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내 어머님의 어제 돌아가시었으나, 기쁜 일일세. 본문

일기형식

내 어머님의 어제 돌아가시었으나, 기쁜 일일세.

어둠의골짜기 2012. 8. 9. 20:16

내 어머니의 약력 대강


1946년 02월 22일(음력)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일명, 토끼섬(문주란) 자생지 그 동네에 둘째 태어나시고, 어제, 그러니까 2012년 08월 08일(양력) 오후 16시 20분에 제주도 한라병원 암말기환자로 2012년 1월 2일 입원하시고, 어제 날짜로 주무시듯이, 다른 암말기환자에 비해,

상당히 편안하게 돌아가시었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시었다고, 막내이모님이 울면서 전화가 왔다.


내 어머니의 태어난 이야기는, 이렇다.

일제시대 강정기 때, 내 외할아버지가 같은 동네 순사에게 미움을 받으셨는지, 일본 훗카이도(북해도) 탄광에 끌려가시었다가, 

살아서 귀국하시어, 외할머니와 회포를 푸시자, 어머님의 임신되었고, 태어나시었다고 들었다.


어머님의 훗날에 내게 말씀하시길, 

사실은, 처녀 때, 시집오기 전, 열 몇 살 때, 부산에서 시골까지 어머니를 만나려 온, 부산 싸나이가 있었다고 한다.

따님을 달라고, 했더니, 시골 외할머니는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어머님의 살던 시골에, 

술도 안드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 바로 이웃 마을 젊은 청년이, 어머니의 바로 윗 언니, 나에게는 큰 이모님 댁을 초가집에서,

쓰레트집으로 개조하는 데 목수여서 왔었다.


잘 생기고, 성실해 보여서, 큰이모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연애도 아닌 바로 중매로 날짜를 잡고 결혼을 20살 나이인 1967년 가을에 하시었다.

아마, 어머님의 생전에 말씀하실 아마도 양력으로 10월 달이, 결혼을 한 기념일이 있는 날이고 들은 듯 하다.


그리고 나서, 1968년 양력 11월 말에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첫소산의 바로 나이다.


결혼은, 부산의 송도라고 하는 남부민동 근처의 모 산의 사찰에서 결혼을 하였다고 들었다.

결혼 사진이 있었는데, 

내가 아버지랑 원수지간이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근 30년간 아니 결혼하고 40여년 간 원수로  지내는 사이여서, 내가 찢어버렸다.


어느 부모의, 아니

한 인간의 일생동안의 경험한 것을 책으로 쓴다면 몇 십권, 아니 몇 백권이 될것이다.


내가 객관적으로 내 어머니를 보고,

아니, 한 여자로 보았을 때, 

참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 내 어머니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육아법은, 자기 희생이시었고, 

단 한 번도, 자녀를 때리거나 욕한 적이 없으시다.


그 와는 반대로, 내 아버지는, 돌아가시었지만, 인간 말종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남편으로서 자격상실,

아버지로서 자격상실,

아들로서 자격상실인 분이, 내 육체의 아버님이셨다.


하여간, 두 분 다 돌아가시었다.


내 어머니가 일주일 아니 보름 전인가, 전화를 내게 하시었다.

병원 내, 공중전화로 안부 전화를 하신 것이다.

내가 홀로 사니, 

5년 동안 만나던 여자는, 요즘 만나는지, 물으신다.

몸 건강 상태는 어떤지 물으신다.


이러 저러 하다고 말씀드리고,

이런 말을 내가 해 드렸다.

어머니,

몸은 비록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프지 마세요.

내 바램은,

가 보지 못하지만, 

주무시다가 주무시듯이 돌아가시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절대로 몸은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프지 마시라고... 그게 마지막 어머니와의 대화이다.

이 생에서...





어머니는 처녀시절이나 30대 초반까지는, 아주 세상물정 모르는 순수한 시골 해녀였다.

시라고 하는, 도시로 이사를 하고 나서, 인생의 완전 지옥으로 바뀐 케이스가 내 어머니이시다.

당시, 

내 아버지가 어찌어찌하여, 집을 나가버렸다.

이혼도 안하고,

훗날 내가 성인이 되어, 찾아보니,

딴 여자랑 자식 4명이랑 살고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약 25년에서 30년간 다른 자녀를 키우고, 다른 여자랑 산 것이다.

본처를 버리고,

친자식을 단 한번도,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이 정도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누구나가 다.... 이 글을 본다면,


다행인 점은, 어머니 배에서 난 자녀는, 6명이다. 

아들 2명에 딸 4명이다. 

딸 2명은 어릴 때 죽었고,

현재 4명이 살아 있다.

둘 째 딸은, 대구에서 살고 있으며, 시집을 가서, 

세 째 딸은, 제주에서 살고 있다.

둘 째 아들은, 머리가 좋은지 외국어에 능통하여, 현재 캐나다에서 홈스쿨링인가, 뭔가를 하고 있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나는, 장남이다.


그저 목숨만 붙어서 살고 있다.





어제 그 시간쯤에,

나는, 

충북 청원군 미원면 구름다리 마을에 가 있었다.

내가 살던 옆방이 노부부인데, 아주 잉꼬이며 깨가 쏟아지는 부부가 사는 시골집이다.


몇 가구 없는, 네 가구인가 세 가구인가가 사는 산속 마을이다.


4시 19분에...문자가 왔다.

막내 여동생이다. 나는 막둥아 라고 지금도 부른다.

걔는 싫어한다.


이런 내용이다.


" 요즘 날씨도 더운데 어때? 잘 지내지? 엄마 때문에 1월달에 입원했잖아 지금도 병원이고.... 상태가 안 좋아 입원할 때 부터 나빤 ㅠ.ㅠ "

핸드폰은, 어머니 핸드폰이다.  2012년 08월 08일 오후 4시 16분


" 나중에 연락할께"  오후 4시 19분.


"선생님이 편하게 가신거랜....다른 암환자들에 비해... " 오후 4시 45분


이렇게 문자가 왔다.


그 사이에 막내이모가 울면서,

 "엄마 돌아가션"하고 전화가 왔다.


내가 물었다.

주무시듯이 편안하게 가시었냐고 물었다.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


이모 울지마,

경사로운 일인데, 울기는, 울지마라. 했다. 내가 이모에게...


여동생은, 

전화를 말로 하지 않았다.

나를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무서워한다.  


막내이모에 말했다.

어머니가 예전에 나에게 내가 죽거든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절대로  산소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뿌리라고 내가 신신당부를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산에 뿌려달라고 했는지, 가물가물했다.

내 생각에는,

어머니가 처녀시절에 해녀였고, 제주도에서 완도까지 물질하러 갔던 상군해녀로서,

물질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시고,

물속 자맥질이 오랬다고 할 정도로, 물을 좋아하시고 물고기 마냥 물속의 좋았다고 들은 것 같다.





왜 화장을 해야 하는가?


사회적으로 산소가 많아서가 아니다.

무덤을 만들면, 후손들이 성묘를 가긴 간다.

그게 남아있는 친 자식 대 뿐일 뿐더러...아닐 지도 모른다.

무덤의 돌아가신 분이 갈 곳이 아니다.

시체를 버리는 장소일 뿐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은 망자가 자기 몸에 집착을 할 경우,

그 죽은 몸이 무덤에서 썩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그 무덤이  곧, 지옥이 된다.


화장을 해 버리면, 순간, 몸이 불에 타는 몇 분동안,

자기 몸을 태운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때,

죽는 순간에,

저승에서의 지옥과 극락의 결정되는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잘 태어나야 하지만, 

잘 죽어야 한다.


죽는 순간에 상념이 훗날 다시 환생할 때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계기가 되기도 때문이다.


화장을 해 버리면,

산소로 인한 탈이나,

아무런 그런 피해를 실제로 현상계에서 입는, 그런 이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안좋은 나쁜 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망자도 역시, 육체에 집착을 거의 하지 않게 된다. 설령 지옥에 떨어질 만한 악한 일을 했다해도.


내 어머니에게, 

2010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한달 가량 제주도에서 내가 병마중에 함께 했었다.


그 때 여러가지로 물어보았다.

어머니의 대인관계와 가치관 그리고 인생관 그런 것에 관해서...

그랬더니,

아주 낙천적이시고, 

이제는, 죽은 남편도 원망안하고, 

남에게 이상한 나쁜 감정들도 없다고 하신다.

또한 실수로 남에게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을 경우, 바로 사과를 한다고 하시었다.


그 때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 좋은 데로 가실 분이에요.

안심이에요 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부처님 얘기를 늘 하시었던 분이시다.


이 번 생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부로써의 인연을 끝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된 그 사람이, 천상계에서의 부부로써의 약속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져 버렸기 때문이다.





옆 집 보살님 부부들 얘기로 돌아간다.

미원면 구름다리 마을에서.

식사를 할 때 온 문자이다.

이모도 그 때 전화가 왔다.

잘 되었다고,

그리고 화장하라고,

나는 하하 웃었다.

그 부부는 말없이 식사를 한다.

나중에 말하시길,

사연을 대충 듣고, 잘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화장이 낫지 라고 한다.





오후 초저녁 쯤에 마당 들마루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나의 이야기 조금 하면서, 

경험담을 영적인 것에 대해 흉내를 내면서 말을 하니,

배꼽을 잡고 두 분이 웃으신다.

나는 아주머니만 보살인 줄 알았는데,

아저씨도 역시 신내림을 받고 보살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철학을 공부하시고, 철학관을 겸하고 있었고,

훗날 불교에 입문하여, 스님의 계를 받으신 분이셨다.

현재는,

시골 그 마을에 이장님도 겸하고 계시다.


이 두 분을 내가 좋아한다. 

인간적으로,

왜냐하면,

아주머니는, 절대로 무당 티를 내지 않는다.

아저씨는, 더더욱 티를 내지 않으신다.


그저  손님이 와서, 물어보면,

그 때 말할 뿐,


척을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


말 끝에 이런 말이 있었다.

부부간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다.


남자들이 혼자 있을 때를 늘 생각하라고 그러면, 다툴 일이 없다고..말이다.


맞는 말이다.


라면 얘기를 예를 들으신다.

내가 혼자 살 때는, 

달랑 물 넣고 라면 넣고 아무것도 안 넣고, 뚜껑에 대충 먹었는데,

부부로 사니,

물이 양은 어떻고,

파도  썰어 넣고,

계란도 집어 넣고

여러 가지 말도 하면서 해 주고, 설거지도 해 주고, 여러 가지 다 해 준다.

빨래도 해 주고,

여러 가지 해 준다.

이런데, 다툴 필요가 어디 있는가?

무슨 일을 할 때 마다, 서로 의논하고,

내가 이런 일을 이렇게 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하면,

아내가 수긍할 때도 있고,

수긍을 하지 않을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을 들어보고, 상대방의 말이 내 말과 달라도 일리가 있으면, 받아들이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다툴 일이 없었다 고 한다.


이 아저씨의 최대한의 장점은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천천히 발음하며, 상세한 예를 들면서, 말씀하신다.

서두르리시 않는다.

그리고

늘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사물을 보고 듣고 대화한다고 하신다.


아주 중요한 정법이 핵심이다.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 에서, 보고 듣고 말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조화의 핵심이다.


전에 스님이라고 하시니, 내가 에잉 하고 했다.

집에 가 보니, 

진짜였다.


그런데, 이 분은, 머리카락이 빨주노초파남보이다.

자동차도 빨강이다.




집에 들어서는 개울을 건너면, 불과 약 3미터 만든 다리를 건너면, 차도 건넌다. 마당이다. 


관음정사라고 한 글로 되어 있다.


헌데 觀音正舍(관음정사)이다. 

觀音精寺(관음정사)가 아니다.


위의 관음정사는, 사물을 잘 보고 잘 듣고 바르게 사는 집이라고 하는 의미로, 누구나 집에 와서 편안한게 보고 들으면서 대화하는 올바르게 

사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신다.


아래의 관음정사는, 관세음보살이 이름과 정사(즉 사찰)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신다.


그 집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산 속에 땅을 사고, 

10년간

청주에서 그 산속 마을을 찾아가, 오래된 폐가가  있었던 곳에, 

망치질도 못하는 내가

망치질을 하면서,

처음에 망치와 톱 하나와 못을 가지고, 집을 다 뜯고, 

현재의 집을 만들고, 정원도 만들고, 벽화도 그리고, 조형물도 만들고, 색칠도 하고, 현재의 집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혼자서  했다고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10년간 한 가지 일에 매진하면, 성공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망치와 못과 톱만 있던 사람이 왠만한 연장은 다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청주에 있으실 때, 현재 청주에서 두  분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가 있지만,

스님이라고 한 적 있고,

검도도 하신다고, 했다...설마 했는데,

집에 가 보니, 사실이었다.


검도, 

특히 내가 놀란 것은, 붓글씨였다. 와 대단했다. 

강인한 성격을 내포하며, 뒤끝이 없고, 시작과 끝이 힘이 넘쳤다.


겨울에는 시골에서 검도를 가르친다고 하신 적이 있다.

쿵후로 조금 하시는 모양이었다.

도복을 입은, 

검도복을 입고 찍은 모습과

쿵후 복을 입은 사진이 있었고,

특전사 1기 출신이라고 하시는데, 그 사진은 못 보았지만, 방에 있는데 그걸 못 보았군 하고 하신다.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하고 싶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 내고야 만다고 하신다.


어제 처음 알았다.

67이라고...

아무리 보아도 그 나이로는 안 보인다.

사실 두 부부가 내 옆방으로 이사를 왔을 때, 50대 후반의 부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 남자들이여 혼자 있었을 때를 생각하라..그러면 다툴 일이 없다......" 명언이다.


" 내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하고자 하고 하다 보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이셨다.


나에게 말하시길, 블로그에 올려도 된다.


觀音正舍(관음정사) 주지.......라고 쓰고서.. 하하하





나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늘 아저씨라고 불렀고, 지금도 부른다.

스님이라고 안 부른다.

이장님이라고 안 부른다.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이라고 안 부른다.

역시, 

아주머니에게도 보살님이라고 안 부른다.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른다.

그게 편하다.


알고 지낸지도 몇 개월이 되었는데,

나는,

자네 이름을 모른다..

알려 달라 했다.


서로간에 이름도 모른다.

그런데,

친하다.


자연스럽게 만난 분들이다.


끊어질 인연이 아니다 라고 하시었다.

나도 그렇게 느껴왔고 느낀다.


떨어져 지낼 지언정, 면면이 이어짐이 있을 만남이라고 좋아하신다.


그래서, 내 이름을 한자로 말씀 드렸다.


이 분이 집에 벽화나 동물들이 조형물이나 석탑을 만든 것이나, 

분수대를 만든 것이나,

정원나무를 심은 것이나

알고서 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한 것이라고 겸손히 말씀하시었다.


그 분의 말씀이,

내가 배워서 한 것이 아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나는 척을 싫어한다.

삼척을 싫어한다고 했다.


아는 척,

잘난 척,

또 하나는 기억이 안 난다.

글을 읽는 분들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아주머니는 안채로 들어가 주무시는 듯 했다.

시간을 보니,


밤 10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배웅을 해 주신다.

알아서 잘 가겠느냐고 하시면서,

배웅을 해 주신다.

차를 몰고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서서 지켜봐 주신다.


배려와 자상함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내가 사실, 최근 몇 일 전부터,

느낌에 어머님의 돌아가실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불과 일주일도 안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몸뚱이가 내 의지대로 안 움직여 줘서, 참 곤란지경이었다.

헌데,


2012년 08월 07일 오전 8시 경에, 전화가 왔다.

약사님이시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리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분이다.


내가 노숙한다고 비공개로 일기글을 썼었는데, 공개가 되어, 전화가 온 것이다.


나중에 비공개 처리했지만,


몸이 안 좋아.

몇 개월 겨우 겨우 살아만 있었다.

자연인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 분이,

용돈 모아 둔 것을, 보내겠다고, 계좌번호를 달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까지 사이버상에서 만나서 상담이라고 하면, 좀 뭐하고,

애로사항들을,

여쭈어 보는 분들에게,

상세히 내가 아는 바를, 

다 말해 주곤 해 왔다.


그래서, 많지는 않지만, 그 애로사항이 그들 스스로 풀려, 약간의 도움을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어떤 서울에 사시는, 여성분은, 

2년 동안인가, 내 기억으로는,

비타민제를 보내 주시었다.  그녀가 경영한 업종의 비타민제였다.


어떤 가정주부는,

스스로 병이 나아...부부애도  좋아졌다고 하시면서, 성의를 금전적으로 하는 자신이 조금 뭐하지만,

꼭 해 드려야만 마음의 가벼워질 것이라고 해서,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이는, 

농사를 짓는 분은 아니지만,

남성분이다.

자기 고장이 농작물을 택배로 계속해서 보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사양한 적이 있다.


어떤 분은,

가르침의 글 중에, 원설 반야심경의 원본이 있으시다면, 경기도 분이시다.

마음의 발견 두 권도 보내 주시었다.


꼭 읽고 싶은 책은, 원설 반야심경이라고 해서, 

내가 일일이 한자를 넣고,

일본어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 한글 자판기로..

한 권의 책을 그대로 옮겨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원래 하는 방식대로 해서, 올려 놓은 적이 있다.


그 분 덕분에, 서툰 일본어이지만, 약간이나마, 나를 더 잘 보는 계기가 되어 왔다.


말없이 묵묵히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여성이 있다.

영혼의 동반자이다.

다음 생에는,

그녀와 나는 부부로 만나기로 약속을 굳게 맺었다.

이 약속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



우리나라 영화 천년 무슨 나무인가 하는 본 적이 없지만, 

환생해서 만나서 어쩌구 하는 영화가 있었나 보다.


서로 굳게 다짐하면, 

그 것이 그 대로 환생하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로 살게 된다.


꼭 부부의 인연만이 아니다.


내가 다음 생에는, 이 생에서 받은 은혜를 당신의 아들로, 혹은 딸로 태어나 갚겠습니다..........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신다.

정법이다.





이사를 왔다.


선풍기를 얻었다.


주인 아주머니 주시었다. 

그분은, 나는 할머니라고 하신다.


물 사먹지 말고, 집에 정수기 있으니, 하루에 두병이나 한병 줄 테니 사먹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두 번 받았다.


오늘은, 낮에 그 시간쯤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혼자 메밀묵으로 만든 국수를 드시고 계시었다.

양을 많게 해서 남았으니 먹으라고 하면서 주신다. 먹었다.

손자들 주시지요? 했더니,

안 먹는다고 하신다.


주변이 나이가 드신 다 60이 넘고 70이 넘으신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질적으로는, 손자들이나 아들내외들의 눈이 있어서 못하지만,

마음적으로 신경을 아주 많이 써 주신다.


새로운 집인 이 곳으로 이사를 오던 날, 

이쁜이 아주머니 70이 넘으신 할머니이신 분이, 쫓아 오시었다.

방을 보시더니, 

좋다고 하신다.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시었다.





아 그리고,

구름다리 마을에 갔을 때, 보살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몇 일 전에 골목에서 앉아서,

이쁜이 큰 언니랑,

뒷집 농협 앞에서 나물을 파시는 그 분도 나이가 70이 후반이시다 분과

또 다른 아주머니랑 셋이서,


내가 이사갈 지 말지 할 집, 현재,

이사 온 이 집이, 할머니가, 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안좋게 말해서,


세 분이 모여서,

나에 대한 올바른 그들이 만 2년동안 혹은 몇 개월동안 옆방에서 지켜 본 바를, 그 할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혼자사는 남자는,

몸이 좀 아프고 많이, 

여러 가지로 힘든 생활을 하지만,

월세 밀린 적 없고,

남에게 손을 벌릴 적이 없는 사람이다.

먹는 게 변변치 않아도...........내색을 않고, 대화도 안 해보고, 겉으로 본 것만으로 그 젊은 남자를,

말하지 말라고 셋이서 말했다고 하신다.


사람의 눈이란,

참으로 사물을 잘 보아야 한다.


수박의 껍데기만 보고,

수박을 쪼개어 속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수박이 속이 내용물이 색깔과 맛을 모른다.

바나나를 예를 들면,

겉은 노랗게 되어 있다.

속도 과연 노란색일까요?


본래는 속은 흰색인데, 노랗게 변한 것이죠.





아 그리고, 

또 다른 기쁜 일.........


내가 춘천에서 이곳으로 아파서 올 때,

1960년대 말에 가족사진 흑백이랑,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형인 형제인 부부와 자녀들과 찍은 사진이랑.

내 돐 사진이 있었는데,

없어진 줄 알았는데,

옷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있었다. 

기뻤다.


1970년 대 초에, 시골에 살 때,

외삼촌이랑 외가쪽 친지들과 찍은, 내 꼬맹이 시절의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 속에는,

울보인 여동생이 울고 있는 모습과

나의 모습과

남동생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과

시골 외가집 마당이 모습이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

그들의 현재 나이는,

40대 초반에서 50대 이며, 

외삼촌과 외가쪽 친지들은, 60대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사진관에 가서,

그 사진을 어찌 어찌해서, 크게 확대해서, 화질이 손상이  없이, 

뭐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해 볼 생각이다.


내가 꼬맹이 아기적에,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큰 아버지댁과 나의 가족 왜냐하면 아버님의 형제는 둘 뿐이었기에.

어머님의 모습은, 아주 통통하고 아주 살집이 많은 고운 자태의  모습이다.


나를 안고 계신 모습이다.

그런 어머님의 병마에 들었다가,

어제 오후

열반에 드시었다.


열반 인도말로 이루바나..이르바나 라고 하는데,

꼭 성인 성자만이 열반이 아니다.


내 어머니는, 누가 보아도, 열반에 드실 자격이 충분한 삶은 살아오신 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금 내 어린 시절이 고향인 제주도에서는,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와 계실 것이다.

풍습에 따라.

3일장을 한 것인지, 

7일 장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신경이 전혀 안 쓰인다.

이미 영혼은 죽음을 맞이할 때, 이미 극락으로 가시었기에, 고통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2012년 08월 09일 청주 안덕벌에서.


ps : 8년여 만에, 집에서 텔레비젼이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진짜 네모난 텔레비젼입니다.  기본 체널만 나옵니다.... 어떤 체널은, 화면 전체에 글자가 있습니다.

디지털용 텔레비젼으로 전환하라고 화면 전체에 글자가 안 없어집니다.

다행이, 

CJB SBS는 잘 나옵니다.


그 바로 옆에, 컴퓨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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