在力)을 가진 신의 화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붓다는 즉석에서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피했다. 이유는 지금 붓다는 쉬라바스티로 가는 도중이지만 나체승의 자이나교의 교주는 리차브족 왕자였으며 바이샬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설법하는 내용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붓다의 법을 알고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정도를 좇아 종전의 교파를 미련 없이 버리게 된다는 것을 붓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리차브족은 성질이 급했으므로 제자들의 변심을 알았을 때는 적지 않은 풍파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붓다의 법을 깨달은 날에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단을 바로잡아 갈 것이라는 예상도 붓다는 이미 하고 있었다.
  붓다가 예측한 대로 그후 수년이 지나서 붓다의 제자 가섭이 이곳에서 포교를 하게 되었을 때 바바리타의 일단은 바이샬리의 붓다 승단에서 중심 인물로 활약했던 것이다.

  쉬라바스티로 가는 여행은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되엇다. 여행 도중 곳곳에서 붓다의 설법은 계속되었으며 그만큼 붓다에 귀의하는 중생의 수도 늘어났다.
  한편 붓다에 반감을 품고 붓다의 설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바라문 수행자들의 대다수가 그러했다. 바라문교는 이미 1,800년의 역사를 가졌으며 당시 중샏을의 생활 가운데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그 바라문교도 여러 갈래의 파벌이 있어서 제사도 형식화되었고 화석화된 종료고 전락하고 있었다. 신앙하는 태도도 타력화되어 권력과 독점욕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신앙 가운데에서 진실한 도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라문 계급이면서도 바라문교에 만족하지 않고 고행의 길을 거쳐 신에 접근하려는 자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부조화한 상태에서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긴나라, 마고라, 아그니, 야그시, 아크샤 등의 지옥령이 빙의하여 그들의 입과 눈을 빌어 이 세상이 것이 아닌 세계를 말하고 보여줌으로써 타력 신앙으로 중생들을 끌어들이는 그릇된 자가 많았다.
  그 결과 '나야말로 위댓한 슈바라다', '나야말로 붓다니라'하고 사칭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전통을 자랑하는 바라문은 이와 같은 수행자에 대해서는 심한 비판을 서슴없이 가했다.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곧장 논쟁을 벌었고, 외도한 수행자를 긍지에 몰아넣음으로써 콧대를 높이는 바라문이 많았다. 지식만 발달하여 말만 앞세웠지 마음의 수양에 힘쓰는 수행자는 없다시피 했다. 그런 바라문이었으므로 크샤트리아 출신인 고타마의 가르침을 믿고 쉬라바스티의 부호 수닷타가 제타베나[祈園精舍]에 막대한 재산을 보시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비판하는 소리가 높았다.
  마하 바라문의 사제들은 수닷타에게 말했다.
  "수닷타여, 대부호여, 바라문의 전통인 신을 받들어왔고 그 신의 가피을 입고 많은 중생이 구제되어 왔는데 어디서 굴러먹은 말뼈다귀인지도 모르는 자에게 막대한 보시를 한다는 것은 반드시 두파칠분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 부모도 바라문의 신을 믿었고 당신도 그 속에서 컸습니다. 오늘의 대부호로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바라문신이 내려준 은덕입니다.
  개종은 조상에 대한 불효이며 바라문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재산과 목숨을 소중히 하고 싶으면 외도로 들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겐 훌륭한 따님이 있습니다. 데르사님, 우다라님, 그 따님의 앞날을 위해서도 외도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도니 신앙은 자손에게도 해가 됩니다."
  이에 대해서 수닷타는 반발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꾸한다.
  "예,예,마하 잇시님, 언제나 저뿐 아니라 아이들 장래까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의 기증은 다른 뜻은 전혀 없고 오로지 저 자신의 기쁨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문의 신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카필라성의 왕자였던 고타마님을 모시는 숙소에 지나지 않으며, 신을 모시는 장소라니 그런 엄청난 일을 저 따위 인간이 어떻게 감당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저희는 고타마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설법당을 지었을 따름입니다. 마하 잇시님도 제발 와보시기 바랍니다. 신을 보신 구석은 전혀 없습니다.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일 뿐입니다."
  이렇게 수닷타는 마하 바라문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마하 바라문은 할 말을 잃었다.
  수닷타가 라자그리하의 마을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도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관에 눈떴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이 감동의 붓다에게 정사 기진(奇進)이란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많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법을 듣게 하고 인간이 가는 길에 법등을 밝혀주고 싶은 일념만이 그으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첫 단계가 지금 눈앞에 완성된 것이다.
  완공된 기원정사를 바라보면서 수닷타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피웠다. 어깨를 나란히 하여 수닷타의 말을 듣고 있던 마하 바라문 출신인 대선(大仙)은 대꾸할 말을 잃고 제타 태자가 기증한 동문의 웅장함을 쳐다보면서 복잡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대선도 언젠가는 우루벨라 캇사파 형제처럼 붓다에 귀의하게 되리라고 수닷타는 짐작하고 있었다. 수닷타도 어릴 때부터 바라문의 사제(司祭) 행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으므로 바라문교의 수행자들이 허구적인 삶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성직자란 전통적인 틀속에 안주하여 자기 완성이 없었고, 지식은 풍부하였지만 행동과 실천이 따르지 않아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붓다의 일행은 쉬라바스티의 시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자(使者)의 연락에 따라 목건련, 수닷타들은 붓다의 일행을 마중하러 나갔다.
  초라한 승복을 걸친 붓다의 모습을 보고 수닷타는 부끄러웠다. 대부호인 자신의 화려한 복장과는 달리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붓다를 위해서 특별히 만든 캇시산 비단 승복을 하인을 시켜 가져왔으므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저희들은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드리는 작은 정성이오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닷타는 정좌한 붓다에게 승복을 바쳐 올렸다.
  "수닷타여, 법의 위대함을 깨닫고 도를 설법하는 자에게 공양하는 행위는 자자손손 광명이 되며 그 공덕은 미래 영겁인의 마음 속에 길이 남으리라 . 고맙다."
  수닷타는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승복이 꽤 낡고 더러워졌으니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수닷타여, 호의는 받아들이겠다. 비록 승복이 더럽지만 마음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 품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서 정해진다. 하지만 그대의 호의를 받겠다."
  "황송합니다. 저희가 기원정사로 모시겠습니다. 부디 이 가마를 타시기 바랍니다"
 "친절은 고맙지만 나는 건강하다. 몸이 불편한 사로몬이 있으니 나 대신 태워주면 좋겠다."
  붓다의 자비에 수닷타도 목건련도 눈물을 흘렸다.

 


  
    < 왕의 임무>


  붓다 일행이 동문에 이르렀을 때 많은 중생은 붓다를 보려고 통로 양쪽에 아름다운 꽃가루를 뿌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중생이 마음이 법으로 안정을 되찾고 진실한 인간성에 눈뜨며 평화롭고 건강한 일상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붓다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붓다는 제타 태자의 영접을 받아 정사 안으로 들어갔다.
  "제타 태자입니다."
  수닷타는 붓다에게 태자를 소개했다.
  "슈바라, 먼 길에도 불구하고 잘 오셨습니다. 슈바라의 큰 덕에 대해서는 수닷타를 통해서 잘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될 날을 큰 즐거움으로 기다려왔습니다."
  "이 넓은 정원을 승단에 기증해 주신 것을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을 코살라국의 거점으로 삼고 중생에게 도를 설법하겠습니다."
  붓다는 제타 태자에게 고마운 뜻을 전했다. 대코살라국의 왕자인 제타는 겉으로는 유순해 보였지만 마음은 엄해 보였다. 정실의 아들인 아우 파세나데가 코살라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데 비해 형은 둘째부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작은 성의 성주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늘 불만이었다.
  그는 운명을 받아들여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런 권력의 집착으로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붓다의 설법은 바로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여 인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붓다는 머지않아 제타 태자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기원정사의 생활은 목건련과 수닷타의 계획에  따라 방 배정, 설법 일정 등이 잡혔다.
  하지만 장마철이 아닌 한 죽림정사에서처럼 옥외에서 수행하는 일이 많았으며 정사를 뜨는 날이 적었다.
  어느 날 수닷타의 소개로 파세나데왕이 붓다를 찾아왔다. 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그의 위세는 제타 태자와는 크게 달랐다. 하지만 대국의 왕이면서도 얼굴은 부드럽고 기품이 넘쳐 흘렀으며 도를 찾는 구도 정신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다. 왕은 붓다 앞에 이르자 절을 하고 정좌한다.
  "샤카족의 왕자, 고타마 붓다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붓다를 직접 만나게 되니 기쁩니다. 빈비사라왕도 붓다에 귀의하였다고 듣고 있습니다. 코살라국에서는 많은 바라 바라문들이 엄격한 수행을 하고 있지만 깨달은 자는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더욱이 크샤트리아인 고타마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는지 그 점이 궁금합니다."
  그는 대국의 왕이라는 신분을 의식하면서 정중하게 질문하였다. 무엇보다도 붓다와는 비슷한 나이였으므로 고타마가 어떻게 해서 깨달을 수 있었는지 그 점이 궁금했다.
  "대왕이시어, 깨달음은 나이와는 상관없습니다. 올바른 마음과 행동을 하면 누구가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나나의 왕자라 해도 얕보면 안 됩니다. 훗날 대왕이 될지 누가 압니끼?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사미라도 얕잡아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미가 법을 잘 알고 마음과 행동이 법에 어긋나지 않을 때는 눈먼 중생을 제도하는 관자재보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냥개비 같은 작은 불도 얕보면 안 됩니다. 그 작은 불이 큰 불이 되면 큰 도시도, 이 아름다운 대자연의 초목도 태워버리는 큰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사미도 장차 사로몬이 되어 마음이 청정하게 하고 정도를 잘 지키면 높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열고 신리를 알게 되면 고뇌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게 됩니다. 법이라든가 도라는 것은 현실에 만족할 줄 알고 노여움, 헐뜯음, 원망, 어리석음 등의 감정이 얼마나 무서운 독인가를 깨닫고 그런 독덩어리인 무거운 짐을 몽땅 버리는일입니다. 정법을 펴는 자를 비방하거나 박해하면 그 죄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바로 신의 마음을 모독하는 짓일 뿐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신성과 불성(佛性)을 더럽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파세나데왕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경계해야 할 두려운 존재랄는 것을 깨달았다. 왕은 평소에 수행자들로부터 두파칠분의 벌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바라문신을 비방하고 바라문 수행자를 박해하면 머리가 찢어지는 아픔을 이기지 못해 미쳐 죽게 된다고 듣고 있었다.
  왕은 바라문의 경전을 공부해 왔다. 그래서인지 붓다가 말하는 정법이 금방 잡힐 듯 이해가 빨리 되었다. 붓다의 말은 적고 간단했지만, 그 한 마디에는 천금의 무게가 실려 있어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붓다는 설법을 멈추고 파세나데왕의 마음 속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파세나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붓다여, 나라의 지도자로서 명심해야 할 마음의 자세와 행동에 대해서 가르쳐주십시오."
  붓다는 지난날 라자그리하성에서 빈비사라왕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은 사실이 머리에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대왕이시어, 무엇보다도 중생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해야합니다. 신분을 따지지 말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권력이나 무력의 힘은 인간의 행동을 한동안은 억제할 수 있습니다만 마음의 자유까지 짓누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마음의 법도에 따라 통치하면 국민은 순종할 것이며, 나라는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도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차 그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할 때, 악의 마음을 이기고 올바른 중도(中道)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희생 위에 자신으 행복을 구축하는 것은 자신을 멸망의 길로 몰고 가는 일입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어주고 고뇌하는 자에게는 고뇌를 제거해 주며 병든 자에게는 자비의 마음으로 아픔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비록 왕이라도 그 지위를 특별한 자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또한 측근자들의 잘못된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번뇌의 고통을 멀리하고 인간다운 길을 걸어야 하며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이 크게 타는 곳에 정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노여움으로 마음이 불타고 있으면 바른 이성이 작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충고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욕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물의 도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몸과 나라를 망치게 됩니다. 또 지식만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은 그림 속의 망고처럼 그 맛을 영원히 알지 못합니다. 지식은 행동과 실천을 거쳐야 지혜로 승화하는 것이며 씨앗은 비옥한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여러 험난한 길을 헤치며 여행을 해야 하듯이 살아가는 데도 여러 장애물을 이겨나가야 하는 끝없는 정진이 필요합니다.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고락을 필수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정도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고뇌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고뇌를 낳은 원인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대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뇌는 그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는 한 다시 싹이 돋아납니다. 이 고뇌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데는 지혜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만들어낸 온갖 고뇌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앞으로 다시는 고뇌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것이 인생을 평화와 안정으로 이끌어가는 길이 됩니다.
  이 정사의 건물도 단단한 땅 위에 든든한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긁은 기둥이 서서 지붕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바람을 견딜 수 있고 우리가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평온히 하고 살 수 있으려면 든든한 정법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법의 기둥이란 자기 중심의 마음을 바로잡고, 남이 있으므로 자신이 있을 수 있으며 대자연 속에서 상부상조하듯이 서로 조화하는 것이 기둥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말을 올바르게 들어야 할 일이지 결코 감정으로 받아들여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떠한 말을 들어도 노여운 마음, 비방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 정욕적인 마음, 허영된 마음, 오만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마음들은 바로 마음에 독을 먹이게 되며 새로운 고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됩니다.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올바르게 말하기는 부조화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므로 부조화된 말은 자신의 마음 속에 독을 먹일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독을 먹이게 됩니다. 특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파세나데왕은 붓다의 자신만만한 설법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반바을 할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설법은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정화된다. 그 감흥이 점점 커지는 것에 대해 왕은 스스로 놀랐다.
  붓다는 제가가 준 물로 목을 축인 다음 설법을 계속했다.
  "위대한 왕이여,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은 곧 마음 속에 고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되며 그것은 직접 행동한 것이나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애가 넘치는 마음은 밝은 세계에 살며 그 행위는 큰 조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됩니다.
  마음 속에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한 자아의식과 자기 중심적인 조화로지 못한 위선적인 자아 의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일체의 고뇌는 바로 거기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자아의 마음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처럼 자애 넘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태양이 아무 보답도 원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의 만물을 키워내는 큰 조화의 근원 즉 신불의 마음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허영심은 마음에 독을 주는 무상한 이기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허영심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초라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마음 속에 생각하는 자유는 그 어떤 위대한 왕의 권력으로써도 구속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애에 넘치는 선한 정치를 펴나간다면 중새의 마음에 양심을 소생시켜 참다운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욕심을 가지고 중생을 다스린다면 조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생각하고 사념하는 마음은 선악 어느 쪽이든 자유로울 수 있으므로 진정한 자애심은 중생의 마음을 감동시켜 감사와 보은의 행동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붓다의 한마디 한마디는 파세나데의 심금을 울렸다. 중생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지금까지 펴온 정치는 어느 것 하나 왕이라는 사심이 개입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통했고 중생도 신하도 기꺼이 왕에게 충성을 바쳐왔다. 왕이 곧 국가요 법이었으므로 중생과 신하는 왕의 분신이요 수족이었다. 왕의 의지는 중생의 의지였고 왕의 생각은 바로 중생의 생각이었음에도 그 행사권은 늘 왕에게만 있었다. 따라서 왕에게 적의를 품고 반역을 꾀하는 자는 중생의 적이므로 죽여도 할 말이 없었다.
  인간으로서의 파세나데와 왕으로서의 파세나데 사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이 있었다. 그는 그 모순을 왕의 입장에서 해결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붓다의 설법을 들으니 자신이 그들의 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던가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위대한 왕이시여, 사람이 진실에 눈떴을 때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명 속에 갇혀서 그 잘못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용기 있는 자라고 하겠습니다."

  붓다는 왕의 마음 속에 싹트는 개심의 정을 읽고 있었다.
  '....아아, 붓다는 내 마음 속까지 죄다 읽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정도를 가르쳐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파세나데왕의 얼굴은 진지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위대한 왕이시여, 사념은 선이나 악 어느 쪽으로도 통하게 되어 있으므로 중생의 행복을 바라는 선심은 중생의 마음에 바로 평안을 심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타력이 아니라 자력인 자애의 마음으로 원하는 행동은 광명이 되어 백성의 마음에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올바르게 사념했으면 실천하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덕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올바르게 일한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하는 일도 수행도 중요한 과정이니 거짓 없고 불평 없고 노여움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올바른 정심(正心) 이외에는 광명 세계에 거주할 수 없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 설법하는 여덟 가지의 정도를 마음과 행동의 잣대로 삼고 생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실한 수행자라고 하겠습니다. 일체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실천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붓다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던 파세나데는 무엇인가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되어 가슴 언저리에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서려오는 것을 느꼈다.
  "붓다여! 나는 지금 마음의 고향에 돌아와 마음의 아버지를 만난 기분입니다. 평안과 행복에 포근히 싸인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나를 인도해 주시시 바랍니다. 잘못 없는 정치를 하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왕은 수닷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닷타여, 참으로 훌륭한 스승을 나에게 인도해 주었다. 코살라국에 위대한 보물을 안겨주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위대한 왕이시여!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을 뿐이올시다."
  "아니, 그 어떠한 재산과 보물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안겨주었다."
  붓다를 다시 똑바로 쳐다본 왕은 갑자기 '붓다!'하고 소리지르며 무릎을 끓고 최고의 예를 올렸다. 붓다는 입을 열었다.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는 어두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거꾸로 밝은 양지에서 어두운 음지로 전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 항로는 암중모색이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법등을 켜고 광명 세계에 상주하면서 무상한 현상계에 집착하여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자기 것이라면 자기 뜻대로 젊음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육체는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 없으며 추악한 모습으로 변하여 더러는 매장되어 썩고, 더라는 한 줌 재가 되어 대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마음이 밖을 향하면 만족과 안정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을 마음 속에서 찾을 경우에는 끝없는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 밖의 집착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법을 잣대로 삼고 생활하면 그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흔들이지 않고 안정을 얻더 깨달음의 경지에 들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참다운 불국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파세나데는 기뻤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하 바라문 지도를 받아보았지만 기쁨은 없었다. 제사나 기도로는 무엇 하나 얻는 것이 없었다. '어딘가 이상하다', '어딘가 잘못되었다' 의심이 생겼고, 제사에 정성를 쏟아도 자신의 마음도 만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생의 마음도 다스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붓다의 법은 살아 있는 정치요 왕도로 통하고 있지 않은가. 올바른 법과 그 실천만이 조화의 왕국을 일으켜세울 수 있는 지침이라는 것을 왕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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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高橋神次(다카하시 신지)의 『인간석가』「6장 승단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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