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팔정도( 정견, 정사어, 정업, 정명, 정진, 정념, 정정)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님 본문
八正道 ・・・・・ 正見、正思語、 正業、正命、正進、正念、正定
팔정도 ・・・・・ 정견, 정사어, 정업, 정명, 정진, 정념, 정정
출처 : http://www.shoho2.com/index.html
正法の実践は、日常生活(思うこと・行うこと)の上に八正道を実践して行くことにあります。
そのためには、まず八正道そのものを理解する必要があります。
정법의 실천은, 일상생활(생각(상상)하는 것과 행하는 것) 상에 팔정도를 실천해 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팔정도 그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高橋信次先生著 「人間釈迦 一巻」・「心の指針」・「心の発見 神理篇」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 저서 「인간석가 1권」・「마음의 지침」・「마음의 발견 신리편」
GLA発行 「心行の言魂」
GLA발행 「심행의 영혼의 깃든 말」
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
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
より、各項目ごとにまとめました。
에서, 각 항목과 함께 정리했습니다.
日々の実践にお役立て下さい。
매일의 실천에 유익하게 활용해 주십시오.
一、正見 ・・・ 正しく見ること
一、정견 ・・・ 올바르게 보는 것
1.人間釈迦より 【 全文 】1.인간석가에서 【문장 전체】
まず人は、正しく見る目を養うこと。我欲を去った調和ある見解を持つよう努める事であろう。
먼저 사람은, 올바르게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다. 자기만의 욕심(我欲)을 떠난 조화가 있는 견해을 갖도록 힘쓰는 일인 것이다.
それには、己という立場があっては、正しさを求めることはできまい。正しさの尺度は、男女の別老若の別、地位、名誉の別、こうした立場を捨て去って、一個の人間として、大自然の己として、そしてその心の目で、ものを見る、相手を見る、現実を眺めることであろう。
그것에는, 자기(己)라고 하는 입장이 있어서는, 올바름을 찾을 수 없다. 올바름의 척도는, 남녀의 차이 노약의 차이, 지위, 명예의 차이, 이러한 입장을 완전히 떠나서, 한 사람(一個)의 인간으로서, 대자연의 나(己)로서,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상대방을 본다, 현실을 바라보는 일인 것이다.
官僚にある者が、ひとたび野に下ると、官職時の感覚とはまるでちがって、会社の利益のために、あとに残った後輩たちを困らせることを平気でやっている。そうかと思うと、ついこの間まで、鬼検事といわれ、恐れられていた人が、一夜にして弁護士に変身し、法廷で主客ところをかえて、弁護に立っている姿を見ると、人の心の所在が、いずこにあるのかわからなくなってくる。
관료(官僚)로 있는 사람이, 일단 관직을 떠나 민간인의 생활에 들어가면, 관직에 있을 때의 감상(感賞)과는 전혀 달리, 회상의 이익을 위해서, 뒤에 남은 후배들을 곤란하게 하는 일을 예사로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로 저번 때까지, 귀검사(鬼検事)라고 불리우며, 두려움에 떨게 하더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변호사로 변신해서, 법정에서 주객 전도되어, 변호를 서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사람의 마음의 소재(所在)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게 되어 온다.
調和の基本は、まず何はさておき見ることの正しい評価にあるといえよう。現れた現象の背後には必ずその現象を映し出す原因が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だ。また、自分に直接関係のある諸問題が派生したときは、まず自分自身の心の姿を見ることが大事だ。肉体の眼を通して外界の動きを正しく見るためには、その眼の奥にある心眼がキレイに磨かれていないと肉眼に映った諸現象もゆがんでしまうからである。各人の心は鏡である。その想念という鏡をたえず掃除しておくことだ。掃除は反省を通して磨かれてゆくであろう。
조화(調和)의 기본은, 우선 만사 제쳐놓고 보는 것의 올바른 평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타난 현상(現象)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 현상(現象)을 투영하는 원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에게 직접 관계가 있는 모든 문제가 파생했을 때는, 우선 자기 자신의 마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육체의 눈을 통해서 외계의 움직임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그 눈 안에 있는 마음의 눈(心眼)이 깨끗(綺麗)하게 닦여 있지 않으면 육안(肉眼)에 비친 모든 현상도 일그려저 버리기 때문이다. 각 사람(各人)의 마음은 거울이다. 그 상념(想念)이라고 하는 거울을 항상 소제(掃除)해 놓는 것이다. 소제(掃除)는 반성을 통해서 손질해 가는 것이다.(청소는 반성을 통해서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이다.)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문장 전체】
ものを正しく見るには、まず、自己の立場を捨て第三者の立場でモノを眺めることです。私たちは普通、他人の問題については比較的正確な判断が下せます。ところが、自分の問題となり、利害関係が伴ってくると、是非の判断がつかなくなり、しばしば悔いが残るような結果になるようです。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데에는, 우선, 자기의 입장을 버리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안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되어, 이해관계가 따르게 되면, 옳고 그름(是非)의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어, 종종 후회를 남기는 결과가 되게 됩니다.
これは、自分の問題になると、知らぬ間に自己保存が働き、我欲に左右されるからです。正しい判断、正しい見方は、自分を切り離し、いわば第三者の立場でモノを見ることから始まるのです。
이것은, 자신의 문제가 되면, 모르는 사이에 자기 보존이 작용하여, 자기만의 욕심((我欲)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단, 올바른 견해는, 자신을 분리하고, 말하자면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そうしてやがてその見方は、心の内面にまで掘り下げられ、これまで正しいと思ったことが、まったく反対であったことがわかります。
그래서 이윽고 그 견해는, 마음의 내면에까지 파고들어 가게 되어, 여태까지 올바르다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반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たとえば、つい百年前、二百年前まで親の仇打ちは正しいものとされました。仇打ちと聞くと、武士も、町人も、百姓も、その仇打ちに加勢したものです。
예를 들면, 바로 100년 전, 2백년 전까지 부모(親)의 원수를 갚는 것은 올바른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원수를 갚았다고 들으면, 무사(武士)도, 상공업민(町人)도, 백성(百姓)도, 그 원수를 갚음에 가세했던 것입니다.
現代では仇打ちは人殺しになり、殺人罪に問われます。百年前より、ものの見方が前進たといえましょう。
현대에는 원수를 갚는 것은 살인(자)가 되어, 살인죄를 추궁당합니다. 100년 전보다, 사물의 견해가 전진(前進)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なぜ仇打ちはいけないか。殺人は神の理に反するからです。
왜 원수는 갚아서는 안 되는가? 살인은 신(神)의 법칙(理)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神の理は地上の調和であり、人びとの目的は、調和の中に生かされているからです。
신(神)의 법칙(理)은 지상(地上)의 조화(調和)이며, 사람들의 목적은, 조화 속에 소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殺人の繰り返しは、不調和を助長します。つまり、作用反作用の振り子は、いつまで立っても止ま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살인의 반복은, 부조화를 조장(助長)합니다. 즉, 작용반작용(作用反作用)의 진자(振子)는, 언제까지나 서거나 멈추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今日、個人間のこうした問題は、国が裁いています。ところが国と国の問題となると、調停や、裁くものがないために、戦争にまで発展してしまいます。
오늘, 개인간의 이런 문제는, 국가가 시비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국가의 문제가 되면, 중재(調停)나, 시비를 가리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전쟁으로 까지 발전해 가 버리고 맙니다.
第四次中東戦争は、昔の個人間の仇打ちにも似た怨念戦争であり争いは、怨念が消えるまで半永久的に続くでしょう。
제4차 중동 전쟁은, 옛날의 개인간의 원수갚음과도 닮은 원념(원한) 전쟁(怨念戦争)이며 싸움은, 원념(怨念=원한)이 사라질 때까지 반영구적으로 계속 되겠지요.
戦争が絶えないということは不幸です。多くの人命が失われ、一家は離散します。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많은 인명(人命)을 잃게 되고, 한 가족(一家)은 이산(離散)합니다.
なぜこうなるのでしょうか。戦争や争いというものは、自分のこと、自国の問題となると、自己保存が働き、自分を守ろう、相手はどうでも自分さえよければ、という考え、見方に傾いてしまうからです。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전쟁이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일, 자국의 문제가 되면, 자기보존이 작용하여,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상대방은 어떻게 되어도 자기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로 기울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正見の尺度は神の心なのです。その出発点は第三者の立場で、自分を見相手をながめることです。
정견(正見)의 척도(尺度)는 신(神)의 마음(心)인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제삼자의 입장으로, 자신을 보고 상대방을 자세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現象の姿だけをとらえて判断を下しては、間違いのモトになります。
현상(現象)의 모습만을 사로잡고(붙들고) 판단을 내리면, 잘못의 근원(모토)가 됩니다.
現象の奥にかくされた原因を見きわめ、そうして、その原因を取り除く努力が必要なのです。
현상의 깊은 곳(奥)에 숨겨진 원인을 살피고, 그리고 나서, 그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原因を見出すには反省しかありません。客観的立場に立った反省を通して、その原因をつかみ、捨て去ることです。
원인을 찾아내는 데에는 반성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입장에 선 반성을 통해서, 그 원인을 파악해서, 미련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正しい見方は、やがて正しい見解をつくってゆくでしょう。そうすると、この現れの世界の、めまぐるしい動きに、いちいち私たちの心を振り回されることがなく、心をいつも平静にしていられるでしょう。
올바른 견해(見方=보고 생각하는 방법)는, 이윽고 올바른 견해(見解)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표현(現れ)의 세계의, 눈이 팽팽 돌 정도로 빠른 움직임에, 일일이 우리들의 마음을 농락당하는(휘둘리는) 일이 없고, 마음을 늘 평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この現象界で起こった、あるいは起こりつつある現象は、すべて原因があって結果として現れてくるものですから、正しい見方が養われてくるにしたがって、現象の奥にかくされた原因をつかむことが容易になるでしょう。
이 현상계(現象界)에서 일어난, 혹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現象)은, 모두 원인이 있고 결과로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보고 생각하는 방법(正しい見方)을 기르기 시작함에 따라서 현상이 깊은 곳에 감춰진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용이(容易)해지게 될 것입니다.
正しい見方は、こうした心の眼を養うことによって高められ、やがて、神の心につながっていくものです。
올바른 견해는, 이러한 마음의 눈을 기르는 것에 의해서 고향되어, 이윽고, 신(神)의 마음으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현상의 세계(現象界)란, 다른 말로 하면, ((철학))에서, "감각의 세계" 혹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거나 인식할 수 있는 경험의 세계"라 합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본문 전체】
ものを正しく見る、これが必要である。多くの人々は、この問題について、その人の行為や外見だけで判断する場合が多い。これは誤りである。現象を見るときもそうだ。外見だけでものごとを判断することは避けなくてはいけない。
사물을 올바르게 본다, 이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사람의 행위나 외견만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잘못이다. 현상을 볼때도 그렇다. 외견만이라도 일체의 사물(ものごと)을 판단하는 일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眼は、人生行路の乗り舟の附属品と考えねばならない。客観的に見た現象や印象については、正しい心の眼で判断することが肝要である。
눈(眼)은, 인생행로의 타는 배(乗り舟)의 부속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본 현상이나 인상(印象)에 대해서는, 올바른 마음의 눈(眼)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肝要)하다.
ものごとの原因と結果について、さらに第三者として、己を中道において考察することも必要なことである。また相手の心になって考えることも必要である。일체의 사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더욱더 제삼자로서, 자기 자신을 중도(中道)에 두고서(의 입장에서) 고찰하는 일도 필요한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4.心行の言魂より 【 全文 】
4.심행(心行)의 말씀에서【본문 전체】
正しさの規準は何かというと、「公平」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ではその公平はどのようにして得られるか。それは、常に第三者の立場に立って、ものを見ることです。自分中心にものを見るから、そこに偏見が生まれ、邪見になってゆくのです。
올바름의 규준(規準)은 무엇인가 하면, 「공평(公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공평(公平)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항상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거기에 편견(偏見)이 태어나서, 사견(邪見)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すなわち、正見に反対は邪見です。邪見は心のわだかまりであり、自我我欲、自分中心から生まれます。心のわだかまりはどうして生じて来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これまで生活してきた環境、習慣、教育、思想などによって毒されてきたためです。したがって、ものを正しく見よう、公平に見ようとするには、これまでの既成観念を白紙に戻し、全く、新しい立場から、ものを見るよう努めることです。
즉, 정견(正見)에 반대는 사견(邪見)입니다. 사견(邪見)은 마음의 응어리이며, 자아아욕(自我我欲), 자기중심(自分中心=자기를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자기본위[自己本位])에서 태어납니다. 마음의 응어리는 어째서 생기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생활해 온 환경, 습관, 교육, 사상(思想) 등에 의해서 해를 당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물을 올바르게 보려고, 공평하게 보려고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기성관념을 백지로 돌리고, 완전히, 새로운 입장에서, 사물을 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例)感謝について
(예를 들어)감사에 대해서
年が進むにしたがって、ものに感謝する心が失われてきます。すべてが当たり前に動いており、感謝や、感動の心は湧いてこなくなります。しかし、ものに感謝できない心は、もともと、どの辺りから生じてきたのでしょう。誰しも子供の時代がありました。子供のときは両親から可愛がられます。両親は子供のいうことなら大抵のことは聴いてくれます。近頃は過保護となり、親は子供のこととなると夢中になってしまうようです。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사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차츰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게 움직이고 있고, 감사하는 마음이나, 감동하는 마음은 솟아나오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사물에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은, 원래, 어떠한 것에서 발생한 것이겠지요.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양친에게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양친은 아이가 말하는 것이라면 여간한 것은 들어 줍니다. 요즘은 과보호(過保護)가 되어, 부모(親)는 아이(자식)이 일이 되면 정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열중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両親は大抵のことはいうことをきいてくれる。わがままを通してくれる。ということから、子供の心は生長するにしたがい、次第に、ものに感謝する心を失ってゆきます。学業を終え、社会に出ても、仕事をするから給料をもらうのは当然だ、課長は係長より余計に給料を取っているから、それだけ働くのは当然だ、ということになってゆきます。
양친은 여간한 것은 말하는 것을 들어 준다. 제멋대로 구는 것을 통하게 해 준다. 그렇다고 하는 것에서, 아이의 마음은 성장(生長)함에 따라서, 첨차, 사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 갑니다. 학교를 끝내고, 회사에 다녀도, 일을 하기 때문에 급료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과장(課長)은 계장(係長)보다 필요 이상으로 급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하게 되어 갑니다.
こうして感謝の心は一向に芽生えてこないわけですが、そのもとをたどると、子供の頃のわがままが、大人になってもつづいているからです。これでは感謝の心がよみがえってきません。
이렇게 해서 감사하는 마음은 조금도 싹트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 원인(もと)을 더듬어 가면, 어릴 때의 제멋대로 굶(버릇없음=이기적임)이, 어른이 되어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되살아나지 않게 됩니다.
この地球上は、お互いに、助けたり、補い合うこと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のですから、感謝の心というものは、人間にとって非常に大事なものになるのです。感謝は謙虚な心をつくり、やがて、愛の心をも育てるものです。正法の出発、そして終点は、ものに感謝することにあります。すべてが当たり前で、当然、という見方をしていては、「正しくものを見る」ことにはなりません。
이 지구상은, 서로, 돕거나, 서로 보충하는 것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겸허한 마음을 만들고, 이윽고, 사랑의 마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의 출발, 그리고 종점은, 사물에 대한 감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며, 당연하다, 라고 하는 견해를 하고 있어서는, 「올바르게 일체의 사물을 본다(正しくものを見る)」 것으로는 안 됩니다.
大事なことは感謝です。感謝が基礎にないと、ものの見方は偏見を伴ってくるでしょう。
중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기초가 되지 않으면,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은 편견을 수반하게 될 것입니다.
このほか、親子の問題、夫婦の問題、社会生活の問題、いろいろその例題は尽きませんが、正しい見方というものは、具体的には現れているさまざまな事柄を深く掘り下げ、物事を正しく認識することから生まれてきます。
이 밖에, 친자의 문제, 부부의 문제, 사회생활의 문제, 여러가지 그 예제(例題)는 끝나지 않지만,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사항을 깊이 파고들어, 일체의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公平な見方は、そうした認識から生まれ、正しい見解に至るわけです。
공평한 견해(見方)는, 이러한 인식에서 탄생하여, 올바른 견해((見解)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この地上界に事象(現れているさまざまなできごと)は、すべて、人の想念、心の動きから生じており、現れの姿はそれの結果なのです。ですから、ものごとの原因は、人の心にあるのであって、現れているさまざまな現象は、原因ではなく結果なのです。したがって、結果だけをとらえ、あれこれ判断すると、間違いのもととなります。まず、現れている結果を見たならば、その原因について、掘り下げてゆくことが「正見」のポイントです。
이 지상계(地上界)에 사상((事象)(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일어나는 일))은, 전부, 사람의 상념(想念), 살마의 움직임에서 발생하고 있고, 표현(現れ)의 모습은 그것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항(ものごと)의 원인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며, 나타나 있는 다양한 현상은, 원인이 아닌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만에 마음이 사로잡혀, 이리저리 판단하면, 잘못이 원인이 됩니다. 먼저, 나타나 있는 결과를 보았다면, 그 원인에 대해서, 파고들어 가는 것이「정견*正見)」의 포인트입니다.
正見の目的は、物事の正確な判断であり、そうして、それにもとずく正しい見解を持つことです。
정견(正見)의 목적은, 일체의 사항(사물)의 정확한 판단이며, 그렇게 해서, 그것에도 이르는 올바른 견해(見解)을 갖추는 것입니다.
以上を要約すると、
이상을 요악하면,
一、まず感謝の心を持つこと。
一、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一、事象の一切の原因は人の想念、心にあって、現れの世界は結果である。
一、사상(事象=나타나 있는 다양한 일체의 사항)의 일체의 원인은 사람의 상념(想念), 마음에 있으며, 표현의 세계는 결과이다.
一、既成観念を白紙にもどし、物事の真実を知るようにする。
一、기성관념을 백지로 돌리고, 일체의 사물의 진실을 알도독 한다.
一、正見の反対は邪見になります。常に第三者の立場に立って、自我の思いを捨て、
一、정견의 반대는 사견(邪見)이 됩니다. 항상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 자아(自我)의 생각을 버리고,
正しく見る努力をす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올바르게 보는 노력을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 【발췌】
正見とは、実相と現象の区別をよく知って現象にとらわれずに実相を観(み)、しかも現象を現象として軽視せずに、現象を実相そのままの現象とすることである。
정견이란, 실상(實相=실제의 사정이나 정황)과 환경(環境)의 구별을 잘 알고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상(實相=실제의 상태)을 보고, 게다가 현상을 현상으로서 경시하지 말고, 현상을 실상(實相=참모습) 그대로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상(實相) "ⓐ참모습 ⓑ실제의 상태, 실태 ⓒ만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제의 사정이나 정황"이란 뜻임.
★현상(現象) ①"사물이나 어떤 작용이 드러나는 바깥 모양새"이란 뜻임.
実相とは元々は釈尊が使われた言葉であったのである。
실상(實相)이란 본래는 석존(釋尊)이 사용하신 말이었던 것이다.
正見の次に正思とあるのは、正しく思う、正しく考えるということは、正しく見ることからしか出てこないので、間違った見方をしていれば当然、間違った考えしか出てこないから、正しく思うためにはまず正しく見ること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정견(正見)의 다음에 정사(正思)라고 하는 것은, 、올바르게 생각한다(正しく思う)(어떠한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 올바르게 생각한다(正しく考える)(사고를 짜내다. 이것 저것 생각하여 일을 명백하게 하다. 여러모로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은, 올바르게 보는 것에서 밖에서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見方=보고 생각하는 방법)을 하고 있으면 당연히, 잘못된 사고(考え)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올바르게 생각(마음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올바르게 보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正しく思う는, 감정적으로, 正しく考える는 지적으로, 입니다.
人間の実相は神の子である。しかし、神の子であっても、その思い方が悪いと悪い現象となって現れるから、よい現象を現わそうと思ったらよいことを思わないといけない。
인간의 실상(實相=참모습)은 신(神)의 자녀(子)이다. 하지만, 신(神)의 자녀(子)이면서도, 그 사고방식(思い方)이 나쁘면 나쁜 현상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잘 현상을 보려고 생각하면 좋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現象」とは「現れた相」ということであるから、どういう相を現わすかは、心の思い一つ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人間は神の子であっても、その思いが悪ければ悪いことが現れるのであって、それが因縁の法則であって、人間は神の子であると知れば、どんなことを思ってもそれが善であるということにはならないので、悪の現象が現れてきたら、その原因はどこにあったのかと、その悪の原因をしっかり見つめて、反省してその悪の原因を除いて、悪の原因をつくら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현상(現象)」이란 「드러난 모습(現れた相)」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모습(相)을 나타내는가는, 마음의 생각 하나에 있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신(神)의 자녀(子)이면서도, 그 생각이 나쁘면 나쁜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이 인연(因縁)이 법칙(法則)이며, 인간은 신(神)의 자녀(子)라는 것을 알면, 어떤 것을 생각해도 그것이 선(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그 나쁜 원인을 확실하게 바라보고, 반성을 통해서 그 나쁜 원인을 제거하고, 나쁜 원인을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現象には、真象と偽象がある。
현상에는, 진상(眞象)과 위상(僞象)이 있다.
真象とは、神の子の実相そのままの正しい思いが、現象として形に現れたもの。
진상(眞象)이란, 신(神)의 자녀(子)의 실상(實相,참모습) 그대로 올바른 생각이, 현상(現象)으로서 모습(形)을 드러낸 것.
偽象とは、神の子の実相に反した、実相にふさわしくない間違った思いが形と成って現れたもの。
위상(僞象)이란, 신(神)의 자녀(子)의 실상(實相,참모습)에 반한, 실상(實相)에 어울리지 않는(상응하지 않는) 잘못된 생각이 모습(形)이 되어 나타난 것.
偽象が起こると、それは「苦しみ」として感じられる。だから苦しみの原因となる悪い思いはしないようにする。思わないようにするという消極的な生き方だけではいけないので、積極的に良いことを思い、よい行いをするということをし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위상(僞象)이 일어나면, 그것은「괴로움(苦しみ)」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나쁜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고 하는 소극적인 생활 태도(방식)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좋은 것을 생각하고, 잘 행동(行い)을 한다고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正法は、「行即光」といって、よいことを日常生活に実行することによって、心は安らかになり、心から光が出るようになって不動心を得る。と説くのである。
정법(正法)은, 「행즉광(行即光)」이라고 하며, 좋은 것을 일상생활에 실행하는 것에 의해서, 마음은 편안해지며, 마음에서 빛이 나오게 되어 부동심을 얻는다. 라고 설명(설교)하는 것이다.
正見の目的は、物事の正確な判断である。
정견의 목적은, 사물(物事,세상사,일체의 사항)의 정확한 판단이다.
一、まず感謝の心を持つこと。
一、우선 감하하는 마음을 갖는 것.
一、人の想念、心のあり方が原因となってそれに応ずる結果が現れる。
一、사람의 상념(想念),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원인이 되어 그것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
一、既成観念を白紙に戻して、物事の真実を知るようにする。
一、기성관념을 백지로 돌리고, 사물(物事)의 진실을 알도록 한다.
一、常に第三者の立場に立ち、自己本位の思いを捨て、相手の立場に立ってものを見るようにする。
一、항상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 자기본위의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람(것)을 보도록 한다.
正見をする根本は、感謝の心を持つことである。感謝の心を持たないと正見はできない。
정견을 하는 근본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정견은 할 수 없다.
その感謝の心を持つことの始まりは、親に対する感謝である。親はどんな気持ちで自分を育ててくれたかを思うことである。親の心を思うことができるそのことによって、われわれは相手の立場に立ってものを見る、考えるということを学ぶことになる。だから、親に対して感謝の心を持たないものは、第三者の立場に立ってものを見、考えるということはできなくなる。
그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의 시작은, 부모님에 대한 감사이다. 부모님은 어떤 마음(마음가짐)으로 나(자기)를 키워 주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그것에 의해서, 우리들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람을 보고, 여러모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님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제삼자의 입장세 서서 사람을 보고, 여러모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親に対する感謝の心に目覚めてくると、こんどはすべてのものに対して感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わかってくる。親に対する感謝を中心として、祖先に、子どもに、兄弟姉妹に、親戚に、そうして、友だちに、上司に、お世話になった人々に、それなくしては生きられなかった、また生きられない、食べ物、衣服に、住居に、空気に、水に、そうして大自然全体にと、感謝の念は広がってくる。
부모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에 눈을 뜨게 되면, 이번에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중심으로 해서, 조상(祖先)에, 자식(子ども=아이)에게, 형제자매에게, 친척에게, 그리고, 친구에게, 상사(上司)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고, 또한 살 수 없는(생활할 수 없는), 음식물, 의복에, 주거에, 공기에, 물에, 그리고 대자연 전체에게도, 감사하는 마음(念)은 차츰 넓혀지기 시작한다.
こうした感謝の心が起こってくると、人と人とが争うことの馬鹿らしさがわかってくるし、人はお互いに助け合い、補い合っ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わかってきて、その心は世界の平和へとつながっていく。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사람과 사람이 싸움 같은 어리석움을 차츰 알게 되고, 사람은 서로 서로돕고, 서로 보충해야 한다는 것은 알게 되어, 그 마음은 세계의 평화로 이어져 간다.
感謝は謙虚な心をつくり、愛の心を育てる。
감사는 겸허한 마음을 만들고, 사랑의 마음을 키운다.
正法の出発も終点も、すべて感謝にある。大事なことは感謝である。感謝の心がないとものの見方が片寄ってくる。
정법의 출발도 종점도, 전부 감사에 있다. 중요한 일은 감사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 完 -(완결)
二、正思 ・・・ 正しく思うこと
二、정사(正思) ・・・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 전체】
「正見」につづいて、「思う」ことについても中道の尺度は必要だろう。 「정견(正見)_」에 이어서, 「생각한다(思う)」것에 관해서도 중도(中道)의 척도는 필요한 것이다.
思うことも、自己中心になると人との衝突はさけられまい。思うことは具象化するからである。
생각하는 것도, 자기 중심이 되면 남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은 구상화(具象化)되기 때문이다.
★구상화(具象化) ①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실체 없는 것이 일정한 모습으로 됨
親愛の心を持って人に接すれば、人もまたそれに応えてくれるだろうし、食べ物も、食器も、家も、着物も、テーブルも、橋も、馬車も、すべて「思う」ことから出発し発明化している。
친애(親愛,남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애정을 품고 있는 것)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접하면, 남도 또한 그것에 응해 줄 것이고, 음식물도, 식기도, 집도, 옷도, 테이블도, 다리(橋)도, 마차도, 전부 「생각한다(思う)」는 것에서 출발해서 발명화(發明化)되고 있다.
それゆえ、思うことが自己本位に流れると、人と人との調和を崩し、争いの種をまくことになろう。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이 자기본위(自己本位)로 흐르면, 사람과 사람과의 조화(調和)를 무너뜨리고, 분쟁의 씨를 뿌리게 될 것이다.
★自己本位 ⓐ"자기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본문 전체】
思うとは、考えることです。見る、聞く、語る、の行為の中には、正しい中道の神理をもとにした考えがなくてはなりません。自己本位の考え方は身を滅します。すべては相互に作用し、循環の法にしたがっているため、自己保存の想念は自分にかえってくるからです。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思うとは)라고 하는 것은, 여러모로 생각한다(考えること)는 것입니다. 본다, 듣든다, 말한다, 고 하는 행위 속에는, 올바른 중도(中道)의 신리(神理)을 근본으로 한 사고(考え)을 해야 합니다. 자기본위(自己本位)의 사고방식(考え方)은 몸(신세)을 망칩니다. 모든 것은 상대방에게 작용하고, 순환의 법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보존(自己保存)의 상념(想念)은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상념(想念)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
思う、考えることは、行為につながりますから不調和な思いは、想念のフィルムに抵抗をつくり、その抵抗は、自分の意識や脳細胞までも狂わせてしまいます。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 여러모로 생각한다는 것은(思う、考えること)、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부조화(不調和0한 생각(思い)은, 상념(想念)의 필름에 저항을 만들어, 그 저항은, 자신의 의식(意識)이나 뇌세포(脳細胞)까지도 미치게 해 버립니다(혼란스럽게 해 버립니다).
私たちは、毎日に生活の中で、自分だけよく思われよう、楽をしようと考え、他人のことを考えなかったりしますが、これは自己保存の我欲につながっていることを知るべきです。
우리들은, 매일에 생활 속에서, 자기에게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마음먹으려) 하고, 편안하게 지내려고 꾀하며, 타인의 일은 고려하지 않거나 합니다만, 이것은 자기보존의 아욕(我欲,자기만의 욕심)으로 이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自己主張も自分にもどるのです。競争相手をケ落そうなどという思いは、あの山彦に似て、己にかえってきます。「馬鹿野郎」といえば、山彦もまた「馬鹿野郎」と、自分の声で帰ってきます。
자기주장도(自己主張)도 자신에게 도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경쟁 상대를 밀어내려고 하는 따위라고 하는 생각은, 저 메아리와 같아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 옵니다. 「멍청한 놈(馬鹿野郎)」이라고 말하면, 메아리(山彦)도 역시「멍청한 놈(馬鹿野郎)」이라고, 자신의 소리로 돌아옵니다.
思う、考えることは、創造行為でもあり、自己の運命をよくしたいと思うなら、まず。正しく思うこと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 여러모로 생각한다는 것은(思う、考えること)、창조행위(創造行為)이기도 하며, 자기의 운명을 좋아지게 하려고 생각하면, 우선, 올바르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不調和な思いを持てば、黒い想念の抵抗を自らつくり、苦しみを多くするだけです。相手を陥れて不幸にしようと思う心は、自分の落ち込む穴を掘っているようなもの。「策士、策におぼれる」の類であり、「人を呪わば穴二つ」であります。
부조화(不調和)한 생각(思い)을 가지면, 어두운 상념(想念)의 저항을 스스로 만들어, 괴로움이 많아질 뿐입니다. 상대방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어 불행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의 빠질 구멍을 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책사가 제 꾀에 넘어간다(策士、策におぼれる」는 류이며, 「남을 저주해서 죽이려고 하면 자신도 그 보복으로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묻어야 할 묘혈(墓穴)은 두 개가 필요하게 된다, 남을 저주하면 자기도 저주받는다(人を呪わば穴二つ)」는 것입니다.
また情欲の連想は、心の中で、行為につながります。夢とかあの世の生活では、思ったこと、考えたことが、その結果として、ただちに現れます。現象界においても、心の中で思ったことは、形に現れずにはおかないものです。思うことは行為の前提であるが、実は、行為その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らなくてはなりません。
또한 정욕(情欲)의 연상(連想)은, 마음속으로, 행위로 이어집니다. 꿈이라든가(夢とか) 저 세상의 생활에서는,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 것(思ったこと), 여러모로 생각한 것(考えたこと)이, 그 결과로, 즉석에서 나타납니다. 현상계(現象界)에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모습(形)으로 나타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행위의 전제(前提)이지만, 실은, 행위 그 자체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昔から姑と嫁の争いを聞きます。姑が嫁にきびしいことをいうと、嫁はたび重なる叱言に心から嫌な姑だ、早く死んでしまえば良いと思うようになってきて、そうなると心の黒い想念は現象化され、表面は姑に合わせ、口ではうまいことをいっても、嫁の心にひびくものは、姑に対する憎しみとなり、やがて爆発し、争いになってきます。
옛부터 시어머니(姑)와 며느리(嫁)의 다툼을 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매정한 말을 하면, 며느리는 그 때마다 거듭되는 꾸지람에 마음으로 보기 싫은 시어머니다, 빨리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 차츰 생각하기 시작하며, 그렇게 되면 마음의 어두운 상념(想念)은 현상화(現象化)되어, 표면(表面,겉)은 시어머니에게 보조를 맞추며,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해도, 며느리의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시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되어, 이윽고 폭발해서, 싸움으로 되어 버립니다.
子でない、親でないという、お互いのそうした感情が、姑と嫁の関係をいっそう面倒にしています。それというのも、双方の腹の底で、たがいに、よく思われたい、思う通りに家の中をしてゆきたいという自己保存から抜け切れないために、諸々の問題を引き起こしてしまうのです。
자식(子)도 아니며, 부모(親)도 아니라고 하는, 서로가 그러한 감정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한층 더 귀찮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쌍방의 마음속(腹の底)으로, 둘 다, 좋게 헤아리고 싶은, 생각대로 집안을 이끌어 가고 싶다고 하는 자기보존(自己保存)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야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
正思の重要なことは、正見と同じように、第三者の立場に立って考え、思うことです。
정사(正思)의 중요한 점은, 정견(正見)과 마찬가지로,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 여러모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相手の立場、相手の幸せを考え、調和を目的とした思いが大事なのです。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행복을 곰곰이 생각하며, 조화(調和)을 목적으로 한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誤解や行き過ぎはあらためればいい。話し合って、理解し合うということが調和の大きな前提なのです。
오해(誤解)나 정도를 넘은 행동(필요 이상의 행동)은 바로잡으면 좋다. 서로 대화를 하고, 서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조화(調和)의 근본 조건(大前提)인 것입니다.
話し合ってもうまくゆかず、自分の非がどうしても認められない場合は、相手のために祈ってやる広い心が必要です。
서로 대화를 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자신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서(非) 아무리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正道の目的は〝心の安らぎ〟であり、心の中が、思いが、いつも不安でジメジメしていてはなんにもなりません。
정도(正道)의 목적은, 〝마음의 평안(心の安らぎ)〟이며, 마음속이, 생각이, 항상 불안(不安)하며 우울(음울)해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相手に通じなければ、広い心で相手を包んでやることです。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으면, 넒은 마음으로 상대를 감싸 주는 것입니다.
もう一つ大事なことは、我慢と忍辱です。この両者は似ているようで大いにちがいます。我慢とは苦しみ、悲しみを腹の中につめこむことです。自分さえ我慢すれば家の中がまるく収まる、として我慢に我慢を重ねてしまう。我慢は病気をつくります。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아만(我慢)과 인욕(忍辱)입니다. 이 양자는 닮아 있는 듯 하지만 크게 다릅니다. 아만(我慢)이란 괴로움, 슬픔을 뱃속(마음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만(我慢)하면 집안이 좋게 수습된다, 라고 하며 아만(我慢)하며 아만(我慢)을 거듭해 버린다. 아만(我慢)은 병(病氣)을 만듭니다.
★한국 여인들이 많이 갖고 있는, "홧병"이 바로 아만(我慢がまん)입니다★
"① 참음 ② 견딤" 이란 뜻이며,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아집, 자만"이란 뜻이 아닙니다. 이 문단에서는.
忍辱とは、耐え忍ぶことですが、苦しいことを腹につめこまない、話しても相手がわからなければ、相手の心の安らぎを、調和を神に祈るという、広く、高い心をいうのです。
인욕이란, 괴로움이나 고통을 참는 것이지만, 괴로운 것을 뱃속(속마음)에 집어넣지 말고, 말로 해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방의 마음의 평안을, 조화(調和)를 기도한다고, 넓고, 높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私たちは忍辱を学び、我慢を捨てることです。
우리들은 인욕(忍辱)을 배우고, 아만(我慢)을 버리는 것입니다.
正思を養うには、これまた反省です。今日一日の考え、思いは正しかったか、正しくなかったかを反省し、過失があれば訂正してゆくことです。
정사(正思)를 기르는 데에는, 이 또한 반성입니다. 오늘 하루의 사고(思考), 생각(思い)은 올바랐나, 올바르지 않았나를 반성하과, 과실이 있다면 정정(訂正)해 가는 것입니다.
こうしてやがて、中道に適った正思を、心の中に確立することが出来ます。
그래서 이윽고, 중도(中道)에 맞는 정사(正思)를, 마음속에 확립할 수 있습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본문 전체】
思うということは、考えるということである。見る、聞く、語る、という行為に対しても、まず正しい中道の神理をもとにして、考えなくてはならない。自己本位の考え方は、身を亡ぼす結果を生じるからである。神理である大調和の法則に反するからである。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思うということ), 여러모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考えること). 본다, 듣는다, 말한다, 라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우선 올바른 중도(中道)의 신리(神理)를 근본으로 해서, 여러모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본위(自己本位)의 사고방식은, 몸(신세)을 망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신리(神理)인 대조화(大調和)의 법칙(法則)에 반하기 때문이다.
思うことは、行為につながる。心の動作である。だから不調和な思考は、想念のフィルムに抵抗を造ってしまい、その抵抗は、自分の意識や脳細胞までも狂わしてしまう場合がある。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思うこと), 행위로 이어진다. 마음의 동작(動作)이다. 그러므로 부조화한 사고(思考)는, 상념(想念)의 필름에 저항을 만들어 버리며, 그 저항은, 자신의 의식(意識)이나 뇌세포(脳細胞)까지도 미치게 해 버리는(혼란스러베 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私達は毎日の生活の中で、自分だけ良く思われようとする心を動かしたり、楽をしようと思い他人のことを考えなかったりする。しかし、真実でない考え方はすべて自己保存の我欲につながって行くことを知るべきである。
우리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기만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을 움직이거나, 편안하게 지내려고 생각하며 타인의 일은 고려하지 않거나 한다. 하지만, 진실이 아닌 사고방식은 전부 자기보존(自己保存)의 아욕(我欲,자기만의 욕심)으로 이어져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自己主張は、自己にもどる。競争相手を蹴落とそうなどという思いは、あの山彦に似て、己にかえってくるものなのだ。「馬鹿野郎」といえば、山彦もまた「馬鹿野郎」と自分の声で帰ってくるようなものである。
자기주장은, 자기에도 되돌아온다. 경쟁상대를 밀어내려고 하는 생각은, 저 메아리와 같아서, 자기에게 되돌아 오는 것이다. 「멍청한 놈(馬鹿野郎)」이라고 말하면, 메아리도 역시「멍청한 놈(馬鹿野郎)」이라고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このように不調和な思いを持てば、黒い想念の抵抗を自ら強くして、己自身の苦しみを多くして行くだけのことにすぎなくなる。相手を陥れて不幸にしようと思う心は、自身の落ち込む穴を掘っているようなものだ。「策士策におぼれる」の類であり、「人を呪わば穴二つ」である。
이와 같이 부조화한 생각을 가지면, このように不調和な思いを持てば、黒い想念の抵抗を自ら強くして、己自身の苦しみを多くして行くだけのことにすぎなくなる。相手を陥れて不幸にしようと思う心は、自身の落ち込む穴を掘っているようなものだ。「策士策におぼれる」の類であり、「人を呪わば穴二つ」である
이와 같이 부조화(不調和)한 생각을 가지면, 어두운 상념(想念)의 저항을 스스로 강하게 해서, 자기 자시의 괴로움을 많아지게 해 갈 뿐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상대방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어 불행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의 빠질 구멍을 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책사가 제 꾀에 넘어간다(策士、策におぼれる」는 류이며, 「남을 저주해서 죽이려고 하면 자신도 그 보복으로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묻어야 할 묘혈(墓穴)은 두 개가 필요하게 된다, 남을 저주하면 자기도 저주받는다(人を呪わば穴二つ)」는 것입니다.
またみだりに情欲について連想することは、心の中では行為につながるものである。正しい自分の心に忠実な考えを持つことが必要だ。
또한 함부로 정욕(情欲)에 대해서 연상(連想)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다. 올바른 자기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사고(思考)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常に他人の幸福を思う心は、行為につながって行けば己にまた帰ってくるものである。悪い考えが己に帰ってくるように、良い原因も循環してくる。
항상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은, 행위로 이어져 가면 자신에 또한 돌아오는 것인 것이다. 나쁜 생각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좋은 원인도 순환(循環)해 옵니다.
多くの人々への救いの心がやがて行為につながって行けば、常に善なる思いに満ち満ちている生活は、自分自身をより次元の高い姿に磨いて行く。
많은 사람들에 대한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이윽고 행위로 이어져 가면, 항상 선한 생각으로 충만되어 있는 생활은, 자기 자신을 보다 차원(次元)의 높은 모습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간다.
正しい神理に適う思いが、行為と結びつくような生活、それを実践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
올바른 신리(神理)에 맞는 생각이, 행위로 이어진 생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家庭内でも姑と嫁の争いを良く耳にするが、姑が嫁に対してきびしいことをいうと、嫁は度重なる叱言に、心から嫌な姑だ、早く死んでしまえば良いと思うようになってくる。そうなってくると心の黒い想念は現象化され、たとえ口でうまいことをいっても姑の心にひびくものではない。それは心から思っての行為ではないからである。その原因は互いに自分の子ではない自分の親ではない、という自己保存の思いがこのような結果を引き起こすのである。
가정 안에서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움을 자주 들어서 알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서 매정한 말을 하면, 며느리는 거듭되는 꾸지람에, 마음으로 보기 싫은 시어머니다, 빨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차츰 생각하기 시작한다. 고 있지만, 잘 듣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의 어두운 상념(想念)은 현상화(現象化)되어, 설령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해도 시어머니의 마음에 와 닿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서로 자기 자식(子)이 아니며 자기 부모(親)가 아니다, 라고 하는 자기보존의 생각이 이러한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互いに、神理に適った正しい考えを正しく語り合うことによって誠意をつくすことである。解決はそこにある。
서로, 신리(神理)에 맞는 올바른 사고(思考)을 올바르게 서로 말하는 것에 의해서 끝까지 성의(誠意)을 다하는 것이다. 해결은 거기에 있다.
決して人に対して恨んだり、妬んだり、そしったりするような考えを持ってはならない。通じない人々に対しては「哀れな人だ、どうか神よ、救ってやってください。あの人に安らぎを与えてください」と祈ってやる心が必要である。心から正しく思うことは、さらに自分に安らぎを生み、神仏の愛に満ちた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れは神理である。
절대로 남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질투하거나, 비방(비난)하거나 하는 것과 같은 사고(思考)을 가져서는 안 된다. 통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불쌍한 사람이다, 부디 신(神)이여, 도와 주십시오. 저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 평안을 낳고, 신불(神佛)의 사랑으로 가득 찬 빛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은 신리(神理)이다.
4.心行の言魂より 【 全文 】
4.심행의 말씀에서 【본문 전체】
正しく思えないのは、正見で見たように、自分の心にわだかまりがあるからです。怒りや憎しみや、嫉妬、愚痴、欲望がありますと、心がそれに翻弄され、正しく、ものを思うことができなくなります。正しい思いとは、慈悲と愛しかありません。これ以外の思いは、すべて、自我からきています。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견(正見)에서 본 것처럼, 자신의 마음에 응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怒り)나 미움(증오)나, 질투(嫉妬), 푸념(愚痴,게정, 넑두리), 욕망이 있다면, 마음이 그것에 농락당해, 올바르게, 사물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올바른 생각이란, 자비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것 이외의 생각은, 전부, 자아(自我)에서 나옵니다.
怒りの感情や本能的な欲望、また知におぼれると、冷たい人間になってゆきます。理性は経験を基礎としていますが、経験だけに頼り、ものを知る知性の働きを無視すると、人を納得させる深い智慧は浮かんできません。
분노의 감정(感情)이나 본능적인 욕망(欲望), 또한 세상적인 지혜(知)에 빠지면, 냉정한 사람으로 되어 갑니다. 이성(理性)은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경험만에 의지하며, 사물을 아는 지성(知性)의 작용을 무시하면, 사람을 납득시키는 깊은 지혜(智慧)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意志は、弱くても、強くても困ります。弱ければ、くるくる変わるし、強いと頑固者になります。鋼(はがね)のような、強靭な意志は、心の機能が全体的に働き、十分にゆきわたって、はじめて、その力を発揮します。
의지(意志)는, 약해도, 강해도 곤란합니다. 약하면, 급격히 변하고, 강하면 완고한 사람이 됩니다. 강철과 같은, 강인(強靭)한 의지(意志)는, 마음의 기능이 전체적으로 작동하고, 충분히 고루 미치어야,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합니다.
心が丸く、大きく、豊かであるということは、まず、正しく思うことから、出発します。
마음이 둥글고, 크고, 누긋(관대)하다고 하는 것은, 우선,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そうなのです。物事に始まりは、まず、思うことからスタートを切ります。
그러한 것입니다. 일체의 사물(物事,일)에 시작은, 우선, 생각하는 것에서 스타트를 끊습니다.
この大宇宙も、神の意志、つまり、思うことから始まりました。人間の生活も、思うことから、始まります。ただ人間は、五体を持ち、眼でものを見ることによって、「思う」ことが機能化するので、八正道も、正見、正思という順序になっていますが、本来は心が主体であり、一切の創造行為は、すべて、思うこと、考えることから生まれるものです。
이 대우주(大宇宙)도, 신(神)의 의지(意志), 즉, 생각하는 것에서 시자되었습니다. 인간의 생활도,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단 인간은, 오체(五體)를 가지고, 눈(眼)으로 사물을 보는 것에 의해서, 「생각한다(思う)」 것이 기능화(機能化)하는 것이며, 팔정도(八正道)도, 정견(正見), 정사(正思)라고 하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만, 본래는 마음이 주체(主體)이며, 일체의 창조행위는, 전부, 어떠한 일의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思うこと), 여러모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考えること)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人の思いは、以心伝心といって、すぐさま人に伝わります。またあの世に対しても、同じように伝わります。慈悲と愛の思いは、天上界につながり、憎しみ、怒りの思いは地獄界に通じてゆきます。病気、災難、さまざまな不幸の原因は、正しく思わない自己本位に、心がゆれているから起こるのです。
사람의 생각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어, 즉각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또한 저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전해집니다. 자비와 사랑의 생각은, 천상계(天上界)로 이어지면, 미움(증오), 분노의 생각은 지옥계(地獄界)로 통해 갑니다. 병(病氣), 재난(災難), 다양한 불행의 원인(原因)은,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는 자기본위(自己本位)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正しく思うことは、正念と密接に関係し、特に重要ですから、正念と合せて理解して下さい。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정념(正念)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정념(正念)과 합쳐서 이해(理解)해 주십시오.
正見、正思の目的は、慈悲と愛を根底にした中道の思いにあります。善の思いには善が返ってきます。悪の思いには悪が返ってきます。思いは、ものを創造する行為です。他を生かし助け合う、正しく思うことが、あなたを調和させ、人びとを調和させる根本です。
정견(正見), 정사(正思)의 목적(目的)은, 자비(慈悲)와 사랑(愛)을 근저(根底)로 한 중도(中道)의 생각(思い)에 있습니다. 선(善)한 생각에는 선(善)이 되돌아 옵니다. 악(悪)한 생각에는 악(悪)이 되돌아 옵니다. 생각(思い)은, 사물을 창조하는 행위(行為)입니다. 남을 살리고 서로 돕고,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당신을 조화(調和)시키고, 사람들을 조화(調和)시키는 근본(根本)입니다.
5.園頭廣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가 저서, 심행(心行)의 해설, 하권에서【발췌】
想像は創造である。
상상은 창조이다.
正見とは神の心になって見るということであり、その正しい見方を本にして考えることが正思である。
정견(正見)이란 신(神)의 마음이 되어 본다고 하는 것이며, 그 올바른 견해(見方, 보고 생각하는 방법)을 근본(本)으로 해서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이 정사(正思)입니다.
思うことがなぜ大事かというと、思うことがあって初めて行動す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る。思うということがなければ人間は何も行動できない。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행동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
思うこと(想像すること)が創造となるのであるから、われわれは行動する前によく考えることである。ここに働いている法則が、よいことを思えばよいことがくるし、悪いことを思えば悪いことがくるという原因と結果の法則である。
생각하는 것(상상하는 것)이 창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행동하기 전에 잘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이, 좋은 것을 생각하면 좋은 것이 나오고, 나쁜 것을 생각하면 나쁜 것이 나온다고 하는 원인(原因)과 결과(結果)의 법칙(法則)이다.
思ってばかりいて行動がないとなにもできないし、考えずにただ動き回るだけでは成果は上がらないし、思うことと行動が一致しなければいけない。
생각만 하고 행동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여러모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기만 해서는(돌아다니기만 해서는) 성과는 이룰 수 없고, 생각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思うことの基準は、どうしたら神の心を表現す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ことである。自分で自分のことを考えることが反省であり、相手のことを考えることが理解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だから、理解とは、自分の考えを相手に押しつけようとすることではなくて、相手の立場に立って相手の心がよくわか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생각하는 것의 기준(基準)은, 어떻게 하면 신(神)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으 일을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이 반성(反省)이며, 상대방의 것을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이 이해(理解)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理解)란, 자신의 사고(思考)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話し合ってもどうしてもうまくゆかぬという場合は、相手のために祈ってやるという広い心が必要である。相手に通じなければ広い心で相手を包んでやることである。
서로 이야기를 해도 잘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고 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으면 넓은 마음으로 상대방을 감싸 주는 것이다.
我慢は、悲しみ、苦しみを腹の中につめ込むことだからいけない。
아만(我慢, 참음)은, 슬픔과 괴로움을 뱃속(마음속)에 쑤셔 넣는 것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
忍辱でないといけない、我慢に我慢を重ねると、後には病気になる。道徳的には我慢することはよいこととして教えられているが、我慢は心の中に苦しみをつくり出す。我慢では心が安らかにならない。
인욕(忍辱)이 아니면 안 된다, 참고 참음을 거듭하면(我慢に我慢を重ねると), 나중에는 병(病氣)이 난다. 道徳的には我慢することはよいこととして教えられているが、我慢は心の中に苦しみをつくり出す。我慢では心が安らかにならない。
忍辱とは耐え忍ぶことであるが、忍辱は心の中に苦しみをつくらない。話しても相手がわからなければ、神に祈ってやるという広く高い心をいうのである。
인욕(忍辱)이란 참고 견디는 것이지만, 인욕(忍辱)은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다. 말을 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며나, 신(神)에게 기도해 준다고 하는 넓고 높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正思を養うには反省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今日一日の思いは正しかったかどうかを反省して、過ちがあったら訂正してゆく。そうして、正しく思うことが確立されてゆくのである。
정사(正思)를 기르는 데에는 반성(反省)하는 일이 중요하다. 오늘 하루의 생각은 올바랐었는지 어떤지를 반성하고, 잘못이 있었다면 정정(訂正)해 간다. 그리고,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思うことを実現させるためには、それを実現させる具体的な方法が絶対的に必要である。
생각하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현시킬 구체적인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そのことを高橋先生は「思念と行為が大事である」といわれたのである。思っただけではいけないので、思ったらその思いをどのようにして実践するか、その具体的な順序方法をしっかり考えないといけない。思っていることはどんなに立派なことであっても、それを実現するための順序方法が間違っていると、それは実現しないのである。
그 내용(こと)을 다카하시 선생님(高橋先生)은 「사념(思念)과 행위(行為)가 중요(大事)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생각한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며, 생각했다면 그 생각을 어떻게 실행할까, 그 구체적인 순서 방법을 확실히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순서 방법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은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この大宇宙も、神の意志、つまり、神が思われることによって創造された。人間の運命も、思うことによってつくられる。慈悲と愛の思いは、天上界につながり、憎しみ、怒りの思いは地獄界に通ずる。
이 대우주(大宇宙)도, 신(神)의 의지(意志), 즉, 신(神)이 생각되는 것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인간의 운명도,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자비와 사랑의 생각은, 천상계(天上界)로 이어지면, 미움, 분노의 생각은 지옥계(地獄界)로 통한다.
正思とは、慈悲と愛をもとにした中道の思いである。病気・不幸の原因は、正しく思わなかった自己本位の心にある。
정사(正思)란, 자비와 사랑을 근본으로 한 중도(中道)의 생각이다. 병(病氣)・불행(不幸)의 원인은,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자기본위(自己本位)의 마음에 있다.
善の思いには、善が、悪の思いには、悪が、それが〝法〟である。
착한(선한) 생각에는, 선(善)이, 나쁜(악한) 생각에는, 악(悪)이, 그것이 〝법(法)〟이다.
- 完 -(끝)
三、正語 ・・・ 正しく語ること 完了
三、정어(正語) ・・・ 올바르게 말하는 것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전체】
「言葉」にしてもそうだ。
「말」이라고 해도 그렇다.
ヒョウタンから駒が・・・・・・という古人の経験的な教訓は、一面の真実を語っている。
농담으로 한 말의 내용이 뜻밖에도 실현된다(瓢簞から駒)・・・・・・라고 하는 옛 사람(古人)의 경험적인 교훈은, 일면(一面)의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다.
相手を見下す言葉、野卑な言葉を使っていると、いつしかその言葉に自分の心まで犯され、相手の心を刺激し、争いの原因をつくる。
상대방을 깔보는 말, 상스런 말(野卑な言葉)을 쓰고 있으면, 언젠가 그 말에 자신의 마음에까지 침범당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자극(刺激)해서, 싸움의 원인을 만든다.
言葉は言魂であり、生きた波動である。謙虚な言葉、いつくしむ言葉、優しい言葉、勇気ある言葉、思いやりの言葉など、正しく語ることの重要性は、人間が社会生活を営むかぎり、絶対に欠くことのできない要件の一つである。
고도바(言葉,말)는 고토다마(言魂=말 속에 깃든 영적인 힘)이며, 살아 있는 파동(波動)이다. 겸허(謙虛)한 말, 사랑스러운 말(言葉), 용기 있는 말(言葉), 인정어린 말(따뜻한 말) 등의, 올바르게 말하는 것의 중요성(重要性)은, 인간이 사회생화를 영위하는 한,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요건(要件)의 하나이다.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으 지침에서【본문 전체】
言葉は言魂といって、相手に伝わります。ですから表現された私たちの言葉は、相手の耳を通して不調和か、調和か、いずれかの現象を生じさせるものです。
말(言葉)에는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며(言魂), 상대방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표현한 우리들의 말은, 상대방의 귀를 통해서 부조화(不調和)라든가, 조화(調和)라든가, 어느 쪽이든 현상(現象)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言魂とは、光と音の波動を意味します。
말 속에는 영혼이 깃든 영적인 힘이 있다는 것(言魂)은, 빛(光)과 소리(音)의 파동(波動)을 의미(意味)합니다.
私たちの心、肉体は光から出来ています。音も波動も、また、光の波として空間に振動して行きます。
우리들의 마음, 육체는 빛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소리(音)도 파동이며, 또한, 빛의 파동으로서 공간(空間)으로 진동(振動)되어 갑니다.
心からの言葉は、そのまま、光の波動となって伝わってゆきますが、すぎたお世辞や、横暴な語り方は、光の波動に黒い塊を付着させているため、相手の心を傷つけます。傷つけた結果は、自分にはねかえってくるのです。
진심어린(心から)의 말은, 그대로, 빛의 파동이 되어 전해져 갑니다만, 지나치게 마음에도 없는 발림말을 하는 것이나(すぎたお世辞)나, 난폭한 말을 사용하는 방법(横暴な語り方)은, 빛의 파동에 더러운 덩어리(검은 덩어리)를 부착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상처를 준 결과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ですから、言葉は、素直な心で、相手の心になって語り合うことが大切です。語調の強い言葉は、相手の心に不調和を与えるだけです。
그러므로, 말은, 솔직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조(語調)가 강한 말씨(言葉)는, 상대방의 마음에 부조화(不調和)를 줄 뿐입니다.
売り言葉に買い言葉で、町中や電車の中で口論している人がよくあります。たがいに、黒い塊を発散させ、それを食べ合っている。心に黒い塊をつくり出し、拡大させています。こうしたことを年中やっていますと、病気や怪我をします。心がいつも不安定になっているからです。
서로 욕지거리를 하며, 시내(번화가)나 전차 안에서 언쟁(말다툼)을 하는 사람이 자주 있습니다. 둘 다, 어두운(검은) 덩어리를 발산시키며, 그것을 서로 먹고 있다. 마음에 어두운 덩어리를 만들어 내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연중하고 있으면, 병(病氣)이 걸리거나 부상(怪我)을 입습니다. 마음이 늘 불안정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相手が怒鳴っても、決して反発をしてはいけません。反発は自己保存であり、反発する前に、自分を第三者の立場で見、考えてから結論を出しても遅くはないからです。
상대방이 아무리 고함을 쳐도, 절대로 반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반발(反発)은 자기보존(自己保存)이며, 반발하기 전에,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고, 여러모로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도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怒った心は怒った人の心に帰って行くものであり、これの心を動かしてはなりません。
화를 낸 마음은 화를 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이런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第三者の立場に立って反省し、いわれなきものであれば「哀れな人だ」と相手を思いやればよいのです。そして、「神よ、あの人の心に安らぎを与えてください」と祈ることです。
제삼자의 입장에서 서서 반성하고, 부당한 비난(いわれなきもの)을 받았다면 「불쌍한 사람이다(哀れな人だ)」라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神)이여, 저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言葉は自分と相手の意志の交流です。
말은 자신과 상대방의 의지(意志)의 교류(交流)입니다.
それだけに、常に調和ある言葉を心掛け、調和ある対人関係をつくるよう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그만큼, 항상 조화 있는 말을 명심하고, 조화 있는 대인관계를 만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言葉は、人によって受け取り方がちがって来ます。お年寄りに英語を交えたり、若い人に古い話を持ち出し、長々と語られると戸惑ってしまします。
말은, 사람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방식이 차이가 생깁니다. 노인에게 영어(英語)를 섞어서 말하거나, 젊은 사람에게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서 말하며, 장황하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면 당황해 버리고 맙니다.
「人を見て法を説け」なのです。
「사람을 보고 법(法)을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 【본문 전체 】
語るということは、言魂となって、相手に伝わるということである。表現された私達の言葉は、相手の耳を通して不調和か調和か、いずれかの現象を生じさせるものである。
말한다고 하는 것은, 말에 영혼이 깃들게 되어, 상대방에게 전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표현된 우리들의 말은, 상대방의 귀를 통해서 부조화하든가 조화하든가, 어느 쪽이든 현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すぎたお世辞や、横暴な語り方は人の心を傷つける。その原因は、結果となって自分にはねかえってくる。言葉は、少なすぎても多すぎても、自分の意志を正しく人に伝えることはできない。
지나치게 마음에도 없는 발림말을 하거나(すぎたお世辞), 난폭하게 말하는 방식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 원인은, 결과가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말은,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자신의 의지를 올바르게 남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良く自分の心に問い、自分が相手の心になって語り合うことが必要である。強い言葉は、相手の心に不調和を呼ぶものである。
충분히 자신의 마음에 묻고,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씨가 강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에 부조화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良く自動車の運転手などが怒鳴り合っていることがある。かりに相手が怒鳴っても、自分が正しいと第三者の立場で考えてから結論が出ても、反撥をしてはならない。
종종 자동차 운전수 등이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마구 서로 고함치는 일이 있다. 만약 상대방이 호통을 쳐도, 자신이 올바르면 제삼자의 입장에서 여러모로 생각하고 나서 결론이 나와도, 반발을 해서는 안 된다.
反撥の心は自己保存であり、自己中心の考え方である。このようなときこそ、正しく語り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争うことは、不調和な原因を作り出すことになるからである。
반발하는 마음은 자기보존(自己保存)이며,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때야말로, 올바르게 대화해야 한다. 타투는 것은, 부조화한 원인을 만들어 내게 되기 때문이다.
相手が怒っても、善悪をよく判断して、心を動かしてはならない。正しい納得の上で心を調和することである。怒った心は怒った人の心に帰って行くものだからだ。
상대방이 화를 내도, 선악을 잘 판단해서,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올바른 납득하는 면에서 마음을 조화하는 것이다. 화를 낸 마음은 화를 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そのように、「語る」ということは、自分と相手の意志とが交流することなのである。優しい言葉から受ける感じと、はげしい語気でいわれたときの感じでは非常に異なるものである。やはり受ける、与える感じの良い方法の中に調和は生まれてくるのである。どのような誹謗もそしりも、怒りも、心を動かさずに聞き流してしまえば、その言魂は、不調和な言動者に帰るということだ。
그처럼, 「말한다(語る)」라고 하는 것은, 자신과 상대방의 의지(意志)가 교류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말(상냥한 말)에서 받는 느낌과, 격한 말투로 들었을 때의 느낌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역시 받는 느낌과, 주는 느낌의 좋은 방법 속에서 조화는 태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비방도 비난도, 분노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듣고 흘러 버리면, 영혼에 깃든 말은, 부조화한 언동자에게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しかし、なぜそのようにいわれるのかということも、反省しなくてはならない。もしいわれる原因のないときは「哀れな人だ」と相手を思いやれば良い。そして「どうか神よ、あの人の心に安らぎを与えてください」と祈ることだ。その心はすでに菩薩心の現れなのだ。
하지만, 왜 그러한 말을 든는가 하는 것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말을 들을 원인이 없을 때는 「불쌍한 사람이다(哀れな人だ)」라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주면 좋다. 그리고 「부디 신(神)이시여, 저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이미 보살심(菩薩心)의 표현인 것이다.
4.心行の言魂より 【 全文 】
4.심행의 말씀에서 【본문 전체】
通常は、思うこと、考えることは言葉になって伝わります。言葉は言魂といって、光の波動であり、光の粒子ですから、その粒子を黒い想念で汚してはならないのです。
통상은, 어떠한 일의 조리‧내용을 분별하기 위해 마음을 움직이는 것(思うこと),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考えること)은 말이 되어 전해집니다. 말은 영혼이 깃든 영적인 힘(言魂)이라고 하며, 빛의 파동이며, 빛의 입자이기 때문에, 그 입자를 어두운 상념으로 더럽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怒りで感情がふくれ上がりますと、言葉はつい荒くなり、相手にも悪感情をいだかせることになります。つまり、光の粒子に黒い想念を付着させるからです。それ故、正思を根底にして語ることの重要性がわかります。言葉が足りない、言葉がすぎる、というのは、しばしば感情が入るからです。また誤解や不信が生じるとすれば、それは心の底に慈愛がないからです。慈愛を根底として言葉を発するようにしていけば、誤解や不信というものはおこらず、仮に、不足の言葉があったとしても、相手が補ってくれることでしょう。そうした経験は、おそらく誰もがしていると思います。言葉は、意思の疎通に欠くことのできない重要な機能ですが、心に愛があれば言葉以前の言葉が相手に伝わり、こちらの意思が正しく伝わって行くものです。
화를 내며 감정이 완전히 고조되면, 말은 무심코 거칠어지며, 상대방에게도 악감정(惡感情)을 갖게 하게 됩니다. 즉, 빛의 입자에 어두운 상념(想念)을 부착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사(正思)를 근저(根底)로 해서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말수가 적거나, 말이 지나치다, 라고 하는 것은, 종종 감정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해나 불신(不信)이 생긴다고 하면, 그것은 마음속에 자애(慈愛)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慈愛)를 근저(根底)로 해서 말을 소리를 내며 하고 있으면, 오해나 불신이라고 하는 것은 생기지 않고, 가령, 불만(不足)의 말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이 보충해 줄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필시 누구가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의사(意思)의 소통(疎通)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에,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말 이전의 말이 상대방에게 전해져서, 이쪽의 의사(意思)가 올바르게 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발췌】
正思は、相手の立場、相手の幸せを考え、調和を目的とした思いが大事であると同じように、正しく語るというその根底にはどんな時でも相手の幸せを祈りながら語るということが大事である。
정사(正思)는,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행복을 생각하며, 조화를 목적으로 한 생각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말한다고 하는 그 근저에는 어떤 때라도 상대방의 행복을 빌면서 말한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日本では昔から言霊(ことだま)という。言葉に霊があるというのである。言葉は相手の耳に達して、それによって相手は調和か不調和か、なんらかの感情の変化を起こす。
일본에서는 옛부터 고토다마(言霊=言魂=말 속에는 영혼이 깃든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한다. 말(言葉)에 영혼(霊)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말(言葉)은 상대방의 귀를 통해서, 그것에 의해서 상대방은 조화라는가 부조화든가, 어떠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言葉には二種類ある。
말(言葉)에는 두 종류가 있다.
一、想念として心の中にあるだけで、まだ口には言葉とならない言葉、心の思い。
一、상념(想念)으로서 마음속에 있을 뿐이며, 아직 입으로는 말하지 않은 말, 마음의 생각.
一。口に発する音声としての耳に聞こえてくる言葉。
一。입으로 소리른 내는 음성으로서의 귀로 들여오는 말.
心に相手の幸せを思い、口に相手の心を調和させ、相手を発奮させる言葉を発すること。
마음으로 상대방의 행복을 생각하고, 입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조화시키고, 상대방을 분발(發奮)하게 하는 말을 소리로 내는 것.
★발분[發憤, 發奮=奮發]=奮發 1.분노를 발하는 것. 2.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
心の中ではそうは思っていなくても、口先だけでうまいことをいうお世辞が、相手に不愉快な思いを起こさせるのは、その思っている心の波動が伝わってゆくからである。
마음속으로는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겉발림뿐인 그럴싸한 말을 하는 입발림이, 상대방에게 불쾌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그 생각하고 있는 마음의 파동이 전혀져 가기 때문이다.
神は大調和であり、人間はこの地球を調和させるために生まれてきているのであるから、どんなことがあっても調和と反対の争いを生み出すような言葉は使ってはならないし、そういう行動を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のが、人間の言動の規準で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
신(神)은 대조화(大調和)이며, 인간은 이 지구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태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조화(調和)와 반대되는 싸움을 낳는(분쟁을 가져오는) 것과 같은 말은 사용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의 언동의 규준(規準)이라고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言動の規準は調和を乱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にあるのであるから、心の中ではウマが合わない、波長が合わないと思っていても、相手の心を傷つけてはならない、相手との間に不調和をきた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言葉を選ば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それが「智慧」というものである。
언동(言動)의 규준(規準)은 조화(調和)를 어지럽서는(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으는 배짱이 맞지 않다, 파장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상대방과의 사이에 부조화를 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에서 말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지혜(智慧)」라고 하는 것입니다.
自分が正しいと思って発言したことが相手の怒りを買ったとしても、自分が腹を立ててはならない。相手に腹を立てさせないもっと上手ないい方はできなかったのかを反省することである。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해서 발언을 했던 것이 상대방의 화를 샀다고 해도, 자신이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게 하지 않는 가장 뛰어난 말하는 방법은 만들지 못했던가를 반성하는 것이다.
自分にいっていることが正しいと思っていても、相手が腹を立てた時は、相手の平和な心を乱し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を心の中で謝り、すぐさまその人の幸せを祈ることである。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상대방이 화를 냈을 때는, 상대방의 평화로운 마음을 어지럽혀 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즉각 그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そうするとその心が即座に相手の魂に通じて相手も感情的になったことを即座に、また少し時間が経つと必ず反省するものである。
그렇게 하면 그 마음이 즉각 상대방의 영혼(魂)에 통해서 상대방도 감정적으로 되었던 것을 즉각, 역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반성하는 것이다.
相手からいわれたことが、いわれなきものであれば、この人は偏見を持っているなとか、理解が足りないなと思って相手を思いやればよい。そうして「神よ、あの人の心に安らぎをお与え下さい」と祈ることである。
상대방으로부터 들은 말이, 부당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편견을 갖고 있다든가, 이해(理解)가 부족하다든가 생각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면 좋다. 그렇게 해서 「신(神)이시여, 저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십시오」라고 기원해 주는 것이다.
人と人が意志を疎通するのは言葉によってである。それだから、常に調和になるための言葉を使い、調和ある対人関係をつくり出すように言葉を使うことである。
사람과 사람이 의지(意志)를 소통하는 것은 말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항상 조화롭게 되기 위한 말을 사용하며, 조화 있는 대인관계를 만들어 내도록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叱る」と「怒る」とは、口に出てくる言葉は同じであったとしても、その言葉の奥にあるのは、一方は心の底から相手の幸せを願う心であり、他方はただ憎むだけだということの違いである。この違いは大きい。一方は調和と善を生み出すが、他方は不調和と悪を生み出す。叱ることには愛があるが、怒りには愛がない。
「꾸짖는다, 나무란다(叱る)」와 「화를 낸다(怒る)」는, 입으로 나오는 말은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 말 속에 있는 것은, 한 편은 마음속으로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며, 다른 한 편은 그저 미워할 뿐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크다. 한 편은 조화(調和)와 선(善)을 낳지만, 다른 한 편은 부조화(不調和)와 악(悪)을 낳는다. 꾸짖는다(나무란다) 라는 것에는 사랑(愛)이 있지만, 화를 냄에는 사랑(愛)이 없다.
キリスト教の「創世記」の始めに、「神、光ありといいたまいければ光ありき」という即ち、神の想念が言葉となって現れてきたという考え方と同一である。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창세기(創世記)」의 처음에, 「신(神)은, 빛(光)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라고 하는 즉, 신(神)의 상념(想念)이 말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사고방식과 동일하다.
言葉が生みだされる以前の言葉とは想念である。だから、言葉を正しくするためには想念を正しくしなければいけない。
말(言葉)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말이란 상념(想念)이다. 그러므로, 말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상념(想念)을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념(想念) ⓐ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
心の中に描く想念と、使う言葉が正しいものであって一致した場合は、その言葉は幸福な運命となって現実化してゆくが、想念と言葉とが正しくなく、また一致しない場合は不幸な運命となって現れる。病気だ、不幸だという人はその想念と言葉の違いをよく反省してみることである。
마음속으로 그리는 상념과, 사용하는 말이 올바른 사람이 있고 일치한 경우는, 그 말은 행복한 운명(運命)이 되어 현실화 해 가지만, 상념과 말이 올바르지 않고, 또한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불행(不幸)한 운명이 되어 나타난다. 병(病氣)이 걸렸다, 불행(不幸)하다고 하는 사람은 그 상념과 말의 차이를 잘 반성해 보는 것이다.
言葉は波動である。耳に入る言葉と、その言葉の裏にピタッとくっついてくる心の思いの波動がある。どんなにきれいな言葉を使っていても、その言葉にピタッとくっついてくる心の思いが悪いと、聞く人の心は波動が荒くなり不快さを感ずる。いっている言葉は多少ぞんざいであっても、その思いが謙虚でやさしく思いやりがあり、励ましの勇気のある思いであると、その言葉は快く感じられる。
말은 파동(波動)이다. 저절로 들리는 말과, 그 말의 이면에 딱 달라붙어 있는 마음의 생각의 파동이 있다. 아무리 부드러운 말(상냥한 말)을 쓰고 있어도, 그 말에 딱 달라붙어 있는 마음의 생각이 나쁘면(악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은 파동이 거칠어져 불쾌감을 느낀다. 말하고 있는 말은 다소 무례하다고 해도, 그 생각이 겸허하며 자상하고 이해심(동정심)이 있고, 격려하는 용기가 있는 생각이라고 하면, 그 말은 기분 좋게 느껴진다.
言葉を正しくするということは礼儀を正しく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が、同時に言葉は誠実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말을 올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예의를 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말은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調和を目的とし、調和を生み出す言葉は正しいが、その反対に、人を争わせることを目的とし不調和を生み出す言葉は正しくない。
조화(調和)을 목적으로 하고, 조화(調和)를 낳은 말은 올바르지만, 그 반대로, 사람을 싸우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부조화를 낳은 말은 올바르지 않다.
沈黙の尊さ・・・・・・お釈迦さまが竹林精舎にいられた時、つぎのように教えられた。
침묵의 존엄성(沈黙の尊さ)・・・・・・부처님(お釋迦さま)이 죽림정사(竹林精舎)에 계실 때,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比丘たちよ、そなたたちが集まっている時には二つのなすべきことがある。
一つは、法について語り合うこと。
二つは、聖なる沈黙を守ること」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모여 있을 때에는 두가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는, 법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두 번째는,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
正しく語るということは、しゃべるべきでない時は正しく沈黙するということをも含んでいるの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
올바르게 말한다고 하는 것은,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되는 때는 올바르게 침묵(沈默)한다고 하는 것도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家庭は、神が定められた魂の修行の基本的な場なのであるから、正しく語ることの訓練もまず家庭で行うことである。
가정(家庭)은, 신(神)이 정하신 영혼(魂)의 수행(修行)의 기본적인 장소(場)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말하는 것의 훈련(訓練)도 먼저 가정(家庭)에서 행하는 것이다.
八正道が、正見、正思、正語・・・という順序になっているのは、この順序が想念を具象化する順序であるからである。
팔정도(八正道)가,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라고 하는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순서가 상념을 구상화(具象化)하흔 순서(順序)이기 때문이다.
「正しく語る」ということが行われないと世の中では、人間は幸福にならない。「올바르게 말한다」라고 하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 完 -(끝)
四、正業 ・・・ 正しく仕事をすること
사、정업(正業) ・・・ 올바르게 일하는 것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 전체】
まず「正業」に考えを進めてみた。
우선「정업(正業)」을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았다.
「仕事」は、自らの生活を助けると同時に、人々の生活にうるおいをもたらすものである。健康で、快活に仕事ができるのは、自然の恵みと、人々の協力の賜であろう。
「일(仕事)」은, 자신의 생활을 도움과 동시에, 사람들의 생활에 재정상에 이익(보탬)을 가져오는 것이다. 건강하게, 쾌활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혜택(惠澤)과, 사람들의 협력해 주신 덕택인 것이다.
正しく仕事をするには、まず感謝の心が大事であろう。
올바르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そうして、その感謝の心は、報恩という布施の行為となって実を結ぶものであろう。
또한, 그 감사하는 마음은, 보은(報恩)이라고 하는 보시(布施)의 행위가 되어 열매(결실)를 맺는 것이다.
地上の調和は、この「仕事」に対する心構えによって大分ちがってこよう。 지상(地上)의 조화(調和)는, 이 「일(仕事)」에 대한 마음가짐에 의해서 상당히 달라져 오는 것이다.
感謝と報恩を軸として、勇気と努力、それに智慧が三位一体となって働くときに、この地上はよりいっそうの豊かさをましてこよう。
감사와 보은을 축으로 해서, 노력과 용기, 그것에 지혜가 삼위일체가 되어 작용할 때에, 이 지상은 보다 한 층 더 낫게 풍요로워진다.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 【본문 전체】
私たちのこの地上での目的は、魂を磨くことと、仏国土ユートピアを造ることです。
우리들의 이 지상에서의 목적은,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과, 불국토 이상향을 만든 것입니다.
正業とは、この目的に適ったものでもの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
정업(正業)이란, 이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感謝と報恩、そして、より大きく、豊かな心と魂をつくる場が仕事のはずです。
감사와 보은, 그리고, 보다 크고, 관대한 마음(느긋한 마음)과 영혼을 만드는 장(場)인 것입니다.
こう考えますと、正業の在り方はまず心を豊かにすることにあり、仕事は己の魂の経験の範囲を広げてゆくことになります。
이렇게 생각하면, 정업의 본연의 모습은 우선 마음을 관대하게(느긋하게)하는 것에 있으며, 일은 자신의 영혼의 경험의 범위를 넓혀 가게 됩니다.
ペテロはイエス・キリストの第一の弟子として後世に名を遺しましたが、そのペテロは、当時は漁師でありました。学問に縁が薄かったために、伝道には随分と苦労しました。そこで今世は学問をみっちりと学び、魂の経験を広げてゆこうと、今世は学者の道を志したのです。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일의 제자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 베드로는, 당시는 어부(漁師)였습니다. 학문(學問)에 연(緣)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도(傳導)에는 몹시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세상(今世)은 학문을 단단히 배우고, 영혼의 경험을 넓혀 가려고 해서, 금세(今世)는 학자(學者)의 길을 지향했던 것입니다(금세에는 학자의 길에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元東大総長の故矢内原忠雄氏が、かつてのペテロであったのです。
이전의 도쿄대학교 총장(元東大総長)인 고(故)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内原 忠雄)씨가, 옛날의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矢内原 忠雄(やないはら ただお、1893年(明治26年)1月27日 - 1961年(昭和36年)12月25日)は、日本の経済学者・植民政策学者。東京大学総長。日本学士院会員。正三位勲一等瑞宝章。
야나이하라 타다오(Tadao Yanaihara), 1893년(메이지 26년)1월 27일 - 1961년(쇼와 36년) 12월 25일)은, 일본의 경제학자, 식민정책학자. 동경대학교 총장. 일본학사원 회원. 한국과 중국의 정3품에 해당하는 쇼우산미 주이호우쇼우(正三位勲一等瑞宝章) (ずいほうしょう、Orders of the Sacred Treasure)라는 훈장을 받았다.
※베드로 ペトロ[ Petros 그리스 ] ①베드로 ②예수 그리스도 12제자의 필두(筆頭) ③원래 이름은 시몬 ④갈릴리 어부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의 승천 후 전도에 힘쓰다가 만년에 로마에서 네로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 ⑤가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로마사교(司教, 교황(教皇))로 간주하고, 각 교황이 그리스도로부터 베드로가 받은 천국의 열쇠를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こういうと人はそんなバカなと、いうかも知れませんが、同氏が書き遺した「イエス伝」を見れば、当時の経験がなければ書けないような個所が随所に見られます。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어디 있나,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만, 앞에서 말한 그 사람이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쓴 「예수 전(Jesus 傳)」을 보면, 당시의 경험이 없었다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점(個所)이 도처(随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작(著作)의 일부
マルコ伝による 嘉信社 1940 『聖書講義』(1948年-1959年)
このほか現代の著名人の中には歴史上に名をつらねた人がおり、あの人がこんな仕事を、という例が非常に多い。
이 밖에 현대의 저명 인사 중에는 역사상에 이름을 남기신 분이 있고, 저 사람이 이런 일을, 이라고 하는 예가 상당히 많다.
普通は前世の職業が今世につながっている人もありますが、百八十度ちがった職業を持って今世を送る人も多いのです。
보통은 전세(前世,전생)의 직업이 금세(今世,금생)으로 이어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108도로 다른 직업을 갖고 현재의 세상을 보내는 사람도 많은 것입니다.
このように職業を通して、己の魂の経験をより豊かにし、広い心を養うことが正業の第一の目的なのです。
이와 같이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하고, 넓은 마음을 기르는 것이 정업의 첫번째의 목적인 것입니다.
第二の在り方は、職業を通して、人びとの調和をはかることです。自分を含め、人びとの生活を守ってゆくことにあります。
두 번째의 본연의 모습은, 직업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과의 생활을 지켜 가는 것에 있습니다.
南方の原住民のように、一から十まで自給自足する時代は過ぎました。しかし原住民でさえ、男女の役割が決まっており、男は狩に、女は子供と食事の用意をするように、やはりそれぞれの分担がるようです。何もかも一人で生きることは、事実上不可能ですし、社会生活という永続性を持った生活は一人では期待できません。それぞれが持ち場を守り、その分を果たすことによって自分も生かされ、他をも生かすことになるのです。
남방의 원주민(原住民)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자급자족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하지만 원주민(原住民)조차도, 남녀의 역할이 정해져 있고,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아이들을 돌보고 식사 준비를 맡는 식으로, 역시 각자가 분담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사회생활이라고 하는 영속성을 가진 생활은 혼자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각자 부서(담당 구역)을 지키며, 그 몫(分)을 완수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도 살고, 남도 역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職業に就くということは、自分を生かすばかりか、他の人びととの共同生活に欠かせない役割なのです。
직업(職業)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살릴 뿐아이라,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생활에 빠뜨릴 수 없는 역할인 것입니다.
私たちの肉体の機能を見ても、心臓は心臓として、胃腸は胃腸の働きを果たすことによって体は維持されます。心臓や胃腸が勝手に動き、持ち場を放棄すれば、私たちに肉体は一日として保つことは出来ません。
우리들의 육체의 기능을 봐도, 심장은 심장으로서, 위장은 위장의 기능을 완수하는 거에 의해서 몸은 유지됩니다. 심장이나 위장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부서를 방기하면, 우리들에게 육체는 하루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職業とはこのように、自分を生かし、他をも生かす大事な場です。
직업이란 이와 같이, 자신을 살리고, 남을 또한 살리는 중요한 장(場)입니다.
第三の在り方は、奉仕です。
세번째의 본연의 모습은, 봉사(奉仕)입니다.
私たちが健康で働ける環境にあるということは、自分を生かし、さらに他をも生かす原動力となるものです。
우리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살리고, 나아가 남도 또한 살리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職業の第一の目的が魂の経験の範囲を広げてゆくことにあれば、健康で働けることは神の偉大な慈悲があるからであり、感謝と報恩の行為こそ正業の第三の在り方のはずです。
직업의 첫째의 목적이 영혼의 경험을 범위를 넓혀가는 것에 있다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은 신(神)의 위대한 자비(慈悲)가 있기 때문이며, 감사와 보은의 행위야말로 정업의 제3의 본연의 모습인 것입니다.
こうみてまいりますと、職業の在り方、仕事の目的がハッキリしてきたと思います。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직업의 본연의 모습, 일의 목적이 확실해 져 온다고 생각합니다.
ところが現実がどうでしょうか。利益のためなら人を押しのけても無理押しする。公害が出ようが、人が苦しもうが、最少の費用で最大の利益を挙げる、それが企業目的になっています。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밀어내서라도 억지로 강행한다. 공해가 발생하든, 남이 괴롭든지 (상관않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는, 그것이 기업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消費は最大の美徳とかいって、地球資源の乱獲に狂奔し、将来の人類の生存のことなどあまり考えずに、儲かればいい、自分さえよければよいというのがこれまでの企業精神のようでした。
소비는 최대의 미덕(美徳)이라든가 라고 하며, 지구 자원의 난획(亂獲)에 광분하며, 장래 인류가 생존하는 것 따위는 그다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이익을 올리면 좋고, 나만 좋으면 좋다고 하는 것이 이때까지의 기업정신(企業精神)인 것 같습니다.
さらには労使の争い。労働者も人の子、食えるだけよこせと経営者に迫る。賃金と物価はニワトリ・卵の論争のごとく、年々エスカレートし、労働者の生活福祉を目的とした組合運動は、ここへ来てようやく反省期に入ろうとしています。나아가서는 노사의 분쟁. 노동자도 사람의 자식이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만이라고 해 달라고 경영자에게 재촉한다(강요한다). 임금과 물가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해마다 에스칼레이트하며(격화되며), 노동자의 생활 복지를 목적으로 한 조합 운동은, 여기까지 와서 차츰 반성기(反省期)에 접어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経営者と労働者の対立は、やがて経済全体のバランスを失う要因をはらんでいます。
경영자와 노동자의 대립은, 이윽고 경제 전체의 밸런스(균형)를 잃게 하는 요인을 안고 있습니다.
企業エゴ、個人エゴが正業から見た場合、いかに人類全体の破壊行為につながるか、魂の前進にブレーキをかけているかが、これで明らかになるでしょう。
기업이기주의, 개인이기주의가 기업에서 봤을 경우, 어떻게 인류 전체의 파괴행위로 이어지는지, 영혼의 전진(前進)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지를, 이것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物を主体にしたものの考え方は、必ず破壊につながってゆきます。
물건(物,물질)을 주체로 한 일체의 사고방식은, 반드시 파괴로 이어져 갑니다.
心を中心とした物心両面の考え方こそ、私たち人類の調和の基礎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人類が永遠の平和を望みたいならば、ウソのいえないその心を大事にし、その心をもとにした生活が大事なのです。
마음을 중심으로 한 물심양며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우리들 인류의 조화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인류가 영원한 평화를 바라는 것처럼 되면, (남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마음을 근본으로 한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본문 전체】
この現象界においての修行は、物質、経済の場である。
이 현상계에서의 수행은, 물질, 경제의 장(場)이다.
過去における修行者達は、現代のように物質経済文明の進歩の早い環境ではなかったから、生活条件もゆるやかであった。しかし、権力者により多大な犠牲を払ったり、戦争というような不調和に、心の安らぎは常に得られなかった。それだけに、安らぎを求める人々も多かったのである。
과거에 있어서의 수행자들은, 현대와 같이 물질경제 문명의 진보의 빠른 환경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 조건도 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권력자에 의해 다대한 희생을 지불하거나, 전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부조화로, 마음의 평안은 항상 얻을 수 없었다. 그만큼, 평안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状況は異なるが、現代も己の心を失っている人々は多い。生活の知恵から生じている物質文明に押し流されてである。しかし私達は、生活の基盤を放棄することはできない。物質経済の根本は失うことはできない。生きていられなくなる。
そうした中で、与えられた仕事こそ天職であり、そのために生命の保存ができるのであるから、努力して、成果を上げ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
상황은 다르지만, 현대도 자신의 마음을 잃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생활의 지혜(知惠)에서 일어나고 있는(발생하고 있는) 물질문명에 휩쓸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생활의 기반을 방기할 수는 없다. 물질경제의 근본은 잃을 수는 없다. 살아 있을 수 없게 된다.
そうした中で、与えられた仕事こそ天職であり、そのために生命の保存ができるのであるから、努力して、成果を上げ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
그러한 가운데에서, 주어진 일이야말로 천직이며, 그 때문에 생명의 보존이 가능한 것이기 땜누에, 노력해서, 성과를 올려야 하는 것이다.
生活のための仕事に対して、不平不満の心が存在することは、すでに感謝の心を失っているからである。もちろん正しい努力の結果に対しては、報酬の基準が、生活経済との調和の上に成り立つべきである。生活環境における基準の調和が崩れている場合は、己の心と良く相談し、生活できる経済の確立を、計らなくてはならない。自己保存のみによる物質経済の独占は、必ず心の不調和を起こし、これが原因となり他の生活環境にも不調和な結果を作り上げてしま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あくまでも大衆の調和を根底にした正しい仕事に専念することが、本当の修行である。その仕事についても、社会の人々に貢献できる目的を持った、正しい仕事を私達は修行の目的としても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생활을 위한 일에 대해서, 불평불만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은, 이미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올바른 노력에 대해서는, 보수(報酬)의 기준이, 생활경제와의 조화 위에 성립해야 한다. 생활환경에 있어서의 기준의 조화가 무너지고 있는 경우는, 자기의 마음과 잘 상담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경제의 확립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보존만으로 인한 물질경제의 독점은, 반드시 마음의 부조화를 일으키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다른 생활환경에도 부조화한 결과를 만들어 내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대중의 조화를 근저(根底)로 한 올바른 일에 전념(専念)한는 것이, 참된 수행(修行)이다. 그 일에 대해서도, 사회의 사람들에게 공헌할 수 있는 목적을 가진, 올바른 일을 우리들은 수행의 모적으로서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まして、集団の指導者でもある事業体の責任者は、自我我欲を捨て、従業員を幸福にするための目的を根底にして、労使協調の心を果たすことが人要であり、事業はその心によって発展し、不朽の事業にもなり得るのである。
하물며, 집단의 지도자(指導者)라 해도 어떤 사업체의 책임자는, 자아아욕을 버리고, 종업원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근저로 해서, 노사협조의 마음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사업은 그 마음에 의해서 발전하고, 불후의 사업도 될 수 있는 것이다.
新製品の開発にしても、心を悟った行いの中から、その研究努力に対し、より以上の霊感が与えられるというものである。
신제품을 개발하더라도,, 마음을 깨달은 행위 속에서, 그 연구 노력에 대해서, 보다 이상(以上)의 영감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現代社会における労使の闘争は、不自然である。資本家も労働者も、物質的、経済的な考えのみで、人間として、神の子としての尊厳を失っている。資本家は経済観念の上に、より次元の高い心を悟り、自己利益の追求の仕事に終始しないことである。利益は労働力によって得られるのであるから、やはり報恩の心はその労働力に対して感謝の心を示さなくてはならない。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노사의 투쟁은, 부자연스럽다. 자본가도 노동자도, 물질적 경제적인 사고만으로, 인간으로서, 신(神)의 자녀(子)로서의 존엄을 잃고 있다. 자본가는 경제관념 위에, 보다 차원의 높은 마음을 깨닫고, 자기 이익의 추구하는 일에 시종일관하지 않는 것이다. 이익은 노동자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보은(報恩)의 마음은 그 노동력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感謝の心の表現は、生活の安定を保証することである。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은, 생활의 안정을 보증하는 것이다.
また労働力の提供者は、正しい仕事の提供者に対して報恩感謝の印として、仕事に専念し、己に足ることを知った生活の基盤を築かなくてはならない。労使協調の精神は、闘争を根底にした協調であっ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
또한 노동력의 제공자는, 올바른 일의 제공자에 대해서 보은 감사의 표시(印)로서, 일에 전념하고, 자신에게 만족할 줄 안 생활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노사협조의 정신은, 투쟁을 근저로 한 협조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働いた金を当然のごとくもぎとろうとする心、行為は、すでに正しい仕事とはいえない。賃上げ交渉にしても、本来相互理解を根本とすべきである。相互の心からの話し合いが、正しい神理なのである。
일한 돈을 당연하듯이 강제로 빼앗으려 하는 마음, 행위는, 이미 올바른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임금 인상 교섭에서도 역시, 본래 상호이해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 상호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올바른 신리(神理)인 것이다.
現代社会の歪は、資本家も労働提供者もともに正すべきであるし、ともに心という内面を、より正しい神理によって開発することが第一歩である。
현대 사회의 비뚤어짐은, 자본가도 노동 제공자도 다 같이 바로잡아야 하며, 다 같이 마음이라고 하는 내면을, 보다 올바른 신리(神理)에 의해 개발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 労・使の葬儀の解決について 】
【노사(勞使)의 장례식의 해결에 대해서】
闘争の場が職場であると考えることは、己の首を己で絞める結果を呼ぶものである。
투쟁의 장(場)이 직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목(首)을 스스로 조르는 결과를 부르는 것이다.
闘争の職場は、すでに不調和な黒い想念で包まれ、安らぎの正しい職場とはいいにくい。
투쟁의 직장은, 이미 부조화한 어두운 상념으로 싸여, 편안한 올바른 직장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人々の争いと破壊の心は、そのまま地獄の阿修羅界に通じているからである。事業の実体について、常に労使の心を調和させ、より向上するための努力の結果には、神仏の光がもたらせられ、正しい仕事ができるであろう。
사라들의 다툼과 파괴의 마음은, 그대로 지옥의 아수라계(阿修羅界)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의 실체에 대해서, 항상 노사의 마음을 조화시키고, 보다 향상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에는, 신불(神佛)의 빛이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不退転の正しい事業体とは 】
【불퇴전의 올바른 사업체란? 】
労使の心と心の調和がとれ、互いに幸福のための団結が計られ、自己保存、自我我欲を捨てた事業体は、神意に適った団体である。
노사의 마음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서로 행복을 위한 단결을 꾀하며, 자기보존, 자아아욕을 버린 사업체는, 신의(神意)에 맞는 단체이다.
正しい仕事への情熱、人々の心の調和度に比例した環境は、神仏の光によって保護される。他の事業場でできない立派な技術を生み出した環境は、不退転である。技術がなくても営業活動が勤勉で、正しい仕事に専念し、良い調和のとれた得意先を持っている環境は、不退転である。研究努力の結果、常に社会人類のために貢献する新製品の開発によって得た専売特許の活用は、不退転である。
올바른 일에 대한 정열, 사람들의 마음의 조화도(調和度)에 비례한 환경은, 신불(神佛)의 빛에 의해 보호된다. 다른 사업장에서 할 수 없는 훌륭한 기술을 내놓은 환경은, 불퇴전이다. 기술이 없어도 영업활동이 근면하고, 올바른 일에 전념하고, 잘 조화를 이룬 거래처를 가지고 있는 환경은, 붙퇴전이다. 연구 노력의 결과, 항상 사회인류를 위해 공헌하는 신제품의 개발에 의해서 얻은 전매특허의 활용은, 불퇴전이다.
常に大自然の法則に適った正しい仕事は、知情意を伴って社会人類を幸福に導き、より高い次元へ己の魂を磨き、調和の環境を築き上げて行く。これが、仕事の本質である。たずさわる人々の心が大切なのである。
상상 대자연의 법칙에 맞는 올바른 일은, 지정의(知情意)을 수반하여 사회 인류를 행복하게 이끌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고, 조화의 환경을 쌓아 올려간다. 이것이, 일의 본질(本質)이다. 관계하는(종사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人々の心に安らぎと調和、そうした娯楽を与える人々の仕事は、人々の心とこの心との調和の中により高い次元の芸術を生む。このような人々の正しい生活もまた、不退転である。自己慢心、は孤立を招く。心を失った芸術は自我そのものと化す。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과 조화, 그러한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일은, 사람들의 마음과 이 마음과의 조화 속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을 낳는다. 이러한 사람들의 올바른 생활도 또한, 불퇴전이다. 자기 만심(自己慢心), 은 고립을 초래한다. 마음을 잃은 예술은 자아(自我) 그 자체로 화(化)한다. 立を招く。心を失った芸術は自我そのものと化す。
위 문장에서, 자아(自我)의 뜻은, "이기주의, 자기 중심, 자기 본위"을 뜻하는,
(Ego)입니다.
また、心を失った科学は、智と意のみによって闘争と破壊の社会を作ってしまう。
또한, 마음을 잃은 과학은, 세상적인 지혜(智)와 의지(意)만으로 인해 투쟁과 파괴의 사회를 만들어 버린다.
心を失った指導者は一時は栄えても、いつかその指導力を失い、犯した罪を己で償わなくてはならないようになる。
마음을 잃어버린 지도자는 한때는 번영해도, 언젠가 그 지도력을 잃고, 저지른 죄를 스스로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闘争と暴力によって造り上げたすべての結果は、闘争と暴力によってまた覆えされる。心をモットーとし、勤勉と努力によって造り出された社会は調和と安らぎの環境となり、より高い文明を築き、私達の魂はより高い次元に進化されて行く。
투쟁과 폭력에 의해서 만들어 낸 모든 결과는, 투쟁과 폭력에 의해서 역시 전복된다.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근면과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 낸 사회는 조화와 평안의 환경이 되어, 보다 높은 문명을 구축하고, 우리들의 영혼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화(進化)되어 간다.
このように、正しい仕事はそのまま人生の修行であり、その場はそのまま魂の修行場である。私達は皆、個の生命であり、その開発努力により、さらにより高い調和のある社会を築き上げることができる。
이와 같이, 올바른 일은 그대로 인생의 수행이며, 그 장소(場)는 그대로 영혼의 수행장이다. 우리들은 모두, 개인(個)의 생명이며, 그 개발과 노력에 의해, 더욱 보다 높은 조화를 이룬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万象万物、皆相互の関係にあって、独り人間のみが特別存在であると認識するのは誤りであり、神仏の体である万象万物を正しい心で活用してこそ正しい仕事ができるのである。
만상만물(萬象萬物)은, 다 상호의 관계에 의해서, 다만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며, 신불(神佛)의 몸(體)인 만상만물을 올바른 마음으로 활용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指導者が自分自身に足ることを悟り、利益は働く人々に還元し、常に心の対話によってより高い業績を挙げ、余った利潤の一部は社会福祉の方向へも還元する。そうしたことによって経営者たちの菩薩心は磨かれて行くのである。
지도자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을 깨닫고, 이익은 일하는 사람들에 환원하고, 항상 마음의 대화에 의해서 보다 높은 업적을 거두고, 남은 이윤의 일부는 사회복지의 방향으로도 환원한다. 그러한 것에 의해서 경영자들의 보살심(菩薩心)은 한층 빛나게 되어 가는 것이다.
こうした問題は、一人一人の人間が、神仏の子としての自覚を持ってこそ初めて実践されて行くものだ。
이러한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신불(神佛)의 자녀(子)로서의 자각을 가져야만 비로소 실천되어 가는 것이다.
私達は、物質や経済の奴隷になってはならない。己自身の心を持った生活こそ、神理に適った生活といい得るのである。
우리들은, 물질이나 경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진 생활이야말로, 신리(神理)에 맞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心行の言魂より 【 全文 】
4.심행의 말씀에서 【본문 전체】
地上のあらゆる生物は、働くように仕組まれています。動物も植物も、そして、鉱物さえも、この地上の生きとし生けるものに、その体を提供しています。지상의 모든 생물은, 일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광물마저도, 이 지상의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모든 생물)에게, 그 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人間の場合も、その点は老若男女を問いません。幼児は乳をのみ、眠ることが務めです。それによって、やがて、成人し、次代を背負う、大事な働き手となるのです。学生は学校で学問を学び、社会人は社会のために働きます。主婦は家庭にあって子供を守り、夫の仕事が円滑にゆくよう、安らぎの場を与えるものです。
인간의 경우도, 그 점은 남녀노소(老若男女)를 불문합니다. 유아(乳兒)는 젖을 먹고, 자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이윽고, 성인이 되어, 다음 세대를 짊어지는, 중요한 집안의 일꾼(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사회인은 사회를 위해서 일합니다. 주부는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고, 남편의 일이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편안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安らぎの安の字は、宀(うかんむり)に、女と書きます。宀はもともと家の宀からきており、その宀に女が加わると、安、つまり、その周囲は安らぎとなるのです。
평안의 안(安) 자(字)는, 갓머리(宀)부에, 여자(女)라고 씁니다. 갓머리(宀,집 면)는 원래 집(家)의 "지붕이 사방으로 덮힌 집(宀)" 이란 뜻에서 만들어 졌고, 그 집((宀)에 여자가 더해지면, 편안(安), 즉, 그 주위는 마음의 안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やすらぎ [ 安らぎ ] ① 평온 ② 편안 ③ 평안 ④마음이 편안해짐 ⑤마음의 안정.
男は、田と力が合わさって男となります。男は外に出て田畠で仕事に精を出す。女は、家庭にあって安らぎの場を提供します。男性が女性に美を求めるのは、美は安らぎの象徴であり、女性が男性に求めるもの、力は、たくましさの象徴だからです。男女の性が、それぞれ機能することによって、人間社会は円滑に回転します。
사내 남(男)자는, 밭 전(田)과 힘 력(力)이 합해져서 남(男)자가 됩니다. 남자(男)는 밖에 나가서 논밭(田畠)에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여자(女)는, 가정에서 마음의 편안한 장소(場)을 제공합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아름다움(美)을 찾는 것(아름다움을 바라는 것)은, 아룸다움(美)은 평안의 상징(象徴)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바라는 것, 힘(力)은, 늠름함의 상징(象徴)이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성(性)이, 각자 기능(機能)하는 것에 의해서, 인간 사회는 원활하게 회전합니다.
働くということは、人間としての義務であります。同時に、職業に就き働くということは、人びとに必要なものを提供することを意味します。職業のない者、働くことの必要のない者は一人もいないはずです。
일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義務)입니다. 동시에, 취직을 해서 일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意味)합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今日の社会はそれぞれの業務を分け合い、たがいに、その生活を補い合い、助け合っています。すなわち、分業化によって、それぞれの生活を支えているというのが実情です。
오늘의 사회는 각자의 의무를 서로 나누고, 서로, 그 생활을 서로 보충하며, 서로 돕고 있습니다. 즉, 분업화(分業化)에 의해서, 각자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실정(実情)입니다.
私たちが仕事をし働くということは自らの生活を維持し、人びとの生活を支えることです。ですから、それは愛の行為につながるのです。
우리들이 일을 하고 일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활을 유지(維持)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愛)의 행위(行為)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愛は他を生かすことであり、助け合うことです。
사랑은 남을 살리는 것이며, 서로 돕는 것입니다.
仕事をし、働くことは他を生かすことですから、愛の行為なのです。仕事をし、職業に就くことが愛の行為にも拘らず、社会がこのように混乱するのは、仕事を単に金儲けの手段と考え、人はどうでも自分さえよければいいと思うのが、その原因です。ですから、今日の多くの人びとは正しく仕事をしているとはいえないでしょう。
일을 하고, 일하는 것(仕事をし、働くこと)은 남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일을 하고, 취업을 하는 것이 사랑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이렇게 혼란한 것은, 일을 간단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며, 남은 어떻게 되어도 나만 좋으면 좋다고 하는 생각하는 것이, 그 원인(原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올바르게 일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正業の在り方は、この地上界の調和に役立てることであり、その基礎は愛であり、奉仕の心なのです。
정업(正業)의 본연의 모습은, 이 지상계(地上界)의 조화(調和)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 기초는 사랑(愛)이며, 봉사(奉仕)하는 마음(心)인 것입니다.
戦後の企業は労使の対立が深まり、常に争いと混乱が絶えません。一部の指導者や扇動者は、文明の発達と社会の進歩は、こうした闘争の中から生まれるとみています。が、とんでもないことです。人間は、文明や科学技術のドレイではありません。人間のための文明や社会の進歩であって、進歩のために人間が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闘争はどこまでいっても闘争であり、平和はきません。平和のない文明ならそんな文明は必要ありません。
전후(戦後)의 기업은 노사의 대립이 심해져서, 항상 분쟁과 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일부의 지도자(指導者)나 선동자(扇動者)는, 문명의 발달과 사회의 진보는, 이러한 투쟁 속에서 탄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당찮은 생각입니다. 인간은, 문명이나 과학기술의 도레이(奴隸)가 아닙니다. 인간을 위한 문명이나 사회의 진보이며, 진보(進歩)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투쟁(鬪爭)은 어디까지나 투쟁이며, 평화는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문명이라면 그런 문명(文明)은 필요없습니다.
労使の対立が激しい企業ほど不調和であり、やがて倒産へと発展してゆきます。企業が倒産すれば労使ともども生活に困り、家族は路頭にさ迷うことになります。
노사의 대립이 결렬한 기업만큼 부조화하며, 이윽고 도산(倒産)으로 발전해 갑니다. 기업이 도산하면 노사(勞使)도 모두 함께 생활에 곤란해지고, 가정은 길거리를 헤매게 됩니다.
労使の対立はどうして起こるか、それは、組合も使用者もたがいに自己主張してゆずらず、それぞれが自己保存の中に埋没しているからです。使用者はできるだけ賃金を払うまいとし、労働者はより以上の賃金を獲得しようとします。これでは両者の争いはエスカレートせざるを得ません。労使が裸になり、常に対話の姿勢を持つならば、こうした争いというものは起きません。
노사의 대립은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조합도 사용자도 서로 자기주장(自己主張)만 하며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보존(自己保存) 속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는 가능한 한 임금(賃金)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고, 노동자는 그 보다 더 많은 임금(賃金)을 획득하려고 합니다. 이래서는 양자의 분쟁(다툼)은 에스컬레이트하지(격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사(勞使)가 발가벗고, 항ㅅ항 대화의 자세를 갖게 되면, 이런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経済社会がどんなに合理化されたとしても、お互いに汗して働かなければ、生活に必要な物、つまり衣・食・住は得られないのです。経済の合理化とは分配の公平にあるわけですが、分配の公平はまず人間尊重の対話からであり、対話の前提は自己保存による自己主張をまず捨て、人間本来の目的と使命を自覚したところからはじまります。物事は対立を通しては、決して満足な結果は得られません。
경제사회가 아무리 합리화되었다고 해도, 서로 땀을 흘리며 일하지 않으면, 생활에 필요한 물건, 즉 의식주(衣食住)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제의 합리화(合理化)란 분배(分配)의 공평(公平)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분배의 공평은 우선 인간 존중의 대화에서 시작되며, 대화의 전제(前提)는 자기보존에 의한 자기주장을 우선 버리고, 인간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자각(自覺)한 데에서 시작됩니다. 매사(物事)는 대립을 통해서는, 결코 만족스런 결과는 얻을 수 없습니다.
こうした意味で、まず、人間とは何か、人間は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ということを理解すること必要です。人間は経済のドレイではありません。人間は己の魂を磨くために、この世に生まれてきています。それぞれの職業、役割というものは、その時々の自分の魂を磨く材料、環境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る必要があるでしょう。
이러한 의미(意味)에서, 우선,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경제의 도레이(노예)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있습니다. 각자의 직업(職業), 역할(役割)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재료(材料)이며, 환경(環境)이라고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すでに、これまで既述してきたように、人間の魂は転生を輪廻し、ある時は王として、君臨し、ある時は一介の農夫で身を粉にして働き、ある時は医者として人々を救って来ました。そうして今世は一介の労働者であり、経営者の立場に立っているわけであり、そうした立場は、己の魂をより広く、豊かに育ててゆくためのものであリ、対立や争いにあるのではないのです。
벌써, 여기까지 기술(既述)한 바와 같이, 인간의 영혼은 전생(轉生,환생)하며, 어떤 때는 왕(王)으로, 군림하고, 어떤 때는 일개(一介)의 농부(農夫)으로 고생을 마다않고 전력을 다해 일하고, 어떤 때는 의사(醫師)로서 사람들을 도와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今世)에는 노동자(勞動者)이며, 경영자(經營者)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며, 그러한 입장은, 자신의 영혼을 보다 넓고, 관대(느긋, 풍요)하게 길러 가기 위한 것이며, 대립이나 분쟁(다툼,싸움)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人間はみな兄弟であり、友です。
인간은 모두 형제(兄弟)이며, 친구(友)입니다.
こうなりますと、一つのパイ(物)をめぐって相争うことの愚が理解され、たがいに愛を持って、助け合う、他を生かすことの意義を見出すことでしょう。
이렇게 되면, 한 개의 파이(物, 물건)을 둘러싸고 상쟁하는 것의 어리석음이 이해되어,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돕는, 남을 살리는 것의 의의(意義)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 개의 음식물인 파이(pie)를 둘러싸고 상쟁한다(一つのパイ(物)をめぐって相争うこと)"는 "한 개의 물건(パイ(物))을 차지하기 둘러싸고 상쟁한다" ★
こうした意味から正業とは、次の三つの目的から成り立っています。
이러한 의미에서 정업(正業)이란, 다음의 세가지의 목적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一、魂の修行
一、영혼의 수행
一、地上界の調和
一、지상계의 조화
一、奉仕
一、봉사
すなわち、人間の魂(心)は転生を輪廻して行くものですから、現在の環境、立場は自分の魂を磨いてゆく修行の場です。
즉, 인간의 영혼(魂)(마음(心))은 전생(轉生,환생)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 입장은 자신의 영혼(魂)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수행(修行)의 장(場)입니다.
地上界の調和とは、そこに住む人びと、それぞれが、職業を持ち働き、自分の生活を保持し、人びとの生活を維持す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つまり、働くことは地上の調和に役立っているわけです。
지상계(地上界)의 조화(調和)란, 그곳에 거소를 정해 거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그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각자가, 집업을 가지고 일하며, 자신의 생활을 보지(保持,유지)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維持)한다고 하는 것인 것입니다. 즉, 일하는 것은 지상의 조화(調和)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次に、その調和というものは、各人が人びとに奉仕するという愛の心が根底に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調和は愛の心によって支えられるわけです。
다음으로, 그 조화(調和)하고 하는 것은, 각자(各人)가 사람들에게 봉사(奉仕)한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이 근저(根底)에 없으면 안 되며, 조화는 사랑의 마음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발췌】
日本人は、人間は神の世界から天孫降臨した神の子であると知っていた。神が天地を創造された。しかし神は大きな部分を創造され、小さな部分は神の子である人間にその創造を任された。即ち「天業恢弘」(てんぎょうかいこう)(神さまの仕事を手助けして、それをすべてに押し広めて神さまの仕事を完成させる)が人間の目的であると考えてきた。この考え方が日本民族の労働観となっている。即ち、仕事をすることは神さまの仕事の手伝いをすることであって、仕事をすることそのことが喜びで楽しみなのであると考えるのである。
일본인(日本人)은, 인간은 신(神)의 세계에서 천손강림(天孫降臨)한 신(神)의 자녀(子)라고 알고 있었다. 신(神)이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셨다. 하지만 신(神)은 큰 부분을 창조하시고, 작은 부분은 신(神)의 자녀(子)인 인간에게 그 창조(創造)을 맡겼다. 즉 「천업회홍[(天業恢弘,텐교우카이코우)]」((하느님의 일을 거들고, 그것을 모든 것에 널리 퍼뜨려 하느님의 일을 완성시킨다))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 사고방식이 일본민족의 노동관(勞動觀)으로 되어 있다. 즉, 일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도와 주는 것이며, 일을 한다는 그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釈尊が説かれた正業(正しく仕事をする)の根本的精神は、それぞれの人々が仕事を通して自分の生活を維持し、人々の生活を支え、そうしてこの地上界を調和させることにあった。働くことは「側(はた)をラクにする」ことだとよくいわれるが、一人でなんでもできるわけはないのだから、それぞれが分業して助け合ってゆくこと、即ち働くことは奉仕であり愛の行為なのである。
석존(釋尊)이 설명하신 정업((正業))((올바르게 일을 한다))의 근본적인 정신(精神)은, 저마다의 사람들이 일을 통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維持)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지탱)하고, 그렇게 해서 이 지상계를 조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일하는 것은 「옆 사람을 즐겁게 한다((側(はた)をラクにする))」는 것이라고 자주 말을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분업(分業)을 해서 서로 도와 가는 것, 즉 일하는 것은 봉사(奉仕)이며 사랑의 행위(行為)인 것이다.
釈尊の教え
[석존의 가르침]
「財を求めるということは、単に意欲だけでできることではない。それぞれの職業についての知識、訓練が必要であり、初めに技術を学び、後に財物を求むべし」
「경제 활동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돈(물건)((財))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財を求めるということ))은, 단순히 의욕(意欲)만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직업에 대한 지식, 훈련이 필요하며, 처음에 기술을 익히고, 나중에 재물(財物)을 손에 넣어야 한다((財物を求むべし))」
人はいかにして財を得るか、という問いに対しては、
사람은 어떻게 해서 재물(財)을 얻을까, 라고 하는 물음(問い,문제)에 대해서는,
「適宜に事を為し、忍耐強く努力するものは財を得る。正直の徳を守ることによって信用を得、施与することによって交友を結ぶ」
「적당(適宜)히 일을 하고, 인내하고 강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재물을 얻는다. 정직의 덕(徳)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신용을 얻고, 남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것((施與すること))에 의해서 교우(交友)를 맺는다」
釈尊は、祈祷をすれば商売が繁盛するというようなことは全く説いてはいられない。なにもしないで祈ってさえいれば金儲けができるというようなことをいわれたのではない。
석존(釋尊)은, 기도(祈禱)를 하면 사업(장사)가 번성(繁盛)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전혀 설명하고 계시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まことに、極めて平凡に、当たり前であることを当たり前に、まずなんの仕事をするか、まずその仕事に対する知識と技術を身につけて、一生懸命に努力して信用を得れば自然に財を得ると教えていられる。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게,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먼저 어떤 일을 하든지, 우선 그 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몸에 익히고, 열심히 노력해서 신용을 얻으면 자연히 재물(財)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正業」(正しく仕事をする)とは、全くそうすることである。
「정업(正業)」(올바르게 일을 한다)이란, 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正しく仕事をすることは悟りに至る道の一つである。正しく仕事をすれば心が安らかになるというのが釈尊の教えである。
올바르게 일을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道)의 하나이다. 올바르게 일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는 것이 석존(釋尊)의 가르침이다.
最近は、人間の欲望に奉仕し、人の欲望を利用して金儲けをする仕事がふえてきた。いわゆる第三次産業といわれるものの中にそういうものがある。そういう仕事をしている人は一般の仕事をしている人以上に儲けた金の使い道を考えないといけない。
최근에는, 인간의 욕망에 봉사(奉仕)하고, 사람의 욕망을 이용(利用)해서 돈을 버는 일이 늘어났다. 이른바 제3차 산업(第三次産業)이라고 불리우는 것 중에 그러한 것이 있다.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일반의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 이상으로 돈을 번 돈의 용도(사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仕事の中における人間観 ・・・ 人間観には、「性善説」と「性悪説」がある。日本人の労働観、人間観はもともと「性善説」であった。日本人の「大福帳」という記帳の仕方は性善説に基づいているが、外国の複式簿記は、どこで間違ったか、悪い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という仕方である。
일을 하는 중에 있어서의 인간관(人間觀) ・・・인간관(人間觀)이란, 「성선설(性善說)」과「성악설(性惡說)」이 있다. 일본인의 노동관(勞動觀), 인간관(人間觀)은 본래 「성선설(性善說)」이었다. 일본인의 「대복장(大福帳)((상가에서 매매의 기장(記帳)을 한 원장(元帳))」이라고 하는 (장부를) 기장(記帳)하는 방법은 성선설(性善說)에 말미암은 것이지만, 외국의 복식부기(複式簿記)는, 어디에서 잘못된 것인지, 나쁜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고 하는 방식이다.
★복식부기((複式簿記)) ①모든 거래를 꾸는 쪽 요소와 빌려 주는 쪽 요소로 분해하여 각 요소를 계속적‧조직적으로 기록함으로써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유도적으로 작성할 수 있도록 짜여진 부기
昔の日本人は借金に担保は取らなかったし、借用証書も書かなかった。借金を返せなかったら「満座の中でお笑い下さるべく候」であった。日本人は「恥」ということを大事にした。恥をかくことは人間失格を意味していた。明治維新になって西洋式の「性悪説」による」労働観、経済観が日本に入ってきた。
옛날의 일본인은 빌린 돈(借金, 빚)에 담보(擔保)는 잡지 않았고, 차용증서(借用證書)도 쓰지 않았다. 돈을 꾼(借金) 것을 갚지 못하면「좌중 앞에서 웃어 줘야 한다((좌중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한다))(満座の中でお笑い下さるべく候」고 했다. 일본인은 「수치(恥, 창피, 치욕,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창피를 당하는 것은 인간 실격을 의미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되어 서양식의 「성악설(性悪説)」에 의한」노동관(勞動觀), 경제관(經濟觀)이 일본에 들어 왔다.
その西洋式の労働観、経済観、人間観が百二十年間経って修正され、日本人が古来持ってきた、そして釈尊が説かれた労働観、経済観、人間観に復帰しようとしている。
그 서양식의 노동관, 경제관, 인간관이 120년이 사이를 거치며 수정(修正)되어, 일본인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그리고 석존(釋尊)이 설명하신 노동관, 경제관, 인간관으로 복귀(復歸)하려고 하고 있다.
時代は変わりつつある。
시대는 변하고 있다.
「八正道」の最後は「正定」「禅定」である。正しく瞑想する、正しく禅定をするための準備段階として「正業」(正しく仕事をする)が必要であるのである。時代は変わりつつある。古い考え方は通用しなくなる。だが神理は永遠に古くして、永遠に新しい。
「팔정도(八正道)」의 마지막(最後)은 「정정(正定)」「선정(禪定)」이다. 올바르게 선정(禪定)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정업(正業)」((올바르게 일을 한다))이 필요한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은 통용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신리(神理)는 영원히 오래되어도, 영원히 새롭다.
働くということは、人間としての義務であり、同時に、仕事を通して必要なものを提供してゆく慈愛の行為である。
일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이며, 동시에, 일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제공해 가는 자애(慈愛)의 행위(行為)이다.
資本主義思想、唯物論の影響によって、仕事を単に金儲けの手段と考え、仕事をせずに金儲けしよう、遊んでいて食いたいなどと考えて財テクに走ったりしているが、そういう考えが社会を混乱させているのである。だから、現在の多くの人々は正しく仕事をしているとはいえない。
자본주의 사상, 유물론(唯物論)의 영향에 의해서, 일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며,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며, 놀려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하며 재테크에 빠지거나 하고 있지만, 그러한 생각이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많은 사람들은 올바르게 일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正業のあり方は、この地上界の調和に役立てることであり、その基礎は慈愛、奉仕で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정업의 본연의 모습은, 이 지상계의 조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그 기초는 자애(慈愛), 봉사(奉仕)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 完 -(끝)
五、正命 ・・・ 正しく生活すること
오, 정명 ・・・ 올바르게 생활을 하는 것
・人生の目的と意義を知った生活
인생의 목적과 의의를 안 생활
・自分を正し、業(カルマ) の修正を図る
자기 자신을 바로잡고, 업(業)(카르마)의 수정을 도모한다.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 전체】
「正しい生活」とは、人生の目的と意義を知った生活であろう。人間の生活は、大自然が調和されているように、調和にあるはずだ。助け合い、補い合い、笑いのある生活でなければなるまい。それにはまず己自身の調和をつくってゆく。自分の長所をのばし、短所を修正してゆくものだ。自分が円満になれば周囲もまるくなるはずである。自己をみつめる厳しい態度をはずして、正しい生活はあり得ないものだ。
「올바른 생활(正しい生活)」이란, 인생의 목적과 의의(意義)을 안 생활인 것이다. 인간의 생활은, 대다졍의 조화(調和)되어 있는 것처럼, 조화에 있는 것이다.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며, 미소가 있는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는 우선 자기 자신의 조화(調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수정해 가는 것이다. 자신이 원만해지면 주위도 원만해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엄격한 태도를 빠뜨리고서, 올바른 생활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본문 전체】
正命とは文字通り、正しく生活する事です。正しい生活を送るには、まず自身の業(カルマ)の修正、短所を改めることです。
정명(正命)은 문자 그대로,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생활을 보내는 데에는, 우선 자기 자신의 업(業)(카르마)의 수정(修正), 결점(단점)을 고치는 것입니다.
人間は誰しも、長所と短所の両面を持っています。長所と短所というものは、光と影のようなもので、性格が片寄ったときに、長所が短所になり、短所が長所に変化します。
인간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결점)의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과 단점이라고 하는 것은, 빛과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성격이 한 쪽으로 치우쳤을 때에,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으로 변화합니다.
信長は非常に気短かな男だったようです。しかしその短気が決断となって現われたときは、神出鬼没の戦術に変化し、戦国の世を生き抜く絶大なエネルギーになったようです。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상당히 참을성이 없는(성급한) 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급한 성격이 결단이 되어 나타났을 때는,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전술(戦術)로 변화해서, 전쟁으로 매우 혼란한 세상(戰國の世)에서 고난을 참고 살아 나가는 월등히 큰 에너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このたとえはあまり感心しませんが、長所と短所というものは紙一重であり、それは、紙の表と裏のようなものといえるでしょう。
이 비유(比喩)는 별로 탐탁하지 않지만, 장점과 단점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이며, 그것은, 종이의 겉과 속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そうした紙一重の性格をどうすれば長所に変えることができるか、あるいは長所とは何か、短所とはどういうものか、となりますと、短所は自分の心をさわがし、人の心をも傷つけるものであり、長所は、自他ともに調和をもたらす性格といえるでしょう。
그러한 종이 한 장의 성격을 어떻게 하면 장점으로 바꿀 수 있을까, 혹은 장점이란 무엇인가, 단점이란 어떠한 것인가, 라는 것이 되면, 단점은 자신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고, 남의 마음에도 역시 상처를 주는 것이며, 장점은, 자타가 모두 조화(調和)를 가져오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長所を伸ばし、欠点を修正することによって、自身の想念と行為はもとより、自身の周囲を明るく導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장점을 살리고, 결점을 수정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상념과 행위는 물론, 자신의 주위를 밝게 이끌 수가 있는 것입니다.
私たちのこの世の目的は、この地上に仏国土・ユートピアをつくることです。それには正しい生活とを営まねばなりません。正しい生活は、まず自分自身の調和からはじめねばなりません。自分自身が調和を保たなければ、自分の周囲も調和に導くことは出来ません。
우리들의 이 세상의 목적은, 이 지상에 불국토 이상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올바른 생활을 또한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바른 생활은, 우선 자기 자신의 조화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조화를 유지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위도 조화로 이끌 수 없습니다.
欠点を修正するにはどうするか。それには第三者の立場から、自分の心を、毎日の思うこと考えること、行為を、反省することです。
결점을 수정하는 데는 어떻게 하는가? 그것에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매일 생각하는(상상하는) 것과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을, 행위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본문 전체】
私達に肉体は、人生航路を渡る舟であり、この船の支配者は意識すなわち魂である。この魂は、神仏の子としての本性であり、私達は神の体の中にいるのである。この現象界において、永い転生輪廻の中で造り出してきた業(かるま)の想念は、私達の意識の中に記録されている。それを、神の子としての正しい想念によって調和することが修行なのである。
우리들의 육체는, 인생항로를 건너는 배(舟)이며, 이 배의 지배자는 의식(意識) 즉 영혼(魂)이다. 이 영혼(魂)은, 신불(神佛)의 자녀(子)로서의 본성(本性)이며, 우리들은 신(神)의 몸(體) 속에 있는 것이다. 이 현상계에서, 영원한 전생윤회 속에서 만들어 내어 온 업(業)(카르마)의 상념(想念)은, 의식 속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것을, 신(神)의 자녀(子)로서의 올바른 상념에 의해서 조화(調和)하는 것이 수정(修行)인 것이다.
業想念とは、私達が常に心の中に想像している不調和な自己保存、自我我欲の姿であり、過去世においても持ち続けていたものである。それは、行為につながって行くもので、自身が反省することによって見いだすことのできる欠点である。また調和もできるものなのである。
업상념(業想念)이란, 우리들의 항상 마음속에 상상(想像)하고 있는 부조화한 자기보존, 자아아욕의 모습이며, 과거세(過去世)에서도 지속되어 있던 것이다. 그것은, 행위로 이어져 가는 것이며, 자기 자신이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결점이다. 또한 조화(調和)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인 것이다.
人間は、眼耳鼻舌身意の六根によって惑わされる。過去世の悪い業の種も、そうした惑いから起きる。心は私達の肉体を支配している意識の中心で、自己には絶対に忠実であり、嘘をつくことはできない。ところが人間は、他人には都合が悪いと嘘をつく。そうした自己保存によって、より大きい業を造り上げてしまうのである。
인간은, 눈귀코혀몸뜻(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에 의해서 현혹된다. 과거세(過去世)의 나쁜 업의 씨앗(種)도, 그러한 현혹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우리들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意識)의 중심(中心)이며, 자기 자신에게는 절대로 충실하며,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타인에게는 형편(사정)이 나쁘면 거짓말을 한다. 그러한 자기보존에 의해서, 보다 큰 업(業)(카르마)를 만들어 내어 버리는 것이다.
私達は、眼で見た現象面のみで判断をくだしてはいけない。正しく見る心の修行、そうした構えで、的確な判断をし、中道の考えの中から出た調和の心によって結論を出すことが必要なのだ。
우리들은, 눈으로 본 현상면만으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올바르게 보는 마음의 수행(修行), 그러한 자세로, 정확(的確)한 판단을 하고, 중도(中道)의 사고(思考) 속에서 나온 조화(調和)로운 마음에 의해서 결론을 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たとえ人の噂を耳にしても、自身でその原因と結論を判断するような生活が必要であり、肉体の五官のみで判断してはならない。肉体的な諸現象のみでは、正しい生活をす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る。
설령 남의 이야기(소문,噂)을 듣더라도, 자기 스스로 그 원인과 결론을 판단하는 생활이 필요하며, 육체의 오관(五官, 눈귀코혀몸)만으로 판단해서 안 된다. 육체적인 모든 현상만으로는, 올바른 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正しい神理に適う、各人の心の悟りが社会集団を構成し、その中から調和のとれた相互関係が生まれてくるのである。正しい生活の中で、対人的な嘲笑や、恨み、妬み、そしり、怒りなどの思いは滅せられて行く。大自然の無限の慈悲に対しての報恩の心と行為が、平和な安らぎの光を、人々の上に現象化して行くのである。
올바른 신리(神理)에 맞는, 각자의 마음의 깨달음이 사회집단을 구성하고,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상호관계가 태어나는 것이다. 올바른 생활 속에서, 대인적(對人的)인 조소(嘲笑)나, 원망, 질투, 비난(비방), 분노 따위의 생각은 없앨 수 있게 되어 간다. 대자연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보은의 마음과 행위가, 평화로운 평안의 빛을, 사람들 위에 현상화 해 가는 것이다.
神仏は、万象万物を、すでに人類修行の場として与えているのであるから、祈るよりは感謝の生活を具現することが大切なのである。己自身の魂が、実践行為による努力をしない限り、神理に適った修行はできない。すなわち修行は、一秒一秒の連続の中の正しい生活の中に存在していることを悟らなくてはならない。신불(神佛)은, 만상만물을, 이미 인류 수행의 장(場)으로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보다는 감사하는 생활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魂)이, 실천행위에 의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신리(神理)에 맞는 수행은 할 수 없다. 즉 수행(修行)은, 1초 1초의 연속 속에 올바른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神社仏閣に行って神仏に祈ることが信仰ではないのだ。祈りの心を持ち続けることが本当の信仰心であり、神仏の心を己の心として生活する中に初めてこの心の尊厳を悟り、心の眼が開かれ、観自在の力を発揮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신사(神社佛閣)에 가서 신불(信佛)에게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닌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을 지속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심(信仰心)이며, 신불(神佛)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해서 생활하는 중에서 비로소 이 마음의 존엄을 깨닫고, 마음의 눈을 떠서, 관자재(觀自在)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科学者が科学を通じ、芸術家が芸術を通じ、文学者が文学を通じ、スポーツマンがスポーツを通じて得た神理も、神に通じるものであり、そうした生活の中で人間らしく調和されてこそ本当の神理であることを悟らなくてはならない。
과학자가 과학을 통해서,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서, 문학자가 문학을 통해서, 스포츠맨이 스포츠(운동 선수가 운동)를 통해서 얻은 신리(神理)도, 신(神)에게 통하는 것이며, 그러한 생활 속에서 인간답게 조화되어야만 비로소 참된 신리(神理)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学問化した哲学的宗教は実践に乏しい。神理を悟らずに座禅をしても、煩悩を滅するために肉体行をしても、無意味であり、神理を悟って実行する中に本当の生活がある。
학문화 된 철학적 종교는 실천(實踐)이 부족하다. 신리(神理)을 깨닫지 않고 좌선(坐禪)을 해도, 번뇌(煩惱)를 없애기 위해서 육체수행(肉體行)을 해도, 무의미하며, 신리(神理)를 깨닫고 실행(實行)하는 중에서 진실한 생활이 있다.
その神理は、自分自身の生活環境の中に存在しているのであり、その姿こそ本当の信心である。
그 신리(神理)는, 자기 자신의 생활 환경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 모습이야말로 참된 신심(信心.믿음, 신앙심)이다.
生活と結びつかない信仰は、すべて宗教としての存在価値はない。それは、正法を悟っていない人々の行為といわねばならない。
생활과 결부되어 있지 않은 신앙은, 전부 종교로서의 존재 가치는 없다. 그것은,정법(正法)을 깨닫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すべて不幸の原因は己自身にあり、生活の不調和がもたらしたものであリ、責任は他にはない。その原因を追究し、その根本をとり去る、心の反省の中から前進があるのである。
모든 불행(不幸)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생활의 부조화가 가져온 것이며, 책임은 다른 사람(他)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을 추구(追究, 근본까지 깊이 들어가 연구하는 것)하고, 그 근본을 없애는, 마음의 반성 속에서 전진(前進)이 있는 것이다.
毎日の生活が調和された中には、常に神仏の光によって保護されるものである。そしてそこには不幸は訪れてはこない。それは、正しい生活の実践の中に積み重ねられて行くものなのである。
매일의 생활이 조화된 중에서는, 항상 신불(神佛)의 빛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올바른 생활의 실천 속에 쌓아 올려져 가는 것인 것이다.
4.心行の言魂より 【 全文 】
4.심행의 말씀에서 【본문 전체】
正しい生活は、右にも左にも片寄らない中道にあります。中道とは仏教でいう色心不二です。色心不二の生活は、調和ある精神的、肉体的生活を意味する。人間の生活は、そのどちらに片寄っても不調和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たとえば、煩悩を滅却したいとして肉体業に打ち込み、滝に打たれ、断食をし、己の肉体をないがしろにすると、やがて健康を損ない、自分の心をも見失ってゆきます。自分を失うとは魔に犯され、普通の生活ができなくなる事です。
올바른 생활은,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에 있습니다. 중도(中道)란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입니다. 색심불이의 생활은, 조화 있는 정신적, 육체적 생활을 의미(意味)한다. 인간의 생활은, 그것이 어느 쪽으로 치우쳐도 부조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데, 번뇌(煩惱)를 멸각(滅却)하고 싶다고 해서 육체(肉體)적인 일(業)에 열중하고, 폭포수(瀧)를 맞으며, 단식(斷食)을 하며, 자신의 육체를 소홀히 하면, 이윽고 건강을 해치고, 자신의 마음도 역시 놓치게 되어 갑니다(자신의 마음도 역시 지금까지 보였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어 갑니다).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악마(魔)에게 침범당해서, 보통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肉体行は、精神のみにウエイトを置き、肉体を無視するところにあります。しかし、その精神についても正しい精神のあり方がある、正法を基準としたものではないので、それ自体にも問題があることはもちろんです。また、精神を無視し肉体中心の生活に比重が傾いてきますと、今日のような混乱した社会ができ、家庭も、人とのつながりも瓦解してゆきます。
육체수행(肉體行)은, 정신(精神)만에 무게를 두고, 육체를 무시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에 대해서도 올바른 정신의 본연의 모습이 있다, 정법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정신을 무시하고 육체 중심의 생활에 비중(比重)이 기울기 시작하면, 오늘과 같은 혼란한 사회가 되어, 가정도, 사람과의 관계도 와해(瓦解)되어 갑니다.
では正しい生活とはどうすればよいものか、
그렇다면 올바른 생활이란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それは八正道の目的である中道を物差しとして、己の業(カルマ)を修正し、中道に適った生活をするということです。
그것은 팔정도의 목적인 중도를 척도(物差)로 해서, 자기의 업(業)(카르마)를 수정하고, 중도에 맞는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業は私たちの性格、性質の上に、その人の短所という形で現われています。人の短所は自分自身にも他人に対しても、よい結果を及ぼしません。怒り、愚痴、優柔不断、独善、気取り、強欲、中傷、そねみ、粗野、多弁、排他、増上慢、引っ込み思案、自閉、出しゃばり、憎しみ、怠惰・・・。こうした性格は自分自身を孤立させ自分の運命を不幸にして行きます。
업(業)은 우리들의 성격, 성질의 상에, 그 사람의 단점이라고 하는 형태(形)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단점은 자기 자신도 타인에 대해서도, 좋은 결과를 주지 않습니다. 분노(怒り,노여움, 화가 치밈), 푸념(愚痴, 게정, 넋두리), 우유부단(優柔不斷), 독선(獨善), 거드름(気取り,허세), 탐욕(強欲, 탐나서 싫증나는 것을 모르는 욕심), 중상(中傷,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여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 시기(そねみ, 질투) 、조야(粗粗, 말이나 거동 따위가 거칠고 상스러운 것. 노골적이며 예의가 없는 것), 다변(多辯,말이 많음),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排他,배타). 자만함(増上慢,증상만)、소극적임(引っ込み思案, 자진해서 일을 하거나 남의 앞에 나가거나 하는 기력이 모자라는 것 또는 그러한 태도나 성질), 자폐(自閉,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내면 우위의 현실 이탈을 보이는 병적인 정신상태),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 또는 그러한 사람(出しゃばり), 미움(憎しみ, 증오), 게으름(怠惰, 나태, 태만)・・・등등이다. 이러한 성격은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신의 운명(運命))을 불행(不幸)하게 해 갑니다.
正しい生活は、まず自分の短所を長所に変えてい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長所とは、明るく朗らかで、素直であり、人と協力し、助け合い、補い合ってゆく調和の生活です。人間はみなこうした心を持ち、そうした性格を持っているのですが、環境、教育、思想、習慣などの影響を受けてさまざまな業を作り出してしまっています。業が身につくと、業自体が回転を始めるため、怒りの場面にぶつかると、習慣的についカッとなってしまいます。
올바른 생활은, 우선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장점은, 밝고 명랑하며, 솔직하며, 사람과 협력하고,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해 가는 조화로운 생활입니다. 인간은 모두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만, 환경, 교육, 사상, 습관 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업(業)(카르마)를 만들어 내어 버리고 있습니다. 업(業)이 몸에 배면, 업 자체(業自體)가 회전(回轉)을 시작하기 때문에, 분노의 장면(場面)에 부딪치면, (참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그만 벌컥 화를 내어 버리고 맙니다.
つまり、業というものも常にリンネします。”わかっちゃいるけどやめられない”というのが業なのです。人の欠点の三分の二は今世のもの、残り三分の一は過去世の業といってもいいでしょう。したがって三分の一の業は、反省してもなかなかその原因をつかまえることがむずかしいものです。
즉, 업(業)(카르마)라고 하는 것도 항상 윤회(輪廻)합니다. ”알고 있지만 그만 두지 못한다( わかっちゃいるけどやめられない ”)라고 하는 것이 업(業)인 것입니다. 사람의 결점의 3분의 2는 현재의 세상(今世)의 것이며, 나머지 3분의 1은 과거세(過去世)의 업(業)(카르마)라 해도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3분의 1의 업(業)은, 반성을 해도 좀처럼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しかし、今世の三分の二の業が、これらの影響をうけて働いていますので、その三分の二の業を修正する事によって、修正することが可能です。己の欠点を正す事は、己の安心につながる事であり、己の心が安心し明るくなれば、自分の周囲も明るくなります。正しい生活は、こうして、まず自分自身から修正して初めて可能なのですが、それには八正道の規範である「正定」による正しいい反省が重要になってきます。
하지만, 현재의 세상(今世)의 3분의 2의 업(業)이, 이러한 영향을 받아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3분의 2의 업(業)을 수정(修正)하는 것에 의해서, 수정하는 것이 가능(可能)합니다. 자신의 결점(缺點)을 고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안심(安心)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자기 마음이 안심(安心)하고 밝아지면, 자신의 주위도 밝아집니다. 올바른 생활은, 이렇게 해서, 우선 자기 자신부터 수정(修正)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는 팔정도(八正道)의 규범(規範)인 「정정(正定)」에 의한 올바른 반성이 중요하게 되어 옵니다.
中道に反する生活は、すべて自己保存という想念行為が原因であり、自分中心のエゴ、原罪にあるわけです。原罪とは肉体五官による六根、迷い、煩悩にあるのですから、まず六根を清浄にする反省の生活が、自分の業を修正することになります。このように正命の目的は、精神的、肉体的な調和をめざし、業と化したさまざまな原罪(自己保存の想念)を正すことにあるわけです。
중도(中道)에 반하는 생활은, 이미 자기보존(自己保存)이라고 하는 상념행위(想念行爲)가 원인이며, 자기중심(自分中心)의 에고(이기심), 원죄(原罪)에 있는 것입니다. 원죄(原罪)란 육체 오관(肉體 五官)에 의한 육근(六根), 마음이 흔들림(迷い, 미망), 번뇌(煩惱)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육근(六根)을 청정(清浄)하게 하는 반성의 생활이, 자신의 업(業)을 수정(修正)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정명(正命)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인 조화(調和)를 목표로 하고, 자신의 업(業)으로 변한 다양한 원죄(原罪)(자기보존의 상념(想念))을 바로잡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발췌】
人生の目的を知ること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
「正しい生活」とは、人生の目的と意義を知った生活である。われわれは、なんらかの目的を持って生活している。目的をもたないで生活している人は一人もいないであろう。人間は夜が明けると働き出す。なんのために働くのであろうか。食うためか、金のためか、家をつくるためか、名誉か、権力か。なんらかの目的がある筈である。
「올바른 생활」이란, 인생의 목적과 의의(意義)을 안 생활이다. 우리들은, 무언가의 목적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목적을 갖지 않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날이 새면 일하기 시작한다. 무슨 목적으로 일하는 것일까? 먹기 위해선가? 돈 때문인가? 집을 짓기 위해선가? 명예 때문인가? 권력 때문인가? 무언가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大自然は調和されている。人間は大自然と調和し、人と人と調和し、そのために、お互いに助け合い、補い合って、明るく笑い合って生活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
대자연은 조화되어 있다. 인간은 대자연과 조화하고, 사람과 사람과 조화하고, 그 때문에, 서로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고, 밝게 서로 웃으며 생활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過去世からの三分の一の業の原因はなかなかはっきりつかめなくても、その業の傾向性は今生にも必ず出てくるものであるから、今生でつくった三分の二を反省してゆけば、過去世の三分の一も自然に修正されてゆく事になる。自分の欠点が修正できると、心が広く明るくなり、「やれた」「やった」という魂の充実感を感じて心が安らかになる。心が安らかになってくると、自然に周囲も明るくなる。周囲の人も変わってくる。こうして、正しい生活は、それまでに習得したよいことを、どしどし積極的に実践して前進してゆく中で、自分自身の業の修正を図ってゆくことである。反省ということで多くの人が間違いを犯しやすいのは、欠点、業の修正にばかり気を取られて、よいことをどしどし実践して前進することを怠ることである。
과거세(過去世)에서 3분의 1의 업(業)의 원인은 좀처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해도, 그 업(業)의 경향성(傾向性)은 이승(今生)에서도 반드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今生)에서 만든 3분의 2를 반성해 가면, 과거세(過去世)의 3분의 1도 자연히 수정되어 가게 된다. 자기 자신의 결점이 수정되면, 마음이 넓고 밝아지며, 「해냈다(やれた)」「해냈어(やった)」라고 하는 영혼(魂)의 충실감(忠實感)을 느끼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안해지게 되면, 자연히 주위도 밝아진다. 주위의사람도 차츰 바뀌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올바른 생활은, 그때까지 습득(習得)한 좋은 것을, 계속 적극적으로 실천해 가는 중에서, 자기 자신의 업(業)의 수정을 도모해 가는 것이다. 반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잘못을 범하기 쉬운 것은, 결점(缺點), 업(業)(카르마)의 수정(修正)에만 정신을 빼앗겨서, 좋은 것을 계속 실천해서 전진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愛はすべてを浄化する」「愛をもってすれば、人をも生かし、自分も生きる」。正命(正しく生活する)の目的は、精神的、肉体的な調和をめざして、業と化したさまざまな自己保存の原罪を、いかにして正してゆくかにある。
「사랑은 모든 것을 정화한다(愛はすべてを浄化する)」「사랑을 가지고 하면, 남도 또한 살리고, 자기 자신도 살린다(愛をもってすれば、人をも生かし、自分も生きる)」。정명(正命)(올바르게 생활한다))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인 조화(調和)를 목표로 해서, 업(業)으로 변한 다양한 자기보존(自己保存)의 원죄(原罪)를, 어떻게든 해서 바로잡아 가는가에 달려 있다.
人間は、いろいろな業を持って生まれてくる。長所もあれば短所もある。長所は伸ばし、短所は修正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
인간은, 여러 가지 업(業)을 가지고 태어난다. 장점도 있으면 단점도 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수정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단점은 수정해야 한다).
業というのは習慣性であり傾向性であるから、「金に対してはどうか」「女に対してはどうか」「地位・名誉に対してはどうか」などと人間が過ちを犯しやすい事象について反省をしてゆくことであり、今生でのあり方を正しく修正すればよいということになる。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습관성(習慣性)이며 경향성(傾向性)이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는 어떤가?(金に対してはどうか)」「여자에 대해서는 어떤가?(女に対してはどうか)」「지위・명예에 대해서는 어떤가?」 등과 인간이 잘못을 범하기 쉬운 사상(事象, 사실과 현상)에 대해서 반성을 해 가는 것이며, 이승(今生)에서의 본연의 모습을 올바르게 수정하면 좋아지게 된다.
右に左に揺れ動く心の中で霊は向上し成長してゆく。自分で自分をほめ、自分で自分を叱る。心が定まるまでは(不動心を得るまでは)心は揺れ動く。八正道の中で「正命」、正しく生活するとは家庭生活のことが中心となる。
좌우로 흔들리는 마음속에서 영혼(靈)은 향상하고 성장해 간다.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고, 스스로 자신을 꾸짖는다. 마음이 정해질 때까지는((부동심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린다. 팔정도(八正道) 중에서「정명(正命)」,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은 가정 생활의 일이 중심이 된다.
生活を明るくする秘訣は、まず与えられている恩に感謝する事である。神の恩、自然の恩(まず呼吸が出来ること、それは空気があるからである。水もなければ生きられない。まして太陽がなければ生きられない。人間が生きてゆくのに必要な自然は、われわれが生まれてくる以前に既に準備されてあったことに感謝する)、先祖の恩、親の恩、夫(妻)の恩などと、感謝しようと思えばいくらでも感謝することがある。ところがそれらの物を、皆当たり前だと思って感謝しないで、悪い所だけ、不満足な点だけを見つけて探し出しているから人生が暗くなるのである。
생활을 밝게 하는 비결(秘訣)은, 우선 주어지고 있는 은혜(恩)에 감사하는 것이다. 신(神)의 은혜(恩), 자연의 은혜(恩)((먼저 호흡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도 역시 없으면 살 수 없다. 하물며 태양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연은, 우리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준비(準備)되어 있던 것에 감사한다)), 조상(先祖)의 은혜(恩), 부모님의 은혜(恩), 남편(夫)(아내,妻))의 은혜(恩) 등등, 감사하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사할 것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것(物)을, 전부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감사하지 않고, 나쁜 장소(悪い所, 특히 유흥가. 환락가)만을, 불만족한 점(點)만을 찾아내고 찾아내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正しい生活は足ることを知った、物や金に、そうして周囲の人々にも振りまわされ気がねしない生活の中で、自分を修正し、その修正したことを実践していって、自分の魂が向上してゆく手応えを味わいながら生活して行くことである。中道に反する生活は、すべて自分中心の自己保存の心からである。だから、正命の目的は、精神的、肉体的な調和をめざして、悪い業となったものを修正して善に変えてゆく生活である。
올바른 생활은 만족함을 안, 물건(物)이나 돈(金)에, 그리고 주위의 사람에게도 휘둘림을 당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눈치를 보지 않는, 어려워하지 않는) 생활 속에서, 자신을 수정하고, 그 수정한 것을 실천해 가며, 자신의 영혼(魂)이 향상해 가는 반응을 맛보면서 생활해 가는 것이다. 중도(中道)에 반하는 생활은, 이미 자기 중심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명(正命)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인 조화를 목표로 해서, 나쁜 업(業)으로 된 것을 수정해서 바꿔 가는 생활이다.
- 完 -(끝)
六、正進 ・・・ 正しく道に精進すること 完了
육, 정진・・・ 올바른 길에 정진하는 것
・人間関係の調和
・인간관계의 조화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 전체】
「道に精進」とは、親子、兄弟、友人、隣人における人間としての在り方であろう。人間は大自然と人との関係を通して、はじめて自分自身の大きな自覚に到達できるものである。大自然もない、自分以外の人間も存在しないなどと考えるのは愚かなことだ。同時に、自分以外のあらゆる存在は、自己を認識するための材料であり、魂の向上に不可欠なものであろう。親子、友人、隣人の関係を通じて、自己の魂を正しく磨いてゆける現象界は、天が人間に与えてくれた慈悲でなければならない。
「길에 정진」이란, 부모와 자식(親子), 형제(兄弟), 친구(友人), 이웃(隣人)에 있어서의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인간은 대자연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큰 자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연도 없고, 자기 이외의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따위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동시에,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는, 자기를 인식하기 위한 재료이며, 영혼(魂)의 향상에 불가결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 친구, 이웃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영혼(魂)을 올바르게 닦아 갈 수 있는 현상계(現象界)는, 하늘(天)이 인간에게 제공해 준 자비(慈悲)라 하지 않을 수 없다.
道への精進は、人間の特権であり、神の慈悲である。動物には見られぬ偉大な要素を持った者が人間であるからだ。
길을 향한 정진은, 인간의 특권이며, 신(神)의 자비이다.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위대한 요소를 가진 것(者)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 【본문 전체】
私たちの人生は、いくら長生きしても八十年か九十年、その短い一生を目先の利益のために過してしまうことは惜しいかぎりです。意識の10%しか働かないとすればそれも仕方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しかしそうした環境だからこそ修行が出来るといえます。何もかもわかったならば、この世に生まれた意義はありません。
우리들의 인생은, 아무리 장수(長生)해도 80년내지 90년, 그 짧은 인생을 눈앞의 이익 때문에 시간을 보내 버리는 것은 애석하기까지만 하다. 의식(意識)의 10%밖에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러한 환경이기 때문이야말로 수행(修行)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완전히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의(意義)는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精進の目的は対人関係と地上の環境を整備し、調和させる事です。
정진의 목적은 대인관계와 지상의 환경을 정비(整備)하고,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人は単独では生きられないし、また生まれてもきません。必ず両親がおり、そして兄弟姉妹、夫婦、隣人、友人、先輩、後輩というように、そうした環境の中で生活しています。
사람은 단독(單獨)으로는 살 수 없고, 또한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양친(兩親)이 있고, 그리고 형제자매, 부부, 이웃, 친구, 선배, 후배라고 하는 것처럼, 그러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そして、そうした関係の中で、己自身の心が練磨され、尊重し合う心がつくられてゆくのです。
그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연마(練磨)되어,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最近のように物質オンリーの風潮が強くなりますと、親子でも心は他人であり、夫婦は享楽の手段としか考えぬ人も出てきます。友人は利益追求の手段であり、自分以外はすべて他人というようになってきます。恐ろしいかぎりです。
최근과 같이 오직 물질뿐인 풍조(風潮)가 강해지면, 부모와 자식(親子)라 해도 마음은 타인(他人)이며, 부부는 향략의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나오게 됩니다. 친구는 이익추구의 수단이며, 자기 이외에는 전부 타인이라고 하게 되게 됩니다. 염려스럽기까지 합니다.
親子といえども魂はちがいますが、しかし自分を生み、育て、今この世に在るということは、両親の賜です。もし、その両親があの世(出生する前に親子の約束を交わす)の約束を果たさず、放蕩したり、あるいは胎児をおろしたりすることがあれば、話は別ですが、そうでなければ、この世に生まれ、魂の修行の機会を与えてくれた両親を安心させるような自分自身に成長することが、人の道に適った生き方でしょう。
부모와 자식(親子)이라고 해도 영혼(魂)은 다릅니다만, 하지만 자신을 낳고, 길러주고, 지금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것은, 양친(兩親) 덕분(賜)입니다. 만약, 그 양친이 저 세상((출생하기 전에 부모와 자식의 약속을 맺는다))에서의 약속을 완수하지 않고, 방탕(放蕩)하거나, 혹은 태아(胎兒)를 낙태하는 일이 있다면, 말은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영혼(魂)의 수행의 기회(機會)를 주신 양친을 안심(安心)시키는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는 것이, 사람이 지키고 행해야 할 도리(人の道)에 맞는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
夫婦にしても、大抵は前世で夫婦であるという場合が多く、そうだとすれば互いに助け合う、愛の環境を作ることが大事なのです。夫
부부라해도, 대개는 전세(前世, 전생)에서 부부(夫婦)였다고 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다고 한다면 서로 서로 돕고, 사랑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兄弟姉妹、友人、隣人にしても、それぞれが助け合い、補い合い、話し合える愛の行為が出来るよう励むことが、人の道です。
형제자매, 친구, 이웃에 대해서도, 저마다가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가 가능하도록 힘쓰는 것이, 사람이 지키고 행해야 할 도리(人の道)입니다.
正進の目的は、人の道、神の道を具現してゆくことです。
정진의 목적은, 사람의 지키고 행해야 할 도리(人の道), 신이 가르치고 전한 길(神の道)을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第二の目的は、私たちの共同生活が末長く続けられるように、動物、植物、鉱物資源を整備し活用してゆくことです。
두번째의 목적은, 우리들의 공동생활이 앞으로 언제까지나 이어지도록, 동물, 식물, 광물 자원(資源)을 정비(整備)해서 활용해 가는 것입니다.
私たちの生活は、こうした動・植・鉱物の資源を活用しなければ生きてゆけません。
우리들의 생활은, 이러한 동물・식물・광물의 자원을 활용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そのため、こうした資源が循環の法則にそうように、大切に保存しながら、そして、それらを生活の上に活用してゆくことです。
그 때문에, 이러한 자원이 순환(循環)의 법칙(法則)에 맞도록, 소중하게 보존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생활 상에 활용해 가는 것입니다.
神は私たちが平穏に生活できるよう、大地と、資源と、生きる環境とを与えてくれました。これを、半永久的に保存し、活用してゆくためには、私たちは、資源の再生産が常に可能になるよう、それらを大切に扱ってゆかねばなりません。
신(神)은 우리들이 평온(平穏)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대지(大地)와, 자원(資源)과, 살아갈 수 있는 환경(環境)을 또한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반영구적으로 보존(保存)하고, 활용(活用)해 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자원의 재생산(再生産)이 늘 가능해지도록, 이러한 것들을 소중하게 취급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つい最近まで鳥や獣を見ると勝手放題に殺してしまっていました。必要なものなら許されますが、面白半分に動物を殺傷することは、植物資源の枯渇にも影響してきます。
바로 최근까지 새(鳥)나 짐승(獸)을 보면 제멋대로 죽여 버리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허락하겠지만, 재미 삼아 동물을 살상(殺傷)하는 것은, 식물자원(植物資源)의 고갈(枯渇)에도 영향(影響)을 끼칩니다.
★이 말의 뜻은, 동물이 배설하고, 씨앗을 퍼트리고, 식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물자원이 고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石油や石炭も今日のように使い放題、掘り放題にしてゆきますと、これに代わる動力資源が出来る前に、ガスや電気はとまり、再び原始時代がやってくるでしょう。
석유(石油)나 석탄(石炭)도 오늘날처럼 쓰고 싶은 대로 실컷 사용하고, 캐내어 버리고 싶은 대로 실컷 파 버리게 되면, 이것을 대신할 동력자원(動力資源)이 만들어지기 전에, 가스(Gas)나 전기(電氣)는 멈추게 되고, 다시 원시시대(原始時代)가 도래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こうした自然の資源は大切に活用し、科学の進歩と歩調を合わせて使ってゆかなければいけないものです。
이러한 자연의 자원은 소중하게 활용하고, 과학의 진보와 보조를 맞춰서 사용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資源を大切にする、ものを大切にすることも、道に適った生き方なのです。
자원을 소중하게 한다. 물건을 아껴 쓴다는 것도, 도리(道)에 맞는 생활 방식입니다.
私たちは常に反省し、行き過ぎや怠惰にならないよう、自戒してゆ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우리들은 항상 반성하고, 정도를 넘거나 태만하게 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경계(自戒)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 【본문 전체】
私達の人生は、肉体を持って八十年か九十年であり、肉体に舟に乗ってしまうと表面意識が一〇%、潜在意識が九〇%という比率で、ほとんど目先のことしか分からないために、自分自身が悟る修行の場としては非常に良い環境である。
우리들의 인생은, 육체를 가지고 80년 내지 90년이며, 육체에 배(舟)를 타 버리면 표면의식(表面意識)이 10%, 잠재의식(潛在意識)이 90%라고 하는 비율(比率)이며, 거의 눈앞의 일밖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깨닫는 수행으로서는 항상 좋은 환경이다.
この現象界は、人々の心の中が分からないため互いに誤りを犯すのであり、一寸先は闇というようなことをいうのである。しかし、人間生活はだから有意義といえる。心の精進を日夜にし、より高い次元の世界に魂を磨いて行く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이 현상계(現象界)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한 치 앞은 어둠(一寸先は闇, 인생의 앞일은 예측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생활은 그래서 유의의(有意義)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보다 높은 차원(次元)의 세계로 영혼(魂)을 닦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 세상의 구조는, 극락(천국)의 경우, 4차원 유계(幽界), 5차원 영계(靈界), 6차원 신계(神界), 7차원 보살계(菩薩界), 8차원 여래계(如來界), 9차원 우주계(宇宙界), 로 되어 있습니다. ★지옥도 역시, 4차원의 세계이지만, 아래로 내려갈 수록 더 깊은 지옥계(地獄界)가 됩니다.
また逆に目先のことが分からぬから、苦悩の原因を自ら作り出し、悪いことも堂々とするようになる。人生は闇だ、などという考えになってしまう。人生は、正しい生活をしていれば、決して暗闇ではない。
또한 반대로 눈앞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뇌(苦惱)의 원인을 스스로 만들어 내서, 나쁜 일도 당당(堂堂)하게 하게 된다. 인생은 어둠(闇)이다, 따위라고 생각하게 되어 버린다. 인생은,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으면, 결코 암담(暗闇)하게 되지 않는다.
人々の心を重んじ、我欲にもとずいた考えを正して、自身の言動を、第三者のつもりで注意深く見守りながら生活することが、正しい生活というのである。こうした生活の中から、私達の潜在意識に包まれている無限大の智恵が解き明かされ、人間として生活をしている喜びを悟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사람들의 마음을 중히 여기고, 아욕(我欲, 자기만의 욕심)에 뿌리를 둔 생각을 바로잡고, 자신의 언동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주의 깊게 지켜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올바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감싸여 있는 무한대(無限大)의 지혜(智恵)가 해명되어, 인간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는 기쁨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実在界、あの世から見ると、私達現象界における生活状態や心の在り方は、丁度四方透明のガラスの中でのように見える。心の嘘も分かってしまう。
실제계(實在界), 저 세상(저승, あの世)에서 보면, 우리들 현상계(現象界)에 있어서의 생활태도나 마음의 본연의 모습은, 마치 사방의 투명한 유리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의 거짓말도 알아 버린다.
私達はその次元の異なる世界の存在を、否定す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る。自分の生活がこのようにガラス張りと知ったら、人間は苦しみなどは造れないことを悟るであろう。
우리들은 그 차원이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정(否定)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이 이와 같이 유리를 끼움(비밀이 없고 없음)과 같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인생은 괴로움 따위는 만들지 않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自分だけの心にしまっている不調和な生活を精算し、真実己の心に忠実な、正しい生活に励むよう実践することである。精進、この言葉の意味はここにある。자기만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부조화한 생활을 정산(精算)하고, 진실한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올바른 생활에 힘쓰고 실천하는 것이다. 정진(精進), 이 말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다.
4.心行の言魂より 【 全文 】
4.심행의 말씀에서 【본문 전체】
私たち人間の道は、中道に沿った調和の生活にあります。いうなれば、正しい普遍的な法にあるわけです。
우리들 인간의 길(道)은, 중도(中道)에 따른 조화의 생활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올바른 보편적인 법(法)에 있는 것입니다.
法とは、循環の法則であり、循環の法はこの地上界のあらゆる面に適用されています。正道の生活とは、この意味で循環の法に乗った生活であり、正しい生活です。正しい生活とは前述の通り、中道の生活であり、中道の生活は、人びとをして調和の生活に導いてゆくものです。
법(法)이란, 순환(循環)의 법칙(法則)이며, 순환의 법은 이 지상계(地上界)의 모든 면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정도(正道)의 생활이란, 이 의미에서 순환의 법을 탄 생활이며, 올바른 생활입니다. 올바른 생활이란 전술한 바와 같이, 중도(中道)의 생활은, 사람들을 역시 조화가 있는 생활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中道の生活は慈悲と愛の生活であり、その想念行為は再び自分にめぐってくるものです。自己保存の片寄った独りよがりの生活は、この地上界が相互扶助の調和を軸に動いているので、当然その反作用として、苦しみを招きます。循環の法が働いているからです。
중도(中道)의 생활은 자비와 사랑의 생활이며, 그 상념행위는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기보존(自己保存)의 치우친 독선(獨善)의 생활은, 이 지상계(地上界)가 상호부조의 축(軸)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반작용(反作用)으로 해서, 괴로움을 초래합니다. 순환의 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正進の目的は、人間関係の調和にあります。正命の目的が自分を正すものでありますから、その次にくるものは、人びととの調和なのです。
정진(正進)의 목적은, 인간관계의 조화에 있습니다. 정명(正命)의 목적이 자신을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오는 것은, 사람들과의 조화(調和)인 것입니다.
人間関係とは、夫婦、親子、兄弟、友人、隣人、そうして個人と社会の関係であり、それは、まず自分の足元から始まって、全体にまで発展してゆく調和のリズムであり、波動であります。夫婦の関係は、たがいに足りないものを補い合い、よき子孫を育て上げてゆくものであり、親子の関係は、過去世の縁によって生じたものなので、親は子をいつくしみ、子は親を敬うのは当然な事です。兄弟は、たがいに向上し合う切磋琢磨する間柄であり、友人は、社会生活上のよき協力者といえましょう。こうした人間関係の調和に一貫して貫く柱は何かというと、それは他を生かし、助け合う「愛」の心です。愛こそ、調和の姿であり、この地上の光なのです。
인간관계(人間關係)란,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이웃,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이며, 그것은, 우선 자신의 주변(足元)부터 시작해서, 전체로까지 발전해 가는 조화의 리듬이며, 파동(波動)입니다. 부부의 관계(夫婦の關係)는, 서로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고, 경사스러운 자손(よき子孫)을 길러내어 가는 것이며, 부보와 자식의 관계(親子の關係)는, 과거세(過去世)의 인연(縁)에 의해서 탄생한 것인 것이기 때문에, 부모(親)는 자식(子)을 애지중지하며, 자식(子)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兄弟)는, 서로 서로 향상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냄)하는 사이(間柄)이며, 친구(友人)는, 사회생활 상에서의 좋은 협력자라고 할 수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조화에 시종 여일하게 관철하는 기둥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남을 살리고, 서로 돕는 「사랑(愛)」의 마음(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조화(調和)의 모습이며, 이 지상(地上)의 빛(光)인 것입니다.
★切磋琢磨 [절차탁마]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この地上は、男女の両性から成り立っています。一方が増えても困るし、減っても困る。男だけでも女だけでも人間社会は成り立ちません。考えてみてください。もし、一方だけが存在し、一方が存在しないとすれば、人間社会は、百年を待たずに絶滅してしまいます。これでは、この地上界に仏国土もユートピアもできません。 男女の両性があって、はじめて、社会生活(それはまず家庭から)が生まれ、子孫を育てることができます。人類の永遠の生活は、こうした男女の両性の存在によって可能であり、調和ある仏国土も完成されてくるのです。男女の両性にはそれぞれ特性と役割があり、それぞれが助け合うことによって調和されます。
이 지상(地上)은, 남녀의 양성(兩性)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한쪽이 증가해도 곤란하고, 줄어들어도 곤란하다. 남자만 있어도 여자만 있어도 인간사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한쪽만이 존재하고, 한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사회는, 100년을 지나지 않고 멸종(絶滅, 완전히 없어짐)해 버리고 맙니다. 이래서는, 이 지상계(地上界)에 불국토 이상향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남녀의 양성(兩性)이 있어야, 비로소, 사회생활(그것은 우선 가정에서부터)이 탄생하며, 자손(子孫)을 양육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영원한 생활은, 이러한 남녀의 양성(兩性)의 존재에 의해서 가능하며, 조화 있는 불국토도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남녀의 양성(兩性)에는 저마다 특성과 역할이 있으며, 각자가 서로 돕는 것에 의해서 조화됩니다.
色心不二の中道の精神はここでも生きています。現象界は、天地に分かれてはじめて空間が生まれ立体となり、生命の生きる場がつくられます。地球は南極、北極に分かれ、地球の自転、公転を正しく回転させ、地上の生命を育てています。색심불이(色心不二)의 중도(中道)의 정신(精神)은 여기서도 살고 있습니다. 현상계(現象界)는, 천지(天地)로 나뉘어져 비로소 공간(空間)이 태어나 입체(立體)가 되어, 생명이 살 수 있는 장소(場)가 만들어집니다. 지구(地球)는 남극(南極), 북극(北極)으로 나뉘어져, 지구의 자전(自轉), 공전(空轉)을 올바르게 회전(回轉)시키며, 지상의 생명을 기르고 있습니다.
人間の世界も男女の両性があって、人間社会が永遠に続いて行きます。調和、中道、愛、慈悲という言葉の意味を現実的に、実際的によく考えてください。そして、こうした言葉が現実的に生きてくるのは、常に複数という関係の中においてです。これらの言葉は単独では決して成り立っていないことを考えてみてください。
인간의 세계도 남녀의 양성(兩性)이 있어서, 인간사회가 영원히 지속되어 갑니다. 조화(調和), 중도(中道), 사랑(愛), 자비(慈悲)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잘 여러모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말이 현실적으로 생기는 것은, 항상 복수(複數)라고 하는 관계 속에 있어서입니다. 이러한 말은 단독(單獨)으로는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 것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 주십시오.
正しい道に精進するとは、私たちが複数という社会の中で、他を生かし、助け合ってゆく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その意義が生まれ、本来の目的に適ってくるわけなのです。
올바른 길(道)에 정진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복수(複數)라고 하는 사회 속에서, 남을 살리고, 서로 도아 가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그 의의(意義)가 태어나, 본래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 【발췌】
「正命」の目的は自分自身を正す事であった。つぎにくるものは、人々との調和である。
「정명(正命)」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다음에 오는 것은, 사람들과의 조화(調和)이다.
正進の目的は、人間関係の調和である。親子、夫婦、兄弟、友人、隣人、そうして個人と社会、個人と国家、個人と世界、個人と自然、個人と大宇宙、まず自分の足元から始まって、全体にまで発展してゆく調和のリズムであり、波動である。親子の縁は、過去世の縁によって生じたもので、親は子を慈しみ、子は親を敬うのは当然のことであり、夫婦は補足の原理によって互いに足りないところを補い合い、よき子孫を育て上げてゆくものであり、兄弟姉妹は、お互いに切磋琢磨して向上し合う間柄であり、友人は、社会生活のよき協力者である。
정진(正進)의 목적은, 인간관계의 조화(調和)이다. 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 친구, 이웃, 그리고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 개인과 세계, 개인과 자연, 개인과 대우주, 먼저 자신의 주변부터 시작해서, 전체로까지 발전해 가는 조화의 리듬이며, 파동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과거세의 인연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애지중지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부부는 보족(補足)의 원리에 의해서 부족한 바를 서로 보충하며, 경사스러운 자손을 길러내어 가는 것이며, 형제자매는,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해서 서로 향상하는 사이(間柄)이며, 친구는, 사회생활의 좋은 협력자이다.
★切磋琢磨 [절차탁마]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正進は、調和を目的としての行動であって、自分がしたことを自分で喜ぶ生活である。誰からほめられなくても、自分がそのことを喜べば、それはそのまま神に、天上界に認められ記録されるのである。
정진(正進)은, 조화를 목적으로 한 행동이며, 자신이 한 것을 자기 스스로 기뻐하는 생활이다. 누구한테 칭찬을 듣지 않아도, 자신이 그 일을 기뻐하면, 그것은 그대로 신(神)에게, 천상계(天上界)에 인정되어 기록(記録)되는 것이다.
高橋信次先生が常に強調していられたのは「自己の確立」であった。正進ということは自己確立の道を歩むことである。何事もまず自分を見つめるところから始めよということである。人から言われたときにそれが事実であったら反省すれば自分がそれだけ成長するのであるし、そうでなかったら真実を知らないかわいそうな人だと思えばよいのである。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고 계셨던 것은 「자기 자신의 확립(自己の確立)」이었다. 정진(正進)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확립(自己確立)의 길(道)을 걷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우선 자신을 보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하는 것이다. 남에게 말을 들었을 때에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한다면 반성하면 자신이 그만큼 성장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진실을 게 하지 않았다면 진실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 좋은 것이다.
「自己の確立」とは、自分が神の子であり、仏の子であることを自覚したところのその良心に従った行為のできる人間になることである。
「자기 자신의 확립(自己の確立)」이란, 자신이 신(神)의 자녀(子)이며, 부처님(佛)의 자식(子)인 것임을 자각한 바인 그 양심(良心)에 따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釈尊が説かれた正進とは、慈悲と愛の心による家庭・夫婦の調和と、複雑な国家社会に対する調和を目的とした行為にあったのである。それはあくまでも中道に沿った実践でなければならない。
석존(釋尊)이 설명하신 정진(正進)이란, 자비와 사랑의 마음에 의한 가정・부부의 조화와, 복잡한 국가사회에 대한 조화를 목적으로 한 행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도(中道)에 따른 실천이어야 한다.
高橋信次先生は、「正しく道に正進するとは、私たちが複数という社会の中で、他を生かし、助け合っていく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その意義が生まれ、本来の目的に適ってくるのである。」と説かれているのである。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은, 「올바르게 길에 정진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복수(複數)라고 하는 사회 속에서, 남을 살리고, 서로 도와 가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그 의의(意義)가 탄생하여, 본래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正進の目的は、人間関係の調和である。人間関係の調和に一貫しているものは、他を生かし、助け合うという「愛」の心である。この地上は男と女しかいないのである。一方が多過ぎても、少なすぎても困るのである。この男女の両性があって初めて子供が生まれ、調和関係が成立する。家庭は社会生活の単位である。人類の永遠の生活は、こうした男女の両性の存在によって可能であり、調和ある仏国土も完成されていく。人間社会は複数の関係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だから正しく道に正進するとは、男女、夫婦、親子の関係を中心として広がる複数の社会の中で、お互いに生かし合い、助け合っていって、初めて本当の目的に適うことになってくるわけである。
정진(正進)의 목적은, 인간관계의 조화이다. 인간관계의 조화에 일관(一貫)되어 있는 것은, 남을 살리고, 서로 돕는다고 하는 「사랑(愛)」의 마음(心)이다. 이 지상(地上)은 남자와 여자밖에 없는 것이다. 한쪽이 너무 많아도, 한쪽이 너무 적어도 곤란한 것이다. 이 남녀의 양성(兩性)이 있어야 비로소 자식이 태어나고, 조화관계가 성립한다. 가정은 사회생활의 단위(單位)이다. 인류의 영원한 생활을, 이러한 남녀의 양성(兩性)의 존재에 의해서 가능하며, 조화 있는 불국토(佛國土)도 완성되어 간다. 인간관계는 복수(複數)의 사회 속에서, 서로 서로 살리며, 서로 도와 가야, 비로소 진정한 목적에 맞아 가는 것이다.
- 完 -(끝)
이 장은,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장입니다.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七、正念 ・・・ 正しく念ずること
칠, 정념 ・・・ 올바르게 마음속으로 비는 것(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는 것, 기원하는 것)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 전체】
★염(念)을, "생각, 마음" 혹은 고어(古語)로소 '소원'으로 번역합니다.
※ (문장)의 의미에 따라, 적절하게 번역했습니다.
おもい[ 思い,念い,想い ] 생각하는 마음의 움직임‧내용‧상태.
かんがえ[考え] ①(사고적인) 생각. (옛날에는 カムガヘ) 생각. 생각하는 것. 또는, 생각해서 얻은 내용.
しかし今夜は、この問題は後にゆずり、「正念」について考えていった。
하지만 오늘밤은, 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정념(正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念は願いである。念のない人生、念のない生活はあり得ない。人は今日よりは明日を思うから生き甲斐が生まれるのであり、明日のない人生は死を意味しよう。今日に生きる者は強者だが、人間は、死の瞬間まで希望を託して生活していくものだ。その希望が自己本位に傾くと人との調和が崩れ、自分自身も立ってはいられない。念のあり方も調和という中道に適った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し、「正しき念」は無制限に発展する欲望をコントロールし、足ることを知った、人生の目的を自覚した願いでなくてはなるまい。
생각(念)은 바람(願,소원)이다. ((참고: 염원(念願):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 생각(念)이 없는 인생, 생각(念)이 없는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보람이 생기는 것이며, 내일이 없는 인생은 죽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오늘에 사는 사람은 강자(強者)이지만,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희망(希望)을 걸고 생활해 가는 것이다. 그 희망(希望)이 자기본위로 기울게 되면 사람과의 조화는 무너지고, 자기 자신도 서 있을 수 없다. 생각(念)의 본연의 자세도 조화(調和)라고 하는 중도(中道)에 맞지 않으면 안 되고, 「올바른 생각(念)」은 무제한으로 발전하는 욕망(欲望)을 콘트롤(조절)하고, 만족할 줄을 안, 인생의 목적을 자각한 바람(願い,소원)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ここで念と祈り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여기에서 생각(念)과 기도(祈り)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念も祈りもともにエネルギーの働きから生まれる。
생각(念)과 기도(祈り)도 다 같이 에너지의 작용(働き,기능)에서 생긴다.
ものを考える、思うことが出来るのは、人間の五体の中に、そうした創造能力を生み出すエネルギーの働きがあるから可能なのである。睡眠中は、こうした能力は働かない。これは、エネルギーの休息であり、同時に、エネルギーの補給のために、人間は、睡眠中に、次元の異なる世界に旅立つからである。
무엇(もの)을 이것저것 생각하고, 생각(상상)할 수가 있는 것은, 인간의 오체(五體) 속에, 그러한 창조능력을 낳는 에너지의 기능(働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수면중(睡眠中)에는, 이러한 능력(能力)은 작용(働き)하지 않는다. 이것은, 에너지의 휴식(休息)이며, 동시에, 에너지의 보급(補給)을 위해서, 인간은, 수면중(睡眠中)에, 차원이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魂というと、否定する者もあろう。しかし、魂のない人間は一人もいないのだ。魂とは個性を持った意識をいうのである。睡眠は、魂と肉体との分離であり、このため、グッスリ眠ると鼻をつままれても、地震が起きても、わからないのである。目がさめるとは、魂が肉体に入ることである。考える、思うことは、肉体がするのではなく、魂を形成しているエネルギーの働きがあるから、可能になってくるのである。
영혼(魂)이라고 하면, 부정(否定)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魂)이 없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영혼(魂)이란 개성을 가진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이다. 수면(睡眠)은, 영혼(魂)과 육체(肉體)의 분리(分離)이며, 이 때문에, 푹 자면 코(鼻)를 손가락으로 잡아 당겨도, 지진(地震)이 일어나도, 모르는 것이다. 잠이 깬다(目がさめる)는 것은, 영혼(魂)이 육체(肉體)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한다(考える), 생각(상상)한다((思う)는 것은, 육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魂)을 형성(形成)하고 있는 에너지의 작용(働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念も祈りも、個性を持った魂の働きによって行われる。念は、人間の目的意識を現わした働きである。誰々と結婚したい、出世したい、事業をひろげたい、老後の生活を安定させたい、子供が素直に育って欲しい、というように。
생각(念)도 기도(祈り)도, 개성(個性)을 가진 영혼(魂)의 기능(働き)에 의해서 행해진다. 생각(念)은, 인간의 목적 의식을 나타낸 기능(働き)이다. 누구누구와 결혼하고 싶다, 출세하고 싶다, 사업을 확장하고 싶다, 노후(老後)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싶다, 자식(子供)이 솔직하게 자라 주었으면 싶다, 고 하는 것처럼.
人間である以上、こうした目的意識を持たぬ者は一人もいない。目的意識があるから、文明や文化が育ち、社会生活がエンジョイされてくる。
인간인 이상, 이러한 의식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목적 의식이 있기 때문에, 문명이나 문화가 자라고, 사회생활이 엔조이(enjoy)하게 된다(사회생활을 즐기게 된다).
ところが人間は、肉体を持つと、肉体にまつわる想念に支配されてくる。自己本位になってくる。これは俺のものだ、人に構っていると生きてゆけぬというように、争いのモトは、こうした自己本位の想念、つまり、そうした目的意識を持った念の働きが作用するために起こってくる。
그런데 인간은, 육체를 가지면, 육체에 달라붙은 상념에 차츰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자기본위가 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내것이다. 남의 일에 상관(참견)하고 있으면 살아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분쟁(다툼)의 원인(モト)은, 이러한 자기본위의 상념(想念), 즉, 그러한 목적 의식을 가진 기능(働き)이 작용(作用)하기 때문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そこで人間の目的は、調和にあるのだし、調和とは、助け合い、喜びをわかち合うことなのだから、人間の目的意識も、ここに焦点を合す必要があるのである。
그래서 인간의 목적은, 조화(調和)에 있다는 것이고, 조화(調和)란, 서로 돕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목적 의식도, 여기에 초점(焦點)을 맞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正念は、こうした調和という尺度を通してなされるものであるし、正念の次元は、それゆえ、非常に高いものになってくる。
정념(正念)은, 이러한 조화(調和)라고 하는 척도(尺度)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정념(正念)의 차원(次元)은, 그러므로, 상당히 높은 쓸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仕事について考えると、仕事そのものは、社会に、従業員に、家庭にたいして、その生活を保障し、うるおいをもたらすものだ。仕事に忠実であることは、正念のあり方に適ってくる。このことは、主義や、主張や、社会制度に関係がない。社会主義であろうと、資本主義であろうと、仕事に忠実に打ちこんでいく態度は、そうした制度とは本来無関係であるからである。問題は、それによって生み出された利益、収入をどのように使っていくかによって、それぞれの念の在り方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か、ちがってくる。つまり欲望を満たす自己本位のためだったか、それとも、その利益を家庭に、従業員に、社会に還元するためだったか。
일(仕事)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면, 일(仕事) 바로 그것은, 사회에, 종업원에게, 가정에 대해서, 그 생활을 보장(保障)하고, (살림에) 이익(보탬)을 가져오는 것이다. 일(仕事)에 충실하다는 것은, 정념(正念)의 본연의 모습(자세)에 맞게 된다. 이 일은, 주의(主義)나, 주장(主張)이나, 사회제도(社会制度)와는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社会主義)라 하더라도, 자본주의(資本主義)라 하더라도, 일(仕事)에 충실히 몰두해 가는 태도(態度)는, 그러한 제도(制度)와는 본래 관계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問題)는, 그것에 의해서 낳게 된 이익(利益), 수입(収入)을 어떻게 사용해 가는가에 의해서, 각자의 생각(念,마음, 소원)의 본연의 모습(자세)이 어떠한 것이었는지가, 달라져 온다. 즉 욕망을 채우는 자기본위(自己本位)을 위함었는가, 그렇다 할지라도, 그 이익을 가정에, 종업원에게, 사회로 환원(還元)하기 위함이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足ることを知った念の在り方は、人間は自己本位に流れやすいので、正念を生かす一つの尺度として、必要なことなのである。
만족할 줄을 안 생각(念,마음)의 본연의 자세는, 인간은 자기본위로 흐르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정념(正念)을 살리는 하나의 척도로서, 필요한 것인 것이다.
★おもい[ 思い,念い,想い ] 생각하는 마음의 움직임‧내용‧상태.
正念の在り方、生かし方は、こうした足ることを知った考え方を踏み台にして、昇華してゆくものである。
정념(正念)의 본연의 자세를, 살리는 방법(발휘하는 방법)은, 이러한 만족할 줄을 안 생각(사고 방식)을 발판으로 해서, 승화(昇華)시켜 가는 것이다.
★승화[승화] ⓐ(현상이 높은 영역으로)한 단계 더 발전하다
つぎに祈りについて考えてみると、祈りは感謝の心を表わし、その心で生活行為をしていく思念である。
다음으로 기도(祈り)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면, 기도(祈禱)는 감사(感謝)하는 마음을 나타나고, 그 마음으로 생활행위를 해 가는 사념(思念,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함,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다.
人間は、一寸先闇の中で生活している。明日がわからない。いつ災難がふりかかり、あるいは喜びごとがあるかも知れない。隣の人が今、どのように生活してるかもわからない。そうした中で、健康で、楽しく、明るく生活できることにたいして感謝する気持ちが湧き上がって来たときに、私たちは祈らずにはいられない気持ちになるものだ。しかし、通常は、願いごとに終わっている。神社仏閣にいって、こうして欲しい、ああして欲しいと手を合わせる。
인간은, 한치 앞은 암흑(一寸先闇, 한치 앞일도 모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재난(災難)이 닥치고, 혹은 기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웃 사람이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중에서, 가정에서, 즐겁게, 밝게 생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분(마음)이 솟아나왔을 때에, 우리들은 기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通常)은, 바라는 일(願いごと, 소원)로 끝난다. 신사불각(神社佛閣)에 가서,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고 합장한다(애원한다)
★신사(神社) ⓐ신(神)을 모셔 놓은 건물.
★불각(佛閣) ⓐ절(寺) ⓑ부처를 모셔 놓은 대청이나 집
正しき生活行為、つまり調和に向かって努めているときには、その願いごと、祈りはたいてい叶えられる。正しき「祈り」は、次元のちがったあの世の天使の心を動かし、その願いを叶えてくれるからだ。この意味から「祈り」は天使との対話であるといえる。奇跡は、こうした「祈り」によって起こるものである。
올바른 생활행위, 즉 조화(調和)를 향해서 노력하고 있을 때에는, 그 바라는 일(소원,願いごと), 기도는 대개 이루어 진다. 올바른 「기도(祈り)」는, 차원이 다른 저 세상(あの世)의 천사(天使)의 마음을 움직여, 그 소원(願い,바람)을 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의미(意味)에서 「기도(祈り)」는 천사(天使)와의 대화(對話)라고 말할 수 있다. 기적(奇蹟)은, 이러한 「기도(祈り)」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人間生活にとって、「祈り」のない生活は考えられないし、独裁者が自分以外の人間のこうした思念を押さえようとしても押さえることはできない。
인간 생활에 있어서, 「기도(祈り)」가 없는 생활은 생각(상상)할 수 없고, 독재자(獨裁者)가 자기 이외의 인간의 이러한 사념(思念,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함,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을 하는 것을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ただこれまでの「祈り」は、我欲のそれに使われ、祈っておればタナボタ式に、なんでも叶えられると思われている。念仏を唱えればうまいことがある。祈っておれば救われるという風に考えられてきた。そんなものではないのである。
단지 지금까지의 「기도(祈り)」는, 아욕(我欲, 자기만의 욕심)의 그것에 사용되어, 기도하고 있으면 뜻하지 않은 행운이 굴러들어오는 방식(棚から牡丹餅, 굴러 온 호박)으로, 무엇이든 들어 준다고 생각하고(믿고) 있다. 염불(念佛)을 외우면 좋은 일이 있다. 기도하고 있으면 구제된다(구원된다)고 하는 식(風)으로 생각(판단)해 왔다..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다.
こうみてくると念は、目的意識であり、創造活動の源泉であり、祈りは、生かされている感謝と報恩の心、進んでは神との対話であるわけである。そうしてそのどちらも、エネルギーという力の波動によって為されている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と思う。
이렇게 보게 되면 생각(念)은, 목적 의식이며, 창조 활동의 원천(源泉)이며, 기도는, 되살아나는 감사와 보은의 마음, 나아가서는 신(神)과의 대화(對話)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 쪽이든, 에너지(Energie)라고 하는 힘(力)의 파동(波動)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 (働き)=(人+動)는, 일본에서 말들어 낸 단어이며, 뜻은, "일", "작용", "기능", "효과"란 뜻이 있습니다. ①움직이는 것 ②일을 하는 것 ③역할을 하는 것 ④일을 하거나 생활을 유지하는 능력 ⑤(전쟁터에 나가서) 행동하는 것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 【본문 전체】
念とは、思い願う、エネルギーのことです。
생각(念이란, 소원(思い)을 신불(神佛)에게 기원하는(願う), 에너지(Energie)의 작용(こと,일)입니다.
あれが欲しい、これが得たい。あの人と結婚したい、こういう仕事をしたい……、というように。
저것이 갖고 싶다(あれが欲しい), 이것을 이루고 싶다(これが得たい). 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이러한 일(仕事)을 하고 싶다……, 라고 하는 것처럼.
つまり、念には常に目的意識が内在されています。
즉, 생각(念)에는 항상 목적 의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目的のない人生は、漂流した船が大洋にさまよっているようなものです。
목적이 없는 인생은, 표류(漂流)한 배(船)가 큰 바다(大洋)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思うこと、願うことは誰しも抱くものであり、そしてそれは自由ですが、足もとをみつめた目的をもつことが大切です。
생각(상상)하는 것, 바라는 것(願う, 신에게 기원하는 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품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자유(自由)입니다만, 주변(足もと,신변)을 뚫어지게 본 목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쪽의 다른 항목에서, "足もと"을 "주변"을 주시하다, 로 번역했습니다.
★"약점을 잡다" "발목(발치)" "기반" "근처"란 뜻도 있습니다.
正念の在り方は、調和にあります。就職、結婚、育児、仕事、諸事全般にわたって、常に己を知り、その目的が、神の心である調和、愛の行為に適ったものであるかどうかを、正しく見ることです。
정념(正念)의 본연의 자세는, 조화(調和)에 있습니다. 취직, 결혼, 육아, 일(仕事), 모든 일에 전반(全般)에 걸쳐서, 항상 자기 자신을 알고, 그 목적이, 신(神)의 마음인 조화(調和), 사랑의 행위에 맞는 것인지 어떤지를, 올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適った物であれば、それに向かって努力することです。
적절한 것(適った物)이라면, 그것을 향해서 노력(努力)하는 것입니다.
念を抱くと、たいていの場合、それに応じたものが返ってきます。
마음(念)을 품으면, 대개의 경우, 그것에 응한 것이 되돌아옵니다.
念は、物を引き寄せるエネルギーを持っているからです。
생각(念)은, 물건을 끌어당기는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しかし不相応な願いや、しっとや、憎しみ、足ることを知らぬ欲望を抱くと、目的が適う前に反動がやって来ます。
하지만 걸맞지 않은 소원((不相応な願い)이나, 질투나, 증오(미움), 만족할 줄을 모르는 욕망을 품으면, 목적이 맞기 전에 반작용(反動)이 일어나게 됩니다.
念はエネルギーであり、そのエネルギーは、必ず自分自身に返ってくるので、正しい目的ならばいいが、そうでないと大変なことになります。
생각(念)은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며, 올바른 목적이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커다란 변고(큰일, 大變)가 생기게 됩니다.
念は魔術師です。
생각(念)은 마술사(魔術師)입니다.
科学が未発達の時代には、祈りや念によって、敵を倒すということが行われました。事実、そうしてことが流行した物です。
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기도나 생각(念)에 의해서, 적(敵)을
쓰러뜨린다고 하는 것이 행해졌습니다. 사실, 그러한 것이 유행했던 것입니다.
念の力で大石を空中に持ち上げ、大木をたおす。風を呼び、雨を降らせるといったような術が行われていたようですが、こうしたことは本来、邪道です。しかし、人間の中にたくわえられたエネルギーは、大きな山を動かすことも可能ですし、それは神が大宇宙を創造されたように、人間もまたそうしたことが出来るように仕組まれています。
염력(念の力, 의지력, 정신력)으로 큰 바위(大石)을 공중(空中)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큰 나무(大木)을 넘어뜨린다.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술법(術)이 행해졌던 것 같습니다만, 이러한 것은 본래, 사도(邪道, 올바르지 않은 그릇된 길, 정당하지 못한 방식, )입니다. 하지만, 인간 중에 (지식이나 체력)을 쌓은 에너지는, 큰 산(山)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며, 그것은 신(神)이 대우주를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또한 그러한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それほど人間は偉大なのですが、反面、邪の道に念力を使うと地獄に堕ちるしかありません。私たちは常に、念を正しく使うことが大切であり、そうしたときに、守護・指導霊が力を貸し、より偉大な、平和な仕事が成就できるようになるのです。
그만큼 인간은 위대(偉大)한 것입니다만, 반면에, 올바르지 않은 그릇된 방식(邪の道)으로 염력(念力, 의지력, 정신력, 초능력)을 사용하면 지옥(地獄)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생각(念)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했을 때에, 수호령(守護靈)・지도령(指導靈)이 힘을 빌러서, 보다 위대한, 평화로운 일(仕事)을 성취(成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 【본문 전체】
現代宗教の多くは、ただ祈ることのみが、念ずることだと思っている傾向がある。
현대종교의 대부분은, 오로지 기도하는 것만이, 마음속으로 비는 것(念ずるこ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経文というものは、拝むための道具ではない。経文の中に書いてある意味に、私達の眼は向け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
경문(經文,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합장 배례하기 위한 도구(道具)가 아니다. 경문(經文) 속에 쓰여 있는 의미(意味)에, 우리들의 눈(眼)은 돌릴 수 있어야 한다.(우리들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特に仏教は、むずかしい哲学化した経文を上げることが、一つの勤行と化している。
특히 불교(佛敎)는, 어려운 철학화(哲學化)된 경문(經文)을 올리는 것이, 하나의 근행(勤行)으로 변하고 있다.
★근행[勤行] ⓐ불도를 닦으며 수행하는 것 ⓑ불전에서 때를 정해 독경‧예배하는 것.
これは大きな間違いである。その中の意味にこそ意義のあることをなぜ悟らぬのであろうか。ありがたいお経だと思ったなら、その経文の文言の意味を実践するところに、意義のあることを悟らなくてはならない。
이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그 안의 의미(依微)야말로 의의(意義)가 있는 것임을 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고마운 경문(お經)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 경문(經文)의 문언(文言, 문장 속의 어구)의 의미를 실천하는 데에, 의의(意義)가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亡くなった人々に、お経を上げることによって功徳があると信じていることは大きな間違いなのである。なぜなら、もしこの世を去った人々の霊がその経文の意味すら分からないのになぜ功徳があるか、ということを考えてみることである。죽은 사람에게, 경문(お經)을 올리는 것에 의해서 공덕(功徳)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크나큰 잘못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옇혼(靈)이 그 경문(經文)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데 왜 공덕(功徳)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ただの観念論ではすまないことを知らなくてはならない。読者は自分の分からない言葉で相手から語られて、その理解が行きとどくであろうか。
부질없는 관념론(觀念論)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독자(讀者)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로 상대방에게 말하면, 그것을 상대방이 이해를 충분히할까요?(독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을 상대방에게 말했을 때, 그 말을 상대방은 충분히 이해할까요?)
人間は、現世での生活状態、心で思っている状態を持ち続けながらこの世を去って行くものであって、死んでしまったら即座に仏になるのだというならば、そのことを説く人々が実際に分かってそのような説明をしているのだろうかと、疑問を持たずにはいられない。物理学で言う慣性の法則を考えてみることである。あの世にも慣性の法則があるのだ。ここでいうそれは、現代の意識を持ったまま、次元の異なった世界に循環して行く死者は悟るには時間がかかるということである。
인간은, 현세(現世)에서의 생활태도,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줄곧 가지면서 이 세상을 떠나 가는 것이며, 죽어 버리면 바로(即座)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말을 설명(설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깨닫고(알고) 그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리학(物理學)에서 말하는 관성(慣性)의 법칙(法則)을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저 세상(あの世, 저승)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것은, 현대의 의식(意識)을 가진 그 상태로, 차원이 다른 세계로 순환(循環)해 가는 죽은 사람(死者)은 깨닫는 데에는 시간(時間)이 걸린다고 하는 것이다.
読者の中にはそんなことは分かるはずはないと反論する人々があるかもしれない。しかし私達は、即座にその事実の状態を現象化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る。독자(讀者) 중에는 그런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라고 반론(反論)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은, 당장((即座) 그 사실의 상태를 현상화(現象化)할 수가 있는 것이다.
これは事実であり、そのままの姿とその当時の言葉使いで、その人の特徴で、その関連の霊と語る状況を、疑問のある人には証明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る。
이것은 사실이며, 그대로의 모습과 그 당시의 말을 사용하며, 그 사랆의 특징이며, 그와 관련된 영혼(靈)과 말하는 상황을, 의문이 있는 사람에게는 증명(證明)할 수가 있는 것이다.
それは、その人の生活をしてきた念を、そのまま持っている事実であり、人間として正しい生活をした己自身を知っている霊以外は、地獄にいることを私達ははっきりと見ることも語ることも可能だからである。
그것은, 그 사람의 생활을 해 왔던 생각(念)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실이며, 인간으로서 올바른 생활을 한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영혼(靈) 이외에는, 지옥(地獄)에 있는 것을 우리들은 확실히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それだけに私達は、正しい心の在り方を悟り、神仏に祈ることもただ自己保存の祈りではなく、感謝の念を持ちその心で実践する中に、より以上の力を神仏から得られるのである。
그 정도로 우리들은, 올바른 마음의 본연의 자세를 깨닫고, 신불(神佛)에게 기도하는 것도 오로지 자기보존(自己保存)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念)을 갖고 그 마음으로 실천하는 중에, 보다 이상(以上)의 힘을 신불(神佛)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私達の心の中で念ずることが即現象化されるのであり、たとえば自分が欲望を果たそうと念ずる心はすでに欲望のとりことなる、という想念になり、自分の意識に記録されてしまう、というふうなことである。その記録を修正することはできない。
우리들의 마음속으로 두고 늘 생각하는 것(念ずること)이 즉 현상화(現象化)되는 것이며, 가령 자기 자신이 욕망을 달성하려고 마음속으로 비는(念ずる) 마음은 이미 욕망의 포로(捕虜)가 된다, 고 하는 상념(想念)이 되어, 자신의 의식(意識)에 기록(記錄)되어 버린다, 고 하는 식인 것이다. 그 기록(記錄)을 수정(修正)할 수는 없다.
私達が歩んできた過去を消す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私達の想念は、すべて記録し保存される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しかし不調和な念も、反省することによって、私達の心は進化するのであるから、反省のない人々は哀れである。反省は、神仏が人類に対するために与えた慈悲なのである。
우리들이 걸어 온 과거를 없앨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상념(想念)은, 이미 기록되어 보존(保存)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부조화(不調和)한 생각(念, 마음)도,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들의 마음은 진화(進化)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성이 없는 사람들은 불쌍하다. 반성은, 신불(神佛)이 인류에 대한 목적으로 주신 자비(慈悲)인 것이다.
また、神社仏閣に参詣することはその人の自由であるが、神仏はその人に対する幸・不幸の責任は持たないということを知らなくてはならない。正しい心の念と行為が、幸・不幸を造り出すのである。
또한, 신사불각(神社佛閣)에 참예(参詣)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自由)이지만, 신불(神佛)은 그 사람에 대한 행복(幸)과 불행(不幸)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마음의 생각(念)과 행위(行為)가, 행복(幸)과 불행(不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사(神社) ⓐ신(神)을 모셔 놓은 건물.
★불각(佛閣) ⓐ절(寺) ⓑ부처를 모셔 놓은 대청이나 집
正しい念によりその行為が神理に適っているならば、私達に協力してくださる指導霊 や守護霊達は必ず神の光を与えてくれる。またこの地球そのものも神体の一部であり、大神殿であるから、正しい念は必ず通ずる。
올바른 생각(念)에 의해 그 행위가 신리(神理)에 들어맞고 있다면, 우리들에게 협력(協力)해 주시는 지도령(指導靈)이나 수호령(守護靈)들은 반드시 신(神)의 빛을 제공해 주신다. 또한 이 지구(地球) 그 자체도 신체(神體)의 일부이며, 대신전(大神殿)이기 때문에, 올바른 생각(念)은 반드시 통한다.
神社仏閣は、将来人々の心の修行所、神理を学ぶ場所と変わり、また多くの人々の娯楽の場と変わって行くであろう。
신사불각(神社佛閣)은, 장래 사람들의 마음의 수행소(修行所), 신리(神理)를 배우는 장소로 바뀌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오락(娛樂)의 장소로 바뀌어 갈 것이다.
現代の神社仏閣の中には、霊域の高い場所もあって、実在界の諸天善神が常に連絡所として一念が現象化される場所もあるが、そのような神域ははなはだ少ない。従って神社仏閣はどこでも霊域が高い所だ、と信ずることは危険であり、かえって不幸を呼びこむこともあり得ることを悟らなくてはいけない。
현대의 신사불각(神社佛閣) 중에는, 영력(靈域)((오라 Aura))이 높은 장소도 있고, 실재계(實在界)의 제천선신(諸天善神)이 항상 연락소(連絡所)로서 일념(一念)이 현상화되는 장소도 있지만, 그와 같은 신역(神域, 신성한 곳)은 매우 적다. 따라서 신사불각(神社佛閣)은 어디라도 영역(靈域)((Aura)이 높은 장소이다, 라고 믿는 것은 위험(危險)하며, 도리어 불행을 불러들이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心の発見 神理篇에서, 팔정도의 정정편에서, 영력(Aur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正しい念を持っている人々は、必ず神仏の光によって保護され、他のよからぬ不調和な霊に支配されることはない。
올바른 생각(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불(神佛)의 빛에 의해서 보호(保護)되며, 다른 좋지 않은 부조화(不調和)한 영혼(靈)에게 지배당하는 일은 없다.
多くの人々が今まで、神とか仏とかいっているのは、実在界の天使達のことなのである。然し、天使も心の調和度によって段階があるということも悟らなくてはならない。また、天使達のほかに不調和な世界があるということも知らなくてはならない。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신(神)이라든가 부처(佛)라든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실재계(實在界)의 천사들인 것이다. 그렇지만(然し), 천사(天使)도 마음의 조화도(調和度)에 따라서 단계(段階)가 있다고 하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천사들과는 달리 부조화(不調和)한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私達の想像は無限大である。しかしその想像も正しい調和のための想像でないと、正念とはいえない。間違った念によって己を失う場合があることを知るべきである。
우리들의 상상(想像)은 무한대이다. 하지만 그 상념도 올바른 조화(調和)을 위한 상상이 아니면, 정념(正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잘못된 생각(念)에 의해서 자기를 잃는 경우가 있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その証拠には、不自然な新興宗教や不調和な仕事に専念している人々に、果たして心の安らぎがあるであろうか。自己の心の中に小さな枠をはめて常に格闘を続けているため、不幸になっている人は少なくないのである。
그 증거(證據)로는, 부자연한 신흥종교나 부조화한 일(仕事)에 전념(専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마음의 평안이 있는가 이다. 자기의 마음속에 작은 틀(枠)을 끼워서 항상 격투(格鬪, 씨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은 것이다.
人間は生き神さまになどなれるものではない。
인간은 살아 있는 신(生き神さま, 생불) 따위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神仏の心と調和することは、自分自身の正しい念と、行為以外にはないのである。
신불(神佛)의 마음과 조화(調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올바른 생각(念)과, 행위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神は己の心にあり、と知らねばならない。
신(神)은 자기의 마음에 있다, 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4.心行の言魂より 【 抜粋 】
4.심행의 말씀에서 【발췌】
正しく念じないと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올바르게 마음속으로 기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正念の反対は邪念です。邪念とは自分の都合だけしか考えない自己本位の想念であり、欲望の想念です。
정념(正念)의 반대는 사념(邪念, 악한 마음, 못된 생각)입니다. 사념(邪念)이란 자기 자신의 형편(사정)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기본위(自己本位, 자기중심)의 상념(想念)이며, 욕망의 상념(想念,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입니다.
欲望の想念が激しければ激しいほど、この地上界は混乱してきます。足ることを知らない欲望はたがいに相入れないエゴとなり、エゴは自分本位の我であるから相互協調は非常にむずかしいものとなります。
욕망(欲望)의 상념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이 지상계(地上界)는 혼란해지기 시작합니다. 만족할 줄을 모르는 욕망은 대개 용납할 수 없는 에고(이기주의)가 되며, 에고(이기주의)는 자기본위(자기중심)의 나(我)이기 때문에 상호협력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 됩니다.
念の方向が自分本位であればあるほど苦悩が多く、心に業(カルマ)をつくります。人々の心に業が多く生まれると、真実とニセものの区別がわからなくなり、地上は末法となってゆきます。
생각(念)의 방향이 자기본위(自分本位)가 되면 될 수록 고뇌(苦惱)가 많고, 마음에 업(業)(카르마)를 만듭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업(業)이 많이 생기면, 사실과 가짜(ニセもの)의 구별을 모르게 되어, 지상(地上)은 말법(末法)이 되어 갑니다.
思うことは念によって具体的な行為になります。
생각(상상)하는 것은 생각(念 마음, 소원)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행위가 됩니다.
たとえば、どこどこの学校を受験したいと考える。しかし、自分の実力からしてA学校はむずかしい。ではBにしようか、Cにしようかと思案します。この段階では、思うこと、考えることが心の中だけの話で、まだ行為にはなっていません。ところが、あれこれ考えた末、Bに決定したとします。すると当人は、Bに向かって進んでいくでしょう。つまり、受験準備という行為が始まるわけです。念の働きは、B学校に決めた、という意志の決定なのです。
예를 들면, 어디어디의 학교를 수험(受驗)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해서는 A학교는 어럽다. 그럼 B로 할까, C로 할까하고 이리저리 궁리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생각(상상)하는 것, 여러모로 생각하는 것이 마음뿐인 말이며, 아직 행위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B로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사자는, B로 향해서 진행해 가겠지요. 즉, 수험준비라고 하는 행위가 시작될 것입니다. 생각(念)의 기능(働き)은, B학교로 정했다, 라고 하는 의지(意志)의 결정(決定)인 것입니다.
すなわち、念というものは、こうしよう、ああしよう、こうありたい、という目的意識であり、意思の決定であり、行為である、というわけです。
즉, 생각(念)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렇게 하고 싶다, 라고 하는 목적의식(目的意識)이며, 의사(意思)의 결정(決定)이며, 행위(行為)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念によって、私たちは、心の中で思うこと、考える事の創造行為を具体的に形に現わしているわけです。
생각(念,소원)에 의해서,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생각(상상)하는 것,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판단하는 것)의 창조행위(創造行爲)를 구체적인 형태(形)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人の思いは、あの世に通じ、人の心にも通じます。しかし、ふつう、人に通じないのは大抵は外に気を取られ、それをキャッチしても、打消すか、忘れるか、仕事に追われているからです。
사람의 생각(思い, 생각하는 마음의 움직임‧내용‧상태)은, 저 세상(あの世, 저승)에 통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통합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 것은 대개는 밖으로 정신을 뺏겨서, 그것을 캐치(포착)해도, 부정(否定)하든가, 잊든가, 일(仕事)에 쫓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しかし、思うことを、念を通じて心に強く働きかけますと、相手によっては通ずるものです。怒りや憎しみ、嫉妬に念は、具体的にはキャッチできなくとも、その念を発した人に道で出会うと、なんとなく敵対視してしまう、というのがそれです。ところが、そうした念波が発せられても、こちらに何もなく、慈愛の心に満ちていると、敵対視の心は湧いてこず、その念を発した人はかえって気まずい思いにかられてゆきます。
하지만, 생각(상상)하는 것(思うこと)을, 생각(念, 마음, 소원)을 통해서 마음에 강력하게 작용하기 시작하면, 상대에 따라서는 통하는 것입니다. 분노나 증오, 질투의 념(念, 마음)은, 구체적으로는 캐치(포착)할 수 없더라도, 그 념(念, 마음)을 발한 사람을 길(道)에서 마주치면, 왜 그런지 모르게 적대시(敵對視)해 버린다, 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의 파동((念波)이 발해져도, 이쪽에서 왜 그런지 모르게, 자애(慈愛)의 마음으로 충만되어 있으면, 적대시(敵對視)하는 마음은 솟아나지 않고, 그 념(念, 마음)을 발한 사람은 오히려 어색하게 여기는 감정에 사로잡혀 갑니다.
このように念というものは、具体的な意思決定とそれに伴う行為とであると同時に、念そのものの働きによって他に作用を及ぼします。
이와 같이 생각(念)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의사결정(意思決定)과 그것에 동반하는 행위(行爲)임과 동시에, 생각(念) 그 자체의 기능(働き)에 의해서 달리 작용을 끼칩니다.
念はエネルギーであり、心の中の創造行為を形に具象化して行くものです。
생각(念)은 에너지이며, 마음속에 창조행위를 형태(形)로 구상화해 가는 것입니다.
また、一度発した念波は、一秒間に地球を七回り半もまわる光以上の速さで自分に返ってきます。つまり、リンネします。善念は善念として返り、悪念は悪念として、もとの発信者に返ってくるのです。
또한, 일단 발한 생각의 파동(念波)는, 1초 동안에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빛 이상의 속도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 옵니다. 즉, 린네(輪廻, 윤회)합니다. 착한 생각(善念)은 착한 생각(善念)으로 되돌아오고, 나쁜 생각(惡念)은 나쁜 생각(惡念)으로, 본래의 발신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ですから、常に安心した境涯を毎日の生活の上に望むならば、自分さえよければ外はどうでもという自己保存の念を改め、他を生かす、助け合いの、愛の想念、中道の法を、ます、心の中に確立させることです。
그러므로, 항상 안심(安心)한 경애(境涯)를 매일의 생활 상에 바란다면, 자기만 좋으면 남은 어찌되어도 좋다고 하는 자기보존의 생각(念, 마음)을 고치고, 남을 살리는, 서로 돕는, 사랑의 상념, 중도(中道)의 법(法)을, 우선, 마음속에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思うこと、念ずることは、万生万物の創造の根源であり、仕事を為し得るエネルギーでありますから、これを正すことがなにをさておいても重要であるといえます。
생각(상상)하는 것(思うこ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는 것(念ずること, 마음속으로 비는 것, 기원하는 것)은, 만생만물(萬生萬物)의 창조의 근원(根源)이며, 일을 해 낼 수 있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는 것이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것만은 중요(重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人の幸、不幸の分かれ目は、心の中の思うこと、念ずることによって決定されて行きます。
사람의 행복(幸), 불행(不幸)의 갈림길은, 마음속으로 생각(상상)하는 것(思うこ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는 것(念ずること, 마음속으로 비는 것, 기원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決定)되어 갑니다.
また、想念は、カルマをつくってゆきますから、そのカルマを越えてゆくためにも、左右に片寄らない心の在り方が重要になります。
또한, 상념(想念)은, 카르마(Karma)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그 카르마를 초월해 가기 위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본연의 자세가 중요하게 됩니다.
中道の想念は、慈悲と愛、そうしてそれは調和というバランスがとれた状態をいうわけですが、中道の極致は神の心であり、法でありますから、ここまで人の心が昇華しますと、人は苦楽のカルマから本当に解脱する事が出来ます。
중도(中道)의 상념은, 자비(慈悲)와 사랑(愛), 그리고 그것은 조화(調和)라고 하는 균형이 잡힌 상태(狀態)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중도(中道)의 극치(極致)는 신(神)의 마음이며, 법(法)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사람의 마음이 승화(昇華)하게 되면, 사람은 고락(苦樂)의 카르마(업)에서 정말로 해탈(解脫)할 수 있습니다.
ところで、ときおり、こういう質問をうけます。
그건 그렇고, 가끔, 이와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思うことは現われる、念ずるとその通りになるというが、私は金が欲しいと日ごろから思い念じているが、さっぱり、金が貯まらない、これはどういうわけか、というのです。
생각(상상)하는 것은 나타난다,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면((念ずると,마음속으로 빌면, 기원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지만, 저는 돈이 필요하다고 평소부터 마음속으로 빌고 있지만, 조금도, 돈이 모이지 않는데, 이것은 어떤 까닭인지, 라고 질문을 받은 것입니다.
お金が欲しい、金を貯めたいという欲望は大抵の人がそれを思い念じています。念は人によって強弱がありますが、みんなが同じものを念じますと、その念はぶつかり合い、交錯してゆきます。そうして、やがて交錯した念は、強い念に弱い念が吸収され、強く念じた人に集まります。つまり、それを望む念の強いところに金は集まってくることになります。
돈이 필요하다, 돈을 모으고 싶다고 하는 욕망은 대개 사람이 그것을 마음속으로 빌고 있습니다. 념(念, 마음, 소원)은 사람에 따라 강약(强弱)이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을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면(念じますと,마음속으로 빌면, 기원하면), 그 마음(念)은 서로 부딪쳐서, 교착(交錯)해 갑니다. 그래서, 이윽고 교착(交錯)한 생각(念)은, 강한 마음에 약한 마음에 흡수되어, 강하게 기원한 사람에게 모입니다. 즉, 그것을 바라는 마음(念)의 강한 쪽으로 돈(金)은 모이게 됩니다.
お金が集まるもう一つの理由は、人にはそれぞれ今生での目的があります。それは本人の今生での意思とは関係なく働きます。今生の目的が経済的問題よりもむしろ人を救うことにあるとすれば、その目的を外れた意思をいくら強くいだいたとしても、お金は集まらな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돈(お金)이 모인다는 또 하나의 이유(理由)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이승(今生)에서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이승(今生)에서의 의사(意思)와는 관계없이 작용합니다. 이승(今生)의 목적이 경제적 문제(問題)보다도 오히려 사람을 구제하는 것(사람을 돕는 것)에 있다고 하면, 그 목적을 제외한 의사(意思)을 아무리 강력하게 품었다고 해도, 돈(お金)은 모이지 않게 됩니다.
こうした意味から念の作用は、その人の今生での目的と合致したときに、もっともよくその効果を現わし、最大に発揮されます。金が集まらないと愚痴をいう前に、人も欲しがるお金(お金は有限)を集めれば、集めただけその反作用もあるということを考えてください。いっときの悦楽を求めることと、長期間にわたる苦悩を考えるならば、一定限度しかない物を奪い合う愚かさに気付くと思います。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念)의 작용(作用)은, 그 사람의 이승(今生)에서의 목적과 합치(合致)했을 때에, 가장 잘 그 효과(効果)를 나타내어, 최대로 발휘됩니다.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불평(愚痴)을 말하기 전에, 남(人)도 갖고 싶어하는 돈(お金)((돈은 유한(お金は有限))을 모으면, 모은만큼 그 반작용(反作用)도 있다고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주십시오. 한때의 쾌락(快樂)을 찾는 것과, 장기간에 걸친 고뇌(苦惱)를 생각하게 된다면, 일정(一定)한 한도(限度)밖에 없는 것(物)을 서로 쟁탈하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一事が万事、何事によらず、このように考えていけば、念の作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り、念はどのように使えば正しく行使できるかということが、おわかりになったと思います。
하나를 보면 다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一事が万事), 무슨 일이든, 이와 같이 이것저것 생각해 가면, 생각(念,마음)의 작용(作用)은 어떠한 것이며, 생각(念,마음)은 어떻게 사용하면 올바르게 행사(行使)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아시게 되셨다고 생각합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이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 【발췌】
人間の幸、不幸の分かれ目は、心の中で思うこと、念ずることによって決まる。
인간의 행복(幸), 불행의 갈림길은, 생각(상상)하는 것(思うこ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는 것(念ずること)에 의해서 정해진다.
念はエネルギーであり、心の中で想像したことを、形の上に創造してゆく力である。
생각(念)은 에너지이며, 마음속으로 상상(想像)한 것을, 형상으로 창조해 가는 힘이다.
神は自ら、思うこと、念ずることによって万生万物を創造されたのであり、神がこの宇宙をこのように創造しようと思われたことが、物質宇宙という姿になって現象化されたのであり、神のその創造の原理を、人間はそのまま与えられ持たされているのである。
신(神)은 몸소, 생각(상상)하는 것(思うこ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는 것(念ずること)에 의해서 만생만물(萬生萬物)을 창조하신 것이며, 신(神)이 이 우주(宇宙)를 이와같이 창조하려고 생각하신 것이, 물질우주(物質宇宙)라고 하는 모습이 되어 현상화(現象化)된 것이며, 신(神)의 그 창조의 원리(原理)를, 인간은 그대로 제공받아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神は天地万物を、陰陽の原理によって創造されたと同じように、思うこと、念ずることも二つに分かれる。
신(神)은 천지만물(天地万物)을, 음양의 원리에 따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상상)하는 것(思うこ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는 것(念ずること)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 善、正、 明、高貴、他を生かす ー 良い運命 선, 옳바름, 밝음, 고귀, 남을 살리는 - 좋은 운명
念(생각, 마음, 소원)
\ 悪、不正、暗、卑賤、自己本位 ー 悪い運命 , 악, 옳지 않은 것, 어둠, 비천, 자기본위 - 나쁜 운명
人間は このような二つのどちらかの想念を持つ。善でもなければ悪でもない。正しいのでもなければ、正しくないのでもない、その中間だという考え方はないのである。善と悪、正と不正の間で人間の心が揺れ動くわけであるが、この揺れ動く、判断に迷う時間が多ければ多いほど、その人はなんにもできずに不幸になることになる。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의 중에 어느 쪽인가의 상념을 갖는다. 선(善)하지도 않은가 하면 악(悪)하지도 않다. 올바른가 하면, 올바르지도 않다. 그 중간(中間)이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없는 것이다. 선(善)과 악(悪)、옳바름(正)과 옳바르지 않은 것(不正)의 사이에서 인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지만, 이렇게 흔들리며, 판단을 망설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된다.
だから幸福になりたい人は、善なることに、正しいことに、明るい方に、パッと決断して実行するという習慣をつけることである。そうすると運が向いてくるのである。自分だけよければよい、という自己本位の想念は自分を不幸にし、他を生かす慈悲と愛の想念は自分を幸福にする。
그래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착한 것에, 올바른 것에, 밝은 방법으로, 확 판단해서 실행한다고 하는 습관(버릇)을 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운(運)이 트여오는 것이다((そうすると運が向いてくるのである. 그렇게 하면 운(運)이 돌아오는 것이다)). 나만 좋으면 (남이야 어찌 되었든) 좋다, 라고 하는 자기본위의 상념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남을 살리는 자비(慈悲)와 사랑(愛)의 상념(想念)은 자신을 행복(幸福)하게 한다.
念はあの世にも通じ、人の心にも通ずる。念は祈りであって、人が何かを念じているということは、常に何かを祈っていることである。多くの人は、神仏の前に座って、一定の時間、祈ることだけが祈りだというように考えているが、日常不断に思っていることも祈りなのである。だからその人の幸、不幸は、その人が一日二十四時間の内に、よい想念と悪い想念、明るい想念と暗い想念と、どちらの想念が多かったか、少なかったか、ということによって決まってくるのである。생각(念)은 저 세상으로도 통하고, 사람의 마음(心)에도 통한다. 생각(念)은 기도이며, 사람이 뭔가를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念じているということ)은, 항상 뭔가를 빌고(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신불(神佛) 앞에 앉아서, 일정한 시간, 비는 것만이 "기도한다" 라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평소에 끊임없이 생각(상상)하고 있는 것도 기도(祈禱)인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복(幸), 불행(不幸)은, 그 사람이 하루 24시간 동안 속에서, 좋은 상념과 나쁜 상념, 밝은 상념과 어두운 상념과, 어느 쪽이 상념이 많았는가, 적었는가, 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정해져 오는 것이다.
ある人の事を思う時、その心はその人に通じているのであるが、その人が他のことに気を取られ、それをキャッチしても打消すか、仕事に追われているかなどして気づかないのである。
어떤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은 그 사람에게 통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겨, 그것을 케치(포착)해도 부정(否定)하든가, 일에 쫓기고 있는가 따위로 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입니다. 아 귀가 간지럽네, 누가 내 말 하나? 하거나, 혹은 문득 누군가가 생각이 번쩍하고 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念の速さは、光以上の速さである。善念は善念として返り、悪念は悪念として返る。だから、常に安心した生活をしようと思うならば、自分さえよければよいという自己本位の想念を改めて、他を生かす、助け合いの、愛の想念、中道の法をまず、心の中に確立させることである。
생각(念)의 속도는, 빛 이상의 속도이다. 착한 생각(善念)은 선념(善念)으로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나쁜 생각(惡念)은 악념(惡念)으로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래서, 항상 안심(安心)한 생활을 하려고 생각한다면, 나만 좋으면 (남이야 어찌 되었든) 좋다고 하는 자기본위(自己本位)의 상념을 고치고, 남을 살리는, 서로 돕는, 사랑의 상념, 중도(中道)을 법(法)을 우선, 마음속에 확립(確立)시키는 것이다.
中道の極致は神の心であり、法であるから、そこまで人の心が昇華すると、人は苦楽のカルマから解脱することができる。
중도(中道)의 극치(極致)는 신(神)의 마음(心)이며, 법(法)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사람의 마음(心)이 승화(昇華)하면, 사람은 고락(苦樂)의 카르마(업)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다.
念は、その人の今生での目的と合致したときに、もっともよく聴かれる。人間は輪廻転生しながら魂を磨いてゆく。一回の生まれ変わりの短い時間で、すべて魂を完全に磨くことはできない。一回の生まれ変わりによって磨かなければならない魂には限界がある。それぞれ目的がある。その目的に適った祈りは実現するが、適っていない祈りは実現しないのである。
생각(念)은, 그 사람의 이승(今生)에서의 목적과 합치(合致)했을 때에, 가장 잘 들을 수 있다(もっともよく聽かれる). 인간은 윤회전생(輪廻轉生)하면서 영혼(魂)을 아름답게 가꾸어 간다. 한 번의 환생의 짧은 시간으로, 전부 영혼(魂)을 완전하게 닦을 수는 없다. 한 번의 환생에 의해서 아름답게 가꾸지 않으면 안 되는 영혼(魂)에는 한계가 있다. 저마다 목적(目的)이 있다. 그 목적에 맞는 기도(祈禱)는 실현되지만, 맞지 않는 기도(祈禱)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念ずるのに美辞麗句を並べる必要はない。神はその人の心を見られるのであるから、どんなに美しい言葉を並べて祈っても、その心に嘘があればその祈りは実現しない。言葉は少なくても、心に誠があればその祈りは必ず実現する。
마음속으로 비는 데에(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다, 念ずるのに), 미사 여구((美辭麗句)를 늘어 놓을 필요는 없다. 신(神0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으며 빌어도, 그 사람에게 거짓(嘘)이 있으면 그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말은 많지 않아도, 마음에 진심(誠, 성의)가 있으면 그 기도는 반드시 실현된다.
キリストが、「かくれたるに在(いま)す汝らの父に祈れ」と教えられたのは、誠の心をもって祈れということである。
그리스도(Christ)가, 「숨어 계시는 너의 아버지에게 기도하라(かくれたるに在(いま)す汝らの父に祈れ)」라고 가르치셨던 것은, 진실한 마음(誠の心)으로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6절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kjv)
"pray to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esv)(niv)
비밀히, 남몰래, 배후에서, 숨어서
"pray to your Father, who is unseen" (niv)(Berean Study Bible)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もしかしてその祈りは、自己中心の自己満足の祈りである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場合は、キリストが「御心の天になるが如く」と祈られたように「それが実現することが神さまの御心でありましたら実現させてください。もし、御心でありませんでしたら実現しなくてもよろしいです。」という祈りを最後にしなければいけない。
혹시나 그 기도는, 자기중심의 자기만족의 기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는 경우는, 그리스도가 「마음(御心)의 하늘인 것 같이」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시라면 실현시켜 주십시오. 만약, 마음이 아니시라면 실현시켜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念が通ずるために、祈りが聞かれるために、更に大事なことは、調和を目的として、まず、やれるところから実践することである。実践は何一つせずにして、ただ座って祈るだけでは祈りは聞かれない。実践せずに祈る祈りは欲望の祈りである。実践してこそ、その誠心が神に通ずるのであるから、実践のない祈りは聞かれない。
생각(念)이 통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더욱더 중요한 것은, 조화(調和)을 목적으로 해서,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實踐)은 무엇 하나 하지 않고서, 그저 앉아서 비는 것만으로는 기도는 듣지 않는다. 실천하지 않고 빌기만 하는 기도는 욕망의 기도이다. 실천해야만 비로소, 그 진심(誠心, 거짓이 없는 마음)이 신에게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천이 없는 기도는 듣지 않는다.
念ずるとは、ただ単に思う事だけではいけないので、具体的な意思決定とそれに伴う実際行動である。念はエネルギーであり、創造行為の源流であるから、その創造行為が具体的な形をと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当然である。
마음속으로 빈다는 것은(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단지 생각(상상)하는 것만으로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사결정(意思決定)과 그것에 따르는 실제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생각(念)은 에너지이며, 창조행위의 원류(源流)이기 때문에, 그 창조행위가 구체적인 형태(形)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目に見えないものは「ない」というが、心は目に見えないではないか。「念」とは「今の心」と書く。念ずるとは、今の心が思うことでありそれが祈りである。だから祈りを離れた生活はないのである。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ない)」라고 하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생각(念)」이란 「지금의 마음(今の心)」이라고 쓴다. 마음속으로 빈다는 것(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今)의 마음(心)의 마음이 생각(상상)하는 것이며 그것이 기도(祈禱)이다. 그래서 기도를 떠난 생활은 없는 것이다.
★파자법을 사용하고 있네요. ^^
正念とは潜在意識の底から継続的に間難なく起こってくる想念のことであり、「心の底からのまことの願い」である。特に気まぐれに思うのは単なる願望にしか過ぎない。願望と正念とを混同しない事である。
정념(正念)이란 잠재의식의 속(底)에서 계속적(繼續的)으로 쉽사리 활동하기 시작하는 상념인 것이며, 「마음속으로부터의 진정한 바람(소원)((心の底からのまことの願い)」이다. 특히 내치락들이치락하게 생각(상상)하는 것은 단순한 소원(願望)에 불과하다. 소원(願望)과 정념(正念)을 혼동(混同)하지 않을 일이다.
一ぺんにはできないかも知れないが、二十四時間をすべて神への感謝と報恩で満たすことである。神へといっても実際は、自分を支えてくれる周囲の人々に対して感謝し報恩することである。一日二十四時間、あなたは明るい心でいた時間と、暗い心でいた時間と、どちらが長いか。
한꺼번에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24시간을 전부 신(神)에 대한 감사(感謝)와보은(報恩)으로 채우는 것이다. (神)에게로 라고 해도 실제로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하고 보은하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당신은 밝은 마음으로 있었던 시간과, 어두운 마음으로 있었던 시간과, 어느쪽이 긴가?
「思わない」ということは、思わないのではなくて、「思わないという一つの思いである」ということがわかれば、われわれは、自分の想念を、悪の否定の方向にふり向けず、絶えず、善の高低の方にふり向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がよくわかってくる。と同時に、われわれは後退し停止することなく、絶えず、前進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もわかってくる。
「생각(상상)하지 않는다(思わない)」라고 하는 것은, 생각(상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상상)하지 않는다고 하는 하나의 생각이다(思わないという一つの思いである)」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들은, 자신의 상념(想念)을, 나쁜 부정(否定)한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끊임없이, 착한 고저(高低)으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고 하는 것을 잘 알게 된다. 그것과 동시에, 우리들은 후퇴하고 정지(停止)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진적이여 한다고 하는 것도 알게 된다.
「無」になろう、「空」になろうとすることは思考を停止することである。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또 노력이나 일이 헛되게 될 것이다), 해도 효과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고(思考)를 정지(停止)하는 것이다.
日本の他力信仰をしている人たちは、拝めば救われると聞かされてそこで思考が停止してしまって、「では、なぜ拝めば救われるのか」ということを考えていない。
일본(日本)의 타력신앙(他力信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합장 배례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듣고서 그래서 사고(思考)가 정지(停止)되어 버려서, 「그럼, 왜 합장 배례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正念は、一貫性、継続性があるが、単なる願望はムラ気でバラバラである。単なる「願いごと」が実現しないのは念の法則に反しているからである。
정념(正念)은, 일관성(一貫性), 계속성(繼續性)이 있지만, 단순한 소망은 변덕스럽고 어수선하다. 단순한「바라는 일(願いごと,소원)」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생각(念)의 법칙에 반해 있기 때문이다.
われわれの想念を絶えず神に、善にふり向ける。そのために禅定はするのである。
우리들의 상념을 끊임없이 신(神)에게, 선(善)으로 돌린다. 그 때문에 선정(禪定)하는 것이다.
※끝 부분인, 소노사시라 히로치카님의 정념에 대한, 해설은, 좀 이상? 합니다.
도대체, 저로서도, 뭔 말인지, 뜻이, 좀 그렇습니다.
팔정도 중에, 이 부분, 정념(正念), 굉장히 번역하기가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 完 -
八、正定 ・・・ 正しく定に入ること
中 팔, 정정 ・・・올바르게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1.人間釈迦より 【 全文 】
1.인간석가에서 【본문 전체】
さて、「正定」についてゴーダマは考えるのであった。正定の根本は反省であろう。反省は光明世界に住するかけ橋であろう。ねたみ、怒り、そしり、そして諸々の執着から離れるには、反省をおいてほかにはない。反省を積むことによって、心と肉体の調和が生れ、進んでは己の心と大宇宙の心との合一がはかられよう。反省せずして、心を空にするとマーラー(魔王)、ヤクシャ―(夜叉・やしゃ)、アスラー(阿修羅)、ナガー(龍、蛇)に支配され、自分の心を悪魔たちに売り渡してしまうことになる。
그래서(그런데), 「정정(正定)」에 대해서 고타마 싯다르타(산스크리트어: सिद्धार्थ गौतम, Gautama Siddhārtha, 팔리어: Gotama Siddhattha 한국 한자: 瞿曇 悉達多(구담 실달다))는,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정(正定)의 근원은 반성(反省)인 것이다. 반성(反省)은 광명세계(光明世界)에 사는(거하는) 가교(架橋)인 것이다. 질투, 분노, 비방(비난), 그리고 모든 집착(執着)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반성 이외에 딴 것은 없다. 반성을 거듭하는 것에 의해서, 마음가 육체의 조화가 생기고, 나아가서는 자기 마음과 대우주의 마음과의 합일(合一)을 꾀할 수 있다. 반성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心を空にする) 마라(Mara)(마왕(魔王)), 야쿠샤(Yaksa((야차((夜叉, 두억시니))), 아수라(Asura)((阿修羅)), Naga((룡龍, 뱀(蛇))에게 지배당하여, 자신의 마음을 악마(惡魔)들에게 팔아 넘겨 버리게 된다.
★가교[架橋] ①서로 떨어져 있는 두 대상을 이어 주는 사물이나 사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존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신"들, 이라고 생각해선 큰일납니다.
正定は反省という止観(しかん)の行為でなければなるまい。
정정(正定)은 반성이라고 하는 지관(止觀,멈추어서 자세히 봄)이 없으면 안 된다.
ゴーダマは三十六年間の人生を、以上の八つの規範に照らして、洗い出してみようと決意するのだった。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는 36년간의 인생을, 이상의 여덟 가지의 규범에 비추어, 밝혀내 보겠다고 결의(決意)하는 것이었다.
すなわち、八正道という仏法(正法)に照らして、自分の過去をふりかえってみることにしたのであった。
즉, 팔정도(正道)라고 하는 불법(佛法)((正法))에 비추어,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 보게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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ゴーダマは、過ぎし日をふりかえってみると、自分が歩いてきたその想念と行為は、自己存のエゴしか見当たらないことを知ったのであった。そうして、心の遍歴について、中道という仏法(正法)の照明を当てていくと、至るところ、黒雲が渦をまき、正法に適う行為のすくなさに唖然とするのであった。父や義母に対する態度、部下との競争意識、動物愛護にしても、そのほとんどが独りよがりであったり、自己主張の現れであった。これまで六年間の山中での修業にしても、一日も早く悟りたいという自己の欲望が先に立ち、外見にとらわれたみせかけの修行であった。悟りへの重要な過程は、心の内面にたいする反省であり、正法という大自然の摂理に照らしてみて、ものの見方、考え方、とらえ方、そして、それにもとづく行動が、果たして正しいものであるかどうかを、内省することがキメ手になるのであった。そうして、正しくない面が浮彫りされたならば、二度と再び、同じことをくりかえさないように、想念と行為のうえで現わしていくことであった。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는 지난날을 뒤돌아보자, 자신이 걸어왔던 그 상념과 행위는, 자기보존의 에고(자존심, 이기심)밖에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편련(遍歴)에 대해서, 중도(中道)라고 하는 불법(佛法)((정법(正法))의 조명(照明)을 비추어 가자, 이르는 곳마다, 먹구름(墨雲)이 소용돌이 치고, 정법(正法)에 맞는 행위가 적음에 아연(啞然)하는 것이었다. 아버지(父, 슈도다나,Suddhodana)나 의모(義母,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를 대하는 태도, 부하(部下)와의 경쟁의식(競爭意識), 동물 애호(動物愛護)라고 해도, 그 대부분이 독선(獨善)이었거나, 자기주장이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6년 동안의 산중(山中)에서의 수업(修業)이라 해도,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싶다고 하는 자기의 욕망이 맨 먼저 일어났고, 외관(外見)에 사로잡힌 겉치레의 수행(修行)이었다. 깨달음을 향한 중요한 과정은, 마음의 내면에 대한 반성이며,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자연의 섭리(攝理)에 비추어 보고, 사물을 보는 방법, 사고방식, 파악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에 입각한 행동(行動)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어떤지를, 반성(内省)하는 것이 결정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바르지 않은 면이 부각된다면, 두번 다시, 같은 것(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상념과 행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ゴーダマは過去をふりかえり、反省することによって、心の曇りを、一つ一つ払いのけていった。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는 과거를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흐트러진 마음((心の曇り=마음의 우울함(우울증))을, 하나씩 떨쳐 버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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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六年間の過去をふりかえり、その想念と行為について、黒白をつけてゆくことは、大変なことであった。黒白をつけるには、中道を根本とした第三者の立場で自分を眺めなければならない。身びいきがあっては意味を持たない。これでは反省にはならないからだ。それだけに、反省が厳正なものであればあれほど、愚かな自分が浮彫りされてくる。人に話すことも出来ない。
36년 동안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그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 흑백(잘잘못)을 가려 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흑백(잘잘못)을 가리는 데에는, 중도(中道)을 근본으로 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의 편을 특별히 드는 일이 있어서는 반성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반성이 엄정(嚴正)한 것이면 것일수록, 어리석은 자신이 부각되어 간다. 남에게 말할 수도 없다.
反省して悪いと自認したとしても、その事実を消すことはできない。要はその事実を、これからの人生の過程において、改めてゆく以外にないのである。また、過去のその善悪について、それに執着を持つと、これからの行動が束縛されてくる。本来の自由性がそこなわれてっしまう。特に悪の行為について、
반성해서 나쁘다고 자인(自認)했다고 해도, 그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결국(要)은 그 사실을, 지금까지의 인생의 과정에 있어서, 고쳐가는 이외에 없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그 선악(善惡)에 대해서, 그것에 집착을 가지면, 지금까지의 행동이 속박당하게 된다. 본래의 자유성(自由性)이 손상되어 버린다. 특히 악(惡)한 행위에 대해서,
「悪かった・・・・・・」
「내가 나빴다・・・・・・」
と認めたまではいいが、それにとらわれると暗い想念をつくりだしてしまう。この点も中道の心が大事である。過去の全体験は、魂の修行の一過程であるからである。反省の功徳は反省後の中道の実践に掛かっている。功徳は身心の調和という姿で現れてくる。
라고 인정한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에 사로잡히면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어 버린다. 이 점도 중도(中道)의 마음이 중요하다. 과거의 모든 체험(體驗)은, 영혼(魂)의 수행(修行)의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성의 공덕(公德)은 반성 후의 중도(中道)에 실천(實踐)에 달려 있다. 공덕은 신심(身心)의 조화(調和)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ゴーダマは三十六年の過去を反省し、開眼する。そうして開眼後の実践によって、開眼の領域とその内容を、いっそう充実したものにしていくのである。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는 36년의 과거를 반성하고, 개안(開眼, 눈을 뜸)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뜬 다음의 실천(實踐)에 의해서, 눈을 뜬 영역(領域)과 그 내용(內容)을, 한층 더 충실하게 익혀 갔던 것이다.
2.心の指針より 【 全文 】
2.마음의 지침에서 【본문 전체 】
正定の在り方は、日常生活における正しい想念で生活が行えることを意味します。
정정(正定)의 본연의 자세는,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올바른 상념으로 생활이 행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つまり、八正道の神理に適った生活行為なのです。
즉, 팔정도(八正道)의 신리(神理)에 맞는 생활행위인 것입니다.
それにはまず、八正道の正見、正思、正語、正命、正進、正念について、反省をすることから始まります。
그것에는 우선, 팔정도의 정견(正見, 올바르게 봄), 정사(正思, 올바르게 생각(상상)함), 정어(正語, 올바르게 말함), 정명(正命,올바르게 생활함), 정진(正進,올바르게 길에 정진함), 정념(正念,올바르게 마음속으로 빔, 기원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함)에 대해서, 반성(反省)을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今日一日をふりかえり、八正道の正しさに反した想念と行為がなかったかどうか。あったとしたら、どこに、なぜ………というように、静かに反省し、思念と行為について検討する事です。そして、正道に反したことは、神に詫び、明日からは、二度と再び同じ過失をくりかえさないよう努力することです。
오늘 하루를 뒤돌아보고, 팔정도의 올바름에 반한 상념과 행위가 없었는지 어떠했는가를. 있었다고 한다면, 어디에, 왜………라고 하는 식으로, 조용히 반성하고, 사념(思念,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행위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도(正道)에 반한 것은, 신(神)에게 사죄하고, 내일부터는, 두번 다시 똑같은 실수(過失)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こうして日常生活が神理に適った生活行為が出来るように、毎日の努力を積み重ねて行くことです。
그리고 나서 일상생활에 신리(神理)에 맞는 생활해위가 될 수 있도록, 매일의 노력을 쌓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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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定は、反省から始まり、そうして、神の心である調和の心と自分の心が一体になることです。しかもそうした神の心を、日常の生活の中に具現でき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
정정(正定)은, 반성에서 시작되며, 그리고 나서, 신(神)의 마음인 조화(調和)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의 한몸(一體)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신(神)의 마음을, 일상의 생활 속에 구현(具現)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つまり、正定の第一歩は、禅定と言う反省的瞑想から始まり、やがて、守護・指導霊との対話となり、菩薩の心である慈悲と愛の行為が出来るようになることが第一の目的。
즉, 정정(正定)의 첫걸음(第一歩)은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반성적 명상(反省的瞑想)에서 시작되며, 이윽고, 수호령(守護靈)・지도령(指導靈)과의 대화가 이루어져, 보살(菩薩)의 마음(心)인 자비(慈悲)와 사랑의 행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첫째 목적입니다.
★실재계(實在界)인 천상계(天上界)에서, 마음의 조화의 정도(調和度)에 따른, 차원이 상하가 있는 데, 4차원 유계, 5차원 영계, 6차원 신계, 여기에서 말하는, 자비와 사랑 그 자체의 마음으로 사는 영혼의 형제와 자매들은, 7차원 보살계(菩薩界)라는, 여래계 바로 아랫 단계인 세계가 살고 있는 분들입니다.
第二の目的は、禅定の心が、そのまま日常生活に生かされてゆくことです。
두번째의 목적은, 선정(禪定)하는 마음이, 그대로 일생생활에 활용되어 가는 것입니다.
禅定は、日常生活をより豊かに、自己の心がより大きく、広く、神理に適った生活が出来るようになるためのものですから、禅定のための禅定、つまり、反省のための反省では、本当の反省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선정(禪定)은, 일상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자신의 마음을 보다 크게, 넓게, 신리(神理)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선정(禪定)을 위한 선정(禪定), 즉, 반성을 위한 반성(反省)으로는, 진정한 반성(反省)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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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中禅定しているわけにはゆきません。私たちは仕事を持ち、家庭を持ち、そして、社会の一員として生活してゆくのですから、禅定は、一日のうちの一部であり、一日の活動の動力源と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た意味から、正定の在り方は、禅定そのものではなく、反省そのものでもなく、一日の生活行為が八正道に適った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わけです。
하루종일 선정(禪定)만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일(仕事)을 가지고, 가정을 가지고, 그리고, 사회의 일원(一員)으로서 생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정(禪定)은, 하루 동안의 일부(一部)이며, 하루의 활동의 동력원(動力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정(正定)의 본연의 자세는, 선정(禪定)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성(反省) 그 자체도 아니며, 하루의 생활행위가 팔정도에 맞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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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うして、私たちは、正定を日常生活のものとする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如心(にょしん)という段階に到達します。
그래서, 우리들은, 정정(正定)을 일상생활의 것으로 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여심(如心)이라고 하는 단계(段階)에 도달(到達)합니다.
如心とは、己の心がある程度理解できた事であり、それはまた相手の心をも見通せる能力を備えた状態をいいます。
여심(如心)이란, 자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를 잘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能力)를 갖춘 상태(狀態)를 말합니다.
普通は人の心とか、性格というものは長いこと交際してみないとわからないものです。あの男とは二十年もつき合ってきたが、あんな男とは知らなかった、という話をしばしば耳にします。
보통(普通)은 사람의 마음이라든가, 성격(性格)이라고 하는 것은 오랫동안 교제(交際)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저 남자(男)와는 20년간 사귀어 왔지만, 저런 남자였는지는 몰랐다. 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ところが、如心の心を体得すると、未知の相手でも、名前さえわかれば、その人の意識の程度、性格、生活態度がわかってしまうのです。
그런데, 여심(如心)의 마음을 체득(體得)하면, 미지(未知)의 상대방(相手)도, 이름까지도 알면, 그 사람의 의식(意識)의 정도(程度), 성격(性格), 생활태도(生活態度)을 알아 버리는 것입니다.
同時にまた、日常生活が安心して送れるようになります。
동시에 또한, 일상행활을 안심(安心)하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こういうように、八正道の功徳というものは、普通では考えられないようなすばらしいものがあるわけです。
이렇게, 팔정도의 공덕(功德)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훌륭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3.心の発見 神理篇より 【 全文 】
3.마음의 발견 신리편에서 【본문 전체】
私達が、神仏の子としての自覚ができることにより、毎日の生活自体変わってくるはずである。この世は修行所である以上、やがては帰らなくてはならない世界が存在しているのである。私達は煩悩という海の中でも悟ることはできる。心の調和を計り、反省の瞑想は、己の霊域(オーラー)を造り出し、己の心の神性、仏性が潜在意識の扉を開き、不滅の世界、あの世の生活をも思い出す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우리들이, 신불(神佛)의 자녀(子)로서의 자각(自覺)을 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매일의 생활자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この世, 이승)은 수행소(修行所)인 이상(以上), 머지않아서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世界)가 존재(存在)_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번뇌(煩惱)라고 하는 바다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조화(調和)을 도모하고, 반성의 명상(瞑想)은, 자기의 영역(靈域)(오라 Aura)를 만들어 내어, 자기의 마음의 신성(神性), 불성(佛性)이 잠재의식의 문(扉)을 열고, 불멸(不滅)의 세계, 저 세상(あの世, 저승)의 생활도 또한 생각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오라(Aura). ⓐ사람이나 물건이 발산하는 영묘한 기운 혹은 독특한 분위기.
意識は実在界も、現象界のどこにも自由自在に行ける。
의식(意識)은 실재계(實在界)도, 현상계(現象界)의 어디라도 자유자애로 갈 수 있다.
私達が眠っているときは、肉体からの霊子線を通して、実在界や、この現象界の知っている場所や、かつて自分の生まれた過去世の場所に行っている場合もある。さらに神仏から安らぎの光のエネルギーを意識は吸収してくる。
우리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육체에서의 영자선(靈子線)을 통해서, 실재계(實在界)나, 이 현상계(現象界)의 알고 있는 장소(場所)나, 옛날에 자신이 태어났던 과거세(過去世)의 장소로 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신불(神佛)로부터 평안안 빛 에너지를 의식(意識)은 흡수(吸収)하게 된다.
★영자선(靈子線)에 대해서는, 본문의 아래쪽에 설명이 있습니다.
眠る、ということは、肉体という舟を休めるとともに、意識、心の洗濯にもなるのである。また、意識はその天使達に磨かれるときもある。酒も呑まないのに二日酔いのような状態や、風邪でも引い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肉体的症状がそのために起きる場合がある。ときには、心臓の動悸がしたりして気分が悪くなるときもある。
잔다(眠る), 라고 하는 것은, 육체(肉體)라고 하는 배(舟)를 중지하고 휴식시키면 다같이, 의식(意識), 마음(心)의 세탁(洗濯)도 되는 것이다. 또한, 의식(意識)은 그 천사들(天使達)에 의해서 닦일 때도 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을 잃지도 않았는데 숙취(宿醉)와 같은 상태(狀態)나, 감기(風邪)라도 걸린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육체적 증상(症狀)이 그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심장(心臟)의 동계(動悸)를 하거나 해서(심하게 두근거리거나 해서)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다.
★심장의 동계(動悸)한다, 영혼(의식)은, 흔히 말하는, 가슴(심장)에 살고 있습니다. 믿으시거나 안 믿으시거나, 그래서 가슴이 뭉클하다, 가슴이 아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 홧병은, 개인적으로 볼 때, 영혼(의식)이 심하게 아픈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슴(심장)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しかし、守護霊や指導霊に磨かれた十数時間後はすっきりする。ただし、その肉体的症状は病気ではないから医者に診せても治らない。
그렇지만, 수호령(守護靈)이나 지도령(指導靈)에게 연마된(닦인) 열대여섯 시간 후에는 상쾌해진다(맑아진다). 단, 그 육체적 증상은 병(病氣)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醫師)에게 진찰을 받아도 낫지 않는다.
人々の中で、もしこのような現象に悩まされている方々があったら、良く反省し、早速正法に適った生活をすることをおすすめする。
사람들 중에서, 만약 이러한 현상(現象)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잘 반성(反省)하고, 조속히 정법(正法)에 맞는 생활을 하실 것을 권합니다.
これ以外にも、イライラ、怒りっぽい、などという状態になっている人々は、これは不調和な低級霊に支配されている場合が多い。神仏の光の保護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とこういうふうになるときがる。
이 이외(以外)에도, 초조하며, 사소한 일에도 곧잘 화를 잘내는 경향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태(狀態)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은 부조화(不調和)한 저급령(低級靈)에게 지배(支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불(神佛)의 빛의 보호(保護)을 받을 수가 없다면 이러한 경향이 될 때가 있다.
良く頭痛持ちなどという人があるが、これは取り越し苦労をする人に多い。あらゆることを全部頭に詰めこみすぎるのである。
자주 두통을 호소한다고 하는 등이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많다. 모든 것을 전부 머리속에 지나치게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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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達の頭脳は、体全体の細胞集団の総合指令室であり、コントロールセンターなのである。記憶室は、大脳皮質の神経線維に流れる一切の電気的な波動粒子によって成立している。そこから発信された振動のエネルギーは、意識に伝達されて記録される。
우리들의 두뇌(頭腦)는, 몸 전체의 세포집단(細胞集団)의 종합지령실(總合指令室)이며, 컨트롤 센터(관리·통제 본부, control center)인 것이다. 기억실(記憶室)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신경선유(神經線維[(의학용어)로 신경섬유))에 흐르는 일체(一切)의 전기적(電氣的)인 파동입자(波動粒子)로 성립(成立)되어 있다. 그곳에서 발신(發信)된 진동(振動) 에너지는, 의식(意識)에 전달(傳達)되어 기록(記錄)된다.
「私達のすべては脳内部に記録されている」という考え方はだから間違っているのである。もし私達の脳が、一切の記憶装置を持ち、考えるエネルギーを発信する場所、と考えるならば、眠っているときに、考えたり見聞したりすることは出来ないはずであろう。
「우리들의 모든 것은 뇌의 내부(腦內部)에 기록되어 있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그래서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뇌(腦)가, 일체의 기억장치(記憶裝置)을 가지고, 이것저것 생각하는(판단하는) 에너지를 발신하는 장소, 라고 생각(판단)한다면, 잠을 자고 있을 때에, 이것저것 생각하거나 보고 듣거나 할 수 없을 턱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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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達が眠っていても脳波の振動が発信されているというのは、意識とのコンタクトを計っているためであり、霊子線が切れて意識がもどらなくなったときは、脳波の振動は停止し、肉体は光子体と分離され、あの世に帰ること、死を意味す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
우리들이 잠을 자도 뇌파(腦波)의 진동(振動)이 발신(發信)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식(意識)과의 콘택트(접촉)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며, 영자선(靈子線)이 끊어져 의식(意識)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는, 뇌파(腦波)의 진동(振動)은 정지(停止)하고, 육체는 광자체(光子體)와 분리(分離)되어, 저 세상(あの世, 저승)으로 돌아가는 것, 죽음(死)을 의미(意味)하게 되는 것이다.
★광자체(光子體)는, 영혼의 본래의 모습을 뜻합니다. 누구나 다, 단, 지옥에 떨어져 고향인 실재계(實在界) 즉 극락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안은, 황금빛이 아닌, 어두운 빛이나 붉은 빛을 하고 있습니다.
脳波の振動数も、五官を通して脳内に通じ、その発信振動により意識に報告されているのだが、睡眠中の振動数が異なっているのは、このような組み合わせになっているからである。過去世は、肉体細胞では思い出せ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뇌파(腦波)의 진동수(振動數)도, 오관(五官)을 통해서 뇌속(腦內)으로 통하고, 그 발신 진동(發信振動)에 의해서 의식(意識)에 보고(報告)되고 있는 것인데, 수면중(睡眠中)의 진동수가 달라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조합(組合)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세(過去世)는, 육체세포(肉體細胞)로는 생각해낼 수 없다, 고 하는 것이다.
私達は日本にばかり生誕するわけではない。肉体条件の異なるあらゆる世界の国々に自分が望んで転生輪廻している生命であることを知るべきで、肉体的先祖がすべてであると考えている人々は、ここに誤りを起こすのである。
우리들은 일본(日本)에만 탄생(生誕)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조건(肉體條件)의 다른 전세계의 나라들에 자신이 바램으로 전생윤회(轉生輪廻)하고 있는 생명(生命)인 것임을 알아야 하며, 육체적 조상(先祖)가 전부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잘못을 일으키는 것(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生命は両親から、と考えるなら、なぜ親子の間に不調和な現象が起るのか。なぜ性格が異なるのか、なぜ考え方が異なるのか。
생명(生命)은 양친(兩親)에게서, 라고 생각한다면, 왜 부모와 자식(親子) 간에 부조화(不調和)한 현상(現象)이 일어나는가? 왜 사고방식이 다른가?
これには答えられないはずである。
이것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メンデルの遺伝の法則は、肉体遺伝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
멘델의 유전(遺傳)의 법칙은, 육체유전(肉體遺傳)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私達の脳細胞は約二百億ある、といわれている。しかしそこは、記憶の道程路にしかすぎない。もし人々が、記憶脳細胞を唱えるならば、私達の交信の実験をお目にかけよう。
우리들의 뇌세포(腦細胞)는 약 200억(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는, 기억(記憶)의 도정로(道程路)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기억뇌세포(記憶腦細胞)을 주장한다면, 저희들이 교신(交信)의 실험(實驗)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私達霊道者は、あらゆる次元の異なった世界との交信が可能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
저희들 영도자(靈道者)는, 온갖 차원(次元)이 다른 세계(世界)와의 교신(交信)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正しい神理の実践生活の中で、定(じょう)に入ることにより、私達は、体が宇宙大に拡大され、神仏の意識と調和され、心の安らぎを味わう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올바른 신리(神理)의 실천(實踐) 중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에 의해서, 저희들은, 몸(體)이 우주의 크기(宇宙大)로 확대(擴大)되어, 마음의 평안을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ある人は、想念停止によって悟りを開いたという。万象万物一切の現象は、一時も停止することがないにもかかわらず、想念停止の瞬間に動物霊に支配され、俺は神だ、などという偽善者もいるが、そういう本人は常に病弱であり、また物欲念を拭い去ることのできない人なのである。病弱の原因を、信者の業を受けたのだ、と逃げ口上をいうが、事実は、暗い想念によって憑依霊に憑かれているのである。
어떤 사람은, 상념정지(想念停止)에 의해서 깨달았다(득도했다)고 한다. 만생만물(萬生萬物)은, 한시(一時)도 정지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념정지(想念停止)의 순간(瞬間)에 동물령에게 지배되어, 나는 신(神)이다, 등이라고 하는 위선자(僞善者)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본인(本人)은 항상 병약(病弱)하며, 또한 물욕의 생각(物欲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병약(病弱)의 원인(原因)은, 신자(信者)의 업(業)(카르마)을 받은 것이다, 라고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어두운 상념에 의해서 빙의령(憑依靈)에게 홀려 있는 것이다.
また、山中に入って修行したと称する者が、あたかも立派な修行者のように思われがちであるが、これは逆である。
또한, 산속에 들어가서 수행(修行)했다고 칭하는 사람이, 마치 훌륭한 수행자(修行者)처럼 생각하기 쉽상이지만, 이것은 반대이다.
滝に打たれたからといって、煩悩は滅するものではない。肉体修行の苦しさに、意識と肉体が調和せず、その瞬間に主として動物霊に支配され、その変化(へんげ)を見たり、霊聴を聞いたとかいっているが、これは本物ではない。千人界や、天狗界の人々に多い修行法であるが、このような人々は自我が強く、慈悲心もなく、本人が常に不調和で安らぎのない者であり、悟りには遠い人間である。神秘の術に通じている、などという手合いにはこうした動物霊に支配されている人々が多い。
폭포수를 맞으며 (고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해서, 번뇌(煩惱)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수행(肉體修行)의 고통(괴로움)에, 의식(意識)과 육체(肉體)가 조화되지 않고, 그 순간에 주로 동물령(動物靈)에게 지배당하여, 그 변화(變化)를 보거나, 영청(靈聽)을 들었다든가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짜(本物)가 아니다. 천인계(千人界)나, 천구계(天狗界)의 사람들에게 많은 수행법(修行法)이 있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자아(自我)가 강하고, 자비심(慈悲心)도 없고, 본인(本人)이 항상 부조화하며 평안은 없는 자이며, 깨달음과는 먼 인간(人間)이다. 신비(神秘)한 술법(術)에 통하고 있다, 와 같은 말을 하는 패들에게는 이러한 동물령(動物靈)에게 지배당해 있는 사람들이 많다.
このような、行ないは、正しい定とはいいがたい。
이러한, 행위(수행)은, 올바른 선정(禪定)((定))에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正法に帰依して悟りを開いている人々は、皆謙虚である。驕る心はないのである。この人々は、一切の現象にとらわれず、正しく八正道を実践し、三世を見通す力を持っている。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다 겸허(謙虛)하다. 교만을 떠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일체(一切)의 현상(現象)에 사로잡히지않고, 올바르게 팔정도(八正道)을 실천(實踐)하고,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 또는, 전세(前世) ‧현세(現世) ‧후세(後世, 내세(来世))를 꿰뚫어 보는 힘(力)을 갖고 있다.
人間は山中に入って修行するために生まれてきたのではない。正しい仕事に専念し、人間らしく生きるために肉体舟を持ったのである。
인간은 산속에 들어가서 수행(修行)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올바른 일(仕事)에 전념(専念)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육체배(肉體舟)를 가진 것이다.
インドのゴーダマも、六年間の山中の修行では、遂に悟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を知るべきである。
인도(印度)의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도, 6년간의 산속의 수행(修行)으로는, 마침내 깨달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イスラエルのイエスも、子供の頃、山中に入ったが、ほとんど肉体的荒行はしていない。
이스라엘(Israel)의 예수(Jesus)도, 어린 시절, 산속에 들어갔지만, 거의 육체적 고행(荒行)은 하고 있지 않다.
神理を悟らないで、禅行をしても、それは形式にしかすぎない。神理を悟った実践生活の中での肉体的な山中行など、スポーツとしてなら良い。だが、悟りは、形式や理論ではない。
신리(神理)를 깨닫지 않고, 선정수행(禪行을 해도, 그것은 형식(形式)에 불과하다. 신리(神理)를 깨달은 실천생활(實踐生活)하는 중에서 육체적인 산속에서의 수행(山中行)과 같은 것은, 스포츠(운동)으로서 하면 좋다. 하지만, 깨달음은, 형식(形式)이나 이론(理論)이 아니다.
形式や理屈のみにとらわれている人々は、未だ悟りの一歩にも踏み込んでいない。
형식(形式)이나 억지(이론)((理屈))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아직 깨달음의 한 걸음(一歩)조차도 발을 들여놓고 있지 않다(한 걸음도 디디지 못하고 있다).
正しい定とは、神理の悟りと、正しい想念と行いの中に成就するものなのである。
올바른 선정(禪定)((正しい定))이란, 신리(神理)의 깨달음과, 올바른 상념과 행위 속에서 성취(成就)되는 것인 것이다.
学問仏教でも、形式仏教でも、観光仏教でも、また葬式仏教でも、もはや悟りを得ることはできない。
학문불교(學問佛敎)도, 형식불교(形式佛敎)도, 관광불교(觀光佛敎)도, 또한 장례식불교(葬式佛敎)도, 이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이제는 깨달을 수 없다).
インドの時代に説いたゴーダマの仏教によってこそ、悟りへの道は開けることを悟るべきである。
인도 시대에 설명한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의 불교(佛敎)에 의해서만 비로소, 깨달음으로의 길(道)은 열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イエスの時代にもどることである。
예수(Jesus)의 시대(時代)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なぜなら、その当時の神理に帰ることが、現代社会の人々に、本当の心の尊厳を悟らせ得る早道だからである。
왜냐하면, 그 당시의 신리(神理)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존엄(尊嚴)을 깨우칠 수(일깨울 수) 있는 지름길(早道)이기 때문이다.
このような、自分自身の悟りを、如心、という。
이러한,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여심(如心), 이라고 한다.
八正道は、己自身の悟りであり、人間は最低この悟りを得るために生まれてきたのである。
팔정도는,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며, 인간은 최저(最低)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正法は一国家のみに通ずるものではなく、全宇宙の神理であることを知らなくてはならない。仏教も、キリスト教も、ゴーダマの時代、イエスの時代に帰ることが、先決である。
정법(正法)은 한국가만에 통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全宇宙)의 신리(神理)인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佛敎)도, 기독교(キリスト敎)도, 고다마(Gautama Siddhārtha, Gotama Siddhattha)의 시대(時代), 예수(Jesus Christ)의 시대(時代)로 돌아가는 것이, 선결(先決)이다.
神理は、時代に拘束されるものではない。物質文明は生活の知恵であり、より高い次元に心を持つことが万物の霊長であることを悟らなくてはならない。
신리(神理)는, 시대(時代)에 구속(拘束)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문명은 생활의 지혜(知惠)이며, 보다 높은 차원(次元)으로 마음을 갖는 것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4.心行の言魂より 【 抜粋 】
4.심행의 말씀에서 【발췌】
正定とは、反省を言います。
정정(正定, 올바르게 선정에 들어감)이란, 반성(反省)을 말합니다.
私たちは、自己反省を通して、ものの道理が理解され、同じ間違いの愚かさから解放されてゆきます。
우리들은, 자기 반성을 통해서, 사물의 이치(道理)가 이해되어, 똑같은 잘못의 어리석움에서 해방되어 갑니다.
反省こそ、神が人間に与えた慈悲であり、愛の能力といえましょう。
반성이야말로, 신(神)이 인간에게 주신 자비(慈悲)이며, 사랑의 능력(能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動物にも本能・感情はありますが、反省という理性の能力、知性の働きは、人間をおいてほかにはありません。
동물(動物)에게도 본능(本能)・감정(感情)은 있습니다만, 반성(反省)이라고 하는 이성(理性)의 능력, 지성(知性)의 기능(働き, 작용)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この意味で、正定の反省は、人間だけに神から与えられた特権であり、その特権を生かしてこそ、進歩があり、無限の調和に向かうことが出来るのです。
이 의미(意味)에서, 정정(올바르게 선정에 들어감)(正定)의 반성은, 인간만에게 신(神)으로부터 부여된 특권(特權)이며, 그 특권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진보(進歩)이며, 무한한 조화(調和)로 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反省は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進・正念の七つの規範について行います。
반성(反省)은, 정견(正見, 올바르게 봄), 정사(正思, 올바르게 생각(상상)함), 정어(正語, 올바르게 말함), 정업(正業, 올바르게 일함), 정명(正命,올바르게 생활함), 정진(正進,올바르게 길에 정진함), 정념(正念,올바르게 마음속으로 빔, 기원함,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함)의 일곱가지의 규범(規範)에 대해서 행합니다.
中道の尺度を持って、今日一日をふりかえり、ものを正しく見たか、思ったか、語ったか、働いたか、生活したか、念じたか、友をいたわったか、と反省します。
중도(中道)의 척도(尺度)를 가지고,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았나, 생각했나, 말했나, 일했나, 생활했나, 기원했나(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했나, 마음속으로 빌었나), 친구를 돌보았나, 라고 반성(反省)합니다.
人の個性と業(カルマ)というものは、一見似てるようだが、ちがうのです。しかし、その個性と業というものが、日常席活の上に非常に大きく影響しており、したがってその個性と業のちがいを、まず発見する努力、そして反省をしてみたいものです。
사람의 개성(個性)과 업(業)((카르마)라고 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개성과 업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생활 상에 상당히 큰 영향(影響)을 끼치고 있고, 따라서 그 개성과 업의 차이(ちがい)를, 우선 발견(發見)하는 노력(努力), 그리고 반성(反省)을 해 보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それにはまず、ずっとさかのぼって、一才から十才、十才から二十才、二十才から三十才、三十才から四十才、というように、年代別に自己反省をしてゆきますと、自分の業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り、全体の中での自分の在り方、自分の役割が明らかになると思います。個性というのは、ここでは、人それぞれの持味、特性、そうして、ここから生ずるその人の人格、役割を指します。
그것에는 우선, 훨씬 거슬러올라가서, 한 살 때부터 열 살, 열 살 때부터 스무 살, 스무 살 때부터 서른 살, 서른 살 때부터 마흔 살, 이라고 하는 것처럼, 연대별(年代別)로 자기 반성을 해 가게 되면, 자신의 업(業)은 어떠한 것이며, 전체 중에서 자신의 본연의 모습(자세), 자신의 역할(役割)이 밝혀진다고 생각합니다. 개성(個性)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사람 각자의 소질(持味), 특성(特性), 그리고, 여기에서 생기는 그 사람의 인격(人格), 역할(役割)을 가리킵니다.
年代別に反省をしていきますと、人それぞれの性格が、大体、三才頃から十才ぐらいまでに、ほぼ形づくられていることに気付きます。
연대별(年代別)로 반성을 해 가게 되면, 사람 저마다의 성격(性格)이, 대체, 세 살 무렵부터 열 살 정도까지에서, 거의 형성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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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というものは、自分自身にとっても、人にとってもプラスになる面が少なく、いわゆるその人の欠点、短所という形で現れています。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도, 남에게 있어서도 플러스가되는 면(面)이 적고, 온갖 그 사람의 결점(缺點), 단점(短所)이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業はもともと執着の想念であり、それは家庭の環境、教育、思想、習慣、友人などの影響をうけて、つくられて行(ゆ)きます。
업(業)은 본래 집착(執着)의 상념(想念)이며, 그것은 가정(家庭)의 환경, 교육, 사상(思想), 습관, 친구 등의 영향(影響)을 받고, 만들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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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た業というものは、常にリンネしており、短気という性格は、ふだんは出なくとも、その場面に会うと、つい出てしまうという性質を持っています。つまり短気のリンネです。
또한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린네(윤회)하고 있고, 성질이 급하다는 성격(性格)은, 보통 때는 나오지 않아도, 그 경우(場面,처지)에 직면하면, 무심코 나와 버린다는 성질(性質)을 갖고 있습니다. 즉 성질이 급한 것의 린네(輪廻,윤회)입니다.
そこで、反省し、その原因をつきとめたならば、勇気と努力と知恵をつかって、二度、三度と同じ事を繰り返すことがないようにして行くことです。
그래서, 반성하고, 그 원인을 밝혀냈다면, 용기와 노력과 지혜(知恵)을 들여서, 두 번, 세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해 가는 것입니다.
原因がわかり、その原因にほんろうされていたことに気付きますと、その原因によって影響を与えてきた人びと、そうしてまた、神に対して詫びなければいられない気持ちになるものです。
원인이 밝혀지고, 그 원인에 농락당하고 있던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원인에 의해영향을 끼쳐왔던 사람들과, 그리고 또한, 신(神)에 대해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悔い改めの心こそ、業を超えて行く足場になるからです。
악행이나 과실을 뉘우쳐 고치는 마음((penitentia 라틴어) 참회)) 혹은 회개))하는 마음(心)이야말로, 업(業)을 초월해가는 발판(足場,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もし、本当に悪かった、あるいは感謝と報恩の気持ちが湧いてこないとすれば、その人の反省は、まだまだ本物とはいえないでしょう。
만약, 정말로 나빴다, 혹은 감사와 보은의 기분이 솟아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의 반성은, 아직도 진짜(本物)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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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に仕方としては、各人が工夫してやってもらってよいのです。が、一つの方法として、まず、現在の欠点、短所をノートに書き記(しる)し、その一つ一つについて、年代を追って、原因をつきとめます。
반성(反省)에 방법(仕方)으로서는, 각자가 궁리(工夫)해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방법(方法)으로서, 우선, 현재의 결점(缺點), 단점(短所)을 노트(Note)에 적고(기록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연대(年代)를 뒤쫓아서, 원인을 밝혀냅니다.
もう一つのやり方は、両親と自分、夫と自分、子供と自分、兄弟姉妹と自分、友人と自分、上役と自分、後輩と自分、得意先の人々と自分、隣人と自分、というように、他と自分とを対比させ、これまで生きて来たさまざまな状況の中で、自分の心がどのように動き、どのような態度ですごしてきたか。
또 다른 하나의 하는 방법은, 양친(兩親)과 나, 남편(夫)과 나, 아이(子供, 자식)과 나, 형제자매와 나, 친구와 나, 상사(윗사람)과 나, 후배와 나, 단골 손님(단골거래처)의 사람들과 나, 이웃과 나, 라고 하는 식으로, 타인(他)과 나 자신(自分)과를 비교해보고, 지금까지 살아 온 다양한 상황(狀況) 중에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떠한 태도(態度)을 지내왔나?
これらを前と同じように年代別に追ってゆく方法です。
이러한 것들을 전과 마찬가지로 연대별(年代別)로 뒤쫓아 가는 방법(方法)입니다.
ものを対比しながら反省をしますと、比較的自分本位の傾向から離れ、客観的に真実をとらえることができます。
사물(もの)을 비교하면서 반성을 하면, 비교적 자기본위(자기중심)의 경향(傾向)에서 떠나서, 객관적(客觀的)으로 진실(眞實)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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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の反省は、自分の在りのままの姿、内在する正直な心に照らして、両親に対して自分はどう対処してきたか、両親の献身に対して、自分はどれほど孝養したか、と疑問、追及して行くものです。
중도(中道)의 반성(反省)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姿), 내재(内在)하는 정직(正直)한 마음에 비춰서, 양친(兩親)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대처(對處)해 왔는가, 양친(兩親)의 헌신(獻身)에 대해서, 나는 어느만큼 효도(孝養)했던가, 라고 하는 의문(疑問)을, 추궁(追及,추적)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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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うして自分の欠点はすべて自己保存という自我の想念がつくり出しており、この想念に自分が支配されているかぎりは、正見、正思、正語といった正しい生活、調和された生活は期待できないわけです。不幸の100%は自分の想念の在り方にありますから、幸福を望むなら、中道の生活に軌道修正する必要があるわけです。
이렇게 해서 나 자신의 결점(缺點)은 전부 자기보존(自己保存)이라고 하는 자아(自我)의 상념(想念)이 만들어 내고 있고, 이 상념(想念)에 내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 한은, 정견(正見, 올바르게 봄), 정사(正思, 올바르게 생각함), 정어(正語, 올바르게 말함)이라고 한 올바른 생활, 조화(調和)된 생활은 기대(期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행의 100%는 자기 자신의 상념(想念)의 본연의 자세(모습)이기 때문에, 행복(幸福)을 바란다면, 중도(中道)의 생활에 궤도를 수정(軌道修正)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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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正定の反省は、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想念を軸として行われることが必要です。
그럼, 정정(正定, 올바르게 선정[禪定]에 들어감)위 반성(反省)은, 이렇게 해서, 올바른 상념을 축(軸)으로 해서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反省後の瞑想は、心を豊かに安定させます。
반성 후의 명상(瞑想)은, 마음을 느긋하게(관대하게) 안정시킵니다.
心のバイブレーションは神の心に近づいて行(ゆ)きます。
마음(心)의 바이브레이션((振動, 진동))은 신(神)과 비슷해져 갑니다.(마음(心)의 바이브레이션(vibration,진동)은 신(神)과 친밀하게 되어 갑니다)(마음(心)의 바이브레이션은 신(神)과 거리가 가까워져 가게 됩니다).
心が落着き平静になりますと、守護霊の通信をうけやすくなり、示唆に豊(と)んだ考えが腹の当たりから浮かんでくるようになります。
마음이나 성격(성향) 등이 온화하고 조용하고 평정(平靜)해지면((마음이 안정되어 평정해지면)), 수호령(守護靈)의 통신(通信)을 받기 쉽게 되고,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생각(考え, 사고[思考])이 속마음(腹)의 짐작(当たり)에서 떠오르게 됩니다.
平静な心を生活の場に保ちつづけますと、外界の動きに心を動揺させることがなくなり、外界のさまざまな動きを正確にキャッチすることができます。
평온(平靜)한 마음을 생활의 장(場)에서 계속 유지하게 되면, 외계(外界)의 움직임에 마음을 동요(動搖)시키는 일이 없어져서, 외계(外界)의 다양한 움직임을 정확(正確)하게 캐치(포착)할 수 있습니다.
心を内に向け、外に向けるなということは、外界の動きに心をとらわれず、これらをすべて心の糧とすることです。
"마음(心)을 안(内)으로 돌리고, 밖(外)으로 돌리지 말라(心を内に向け、外に向けるな)(혹은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주의하고), 딴 것에 신경을 쓰지 마라 心を内に向け、外に向けるな)" 라고 하는 것은, 외계(外界)의 움직임에 마음을 사로잡히지 않고, 이러한 모든 것을 마음의 양식(糧)((정신적인 활동의 근원, 정신의 지주 心の糧=こころのかて))으로 하는 것입니다.
誰かが自分を中傷したとします。心が外に向いているときは、すぐそれに反発し、心をいらだてます。ところが内に向いているときは、その中傷を平静にうけとめ、冷静な立場でその中傷の中身を考えます。もし自分に非のないものとすれば、中傷した人は真実を知らぬ気の毒な人であるわけですから、誤解を解く機会がなければ相手のために祈ってやることです。中傷の中に自分を置くと、それだけ心を不安定にさせ、生活のバランスを崩してゆきます。毒は食わないことでありますが、中傷という一つの事柄を通して、人間の心の姿を知る機会ができたのですから、心が内に向いているときは、すべてが心の糧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
누군가가 자신을 중상(中傷)했다고 합시다. 마음이 밖으로 향하고 있을 때(마음을 딴 것에 쓰고 있을 때)는, 곧 그것에 반발(反發)해서, 마음을 초조하게 합니다(안절부절못하게 합니다. 짜증나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안으로 향해 있을 때는, 그 중상(中傷)을 평정(平静)하게 받아내고(막아내고), 냉정한 입장(立場)으로 중상(中傷)의 내용(中身)을 판단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잘못(非)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중상(中傷)을 한 사람은 진실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인 것이기 때문에, 오해(誤解)을 풀 기회가 없으면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祈禱)해 주는 것입니다. 중상(中傷)의 속(中)에 자신을 놓으면, 그만큼 마음을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생활의 밸런스(균형)을 무너뜨려 갑니다. 독(毒)은 먹지 않는 것이지만(중상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는 것이지만毒は食わないこと), 중상(中傷)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항(事柄)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의 모습을 알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안으로 향하고 있을 때는(주의하고 있을 때는心が内に向いているときは), 모든 것이 마음의 양식)((정신적인 활동의 근원, 정신의 지주 心の糧=こころのかて))이 되는 것입니다.
★中傷2 [중상] ⓐ근거가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나 지위에 해를 입힘
★中傷謀略 [중상모략]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나 지위를 손상시키는 중상과 ⓑ속임수로 남을 해롭게 하는 모략을 아울러 이르는 말
こうして正定を重ねていきますと、やがて静(心)と動(生活)のバランスが保たれ、不動の心が養われてきます。つまり、正定の目的は、一つには中道に照らした反省にありますが、今一つは、その静なる心を日常生活の中で活かしつづける不動心にあるということです。
이렇게 정정(올바르게 선정[禪定]에 들어감)을 거듭해 가게 되면, 이윽고 평온(静)(마음(心))과 행동(動)(생활(生活))이 밸런스(균형)이 유지되어, 부동(不動)의 마음이 길러지게 됩니다. 즉, 정정(正定)의 목적은, 하나는 중도(中道)에 비춘 반성에 있습니다만, 또 하나는, 그 평온한 마음(静なる心)을 일상생활 속에서 계속 살리는 부동심(不動心)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5.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下巻より 【 抜粋 】
5.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의 저서 심행의 해설 하권에서【발췌】
反省ということで多くの人が間違いを犯しやすいのは、欠点、業の修正にばかり気を取られて、よいことをどしどし実践して前進することを怠ることである。반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많은 사람이 잘못을 범하기 쉬운 것은, 결점(缺點), 업(業)의 수정(修正)에만 정신이 팔려서, 좋은 일(것)을 척척 실천(實踐)해서 전진(前進)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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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をしたら、「よし、やるぞ」という勇気が出てきて、反省したことを積極的に実践して、そうしてその反省したことに打ち克って、人生の勝利者となり、業を修正して乗り越えられたことに対して感謝する事が出来る、という反省をし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正しい反省は積極的な人生の推進力になるが、間違った反省は、かえって業に執着して人生を暗くしてしまう。
반성을 한다면, 「좋아, 해 보자(よし、やるぞ)」라고 하는 용기를 내서, 반성한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그래서 그 반성한 것을 이겨내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 업(業)을 수정하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감사(感謝)할 수 있다, 고 하는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올바른 반성은 적극적인 인생의 추진력(推進力)이 되지만, 잘못된 반성은, 도리어 업(業)에 집착(執着)해서 인생을 어둡게 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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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カルマ)というと、多くの人が悪い業だけを考えてしまう。業には悪い業もあれば、良い業もあるのである。よいことをする習慣性、傾向性もあるのである。だから、よいことはどんどん実践してゆく事である。よいことを実践した時には、心に喜びが感じられてくる。よいことをしないと、生きる喜びが感じられないのである。
「업(業)(카르마)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나쁜 업(業)만을 생각해 버린다. 업(業)에는 나쁜 업(業)도 있다면, 좋은 업(業)도 있는 것이다. 좋은 일(것)을 하는 습관성(習慣性), 경향성(傾向性)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자꾸 실천해 가는 것이다. 좋은 것을 실천했을 때는, 마음에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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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をする場合は、自分の良い面(長所)よ、悪い面(短所)とを書き出してみることである。短所だけを書いてはいけない。そうして自分のよい面(長所)を確認して上で、こういうことはいかんなと短所を反省して、「よし、今度はこれをこのようにしてやろう」と反省することである。
반성을 하는 경우는, 자신의 좋은 면(장점)과, 나쁜 면(단점)을 적어 보는 것이다. 단점만을 적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좋은 면(장점)을 확인하고 나서, 이래서는 글렀는데 라고 하는 단점을 반성하고, 「좋아, 이번에는 이것을 이렇게 해 보겠다」고 반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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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は、悪を善に、欠点を長所に置き換える作業なのである。だから反省は楽しいことなのである。「反省は、ああ楽しいな、これでまた自分が良くなる。」と明るい心で座れるようになったら合格である。欠点が修正されてくると心が安らかになる。自分の心が安らかになると自分の心が明るくなり、自分の心が明るくなると周囲も明るくなる。
반성은, 악을 선으로, 결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반성은 즐거운 일인 것이다. 「반성은, 아 좋군, 이래서 역시 내가 좋아진다」면 밝은 마음으로 앉을 수 있게 된다면 합격이다. 결점이 수정되어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면 자기 마음이 밝어지며, 자기 마음이 밝아지면 주위도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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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が大事であるのは、反省によってのみ心は浄化できるので、他のどんな方法をもってしても心をきれいに浄化す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る。
반성이 중요한 것은, 반성에 의해서만 마음은 정화(浄化)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마음을 아름답게 정화(浄化)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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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れわれの想念を絶えず神に、善にふり向ける。そのために禅定はするものである。
우리들의 상념을 끊임없이 신(神)에게, 선(善)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때문에 선정(禪定)은 하는 것이다.
正定、または、禅定、瞑想ともいう。天台大師は、止観といわれた。
정정(正定), 혹은, 선정(禪定), 명상(瞑想)이라고도 한다. 천태대사(天台大師)((중국 수(隋)나라의 천태 지의 대사(天台智顗大師), Zhi-yi, (538-597))는, 지관(止觀)이라고 말했다.
止 ― 反省
지(止) ― 반성(反省)
観 ― 観ずること
관(觀) ―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잘 관찰하고 곰곰이 생각하여 정확히 아는 것)
正定とは正しい禅定、正しい瞑想であり、そのためには反省によって心を安らかにすることが大事である。心が乱れていたのでは正しい禅定、瞑想ができない。反省は神が人間にだけ与えられた特権であり、この反省を通してのみ、物の道理が理解され、同じ間違いを犯すことから開放される。私たちは反省を通してのみ進歩向上することができる。反省こそ神が人間に与えられた慈悲である。いかに多くの罪を犯したものといえども、この反省を通してのみ神に近づき、神を知ることができる。それ以外の方法で神を知ることはできない。反省は、今日一日をふり返り、物を正しく見たか、思ったか、語ったか、働いたか、生活したか、念じたかなどを反省するのである。
정정(正定)은 올바른 선정(禪定), 올바른 명상(瞑想)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성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어서는 올바른 선정(禪定), 명상(瞑想)을 할 수 없다. 반성(反省)은 신(神)이 인간(人間)에만 부여한 특권(特權)이며, 이 반성을 통해서만, 사물(物)의 도리(道理)가 이해(理解)되며,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에서 개방(開放)된다. 우리들은 반성을 통해서만 진보향상(進歩向上)할 수가 있다. 반성이야말로 신(神)이 인간에게 주신 자비(慈悲)이다. 아무리 많은 죄(罪)를 진(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반성을 통해서만 신(神)과 친해져서(다가가서), 신(神)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 신(神)을 알 수는 없다. 반성은, 오늘 하루를 뒤돌아보고, 사물(物)을 올바르게 보았는지, 생각(상상)했는지, 말했는지, 일했는지, 생활했는지, 마음속으로 빌었는지(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했는지) 따위를 반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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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懺悔、悔い改めによって、私たちは性格をつくり変え、業を超えていく。心からの反省、懺悔、悔い改めには、感謝と報恩、「すまなかった」という思いの涙が伴う。反省の後で感謝が出てこなかったら、その反省はまだホンモノではない。
반성(反省), 참회(懺悔), 회개(악행이나 과실을 뉘우쳐 고치는 것)를 통해서, 우리들은 성격(性格)을 바꾸고, 업(業)을 초월해 간다. 진심(心から)의 반성, 참회, 회개(악행이나 과실을 뉘우쳐 고침)하기 위해서는, 감사(感謝)와 보은(報恩), 「(그렇게 해서) 미안했다(すまなかった)」하는 생각의 눈물이 맺힌다. 반성을 한 후에 감사하는 마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반성은 아직은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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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省の基本はなんといっても親と自分の関係である。反省によって心から涙を流して両親に、感謝できるようになると、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スラスラと深い反省ができるようになってゆくものである。
반성의 기본(基本)은 뭐니뭐니 해도 부모(親)와 자신의 관계이다. 반성에 의해서 진심으로(心から)으로 눈물을 흘리며 양친(兩親)에게,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에 대해서 거침없이 깊이 반성을 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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瞑想、禅定を重ねていくと、静(心)と動(生活)とのバランスが保たれて、不動心が自然にもてるようになる。よく「不動心をもて」といわれるが、不動心は持とうと思って、いくら祈ってみても、それによって得られるものではない。静かな心で日常生活を実践していく中で得られるものである。
명상(瞑想), 선정(禪定)을 거듭해 가면, 평온(静)(마음(心))과 행동(動)(생활(生活))이 밸런스(균형)이 유지되어、부동심(不動心)을 자연히 가질 수 있게 된다. 잘 「부동심(不動心)을 가져라」라고 하지만, 부동심은 가지려고 생각해서, 아무리 빌어 봐도, 그것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가는 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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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正道を実践し、瞑想、禅定をしたらそのまま一直線に最高の悟りの境地に達するのではない。瞑想、禅定をすると、今までわからなかった自分の心がわかってきて、心が一段と飛躍向上していることがわかってくる。そうした心でまた物を見る(正見する)と、以前とは違った物の見方ができるようになる。するとその違った新しいものの見方を本にして物を考える(正思する)と、また一段と深く物を考え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ようになって、以下順次に正語も正業も正命も・・・・・・深くなってきて、瞑想、禅定も新しい心で座ってすることができ、それだけにまた深い境地が得られるようになってゆく。このようにして八正道は循環してゆくことによって悟りの新たな境地は開かれてゆくのである。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고, 명상(瞑想), 선정(禪定)을 한다면 그대로 일직선으로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瞑想), 선정(禪定)을 하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차츰 알게 되어, 마음이 일단(一段)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마음으로 역시 사물(物)을 본다((정견(正見)한다))면, 이전과는 달리 사물(物)을 보는 방식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면 그 잘못된 새로운 사물을 보는 방식을 근본(本)으로 해서 사물(物)을 생각(판단)((정사(正思)한다))면, 또한 일단 깊게 사물(物)을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이하 순서로 정어(正語)도 정업(正業)도 정명(正命)도・・・깊어지게 되어, 명상(瞑想)도, 선정(禪定)도 새로운 마음으로 앉아서 할 수가 있고, 그만큼 또한 깊은 경지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간다. 이렇게 해서 팔정도(八正道)는 순환(循環)되어 가는 것에 의해서 깨달음의 새로운 경지는 열리어 가는 것이다.
正法の根本は中道であり、中道の極点は調和である。調和が神仏の心である。
정법(正法)의 근본(根本)은 중도(中道)이며, 중도(中道)의 극점(極点)은 조화(調和)이다. 조화(調和)가 신불(神佛)의 마음(心)이다.
- 完 - 끝
高橋信次先生著 「人間釈迦①~④」・「心の指針」・「心の発見 三部作」
も併せてお読みください。― 三宝出版社 刊行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저서 「인간석가①~④」・「마음의 지침」・「마음의 발견 3부작」도 병행해서 읽어 주십시오. 삼보출판사 발행
園頭広周先生著 「心行の解説 上・下巻」も併せてお読みください。
소노가시라 히로치카 선생님의 저서 「심행의 해설 상・하권」도 병행해서 읽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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園頭先生のご著書は、今後販売される予定はありません。在庫限りの販売です。
소노가시라 선생님의 저서는, 금후 판배될 예정은 없습니다. 재고에 한해서 판매합니다.
2015.04.26 (日曜日)UP
2015년 04월 26일 (일요일) up
이라고, 위 글을 올려주신 사이트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http://www.shoho2.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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