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인간석에서 석가의 깨달음이란(「人間釈迦より」釈迦の悟りとは ?)/인간석가와 여래수량품(人間釋迦と如來壽量品)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인간석에서 석가의 깨달음이란(「人間釈迦より」釈迦の悟りとは ?)/인간석가와 여래수량품(人間釋迦と如來壽量品)

어둠의골짜기 2016. 5. 30. 06:30



지금 올리는 내용이, 다소 어려울지도 모릅니다만, 관심이 있으신 분은, 

보시길 바랍니다. 

어려운 불교용어 및 고대 인도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본의 승려들이나, 고대 인도의 승려들이 이름과

힌드교의 경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석가의 아내의 이름이나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분들도 어려울 것이며,

지명도 좀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법화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내용을 또한 잘 모르는 분들도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만약 읽으신다면, 의문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2016년 5월 30일에 올립니다. 

다시 정리하여 2편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人間釈迦より」釈迦のりとは ?

인간석가에서석가의 깨달음이란 ?

 

 


 

高橋信次先生著「人問釈迦」第一巻より要約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저서인간석가 1권에서 요약

 


 

一口牛乳

 한 모금의 우유

 

 

ゴーダマがカピラをて以来、六年目のりがづこうとしている

(고다마가)카필라를 나온 이래, 6년째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かつてのたくましかった肉体はどこへやらまだ三十ばだというのに、老人のようにすっかり衰弱、骨のみになって、死姿がそこにあった

일찍이 체격이 건장했던 육체는 어딘가로 가 버리고, 아직 30대 반인데도, 노인처럼 완전히 쇠약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ゆるやかにれるネランジャラ、衰弱した肉体を清めすすいでくれた

までつかって水面を覗くとそこにった自分まるで他人みたいであった

느릿하게 흐르는 네란자라강은, 쇠약해진 육체를 맑게 하고, 씻어 주었다.

걸터 앉아서 수면을 바라보니, 거기에 비친 내 자신의 얼굴은, 마치 타인을 보는 듯 했다.

 

 

六年前、心にはの変化もないのに、肉体の全然別人だった

6년 전이나 지금도,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육체 쪽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しばらく牧草砂地をおろしていると、女の歌声がに乗ってきこえてきた

잠깐 목초의 모래밭에 걸터 앉아 있었는데, 여자의 노랫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 왔다.

 

 

は、強くめれば糸は

악기의 줄(현)의 소리는, 강하게 조이면 소리는 끊어져

 

、弱くては音色が悪い

악기의 줄(현)의 소리는, 약하게 조이면 음색이 좋지 않아

 

、中ほどにめて音色がよい

악기의 줄(현)의 소리는, 중간정도로 조여야 음색이 좋아

 

調子合わせてろよ

박자에 맞춰 춤을 춰라 춤춰라

 

みんなになりろよ

모두 원을 돌리며 춤을 춰라 춤춰라

 

 

朝靄をついてれてくるんだの美声はゴータマのをゆりかした

「弦、中ほどにめれば音色がよい

아침 안개에 쌓여 흘러 오는 젊고 맑은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고타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악기의 줄(현)의 소리는, 중간정도로 조여야 음색이 좋아

 

 

もう一度、歌文句のなかで反復した。

今迄求めてきたこの歌声によって天啓のように氷解するのだった

다시 한 번, 노래의 문구를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지금까지 찾아왔던 수수께끼가, 이 노랫소리에 의해서 신의 계시(天啓)처럼 얼음이 녹듯이 풀리는 것이었다.

 


ゴータマはげるとその歌声のづいた。

고타마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다가갔다.


 

声の、草むらのにつないであるっていた

りながらっているのであった

十六、七、身なりこそ粗末だが、面長で気品のある顔立ちであった

노래를 부르는 소리의 주인공은, 풀밭의 그늘에 매여 있는 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소젖을 짜면서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년령은 16~17세 정도이며, 옷차림은 변변치 않았지만, 얼굴이 갸름하며 기품이 있는 용모였다.

 


ゴータマは気づかれないようにゆっくりとづき、彼女るのをった

고타마는 알아채지 못하게,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가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よいかせてもらってありがとう。」

「좋은 노래를 듣게 해 줘서, 고맙다」

 

 

彼女一瞬おどろいただったがはずかしそうにうつきながら

「搾りたての牛乳ですよかったら一口いかがですか・…といった

らめながらゴータマのにそそいでくれた

그녀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모습이었지만, 수습은 듯 고개를 숙이면서

「금방 짜낸 우유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드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얼굴을 붉히면서, 고다마의 사발()에 부어 주었다.

 

 

 

よかったらをきかせてさい。」

「괜찮다면 이름을 들려 주십시오」

 

 

はいチュダリヤ・チュダータとします。」

「네, 츄다리야슈닷타라고 합니다」

 

 

ゴータマはチュダータに礼をいうと、五人修行者達のところに、彼女からもらった牛乳にした

고타마는, 츄닷타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5명의 수행자들의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에게서 받은 우유를 입에 대었다(먹었다).

 


これをていたコースタニヤがった

ゴータマさまあなたは修行をやめたのですか、修行者生臭いものをにしてはいけないはずです。」

이것을 보고 있던 코스타니야가 말했다.

「고타마님, 당신은 수행을 그만 둔 것입니까, 수행자는 비린 것을 입에 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ゴータマは五人

このまま肉体行を続けていては、悟らないうちに肉体がんでしまう

になったこの肉体をそうと決心したのだ。」

ときっぱりった

고타마는 5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대로 육체수행을 계속하고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육체가 멸해 버린다.

나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 육체를 고쳐 만들려고 결심한 것이다.

라고 단호히 말했다.

 

 

 

五人やら相談していたが、代表格のコースタニヤがった

ゴータマあなたとは今日かぎりれよう

までは弟子としてあなたをおりしてきたがもう王子でもでもない

あなたの自由にしなさい。」

5명은 어떠한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대표격인 코스타니야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고타마, 당신과는 오늘을 끝으로 헤어지자.

지금까지는 제자로서 당신을 수행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왕자도 스승도 아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らはゴータマかられるとゴータマに一顧もせずネランジャラの岸辺沿いにってった

그들은 고타마와 헤어지면서, 고타마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네란자라 강의 강가를 따라서 북으로 내려 갔다.

 




の格闘

마음의 격투

 

 

修行はもともと一人である

りも自分るので、友ではない

ウルヴェラのに帰ってビパラの大木つけると、悟るまでは、決してここからくまいとうのだった

수행은 본래 혼자이다.

깨달음도 내 자신이 깨닫는 것이며, 친구가 아니다.

우루벨라 숲으로 돌아가서, 피팔라의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깨달을 때까지, 결코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피팔라(인도어), 중국어로 보리수(깨달음의 나무)로 변했다.

 

 

 

って正座チュダータのっていた民謡をしながら、静かに瞑想するのであった

瞑想中のゴータマは、昨日までのゴータマではもはやなかった

一切執着かられた自分にかえっていた

地上想念から解放され、大自然に触れていたのであった

동쪽을 향해서 정좌하고, 츄닷타가 노래를 부르고 있던 민요를 떠올리면서, 조용히 명상하는 것이었다.

명산 중의 고타마는, 어제까지(★참고로, 6년간의 육체 고행을 하던)

의 고타마는 이미 없었다.

일체의 집착에서 떠난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상의 상념에서 해방되어, 대자연의 마음에 닿아 있었던 것이었다.

 

 

ふと瞑想中がゆれいた

すると耳元の声がきこえてきた

문득(갑자기) 명상 중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자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シッタルターさま、私でございます。」

「싯타르타님, 접니다.

 

 

わずゴータマは見開いた

저도 모르게(엉겁 결에, 무의식 중에), 고타마는 눈을 떴다.

 


焚火りをすかしてみると、暗闇のなかにヤショダラの姿があるではないか

ヤショダラのいるにもっている

第二夫人のゴーパであった

횃불의 빛을 비춰 보니, 어둠 속으로, 야쇼다라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야쇼다라가 있는 왼쪽에도 사람이 서 있다.

2부인()인 고파였다.

 

 

さらによくるとかつて言葉わした子達姿もあるではないか

ゴータマはじっと前方をみつめたまま、立とうとはしなかった

조금더 자세히 보니, 일찍이 말을 주고받았던 무용수들의 모습도 있는 것이 아닌가?

고타마는, 가만히 전방을 주시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そのうちにヤショダラの体がいた

めるのあやしい姿がそこにっている。

体をくねらせ、春を売ろうとするに変っていた。

그러고 있는 사이에, 야쇼다라가 몸을 움직였다.

사내를 갈구하는 여자의 이상한 몸짓이 거기에 비추고 있다.

몸을 비비꼬며, 매춘을 하려고 하는 여자로 변해 있었다.

 

 

 

(悪魔だ

악마다

 

 

そうった瞬間、女達姿ゴータマの体は梵天りにわれていた。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여자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고다마의 몸은 범천(브라흐만)의 빛으로 덮혀 있었다.

 

 

悪魔とは、人間の体に巣をつくる回虫のようなものである。

悪魔に魅入られると、人正常心ないやたらと闘争心がつのってくる

そして、自分に敵対するものは容赦もなくこれをさずには済まなくなってくる

악마란, 인간의 몸에 둥지를 치는 회충과 같은 것이다.

악마에게 홀리면, 사람은 정상심(正常心)을 잃고, 느닷없이 투쟁심이 점점 심해지기(격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적대하는 것은 인정사정도 없이, 이것을 쓰려뜨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게 된다.

 


をみて快感、人不幸冷然としていられる

피를 보고 쾌감을 느끼고, 남의 불행에 냉연(冷然)한 상태로 있을 수 있다. 

(피를 보고 쾌감을 느끼며, 남의 불행에 쌀쌀한 태도를 취한다)


 

不幸しみをはない

だが、自分と競争相手にあるとか、頭四六時中押さえつけているたまたまかがあると

ざまあみろ

というたないないであろう。

남의 불행이나 슬픔을 기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과 경쟁상대로 있다든가, 머리를 항시 꽉 누르고 있는 사람이, 때마침 무슨일인가 있으면,

(꼴 좋다, 꼴 좋게 됐군)

라고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悪魔はそうした、人不幸支配するのである

不幸程度が強くなるにしたがって、身体がくなり、環境不調和になる。

악마는 그러한,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정도가 강하게 됨에 따라서, (身體)이 무거워지고, 환경이 부조화(不調和)하게 된다.

 


人間社会が混乱し、人んでくると悪魔となってあのへ帰った悪魔達が、現象世界の人々のによってせられ、一層悪事を働くようになるのである

인간사회가 혼란하고, 사람의 마음이 거칠어지게(황폐해지게) 되면 악마가 되어 저세상으로 돌아간 악마들이, 현상세계(現象世界)의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서 끌어당겨 곁에 오게 되어, 한층 더 못된 짓을 하게 하게 되는 것이다.

 


ゴータマは、暗闇現象、自分まだそのような想念の残骸があったことに気づきそうした悪魔の誘惑けてはならぬとめるのであった

고타마는, 어둠의 현상을 보고, 자신의 마음의 구석에, 역시 그러한 상념의 잔해(殘骸)가 있었던 것을 깨닫고(알아차리고), 그러한 악마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고 (느즈러진) 마음을 다그치는 것이었다.


 

 

光明への道

광명을 향한 길

 

 

肉体には肉体の役割がある

その役割をなおざりにしてまでなおりがあるとするのはらかに邪道であり、観念の遊戯にすぎない

りという問題、健康な肉体と健全にある

病弱意識不明瞭にどうして、神仏のを自覚させることが出来よう

육체에는 육체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역시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사도(私道)이며,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병약하며 의식이 불명료한 자에게 어떻게, 신불의 마음을 자각시킬 수 있을까?

 

 

大自然らいを

대자연의 배려를 보라.

 


大陽健康ではないか

わめくことも、怒ることもない

をより広く、大きくくためにはまず健全な肉体が必要であり、欠くことが出来ない

りのきな前提精神と肉体の調和にある

태양은 항상 건강하지 않은가?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일도, 화를 내는 일도 없다.

마음을 보다 넓게 하고, 크게 듣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한 육체가 필요하며,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깨달음의 큰 전제는 정신과 육체의 조화에 있다.

 

 

べるものもべず、摂るものも摂らず、肉体をどんなにしめてみても、心らかにならない。

肉体をしめる苦行によってることが出来るのなら、過去苦行をしたたちのからったていてもよいわけであるが、誰ていない

먹는 것도 먹지 않고, 섭취하는 것도 섭취하지 않고, 육체를 아무리 괴롭혀 봐도,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는다.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苦行)에 의해서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이라면, 과거에 고행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 깨달은 사람이 나와도 당연히 좋은 것일 테지만, 아무도 (깨달은 사람은) 나와 있지 않다.

 


「生まれて来なければこのようなしみをけずにすむものを、」えるが

れてきた以上人間にはらかの目的便命があるはずである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괴로움을 받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이라고 생각하지만,

태어난 이상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목적과 사명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その目的とはいったい

使命とはいかなるいつかはをとり、病気をしんでゆく

그 목적이란 도대체 뭔가?

사명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사람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 병에 걸려 죽어 간다.

 


何人かられることはできない

地位も名誉も、財産、全てこのいて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は皆分かっているのにそれでも欲望えぬ

어떠한 사람도 죽음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

죽을 때는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전부 이 세상에 남기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욕망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五官して現象世界無常である

오관을 통해서 아는 현상세계는 무상(無常)하다.


★오관[五官], 눈귀코입몸, 을 말합니다.


 

無常りながらも、欲望をつのらせて無常なるものに執着している

所詮、人生しみの連続なのか、苦しみのない人生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現実との妥協、逃避か、自己満足ではないのか

무상(無常)하다고 알면서도, 욕망이 (끊이지 않고) 더 심해져서 무상한 것에 집착하고 있다.

결국,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인 것인가, 괴로움의 없는 인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과의 타협이든지, 도피라든지, 자기만족은 아닌 것인가?

 

  

しみのくりしは、人間にとって最大不幸である

なくともこうして人間まれたからには、苦しみをいだいてえることだけはけたい

万人万人、そのむところは、死えるまでにその悩みから解放されろことであろう

괴로움의 되풀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불행이다.

적어도,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에는, 괴로움을 품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만은 피해 주었으면 좋겠다.

만인이 만인, 그 바라는 바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고민(걱정)에서 해방되는 일일 것입니다.

 


せこそ解脱である

행복이야말로 해탈이다.

 


その解脱のとはであるのか

万人共通する解放へのはどんなであろうか

그 해탈의 길이란 무엇인 것일까?

만인에게 공통하는 해탈을 향한 길은 어떤 길일까?

 


しみの原因間題なのだ

うことえることの作用が、諸々のしみ悩みをしている

괴로움의 원인은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상상(생각)하는 것과 (곰곰히 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마음의 작용이, 여러 가지의 괴로움과 고민(걱정)을 낳고 있다.

 


§うことえること?? 감정적인 생각(상상)과 지적인 사고(생각)을 뜻합니다.

 


 

くの場含、肉体のしてらの体験と知識、我欲土台にした偏見になっている

そのために、人間社会は諸々の予盾撞着をつくり、自然が教える中道かられている

대부분의 경우, 육체의 눈을 통해서 얻은 자신의 체험과 지식은, 아욕(자기만의 욕심)을 토대로 한 편견으로 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인간사회는 다양한 모순과 당착을 만들어, 자연이 가르쳐주는 중도(中道)의 마음에서 떨어져 있다.



けの輪廻その渦中からぬけさないかぎり永遠に続く

しみの輪廻そのしみのいがまる、果てしなく続いてゆく

승패의 윤회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

괴로움의 윤회는, 그 괴로움 속에 생각()이 머무는 한, 끝없이 계속되어 간다.

 

 

中道にそった調和さないは、真のせをつかむことはできない

れという立場固執していては、正しさをめることができない

중도에 맞는 조화를 지향하지 않는 동안은, 참된 행복을 손에 넣을 수가 없다.

자기 자신()라고 하는 나(我)의 입장에 고착하고 있어서는, 올바름을 찾을 수가 없다.


 

しさの尺度は、男女、老若、地位、名誉等の立場って、一個人間として、大自然れとしてそしてそのものを見、相手を見、現実をめることである

올바름의 척도는, 남녀, 노인과 젊은이, 지위, 명예 등의 다른 입장을 주저없이 버리고 거기서 떠나서, 한 개인의 인간으로서, 대자연 속의 자기 자신(()으로서, 그리고 그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상대를 보고,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調和基本まずはさておいて、見ることのしさにある

조화의 기본은, 우선 이것저것을 제쳐놓고, 보는 것의 올바름에 있다.


 

れた現象の奥には、必ずその現象原因があるはずである

自分に直接関係のある問題派生した場合まず自分自身姿ることが大事だ。

겉으로 나타난 현상의 깊숙한 곳에는, 반드시 그 현상을 비추는 원인이 당연히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직접 관계가 있는 문제가 파생한 경우는, 우선 자기 자신의 마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肉体のして外界きをしくるためにはそのの奥にある心眼がきれいにかれていないといけない

육체의 눈을 통해서 보는 외계(外界)의 움직음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그 눈의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의 눈(心眼)이 아름답게 닦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各人である

その想念というえず掃除しておくことだ

각자의 마음은 거울이다.

그 상념이라고 하는 거울을 끊임없이 청소(掃除)해 두는 것이다.

 


掃除するということは反省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

反省光明世界するかけである

청소(掃除)한다고 하는 것은 반성한다고 하는 것이다.

반성은 광명(光明)의 세계에 사는 가교(掛橋,懸橋)이다.

(반성은 광명의 세계에 사는 임시로 걸쳐 놓은 다리[혹은 사다리]이다.)


 

ねたみ、怒そしりそうして諸々の執着かられるには、反省をおいてにない

질투(시샘), 화를 냄(노여움, 분노), 비방(비난), 그리고 여러 가지의 집착에서 떠나기 위해서는, 반성 이외에 달리 없다.


 

反省ねることによってと肉体の調和、進んではれの大宇宙との合一がはかられる

반성을 거듭하는 것에 의해서 마음과 육체의 조화가 태어나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대우주의 마음과의 합일(合一)을 꾀할 수 있다.


 

反省をせずしてにすると、魔や憑依霊に支配される

반성을 하지 않고서 마음을 비우면, 마귀()나 빙의령(憑依靈)에게 지배된다.


 

人間生活にとってりのない生活えられない

しい調和生活ってめているいごと、祈りはそのにふさわしいものであるず叶えられる

인간생활에 있어서 기도하지 않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다.

올바른 조화의 생활을 향해서 노력하고 있을 때의 소원(기원), 기도는, 그 사람에게 상응하는(잘 어울리는, 적절한) 것인 한 반드시 이루어진다.

 


しかし我慾を満たすだけにってはならない

하지만 아욕(자기만의 욕심)을 채우는 것만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人間生活、大自然調和されているように、助、補、笑いのあるるい生活でなければならない

인간의 생활은, 대자연이 조화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돕고, 서로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고, 미소(웃음)이 있는 밝은 생활이어야 한다.

 


それにはまず自分自身調和をつくってゆくことである

長所ばし、短所修正してゆくのだ

그것에는 우선 자기 자신의 조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수정(修正)해 가는 것이다.

 


精進するとは、親子、夫婦、兄弟、友人、隣人調和をつくることである

사람의 지켜야 할 도리()에 정진(精進)하는 것이란, 친자(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 친구(友人), 이웃 사람 간의 조화를 만드는 것이다.

 

 

親子、夫婦が争っていて信仰とはナンセンスである

そんなものは信仰ではない

친자(부모와 자식), 부부가 다투고 있으면서 신앙(信仰)한다는 것은 넌센스(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다.

 


人間大自然との関係をして、初めてきな自覚に到達することが出来る

自分以外存在、自己認識するための材料であり、魂向上不可欠なものである

親子、夫婦、友人、隣人等、自己しくいてゆくために、天人間に与えた慈悲である

인간은 대자연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큰 자각(自覺)에 도달할 수가 있다.

자기 이외의 존재는, 자기를 인식(認識0하기 위한 재료이며, 영혼()의 향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불가결)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親子), 부부(夫婦), 친구(友人), 이웃 사람(隣人) 등은, 자기의 영혼을 올바르게 닦아 가기 위해서,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자비(慈悲)이다.

 

 

 

言葉言魂でありきた波動である。

謙虚な言葉、慈しみの言葉、やさしい言葉、勇気ある言葉、思いやりの言葉等、正しく言葉使うことの重要性、人間が社会生活を営むり、絶対にくことのできない要件つである

(言葉)은 말속에 깃든 영혼[영력](言魂, 고토다마, 혹은 言嶺)이며 살아있는 파동(波動)이다.

겸허한 말, 자비의 말, 친절한 말(너그러운 말), 용기 있는 말, 인정어린 말(따뜻한 말) (), 올바르게 말을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필요한 조건(要件)의 하나이다. 

 


りへの重要過程、心の内面に対する反省でありものの見方、考方、捉方、そしてそれにづく行動、果たしてしいものであるかどうかを、内省することがキメになるのである

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とは、二度、同じことをさない様にすればよいのである

깨달음을 향한 중요한 과정은, 마음의 내면에 대한 반성이며, 사물의 견해, 사고방식, 파악방식,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두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어떠한지를,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內省) 것이 결정타(결정적인 증거[수단])가 되는 것이다.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두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면 좋은 것이다.

 

 

反省して悪いと自認したとしてもその事実をすことはできない

めればよいのである

반성해서 나쁘다고 자인(自認)했다고 해도, 그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요점()은 고치면 좋은 것이다.

 

 

過去のことに執着つとこれからの行動束縛され、本来の自由性がそこなわれる。

悪かったことを悪かったとめてもそれにわれると想念してしまう

과거의 일에 집착을 가지면, 앞으로의 행동이 속박(束縛)되어, 미래의 자유성이 엉망이 될 수 있다.

나빴던 것을 나빴다고 인정해도, 그것에 사로잡히면 어두운 상념을 창출해 버린다.

 


この中道大事である

이 점도 중도(中道)의 마음이 중요하다.


 

過去の経験は、魂修行一過程である

反省の功徳は、反省したの実践にかかっている

その実践の功徳は心身調和という姿で顕われてくる

과거의 경험은, 영혼()의 수행의 한 과정이다.

반성의 공덕(功德), 반성한 후의 실천(實踐)에 달려 있다.

그 실천의 공덕은 심신(心身)의 조화(調和)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夢幻世界

꿈과 환상(몽환)의 세계

 

 

りのしいルールを発見することは、非常しいものである

ウパニシャド・ヴェダーのからこれを見出すことはできない

깨달음의 올바른 규칙을 발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우파니샤드베다 속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ゴータマは三歳のからウパニシャドやヴェダーを教えられた。

教えられることは知的に体系づけられていたが、教える学者達の生活は乱れていた

ヴァフラマンやインドラーの祭壇をつくってりさえすれば、心はどうしなくてもわれるとっている

고타마는 세살 때부터, 우파니샤드나 베다를 배웠다.

배우는 것은 지적(知的)으로 체계를 받고 있었지만, 가르치는 학자들의 생활은 문란해져 있었다.

브라흐만(Brahman)이나 인드라(Indra) ()에게 제단을 만들어 기도만 하면, 마음은 통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また一般信者直接神ってもわれない、必ずパラモンの司祭という代理ててらないと、神さまはってさらないという

또한 일반 신자가 직접 신에게 기도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며, 반드시 바라문의 사제(司祭)라고 하는 대리를 세워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도와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そうしての奥底に潜む原因については、全めようとはしなかった

그리고 또한 속마음에 잠재하는 마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전연 손을 대려고는 하지 않았다.


 

アポロキテー・シュパラー(観自在)にるには、心いという実践しか残されていない。

神仏の希求するならばそのにまずりを払いのけることであった。

아포로키티 슈바라(관자재)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위라고 하는 실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신불의 빛을 희귀한다면, 그 전에 우선 마음의 흐림(어두움=우울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求道解脱は疑問から出発する

구도-해탈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疑問たない求道などありない

疑問探求心、探究心はやがて解答理解されてくる

의문을 갖지 않는 구도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의문은 탐구심을 기르고, 탐구심은 이윽고 해답을 얻어 이해되어 간다.

 


普通中道という尺度らないために、求道方向見誤ってしまう場合非常

보통은 중도라고 하는 척도를 모르기 때문에, 구도의 방향을 잘못 파악해 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しかし八正道という大自然尺度が発見された以上、疑問安易理解されてゆく

하지만 팔정도라고하는 대자연의 척도가 발견된 이상은, 의문은 안이하게 해결되어 간다.


 

間題その中道尺度使って、自分自身がどこまで厳格に、公平、自分つめるが出来るかである

문제는, 그 중도의 척도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어디까지나 엄격하게, 공평하게, 자신의 마음을 주시할 수 있는가이다.

 


自分、自分をどこまでせるかにかかっている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어디까지 밝혀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が潜む、生老病死執着は断てないのだ。

解脱とは執着かられたなのである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잠재하는 동안은, 생로병사의 집착은 끊지 못하는 것이다.

해탈이란 집착에서 떠난 마음인 것이다.

 



 

マラーとの対決

마라(마왕)와의 대화


 

五日間のゴータマの反省、自己追究への反省であった

一点えさえさなかった

それだけに、反省前ではらぎがっていた

らぎとともに不動自然ってくるのであった

5일동안 고타마의 반성은, 자기추구로의 반성이었다.

한 점의 어리광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반성 전과 후에는 마음의 평안이 달라져 있었다.

마음의 안정과 함께 부동의 마음이 자연히 갖춰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ゴータマは反省冥想こうとした

고타마는 반성의 명상을 풀려고 했다.

 


いつのにか自分ヴァフラマンがっていた

こちらをじっとている

어느새인가 자신 앞에, 브라흐만(Brahman)이나 서 있었다.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다.


 

カピラの王子、ゴータマよに帰りなさい

がいかに慈悲心ってもっても、我欲りの人々をうことは出来ないだろう

「카필라의 왕자, 고타마여, 너는 성()으로 돌아가시오.

네가 아무리 자비심을 가져도 깨달아도, 아욕(자기만의 욕심)의 덩어리인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には、多くの部下達っているではないか

修行てれば、全地球として優雅生活が出来よう

はそうした生活をするようから与えられている

()에는 왕(), 네 아내(), 많은 부하들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수행(修行)을 버리면, 전지구(全地球)의 왕으로서 우아(優雅)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러한 생활을 하도록 신에게서 부여받아 있다.

 

 

れたかゴータマ、生命輪廻しているなら原因は来世の結果となり、王としてこのれば、来世もとしてその地位約束されよう

のような苦行をしておれば、来世もしい修行っている

生命はこの世限りだ

修行めば、私協力して全地球にしてあげよう。」

잊었는가, 고타마, 생명은 윤회하고 있다면 지금의 원인은 내세의 결과가 되어, 왕으로서 이 세상을 떠나면, 내세에도 왕으로서 그 지위가 약속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고행을 하고 있으면, 내세(來世)도 괴로운 수행이 기다리고 있다.

네 생명은 이 세상뿐이다.

네가 수행을 멈추면, 나는 반드시 협력해서 전지구의 왕으로 해 줄 것이다.

 

 

っているっていたが、解せないのは異様ないだ

말하고 있는 것은 조리()가 서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상한 냄새(악취). 

 

 

ゴータマは、相手の正体を見破った

고타마는, 상대의 정체를 간파했다.

 


何者、本性わしなさい-」

「너는 누구냐, 본성을 드려내시오-」

 

 

「魔王とその弟子たちよ

素直きなさい

「마왕(魔王)과 그 제자들이여.

내가 말하는 것을 솔직하게 들으시오.

 

 

前達

であるのに、生前のお前達、怒そしりうらみのが強く、人したことも、愛されたこともない

너희들도 신의 자녀다.

신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생전의 너희들은, 분노, 비난(비방), 질투의 념()이 강하고, 남을 사랑한 적도, 사랑받은 적도 없다.

 


前達自分子供てたことがあろう

はいない

愛、慈悲もそれとじだ

너희들도 자기 자식을 기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는 없다.

신의 사랑, 자비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では魔王となり、鬼のようにんでしまったがそれでもはお前達見離すようなことはしない

からでも遅くはない

自分に嘘のつけぬなるに勇気をって、仏性をすのだ

너는 지금와서는 마왕이 되어, 귀신처럼 마음은 황폐해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신은 너희들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한 마음으로 용기를 갖고, 불성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の与えているは天国の

慈悲からられてくるらぎの

さあ、執着てなさい

ちをわぴ、仏性をわしなさい。」

내가 주고 있는 빛은 천국의 빛이다.

신의 자비에서 보내오는 평안의 빛이다.

그럼, 집착을 버리시오.

잘못을 사죄하고, 불성을 드러내십시오.

 

 


うことはできない

魔王にもっていった

は両膝をにつけゴータマにって両手をわせて合掌した

어둠은 빛에 저항할 수는 없다.

마왕의 마음에도 빛이 들어 갔다.

그는 양무릎을 땅에 대고, 고마다를 향해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魔王といえども、慈悲うと、内在する神性仏性が顕われてくる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자비의 빛에 맞으면, 내재하는 신성불성이 나타나게 된다.


 

(降魔の釈尊とはこのをいうのである

(항마의 석존이란 이 일을 말하는 것이다)

 

 



偉大なる

위대한 깨달음

 

 

七日目がやってきた

、瞑想ろうとしてふと気がつくとしているの体が次第きくなっているのであった

7일째가 찾아왔다.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가려고 해서,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앉아 있는 내 몸이 점차 커지는 것이었다.

 


ゴータマを雨露からっていたビバラの大木を抜けてガヤダナが眼下えてくる

고다마를 비와 이슬로부터 지켜주고 있던 피팔라의 거목을 빠져나와, 가야다나가 눈아래 보이기 시작한다.


 

ゴータマの意識は刻々と拡大していった

코타마의 의식은 시시각각으로 확대해져 갔다.


 

地上次第のいてゆく

意識の拡大はテンポをめた。

暁の明星足下えた

もう一人のゴータマはさなのようにはるか下方していた

ゴータマは宇宙大に広がり、宇宙自分意識ってくのだった

지상이 차례로 멀어져 간다.

의식의 확대는 템포를 앞당겼다(진행속도를 빨리했다).

샛별(새벽에 동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이 발밑에 보였다.

또 한 사람의 고타마는 작은 잎자처럼, 아득히 먼 아래쪽에 앉아 있었다.

 

 

、悟りをいた

三十六年間した不調和心、想念りがこの瞬間において光明したのであった

大宇宙意識と同体となったのであった

마침내, 깨달음을 열었다(득도했다, 도를 깨달았다).

36년 동안에 만들어 냈던 부조화한 마음, 상념의 흐림(우울함曇)이, 이 순간에 있어서 광명으로 화했던 것이다.

대우주의 의식과 동체(同體)가 되었던 것이었다.

 


森羅万象、宇宙人間、神存在、人間方、魂の転生輪廻等が一瞬のうちにらかになるのであった

삼라만상의 그 내력(성장, 생장), 우주와 인간, 신의 존재, 인간의 본연의 자세(바람직한 자세, 본연의 모습), 영혼의 전생윤회가 한 순간에 밝혀지는 것이었다.

 


この大宇宙によってつくられた

大宇宙が発生する以前大宇宙、光明という意識だけがそこにあった

その意識、意志をもたれた

「이 대우주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대우주가 발생하기 이전의 대우주는, 광명이라고 하는 신의 의식만이 거기게 있었다.

신은, 그 의식 속에서, 의지를 갖고 있었다.


 

大宇宙創造、神意志によってはじまった

意識の働く字宙、物質界宇宙つの世界創造した

意識界宇宙はその意志をもって物質界宇宙かしそうしてこのつの世界、光という相関関係をして、永遠調和目的とすることになった

대우주의 창조는, 신의 의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의식의 작용하는 우주와, 물질계의 우주 2개의 세계를 창조했다.

의시계의 우주는 그 의지를 갖고 물질계의 우주를 움직이고, 그렇게 해서 이 2개의 세계는, 빛과 그림자라고 하는 상관관계를 통해서, 영원한 조화를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人間天地創造、神意識から、神意志け継ぐ万物の霊長としてぶ声をあげた

人間以外の動物、植物、鉱物も、大地姿わした

인간은 천지창조와 동시에, 신의 의식에서 떨어져나와, 신의 의지를 계승하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갓난아이가 첫울음을 울었다(태어났다).

인간 이외의 동물, 식물, 광물도, 대지에 모습을 드러냈다(나타냈다).

 


人類、神意志にもとづいて、調和という仏国土をつくりはじめた。

人々の年令は五百歳、千歳の長命った

子孫子孫み、人々の転生輪廻がはじまった。

인류는, 신의 의지에 따라서(의거하여), 조화라고 하는 불국토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연령은 500, 1000세의 장수(長命)을 유지했다.

자손이 자손을 낳고, 사람들의 전생윤회가 시작되었다.

 


人々は次元なる意識界自由交流ができた

文明高度に発達した

人間自由を駈けめぐり、地下大都市をつくった

들은 차원이 다른 의식계와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다.

문명은 고도로 발달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하늘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하에 대도시를 만들었다.

 

 

しかしやがてその文明終焉えるがやってきた。

人々の自我れ、国境がつくられ争いがはじまったからである。

人々の不調和、暗想念りは偉大をさえぎった

その結果、大地り、黒雲がった

るところで火山が爆発し、陸、海になった。

하지만 이윽고 그 문명도 종말(終焉)을 맞이할 때가 왔다.

사람들 사이에 자아가 태어나, 국경을 만들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부조화, 어두운 상념의 흐림은 위대한 신의 빛을 차단했다.

그 결과, 대지는 눈노하고, 먹구름(墨雲)이 하늘을 뒤덮었다.

도처에서(가는 곳마다) 화산이 폭발하고, 육지는 바다로, 바다는 육지가 되었다.

 

 

天変地異は自然現象ではない

人類と行為がつくりしたものであった

천변지이(천재지변)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인류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천변지이 (天變地異)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자연계의 여러 가지 변동과 이변.

※유의어 : 천변지변, 재앙, 천재지변

 



意志である調和という仏国土を建設するために人類存在し、人々のはそうした建設して、永遠進化をめざすものであった

신의 의지인 조화라고 하는 불국토를 건설할 목적으로 인류는 존재하고, 사람들의 영혼은 그러한 건설을 통해서, 영원한 진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人間小宇宙である

大宇宙展開するの数は、人間の肉体を形作っている細胞数とほぼ同数である

인간은 소우주이다.

대우주에 전개하는 별의 숫자는,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숫자와 거의 같은 수효(同數)이다.


 

人間は肉体のほかに意識、あるいはっている

인간은 육체 외에 마음(의식, 혹은 영혼)을 갖고 있다.


 

そのは、肉体というして、物質界、現象界調和をもたらすことを目的とする反面、大宇宙同通それぞれの役割に応じた使命を担っているしの意識である。

그 마음은, 육체라고 하는 옷을 통해서, 물질계, 현상계에 조화를 가져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대우주의 마음에 동통(同通)하고, 저마다의 역할에 맞는 사명을 담당하고 있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는 의식(しの意識)이다.

 


肉体は仮りの宿にすぎない

物質非物質世界、交互循環することによって調和という運動形態永遠に持続するためにありこのため、肉体という物質が経てば非物質的世界に戻らなければならない

육체는 임시 거처(仮りの宿)에 불과하다.

물질과 비물질계의 세계는, 번갈아 순환하는 것에 의해서 조화라고 하는 운동 형태를 영원히 지속하기 위함에 있고, 그 때문에, 육체라고 하는 물질은 시간이 지나면 비물질적인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人間意識、心、魂、物質、非物質左右されず、永遠その姿を変えることがない

인간의 의식, 마음, 영혼은, 물질, 비물질에 좌우되지 않고, 영원히, 그 모습을 바꾸는 일이 없다.

 


しである

처음부터 끝까지 산다.


 

このように人間、神じながら、物質界という現象界、非物質の霊界とを循環、個魂、意識をもって、永遠き続けてゆくのである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ㅁ은, 신의 마음에 통하면서, 물질계라고 현상계와, 비물질의 영계(靈界)를 순환하며, 개체의 영혼, 의식을 가지고, 영원히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としての人間が何故悪をつくりしたか

どうして不幸になるか

신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왜 악을 만들어 냈는가?

왜 불행해지는가?

 


それは肉体の自分、自分であるとい、肉体を中心とした自我、自由自在を、肉体のじこめて束縛してしまったからにほかならない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신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육체를 중심으로 한 자아의 사고방식이, 바로 자유자재한 마음을, 육체 속에 가두어 속박해 버렸기 때문이다.

 


全能人間不幸予測できない筈はないもがえるであろう

どうして事前不幸げないかと

전능한 신이 인간의 불행을 예측할 수 없을 리가 없다. 라고 누구든지 생각할 것이다.

왜 사전에 불행을 막지 않았냐고.

 


それは丁度、人間親子の関係とじである

にそむくがあるとじように、親自由にできないとじように、子としての主体性をもって行動する

그것은 마치, 인간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마음을 거역하는(배반하는, 등지는) 자식이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는 자녀로서의 주체성을 갖고 행동한다.

 

 

人間には自由が与えられている

その与えられた自由、人間はどうするかを自分で選択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 주어진 자유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까를 자기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調和という「中道」で厳然ときている

人間中道した行為をすればその分量だけ、反作用をともなうように法則がつくられている

신은 조화라고 하는 「중도(中道)」의 마음으로 엄연히 살아 있다.

인간이 중도에 반한 행위를 하면, 그 분량만큼, 반작용이 따르도록 법칙이 만들어져 있다.

 


人間は肉体をって修行する。

肉体には五官が与えられている

五宮が働かなくなれば、肉体はななければならない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영혼을 수행한다.

육체에 는 오관이 주어져 있다.

오관이 작용하지 않게 되면, 육체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죽어야 한다).

 

 

さりとて五官われると、欲望がつのり煩悩がってくる

그렇다고 해서 오관에 마음을 빼앗기면(오관에 사로잡히면), 욕망이 점점 심해져서 번뇌가 일어나게 된다.

 

 

さまざまの不幸このような肉体を中心としたの働きによって自分がつくるのである。

地位、名誉、金銭、情欲、そのさまざまの欲望、人間の神性仏性をしてゆく

こうしてあのとこの循環しながら修正してもあるが、大部分、新たなをつくってしまう

여러 가지의 불행은, 이러한 육체를 중심으로 한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지위, 명예, 금전, 정욕, 그 밖의 여러 가지의 욕망이, 인간의 신성불성을 침범(침해)해 간다.

그래서 사람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순환하면서 업을 수정해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영홍는, 새로운 업을 만들어 버린다.

 

 

このために人類、地上に仏国土を建設するまず自分修正しなければならなくなった。

神性仏性の本当の、暗ってしまった

이 때문에 인류는, 지상에 불국토를 건설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업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신성불성의 참된 마음을, 어두운 마음으로 덮혀 버렸다. 

 


動物植物・鉱物は、人間修行であるこの地球環境維持するためのものであって、人間万物の霊長としてそれらを調和させてゆく、神から与えられている

동물 식물 광물은, 인간의 영혼의 수행의 장인 이 지구의 환경을 유지(維持)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르소 그들을 조화시켜 가는 소임(책임, ), 신으로부터 부여받아 있다.


 

動物植物それぞれの個性にしたがって進化を続けるが、動物植物人間になることもできなければ、人間動物植物になることもできない

동물 식물은, 저마다의 개성(個性)에 따라서 진화를 계속하지만, 동물 식물이 인간이 될 수도 없다면, 인간이 동물 식물이 될 수도 없다.

 


人間が本来の神性回復するためには、神に触れなければならない

神性に帰るとは、苦界自分かられることである

生老病死執着から脱皮することである

인간이 본래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의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계(苦界)의 자기 자신에서 떨어지는 일이다.

생로병사의 집착에서 탈피하는 일이다.

 


中道という調和にありそのれに自分がふれるよう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

신의 마음은 중도라고 하는 조화 속에 있고, 그 흐름에 자신의 영혼이 흐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一日には昼とがある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다.

 


どんなに人類が増えても空気とは増えたり、滅ったりしない

一定である

아무리 인류가 증가해도 공기와 물은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는다.

일정하다.

 


太陽一定で不変である

태양의 빛과 열도 일정하며 불변이다.

 


人間男女一定である。

인간의 남녀의 비율도 일정하다.

 


戦争・災害など、人々の我欲かない、男女均等たれることになっている。

전쟁 재해 등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욕(我欲, 자기만의 욕심)에 기울지 않는 한, 남녀의 비율()는 균등하게 보존될 수 있게 되어 있다.

 


肉体には肉体の法則があり、夜らずに仕事を続ければ、肉体的に故障われ精神平衡ってくる

육체에는 육체의 법칙이 있고, 밤에 잠자지 않고 일을 계속하면, 육체적으로 고장(故障)이 나타나고 정신의 균형(均衡)을 잃게 된다.

 


すべての生命、中道かられてはきてゆけないようにできている

中道は毎日の生活反省、反省したことを実践することからられる。

모든 생명은, 중도에서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중도의 마음은 매일의 생활을 반성하고, 반성한 것을 실천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다.

 

 


実践には勇気がいる

努力がいる

智慧を働かせば、心修正くなる

실천에는 용기가 있다.

노력이 있다.

지혜를 발휘하면, 마음의 수정은 빨라진다.

 

 

反省尺度八正道である

「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進」「正念」「正定」である

반성의 척도는 팔정도이다.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진」「정념」「정정」이 있다.

 

 

この八正道基準として、毎日の生活しく修正されて

사람의 마음은, 이 팔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올바르게 수정되어 간다.

 

 

人間しである

不死である。

인간의 영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산다.

불사(不死)이다.

 

 

肉体はが経てばててあのへ帰らなければならない

中道にふれるとこうしたらかになり、神である永遠らぎをつことができよう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버리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도의 마음에 닿으면, 이러한 이치()가 밝혀지게 되어, 신의 마음인 영원한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が拡大すると、太陽をはじめ星々がすべて自分で回転しその呼吸する一切生物わが肉体の一部であることに気づく

마음이 확대되면, 태양을 비롯한 별들이, 전부 자신의 마음속에서 회전하고, 그 속에서 호흡하는 일체의 생물은, 내 육체의 일부인 것을 깨닫게 된다.

 

 

宇宙大意識っている。

肉体に執着すると宇宙大自己見失なってしまう

사람은 대우주의 의식을 갖고 있다.

육체에 마음이 집착하면 대우주의 자기(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もだえ、迷、地獄を焼く人間に対しても、神は、辛棒強く、救いのべている

太陽、水を、空気を、大地、食を与えている

번민하며,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그런 상태에 있는, 지옥에서 애태우고 번민하는(애를 태우는) 인간에 대해서도, (), 참을성 있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わがじないがないのとじように、神人間無限慈悲を与えている

내 자식이 앞날이 걱정되지 않는 부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비를 주고 있다.

 


人間その慈悲に応えなければならない。

応えるによって、人間神性自分を自覚するのだ

平等である

太陽万生万物平等らしている

인간은, 그 자비에 어긋나지 않도록(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응하는 것에 의해서, 인간은 신성(神性)의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신은 평등하다.

태양은 만생만물을 평등하게 비추고 있다. 

 

 

 

階級、貧富じ、競争意識にが翻弄されることは、神する

能力別、カの相違、得手不得手はすべて努力所産である

계급이 태어나고, 빈부가 생기고, 경쟁 의식에 마음이 농락당하는 것은, 신의 마음에 반한다.

능력의 차이, 힘이 상위(서로 다름), 잘하고 못하는 것은 전부 노력의 소산이다.


 

人類の歴史は、己れをることよりも、我欲を満たすための歴史であった。

闘争と破壊はそのためにくりされた。

인류의 역사는, 자기를 아는 것보다도, 아욕을 채우기 위한 역사였다.

투쟁과 파괴는 때문에 되풀이 되었다.

 


人々はしみかられようとさまざまの信仰をもっている。

肉体を苦行めばわれる。

拝めばわれ、祈れば功徳があるとじているが、大きな間違いである

사람들은 괴로움에서 달아나려고, 다양한 신앙을 갖고 있다.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쌓으면 구원된다.

합장배례하고 절하면 구원되고, 빌면 공덕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크나큰 잘못이다.

 


苦行、心を肉体に束縛執着させ、祈ればよいとする他力、心をきれいにらかにすることをなおざりにするので神性なわしめる

고행은, 마음을 육체에 속박 집착하게 하고, 빌면 좋다고 하는 타력은, 마음을 아름답고(깨끗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을, 소홀히(등한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성(神 性)을 잃어버리게 한다.

 


いづれも片寄った信仰である

어느 것이나() 치우친 신앙이다.

 

 

中道、神じたウソのつけないれの、八正道という生活行為をしてゆくところにある。

真の安心は、自己満足や逃避であってはならない

自分生死を冷静に客観視することができる自分確立できてこそ、真の安心られ

중도는, 신에게 통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기의 마음을 믿고, 팔정도라고 하는 생활행위를 해 가는 데에 있다.

진정한 안심은, 자기만족이나 도피여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사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을 확립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참된 안심은 얻을 수 있다.

 


人間である

인간은 신의 자녀이다.

 


天地創造された

신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人間もまたれの天地調和させ、自己かれた環境創造してくものである

인간도 또한 자기 자신의 천지를 조화시키고, 자신의 놓여진 환경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から与えられた肉体をめてもいけない

あなたまかせの他力に自己満足していてもいけない

신에게 받은 육체를 괴롭혀도 안 된다.

남에게 의지하여 남에게 맡겨두는(앞일을 아미타불의 서원에 맡기는) 타력에 자기만족을 해서도 안 된다.

 


はまさに末法である

正法という中道神理、人類いのに沈潜している

세상은 정말로 말법이다.

정법이라고 하는 중도의 신리를 잃고, 인류는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속에(미혹 속에) 침체되어 있다.

 


このいから人々をうには、正法という法灯を、大自然慈悲に、目覚め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미혹(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정법이라고 하는 법등을 켜고, 대자연의 자비를, 깨닫지(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

 


慈悲をよぴ覚ますである

법은 자비와 사랑을 깨우치는 힘이다.

 


無限慈悲とそのをもって、正法ずる、光明いてくれる

신은 무한한 자비와 그 힘을 가지고, 정법을 믿는 사람의 앞길에, 광명의 길을 열어 준다.

 


ゴータマははじめて人間の価値をった

고타마는, 비로소 인간의 가치를 깨달았다.

 


いうまでもなく人間であり、神、人間大自然は一体となってきている

自然れて人間はなく、人間はその自然、神の経倫にしたがって調和してゆくものであることをったのであった

두말 할 나위 없이(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은 신의 자녀이며, 신의 마음 하에, 인간과 대자연은 일체(一體)가 되어 살고 있다.

자연을 떠나서 인간은 없고, 인간은 그 자연을, 신의 경륜에 따라서 조화해 가는 것인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を、単に、物としてている、心らぎをめることはできない

を単にとして、物としてかしているその奥にある実在をることである

사물을, 단순히, 사물로서 보고 있는 동안은,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는 없다.

사물을 단순히 사물로서 보지 않고, 사물을 사물로서 활용하고 있는(소생시키고 있는) 그 깊숙한 곳에 있는 실재(實在)를 아는 것이다.

 


色心不二という認識、人間から、物を客観的にるようになった、初めてるのであるった。

불이라고 하는 인식은,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서 떠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말할 있는 것이었다.


 

宇宙即我の境地っている瞑想極致には、時間の経過はらなくなる

、今という瞬間を数えるのみで、大自然輪廻、一時みもなくぎてゆく

우주즉아의 경지에 잠겨 있는 명상의 극지에는, 시간의 경과는 알지 못하게 된다.

때는, 지금이라고 하는 순간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대자연의 윤회는, 잠시도 쉬지 않고 지나간다.

 


瞑想から覚められたお釈迦さまのんできたのは

いったいこの自分りを、人してもかってくれるだろうか。」

ということであった

명상에서 깨어난 부처님(お釈迦さま)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도대체, 바로 지금 나의 깨달음을, 사람에게 말해도 알아(이해해) 줄까?

라고 하는 것이었다.

 

 

永遠生命とは、生老病死のない世界であった。

肉体の自分にもう一人自分がいる

れることもぬことも、病むこともいることもない自分がある

영원한 생명이란, 생로병사가 없는 세계였다.

육체의 내 안에 또 한 사람의 내가 있다.

사는 일도 죽은 일도, 병드는 일도 늙는 일도 없는 내 자신이 있다.


 

現在の肉体は両親の縁によってたがその肉体は人生航路の乗りにしかすぎない

一切しみは、自らのいがつくりしたもの、即ち、自然の掟である中道というらったがためにしみなのだ

현재의 육체는 양친의 인연()으로 얻었지만, 그 육체는 인생항로를 위해서 타는 배에 불과하다.

일체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낸 것, , 자연의 법칙인 중도(中道)라고 하는 신의 마음을 거스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인 것이다.

 


しく、正しく、正しくるというその想念行為を放棄するところにしみは

올바르게 본다, 올바르게 생각한다(상상한다), 올바르게 말한다고 하는, 그 상념행위를 스스로 포기(放棄)하는 데에서 괴로움은 발생한다.

 


中道もっとも人間らしくもっとも自然生活のしかたである筈である

중도의 마음은, 가장 인간답게, 가장 자연스런 생활 수단(방식)인 것이다.

 

 

ピバラのをあててゆっくりとられたお釈迦さまはネランジャラの河辺におりてゆかれた

ゆっくりとれるれは、昨日一昨日も変らない

피팔라 나무의 뿌리에 손을 대고, 천천히 일어선 부처님은, 네란자라의 강변으로 내려 갔다.

천천히 흐리는 물의 흐름은, 어제도 그저께도 변함 없다.

 


無言れてゆく。

両手でをすくってわれた

물은 말없이 흘러 간다.

양손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었다.


 

お釈迦さまの教えは、決してしいものではなかったと

なぜならあの当時の奴隷階層人違も沢山出家している

くの無字文盲人達が沢山いた

むずかしい文字かれた一部だけしかからないようなものであったら、神いは平等で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 당시의 노예계층의 사람들도 많이 출가하고 있다.

완전히 글을 쓸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無字文盲)무자문맹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려운 문자로 써진 일부의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면, 신의 구원은 평등하지 않다고, 고 하는 셈이 된다. 

 


お釈迦さまの禅定瞑想は二十一日間続けられた

いつでも金剛定れる不動があった

부처님의 선정명상은 21일간 계속되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선정(金剛定)에 들어갈 수 있는 부동의 마음(不動)이 있었다.

 

 


★ 여기까지의 내용은, 예전에 올린 듯 하지만, 다시 재 번역하여 올렸습니다.


★일본식 한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http://plaza.rakuten.co.jp/hhokari/18000/


*********************************************************************************************************************

 

2012년 9월 25일 목요일, 오후에, 잘못된 받침과 혹 번역상의 잘못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어의 뜻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넣거나, 색깔을 입히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30일에, 2011년 10월 26일에 최초로 올렸던 것을, 수정작업하였습니다.


★여래수량품은, 법화경의 16품입니다.

★보현보살권발품은, 아래의 내용에 나오는 데요, 

보현이 창작으로 만들어 낸 글이라고 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28품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전 절대로 부처 따위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人間釋迦と如來壽量品


인간석가와 여래수량품


 

 


소노가시라 히로치카(園頭廣周) (1918.02.20~1999.02.20) 

전생에서의 이름은, 사리불(舍利佛) 가브리엘(Gabriel) 







お釋迦さまは、 全ての人人は皆如來になる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說かれた。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여래가 된다, 고 하는 것을 설법하셨다.

 


この「如來藏」の眞理は原始佛典の中にはない。
 여래장(如来藏) 진리는 원시불전(原始仏典) 속에는 없다.


 

それなら高橋信次先生は、どう説いていられたのであろうか。
그러면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은, 어떻게 설법하고 계신 것일까?


 

それがはっきり出てくるのは人間釋迦第4巻135頁、解脫への道である。
그것이 확실히 나오는 것은 인간석가 4권 135항, 해탈로의 길이다.


 

この「人間釋迦」という本は第1券の「はしがき」に書かれてあるように、靈的示唆と自動書記現象によって書かれたもので、高橋信次先生が目を瞑ると、2500年前のインドのお釋迦樣の時代のことがパノラマのように瞼の裏に展開される。
이 「인간석가(人間釋迦)」라고 하는 책은 제1권의「머리말」에 적혀 있듯이, 영적시사(靈的示唆) 자동서기 현상(自動書記現象)에 의해 쓰신 것이며, 다카하시 신지 선생(高橋信次先生)이 눈을 감으면, 

2500년 전의 인도의 부처님의 시대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전개된다.



すると手が自然に動いて書かされたというもので、この本を読んだ人達はみな高橋信次先生を、お釋迦樣の生れ變りであるというようになった。
그러자 손이 자연히 움직여 써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을, 부처님의 환생(お釋迦樣の生れ變り)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解脫の道」という章は、お釋迦さまが出家をされて、12年ぶりに生れ故鄕であるカピラ城へ歸られて、自分の父親であるシュットダーナー王をはじめ釋迦族の主だった人達に說法をされたことが書かれてある。
해탈의 길(解脫の道)」이라고 하는 장(章)은, 부처님이 출가(出家)를 하시고, 12년 쯤에 태어난 고향인 카필라 성(城)으로 돌아오시어, 자신의 부친인 슈도다나왕(王)을 비롯한 석가족의 주요한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신 것이 적혀 있다.



 

「釋迦族の友よ、多くの衆生は盲目の人生を送っている。
城內の友は、なに不自由なく優雅な生活を送っているが、一步城外に出ると、生活に疲れた賤民たちの群れがいる。
同じ太陽の下で生活しながら、カースト制度によって社會惡をつくり出している。
석가족의 친구여, 많은 중생은 맹목(盲目)의 인생(人生)을 보내고 있다.
성 안의 친구는, 아무 불편 없이 우아(優雅)한 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한걸음 성밖으로 나가면, 생활에 허덕이는 천민(賤民)들이 무리가 있다.
같은 태양 아래에서 생활하면서, 카스트제도(계급제도)에 의해 사회악(社會惡)을 만들어 내고 있다.

 


人は、生まれによってその價値が定まるのではない。
사람은, 출생(출생지)에 의해서 그 가치(價値)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また、聖者というものは、慈悲の心と行いで、いかに多くの人に生きる喜びを与えたかということで定まるものである。
또한, 성자(聖者)라고 하는 것은, 자비(慈悲)의 마음(心)과 행위(行爲)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살아가는 기쁨을 주었는가 하는 것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人が敵味方に分かれて爭いに走るのは、自己の利益のみにとらわれるからである。
武力によって他を支配しても、いつの日かまた武力によって支配されよう。
사람이 적군(適軍)과 아군(我軍)을 나누어 싸움에 치닫는 것은, 자기(自己)의 이익(利益)만에 사로잡히기(얽매이기)  때문이다.
무력에 의해서 남을 지배(支配)해도, 언젠가 역시 무력(武力)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다.


 

しかし、心の價値、不變の神理を理解するならば、いかなる大國の王たちといえども、爭いと破壞の空しさを悟ることができよう。
하지만, 마음의 가치(價値), 불변(不變)의 신리(神理)를 이해하면, 어떠한 강대국(大國)의 왕(王)들이라고 하더라도, 싸움과 파괴(破壞)의 공허함(空しさ)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人間は、鬪爭と破壞の歷史を繰り返すために生まれてきたのではない。
より豊かな心と、調和された杜会を作るために生まれてきたのである。
인간은, 투쟁 파괴의 역사를 되풀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보다 풍요로운 마음(관대한 마음:豊かな心) 과, 조화(調和)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それが同胞相爭い、自己の權益を守るために一生を終ってしまう。
いったいどこに人生の目的と意義があるのであろうか。
おろかというほかはない。
舊來の信仰では、自らを救うことはできない
그것이 동포상쟁(同胞相争い:형제 자매의 상쟁), 자기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일생을 끝마쳐 버린다.
도대체 어디에 인생의 목적과 의의가 있은 것일까?
어리석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구래의 신앙으로는, 자신을 도울(구제할) 수가 없다.



(ここのところを讀むと、2500年前の世界と、現在の世界とが全く同じであって、人間の心というものは少しも進步していないということがよく分かる。
信仰の世界でも同じである。
(이 부분을 읽으면, 2500년 전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가 완전히 같은 것이며,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진보(進步)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一つの神に生かされている人間が、救われる道は一つであるべきである。
하나의 신(神)에게 되살려지고 있는 인간이, 구제받는 길은 응당 그렇게 하나이어야 할 것이다.


 

なのに、現在、日本には約二十万近くの宗敎法人があって、それぞれに人が救われる道を説いているのである。
그런데도, 현재, 일본에는 약 20만에 가까운 종교법인 있으며, 저마다 사람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人間が救われる終局の神理が、二十万通りもある箸がない。)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종국(終局)의 신리(神理)가, 20만 가량이나 있을 턱이 없다。)

 



自分を救う者は、自分以外にない。
思うこと、行なうことが神理=法に適った生活以外に道はない。
자신을 돕는(구제하는) 자는, 자기 이외에는 없다.
생각하는 것, 실행하는 것이 신리(神理)=법(法)에 들어맞는 생활 이외에는 길은 없다.

 


なぜなら、人それぞれの心の中にアートマン(眞我)というものがある。
その眞我に目覺めることなのだ。
왜냐하면, 사람 각자의 마음속에 아트만(진아)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 진아(眞我)에 눈뜨는 일인 것이다.

 

  

眞我なる自分は、天地創造のすべてを知っている。
참된 자신인 자기 자신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眞我以外に他に賴る必要のない自分、正しい自己こそ賴るべきすべてである。
참된 자신(眞我) 이외에 다른 것에 의지할(믿을) 필요가 없는 자기 자신, 올바른 자기야말로 의지해야(믿어야) 될 전부이다.


 

僞りも憎しみもなく、赤子のような安らぎのある自己。
天眞爛漫な素直な心。
これこそ、アートマン(眞我)の姿である。
거짓도 증오도 없는, 갓난아기와 같은 평안함이 있는 자기 자신.
천진난만한 솔직한 마음(天眞爛漫な素直な心). 
이것이야말로, 아트만(진아=참된 자기)의 모습이다.


 

しかるに、人は生まれた環境、敎育、思想、習慣に溺れ、自己保存の僞我に蔽われ、自ら苦惱をつくり出して行く。
그런데도, 사람은 태어난 환경(環境), 교육(教育), 사상(思想), 습성(習慣) 빠져, 자기보존(自己保存)의 위아(爲我:거짓된 자기)에 덮이여, 스스로 고뇌(苦惱)를 만들어 내어 간다.


 

苦界のままで人生を送れぱ、死後の人生もまた苦界である。
苦界とは地獄である。
고계(苦界)인 채로 인생을 보내면, 사후(死後)의 인생도 또한 고계(苦界)이다. 
고계(苦界)란 지옥(地獄)이다.


★고계(苦界) 

육체적·경제적인 괴로움 ⓑ고통 ⓒ고생  ⓓ어려움과 정신적인 괴로움 ⓔ고민 ⓕ번민 ⓖ걱정 ⓗ근심)

 



(地獄は神がつくったのではない。
神が惡いことをした人間を懲罰するために地獄をつくられたと說く人があるがそれは間違っている。
(지옥(地獄)은 신(神)이 만든 것이 아니다.
신(神)이 나쁜 짓을 한 인간(人間)을 징벌(懲罰)하기 위해 지옥을 만들었다고 설법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人間には想念の自由が与えられてある。
だから人間は、善を思うことも惡を思うことも自由である
인간에게는 상념(想念)의 자유(自由)가 주어져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선(善)을 생각하는 것도 악(惡)을 생각하는 것도 자유(自由)이다.



 

人間が自らの想念することの自由によって惡を描いた、その想念があの世で地獄として現わされているのである。
だから、人間は自分が勝手に想念した惡の中で、自分で勝手に苦しんでいるのである。
いくら他に助けを求めても、自分が心の中で惡なる想念を描いていれぱ、どこまで行っても悪は消えることはない
인간이 자신의 상념(想念)하는 것이 자유에 의해서 악을 그린(악을 마음에 떠올린), 그 상념(想念)이 저 세상에서 지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제멋대로 상념한 악 속에서, 스스로 제멋대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남에게 도움을 구해도, 자신이 마음속에서 나쁜 상념(想念)을 그리고(마음속에 떠올리고) 있으면, 어디까지 가더라도 악(惡)은 사라지는(없어지는) 일은 없다.

 


それが即ち因緣因果の法則である。
그것이 즉 인연인과의 법칙(因緣因果の法則)이다.


 

因緣の法則を說いていながら、一方で他力信仰を說く間違った宗敎指導者がいかに多いことか。)
인연의 법칙을 설법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타력신앙을 설법하는 잘못된 종교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가? )

 



地獄といい、極樂といえども、神が造られたものでははい。
人ぴとの想念と行爲が生み出したものだ。
지옥(地獄)이라고, 극락(極樂)이라고 하더라도, 신()이 창조(創造)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상념(想念)과 행위(行爲)가 만들어 낸 것이다.

 


 

(ここでいう極樂とは、神が造られた天上界ではなくて、人間が想念によって造り出した極楽のことである。
努力する必要のない、寢ていて食える、欲しいものは何でも手に入る、怠惰な世界のことである。
仕事をしなくても食える世界を夢見た人達は、そういう世界へ行く。
(여기에서 말하는 극락(極樂)이란, 신이 만든 천상계(天上界)가 아니라, 인간이 상념(想念)에 의해서 만들어 낸 극락(極樂)인 것이다.
노력할 필요가 없고, 누워 있어도 먹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는, 태만한 세계인 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세계를 꿈 꾼 사람들은, 그러한 세계로 간다.



すると、仕事が無いことがどんなにつらいか、食うだけで何もしないということがどんなに空しいものであるかを知らされるのである。)
그렇다면, 일이 없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먹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恐れてはならない。
自らを卑下してはならない。
希望を持って謙虛に、與えられた環境を十分に生きようと努力する者に、神佛の慈悲が惜しみなく與えられるのである。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비하(卑下)해서는 안 된다.
희망(希望)을 가지고 겸허(謙虚)하게, 주어진 환경(環境)을 충분히 살리려고 노력(努力)하는 사람에게, 신불(神佛)이 자비(慈悲)가 아낌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あの世とこの世とを通じて、もっとも尊いことは明るい感謝の心を持って努力することである。
(저 세상과 이 세상을 통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밝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는 일이다.

 

努力の價値がどんなに尊く大事なものであるかということは、あなた方の周圍に、何の信仰も持たないがいつも明るい心で感謝して、一所懸命に努力して成功し幸福になっていられる人がある筈である。
その反面に、一所懸命に信仰していても、いつも暗い顔をして、仕事も努力せず、何かあると拜んだりお詣りばかりしていて、一向に幸せにならない不幸續きであるという人もある筈である。
信仰とは何か、拜んだりお詣りしたりすることではなくて、明るい感謝の心で努力することなのである。
努力する人にの慈悲加護が与えられるのである。)
노력(努力)의 가치(價値) 얼마나 소중하고 중대사한 것인가하는 것은, 여러분의 주위(周圍)에, 아무런 신앙(信仰)도 갖고 있는 않지만 늘 밝은 마음으로 감사(感謝)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성공(成功)해서 행복(幸福)하게 살고 계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열심히 신앙하고 있어도, 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일도 노력도 하지 않고, 뭔가 있으면 합장 배례하거나 참배하기만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행복하게 되지 않는 불행의 연속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합장 배례하고 참배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 감사의 마음으로 노력하는 일인 것이다.
노력(努力)하는 사람에게 자비 가호(慈悲加護) 주어지는 것이다)

 



釋迦族の友よ、
目覺めよ。そして、起て。」
석가족의 친구여,
눈을 떠라.  그리고, 일어나라。」



ブッダの法は解脫の法であった。
輪廻から解脫するというものであった。
붓타의 법은 해탈의 법이었다.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脱)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もう一つは現象界にとらわれない生き方であった。
또 하나는 현상계(現象界)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생활 태도(삶의 방식:生き方)이었다.

 


如來になれぱ、轉生は己の意思に委ねられる。
여래가 되면, 전생(轉生:환생)은 자기의 의사(뜻)에 맏겨진다.


 

この場合は轉生の粋から完全離脫したといえるわけだ。
이 경우는 전생(轉生:환생)의 틀에서 완전히 이탈(離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轉生の絆から完全に離脫して轉生は己の意思にゆだねられるということは、如來になれぱ過去、現在未來の三世を見通す力が得られるから、この世の助きのすべてが分かり、自分の思う時と所に白由に肉体を持つ事が出來るということである)
(전생(轉生:환생)의 유대(굴레)에서 완전히 이탈(離脱)하고 전생(환생)은 자기의 의사(意思:뜻)에 맡겨진다고 하는 것은, 여래(如来)가 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꿰뚫어보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자기가 생각하는 때()와 장소()에 마음대로 육체(肉體)를 가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現象世界にあって、一切の物に囚われが無くなれぱ、生きながらにして解脫の境地にあるといえる。
현상 세계에 있고, 일체의 사물에 사로잡힘(얽매임)이 없게 되면, 살아가면서도 해탈의 경지(解脫の境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一方、轉生の永久運動には、生命の循環と因緣因果がある。
生命の循環(あの世とこの世を循環する)とは、生ある者の天命であり、生命として現象世界に現われた者は、循環の法の外にはみ出ることは出来ない。
한편, 전생(轉生:환생)의 영구운동(永久運動)에는, 생명의 순환(生命の循環)과 인연인과(因緣因果)가 있다.
생명의 순환(저 세상과 이 세상을 순환한다)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천명(天命)이며, 생명으로서 현상 세계(
現象世界)에 나타난 사람은, 순환의 법 이외에는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나올 수가 없다)

 


これを、生の天命という。
이것을, 인생의 천명(生の天命)이라고 한다.

 


ただし、個の魂が神に近づき、佛に至ると法の施行者となり、轉生は個の魂の意思に委ねられる。
단, 개인(個)의 영혼(魂)이 신(神)에 다가가서, 부처(佛)에 이르면 법(法)의 시행자(施行者)가 되어, 전생(轉生:환생)은 개인(個)의 영혼()의 의사(意思:뜻)에 맡겨진다.

 


因緣因果は、カルマの輪廻であり、苦樂は永遠につづく。
大部分の生命は、循環の法の作用のなかで、因緣因果を繰り返しているわけである。
인연인과는, 카르마(업)의 윤회(輪廻)이며, 고락(苦樂)은 영원(永遠)히 이어진다(계속된다).
대부분의 생명은, 순환의 법의 작용 속에서, 인연인과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シュット・ダナーがブッダの法を聽聞し、感動した点は轉生の粋から完全離脫出來るということであった。
슈도다나가 붓타의 법(法)을 청문(聽聞)하고, 감동(感動)한 점은 전생(환생)의 틀에서 완전(完全)히 이탈(離脫)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이었다.


 

「個の魂が神に近づき、佛に至ると法の施行者となる」
개인(個)의 영혼(魂)이 신(神)에 다가가서, 부처(佛)에 이르면 법(法)의 시행자(施行者)가 된다

 



ブッダというのは、神の心を完全に知り、神の心をそのまま人に傳える力を持たれた人のことで、日本では「神佛一体」ということを、神のことを佛とも言うである、という意味に解釋している人が多いが實際はそうではない。
붓타라고 하는 것은, 신의 마음을 완전히 알고, 신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힘을 가진 사람인 것이며, 일본에서는 「신불일체(神佛一體)」라고 하는 것을, 신(神)을 부처라고도 말하고 있다, 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お釋迦樣の事をブッダと言うのは、お釋迦樣が完全に法を知って、神の心の全てを知っていられたからブッダと言うのであり、お釋迦樣が出生される以前、三千年も前からインドにブッダが出られるということが言い傳えられていたのである。
부처님을 붓타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이 완전히 법을 알고, 신의 마음 전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붓타라고 말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출생하시기 이전, 2천년이나 전부터 인도에 붓타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말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お釋迦樣が悟りをひらかれた後、忽ちにして中インド全体に廣がって、多くの人がぞくぞくと歸依してきたのは、やがてブッダがインドに出られる、という、ブッダの出生を待望する空氣があったからである。
부처님이 깨달음을 여신 후, 순식간에 중인도(中印度) 전체로 확산되어, 많은 사람이 속속 귀의해 온 것은, 이윽고 붓타가 인도에 나오신다, 고 하는, 붓타의 출생을 대망(待望 : 사물의 실현이나 출현을 바라며 기다림)하는 공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글상자를, 했습니다.

예전에, 스크랩해 가신 분들이 글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의 진의를, 밝히는 내용이, 있어서, 소개할까 해서 입니다.

 

 

 

이 글은, 2009년 11월 13일, 00시 13분에, 카테코리 "좋은글"에 올렸던 글입니다.

현재 날짜인 2014년 09월 18일 목요일 오후 날짜로 변경하여 올립니다.


머리를 드리워 진흙길에


아득한 옛날 선혜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둔 채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선혜는 세상의 덧없음을 느꼈다. ‘이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한 푼도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생까지 가져갈 수 있는 씨앗을 심어야 겠다.’ 이렇게 생각한 선혜는 거지와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끝없는 고행의 길을 떠났다.


샘솟는 정진 끝에 도를 깨우쳤다. ‘모든 중생이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욕심, 성냄,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그릇된 마음을 버려야만 참다운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 후에 선혜선인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품으로써 욕심을 비우고 성냄을 다스리고 세상 이치를 바라보는 지혜를 닦으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서원했다.


그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다는 말에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로 가던 길에서 오백명의 수행자를 만나 도(道)를 이야기하고 헤어질 때가 되자 그들은 은전 한 닢씩을 내어 선혜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을 어귀에 이르니 집집마다 전단향을 피워 놓아 온 마을에 향내가 가득했으며, 길은 물로 씻은 듯 말끔하여 마을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연등부처님께서 마을에 오시는 날이라 했다. 선혜선인은 꼭 부처님을 뵙길 서원해 왔기에 그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마침 맞은 편에서 고오피라는 왕녀가 일곱송이의 푸른 연꽃을 가지고 걸어왔다. 꽃이 필요했던 선혜선인은 그녀에게 간절히 청했다. 부탁입니다. 저에게 오백닢의 은전이 있는데 푸른 연꽃과 바꾸어 주십시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마을과 온 도시엔 연등부처님께 예(禮)하고 공양할 꽃을 모두 왕 앞에 바치라 해서 꽃이란 꽃은 찾아 볼 수 없을 때였다.


저 역시 연등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기 위해 준비한 꽃이지만 그렇게 간청하시니 다섯 송이를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깨달음을 얻게 되시면 저를 잊지 마시고 제도해 주십시오.”

다섯 송이의 푸른 연꽃을 구한 선혜선인은 부처님께서 지나가는 길목에 다다랐다.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거리에 나타나시자, 국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은 준비한 꽃을 바치고 향을 사르며 부처님께 경배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친 많은 꽃 중에서 선혜선인이 바친 푸른 연꽃 다섯 송이만이 공중에 떠 있어 부처님의 머리위를 장식하였다. 연등 부처님께서는 선혜선인을 보시고 가까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그대는 오랜 과거생을 거듭하면서 수행을 하였고, 몸과 마음을 바쳐 남을 위하여 살았으며, 욕망을 버리고 자비행을 닦아 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아흔 한 겁이 지나면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라 불리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혜선인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게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진흙길이 있었다. 선혜선인은 부처님의 발이 진흙으로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 길위에 펼치고도 부족하여 머리를 풀어 길 위에 깔았다. 이 모습을 지켜 본 고오피 왕녀는 선혜선인의 뜨거운 구도심에 감동하여 함께 엎드려 절하였다. 이 일이 연유가 되어 선혜선인은 뒤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고 고오피 왕녀는 아쇼다라 왕비가 되었다.


<운문지 제70호 벽화이야기 참조>


출처:http://unmunsa.or.kr/new/cloud/story.html?tbid=cstory&cate=&hlq=view&pg=1&num=3&keyfield=&keyword=


千年의 숨결 虎距山 雲門寺

(천년의 숨결 호거산 운문사)

이 절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있습니다.

비구니 사찰입니다.

주변 계곡의 물은 청정수입니다.

아주 마음의 아름다운 비구니분들이 마음을 닦는 사찰입니다.

실제로, 가 본 곳입니다.

 

 


 


ブッダが、やがてインドに出生されるという言い傳えはギリシャから傳えられた。
붓타가, 이윽고 인도에 출생하신다고 하는 전설은 그리스(Graecia)에서 전해졌다.


 

ブッダと言う悟られた方が亡くなられる時は、この次はどこに生まれる、ということを予言をされることになっている。
붓타라고 하는 깨달은 분이 돌아가실 때(죽을 때)는, 이 다음은 어디에 태어난다, 라고 하는 것을 예언하시게 되어 있다.


 

ブッダと言うインドの言葉が、中國では「佛陀」と譯され「佛」ともいい「如來」とよぱれたのである。
붓다라고 하는 인도의 말이, 중국에서는 「불타(佛陀)」라고 번역되어 「불(佛=부처)」이라고 하며「여래(如來)」라고 불렸던 것이다.


 

だから、「神佛一體」と言うのを、宇宙創造の神の事を、佛敎では「佛」と言うのであると解釋しているのは間違いである。
그래서, 「신불일체(神佛一體)」라고 말하는 것을, 우주창조의 신(神)을, 불교에서는 「불(仏=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神の心を完全に知っている方を佛と言うのであるから、その心の面に於ては「神佛一體」ということも言えるのである。
신(神)의 마음을 완전히 알고 있는 분을 불(佛=부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면에 있어서는

「신불일체(神佛一體)」라고 하는 것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如來の事をキリスト敎ではメシヤという。
菩薩の事を光の天使といっている。
여래를 그리스도교(Christianity;기독교)에서는 메시야(히브리어: Messish, 영어: Messiah)라고 말한다.
보살빛의 천사라고 말하고 있다.

 


佛敎でいう如來と菩薩、キリスト敎でいうメシヤと光の天使は、我我と同樣に個生命である。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와 보살, 그리스도교(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야와 빛의 천사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생명이다.

 


我我と違う点は、それらの個生命を持たれた方方は、あらゆる經險を通して悟られた範圍が、地上の我我が依然として煩惱迷妄の暗い雰圍氣の中に留まっているのに反して、宇宙の「一なるもの」即ち「神」を悟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우리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개인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온갖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범위가, 지상의 우리들이 의연히 번뇌미망(
煩惱迷妄)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에 반해서, 우주가 「하나인 것」 즉「신(神)」을 깨닫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我我が全て悟りによって完成されてゆくように、如來、メシヤ、大指導靈と言われる方も、自分自身の體險と悟りによって完全に自己統制をされて、善いことのみをし続けて来られた人達であるのである。
우리들이 전부 깨달음에 의해서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여래, 메시야, 대지도령이라고 불리는 분도, 자기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에 의해서 완전히 자기통제를 하시고, 선한 것만을 계속 해 오신 분들인 것이다.

 


我我が神を想うことが出來るのは、我我が神と一體であるという何よりの証據なのである。
だから、我我を神の子というのであり、我我は「神の意識」のまがうかたなき延長であり、「神の意識」そのものなのである。
우리들이 신(神)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신(神)과 일체(한 몸)이다 라고 하는 가장 좋은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신(神)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들은「신의 의식(神の意識)」의 헷갈릴 수가 없는(확실한, 틀림없는) 연장(延長)이며,「신의 의식(神の意識)」그 자체인 것이다.


 

人生の、永い輪廻轉生の旅路というものは、神の意識の延長である人間の意識が、色色な體險をして、また神の意識であったことを自覺して、神の意識に歸る道程なのである。
인생의, 오랜 윤회전생(전생윤회)의 여로(
旅路)라고 하는 것은, 신(神)의 의식(意識)의 연장(延長)인 인간의 의식(意識)이,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또 신의 의식(意識)이었던 것을 자각하고, 신의 의식(意識)으로 돌아가는 도정(道程)인 것이다.

 


その人が神の意識に目ざめず、どんなに惡を犯そうとも、その人もまた神の意識なることを知るまでは永い輪廻轉生をくり返さなけれぱならないのである。
그 사람이 신의 의식에 눈뜨지 않고(신의 의식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리 악을 범하더라도, 그 사람도 역시 신의 의식인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윤회전생(전생윤회)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だから、どんな惡人でも、全ては救われることが約束されているのであるが、それは自分が悟る以外に救われる道はないのであって、救われるのはあくまでも自力であって他力では救われないのである。
그래서, 어떤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전부는 구제받는 것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깨닫는 이외에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며, 구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력이며 타력으로는 구제받을 수 없는 것이다.

 


如來、メシヤといわれる方は、神の法の全てを知っていられる法の實踐者なのであって、法の講義をする人ではないのである。
여래, 메시야라고 불리는 분은, 신(神)의 법 전부를 알고 계시는 법의 실천자(
實踐者)인 것이며, 법의 강의(講義)를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だから如來、メシヤは自ら實踐して、斯くの如く生きよと示されるのであるから、說かれることと行うことが一致しているのである。
그래서 여래, 메시야는 스스로 실천하고, 이와 같이 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법하시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法の一部分を知っている人達は、ある程度法を講義はするが、實踐の出來ていない面があるから、言うことと行うことが一致しないのである。
법의 일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법을 강의는 하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 면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頭で知的に法を知ることが出来ても、實踐していなかったら、それは法を知ったとはいわれない。
머리로 지적으로 법을 알 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실천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법을 알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だから、高橋信次先生が、
「言うことと行うことの一致しない者はニセモノである。そういう者を信じてはならぬ。」と言われたのである。
그래서,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가짜이다.  그러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我我は「罪の子」でもなければ「罪惡深重の凡夫」でもないのである。
우리들은「죄의 자녀」도 아니려니와「죄악심중의 범부」도 아닌 것이다.


 

人間の不完全な、神の子であることを自覺していない想念と行爲とのみを見れば、「罪の子」であり、「罪惡深重の凡夫」と見える。
しかし、そう見えている表面の姿の奧に、未だかつて汚れたことのない、神の子の意識があるのであることを見ないといけないのである。
인간의 불완전한, 신의 자녀인 것을 자각하고 있지 않은 상념과 행위만을 보면,「죄의 자녀」이며,「죄악의 심히 무거운 범부」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고 있는 표면의 모습의 깊은 곳에, 지금까지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는, 신의 자녀의 의식이 있는 것인 바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人間が救われる原理は、そこにあるのである。
인간이 구제되는 원리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われわれはみな、如來に到達しなければならない。
必らず如來になることを神に約束されている神の子なのである。
우리들은 모두, 여래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틀림없이 여래(如來)가 되는 것을 신에게 약속받고 있는 신의 자녀인 것이다.

 


それがお釋迦樣の言葉であり、この一大事が釋尊減後の弟子達によって傳えられず、お釋迦樣が亡くなられて九十日目に、迦葉を中心として阿難の記憶によって結集が行なわれた時に、その結集を不滿として去って行ったのが文殊と普賢である。
그것이 부처님의 말이며, 이 일대사(
一大事)가 석존 멸후의 제자들에 의해서 전해지지 않고,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90일 째에, 가섭(迦葉)을 중심으로 해서 아난(阿難)의 기억에 의해서 결집이 거행되었을 때에, 그 결집을 불만으로 해서 가 버린 것이 문수(文殊) 보현(普賢)이다.

 


この文殊と普賢が設いたことが後に拾い上げられて大乘佛敎となって行った。
 문수 보현이 설법한 것이 나중에 많은 것 중에서 골라내어 대승불교로 되어 갔다.


 

であるから大乘佛敎ではこの二人が主体になって、智惠第一といわれた舍利佛も、文殊には頭が上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文殊の智惠といわれるようになった。
그러므로 대승불교(
大乘佛敎)에서는 이 두 사람이 주체가 되어, 지혜제일(智惠第一)이라고 불리웠던 사리불(舍利佛)도, 문수(文殊)에게는 수제자로 인정하지 않게 되어, 문수의 지혜(文殊の智惠)라고 말하게 되었다.


 

普賢のことは「妙法蓮華經」の最後の締めくくりとして「普賢菩薩勸發品第二十八」というものにまとめられ、お釋迦樣が直接普賢菩薩にこのように說かれたという形で書かれてあり、文殊菩薩は智の象徵であり、普賢菩薩は理を象徵する菩薩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
보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최후의 결말로서 「보현보살권발품 제28 」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합되어, 부처님이 직접 보현보살(
普賢菩薩)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라고 하는 식으로 적혀 있고, 문수보살(文殊菩薩)지혜(智)의 상징이며, 보현보살(普賢菩薩)도리(理)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라고 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法華經で、お釋迦樣だけでなく、すぺて人は如來になれる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取り上げたことは實に素晴らしいことであった。
법화경에서, 부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여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채택한 것은 참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ところが法華經が素晴らしい神理が說かれているという余りに、余分なことを付け加えてしまった。
그런데 법화경이 매우 훌륭한 신리가 설법되어 있다고 하는 나머지, 여분(필요 이상인)인 것을 첨가해 버렸다.


 


「普賢菩薩勸發品」の中にも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る。
「보현보살권발품」의 중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後世、法華經を讀んだ人達がみな間違えてしまったのは、みなお釋迦樣がそのよう言われたのである、という形で書かれてあるから、お釋迦樣がそのように說かれたのであったら、そのようにしなけれぱ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そ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が、心が傳えられずに形だけになってしまったところに、根本的な間違いがあるのである。
후세, 법화경을 읽은 사람들이 모두 잘못되어 버린 것은, 모두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하는 형태로 적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렇게 설법하신 것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라고 하는 것이지만,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형식만으로 되어 버린 바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이다.


 

「普賢よ、もしこの法華經を受持し、讀誦し、正憶念し、修習し、書寫することあらん者はまさに知るぺし。
この人は釋迦牟尼佛を見たことになるのである。
即ち佛敎信仰の最も高い境地に入るのである。
「보현이여, 만약 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고, 올바르게 억념하고(마음에 깊이 새겨 잊지 않고)、수습하고(배워 익히고), 베껴 쓰는 모든 사람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석가모니를 본 것이 되는 것이다.
즉 불교신앙의 가장 높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だから、佛の口から直接に、このお經を聞くのと同じである。
釋迦牟尼佛を直接供養す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
그래서, 부처의 입에서 직접, 이 경문을 듣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를 직접 공양하게 되는 것이다.


 

その人を佛がお褒めになるのである。
その人は佛がみ手をもって、その頭を撫でて下さるのである。
その人は釋迦牟尼佛の衣に覆われることが出來るのである。
그 사람을 부처가 칭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부처가 손수,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다.
그 사람은 석가모니부처의 옷에 덮힐 수가 있는 것이다.

 


もし人がそしったり輕んじたり、汝は氣違いである、そのような修行をしても、なんの結果もないであろうといった人は、眼が見えなくなるであろう。
もしまた、法華經を持っている者を見て、その人の過失や欠点を見出してあばくようなことがあると、それが本當であってもなくても、そのようなことをする人は現世でライ病になるであろう。
また法華經を持っている人を輕んじたり笑ったりする人は、齒が欠け隙間だらけになり、唇は醜く、鼻や手足も醜くなり、目も體も人にきらわれるようになるであろう。
만약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깔보거나, 너는 미친 사람이며, 그러한 수행을 해도,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또한, 법화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과실이나 결점을 찾아내어 까발리는 것과 같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사실이어도 아니어도, 그러한 것을 하는 사람은 현세에서 문둥병(癩病)에 걸릴 것이다.
법화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깔보거나 웃거나 하는 사람은, 이가 빠진 틈새투성이가 되어, 입술은 추하고, 코나 손도 보기 흉하게 되어, 눈도 몸도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であるから普賢よ、もし法華經を持っている者を見たら、遠くからであっても、佛を迎えるようにしてその人を迎えなけれぱならないのである。」
그러므로 보현(普賢)이여, 만약 법화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처를 맞이하는 것처럼 해서 그 사람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私達は、高橋信次先生の本を読み話を聞いていたから、このような言葉に迷わされることはないが、尊いお釋迦樣がすべて說かれたものであるといって見せられた過去の人人は、みなこれがお釋迦樣が說かれたのであると、信じてしまったのも無理はないと思う。
우리들은,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에 현혹되는 일은 없지만, 존엄한 부처님이 전부 설법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보여진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이라고, 믿어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日蓮上人も法華經が第一であると思われた。
니찌렌 상인(일련상인)도 법화경이 제일이라고 믿었다.

 


日蓮上人はまた、法華經第一に思われる余りに、法華經の中に說かれてある法を大事にせよと言われるつもりで「南無妙法蓮華經」と唱えよ、「南無妙法蓮華經」と一回唱えることは、「妙法蓮華經」全券を一回讀んだことに相當すると說かれたために、日蓮宗の信者達は一回でも澤山唱題すれぱ救われると思って唱えるようになった。
니찌렌상인(일련상인)은 또한, 법화경이 제일로 믿어버린 나머지, 법화경 속에 설법되어 있는 법을 소중하게 여기세요 라고 말할 작정으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소리내어 읽어라(외워라, 큰소리로 외쳐라),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한번 소리내어 외우는(읽는) 것은, 「묘법연화경」전권을 한번 읽은 것에 해당한다고 설법했기 때문에, 니찌렌종(일련종)의 신자들은 한번이라도 많이 창제(경전의 제목을 입으로 부르면)하면 구제받는다고 생각하며 외우게 되었다.

 


いくら朝から晩まで休みなしに唱題してみても、心が分からなかったら悟ることはできない。
아무리 아침부터 밤까지 쉼없이 제목을 외워보아도, 마음을 모른다면 깨달을 수가 없다.

 


法然、親鸞の念佛が日蓮上人の唱題より先に言い出されたのであるが、念佛は人間の無力感に立って、救いは向うから阿弥陀如來樣から來るというのである。
この念佛も法華經に書かれてある「受持し、書寫し、憶念し」というところから導き出されている。
호넨(
法然), 신란(親鸞)의 염불이 니찌렌상인(일련상인)의 창제보다 먼저 구전되었던 것이지만, 염불은 인간의 무력감에 서서, 구제(구원)은 저쪽에 있는 아미타여래님에게서 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염불도 법화경에 적혀 있는 「수지하고, 베껴 쓰고, 억념하고(마음에 깊이 새겨 잊지 않고)」라고 하는 데에서 도출되어 있다.


 

更にもう「唯願わくば世尊、わがこの陀羅尼を說くことを許したまえ。即ち佛前に於いて、呪を說きてもうさん……」
と言って「呪」を唱え、
「世尊、もし菩薩ありて、この陀羅尼を聞くことを得ん者は、まさに知るべし、普賢神通の力なり」
と、陀羅尼を唱えると佛に守られるというところから發したものである。
더 더욱오직 바라옵건데 세존이시여, 제가 이 다라니(
陀羅尼)를 설법하는 것을 허락한 앞(前)에.  즉 부처님 앞에서(佛前)에서, 주문을 설법해도 ……

라고 말하며, 「주문」을 소리내어 읽으며(외우며),
세존이시어, 만약 보살이며, 이 다라니(
陀羅尼)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확실히 알아야 하고, 보현(普賢)의 신통한 힘이니라

라고, 다라니(陀羅尼)를 소리내어 읽으면(외우면_ 부처가 지켜주신다고 하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다.



 

心なくして、ただ、讀誦すればいい、寫經すれぱいい、念佛や題目を唱えれぱいいというのは明らかに間違っているのであって、佛に通じ如來に通ずる綺麗な心を持ってするならぱ、それはまた、それだけの心の進歩があるのであるが、心を忘れての信仰は成り立たないのであることをよく知らなけれぱならない。
철없이(분별이 없이), 단지, 독송하면 좋다, 사경(寫經)하면 좋다, 염불이나 제목을 소리내어 읽으면(외우면) 좋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며, 부처에게 통하며 여래에게 통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는다고 하면, 그것은 역시, 그만큼의 마음의 진보가 있는 것이지만, 마음을 잊어버리고 있는 신앙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高橋信次先生が書かれた「心行」は、宇宙の法が說かれてあるのであり、高橋信次先生が「心行」を書かれたのは、この宇宙の神理を全人類に知らせたいという慈悲の心から書かれたものである。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이 쓰신「심행」은, 우주의 법을 설법하시고 있는 것이며,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이, 「심행」을 쓰신 것은, 이 우주의 신리를 전인류에게 알려 주고 싶다고 하는 자비의 마음에서 쓰신 것이다.


 

これは佛典や聖書と同じように扱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것은 불전이나 성서와 마찬가지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どうしても精神が統一しないという娘さんがあった。
私(園頭先生)はその人に「心行」の意味をよく치噛みしめながら每日「心行」を書寫することをすすめた。
아무리 해도 정신이 통일되지 않는다고 하는 아가씨가 있었다.
나(소노가시라 히로치가)는 그 사람에게「심행(心行)」의 의미를 잘 음미하면서 매일 「심행(心行)」을 베껴 쓸 것을 권했다.


 

それは三月であったが、九月にその方に逢った時、全く見違えるように落着いていられたのには驚いた。
그것은 3월이었지만, 9월에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완전히 몰라볼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었던 것에는 놀랐다.

 


寫經も本當にその意味が分かってするならばよいが、意味も分からずにするのであれば、その事によって、心が統一され字が上手になるという利点はあっても、それによって悟ることにはならないから、寫經されるならば、意味をよく噛みしめながら寫經されることをお勸めする。
사경도 정말로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좋지만, 의미도 이해하지 않고 하는 것이라면, 그 일에 의해서, 마음이 통일되는 문자가 능숙하게 된다고 하는 이점은 있어도, 그것에 의해서 깨닫는 것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사경하게 된다면, 의미를 잘 음미하면서 사경하시는 것을 권장한다.




 

日本佛敎は、法華經の形骸だけになっているといえる。
法華經を信ずるというならば「如來壽量品」と「授記品」をもっと信じて、「やがて人はみな如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心を大事にしてゆくべきであると思う。
일본 불교는, 법화경의 형해(形骸)만으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을 믿는다고 하면, 「여래수량품」과「수기품」을 더욱 믿고, 「이윽고 사람은 모두 여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소중하게 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そうなるならば、信仰は心でするものであるから、
「月に千回、百年間祀るとも、たとえ、一時でも、よくこれを修めた一人を導くならば、その供養はまさに百年間の祭祀に優る」
그렇게 되면, 신앙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달에 천번, 백년 동안 제사지내더라도(신으로 받들어 모시더라도), 가령, 한때라고 할지라도, 자세히 이것을 익힌 한 사람을 이끌게 되면, 그 공양은 정말로 백년 동안의 제사보다 낫다」



とお釋迦樣が說かれたように、佛敎は祭祀することではなくて、法を實踐する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祭祀佛敎、葬式佛敎、觀光佛敎であることをやめなければならないし、法華經の中の、お釋迦樣が說かれたのではない、後世の作者がつけ加えた間違ったことを正しいとして傳えていることを信じている新興宗敎も、これまでのあり方を大改革し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라고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처럼, 불교는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실천하는 것인 바를 알고, 제사 불교, 장례식 불교, 관광 불교인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고, 법화경 속의,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이 아닌, 후세의 작자가 첨가한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해서 전하고 있는 것을 믿고 있는 신흥종교도, 지금까지의 본연의 모습을 대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人間が神を求めずにはいられないのは、本來人間は神の意識の延長線上にある神の子であり、即ち如來になり得る意識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り、本當の信仰はそこに原点を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인간의 신을 아무래도 신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본래 인간은 신의 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신의 자녀이며, 즉 여래가 될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신앙은 거기에 원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罪の子が次第に神の子になるのではないのである。
それは本來ダイヤモンドであるからこそ、磨けばダイヤモンドの光りを放つことが出래るのであって、石をいくら磨いてもダイヤモンドになることはないのと同じである。
죄악의 자녀가 차즘 신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본래 다이야몬드이기 때문에, 닦으면 다이야몬드의 빛을 발할 수가 있는 것이며, 돌을 아무리 갈아도 다이야몬드가 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どんなに美しい素晴らしい言葉を以ってしても褒め過ぎるということはないほどに、素晴らしい神の意識を持っている我我が、そのことをどれだけ自覺し實踐しているかによって、その人の人格が違う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아무리 아름다운 매우 훌륭한 말을 사용해도 너무 칭찬한다고 하는 것은 없을 정도로, 매우 훌륭한 신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일을 어느만큼 자각하고 실천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격(人格)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神はないといっている人は、神があることを自覺するまでに至っていない幼い魂の持ち主であることを知って、その人が早く神の意識に目覺められるように祈って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신은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신이 있는 것을 자각하기까지에 이르고 있지 않은 어린(미숙한) 영혼의 소유자인 것을 알고, 그 사람이 빨리 신의 의식에 눈뜰 수 있도록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目を瞑って今から二千五百年前のインドの当時を想起し、現在の狀態とを比較對照して考察する時に、神が創られた法、神理を、正しく傳える事がいかに難しいかを思わされる。
눈을 감고 지금으로부터 2천 5백년 전의 인도의 당시를 상기하고, 현재의 상태와 비교 대조해서 고찰할 때에, 신이 만드신 법, 신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正法は大衆一般から大衆一般へと傳えられることはない。
정법은 대중 일반에서 대중 일반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正見することが出來る靈の次元の高い人から高い人へと、心ある一部の人人によって傳えられてゆく。
바르게 볼 수가 있는 영혼의 차원이 높은 사람에게서 높은 사람으로, 분별력이 있는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져 간다.




 

お釋迦樣の說法を、直接聞いた人の中からお釋迦樣を否定する人物が現われ、またお釋迦樣の敎を正しく傳えようとしながらも靈の次元の違いによって大事なことが抜かされてしまった。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들은 사람 중에서 부처님을 부정하는 인물이 나타나서,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하려고 하면서도 영혼의 차원의 차이에 의해서 소중한(중대사한 것)을 빼놓아 버렸다.

 


お釋迦樣の滅後七百年目に「人はみな如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ということが法華經という形で拾い上げられた。
부처님의 멸 후 7백년 째에,「사람은 모두 여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법화경이라고 하는 형태로 채택되었다.


 

もし、この事が無くて原始佛敎だけが殘されたとしたら、今日、佛ㄱ敎というものがインドから中國を經て日本へと傳えられてきたかどうかは疑問である。
만약, 이 일이 없고 원시불교만이 남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불교라고 하는 것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왔을지 어떨지는 의문이다.


 

お釋迦樣時代の、そのままの原始佛敎のあり方を守ってきているのが現在スリランカに殘っている南方佛敎である。
この南方佛敎即ち小乘佛敎は日本には傳わってこなかった。
부처님 시대의, 그대로의 원시불교의 본연의 모습을 지켜 오고 있는 것이 현재 스리랑카에 남아 있는 남방불교이다.

이 남방불교 즉 소승불교는 일본에는 전해져 있지 않았다.

 


北方佛敎即ちインドから北の方の中國へ、そして日本へと傳えられたのは大乘佛敎教であった。
大乘佛敎にいろいろ間違った点はあっても、法華經という形で如來壽量品が傳えられた意義は極めて大きい。
これあるが故に佛敎は正しいとして傳えられていったといえる。
북방불교 즉 인도에서 북쪽인 중국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대승불교였다.
대승불교에 여러 가지 잘못된 점은 있어도, 법화경이라고 하는 형태로 여래수량품이 전해진 의의는 극히 크다.
이것이 있으므로 불교는 올바르게 해서 전해져 갔다고 말할 수 있다.




 

お釋迦樣滅後の直弟子達が犯した大きな過ちがもう一つある。
この事は、日本に佛敎が傳來して以來千五百年になるがその間、誰も氣づかなかったことである。
부처님 멸 후의 직제자들이 범한 큰 실수가 또 하나 있다.
이 일은,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어 이래 1천 5백년이 되지만 그 동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これは原始佛敎時代の僧達が、「輸廻を超越して涅槃に入られた」という事を、本來は、輪廻を超越していられるから、思う時と所とに自在に肉体を持つことが出來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のに、輪廻を超越していられるから、もう二度とお釋迦樣は肉體を持って生まれられることはない、それを涅槃に入られたというのであると解釋したことである。
이것은 원시불교 시대의 스님들이, 「윤회를 초월해서 열반에 들어갔다」라고 하는 것을, 본래는, 윤회를 초월해서 계시기 때문에, 생각할 때와 장소에 자재(自在)로 육체를 가질 수가 있다고 하는 의미인데도 불구하고, 윤회를 초월해서 계시기 때문에, 다시 한번 부처님은 육체를 갖고 태어나는 일은 없다, 그것을 열반에 들어가셨다 라고 하는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正法誌16號1979.12より拔萃
정법지 16호 1979년. 12호에서 발췌.

 

 

 

***************************************************************************************************************************


 

 

★출처 http://plaza.rakuten.co.jp/hhokari/18001/


高橋信次先生に学ぶ (健康・ダイエット)楽天ブログ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에게 배우는 낙천 블로그.

2011년 10월 26일 수요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