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5장 바라리의 제자 17인의 귀의-『인간석가』(高橋信次)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5장 바라리의 제자 17인의 귀의-『인간석가』(高橋信次)

어둠의골짜기 2010. 3. 16. 04:07

『인간 석가』

5장 바라리의 제자 17인의 귀의

몸이 불편한 바바리는
붓다에게로 떠나는 17명의 제자들의
얼굴을 보면서 감상에 젖었다.
'나도 젊다면 앞장서서 붓다를 만날 터인데
이렇게 늙었으니 그에게 찾아갈
힘조자 없구나.'
사랑스런 제자들이 깨달음을 위해
자신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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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과 제자의 이별 >

 

  바라나시 교외의 바라문 마을은 온통 붓다의 이야기로 가득찼다. 야사의 아버지 우파시 카우파사카 붓다의 가르침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파시카는 바라문 가문의 신망도 두터웠다. 두 부부는 마하 바이샤(대부호)였는데 수행자라면 누구에나 차별 없이 보시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 부부는 붓다의 첫 번째 신도였으므로 만나는 수행자마다 붓다의 가르침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마하 바라문인 바바리도 이 두 사람으로부터 붓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로병사의 고뇌에서 해탈하는 정도를 섭법한 내용이 충실하고 빈틈없어서 가히 붓다의 명성에 손색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바바리를 감동시킨 것은 이 부부의 외동아들인 야사가 붓다의 제자로 입문하여 벌써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 중생 제도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붓다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바리는 이미 120세의 고령이었다. 먼 마가다국까지 걸어가기에는 너무 늙은 몸이었다. 붓다에 대한 흠모의 정을 안고 애태우고 있을 무렵에 마을에서 축제가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축제는 바라문의 신을 모시고 마을 전체가 즐기는 행사였다. 바바리는 제전의 주관자였으므로 분주한 축하 행사를 끝내고 가파리의 도장으로 돌아왔다.
  그가 잠시 쉬려고 할 때 초라한 행색을 한 남자가 찾아왔다. 몸이 푸석푸석 부어 있고 머리는 먼지투성이었다. 얼굴은 아에 씻은 적도 없는 듯 딱지가 눌러붙어 있었고, 어디를 보나 거지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바라문의 수행자라로고 우겼다. 바바리는 그 수행자에게 자리를 권하고 죽을 대접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바리를 쏘아보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축제는 굉장하고 공양물도 많은데 내게도 좀 주시구려."
  그가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요구를 했으므로 바바리는 어리둥절하여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바바리는 정중하게 대꾸했다.
  "축제의 공양물은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누눠져 버렸고,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에게 드릴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흐흠,그렇게 많던 공양물이 벌써 바닥이 났다고?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나의 주문으로 네 머리통을 일곱 조각으로 깨어 즉사시킬 것이다. 그것도 7일 이내에 말이다."
  이렇게 겁을 주더니 그는 바바리 쪽으로 손바닥을 들어보이면서 무엇인가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고 돌아가 버렸다. 바라문교의 수행자로서 지금까지 없었던 일인만큼 바바리는 당황했다. 남이 보는 앞에서 저주를 받았으니 누군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바바리는 괴로워서 밥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숲 속으로 나가 선정(禪定)도 해보았으나 평온을 되찾을 수 없었다. 스산한 마음으로 밤늦게까지 뒤척거리다가 너무 피로가 겹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때 귓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문득 잠이 깼다.
  "바바리, 무슨 고민이 있느냐. 너는 아직도 집착하는마음을 못 버리고 있구나. 무엇이 두려우냐? 무엇에 놀라고 있느냐? 바라문이라면 그녀석은 너의 재산을 탐냈을 뿐이다.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내겠다는 두파칠분(頭破七分) 따윈 알 리도 없어."
  "바라문의 신령님, 두파칠분의 벌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분은 누구신지요. 제발 가르쳐주십시오."
  바바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매달려 해답을 구했다.
  "너는 아직도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가. 죽음이 그렇게도 겁이 나는가."
  "저처럼 여러 제자들도,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무자비한 협박과 행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발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바바리는 하늘에 대고 빌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코살라국 샤카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지금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성 동북쪽 그리드락터에서 마음의 위대함과 자비의 도를 설법하고 있다.이미 붓다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이 붓다라면 인과의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바바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바라나시의 우파시카가 믿고 있는 붓다의 이름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바바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틀림없이 천인(天人)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제자들을 도량에 모았다. 축제가 끝난 후라 모두 한잠 푹자고 있었던 터라 그들은 불러온 영문을 몰랐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깊이 명심해서 듣기 바란다. 나는 마하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나 오늘날까지 바라문의 성전을 배우고 방황의 길을 걸어오면서 수행을 쌓아왔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 깨달음의 경지는 멀기만 하다. 어제 도량을 찾아온 한 바라문 수행자로부터 보시를 요구받았으나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나를 원망하면서 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갈라지며 7일 이내에 죽는다는 저주를 걸고 갔다. 뜻하지 않던 협박으로 밤새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에야 잠깐 눈을 붙였는데 뜻밖에 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와 붓다가 정도를 설법하고 있다는 것을 교시 받았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숨죽이고 들었다. 스승의 겪은 거짓없는 마음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바라문의 어려운 습관, 형식적인 축제, 그 밖의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여러분들도 의문이 많을 줄 안다. 그 의문에 대해서 스승인 나는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 없다. 왜 그럴까. 바라문교는 학문이 되고 말았으며 지식만으로 깨달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삼계를 꿰뚫어보는 법력을 겸비하신 분인데 그것은 가장 으뜸인 '마음'을 깨닫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진짜 붓다라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을 자유자재로 꿰뚫어볼 수 있다. 내가 가르치지 못한 '마음'을 붓다에게 배워 참다운 바라문 수행자답게 슈바라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고 바바리는 제자들 한사람 한사람을 둘러보면서 붓다에게 수행하려 갈 사람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모두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바리는 어렵게 한 사람씩 지명해 나갔다.
  "핀기야, 너는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까지, 내가 지금부터 뽑는 제자들을 인솔하여 가주기 바란다."
  우선 핀기야를 인솔 책임자로 지명했다.
  핀기야는 몸짐이 클 뿐더러 힘도 세었기 때문에 긴 여행을 무사히 인솔하는 데 가장 마땅한 인물이었다. 제자들은 다음에는 누가 지명될까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바바리의 지명을 기다렸다.
  "법 앞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이 평등해야 할 것이다."
  아직 어린 마이트레이어에게 바바리의 시선이 멈추었다. 마이트레이어는 바바리의 질녀였다.
  "마타레, 너는 어려서부터 바라문교를 잘 공부하여 바라문 가문의 여성답게 수행을 쌓았다. 바라문 가문의 어린이들에게도 엄격한 제사의 학습을 잘 지도해 주었다. 가정에 돌아가지 않고 명상, 고행, 그 밖의 수도 생활을 잘 견디기도 했다. 마가다국이 멀긴 하지만 가볼 뜻이 있는가?"
  "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기도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지명받아 거침없이 승낙해 버린 자신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가족들과 의논도 없이 결정해 버린 자신의 경망함도 마음에 걸렸다.
  바바리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젊어서는 고생을 많이 하는 것이 좋으니라."
  그리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사라난다, 포사라, 도데야, 너희들도 마타레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세 여성도 모두 좋아하며 스승의 말을 받아들였다.
  "고맙다. 마타레도 셋이 함께라면 외롭진 않겠다."
  세 여자는 마이트레이어보다 모두 서너 살 연상이었다. 지조가 곧고 평소에 우의가 돈독했다. 넷은 눈짓으로 교환하면서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이어 몽가라자가 지명되었다. 그는 <우파니샤드>,<베다>의 이론에 밝아 바라문의 진가를 발휘하는데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지명되자 몽가라자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비록 붓다라 하더라도 마하 바라문의 바바리, 마하 이시(대성인)보다 위대한 슈바라라곤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다. 직접 만나보기도 전에 상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게 네 결점이다. 많은 체험을 거친 후에 빌소 옳은 것을 알게 되는 법이다.
  바바리는 그의 좁은 소견을 꾸짖었다. 좌중을 연방 둘러보면서 한 사람씩 계속 지명해 나갔다.
  "아지타, 멧다구, 도다카, 헤마카, 너희들도 젊다. 많은 인생 경험을 쌓고 오너라."
  "자토칸닌, 너도 함께 다녀오너라. 우다야, 캇파, 너희도 가도록. 다들 단단히 수행하고 오너라. 도중에는 험한 산과 계곡도 있고 맹수와 독사도 많으니 서로 주의하면서 행군하거라. 크샤트리아에서 몰락한 산적도 있겠지만 재물이 없는 수행자에게는 손대지 않겠지. 여성도 남장을 하여라. 남성은 앞뒤에서서 여성을 보호하면서 행진하기 바란다.
  붓다를 만났을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진짜 붓다라면 너희들의 마음 속을 모두 읽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우선 내가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많은 제자들을 보냈는가, 내 제자는 모두 몇 명이며 나의 고민, 머리가 깨어지는 일 등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해도 금발 알아버릴 것이다. 바도라<베다>, 푼나가, 우바시바, 난다, 너희들도 동행하여라. 자 , 그러면 지명된 자는 모두 앞으로 나와라."
  체구가 큰 핀기야을 선두로 17명이 바바리 앞으로 나가서 정렬했다. 바바리는 17명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어느새 감상에 젖고 말았다. 자기도 젊다면 앞장서서 붓다를 만날 터인데 이렇게 늙었으니 목적지까지 도착하기조차 힘들다. 귀여운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나 생소한 곳에 가서 마음의 공부를 하게 된다. 이렇게 경하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지만 막상 자기 곁을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비는 것만 같았다.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은 이미 각자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며, 항상 명상하던 전생에서도 훌륭한 바라문교의 수행자들이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지식으로서의 바라문교를 설했지만 붓다는 마음과 행동의 척도를 가르쳐줄 것이다. 참다운 붓다라고 인정되거든 그 자리에서 붓다의 제자가 되어라. 핀기야, 너는 돌아와 보고하여라."
  바바리의 목소리른 떨렸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흥건히 고였다. 마이트레이어를 비롯하여 모든 여자들이 흐느꼈다. 스승을 떠나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붓다의 제자가 되어 자신을 완성하라는 바바리의 큰 자비심이 나머지 제자들의 가슴에도 전달되었다.
  "자, 너희들은 내일 첫닭이 울 시간에 출발하여라."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했다. 미지의 나라 마가다까지, 그것도 험한 길을 더위와 싸우면서 며칠씩 행군해야 하는 위험한 여행이었다. 따라서 이번 여행은 가족들과도 최후의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치안이 유지되는 곳은 고작 마을과 도시뿐, 마을만 나서면 호랑이, 하이에나, 독사 등이 우글거리는 맹수 천지였으며 산도적들도 도처에서 출몰한다.

  다음 날 새벽 첫닭이 울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도량에 집합했다. 모두들 머리를 곱게 빗고 사슴 가죽옷을 입고 바바리 앞으로 나가 인사를 올렸다. 바바리는 합장하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전도를 빌었다. 일행은 도량을 뒤로 하고 완만한 구릉을 몇 개나 건너 북쪽으로 걸었다.
  그들은 가파리, 바이샬리를 지나서 산을 넘고 다시 계곡을 따라 남하했다. 뜨거운 태양에 질려 일행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허우적거리며 걸었다.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마침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진기한 것뿐이었으며, 머물러 구경하고 싶기도 했다.
  핀기야은 지가가는 사로몬 한 사람을 붙들고 붓다의 거처를 물었다. 라자그리하 도시의 북문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산기슭에 그리드락터라는 곳이 있는데, 붓다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었다. 마이트레이어는 미지의 붓다에 대해서 사라난다, 포사라, 도데야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붓다란 어떤 분일까?"
  "카필라의 왕자님이시니 크샤트리아다운 위엄을 갖추신 분이겠지."
  "바라문 가문도 아닌데 붓다가 나오다니 정말일까?"
  여자들은 붓다를 만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궁금중과 설레임이 더해 갔다. 붓다, 아포로키티슈바라라는 으레 바라문 가문에서 출현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며, 그녀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나 같은 생각이었다. 붓다를 직접 만나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이지 아포로키티슈바라란 경전이나 말로만 듣고 알았을 뿐이지,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으니 어떤 사람인지 누구나 궁금한 일이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아지타가 선두에 서서 산에 올랐다. 이따금 산새들이 일행의 앞기를 가로질렀다. 산새의 울음 소리가 그치면 주위는 깊은 정적에 빠졌다.
  붓다는 큰 바위를 등지고 않고 사로몬, 사마나들에게 설법하고 있었다. 탄력성 있는 찌렁찌렁한 음성이 청중의 마음 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미륵보살의 이름, 마이트레이어, 마타레 ....로 불리웠다.★

 

 

 

    < 붓다와의 질문과 대답 >

 

  붓다의 이마에는 땀이 베어 있었다.
  "수행자 여러분, 엄한 육체 고행으로 불타는 번뇌를 진정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오관에 붙들여 있기 때문이다. 엄한 육체 고행의 인내는 훌륭하지만 마음 속에서 일어난 자아는 보다 강한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굳혀갈 뿐이다. 오관에 붙들린 번뇌의 두께가 가라앉아 있는 마음을 청정하게 씻는 데는 오바른 심행(心行)이 필요하다.
  팔정도의 척도를 기준으로 하여 마음과 행위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목적인 수행은 자아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부유한 환경에서 욕심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번뇌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불꽃을 잠재울 수는 없다.
  고뇌의 생활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마련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고 끝없는 욕망의 윤회가 이어진다. 흡사 진흙탕에 발목을 잡힌 것과 같으며 거기서 뺘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수족의 자유를 잃게 된다. 해탈의 길은 고행과 안일이란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에 드는 것이다."
  붓다의 큰 목소리는 들과 산을 건너 멀리 퍼졌다.
  핀기야 일행은 수행자들의 뒷자리에 앉아서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붓다의 몸은 황금빛에 싸여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요. 마타레님의 눈에도 그것이 보이나요?"
  아지타는 옆자리에 앉아서 붓다의 설법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마이트레이어에 말을 건넸다.
  아지타가 묻지 않아도 마이트레이어 역시 붓다가 아름다운 후광에 휩싸인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지타의 말에 제 정신이 든 마이트레이어는 붓다의 설법 속에 빠져 들었다.
 
  붓다는 그들 일행의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씩 핀기야 일행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약 한 시간 반이나 걸린 붓다의 설법이 끝난 후에 핀기야 일행은 붓다 앞으로 나가 예를 갖추었다.
  "먼 길에 무사시 잘 오셨습니다."
  붓다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금 전의 힘차고 굵직한 음성과는 달리 부드럽고 친절한 말로 대해 주었다. 일행은 여기서 붓다의 인품을 엿보았다.
  몽가라자는 붓다의 설법 중에서 마하 바라문 가문의 입장을 의식해서 주의 깊에 듣고 있었기에 붓다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음식 대접을 받은 사람이 먹어보지도 않고 아무리 요리법을 연구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음식을 눈으로 즐기고 있는데 불과한 일입니다. 바라문 출신들께서는, 지식이 실천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지혜로 바뀐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붓다의 돌연한 질문에 몽가라자는 깜짝 놀랐다. 그때 뒤에 앉아있던 아지타가 혼자 마음 속으로 붓다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 스승님께서 머리가 일곱 개로 깨질 것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선이시여, 부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수행자들이여, 여러분은 내가 슈바라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진짜 슈바라라면 범을 공부하고 실천해서 제자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배우고 수행한 것을 옳다고 생각하지만,그것은 자기에게만 통하는 것일 뿐이며 남의 말을 멸시하고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붓다는 아지타를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스승 바바리는 바라문의 세 성전(聖典)에 통달하시고 스스로 수양을 닦으신 훌륭한 마하 바라문입니다. 그대들은 내가 만일 진짜 슈바라거든 제자로 입문하여 공부하고 오라는 그의 분부을 듣고 왔습니다. 바바리는 용기 있는 지도자이십니다. 너무 나이가 많아서 내게 올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붓다가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한편 마이트레이어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붓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감동이 솟구쳐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녀의 두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왜 자신이 감격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복받쳐서 걷잡을 수 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붓다, 아포포키티슈바라여, 저는 당신에게 귀의하겠습니다. 제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감격적인 체험이었다. 그녀는 위대한 붓다의 힘으로 순시간에 마음의 문이 열렸다. 아지타는 붓다 앞으로 다가가 붓다를 의심했던 자신이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용서를 쳥했다.
  "제 스승은 무례한 바라문 수행자로부터 머리가 일곱 조각이 날 거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제발 저희 스승을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붓다는 아지타에게 말했다.
  "인간의 무지가 바로 두파칠분입니다. 육체는 무상한것, 자기 것이면서 자기 것이 아니다. 육체는 부모로부터 얻은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육체의 오관을 통해서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마음을 넓고 둥글게 키워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실상을 모르고 육체만 귀하게 여겨 스스로 고통과 욕망의 포로가 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육신을 가지고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육체에 집착하여 고뇌에 빠진다.
  그대의 스승 바라리는 바라문교에서 두파칠분을 배워서 알고 있었기에 괴로워하고 있다. 아무리 저주를 받아도 스스로 마음과 행위가 올바르면 그 저주는 다시 저주를 건 자에게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구더기는 햇빛이 들지 않는 더러운 그늘에 끊는다. 햇빛이 있는 대지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벌과 나비들이 날고 있다. 밝고 깨끗한 곳에 구더기가 있을수 있겠는가.
  벌은 자기 마음과 행위의 부조화가 만들어내는 것, 마음과 행위가 중도를 지키고 광명으로 충만한 생활을 한다면 못된 수행자의 저주 따위가 무슨 걱정이 되겠는가. 바바리는 그 저주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비록 상대가 아무리 저주를 걸어도 이쪽에서 받지 않으면 된다. 저주는 이쪽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거기싸지 말하고 핀기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는 스승에게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여라."
  붓다는 그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17명의 수행자들은 사슴 가죽으로 만든 승복의 오른쪽 어깨를 벗고 붓다의 발 밑에 넙죽 엎드렸다.
  "바바리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한다."
  붓다는 자애에 넘치는 말로 그들을 위로했다. 잠시후에 붓다는 말을 이었다.
  "바라문의 수행자들이여, 그대들 마음 속에 있는 의문을 풀어주겠다. 사양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물어라. 긴장을 풀고 몸을 편히 한 다음 한 사람씩 질문하도록 하라."
  맨 먼저 몽가라자가 질문인지 호소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저는 이미 마음 속으로 두 번 질문을 했습니다만 아직 대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대답해 주시시리라 믿습니다."
  "그대는 왜 질문을 말로 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하면서 대답을 원하는가. 그대는 입이 있지 않은가. 내가 많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읽어야 한다. 말을 통해 생각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사람들의 의사 소통으로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말이 없다면 사회 생활에 불현을 초해할 것이고, 일도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몽가라자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질문했다.
  "저 세상과 이 세상, 브라흐만과 인드라신의 세계에 대해서 고타마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신에 붙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몽가라자여, 그대은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육체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
  "그대는 바라문 계급으로, 성직자 가문에서 태어났으므로 신들에게 봉사하는 특별한 종족이라고 생각하는가? 햇빛이 너희 바라문에게만 비치고 있는가? 몸을 보호해 주는 모든 주위 환경이 너희 바라문만을 위해서 있는가? 그렇지 않다. 수드라에게도, 바이샤에게도, 크샤트리아에게도 모두 평등하게 부여되고 있다.
  대자연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 모습이야말로 자비의 발현이다. 이런 대자대비한 품 속에서 사람은 육체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대자연의 혜택이야말로 자비의 덩어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자연의 혜택을 창조해 내는 근본이야말로, 공(空)의 세계, 곧 의식이 세계, 마음의 세계인 것이다. 의식 세계는 그대의 육체를 부리고 있는 의지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차원의 세계이다.
  몽가라자여, 네자 잠자고 있을 때를 생각해 보아라. 그대의 귀는 열려 있지만 말을 들을 수 있느냐? 또 그대의 머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기억할 수 있더냐? 우리의 감각은 육체의 오관을 통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육체를 지탱하고 있는 의식이 없다면 감각 역시 작용할 수 없지 않느냐. 잘 생각해 보아라.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이야말로 너의 지배자이며 그게 바로 찐자 자기 자신이다.
  범천도 천사들도 의식의 세계, 공(空)인 실재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육체는 이 세상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 죽음은 네 의식과 육체와의 헤어짐이다. 결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무상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삶과 죽음의 구별을 없애야 한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등 육근 번뇌(六根煩惱)의 집착이 죽음의 공포가 되고, 삶은 이승뿐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는 것이다. 내 오관으로 잡을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마치 장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판단과 같은 것이니라."
  바라문의 이론가로 알려진 몽가라자도 붓다 앞에서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고향을 따난 때부터 '붓다를 만나면 물어야겠다'던 의문을 마이트레이어가 물었다.
  "마음의 동요가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일체의 욕망에서 초월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마이트레이어여, 많은 중생이 욕망의 포로가 되어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불평을 하고 화를 내고 험담하고 시기 질투의 마음을 갖는다. 자신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더럽히며 고뇌의 씨를 뿌린다. 중도를 깨닫고 욕망을 만족으로 이기고, 애욕을 순결로 지키고 심신의 욕심을 제거하며, 언제나 편협되지 않은 생가과 해위를 다스려 마음이 평정하면 동요가 일어날 리가 없다. 남에게 자애를 베풀고 정도의 척도로 생활하므로 마음이 더러워질리 없으며, 항상 청정하고 법을 실천하므로 지혜는 풍부하며 일체을 초월하고 있다. 진성(眞性)의 인간이란 이렇게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예,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갖지 않고, 의식(儀式) 중심으로 신에게 제사하는 바라문교의 사고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 그녀는 붓다의 가르침이야말로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붓다의 법을 배우고 실천하여 자기 완성에 정진하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붓다는 일행에게 다시 질문을 재촉했다. 그러자 마이트레이어가 손을 들고 두번째 질문을 했다.
  "크샤트리아도 바라문도 다 같이 신에게 많은 공양을 해왔습니다. 특히 저희 바라문들은 제사 때마다 많은 공양물을 신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녀의 질문은 푼나가도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의문이었다.
  "저도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등이 신에게 공양을 바쳐왔습니다만 실제로 신은 이런 공양을 좋아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공양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혹은 들어주시라고 했던 것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두 사람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중생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신에게 공양해 왔다. 혹자는 현재의 불행에서 구제받고 싶다. 혹자는 현재의 행복을 그대로 유지해 가고 싶다는 등 저마다 소원을 빈다. 하지만 고뇌는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참다운 공양이란, 공양물을 신 앞에 차리고 비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공양하고 신을 찬미해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공양은 아무 효험이 없는 법이다. 이익을 추구하고 애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공양이라면 제 아무리 열심히 공양을 쏟아붓는다 해도 그것은 생존에 대한 욕망이요 집착일 뿐 생과 사를 초월한 수 있는 길은 못 된다.
  이 지상계에서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과 상호 관계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하다. 네가 만일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자기 중심의 삶을 버리고 거짓 없이 타인을 살피고 서로 협조하는 인간 관계를 갖는 것이 공양보다 더 중요하다.
  살아 있는 불쌍한 이웃에게 공양하는 것이 참다운 공양이지 신에게 공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상부 상조하는 생활의 실천과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보은 행위이며, 이 보은의 행위가 신이 좋아할 가장 큰 공양이 될 것이다."
  마이트레이어는 붓다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칠세라 가슴 깊이 새겨듣고 있었다. 푼나가가 다시 질문했다.
  "많은 중생은 열심히 공양해 왔습니다만 공양에 의해서는 생과 사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이란 어떤 분을 말합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닫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동요가 없으며 니르바나 [열반:涅槃]의 경지게 도달하여 거짓, 어두운 마음이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생과 사를 초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았습니다."
  푼나가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붓다의 설법이 너무나 명쾌하고 솔직해서 깨달음의 경지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 속까지 울려오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이 설법의 무게가 절실하게 느껴질 날이 있으리라.
  이어서 멧다구가 질문하였다.
  "우리의 고뇌는 어디서 생겨납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좋은 질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깨달은 그대로 설명하겠다. 지금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저마다 인생의 고뇌를 체험했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뇌가 따라붙는다고 할 수 있다. 고뇌의 근본 원인은 내가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 채 맹목적으로 사는, 표면 의식의 위장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을 모든 생각과 행위의 지침으로 알고 산다면 거짓된 나에 의해 고뇌의 늪에 빠질 리가 없으며, 맹목적인 양극단을 버리고 항상 반성 지관(止觀)하고 일체의 집착에서 초월한다면 인생을 살 턱도 없을 것이다. 고(苦)와 낙(樂)의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다. 고(苦)는 모든 편협된 사념과 행위가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야야 한다."
  멧다구는 붓다의 최고의 법에 의해 마음을 바로잡고 행위를 정도에 올려놓음으로써 해탈의 길이 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붓다의 지혜>

 

  "올바른 마음가짐이란 대우주의 변함없는 운행처럼 어느 한 쪽에도 기울어짐이 없는 중도의 법을 말한다. 그 법을 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 중도에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왜곡되어 있는가를 늘 멈춘 상태에서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잘못된 사념이 마음 속에 도사려 그로 인해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즉시 고치고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중도란 모든 욕심에서 떠나 대우주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대우주의 마음과 하나가 된 것이며 중도의 사념과 행위는 대우주의 마음의 발현인것이다. 그 깨달음에 의해서 그때까지 모호했던 고뇌의 원이이 이해되었고 그 고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나 붓다의 법을 믿는 자는 붓다가 말한 중도의 생활을 실천하는 자들이며, 그래야만 생로병사의 미망에서 자신을 구제할 수 있다."
  멧다구는 올바른 생활이 중요하다는 붓다의 설법이 차츰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붓다는 맷다구에게 계속 말했다.
  "동서남북 어디에나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이니 집착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또는 거기에 안주하거나 기대어서도 안 된다. 사념을 집중하여 반성과 명상을 게을리하지 않고 수행하고 있는 사로몬, 사마나들은 생과 사를 초월하여 해탈하여 괴로움과 슬픔을 물리칠 수 있다. 여덟 가지의 올바른 도는 일체의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멧다구는 감격하며 말했다.
  "붓다의 법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일체의 고뇌에서 해탈한 위대한 성자 붓다야말로 모든 신리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붓다의 법을 듣고 실천한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고뇌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저도 붓다의 법에 귀의하겠습니다. 부디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붓다와 17인의 주위에는 사로몬, 사마나들이 몰려들어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며 하늘을 붉게 불들이고 있었다. 해가 지면 공기가 냉각되어 갑자기 한기가 엄습한다.
  누군가 붓다와 17인 사이에 모닥불을 피웠다. 붓다의 설법은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계속되었다.
  "우주의 대법(大法)을 신리라 하며 그 신리를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성자가 된다. 성자는 아무런 욕심이 없으며 자비로 충만하다. 도를 구하는 자에겐 그 구하는 양만큼 자비를 주고 빛을 내려준다. 성자는 무욕이며 애욕과 생존에 집착하지 않는다. 인생의 그 어떠한 장애도 인욕으로 대처하며, 피안에 도달아혀 흐트러짐도 의혹도 없다."
  "고맙습니다.'
  멧다구는 그만 목이 메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온 마음에 감동이 가득 찼으며 환희의 눈물이 그 칠줄 모르고 그의 마음을 씻어내렸다. 그 옆에 않아 있던 우바시바가 물었다.
  "저는 붓다의 법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 혼다서 인생의 격류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험한 인생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고통과 즐거움의 격류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진정으로 의지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우바시바에게 시선을 던지며 대답하였다.
  "오관의 번뇌를 물리치고 모든 일에 사로잡히지 말며, 법을 마음과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자신의 오관에 의해 발생되는 애욕을 끊고 일체의 잡념에서 벗어나 늘 마음과 행동을 청정하게 하도록 하여라."
  "오직 붓다의 법만을 의지하여, 고뇌에서 해탈한 사람들은 퇴보하는 일이 없어 늘 그 경지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고말고, 하지만 법에 의지하여 살면 문제 없지만, 그 법이 지식이 되어 행동이 따르지 않고 정도에서 벗어나면 애써 이룬 평안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행위가 없는 법은 언덕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바퀴처럼 아차 하는 순간에 낙하해 버린다. 항상 올바르게 도를 정진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우바시바는 법의 엄격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법을 의지하여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고 지관과 선정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법을 생활 속에 살려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한번 더 묻겠습니다. 법에 의지하여 정진하고 있는 사람은 늘 조화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으며 자연 그대로 해탈할 수 있습니까?"
  "우바시바여, 우리 몸은 이 대자연 속에서 살아 존재하고 있다. 우리 몸도 유년에서 소년으로 성장하고 나아가서 청년, 장년, 노년으로 노화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은 공의 세계, 실재의 의식이 세계로 돌아가며 언젠가는 인연에 의해 다시 이 지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자는 의식의 세계나 지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전생윤회에서 벗어나 있다.
  우바시바여, 여행을 할 때는 말을 타기고 하고 코끼리 등에 오를 때도 있으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도 있다. 하지만 탈것이 달라졌다 하더라고 타고 가는 사람은 변함이 없다. 그처럼 우리들 몸은 인생이란 항로를 살아가는 이동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해탈도 법도 의지삼아 실천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자연히 조화되고 참다운 평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생로병사의 미망과 고뇌는 육체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볼 뿐, 자신이 영원히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도다카가 질문했다.
  붓다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도다카여, 나의 법을 열심히 공부하라.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생활하고, 올바르게 도에 정진하며, 올바르게 염(念)하고, 올바르게 반성하고 명상하는 여덟 가지 정도을 지침으로 삼고 자기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 법을 실천하여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하면 전 우주의 만물이 모두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기 몸에 집착이 강한 사람은 물질에도 집착이 강하다. 그러나 육체에 집착해도 육체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이치를 깨닫는다면 물질이나 욕망에 희롱당하고 있는 인간의 불쌍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단히 법을 공부하여 실천할 일이다."
  붓다는 한숨을 쉬고 무리를 둘러본 다음 헤매카를 지적했다.
  "그대는 의문이 없는가. 무엇이든지 질문하여라."
  헤매카는 자신이 지적당하자 잠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예, 가르침은 감명 깊게 가슴에 와닿습니다. 지금가지 제가 배워온 가르침은 조상으로부터 전해되어 온 제사였으며, '이전에는 이렇게 했다', '이런 수행이 좋다', 혹은 '장차 이렇게 되리라' 등 남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으며 알맹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 곳에 잇는 대성선은 이렇게 수행하였으니 이럴 경우에는 그런 방법은 어떤가'하고 결국은 논쟁의 씨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그런 설법에 항상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스스로 깨달은 체험이기 때문에 의문이 여지가 없습니다. 설법하신 가르침을 잘 인식하여 실행하면 고뇌에서 해탈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겸허하게 자신의 소감을 늘어놓았다.
  "헤마카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온갖 움직임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욕망과 탐욕을 버린다면 깨달음의 경지에 들 수 있다. 이것으로 항상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혼란한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해탈한 사람들이다. 정도를 확실하게 마음의 양식으로 삼기 바란다."
  붓다는 이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여성인 도데야 바라문에게 질문을 재촉했다.
도데야의 얼굴은 긴 여행으로 햇볕에 그을려 남자인지 여자인지 쉽게 구별이 안 되었다.
  "만일 애욕이 마음에 없고 갈망도 없으며, 항상 정도를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고뇌의 원인 일체를 제거한 상태라면 그 사람의 해탈은 어떤 상태입니까?"
  붓다는 도데야의 질문에 답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해탈이니라."
  "최고의 해탈을 이룬 사람은 욕망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전혀 없는 것입니까? 지혜의 문은 열려 있는 것입니까?"
  "그런 분은 고뇌의 원인이 될 욕망을 결코 품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지(佛智)를 지니고 있으므로 지혜의 문이 설령 열리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영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그 자체가 뮤욕을 의미하며 애욕에 마음이 유혹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붓다의 부드러운 설명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도데야 옆에 앉아 있던 포사라가 질문했다.
  "물욕이 없고 모든 일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으며 마음의 안팎이 그야말로 한 점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의 지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붓다는 일체의 인식 활동의 단계를 알고 있으므로, 무일물(無一物)의 경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도 이해하고 있으며, 일체의 고락은 마음의 속박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서는 솟아나는 샘물처럼 지혜가 넘치고 있다. 포사라여, 그런 경지에 이룰수 있도록 수행하여라."
  "예, 감사합니다."
  붓다는 한사람 한사람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질문자의 심경에 맞추어 알기쉽게 대답했다. 그들 일행은 이와 같이 붓다를 만나 그때까지 경험도 못 했고 인식도 못 했던 사항들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긴 여행의 목적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서로 기뼈했다. 스승 바바리가 그들 17인을 선발하여 준 배려와 자비에 대해서도 새삼 감사를 표시했다.
  만일 그들이 선발에서 탈락되어 붓다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때까지 경험 못 했던 기쁨을 결코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라문을 통해서 도를 구해 온 동지들이었다. 그런만큼 붓다의 설법은 천금의 무게를 지니고 그들의 진심에 전달되어 왔다.
  붓다가 한 말을 빛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씻어주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 한마디는 백만의 말이 되어 마음 속에 확대되어 갔다. 그들은 더 이상 붓다에게 질문할 말이 없어졌다. 붓다의 말은 씹으면 씹을수록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일행 중에 바도라<베다>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우아한 보금자리 카필라성을 버리고 일체의 애욕과 욕구를 끊어 인생의 승자가 되었고 지혜의 화신이 된 붓다여, 미로들 헤맨 저희들에게 법등을 밝혀주셨으니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붓다의 법에 귀의하고 승단에 귀의하고자 합니다. 제발 거두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붓다에게 합장하여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붓다는 그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바도라<베다>여, 인간의 마음은 오관과 번뇌에 미혹당하여 무한히 바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욕망이 생기면 그 욕망이 이루어져도 다음의 욕망이 그 마음을 지배하여 평안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법을 잘 알고 실천하여 물질 세계의 여러 현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도록 하여라. 생사의 문제에 사로잡혀 애착을 가진 자들은 아직도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들이다. 욕망으로 마음을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실천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날마다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보다 풍부한 지혜로써 집착의 뿌리를 제거함이 평안에의 지름길이다."
  "고맙습니다."
  바도라<베다>는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사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난다가 손을 들어 붓다에게 질문했다.
  "세상에는 성인이라는 사람들과 자칭 성자라고 뽐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성인이란 지식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육체 고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나 훌륭한 업적을 지닌 남긴 살마을 말하는 것입니까?"
  "난다여, 진짜 성인은 일체의 집착에서 떠난, 욕심이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아픈 사람의 마음을 달래어 법등을 밝혀주는 사람을 말한다. 학문 연구로 얻은 지식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고 거짓 행위를 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미 지식일 뿐 행위는 죽고 없다.
  거기에는 참다운 지혜가 없고 논쟁의 씨앗만 뿌려질 뿐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보고 듣든 것으로 얻게 되며 대개 외부에서 온다. 그러므로 지식의 범위라는 것은 넓은 듯하지만 실은 좁은 법이다. 하지만 지혜라는 것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없이 샘솟아서 그 어떤 일에도 대처해 나갈 수가 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 변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지혜는 올바른 행위에 의해 마음속에 샘솟는다.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어두운 인생을 법등으로 밝혀주는 것은 무진장의 지혜이다. 성인이란 자기를 완성하고 인류에게 법등을 밝혀주는 사람이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바라문의 신분으로 태어난 저희들은 옛부터 제사 같은 종교적 행사를 치름으로써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엄한 육체 고행을 함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학문을 닦음으로써 청정해진다고도 말합니다. 과연 이러한 방법으로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 난다여, 그대가 말하는 청정이라는 것에 의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느니라. 타력신앙으로 신불 앞에 많은 재산과 보물과 음식을 공양하더라도 광명의 열리지 않는다. 사람이 더 이상 신에게 무엇을 부탁한단 말인가. 신은 이미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주고 있지 않은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땅, 물, 공기, 태양과 열,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은 모두 갖추어주었다. 신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생활 환경을 만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만의 지식이나 독선적인 행동으로는 청정이 얻어지지 않는다. 타력으로써는 생사의 집착에서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야야 한다. 출가한 사로몬, 사마나 등 모든 수행자들이 모두 세상의 속박에 얽매여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문제는 이 세상에서 체험한 그릇된 관념이나 행위나 견문 등을 모두 버리고 일체의 욕망을 물리쳐서 마음의 때를 벗긴 사람만이 인생의 험한 파도를 건너갈 수 있다.
  전통, 습관, 교육 등이 만들어낸 환경 속에서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의문과 추궁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용기와 노력 그리고 지혜로 사는 자는 마침내 보편적 신의 이치에 이룰 수 있다."
  "잘 알았습니다. 명심하여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바이샤나 크샤트리아와는 달리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 많았다. 지식화된 바라문이라고는 하지만 <베다>나 <우파니샤드>는 본래 신의 진리를 말한 것이었다. 바라문교가 아무 쓸모 없는 종교가 된 것은 신의 노여움을 너무 강조하여 오랫동안 제사만 지내왔기 때문이다.
  바라문교는 본래 브라흐만의 신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라문교란 브라흐만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그 바람분의 가르침이 표현이 바뀌고 분장되고 먼지 속에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의 바라문교는 오늘날 불교의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다. 바라문교의 승려들은 브라흐만의 노여움이 두려워 오로지 제사에 열중했다. 그래서 제사를 위한 신앙이 되고 말았다.

  사라난다는 이 점에 대해 평소 의문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붓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바라문교의 지도자들은 제의를 태만히 하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신은 정말 벌을 내리는 것입니까?"
  "사라난다여, 그대의 어버이는 건재한가?"
  붓다는 부드러운 눈길을 던지며 오히려 사라난당게 반문했다.
  "예,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십니다."
  "형제는 있는가?"
  "예, 아우와 언니가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대의 부모님이 그대를 불행하게 하려고 그대를 돌보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저의 일을 걱정해 주셨습니다. 저를 불행하게 하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난다여, 신이 장님 같은 인생을 체험하고 있는 제 자식에게 벌을 주리리고 생각하는가. 신은 아버지요 어머니이니라. 벌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잘못이 있을 때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벌 따위는 내리시지 않는다."
  사라난다는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의문이 비로소 얼음 녹듯이 풀렸다. 신의 노여움이나 신이 내리는 벌이란,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협박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신도들이 등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런 협박 수단을 썼던 것이다. 참으로 비열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무게 있는 붓다의 설명으로 비로소 신의 벌에 대한 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은 인간을 벌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벌을 만들어낼 뿐이다. 사라난다의 질문이 끝나자 자토칸닌이 질문했다.
  "붓다는 어째서 애욕을 부정합니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애욕은 마음을 온통 불덩어리로 만들어 인간 본래의 진실을 잃게 한다. 한번 애욕의 불이 붙으면 사람은 자제심을 잃고 일시적인 쾌락에 빠져 도를 그르친다. 애욕은 독점욕을 낳고 인간을 욕망의 포로로 만든다. 멋진 남자나 여자를 보고 마음이 흔들려도 간통의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애욕은 마음에 어두운 구름을 끼게 한다. 마음 속의 구름은 광명을 차단하고 고뇌를 지어낸다. 그러므로 애욕을 억제하고 애욕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자토칸닌이여, 너는 사랑의 애욕에 빠져보았으니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사랑의 애욕에 빠졌을 때 네 마음이 정상적이더냐? 하지만 그로 인해 마음 속에 집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집착은 응어리가 되며 언젠가는 현상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을 가진 수행자는 애욕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는 모두들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왜냐하면 그는 바바리으 곁을 떠난 날부터 붓다를 만날 때까지 내내 일행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쟁을 거듭했지만 결국 붓다에게 해답을 얻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붓다의 대답을 기다렸다.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는 자들은 부부가 마음을 서로 잘 다스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애욕을 불태우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욕의 제3자로 확대되면 거기서 미움이 싹트고 질투심이 불타 오른다. 그렇게 되면 부부는 저마다 증오와 질투의 독을 마음 속에 품고 더 심한 고뇌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일부 일처의 가정에서는 서로가 만족할 만한 애욕은 허용되어야 한다. 즉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이 강한 사람이라면 걱정 없을 것이다. 한편 출가한 독신 수행자가 애욕의 포로가 되면 스스로 고뇌라는 욕망에 쫓겨 깨달음의 경지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애욕이 체험이 있었다 하더라고 그 무상을 깨닫고 잘 반성하여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마음은 안정되고 평화의경지를 얻게 되리라."
  "잘 알았습니다. 애욕은 오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마음 속에 고뇌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자토칸님이 얼굴은 평정을 되찾았고 마음 속을 지배하고 있던 이성에 대한 동경이 차츰 꼬리를 감추는 것을 느꼈다.
  다음으로 얼굴이 긴 갓파가 붓다에제 질문하였다.
  "지금 살아가면서 몹시 어려운 처지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느 사람들을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갓파여, 고뇌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왜 고뇌에 빠졌는가 그 원인을 찾아내어 고뇌의 뿌리를 뽑아내고, 법에 의지하여 마음의 집착을 팽개치고 일체의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과 행동의 잘못을 수정할 때 비로소 광명에 싸여 악마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다."
  "잘 알았습니다. 정도에 정진하고 자신을 완성하여 고뇌에 허덕이는 중생의 마음에 환한 법등을 밝혀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인솔 책임자인 핀기야가 질문하였다.
  "저는 이제 늙어서 눈은 피로하고 귀도 멀었습니다. 종래의 수행 방법으로는 마음의 평안도 얻기 전에 죽고 말 것입니다. 끝도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오관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마음의 본성을 알야야 한다. 감정에 흐르지 않고 애욕의 늪에 빠지지 않으며,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항상 정법을 좇는 이성으로 마음을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사념과 행위에 있어서 정도에서 이탈하지 않는 청정한 생활로 풍부한 마음을 길러낸다. 늙는 것이 괴롭다면 더욱 열심히 법을 실천하여 일체의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그대도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하리라.
  그대는 바바리에게 돌아가서 사실들을 보고해 드리는 것이 스승에 대한 보은이니라. 바바리는 그대가 돌아오는 날을 큰 아픔으로 학수 고대하고 있다. 푹 쉬었다가 곧 귀국하거라."
  "법을 실천하겠습니다. 바라문교의 성전은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습니다만 결국은 지식의 학문이었을 뿐 실천이 따르지 않는 무용지물임을 알았습니다. 이제야말로 마음의 위대함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고국에 돌아가서 스승님께 보고 드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법을 바라문에게 펴 그들의 마음을 법등으로 밝히고 싶습니다."
  "그것이 좋으니라."
  붓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17인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끝을 맺었다.
  "여러분의 질문도 끝난 것 같다. 나의 대답을 하나하나 잘 이해하여 마음의 척도로 삼고 법을 실천하면 생로병사의 고뇌에서 해탈하고 피안의 깨달음에 도달하리라. 한눈 팔지 말고 공부에 정진하기 바란다."
  붓다와 17인의 바라문과의 대화는 이로써 끝났다.

  해는 지고 그리드락터의 산 능선과 하늘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에워쌌다. 모닥불은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환한 불빛이 모든 얼굴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네 여자의 처우에 대해서 붓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왜냐하면 여자 사로문의 입단은 석가 교단에서는 허용하지 않고 있던 일이었으며, 출가자는 모두 남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네 사람은 전생으로부터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었으며 여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거절한 명분이 없었다.
  지조가 견고하고 남성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자라면 승단의 일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이야말로 법이 아닌가. 남녀는 법의 그늘에서는 평등하며, 인간 사회는 남녀의 올바른 만남으로써 성립되는 것인만큼 승단의 운영도 마땅히 그래야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생각을 좀더 확대시키면 석가 교단은 출가승으로 성립되어 있지만, 출가는 전도자들의 모임이므로 법의 적용이 출가자에만 국한되어 재가에 미치지 않는다면 법은 결코 인간 사회에서는 살아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법은 일부 인간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것, 곧 신의 것이다. 따라서 법의 적용은 재가가 미침으로써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며 언젠가는 조화 있는 불국토를 기대할 수 있게 되리라. 석가 교단은 붓다의 법을 전 인류에게 침투시키는 소위 첨병으로서 재가의 사회에 법의 씨앗을 뿌려 가는 존재이다. 그런 뜻에서 남녀의 구별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지조만 견고하다면 여성의 출가도 인정함이 마땅하리라.
  붓다는 네 사람의 여성에 대해서는 바라문의 출가 수행자로서 승단 입단을 허용하기로 했다. 다만 남성의 수행자와는 별도의 수행소에서 생활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남자들과의 불순한 교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이 네 여성들에게는 붓다의 설법을 사전에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핀기야를 제외한 16인의 바라문 수행자는 붓다의 법을 소화시키는 것이 빨라서 마이트레이어를 선두로 차레차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했다.

  며칠 동안의 휴양을 취한 다음 핀기야는 바바리 곁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승을 만나자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진짜 아포로키티슈바라였습니다. 붓다가 틀림없었습니다. 지혜의 덩어리 같은 청정한 붓다는 당신의 체험담으로 깨달음의 길을 설법하였습니다. 일체의 욕망에서 벗어나 만족함을 알고 집착도 없었으며 거짓말 같은 것은 당장에 꿰뚫어보았습니다. 마음 속은 때가 없었고 오만이란 그림자조차 없었으며, 저희들에게는 친절한 말로써 설법해 주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꿰뚫어보았으면, 마음 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공의 세계인 실재계를 말씀하였으며, 삶과 죽음과 전생과 윤회에서 이미 해탈하여 일체의 고뇌를 끊었으며, 마음은 항상 평화롭고 동요함이 없었으며, 말씀은 그대로 신리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진짜 위대한 붓다였습니다.
  붓다는 남의 말을 빌리는 일이 없었으며 늘 붓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진리를 말씀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진실한 정도를 찾은 듯싶습니다. 붓다는 제 마음 속의 어둠을 걷어내 주셨습니다. 그 법등에 의해서 마음은 광명으로 충만하게 되었으며 갈망은 근절하고 일체의 번뇌와 재난과 액을 없앨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갖게 해주신 스승님의 큰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핀기야는 한 번도 머뭇거림이 없이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바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핀기야의 보고를 들었다. 그는 자신도 '좀더 젊었더라면 그 위대한 붓다를 직접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큰 아쉬움에 잠겼다. 하지만 자신의 뜻으로 제자들이 정법에 귀의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핀기야여, 그대는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말아야 했다. 나는 이제 살 날이 별로 많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에게 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몸이다. 비록 너에게 돌아와 보고하라는 분부를 내렸지만 너는 위대한 붓다 밑에 남아서 수행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스승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붓다의 법은 제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려 그대로 꽃피웠으며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나이가 많아 붓다 곁으로 돌아갈 수은 없습니다만 붓다의 법을 앞으로도 의지삼아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자 바바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 긴 몸을 굽혀 핀기야의 손을 잡고는 울면서 말했다.
  "부디 그 법등을 마음 속에 밝혀 일체의 고뇌에서 해방되어 피안에 도달하여라. 나도 붓다의 법을 단단히 마음 속에 새겨 열반의 경지에 들도록 정진하겠다."
  "스승님, 붓다의 마음은 신의 마음 그대로였고, 그 태도는 티끌만한 조잡함도없는 자비 그대로였으며, 그 생활은 법 그대로였습니다. 붓다는 모든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깨닫고 있었으며 어떠한 의문도 명쾌하게 풀어주셨습니다. 스승님, 위대한 붓다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천거해 주신 이 은혜 뼈에 사무칩니다."
  핀기야도 바바리의 무릎 밑에 엎드려 흐느끼고 말았다. 바바리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자기 앞에서 흐느끼고 있는 핀기야를 내려다보며 제자의 지성에 감동하고 있었다.
  바바리는 갸름하고 기품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반면 핀기야는 우람한 체구에 박력이 넘치고 있었으므로 둘이 함께 있으면 어느 쪽이 스승이고 제자인지 얼른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바리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제자를 거느렸고 지식고 풍부하여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었다. 마음은 온유하여 제자들의 건강과 사소한 일에 자상하게 마음을 썼다. 그가 제자들에게 붓다에 귀의할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은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어버이와 자식 같은 사이였다. 아무리 작은 일도 스승에게 의논하였다. 그러므로 스승에게 돌아온 핀기야뿐만 아니라 붓다 곁에 남아 있는 16인의 제자들도 고국에 남아 있는 스승 바바리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면서 수행에 정진하고 있었다.
  바바리는 핀기야로부터 법을 전해 듣고 그 법을 마음에 기둥으로 삼아 그때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잘못이 발견되는 대로 고쳐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달음의 경지로 승화해 가는 것이었다. 이 바바리야말로 바라문의 위대한 스승 '아축여래'라는 바로 그사람이었다.
  고국에 돌아온 핀가야도 반성과 정진을 거듭한 결과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는 붓다의 법을 바라문에게 펴나갔다. 바라나시의 수행자들은 핀기야가 설하는 법을 마음의 등불로 삼고 차레차레 붓다의 승단에 귀의하였다. 그는 야사와도 서로 연락하면서 캇시국에 법등을 켜고 많은 중생을 교화해 나갔다.

  

------이 내용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바라문 제자들은 상당한 경지의 지식의 소유자이면서, 진리 탐구에 매진한 인재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질문의 내용이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설법을 쉽게 이해합니다. 아~ 상당합니다. 특히 여성 4분의 질문 내용 수준이 상당합니다. 감탄 감탄~!

 

※출처 : 다카하시 신지의 『인간석가』「제 5장 바바리의 제자 17인의 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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