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반야심경(般若心経)의 해설(解 説)- 다카하시 신지님의 강연집/1975년/절판 본문
高橋信次講演集 다카하시신지강연집
▷ 般若心経の解說 반야심경의 해설 ◁
by 高橋信次先生(다카하시 신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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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回は、仏教という神理が、現代社会、現代物質文明の高度化された社会においても、我々が究め得た物理学の法則によっても異論をさしはさむ余地のないような立派な科学的なものであるという事を説明したはずであります。
지난번에는, 불교라고 하는 신리가, 현대사회, 현대 물질문명의 고도화된 사회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추구하여 얻은 물리학의 법칙에 의해서도 이론을 재기할 여지가 없다고 하는 훌륭한 과학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神理というものは永遠であり、その神理は唯物的な思想や知識の中から得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二千五百有余年前において、あの中インドを中心に、乱れ切った人々の心に安らぎと調和を与えるために、この地上界に生れ出た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しゃか釈迦むにぶつ牟尼仏が、四十五年間にわたって説いた神理は、現代においても、我々の、また皆さん自身の心の中に内在されたテープ・レコーダーの中に、すべて記録されています。
신리(神理) 하는 것은 영원하며, 그 신리는 유물적인 사상이나 지식안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천 5백여년 전에 있어서, 저 중인도를 중심으로, 혼란한 사람들의 마음에 평온함과 조화를 주기 위해서, 이 지상계에 태어난 고다마 싯타르다라는 석가모니부처님이, 45년간에 걸쳐서 설명한 신리는, 현대에 있어서도, 우리들의, 또 여러분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된 테이프 레코더 안에,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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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で、私たちはこの地球上という場に出て来ますと、善と悪のミックスされている厳しい修行場であること、肉体という舟に乗ってしまうと私たちの意識はわずか一〇パーセントしか表面に出ていないため、神理がわから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めくら盲のような私たちの人生航路は、常にあんちゅう暗中もさく模索するが、それは万物の霊長として、神の子としての本性を悟るまでの大きな厳しい修行の過程だといえます。我々はその中において、自分の生れた環境あるいは教育、思想、また、この地上界において先祖代々の肉体的な先祖を通して築き上げられたところの習慣、こういうものが大きく我々の悟りの前に厳しく横たわっているといえましょう。
그런데, 저희들은 이 지구상이라고 하는 곳에 나오게 되면, 선과 악의 혼합되어 있는 엄한 수행장인,육체라고 하는 배를 타버리면 저희들의 의식은 불과 10%밖에 표면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신리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장님과 같은 저희들의 인생항로는, 항상 암중모색하지만, 그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신의 자녀로서의 본성을 깨닫기까지의 크나큰 엄격한 수행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태어난 환경 혹은 교육, 사상, 또, 이 지상계에서 선조대대로의 육체적인 선조를 통해서 구축되어진 습관, 이러한 것이 크게 우리들의 깨달음의 앞에 험난하게 가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したがって、その中から神の偉大な慈悲と、我々の善なる心というものを悟り得る事は非常に至難なことになってきます。我々は、この地上界に自分自身が生れるその環境というものを選んで出てきます。貧乏人に生れてくる者もあれば、金持、地位、名誉のある家庭に生れてくる者もあり、それらは皆、自分自身が選んでくるのであります。
따라서, 그 안에서 신의 위대한 자비와, 우리들의 선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음을 얻을 수는 매우 지난(至難)한 것으로 되어 옵니다. 우리들은, 이 지상계에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그 환경이라고 하는 것을 선택해서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태어나오는 사람도 있다면, 부자, 지위, 명예가 있는 가정에 태어나오는 사람도 있고,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선택해서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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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ず第一に、この地上界に出て来るときの人類は、経済、物質文明という環境、肉体的先祖という環境、こういうものは修行の材料であって、これにとらわれ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のために、あの世の規準はあくまでも肉体舟に乗って本能を備えたまま、神の子としていかに自分自身が正しい中道の生活をし、地上界において人々と調和して帰るか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決して死んだときの地位や名誉、権力を持って、功一級だの、あるいはその他の色々な名誉を持って帰る事が規準には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あくまでも皆さん自身の善なる心とその行為であります。嘘のつけない善なる自分に忠実な実践努力の結果が、あの世に持ち帰る規準になっていくのです。
우선 첫째로, 이 지상계에 나올 때의 인류는, 경제, 물질문명이라고 하는 환경, 육체적 선조라고 하는 환경, 이러한 것은 수행(修行)의 재료(材料)이며, 이것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세상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육체배를 타고 본능을 갖춘채로, 신의 자녀로서 어떻게 자기 자신이 올바른 중도의 생활을 하고, 지상계에서 사람들과 조화하고 돌아갈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을 때의 지위나 명예, 권력을 가지고, 공적의 최고인, 혹은 그 외의 여러 가지의 명예를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기준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여러분 자신의 선한 마음과 그 행위입니다. 거짓말 할 수 없는 선한 자신에게 충실한 실천과 노력의 결과만이, 저 세상에 가지고 돌아가는 규준(規準)되어가는 것입니다.
どんなに大金持ちであっても、この世から去るときに、それは持って帰れません。またどんなに大地主であっても、どんなに立派なお墓を作ってもあの世では通用しません。通用するのは、ただその人の心が真実に正しい中道の道を実践したかという事です。という事になると、あの世から出て来るときには、自分が最も悟りよい場所を選んで来るという事に皆さんは気がつくはずであります。
아무리 재산가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떠날 때에, 그것을 가지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대지주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산소를 만들어도 저 세상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통용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의 마음이 진실로 올바른 중도의 길을 실천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이 되면, 저 세상에서 나올 때에는, 자신이 가장 깨닫기 쉬운 장소를 선택해서 온다라고 하는 것으로 여러분은 당연히 깨달아야 합니다.
もし二千年前に、イエス・キリストが、イラクという当時の王族の子供に生れたらどうなったでしょう。おそらくイエスたりといえども悟る事は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最も厳しい左官屋としての不調和な生活環境に彼は出てきております。そこでまず疑問を持ちます。社会におけるところのあのユダヤ教徒の宗教教義が果して正しいものであるか。一週間に一回、安息日には、仕事をしてはいけない、家庭の雑事も、仕事をも否定されるような、当時のユダヤ教徒の教え、あるいは、また厳しい律法制度、果して神がこのような事を人間に教えたであろうか?、イエスは、当然、疑問を持ち始めます。一方においては、ノルマという厳しい環境の中におけるイスラエルの現状、ユダヤ人のあわれな生活環境、このようなものにも疑問をもって参ります。そういうあらゆる疑問を通して、まず同じ人間に生れながらにして、なぜあのような厳しい階級があるんだろうか、そしてイエス自身は、神という疑問のたんきゅう探究を続け、最後は悟りの境地に到達します。
만약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라크라고 하는 당시의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지요. 아마 예수라고 할지라도 깨달을 수는 없었겠지요. 가장 힘겨운 미장이가게로서 부조화스러운 생활 환경에 그는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선 의문을 가집니다. 사회에 있어서의 저 유대교도의 종교 교의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安息日)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가정의 잡일도, 일(직업, 작업,업무)도 부정되는, 당시의 유대교도의 가르침, 혹은, 또 엄한 율법제도, 과연 신이 그러한 것을 인간에게 가르쳤단 말인가?, 예수는, 당연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한 편에 있어서는, 노르마라고 하는 엄한 환경 안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현상, 유대인의 처참한 생활환경, 그러한 것에도 의문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온갖 의문을 통해서, 우선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왜 저러한 엄하고 가차없는 계급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예수 자신은, 신이라고 하는 의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마지막에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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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去におけるところの神理を説く多くの大天使たちはほとんど自分自身のもっとも悟りやすい環境を選んで出生します。そのために大金持からは出ません。経済的にあまりにも環境に恵まれたところに出てしまうと、人間は優雅な生活にどうしても溺れてしまうからです。〃疑問と解答〃疑問の追究の結果が神理に到達していくからです。
과거에 있어서의 신리를 설명하는 많은 대천사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그 중에서 가장 깨닫기 쉬운 환경을 선택해서 출생합니다. 그 때문에 부자집으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아무래도 환경에 여유 있는 곳에 나와버리면, 인간은 우아한 생활에 어떻게해서도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의문과 해답” 의문의 추궁의 결과가 신리에 도달해 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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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ンドの当時の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も、やはり同じように、出生の場所を選んでおります。後の仏典などには非常に優雅な大国の王の子供のようにして扱われているけれども、それは大きなまちがいです。そして四十五年間説かれた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の神理はだいはんにゃきょう大般若経というものにまとめられたのであります。ナラジュルナ(龍樹)という僧侶が、それを更に取捨選択し、まとめて人々にわかりやすく書き上げました。般若心経は、こうした大般若経をもとに、中国の僧、げんしょう玄奨がまとめたものです。
인도의 당시의 고다마 싯타르다(산스크리트어: सिद्धार्थ 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팔리어: Siddhattha Gotama, 悉達多 喬達摩)도, 역시 마찬가지로, 출생의 장소를 선택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불전(불교의 경전) 등에는 매우 우아한 대국(大國)의 왕의 자식과 같이 다르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설명했던 고다마 싯타르다의 신리는 대반야경(大般若經)이라고 하는 것으로 일괄 정리된 것입니다. 나라쥬르나(용수=龍樹)라고 하는 승려가, 그것을 더욱 취사선택(쓸 것과 버릴 것을 가림)하고, 합쳐서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낱낱이 열거하여 썼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이러한 대반야경(大般若経)을 다같이, 중국의 스님, 현장(현장법사)이 합친 것입니다.
この般若心経というのは、過日も説明いたしましたが、日本へ伝わって来てからは、いつのまにか、仏壇や、神様の前で上げる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また、清書(写経)して何回も書く事によって悟り得るという馬鹿げた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字は上手になりますが、しかしそれでは悟れるものではないのです。その意味をよく知った生活をする事なのです。皆さんは法華経を今迄学んできました。南無妙法蓮華経とお経を上げて参りました。あれはやはり方便を通して人間はかくあるべきだ、人間の心はこういうものだ、これを説いたものなんです。
이 반야심경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에도 설명했습니만, 일본으로 전해져 오고 나서는, 어느 사이엔지, 불단이나, 신령님 앞에서 외우는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또, 정서(사경=寫經)해서 몇 번이라도 쓰는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는 바보같은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글자는 능숙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그래서는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미를 잘 인식한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법화경을 지금까지 배워 왔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과 경문을 외워 왔습니다. 저것은 역시 방편을 통해서 인간은 기록해야 하며,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것이며, 이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インドの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の時代は、決して南無妙法蓮華経も上げておりませんし、南無阿弥陀仏も上げておりません。ただその意味をよく理解した生活をして、人間の価値、生れて来た目的と使命、このようなものを教えたのに過ぎないのであります。決して経文を上げろという事はやっていません。
인도의 고다마 싯타르다(Siddhattha Gotama, Siddhārtha Gautama)의 시대는, 결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도 외우고 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弥陀仏)도 외우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 의미를 잘 이해한 생활을 하고, 인간의 가치, 태어나온 목적과 사명, 이러한 것을 가르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코 경문(經文)을 외워라 하고 일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だいいち、当時の多くの弟子たちは無学もんもう文盲です。文字など書けるような人は非常に少なかった。クシャトリヤという武士階級の中において婆羅門をやっている人たちの多くは、一応は学問をしております。寺小屋のようなところで婆羅門を中心とした一つの経典を主体とした教えを学んでおります。
첫째로, 당시의 많은 제자들은 배움이 없어서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無学文盲)입니다. 글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크샤트리야(Kshatriya, 刹帝利)는라고 하는 무사계급 속에서 바라문(婆羅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일단은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 서당(학당)(寺小屋)과 같은 곳에서 바라문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경전을 주체로 한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その当時の文字も、仏教でいうぼんじ梵字というのがありますが、それとはまるっきり違います。そのような事を考えたならば、般若心経を上げたり、書いたりする事が悟りへの道だとは思えないはずです。 しかし、こういう般若心経というものを知る事によって、なるほど、仏教は科学であり、現代物理学の最極微を極めた神理であるという事がわかるはずです。
그 당시의 문자도, 불교에서 말하는 범어(梵字)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했다면, 반야심경을 외우거나나 쓰거나 하는 것이 깨달음에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야심경(般若心経)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에 의해서, 과연, 불교(仏教)는 과학(科学)이며, 현대 물리학의 최극미(最極微=가장 미묘한 이치)를 구명(究明)한 신리(神理)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범어(梵字=산스크리트어를 적는 데 쓰는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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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か摩訶はんにゃ般若はらみ波羅蜜たしんぎょう多心経。かんじざい観自在ぼさつ菩薩 ぎょうじん行深はんにゃ般若はらみ波羅蜜たじ多時 しょうけん照見ごうん五蘊かいくう皆空 ど度いっさい一切くやく苦厄 しゃりし舎利子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 관자재보살(観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사리자(舎利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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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みするとまるっきりわからない。この前にも説明致しましたように、摩訶とは偉大、当時はマハーといいました。マハー・パジャパテイー、また、皆さまの現在の会長様も、マハー・ナマといって偉大なるナマといわれた方です。
봉독(棒読=한문을 음독(音讀)으로 내리읽음)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전에도 설명을 마쳤습니다만, 마하(摩訶)란 위대하다, 당시는 마하(mahā)라고 말했습니다. 마하 ・파자파티(Mahapajapat=마야 부인(Mahamaya)의 여동생이며 또한 양모), 또, 여러분의 현재의 회장(會長)님도, 마하・나마(Mahanama)라고 말하며 위대(偉大)한 나마(nama 男)라고 불리우는 분입니다.
ナマという名前でカピラ・ヴァーストのシュット・ダナーの四番目の弟さん、その弟さんの長男、その方をマハー・ナマといいました。その弟をアニルッターといいます。アニルッターといわれる方は、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の十大弟子のアナリツ、このアナリツの兄さんが今の中谷会長であります。それはそのおうちに、皆さんの中から霊道者が大分出てきておりますから証明されるでしょう。また別のところがらそのような証明者が出て参ります。これだけは否定できないのであります。とにかく、そのようにマハーというのは偉大という事です。
나마라고 하는 이름으로 카피라(Kapila 迦毘羅) ・바스투(vastu)의 슈도다나왕(Śuddhodana 輸頭檀那)의 네번째의 아우님, 그 아우님의 장남(長男), 그분을 마하 ・나마(Mahanama 摩訶男=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 동생)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생을 아니룻타라고 말합니다. 아니룻타라고 불리우는 분은, 고다마 싯타르다(Siddhārtha Gautama)의 10대제자의 아나리시, 이 아나리시의 형님이 지금 중곡회장(中谷会長)입니다. 그것은 그 가운데에, 여러분 중에서 영도자(霊道者=영능력자)가 상당히 나오고 있기 때문에 증명되겠지요. 또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증명하는 사람이 나오고 옵니다. 이것만은 부정(否定)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처럼 마하(Maha)라고 하는 것은 위대(偉大)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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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んにゃ般若というのは智慧という事です。はらみた波羅蜜多という事は、到達する、という事です。そしてしかも彼岸に到達する迄には、自分に内在されているところの潜在意識の偉大なる智慧、この智慧に到達するいわば心の教え、心経はインド時代は、ストラーといっております。悟りへの道。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은 지혜(智慧)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라밀다(波羅蜜多=Prajnaparamita)라고 하는 것은, 도달(到達)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다가 피안(彼岸)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자신에게 내재(內在)되어 있는 곳의 잠재의식(潜在意識)의 위대한 지혜, 이 지혜(智慧)에 도달하는 말하자면 마음의 가르침, 심경(心經)은 인도의 시대는, 스트라(Stura) 라고 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에의 길(道).
ところが中国人はなかなか頭がよく、うまく語呂と意を合わせています。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のまか摩訶とは、また大いに不思議という意味もあり、摩訶不思議ともいいます、あの摩訶です。
그런데 중국인들은 꽤 머리가 좋고, 훌륭한 어휘와 뜻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Mahaprajnaparamitasutra의 마하(摩訶=Maha)란, 또 매우 불가사의하다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위대한 불사가의(摩訶不思議)라고도 말합니다. 저 마하(摩訶=Maha)입니다.
摩訶般若のはんにゃ般若というのはほとんどの人は般若の面ぐらいしか思い出しませんが、当時のインドではこの偉大なる智慧をみた蜜多ともいいました。というのは当時のインドでは、蜂蜜というものは非常に貴重なものでそう採れなかった。蜂蜜を採るには、蜂蜜を探す鳥がおりまして、その鳥に赤い布を付けて飛ばし、蜂の巣をみつけて蜜を採るのです。こうした事を商売にしていた人もいました。
마하반야의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은 반야의 표면으로 밖에 생각해 내지 않습니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위대한 지혜를 본 밀다(蜜多)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인도에서는, 벌꿀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것으로 그렇게 채취할 수 없었습니다. 벌꿀을 모우는데에는, 벌꿀을 찾는 새가 있어서, 그 새에게 붉은 옷감을 붙여 날려보내서, 벌집을 찾아내고 꿀을 뽑습니다. 이러한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特に仏教々団の場合は、蜂蜜は高貴薬の様なものでした。そのためによく薬王菩薩とか薬師如来が、左の手に壷を持っており、これも実は蜜の壼、女王蜂の園から取り出して作られたところのローヤル・ゼリー、不老長寿の薬として持っていたものです。
특히 불교 여러 단체의 경우는, 벌꿀은 고귀한 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주 약왕보살(薬王菩薩)이라든지 약사여래(薬師如来)가, 왼손에 항아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도 사실은 꿀항아리이며, 여왕벌의 정원에서 끄집어내서 만들어진 것의 로얄 젤리이며, 불노장수(不老長寿)의 약(藥)으로서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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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ように蜜というものは、非常に高貴薬であるという事から、心の中の内在されている分野にはそのような高貴薬のような偉大なものがあるんだよ。即ち偉大なる智慧、内在している偉大なる智慧に到達する心の教え。このように摩訶般若波羅蜜多という意味は、つけられても結構だと思います。
그렇게 꿀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고귀한 약(藥)이라고 하는 것에서, 마음 속의 내재되어 있는 분야에는
그러한 고귀한 약과 같은 위대한 것이 있는 것이죠. 즉 위대한 지혜, 내재되어 있는 위대한 지혜에 도달하는 마음의 가르침. 이와 같이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라고 하는 의미는, 붙인다고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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かん観じざい自在ぼさつ菩薩、この観自在菩薩というのは、これも又、中国流に訳しております。漢字で読んで字の通り、自在にものを見る菩薩。皆さまの中には菩薩といえば、ああ立派な偉い神様だと思っているでしょう。菩薩というのはインドの当時は、サマナー、サロモン、アラハン、ボサター、その次がプッターといって、それは悟りの段階を指すのです。観世音菩薩像を見ますと必らずネックレスをはめたり、王冠を付けております。またもんじゅ文殊菩薩・マンチュリァーも矢張り王冠をかむっております。このように王冠等飾りつけているうちは、執着があるという事なのです。
관자재보살(観自在菩薩), 이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도 또, 중국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자로 읽고 글자그대로, 마음대로 사물을 보는 보살. 여러분 가운데에는 보살이라고 말하면, 아~ 훌륭한 위대한 신령님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겟지요.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의 당시는, 사마나, 사로몬, 아라한, 보사타, 그 다음이 붓타라고 말하며, 그것은 깨달음의 단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상(観世音菩薩像)을 보게되면 틀림없이 목걸이를 걸거나, 왕관(王冠)을 쓰고 있습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만츄라도 마찬가지로 왕관(王冠)을 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왕관 등 장식을 붙이고 있는 내용은, 집착(執着)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そうすると未だ菩薩は悟り得ぬ段階なのです。そこで観自在菩薩といわれる者は、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が今から二千五百有余年前のヴェダーとかウパニシャドという現代の日本の仏典、教典と同じようなものがありまして、その中に書き込まれているものなのです。自由自在に見る事の出来る菩薩、本当は如来を指しているのであり、これをアポロキティ・シュバラーともいっております。
그렇다면 단지 보살(菩薩)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観自在菩薩)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고다마 싯타르다가 지금으로부터 2천 5백여년 전의 베다(Veda 吠陀=힌드교=고대 인도의 바라문 경전으로서 찬가 혹은 시(詩))라든지 우파니샤드(Upanishad=힌드교, 고대인도의 철학서)라고 하는 현대의 일본의 불전, 경전과 같은 것이 있는 것이고, 그 안에 끼워넣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자재로 볼 수 있는 보살, 진실은 여래(如來)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아보로키티 슈바라 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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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皆さまのうちに、私の神理を聞いた人々の中から、シュバラーに近い状態になる人が、出始めております。私の講演が終ったのちに、その人たちの心に光を入れれば波羅蜜多の偉大なるその智慧、潜在された、内在された過去に学んできたところの自分自身の体験が、今の肉体を持った人を通して語り始めます。菩薩とは、ボサターをいうのですから、まだポサッとしているところがある。だから菩薩といっても決してまだ立派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
지금, 여러분 가운데에, 저의 신리를 들은 사람들 중에서, 슈바라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의 강연이 끝난 후에, 그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넣으면 바라밀다의 위대한 그 지혜, 잠재된, 내재된 과거에 배워왔던 자기 자신의 체험이, 지금 육체를 가진 사람을 통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보살이란, 보사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뽀사쯔(보살)로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살(菩薩)이라고 말해도 결코 아직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そこで観自在菩薩といわれるようになるには、神理に適うよう行ずるのですが、大抵は間違いを犯してしまう場合が多いのです。ぎょうじん行深というと行を深くするということになる。 そこでハァ行をするというんだから、山の中へ入って滝にでも打たれ、厳しい肉体的な修行をする事によって悟り得るんだなあーと。それには、この摩訶般若波羅蜜多を一生懸命に上げればよいんだなあーと、こう思ってしまって金剛杖か何かを持って、観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蜜多といって、厳しい肉体行をしていく。その内に心がカラッポになったところへ、動物霊か何かが入ってくる。するとその人に入った動物霊が出て、ついに神様が出て来たなんていう事になって稲荷大明神が一つ出来上る訳です。そういう事をよく考えると、この行深という意味が非常に重要な意味を持ってくるのです。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고 불리우게 되려면, 신리에 맞도록 행하는 것입니다만, 대부분은 잘못을 범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행심(行心)이라고 하는 행(行=실천)을 깊게한다고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행(行=실천)을 한다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 속으로 들어가서 폭포에라도 맞아가며, 엄한 육체적인 수행을 하는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나~라고. 그래서는, 이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波羅蜜)를 죽어라하고 열심히 외우면 좋지 않나~라고, 이렇게 생각해 버리고 금강장(金剛杖)이라든지 뭔가를 가지고,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観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蜜多)라고 말하며, 엄한 육체수행(肉體行)을 해 간다. 그러한 가운데에 마음이 텅 비게 되어버렸더니, 동물령이라든지 뭔가가 몸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들어온 동물령이 나와서, 마침내 신령님이 나왔다 라고 하는 것이 되어서 이나라대명신(稲荷大明神=도하대명신)이 하나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잘 생각하면, 이 행심(行深)이라고 하는 의미가 매우 중요(重要)한 의미(意味)를 가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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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深という事は、神理に適った毎日の生活、これを深く行う。そうすると智慧の波羅蜜多がゆ涌げん現されてくる。この波羅蜜多という内在された自分の心を涌現する、思い出すには、先ず中道の神理に適した生活をしなかったならば、心の中に曇りが出てしまって神の光を遮ぎってしまいます。遮ぎってしまうから、暗い心に閉ざされるからあの世とは通じません。あの世と通じないから凡人です。明日の事も目先きの事もわから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そこで自分の心の中が綺麗であれば光が差し込んでまいります。そういう生活をする事が一番重要であり、深く行ずる事なのです。そこで般若波羅蜜多時、悟りに到達するために深く自分自身がそういう生活をした時に、観自在菩薩、つまり自由自在に見る事が出来るのです。
행심(行心)이라고 하는 것은, 신리에 맞는 매일의 생활, 그것을 깊게 행한다. 그렇게 하면 지혜의 바라밀다(波羅蜜多)가 힘차게 솟아 나옵니다. 이 바라밀다라고 하는 내재된 자신의 마음을 용현(湧現=마치 샘물처럼 솟아 나온다)한다, 생각해 내려면, 우선 중도의 신리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마음 속에 구름이 끼여 버려서 신의 빛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어두운 마음에 갇혀버리기 때문에 저 세상과는 통하지 않습니다. 저 세상과 통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凡人)입니다. 내일의 일도 눈앞의 일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속이 곱고 깨끗하다면 빛이 스며들어 옵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깊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시(般若波羅蜜多時), 깨달음에 도달(到達)하기 때문에 깊게 자기 자신이 그러한 생활을 했을 때에, 관자재보살(観自在菩薩), 즉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ごうん五蘊かいくうど皆空度いっさい一切くやく苦厄しゃりし舎利子――、ここで苦厄というのは苦しみや災難、それはここでいう五蘊という皆さまの目や耳や鼻や口、肉体の五官を通してそのような苦しみが出てくるのです。その苦しみも実は、五官から生ずる六根のため神の光を遮ぎってしまうので、我々はそのなよう苦しみを作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を観自在菩薩はよくわかっております。舎利子というのは、シャーリ・プトラー、これを日本でいうとしゃり舎利ほつ弗、インドの時代はシャーリ・プトラーといっております。このシャーリ・プトラーという人は、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の四十二才の頃にデンドーナーというところへ尋ねてきたアサンジャーといわれる大波羅門の従兄弟です。その友達にマハー・モンガラナー(大目蓮)という男がおりました。この人は理論的にも多くの神理を説く事ができ、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も重用しました。何れにせよシャリー・プトラーは九十七、八才でこの世を去りました。
오온개공도 일체고액 사리자(五蘊皆空度 一切苦厄 舎利子)---, 여기에서 고액(苦厄)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나 재난, 그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여러분의 눈이나 귀나 코나 입, 육체의 오관(五官)을 통해서 그러한 괴로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괴로움도 사실은, 오관에서 생기는 육근(肉根)때문에 신의 빛을 차단해 버리는 것으로, 우리들은 그러한 괴로움을 만들어 버린다라고 하는 것을 관자재보살(観自在菩薩)은 잘 알고 계십니다. 사리자(舎利子)라고 하는 것은, 샤리・푸트라(Śāriputra), 이것은 일본으로 말하면 사리불(舎利弗Sāriputta Śāriputra)、인도의 시대는 샤리・푸트라(Śāriputra) 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사리・푸트라라고 하는 사람은, 고다마 싯타르다(Siddhārtha Gautama)가 42세 무렵에 덴두나라고 하는 곳에서 방문해 온 아산자라고 불리우는 대파라문(大波羅門)의 사촌형제입니다. 그 친구들에게 마하・몽가라나(大木蓮=대목련 Maha Maudgalyāyana)이라고 하는 남자가 계셨습니다. 그 사람은 논리적으도 상당한 신리(神理)를 설명할 수가 있고, 고다마 ・싯타르다도 중용(重用)했습니다. 결국 샤리・부트라(Śāriputra)는 97~8세 경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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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はシャリー・プトラーは弟子に対する一つの代名詞のようなものなので、舎利子とは諸々の衆生よ、ということになり、偉大なる般若波羅蜜多という悟りの境地は、観自在菩薩という自由自在に見る事の出来る境地であり、あの世もこの世もアポロキティ・シュバラーという方は、この地上界とあの世、そして又未来、皆様の過去と現在と未来、これらのものを自由自在に見る事の出来る悟られた方であるということを舎利子にいっているのです。また、苦しみ悲しみをつくる五官を通した六根にほんろうされてはならない、もともと六根というものは実体のないものであり、これにとらわれるから不幸をつくるのであり、これからおんり遠離しなければならない、わかったか舎利子よ、ということも合わせていっています。
여기에서 샤리・푸트라(Śāriputra)는 제자에 대한 하나의 대명사와 같은 것으로, 사리자(舎利子)란 여럿의 중생이여, 라고 하는 것이 되며, 위대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관자재보살(観自在菩薩)이라고 하는 자유자래로 볼 수 있는 경지이며,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아포로키티・슈바라라고 하는 분은, 이 지상계와 저 세상, 그리고 또 미래,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러한 것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불 수 있는 깨달을 수 있었던 분이라고 하는 것을 사리자(舎利子)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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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ぎに、この皆空、一切は空であるという、くう空というのは、あの世の事をいっております。実在界あの世、あの世というのは実際に、ものが実在する世界で、そのあの世からこの地上界に投映されている世界、あの世から映写機でいわば幕を透して此の三次元という世界に、宇宙というものが投映されていて、しかも立体モーションピクチャーであの世から操つられている訳です。操つられて皆さまは生活し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その操り人形が勝手な行動をしてしまうから、いろいろと問題が出てきてしまう訳です。
다음에, 이 개공(皆空), 일체(一切)는 공(空)이라고 하는,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저 세상의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실재계(實在界) 저 세상, 저 세상이라고 하는 실재로, 물질이 실재하는 세계(世界)이며, 그러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지상계로 투영(投映)되고 있는 세계, 저 세상으로부터 영사기(映写機)로 이를테면 막을 투시하고 이 3차원이라고 하는 세계로, 우주(宇宙)라고 하는 것이 투영되고 있고, 게다가 입체 motion picture로 저 세상으로부터 조종되고 있는 것입니다. 조종되어져서 여러분은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꼭두각시가 제멋대로 행동을 해버리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문제가 나아버리는 것입니다.
五蘊という目や耳や鼻や舌を通して、皆さまは嫌な事を聞くと、つい頭にきてしまったり、感情的になってしまったりして、自分で苦しみや災難を作ってしまうのです。そうなって参りますと私たちは、その様な操つられている事に対して反省をする事によって、我々はなんでこのような苦しみや災難が起るのかという事が、自分でよくわかるはずです。それもしないで自分の苦しみだけを他人のせいにしたり、生活環境を妬んだり、恨んでしまったりするのです。またその操つられている者が、つい生命を持っているから自分勝手な方向へ行ってしまう。そこで、あちらの人は、どうするんだろうといっている訳なんです。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눈이나 귀나 코나 혀를 통해서, 여러분은 싫어하는 말을 들으면, 무심코 화가 나버리거나, 감정적으로 되어 버리거나 해서, 스스로 괴로움이나 재난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오게 되면 저희들은, 그렇게 이끌려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반성(反省)을 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들은 어째서 그러한 괴로움이나 재난이 생기는 것일까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성도 하지 않고 자신의 괴로움만을 타인의 탓으로 하거나, 생활환경을 질투(시기)하거나, 원망해 버리거나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이끌려버리고 있는 사람이, 무심코 생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제멋대로인 방향으로 가버린다. 그래서, 저런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춘계 강연회모습 1975년 히가시오사카의 중앙체육관 ♡ 마음속에 깊이 스며드는 영혼의 말---
実は皆さまも、毎日の生活の一秒一秒はあちらから皆見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を知ったら全く自由はないのです。それが肉体をもつ自分が、自由という事をはき違えてなお苦しみを作っています。死ぬ時には、いずれそれを自分が裁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一つ大きな目的を持って出て来て、よし、今度こそは一つ悟って人々を救ってくるよといって、救うどころではなく自分をも救われず、あの世へ帰ってしまう人が多いんです。そういう人は先ず地獄です。何百年間じっくり地獄で味わってくる事です。
사실은 여러분도, 매일의 생활의 1초1초는 저 세상에서 모두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완전히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를 가진 자신이, 자유(自由)라고 하는 것을 잘못 인식해서(=자유와 방종을 잘못 인식해서) 여전히 괴로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죽을 때에는, 어쨌든 그것을 자신이 재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의 큰 목적을 가지고 나와서, 좋아, 이번이야말로는 하나라도 깨달아서 사람들을 구원(=도와주고)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구원하기는 커녕 자신마저 구원하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우선 지옥(地獄)입니다. 몇백년 동안 단단히 지옥에서 체험하고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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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では実際困ります。なぜならば、皆さまの魂の兄弟達が困るからです。魂の兄弟の内、一人でも地獄に落ちてしまうと、この地上界に皆さまの魂のグループ、即ち六親けんぞく眷族は生れてくる事が出来ないのです。そうすると自分一人のために多くの人に迷惑をかけるという事を知るべきです。
그렇게 해서는 실재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혼(魂)의 형제(兄弟)들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혼(魂)의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지옥(地獄)에 떨어져 버리면, 이 지상계에 여러분의 혼(魂)의 그룹, 즉 육친 권속(六親眷族)은 태어나올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폐(迷惑=괴로움)를 끼친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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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次ぎにしき色ふいくう不異空、くう空ふいしき不異色と出て来ます。この場合の◎色というのは物質、我々の目に見えるところの物質、色、即ち色彩、赤、青、黄という色彩は何万色にも変る。その何万色もある我々の、この地上界の万生万物は全て色彩をもっております。このように色とは万生万物を指します。
그럼 다음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 나옵니다. 이 경우의 ◎색(色)이라고 하는 물질(物質),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 색(色), 즉 색채(色彩), 빨강, 파랑, 노랑이라고 하는 색채는 몇 만가지 색깔로도 변한다. 그 몇 만가지 색깔도 있는 우리들의, 이 지상계(地上界)의 만생만물은 전부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색(色)이란 만생만물(萬生萬物)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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ふいくう不異空という事は、異らずという事、即ち色と空は異ならないのだ、同じだということです。色は空に異らず、空は又色に異らずとこういう異ならないのだです。そうするとなんだか一寸もわからなくなる。そこえもってきて更に又念を押す訳です。
불이공(不異空)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라고 하는 것, 즉 색(色)과 공(空)은 다르지 않는 것이다. 같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색(色)은 공(空)에 다름이 없고, 공(空)은 또한 색(色)에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데다가 더욱더 또 못을 막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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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き色そくぜくう即是空とくうそく空即ぜしき是色――、しかしこれが重要なんです。この空という問題に、あるお坊さんは、この空さえ解かればもう悟りだなんて言っているんです。冗談じゃない、空がわかっても悟れないんです。空という事を知ったら実践しなければ駄目です。深く行わなければ駄目です。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나 이것이 중요(重要)한 것입니다. 이 공(空)이라고 하는 문제(問題)에, 어떤 스님은, 이 공(空)마저도 풀어낼 수 있으면 이미 깨닫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며, 공(空)을 이해하여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空)이라 하는 것을 알았다면 실천(實踐)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깊게 행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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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こでこのように物質というものは、実在を通うして、あの世を通して存在しているんだから、いわばこの地上界は、実在界とは異ならない、同じだよ、変っていないんだ、しかも又、あの世実在界は、この地上界とも異なってはいないんだよ、連続体だ、即ち同じ事を行なっているから、生れたり、滅したりすることはないと説明をしている訳です。
그래서 이와 같이 물질(物質)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實在)를 통함으로서, 저 세상을 통해서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 지상계(地上界)는, 실재계(實在界)와는 다르지 않고, 같은 것이지요. 변하고 있지 않은 것이며, 게다가 또, 이 지상계와도 다르지는 않은 것이지요, 연속체(連續體)인 것이다, 즉 같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설명(說明)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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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ために異ならないから、ここでダメ押ししている訳ですね。この地上界はあの世だよ。あの世は即ちこの世だよ。当然同じ結果になるはずです。ただ次元が違うだけなんです。「あ」と「こ」の違いだけで、○あと○こを外したならば一つになってしまいます。あの世もこの世も、そんなむつかしい世界ではなく一転びなのですから、この理論というものは成り立つはずです。そこで仏教でいうところの〃色心不二〃という事も又同じような姿を表わしております。物理学でもこれは証明出来ますね。
그렇기 때문에 다르지 않으니까, 여기에서 헛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지상계(地上界)는 저 세상이지요. 저 세상은 즉 이 세상이지요. 당연히 같은 결과(結果)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차원(次元)이 다를 뿐인 것입니다. 「저기」「여기」의 차이(差異) 뿐이며, ○저기와 ○여기를 제외했다면 하나로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저 세상도 이 세상도, 그렇게 어려운 세상이 아니라 한번 구르는 빛(一転び)인 것이기 때문에, 이 이론(理論)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것인 “색심불이(色心不異)”라고 하는 것도 또 같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리학(物理學)에서도 이것은 증명(證明)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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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こでこのようなところがら、じゅそう受想ぎょうしき行識 やくぶ亦復にょぜ如是 しゃりし舎利子 又舎利子が出ておりまずけれど人に聞いたら、お釈迦様の骨の事をシャリっていうんだよ。このように答えているお坊さんがありました。最近はシャリといったら米の飯の事を銀シャリといっとりますが、これもシャリには変りないでしょう。米は肉体を保存するための物ですから、米を主食とする人々にとっては大事な食糧です。
그래서 이러한 것 때문에,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또 사리자(舍利子)가 나오고 있지만 남에게 들으면, 부처님의 뼈라는 것을 샤리(舍利사리=유골)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이 대답하고 있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샤리(舍利)라고 말한다면 쌀밥(米の飯)이라는 것을 은(銀)쌀알([일본고유어 しゃり(舎利)=흰 쌀알, 밥알])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샤리(舍利=유골)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쌀(米)은 육체(肉體)를 보존(保存)하기 위한 물질이기 때문에, 쌀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소중(중요)한 식량(食糧)입니다.
したがってお米は諸々の衆生にとって欠くことのできないものですね。シャリ・プトラーは人の名ですが、般若心経の中では〃諸々の衆生よ〃という事ですから、お米をシャリという語源は、案外ここから出たかもわかりませんね。(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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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쌀은 여러 여럿의 중생(衆生)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샤리・부트라(Śāriputra=舍利佛)라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가운데에는 “여러 여럿의 중생이여” 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쌀을 샤리[(舍利=유골(부처・성자)=흰 쌀알, 밥알)] 라고 하는 어원(語源)은, 이외로 여기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웃음=방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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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想行識・・・・・・、即ち皆さまの想念と行為というものは実はこの地上界という場に出てしまうと、空即是色にもかかわらず、現象にとらわれ現象におぼれてしまって、常に堂々めぐりをくりかえしてしまう、おろかなものだとここではいっているのです。
수상행식(受想行識)・・・・・・, 즉 여러분의 상념(想念)과 행위(行爲)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지상계(地上界)라고 하는 장소(場所)에 나와 버리면, 공즉시색(空卽是色)인데도 불구하고, 현상(現象)에 사로잡혀 현상에 빠져버리고, 항상 당당하게 순환(循還)을 반복해 버린다,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기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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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即是空、空即是色といっても、現代のお坊さんでも物理や、科学や、医学というものを通して、自分が神理というものを実践してみないとこの問題は解けないのです。ここが分かれば、受想行識も自然と理解されてくるわけです。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말하여도, 현대의 스님이라해도 물리나, 과학이나, 의학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신리(神理)라고 하는 것을 실천(實踐)해 보지 않으면 이 문제(問題)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理解)할 수 있으면,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자연히 이해(理解)되어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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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こでぜ是しょほう諸法くうそう空相、このようにして一切の神理というものは、実在の実相を通し、神の意志に基づいて作られているものだよ、と言う事になりますね。そこで色即是空というものは、私はよく声を大にして説明します。
그래서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렇게 해서 모든 신리라고 하는 것은, 실재의 실상(實相)을 통해서, 신의 의지(意志)에 바탕을 두어 만들어져 있는 것이지요, 라고 말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저는 자주 목소리를 크게 해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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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さまの肉体は、地上界に適応した人生航路の乗り舟である。この舟に乗っている船頭さんが、魂であり、意識であり、心なのです。その中心の心というものが又どのようになっているかというと、我々の魂というものは、ふしょう不生ふめつ不滅である。生れず滅せずなのです。ですから垢もない、浄ということもないのです。ですからその次にふぞう不増ふげん不減、増えず減らずとこうくる訳です。
このようにすべてを否定しているようにみえるけれども、実は大こうてい肯定なのです。心とはそのようなものなのです。
여러분의 육체(육체)는, 지상계에 적응(適應)한 인생항로(人生航路)의 배를 타고 있다. 이 배에 타고 있는 선장(船長)이, 혼(魂)이며, 의식(意識)며, 마음(心)것입니다. 그 중심(中心)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또 어떻게 되어 있는가 라고 하면, 우리들의 혼(魂)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태어남이 없고 없어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부증불감(不增不減), 늘어남도 없고 줄어듬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부정(否定)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굉장한 긍정(肯定)인 것입니다. 마음(心)이란 그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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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さまの魂というものは、あの世とこの世を転生輪廻してきております。太陽も今日の太陽と明日の太陽は一つも変っていないのです。キリスト教の古い宗教の中には、地球は平面の板の様なものだと教えているようです。東の方から新しい太陽が出て、海の彼方に沈んで、又明日になると新しい太陽が出てきて又沈むのだ。
여러분의 혼(魂)이라고 하는 것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전생윤회(転生輪廻)해 오고 있습니다. 태양(太陽)도 오늘의 태양과 내일의 태양은 하나도 변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Christ)의 고대의 종교 중에는, 지구는 평면(平面)의 판(板)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쪽에서 새로운 태양이 나오고, 바다의 저 쪽으로 가라 앉으며, 또 내일이 되면 새로운 태양이 나오고 또 가라 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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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が文明が発達し、科学が発展するに従って、コペルニクスや、或はガリレイたちは地動説をとなえて、地球はこのように回わっているんだ、だから太陽は一つなんだと、いわゆる地球軌道説をとなえた。この説を強く主張したこれらの弟子たちは、世をまどわすということで首を切られて死んでおります。宗教というのは恐しいものです。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나, 혹은 갈릴레이(Galileo Galilei)들은 지동설[(地動說)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을 일컫고, 지구(地球)는 이와 같이 돌고 있는 것이며, 그러니까 태양은 하나인 것이라고, 이른바 지구궤도설(地球軌道説)을 일컬었다. 이 설(說)을 강하게 주장(主張)한 이들의 제자(第子)들은, 세상을 혼란하게 한다고 하는 일로 참수당해서 죽었습니다. 종교(宗敎)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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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エス様は、そんな事を教えなかった。途中の弟子たちが色々と考え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地球は板のようなもので、地平線の彼方からポンと新しい太陽が出てきて、スーッとおっこちてしまって、又明日になったら新しいのが出てくると考えていた。しかしなんと説明しようと太陽は一つで、今日も昨日も変っていない、同じ太陽である。
예수님님(Jesus)은,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도중의 제자들이 다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구는 판과 같은 것으로, 지평선의 저 쪽에서 뽕~!하고 새로운 태양이 나아오고, 스윽~!하고 떨어져 버리고, 또 내일이 되면 새로운 것이 나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설명하려면 태양은 하나이고, 오늘도 내일도 변하고 있지 않고, 같은 태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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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さんの魂も、ある時は中国に肉体を持って一生懸命に学んだ人や、あるいはエジプトで、又フランスで、それぞれの国を転生輪廻してきて、今日、日本人として自分が日本の環境の中で肉体を持って生活をしております。
여러분의 혼도, 어느 날은 중국에 육체를 가지고 죽어라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나, 혹은 이집트에서, 혹은 프랑스에서, 저마다의 나라를 전생윤회해 오며, 오늘날, 일본인으로서 자신이 일본의 환경 속에서 육체를 가지고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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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船頭さんである皆さんの魂は一つも変っていないのです。ですから魂は生れる事もなげれば、滅する事もないという事実は、皆さんもわかるはずです。エネルギー不滅の法則、質量不変の法則というのがございます。これと同じように我々の魂も永遠である。当然垢も付く事もない、清らかであり、増える事もなげれば、減る事もないのです。
그 선장인 여러분의 혼은 하나도 변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은 태어나는 일도 없지만, 없어지는 일도 없다라고 하는 사실은,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혼도 영원하다. 당연히 때도 뭍는 일도 없고, 맑고 깨끗하며, 늘어나는 일도 없다면, 줄어드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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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次ぎに、くうちゅう空中、つまり実在界は、むしき無色むじゅそう無受想ぎょうしき行識だ。 皆さんの目で見ている五官というもの、あちらでは心の内面で見て参りますから問題は少ない。この地上界についてもそれはいえるし、地上界的なものの考え方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というわけです。それ故にこのような物質的な光景というもの、我々のこの地上界における原子というものを根本としたところのいわば物質的な光景はあの世にはない。実在界は光ですから当然こういう現象はないはずであります。
그럼 다음에, 공중(空中), 즉 실재계(實在界)는, 무색 무수상 행식.(無色 無受想 行識). 여러분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오관이라고 하는 것, 저 세상에서는 마음의 내면으로 보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는 적습니다. 이 지상계에 대해서도 그것을 말할 수 있고, 지상계적인 현상의 사고방식이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질적인 광경이라고 하는 것, 우리들의 이 지상계에 있어서의 원자라고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 장소의 이를테면 물질적인 광경은 저 세상에는 없다. 실재계는 빛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현상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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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この地上界と同様に、目や、耳や、鼻を通して見るような一つの想念と行為があれば、あの世は心の世界ですから、思えば即座に現象化されていきます。特に地獄界などは、心の中で思った事が即座に現象化されます。それだけに恐しい世界です。
그러나, 이 지상계와 마찬가지로, 눈이나, 귀나, 코를 통해서 보는 것과 같은 하나의 상념과 행위가 있으면, 저 세상은 마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생각하면 즉석에서 현상화되어 갑니다. 특히 지옥계 등은, 마음 속에서 생각한 것이 즉석에 현상화됩니다. 그런만큼 무서운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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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在界においても又同じ、心で暗い想念を持つと即座に神の光はスーと消えていきますから反省してしまいます。なぜ私は光が暗くなったのだろうか、反省していけばそこで直り、自分自身が神の心に調和させる事によって、神の光がパーと入りますから元に復してしまいます。そのために人と人との間に嘘がない、嘘をついても直ぐわかってしまいます。便利です。
실재계에 있어서도 역시 같고, 마음으로 어두운 상념을 가지면 즉석에 신의 빛은 스윽~!하고 사라져 가기 때문에 반성해 버립니다. 왜 저는 빛이 어둡게 되었던 것일까, 반성하고 있으면 그러면 바로, 자기 자신이 신의 마음에 조화시키는 것에 의해서, 신의 빛이 확~!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원래대로 회복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거짓이 없고, 거짓말에 대해서도 즉시 알아 버립니다.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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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この地上界でそうなると不幸が来ると思う人があるでしょう。ところが不幸は本当はないのです。争いや斗争や、苦しみや、悲しみや、災難というものは、本来は起らないのです。心がきれいな状態になってしまえば、そこが実在界となり、当然、眼、耳、鼻、舌、身、意というぼんのう煩悩というものも消えてしまいます。
그러나, 이 지상계에서 그렇게 되면 불행(不幸)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데 불행은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다툼이나 투쟁(dòu zhēng鬥争)이나, 괴로움이나, 슬픔이나,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옵고 예쁜 상태로 되어 버리면, 그곳이 실재계로 되며, 당연히, 눈, 귀, 코, 혀, 몸, 의식(意)이라고 하는 번뇌라고 하는 것도 사라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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煩悩が消えるから、目で色々な色彩を見たり、耳で色々な事を聞いたり、或は鼻を通して色々な臭いを感じたり、又舌で味をおぼえたり、身で感触をもったり、このようなものにも影響がなくなります。それはあくまでも原子細胞というものを通して、今のこの地上的なものの考え方で見るから間違いが出てくるのです。心の実相というものは関係ないんだ、というわけです。
번뇌(煩腦)가 사라지기 때문에, 눈으로 다양한 색채를 보거나, 귀로 다양한 것을 듣거나, 혹은 코를 통해서 다양한 냄새를 맡거나, 또 혀로 맛을 느끼거나, 몸으로 감촉을 갖거나, 이러한 것에도 영향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자세포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 이 지상적인 것의 사고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잘못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없는 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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むげんかい無眼界ないし乃至むいしきかい無意識界 あの世は我々の肉体だけで見るような、そんなちっぽけなものではないんだ。広い広いもっと大きな神の意識に基づいた光の光明に満ちた世界なんだ。それこそこの地上の想像を越えた世界であるといえます。
무안계 내지무의식계(無眼界 乃至無意識界) 저 세상은 우리들의 육체만으로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자그만하고 하찮은 것은 아닌 것이다. 넓고 넓은 더욱 더 큰 신의 의식에 바탕을 둔 빛의 광명으로 가득찬 세계인 것이다. 그야말로 이 지상의 현상을 초월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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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故、むむみょう無無明やく亦 それこそ無明の無い世界であり、明るいことを意味するが、むむみょう無無明じん尽だから、その明かるさの尽きるところがないという事になりますね。これは中国特有の言葉であり、これはここの文句と合せるための、いわばごろ語呂合せだったようです。生れず滅せずといっても人間にはわからない。かえってしつこくいったらなおわからんと思うんですが、それを有難がって拝んでいる方はなお有難い人という事になりましょうか。
그러므로, 무무명역(無無明亦) 그야말로 무명의 없는 세계이며, 밝은 것을 의미하지만, 무무명이 다하기 때문에, 그 밝음의 다할 수 있는 곳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것은 중국 특유의 말이며, 이것은 여기의 문구와 배합하기 위한, 말하자면 말장난인 것 같습니다. 태어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고 말하여도 인간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집요하게 말하면 더욱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고맙다고 두손 모아 비는 분은 더욱 고마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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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に出てくるのが、ないし乃至むろうし無老死 やく亦むろうし無老死じん尽 年をとったり死ぬ事もないということですが、それはそうでしょう。あの世へ行って死ぬ訳はないんですから。前節で不生不滅、生れる事も、滅する事もないといっているのですから、我々があの世へ帰って死んじゃったといったら、おかしい事ですね。一回死んだら死ぬ訳がないんで、死というものは肉体という形を見ているから、死んだの生れたのとみな言うんですが、魂は別に一寸も痛くもかゆ痒くもないんです。
다음에 나오는 것이, 내지무노사 역무무사진(乃至無老死 亦無死盡) 나이가 들거가 죽는 일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그렇지요. 저 세상으로 가서 죽는 일은 없으니까요. 앞 절에서 불생불멸(불생불멸), 태어나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저 세상으로 돌아가서 죽었다고 하면, 우스운 일이겠지요. 한 번 죽으면 죽은 것이 아닌 것이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라고 하는 형태을 보고 있기 때문에, 죽은 것 태어난 것이라고 모두 말하는 것입니다만, 영혼(魂)은 별로 조금도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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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体という舟が、この地球上に沈没しちゃっても、その船頭さんは一つも変っていないのです。だから我々は年をとる事もなげれば、死ぬ事もないはずです。ですから皆さんがあの世へ帰った時には、この世で年をとっていっても、あの世へ帰ったら三十か四十才位の人が多いんですよ。お年寄りの方に「おばあちゃん幾才になるの」と聞いたら「私は三十五才位だよ」なんてね。
육체(肉體)라고 하는 배가, 이 지구상에 침몰해도, 그 선장은 하나도 변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나이를 먹는 일도 없지만, 죽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저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 세상에서 나이를 먹고 있어도, 저 세상으로 돌아가면 30살인가 40살인가 정도의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노인이신 분에게 「할머니 몇 살이세요 」라고 여쭤보면 「나는 35살 정도야 」라고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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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前の講演の時に東京でしたけれども、七十八才にもなった人に年はどの位いと聞いたら、「私はまだ三十八、九才の気持です。」又隣りの旦那さん、どうですか、といったら六十才位なのに「私はまだ二十五才位の気持です」と、これは皆さま自身ね、年をとっていても決して自分は人には負けない積りでいるんです。
요전날에 강연 때에는 도쿄였는데요, 78세가 된 사람에게 연세가 어찌되나요 들어보면, 「나는 아직 38이나 39살의 기분입니다.」또 옆에 계신 시주님, 연세가 어떻게 되나요, 라고 여쭤보면 65살 정도인데도 「저는 아직 25살 정도의 기분입니다. 」라고, 이것은 여러분 자신네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결코 자신은 남에게는 뒤지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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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然、魂、船頭さんは若い気持でも、肉体がいう事をきかないから、しかたがないと思っているだけです、そうですね。このようにあの世へ行った時には今皆さんが思っている心の意識年令、これがあの世なんですよ。イエス様でも、あちらへ行きますと若いですね。ちょっと計算していきますと、二千何百才になるはずです。ところが事実は四十才代です。モーゼも同じです。観世音菩薩、みろく弥勒菩薩も矢張り、三十一才~三十五才位です。ですからあの世へ行ってみると皆若いんです。ただ色々な状態で年寄の格好ならよいと思って生活している人もあります。
당연히, 영혼(魂), 선장(船長)은 젊은 기분이라고 해도, 육체(肉體)가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렇군요. 이와 같이 저 세상에 갔을 때에는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마음의 의식연령, 이것이 저 세상이고 하지요. 예수님이라고 해도, 저 세상으로 가게 되면 젊은이이지요. 잠깐 계산해 보게 되면, 2천 몇 백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40대입니다. 모세(Moses)도 같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도 마찬가지로, 31~35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 가서 보면 젊은이인 것입니다. 단지 다양한 상태로 노인(老人)의 모습과 같다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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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ういう事で、あの世は年をとって死ぬ事も、尽きる事もない、不生不滅だから当然の事です。即ちくしゅうめつどう苦集滅道も生老病死もない。こうした意味で般若心経は、人間の生命という問題を解いている訳です。般若心経で問題な点は、ごうん五蘊つまり、眼耳鼻舌身がすべての苦しみを作っていることですが、では その苦しみから解放されるには、どうしたらよいのかというと、この中には書いてないのです。
그러한 것으로, 저 세상은 나이를 먹어서 죽는 일도, 다하는 일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생노병사(生老病死)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야심경(般若心経)은, 인간의 생명(生命)이라고 하는 문제(問題)를 풀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문제인 점은, 오온 즉, 눈귀코혀의(의식)이 모든 괴로움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그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라고 하면, 이 안에는 적혀 있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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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ため神、仏様の前で般若心経を毎日一生懸命上げたり、拝むことが即自分たちが救われるんだと早合点してしまうのですが、こういうような人たちは、なんにもわかっていないという事になります。この中にも何人かいますけれどね。まあ、このように我々の魂の永遠性というもの、この地上界に出てくる苦しみというものは一切我々は、自分自身が作りだしている事を知るべきであります。
이 때문에 신(神), 부처님(佛樣)의 앞에서 반야심경(般若心経)을 매일 죽어라하고 열심히 외우거나, 두손 모아 비는 것이 즉 당사자들이 구원(救援)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리는 것입니다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理解)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아무것도 모른다). 이 중에도 몇분인가 있는데요. 자 그럼, 이와 같이 우리들의 영혼(魂)의 영원성(永遠性)이라고 하는 것, 이 지상계에 나온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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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で、人間はなぜこの地球上に生れてくるのでしょう。それは皆さま自身が転生輪廻をくり返してきて、心に記録された不調和な面を自分自身がよく見つめて、〃自分にはこのような欠点がある〃ということを知り、それを八正道という中道の尺度を通してその欠点を直そうと決心をして生れてくるのです。
그런데, 인간은 왜 이 지구상에 태어나온 것이지요.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전생윤회를 반복해 와서, 마음에 기록된 부조화한 면을 자기 자신이 잘 들여다 보고, “자신에게는 그러한 단점(短點)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중도(中道)의 척도(尺度)를 통해서 그 단점(短點)을 고치겠다고 결심(決心)을 해서 태어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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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には先ず勇気と努力、そしてその欠点を超えてゆくにはどうするかという工夫をこらすことがなければ、心の修正は出来ません。即ちカルマ(業)の修正であります。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용기(勇氣)와 노력(勞力), 그리고 그 결점(短點)을 초월해 가려면 어떻게 할까라고 하는 궁리(窮理)하지 않으면, 마음의 수정(修正)은 할 수 없습니다. 즉 카르마(업)의 수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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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ようにして我々は、地球上の人類が本当に心と心が通い合った、神の子としてみな兄弟であるとの自覚が芽ばえてくるのです。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지구상의 인류가 진실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신(神)의 자녀(子女)로서 모두 형제(兄第)라고 하는 자각이 싹트여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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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がこの地上界に出てくると、その国の思想とか環境に振り回されるから、自分というものが解らなくなって来ます。井の中の蛙大海を知らずで、ついには神の子である事も忘れて、外国人というと、かって自分の生れた国の子孫たちにも拘らず、まるで赤の他人扱いをしてしまう。
그런데 이 지상계(地上界)에 나오면, 그 나라의 사상이라든지 환경에 휘둘려 버리기 때문에,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옵니다. 우물안의 개구리는 넓은 바다를 알 수 없고, 마침내는 신의 자녀인 것도 잊어버리고, 외국인(外國人)이라고 하면, 제멋대로 자신의 태어난 나라의 자손(子孫)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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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さまの多くは、殆んど中国を経由して日本に生れております。中国の文化も皆さまの心の中の意識のテープ・レコーダーには、輪廻転生の中に全部記録されております。それを日本は中国と戦争をした。考えてみれば肉体の子孫とけんか喧嘩をして来た事になるのです。あの世へ帰ったならば、ああ馬鹿々々しかった、なぜ争いなどやったんだと、そのように思うでしょう。
여러분의 상당수는, 대부분 중국을 경유해서 일본에 태어나고 계십니다. 중국의 문화도 여러분의 마음 속인 의식의 테이프 레코더에는, 전생윤회의 속에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일본(日本)은 중국(中國)과 전쟁(戰爭)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육체(肉體)의 자손(子孫)과 싸움을 해왔던 일인 것입니다.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면, 아~! 바보같은 어리석은 짓을 해버렸다, 왜 싸움 따위를 했던 것인가 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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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というものは、永遠に転生輪廻し、あらゆる国々を経て来ているので、今生の僅か五・六十年の体験などホンの小さなものなのです。皆さま自身の過去に体験されて来たところの偉大なる智慧の宝庫が、潜在意識の九〇パーセントの中に記録されております。そうゆうものをゆげん涌現する道がこの般若心経の中に書かれております。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전생윤회하고, 온갖 나라 나라를 경유해서 오고 있는 것으로, 이번 생의 불과 5・60년의 체험(體驗) 등 사실 적은 것은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과거에 체험되어 온 곳의 위대한 지혜의 보고가, 잠재의식(潛在意識)의 90%의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샘물처럼 솟아 나오게 하는 길이 이 반야심경의 안에 쓰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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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々は心と言うものを本当に知ったならば、心は実在の世界に通じ、是故空中なのです。実在界は光明に満ちた世界であり、神理を悟っている為に生老病死の苦しみというものが無いんだよといっております。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もイエス・キリストも、あの世とこの世の〃神理〃を悟り、此の肉体を持っていても、あの世へ自由に行く事が出来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だから肉体というものは、ただの途中の乗り舟にしか過ぎないという事で永遠の輪廻から解脱しているのです。神理の境地というものを知っているために、もうすでに輪廻の苦しみから解脱しているという事です。
우리들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진실(眞實)로 알았다면, 마음은 실재(實在)의 세계(世界)로 통하고, 시고공중(是故空中)인 것입니다. 실재계는 광명(광명)으로 충만한 세계(세계)이며, 신리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다마 싯타르다도 예수 그리스도도,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신리(神理)”를 깨닫고, 이 육체(肉體)를 가지고 있어도, 저 세상으로 자유롭게 갈 수 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도중의 승선한 배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으로 영원(永遠)한 윤회(輪廻)로부터 해탈(解脫)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리의 경지(境地)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윤회(輪廻)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解脫)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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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地上界にあるもの、万生万物は総て輪廻を繰り返しております。たと譬え悟った人なりといえども、永遠の輪廻の中の過程にあるのですが、その輪廻の苦しみから解脱して、あの世もこの世も自由自在に見る能力を持ってしまうために、現象界において、苦しみに見舞われる事もなく、生老病死の原因を知っております。
이 지상계에 존재하는 것, 만생만물(万生万物)은 전부 윤회(輪廻)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령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영원(永遠)한 윤회의 속의 과정(過程)에 있는 것입니다만, 그 윤회의 괴로움에서 해탈(解脫)하고, 저 세상도 이 세상도 자유자래(自由自在)로 보는 능력(能力)을 가져 버리기 때문에, 현상계(現象界)에 있어서의, 괴로움을 맞이하는 일도 없고,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원인(原因)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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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こで宇宙は一つ、宇宙即我の心境であり、自分自身に足る事を知っているので所得の有無に左右されることがない故に、悟られた方たちは般若波羅蜜多、内在されたる偉大なる智慧を悟っているために、心の中は、 である。
그래서 우주는 하나이며, 우주즉아(宇宙即我)의 심경(心境, 마음의 경지)이며, 자기 자신을 만족함을 알고 있는 것이며 소득(所得)의 유무(有無)에 좌우(左右)되는 일이 없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분들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내재된 위대(偉大)한 지혜(智慧)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마음 속은, 있다. ← である원문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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引っ掛りが無い、引っ掛りが無いから、自分の心の中にも、生活の中にも、恐怖する事も何も無い。夢のような間違った考え方を総て遠く離している、おん遠り離している。何時死んでもよい、一日一生という神理を自分自身が悟ってしまう。執着というものが何一つ無い、ねはん涅槃の境地なのです。
거리낌(걸림)이 없고, 꺼리낌(걸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속에도, 생활 속에도, 무서워 할 일도 아무것도 없다. 꿈과 같은 잘못된 사고방식(思考方式)을 전부 멀리 떼어 놓고 있다, 멀리 떼어 놓고 있다. 언제 죽어도 좋다, 일일일생(一日一生)이라고 하는 신리를 자기 자신이 깨달아 버린다. 집착(執着)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하나도 없다, 열반(涅槃)의 경지(境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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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去、現在、未来におけるところの、それぞれ悟られた諸仏は、此のようなパラミタという内在された九〇パーセントの潜在意識・偉大なる智慧を過去世で体験し己の心に記録している。すなわち次ぎに出てくるあのく阿耨たら多羅さんみゃくさん三貌三ぼだい菩提。これは一切のものから解脱して、神の心と調和されている最終段階の悟りの境地をいいます。これをインドの言葉では、アーヌクタラー・サンミヤク・サンボデーというのです。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의 곳인, 저마다 깨달을 수 있었던 여러 부처(諸佛)는, 이러한 파라미타라고 하는 내재된 90%의 잠재의식(潜在意識)・위대(偉大)한 지혜(智慧)를 과거세에서 체험体験)하고 자기의 마음에 기록(記録)하고 있다. 즉 다음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貌菩提). 이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解脫)하고, 신(神)의 마음과 조화(調和)되고 있는 최종단계(最終段階)의 깨달음(得道)의 경지(境地)를 말합니다. 이것을 인도의 말로는, 아메쿠타라 ・삼미야쿠 ・삼보디 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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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境地は偉大な智慧の泉であるだいしんしゅ大神呪であり、そうして光に満ち満ちた神の世界、だいみょう大明しゅ呪であるというわけです。したがってもうここまでくると比較するものがない、これ以上のものは無い、む無とう等とうしゅ等呪である。このように我々は内在された偉大なる智慧をゆ涌げん現して、アポロキティ・シュバラーとなるが、それには般若波羅蜜多という神理に到達する道を理解し行うことです。
그 경지는 위대한 지혜(智慧)의 샘(泉)인 대신주(大神呪)이며, 그렇게 해서 빛으로 충만하고 충만한 신(神)의 세계, 대명주(大明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벌써 여기까지 오면 비교(比較)하는 것이 없다, 이것 이상(以上)의 것은 없다, 무등등주(無等等呪)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내재된 위대한 지혜를 샘물처럼 솟아 나오고, 아포로키티 슈바라로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라고 하는 신리에 도달하는 길을 이해(理解)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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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生よ、悟りの彼岸に到達しようという事で、ぎゃてい羯諦ぎゃてい羯諦 はら波羅ぎゃてい羯諦 はら波羅そうぎゃてい僧羯諦 ぼじ菩提そわか薩婆呵。と所謂じゅもん呪文を唱えれば幸福に成る、もうこの辺から当時の玄装三蔵も違って来たようです。こんなものではないのです。呪文を唱えなくともよいのです。このような神理を知って実践をする生活が大事なのです。日蓮の南無妙法蓮華経を拝めば幸せになる、日蓮はそのような事は教えなかったけれども、後の者がそのような方向に持って行ってしまったのです。
중생이여, 깨달음의 저 기슭에 도달하게 하는 것으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보리 살바하(羯諦 羯諦 波羅 羯諦 波羅 僧羯諦 菩提 薩婆呵). 라고 소위 주문(呪文)을 외우면 행복(幸福)에 이른다, 벌써 이 부분에서 당시의 현장삼장(玄装三蔵,현장법사)도 달라져 왔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신리를 알고 실천(實踐)을 하는 생활(生活)이 중요(重要)한 것입니다. 니찌렌(일련=日蓮)의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을 두손 모아 빌면 행복(幸福)하게 된다, 니찌렌은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후세의 사람이 그러한 방향(方向)으로 가지고 가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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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という者は、色々解らないと、我流の知慧で自分たちの都合のよいように変えてしまったといえるでしょう。呪文の○○○○○○○○ぎゃていぎゃてい・・・・・云々とは、インドの当時の言葉では、カーティ、カーティ、パラーカーティ、パラサンカーティ、ボデースバハーといっておりました。一切衆生よ、迷いの岸から悟りの彼岸に到達して、仏の境地と調和されて、一切を成就しようと、このようになるのです。
인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으면, 자기 방식인 지혜(知慧)로 당사자들의 형편의 좋은 쪽으로 바꿔버린다 라고 말할 수 있지요. 주문(呪文)○○○○○○○○아제 아제・・・・・말 말이란, 인도의 당시의 말(언어)로는, 카티.카티, 파라카티, 파라상카티, 보디스바하 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중생(衆生)이여, 미혹(迷惑)의 기슭(岸)으로부터 깨달음의 저 기슭(피안)으로 도달(到達)해서, 부처(佛)의 경지(境地)와 조화(調和)되어, 모든 것을 성취(成就)하라, 라고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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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は拝む事ではなく、その神理をよく知った日常生活をする事で、心が本当に神の心、仏の心と調和された時には、本当の安らぎが出て来て、内在する過去、転生輪廻した皆さまの偉大な体験された宝庫が、そして仏性が心の中にあるんだ、というのが般若心経です。
인간(人間)은 두손 모아 비는 것이 아니라, 그 신리(신의 의지, 뜻)를 잘 인식(認識)한 일상생활(日常生活)을 하는 것으로, 마음이 진실로 신(神)의 마음, 부처(佛)의 마음과 조화(調和)되었을 때에는, 진실로 평온(平溫, 平安)함이 나오며, 내재하는 과거, 전생윤회(轉生輪廻)한 여러분의 위대한 체험(体験)된 보고(寶庫)가, 그리고 불성(佛性)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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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般若心経というものは実は知らないんです。知らない人間が皆様の前で教えているのは、私はあの世を通うして教えを乞うているからです。そのために皆解ってしまいます。専門の方が聞けばなおよく解ると思います。
저는, 반야심경(般若心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모릅니다. 모르는 인간이 여러분의 앞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저는 저 세상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모두 이해(理解)해 버리는 것입니다. 전문가(專門家)가 들으면 역시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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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こで私は、ここに心経(現在は心行といっています)というものを書きました。私自身、全く仏教とか神様には縁の薄い男でしたが、自然科学の中から〃神理〃を三十数年間追い求めて来て、最終的にはこの問題に到達致しました。それまで私は、あの世を通して色々厳しい事を言われ、三日間で悟れというのです。
그래서 저는, 여기에 심경(心經)(현재는 심행(心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이라고 하는 것을 적었습니다. 저 자신, 전혀 불교라든지 신령님과는 관계가 없는 남자였지만, 자연과학(自然科學) 속에서 “신리”을 30년 동안 추구해와서, 최종적으로는 이 문제(問題)에 도달(到達)했습니다. 거기까지 저는, 저 세상을 통해서 다양한 엄격한 것을 듣어서, 3일 동안에 깨달아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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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四十三年七月十二日、三日目の最終日、「自分はもう死んでもよい、地位も名誉も金も、一切何もいらんと、今まで苦しめた悪魔よ、出て来い、私は命も執着も捨てた」と、はら肚を決めました。その前の一週間というものは殆んど「お前は死んでも、地球上の果まで逃げても、宇宙の彼方へ行っても、俺は掴えてやるぞ、死ぬなら死んで見ろ」と徹底的に叱責されていたのですが、こうして自分自身が実在界(あの世)を通して光の天使から厳しく毎晩付いて回られて、苦しみ抜いた末、遂に自分自身という者が、神の子であり、その使命を果さねばとの自覚を得たのであります。
소화 43(1968년)년 7월 12일, 3일 째의 마지막 날,「 나는 이제 죽어도 좋다, 지위도 명예도 돈도, 모두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지금까지 괴롭힌 악마여, 나와라, 나는 생명도 집착도 버렸다.」라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 전의 일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너는 죽더라도, 지구상의 끝까지 도망치더라도, 우주의 저 쪽으로 가더라도, 나는 붙잡고 말테다, 죽을려면 죽여 봐라.」 라고 철저(撤底)하게 질책(叱責)받고 있었던 것입니다만,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실재계(저 세상)을 통해서 빛의 천사로부터 엄격하게 매일 밤 달라붙어 에워싸여, 괴로움을 없앤 끝에, 마침내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의 자녀(子女)이며, 그 사명(使命)을 완수(完遂)하지 않으면, 자각(自覺)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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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後、十月迄に神理を書けと指令がありましたが、私は電気屋です。電気の事なればよく解りますが、神と称するものや、お経というものは全くヅブの素人です。それがいつの間にか自然と書か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て、ワン・ツー・スリー、又はフォアイシン・フォアイ・シンフォーと言われる上段階の光の天使達が、常に私の所へ付きぱなしです。ぺンを持てば自然と手が動いてしまいます。そこで「大自然の波動と生命」という本を書きました。これを書きました時に、〃中のエキスをお前は作り出せ〃と大自然の波動と生命の中の、生命論の内部を収縮したものが、この「心行」なのです。
그 이후, 12월까지 신리를 기록하라 하고 지령(指令)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전기상(電氣商)입니다. 전기의 관한 일이라면 잘 할 수 있습니다만, 신이라고 칭하는 것이나, 경문(經文)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문외한(門外漢)입니다.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럽게 쓰여지게 되고, 원 투 쓰리, 또은 우완신 우와이 신호라고 불리우는 상단계의 빛의 천사들이, 항상 제 곁에 붙여 있습니다. 펜을 쥐면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여 버립니다. 그래서 「대자연(大自然)의 파동(波動)과 생명(生命) 」이라고 하는 책을 썼읍니다. 이것을 썼을 때에, “내용의 액기스를 너는 완성해라 ”라고 대자연의 파동과 생명의 내용의, 생명론(生命論)의 내부(內部)를 수습(收拾)한 것이, 이 「심행(心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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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行を書き終った時に、実在界(あの世)から光の天使たちが出て参りまして、読んで聞いてもらったところが、お前は四十二年間、本当に親不孝者だった、神を忘れ、自分の使命を忘れ、金儲けからあらゆる悪い事をしておった、こんな野郎は見た事が無い、一緒にキャバレーや料理屋へも度々行かせてもらったけれども、お前のような勝手な男はなかった。併し、親不孝な子供ほど、可愛いいもんだよ、四十二年間付き添ったけれども、こうやって悟ってしまえば、もう私たちには用はなくなった、淋しいものだ、といっていました。
심행(心行)을 다 썼을 때에, 실재계(저세상)에서 빛의 천사들이 찾아와서, 읽어보고 물어보시는데, 너는 42년간, 정말로 불효자(不孝子)였다, 신(神)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사명(使命)을 잊어버리고, 돈벌이로만 온갖 나쁜 짓을 해 왔던, 이런 놈은 본 적이 없고, 같이 카바레나 요리집에도 종종 가게 해주었지만, 너처럼 제멋대로인 남자는 없었다. 그렇지만, 불효(不孝)한 자식(子息)만큼, 사랑스러운 녀석이지, 42년 동안 옆에서 시중을 들었지만, 이렇게 해서 깨달아 버리면, 이제는 우리들로는 쓸모가 없어졌고, 적적한 것이지, 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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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上界の人たちの親心というものは、この地上界よりもっと微妙なものです。光の指導霊たちは、そんな事でもう俺たちの手を借りなくとも、お前は一人歩き出来るだろう、と。これが日本語で喋ってくれるのなら、もっと解るのですが、何しろヘブライ語か、イスラエル語か解らない言葉でペラペラ喋べられるから、気分は半減しますけれども、しかし、矢張り私の心に響いてくるものは同じです。
천상계의 사람들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계보다 좀더 미묘(微妙)한 것입니다. 빛의 지도자(指導霊)들은, 그런 것이며 이제는 우리들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너는 한 사람으로 걸어 갈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이것이 일본어로 말해 준 것이라면,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하여간 헤브라이어(語)인지, 이스라엘어(語)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중얼 중얼 말하기 때문에, 기분은 반감합니다만, 그러나, 역시 저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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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こで私の書いた心行をみて「そうだそうだ神理はこれ以外にないんだ、人間は間違っている、神の子としての自覚をしてもらいたい。自分の心の中でよく消化し、消化した時には偉大なる内在された智慧が、皆さまの過去世である転生輪廻を続けてきたところの、心の宝庫が開かれるんだ」と言われたのであります。
그래서 제가 쓴 심행을 보고 「그렇지 그렇지 신리(神理=신의 의사, 뜻,사랑, 마음)는 이것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잘못하고 있고, 신의 자녀로서의 자각을 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잘 소화(消化)하고, 소화했을 때에는 위대(偉大)한 내재(內在)된 지혜(智慧)가, 여러분의 과거세(過去世)인 전생윤회(転生輪廻)를 계속해 왔던 곳의, 마음의 보고(宝庫)가 열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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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時に始めて、ワン・ツー・スリーことモーゼだと本名を知らされたのです。どこかで聞いた事のある人だと思ったら、パァーと姿が現れ二米以上の大男です。数百年前のエジプトの格好をしております。
그 때에 처음으로, 원 트 쓰리, 곧 모세(Moses)다 라고 본명(本名)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짠~하고 모습이 나타나 2m이상의 큰 남자입니다. 수백년 전의 이집트풍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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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ォアイシン・フォアイ・シンフォーと云われる難かしい名前の方は、かって二千年前、イスラエルの地において人々の心に偉大なる愛の道を説いたイエス・キリストの分身だと名乗りました。私はその時に驚いてしまいました。まさかそんな偉い人が私の所なんか出て来る訳はない。
우완신 우와이 신호라고 불리우는 어려운 이름인 분은, 대략 2천년 전, 이스라엘의 땅에서 사람들에게 마음에 위대한 사랑의 길을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Jesus Chirst)의 분신(分身)이라고 자칭했습니다. 저는 그 때에 경악했습니다. 뜻밖에 그런 위대한 사람이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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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がいろいろな事を教えて貰いますから、これにはどうする事も出来ません。私一人なら私は否定して黙っておりますが、しかしいろいろと周囲の人たちが、私と同じように他国語を喋り始め、又現象も出てまいりました。私はそのようなものは余り信じない男なんですが、こうして既に皆さまの前で、神理を説いている間に、この中からも心の窓を開かれる人たちが出てまいりました。これは否定出来ません。
그런데 여러 가지의 일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이러면 어찌할 수도 없습니다. 저 한 명이라면 부정(否正)하고 침묵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여러가지로 주위의 사람들이, 저와 마찬가지로 타국어를 말하기 시작하고, 또 현상도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그러한 것은 여전히 믿지 않는 남자였습니다만, 이렇게 해서 이미 여러분 앞에서, 신리를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이 중에서도 마음의 창을 열수 있는 사람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정(否正)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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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そうなるのでしょう。皆さまも神の子であるからです。そうして心の窓が開かれた時には、もっと偉大なる不滅の世界の存在があるという事を知らなくてはならないからです。
왜 그렇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도 신(神)의 자녀(子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창이 열리었을 때에는, 더욱 더 위대(偉大)한 불멸(不滅)의 세계(世界)의 존재(存在)가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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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時に私たちが多くの人々に偉大なる神の子としての道を説く時、その中から真に心の調和されている人たちは、我々の神理は正しいのだと、自分の一〇パーセントの声でなく、過去世に学んだ神の子としての道を悟った人たちが現れ立証を与えて行くからです。聖書の中にも、イエスの弟子たち、パウロを初めとして、十何人の弟子たち心の窓が開かれて、今世で学ばなかった言葉や、当時の模様を彼等は語り出し、多くの人々にその道を説いたという事がハッキリと記録されています。
동시에 저희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신의 자녀(子女)로서의 길(가르침)을 설명할 때, 그 안에서 진실로 마음의 조화(調和)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신리(神理)는 올바른 것이다 라고, 자신의 10%의 목소리이가 아니라, 과거세(전생)에 배운 신의 자녀로서의 길을 깨달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입증(立證)을 주시고 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성경)의 속에도, 예수(Jesus)의 제자(第子)들, 바울(사도 바울)을 시작으로 해서, 10 몇명의 제자들 마음의 창이 열리어서, 이 세상에서 배운 적이 없는 말로, 당시의 모양을 글들은 말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길을 설명(說明)했다 라고 하는것이 분명하게 기록(記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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仏教の中のけごん華厳きょうじゅっちぼん経十地品の中にも、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の出られた当時に、多くの人々の心の窓が開かれて、あらゆる国々の言葉を喋り、私は何処で生れ、このような事をして、此処で死に、そして又此処で生れて、このようにしているという事が、心の窓の開かれた人々によって語られたことが記録されております。今我々の現象は、この地球上において二千年ぶりに起っている現象です。そのために今後も我々のグループの中から、心の窓が開き、その使命を自覚した人が沢山出て来るでしょう。
불교(佛敎)의 안의 화엄경 십지품(華厳経十地品)의 내용에도, 고다마 싯타르다가 출현했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창(窓)이 열리어서, 온갖 여러 나라의 말을 말하고, 나는 어디에서 태어나서, 이러한 일을 하고, 이곳에서 죽고, 그래서 또 이곳에서 태어나,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마음의 창의 열리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말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상(現象)은, 이 지구상에 있어서 2천년의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 때문에 나중에도 우리들의 그룹 중에서, 마음이 창이 열리고, 그 사명(使命)을 자각(自覺)한 사람이 많이 나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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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はそれぞれが神の子として自覚に立っているために、実在界より皆さまが出て来る時には、多くの人々を救済しよう、愛と慈悲の道を説いてこようと思い約束した人々が、類は類を呼び、友は友を呼ぶ法則に従って集まって来るからです。すでに我々の周囲には更に又何十何百という教団が同じような方向に転回しつつあります。大阪で最初の同じグループが転回しております。次々に関西、関東、或は九州方面へと、そして更に又、一つ海を越えて沖縄、中華民国(台湾)、アメリカ、南米にも火の手が上り初めております。
그것은 저마다가 신(神)의 자녀(子女)로서 자각(自覺)에 서 있기 때문에, 실재계(=저세상)에서 여러분이 나올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救濟)하자, 사랑과 자비(慈悲)의 길을 설명하고 오겠다 라고 생각하고 약속(約束)한 사람들이, 종류는 종류를 부르고, 친구는 친구를 부르는 법칙에 따라 모여서 오기 때문입니다. 벌써 우리의 주위에는 더욱 또 몇십 몇백이라고 하는 교단이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오사카에서 최초의 같은 그룹이 회전 있습니다 . 차례차례로 칸사이, 칸토, 혹은 큐슈 방면으로, 그리고 더욱 또, 한편으로 바다를 넘어 오키나와, 중화 민국(대만), 미국, 남미에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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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さまの心の中には正しいものと、そうでないものの記録が全部載っており、それを各人の一〇パーセントの意識で、善なる意識で選択して行くのです。人間は思想とか、或は権力によって肉体の行動は制約出来ても、人間の不変的な魂まで、押える事は出来ないのです。心は自由であり、誰もがそく束ばく縛する事の出来ない偉大なる生命です。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올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기록(記錄)이 전부 기재(記載)하고 있고, 그것을 각자의 10%의 의식으로, 선한 의식으로 선택(選擇)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상이라든지, 혹은 권력에 의해서 육체의 행동은 제약(制約)할 수 있어도, 인간의 불변적인 영혼(魂)까지, 누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자유롭고, 누구든지 속박(束縛)할 수 없는 위대(偉大)한 생명(生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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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ような事を知った時に、現代の社会を修正する道は、混乱した世の中を救う道は、一人一人の人間が魂の普遍的尊厳性を悟って、人間らしく生きる、これを自覚した時に世の中は平和になって行くのです。アメリカはその軍事力と科学にものをいわせ南ベトナムの統一を電子計算機によって弾き出しておりました。
그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에, 현대 사회를 수정(修正)하는 길은, 혼란한 세상을 구원(救援)하는 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영혼(魂)의 보편적인 존엄성(存嚴性)을 깨닫고, 인간답게 살고, 이것을 자각(自覺)했을 때에 세상은 평화(平和)가 이르어져 가는 것입니다. 미국(Ameica)은 군사력(軍事力)과 과학(科學)이라고 하는 것은 앞세워 남베트남의 통일(統一)을 전자계산기(電子計算機)에 의해서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しかしあのコンピューターによってすら、南ベトナムの人々の心を掴む事は出来なかったはずです。人の心は暴力や金や地位の力や、又思想によってコントロールする事は出来ないのです。善なる己の心が正しい道に導いて行った時に本当の平和が来るのです。そうゆう面を通して般若心経の更に一歩前進させた神理である(心行)を書いたのであります。
그러나 저러한 컴퓨터(cumpter)에 따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의 사람들의 마음을 [중국어:guāi,掴] 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人間)의 마음은 폭력(暴力)이나 돈이나 지위(地位)의 힘이나, 또 사상(思想)에 의해서 컨트럴(control)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善)한 자기의 마음이 올바른 길(道)로 이끌었을 때에 진실한 평화(平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을 통해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더욱 일보전진(一步前進)시킨 신리(神理)인 (심행[心行])을 기록(記錄)한 것입니다.
---------------2010년 3월 8일 풀이-------------------------------------------------
※출처 : 원문의 저자: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 『高橋信次講演集,1975年 5月 吉日』「般若心經의 解說」이 내용은 현재 일본내에서 절판.
※출처 : http://yuki000004.seesaa.net/article/91166622.html ,
http://yukis0000.blog78.fc2.com/blogcategory2.html, ゆきのひとりご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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