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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창녀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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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창녀였다.

어둠의골짜기 2013. 1. 27. 22:41

내 아내는 창녀였다.

 

우리의 만남의 시작은 특이했다.

아주 ㅡ 특이했다.

 

나는 택시기사였다.  영업용.  새벽 4시경에, 하얀 추리닝 차림이 술에 취한 키가 150정도의 앳틴 여자가 탔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새벽 6시에 교대를 해야 한다. 마지막 손님이라 생각하며, 사납금 12만원을 내고, 교대 기사를 위해, 연료를 만땅 채우고 나면, 이 손님 덕분에, 용돈은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소지품이 아무것도 없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배고프다고 한다.  새벽 시간, 매콤함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새벽에 여는 식당을 찾아, 라면을 사 주었다.  그리곤, 집으로 안 간다.  결국, 내 회사까지 갔다.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총각이었던 35살 나에게, 피부가 고운 아담한 아가씨가 회사까지 온 것은,ㅡ 회사 창립 이해 처음인, 그리고, 교대하고 내 차로 귀가했다. 

 

그녀는, 집으로 안 갔다.  총각이 사는 집까지 온 것이다.

그리곤 그 여자는 잠을 잔다.  옷을 보니 엉망이다.  하얀 추리닝 상하의가 엉망이다.  밝은 아침에 보니, 그래서, 급 드라이를 맞겼다.  두 어시간이면 새옷이 된다.  내 돈 주고, 차비도 못 받았다.

 

내가 돈을 주고 그 아가씨는, 집에 간다며 갔다.

그리곤, 가끔 집에 쉬려 와도 되냐고 묻는다.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난 택시기사로 영업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 가끔 집에 왔다.  특이한 게, 점심 시간 이후 잠깐 왔다, 초저녁이 되기 전에 갔다.

 

그렇게 1년 여를 친구처럼 만났다.

 

나중에 어찌하다 보니, 결혼하게 되었다.  웨딩드레스에 턱시도도 없는, 서류상이 결혼이다.

그녀는, 사진을 찍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고향은, 강원도 삼척 산골 다섯 가구도 안 사는, 곳이 고향이다.

 

강릉...그녀의 언니와 오빠가 사는 곳에도 가 본 적이 있다.

....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직업이 창녀라고 어느 날 내게 말했다.

결혼 경력이 있는, 아니 그 보다, 시골 산골에서, 큰 오빠에게, 꼬맹이 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하며 살다, 사춘기 시절이 지나, 고등학교에 갈 나이 때쯤에, 그 산골에서 도망쳐서,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큰 오빠에게 당하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후, 그녀는, 국민학교도 못 나온, 글씨도 아주 엉망인, 영어 단어도 몰랐다.  ABCD도 모르는,

 

그리곤, 부산에서 나이가 많은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딸을 하나 낳았다고,  그리곤, 매일 때려서, 이혼 아닌 이혼식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남편이 폭력에 못 견디어.

 

그리곤, 여기 저기 떠돌다가 내가 있던 그 곳으로, 온 것이라고,

그녀 나이 28살에, 왔다고 했다.  오기 전에 법정 이혼을 했다고,  그리고 자기가 낳은 딸이 꼴도 보기 싫다고 했다.

정이 안 간다고... 어린시절부터 18살인가 되기 전까지 산골소녀가 큰 오빠에게 당한 성폭행, 그리고 결혼 그리고 이혼, 폭력으로 인한,  키가 작은 150정도의, 아주 작은 키에, 문맹인,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몸뚱이 뿐이었다.

 

결혼하고 살 때, 제왕절개 자욱을 발견했다.

그 때 말해 준 것이다.  자기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6개월이 정식 결혼생활 그리고 6개월 후,

이혼하게 되었다.

 

처음에 연민으로 만나, 연민이 정이 되어, 정 속에 나는 빠져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친구처럼 지냈다.

 

식성이 서로 달랐다.

취미도 달랐다.

사고방식도 달랐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 준 것은, 내가 쉬는 날에,

달래 캐려, 냉이 캐려, 쑥 캐려 함께 다녀 준 것과,

아주 작은 산도 못 올라가던, 그녀를, 나중에는 1000미터가 넘는 산에도 올라갈 수 있는 심장을 갖게 해 준 것과,

바닷가에 가서, 미역, 소라, 굴 등 해산물을 캐는 재미를 가르쳐 주었다.  초여름부터 한 여름까지는, 바닷가 모래 사장이나 뻘에 가서, 조개를 캐는 재미를 주었다.

 

그렇게 낮에 잠깐씩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생활하던, 창녀촌이 일상에서, 해방되어, 살았던 것이다.

그리곤 저녁이 되면, 일터로 갔다.  그리곤 몇 일 뒤, 다시 날 찾아온다.

 

이혼 후에도 여러 번 나를 찾아왔다.

밤에 영업할 때도, 전화가 오곤 했다.  결혼 전과 후를 따져, 약 5년간 나는, 사창가를 밤낮 왕래를 했다.

밤에 정신나간 취객손님이나 건달도 아닌 양아치가 시비를 걸 땐, 나를 부른다.

그럼, 난 택시를 몰고, 혹은 내 차를 몰고 사창가로 달려간다.

난리 법석인, 사창가,

다들 구경 나온다.  난 그녀를 보호한다.

 

낮에 그곳을 가도 밤에 가도, 포주 및 나까이 아줌마라는, 호객하는 아줌마들도 내가 누구인지 다 알았다.

단 한 번도, 사창가 여자들과 잔 적이 없다.

몸이 아주 아플 땐, 전화가 오곤 했다.

그 때, 나를 부른다.

그녀의 손님들 중의 단골을 부르지 않고 나를,

간호 해 준다.  그럼 좋아진다.

그리곤 난 일터로 간다.  택시 기사였기에, 바로 영업을 한다.

 

술이 아주 약한 그녀였다.

맥주 3병이 딱 정량이다.  그 이상 마시면 필림이 끊긴다.  그 이후론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지갑도 핸드폰도 어디에 있는지 기억을 못한다.  결국 한 밤중에 전화가 온다. 파출소이다.

여러 번이다.

나를 찾는다.  그 수 많은, 단골, 오빠라는, 그들이 아닌,

그녀로 인해 별의별 직종이 남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몇 번인가, 두들겨 패기도 하고, 진정으로 대하면서,

서로 서로간의 화해를 시키는 역할을 내가 하곤 했다.

 

사창가에선, 그녀에게 말하길, 나와 정식으로 결혼하라고 여러 번 아가씨들이나 포주들이 말하곤 했지만,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했다는 말을 나중에 포주들에게 들었었다.

 

가정환경이 아주 중요하다.

부모님들이 자녀에 대한 역할이 아주 중요한데, 그녀는, 아주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소녀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에, 육체적 정신적인 괴로움을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고, 남자는, 일종의 복수의 대상이었을 뿐이었음을 훗날 알았다. 

그런데 내가 뭐가 좋아서 오느냐 했더니, 편하다고 했다.

나를, 자기를 지켜주는, 마치 수호천사인 듯 행동했다.

 

만취되어 정신을 잃은 상황에도 나에게 전화를 한다.

몸이 아주 아파서 움직일 수 없게 될 때도 나에게 전화를 했다.

만나던 손님들과 다툼이 있을 때, 신변에 위험이 닥칠 때면 나를 찾았다.

가게에서 일하다 몇 일 쉴 때도, 나를 찾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쉼터였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그녀와 함께 식당에 간 적이 없다. 함께 쇼핑을 한 적이 없다.

결혼하고 살 때도, 그녀가 집에서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한다.  그럼 난 길가에까지 나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1분 거리도 택시를 타던 여자였는데, 나를 만난 후 심폐기능이 좋아지고, 다리에 힘이 붙어,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인, 일터로 걸어다녔다.

난,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보고는 난 집으로 와서 쉬었다.  그리곤 새벽 5시에 일어나, 회사로 갔다.  그리곤 다음 날 오전에 퇴근 했다.

그리곤 그 날 쉰다. 격일제 근무였다.

 

그 때가 좋았다.

뒤돌아보면,

 

우리가 이혼하는 날, 가정법원을 갔다.

결혼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냥 동사무소에 가서, 용지를 가지고 그곳에 기록하고 도장을 찍으면 되었다.

그런데 이혼은, 가정법원에 같이 가서, 4명인가 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여러가지를 물어본다. 대답하고,

서로 합의하에 이혼한다고, 말했더니, 즉시 이혼이 되었다.

 

쉬웠다.

 

우리는, 함께 다닐 때 단 한 번도, 손을 잡고 다닌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밖에서 나란히 앉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음식솜씨가 아주 뛰어나다는 것만은 기억이 난다.

 

그녀와 헤어질 때, 반찬이나 국끓이는 것이나 찌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난 해보지 않았다.

그 맛이 안나서였다.

 

그 후, 나는, 접대부 여성들을, 볼 때 마다 그녀가 생각이 난다.

이쁘고 젊을 때는, 룸싸롱 그러다 단란주점으로 그러다 사창가로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일명 과부집으로...

 

내가 사는 동네인 내덕동에도, 일명 과부집들이 있다. 

그녀들을 볼 때, 나는 씨익 웃고 만다. 

20대 후반, 3~40대, 50대 후반이 한 때 한 미모했을 듯한, 아줌마 등등 여름날에 저녁에 한 번 그 길가를, 걸어보니, 대로변에 의자를 내 놓고 모기향을 피워 놓고 부채질을 하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가게 앞에서 마늘을 까고 있다.  나도 그 옆에 쭈그려 앉아, 마늘을 깠다. 

놀다 가라 한다.

난 말했다.  술을 안 마신다고, 죄송하다고,  죄송할 것 없다고 한다.

 

산전수전 다 겪어 온 그녀들, 남자에 대해선 훤한 그녀들.

 

밑바닥 인생들

사창가 여성들 중에, 3분의 1를 빼곤, 가정이 어려워 일을 하는, 주부들도 상당했고, 실제로 아가씨인 경우도 있었고, 다양했다.  돈을 착실히 모았다가, 몇 개월에 한 번 고향으로 가서 일주일정도 있다가 돌아오는 여성들도 있었다.  남편 병원비 혹은 부모님 병원비 등등..실제로.. 포주들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그렇다고..

정신 나간 여자들은, 몸팔고 번돈을, 양아치들에게, 바치는, 혹은 놀음을 하고 술퍼먹고 없애 버리는 한심한 여자들도 있다면서, 그런 아가씨들은, 주인들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수 많은 발가벗은 여인들을 보아왔다.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저 불쌍한 가엾은 여성들이라고만 당시에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평범하게 옷을 입고 나가면, 그런 곳에 일하는 여성인지 평범한 여성들인지 구분이 안 갔다.

 

노골적으로 티를 내고 다니는 더러 직업에 충실한 것인지, 나는 빠순이 라고 티를 내고 다니는, 여성들도 많이 보아왔다.

 

내가 세탁소를 차리려고 한 때, 3년간 룸싸롱이나 단란주점 그리고 고급콜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배달을 했었다.  그럼 숙소로 간다.  옷을 줄인다, 늘인다, 드라이를 한다. 물빨래를 한다.  혹은, 고급 호텔에서 전화가 온다, 급드라이라고, 가 보면, 일본인 손님과 고급 콜걸 일본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텔렌트 보다 더 몸매가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이, 옷을 맡긴다. 

 

그녀들이 집에도 여러 번 갔었다.

내가 여성들이 옷을 줄이거나 늘일 때, 수선쪽으로 옷에 표시하는 것을 아주 잘해서, 단 한 번도 수선에 있어서,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티 하나에 50만원 하는 그런 옷이나, 짧은 스커트가 고가인 옷도, 여성 옷 전문점에서 수선 주문이 올 때 나는, 핀들을 가지고 가서, 표시를 하고 수선 배달이나 가정집 옷 배달들, 별의별 배달을 다 하면서, 아주머니들, 아가씨들, 별의별 사람들이 가정집이나 술집이나 룸싸롱이나 단란주점 혹은 고급 여성의류 점을 들락날락 하던 20대 후반이 내가 기억이 난다.

 

당시 호스트빠가 유행하던 밤이지나 새벽녘까지 길거리의 땅에서 올라오는 술냄새들이 악취들이 넘치는, 거리를,

나중에 택시기사가 되어 달리고 또 달렸었다.

 

택시를 타기 전, 세탁소 사장과의 트러블로, 호텔이나 여관이나 사우나 안마시술소에 가서 이불이나 수건 등등을 걷어다 배달해 주는, 세탁물 빨래전문 중소기업에서 배달기사로 있었었다.

 

모텔, 여관, 안마시술소, 사우나, 고급 팬션, 호텔 등등에 수거하려 간다.

피뭍은 이불부터 별의별 것들이 다 있다.

안마시술소에 오전에 타월을 수거하려 가 보면, 아가씨들이 피곤해서 자고 있다.  아주 가엾은, 여성들이었다.

새벽녘까지 시달리다, 오전에 잔다. 다시 초저녁이 되면, 일을 해야 하는.

 

난 그 중에 퇴폐이발소에 양복을 수거하려 갈 때가 제일 싫었다.

겉은 이발소인데, 이발소가 아닌,

별의별 인간세상군의 사람들을 보아오다...

 

만난, 강원도 삼척 산골 여자...

 

그녀가 순수하던, 10세 이전의 아주 어린 시절에 기억이 있었다.

몇 가구 안 되는, 친척들이 사는,

산골, 마을로 가려면 아주 멀었다고 하며, 산에는 별의별 산나물과 개울에서 가재랑 물고기들을 잡았던 기억을,

간혹 얘기하곤 했었다.

 

내면에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혼 후, 나의 삶은, 꿈은 산산히 깨졌다.  병이 왔다.

정신적 충격이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컸다. 

그 이후, 몸이 전신마비도 되었고, 병마가 나를 휩쓸었다.  그 후, 2년 인가 후에, 나는, 2008년 내 병을 내가 고쳐야 겠다고, 전국을 돌아다니다, 이곳에 있다.

 

23살에 첫 여자를 만났다.  2년간 동거했던,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 어머니 하던, 여자가 변신을 했다.

결혼할 거라 다 믿었던, 그 때는 젊어서 그런지, 쇼크가 8년인가 갔었다.  그 후는, 절대로 여자를 만나지 않으리라, 했는데, 운명이 택시기사로 있을 때, 그녀를 만나고, 다시 충격을 받았고,

여자라면, 진저리가 났던,  그리고 찾아온 빙의, 그리고, 몇 일전 알게 된,

위가 거의 녹아내렸다고, 십이지장은 돌맹이처럼 단단히 굳어져서, 잘라내어야 했다는 외과 의사 선생님,

전신마취를 태어나 처음 해 보았다.

얼굴에 뭔가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나는 죽었던 모양이다.

그리곤 깨어나 보니, 초저녁이었다.

아주 편안했다.

 

고통도 없었다.  10시간 정도의 그 시간은, 내 인생의 경험에 있어서, 아무런 기억도 없는, 평온함이었다.

 

모든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다 아름답다.

아무리 악한 악인이라 해도, 가장 정직하고 순수하고 단순한 사람에게는, 약하다는 것을 난 그 생애동안 알게 되었다.

 

전신에 손과 발과 얼굴만 빼고, 전신에 용문신으로 도배한 나 보다 두 어살 많았던, 모모씨, 와의 3개월 정도의 만남, 피말리는, 내 아내였던 그녀가 독신이라며, 속여서 만났던 그 남자, 알고보니, 아주 잔인한 행동대장이었던, 그와의 만남, 그가 3개월인가 후에, 다방에서 대화를 둘이 했다.  실은, 그녀가 내 아내라고,

그는 말했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자기는 그녀가 독신이라 해서 살아볼까 만난 것이라고.

둘은 마치 연인처럼, 함께 있었다. 나와 있을 때, 나는 그녀의 남편이 아닌, 친구로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눈에는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그 남자의 정체를 알고 난 후의 공포심이었던 것이다.   죽인다고 산에 끌고가 칼로 가슴을 찔렀던 그 남자, 란 사실을 훗날 알았다.  그 다방에서 내가 말하기 전에, 그 남자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면서, 두 번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것이며, 혹 길에서 만나더라도 피해 갈 것이라고 내게 약속을 했고, 그 남자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곤 2010년 8월에 그 남자를 5년 후 인가 만났었다.

공원에서, 여름 한 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고기 구워먹고 탠트를 치고 밤샘을 하는, 공원에서,

나는 그 때 몸이 굉장히 아플 때 였다.

나를 알아 보았다.

처음에는, 못 본척 했다.  그리곤 둘이 눈이 마주쳤다. 오랜 만입니다.  하곤 우리는 헤어졌다.

말이 필요 없다.

그는,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깍두기 머리에 검정 양복을 입고 있다, 손목이상 팔을 걷어 올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 남자,

그래도 가족들끼리 있을 때는, 자상한 삼촌이며, 동생인 그.

딸도 있고 아들도 있는, 그 사람이다.  

 

그 후, 어떤 사람이건, 만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니, 20대 초반부터, 겁이 없었던 나였지만 그 이후, 어릴 때, 사랑 받지 못해 자라서, 불우한 불행한 삶속으로, 떨어져 사는, 가엾는 사람들이며, 사랑받고 싶어하는, 영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ㅡ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나의 기억속에는, 다 들어있다.

다만, 그 시절, 그 당시의 열렬한 분노나 슬픔이나 좌절이나 고통은 지금은 없다.

마치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텔레비젼을 보는, 연극을 보는, 관객의 입장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내 나이 40대 후반이지만,

나름대로 인생경험에 있어서, 많은 경험들을 해 왔다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보다 더 힘든 나날을 보내 온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 후, 누굴 만나건 상대방을 내 잣대로 계산하지 않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 주게 되었다.

앞질러 생각하지 않는,

 

저녁 7시 경에 우리동네 마트로 갔다.

꽁치 통조림이랑 내가 좋아하는 오댕을 사려 갔더니, 한 남자가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예술가는 뭔가 다르네요. 하면서,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나이는 50대 후반, 얼굴을 보니, 많이 고생한 듯 한 모습,

그래서, 죄송합니다 어디선가 뵌 듯 한데, 기억이 안 납니다. 했더니,

요즘도 일하려 나오냐고 물으신다.  35일 전에 위수술을 해서, 쉬고 있습니다. 했더니,

노동을 하려면 건강해야 하는데 하며, 건강 잘 챙기라고 하신다.

그래도 기억이 안났다.

 

그 마트에 농산물 코너에서 일하고 계셨다.

집에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로 2012년 2월에서 3월 중순까지 함께, 모 용역에서 함께 일터로 나갔던, 그 남자였다. 

그 남자는, 나를 인상깊게 보아온 듯 했다.  내가 예술가 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남자분.

 

어떤 분은, 역시 50대 후반이지만, 나를 볼 때 마다, 보살님 하고 부르시는 분이 계신다.

단 한 번도 그 남자는, 나에게 반말을 하시지 않았다. 상스런 말도 안하셨다.  다른 분들과 대화를 할 때는,

건달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말투나 행동에서 보이곤 했지만, 말이다.

 

늘 나를 볼 때 마다, 일용직 일을 하려 가면, 간혹 큰 공사를 하는 곳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역시,

먼저 다가와, 보살님 하면선 내게 인사를 먼저 하신다. 

그의 눈에는, 내가 보살로 보이시나?

그래서 왜 내게 보살님이라고 부르시냐고 물었더니, 보살이니까 보살이라고 부른다고 하신다.

 

나는 보살심을 갖기에는 아직 부족한 사람인데,

보살심은, 자비와 사랑을 품고 있으며,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주는 그런 자연스런 모습과 행동과 말투가 저절로 우려나오는 사람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여야 보살이라 할 수 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며 사는 이가, 바로,

보살심이 있는 사람인 것을.

 

실제로 보살계인 극락, 보살계로 가려면, 자비와 사랑 그리고 온 인류는 형제요 자매이며 신불의 자녀이다, 라고 알며 행동하며, 심지어는, 동물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며, 데리고 다니면서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어야 만, 보살계의 사람이 된다.

 

흔히 절에서 일하시는 공양주나 무속인 여성들을, 보살이라고 부르지만, 본래는 그런 뜻이다.

 

형식상 서류상의 아내였던 딱 1년 만에 헤어진 그녀였지만, 내게도 한 때는, 아내가 있었다.

 

내 아내는 창녀였지만, 술 취하지 않았을 때의 그녀는, 순수했다.

그 점만은, 내가 인정한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줄 아는. 봄의 입구에 피는, 냉이를 보면, 땅에 주저 앉아, 냉이를 캔다.  봄날에 길가에 피어나는 달래를 보면, 주저 앉아 캔다.  아마도 산골에 살던 당시에 했던 평안한,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아주 즐거워하며 근심도 걱정도 없던 표정. 

 

그래서, 나는 그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일터에서의 시름이나 괴로움이나 걱정거리가 있어서, 나를 찾아올 때면, 산이나 들이나 바닷가로 데려가곤 했다.

 

 

다이아몬드의 눈 모양이라는 눈에 대한 명상음악입니다. 9분 50초의 곡이죠.

 

지금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바라봅니다.

깊은 산속 올달샘을.  퍼도 퍼도 즐지 않는 깊은 산속 옹달샘을.  생각합니다.  미소가 입가에 스칩니다.

고요히, 그녀는 옹달샘으로 그곳에 물의 요정이 되어, 물로 화하여 목마른 길손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수인

땅의 어머니이신 그녀의 젖을, 아낌없이, 땅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옹달샘으로 그녀의 젖을 먹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nmb0516/11305450?srchid=IIMsLgMW200#A18635D564DE41440157168

(온고지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이라는 제목의 블로그에서 퍼 온 이미지입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하고 기도합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대지의 어머니이시여 하며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높은 하늘만 바라봅니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의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것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땅에서 모든 생명들을 위한 선물들이 솟아나오는데도 말이죠.

 

펄벅이 대지를, 한 번 쯤 읽어 보세요.  문고판으로 저렴하게 있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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