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천사의 재래(天使の再來)』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1970년/일본내 절판(絶版) 본문
이글은 2010년 3월 26일에 최초로 올렸던 글입니다.
당시는, 심한 빙의(憑依)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이 있던 시기에, 제 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번역했던 글입니다.
그리고 훗날인, 2011년 11월 7일 월요일로 날짜를 변경합니다.
그러다, 오늘, 2016년 10월 27일 목요일의 날짜로 변경하며, 나뉘어진 것을, 한 권으로 묶었습니다.
또한, 일본어식 한자인, 약자(略字)와 속자(俗字)를, 해서체(偕書體)인 정자(正字)로 변경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분은, 그대로 놓아 둔 상태입니다.
단 번역상에 한자()를 넣은 곳도 있고, 넣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또한, 중증 빙의 상태에서, 번역했던 글이었기 때문에,
번역상에 오타 혹은 어색한 부분을, 일부 수정하고, 번역상에 누락되었던 문장을, 재번역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일본어 원본이 그대로 실렸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1969년도 판이며, 현재 2010년 일본내 절판이며, 현재 2016년도 역시 절판인 책입니다.
기존에, 스크랩을 해 가신 분들은,
완전체인, 이 글을, 다시 스크랩 해 가시기 바랍니다.
「生きる道」(あなたにも過去世がある)改題
「天使の再來」
「살아갈 길, 살아가는 도리」(당신에게도 과거세가 있다)
개제(제목을 바꾸어)
「천사의 재래」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
ま え が き
(머리말)
現代の佛敎、キリスト敎の神理(しんり)は、ながい歷史的な過程(かてい)のなかに埋沒(まいぼつ)してしまったといってもいいすぎ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時の權力や宗敎家達の智と意によって解釋さ(かいしゃく)れ、學問、哲學と化し、人びとの心から遊離してしまったからであります。本來、佛敎もキリスト敎も、人びとの心から遊離(ゆうり)するようなそんなむずかし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敎えそのものは、人間の心とはこういうもの、人間とはこうしたものなのだということを誰にも分り易く說いているからにほかなりません。智情意の情とはどういうものかといいますと、情とは心です。心があってはじめて、智は智慧(ちえ)となり、意は大我となるのです。その情が不在となり、佛敎もキリスト敎も智と意で勝手に解釋さ(かいしゃく)れ、自分の都合のいいように書きあらためられたものですから、いよいよもって民衆の心から離れていったわけです。
현대의 불교, 그리스도교의 신리는, 오랜 역사적인 과정 속에 매몰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권력이나 종교가들의 지혜(세상에서 배운 경험을 통해 배운 지혜)와 자기의사(意)로 해석되어, 학문, 철학화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서 유리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래,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사람들의 마음에서 유리하는 것과 같은 그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르침 그 자체는, 다름아닌 인간의 마음이란 이러한 것이며, 인간이란 이러한 것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누나나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정의의 정이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정이란 마음입니다.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지는 지혜가 되고, 의는 대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정이 부재하게 되어, 교도 그리스도교도 지와 의로 제멋대로 해석되어, 자신의 형편(사정)에 좋도록 고쳐 써버렸던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민중의 마음에서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もっとも、それにはそれだけの理由はありました。人間は、五官(かん)や六根(こん)に左右されるように一面においてできているからです。うまいものが食べたい。いい着物が着たい。いい家に住みたい。偉くなりたい。金を儲けたい、といった自己保存の念が社會生活を営む(いとな)ことによってますます强よくなっていったからです。鬪爭(とうそう)と破壞(はかい)――。その原因をたずねれば、みんなこうした欲望にふりまわされたところにあります。ところが、こうした欲望や本能というものは、人間の生活がこの世だけと自ら(みずか)限定してしまうところに根本的な理由があったといえましょう。手にふれるもの、眼に見えるもの、耳で聽(き)くものなど感覺(かんかく)の世界にしか人間は、これを認知(にんち)す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に、人は現世に執着を(しゅうちゃく)持つ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ります。
무엇보다도 가장, 그것에는 그만큼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인간은, 오관이나 육근에 좌우되도록 한편에 있어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좋은 옷을 입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위대해지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라고 한 자기보존의 염원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의해서 더욱더 강해지게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투쟁과 파괴와 같은. 그 원인을 찾아보면, 모두 이러한 욕망에 휘둘린(놀아난) 바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이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활이 이 세상뿐이라고 스스로 한정해 버린 바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에 닿은 것,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과 같은 감각의 세계밖에 인간은, 이것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현세에 집착을 갖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しかし、人間は死んでも來世に生きつづけていることを知れば人びとの人世觀はかわる筈です。即ち、あの世は嚴然としてあるのであり、あの世こそ本當の人間の住む世界であり、この世はあの世への人間修行の場であり、そうして人間はあの世、この世の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をくりかえすことによって、魂の淨化(じょうか)、佛性である己の(おのれ)本性に目覺めるものなのです。苦しみ悲しみの原因は神性佛性の己自身の「心」から離れた想念行爲の結果であり、その苦しみから解放されるには己の心を直視し、心そのものの實体を認識する必要があるのであります。
하지만, 인간은 죽더라도 내세에서 계속 살고 있는 것을 알면 사람들의 인세관(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바뀔 것입니다. 즉, 저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저 세상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사는(거주하는) 세계이며, 이 세상은 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인간수행의 장소이며, 그래서 인간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전생윤회를 반복하는 것에 의해서, 영혼의 정화, 불성인 자기 자신의 본성에 눈뜨는(본성을 깨닫는) 것인 것입니다. 슬픔과 괴로움(애고)의 원인은 신성불성의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떨어진 상념행위의 결과이며, 그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직시하고, 마음 그 자체의 실체를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本書は、そうした意味で「心」とは何にか「正法」とはどういうものか、「人間」とはいかなる存在かを槪念的ではありますが、そのポイントをしぼり、書いたものです。本書を手にされた讀者は、本書の眞意をつかんでいただき、己の調和のとれた生活と、平和な社會を築くための心の糧(かて)とされんことを願ってやみません。
본서는, 그러한 의미에서 “마음”이란 무엇인지 “정법”이란 어떠한 것인지,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개념적으로는 아닙니다만, 그 포인트(요점)를 압축해서, 쓴 것입니다. 본서를 입수하신 독자는, 본서의 진의를 파악하시고, 자기 자신의 조화를 이룬 생활과,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마음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昭和四十五年一月吉日((쇼와45년(1970년) 1월 길일(초하룻날)에))
高(たか) 橋(はし) 信(しん) 次(じ) ((다카하시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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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とはいかなるものか
마음이란 어떠한 것인가?
心とは太陽のように、貧(まず)しい人にも富(と)める人にも、わけへたてしない公平無私(こうへいむし)の意識である。エネルギである。信心(しんじん)はその己の心を信ずることである。
마음이란 태양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돈을 요구하지 않는 공평무사한 의식이다. 에너지(Energe)이다. 신앙(信心)은 그 자기의 마음을 믿는 것이다.
生命と物質―すべての中心は心
[생명과 물질- 모든 것의 중심은 마음]
地上の目的は調和にある
[지상의 목적은 조화에 있다]
この世に生をうけ、まず私達が疑問(ぎもん)に思うことは、なんのために肉体を持ってこの世に生れてきたかであります。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선 우리들이 의문(疑問)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육체(肉体)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가"입니다.
しかし、その本論を述べる前に、何故に、この世に生をうけると、その使命を忘れるかについてお話しましょう。
하지만, 그 본론(本論)을 말하기(기술하기) 전에,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사명(使命)을 잊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まず、皆さん自体が、五体の眼、耳、鼻、舌、身、意、そうして、その環境に支配され、それぞれの自我我欲、自己保存という動物本能に万物の霊長たる人間がふりまわされるところに原因があります。
우선, 여러분 자체(自体)가, 오체(五体:사람의 온몸)의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지(意), 그리고나서, 그 환경(環境)에 지배(支配)되어, 저마다의 자아아욕((自我我欲:자기(自己) 혼자만의 욕심(慾心)), 자기보존(自己保存)이라고 하는 동물본능(動物本能)에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이 휘둘린 바에 원인(原因)이 있습니다.
古き印度の時代に釈迦(しゃか)牟尼仏(むにぶつ)が、神の理、仏の理、即ちその神理を説きました。あれからすでに二千五百四十四年になります。その間、生命それぞれは転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を重ね、ある時は中国に、ある時は日本において、その神理が伝わって参いりましたが、中国そのものの長い歴史の中で、スッカリ哲学化され、そうして、こうであろうとする余分の推測(すいそく)が加わったために釈迦の神理は大
分書きあらためられてしまったのであります。
옛날의 인도(印度;India)의 시대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신(神)의 도리(理), 부처(佛)의 도리(理), 즉 그 신리(神理)를 설법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2544년(二千五百四十四年: B.C. 575년: 1969년 현재)이 됩니다. 그 동안, 생명(生命) 저마다는 전생윤회(轉生輪廻)을 거듭하고, 어떤 때는 중국(中國)에, 어떤 때는 일본(日本)에서, 그 신리(神理)가 전해져 왔습니다만, 중국(中國) 그 자체의 오랜 역사(歷史) 속에서, 죄다 철학화(哲學化)되어, 그리고나서, "이러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여분(餘分)의 추측(推測)이 더해졌기 때문에 석가(釋迦)의 신리(神理)는 대부분 고쳐 쓰여져 버렸던 것(개서(改書)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神理というものは、智と情と意、つまり、智情意の中に厳然として、含まれているにも拘ら(かかわ)ず人間は自分の立場というものを考え、自分の宗派にとらわれ、自己保存と化してしまったために、一つの大きな間違いを犯(おか)してしまったのであります。
신리(神理)라고 하는 것은 지(智:지혜)와 정(情:마음)과 의(意:자기 의지), 즉, 지정의(智情意)의 속에 엄연(厳然·儼然)히,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人間)은 자기 자신의 입장(立場)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여, 자신의 종파(宗派)에 사로잡혀(얽매어), 자기 보존(自己保存)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의 큰 잘못(間違い)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たとえば、お経というものは拝むもの、神仏には手を合わせるものというように、仏教そのものは変ってきてしまったのであります。
예를 들면(예컨대), 불경(お経: 佛經)이라고 하는 것은 합장 배례(合掌拜禮)하는 것, 신불(神佛)에게는 손을 모으는(합장(合掌)하는, 애원하는;진심으로 부탁하는)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불교(佛敎) 그 자체(自體)는 변해 와 버렸던 것입니다.
お経は、二千五百四十四年前に、ゴーダマ・シッタルターの弟子達が、マーハー・カシャパーを中心として、その神理をレポートしたのがはじまりです。それは釈迦滅後(めつご)、当時の弟子達、四百七十六人が集まり、四十五年間にわたる釈迦の説いた正法を、私はこう聞いた、私このように教わったということを書いたものです。
불경(お経: 佛經: 불교의 경전)은, 2544년(二千五百四十四年: B.C. 575년: 1969년 현재) 전(前)에, 고다마 싯타르타의 제자들(弟子達)이, 마하 카샤파를 중심(中心)으로 해서, 그 신리(神理)를 리포트(Report)한 것이 시초(始初)입니다. 그것은 석가(釋迦) 멸후(滅後), 당시(當時)의 제자들(弟子達), 476명(四百七十六人)이 모여서, 45년 동안(四十五年間)에 걸치는 석가(釋迦)가 설법한 정법(正法)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私はこう聞いた)", 나는 이와 같이 배웠다(가르침을 받았다)(私このように教わった)"라고 하는 것을 쓴 것입니다.
それですから経文そ(きょうもん)のものは、人間としての在り方を教えているのです。拝むのではなく、行うものであります。
그렇기 때문에 경문(經文(お経: 佛經: 불교의 경전) 그 자체(自體)는, 인간(人間)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본연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합장 배례(合掌拜禮)하는 것이 아니라, 행(行)하는 것입니다.
私達の住んでいるこの地球は、大宇宙からみれば、一つの細胞にしかすぎません。その細胞(さいぼう)の中に住んでいる人類はカビのようなものです。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地球)는, 대우주(大宇宙)에서 보면, 하나의 세포(細胞)에 불과합니다. 그 세포(細胞) 속(中)에 살고 있는 인류(人類)는 곰팡이(カビ:黴)와 같은 것입니다.
皆さん自体の体は、動、植、鉱のエネルギーを吸収して維持しています。吸収し(きゅうしゅう)て出されるたくさんの唾液(だえき)は、小さなバイ菌です。そのバイ菌(きん)からみたならば、恐らく胃の中を大宇宙だと彼等は思っているにちがいありません。われわれの科学は進歩し、人類の智恵(ちえ)は月までいって帰え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が、このことで科学万能主義を唱(とな)えるのはどうかと思います。
여러분 자체(自体)의 몸(体)은, 동물(動), 식물(植), 광물(鉱)의 에너지(Energy)를 흡수(吸収)해서 유지(維持)하고 있습니다. 흡수(吸収)해서 나온 많은 타액(唾液)은, 작은 미균((バイ菌 : (‘細菌(=세균)’의 통속적인 말씨)입니다. 그 세균(細菌)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위속(胃の中)을 대우주(大宇宙)다"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과학(科學)은 진보(進歩)하고, 인류(人類)의 지혜(智恵)는 달(月)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 사건으로 과학만능주의(科學萬能主義)를 외치는 것은 어떨는지 싶습니다.
私自身、私の生命は約一万二千年前の過去を思い出しております。その当時においても人間そのものの考え方は変ってはいないのです。肉体を支配している人間の意識は、少しも進化していないのであります。進化しているのは、人間の智恵、生活の智恵、物質文明だけであります。金のために、地上の人類は動物的本性を出して、肉体破壊(はかい)の方向にまで持っていっているのです。
저 자신(私自身), 제 생명(生命)은 약(約) 12000년 전(一万二千年前)의 과거(過去)를 생각해 내고 있습니다. 그 당시(当時)에 있어서도 인간(人間) 그 자체의 사고방식은 달라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육체(肉體)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인간(人間)의 의식(意識)은, 조금도 진화(進化)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진화(進化)하고 있는 것은, 인간(人間)의 지혜(智恵), 생활(生活)의 지혜(智恵), 물질문명(物質文明)뿐입니다. 돈(金)을 위해서, 지상(地上)의 인류(人類)는 동물적 본성(動物的本性)을 꺼내서, 육체파괴(肉体破壊)의 방향(方向)으로까지 가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2칸)
この現象界は、神の体の一部分であり、細胞の一つです。
이 현상계(現象界)는, 신(神)의 몸(体)의 일부분(一部分)이며, 세포(細胞)의 하나(一つ)입니다.
なればこそ、この地球そのものは、神の体であり、大神殿であります。その大神殿を忘れ、遂いには神理そのものを、紙に書かれた文字や仏像を神として祈っています。そん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지구(地球) 그 자체는, 신(神)의 몸(體)이며, 대신전(大神殿)입니다. "그 대신전(大神殿)을 잊고, 마침내 신리(神理) 그 자체를, 종이(紙)에 쓰여진 문자(文字)나 불상(佛像)을 신(神)으로 삼고 빌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人間本来、そのような目的で出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
인간(人間)은 본래(本來), 그러한 목적(目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神の体であるところの、この地球上の調和をはかるために、人類は肉体を持ってこの現象界に出ているのです。それは長い年月において転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を繰(く)り返(か)えして来た生命そのものの犯したところの己自(おのれ)体のその罪を、自分たちが、この現象界において調和させると同時に、この地球という神の体であるところの、この地球そのものを調和させるために、皆さんはその使命を持って生れて来ているのであります。
신(神)의 몸(體)인 곳인, 이 지구상(地球上)의 조화(調和)를 도모하기 위해서, 인류(人類)는 육체(肉體)을 가지고 이 현상계(現象界)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年月)에 있어서 전생윤회(轉生輪廻)를 반복해 온 생명(生命) 그 자체가 막 저지른 자기 자신(己自体)의 그 죄(罪)를, 자기들이, 이 현상계(現象界)에서 조화(調和)시킴과 동시에, 이 지구(地球)라고 하는 신(神)의 몸(體)인 곳의, 이 지구(地球) 그 자체를 조화(調和)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은 그 사명(使命)을 갖고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칸)
にも拘らず、その神理は哲学化され、人間は物質至上主義に陥っ(おちい)てしまい、各自それぞれ勝手なことを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ですから、神の体である以上、私達は、俺の地所だ、他人の地所だということも本来ない筈です。地位や名誉にしても人間は自分の立場を築くためにつくり上げてしまったものです。莫大(ぼうだい)なエネルギーを与えているところの太陽そのものが、たとえ貧亡人であろうと、学問がなかろうと、地上のこうしたさまざまな階級にたいして、その光のエネルギーを差別していますか。神仏は、各人の意識、心そのものに、その光の光子量に応じて幸、不幸を与えています。今日の資本主義を御覧なさい。経済力によって折角苦労して作り上げた会社を
平気で乗っ取りをやったり、金の多い少ないで人間まで評価しようとします。また一方におけるマルクス主義にしても物を物としてみる唯物論(ゆいぶつろん)ですから、経済物質を根底にしてすべてを評価しようとします。人間まで物としかみないのですから、昨日の同志は今日になれば人民の裏切者、売国奴(ばいこくど)のレッテルを貼ってしまいます。中国のこうした体制には大きな問題があります。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리(神理)는 철학화(哲學化)되어, 인간(人間)은 물질지상주의(物質至上主義)에 빠져 버리고, 각자(各自) 저마다 제멋대로 굴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神)의 몸(體)인 이상(以上), 우리들은, "내 땅(俺の地所)이다, 타인의 땅(他人の地所)이다" 라고 하는 것도 본래(本來) 없는 것입니다. 지위(地位)나 명예(名譽)라 하더라도 인간(人間)은 자신(自分)의 입장(立場)을 쌓기 위해서 만들어 내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막대(莫大)한 에너지를 주고 있는 태양(太陽) 그 자체가, 가령 가난하게 죽은 사람(貧亡人)도, 학문(学問)이 없어도, 지상(地上)의 이러한 다양한 계급(階級)에 대해서, 그 빛(光) 에너지를 차별(差別)하고 있습니까? 신불(神佛)은, 각자(各人)의 의식(意識), 마음(心) 그 자체에, 그 빛(光)의 광자량(光子量)에 따라서 행복(幸), 불행(不幸)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今日)의 자본주의(資本主義)를 보십시오. 경제력(經濟力)에 의해서 모처럼 고생해서(힘들여) 만들어 낸 회사(會社)를 태연하게(平気) 빼앗거나((기업을 매수(買收)하여 경영을 지배함(take-over의 역어)), 돈(金)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人間)마저 평가(評價)하려고 합니다. 또 한편(一方)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Marxism)라 해도 (사물의 판단에 있어서 마음이 아닌) 물건을 물건으로 보는 유물론(物を物としてみる唯物論)이기 때문에, 경제물질(経済物質)를 근저(根底)로 해서 모든 것을 평가(評價)하려고 합니다. 인간(人間)까지도 물건(物)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어제(昨日)의 동지(同志)는 오늘(今日)이 되면 인민(人民)의 배반자(裏切者), 매국노(賣國奴)의 낙인(레테르)을 찍어 버립니다. 중국(中國)의 이러한 체제(体制)에는 큰 문제(問題)가 있습니다.
(( 1969년 당시의 일입니다))
★유물론(唯物論)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
また、大きな問題が起こるでしょう。なぜなら、人間の心という大自然に拡がったその心を、人間の智による一つの機構、組織で統制しようというところにムリがあり、不自然さがあるからです。
또한, 큰 문제(問題)가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人間)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대자연(大自然)에 펼쳐진 그 마음(心)을, 인간(人間)의 지혜(智)에 의한 하나의 기구(機構), 조직(組織)으로 통제(統制)하려고 하는 바에 무리(無理 :ムリ)가 있으며, 부자연함(不自然さ)이 있기 때문입니다.
神仏はエネルギーそのもの
[신불(神佛)은 에너지 그 자체(自體)]
人間がこの地上界に神の命をうけて肉体を持ち、この地球そのものを調和させるということは、最も自由の中で、しかも、物質、経済の上に、われわれの心というものの存在が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拘らず、あのマルクス主義は、そのようなことをせず心の存在を否定しているところに、大きな間違いを犯(おか)しているのです。
인간(人間)이 이 지상계(地上界)에 명(命)을 받고 육체(肉體)를 갖고, 이 지구(地球) 그 자체를 조화(調和)시킨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자유(自由)로운 가운데서, 게다가, 물질(物質), 경제(經濟) 상(上)에, 우리들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그 자체의 존재(存在)가 없으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저 마르크스 주의(Marxism)은, 그러한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음(心)의 존재(存在)를 부정(否定)하고 있는 바에,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しかし、心を否定しても否定でき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現在のソビエトをごらんなさい。キリスト教信仰が復興(ふっこう)しつつ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カール・マルクス、ヘーゲル、オーギュスト・コントにしても、彼等は社会主義生活こそ至上のものとしていたにも拘らず、オーギュスト・コントのごときは、晩年人道学派というものをつくって、一つの宗教に帰依(きえ)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ハーバート・スペンサーは一八一八年、実在界から命ぜられて、当時の権力と、一つの資本力に対抗するためにこの地上界に出されたのであります。しかし、こういう人達も最後は、心というもの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くて、やはり、宗教に帰依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むろん、マルクス自体も、モスコーに神学校まで作っているのです。
하지만, 마음(心)을 부정(否定)하려고 해도 부정(否定)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現在: 1969년 현재)의 소비에트(Soviet: 소련의 노농 평의회)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교(Christianity: 기독교) 신앙(信仰)이 계속 부흥(復興)하고 있지 않습니까?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 독일; 1818~1883)",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독일의 철학자(1770-1831)",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라 해도, 그들은 사회주의 생활(社會主義生活)이야말로 지상(至上:최상)의 것으로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와 같은, 만년(晩年) 인도학파(人道學派)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한 종교(宗敎)로 귀의(歸依)하고 있지 않습니까?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영국의 철학자·사회학자(1820-1903)"는 1818년(一八一八年), 실재계(實在界)에서 명령을 받고, 당시(當時)의 권력(權力)과, 하나의 자본력(資本力)에 대항(對抗)하기 위해서 이 지상계(地上界)에 나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도 최후(最後)는,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을 어덯게 할 수도 없게 되어, 역시, 종교(宗敎)에 귀의(歸依)해서 죽는 것입니다. 물론,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그 자신(自體)도, 모스크바(Moscow)에 신학대학교(神學校)까지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 독일; 1818~1883, 칼 마르크스,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일본어 및 영어 사전))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독일의 철학자(1770-1831). 칸트·셸링 등을 비판하여 독자적인 방법론·변증법을 확립하였음), ((일본어 및 영어사전))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사회학자)
((일본어 및 영어사전))
★허버트 스펜서(영어: Herbert Spencer, 1820년 4월 27일 ~ 1903년 12월 8일)는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 철학자이다. 오귀스트 콩트의 체계에 필적할 대규모의 종합사회학 체계를 세워 영국 사회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사전)
진화·발전을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인식하고 사회·심리·도덕·생물 등의 여러 현상을 통일적으로 해명코자 하였음. ((일본어 사전))
物を物として、彼等がいくら説いたところで説明出来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現代物理学において、原子核そのものの、核(かく)、ニュー・プロトンとプロトンと陰外(いんがい)電子の間におけるところの媒(ばい)体(たい)、即ち、空間に対して、これを物質とみ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か。
물질(物)을 물질(物)으로서, 그들이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대 물리학(現代物理學)에 있어서도, 원자핵(原子核) 그 자체의, 핵(核), 뉴 프로톤(New Proton: 새로운 양성자)과 프로톤(Proton: 그냥 양성자(陽性子))과 음외전자(陰外電子)의 사이에 있는 곳인 매체(媒體), 즉, 공간(空間)에 대해서, 이것을 물질(物質)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볼 수 있을까요?)
★(proton, 프로톤)
양성자(陽性子). 원자핵의 기본적 성분을 이루는 소립자. ((일본어 사전))
((위 문장의 설명)) 高橋信次著「大自然の波動と生命」における現象論の要約(2)
다카하시 신지님의 저서 『대자연의 파동과 생명』에서의 현상론의 요약(2)에서....
8、原子の三性
((8. 원자의 새가지 성질))
物質は、分子から構成され、分子は数個の原子から成立している。この原子は陽電子と中性子から成る原子核と、その周囲を回転する陰外電子からなっている。
물질은, 분자로 구성되며, 분자는 수십개의 원자로 성립되어 있다. 이 원자는 양전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지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회전하는 음외전자로 되어 있다.
電子の質量は極めて小さく、水素原子の質量等は1800分の一に過ぎない。
전자의 질량은 극히 작고, 수소원자의 질량 등은 1800분의 1에 불과하다.
この電子は、陽電子を持った原子核との間の引力によって、その周囲に拘束され、安定な軌道を運動している。このような電子を束縛電子または軌道電子という。
이 전자(電子)는, 양전자를 가진 원자핵과의 사이의 인력(引力)에 의해서, 그 주위에 구속(拘束)되어, 안정(安定)된 궤도를 운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원자를 구속전자(拘束電子) 혹은 궤도전자(軌道電子)라고 한다.
陽電子から、陰外電子にエネルギーが流れると中性子は陽電子に変わり、陰外電子に作用して核と陰外電子が、調和されている時は、安定している。15ミリの飴玉を地球の表面に伸ばして約ピンポン玉位の大きさの物が原子の大きさである。
양전자에서, 음전전자로 에너지를 흐르게 하면 중성자는 양성자로 변하고, 음외전자에 작용하여 핵과 음외전자가, 조화(調和)되어 있을 때는, 안정되어 있다. 15밀리의 눈깔사탕(飴玉)을 지구(地球)의 표면에 펴서 약 탁구공 정도의 크기의 물질이 원자(原子)의 크기이다.
(イ)陰性は陰外電子(( 음성은 음외전자 ))
(ロ)中性は中性子 ((중성은 중성자))
(ハ)陽性は陽電子 ((양성은 양전자))
太陽系の惑星と同じ陽に、原子核を中心に陰外電子が運動を続けており、エネルギーをはらんでいる。
태양계의 혹성과 같은 빛(陽)으로, 원자핵을 중심으로 음외전자가 운동을 계속하고 있고, 에너지를 품고 있다.
http://ameblo.jp/cpa-togo/entry-11406370066.html
(본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また、電波のエネルギーにしても、核エネルギーにしても、そのような物質論だけでは割り切れぬ面が非常に多いのであります。
또한, 전파(電波)의 에너지(Energe)도, 핵에너지(核Energe)도, 그와 같은 물질론(物質論)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면이 상당히 많은 것입니다.
皆さん自体が、仮(か)りに、経済力を持って、自分の思う通りのことをやってごらんなさい。感ずることは無情である筈です。
여러런 자체(自體)가, 시험 삼아서, 경제력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하는 그대로의 일을 해 보십시오. 느끼는 것은 무정(無情)일 것입니다.
六〇兆からなる人体の細胞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エネルギー源は何か。人間の頭の中で考えていると思ったら大間違いです。頭の中は、肉体諸器官のコントロール・タワーにしか過ぎません。
60조(六〇兆)로 구성되어 있는 인체(人體)의 세포를 지배하고 있는 곳의 에너지핵은 무엇인지? 인간의 머리속으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상상)한다면 큰 잘못(큰 착각)입니다. 머리 속은, 육체의 모든 기관(肉体諸器官)의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R관제탑)에 지나지 않습니다.
腦細胞は、約二百億あります。二百億からの約二〇ミクロンの腦細胞そのものを、米粒(こめつぶ)の大きさにして換算(かんさん)すると十五トンのワム車(貨物車)が二百輌必要とします。それほどのものが皆さんの頭の中につまっています。
뇌세포(脳細胞)는, 약 200억(二百億)입니다. 200억(二百億)에서 약 20미크론의 뇌세포 그 자체를, 쌀알(米粒)의 크기로 해서 환산(換算)하면 15톤의 화물차(貨物車)가 200대(二百輌)가 필요로 합니다. 그만한 것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꽉 차 있습니다.
★1미크론은 100만분의 1미터 ((일본어 사전))
しかし、その頭腦も、皆さんが一たん眠ってしまうと、今、私が述べていることすら聞くことは出来ません。それは皆さんから意識が離れるからです。それほど頭腦そのものは、本來、賴(たよ)りないものなのです。眼がさめて、意識の意思によって、私の話しを聞いていられる。その話しも、皆さんの耳に、この空氣という媒体(ばいたい)を通して、それぞれの經驗、敎養、德というものによって、各自が計算し、意識に傳えているわけであります。
하지만, 그 두뇌(頭腦)도, 여러분이 일단 잠들어 버리면, 지금, 제가 말하고(진술하고) 있는 것조차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서 의식(意識)이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두뇌(頭腦) 그 자체는, 본래(本來), 미덥지 않은 것(반응이 없는; 감각에 별로 자극을 주지 않는)인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 의식(意識)의 의사(意思)에 의해서, 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도, 여러분의 귀(耳)로, 이 공기(空氣)라고 하는 매체(媒體)를 통해서, 저마다의 체험(體驗), 교양(敎養), 덕(德)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각자(各自)가 계산해서, 의식(意識)에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意識はエネルギーです。皆さんが每日の生活の中で、あることについて惱みを持って苦しんでいるとします。すると非常に疲れをおぼえると思います。それはエネルギー(意識)が消費されているからであります。
의식(意識)은 에너지(Energe)입니다. 여러분이 매일(毎日)의 생활(生活) 속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고민(걱정)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상당히 피로를 느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에너지(Energe)((의식(意識))가 소비(消費)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心配ごとが多いと肉体にも支障が出てまいります。
걱정거리가 많으면 육체에도 지장이 초래합니다.
一方、肉体労働をしても、やはり同じように疲れます。エネルギーを使っているからです。肉体的なロス(損失)にたいするエネルギーは、動物、植物、鑛物のエネルギーを吸収して補い(おぎな)ます。しかしそのエネルギーも、太陽の熱・光のエネルギーと、この地球という環境そのものがあればこそ、皆さんの五体は調和出来るのです。
한편(一方), 육체노동(肉體勞動)을 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피곤합니다.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loss(손실(損失))에 대한 에너지는, 동물(動物), 식물(植物), 광물(鑛物)의 에너지를 흡수(吸収)해서 보충합니다. 하지만 그 에너지도, 태양(太陽)의 열(熱)・빛(光)의 에너지(Energe)와, 이 지구(地球)라고 하는 환경(環境) 그 자체가 있어야만 비로소, 여러분의 오체(五体:五體)는 조화(調和)될 수 있는 것입니다.
しかし、精神的な惱みにおいて生ずるところの肉体的ロスは、どこからそのエネルギーを補充(ほじゅう)すると思いますか。これは皆さんの肉体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意識そのものがエネルギーであり、そのエネルギーは、この地球というものを調和させる使命を担(にな)って出ているところの細胞体、大宇宙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意識、即ち、エネルギーの元である神、佛そのもののエネルギーを吸收しなければ調和できないのです。
하지만, 정신적(精神的)인 괴로움(고민; 번민; 걱정)으로 생기는 바인 육체적(肉體的)인 손실(ロス:損失)은, 어디에서 그 에너지를 보충(補充)한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육체(肉體)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바인 의식(意識) 그 자체가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는, 이 지구(地球)라고 하는 것을 조화(調和)시킬 사명(使命)을 담당하고 있는 바인 세포체(細胞體), 대우주(大宇宙)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바인 의식(意識), 즉, 에너지의 근원(元)인 신(神), 불(佛) 그 자체의 에너지를 흡수(吸収)하지 않으면 조화(調和)할 수 없는 것입니다.
神・仏とは、皆さんの肉体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意識、その意識の中心、心こそがエネルギーの中心であり源な(みなもと)のであります。
신(神)・불(佛)이란, 여러분의 육체(肉體)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바인 의식(意識), 그 의식(意識)의 중심(中心), 마음(心)이야말로 에너지의 중심(中心)이며 근원(源な(みなもと))인 것입니다.
この心が、全(すべ)ての中心であり、意識こそ肉体の支配者であります。
이 마음(心)이, 모든 것의 중심(中心)이며, 의식(意識)이야말로 육체(肉體)의 지배자(支配者)자입니다.
それにも拘らず、人間は自分の頭だけで全てを考えよう、頭だけに全てをつめ込もうとするところに、問題が起ってくるのです。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人間)은 자신의 머리(頭)만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려고, 머리(頭)에게만 모든 것을 채워 넣으려고 하는 바에, 문제(問題)가 일어나는 입니다.
現代社会は、唯物論や資本主義経済というものに蹂躙さ(じゅうりん)れて、心の安らぎがありません。
현대사회(現代社會)는, 유물론(唯物論)이나 자본주의 경제(資本主義經濟)라고 하는 것에 유린(蹂躙)되어, 마음(心)의 평온함(安らぎ:평안)이 없습니다.
人間自体がこのような姿となり、そのために現代宗敎までが、不調和であり、鬪爭、鬪爭という同じ釋迦(しゃか)の考えに對して、我こそは本山なりとやっているのです。日蓮宗一つみても、その分派活動と、それぞれが本山を主張してゆずりません。印度の時に說いた佛敎の本質は、そん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인간자체(人間自體)가 이와 같은 모습(姿)이 되어, 그로 인해서 현대 종교(現代宗教)마저도, 부조화(不調和)하게 되어, 투쟁(鬪爭), 투쟁(鬪爭)이라고 하는 똑같은 석가(釋迦)의 사고(思考)에 대해서, "나야말로 본산((本山:일종 일파(一宗一派)를 통할하는 사찰))이다( 我こそは本山なり)"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치렌종(日蓮宗) 하나만 봐도, 그 분파 활동(分派活動)과, 저마다가 본산(本山)를 주장(主張)하며 양보하지 않습니다. 인도(印度)의 당시(時)에 설법한 불교(佛敎)의 본질(本質)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人間は核(かく)を中心に五分身から成る
[인간(人間)은 핵(核)를 중심으로 5명의 분신(五分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皆さんの六〇兆から成る細胞が不調和を起してごらんなさい。皆さんは医者にいったり、薬をのんだり、ある者は切開(せっかい)して自分の体を治(なお)そうとするでしょう。
여러분의 60조(六〇兆)로 이루어지는 세포(細胞)가 부조화(不調和)를 일으켜 보십시오. 여러분은 의사(医者:醫師)에게 가거나, 약(藥)을 먹거나, 어떤 사람은 절개(切開)해서 자신의 몸(體)를 고치려고(치료하려고) 할 것입니다.
★★★ "여러분들의 모르시겠지만, 세포 그 자체에도 의식(意識)이 존재함을 이해하신다면, 위 문장의 뜻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
それと同じように、地球も、やはり、皆さんの心の不調和によって天変地変が起ります。私達は神の命によってこの現象界、物質界自体の調和をはかるために、その使命を担(にな)って来たのであります。皆さん自体そのものが、己の(おのれ)心の本質までも忘れ去って自分の進むべき道すら分らなくなっているのです。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구(地球)도, 역시, 여러분의 마음(心)의 부조화(不調和)에 의해서 천변지변(天変地変★하늘과 땅에서 생기는 자연(自然)의 큰 변동(變動)★)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은 신(神)의 명령(命)에 의해서 이 현상계(現象界), 물질계(物質界) 자체(自體)의 조화(調和)를 도모하기 위해서, 그 사명(使命)을 담당해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自體)바로 그 자체가, 자기(己)의 마음(心)의 본질(本質)마저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てんさい-ちへん【天災地変】の意味★★
自然界に起こるさまざまな災い。暴風・地震・落雷・洪水などの災害のこと。
천재지변은, 자연계에 일어나는 다양한 재앙. 폭풍, 지진, 낙뇌, 홍수 등의 재앙을 말함.
★★てんぺん-ちい【天変地異】の意味 新明解四字熟語辞典 ★★
((한자 사전))의 뜻 :"하늘과 땅에서 생기는 자연(自然)의 큰 변동(變動)"
((더 자세한 설명은, 일본의 국어대사전 새롭게 알기 쉽게 해석한 사자숙어 사전))에는,
天地間に起こる自然の災害や、変わった出来事のこと。▽「天変」は天空に起こる変動のこと。異常気象やそれ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災害で、日食・隕石いんせき彗星すいせい暴風・大雨などをいう。「地異」は、地震・津波・火山の噴火など地上で発生する異変のこと。
천지간에 일어나는 자연 재해나, 돌발적인 사건. ▽「천변(天變)」은 천공(天空: 한없이 넓은 하늘)에 일어나는 변동(變動)을 말함이며. 이상기상(異常氣象)이나 그것에 의해서 초래되는 재해(災害)이며, 일식(日食)・운석(隕石:별똥별) 혜성(彗星) 폭풍(暴風)・큰비(大雨:호우) 등을 말한다. 「지이(地異)」는, 지진(地震)・쓰나미(津波:해일)・화산(火山)의 분화(噴火) 등으 지상(地上)에서 발생하는 이변(二變)을 말함.
――これを未法の姿というのです。
――이것을 말법(未法)의 모습(姿)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イエス・キリストが紀元前三十二年に、肉体を持ち、そして、あのエルサレムにおいてその神理を說いた時は、人間の心は、殆(ほと)んどが惡魔(あくま)でした。パリサイ人をはじめとして、悪魔の支配をうけていない人は少なかったのです。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기원전(紀元前) 32년(三十二年)에, 육체(肉體)를 가지고, 그리고, 바로 저 예루살렘(Jerusalem: 이스라엘의 수도)에서 그 신리(神理)를 설법했을 때는, 인간(人間)의 마음(心)은, 대부분이 악마(悪魔)였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 Pharisaios)을 비롯하여, 악마(悪魔)의 지배(支配)을 받고 있지 않은 사람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パリサイびと[パリサイ人] ((일본어 사전/영어사전))
ⓐ바리새인, 바리새파의 교인, ⓑ전하여, 위선자, 형식주의자
1.바리새인(율법을 엄격히 따르던 고대 유대인 집단인 바리새파의 일원)
2.(못마땅함) 경건한[도덕군자인] 척하는
現代はどうかというと、動物靈に犯(おか)されています。万物の靈長たる人類に、己の(おのれ)心を、己の本性を忘れたため、その黑い想念がそのような動物靈を呼び込み、とりわけ、神がかり的現象をみせている新興宗敎のほとんどは、動物靈の支配をうけているというのが實情であります。
현대(現代)는 어떤가 하면, 동물령(動物靈)에게 침해당해 있습니다((혹은, 동물령에게 지배당하여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인류(人類)에게, 자기(己)의 마음(心)를, 자기(己)의 본성(本性)을 잊었기 때문에, 그 어두운 상념(想念)이 그러한 동물령(動物靈)를 끌어들여(불러들여), 그 중에서(특히), 접신적 현상(接神的現象)를 보이고 있는 신흥종교(新興宗敎)의 대부분은, 동물령(動物靈)의 지배(支配)를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실정(實情)입니다.
私達の周圍の環境を(かんきょう)ごらんなさい。自分本位、自分さえよければよい。他はどうなってもいいといった不調和そ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
우리들의 주위(周圍)의 환경(環境)을 보십시오. "자기본위(自分本位), 자기만 좋으면 (남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 남(他)은 어찌 되어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하는 부조화(不調和) 그 자체가 아닙니까?
今日、夫婦というものの九〇%は破壊(はかい)寸前に来ております。性の混亂、生活の目的がなんであるかを忘れてしまった結果であります。
오늘날(今日: 1969년 현재), 부부(夫婦)라고 하는 것의 90%는 파괴직전(破壞寸前)에 놓여 있습니다. 성(性)의 혼란(混亂), 생활(生活)의 목적(目的)이 무엇인지를 잊어 버리고만 결과(結果)입니다.
人間は、その使命に目覺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己自体の心というものの存在を明確化し、そして、その使命を悟(さと)るならば、この現象界の調和は可能なのです。
인간(人間)은, 그 사명(使命)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己自體)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의 존재(存在)를 명확화(明確化)하게 해서, 그리고, 그 사명(使命)을 깨닫게 되면, 이 현상계(現象界)의 조화(調和)는 가능(可能)한 것입니다.
これ以上放っておくと、地上はやがて破滅に至ります。しかし、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
이 이상으로 방치해 두면, 지상(地上)은 머지않아 파멸(破滅)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今から約一万二千年前に、アトランテス帝國というのがありました。その当時、この會場の何人かの人たちは、光の天使として出ていました。しかし、當時の人民は、その殆んどが悪魔に支配されており、このためにこれら天使の殆んどを殺してしまいました。當時は、惡魔の姿をこの眼でみ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アトランテス帝國は、一夜
にして海底に陥没(かんぼつ)しました。
지금으로부터(1969년 현재) 약(約) 1만 2천 년 전(一万二千年前)에, 아틀란테스 제국(Atlantis帝國)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當時), 이 회장(會場: 모임을 가지는 곳)의 몇명인가의 사람들은, 빛(光)의 천사(天使)로서 (이 세상에) 나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當時)의 인민(人民)은, 그 대부분이 악마(惡魔)에게 지배(支配)되어 있고, 이 때문에 이러한 천사(天使)의 대부분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當時)는, 악마(惡魔)의 모습(姿)을 이 눈(眼)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틀란티스 제국(Atlantis帝國)은, 하룻밤 사이에 해저(海底)에 함몰(陥没)되어 버렸습니다.
★アトランティス(Atlantis, 아틀란티스) ((일본어 사전))
ⓐ 그리스의 지브롤터 서쪽의 대서양에 있었다는 전설의 대륙. 금은이 풍부한 낙원이었으나 지진으로 하룻밤 사이에 바다속에 매몰되었다 함.
また、あのローマにおける火山の噴火。それもやはり、当時のイエス・キリストの弟子たち、光の天使を殺したために、そのような現象をみせられローマは壊滅(かいめつ)したものです。
또한, 저 로마(Roma: 이탈리아의 수도)인 경우는 화산(火山)의 분화(噴火). 그것도 역시, 당시(當時)의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의 제자(弟子)들, 빛(光)의 천사(天使)를 죽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상(現象)를 보여서 로마(Roma: 이탈리아의 수도)는 파멸(壊滅)되었던 것입니다.
皆さんは、各自の心の不調和が、それがそのまま姿を変え、現象となって現われることはないと思ったら、とんでもない間違いです。皆さん自体の五体を支記しているところの意識そのものの不調和、心の不調和は、それが即、皆さんの日々の生活の安らぎのない、そして、肉体的諸現象となって現われることを認識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て、こうした不調和が、地球そのものの不調和につながってゆくのです。
여러분은, 각자(各自)의 마음(心)의 부조화(不調和)가, 그것이 그대로 모습(姿)를 바꾸어, 현상(現象)이 되어 나타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잘못(실수)입니다. 여러분 자체(自體)의 오체(五體)를 지배(支記)하고 있는 바인 의식(意識) 그 자체의 부조화(不調和), 마음(心)의 부조화(不調和)는, 그것이 즉, 여러분의 매일(日々)의 생활(生活)의 평온함의 없는, 그리고, 육체적 모든 현상(肉体的諸現象)이 되어 나타나는 것임을 인식(認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부조화(不調和)가, 지구(地球) 그 자체의 부조화(不調和)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それですから、自分の心というものは、この肉体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中心であり、その心自体は、自由自在に自分を創造し、常に正しい心で、悪いものは排してゆくという調和の姿を持つことが必要なのであります。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육체(肉體)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곳의 중심(中心)이며, 그 마음 자체(心自體)는,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자기 자신(自分)을 창조(創造)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心)으로, 악(惡)한 것은 물리쳐 간다고 하는 조화(調和)로운 모습(姿)을 갖는 것이 필요(必要)한 것입니다.
そして、心自体は、宗教の特別なる戒律(かいりつ)や形づけられたものに制約を受けてはならないのです。心そのものは、自由です。その自由の中から、正しいものが、自と(おのず)湧(わ)いてくるものです。
그리고, 마음 그 자체(心自體)는, 종교(宗敎)의 특별(特別)한 계율(戒律)이나 형식화 된 것에 제약(制約)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心) 그 자체는, 자유(自由)입니다. 그 자유(自由) 속에서, 올바른 것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それともう一つ。皆さんは、この現象界に一人で肉体を持っていると思ってはいけません。
그것과 또 한가지, 여러분은, 이 현상계(現象界)에 혼자(一人)서 육체(肉體)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皆さんは、この地球上というところに、みなさんを中心とした分身や本体が、あの實在界(あの世)で、皆さんを見守っているのです。大抵はこのことが分らず、人間そのもの、心というものの存在を忘れ、每日每日を、眼・耳・鼻・舌・身・意の現象的なものに振(ふ)り回(ま)わされて、己を(おのれ)忘れているのが現代社會の姿です。
여러분은, 이 지구상(地球上)이라고 하는 장소에, 여려분을 중심(中心)으로 한 분신(分身)이나 본체(本體)가, 저 실재계(實在界)(저 세상(あの世))에서,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大抵)는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인간(人間) 그 자체,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의 존재(存在)를 잊고, 눈(眼) ・귀(耳)・코(鼻)・혀(舌:입)・몸(身)・뜻(意:자기 의지)의 현상적(現象的)인 것에 휘둘려서, 자기(己)를 잊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現代社會)의 모습(姿)입니다.
科學万能のようにみえていながら、物理學、醫學、天文學の世界に踏(ふ)みこんでみても、生命そのものの本体を知る手がかりは何一つ見出せないというのが現在の科學です。
과학만능(科學萬能)처럼 보이고 있으면서, 물리학(物理學), 의학(醫學), 천문학(天文學)의 세계(世界)에 깊이 파고들어 가 보아도, 생명(生命) 그 자체의 본체(本體)를 알 길은 무엇 하나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현재(現在)의 과학(科學)입니다.
核(かく)というものを中心として、五人の分身からこの人類は、成り立っています。即ち、肉体を持ってこの現象界にその一人が出ているとすれば、残る本体や分身(ぶんしん)は実在界において、現象界にいる人間にたいして守護、指導靈として見守り、指導しているのであります。現象界に肉体を持っている本体あるいは分身の心は、次元のちがったエネルギーの世界、つまり実在界における五人の分身、本体に通じており、それは靈子線(れいしせん)という光の糸でつながれていることを知らねばなりません。
핵(核)이라고 하는 것을 중심(中心)으로 해서, 5명(五人)의 분신(分身)으로 이 인류(人類)는, 성립(成立)되어 있습니다. 즉, 육체(肉體)를 가지고 이 현상계(現象界)에 그 한 사람(一人)이 나와 있다고 하면, 남은 본체(本體)나 분신(分身)은 실재계(實在界)에서, 현상계(現象界)에 있는 인간(人間)에 대해서 수호(守護), 지도령(指導靈)으로서 지켜보며, 지도(指導)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現象界)에 육체(肉體)를 가지고 있는 본체(本體) 혹은분신(分身)의 마음(心)은, 차원(次元)의 다른 에너지(Energe)의 세계(世界), 즉, 실재계(實在界)에서 5명(五人)의 분신(分身), 본체(本體)에 통하고 있고, 그것은 "영자선(靈子線)이라고 하는 빛(光)의 실(絲)"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その靈子線は、皆さんの正しい心の調和、正しい神理、正しい行ない、つまり、この三相(さんそう)の心の中に生活を送っているとすれば、皆さんは靈子線を通して、神の光をストレートで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이 영자선(靈子線)은, 여러분의 올바른 마음(心)의 조화(調和), 올바른 신리(神理), 올바른 행위(行ない:행실), 즉, 이 세가지 모습(三相)의 마음속(心中)에 생활(生活)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자선(靈子線)를 통해서, 신(神)의 빛(光)을 스트레이트(직접적으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それが、不調和を起こして、怒ったり、誹(そし)ったり、罵(のの)ったりして、自分の心というものを掴(つか)めないならば、その人達は即地獄の姿となり、靈子線の光が消えて、動物靈だの、あるいは、他のよからぬものに憑依(ひょうい)されてしまうのであります。
그것이, 부조화(不調和)를 일으켜서, 화를 내거나, 비난하거나(비방하거나, 나쁘게 말하거나, 욕하거나), 욕을 퍼부으며 떠들거나((매도(罵倒)하거나) 하며, 자기 자신(自分)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즉 지옥(地獄)의 모습(姿)이 되어, 영자선(靈子線)의 빛(光)이 사라지고, 동물령(動物靈)이라든가, 혹은, 다른 좋지 않은(못된) 것에 빙의(憑依)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印度時代の現象が現われる
[인도(印度:India) 시대(時代)의 현상(現象)이 나타나다]
己自体が天狗になったり、自己保存、自我我欲に耽(ふけ)っている時は、そのような原因によって、光を閉(と)ざし、守護靈、指導靈や、皆さんの本体に通じているその友達の力を自ら(みずか)閉ざすことになってしまうのであります。
자기 자신(己自体)이 천구(天狗:자랑하고 우쭐해 하는 사람)가 되거나, 자기보존(自己保存), 자아아욕(自我我欲)에 빠져있을 때는, 그러한 원인에 의해서, 빛을 막아 버리고, 수호령(守護靈), 지도령(指導靈)이나, 여러분의 본체(本體)에 통하고 있는 그 친구들의 힘(力)를 스스로 닫게(막아)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神(かみ)信心(しんじん)をしても、こうした心に支配されると、眞實の神の光が通らなくなり、その人はますます狂信者、(きょうしんじゃ)盲信者(もうしんじゃ)になっていきます。
신앙(神信心:영검한 신을 믿음)을 해도, 이러한 마음에 지배(支配)되면, 진실(眞實)한 신(神)의 빛(光)이 통하지 않게 되어, 그 사람은 점점더 광신자(狂信者), 맹신자(盲信者)가 되어 갑니다.
それですから、常に自分の心というものは、広く、高く、無限大の宇宙に通じていることの自覚を持つことが必要です。事實、人間の心は、さきほどもいいましたように、自由であり、そして、無限大の廣さを持っているも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넓고, 높은, 무한대(無限大)의 우주(宇宙)에 통하고 있는 것인 자각(自覺)을 갖는 것이 필요(必要)합니다. 사실(事實), 인간(人間)의 마음(心)은, 조금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자유(自由)이며, 그리고, 무한대(無限大)의 넓이(広さ)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人々を助け、人々の幸せを願い、行なっている人の心は、菩薩(ぼさつ)の心に通じ、逆に、怒りの姿は阿修羅界(あしゅらかい)に通じているのであります。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의 행복(幸せ)를 바라며, 행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心)은, 보살(菩薩)의 마음(心)에 통하며, 분노(怒り)의 모습(姿)은 아수라계(阿修羅界)에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皆さんがこの現象界に肉体を持っている時は、この肉体という原子細胞から構成(こうせい)されていますが、現象界を去る時は、次元のちがったあの世にゆくのですから、光子細胞という、光の細胞によって、皆さん自体の心の調和度によって、光の量によって、それぞれ自分の落ちつく場所へゆくのであります。
여러분이 이 현상계(現象界)에 육체(肉體)를 갖고 있을 때(時)는, 이 육체(肉體)라고 하는 원자세포(原子細胞)로 구성(構成)되어 있습니다만, 현상계(現象界)를 떠날 때(時)는, 차원(次元)의 다른 저 세상(あの世)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광자세포(光子細胞)라고 하는, 빛(光)의 세포(細胞)로, 여러분 자신(自體)의 조화도(調和度)에 따라서, 빛(光)의 량(量)에 따라서, 저마다 자신(自分)의 정착할(자리잡을) 장소(場所)로 가는 것입니다.
それですから、この現象界で、皆さん自体は、その使命に目覺(めざ)めて、一日の生活をもっとも人間らしく、かつて、印度で説いた苦集滅道(くしゅうめつどう)の根底をなす神理、八(はっ)正道(しょうどう)を、日日の生活に實行してゆくならば、その中から己の心というものの安らぎが生れ、宇宙の神・佛との調和がとれ、あの世に歸える時には、光そのものをダイレクト(直接)で神から受けとるために、質量が輕いから、自然と、その落ち着く場所は上段階に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계(現象界)에서, 여러분 자신(自體)은, 그 사명(使命)에 눈뜨고, 하루(一日)의 생활(生活)을 무엇보다도 가장 인간(人間)답게, 일찍이, 인도(印度:India)에서 설법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근저(根底:근본 토대)을 이루는 신리(神理), 팔정도(八正道)를, 매일(日日)의 생활(生活)에 실행(實行)해 가게 되면,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己の心)이라고 하는 것의 평온함(安らぎ: 안정)이 생기고, 우주(宇宙)의 신(神)・불(佛:부처)와 조화(調和)가 이루어져, 저세상(あの世)을 돌아갔을 때(時)에는, 빛(光) 그 자체를 다이렉트(직접)로 신(神)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질량(質量)이 가볍기 때문에, 자연히(自然と:저저절로), 그 정착할 장소(場所)는 상단계(上段階)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それが、嫁(よめ)・姑の間(しゅうと)で、お互いに爭ったり、自分の經濟面しか考えなかったり、人の面倒(めんどう)をみずに、そのように自己保存、自我我欲に徹底した人たちは、その結果は自か(おのず)らそうした世界に落ちてゆくことになるのであります。
그것이, 고부간(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서로 싸우거나(다투거나), 자기의 경제면(經濟面)밖에 생각하지 않았거나, 남을 돌봐주지 않고, 그런 식으로 자기보존(自己保存), 자아아욕(自我我欲)에 철저(徹底)한 사람들은, 그 결과(結果)는 자기 스스로 그러한 세계(世界)로 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己の犯したその行爲や結果は、己自体が裁(さば)き、そして、それぞれの世界を築いていることを知らねばなりません。
자기 자신(己)의 저지른 그 행위(行爲)나 결과(結果)는, 자기 자신(己自體)이 심고, 그리고, 각자(각각)의 세계(世界)를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それですから、當然、光の量というものは、己の調和度によって、その質量がちがいますから、その段階は落ち着く先きが無數にあるともいえるのであります。
그렇기 때문에, 당연(當然), 빛(光)의 량(量)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己)의 조화도(調和度)에 의해서, 그 질량(質量)이 다르기 때문에, 그 단계(段階)는 정착지(定着地)가 무수(無數)히 많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こういうように、皆さん自体の、毎日毎日の生活の、無限大な心の中に、自由な心の中に、皆さんの地獄(じごく)、極樂(ごくらく)の世界は、嚴然として、現在もあるわけであります。
이렇게, 여러분 자신(自體)의, 매일매일(每日每日)의 생활(生活)의, 무한대(無限大)한 마음(心中)에, 자유로운 마음속에(自由な心の中), 여러분의 지옥(地獄), 극락(極樂)의 세계(世界)는, 엄연히(儼然)히, 현재(現在)도 있는 것(까닭)입니다.
人間の心は天台上人も說いたように、一念三千といって、無限の變化、大宇宙にもつなが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인간(人間)의 마음(心)은 천태상인(天台上人: 천태지의[(天台智顗(ちぎ、Zhi-yi)(538-597)] )도 설법한 것처럼,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하며, 무한(無限)한 변화(變化), 우주대(大宇宙)로도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地上における八十年、九十年は本當に一瞬の(しゅん)間、線香(せんこ)花火(はなび)のように短(みじ)かいものであります。その短かい人生にたいして、俺が俺がと威張(いば)ってみたり、いかに頭がよかろうとも、心に安らぎがなければなんにもなりません。自我我欲は、心に安らぎがありません。自分の心の調和を、己自体が神理というものをつかまえた時には、學ばなくとも、かつて、何百年、何千年前において、あるいはあの世において、皆さんが學んできたところのものを思い出すことが出來るのです。
지상(地上)에 있어서의 80년(八十年), 90년(九十年)은 정말(本當)로, 한순간(一瞬間)이며, 선향화화(線香花火: 덧없는 것)처럼 짧은 것입니다. 그 짧은 인생(人生)에 대해서, "내(俺)가 내(俺)가"라 하며 뽐내봐도(거만하게 굴어 봐돠, 으스대 보아도), 아무리 머리가 좋을지라도, 마음(心)에 평온함(安らぎ: 평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자아아욕(自我我欲)은, 마음(心)에 평온함(평안)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自分)의 마음(心)의 조화(調和)를, 자기 자신(己自體)가 신리(神理)라고 하는 것을 붙잡았을 때에는, 배우지 않아도, 일찍이, 몇 백년(何百年), 몇 천년 전(何千年前)에, 혹은 저 세상(あの世)에 있어서, 여러분이 배워 온 것인 바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それは心の調和度によって、その中に、あらゆる神理というものを、皆さんは悟ることが出來るのであります。
그것은 마음(心)의 조화도調和度)에 의해서, 그 속에서, 온갖 신리(神理)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私自身は、この世において殆んど電氣や、物理だのしか勉强しておりません。しかし、自分自体の心の調和が出來るに從って、過去世で學んだその神理を思い出したのであります。イエス・キリストもあのエルサレムに出た時は、やはり同じように、かつて学んだその神理を解(と)き明(あか)し、死して、再び復活して、自分の弟子たちに光を与え、それぞれの過去を思い出させています。印度の釋迦が敎えたその現象が、そのまま現在、現われているわけであります。
저 자신(私自身)은, 이 세상에서 거의 전기(電氣)나, 물리(物理)와 같은 것밖에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 자신(自分自体)의 마음(心)의 조화(調和)가 이루어짐에 따라서, 과거세(過去世:과거 세계)에서 배운 그 신리(神理)를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도 저 예루살렘(Jerusalem)에 나왔을 때(時)는 역시 마찬가지로, 일찍이 배운 그 신리(神理)을 해명(解明)하고, 죽어서, 다시 부활(復活)해서, 자신의 제자(弟子)들에게 빛(光)을 줘서, 각자의 과거(過去)를 생각해 내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인도(印度:India)의 석가(釋迦)가 가르친 그 현상(現象)이, 그대로 현재(現在),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닭)인 것입니다.
信仰というものは神社(じんじゃ)佛閣(ぶっかく)にいつて拝(おが)めばいいとい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每日每日の生活の中で、正しく物を見、正しく思い、正しく仕事をするその中に信仰があるのであります。そしてその正しいという姿は、耳で聞いたことに對して、即座(そくざ)に口に出すのではなく、一度心の中で反省し己に問うて、相手の心、相手の立場を考えてから、その答えを出すようにしたいものです。すると怒りという想念(そうねん)は湧(わ)いてきません。怒(いか)りというものは、常に自分自体を守る、自己保存の結果として、出てくるものであります。
신앙(信仰)이라고 하는 것은 신사(神社)와 불각(佛閣:불당:부처를 모신 대청)에서 늘 합장 배례하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毎日毎日)의 생활(生活) 속에서, 올바르게 사물(物)를 보고, 올바르게 생각(상상)하고, 올바르게 일(仕事)을 하는 중에서 신앙(信仰)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올바르다"고 하는 모습(姿)은, 귀(耳)로 들은 것에 대해서, 그 자리(即座)에서 입밖에 내는(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一度:한번) 마음속으로 반성(反省)하고 자기 자신(己)에게 묻고, 상대방의 마음(心), 상대방의 입장(立場)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 나서, 그 답을 내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노(忿怒)라고 하는 상념(想念)은 솟아나지 않습니다. 분노(忿怒)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自分自体)을 지키는, 자기보존(自己保存)의 결과(結果)로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사[神社] ((한국어 사전))
일본(日本) 황실(皇室)의 조상(祖上)이나 일본인(日本人) 고유(固有)의 신앙(信仰) 대상(對象)인 신
또는 국가(國家)에 공로(功勞)가 큰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사당(祠堂)
肉体を焼(や)けば三合(さんごう)の灰(はい)に
[육체(肉體)를 태우면 3홉(三合)의 재(灰)가 된다]
現代社會を構成しているところの指導者たちが、このような神理を知って、外交政策を進めてゆくならば、爭いというものは起りません。長い歷史一つみても、その時時の權力者が自分の都合のいい歷史を作ってしまうことが多いのであります。
현대사회(現代社會)를 구성(構成)하고 있는 곳의 지도자(指導者)들이, 이와 같은 신리(神理)를 알고, 외교정책(外交政策)을 진행해 가게 되면, 싸움(다툼)이라고 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랜 역사(歷史) 하나를 보더라도, 그때 그때의 권력자(權力者)가 자기(自分)의 형편(都合:사정)이 좋은 역사(歴史)을 만들어 버리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心の世界は、こうしたゆがめられた歷史から離れ、人それぞれが、常に心に問う、反省の生活を送るならば、こうした歷史に左右されるような、ものの考え方は生れてこないし、常に正しく、間違いのない判斷が可能になってくるのであります。
마음(心)의 세계(世界)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歷史)에서 떠나, 사람 저마다가, 항상 마음(心)에 묻는, 반성(反省)의 생활(生活)을 하게 되면, 이러한 역사(歷史)에 좌우(左右)되는 것과 같은, 사물을 보는 사고 방식은 생겨나지 않고, 항상 올바르게, 잘못(실수)가 없는 판단(判斷)이 가능(可能)하게 되는 것입니다.
ということは、每日の生活が調和されていれば、各人につながっている靈子線(れいしせん)自体が常に光の保護(ほご)をうけているため、正しい判斷が出來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그렇다고 하는 의미는, 매일(每日)의 생활(生活)이 조화(調和)되어 있으면, 각자(各人)에게 연결되어 있는 영자선(靈子線) 그 자체(自體)가 항상 빛(光)의 보호(保護)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判斷)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そうした判斷の中に、自分の心は、一層淨化(じょうか)され、人を誹(そし)ることや、怒(いか)りや罵っ(ののし)たりする心はなくなり、神理に近づくことになってくるのです。
그러한 판단(判斷) 속에서, 자신의 마음(心)은, 한층(一層) 정화(淨化)되어, 남을 비방하거나(비난하거나; 나쁘게 말하거나; 욕하거나)하는 것이나, 화를 내거나, 욕을 퍼부으며 떠들거나((매도(罵倒)하거나)) 하는 마음(心)은 없어지고, 신리(神理)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現代の資本主義、共産主義は、人間が万物の靈長た(れいちょう)る本質を忘れ去り、動物本能そのままの、力づくで、力のないものを食い破るという姿をみせております。しかし、そういう考えは一時は伸びても、最後は、心という神理を掴(つか)んだ者に、亡(ほろ)び去るのです。
현대(現代:1969년)의 자본주의(資本主義), 공산주의(共産主義)는, 인간(人間)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본질(本質)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동물본능(動物本能) 그대로의, 완력(腕力)으로, 힘의 없는 것을 물어서 부순다(물어 찢는다)고 하는 모습(姿)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사고)는 한동안(一時)은 증가해도, 최후(最後)는, 마음(心)이라고 하는 신리(神理)를 붙잡은(파악한) 사람에게, 스러져가는 것입니다.
私たちは、そういう一つの神理の中から、人間としての在(あ)り方、人間そのものの自覺を持たねばなりません。
우리들은, 그러한 하나의 신리(神理)의 속에서, 인간(人間)으로서의 본연의 모습(바람직한 상태), 인간(人間) 그 자체의 자각(自覺)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皆さんは、肉体そのものについて考えてみて下さい。
여러분은, 육체(肉體) 그 자체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아 주십시오.
その肉体は、自分が望んで、兩親という環境の中から、次元のちがった世界より、生れ出て來たのです。精子(せいし)と卵子(らんし)が調和し、そうして、十月(とつき)十日(とおか)(一ヵ月二十八日計算)九ヵ月經って、この世に生れる。ところが、空氣にふれると、自分のことを皆んな忘れてしまうのです。
그 육체(肉體)는, 자신이 바래서(소망해서), 양친(兩親)이라고 하는 환경(環境) 속에서, 차원(次元)이 다른 세계(世界)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정자(精子)와 난자(卵子)가 조화(調和)해서, 그렇게 해서, 열달 열흘(十月十日)((1개월을 28일로 계산하여)) 9개월을 거쳐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런데, 공기(空氣)에 닿으면, 자신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それだけに、自分の心が掴(つか)みにくくなってしまう。周圍の環境に支配されてしまう。自分の本性を失ない、ついには、自分の心まで動物靈に支配されるような結果になる。そこで、絶えず反省する、心に問うことを怠ら(おこた)なければ、自分の本性を失うということはないのであります。
그런 만큼, 자신의 마음을 붙잡기 어렵게 되어 버린다.((그런 까닭에,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버린다)). 주위(周圍)의 환경(環境)에 지배(支配)되어 버린다. 자신의 본성(本性:타고난 본래의 성질)을 잃어 버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마음(心)까지 동물령(動物靈)에게 지배(支配)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結果)가 된다. 그래서, 늘(끊임없이) 반성(反省)하는, 마음(心)에 묻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본성(本性)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ところが、大部分の人達はそれが分らず、自己保存に自分をしばり、自我我欲に凝(こ)り固(かた)まるために、自分の本性を覆(おお)いかくしてしまうのであります。
그런데, 대부분(大部分)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보존(自己保存)에 자기자신을 구속하고(묶고), 자아아욕(自我我欲)에 몰두(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本性)을 덮어 가리어(덮어 숨기어) 버리는 것입니다.
不調和な原因は、全て、自己保存にあります。難病と(なんびょう)されている癌(がん)のような病氣の原因も、もとを正せば、自己保存にあります。調和されていれば、決して、このようなことはありません。
부조화(不調和)한 원인(原因)은, 전부, 자기보존(自己保存)에 있습니다. 난병(難病:난치병)이라고 되어 있는 암(癌)과 같은 병(病氣)의 원인(原因)도, 알고 보면, 자기보존(自己保存)에 있습니다. 조화(調和)되어 있으면, 결코, 이와 같은 일은 없습니다.
もともとこの肉体は、地球という環境に適応して創(つく)られ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各人が調和の心を持ち、和気アイアイの毎日を送っていれば、その人の一生は、すこやかに終るように出來ているのです。肉体は、自分の魂、(たましい)意識(いしき)の乘り舟です。意識というエネルギーが乘って、人生を船出するのです。ところが、その乘り舟に人類は左右され、船頭である意識(いしき)(魂)(たましい)を忘れてしま
うのであります。
원래(元來) 이 육체(肉體)는, 지구(地球)라고 하는 환경(環境)에 적응(適應)해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各人)가 조화(調和)의 마음(心)을 가지고,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매일(每日)을 보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일생(一生)은, 건강(健康)하게 끝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체(肉體)는, 자기 자신(自分)의 영혼(魂), 의식(意識)의 타는 배(乘り舟)입니다.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에너지(Energe)가 타서, 인생(人生)을 출범(船出:진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는 배(乘り舟)에 인류(人類)는 좌우(左右)되어, 선장(船頭)인 의식(意識)((영혼(魂))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 인간의 육체를, 타는 배(노리후네(乗り舟))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肉体が自分と思ったら大間違いです。第一自分の肉体が自分の思うようになりますか。肉体が自分なら病氣もしない筈ではありませんか。病氣をしたり、思うようにならないというのは、肉体は單に借り物にすぎない。魂の入れ物、乘り舟にすぎないからなのです。
육체(肉體)가 자기 자신(自分)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큰 실수)입니다. 무엇보다도(第一) 자신의 육체(肉體)가 자기(自分)라고 생각하게 됩니까? 육체(肉體)가 자기(自分)라면 병(病氣)도 걸리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병이 들거나, 뜻(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육체(肉體)는 단지 차용물(借り物)에 불과하다. 영혼(魂)의 그릇(용기:入れ物), 영혼의 타는 배(乘り舟)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肉体はやがて、この現象界においてゆきます。肉体を燒けば、三合(さんごう)の灰(はい)に化してしまいます。あるいは、二酸化(さんか)炭素(たんそ)に殆んど變ってしまいます。燐酸(りんさん)カルシュームというものに變(かわ)って、大自然に分解(ぶんかい)してしまうのです。
육체(肉體)는 이윽고, 이 현상계(現象界)에 두고(놓고) 갑니다. 육체(肉體)를 태우면, 3홉(三合)의 재(灰)로 변해 버립니다. 혹은, 이산화탄소(二酸化炭素:탄산가스)로 대부분 변해 버립니다. 인산칼슘(燐酸calcium: 인산석회(燐酸石灰))라고 하는 것으로 변해서, 대자연(大自然)으로 분해(分解)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산칼슘(燐酸calcium)=인산석회(燐酸石灰)★ ((한자사전))
ⓐ인산(燐酸)의 수소 원자를 칼슘 원자와 치환한 화합물
ところが、肉体を支配していた意識そのものは、次元のちがったあの世に帰えってゆきます。その時の自分の姿は、光子量(こうしりょう)に基(もと)づいた光子細胞という肉体をまとい、今度はあの世で生活するのです。その時、各人がこの現象界で、神仏を信じないでいた者は、ダイレクトで地獄に落ちます。これは、各人が、自分を自分で裁(さば)いていくのです。あの世に別な人がいて、あれこれ、指示(しじ)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各人の光子量が、その位置(いち)を決(き)めるのです。
그런데, 육체(肉體)를 지배(支配)하고 있던 의식(意識) 그 자체는, 차원(次元)의 다른 저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時)의 자기자신(自分)의 모습(姿)은, "광자량(光子量)에 바탕을 둔 광자세포(光子細胞)"라고 하는 육체(肉體)를 걸치고, 이번(今度)에는 저세상에서 생활(生活)하는 것입니다. "그 때(時), 각자(各人)가 현상계(現象界)에서, 신불(神佛)을 믿고 있지 않던 사람(者)은, 다이렉트로(곧바로) 지옥(地獄)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각자(各人)가, 자신(自分)을 자기 스스로(自分)로 심판(審判)해 가는 것입니다. 저 세상(あの世)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이것저것, 지시(指示)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各人)의 광자량(光子量)이, 그 위치(位置)를 결정(決定)하는 것입니다.
転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を続ける生命
[전생윤회(轉生輪廻)를 계속하는 생명(生命)]
皆さんは、現在、この現象界に出ていますが、ここに出るまでには、あの世で、二千年三千年と修行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今度こそ、現象界に出たならば立派にその使命を果たしてきますといってきながら、その自分を忘れ、人の悪口を平気でいうようになってしまう。
여러분은, 현재(現在), 이 현상계(現象界)에 나와 있습니다만, 여기에 나올 때까지에는, 저 세상에서, 2천년(二千年) 3천년(三千年)이나 수행(修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이야말로, 현상계(現象界)에 나오게 되면 훌륭하게 그 사명(使命)을 완수해서 (극락으로) 오겠다"고 하면서, 그 자신을 잊어 버리고, 남의 흉(악담)을 태연히 하게 되어 버린다.
私共の心というものは、約九〇%が潜在(せんざい)意識(いしき)で、表面に出ているものは約一〇%です。ところが、肉体というものを持つと、眼(がん)、耳(にい)、鼻(びい)、舌(ぜつ)、身(しん)、意(い)という抵抗(ていこう)によって、表面に出ているものは、一〇%しか過ぎません。その一〇%でもって、皆さんは、人生航路を、この肉体という船に乗って船出する。そこにあらゆる人間の迷(まよ)いが生じて来るのです。
우리들의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약 90%가 잠재의식(潜在意識)이며, 표면(表面)에 나와 있는 것은 약(約) 10%입니다. 그런데, 육체(肉體)라고 하는 것을 가지면, 눈(眼), 귀(耳), 코(鼻), 혀(舌:입), 몸(身), 의지(意:자기 의지)라고 하는 저항(抵抗)에 의해서, 표면(表面)에 나와 있는 것은, 10%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10%를 가지고, 여러분은, 인생항로(人生航路)를, 이 육체(肉體)라고 하는 배(船)를 타고 출범(船出:진출)한다. 바로 그 때에 온갖 인간(人間)의 수수께끼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それが、心の調和、毎日毎日の生活に対して、仏教で教えた「八正道」を実行しておれば、九〇%の潜在意識が、一〇%の表面意識に調和され、かつて学んだ、いろいろな記憶(きおく)がよみがえり、この世の生活をより豊かに、そして、より一層の心の安らぎを得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그것이, 마음의 조화(調和), 매일매일(每日每日)의 생활(生活)에 대해서, 불교(佛敎)에서 가르친 「팔정도(八正道)」를 실행(實行)하고 있으면, 90%의 잠재의식(潜在意識)이, 10%의 표면의식(表面意識)에 조화(調和)되어, 일찍이 배운, 다양한 기억(記憶)이 되살아나서, 이 세상의 생활(生活)을 보다 풍요롭게, 그리고, 보다 한층(一層) 마음의 평안(평온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現在、私の話しをテープ・レコーダーに取っておられる人もおりますが、私の話したことを家に行って聞くことが出来るように、皆さんの意識の中には、厳然(げんぜん)として、こうしたことが書きこまれているのです。
현재(現在), 제 이야기(話し)를 테이프리코더(tape recorder)에 녹음(錄音)하고 계시는 분도 계십니다만, 제가 이야기한 것을 집(家)에 가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의 의식(意識) 속에는, 엄연(儼然)히, 이러한 것이 기입(記入)되어 있는 것입니다.
宇宙(うちゅう)の神理(しんり)、法則(ほうそく)があればこそ、ラジオ、テレビ、無線機(むせんき)などの物質化が可能になるのです。皆さんの頭の中は、このようなラジオ、テレビ、無線機などの構造と同じように出来ており、いやもっと精密に構造化されています。物質文明は、すべてこのように、宇宙の神理を科学化したもの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ような物質経済に先きを越されて自分の心が後についていくよう
な現代社会を、皆さんは、どう思いますか・・・・・、自分の心を悟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悟りは、一秒一秒が、悟りの連続です。
우주(宇宙)의 신리(神理), 법칙(法則)이 있었기에, 라디오(radio), 텔레비전(television), 무선기(無線機) 등의 물질화(物質化)가 가능(可能)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이와 같은 라디오(radio), 텔레비전(television), 무선기(無線機) 등의 구조(構造)와 마찬가지로 되어 있으며, 좀더 정밀(精密)하게 구조화(構造化)되어 있습니다. 물질문명(物質文明)은, 전부 이처럼, 우주(宇宙)의 신리(神理)를 과학화(科學化)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물질경제(物質經濟)에 선두를 빼앗겨서 자신의 마음(心)이 뒤따라가는 것과 같은 현대사회(現代社會)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자신의 마음(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깨달음(悟り)은, 1초 1초(一秒一秒)가, 깨달음의 연속(連續)입니다.
人間は、どのような環境にあっても、地位にあっても、死という姿を迎(むか)えた時は、皆同じであります。
인간(人間)은, 어떠한 환경(環境)에 있어도, 지위(地位)에 있어서도, 죽음(死)이라고 하는 모습(姿)을 맞이했을 때(時)는, 다 같습니다.
自分は地獄に落ちたくないから修行するの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は、この地球上という環境を調和させると共に、実在界に還(か)えり、それから、更に、他の天体の調和に、永遠の旅を続けるのです。それはあたかも動・植・鉱のエネルギーに対して、それをよりよく生かす酵母(こうぼ)の作用と同じような使命であります。
자기 자신(自分)은 지옥(地獄)에 떨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수행(修行)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상(地球上)이라고 하는 환경(環境)을 조화(調和)시킴과 동시에, 실재계(實在界)로 되돌아가서, 그래서, 다시, 다른 천체(天體)의 조화(調和)를 위해서, 영원(永遠)한 여행(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동물(動物)・식물(植物)・광물(鑛物)의 에너지(Energe)에 대해서, 그것을 보다 좋게 살리는 효모(酵母:누룩)과 똑같은 사명(使命)입니다.
生命というものは、肉体細胞一つ一つに生命があり、しかし、この五体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意識〃(心)というものが、一定の使命を果たして帰える時には、その細胞はこの地上界に化してゆくがごとく、〃意識〃(魂)そのものについても、永遠に、転生輪廻を繰り返えしてゆくことを、よくよく知っ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
생명(生命)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세포(肉體細胞) 하나 하나에 생명(生命)이 있으며, 하지만, 이 오체(五體)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곳의," 〃의식(意識)〃(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이, 일정(一定)한 사명(使命)을 완수해서 돌아갈 때(時)에는, 그 세포(細胞)는 이 지상계(地上界)로 화(化)해 가듯이, "〃의식(意識)〃(영혼(魂)) 그 자체에 대해서도, 영원(永遠)토록, 전생윤회(轉生輪廻)를 되풀이해 가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正しく反省することによって、間違いを二度と繰り返えさないようにしたいものです。
올바르게 반성(反省)하는 것에 의해서, 잘못(실수)를 두번 다시 되폴이 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日本の場合、至たるところに神社仏閣をつくり拝む信仰になっているかと思うと、一方では、一つの霊的現象が自分の悟りというように、滝(たき)に打たれて荒行を(あらぎょう)する。煩悩消滅の(ぼんのうしょうめつ)行こそ己を知るという間違いを犯しています。
일본(日本)의 경우(場合), "가는 곳마다(도처에) 신사불각(神社佛閣)를 만들어 합장 배례하는 신상(信仰)이 되어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한편(一方)으로는, "하나의 영적현상(靈的現象)이 자신의 깨달음"이라고 하듯이, 수행(修行)을 위해서 폭포수(瀑布水)를 맞으며 고행(苦行:荒行)을 한다. "번뇌소멸(煩惱消滅)의 수행(行)이야말로 자기자신(己)를 아는 것이라"라고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約八世紀に弘法大師や伝教大師が中国に行き、その神理を学んで来たが、密教という一つのわくの中に、そのような間違えを持ってきてしまったのです。人間は、自分の肉体をいじめるために地上界に生れてきたのではありません。人間はもっとも人間らしく、毎日の生活の中に、自分というものの反省、そして、心というものの本性を悟りつつ、毎日毎日を調和に生きることが、その使命なのです。それなのに、人間は、自己中心、自己保存に心を配(く)ばってしまうために、争いがおこ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汝の敵を愛せよ、右の頬をうたば、左をも向けよ」と教えている筈です。
약 8세기(約八世紀)에 "코우보우다이시((弘法大師:홍법대사, 쿠카이(空海), 774년 7월 27일~835년 4월 22일,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승려))"나 "덴쿄우다이시((傳教大師:전교대사, 사이쵸우(最澄), 767 ~ 822년,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승려))"가 중국(中國)으로 가서, 그 신리(神理)를 배워서 왔지만, "밀교(密敎)라고 하는 하나의 틀 속에서, 그와 같은 잘못을 갖고 와 버렸던 것"입니다. 인간(人間)은, 자신의 육체(肉體)를 괴롭히기 위해서 지상계(地上界)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人間)은 무엇보다도 가장 인간(人間)답게, 매일(毎日)의 생활(生活) 속에서, 자기자신(自分)이라고 하는 것의 반성(反省), 그리고,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의 본성(本性)을 깨달으면서, 매일매일(毎日毎日)를 조화(調和)로 사는 것이, 그 사명(使命)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人間)은, 자기중심(自己中心), 자기보존(自己保存)에 마음을 배치해 버리기 때문에, 싸움(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빰마저 돌려 대어라 Love your enemies, but whosoever shall smite thee on thy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matthew 5:44 :39)」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입니다.
二千五百四十四年前に、インドにおいては、忍辱(にんにく)耐えしのべと教えています。
2천 5백 4십 4년 전(二千五百四十四年前: (B.C 570年): 1969년 현재)에, 인도(印度:India)에 있어서는, "인욕(忍辱)하여 참고 견뎌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욕(忍辱)★ ((한자사전))
ⓐ어떤 모욕(侮辱)이나 박해(迫害)에도 견디어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함
人間はどのようなことがあろうとも、常に自分自体が調和されていれば、そういうものに惑(まど)わさ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
인간(人間)은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항상 자기자신(自分自體)이 조화(調和)되어 있으면, 그러한 것에 현혹(眩惑)되는 일(그러한 것에 정신을 빼앗겨 하여야 할 바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ある特定の宗教家たちは、信仰が足りないと、罰を当てると教えていますが、地上界で苦しんでいる人間に、神の子にたいして、その親が、どうして、罰(ばち)なぞ当てましょう。罰そのものは、皆さん自体が、毎日の不調和な生活に対して、自ら生み出したものなのです。戒律や荒行に自分の心をしばってはなりません。人間の心は、もっとも自由で、もっとも広大であり、大宇宙そのもの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
"어떤 특정(特定)한 종교가(宗敎家)들은, 신앙(信仰)이 부족하면, 천벌(罰)을 당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지상계(地上界)에서 고생하고 있는 인간(人間)에게, 신(神)의 자녀(子)에 대해서, 그 부모(親)가, 왜, 천벌(罰)과 같은 것을 주겠습니까? 벌(罰) 그 자체는, 여러분 자신(自體)이, 매일(每日)의 부조화(不調和)한 생활(生活)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새로 만들어 낸 것인 것입니다. 계율(戒律)이나 고행(荒行)에 자기(自分)의 마음(心)을 묶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人間)의 마음(心)은, 무엇보다도 가장 자유(自由)이며, 무엇보다도 가장 광대(廣大)하며, 대우주(大宇宙) 그 자체(自體)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この稿は去る昭和四十四年十月、東京・高田馬場観音寺における講演をまとめたものです)(1969년)
(이 원고는 지난 쇼와44년(1969년) 10월, 도쿄(東京)・다카다노바바( 高田馬場) 관음사(觀音寺)에 있어서의 강연(講演)을 통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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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正道―その意味と解釈◀
팔정도 그 의미와 해석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 생전 모습 >
위의 큰 제목은 이 책의 제목이며, 뜻은, 살아가는 도리, 살아갈 길,
당신에게도 과거세상의 있다. 제목을 바꿔서, 천사의 재래라 했다.
[八正道こそ中道の道]
[팔정도야말로 중도의 길]
佛敎の言葉の中に、苦集滅道(くしゅうめつどう)というのがあります。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申しますと、苦とは生老病死を(しょうろうびょうし)指し、集と(しゅう)は、その原因について、その滅する道は、八正道を行ずる以外にない、ということ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불교의 말 중에,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라고 말씀드리면, 고(苦)란 생노병사(生老病死)를 가리키고, 집(集)이란, 그 원인에 관한, 그것을 없애는 길은, 팔정도를 실행하는 이외에 없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集である、その原因とは何にかといえば、日常生活において人を批難したり、ぐちったり、そしったり、あるいは自我我欲におぼれる、人を人とみない我執(がしゅう)の虜と(とりこ)なった者。とにかく、人間として中道の道を失なった人をいいます。
집(集)인, 그 원인이란 무엇인가 하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람을 비난(批難)하거나, 푸념(투덜)하거나, 비방하고 헐뜯거나, 혹은 자아아욕(自我我欲)에 빠진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쨌든, 인간으로서 중도(中道)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地位や名譽が高くなりますと、つい、人を見下(みおろ)したり、俺は偉いのだといった気分になってしまいます。お金があると、大抵のことは自由になりますから、贅澤(ぜいたく)をする、二号、三号さんを圍(がこ)うようにもなります。
지위나 명예가 높아지면, 무심코, 사람을 깔보거나, 나는 위대한 것이라고 하는 기분이 되어 버립니다. 재력이 있으면, 대부분의 것은 자유롭게 되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짓을 한다,두번째 첩,세번째 첩을 거느리게도 됩니다.
その反對に、下積(づ)みの生活が續きますと、皆んな自分に敵對しているようにみえてきて、あいつが惡い、こいつが面白くないといって人を呪(のろ)ったり、自分をいじめたりして、小さな自分をつくりあげてしまいます。
그와 반대로, 남이 밑에서 출세를 못하며 고생만이 계속되면, 모두 자신에게 적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지고, 저놈이 나쁘다, 이놈이 달갑지 않다고 말하며 사람을 저주하거나,자신을 학대하거나 해서, 작은 자신을 만들어 내 버립니다.
このように、金がありすぎても、なくても、地位が高過ぎても、低くすぎても、とにかく、人間は、その生活環境が右によっても、左にかたよっても、それに動かされてしまうようになりがちです。
이와 같이, 재산이 너무 많아도, 없어도, 지위가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어쨌든, 인간은, 그 생활환경이 오른쪽으로치우쳐도, 왼쪽으로 치우쳐도, 그것에 흔들려 버리기 쉽습니다.
そこで、何事も腹八分の喩の(たとえ)ように、中道を步むことが大切なのであります。
그래서, 아무래도 배에 8할 쯤으로 모자란 듯이 먹으면 언제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비유처럼, 중도(中道)를 걷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しかし、ここで間違えては困ることは、中道とは地位が高いからよくない、貧乏だから心が貧し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地位が高いのは、それだけ、その人の努力の結果であり、貧乏といっても、それはその人にたいして、天がある修行を命じている場合もあるのです。ですから、現在の環境が、たとえその兩極端に自分がおかれていたとしても、自分は中道を步いていない、俺はダメだ、というような悲觀の要はサラサラありません。
그렇지만, 여기서 잘못해서는 곤란한 것은, 중도(中道)란 지위가 높기 때문에 좋지 않다,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地位)가 높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의 노력(努力)의 결과이며,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하늘이 어떤 수행을 명령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환경(環境)이, 깨우침의 양극단에 자신이 놓여져 있다라고 해도, 자신은 중도(中道)를 걷고 있지 않아서, 나는 쓸모없어,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비관(悲觀)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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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복사가 안되어서 못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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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を步(あゆ)めということは、人間は、とかく、眼や耳や鼻、あるいは舌や身、意(自己主義)に左右されがちなので、その本旨は、こういうものに、心を動かされるな、ということをいっているのです。
중도(中道)를 걷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어쨌든, 눈이나 귀나 코, 혹은 혀나 몸, 뜻(자기주의)에 좌우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 본래의 취지(本旨)는, 이러한 것에, 마음을 흔들리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話は前に戻りますが、苦の原因は、そのように、增長慢や(ぞうちょうまん)自己卑下(ひげ)、自我我欲、愚痴(ぐち)ったり、そしったりして、自分自身をその中に入れてしまうところにあり、こうした狀態がいつまで續くと自分の意識まで腐(くさ)らしてしまい、それはそのまま地獄に通じてしまうということをいっているのです。
이야기는 앞으로 되돌아옵니다만, 괴로움의 원인은, 이와 같이, 뽐내며 거만함이나 자기비하, 자아아욕, 푸념(투덜)하거나, 비난하고 헐뜯거나 해서, 자기 자신을 그 속에 넣어 버리는 것에 있고,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면 자기 자신의 의식까지도 썩어 버리고, 그것은 그대로 지옥으로 통해 버린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地獄は、自己を見失なった世界です。自分を滅した世界です。なぜかといいますと、人間は、本來、神の子、佛の子であり、その住む世界は光輝いた、調和された天上界であるからです。その神の子佛の子が、暗い、陰慘(いんさん)な、火炎(かえん)地獄(ぢごく)や阿修羅界(あしゅらかい)、餓(が)鬼(き)界(かい)に落ちるということは、その神性、佛性を傷つけ、自己を滅したことになるわけです。地獄界に落ちますと、その苦しみから、なかなか拔けられず、何百年、何千年という長い間、そこにとどまることが多いのです。
지옥(地獄)은, 자기를 잃어버린 세계입니다. 자기 자신을 멸망시킨 세계입니다. 왜 그렇냐고 하면, 인간은, 본래, 신(神)의 자녀, 부처(佛)의 자녀이며, 그 살고 있는 세계는 빛으로 빛나고 있는(光輝), 조화된 천상의 세계(天上界)이기 때문입니다. 그 신(神)의 자녀, 부처(佛)의 자녀가, 어두운, 음산한, 화염지옥(火炎地獄)이나 아수라계(阿修羅界), 아귀계(餓鬼界)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신성(神性), 불성(佛性)을 손상시켜, 자기를 멸망케한 까닭입니다.
지옥계로 떨어지면, 그 괴로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고, 몇 100년, 몇 1,000년이라고 하는 오랫동안, 그곳에 체류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そこで、これではいけない。人間は、人間らしく、神の子、佛の子として、その神性を保っていかなければいけない。そうして、神佛の理想とされているこの世の理想社會、つまり、佛國土、ユートピアの世界をつくりあげていか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わけです。
그래서, 이래서는 바람직스럽지 않다. 인간은, 인간답게, 신(神)의 자녀, 부처(佛)의 자녀로서, 그 신성(神性)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신불(神佛)의 이상(理想)이라고 하시고 있는 이 세상의 이상사회(理想社會), 즉, 불국토(佛國土), 이상향(理想鄕)의 세계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치입니다.
それには、各人が、神の子、佛の子としての自覺、つまり、こうした苦の原因である五官に左右されず、佛敎でいう悟りを得ることが大切であるというのです。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신(神)의 자녀, 부처(佛)의 자녀으로서의 자각(自覺), 즉,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인 오관(五官)에 좌우되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そこで、苦集滅のあとに、道という言葉が出てまいります。つまり、苦界からぬけ出すには、己それ自身を救うには、さきほどの中道の道しかない。中道の道を步むしか、人間は救いがないといっているわけです。
그래서, 고집멸(苦集滅) 후에, 도(道)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괴로운 세계로부터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조금 전의 중도의 길 밖에 없다. 중도의 길을 걷는것 밖에, 인간은 구원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이치입니다.
それがかつてインドで說いた釋迦のいう八正道であります。
그것이 일찍이 인도에서 설명한 석가(釋迦牟尼)가 말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八正道は、人間をして、中道を步ませる規範(きはん)であります。天國につなげるかけ橋です。左にかたよらず、右に曲(まが)がらぬ中性への道、つまり、神人、佛性への道、正覺への道であります。
팔정도(八正道)는, 인간으로서, 중도(中道)를 걷게 하는 규범(規範)입니다. 천국으로 연결된 사다리(가교[假橋]잔교[棧橋]입니다.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오른쪽으로 굽어지지 않은 중성(中性)에의 길, 즉, 신인(神人), 불성(佛性)으로의 길, 정각(正覺)으로의 길입니다.
即ち、一、正しく見ること、一、正しく思うこと、一、正しく語ること、一、正しく仕事をなすこと、一、正しく生活すること、一、正しく道に精進すること、一、正しく念ずること、一、正しく定に入ること、の八つです。この八つの規範の一つが欠けても、中道の道は步めないし、正覺を(しょうがく)得ることも、不可能であると說いています。又、これ以上であってもいけない。たとえば、戒(かい)を守れとか、瞑想(めいそう)のみの生活を送れとか、苦行せよ、といったようなもの。それは、釋迦自身が、いろいろな經驗を通して得た中道への道は、八正道以外にないと悟ったのであり、八正道こそ、神理(しんり)につながり、この世に人間が生存するかぎり、その神理は生き續けていくものであるからであります。
즉, 올바르게 보는 것, 올바르게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것, 올바르게 말하는 것, 올바르게 일하는 것,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 올바른 길에 정진하는 것, 올바르게 염원(念願)하는 것, 올바르게 선정(定)에 들어오는 것, 8가지입니다. 이 여덟 개의 규범 중에 하나가 빠져도, 중도(中道)의 길은 걸을 수 없고, 정각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이것 이상이 있어도 바람직스럽지 않다.예를 들면, 계율(戒)를 지켜라든지, 명상(瞑想)만의 생활을 보내라든지, 고행(苦行)해라, 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 그것은, 석가(釋迦) 자신이, 다양한 경험(經驗)을 통해서 얻은 중도(中道)로의 길은, 팔정도(八正道) 이외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며, 팔정도야말로, 신리(神理=신의 섭리, 신의 이치)로 연결되고, 이 세상에 인간이 생존하는 한, 그 신리는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もしも、釋迦(しゃか)の說いた八正道が、一つでも欠けたり、一つでも、二つでも多くあったとすれば、二千五百有余年にわたる佛敎の歷史は、今日以上に大きな變化が、あるいはその敎えは消滅していたかも知れません。 それでは、その八つの規範、八正道について一つ一つ、解說を試みてみましょう。
만약, 석가가 설명한 팔정도가, 하나라도 빠지거나, 하나라도, 두개라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면, 2,500년 여년에 해당하는 불교(佛敎)의 역사는, 오늘 이상으로 큰 변화(變化)가, 혹은 그 가르침은 소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여덟 개의 규범, 팔정도에 관해서 하나 하나, 해설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一、正見(正しく見ること)
정견(正見 : 올바르게 보는 것)
ものを見る場合に、あなたは、通常どういう立場でこれをみていますか。ただバクゼンと見ますか、それとも、眼の前に映った映像(えいぞう)にたいして、疑問を投げ、そして答えを出しますか。人によっては、自分自身の身近かなもの、關心の高いものには注意を向けます。そうでないものには、見向きもしません。それでよいのです。しかし、その關心の高いもの、身近かなものについて、それではあなたは、これをどのようにみようとしますか。あるいは見てしまいますか。
사물을 보는 경우에, 당신은, 통상 어떠한 입장에서 이것을 보고 있습니까. 단지 막연(漠然)하게 봅니까,그렇지 않으면, 눈 앞에 비친 영상에 대해서, 의문(疑問)을 던지고, 그렇게 해서 해답을 끌어냅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과 관계가 깊은 것, 관심이 높은 것에는 주의(注意)를 기울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심(關心)이 높은 것, 관계가 깊은 것에 대해서, 그러면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보려고 합니까. 혹은 봐 버리고 있습니까?
――例を擧げてみましょう。
――예를 들어 봅시다.
一般的な事柄として、新聞の一面に、三面(社会面)に、しばしば大きくとりあげられる東大をはじめとした学生の騷亂(そうらん)事件について、あなたは、これをどのように見ますか。その無暴(ぼう)なふるまいにたいして、あなたは、身ぶるいしますか、怪しからんと考えますか。それとも、現在の社會制度なり、大學制度に欠陷(けっかん)があるのだから、學生が騷(さわ)ぐのは當り前とみましたか。
일반적인 일로서, 신문의 1면에, 3면(사회면)에, 자주 크게 보도되는 도쿄대학을 시작으로 한 학생의 소란 사건에 대해서,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봅니까. 그 지각없는 행동에 대하여, 무서워서 벌벌 떱니까, 괘씸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사회제도라든지, 대학제도에 결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학생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습니까?
正しく見る、ということは、次の正しく思うことと非常に關連が出てくるのですが、こうした學生の騷亂にたいして、私共は、そのよってきた原因、結果について、まず、己の心に問うて、正しい、自分自身の見解を持つことです。
올바르게 본다, 라고 하는 것은, 다음의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과 매우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만, 이러한 학생의 소란에 대해서, 우리들은, 그렇게 된 원인, 결과에 대해서, 우선, 자기의 마음에 묻고, 올바른,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正しく見る、ということは、單に、視覺(しかく)的に、ものを見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正確にいえば、心の眼でみよ、ということです。
올바르게 본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사물을 본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의 눈으로 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心の眼とは、各人に內在する潜在意識の世界、神性、佛性の世界、守護(しゅご)靈(れい)の世界であります。
마음의 눈(心の眼)이란, 각 사람에게 내재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 신성(神性), 불성(佛性)의 세계, 수호령(守護靈)의 세계입니다.
守護靈の眼は、私共現象界(げんしょうかい)の近視眼(きんしがん)的なものとちがって、宇宙的な立場、世界的な視野(しや)に立って見ていますので、現象界に現われた映像を正確にキャッチしてくれます。學生の騷亂にたいして、社會制度、大學制度以前の原因について敎えてくれます。制度そのものは、單に、原因が結果となって表面に吹きでる媒体(ばいたい)の場合が多いのです。從って緣にふれる以前の原因こそ、正しく見る、ポイント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
수호령(守護靈)의 눈(眼)은, 우리들 현상계의 근시안적인 것과는 다르고, 우주적인 입장, 세계적인 시야(視野)에 서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현상계에 나타난 영상(映像)을 정확하게 포착해 줍니다. 학생의 소란에 대해서, 사회제도, 대학제도 이전의 원인(原因)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제도(制度) 그 자체는,단순히, 원인이 결과(結果)가 되어 표면에 솟아 나오는 매체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인연에 닿기 이전의 원인이야말로, 올바르게 본다, Point(요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ともかく、正しく見る、ということは、心の眼で見よ、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それには、まず、己の心に問うことが順序であり、正しい見解もそこから自(おのず)と生れてくるのであります。
어쨌든, 올바르게 본다, 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心の眼)으로 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마음에 묻는 것이 순서이며, 올바른 견해(見解)도 거기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一、正思(しょうし)(正しく思うこと)
정사(正思) (올바르게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것)
ものを思う、ものを考える場合の一つの前提(ぜんてい)は、ものを見ることからはじまることが多いようです。その意味で、正しく見るの次ぎに正しく思うことが第二番目に出てまいります。
사물을 정서적으로 생각한다, 사물을 지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의 하나의 전재는, 사물을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의미로, 올바르게 보는 것 다음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2번째에 나옵니다.
通常、私共は、ものを思う、ものを考える場合に、大抵は頭を働かすことが多いようです。このため、その判斷は、往往にして、自分の都合のいい、我田(がでん)引水(いんすい)におちいりがちです。
통상, 우리들은, 사물을 정서적으로 생각한다, 사물을 지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대부분은 머리를 쓰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그 판단(判斷)은, 때때로, 자신의 형편에 맞게, 아전인수(我田引水=내 논에만 물대기란 뜻으로,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유리하도록 행동함을 일컬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ところが、正しく見るところで說明しましたように、ここでも心に聞くことが大切なのです。
그런데, 올바르게 보는 것에서 설명한 것 처럼, 여기에서도 마음에 듣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頭は、斷に、機械室にすぎません。機械室にいろいろなことを聞こうとするものだから、その答えは、大抵、自己中心になってしまいます。
머리는, 단순히, 기계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계실(機械室)에 다양한 것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해답(대답)은, 대부분, 자기중심(自己中心)이 되어 버립니다.
私共人間の指令室、つまり、各人の心は、それぞれの目的に應じて、正しい考え方を生み出す中樞機能を(ちゅうすうきのう)持っており、いつ、いかなる場合でもそれ相應の答えを用意しております。このことは、人間の体、精神が、どのような仕組みで組み立てられているかを知れば、一目瞭然で(いちもくりょうぜん)あります。
우리들 인간의 지령실(指令室), 즉, 개인의 마음은, 각자의 목적(目的)에 따라서, 올바른 사고방식을 만들어 내는 중추기관(中樞機能)을 가지고 있고,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그에 상응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몸, 정신(精神)이, 어떠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면, 일목요연(一目瞭然=한 번 보고 대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 뚜렷함)입니다.
しかし、普通は、心に聞く、心に反省するとは具体的に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疑問が湧(わ)いてまいりますので、この点について說明しますと、まず、日中、カンカン照っている太陽を思い出して下さい。太陽は、善人にも、惡人にも差別なく、その光を惜(お)しげもなく與えてくれます。太陽がもしもこの世に存在しないとすれば、地球はまさしく死の世界でありましょう。この意味で太陽は地上の生きとし生きる者の絶對の存在であり、慈悲と愛の存在でもあります。その太陽が、各人の体內にも等しく、內在しております。地球からみた場合、太陽は、東から西に沒するように、常に、自然の法則にそって、しかも、中正を守って、決して、その軌道(きどう)から外(はず)れません。その太陽こそ、各人の心です。心に聞くということは、我が身にある太陽に聞くことであります。自然から外れぬあの太陽を思い出しながら、考える、そして反省するとすれば、その答えは、必ずや自然にそった、正しい、ものとなる筈です。少なくとも、我田引水になったり、ご都(つ)合(ごう)主義(しゅぎ)におちいることはないと思います。自分をいったん切り離し、客觀的に、自分を見直すという立場が生じてまいりましょう。
그렇지만, 보통은, 마음에 묻는다, 마음으로 반성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라고 하는 의문이 솟아 나오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우선, 하루 종일, 쨍쨍 비치고 있는 태양을 상기해 주십시오. 태양은, 선인(善人)에게도, 악인(惡人)에게도 차별(差別) 없이, 그 빛을 아낌없이 제공해 줍니다. 태양이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지구는 틀림없이 죽음의 세계이겠지요. 이 의미로 태양(太陽)은 지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의 절대적(絶對的)인 존재이며, 자비(慈悲)와 사랑(愛)의 존재(存在)이기도 합니다. 그 태양이, 각자의 체내(體內)에도 똑같이, 내재(內在)하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보는 경우, 태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항상, 자연(自然)의 법칙(法則)에 따르고, 게다가, 중정(中正: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옳음; 공정(함))을 지키며, 절대로, 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태양이야말로, 각자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듣는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태양(太陽)에게 듣는다"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그 태양을 상기하면서, 지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반성(反省)한다고 하면, 그 대답은, 틀림없이 자연스럽게(자연이 그렇게 된), 올바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적어도,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되거나, 편의주의(기회주의; 임기응변주의기회주의:ご都合主義)에 빠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입장을 일단 따로 떼어 놓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직시(見直)한다고 하는 입장(立場)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中正を守って, "중용을 지키고"를 "중정(中正: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옳음; 공정(함))을 지키며"라고 수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正しく思う、とは以上のような意味であります。
올바르게 정서적으로 생각한다, 라는 것은 위와 같은 의미입니다.
一、正語(正しく語ること)
정어(正語) (올바르게 말하는 것)
言葉は、日常生活に欠くことの出來ぬ流通機能で(りゅうつうきのう)あります。もしも、この人間世界に、言葉という意思(いし)傳達(でんたつ)機能(きのう)がないとすればこの世は暗黑になっていたでありましょう。幸いにして、人間社會には言葉があり、この言葉によって、人と人との意思(いし)の交流がスムーズに行なわれ、調和が保てます。
말은, 일상생활에 빠뜨릴 수가 없는 유통기능입니다. 만약, 이 인간 세계에, 말(언어)이라고 하는 의 사전달기능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암흑(暗黑)이 되고 있겠지요. 다행스럽게, 인간 사회에는 말이 있고, 이 말에 의해서, 사람과 사람과의 의사 교류가 순조롭게 행해지고, 조화를 유지합니다.
聖書の中にも、太初(はじめ)に言(神の意思)ありき、と記してある通り、言葉は人間の生命でもあり、言葉は神そのものでもあります。
성서(聖書)의 내용에도, 태초에 말씀(신의 의사(意思)) 있고, 라고 적혀 있는 대로, 말은 인간의 생명이라고도 하며, 말은 신(神) 그 자체(自體)이기도 합니다.
そのために、正しく語ることの重要性があらためて認識されます。
그 때문에, 올바르게 말하는 것의 중요성이 세삼스럽게 인식됩니다.
近頃、若い人達の間で、その言葉が乱用され、相手が目上であろうと、先輩であろうと、勝手(かって)
氣儘(きまま)に使われています。上長、先輩(せんぱい)にたいしては敬語(けいご)を使って、相手の心になって、不調和を起さぬよう心掛けることが必要であります。
최근, 젊은 사람들의 사이에서, 그 말이 남용되어, 상대가 손윗 사람일지라도, 선배일지라도, 함부로(제멋대로 방자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연장자, 선배에 대해서는 경어(敬語)를 사용하여, 상대의 마음이 되어, 부조화를 일으키지 않게 마음을 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大事なことは、その言葉も、頭で判斷せずに、自分の心に問うてから相手に正しく語ることであります。
중요한 것은, 그 말도, 머리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묻고나서 상대에게 올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言葉にも生命があるということは、普通、言魂(ことだま)といって、言葉は神佛そのものであり、光のバイブレーションであるからです。心から出た言葉は光そのものになってみえます。ところが、黑い想念(そうねん)で發せられた言葉は、黑い塊り(かたま)となって相手の心を毒します。しかもその毒した塊りは再び自分に還えり、還ってきた時は、雪だるまと同じように、二倍、三倍の大きさになって還えってきます。光の場合も同樣です。從って、賣り言葉に買い言葉で、感情に支配され、年中こうしたヤリ取りをやっていますと、いつしかその人は病にたおれます。これは法則です。
말에도 생명(生命)이 있다고 하는 것은, 보통, 고토다마(말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라고 해서, 말(고도바)이란 신불(神佛) 그 자체이며, 빛의 바이브레이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빛(光) 그 자체가 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상념에서 쏘아진 말은, 어두은 덩어리가 되어 상대의 마음을 해칩니다. 게다가 그 독(毒)이 된 덩어리는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되돌아올 때는, 눈사람과 같이, 2배, 3배의 크기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빛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폭언에 대해 폭언으로 대꾸해서, 감정에 지배당하여, 일년에 절반을 이러한 주고 받음을 하고 있으면, 어느 사이엔가 그 사람은 병(病)으로 쓰러집니다. 이것은 법칙(法則)입니다.
よく 氣をつけねばなりません。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一、正業(正しく仕事をすること)
정업(正業) (올바르게 일 하는 것)
まず第一に、與えられた仕事に責任を持つこと。第二は、他に迷惑(めいわく)をかけないこと。第三に、万物は神のものであり、いやしくもこれを獨占するようなこと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第四は、万人のための正しい行爲いうことが重要でありましょう。
우선 첫째로, 주어진 일에 책임을 가지는 것. 두 번째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세 번째로, 만물은 신(神) 자체이며, 적어도 이것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번째는, 만인(萬人)을 위한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仕事というと、いかにも一つの作業行爲ということが連想されますが、この場合の仕事とはそうした作業を含めた、作業を通した人間行爲の在り方を、ここではいっているのです。
일이라고 하면, 정말로 하나의 작업 행위(作業行爲)라고 하는 것이 연상됩니다만, 이 경우의 일이란 그러한 작업을 포함한, 작업을 통한 인간행위의 본연(本然)의 자세(姿勢)를, 여기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從って、第一と第二は、これは當り前のことでありますが、第三と第四については、說明を要しましょう。
따라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당연(當然)한 일입니다만, 세 번째와 네 번째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まず、万物は神のもの、という意味ですが、これは、盤若心經(はんにゃしんぎょう)の色即是空(しきぞくぜくう)、空即是色(くうそくぜくう)の例がもっとも分りやすいと思います。色とは、現實社會、この現われの世界、現象界を指していいます。空とは、實在の世界、つまり、あの世であります。人によっては、あの世はないと思っておりますが、あの世は、今も昔もかわりなく、實際にあります。むしろ、あの世こそ、本當の世界、本當の社會ですから實在界ともいいます。そこで、色即是空とは、この現象界(げんしょうかい)は、實在界の投映、つまり、現象界という言葉は、象の世界、形の世界、寫し出された世界、映畵のスクリーンという意味ですから、その本元、映畵のフィルムは、あの世にあるのだ、といっているのです。
우선, 만물은 신(神) 자체, 라고 의미입니다만, 이것은, 반야심경(盤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即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의 예를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색(色)이란, 현실사회(現実社会), 이 현상의 세계, 현상계(現象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공(空)이란 실재(實在)의 세계, 즉, 저 세상(저승=내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저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저 세상은, 지금도 옛날도 변함없이, 실재(實際)로 있습니다. 물론, 저 세상이야말로, 진실(眞實)한 세계(世界), 진실(眞實)한 사회(社會)이기 때문에 실재계(實在界)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이 현상계는, 실재계의 투영(投映), 즉, 현상계(現象界)라고 하는 말은, 상(象)의 세계, 형(形)의 세계, 비추어진 세계, 영화의 스크린(screen=映寫幕)이라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 본원(本元:근원; 본바탕), 영화(映畵)의 필름(film)은, 저 세상(저승)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次の空即是色とは、それ故に、この現象界は、眼に見え、体にふれて、いかにも、實際に、ものが實在するかのように感じますが、本當は、あの世から寫し出された世界でありますから、ある年月が立つと消えてなくなってしまうものだといっているのです。かつて榮えたローマの都もギリシャの文明も、今日では、その形骸(けいがい)をとどめるのみであり、現象世界の浮き沈みを物語るよき參考資料といっていいでしょう。
다음의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그런고로(그러므로), 이 현상계(現象界)는 눈에 보이고, 몸에 접촉하고, 정말로, 실제(実際)로 사물이 실재(実在)할까 라는 것처럼 느낍니다만, 사실은, 저 세상으로부터 비추어진 세계(世界)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사라져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번영했던 로마(Roma)의 수도(首都)도 그리스(Graecia)의 문명(文明)도, 오늘날에는, 그 형태를 남길 뿐이고, 현상세계(現象世界)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이야기하는 참고자료라고 해도 좋겠지요.
このように、現象界はまことにはかなく、無情でありますが、現象界が實在界の投映(とうえい)であり、本來、あるように見えていてなにもない、本家本元は、實在界、空の世界、心の世界にあって、それは又、見方をかえれば、心の世界は神佛の世界でありますから、現象界に寫し出された諸々のものは、「神佛のもの」という考え方が成り立つと思います。
이와 같이, 현상계는 참으로 덧없고(無常), 무정(無情)합니다만, 현상계(現象界)가 실재계(實在界)의 투영(投映)이며,본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원조(元祖,大宗家)는, 실재계(實在界), 공(空)의 세계, 마음(心)의 세계에 있고, 그것은 또, 관점을 바꾸면, 마음(心)의 세계는 신불(神佛)의 세계(世界)이기 때문에, 현상계에 비추어진 여러 가지의 사물은, 「신불(神佛) 자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私達の生活は、このように、實在界から一時お預りして、成り立っているわけですから、いやしくも、これらの物を獨占するようなことがあっ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
우리들의 생활은, 이와 같이, 실재계로부터 일시 맡아서, 성립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러한 물건을 독점하려고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第四の万人のための正しい行爲というのは、こうした空即是色の考え方に立てば、その作業行爲も、おのずと慈悲と愛の中から自然發生的に生れ出てくると思います。この世は魂の(たましい)修行の場であり、そのうえ、なにもない世界でありますから、仕事の量がその人の價値を決定するものではなく、仕事を通じて、己の(おのれ)心が、神佛にどう調和されたか、万人のための仕事として爲し得たかどうか、万人のための調和にどう寄與(きよ)したかが、その人にとって、重要な位置づけとなるのであります。
네 번째는 만인(万人)을 위한 올바른 행위(行爲)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그 작업행위도, 저절로 자비와 사랑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영혼(靈魂)의 수행(修行)의 장소(場所)이며,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의 양이 그 사람의 가치(價置)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일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이, 신불(神佛)에게 어떻게 조화되었는가, 만인을 위한 일로서 행했는가 어떤가, 만인을 위한 조화에 어떻게 기여했는가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위치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一、正命(正しく生活すること)
정명(正命) :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
人間は、とかく眼(がん)、耳(にい)、鼻(びい)、舌(ぜつ)、身(しん)、意(い)、つまり五官、六根に左右されます。生命が肉体という衣を(ころも)着てしまいますと、この世での目的が、なんであったか、自分はなんのために生れてきたかを忘れてしまいます。仕方ありません。
인간(人間)은, 대체로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사(意:자기주의), 즉 오관(五官), 육근(六根)에 좌우(左右)됩니다. 생명(生命)이 육체(肉體)라고 하는 옷(衣)을 입어 버리면, 이 세상에서의 목적(目的)이, 무엇이었는지, 자신(自身)은 어떠한 이유로(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를 잊어 버립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しかし、生老病死(しょうろうびょうし)という現實をみせつけられますと、人生の無情、はかなさ、むなしさを感じないわけにはまいりません。そして、そこからあらためて、人生とはなんだ、人間はどこから來て、どこへゆくのか、なぜ病気をするのか、年をとるということは、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疑問が湧(わ)いてくると思います。
그렇지만,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현실(現實)을 똑똑히 볼 수 있으면, 인생人生의 무정(無情), 허무함(무상),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세삼스럽게,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병이 생길까, 나이를 먹을까 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라고 하는 의문이 솟아난다고 생각합니다.
そうして、その目的を知った時、自分一個の生命肉体は、單獨では生きてはいけない、そこには、地球という大地があり、太陽という熱光のエネルギーが万物を育ん(はぐく)でいることを認識します。更に、多くの人人が、それぞれの立場で分業にいそしみ、それらの分業のお蔭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知ります。
그렇게 해서, 그 목적을 알았을 때, 자기 자신 한 개체의 생명 육체는,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다, 거기에는, 지구(地球)라고 하는 대지(大地)가 있고, 태양(太陽)이라고 하는 열과 빛의 에너지가 만물(萬物)을 성장하게 하는 것을 인식(認識)합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立場)에서 분업에 열심히 노력하고, 그러한 분업(分業)의 덕분에 의해, 소생되고 있는 것을 압니다.
五官に左右された五十年、六十年の短かい一生という、かつての觀念(かんねん)、業(ごう)想念(そうねん)のいたずらが、うたかたのように消え伏せて、自己保存、自我我欲の無意味さを悟ると思います。
오관(五官)에 좌우된 50년, 60년의 짧은 일생이라고 하는, 옛날의 관념(觀念), 업상념(業想念)의 장난질(못된 장난, 짖궂은 장난)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자기보존(自己保存), 자아아욕(自我我欲)의 무의미(無意味)함을 깨닫는다고 생각합니다.
正しく生活する、とはこうした立場に立って、報恩感謝の心を持ち、人人との接觸(せっしょく)において、愛と慈悲(じひ)の生活を續けて欲しい、といっておるのです。
올바르게 생활한다, 라고 하는 이러한 입장에 서서, 보은 감사(報恩感謝)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접촉에 있어서, 사랑과 자비의 생활을 계속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一、正進(正しく道に精進すること)
정진(正進) (올바르게 정진하는 것)
これは、努力と實行であります。
이것은, 노력(努力)과 실행(實行)입니다.
いかにうまいことをいっても、實行しなければ意味がありません。パスカルは、人間を稱して、考える葦(あし)といっていましたが、それ以上に大事なことは実行であります。考え、そして努力すること。神佛の心は、正しく考え(思い)正しく實行することを望んでおります。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의미(意味)가 없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가리켜,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중요(重要)한 일은 실행(實行)입니다. 지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노력하는 것. 신불(神佛)의 마음은, 올바르게 생각(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르게 실행(實行)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人間の魂や肉体というものは、この努力と、實行によって、その修行の目的が達せられ、同時に各人の內に眠っている潜在意識が開發されてくるのであります。
인간(人間)의 영혼(魂)이나 육체(肉体)라고 하는 것은, 이 노력(努力)과, 실행(實行)에 의해서, 그 수행(修行)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할 수 있고, 동시에 각자 안에 잠들어 있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개발(開發)되어 오는 것입니다.
ここでいう潜在(せんざい)意識(いしき)とは、心理学上の潜在意識よりも、もっと深く、その人の前世、過去世あるいはあの世での生活の記錄をいいます。従って、各人の努力と實行、つまり、心の調和度によって、千年前、二千年前、一万年前、二万年前の自分の過去世が分り、かつて學んだ樣樣な記憶がよみがえって現實の生活に大いに役立つことになります。
여기에서 말하는 잠재의식(潜在意識)이란, 심리학상의 잠재의식 보다도, 더욱더 깊고, 그 사람의 전생(轉生), 과거세(過去世) 혹은 저 세상에서의 생활(生活)의 기록(記錄)을 말합니다. 따라서, 각자의 노력과 실행, 즉, 마음의 조화도(調和度)에 의해서, 1천년 전, 2천년 전, 1만년 전, 2만년 전의 자신의 과거세를 알고, 옛날에 배운 다양한 기억이 되살아나 현실(現実)의 생활(生活)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しかも、各人の潜在意識は、神佛の心にも通じていますから、かつて學んだそのこと以上に、無限の寶庫に包まれており、この世にあるありとあらゆるものは、あの世にもあるわけでありますから、各人の努力の結果いかんでは、その求めるものに應じて、与えられましょう。やがて、無限大に廣がった心は、慈悲と愛そのものとなり、そうして宇宙(うちゅう)即我(そくわれ)の自覚、神の智慧(ちえ)が得られることになりましょう。
게다가, 각자의 잠재의식은, 신불의 마음에도 통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이 배운 그것 이상으로, 무한(無限)의 보고(寶庫)에 둘러싸여 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은, 저 세상에도 있기 때문에, 각자의 노력(努力)의 결과(結果) 여하에, 그 요구하는 것에 응해서, 주어집니다. 이윽고, 무한대로 넓혀진 마음은, 자비(慈悲)와 사랑 그 자체(自體)가 되어, 그렇게 해서 우주가 곧 자기임(宇宙即我)의 자각(自覺), 신(神)의 지혜(智慧)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このように、努力は向上への大切なステップであり、そうしていかなる諸問題にたいしても、自分に打ち克(か)つ努力をつづけて欲しいものです。
이와 같이, 노력은 향상으로의 중요한 Step(한 걸음)이며, 그렇게 해서 어떠한 여러 문제에 대해도, 스스로 극복(克服)하는 노력(努力)을 계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一、正念(正しく念づること)
정념(正念) (올바르게 염원하는 것)
我が國は法治(ほうじ)國家であります。樣樣な法律をきめて、人人の行爲をしばっています。なぜ人人の行爲をしばらなければならないかといえば、最大多數の最大幸福をその理念におき、その理念に反した者を取締らなければ國の維持、運營がスムーズにゆかないからであります。もっとも、法律の內容そのものは、その國の歷史、風俗、習慣、民族性などによって、いろいろ異なって參りますが、ともかく法律行爲というのは、現實的に、たとえば盜みなら盜みを働いた時でなければこれを罰(ばっ)しません。各人がいろいろ想像する分には、一向に差支えないのであります。
일본은 법치 국가입니다. 다양한 법률을 정하고,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의 행위(行爲)를 규제(規制)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하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그 이념으로 하고, 그 이념에 반한 사람을 단속하지 않으면 나라의 유지(維持), 운영(運營)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법률의 내용 그 자체는, 그 나라의 역사, 풍속, 습관, 민족성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릅니다만, 어쨌든 법률행위(法律行爲)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예를 들어 도둑이라고 해도 도둑질을 했을 때가 아니라면 이것을 벌(罰)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여러 가지 상상(想像)할 때에는, 전혀 지장(支障)이 없는 것입니다.
ところが、ここでいう正念というのは、そうした法律行爲以前の想念、想像が重大視されます。といいますのは、行爲というものには、必ず、その前に想念の働きがあります。箸一つ動かすにも機械室である頭の働きがなければ動きません。よく偶然(ぐうぜん)とか、ハズミとかいって、その責任を回避(かいひ)される場合がありますが、こうした場合にも靈的には憑依現象と(ひょういげんしょう)いう形をとり、その憑依現象も、類は類をもって集まるという法則のワク外には、決していつだつはしないのです。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정념(正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법률행위 이전의 상념(想念), 상상(想像)이 중대시(重大視) 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행위라고 하는 것에는, 틀림없이, 그 전에 상념의 작용이 있습니다. 젓가락 하나를 움직이더라도 기계실인 머리 작용(作用)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충분히 우연이라든가, 탄력이라고 해서, 그 책임을 회피(回避)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영적으로는 빙의현상(憑依現象)이라고 하는 형태를 가지며, 그 빙의현상(憑依現象)도, 유유상종한다고 하는 법칙의 틀 밖으로는, 결코 일탈(逸脫)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神の國、佛の國は、それ故に地上の樣樣な法律の規制以前の各人の想念、意識が問題にされます。
신(神)의 나라, 부처(佛)의 나라는, 그런고로 지상의 다양한 법률의 규제 이전의 각자의 상념(想念), 의식(意識)이 문제가 됩니다.
聖書マタイ傳の一節に「すべて色情(しきじょうを)懷(いだ)きて女を見るものは、旣に心のうち姦淫(かんいん)したるなり」
성서 마태복음의 1절에「모든 색정(色情)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은, 이미 마음 안에 간음(姦淫)한 것이니라.」
というのがありますが、これは人間の想念は、やがて行爲を伴なわずにはおかないし、又一口に想念行爲ともいわれるように、それは又、行爲そのものとみられるからであります。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인간(人間)의 상념人間の(想念)은, 이윽고 행위(行爲)가 따르지 않을 수 없고, 또 한마디로 상념행위(想念行爲)라고도 말해지는 것처럼, 그것은 또, 행위 그 자체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更に、もっと重要なことは、こうした黑い想念はその度合いが深くなりますと、やがてその人の意識にまで食(く)いこみ、その人の今世での天命を損ない、病氣、早死などの諸原因をつくる元をつくります。
더욱, 더 중요(重要)한 것은, 이러한 어두운 상념(黑い想念)은 그 정도가 깊어지면, 이윽고 그 사람의 의식(意識)에까지 잠식해서, 그 사람의 현세(今世)에서의 하늘의 내린 사명(天命=천명)을 망가뜨리고, 질병(病氣), 요절(早死:夭折) 따위의 여러 가지 원인(原因)을 만드는 근원(元)을 만듭니다.
これでは神の國、佛の國は、いよいよ遠のくばかりです。
그래서는 신(神)의 나라, 부처(佛)의 나라는, 점점 멀어져 갈 뿐입니다.
人間は本來、神の子、佛の子であります。最大多數の最大幸福という理念やこの目的を果たすために法律であれこれしばらなくても、その心、その理想像は等しく各人に內在するものであります。しかるにその神性佛性から離れるということは正命でもふれましたように、人間は五官に左右され、自己保存に自分をおいてしまうからであります。
인간은 본래, 신(神)의 자녀, 부처(佛)의 자녀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幸福)이라고 하는 이념이나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법률로 이것저것 규제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 그 이상적인 모습(理想像)은 평등하게 각자에게 내재(內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신성불성(神性佛性)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것은 정명(正命)에서도 접한 것처럼, 인간은 오관에 좌우되어, 자기보존에 자신을 방치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又、そうした想念が湧(わ)いてくるというのは、想念の母体(ぼたい)である意識のどこかに記錄さ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が、しかし、その記錄が緣にふれて想念として浮んできた時には、常に、善念に切り替える練習が必要であります。
또, 그러한 상념(想念)이 용솟음쳐 나온다(솟아나온다)라고 하는 것은, 상념의 모체(母体)인 의식(意識)의 어디엔가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렇지만, 그 기록이 인연(因緣)에 닿아서 상념(想念)으로서 팽창해 왔을 때에는, 항상, 선한 생각(善念)으로 바꾸는 연습(練習)이 필요(必要)합니다.
神の心、佛の心は慈悲と愛であります。この心に、一步でも、二步でも近づくよう心がけて下さい。
신(神)의 마음, 부처(佛)의 마음은 자비(慈悲)와 사랑(愛)입니다. 이 마음에, 한 걸음이라도, 두 걸음이라도 가까워지도록 신경써 주십시오.
なお、念は目的を持っております。思い、考えるとは目的以前の思考を指します。ですから正念は八正道の中でも非常に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ます。
역시, 생각(念)은 목적(目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생각한다, 지적으로 생각한다는, 목적 이전의 사고(思考)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정념(正念)은 팔정도(八正道) 중에서도 매우 중요(重要)한 위치(位置)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一、正定(正しく定に入ること)
정정(正定) ( 올바르게 반성의 명상에 임하는 것)
다른, 글에는, 올바르게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反省は、人間に與えられた特権であり、慈悲であり、救いであります。動物には、反省する能力も機能もありません。人間が万物の靈長たる所以(ゆうえん)も反省する機会があるからです。
반성(反省)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이며, 자비(慈悲)이며, 구원(救援)입니다. 동물(動物)에게는, 반성하는 능력(能力)도 기능(機能)도 없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霊長)인 이유(所以)도 반성할 기회(機會)가 있기 때문입니다.
人をそしったり、妬(ねた)んだり、嫉(そね)んだり、人間の想いは一念三千というように、千變萬化、際限がありません。
사람을 비방(誹謗)하거나 질투(妬妬)하거나, 시기(猜忌)하거나, 인간의 생각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하는 것처럼, 천변만화(千變萬化), 제한(際限)이 없습니다.
しかし、こうした時に、反省の瞑想(めいそう)は、己の魂が磨かれ、神佛の光をうけて魂は淨化されてゆくものです。
그렇지만, 이러한 때에, 반성(反省)의 명상(瞑想)이란, 자기의 영혼(魂)을 연마하고, 신불(神佛)의 빛을 받고 영혼(魂)이 정화(淨化)되어 가는 것입니다.
一日の生活を終えてから、五分でも十分でもいいです。今日一日をふりかえり、反省の瞑想を續けて下さい。そして、どこがいけなかったか、どうしてそうなったか、人をそしった原因はなんであったか。その原因を追ってみて下さい。その結果、自分をかばう想いがあった。自分を滿足させるためであった、と氣がつけば、その人は以前よりも一步も二步も前に進んだことになります。即ち、神佛の光をうけたことになります。
하루의 생활을 마치고 나서, 5분이라도 10분이라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의 명상(暝想)을 계속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남을 비방(誹謗)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原因)을 추적해 보십시오. 그 결과, 자신을 두둔하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을 만족(滿足)시키기 위해서였다, 라고 알아차리면, 그 사람은 이전보다도 한 걸음이나, 두 걸음도 앞으로 진행한 것이 됩니다. 즉, 신불(神佛)의 빛을 받은 것이 됩니다.
そうして、こうした反省のくりかえしによって、あなたは、正法という階段を知らぬ間に上(の)ぼってい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氣がつくと思います。
그렇게 해서, 이러한 반성의 반복(反復)에 의해서, 당신은,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계단(階段)을 부지불식간에 올아가 있던 것을, 나중에는 알아 차리리(깨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八正道は行ずること]
[팔정도는 실행(實行)하는 것]
以上が釋迦の敎えによる八正道の意味であります。
이상(以上)이 석가(釋迦牟尼)의 가르침에 의한 팔정도(八正道)의 의미(意味)입니다.
私達が現在ここに在るということは、肉体的先祖と兩親のお蔭であり、從って、兩親に孝養をつくすことは当然であります。この世の修行とあの世の修行を比(くら)べますと、この世の修行の方が、ズッと樂なのです。あの世は波動の細かい世界であります。思ったこと、考えたことはスグ樣ハネ返えって參ります。このため、次元が低い場合ですと、なかなか反省ができにくく、苦界から脫(ぬ)け出すことがむずかしいのであります。ところが、この世は波動が荒いですから、思ったこと、考えたことに對する結果に、ある一定の時間が與えられています。
우리들이 현재 여기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 선조와 부모님 덕분이며, 따라서, 부모님에게 효도하여 봉양을 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의 수행(修行)과 저 세상의 수행을 비교하면, 이 세상의 수행하는 편이, 훨씬 편안한 것(쉬운 것:ズッと樂なの)입니다. 저 세상은 파동(波動)이 세밀한 세계입니다. 정서적으로 생각한한 것, 지적으로 생각한 것은 곧바로 되돌아옵니다. 이 때문에, 차원(次原)이 낮은 경우라면, 좀처럼 반성을 하기 어렵고, 괴로움의 세계(苦界)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파동(波動)이 거칠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생각한 것, 지적으로 생각한 것에 대한 결과(結果)를, 어느 일정한 시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從って、この間に、結果が出ない前に、これはいけないと反省すれば、そのことにたいする訂正が可能になってくるのです。もっとも一面、その出される結果が遅いですから、人によってはイライラすることもありましょうが、波動が荒いだけに修行はしやすいともいえるわけであります。この世の十年は、あの世の五十年、八十年に匹敵(ひってき)します。それほど、この世の修行は樂であり、しかも、この世の修行の結果が、再びあの世に戾った時の自分の位置を決定しますから、兩親にたいする感謝、孝養は當然であると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따라서, 이 동안에, 결과(結果)가 나오기 전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반성(反省)을 하면, 이 일에 대한 정정(訂正)이 가능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느 면(一面)에서는, 그 드러나는 결과가 늦어지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짜증을 내는 일도 있습니다만, 파동(波動)이 거친 만큼 수행(修行)은 하기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10년은, 저 세상의 50년, 80년에 필적(匹敵)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수행은 편안하고(쉽고:樂であり), 게다가, 이 세상의 수행의 결과가, 다시 저 세상으로 되돌아갔을 때 자신의 위치(位置)를 결정하기 때문에, 부모(父母)님에 대한 감사(感謝), 효도하여 봉양함은 당연(當然)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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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人の魂(意識・心)は、このように兩親から與えられた肉体という舟に乘り、人生航路に船出しますが、魂そのものは、前世、過去世、あるいはあの世での生活があり、これを、魂の先天的因果といいます。
각자의 영혼(의식・마음)은, 이와 같이 부모(兩親)님으로부터 주어진 육체라고 하는 배를 타고, 인생항로에 출항합니다만, 영혼 그 자체는, 전생, 과거세, 혹은 저 세상에서의 생활이 있고, 이것을, 영혼(魂)의 선천적(先天的) 인과(因果)라고 말합니다.
肉体という舟に乘った魂は、當初一〇%の意識しか目覺めていませんから、この世の目的が判然としません。そのためにこれまでの大多數の人人は、五官に左右され、自我我欲におぼれてしまう場合が多いのであります。
육체라고 하는 배를 탄 영혼(魂)은, 당초 10%의 의식 밖에 눈을 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목적을 분명(判然)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관(五官)에 좌우(左右)되어, 자아 아욕(自我我欲)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八正道は、こうした各人の一〇%の意識にたいして、殘りの九〇%の潜在意識、つまり、各人の前世、過去世(かこせ)、あの世の生活の記錄を思い出させ、人間としての目的をめざめさせます。それは、釋迦の長い苦行の結果得たものであり、八正道を日日行ずることによって、悟りへの道が開けると敎えているのであります。その悟りの段階は、各人の先天的因果によることになりますが、しかし、正覺への道は、これしかないのであります。それは祈りでも、お經を(きょう)あげることでもありません。祈りとは感謝の心であり、感謝の心が湧いてくれば、次ぎにくるものは形の上に現わすことであります。行ずることです。お經は行ずることを說いています。八正道は行ずることです。
팔정도(八正道)는, 이러한 각자의 10%의 의식에 대해서도, 나머지의 90%의 잠재의식(潜在意識), 즉, 각자의 전생, 과거세, 저 세상의 생활의 기록(記錄)을 생각해 내서, 인간으로서의 목적(目的)을 일깨웁니다(=목적에 눈 뜨게 합니다). 그것은, 석가(釋迦)의 오랜 고행(苦行)의 결과(結果)로 얻은 것이며, 팔정도(八正道)를 날마다 실행(實行)하는 것에 의해, 깨달음에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단계는, 각자의 선천적 인과(因果)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렇지만, 정각(正覺)으로의 길은, 팔정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도, 경문(經)을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祈禱)란 감사의 마음이며, 감사의 마음이 용솟음쳐 나오면, 다음에 오는 것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행(實行)하는 것입니다. 경문(=불경)은 행(行)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팔정도는 행(行)하는 것입니다.
聖書ヤコブの書にも「なんぢ信仰あり、われ行爲あり、汝の行爲なき信仰を我に示せ、我わが行爲によりて信仰を汝に(なんじ)示さん」と。
성서 야고보서에도「너는 신앙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너의 행위가 없는 신앙을 내게 보이라, 내가 행위에 의해서 신앙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야고보서 2장 18~19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イエス樣も、いくら信仰があっても、祈っても、行爲がなければなんにもならないといっています。
예수님(Jesus)도, 아무리 신앙(信仰)이 있어도, 기도(祈禱)해도, 행위(行爲)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かくて、八正道を行ずることによって、己の心が神佛の心に調和され、調和された心は、それがそのままこの世の天國、佛國土を完成させるものであるといっているわけであります。
그리하여, 팔정도를 실행하는 것에 의해서, 자기의 마음이 신불(神佛)의 마음에 조화되어, 조화(調和)된 마음은, 그것이 그대로 이 세상(世上)의 천국(天國), 불국토(佛國土)를 완성(完成)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生命の轉生リンネは自然の法則であり、そのリンネを繰り返えすことによって、正角への道があると釋迦の說いた八正道は語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page 32~50
생명(生命)의 전생윤회(轉生輪廻)는 자연(自然)의 법칙(法則)이며, 그 윤회(輪廻)를 반복(反復)는 것에 의해서, 정각(正覺)으로의 길이 있다 라고 석가(釋迦)의 팔정도(八正道)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page 32~50
人間が神の子、佛の子であるという說明は、これまで、いろいろな人が說いてきました。しかし、その內容は哲學であり、學問であったり、先人の觀念をそのままうけつぐといったものであったりして、實(み)のないものがほとんどでありました。
그래서 신불의 정에 대해서 우선 설명하면, 그것은, 신불 그 자체, 에너지 그 자체, 자비와 사랑 그 자체, 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불의 정을 내장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만들고, 영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신불의 정, 에너지 그 자체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그 자신을 성립시키고 있는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의식의 중심점입니다.
人間以外の動物、植物、鑛物の場合は、地上世界の調和のための媒体として、生かされています。つまり、エネルギーの補給をうけている。ところが人間は自ら生きている生命体であります。生きている理由、生かされているものとの相違は、一切の事象を認知する能力、大宇宙と己との一体觀、これです。動物その他については、その能力を求めても、求め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인간 이외의 동물, 식물, 광물의 경우는, 지상세계의 조화를 위한 매체로서, 생존되고 있습니다. 즉, 에너지의 보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살아있는 이유, 생존되고 있는 것과의 상위는, 일체의 사상을 인지하는 능력, 대우주와 자기와의 일체관, 이것입니다. 동물 그 외에 대해서는, 그 기능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五官、六根に左右されますと、その人はやがて、病氣や怪我(けが)、その他さまざまな障害(しょうがい)に見舞われます。なぜかといいますと、人間は本來、神の子、佛の子であり、慈悲と愛、調和を目的として、この世に生をうけたのでありますから、これに反する樣な想念行爲は、當然それに應じた反作用を伴なうことになるからです。春夏秋冬の自然の法則は、人間の精神生活にも嚴然として、存在しています。善なる行爲は善を生み、惡なる行爲は惡を生みます。
오관, 육근에 좌우되게 되면, 그 사람은 이윽고, 질병이나 재난(사고), 그 밖의 여러 가지의 장해를 당하게 됩니다. 왜냐고 하면, 인간은 본래, 신의 자녀, 부처의 자녀이며, 자비와 사랑, 조화를 목적으로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반하는 것과 같은 상념행위는, 당연히 그것에 응한 반작용을 동반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춘하추동의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정신생활에도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위는 선을 낳고, 악한 행위는 악을 낳습니다.
▶釋迦、イエス・キリストの正法とは◀
석가, 예수·그리스도(Jesus Christ)의 정법이란
●ウソのつけない自分の心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
「おめェー、信心とか信仰はどういうものだと思う?」
「神樣に手を合わせることじゃないか・・・・・・」
「자네, 신심이라든가 신앙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신령님(하느님)에게 합장하는 것이 아닐까・・・・・・」
「神社、佛閣などにいってか?」
「――まあ、そうだな」
「신사, 불각 등에 가서?」
「――뭐, 그렇지」
「じゃ、神社佛閣へいって、なんのために手を合わせるのだ」
「そりゃ、家內安全、商賣繁盛を賴むのさ――」
「그럼, 신사 불각으로 가서, 무엇을 위해서 합장 하는가」
「그건, 집안의 안전, 장사 번성을 부탁하는 것이지――」
「賴んでご利益あるか?。俺の知人がこの正月に成田山にいって、その歸えり道、自動車にはねられ、死んだよ」
「そりゃ信心が足りないからだ。信心が厚ければそんなことはねェさ」
「부탁해서 이익일까? 내가 아는 사람이 이번 정월에 나리타산에 가서, 그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에 받혀서, 죽었어」
「그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믿음이 두터우면 그런 일은 없지」
「ところがその人は、常日頃、非常に信仰心の厚い人なんだ。月に一度は必ずお参りにいく。布施もする。人柄だって惡くない。その人が、アッという間に死んだ。これをみて俺は、いったい、この世の中に、神樣とか佛樣はあるんだろうかと思ったね。日本には随分と、いろいろな敎團や敎えがあるらしいが、サッパリよくならねェじゃないか。惡くなる一方だ。第一、神樣や佛樣が多すぎる。佛敎一つとっても何百何千だろう。その何百何千が、我こそはとやっている。おかしいと思わない?。――俺は思うんだが、信心とか、信仰というものは、そんなものじゃねェ。神樣、佛樣に手を合わせることじゃねェと思うんだ」
「――じゃあ、どうすりゃいいんだ」
「그런데 그 사람은, 평소, 상당히 신앙심의 두터운 사람이야. 한달에 한 번은 반드시 참배하러 가고 말야. 보시도 하거든. 인품도 나쁘지 않아. 그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 죽은 거야. 이것을 보고 나는, 도대체, 이 세상에, 하느님(신령님)이라든지 부처님은 있을까라고 생각했어. 일본에는 상당히, 여러 가지 교단이나 가르침이 있는 것 같지만, 전혀 좋아지지 않지 않은가. 나빠질 뿐이다. 첫째, 신령님이나 부처님들이 너무 많아. 불교 하나만해도 몇 백 몇 천인가? 그 몇 백 몇 천이, 나야말로 진짜다라고 하고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생각했지만, 신심이라든지,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신령님), 부처님에게 합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俺にもよく分らねェが、神樣、佛樣が賴よりにならねェとすれば、賴りになるのは自分しかいねェってことになるなあ――」
「・・・・・・・・・・・・」
「나도 잘 알았네, 신령님(하느님), 부처님에 의지해봤다(믿어봤자) 소용없다고 한다면, 의지할 것(믿을 것을)은 내 자신밖에 없는 게 아니지 않나――」
「・・・・・・・・・・・・」
「人にはウソは言えても、自分にはウソはつけねェもの。自分にウソがつけねェってことは、自分の中にも、神樣、佛樣があるってことじゃねェのかなあ――。だから、手を合わせるとすれば、ウソのつけない自分に、手を合わせるより仕方がねェと思うが、おめェ、どう思う」
「・・・・・・・・・・・・」
「남에게는 거짓말은 말할 수 있어도, 내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은,내 안에도, 신령님(하느님), 부처님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 그러니까, 합장을 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게, 합장을 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
この會話は、ある寒い朝の、都電の中での風景であります。二人とも中年の出稼ぎ勞働者らしく、言葉はぞんざいですが、話しの內容は、筋が通っています。近頃、珍らしいと思って紹介しました。
이 대화는, 어느 추운 아침의, 도시전철 안에서의 풍경입니다. 두 사람 모두 중년의 외국인 노동자답게, 말은 투박합니다만, 이야기의 내용은, 일리가 있습니다. 최근,드물다고 생각해서 소개했습니다.
この會話にもある通り、家內安全、商賣繁盛のご私益信仰は、今や世上を蔽っています。科學万能といわれながらも、これと倂行して神信心が流行するのも、人間は一寸先が闇(やみ)であり、同時に、自己保存の念がますます强よくなっているからです。信仰の目的が自己本位、自分さえよければという考えに根ざしているからです。
이 대화에도 있는대로, 집안의 안전, 장사 번성을 위한 한 개인인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신앙(ご私益信仰)은, 지금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과학만능이라고 하면서도, 이것과 병행해서 신앙(神信心:영검한 신을 믿음)이 유행하는 것도, 인간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이고, 동시에, 자기보존의 생각이 더욱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기 본위, 자신만 좋으면 좋다라고 하는 생각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神信心して交通事故に會うのも、こうした考え方、利益追及、自己本位が原因になっている場合が多いようです。人間は、信仰するしないに拘らず、各人の運命そのものは、自分がつくり出していることを知らねばなりません。運命とは、命を(いのち)運ぶことであり、命とは、己自(おのれ)身でありますから、己自身が黑い想念に支配された場合は、黑い想念に運命をまかす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す。成田山にいって死に見舞われるのも、その人の信仰そのものに、どこか間違いがあり、黑い想念は、やがて、動物靈の支配下に自分を置いてしまったと考えられます。人間は、肉眼の範圍にしか物を見ることが出来ませんから、動物靈というものが、どういうものか分りません。ところが、動物靈は、嚴として存在しています。動物は、もともと自己本位ですから、こういうものが人間に憑(つ)くと、その人は、やがて、動物本能に左右され、人間としての自覚が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自分に危害を与える者には、徹底した憎惡(ぞうお)を持ち、敵對意識が常に自分を支配する。ところが、この世は、自分一人で成り立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し、人と人とが和合し、助け合うように出来ていますから、調和を亂す想念は、やがて、その運命にも影響を(えいきょう)與え、惡い想いは惡い結果を招くことになるわけです。
신앙(神信心:영검한 신을 믿음)하며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도, 이러한 사고방식, 이익추구(利益追及), 자기 본위가 원인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운명 그 자체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운명이란, 목숨을 옮기는 것이며, 목숨이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어두운 상념에 지배되었을 경우는, 어두운 상념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나리타산(成田山)에 가서 죽음으로 몰리는 것도, 그 사람의 신앙 그 자체에, 어딘가 잘못되어 있고, 어두운 상념은, 이윽고, 동물령(動物靈)의 지배하에 자신을 방치해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안의 범위 밖에 사물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동물령(動物靈)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물영(動物靈)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원래 자기 본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인간에게 빙의하면, 그 사람은, 이윽고, 동물본능에 좌우되어, 인간으로서의 자각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철저한 증오를 가져, 적대 의식이 항상 자신을 지배한다. 그런데, 이 세상은, 자기 혼자로 구성되어 것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화합하고, 서로 돕게 되어 있기 때문에, 조화를 어지럽히는 상념은, 이윽고, 그 운명에도 영향을 주어,나쁜 생각은 나쁜 결과를 불러오게 되는 까닭입니다.
――類は類をもって集まる。
これは神埋です。法則です。終って、神社佛閣にいって、各人が利益追及のみを願ったとする
と、その想念は、やがてその神社、佛閣を包み、動物靈の住家(すみか)となり、そこにきた信者が、もし
も自己本位で手を合わせれば、そこにいる動物靈を呼びこむことになるのです。
――끼리끼리 모인다(유유상종[類類相從])
이것은 신리(神埋)입니다. 법칙(法則)입니다. 따라서, 신사 불각(神社佛閣)에 가서, 각자가 이익추구(利益追及)만을 바랬다고 한다면, 그 상념(想念)은, 이윽고 그 신사(神社), 불각(佛閣)을 포함해서, 동물령(動物靈)의 집(住家:살고 있는 집, 거처)이 되어, 그곳에 온 신자(信者)가, 만약 자기본위(自己本位)로 합장을 하면, 그곳에 있는 동물령(動物靈)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信心は厚いが、年がら年中病氣が絶えない。商賣がうまくゆかない。
お參りにいって交通事故に會った、というのは、大抵はこうした動物靈信仰に身をおく場合が多いようであります。
신심(믿음)은 두텁지만, 일년내내 질병이 끊어지지 않는다.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
참배하려 가서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했다, 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은 이러한 동물영(動物靈) 신앙(信仰)에 몸을 맡기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佛敎もキリスト敎も心を說く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마음을 설명한다]
「人にはウソは言えても、自分にはウソはつけねェ」
とする、考え方は、眞實そのままであり、人間の姿を、ありのままにみつめた正しい信心であ
ると思います。
「남에게는 거짓말은 할 수 있어도,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 진실 그대로이며,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人間、神の子、佛の子といわれる理由も、又、万物の靈長といわれる所以(ゆえん)も、ここにあります。
인간, 신의 자녀, 부처의 자녀라고 말해지는 이유도, 또,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해지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人間には、心があり、心は神佛に通じています。なればこそ、自分の心にはウソが言えないのです。ですから、信心とは己の心を信ずることです。ウソの言えない己の心を信じ、その心の命ずるままに、日日の生活を送るようにすれば、間違いはな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信仰とは、ウソの言えない己の心に問う、聞くの生活であると思います。こういうことが、これまでおろそかになっていました。神社佛閣にいって、手を合わせることが信心であり信仰であるとしたり、あるいは、ある集團に所屬することが信仰とい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佛と人間を切り離した考え方に、大きな間違いがあったと思います。人間神の子、佛の子であり、ウソのつけない心があるとすれば、その心を、しっかりとつかむことが必要ではありませんか。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고, 마음은 신불에게 통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마음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심(믿음)이란 자기의 마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기의 마음을 믿고, 그 마음의 명하는 대로, 일상의 생활을 보낸다면, 잘못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이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기의 마음에 묻고, 듣는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이, 지금까지 소홀히 되고 있었습니다. 신사 불각에 가서, 합장하는 것이 신심이며 신앙이라고 하거나, 혹은, 어느 집단에 소속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불과 인간을 떼어 놓은 사고 방식에, 큰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 부처의 자녀이며,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고 하면, 그 마음을, 단단히 움켜쥐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釋迦の敎え、イエスの愛は、こうした正しい信心、信仰を、求めています。智と意で組み立てられた佛敎や愛の在り方について、その誤ちを訂正する時期に來ていると思います。 それはどういうことかといいますと、釋迦の慈悲、イエスの愛は、今日では、すっかり哲學化され、お經は(きょう)あげるもの、信仰祈るものと變ったために、神理(しんり)の光が、影をひそめてしまったからであります。
석가의 가르침, 예수의 사랑은, 이러한 올바른 신심,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혜(인간의 지혜)와 의지(意:자기의사[自己意思)로 짜맞추어진 불교나 사랑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 그 잘못을 정정할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석가의 자비, 예수의 사랑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철학화 되어, 경문을 외우는 것, 신앙은 기도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신리의 빛이, 그림자를 감추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佛敎もキリスト敎も、その根本は、心の敎えであり、人間は心であり、心こそ、信心、信仰の對象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するところにあります。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그 근본은, 마음의 가르침이며, 인간은 마음이며, 마음이야말로, 신심(믿음), 신앙의 대상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人間は、智情意(ちじょうい)が揃(そろ)って、はじめて、円通(えんつう)無碍(むげ)な人柄となり、神佛の光を、体全体にうけることになりましょう。智とは知慧。情は心。意とは、意思、己であります。この三つの中心が、情、心です。情は心の表れであり、それがあまり表面的になりますと感情になり、感情は、己を失う結果になりますが、情が心となり、神佛の光を大きくうけるようになりますと、智は智慧となり、意は、大我となるのです。それ故、情は、智と意の間に入って、兩者を支えています。もしも、情がなく、智だけの人間になりますと、自分を見失うばかりか、人と人との交流が阻害(そがい)されます。又、意の人間は自我が露骨(ろこつ)となり、自ら(みずか)、その首を締(し)める結果となりましょう。それですから、情、心がいかに大事であるか、心を整えることこそ、信心、信仰の對象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います。
인간은, 지정의(智情意)가 갖추어지고, 비로소, 원통무애한 인품이 되어, 신불의 빛을, 몸 전체에 받게 되지요. 지(智)란 지혜(知慧). 정(情)은 마음. 의(意)란, 의사(意思), 자기입니다. 이 3가지의 중심이, 정(情), 마음(心)입니다. 정(情)은 마음의 표현이며, 그것이 너무 표면적으로 되어버리면 감정이 되어, 감정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만, 정(情)이 마음이 되어, 신불의 빛을 크게 받게 되면, 지(智)는 지혜(智慧)가 되어, 의(意)는, 대아(大我=)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情:마음)은, 지(智:인간의 지혜)와 의(意;의사(意思), 자기(自己))의 사이에 들어가서, 양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情:마음)이 없고, 지(智:인간의 지혜)뿐인 인간이 되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잃을 뿐더러,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가 가로막혀 버립니다. 또, 의(意;의사(意思), 자기(自己))의 인간은 자아가 노골적으로 되어, 스스로, 그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되어 버리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情), 마음(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야말로, 신심(믿음),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대아[大我] ((사전적 의미))
아집(我執)을 벗어난 자유 자재의 경지,우주의 유일·절대적인 본체 혹은 우주 본체로서의 유일 절대의 정신
そこでいったい釋迦の正法とはどういうものかといいますと、正法とは心です。心そのもの、人間それ自身、宇宙全体でもあります。正法そのものについては後程述べますが、その正法そのものは、かつてインドで說いた釋迦の敎えが、そのまま、現代に再現されたといっていいのです。
그래서 도대체 석가의 정법이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정법(正法)이란 마음입니다. 마음 그 자체, 인간 그 자신, 우주 전체라고도 합니다. 정법 그 자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술하겠습니다만, 그 정법 자체는, 일찍이 인도에서 설명한 석가의 가르침이, 그대로, 현대에 재현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といいますのは、万古不滅の神理は、そして、その光は、己の心を開かせ、これまで考えてきた、小さく、みじめな人間感から解放す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ります。そうして、そうした解放感から、一步も二步も先きに自分を進めることが出來たとすれば、智情意の三体は、自然と整ってくるのであります。
그렇다고 하는 것은, 만고불멸(萬古不滅)의 신리(神理)는, 그리고, 그 빛은, 자기의 마음을 열게 해서,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작은,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낌으로부터 해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해방감으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자신을 전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지정의(智情意)의 3개의 몸(三體,삼체)는, 자연스럽게 갖추어져 오는 것입니다.
現在、私達には、靈能者が數十人おります。 この人達は、正法の神理に觸れ、心を開いた方方であります。かつて、イエス樣がその弟子達に靈能を開かせ、過去を思い出させたと同じようなことが、現實に、私達の身の回わりで起こっています。靈能というと、いかにも、特殊な人間、特別な修行を連想させますが、人間誰しも、そのような能力を持っており、各人の心は、本来、すでに神佛に通じているのですから、當然といえば當然なことです。しかし、神理の光、正法の光を頂かなければ、その能力は開けません。
현재, 저희들에게는, 영능자가 수십명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법의 신리에 접해서, 마음을 연 분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영능을 열게 하고, 과거를 생각해 낸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 현실로, 저희들의 일상의 신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능(靈能)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특수한 인간(特殊な人間), 특별한 수행(特別な修行)을 연상(連想)시킵니다만, 인간은 누구든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마음은, 본래, 전부 신불에 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當然하다고 하면 당연當然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리의 빛(神理の光), 정법의 빛(正法の光)을 받지 않으면, 그 능력은 열리지 않습니다.
それは神佛の命による光であり、正法神理にふれなければ、各人の心の外壁(がいへき)を蔽(おお)っている想念帶(樣樣な想念、カルマ、あるいは原罪ともいいます)をうち崩すことが出来ないからです。これは理屈ではないのです。心の眼がひらかれますと、おのずと、その信憑性(しんぴょうせい)に一驚さ(いっきょう)れます。神佛の光はもともと各人に內在します。しかし、その内在する光を表に(おもて)現わすには、それを現わすだけの心の準備が必要であります。
그것은 신불의 명령에 의한 빛이며, 정법에 접하지 않으면, 각자의 마음의 외벽을 덮고 있는 상념대(想念帶:여러 가지 상념(想念), 가르마(업), 혹은 원죄(原罪)라고도 합니다)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럴 듯한 논리(이치)가 아닌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면, 저절로, 그 신빙성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신불의 빛은 원래 각자에게 내재합니다. 하지만, 그 내재하는 빛을 표면에 나타내려면, 그것을 나타낼 만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求めよ、さらば與(与)えられん」
これはイエス楊の言葉です。この意味は、內なる己の心の準備と、それを迎えて下さる神佛の慈悲、愛、より大きな心―光の相叶(あいかな)う姿をいったものです。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라(마태복음)」
이것은 예수님의 말입니다. 이 의미는, 내재된 자기의 마음의 준비와, 그것을 맞이해 주시는 신불의 자비, 사랑, 보다 큰 마음―빛의 화합하는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靈能といっても、各人の心の在り方が非常に重要であり、私利私欲、自己本位になりますと、動物靈や魔王が、その人を支配してしまいますから、靈能は、天才にも、狂人にも通じることになります。自ら開いた靈能ではなく、神理の光で得られたものだけに、靈能者は、普通の人以上に、自戒、自重しなければならないわけであります。
영능(靈能)이라고 해도, 각자(各人)의 마음(心)의 본연의 모습이 매우 중요(重要)하고, 사리사욕(私利私欲), 자기 본위(自己本位)가 되면, 동물영(動物靈)이나 마왕(魔王)이, 그 사람을 지배(支配)해 버리기 때문에, 영능(靈能)은, 천재(天才)에게도, 미치광이(狂人)에게도 통하는 것이 됩니다. 스스로 연 영능(靈能)이 아니고, 신리(神理)의 빛(光)으로 얻을 수 있던 것인 만큼, 영능자(靈能者:초감각적인 능력을 갖춘 자), 보통 사람 이상以上으로, 자계(自戒=잘못 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경계(警戒)함), 자중(自重=말이나 행동, 몸가짐 따위를 신중하게 함)해야 하는 것입니다
●ミロク、聖観(かん)世音(ぜおん)菩薩(ぼさつ)も現存(げんぞん)
[미륵(彌勒), 성관세음보살(聖観世音菩薩)도 현존]
現在、數十人にのほる靈能者は、それぞれ過去の言葉を話します。過去とは、自分がかつて、インドや中國で生活していた言葉です。人間は轉生リンネを續けているのですから、千年前、二千年前の言葉が出るのは當り前です。しかし、人間が轉生リンネを續けているという証明は、佛敎では說かれても、事實をもって示すことは、私達をして、はじめてなし得たものと確信しています。現在、洋の東西を問わず、いろいろな宗敎敎團が存在しますが、正法を地でゆく宗敎が他にあるでしょうか。まず、二つとないでしょう。この意味では、空前絶後といっていいようです。私自身も二千五百四十四年前のインドで說いたその正法を、當時の言葉で話し、日本語で譯して、人人に聽かせます。また私が、何時どこでうぶ聲をあげ、出家して、修行し、そうして、弟子達が何人いて、何にを敎えてきたかを、こと細かく分っています。佛敎辭典をひもとくまでもありません。辭典は、智と意で書き改められていますから、問題は非常に多いかと思います。
현재, 수십명의 영능자는, 저마다 과거의 말을 이야기 합니다. 과거란, 자신이 일찍이,인도나 중국에서 생활했던 말입니다. 인간은 전생 윤회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1천년 전, 2천년 전의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전생 윤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 증명은, 불교에서는 말해지고 있어도, 사실을 가지고 제시하는 것은, 저희들로서, 비로소 이룰수 있었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종교 교단이 존재합니다만, 정법을 실제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종교가 다른 곳에 있을까요. 우선, 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의미에서는, 전무후무(空前絶後)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 자신(私自身)도 2,544년 전(二千五百四十四年前)의 인도(印度:India)에서 설명한 그 정법(正法)을, 당시(當時)의 말言(葉)로 이야기하고, 일본어(日本語)로 번역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또 제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출가하고, 수행하고, 그렇게 해서, 제자들이 몇 명이고, 무엇을 가르쳐 왔는지를,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불교 사전을 펴 보아도 없습니다. 사전은, 지(智)와 의(意)로 고쳐서 쓰여 있기 때문에, 문제는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更に佛敎がチベットから中國に渡り、日本にくるまで。そして、佛敎の歷史がいつどこでどう變っていったかを、私自身も驚くほどの內容で、その記憶がよみがえってきております。
더욱 불교가 티벳으로 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으로 올 때 까지. 그리고, 불교의 역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저 자신도 놀랄 정도의 내용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나오고 있습니다.
私が學んだことといえば電氣工學ぐらいです。現在は、電氣事業を經營しています。佛敎は未知の世界だったわけです。その私が、現世で學ばなかった佛敎に自然にひきづられ、こうした科學的學問は、佛敎の裏打ち、証明の材料にすぎなかったことは皮肉です。神理は、どこから求めても、一つであるということが分ったわけです。そうして、過去、現在、未來の三世にわたって、神からその見通す力を与えられました。
제가 배운 것이라고 하면 전기공학(電氣工學) 정도입니다. 현재(現在)는, 전기사업(電氣事業)을 경영(經營)하고 있습니다. 불교(佛敎)는 미지(未知)의 세계(世界)였던 것입니다. 그런 제가, 현세(現世)에서 배우지 않았던 불교(佛敎)에 자연스럽게 거슬러올라가서, 이러한 과학적 학문(科學的學問)은, 불교(佛敎)의 안을 튼튼히 하고, 증명(証明)의 재료(材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비아냥(皮肉)입니다. 신리(神理)는, 어디에서 구하더라도, 하나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3세(三世)를 걸쳐, 신(神)으로부터 그 훤히 들여다 보는(꿰뚫어보는,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는) 힘을 제공 받았습니다.
ともかく、こうして、私達には、私をはじめ、數十人の靈能者が輩出し(はいしゅつ)、過去世の言葉を語
ります。その言葉は、中國、インド、チベット、イスラエル、エジプト、インカ、イギリス、フランス、ドイツ、フィンランド、スペイン、など、多種多樣です。靈能者の大部分は、これらの言葉を現世で習ったこともなければ學んだこともないのです。それなのに、自在に出てきます。私自身は各國語が分り、從って、各靈能者と自由に話し合います。
어쨌든, 이렇게 해서, 우리들에게는, 저를 비롯해서, 수십명의 영능자를 배출하고, 과거세의 말을 이야기 합니다. 그 말은, 중국中國, 인도(印度), 티벳(Tibet:인도 북쪽의 중국 자치구), 이스라엘(Israel), 이집트(Egypt), 잉카(Inca:남미 페루 고원 지대에 있었던 잉카족의 제국), 영국(Inglez:포루트칼어), 프랑스(France), 독일((네덜란드어: Duitch; 독일어: Deutschland), 핀란드(Finland:북유럽의 공화국), 스페인(Spain:유럽 서남부의 나라) 등, 다양하고 다양(多種多樣)합니다. 영능자의 대부분은, 이러한 말을 현세에서 익힌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자재(自在)로 나옵니다. 저 자신은 각 나라에 말을 알고, 따라서, 각 영능자와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합니다.
また、靈能者は、當時の言葉を、自分で翻譯(ほんやく)し人々に分るように、自分の過去を語ります。それは、まことに楽しいものです。ある者は中國の天台山で經文をあげたことがあり、法華經(ほけきょう)が中國語で出て參いります。本人自身は、經文を習ったことがないのに、一つの間違いもなく出てくるのです。
또, 영능자는, 당시의 말을, 스스로 번역해서 사람들에게 알 수 있도록, 자신의 과거를 말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즐거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천대산(天台山)에서 경문을 외운 적이 있고, 법화경을 중국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인 자신은, 경문을 배웠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실수도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また、ある者は、相手の心が分り、現在、その人が何にを考え、何にを思っているか、病気があるとすれば、その病名まで指摘します。
또, 어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현재, 그 사람이 무엇을 지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정서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질병이 있다고 하면, 그 병명까지 지적합니다.
靈視(れいし)も自由です。靈視のきく人は十人近くにのぼります。うまいことをいっても、背後に動物靈が憑(つ)いている時は、そのことがウソそのものであることが分ってしまいます。ウソは、言えません。普通の人にはウソは言えても、靈能者には、ウソはつけません。
영시(마음의 눈으로 봄)도 마음대로입니다. 영시가 가능한 사람은 열명 정도에 달합니다. 그럴싸한 것을 말해도, 배후에 동물령(動物霊)이 빙의(憑依)하고 있을 때는, 그 일이 거짓말 그 자체인 것을 알아 버립니다. 거짓말은, 할 수 없습니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거짓말은 말할 수 있어도, 영능자에게는, 거짓말은 할 수 없습니다.
私達には、こうした靈能者、つまり、釋迦に關係のあった人、イエスの關連の人、モーゼに緣の深い人達が集まってきています。プルーナー・トラヤプトラ、スブテイ、マンチュリア、ナンダ、マーハーカシヤパー、アナリツ、パウロ、オタオ、など何れも肉体を持って、正法の流布に參畵しています。
저희들은, 이러한 영능자, 즉, 석가(釋迦)에게 관계가 있었던 사람, 예수(Jesus)와 관련된 사람, 모세(Moses)에게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푸루나・트라라푸트라(富楼那弥多羅尼子, 부루나미다라니자, puurNamaitraayaniiputra、पूर्णमैत्रायनीपुत्र),
수부티(須菩提, 수보리, 산스크리트어로 수부티, Subhuuti、सुभूति), 만츄리야(문수, 文殊菩薩, मञ्जुश्री ,maJjuzrii, 文殊師利), 난다(難陀, Nanda, Ānanda, 阿難陀、आनन्द), 마하카샤파(摩訶迦葉, 마하가섭, 마하캇샤파, Mahaakassapa、महाकस्सप, 산스크리트어로 마하카샤파, Mahakasyapa), 아나리츠(阿那律, 아나율,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니룻다, aniruddha、अनिरुद्ध), 사도 바울(그리스어: Παῦλος 파오로스, Paulos, 영어: Paul, 유대어: Sau, 사울), 오타오, 등 죄다 육체를 가지고, 정법의 유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ミロク、聖觀世音の兩菩薩も肉体を持って、正法を傳えています。
미륵(彌勒), 성관세음(聖觀世音)의 두 사람의 보살(兩菩薩)도 육체(肉體)를 가지고, 정법(正法)을 전(傳)하고 있습니다.
兩菩薩の說法は、人人の心に、しみ通るように、やさしく、誰にも分るように話します。末法の世に、人人に光を當てるべく、その使命を担って、この世に生をうけたのですが、それは、宇宙の神理と、その正法を誤りなく伝えられるべく、重大な任務を帶びてきているのです。
두 사람의 보살의 설법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도록, 쉽고, 누구라도 알기 쉽게 이야기합니다. 말법의 세상에,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기 위해, 그 사명을 맡아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만, 그것은, 우주의 신리와, 그 정법을 실수 없이 전하기 위해, 중대한 임무를 띠고 오고 있는 것입니다.
兩菩薩は、何れも女性です。佛像や佛畵のうえでは、女性だか、男性だか、判然としないため、人間が悟りを開くと、中性になるという說明をどこかで聞きましたが、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男性、女性の區別は、この世も、あの世も、かわりません。
두 사람의 보살은, 죄다 여성입니다. 불상이나 불화에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깨달음을 열면, 중성(中性)이 된다고 하는 설명을 어디선가 들었습니다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남성, 여성의 구별은,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변함이 없습니다.
兩菩薩は、本f來、その上の段階の如来であります。上々段階、光の大指導靈であります。ところが、あの世の如來界には、この二人の女性をのぞいては、すべてが男性であり、このため、二人とも、遠慮され、如來界から菩薩界に降りているのです。そのため、菩薩といわれていますが、 本當は、如來であります。――サテ、いったい、こうしたことが、これまで想像され得たでしそうか。誰しも想像できなかったと思います。だが、現實に、そうしたことがおきているのですから、どうすることも出來ません。ただい得ることは轉生リンネの法則を知るならば、疑いなく首(しゅ)肯(こう)できるも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두 사람의 보살은, 그 위의 단계의 여래(如來=부처)입니다. 최상의 단계, 빛의 대지도령(大指導靈)입니다. 그런데, 저 세상의 여래계에는, 이 두 명의 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며,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사양하여, 여래계에서 보살계로 내려 왔습니다. 그 때문에, 보살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여래입니다. 。――허허, 도대체, 이러한 일을, 지금까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누구든지 상상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전생 윤회의 법칙을 알게 되면, 의심하지 않고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光の天使は神仏の使者
[빛의 천사는 신불의 사자 ]
このようにして、人間の生命は轉生リンネを續けており、その事實を、釋迦の正法、つまり、宇宙の神理を理解すること、行ずることによって、証明されてきているのです。過去の言葉を語る――。この事實は、他の宗敎にはみられぬ現象であろうと思います。そればかりか、神理にふれることにより、いくたの奇蹟が相次いで起こっています。病気恢復、事業の好轉、不和だった家庭內が明るくなったなど、その數は枚擧にいとまがありません。
이렇게 해서, 인간의 생명은 전생 윤회를 계속하고 있고, 그러한 사실은, 석가의 정법, 즉,우주의 신리를 이해하는 것, 실행하는 것에 의해서, 증명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언어를 말한다――. 이 사실은, 다른 종교에는 볼 수 없는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뿐만 아니고, 신리에 접하는 것에 의해, 많은 기적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질병의 회복, 사업의 호전, 불화했던 가정이 밝아졌다는 등, 그 수는 매우 많아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습니다.
本來、こうした現象利益は、神理に適(かな)えば、一つの隨伴現象(ずいはんげんしょう)として、具体化されるものです。
본래, 이러한 현상 이익은, 신리를 충족시키면, 하나의 수반현상(어떤 일과 더불어 생기는 현상)으로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なぜかといいますと、釋迦の正法神理は、正しい法、正しい法則にそっているからです。人の一念は岩をも通すで、その一念が正しく使われれば、その一念力は、正しく、その人に還えってきます。もしも、正しくない一念力を燃せば同樣にその人に還えり、その人の心身、環境を惡くすることになります。正しいか、正しくないかは、ウソのつけない自分の心に問うてみることです。自分の心は中正であり、公平ですから、いい惡いは、すぐ答えが出る筈のものです。
왜냐고 하면, 석가의 정법 신리는, 올바른 법, 올바른 법칙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념(一念)은 바위도 뚫고, 그 일념이 올바르게 사용되면, 그 일념력(一念力)은, 올바른, 그 사람에게 되돌아옵니다. 만약, 올바르지 않은 일념력(一念力)을 붙태우면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게 되돌아와, 그 사람의 몸과 마음(心身), 환경을 나빠지게 됩니다.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물어 보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은 중용(中庸)이며, 공평하기 때문에, 좋고 나쁨(선악)은, 곧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動物靈信仰でも、奇蹟はつきもの、といわれます。たしかにそうです。ところが、動物靈は、前にも述べたように、動物は所詮は動物であり、神理は說けないのです。ヘビの獰猛(どうもう)さ、キツネのづるさを想像してみて下さい。ヘビやキツネに、慈悲とか愛が分りますか。まことしやかに人間をだましますが、元元、本能のままに生かされているものですから、こうしたものが、人間に憑くと、一時は、利益を與えても、ある時間が經つと、その本性を現わし、人間を食いものにしてしまいます。熱心な信者ほど病氣をしたり、家の中がうまくゆかなかったりするのも、そのためです。
동물령(動物靈) 신앙(信仰)에서도, 기적은 으레 따르기 마련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 동물령은, 전에도 말한 것처럼, 동물은 결국 동물이며, 신리는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뱀의 영맹함(獰猛=모질고 사나움), 여우의 속임수를 상상해 보세요. 뱀이나 여우에게, 자비나 사랑을 알 수 있습니까? 아주 그럴싸하게(천연덕스러움) 인간을 속입니다만, 원래, 본능(本能)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인간에게 빙의(憑依)하면, 한 때는, 이익을 주어도, 어느 시간이 경과하면, 그 본성을 나타내고, 인간을 미끼(이용물)로 삼아 버립니다. 열심인 신자일수록 병이 들거나, 집안이 잘 되지 않거나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一般的にいって、敎團の敎祖、熱心な信者の狀態をよ觀察することです。動物靈が憑(つ)いている場合は、顔色が悪い、病氣が絶えない、人を批難する、人をおどかす、自己本位、エリート意識が强よい、比較の觀念にとらわれる、我が强よい、感情的、欲望的、愛がない、計算高い、無理を言う、などです。また、敎團によっては動物靈以外に、阿修羅(あしゅら)が憑(つ)く場合もあります。この時は、戰鬪的、排他(はいた)的、一本調子、他をかえりみない等です。
일반적으로 말해서, 교단의 교조, 열심인 신자 상태를 잘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동물령이 빙의하고 있는 경우 는, 안색이 나쁘다,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을 비난한다, 사람을 위협한다, 자기 본위, 엘리트 의식이 강하다, 비교하는 관념에 사로잡힌다, 자존심이 강하다, 감정적, 욕망적, 사랑이 없다, 타산적이다, 무리한 말을 한다 등입니다. 또, 교단에 따라서는 동물령(動物靈) 이외의, 아수라(阿修羅)가 빙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는, 전투적, (문장·회화·노래·행동 등이) 변화가 없고 단조로움(기복(起伏)이 없음), 배타적, 남을 돌보지 않는 등입니다.
何れも、いうことはふるっています。けれども、日日のその人達の行動、言葉を觀察すれば、おのずとハッキリ認識されてまいります。
어느 사람이나 모두, 말하는 것은 분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상의 그 사람들의 행동, 말을 관찰하면, 저절로 분명하게 인식되어 옵니다.
また、靈能者といわれ、いろいろなものを當てたり、予言をしますが、こういうものも動物靈が背後に憑(つ)いている場台が多いのです。動物靈は、現象界に、非常に興味をもっていますから、神理がアイマイだったり、あるいは全然說けず、八卦(はっけ)に集中している場合は、すべて、動物靈とみて差支えありません。何何の神、何々の命(みこと)というようなことを喋るようならば、これは間違いなく動物靈であります。神佛そのものは、人間の体に、乘り移ること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神佛は、法そのものであり、慈悲と愛だからです。如來、菩薩といわれる方方は、そうした神佛の法を說くために、この地上に神の使者として生をうけたのであり、光の天使ではあっても、神佛ではありません。この辺のことが、これまで混同されていたようです。
또, 영능자라고 불려지고, 다양한 것을 맞추거나, 예언을 합니다만, 이러한 것도 동물령(動物靈) 이 배후에 빙의(憑依)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동물령(動物靈)은, 현상계에, 매우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리가 애매모호했거나, 혹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팔괘에 집중하고 있는 경우는, 모두 , 동물령(動物靈)이라고 봐도 지장이 없습니다. 무슨 무슨 신, 무슨 무슨 명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동물령(動物靈)입니다. 신불 그 자체는, 인간의 몸에, 신들리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불은, 법 그 자체이며,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래, 보살이라고 말해지는 분들은, 그러한 신불의 법을 말하기 위해서, 이 지상에 신의 사자로서 태어난 것이며, 빛의 천사일지라도, 신불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지금까지 혼동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こうした動物靈、阿修羅(あしゅら)でも、奇蹟や病氣治しをやるといわれますが、これと、神理に適った生活の隨伴現象として起こってくる奇蹟とは、おのずとその內容を異にしており、第一、その永續性、心身の安らぎという点で、まったく、異質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
이러한 동물령, 아수라라도, 기적이나 병 치료를 행한다고 합니다만, 이것과, 신리에 적합한 생활의 수반현상으로서 일어나오는 기적이란, 저절로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고, 맨 먼저, 그 영속성, 마음과 몸(心身)의 평온함이라고 하는 점에서, 완전히,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循環の(じゅんかん)法則も宇宙の神理(しんり)
[순환(循環)의 법칙(法則)도 우주(宇宙)의 신리(神理)]
それではいったい、釋迦の正法神理とはどういうものか、どういう內容を伴なったものかを說明いたしましよう。
그러면 도대체, 석가의 정법 신리란 어떠한 것인가, 어떠한 내용을 동반한 것인가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正法とは、讀んで字の如く、正しい法、法則、自然の攝理(せつり)、かわりない宇宙の循環を(じゅんかん)いうのであります。かわりない宇宙の循環とは、太陽の周りを自轉公轉する地球そのもののかわりない運動。そして、その運動の過程において發生する春夏秋冬の循環。生命にも春と秋があるように、生と死の絶え間ない循環、これです。
정법이란, 읽고 쓰는 것처럼, 올바른 법, 법칙, 자연의 섭리, 변하지 않는 우주의 순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우주의 순환이란, 태양 주위를 자전 공전하는 지구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운동. 그리고, 그 운동의 과정에 있어서 발생하는 춘하추동의 순환. 생명에도 봄과 가을이 있는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이것입니다.
こうしたかわりない循環が續けられるということは、その循環を、循環たらしめているところの意思、エネルギー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意思、意識、エネルギーこそ、大宇宙生命本体であります。
이렇게 변하지 않는 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순환을, 순환시키고 있는 곳의 의사(意思), 에너지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 의사(意思), 의식(意識), 에너지야말로, 대우주 생명 본체입니다.
これこそが神佛の實体であります。そうして、その意識、エネルギーは、法則そのものであると同時に、慈悲と愛に滿ち滿ちたものであります。もしも、この世に、太陽がないとすれば、私共は生きてゆけません。太陽の熱光のお蔭で生きてゆかれるのです。万物を育む太陽そのものは、法則そのままに、何万年、何千万年と熱光を放射しています。しかも、その太陽が、法則の通りに熱光を地上に與えてくれているから、万物は生きてゆかれます。ですから、法則は、そのまま、慈悲と愛でもあるわけです。
이것이야말로 신불의 실체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의식, 에너지는, 법칙 그 자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하고 충만한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태양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태양의 열과 빛(熱光)의 덕분에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키우는 태양 그 자체는, 몇 만년, 몇 천 만년이나 열과 빛을 방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태양이, 법칙 그대로 열과 빛을 지상에게 주고 있기 때문에, 만물은 살아 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칙은, 그대로, 자비와 사랑이라고도 하는 까닭입니다.
人間を称して、小宇宙といいます。なぜ、小宇宙かといえば、人間そのものは大宇宙とつながっており、大宇宙の縮図(しゅくず)であるからです。
인간을 가리켜, 소우주라고 합니다. 왜, 소우주인가 하면, 인간 그 자체는 대우주와 연결되어 있고, 대우주의 축도이기 때문입니다.
まず人体についてみますと、人体は、約六〇兆からの細胞からなりたっています。そうして、心臟、肝臟(かんぞう)などの諸器官は、それぞれ特有な細胞集團によって形成されています。特有な細胞とは心臟が肝臟になったり、肝臟が心臟になることは出來ないためです。地球は地球であり、火星は火星としての特質を持って、太陽系に依存しているのと同じです。そうして、各諸器官が、よく調和統一されることによって、人間それ自身の生活を可能にし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各器官一つでも欠けたり、痛めば、人間の五体は、全体的に、その機能を弱めることになります。
우선 인체에 관해서 보게 되면, 인체는, 약 60조의 세포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심장, 간장 등의 여러 기관은, 저마다 특유한 세포집단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특유한 세포란 심장이 간장이 되거나, 간장(肝腸)이 심장(心臟)이 되는 일은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지구이며, 화성은 화성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태양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각 여러 기관이, 잘 조화되고 통일되는 것에 의해서 의해서, 인간 자신의 생활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기관 하나라도 빠지거나, 아프면, 인간의 5체는, 전체적으로, 그 기능을 약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しかも、人間の五体は、血液の万遍(まんべん)ない循環によって保たれています。心臟から出された新らしい血液は、体のすみずみまでゆきわたり、各諸器官を動かし、再び、心臟に還えってきます。そうして、又、心臟から排出(はいしゅつ)されてゆきます。
게다가, 인간의 5체는, 혈액의 전체에 고루 미침 내지 순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심장에서 나온 새로운 혈액은, 몸의 구석구석까지 돌고, 각 여러 기관을 움직이고,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심장에서 배출되어 나갑니다.
太陽の周圍(しゅうい)を、九つの惑星(わくせい)が、円を畵きながら、まわっています。循環の法則にしたがって、まわっています。そうしてその法則を續けることによって、各惑星そのものは、惑星としての役目を果たし、太陽系を形成しています。
태양의 주위를, 아홉 개의 혹성이, 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습니다. 순환의 법칙에 따라서,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칙을 계속하는 것에 의해서, 각 혹성 그 자체는, 혹성으로서의 역활을 완수하고, 태양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太陽系を人体にみたてると、人体と太陽系は、實に、よく似ていることが分ります。
태양계를 인체로 보고 판단하면, 인체와 태양계는, 실로, 아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地球や火星の円運動が可能なのも、太陽があるからであり、太陽の熱光がなければ、こうした円運動、生命の躍動(やくどう)は停止してしまうでありましょう。
지구나 화성의 원운동이 가능한 것도, 태양이 있기 때문이며, 태양의 열과 빛이 없으면, 이러한 원운동, 생명의 약동은 정지해 버릴 것입니다.
人体各部の諸器官が、その機能を果たせるのも、かわりない心臟の働き、血液の循環に(じゅんかん)よってであり、心臟が停止すれぱ、各諸器官も、その機能を停めてしまいます。
인체 각부의 여러 기관이, 그 기능을 완수할 수 있는 것도, 변하지 않는 심장의 활동, 혈액의 순환에 의하고 있고, 심장이 정지한다면, 각 여러 기관도, 그 기능을 멈추어 버립니다.
しかし、人間の心そのものは、宇宙の意識につながっていますから太陽系よりも大きく、大宇宙に広がっていること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 그 자체는, 우주의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태양계보다도 크고, 대우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何れにしましても、太陽系にしろ、人体にしろ、その機能を調和させているものは何にかといえば、大宇宙を支配しているところの意識、エネルギーであり、人間にあっては、生命エネルギーであります。その生命エネルギーは、大宇宙意識に通じており、神の子、佛の子といわれる所以も、ここからくるのであります。そうして、その生命エネルギー、意識の中心が、心であり、ウソのつけない、心であります。その心が、人体各部を調和統一させ、五体を維持させています。血液の流れも、胃腸の働きも、すべて、人間の意識、生命エネルギーである心が指令していること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ですから、人間が感情的になったり、怒ったり、悲觀したりしますと、体のどこかに、支障をきたします。胃腸などはとりわけ敏感ですから、その働きを弱めることになります。病は気からとは、この辺の事情、人間の心の在り方を傳えたものです。
결국, 태양계이든, 인체이든, 그 기능을 조화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면, 대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곳의 의식, 에너지이며, 인간에 있어서는, 생명 에너지(bio-energy)입니다. 그 생명 에너지(bio-energy)는, 대우주 의식으로 통하고 있어 신의 자녀, 부처의 자녀이라고 불리우는 근거도, 여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생명 에너지(bio-energy), 의식의 중심이, 마음이며,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인체 각부를 조화하고 통일시켜, 5체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혈액의 흐름도, 위장의 활동도, 전부, 인간의 의식, 생명 에너지(bio-energy)인 마음이 지령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정적으로 되거나, 화를 내거나, 비관하거나 하면, 몸의 어디엔가, 지장을 초래합니다. 위장 등은 특히 민감하기 때문에, 그 활동을 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병은 마음에서 생긴다라고 하는 것은, 주변의 사정, 인간의 마음의 본연의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生命エネルギーの補給(ほきゅう)は、夜の睡眠(すいみん)であります。肉体的ロスの補充は、動物、植物、鉱物のエネルギーからとります。
생명 에너지(bio-energy)의 보급은, 밤의 수면입니다. 육체적 손실의 보충은, 동물, 식물, 광물의 에너지로부터 취합니다.
このように、人間の五体は、正法に適(かな)った循環の法則に従って維持されていることが分ります。それ故、その法則にそった生き方をしておれば、健康は維持され、神仏の恵みも、自然のうちにうけ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祈ればいい、お拝めば何事もうまくゆくといったものではないことがお分りになったと思います。祈りは、感謝です。感謝の心は行為になって現われなければ信仰とはいえません。イエスもいっています。 「汝信仰あり、我行為あり」と。
이와 같이, 인간의 5체는, 정법에 적합한 순환의 법칙에 따라서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법칙에 따른 생활 태도를 실행하고 있으면, 건강은 유지되고, 신불의 은혜도,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면 좋다, 숭배하면 모든 일도 좋아진다고 말했던 것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감사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행위가 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신앙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도 말하고 있습니다.「네 신앙이 있고, 내 행위가 있다」라고. ☜신약성서야고보서 4장 18~19절 참조해 보세요.^^
●苦しみの原因は生老病死(しょうろうびょうし)
[괴로움의 원인(原因)은 생로병사(生老病死)]
ところが、人間には、五官というものがあります。眼、耳、鼻、舌、身。それに、自己保存をつくり出す意であります。智情意の意であります。こうした、六根が、いろいろな作用を、人間それ自身、つまり、心をまどわすものですから、人間の歷史は鬪爭のくりかえし、暗く、陰慘(いんさん)なものとなってきているのです。
그런데, 인간에게는, 오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그것에, 자기보존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지정의(智情意)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육근이, 여러 가지 작용을, 인간 그 자신, 즉, 마음을 유혹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투쟁을 반복하고, 어둡다, 참담(처참)한 것이라고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しかし、五官というものは、肉体を保全、維持(いじ)するためには欠(か)くことが出來ません。眼もない、鼻がないとすればどうなります。歩行は不自由ですし、鼻がなければ、顔はノッペラ棒になります。第一呼吸すら出來ません。問題は、これらの五官が、意につながり、勝手な行動をとるから困るのです。眼の作用で、美しい人をみて心を動かされたとすれば、その人に、もしも妻子があれば、妻子を不幸にし、その美しい人にも、暗い思いをさせることになります。家庭不和、事業不振を招くことになるでしょう。
그렇지만, 오관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를 보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눈도 없고, 코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행은 부자유스럽고, 코가 없으면, 넓적하고 밋밋한 얼굴(=(속어)키가 크고 얼굴에 눈·코·입이 없는 귀신)이 됩니다. 우선 호흡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오관이, 의(意=마음 먹은 생각)로 연결되어, 제멋대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곤란합니다. 눈의 작용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마음을 움직였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만약 처자가 있으면, 아내와 자식을 불행하게 하고, 그 아름다운 사람에게도, 어두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정불화, 사업 부진을 초래하게 되겠지요.
人を愛するとは、こうした眼の作用によるものではないのです。
愛とは許しであり、相手の幸せを願う心です。
聖書の山上の垂訓(すいくん)を思い出して下さい。
「幸福(さいわい)なるかな、心の貧しき者。天國はその人のものなり。幸福(さいわい)なるかな、悲しむ者。その人は慰(なぐさ)められん。幸福(さいわい)なるかな、柔和(にうわ)なる者。その人は地を嗣(つ)がん。・・・・・・」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러한 눈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란 용서이며,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신약성서의 상상수훈을 생각해 보십시오.
「 복이 있으리로다, 마음의 가난한 자. 천국은 그 사람의 것이니라. 복이 있으리로다, 슬퍼하는 자. 그 사람은 위로를 받으리로다. 복이 있으리로다, 유화(柔和=온유함,부드럽고 온화함)한 자. 그 사람은 땅을 상속하리라.・・・・・・」
☞참고 : 마태복음 5장 3절~5절...산상수훈...비교해 보세요.^^
0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0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0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いいますと、心の貧しいとは、おごる心のない者。悲しむとは、物質的に惠まれていない者。柔和とは心のおだやかなことであります。
이 의미는 어떠한 의미인가 하면, 마음의 가난함이란, (재능·지위·권세등을) 뽐내며 남을 얕보다. 거만[교만]하게 굴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슬퍼함이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사람. 유화(柔和=온유함, 부드럽고 온화함)이란 마음이 온화(溫和=성질(性質)이 온순(溫純)하고 인자(仁慈)함)한 것입니다.
神の愛とは、こうしたもので、眼の作用で美しい人に思いをかけるといった欲望とは本質的にちがうのです。
신의 사랑이란, 이러한 것으로, 눈의 작용으로 아름다운 사람에게 집착(=연모하다,사모하다,희망을 걸다)한다고 하는 욕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このように、五官、六根が、人間をして、心の在り方を失なわしめる作用を持っていますが、その根本原因は、人間の生老病死であります。人間はどこからきて、どこえゆくのか。病氣はどうしておきるのか。人間はなぜ、年をとるかが分らないために、五官に賴よる生活に落ちてしまうのです。
이와 같이, 오관, 육근이, 인간으로 해서,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근본 원인은,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입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병은 어째서 생기는 것인가? 인간은 왜, 나이를 먹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관에 의존한 생활에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どうせ人間は死ぬんだ。せいぜい生きている間に、うまいものを食べて、樂しく送らなければ損だ、という考え方が、大方の人人を支配してしまい、本能のまま、五官の作用にひきずられて一生を終るというのが、大半の人生航路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가능한 한 살아 있는 동안에,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겁게 보내지 않으면 손해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지배해 버린다, 본능대로, 오관의 작용에 질질 끌려서 일생을 마친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 항로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ところが、人間の生命には、宇宙の循環の法則が嚴然としてあるのであり、轉生リンネ、つまり、この世が終れば、あの世で生活する。あの世の生活が一段落すると、この世に再び出てくることになっているのです。そうして、そうした繰り返えしを續け、やがて、地球上での使命を終え、他の天体に、生命を運んでゆくのです。これは、本人が自覚するしないにかかわらず、循環の法則は人間の生命にも適用されているのです。
그런데, 인간의 생명에는, 우주의 순환의 법칙이 엄연히 있는 것이며, 전생윤회, 즉, 이 세상을 마치면, 저 세상에서 생활한다. 저 세상의 생활이 일단락되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반복을 계속하고 이윽고, 지구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다른 천체로, 생명을 옮겨 갑니다. 이러한 것은, 본인이 자각과 관계없이, 순환의 법칙은 인간의 생명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そうだとすれば、人間は、この事實をはっきりと認め、同じところを堂々めぐりするよりも、少しでも、自由に、創造的に、のびのびと、生きられる自分を見出すべきだと思います。
그렇다고 하면, 인간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같은 장소를 맴도는 것 보다도,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창조적으로, 걱실걱실(=성질이 너그러워 말과 행동이 시원시원함)하게, 살 수 있는 자신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無(む)自(じ)覺(かく)、無神論者、あるいはやりたい放題(ほうだい)の者は、あの世にいくと、地獄に落ちます。ガンで死んだ者は、その苦しみを持ったまま、地獄で苦しみます。人をそしったり、怒(おこ)ったりした者は、火炎(かえん)地獄(じごく)で身を燒かれます。動物靈に支配されたものは、自分が動物となり、生と死の間を、常に、さまよい步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動物界は弱肉强食ですから、心の安まる間がないのです。
무자각(無自覺), 무신론자(無神論者), 혹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은, 저 세상으로 가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암(癌)으로 죽은 사람은, 그 괴로움을 가진 채로, 지옥에서 괴로워합니다.
남을 비난(비방)하거나, 화(분노,노여움)를 내거나 한 사람은, 화염지옥(火炎地獄)에서 몸을 태어버립니다.
동물령(動物靈)에게 지배된 사람은, 자신이 동물이 되어, 삶과 죽음의 사이를, 항상, 정처없이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물계(動物界=지옥의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이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しかし、天國もあります。空氣は新鮮で、まわりの人達は理解があって、常に助け合うことを誇りにしていますから、實に、樂しいところです。
그렇지만, 천국도 있습니다. 공기는 신선하고, 주위 사람들은 이해심이 있고,, 항상 서로 돕는 것을 자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실로, 즐거운 곳입니다.
現世は、地獄と天國が入りまじった世界です。けれども、あの世は、地獄は地獄。天國は天國で分けられています。その區分けは各人の光子量、つまり、心のあり方いかんで決まります。あの世はこの世のようなわけにはいきません。この世はいわば平地です。あの世はビルの建物と同じです。一階、二階、三階、四階とあり、一階から二階にゆくには階段を一步一步のぼらなければ上にはゆけません。一階と二階はコンクリートの壁でさえぎられ、呼んでも騷(さわ)いでも聞えません。しかし、あの世の場合は、下から上をみることは出來ませんが、上から下を覗(のぞ)くことは可能なのです。こうよのに、區畵が嚴として決められています。
현세는, 지옥과 천국이 뒤섞인 세계입니다. 그렇지만, 저 세상은, 지옥은 지옥. 천국은 천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그 구분은 개인의 광자량(光子量), 즉, 마음의 본연의 모습 여하로 정해집니다. 저 세상은 이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말하자면 평지입니다. 저 세상은 빌딩의 건물과 같습니다. 1층, 2층, 3층, 4층이라고 하며, 1층에서 2층으로 가려면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오르지 않으면 위로는 올라 갈 수 없습니다. 1층과 2층은 콘크리트의 벽으로 차단되어, 불러도 떠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구획(區畵)이 엄연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ともかく、このようにして、生命の轉生リンネは、否も應もなく、天命づけられているのですから、どうしょうもありません。
어쨌든, 이렇게 해서, 생명의 전생윤회는, 좋든 싫든 간에, 천명(天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人間の生命は、この地上を調和させ、佛國土、ユートピアをつくることが目的ですから、それに離れた行動をとれば、離れた分量だけ、自分を苦しめる結果となります。これはなぜかといいますと、人間は神の子、佛の子であり、心も肉体も小宇宙であるからです。
인간의 생명은, 이 지상을 조화시켜, 불국토,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면, 벗어난 분량만큼, 자신을 괴롭히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자녀, 부처의 자녀이며, 마음도 육체도 소우주이기 때문입니다.
●八正道こそ正覺(しょうかく)、菩薩(ぼさつ)への道
[팔정도(八正道)야말로 정각(正覺), 보살(菩薩)에의 길(道)]
そこで、各人が、その自覺に立って、五官に左右されない自分自身を確立するにはどうすればよい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が、それには、宇宙の神理である釋迦の正法、八正道を、日々の生活に行じることしかありません。
그래서, 각자가, 그 자각에 서서, 오관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 자신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고 하게 됩니다만, 그것에는, 우주의 신리인 석가의 정법, 팔정도를, 일상의 생활에 실행(실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ウソのつけない己の心に問う、聞くの、生活。つまり正しく、見る。思う。語る。仕事をする。生活する。道に精進する。念ずる。冥想(めいそう)するの八つです。冥想とは反省です。一日をふりかえって、己の心に問う、聞くことです。そうして、人をそしった原因はなにか。怒った理由はどこにあったか、を反省するのです。すると、自分をかばう心があった、自分をいたわる心が强よかった。プライドそのもののむなしさが分ってくる筈であります。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기의 마음에 묻든다, 듣는 것, 생활 하는 것. 즉 올바르고, 본다. 정서적으로 생각한다. 말한다, 일을 한다. 생활한다. 도(道=팔정도)에 정진한다, 생각(念=지적(知的)으로 생각한다)한다. 명상(冥想)하는 것의 여덟 가지입니다. 명상(冥想)이란 반성(反省)입니다. 하루를 뒤돌아보고, 자신의 마음에 묻는다,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을 비난(비방)한 원인은 무엇인가? 화를 낸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두둔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을 돌보는 마음이 강했다. 자존심 그 자체의 허무함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八正道については、いろいろな意見があるようです。
たとえば八正道は小乘佛敎で(しょうじょうぶっきょう)、自分一個の悟(さと)りだけであって、現代には通用しない。現代は、人を救ってこそ、己も救われる。即ち、大乘佛敎こそ、本筋という論理。しかし、いったい、小乘とか、大乘(だいじょう)は、誰が想像したのでしょう。小乘のはしりは、普賢(ふけん)であり、大乘は龍樹(りゅうじゅ)が考えたようであります。時代の流れと共に、佛敎の考え方もかわったものです。
팔정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팔정도는 소승불교로, 자신 개인의 깨달음뿐이며, 현대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현대는, 남을 구원해야 비로소, 자신도 구원받는다. 즉, 대승 불교야말로, 본래의 방식(正道=정도)이라고 하는 논리. 그렇지만, 도대체, 소승이라든지, 대승은, 누가 상상한 것일까요. 소승의 질주는, 보현(普賢)이며, 대승(大乘)은 용수(龍樹)가 생각한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불교의 사고방식도 바뀌어 왔던 것입니다.
ところが、正法そのもの、つまり、宇宙の神理は、今も昔もかわりません。法がかわったらおかしい。それは法ではありません。
그런데 , 정법 그 자체, 즉, 우주의 신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법(法)이 변한다면 우스꽝스럽다=(이상합니다).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そこで、正法の(しょうほう)筋道は、さきほどの人体ではありませんが、まず、己自身を神佛の心に調和させる。己が調和せずして、どうして、人を調和させることが出來ましょう。まず、これが先決。そうして、人々を救うことです。これを菩薩行と(ぼさつぎょう)いいます。
그래서, 정법의 도리(道理)는, 조금 전의 인체가 아닙니다만, 우선, 자기 자신을 신불의 마음에 조화시킨다. 자기가 조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해서, 남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우선, 이것이 선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합니다.
人間の目的が、この地上界に佛國土、ユートピアをつくることにあるのですから、自分さえ悟ればよいとい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人人にも、その福音(ふくいん)を伝える、愛の手をさしのべることであります。
인간의 목적이, 이 지상계에 불국토, 유토피아(이상향)를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만 깨달으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도, 그 복음을 전한다,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것에 있습니다.
それですから八正道は、小乘も大乘もないのです。八正道は自分一個の悟りですが、悟りを聞けば、進んで、外に出るべきが本當であり、第一、それが人間の佛性でありましょう。小乘、大乘にこだわること自体、佛法は末法と化し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佛敎がこのようになったのも、元はといえぱ、我こそは仏教の本山なりとする關係者の自己保存の現れでなくてなんでありましょうか。
그렇기 때문에 팔정도는 소승도 대승도 아닌 것입니다. 팔정도는 자신 개인의 깨달음입니다만, 깨달음을 얻으면(깨달으면), 진행하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정상(당연)하며, 첫째로, 그것이 인간의 불성이지요. 소승, 대승에 구애되는 것 자체, 불법은 말법으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교가 이렇게 된 것도, 원인(元)을 말하자면, 나야말로 불교의 본산이니라 라고 하는 관계자의 자기보존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現代社會は混迷(こんめい)の時代です。科學時代といいながら、人間の心は、宙に浮いています。心不在です。それは物質文明がつくり出した五官の世界であるからです。物質文明の智惠(ちえ)は五官から生れ、精神文明の智慧(ちえ)は「心」から生れるものです。五官の世界から、私共は、心をとり戾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
현대 사회는 혼미의 시대입니다. 과학시대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마음은, 허공에 떠 있습니다(=갈 곳이 없다). 마음의 부재입니다. 그것은 물질문명이 만들어 낸 오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문명의 지혜(智惠)는 오관에서 생겨나고, 정신문명의 지혜(智慧)「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관의 세계로부터, 우리들은, 마음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神理は、今も昔も生きています。脈脈と波打ち、息(いき)ずいています。なぜなら、人間それ自身、本來、正法そのものであるからです。
신리는, 예나 지금이나 살아 있습니다. 끊이지 않고 물결치며, 숨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그 자신, 본래, 정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私達のグループは、人間をして、人間らしく生きる道、その道標を(どうひょう)、再び、人類の頭上に打ち樹てるべく生れたものです。心不在という末法の世に、その光を照らす燈台(とうだい)の役を、實在界から命じられたものであります。
저희들의 그룹은,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道), 그 도표(道標)를, 다시, 인류의 머리 위에 심기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부재라고 하는 말법의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등대의 임무를, 실재계로부터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文証(もんしょう)とは、心、宇宙の根源(こんげん)、原理そのものであり、それを普遍的(ふへんてき)な論理で論証することをいいます。理証(りしょう)とは心によって生ずる宇宙の法則を科學的に証明することをいいます。現証(げんしょう)とは、心と法が形の上に現われることであり、従って、文と理の現實的証明ということがいえましょう。
문증(文證)이란, 마음, 우주의 근원, 원리 그 자체이며, 그것을 보편적인 논리로 논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증(理證)이란 마음에 의해서 돋아나는(생기는,발생하는) 우주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증(現證)이란 마음과 법이 형태 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문(文)과 리(理)의 현실적 증명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요.
この三つの証明のないもの、証明できないものは、正法とはいえないのであります。
이 세 개의 증명이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정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私達は、この三つの証明をすでに行なってきていますが、更に、より多くの事實を、眞實を、皆樣の前に、いろいろな方法で明らかにしてゆくことでしょう。
저희들은, 이 세 가지의 증명을 이미 실행해 오고 있습니다만, 더욱 더, 보다 많은 사실을, 진실을, 여러분 앞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밝혀 가는 일이겠지요.
一人でも、多くの方方が、釋迦の正法、イエスの愛、己の心を信ずる眞の信心、そして、その心を心とする反省の生活にめざめ、神理を体得されることを望んでやみません。 page 74~96
한 사람이라도, 많은 분들이, 석가의 정법, 예수의 사랑, 자기의 마음을 믿는 진정한 신심(믿음), 그리고, 그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는 반성의 생활로 눈을 뜨고, 신리가 체득되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page 74~96
-........다음은 <실행은 마음을 연다. 실행한다는 것의 참뜻(진의)> 다카하시 신지님의 부인의 글>입니다.......-
2010년 3월 29일에 올린 글입니다. 현재 날짜인 2011년 11월 7일 월요일로 변경합니다.
오늘, 2016년 10월 27일 목요일의 날짜로 변경하며, 나뉘어진 것을, 한 권으로 묶습니다.
다카하시 신지 『심안을 열다』【제4장 정법에 대해서】 《올바른 순환》 이하의 내용과 비교해 보세요. 중요한 내용인지라, 같은 내용을 두권의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출처 : ※출처:高橋信次「生きる道」(あなたにも過去世がある)改題『天使の再來』昭和四十五年一月吉日
「釋迦、イエス・キリストの正法とは」
※출처 : http://tenshinosairai.seesaa.net/,
***page*97****行ない心をらく 실행은 마음을 연다 ----
--信心とは己の心を信ずることであるとすれぱ信仰とはその心を心とした行爲人は,煩惱という緣にふれて菩提という悟りの境地を得ることができるのだ。
--신심(믿음)이란 자기의 마음을 믿는 것이라고 하면 신앙이란 그 마음을 마음으로 한 행위를 하는 사람)行爲人)은, 번뇌라고 하는 인연에 접해서 보리(菩提)라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page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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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ぎょう)ずることの眞意(しんい)・・・・・・・・・・・・・・・・・・・・・・・
실행하는 것의 참뜻(진의)・・・・・・・・・・・・・・・・・・・・・・・
高橋 一 榮(다카하시 카즈에)
△이분은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부인입니다.△
☆行即光―煩惱即菩提☆
실행이 곧 빛―번뇌 즉 보리(깨달음)
私が靈道を開いたのは一昨年の十一月(昭和四十三年)。この正月で、丁度、一年と一寸(ちょっと)になります。この間、いろいろな体驗をしましたが、昨年の八月頃だったと思います。私は、佛敎でいう苦集滅道(くしゅうめつどう)の苦をなくすにはどうすればいいかと、あれこれ、考え、惱みました。日日の生活を通して、反省もし、感謝もしているのですが、なかなかその眞意がつかめません。むろん、八正道を行じることも知っております。每日の生活そのものも、その心算(つも)りで行動しているのですが、どうも、身につかないのです。自分の生活の中に入ってゆかないことが、私としては不思議だったし、それをどうしたら自分の生活の中に入ってゆくかと色々と考えたわけです。
제가 령도(靈道=초능력)를 연 것은 재작년의 11월(쇼와 43년(1968년)). 이 정월에서,꼭, 일년 조금 지났습니다. 이 사이에, 다양한 체험을 했습니다만, 작년의 8월 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집멸도의 괴로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래저래,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일상의 생활을 통해, 반성도 하고, 감사도 하고 입습니다만, 좀처럼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팔정도를 실행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매일의 생활 그 자체도, 그러한 심산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몸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 자신의 생활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저로서는 불가사의했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활속으로 들어갈까라고 가지각색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そこで私は、ある日、あの世にいって、あの世の皆さんにその理由を聞いてみたのです。そうしましたら、「行えばいいのだ――」というのです。行えばいいといっても、ではどう行えばいいのか、私自身のやっている日常生活そのものが本當に良いのか惡いのか、第一心というものの正体さえハッキリ把(つか)んでいませんでしたから、「行え」といわれてもなかなか分りません。そこで私は、更にあの世の人に訊ねたのですが、それ以上の回答を出してくれません。ただ默って、微笑をうかべるのみです。
그래서 저는, 어느 날, 저 세상에 가서, 저 세상의 여러분에게 그 이유를 들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실행하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행하면 좋다라고 말해도, 그럼 어떻게 실행하면 좋은 것인지, 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상생활 그 자체가 정말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우선 마음이라는 것의 정체마저 분명하지 파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실행해라」라고 말해져도 좀처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저 세상의 사람에게 물었던 것입니다만, 그 이상의 회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미소짓고 있을 뿐입니다.
やむなく私は、この世に戾り、「行じる」ことの眞意をつかもうと、更に考え、生活しているうちに、ハッとひらめいたものがありました。それは宙に浮いている自分と、地を步いている自分のちがいではないかと・・・・・・。
부득이 저는,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실행한다」일의 진의을 파악하려고,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는 동안에, 팍하고 떠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허공에 떠 있는 내 자신과, 땅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의 차이가 아닐까・・・・・・。
反省にしろ、感謝にしても、その状態というものは一瞬であるか、長い期間に及ぶ場合もあるかも知れません。何れにしても、その氣持を行爲に現わす際に、それを現わそうという氣負い、抵抗が自分にはあったようだ。ある時はあせりであり、ある時は、四角張っていたかも知れない。そうした氣負い、心の抵抗が、私をして、地を步いていない自分があったと後になって分ったのでございます。
반성을 해라, 감사를 해도, 그 상태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일까, 오랜 기간에 이르는 경우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그 기분을 행위로 나타낼 때에, 그것을 나타내려는 강한 의욕, 저항이 제 자신에게 있던 것 같다. 어떤 때에는 초조하며, 어떤 때에는, 딱딱하여 융통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해내고야 말겠다는)강한 의욕이, 마음의 저항이, 저로 하여, 땅을 걷고 있지 않은 제 자신이 있었다고 나중에 알았던 것입니다.
ここでちょっと、あの世とこの世について説明いたしますが、夜寢についた時、ある時は人間は誰しもあの世にいっています。そうしてあの世にいって、生命の洗濯、エネルギーの補給をして、朝眼をさますのです。睡眠はこうした意味では、大變な行事の一つです。生活の上で欠くことの出來ないものです。ですから十日間睡眠をとらなければ、人間は、肉体を維持することはむずかしいのであります。死ぬしかありません。このことは人間には生命があり、肉体と意識、肉体と生命は別であることの証明でもあります。ですから、私があの世にいって、あの世の人と話しをするといっても、別段不思議でもなんでもないことがご理解いただけると思います。こうした意味で、私はちょいちょいあの世にいって、あの世の皆さんと話しをしてくるのでございます。
여기서 잠깐, 저 세상과 이 세상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만,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떤 때는 인간은 누구라도 저 세상에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 세상에 가서, 생명의 세탁, 에너지의 보급을 받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수면은 이러한 의미에서는, 대단한 행사의 하나입니다. 일상생활에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일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인간은,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죽음 밖에 없습니다. 이 일은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고, 육체와 의식, 육체와 생명은 별도인 것의 증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저 세상에 가서, 저 세상의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특별히 이상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저는 가끔 저 세상에 가서, 저 세상의 여러분과 이야기를 하고 오는 것입니다.
話しは前に戾(もど)りますが、こんなわけで苦から解放されるには、感謝の心を心として、素直に氣樂に行ずることにあると分ったのです。
이야기는 앞으로 되돌아갑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마음으로서, 솔직하게 홀가분하게 실행하는 것에 있다라고 알았던 것입니다.
そこでその後、あの世にいって皆さんに私はどうしてこんなにわからなかったのだろう。これ程よく分っているつもりであるのに、なぜでしょう、といいましたら、「行い」という字をよく調べてみて下さい、すると、一層よく理解される筈、といいます。
그래서 그 후, 저 세상에 가서 여러분에게 저는 어째서 이렇게 몰랐던 것일까? 이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일까요, 라고 말하면 「실행(행동)」이라고 하는 글자를 잘 조사(연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한층 잘 이해되실 것, 이라고 합니다.
私の知人で、光という字をお守りにしている方がありまして、それを靈視しますと、その光という文字が「行」という文字にかわってしまうのです。その時は、隨分おかしなことがあるものと思っていましたが、それが八月になって、光を求めるには、行わなくては駄目ということに到達して、その時はじめて光と行の間に、なにかがあるにちがいない、あの世の人達は光の肉体、私達は原子の肉体、この同者の間に兩者をつなげる何かがあると感じていました。
저의 지인(知人)으로, 빛(光:광)이라고 하는 글자를 부적(符籍)으로 하고 있는 분이 있어서,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靈視), 그 빛(光:광)이라고 하는 글자가 「行(행)」이라고 하는 문자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는, 상당히 이상한 일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8월에 이르러, 빛을 구하기 위해서는, 실행하지 않고서는 헛일이라고 하는 것에 도달해서, 그 때 처음으로 光(광)과 行(행)의 사이에,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저 세상의 사람들은 빛의 육체, 우리들은 원자의 육체, 이 같은 것(同者)의 사이에 둘(兩者)을 연결하는 뭔가가 있다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そこで「行」という文字を、いろいろ調べてみました。その結果、次のような結論を得たので
す。
그래서「行(행)」이라고 하는 문자를, 여러 가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던 것입니다.
「行」の文字を字(じ)源(げん)で引きますと、左側り行人偏「 彳 」は左步に 从(從(したがい)の本字)い、右側「 亍」は右步に ??う、となり「行」とは, それ故に、共に步く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即ち、 , (したがう)とは、人と人とが相寄(あいよ)る姿でもあり肉体と意識が調和されている姿であります。
「行(행)」의 문자를 구성원리에서 풀어보면, 좌측으로 가는 사람 변「 걸을 척(彳) 」은 왼쪽으로 걸어서 “从” 뒤따른다([從=종]의 본자[(뛰따름의 약자나 속자가 아닌 정식 한자), 우측「 亍 (두인 행)」은 오른쪽에 걸어서 뒤따른다, 가 되어 「行(행=간다)」이란, 그러므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뒤따른다)이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육체와 의식이 조화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人間が、この地上にもしも一人しかいないとすれば、己(おのれ)の心を磨くことも、悟りもないと思います。人と人とが集まり、善あり、惡あり、男あり、女ありの社會集團があればこそ、善惡の判斷、男女の區別もあるのでございます。そうして、そうした判斷區別のなかから人が人として、もっとも人間らしく生きてゆくにはどうすればいいか、どうあるべきか。人間とは何にか。人間はどこから来てどこへゆくのか、という問題にぶつかり、己の心をみつ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ございます。
인간이, 이 지상에 만약 한 명 밖에 없다고 하면, 자기의 마음을 닦는 일도, 깨달음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선이 있고, 악이 있고,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는 사회집단이 있기 때문에, 선악의 판단, 남녀의 구별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판단과 구별하는 가운데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더욱 더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라고 하는 문제 부딪쳐서,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お釋迦樣が悟りを開き、もうこれで死んでもよいと考えた時、天上界から「人を救ってこそ、お前の悟りの意味がある・・・・・・」との聲を聞き、多くの衆生を救ったということです。
부처님(お釋迦樣)이 도를 깨닫고(득도하고), 이제는 그럼 죽어도 좋다라고 생각했을 때, 천상계로부터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너의 깨달음의 의미가 있다・・・・・・」라는 음성를 듣고, 많은 중생을 구원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人を救うことを、一口に菩薩行といいます。己の悟りを人人にも分ち与える。人人と共に步む。人があって自分もある・・・・・・。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한마디로 보살행(菩薩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남이 있고 자기 자신도 있다・・・・・・。
「行」とは、このように氣高く、その意味する底は深いものでございます。
「行」の文字を、もう一度あらためて見直し、バラバラにしますと、その劃數は六劃です。六劃とは六つです。六つとは、人間の六根にも通じます。六根あるが故に人間は、なかなか悟ることができません。しかし、人間の煩惱である六根があればこそ、「行」にまとめれば悟ることが出来るのでございます。
「行(행)」이란, 이와 같이 품위(고귀=고결)가 있다, 그 의미하는 바탕은 깊은 것 입니다.
「行(행)」의 문자를, 한번 더 다시 재검토하고, 정리하면, 그 획수는 6획입니다. 6획이란 여섯 개입니다. 여섯 개란, 인간의 육근(六根)에도 통합니다. 육근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좀처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번뇌(煩惱)인 육근이 있어야 비로소,「行(실행)」으로 결말 지으면 깨닫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光が行の文字にかわったというのは、光も六劃なら、「行」も六劃。行は人間的煩惱を含んだ意味を持ち、悟りへのかけ橋ですし、光は神佛ですから、「行」ずることは即光にかわるというわけです。つまり、煩惱即菩提(行即光)です。
光(빛)이 行(행)의 문자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光(빛)도 6획이라면, 「行(행)」도 6획. 行(행)은 인간적 번뇌를 포함한 의미를 가지고, 깨달음에의 가교(架橋:잔교)이며, 光(빛)은 신불이기 때문에, 「실행(行)」한다는 것은 즉 (光)빛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번뇌 즉 보리(煩惱即菩提)(실행은 곧 빛:行即光))입니다.
こうして、私は「行」の持つ眞意を知ったのでございます。
이렇게 해서, 저는「실행(行)」이 가진 진의를 알았던 것입니다.
優しい眼、優しい言葉
[우아한 눈빛, 품위있고 아름다운 말]
そこで、ではどう行ずるかといえば、日々の生活の中に八正道を行ずるわけであります。八正道は中道の道です。右にかたよらず、左に曲がらぬ中正の道。そうしてその道を行ずるのは、神が與えてくれる慈悲と愛に應えるためです。即ち己自身のためでございます。八正道は、その意味では反省の生活でもあります。
그래서, 그럼 어떻게 실행할까라고 하면, 일상의 생활속에 팔정도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중도의 가르침(道=길)입니다.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왼쪽으로도 굽어지지 않는 중용(中正=중정)의 가르침. 그렇게 해서 그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신(神)이 베풀어 주시는 자비와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팔정도는, 그 의미로는 반성의 생활입니다.
反省とは、私達肉体を持ったものには、間違いを犯していると意識してやってしまうのと、間違っていないと思って間違いをしているのとあります。
「お前達は、反省することによって自分を救い、自分を高めてゆくことが出来る。これこそ、神の慈悲であり愛である」
とあの世の人達がいいます。
반성이란, 우리들이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과 의식하고 행해 버리는 것과, 잘못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을 구원하고(돕고), 자신을 향상시켜 갈 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자비이며 사랑이다」
라고 저 세상의 사람들이 말합니다.
その樣に、私達は自分を反省し、間違ったことだけを反省するのではなく、知らないうちに人がみたら間違っているという事でも自分には氣がつかないことが澤山あります。そういう時には自分を正しく中道にもどしてみることが、必要だと思います。
그와 같이,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잘못한 것만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이에 남을 보면서 잘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라도 자기 자신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중도를 근본으로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この世とあの世を通じて、一番上にあるのが光です。次に慈悲と愛、人間はこれに應えるために反省をし、苦をなくすには八正道を行ずることしかありません。ところがさきほどの行うことは、即、光となって元に戾ると言う事です。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통해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이 빛입니다. 다음으로 자비와 사랑, 인간은 이것을 절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반성을 하고,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행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실행하는 것은, 즉, 빛이 되어 원래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말입니다.
このように、この中のどこを取っても、どこをつまんでも、私達は循環を續けているのでございます。人間が生れては死ぬ。このことは一回ポッキリではなく、轉生リンネという繰り返えしの中にあるのです。大自然の春夏秋冬と同じです。
이와 같이, 이 중의 어디를 잡아도, 어디를 집어도, 우리들은 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 이러한 것은 1회 뿐만이 아니고, 전생 윤회라고 하는 반복의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춘하추동과 마찬가지 입니다.
同樣のことは、私達の心も循環してゆくということです。大宇宙体の意識(神佛)は光であり、慈悲と愛があり、そして感謝し、苦集滅道があり、八正道があり、八正道はまず行なわなくては元の光に循環さ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
이러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도 순환해 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우주체의 의식(신불)은 빛이며, 자비와 사랑이 있고, 그리고 감사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있고, 팔정도(八正道)가 있고, 팔정도는 우선 실행하지 않으면 원래의 빛으로 순환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私が惱んだのは八月頃でした。分っていながら、地に足がついていなかったというのは、行じているという意識、つもりがそのような抵抗をつくっていたのです。
제가 고민한 것은 8월 경이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이론만 앞서고 실지에 맞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실행하고 있다고 하는 의식(意識), 의도가 그러한 저항(抵抗)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八正道とは、己だけの悟りです。このほかに菩薩心(ぼさつしん)というものがございます。菩薩心とは、相手があって、はじめて悟る悟りです。私の場合、菩薩心とはどういうことかといえば、皆樣に正法をお伝えすることもその一つの表れであります。菩薩心とはいかにもむずかしく考え勝ちですが、作り笑いや、ぎごちない所作ではなく優しい眼、優しい心、自然の所作。要するに自分だけが持っている、その在りのままの心を、生活の上に出してゆけばいいのです。
팔정도(八正道)란, 자기만의 깨달음입니다. 이 밖에 보살심(菩薩心)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살심(菩薩心)이란, 상대가 있고, 비로서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저의 경우, 보살심(菩薩心)이란 어떠한 것인가라고 하면, 여러분에게 정법을 전하는 일도 그 하나의 표현입니다. 보살심(菩薩心)이란 매우 어렵게 생각되지만, 억지웃음이나, 어색한 행동이 아니고 우아한 눈빛,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마음, 자연스런 행동. 요컨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그 모습대로의 마음을, 생활 상에 나와 가면 좋은 것입니다.
これまでの八正道は、光を中心として行ずることの循環でしたが、菩薩心は、あの人がこういったから、こう見ているからではなく、自分の手で、自分の体で、出來ることをしてあげることが菩薩の心なのです。
지금까지의 팔정도는, 빛을 중심으로 실행하는 것의 순환이었지만, 보살심(菩薩心)은, 저 사람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렇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해 주는 것이 보살(菩薩)의 마음(心)입니다.
この社會は一人では生きてゆけません。互いに助け合い、手をとりあって生きてゆくものです。ですから、傍觀者ではなく、道にゴミが落ちていたら、その一つでも默って拾う。人がいようと、いまいとそれに頓着せずに・・・・・・。
이 사회는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 돕는다,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관자가 아니고, 길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그 하나라도 묵묵히 줍는다. 사람이 있건, 없건 그것에 개의히 않고・・・・・・。
東京中の人が一つのゴミを拾ったら、東京のゴミは無くなるともいわれているぐらいです。そのように、皆さんが一つの菩薩心、奉仕の精神にもとづいて行なったならば東京は凄くきれいになると思います。
도쿄내의 사람이 하나의 쓰레기를 주우면, 도쿄의 쓰레기는 없어진다고도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하나의 보살심(菩薩心), 봉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실행한다면 도쿄는 무서울 정도로 깨끗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このように、人間には菩薩心と自分の心を求める如心の二通りがあるわけですが、まず八正道の一つでもいいから、足をしっかり地につけて、最も人間らしく、自然の生活の中に反省をして同じことを何度もくりかえさないことでございます。そうして、一番下の行ないということを心がけ、少しずつ悟ってゆき、己の悟りと共に菩薩心を持ち、日常生活において優しい言葉、優しい眼、奉仕の心で日常を送っていけば、やがて、菩薩の悟りになってゆくと思います。カッカカッカとやるばかりが信仰ではなく、己を靜かにみつめ、靜かに行動してゆくことも、一つの悟りの方法だと思うのでございます。 page 99~106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보살심(菩薩心)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추구하는 여심(如心=뜻때로 됨)의 두개의 통행이 있는 것입니다만. 우선 팔정도가 한가지라고 해도 좋기 때문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붙히고, 가장 인간답게, 자연의 생활속에 반성을 하고 같은 것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맨 먼저 실행한다고 하는 것을 염두(노력)하고, 조금씩 깨달아 갈 때, 자기의 깨달음과 함께 보살심을 가지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품위있고 아름다운 말, 우아한 눈빛, 봉사의 마음으로 일상을 보래고 있으면, 이윽고, 보살(菩薩)의 깨달음이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한다라고 하는 것만이 신앙이 아니고, 자기를 조용하게 들여다 보고, 조용하게 행동해 가는 일도, 하나의 깨달음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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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자비와 사랑이란,『天使の再來(천사의 재래)』星洋子(호시 요우꼬)>의 글입니다--------
이글은 2010년 3월 30일에 올린 글입니다. 현재 날짜인 2011년 11월 7일로 변경합니다.
오늘,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의 날짜로 변경하며, 나뉘어진 것을, 한 권으로 묶습니다.
※출처 :「生きる道」(あなたにも過去世がある)改題 『天使の再来』「行ない心をらく」
※출처 : http://tenshinosairai.seesa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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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ほし) 洋(よう) 子(こ)
호시 요우꼬
★愛とは許す行爲★
[사랑이란 용서(容恕)하는 행위]
讀者の皆樣は、愛という言葉をよく聞いておられるし、又、實行しておられると思いますが、先ず男女の愛について、ふれてみたいと思います。
독자(讀者) 여러분은,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계시고, 또, 실행(實行)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만, 우선 남녀의 사랑에 대해서, 접해 보고자 합니다.
人間がこの世に出生する時、人は實在界において生活していたその本能を持って生れ出るものでございます。そうして、その本能の命づるままに、先ずお乳をしゃぶります。これは、あの世において食事をとっていた習慣が、そのまま現(あら)われるのでございます。
인간이 이 세상에 출생할 때, 사람은 실재계(實在界)에서 생활했던 그 본능(本能)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능의 명하는 대로, 우선 젖을 물고 빱니다. 이것은, 저 세상에서의 식사(食事)를 해 왔던 습관(習慣)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こうして人は成長し、やがて靑年に、あるいは思春期に達しますと、異性というものに興味をもち始めます。男女の區別は、あの世でもキチンと確立されています。異性のめざめは、それは丁度プラスとマイナスの電氣が互いに吸引す(きゅういん)るように、愛という形で生じてまいります。
이렇게 해서 사람은 성장(成長)하고, 이윽고 청년으로, 혹은 사춘기(思春期)에 이르게 되면, 이성이라는 것에 흥미(興味)를 가지기 시작합니다. 남녀(男女)의 구별(區別)은, 저 세상에서도 분명(分明)히 확립(確立)되어 있습니다. 이성(異性)에 대한 성(性)의 눈뜸은, 그것은 정확히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전기가 서로 끌어 당기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하는 모양으로 생겨나옵니다.
そこで先ず、男女の愛ですが、愛の本質は現實的には相手を許(ゆる)す行爲であり、又、自分のものを與える。自分のものとは生きているあかし――よろこび、理解、物質、知識、情熱、意欲、希望、悲しみも含まれています。つまり自分のすべてを與える。これを愛と申します。
그래서 우선, 남녀의 사랑입니다만, 사랑의 본질(本質)은 현실적으로는 상대방을 용서하는 행위이며, 또, 자기의 것을 준다. 자기 것이란 살아 있는 증표――기쁨, 이해, 물질, 지식, 정열, 의욕, 희망, 슬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ところが、男と女が年頃となり、たがいに好きになるという事は、通常は興味を持っただけに過ぎない場合が多いのでございます。そうして、その興味そのものが一つのものに對して、あたかもそれが愛情のような錯覺をおこしてしまうのでございます。自分自身が一人の男性、女性を感じた時に、自分の心は果たして單なるみであるか、あるいは愛であるかということを、自分の心によく問うてみることが必要です。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나이가 들어, 서로가 좋아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통상은 흥미(興味)를 가졌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흥미 그 자체가, 한가지의 것에 대해서, 마치 그것을 애정(愛情)과 같은 착각(錯覺)을 일으켜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한 사람의 남성(男性), 여성(女性)을 느꼈을 때에, 자기의 마음은 정말로 단순(單純)하게 보고 있을까, 혹은 사랑일까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마음에 잘 물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通常の男女の愛は、ただ單に、肉体的なつながり生活の手段(しゅだん)にすぎないことが多いものです。そうしてこうした槪念(がいねん)をもって子供に愛を敎える、愛を說こうとしても、子供自身は、本當に理解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思います。
통상 남녀의 사랑은, 단지 단순하게, 육체적인 관계의 생활의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자식에게 사랑을 가르친다, 사랑을 설명하려고 해도, 아이 자신은, 정말로 이해(理解)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愛を感じる時、自分の心に現在一人の男性なり、女性が好きであるか嫌(きら)いであるか、そうして、この愛は本物か興味本位かをただすことが大事であり、これにたいする答えは必然的に出てくるのでございます。
사랑을 느낄 때, 자기 자신의 진심으로 현재 한 사람의 남성이 되어, 여성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은 진짜인지 흥미본위(興味本位)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重要)하고, 이것에 대한 해답은 필연적(必然的)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たとえば女の立場からある男性をみる場合、その男性は將來出世するか、金持になるかということよりも自分自身がその人がみじめな姿となった時でも、その人を愛し續けていけるであろうか。もしも愛しつづけることが可能とすれば、その答えは本物であり、愛に通ずることになりましょう。
가령 여자의 입장에서 어떤 남성을 보는 경우, 그 남성은 장래 출세(出世)할까, 부자(富者)가 될까라고 하는 것 보다도 자기 자신이 그 사람이 비참(悲慘)한 모습이 되었을 때라도, 그 사람을 꾸준히 사랑해 갈 수 있을까. 만약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可能)하다고 하면, 그 대답(對答)은 진짜이며, 사랑으로 맺어지겠지요.
日本はとかく、武士階級の時代から、女は耐(た)え忍(しの)ぶように敎えられ、男は自分の自我(じが)を通すことを生(いき)甲(が)斐(い)とし、得意(とくい)としたものです。女の耐え忍ぶ姿は、美しうございますが、耐え忍ぶと言う事は、自分の心にワクをつくることになりますので感心いたしません。
일본은 어쟀든, 무사계급의 시대이기 때문에, 여자는 참고 견디라고 가르치고, 남자는 자신의 자아(自我)를 고집하는 것(=자기 주장을 밀고 나가는 것)을 보람으로 하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져 뽐낸던 것입니다. 여자의 참고 견디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만, 참고 견딘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와쿠(틀=번뇌=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함)를 만드는 것이 되는 것이므로 탐탁하지 않습니다.
※ワク=틀,테두리,미혹,번뇌,갈팡질팡-
△위 부분은, 다른 분이 번역내용에는, 누락된 부분입니다. 참고하세요.
夫婦というものは調和にあります。調和という事は、たとえばご主人が、お前は俺についてこいというのでしたなら、女がついてゆかれるだけの信賴というものを敎える。あるいは理解され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います。ただついてこいだけでは、それは調和ではなく、愛でもありません。かつての武士階級そのままであり、自己保存まる出しとしかいえません。これでは女はご主人のいうままに地獄に落ちてゆくより仕方がありません。その女(ひと)にそれだけの覺悟ができていればいいですが。しかし、それにしてもその女(ひと)自身も、これでは浮ばれません。したがいましてご主人にしても奧樣にしましても、一つ一つの問題にたいして、それぞれが納得し得るだけの理解なり、得心(とくしん)がなければ家庭の調和は保てないものとなりましょう。
부부(夫婦)라고 하는 것은 조화에 있습니다. 조화(調和)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남편이, 당신은 나에 대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여자를 대해서도 죽을 수 있을 만큼 신뢰한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친다. 혹은 이해(理解)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따라오는 것만으로는, 그것은 조화가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일찍이 무사계급 그대로이며, 자기보존을 드려 내놓는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는 여자는 남편이 말하는대로 지옥(地獄)에 떨어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에게 그만큼의 각오(覺悟)가 되어 있으면 괜찮습니다만. 그렇지만, 그건 그렇다고 해도 그녀 자신도, 이래서는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편으로서도 아내(妻)으로서도, 하나 하나의 문제(問題)에 대해서, 각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이해되고, 납득을 할 수 없으면 가정(家庭)의 조화는 유지(維持)할 수 없습니다.
男というものは、大きく社會を照(て)らす一つ灯で(ともしび)ございます。女は足元の小さ灯(ともしび)を御主人のために照らし、家庭のために照らすというのが女の使命でございます。ところが近頃では、女は結婚と同時に、三食晝寢つきとやらで、ただその上にあぐらをかき、自分の夫を夫であるというだけで、支配しようとなさいます。一方、男の方も自分の妻は自分のものであるとして、自己主張を通そうとします。これは、自分の自己保存のための支配であって、愛とはいえません。また、夫婦ともいえません。
남자라고 하는 것은, 크게 사회(社會)를 비추는 하나의 등불입니다. 여자는 발치의 횟불을 남편을 위해서 비추고, 가정(家庭)을 위(爲)해서 비춘다는 것이 여자의 사명(使命)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자는 결혼(結婚)과 동시에, 세끼 밥먹고 낮잠이나 자면서, 단지 그 상태로 편히 앉아(=지위에 만족하며), 자신의 남편을 남편이라고 할 뿐이며, 지배(支配)하려고 합니다. 한편, 남자 쪽도 자신의 아내는 자기의 소유물로서, 자기주장(自己主張)을 밀고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자기보존(自기保存)을 위한 지배(支配)이며,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부부(夫婦)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夫は男であると同時に、一個の人間でございます。人間である以上は、人間としての道をみはずしてしまう時もござまいす。人間は本來神の子であり、その神の子である道から離れてしまうのも人間です。ですから、道からはずれた時に、愛の手をさしのべ、それを許すだけの妻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
남편(男便)은 남자인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인간인 이상은, 인간(人間)으로서의 길(도리)을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신(神)의 자녀이며, 그 신의 자녀인 길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도 인간(人間)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벗어났을 때에,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그것을 용서(容恕)할만한 아내(妻)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妻の場合も、母であり、女であると同時に一個の人間です。子を産む、子を敎育する、夫に對しての妻であるというだけではなく、やはり女であり、人間であるという自覺を男性にも持っていただきたいものでございます。
아내(妻)의 경우도, 어머니(母)이며, 여자인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人間)입니다.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교육(敎育)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라고 할뿐만 아니라, 역시 여자이며, 인간이라고 하는 자각(自覺)을 남성(男性)도 가져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夫婦としての調和は、先ずお互いが、男であり女であり同時に神の子としての人間であり、それを踏みはずす人間でもあるという自覺がなければならぬのでございます。夫の苦しみは、妻の苦しみであり、妻の喜びは夫の喜び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調和とはそうした環境の中から生れ出てくるものでございます。
부부(夫婦)로서의 조화는, 우선 서로가, 남자(男子)이며 여자(女子)인 동시에 신(神)의 자녀(子女)으로서의 인간(人間)이며, 그것을 벗어나는 인간도 있다라고 하는 자각(自覺)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男便)의 괴로움은, 아내(妻)의 괴로움이며, 아내(妻)의 기쁨은 남편(男便)의 기쁨이 아니면 안 됩니다. 조화(調和)는 그러한 환경(環境)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調和とは、本來どのような意味かと申しますと、神佛の心を心とした心でございます。對人的にはそうした心を持(じ)しながら、人人と接する。しかし、現實は神佛の心とはほど遠いものです。
조화(調和)란, 본래 어떠한 의미(意味)인가 말씀드리자면, 신불(神佛)의 마음을 마음으로 한 마음입니다. 대인적(對人的)으로 그러한 마음을 지니면서, 사람들과 만난다. 그렇지만, 현실은 신불의 마음(心)과는 아주 먼 것입니다.
そこで、現實の中に自分自身を置(お)きながら、つまり現實的調和を図りながら、自然のうちにその環境、雰囲気を高めてゆく。論語の中に和(わ)して同ぜず、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あの意味は調和ということでございます。
그래서, 현실 속에 자기 자신을 두면서, 즉 현실적 조화(調和)를 그려가면서, 자연의 안에 그 환경, 분위기(雰圍氣)를 향상시켜 간다. 논어(論語)의 내용에 화합하지만 같지 않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의미는 조화(調和)라고 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자로편 和而不同 同而不和(남이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군자는 같이 어울려 화합(和)하되 같은 부류가(同)되지 아니하고, 소인은 같은 부류가 되기는 하되(同) 화합(和)하지는 못하니라)
夫婦は、その長い人生において苦樂を共にするというだけではなく、苦樂を通して人間としての喜び、人間としての誇りを自覺することにあります。そうして、その中から神佛の心を心とする心、つまり眞の調和に高めてゆく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います。
부부(夫婦)는, 그 오랜 인생(人生)에 있어 고락(苦樂)을 같이 한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락을 통(通)해서 인간으로서의 기쁨, 인간으로서의 긍지을 자각(自覺)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속에서 신불(神佛)의 마음을 마음(心)으로 하는 마음(心), 즉 참된 조화(調和)로 향상시켜 가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愛というものも、本來の意味は神佛の心でございます。宇宙(うちゅう)即我(そくわれ)――自分自身が宇宙大に廣がった時に、愛の心を体驗するものでございます。それは丁度、くらやみの中にさまよう舟、人人にたいして悟りの岸はこちらですよといって照らす灯台の火でございます。灯台の火そのものは、ただひたすらに光を投げ與える。そしてそれによって、より多くの人人が迷いの岸から悟りの岸に、無事に安着することを願うのみです。人人の幸せを願う心。無償(むしょう)の奉仕、無償の喜びは愛の心を知った時に灯台の火のように燃(も)えるものでございます。
사랑(愛)이라는 것도, 본래(本來)의 의미(意味)는 신불의 마음(心)입니다. 우주즉아(宇宙即我=우주가 즉 자기이다)―― 자기자신을 우주의 크기로 넓혔을 때에, 사랑의 마음을 체험(體驗)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어두운 곳을 떠도는 배(舟), 사람들에 대해서 깨달음의 기슭은 이쪽입니다라고 하며 비추는 등대(燈臺)의 불(火)입니다. 등대의 불 그 자체는, 단지 한결같이 빛을 비춰 줍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혹의 기슭에서 깨달음의 기슭으로, 무사(無事)히 안착(安着)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람들의 행복(幸福)을 바라는 마음. 무상(無償)의 봉사(奉仕), 무상의 기쁨은 사랑의 마음을 알았을 때에 등대(燈臺)의 불(火)처럼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夫婦の愛も、口先や物質面のみにとらわれず、苦樂を通じて、無償(むしょう)の喜びにまで高めてゆきたいものでございます。好きだとか、嫌いとか、錯覺(さっかく)やら興味本位では、夫婦愛というものは生れてきません。貧乏になり、病氣となってもその男を、その女を、信じた時には、現象的には不幸であっても変らぬということ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います。信じた時とは、お互いが理解し合った上でのことでございます。
부부의 사랑도, 입에 발린 말이나 물질적 형대만에 사로잡히지 말고, 고락을 통해서, 무상의 기쁨에까지 향상시켜 가는 것입니다. 좋다거니, 싫다거니, 착각이거니 흥미본위(興味本位)로는, 부부애(夫婦愛)이라는 것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가난(貧困)해지거나, 병(病)이 들어도 그 남자를, 그 여자를, 믿을 때에는, 현실적(現實的)으로 불행(不幸)해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었을 때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이해하고 만났을 맞았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若い男女が、これから結婚しようという場合には、先ず自分の心に聞いて、果たして相手の男性なり女性を、本当に愛せるものかどうか、ただ單に好き嫌いの感構だけ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をたしかめて決めるべきだと思います。
젊은 남녀가, 지금부터 결혼(結婚)하려고 하는 경우(境遇)에는, 우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들어보고, 과연 상대방의 남성과 같은 여성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인지 어떤지, 단지 단순히 좋고 싫음의 감정에 얽힌 것만은 아닌지, 라고 하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결정(決定)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愛とは、現實的には許す行爲でありますが、人を許せば何時の日か自分もまた許(ゆる)されるのでございます。これ法則といって、めぐりめぐって自分にかえってくることを、この際、知っておい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ます。
사랑(愛)이란, 현실적(現實的)으로는 용서(容恕)하는 행위(行爲)입니다만, 남을 용서하면 어느 날엔가 자신(自身)도 또 용서(容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칙이라고 하며, 돌고 돌아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하는 것을, 이 기회에, 알아 두고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慈悲(じひ)を持てば生命に革命(かくめい)が
[자비(慈悲)를 가지면 생명(生命)에 혁명(革命)이]
次に、慈悲ということについて觸(ふ)れてみたいと思います。
다음에, 자비(慈悲)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접해 보려고 합니다.
慈悲というものは、皆樣方が、たとえば困っている人を見た時に、ああ可哀想だ、助けてやろうという気になります。この心は菩薩心(ぼさつしん)といいます。自分の心があの世に通じ心が調和されている時でございます。ところが困っている人を見ても、知らないふりをしている時は、自分自身のことだけ、いわば自己保存の心が强い時でございます。
자비(慈悲)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예를 들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 아 불쌍하다, 도와 주려고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마음(心)은 보살심(菩薩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저 세상에 통하고 마음이 조화(調和)되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봐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의 것만, 말하자면 자기보존(自己保存)의 마음이 강(强)할 때입니다.
人間は、誰がなんといっても、一番可愛いいのは自分でございます。そうして、一番信じられるものも自分であり、自分だけです。親兄弟、親子よりも可愛いいのでございます。ところが、その自分を信じたという事は人も信じられる過程(かてい)を生み出すのでございます。妻であれば先ず自分の夫、その次は自分の母、父。この人達には絶対の信賴をもつものでございます。その信じられるものが子供に移り、隣近所(となりきんじょ)に移ってゆくのでございます。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자신(自身)뿐입니다. 친형제, 부모와 자식보다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自身)을 믿었다고 하는 것은 남도 믿을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내라면 우선의 자신의 남편, 그 다으은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이 사람들에게는 절대의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 믿을 수 있는 것을 아이에게 옮기고, 이웃이나 근처의 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自分が可愛いいとは、普通は肉体の自分が可愛いいのですが、自分の心を信じた時にはその心は他に發展してゆくものでございます。各人の心というものは、陸續きなのでございます。瀬戸內海に点在(てんざい)する島島を皆様ご存じだと思います。水面上に浮んだ一つ一つの島は、いかにもさびしく、ポツンとして孤獨です。ところが、水面下に沈んだ島の部分は、海底を通じて水面上の各島島に陸續きなのでございます。つまり、水面上の島島(人間)は孤獨で離れ離れです。けれども、水面下の島の部分(心)は、一つ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자신을 사랑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보통은 육체의 자신을 사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만, 자신의 마음을 믿었을 때에는 그 마음은 밖으로 발전(發展)해 가는 것입니다. 각자(各者)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 것입니다. 세토나이카이 해상자연국립공원(瀨戶內海)에 섬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수면(水面) 위에 뜬 하나 하나의 섬은, 정말로 쓸쓸하고, 뚝뚝 떨어져서 고독합니다. 그런데, 수면 아래에 잠긴 섬의 부분(部分)은, 해저(海底)를 통해서 수면 위의 각 섬(島)들은 끊임없이 이어진 것입니다. 즉, 수면 위의 섬들(인간)은 고독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면 아래의 섬의 부분(마음)은,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ですから、自分の心を信じたときは、他の人の心をも信じられてくるのでございます。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믿었을 때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人の心、佛心というものは、轉生輪廻(てんせいりんね)という長い地上での生活、實在界での魂の練磨を經てきているのですから、それぞれ持ち合わせているものでございます。
사람의 마음, 불심(佛心)이라고 하는 것은, 전생윤회(轉生輪廻)라고 하는 오랜 지상에서의 생활, 실재계(=저 세상)에서의 영혼(魂)의 연마(練摩)를 거쳐 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겸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こうして、時に當り佛心がちょくちょく出る方と、出ない方とがあります。本來は、皆持ち合わせているのですが、地上での生活環境にふり回わされて、佛心が奧にかくれてしまう方もあるのでございます。可哀想な人を見て、氣の毒だ、なんとか助けてやりたいと思う心が湧(わ)いてきたその心を佛心というのでございます。そうして、こうした心が隣りから隣りへ移ってゆくことを慈悲というのです。
이렇게 해서, 시기(時期)를 맞아 불심(佛心)이 이따금 나오는 분과,나오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본래(本來)는, 모두 겸비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지상(地上)에서의 생활환경(生活環境)에 휘둘려져서, 불심이 깊숙히 숨어 버리는 분도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안됐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고 하는 생각하는 마음이 용솟음쳐 나온 그 마음을 불심(佛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마음(心)이 이웃에서 이웃으로 옮겨 가는 것을 자비(慈悲)라고 하는 것입니다.
慈悲とは、めぐむ與えることです。通常は情(なさけ)ともいえます。
자비(慈悲)란, 은혜(恩惠,사랑,인정)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통상은 情(인정,동정,자비,관대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ところが、自分に出來ないこと出來そうにないことを引受けてしまう人がありますが、こういう心は、慈悲ではなく慈悲魔(じひま)というのでございます。自分自身が現實というもの、自分の置かれた立場の中で、可能な範圍(はんい)でしてあげることは、これは慈悲でございます。しかし安請合(やすうけあ)いは慈悲ではなく、自己滿足であり、自分自身を苦しい立場に追(お)いこんでしまいます。また、慈悲の押し賣りもいけません。
그런데, 스스로 할 수 없는 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을 넘겨 받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자신에게 가능하지 않은 일을 마치 가능할 것 같은 생각으로 인수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마음은, 자비가 아니라 자비마(慈悲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현실(現實)이라고 하는 것, 자신의 처해진 입장(立場) 속에서, 가능(可能)한 범위(範圍) 안에서 해주는 것은(=베풀어 주는 것은), 이것은 자비(慈悲)입니다. 하지만, 경솔하게 떠맡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자기만족(自己滿足)이며, 자기자신(自기自身)을 괴로운 입장에 빠트려 버립니다. 또, 자비를 강매[(비유적으로)(상대의 기분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무슨 일을 일방적으로 함)]해서도 안 됩니다.
△위 그런데..부터.안 됩니다..까지는, 다른 분이 번역과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원문 참조하세요. 비공개 했습니다.
이미 스크랩해 가신 분들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2016년 09월 15일 수요일, 현재, 공개처리 했습니다.
慈悲というものは生活の中において、近所の人、あるいは友人知人がそばに來て、何となく心の安らぎを感じ、何となく胸の內を話したくなるというのが、慈悲であり、愛というものでございます。
자비(慈悲)라고 하는 것은 생활(生活) 속에 있어서, 주변(周邊)의 사람, 혹은 친구 지인이 옆에 와서, 웬지 모르게 마음의 평온(平溫)함을 느끼고, 웬지 모르게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는 것이, 자비(慈悲)이며, 사랑(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そうした廣い心を持ち、そのような生活をしてゆくことにより、その人の心は一層高まり、實在界に無限に伸びてゆくものでございます。
그러한 넓은 마음을 지녀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해 나가는 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마음은 한층 향상되고, 실재계(實在界)로 끝도 없이(無限)으로 성장(成長)해 가는 것입니다.
※실재계=저 세상=극락천국=저승 ^^ ↔ 우리들 인간의 영혼의 고향
法を聞きに來ることが喜びではなく、その法を、日日の生活に生かすことが大事なのでございます。自己滿足は循環の法則にしたがい、途中で遮斷(しゃだん)されてしまいます。
법(法)을 들으러 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그 법을, 일상의 생활에 활용(活用)하는 일이 중요(소중)한 것입니다. 자기만족(自己満足)은 순환(循環)의 법칙(法則)에 따라서, 도중에 차단(遮斷)되어 버립니다.
私共の吐(は)く炭酸(たんさん)くガスは、綠の葉には滋養(じよう)となり、綠の葉から出る酸素を私達が吸(す)っているのでございます。生命も又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しながら循環しているのでございます。法を聞くだけでは、自分の中でとまってしまいます。とめれば光は遮斷(しゃだん)されてしまいます。循環してこないのでございます。
우리들의 토(吐)해내는 탄산가스(Gas)는, 초록(草綠)의 잎에는 자양(滋養)이 되고, 초록의 잎(葉)에서 나오는 산소(酸素)를 우리들이 호흡(呼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生命)도 또 전생윤회(轉生輪廻)하면서 순환(循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法)을 듣는 것만으로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잠들어 버립니다. 멈추면 빛(光)은 차단(遮斷)되어 버립니다. 순환(循環)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멈추다, 잠들다..발음이 같아서요. 이해해 주십시오.;;
私が、皆樣に愛とか慈悲について申上げていますが、このことは私の使命でもあり、法を伝えることによって大自然から循環されるのでございます。
제가, 여러분에게 사랑이라든지 자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것은 저의 사명(使命)이기도 하며, 법(法)을 전하는 것에 의해서 대자연(大自然)으로부터 순환(循環)되는 것입니다.
皆樣方の一人一人が、慈悲と愛の心を持ち、より多くの人を一人でも余計に救ってゆく心。貴方のそばに来ると安らぎがあるというような廣い心を持って、日日の生活に励んで下されば、皆樣方の守護靈を通じて、生活そのものに大革命がおこる筈でございます。 page 101~119.
여러분의 한사람 한사람이,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갖고, 보다 많은 사람을 한명이라도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마음. 당신의 곁에 오면 평온(平溫)함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과 같은 넓은 마음을 가져서, 일상의 생활에 힘써 주시면, 여러분의 수호령(守護靈)을 통해서, 생활(生活) 그 자체에 대혁명(大革命)이 일어날 것입니다.
page 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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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짧지만,놀라운 내용입니다. 번역이 참 어려웠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카하시 신지님 글이 아니라, 제자분 글 같으네요, 여성인데 문장이 생소해서, 이해하는데 상당히 곤혹스러웠습니다. 잘 읽으시고 음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010년에 일입니다.----------------------------
-------------다음은 <생명의 유전을 알다-夏栗德子(나쯔쿠리 도쿠꼬)>의 글입니다------------
이글은 2010년 4월 01일 올린 글입니다. 현재 날짜인 2011년 11월 7일 월요일로 변경합니다.
오늘,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에 날짜로 변경하며, 나뉘어진 것을, 한 권으로 묶습니다.
※출처:※출처:「生きる道」(あなたにも過去世がある)改題『天使の再來』 昭和四十五年一月吉日 「慈悲と愛について」http://yukis0000.blog78.fc2.com/blog-category-2.html,
page 119 *** 體驗は自覺をうなかず-- 체험은 자각을 촉구한다~~
人は體驗という行を通じて,寶を天に積むことができる。行のない體驗はあり得ない。人生という旅は天國にもつうじ,地獄にも落ちる修行場である。
사람은 체험이라고 하는 실행을 통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다. 실행의 없는 체험은 있을 수가 없다. 인생이라고 하는 여행은 천국으로도 통하고, 지옥으로도 떨어지는 수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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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命(せいめい)の流轉(るてん)を知る
▷ 생명(生命)의 유전(流轉)을 알다 ◁
夏(なつ) 栗(くり) 徳(とく) 子(こ)
나쯔쿠리 도쿠꼬 주부(主婦)
潜在意識の紐(ひも)を解(と)く
♧ 잠재의식의 끈을 풀다 ♧
私は昨年の五月二日の夜に、高橋先生の御力に依りまして靈道(れいどう)が開らかれた者でございます。それによって潜在意識が呼び起され自分の過去世(かこせ)を想い出す事が出來たのでございます。そして人間の生命は永遠に流轉(るてん)している事を自分自体で確認致しました。過去に於いて此の神理を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とか靈魂(れいこん)の不滅とか文字や言葉で表現されて居りましたが、その實体を知るものはいなか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저는 작년 5월 2일 밤에, 다카하시 신지의 힘에 의해서 영도(靈道)가 열리게 된 사람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잠재의식(潜在意識)이 불러 일으켜 저의 과거세를 생각해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생명은 영원히 유전(流轉)하고 있는 것을 저 스스로 인식하였습니다. 과거에 있어서 이 신리를 전생윤회(轉生輪廻)라든가 영혼의 불멸이라든가 문자나 말로 표현되고 있었지만, 그 실체(實体)를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そして私にはペテロ樣の弟子フリテイ樣が指導していられる事を悟(さと)り、更にフリテイ樣の御力を借り私の潜在意識が紐解(ひもと)かれ、徐徐に自分の過去世を想い出し人間の生命が輪廻(りんね)している事を確信した次第でございます。現在まで呼び起された記憶をたどって私の生命の流轉の過程をこの誌上をお借りして發表させて頂きます。以下それぞれこの地上界に肉体を持った當時の言葉でお話を致します。
그래서 저에게는 베드로의 제자 후리테님이 지도하고 말하신 것을 깨닫고, 더욱 후리테님의 힘을 빌려 저의 잠재의식이 끈을 풀려서, 서서히 저 자신의 과거세를 생각해 내고 인간의 생명(生命)이 윤회(輪廻)하고 있는 것을 확신한 다음입니다. 현재까지 불러 일으킨 기억을 더듬어 저의 생명의 유전의 과정을 이 지상을 빌려서 발표하려고 합니다. 이하 저마다 이 지상계에 육체를 지녔던 당시의 말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私は紀元前約一万二千年の頃、廣大なアトランテス大陸で一大家族を引き連れ、常に動物や嚴しい自然から身を守り乍ら、環境の良い所を求め移住して暮らして居りました。名前をフォーフエロワウと申し男性でございました。その後私は紀元前約九千年の頃、アトランテス帝國で生れ名前をファウリヤリイと申し男性でございました。
저는 기원전 약 1만 2천년 경, 광대한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 대가족을 이끌고, 항상 동물이나 혹독한 자연에서 몸을 지키는 상태에서, 환경의 좋은 장소를 찾아 이주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포우에로와우라고 하는 남성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기원전 약 9천년 경, 아틀란티스 제국에서 태어나 이름을 파우리야리이 라고 하는 남성이었습니다.
私はアガシヤー大王樣にお仕(つか)えした神官で祭事を司(つか)さどった者でした。この時代は文明もかなり高度なもので人々の生活も豊かでありましたが、心不在で人人の心は亂れて居りました。
저는 아가샤(Agasah) 대왕님를 섬기는 신관(神官)으로 제사를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이 시대는 문명도 상당히 고도한 것으로 사람들의 생활도 풍요했습니다만, 마음의 부재로 사람들의 마음은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こうした世の中を憂(うれ)い、アガシヤー大王樣は神理を說かれ自然の惠(めぐ)みに對し感謝する樣人人に呼びかけたのですが、惡魔に心を賣った人達に大王樣を始め私達は捕(とら)えられ大勢の人人の前で見せしめの爲に處刑(しょけい)されたのでございます。
이러한 세상을 걱정해서, 아가샤 대왕님은 신리를 설명하며 자연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것입니다만, 악마(惡魔)에게 마음을 팔았던 사람들에게 대왕님을 비롯해서 우리들은 사로잡혀서 여러 사람 앞에서 본보기로 삼아 처형(處刑)되었던 것입니다.
※ △ 악마,천상계의 천사들이나 새로운 부활 동영상 번역분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私達はその時、來世を信じ未來永劫(えいごう)いつも大王樣のお側(そば)にあって、いつの世かお互いに又、肉体を持って神理を人人に廣めようとお約束致しました。
우리들은 그 때, 내세를 믿고 미래 영겁에 관해서도 대왕님의 곁에 있어서, 언제의 세상인가 서로 또, 육체를 가지고 신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자고 약속했습니다.
更に又私は現在南米のペルーといわれている國で男性として生れ、名前をセンツエーラ・アル・カントーラと申しました。代代國王樣の配繕(はいぜん)係としてお仕(つか)えした家柄でございました。當時の文明は古代エジプト文明の影響(えいきょう)を受け、山中にかなりの文明が開らかれて居りました。慈悲(じひ)深き國王樣は私達にいつも信仰に就いてお話され、國民は皆太陽信仰を致しました。
또 다시 저는 현재 남미의 페루라고 불리우고 있는 나라에서 남성으로서 태어나, 이름을 산체라에이라・알・칸토라 라고 했습니다. 대대로 국왕님의 배선(配繕) 담당자(係)로서 시중을 들던 집안이었습니다. 당시의 문명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산중에 상당한 문명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자비심이 깊은 국왕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신앙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국민은 모두 태양신앙(太陽信仰)을 행했습니다.
※태양신앙 : 이집트의 태양신앙의 의미는, 태양처럼 둥글고 밝고 평등하며 풍부한 마음을 지녀야한다는 의미입니다.
ある時、外國から侵略(しんりゃく)を受けましたが、國民の血を流す事を避ける爲に國王樣は自ら王位を捨て山中に逃がれ、インディオ達と共に神理に基(もと)づいた生活をされ、人間は皆平等であると共に、働き乍ら樂しく暮らしました。
어느 날,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습니다만, 국민의 피를 흘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국왕님은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산중으로 피해, 인디오들과 함께 신리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게 하시고, 인간은 모두 평등한 것과 같이, 일하며 즐겁게(편안하게) 살았습니다.
私はその後エジプトに女性として生れ名前をフエリカと申し、オーディヤ・ラカルステイという武將の妻でございました。又、紀元前六百年の頃にインドに男性として生れ、名前をワーリヤスタデイと申し、フイフイ敎の行者でヒマラヤにおいて火を燃やし動物より身を守り乍ら肉体行を致しました。
저는 그 후 이집트에 여성으로서 태어나 이름을 후에리카라고 하고, 오디야・라카르스티라고 하는 무장의 아내었습니다. 또, 기원 전 6백년경의 경에 인도에 남성으로서 태어나, 이름을 워리야스타티라고 하고, 후이후이교(회회교=이슬람교)의 수행자로서 히말라야에서 불을 태워 동물로부터 몸을 지키며 육체수행(肉体行)을 했습니다.
自我(じが)煩惱(ぼんのう)を滅却(めっきゃく)するにはあらゆる行(ぎょう)にたえる肉体を練磨(れんま)する事にあると信じ、不可能な事はないと荒行(あらぎょう)を致しました。
자아번뇌를 멸각(滅却=조금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림)하는 데에는 모든 행위를 참고 견디는 육체를 연마하는 것에 있다고 믿고, 불가능한 것은 없다라고 모진 고행(荒行=수도(修道)하는 사람이 괴로움을 참으며 수행(修行)하는 일)을 했습니다.
大勢の行者達と一緒に修行している所にゴーダマ・シッタルダ樣がお見えになり、悟りの道についてよくお話し合った記憶がございます。そのうちに私は將來、この方は偉大な方になられ、多くの迷える衆生を救われる方になられると悟りましたが、老令の爲にその日を待たず、ついにこの世を去りました。
수많은 수행자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는 장소에 고다마・싯타르다님을 모셔서, 깨달음의 길에 대해서 자주 서로 이야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장래, 이 분은 위대한 분이 되시어, 많은 방황하는 중생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 될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만, 나이가 많기 때문에 그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更に一世紀に女性としてエジプトに生れ、名前をセテリヤと申し、ペテロ樣の弟子オタオと結婚し終生イエス樣の敎えを夫婦共に傳道して地味な生涯(しょうがい)を送りました。
다시 1세기에 여성으로서 이집트에 태어나, 이름을 세테리야라고 하고, 베드로님의 제자 오타오와 결혼해서 평생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부가 함께 전도(傳道)하며 검소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예수님 :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류를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신 빛의 대천사이며 구세주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어부였으며, 예수님이 첫번째 제자로서, 수제자입니다.
更に流轉して私は五世紀にチベットに男性として生れ名前をタタクリと申します。私は子供の頃より佛敎に興味を持ち、インドや中國の僧侶(そうりょ)から敎えを受け、ヒマラヤで肉体行を致しましたが、中國に天台智顗(てんだいちぎ)樣という高僧(こうそう)が居られる事を知り、はるばる中國の天台山に修行の爲入山し、天台經、並びに法華經(ほけきょう)を學んだ僧侶でございます。
또 다시 유전(流轉:윤회)해서 저는 5세기에 티벳에 남성으로서 태어나 이름을 타타쿠리라고 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불교에 흥미를 가져, 인도나 중국의 승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히말라야에서 육체수행을 했습니다만, 중국에 천태지의(天台智顗)님이라고 하는 고승이 계시는 것을 알고, 멀리 중국의 천태산(天台山)에 수행을 위해 입산하고, 천태경(天台経), 및 법화경(法華経)을 배운 승려(僧侶)입니다.
※법화경의 의미는, 가르침의 글들 중에 여러 군데, 있습니다. 찾아서 읽어보세요.
そして八世紀にも中國で生れ名前をトワンティンホワンティンと申しました。
その頃の中國は非常に文化が榮え、學問を身につけ官吏になる事が最大の出世でありました爲に私も一心に儒學(じゅかく)を修め、自分の立身出世を願ったのですが、後に無情を感じ一切を捨てて出家し天台山に入山致し佛敎を學びました。
그리고 8세기에도 중국에서 태어나 이름을 토완틴호완틴이라고 했습니다. 그 무렵의 중국은 매우 문화가 번영하고, 학문을 몸에 익혀 관리(官吏)가 되는 것이 최대의 출세였기 때문에 나도 한마음으로 유학(儒學=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을 익혀서, 저 자신의 입신출세(立身出世)를 원했던 것입니다만, 나중에 무정(無情)을 느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해서 천태산에 입산해서 불교(佛敎)를 배웠습니다
その頃日本より留學されて來られた最澄(さいちょう)樣(傳敎大師)と共に法華經を學び、最澄樣のお誘いに應じ天台敎を廣める爲、この日本の延曆寺((えんりゃくじ)に參り、若い僧侶達に法華經の解說を致し、後に歸化し日本名を源信(げんしん)と申しました。
그 무렵 일본에서 유학을 온 사이쵸(最澄=전교대사[傳敎大師])님과 함께 법화경(法華經)을 배워, 사이초(最澄)님의 권유에 응해서 천태교(天台敎)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일본의 연력사(延暦寺)에 모여, 젊은 승려들에게 법화경의 해설을 하고, 나중에 귀화해서 일본명을 원신(源信)이라고 했습니다.
それより後十二世紀にはこの日本に女性として生れました。北条氏に由緣(ゆしょ)ある者で夫は政治家でございました。私は夫と共に禪(ぜん)を學び夫亡き後は世の慣(なら)いに従い尼(あま)となり鎌倉で靜かに余生を過しました』
그 후 12세기에는 이 일본에 여성으로서 태어났습니다. 호조씨(北条氏=골육 상쟁하는 난세에 초대의 가르침을 관철하는 일족의 인연을 중시하는 무장의 씨족)에 연유(有緣)한 사람으로 남편은 정치가였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참선(禪)을 배워 남편이 죽은 후에는 세간의 풍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카마쿠라(鎌倉:오늘날의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의 동남부의 시[市])에서 조용히 여생(餘生)을 보냈습니다』
★카마쿠라(鎌倉)에서 조용히 : 번역상의 누락부분입니다. 죄송합니다. (2011년에)
調和という輪をつくろう
♧조화라고 하는 수레바퀴를 수리하다♧
(이 글은, 여성분의 자신에 대한 과거세를 알고 고백하는 글의 형식입니다. 글자의 말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以上申し述べました樣に肉体は亡(ほろ)んでも靈魂(れいこん)は永遠に不滅で潜在意識にはっきりと記錄されている事を知りました。高橋先生がいつもお話をされます樣に本体を中心として五人の分身が次元の異った世界よりこの世に肉体を持ち心をみがき修行するという事は神理でございます。
이상 말씀 드렸듯이 육체(肉体)는 없어지더라도 영혼(靈魂)은 영원(永遠)토록 불멸(不滅)하고 잠재 의식(潜在意識)에 확실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타카하시 선생님(高橋先生)이 항상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본체(本体)를 중심(中心)으로 다섯 명(五人)의 분신(分身)이 차원(次元)이 다른 세계(世界)에서 이 세상에 육체(肉體)를 갖고 마음을 닦으며 수행(修行)한다고 하는 것은 신리(神理)입니다.
※본체(本体)☜ 본체와 분신의 관계는 제 블로그에 많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신리(神理)란 단어는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용어해설편을 참조하세요. 이미 올렸습니다. 문장 마다 간간히 보입니다. 신리는, 정법, 신의 빛, 신불을 말합니다.
私は下町生れの下町育ちで敎養もなく、性來の不勉强者であまり讀書等もせず、又、宗敎的な事柄に對しても人樣に比べ探究(たんきゅう)する樣な事はなく、大變平凡な者ですが、先生との御錄(ごえん)にふれ正法を知り每日の生活を報恩感謝と反省で送った事に依り心の窓は開らかれ、安らぎのある日日を過ごせる樣になったのでございます。
저는 깡촌태생(下町生れ)의 깡촌에서 자라서 교양(敎養)도 없고, 천성(性來)이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자(不勉强者)여서 그다지 독서 따위도 하지 않고, 또, 종교적인 일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탐구와 같은 일은 없고, 매우 평범한 사람입니다만, 선생님과의 인연에 접해 정법(正法)을 알고 매일의 생활을 보은감사(報恩感謝)와 반성(反省)으로 보낸 것에 의해서 마음의 창(心の窓)은 열리게 되어, 평온함의 있는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私は下町生れの下町育ちで敎養もなく에서, 깡촌태생으로 깡촌에서 자라 교양도 없고, 라고 했는데, 도시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それまでの私はやはり人間として子寶に惠(めぐ)まれない事や姑(しゆと)と嫁(よめ)の問題等いろいろと惱み苦しんだ事もございました。しかし乍ら生命(せいめい)流轉(るてん)の中から人間は皆、兄弟であり同級生である事を悟(さと)りました。現世では姑と嫁の問題は永遠のテーマとされて居りますが、一人一人が心を開く事に依り解決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여태까지 저는 역시 인간(人間)으로서 아직 자식(子寶)을 두지도 못한 것이랑 시어머니(姑)와 며느리(嫁)의 문제(問題) 등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괴로워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명 유전(生命流轉:생명의 환생)의 가운데에서 인간(人間)은 모두, 형제(兄弟)이며 동급생(同級生)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세(現世)에서는 시어머니(姑)와 며느리(嫁)와의 문제(問題)는 영원한 테마(주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여는 것에 의해서 해결(解決)되는 것은 아닐까요.
私達はよく初對面の御拶挨を致しますが、もとを正せばいつの日かこの世で會っているのでございます。人間の生命はあやなす織物(おりもの)と同じで、一本一本糸をほぐしてみればどこかで交叉(こうさ)しているものです。そして又私は自分の過去のカルマを知り自分の靈性(れいせい)をみがき乍(なが)らそのカルマを修正し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す。即ち自分の過去を振(ふ)り返(かえ)ってみますと、皆自己に對しても他人に對してもあまりにも嚴しい事を知りました。現世では相手を許す心、つまり寬容(かんよう)の精神を養わ(やしな)なければならない事を自覺致しました。
우리들은 자주 초면에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말)을 합니다만, 알고보면(もとを正せば) 어느 날인가 이 세상에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의 생명(生命)은 아름다운 무늬나 색깔로 채색한 직물(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는 직물)과 같고, 한올한올 실을 풀어 보면 어디선가 서로 마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저는 제 자신의 과거(過去)의 카르마(업)를 알고 저의 영성(靈性)을 닦으며 그 카르마(업)을 수정(修正)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제 자신의 과거(過去)를 뒤돌아보면, 모두 저 자신(自己)에 대해서도 타인(他人)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엄격한 것을 알았습니다. 현세(現世)에서는 상대를 용서하는 마음(許す心), 즉 관용(寬容)의 정신(精神)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자각(自覺)했습니다.
斯樣心境に到達出來ました事はこれ偏(ひと)えに高橋先生の御導きの賜と心より感謝して居ります。今後は先生より頂きました力を自分のものだけとせず、人人の先達(せんだつ)となって潜在意識の開發に少しでもお役に立ちたい所存でございます。
이러한 심경(心境)에 도달(到達)할 수 있었던 일은 전적으로 다카하시 선생님(高橋先生)의 가르침 덕분(御導きの賜)이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향후(今後)는 선생님에게서 받았던 힘(力)을 제 자신의 것만으로 하지 않고, 사람들(人人)의 선배(先達)가 되어 잠재의식(潜在意識)의 개발(開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소견(생각:所存)입니다.
そして私は自分の体驗から聲を大にして申し上げたい事は如何に八正道に基づいた生活をする事が大切であるかという事でございます。私達は靈体淨化(れいたいじょうか)に努力し皆兄弟として手をつなぎ調和という輪(わ)になってお互いに導き、又、導かれ乍(なが)ら愉しく此の世の修行をして人格向上に努力致したいと念願しております。
page 121~125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의 체험(体驗)에서 목소리를 높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떻게(어떤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체정화(靈体淨化)에 노력(努力)하고 모두 형제(兄弟)로서 손을 잡고 조화(調和)라고 하는 수레바퀴(輪)가 되어 서로 가르치고(이끌고), 또, 이끌어 내면서(가르침을 받으면서) 즐겁게 이 세상(此の世)의 수행(修行)을 하고 인격 향상(人格向上)에 노력(努力)에 임해 주시었으면 좋겠다고 염원(念願)하고 있습니다.
pgae 121~125
---이 주부님은 남자로 여자로 여러번 환생하지요.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본체와 분신에 관한 글을 읽어보시면 이해가 되실것입니다. 인간은 인간 고유의 영혼으로 환생하며, 동물은 동물의 영혼으로 환생합니다. ----
-------- 다음 페이지의 글은 <「참된 종교에 귀의」 마야하라 렌신(馬屋原 蓮心)의 글입니다---------
이 글은 2010년 4월 1일 올린 글입니다. 현재 날짜인 2011년 11월 7일 월요일로 변경합니다.
오늘,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의 날짜로 변경하며, 나뉘어진 것을, 한 권으로 묶습니다.
★실수로, 스크랩 금지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크립 금지를 풀어 놓았습니다.
※출처 :「生きる道」(あなたにも過去世がある)改題 『天使の再来』「體驗は自覺をうなかず」 <生命の流転を知る>
※출처 : http://tenshinosairai.seesaa.net/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이 내용을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고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께서 뜻이 있어서, 천사의 재래 내용에 들어있는 글인지라 올리긴 올립니다만, 단어들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여러번 꼼꼼히 읽으셔야 되리라고 봅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일부의 사전상에 안 나오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마야하라 렌싱이란 분의...쓴 내용의 단어를 참고해서..가급적 쉽게 주설명을 첨가했습니다.
상당히, 골치가 찌끈거리게 하는 문체입니다. 상황을 보아서, 삭제하던가, 비공개 하던가 할까 합니다.
했던 것을,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에, 함께 묶어 공개처리했습니다.
眞の宗敎に歸依(きえ)せよ・・・・・・・・・・・・・・・・・・・・・
참된 종교에 귀의하세요・・・・・・・・・・・・・・・・・・・・・
馬(ま)屋(や)原(はら) 蓮(れん)心(しん)
마야하라 렌신
(會社顧客) (회사고객)
真の宗教と科学
[참된 종교(宗敎)와 과학(科學)]
人間が生命(いのち)を投(な)げ出して信ずべき唯一最高の宗敎とは如何なるものか。換言(かげん)すると、在來(ざいらい)、世界にある佛敎、基督(キリスト)敎、神道その他最近巷(ちまた)を蔽(おお)っている新興宗敎などは、その儘(まま)でよいのかどうか。宗敎の說き方には色々あるが、眞の宗敎は一切を統一して一元であるべきはずと思います。
인간이 생명을 바쳐서 믿어야할 유일한 최고의 종교란 어떠한 것일까? 바꾸어 말하면, 재래, 세계에 있는 불교, 기독교(그리스도교), 신도[=일본 고유의 민족종교] 그 외 최근 세상을 덮고 있는 신흥종교 등은, 그대로 좋은 것일까 어떨까. 종교의 설교 방식에는 가지각색이지만, 진정한 종교는 전부를 통일하고 사물(事物)의 근원(根源)이 오직 하나이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物質科學は進むだけ進み、遂(つい)に最近原子核(げんしかく)科學に達して、ほぼその極(きょく)に入ったかに見えます。
물질 과학은 진보할 만큼 진보하고, 마침내 최근 원자핵 과학에 도달하고, 거의 그 한계점에 다달았다고 보입니다.
本来物質の役割(やくわり)は、精神(心)文化進展の補助劑(ほじょざい)であり、前そなえである。精神文明はパプテストのヨハネの任務であり、精神文化の靴の紐(ひも)を解(と)くものであります。
본래 물질의 역할은, 정신(마음)문화 발전의 보조제이며,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대한 준비다. 정신문명은 세례[침례] 요한의 임무이며, 정신문화의 신발의 끈을 푸는 것입니다.
今後の文化は是迄(これまで)のように、物質と精神、即ち科學と宗敎とが分離(ぶんり)したり對立鬪爭(とうそう)する相對的(そうたいてき)であってはならない色心不二(しきしんふじ)であって相對は摩擦(まさつ)、抵抗(ていこう)、不調和の元(もと)であります。
금후의 문화는 지금까지와 같이, 물질과 정신, 즉 과학과 종교든가를 분리하거나 대립 투쟁하는 상대적이어서는 안 되는 색심불이이며 상대는 마찰, 저항, 부조화의 근원입니다.
科學は宗敎の忠僕(ちゅうぼく)となって、兩者は生命と肉体との關係に立つのが筋合(すじあい)であります。
과학은 종교의 충복이 되어, 양자는 생명과 육체와의 관계에 서는 것이 사물의 도리(=확실한 이유나 근거가 있는 관계)입니다.
世界万民が等(ひと)しく、そうだと公認する不動の事實を出發点として宗敎を論じないと、是迄(これまで)のような抽象的な(ちゅうしょうてき)觀念論になったり憶說(おくせつ)になったりして、理論の根據が宙に迷ってしまうのであります。キリスト敎や佛敎が今日にては一種の觀念に陷(おち)り易(やす)い弱味の理由がここにあるのであります。
세계 만민이 평등하게, 그렇다라고 공인하는 부동의 사실을 출발점으로 해서 종교를 논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와 같은 추상정인 관념론이 되거나 억설이 되거나 해서, 이론의 근거가 허공을 헤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나 불교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관념에 빠지기 쉬운 약점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科學は何(なん)でも彼(か)でも、赤(せき)裸(ら)裸(ら)にむき出して少しの秘幕(ひまく)をも被(お)わない、現實そのものとして宇宙の眞理を取扱って行くものです。只一つ、これ迄の科學の取扱い方と、宗敎眞理を取扱う時の靈的や科學の扱い方の相違点(そういてん)があります。
과학은 무엇이든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조금 비밀의 장막을 덮지 않는, 현실 그 자체로서 우주의 진리를 취급해 가는 것입니다. 단 한가지, 지금까지의 과학의 취급하는 방법과, 종교 진리를 취급할 때의 영적이나 과학의 취급하는 방법은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科學は物質的尺度(しゃくど)を採用するのに對し、宗敎は靈(心)の在り方を標準尺度(ひょうじゅんしゃくど)に採用する一点にあります。即ち宗敎の世界は始めから見えるものが對象にならず、見えない心とか神とか靈とかが對象になっておるのであります。それならば宗敎の世界は何も無い世界かと言うと、そうではない。無い處か、大いに有(ゆう)の世界なのであります。只(だだ)吾吾(われわれ)人間の肉体的五官(眼耳鼻舌身)では、その有の本源が普通の人間では、どうしてもつかめない、知られないと言う丈(だけ)のことであります。この宇宙の眞理を悟った人は、三世の世界が何も彼も見透(みとお)しが出來るのであります。
과학은 물질적 척도을 채용하는 것에 대해서, 종교는 영혼(마음)의 본연의 모습을 표준 척도로 채용하는 하나의 점에 있습니다. 즉 종교의 세계는 처음부터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든가 신이라든가 영이라든가를 대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세계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일까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 없는 곳일까, 크게 존재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 인간의 육체적 오관(안이비설신)으로는, 그 존재하는 본원이 보통의 사람에게는, 아무리 해도 눈에 띠지 않는다,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할 뿐인 것입니다. 이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삼세의 세계를 무엇이든지 꿰뚫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人間を宇宙の法則に乘せる方法が宗敎であります。宇宙の極は(きょく)大靈(だいれい)(神)であるから、靈覺のない即ち神靈と直通し得ない人人が佛典とか聖書の請賣りだけで人を救うことは無理があります。抽象的な(ちゅうしょうてき)觀念論(かんねんろん)に終り眞實の救濟は不可能であります。それは人間の運命(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や心を見透すことも、人の狀態を眼前に見る如く判る靈覺者がいないからであります。
인간을 우주의 법칙에 싣는 방법이 종교입니다. 우주의 끝은 대령(신)이기 때문에, 영각의 없다 즉 신령과 직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불교의 경전이라든가 신,구약성서의 판매만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추상적인 관념론으로 끝나고 진실의 구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전생윤회)이나 마음을 간파하는 일도, 사람의 상태를 눈앞에서 보듯이 판단하는 영각자[=영혼의 실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今の宗敎の指導者の殆(ほと)んどは、靈覺の無い神靈と直通し得ない人人が、佛典とか聖書を請売(うけう)りして、世に迷っている善男善女の小羊を說敎とか御祈りとか呪文(じゅもん)とか念佛とか御題目(おだいもく)とか、凡そそういうもので暗示を與えて如何にも御利益があるものとして人人の心を釣(つ)る。槪(おおむ)ねの人人が病氣とか、貧乏とかをその原因を極めずして、我利我欲で願をかけるから、つまり、釣られに行くのであるから、つり堀りの魚より、もっと雜作がないのであります。有難や有難やの暗示にかかる。その上靈驗あらたかな如き体驗談を衆團の場で演出させて、さも御利益があるが如き演劇に魅惑(みわく)され恍惚(こうこつ)とさせ一層我欲をつのらせる。その上折伏(しゃくぶく)とか御導きとかの方法により多くの人人を入會せしめた者に、班長とか組長とか部長とかの名誉地位的のもので釣(つ)る。まるで人の我欲をつり掘りして莫大な御布施(ふせ)を集め、それを以て大殿堂なり學校なりを經營している人間つり掘り業者と化しています。實に救われる者は衆生に非ずして幹部諸公の人々のみで一將功成って万骨枯るるのたぐいであります。
오늘날의 종교의 지도자의 대부분은, 영각[=영혼의 실상인 진리를 깨달음)의 없는 신령[신]과 직접 통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불교의 경전이라든가 신,구약성서를 판매하고, 세상에 헤매고 있는 선남선녀의 어린 양을 설교라든가 기도라든가 주문이라든가 염불이라든가 실행되지도 않을 그럴듯한 주장이라든가, 대강 그러한 것으로 암시를 주고 자못 은혜[신불의 혜택=영험]가 있는 것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대체로 사람들이 질병이라든가, 가난이라든가를 그 원인을 끝내지 않고, 사리사욕[我利我欲]으로 기원[발원]하기 때문에, 즉, 유혹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유로낚시터의 물고기 보다, 더 간단한 것입니다. 고맙다라고 고맙다라는 암시에 걸린다. 더욱 영험하고 영험한 듯한 체험담을 교단의 많은 사람들의 있는 장소에서 연출시키고, 자못 영험함이 있는 듯한 연출에 미혹되어 황홀하게 되어 한층 더 아욕(자신의 욕망)을 더욱 격화시킨다. 게다가 절복[=상대편을 꺾어 자기에게 따르게 함.〈佛〉 악인이나 악법(나쁜 종교)을 꺾어 굴복시킴. 중생을 미망(迷妄)에서 깨게 하여 불법으로 인도하는 수단]이라든가, 선도라든가의 방법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을 입회시킨 사람에게, 반장이라든가 조장이라든가 부장이라든가의 명예 지위적인 것으로 유혹한다. 전혀 사람의 아욕을 유료낚시터로 해서 막대한 보시를 모우고, 그것을 사용해서[가지고] 대전당과 같은 학교와 같은 것을 경영하고 있는 인간 유로낚시터 업자로 변하고 있습니다. 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중생에게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간부 여러분의 사람들을 보고 한 장수가 공명을 세울 수 있음은 수많은 병사가 전장에서 죽었기 때문인 것 같은 정도의 것으로 비견합니다.
つまり現在の佛敎とかキリスト敎の信仰というものは一つの觀念的學問の域を越えず、神とか佛とかの直接の交涉なしに佛敎とか聖書の講義をしておる講師として生活している月給取であるから『カラキリスト』『カラ祈禱』『カラ念佛』『カラ題目』に終るのであります。
즉 현재의 불교라든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관념적 학문의 구역을 뛰어넘지 않고, 신이라든가 부처라든가의 직접 교섭없이 불교라든가 성서[성경]의 강의를 하고 있는 강사로 해서 생활하고 있는 월급쟁이 때문에 『 거짓 그리스도』 『거짓 기도』『거짓[공] 염불』로 끝나는 것입니다.
ほんとうの信仰は、まず自分である人間とは一体如何なるものか、また神とは如何なるものか、神と人間との關係を識り得て始めて信仰の使命が判るのであります。
진실한 신앙은, 우선 자기 자기 자신인 인간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또 신이란 어떠한 것일까,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앎으로서 비로서 신앙의 사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この太靈(大生命)を元にした宇宙大自然現象の在り方を知ることにより人間生活の眞實が判るのであります。
이 태령(대생명)을 근본으로한 대우주 대자연상의 본연의 모습을 아는 것에 의해 인간 생활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この際現在の宗敎の如き、心理学的催眠術(さいみんじゅつ)と言う麻藥(まやく)の注射をされている大方の善男善女の方方に對して覺醒劑(かくせいざい)の注射を强度に施藥(しやく)する必要があります。
이 기회에 현재의 종교와 같이, 심리학적 최면술이라고 하는 마약의 주사를 맞고 있는 대부분의 선남선녀의 분들에게 대해서 각성제의 주사를 강한 강도로 시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現在の日本國民ほど宗敎眞理について無知の國民は、文化國家といわれる國家群の中には珍しい現象でありましょう。日本國民が宗敎的に無知だからこそ、インチキ宗敎が、現在の如き時に得顔にはびこるのであります。
현재의 일본 국민만큼 종교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국민은, 문화국가라고 말해지는 국가군 중에는 드문 현상이지요. 일본 국민이 종교적으로 무지한 것이야말로, 엉떠리 종교[가짜 종교=사기 종교]가, 현재와 같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득의양양하게 횡행(橫行)하고 있는 것(득의양양하게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 상당히 단어가 난해하네요. 열심히 머리를 쮜어짜고 있습니다. ^^ 일본 야후 사전 도움됩니다.
얼굴을 내밀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때를 만난듯이 득의양양에게 횡행하고 있는, 판을 치고, 如き時に得顔にはびこるのであります
眞の宗敎者顕(あら)わる
[참된 종교인(宗敎者)이 출현하다]
地球世界の中の人類の思想が亂れ國が亂れた時、神靈は聖人(覺者)君子を、この地球上に神靈の使者(天使即ち諸如来(しょにょらい)諸菩薩(しょぼさつ))を天降(あまくだ)らせて、人間の意識(心)の大調和を整わせられるのであります。
지구 세계의 세상의 인류의 사상이 허물어지는 국가가 마음이 평정을 잃고 혼란했을 때, 신령은 성인(깨달은 자) 군자를, 이 지구상에 신령의 사자(천사 즉 여러 여래(부처), 여러 보살))을 천상계에서 지상으로 내려 보내서, 인간의 의식(마음)의 대조화를 조정시키는 것입니다.
今の人間は二千五百余年前、釋尊(しゃくそん)が予言された通り末法の世と化し、眞の人間不在となりエコノミカル・アニマルと言われても致仕方のない、いわゆる唯物論者となっており全く權力の鬪爭と物質の略奪競爭が續いています。
현재의 인간은 2천 5백여년 전, 석가가 예언한대로 말법의 세상으로 변하고, 진실로 인간부재가 되어 경제적 동물이라고 불리움에도 관직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 소위 유물론자가 되고 있고 전적으로 권력의 투쟁과 물질의 약탈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エコノミック‐アニマル【economic animal】 經濟的利潤の追求を第一として活動する人を批判した語。昭和40年(1965)、パキスタンのブット外相が日本の經濟進出のあり方について言ったもの。
이코노믹 에니멀, 경제적 이윤의 추구를 쳣째로 해서 활동하는 사람을 비판한 말. 소화40년(1965년), 파키스탄의 붓토외상이 일본의 경제진출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 말한 것.
この顚倒(てんどう)夢想(むそう)を遠離(おんり)せしむるには如何に處すべきか、それには宇宙大自然の眞理を覺(さと)った法力即ち神通力のある覺者の顯現(けんげん)以外にはないのであります。
이 전도몽상을 원리하게 위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것에는 우주 대자연의 진리를 깨달은 법력 즉 신통력의 있는 성인(覺者=진리를 깨달은 사람=부처=붓타)의 현현[출현]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幸いにも吾が日本の中心である東京淺草に『大宇宙神光會』が生れ、多くの菩薩、諸如來が參集し眞實の宗敎を世界の万民に宏めるべく誕生されたのであります。
다행이도 내가 일본의 중심인 동경의 아사쿠사(淺草)에 『대우주 신광회』가 생겨, 많은 보살, 여러 여래가 모여서 진실한 종교를 세계 만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탄생된 것입니다.
今迄の宗敎と眞の宗敎の違い
[지금까지의 종교(宗敎)와 참된 종교(宗敎)의 차이]
神や佛は、太陽の光の如く、祈らずも万物に光(エネルギー)を燦燦(さんさん)と照らされていて決して代償を求められないのみならず吾吾人間を善導されておるのであります。それ故、吾吾は神佛の大慈悲に感謝し、万生相互の(ばんしょうそうご)調和の心が神意なることを悟ることであります。
신이나 부처는, 태양의 빛과 같이, 기도하지 않아도 만물에게 빛(에너지)을 찬란하게 비춰주고 있고 결코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인간을 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불의 대자비에 감사하고, 만생상호의 조화의 마음이 신의 뜻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然るに今日迄の宗敎は殆んどが偶像(ぐうぞう)崇拜(すうはい)であって一口に言うと欲(よく)である。その欲も神の子人間の本心から出る欲でなく、我欲即ち肉体欲(眼耳鼻舌身意)であります。
그러한 지금까지의 종교는 대부분이 우상숭배이며 한 마디로 말하면 욕구[욕망]이다. 그 욕구[욕망]도 신의 자녀 인간의 본심에서 나오는 욕구[욕망]이 아니라, 아욕 즉 육체욕망(안이비설신)입니다.
裁判に勝つ方法を敎えてくれ、選擧に當選させてくれ、うちの子供を大學に入學させてくれ、競馬に勝つ方法を知らせてくれ、自動車の障害のないようにしてくれ、病氣を治してくれ、商賣も繁昌させてくれ、くれくれで押かける。その願いはさまざまであるが、何れも虫のいい願いであります。自分丈が甘いことをしよう。他の人はどうなってもかまわぬ。うちの息子、うちの娘さえよくなったらいい。それで眼がくらんで神社參り寺もうでであります。これが偶像(ぐうぞう)崇拜(すうはい)の願かけであるから、行けば行くほど不安になり、心配になるのは當然であります。今日この偶像敎が非常にはやっています。宗敎と言うものは御利益以外にはないものと殆んどの人が思い込んでいます。
재판에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 선거에 당선시켜 달라, 우리집 아이를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 경마에 이기는 방법을 알려 달라, 자동차의 방해가 없도록 해 달라, 병을 치료해 달라, 장사도 번창시켜 달라, 해주세요 해주세요 우르르 밀려든다. 그 소원은 가지각색이지만, 어느 사람이 모두 이기적인 소원입니다. 성인인 당사자가 스스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단물만을 빨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 우리 자식, 우리 딸만 좋으면 괜찮다. 그래서 눈앞이 캄캄해져서 신사에 참배하고 절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의 발원(發願=기원)이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불안하게 되고,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 이 우상교(偶像敎)가 상당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신불(神佛)의 혜택(은혜=영험) 이외에는 없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고 결심하고 믿어 버리고 있습니다.
偶像敎が(ぐうぞうきょう)はやる時は、人人の欲がしまりを失って、野放しになった時であります。
우상교를 행할 때는, 사람들의 욕망을 단도리함을 잃어버리고, 제멋대로 되었을 때입니다.
欲に轡が(くつわ)はまって無い、欲に方向がない、その時、その時の風向き次第で、欲はのび放題、出放題となっている時、この偶像は殷賑(いんしん)を極めるのであります。
욕망에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욕망에 방향이 없다, 그 때, 그 때의 상황 다음으로, 욕망은 거쎄져서 제멋대로, 나와서 제멋대로 되어 있을 때, 이 우상은 매우 번화하고 흥청되는 것입니다.
偶像に走る人人は、もと元自分の欲に齒止(はど)めのきかない性質の人々であります。別して今日のように、誰れも彼もが欲の正しい方向を見失っている時には尙更であります。
우상에 질주하는 사람들은, 본래 자기 자신의 욕망에 제동의 걸리지 않은 성질의 사람들입니다. 유난히 오늘날과 같이, 누구나 다 욕망의 올바른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상경합니다.
偶像(ぐうぞう)崇拜(すうはい)の盛んな時は國としても、國民としても非常に危險な時であります。今日の吾國のこの偶像崇拜の流行もただ事とは思えません。
우상숭배가 번성할 때는 나라라고 해도, 국민이라고 해도 상당히 위험한 때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일본)의 이 우상숭배의 유행도 단순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偶像崇拜は飽(あ)く迄も自己中心であります。我欲一方で目がくらんでる人人の、かじりつく偶像であり、これでは助かりよう救いようがありません。我欲は偶像によるも、よらないも、人を地獄に追い込むものであります。
우상숭배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입니다. 아욕(자기의 욕망) 일방으로 눈앞이 캄캄해져 있는 사람들의, 물고 늘어지는 우상이며, 목숨을 건지는 일 도움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아욕(我欲)은 우상에 의존해도, 의존하지 않아도, 사람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眞の人間を自覺し、神や佛を感謝し隣人を愛する方向に向きをかえる、その爲に大宇宙靈(神)は我人人間反省の機會と光を餘えられたのであります。
참된 인간을 자각하고, 신이나 부처를 감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 때문에 대우주령(신)은 우리들 인간 반성의 기회와 빛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何故かと申せば、人間は本來宇宙大意識界の無限生命の分生命(わけみたま)であり、宇宙即我を悟った人が覺者であります。
왜 그런가라고 말씀드리면, 인간은 본래 우주 대의식의 세계의 무한한 생명의 분령(分靈) 생명(分生命)이며, 우주즉아를 깨달은 사람이 성인(聖人=부처)입니다.
眞の人間は意識((エネルギー)心)であって、現象界の肉体は人生航路を渡る船の役目である。換言すれば衣(ころも)であり住む場であるのであります。實在界と言う彼岸(ひがん)に到達した時その使命は終って不用となるものであります。
참된 인간은 의식((에너지)(마음))이며, 현상계의 육체는 인생항로를 건너는 배의 역할이다. 바꿔서 말하면 옷이며 살고 있는 거주지인 것입니다. 실재계라고 하는 피안에 도달했을 때 그 사명은 끝나며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ところが今の人間は槪ね、肉体が自分であって肉体が亡びたら何も彼も無に歸するのだと言う唯物論者が多く、自然肉体を守る自我中心の我利我欲となり爭いの世と化しておるのであります。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은 대체로, 육체가 자기 자신이 육체가 없어지면 누구나 다 무[無=없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유물론자가 많고, 자연히 육체를 지키는 자아중심의 사리사욕이 되어 투쟁의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私達の頂く光の天使は民族を越え宗派を越えて、人間(無限生命につながる)の眞に生きる道を說き、人間とはどんなものかを明かにし、その生きる正しい道を普及しておられる釋迦以來現れなかった大救世主であられます。
우리들의 받드는 빛의 천사는 민족을 초월하고 종파를 초월하고, 인간(무한생명으로 연결한다)의 거짓이 없이 살아가는 길을 설명하고, 인간이란 어떠한 사람인가를 밝혀주고, 그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보급하고 계시는 석가 이래 나타난 대구세주로 출현합니다.
光の天使は、現象界の一〇%の智を越え、實在界の九〇%の般若(はんにゃ)の智慧(ちえ)を備えられ、三世の世界の神佛や人間と對話の出來る法力のもち主であられる世界稀(まれ)なる大靈覺者であります。
빛이 천사는, 현상계의 10%의 지혜를 초월하여, 실재계의 90%의 반야의 지혜를 겸비하여, 삼세의 세계의 신불이나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법력를 갖춘 주로 나타나는 세계 좀처럼 볼 수 없는 대영각자(大靈覺者)입니다.
自然釋尊在(しゃくそん)世中の一切の出來事を承知されておることは勿論、當時の緣者の生れ代りの人人が續續緣にふれて集って來て旣に靈道(れいどう)を開いたもの六十數人の多數に及ぶ狀態で、不思議で不思議でならない現象が續續現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是迄の宗敎の如く拝(おが)む宗敎でなく、八正道を行う宗敎であり、論より証據來て觀て、天使の法力にふれて觀てから文句を言う事であります。絶對救われる道とはこのことであります。 pgae 126~132
자연히 석가가 생존할 당시의 일체의 가능성을 승지되고 있는 것은 물론, 당시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환생한 사람들이 속속히 인연에 접해서 모여 오고 이미 영도를 연 사람의 60 수명의 다수에 이르는 상태이며, 불가사하며 불가사의한 믿을 수 없는 현상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와 같이 두손 모아 비는 종교가 아니라, 팔정도를 실행하는 종교이며, 이론보다 증거로 해서 보이고, 천사의 법력에 접해서 보기 때문에 문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란 이러한 것입니다.
pgae 126~132
※이 내용은, 천사의 재래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올리지 말까 하다 올렸습니다....단어가 상당히 난해합니다.
이 글은 2010년 4월 3일에 올린 글입니다. 현재 날짜인 2011년 11월 7일 월요일로 변경합니다.
오늘,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의 날짜로 변경하며, 나뉘어진 것을, 한 권으로 묶습니다.
★기존에 올렸던 내용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十七年間の病苦(びょうく)から解放・・・・・・・・・・・・・・・・
17년 동안의 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 ・・・・・・・・・・・・・・・・
新(あら) 井(い) チ カ ((아라이 치카))
(主婦)(주부)
☆先生にお會いし肩の荷おりる ☆
[선생님을 만나 뵙고 어깨 짐이 내려지다]
[(선생님을 만나 뵙고 걱정했던 일이나 책임에서 풀리어 편해지다).]
私が高橋先生にお會いしたのが昨年の三月なかば頃だったと思います。それは長男の病氣がこの先生ならばきっと治していただけるものと思い、知人の誘いで先生のお宅へうかがったのでございます。
제가 다카하시 선생님을 만나 뵌 것이 작년 3월 중순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장남의 병이 이 선생님이라면 꼭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인의 권유로 선생님의 댁에 방문했던 것입니다.
寒い晩でしたが、長男をつれて恐る恐る二階の應接間へ入りますと、若くてガッチリした方が微笑を浮べ、私達親子を暖かく迎えて下さいました。最初はこの方が先生とは思いませんでした。首までの厚手のセーターを着こみ、ズボンもあまり高價なものとはいえないふだん物。先客の方方と冗談をいいながら、きさくに話をされていますので、先生のところで働いている人かと思いました。ところが、ソファに輕く腰をかけられたその方が知人の紹介で先生と分り、本當に驚いた次第でございます。
한창 추운 저녁이었지만, 장남을 데리고 두려워하면서 2층의 응접실로 들어가자, 젊고 야무진 분이 미소를 띄우며, 저희들 모자(親子)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분이 선생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목까지 두툼한 스웨터를 껴입고, 바지도 그다지 고가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것. 먼저 오신 분들과 농담을 하면서, 싹싹하게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 옆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아 계신 그 분이 지인(知人)이 소개하신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말로 놀랄 따름이었습니다.
お釋迦樣の生れかわりと知人からうかがってはいましたが、とても信じられませんでした。しばらくしてから先生が「光を入れてあげます。こちらにいらっしゃい・・・・・」といわれます。
부처님의 환생이라고 지인으로부터 듣고 있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빛을 넣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私はおそるおそる息子を先生の前に連れてゆきました。その時私は心の中で「どうぞ、この子を救って下さい」と一心に念じたものでございます。もう中學三年で、この三月に卒業だというのに、私はこの子を生んでこの方、心の安まる日とてなかったのでございます。息子は鉗子分(かんしぶん)晩(べん)で生れた子です。はじめは氣づきませんでしたが、成長するにしたがい病氣がちとなり、知能の進み具合いも、よそ樣のお子さんより遲れていました。主人が心配していいといわれる大學病院をずいぶん訪ね步きましたが、結果ははかばかしくありません。三年間も特殊敎育をやりましたが、この方もパッとしませんでした。主人はなかばあきらめていたようでしたが、私は女です。普通の人間でいいから、社會人として自立できるようになればと、そればかりを念じ續けていました。先生の前に息子とならんで座ったときは、私はどうぞこの子を救って下さい、という一念と、十七年間の肩の荷がおりたような氣がしまして、心の中で泣いたものでございます。
저는 두려워하면서 아들을 선생님 앞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 때 저는 마음속으로 「부디, 이 아이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한마음으로 염원했습니다. 아직 중학교 3학년이며, 이번 3월달에 졸업한다고 하는 데도, 저는 이 아이를 낳은 이후, 마음이 평할 날이 없었습니다. 자식(아들)은 겸자분만(鉗子分晩: 자연 분만이 어려울 때, 분만 집게로 태아의 머리를 집어서 끌어내는 분만)으로 낳은 아이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성장함에 따라서 병이 잦아지고, 지능발달 상태도, 남의 집 아이들보다 더뎠습니다. 남편이 걱정해서 좋다고 하는 대학병원을 꽤나 찾아 다녔지만, 저는 여자입니다. 보통의 인간이라도 좋으니까, 사회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게만 된다면 좋을 텐데, 그것만을 계속 염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앞에 아들과 나란히 앉았을 때는, 저는 제발 이 아이를 도와 주십시오, 라고 하는 일념으로, 17년 동안의 어깨의 짐이 내려진 듯한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先生はなにやら呪文(じゅもん)のようなものを唱えられていましたが、
「もう心配いりません。・・・・・・大變だったですね」
と、暖かいお言葉を下さいましたときには、人樣がおいでにならなければ、私はその場で泣き伏していたかも知れませんでした。
선생님은 무엇인가 주문(呪文)과 같은 것을 외우고 계셨는데,
「이제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 여간한 일이 아니었군요」
라며, 따뜻한 말을 해 주시었을 때는, 다른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그 곳에서 쓰러져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靈道が開き過去世が分る
[영도(靈道)를 열고 과거세(過去世)를 알다]
この日を境に(さかえ)、息子の病狀もよくなり、卒業と同時に就職もでき、もうあれから一年になりますが、一日として会社を休んだことがありません。顔の相もかわり、表情も生生としてきました。無口で笑ったことのない子でしたが、今日は會社でこんなことがあった、あれがどうしたこれがどうしたと、なんにでも興味をいだくようになりました。本なぞ、讀んだことがないのに結構いろいろ讀むようになり、音樂にたいする興味にしても、自分でレコードを買ってきて、聽いております。家の中がパッと明るくなりました。十七年間の勞がむくわれたと思うと、本當に有難く、高橋先生にたいする感謝の氣持は言葉にいいあらわすことが出來ないほどでございます。
이 날을 경계로, 아들이 병세도 좋아지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도 되어, 벌써 그로부터 1년이 됩니다만, 하루라도 회사를 쉰 적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인상도 변하고, 표정도 생기발랄해졌습니다. 과묵해서 웃던 적이 없는 아이었는데, 오늘은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저것이 어떠했고 이것이 어떠했다고 하며, 무엇에든지 흥미를 품게 되었습니다. 책 따위는, 읽은 적이 없는데도 더할 나위 없이 읽게 되어, 음악에 대한 흥미도 가지고, 자기 스스로 레코드를 사 와서, 듣고 있습니다. 집안이 확 밝아졌습니다. 17년 동안의 수고가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고맙고, 다카하시 선생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こうして、私の長男は高橋先生によって救われましたが、私自身も昨年の七月、靈道をひらかせていただき、二千五百年前にインドのカピラ城で配膳係を勤め、六十四才でこの世を去り、中國では今から千五百年前、家庭の主婦として、一生を終え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ました。インドではお釋迦樣から中國では天台樣からそれぞれ佛敎を敎えていただきました。インド時代の名はリバリ。中國ではオーリヤンといいます。
이렇게 해서, 저의 장남은 다카하시 선생님에 의해서 구제되었고, 제 자신도 작년 7월에, 영도(霊道)를 열어주셔서, 2천 5백년 전에 인도(印度)의 카필라성(카필라 바스트)에서 배식담당을 맡아서 일을 했고, 64세에 이 세상을 떠나고, 중국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천 5백년 전, 가정주부로서, 일생을 마쳤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도(印度)에서는 부처님으로부터 중국에서는 천태지의님으로부터 각각 불교를 가르침 받았습니다. 인도 시대의 이름은 "리파리"이며, 중국에서는 "오우리얀"이라고 합니다.
現在、私は私の分身から私の過去のことを敎えてもらっていますが、本當に樂しうございます。
현재, 저는 제 분신(分身)으로부터 제 과거(과거세)의 일을 가르침 받고 있는데, 정말로 즐겁습니다.
今では、主人をはじめ、私共一家は高橋先生なしでは夜も日も明かぬといった樂しい日日をお送らせていただいております。
지금에는, 남편을 비롯한, 저와 함께 가족은 다카하시 선생님 없이는 잠시도 지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고맙습니다.
合掌(합장)
信じがたい事實・・・・・・・・・・・・・・・・・・・・・・・・・・・・ 믿기 어려운 사실 ・・・・・・・・・・・・・・・・・・・・・・・・・・・・
猿(さる) 井(い) 喜(き) 一(いち) 郎(ろう)
((사루이키 이치로우))
(工學博士)(공학박사)
★ジャワ島における金山調査 ★
자바(Java)섬((인도 제도의 한 섬;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주도(主島))에서의 금광 조사(今山調査)
私は昭和四十二年八月上旬~九月上旬に至る間インドネシア國に出張し、ジャワ島における金山の調査を實施いたしました。
저는 쇼와42년 8월 상순~9월 상순에 이르는 동안 인도네시아국에 출장을 가서, 자바섬에 있는 금광(金山) 조사(調査)를 실시했었습니다.
この金山の調査はT社とインドネシア警察軍(インコパック)と協同して、當金山の調査開發を企劃し、そのための基礎的(きそてき)な第一次調査を日本側に求めて来たものであります。
이 금광 조사는 T라는 회사(T社)와 인도네시아 경찰군(警察軍(インコパック))과 협동하여, 해당 금산 조사개발을 기획하고, 그것을 위해 기초적인 제1차조사를 일본측에 청해 왔던 것입니다.
これより先昭和三十九年に、インドネシア國に行きT社のN部長に大變世話になったことがあります。このような関係からして調査隊の編成を依賴(いらい)され、日本側から早大関係三名、F社技師一名、M社技師一名、T社二名、計六名が参加いたしました。
이보다 앞서 쇼와39년에, 인도네시아국에 가서 T라는 회사(T社)의 N부장(部長)에게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로 해서 조사대의 편성을 의뢰받고, 일본측에서 와세다 대학(早大) 관계자 3명, F라는 회사(F社)의 기사(技師) 1명, M이라는 회사(M社) 기사(技師) 1명, T라는 회사(T社) 2명, 총 6명이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インドネシア側からは同國鑛山局技師三名(一名は當調査中に山中で急死)、同國警察軍大佐以下四十余名が参加し調査隊を編成し一應私がその責任者となって、山元に參ったのであります。
인도네시아측으로부터는 같은 나라 광산국 기사 3명(1명은 해당 조사중에 산속에서 급사), 같은 나라 경찰군 대좌 이하 40여명이 참가해서 조사대를 편성하고 일단 내가 그 책임자가 되어, 광산·탄갱의 소재지(山元)의 조사원으로 참가했던 것입니다.
当金山の位置、交通、地形、地質、鑛床、(こうしょう)等の專門的な諸條件はここでは省略させていただき、氣候について簡單に說明いたしますと、先ず赤道の眞下と言ってよい位の位置で平均氣溫が二十七度~二十九度(℃)、平均湿度八○%、年間降雨量(こううりょう)二~三千ミリと言われております。雨は殆んど雨期(十月~三月)に降りますので、私共の行った時は乾期(かんき)に当(あた)っていたわけで雨の心配は殆んど必要ありませんでした。
해당 금광(金山)의 위치, 교통, 지형, 지질, 광상(유용한 광물의 집합체), 등의 문적인모든 조건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기후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먼저 적도의 직하(바로 아래)라도 말해도 좋을 정도의 위치이며 평균기온이 27~29℃, 평균습도 80%, 연간강수량 2~3천 미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는 대부분 우기(10월~3월)에 내리기 때문에, 저희들의 갔을 때는 건기에 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 걱정은 거의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調査に當ってはジープ數台に、日本から持參した各種調査用具、計器、食料、テントなどを積み前記人員が分散して、搭乘し(とうじょう)て山元の部落に到着し、ここを基点として、テント張りして調査活動をいたしました。なお調査費の總額は四百万円でした。
조사에 있어서는 지프(4륜 구동(四輪驅動) 소형 자동차) 몇대에, 일본에거 참가한 각종 조사용구, 계기((計器 : 수량(數量)을 재는 각종(各種) 기구(器具)), 식료, 텐트(천막) 등을 적재하고 전술(前記)한 인원이 분산해서, 탑승하고 광산·탄갱의 소재지(山元)에 도착해서,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텐트(천막)을 치고 조사활동을 했습니다. 덧붙여 조사비의 총액은 4백만 엔이었습니다.
部落のテントから山元まで約七粁の山道は每日暑さのため、決して樂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ある時は猪が(いのしし)出たり又虎が出たりして、ギヨッとさせられ暑さをしのぐことも幾度かありましたが、インドネシア國の軍隊の護衛(ごえい)で何時もホッとしたものです。
부락의 텐트(천막)에서 광산·탄갱의 소재지(山元)까지 약 7km(七粁)의 산길(山道)은 매일의 더위 때문에,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멧돼지(猪)가 나오거나 또 호랑이(虎)가 나오거나 해서, 섬뜻 놀라서 더위를 참고 견뎌 내는 일도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인도네시아국의 군대의 호위로 언제나 안심했던 것입니다.
灼熱の(しゃくねつ)太陽が眞赤に沈む頃テントに歸り、ドロコーヒー(ジャワはコーヒーの原産地である)を飮み、水浴して汗を流して夕食する時限になれば、澄(す)みきった空に南十字星が明滅して初めて自分は、地球の南側にいるのだと言うことを意識したものです。
작열하는 태양이 시뻘겋게 질 때 텐트(천막)으로 돌아와, 진흙 커피(?)(ドロコーヒー((자바(Java)는 커피의 원산지이다))를 마시고, 수욕(水浴)하며 땀을 흘리고 저녁 식사를 할 시한(時限)이 되자, 맑게 갠 하늘에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명멸하고 비로소 나는, 지구의 남측에 있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物質化現象と靈の世界
[물질화 현상(物質化現象)과 영혼(靈)의 세계(世界)]
このような每日を約十日間繼續(けいぞく)して、試料(しりょう)採取(さいしゅ)を二十五ヵ所からして日本に持參(じさん)し分析(ぶんせき)した結果、高品位の處で(ところ)三二・七九g/屯、低品位(ていひんい)の處で○・三g/屯、單純算術平均六g/屯と言う結果で、更に第二次調査隊を派遣(はけん)して精査を行う價値があるものと確信している次第です。
이러한 매일을 약 10일 동안 계속(繼續)하고, 시료채취(試料採取)를 25개 장소에서 하고 일본으로 지참(持参)하고 (가서) 분석(分析)한 결과, 고품격(高品位)의 32・79g/톤(屯), 고품격(高品位)의 0・3g/톤(屯), 단순 산술평균 6g/톤(屯)이라고 하는 결과로, 다시 제2차조사대를 파견(派遣)해서 조사를 행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바입니다.
??三二・七九g/屯、?? 톤당 그램의 수??인가??
今まで記してきたことは、何にも面白くもおかしくもありません。單なる調査隊の紀行文に過ぎませんので、本表題に(ひょうだい)ついての說明に入ることにいたします。
지금까지 기록해 온 것은, 전혀 이상하고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조사대의 기행문(紀行文)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 표제(本表題)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昨年十二月十一日(木)午後三時に、高橋信次先生を知人と二人で浅草八起ビルに訪(たず)ね、いろいろ話をいたし、たまたま私が前記調査旅行の時の山の寫眞と簡單な地圖を持參して說明致しておりますと、高橋信次先生はこの山はこの様でしょう、あの様でしょうとまるで私と一緒に調査旅行に同行した人のように詳しく、その地形や山肌(やまはだ)の色調か(しきちょう)ら鑛石の種類までを申され、更に地圖を見て調査した山以外の地域のこの地点とこの地点にも有望な、何%位の金山があると指摘(してき)されたのには全く驚く外ありませんでした。
(我々も現地鉱山局の人といろいろ想定していた処だけに・・・・・・)
작년 12월 11일 (목요일) 오후 3시에,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을 지인(知人)과 둘이서 아사쿠사(浅草)의 야오키빌딩(八起ビル)에 방문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또다시 제가 전술한 조사여행을 할 때의 산(山)의 사진과 간단한 지도를 지참해서 설명하고 있자,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은 이 산(山)은 이런 모양이고, 저런 모양이죠 라고 하며 마치 저와 함께 조사여행에 동행한 사럼처럼 상세하게, 그 지형이나 산의 표면(山肌)의 색조(色調)부터 광석의 종류까지를 말하시며, 다시 지도를 보고 조사(調査)한 산(山) 이외의 지역의 이 지점과 이 지점에도 유망한 몇 %정도의 금산(金山)이 있다고 지적하신 것에는 완전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우리들도 현지 광산국의 사람과 여러가지로 상정((想定:어떤 정황(情況)을 가정적(假定的)으로 생각하여 결정(決定))하고 있었을 뿐인데・・・・・・)
しばらくして高橘信次先生は、只今モーゼ様(高橋信次先生の指導(しどう)靈(れい))が來ておられ、前記した金山の鑛石を希望なら物質化しようと言われ、出來るものなら是非と懇願(こんがん)いたしますと先生は南の方向に向かれ、起立し手を合わせて何やら呪文(じゅもん)を唱えること約一―二分、合掌した手の位置が頭の高さ位の處まで來た瞬間、(しゅんかん)手からコロコロと三個の鑛石が出て來たのを目のあたりに見た私と知人は、只芒然(ぼうぜん)とことのなりゆきを見守るばかりでした。
잠시 후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은, 바로 지금 모세(Moses)님((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지도령(指導靈))을 불러와서, 전술한 금광(金山)의 광석을 희망하면 물질화해 보자고 하셔서, 가능하다면 아무쪼록 간청(懇願)드립니다라고 하자 선생님은 남쪽 방향을 향해서, 기립(起立)하고 합창하고 무엇인가 주문(呪文)을 외우고 약 1~2분, 합장한 손 위치가 머리 높이 정도의 곳까지 온 순간, 손에서 동글동글한 3개의 광석이 나온 것을 눈 앞에서 본 저와 지인(知人)은, 그저 어리벙벙하여 되어가는 형편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更に當金山は日本円で約一億円と、日本人技術者約十名現地人約五十名、その他發電機採掘(さいくつ)用トレラー、同ショベルなどを準備すれば開發出來るとも申されました。
더욱이 해당 금광(金山)은 일본 엔(円)으로 약 1억 엔(円)이라고, 일본인 기술자 약 10명 현지인 약 50명, 그 밖에 발전기채굴용 트레일러(trailer), 같은 셔블(삽:Shovel) 등을 준비하면 개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この物質化現象は高橋信次先生も驚かれた様子で、ただ心配なのはこの物質化した鑛石の中に金が入っているか否かを心配されておりましたが、私は前記した山から採取(さいしゅ)して持ち歸ったものと全く同一なので、これには必ず金が入っておりますよと設明して、その場を辞(じ)して歸ったものの、私も半信半疑(はんしんはんぎ)でこの鑛石を實物大のカラー寫眞に納(おさ)め、証據(しょうこ)作りをして後に分析(ぶんせき)を東京通産局に依賴しました(私の處でも分析は可能であるが、わざわざ役所に依賴した)その結果一つは二七・五g/屯、あとの一個は○・三g/屯、最後の一個は証據品(しょうこひん)として私の手許(てもと)に置いてありますので、必要があれば何時でも誰にでも御覧に入れます。
이 물질화 현상은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도 놀라신 모양이며, 다만 염려(心配)한 것은 이 물질화한 광석 중에 금(金)이 들어 있는가 아닌가를 걱정(心配)하시고 있었지만, 저는 전술한 산(山)에서 채취해서 가지고 돌아온 것과 완전히 동일(同一)한 것이라서, 이것에는 틀림없이 금(金)이 들어 있습니다고 설명하고, 그 곳에서 돌아왔지만, 저도 반신반의(半信半疑)해서 이 광석을 실물크기의 칼라사진으로 만들어, 증거제작(証據作り)을 해서 나중에 분석을 도쿄통산국(東京通産局)에 의뢰한 (제가 있는 곳에서도 분석은 가능하지만, 일부러 관공서(役所)에 의뢰했다)に頼した)그 결과 1개에는 27.5g/屯, 다음의 1개는 0.3g/屯, 마지막 1개는 증거품(證據品)로서, 제 수중(手許:주변)에 보관하고 있는데,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보여 드리겠습니다.
紙數の關係でこれ以上詳(くわ)しく申し述べることは出來ませんが、この様な事實があったことは証人もおり証據品もある以上、認めざるを得ないのが最近の私の心境ですが、科學技術が如何に進步しようとも、靈の世界(天上界の世界)のあることを否定出來ないのが、今日この頃の私です。本文について御意見なり御叱聲(ごしっせい)を頂け(いただ)れば幸いと存じます。
페이지 수(紙數)의 관계로 이 이상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이와 같은 사실이 있었던 것은 증인(證人)도 있고 증거품도 있는 이상, 인정(認定)할 수밖에 없는 것이 최근의 제 심경(心境)입니다만, 과학기술이 아무리 진보(進步)되더라도, 영혼의 세계(靈の世界)(천상계의 세계(天上界の世界))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오늘 이 무렵의 접니다. 본문(本文)에 대해서 고견이시거나 질책을 해 주시면 다행이라고 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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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如是我聞- ***一滴(いちてき)の水にも生命(いのち)は宿(やど)る。水には全(ぜん)という意思(いし)はあっても,個(こ)という意思はない。低くきに流れることによってのみ,宇宙の意思に合一(ごういつ)するである。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생명은 깃들여 있다. 물에는 완전이라고 하는 의사는 있어도, 개체라고 하는 의사는 없다. 낮은데로 흐르는 것에 의해서만, 우주의 의사에 합일한다.
------ K・H 生 -------
☆・・・悟(さと)りとは、自分で正法を(しょうほう)學び、行爲に表(あら)われることをいう。その悟りを得るに
は、己の(おのれ)心で、己自身の理解を深めてゆくことが肝要(かんよう)である。人によっては自分で考えることもせず、行なわず、頭だけで分ったような心算(つも)りでいるが、これは大きな間違いである。
☆・・・깨달음이란, 자기 스스로 정법을 배우고, 행위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그 깨달음을 얻는데에는, 자기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이해를 깊게 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일도 없이, 행하지도 않고, 머리만으로 안 것 같은 심산이 있지만, 이것은 큰 잘못이다.
悟りとは、行爲が伴なうものである。行爲のない悟りはあり得ない。なぜなら行爲は心の反映(はんえい)だからである。自ら(みずか)學び、行うことによって悟(さと)りへの段階を一步一步階段をのほるようにして、人は己(おのれ)自身を知ることができる。
깨달음이란,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다. 행위가 없는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배우고, 실행하는 것에 의해서 깨달음으로의 단계를 한걸음 한걸음 단계를 올라감으로 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있다.
また、敎えてもらった理解と、自ら得た理解には大きな差がある。自ら得た理解は、自然のうちに行爲されるものだ。これを自(じ)然法爾(ねんほうに)(佛敎的解釋はひとりでに・・・・・)という。自然法爾とはたゆまずして行爲されるものをいう。
또, 가르침을 받은 이해와, 스스로 얻은 이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스스로 얻은 이해는, 자연스런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법이<불교적 해석은 저절로[자연히]・・・・・>라고 한다. 자연법이[自然法爾]이란 꾸준히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自法爾の行爲は、人びとの心を安ませる。人びとの心を和(なご)ませる。人びとの心を暖く包むものである。こういう人には、人びとの心がその人に集まり、その人の心を心とすべく、人びとに一念の心、菩薩(ぼさつ)の心をおこさせるものである。悟りとは、自然法爾というものは、そういう內容を伴なったものをいう。
자법이[自法爾]의 행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사람들의 마음을 화합시킨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모이고, 그 사람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도록, 사람들에게 일념의 마음,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자연법이[自然法爾]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내용을 동반하는 것을 말한다.
☆・・・眞善美。眞(しん)とは、まこと、神の心、正法そのものである。善とは、心正しければ自(おの)づと外に現われる正しき行爲をいう。美とは、善なる行爲の客体を指していう。內から溢(あふ)れ出た光、虹(にじ)のようなものである。しかし、その美を發見するものは人間である。人間の心である。人間に心があるからこそ、美は美として、その美しさをあらためて發見できるものである。美とは、心の表現にほかならぬ。それ故 に、心、即ち眞は、善よりも、美よりも優先(ゆうせん)し、心の存在があらためて認識(にんしき)される。眞がなければ、善も、美もない。
☆・・・진선미(眞善美). 진(眞)], 참[진실,진심], 신[神]의 마음, 정법[正法] 그 자체이다. 선[善]이란, 마음이 올바르면 저절로 밖으로 드러나는 올바른 행위를 말한다. 미[美]란, 선한 행위의 객체를 가리키고 있다. 안에서 넘쳐 나온 빛,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아름다움[美]은 아름다움[美]으로 해서, 그 아름다움을 세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美]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음, 즉 진[眞]은, 선[善]보다도, 미[美]보다 우선하고, 마음의 존재를 세삼스럽게 인식된다. 진[眞]이 없으면, 선[善]도, 미[美]도 없다.
☆・・・各人の運命は、心のおき方、自我(じが)意識(いしき)が多いか少ないかによって決(き)まる。ところがこの現象界をみると、自我意識の强よい者ほど、地位あり、名譽あり、金もありという場合がしばしば見受けられる。反對に、心は淸よいが貧しい人もある。一見(いっけん)して矛(む)盾(じん)に滿ちているが、實は、矛盾していない。
☆・・・각자의 운명[運命]은, 마음의 일으키는 방식, 자아의식이 많은가 적은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이 현상계를 보면, 자아의식의 강한 사람만큼,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돈도 있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반대로, 마음은 깨끗하지만 가난한 사람도 있다. 언뜻 보면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은, 모순이 아니다.
この世の生活は各人の修行の(しゅぎょう)場(ば)である。地位、名譽、金、貧しいということは、實は單なる幻影(げんえい)にすぎない。人間は、眼、耳、鼻、舌、身、意の六根(ろっこん)で生活しているため、あたかもそれらが實在しているかのように錯覺(さっかく)をおかしているにすぎない。各人の心が高まれば、この世の存在は實在界の投影(とうえい)にすぎないことを悟るだろう。地位、名譽、金があるということは、それだけ、その人の心をしばるものだ。逆に、貧しければ、心の負担(ふたん)がそれだけ輕くなり、自由だ。
이 세상의 생활은 각자의 수행의 장소이다. 지위, 명예, 돈, 가난함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눈(眼), 귀(耳), 코(鼻), 혀(舌:입), 몸(身), 뜻(意:자기주의=의지)의 육근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그들이 실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각자의 마음이 고양되면, 이 세상의 존재는 실재계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지위, 명예,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난하면, 마음의 부담이 그만큼 가벼워져, 자유롭다.
人びとは、そうした環境のなかで、己自(おのれ)身の修行を重ねてゆくものである。金持ちは、その金持ちを通じて、どれほど己自身の心を知ることが可能か。金のない者はないなりに、自分の心がどれほどそれに打(う)ち克(か)つことが出來るかと。つまりそれぞれの環境を通じて、己自身の心を知る。
사람들이란, 그러한 환경속에서, 자기 자신의 수행을 거듭해 가는 것이다. 부자는, 그 재산을 통해서, 얼마만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 가능할까? 돈이 없는 사람은 없는대로, 자기의 마음을 얼마만큼 극복할 수가 있을까라고. 즉 저마다의 환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안다.
己自身の理解を深めてゆく。それが、現象界の修行なりだ。金持ちは過去世で善德を積んでいるから、貧亡人は過去世で惡德を重ねているから、ということは絶對にないものである。人間の因緣(いんねん)因果(いんが)は、そんな淺いものでは決してない。ただいい得ることは、この世も、あの世も循環の(じゅんかん)法則によって動いている。循環とは、めぐりめぐって元に還(か)えってくるということ。
자기 자신의 이해를 깊게 해 간다. 그것이, 현상계의 수행이다. 부자는 과거세에서 선덕을 쌓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게 죽은 사람은 과거세에서 악덕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인간의 인연인과는, 그런 천박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순환이란, 돌고 돌아서 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
感謝の想念は感謝として、惡の行爲は惡い結果となって本人に戾(もど)ってくる。蒔(ま)いた種(たね)は刈(か)り取ることが循環の法則である。それ故、各人の運命は、循環の法則にしたがって動いているが、運命とは、本來、生命(いのち)を運(はこ)ぶことであり、地位や名譽、金の大小ではなく、日常生活における心の負担(ふたん)が多いか、少ないか、いいかえれば生活を通じて五官(ごかん)六根(ろっこん)にどれほど左右されているか、いないかが、その人の生命、天(てん)命(めい)を知る決(き)め手となる。天命を知って生活する場合は、環境は自然と整い、さわりない一生を送ることが出來よう。さわりない心は、そのまま天上界の生活であり、あの世と未來のよりよい運命を決定づけるものである。
감사의 상념은 감사로 해서, 악의 행위는 나쁜 결과로 되어서 본인에게 되돌아 온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순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운명은, 순환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지만, 운명이란, 본래, 생명을 운반하는 것이며, 지위나 명예,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마음의 부담이 많은가, 적은가, 바꾸어 말하면 생활을 통해서 오관 육근에 얼마만큼 좌우되고 있는가, 아닌가가, 그 사람의 생명, 천명을 아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천명을 알고 생활하는 경우는, 환경은 자연히 정리되고, 지장을 초래하지 않은 일생을 보낼 수가 있지요. 장애가 없는 마음은, 그대로 천상계의 생활이며, 저 세상과 미래의 보다 좋은 운명을 결정지는 것이다.
☆・・・正邪(せいじゃ)の正、つまり正しいとはどのような心を指すものか。普通は、その國柄、民族性、習慣、個人的には、環境、(かんきょう)敎養、德性、主觀(しゅかん)によってそれぞれ異なるが、あの世實在界からみた正しさとは、次のような段階に別れている。現在の自分の心がどの位置にいるか、各段階をみることによってハッキリつかめる筈である。
☆・・・...정사[正邪=옳고 그름, 선악]의 정(正), 즉 올바름이란 어떠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일까. 보통은, 그 나라의 상황, 민족성, 습관, 개인적으로는, 환경, 교양, 덕성, 주관에 의해서 저마다 다르지만, 저 세상 실재계에서 본 올바름이란,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별되고 있다. 현재의 자기 자신의 마음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각 단계를 보는 것에 의해서 확실하게 인식될 것이다.
幽界(ゆうかい)――すべてが自己本位、自分に不利益をもたらした者には徹底した憎惡(ぞうお)を持つ。原因、結果を追(つい)究(きゅう)しようとする心がわかない。
유계[幽界]―― 모든 것이 자기 본위, 자신에게 불이익을 끼친 사람에게는 철저한 증오을 가진다. 원인, 결과를 추궁하려고 하는 마음이 솟아나지 않는다.
靈界(れいかい)――損得(そんとく)五分の考え。自分はあの人にこれだけのことをしたから、當然、それにたいする報(むく)いがあると考える。報いがないと氣分がサッパリしない。大變に損をしたと考える。
영계[靈界]―― 손해와 이득은 반반인 생각. 자신은 저 사람에게 이만큼의 일을 해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에 대한 보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답이 없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후련하지 않다]
神界(しんかい)――自分に損害はかかっても、あきらめは早い。また利益を得ればよいと考える。人を批難(ひなん)する前に、自分の欠陷(けっかん)を見い出そうとする。むろん、神界にも段階があり、上にゆくほど自己をみつめ、自分にきびしくなる。つまり、ふりかかった火の粉(こ)は自分に責任があると考え、人を批難する氣はほとんどなくなる。
신계[神界]―― 자신에게 손해를 끼쳐도, 단념[체념]은 빠르다. 또 이익을 얻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결함을 들여다 보려고 한다. 물론, 신계에도 단계가 있고, 위로 올라갈 수록, 자기를 주시하고, 자신에게 엄중하고 가차없게 한다. 즉, 튀어 오는 불똥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남을 비난하는 마음은 대부분 없어진다.
菩薩界(ぼさつかい)――利害に左右されない。與えられた仕事を忠実に行ない、報いを求めず、默默(もくもく)として働く。人の批難も莞爾(かんじ)として受ける。もっとも心が淨化(じょうか)されているから、人の批難も少ない。ほとんどない。
보살계[菩薩界]――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다.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실행한다.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일한다. 남의 비난도 빙그레 미소 지우면서 받아들인다. 가장[제일] 마음이 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남의 비난도 적다. 대부분이 없다.
自分のことより、他を優先(ゆうせん)する。人人の喜ぶさまをみて、自分の喜びとし、人びとの苦しみをみて、自分の心を痛める。人と自分との一体觀(いったいかん)が上段階にゆくほど强よくなる。そうして、やがて、人と自分とが一つであることを知る。
자신의 일보다, 남을 우선한다. 사람들의 기쁨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기쁨으로 하고, 사람들의 괴로움을 보고, 자신의 마음 아파한다. 남과 자신과의 일체관이 상단계로 갈 수록 강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윽고, 남과 자신이 하나인 것을 안다.
如來界(にょらいかい)――天地は一つ。自己はその中にあり、外にもある。一切のとらわれから解放され、慈悲(じひ)と愛だけとなる。
여래계[如來界]―― 하늘과 땅은 하나다. 자기는 그 안에 있고, 밖에도 있다. 일체의 사로잡힘(얽매임)에서 해방되어, 자비와 사랑뿐이다.
☆・・・和(わ)して同ぜず、という孔子(こうし)の言葉がある。和とは、なごむ、平和、如來(にょらい)、菩薩(ぼさつ)の心をいう。そのズッと奧は神佛の心、宇宙の心である。人間が和を得るには、調和であり、無私(むし)しかない。釋迦(しゃか)のいう八正道、イエスの說く愛の心を行ずることである。同ぜずとはどのような意味かといえば、和の心を心とし、次元の低い世界にいて人人と交わりながらも決してその世界に染らない心である。そればかりか、神佛の心をやたらと人人に押しつけず、人びとの心となりながら、調和しながら自然のうちに人びとの心を向上させてゆく。君子(くんし)、即ち如來、菩薩の心というものは、そのように、なごやかであり、人びとに安らぎを與えるものである。
☆・・・화하되 같지 않다[和而不同], 라고 하는 공자의 말이 있다. 화합이란, 온화[누그러짐, 부드러움]함, 평화, 여래[부처], 보살의 마음을 말한다. 그보다 훨씬 깊은 신불의 마음, 우주의 마음이다. 인간이 화합을 얻는데에는, 조화이며, 공평무사[無私=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음]밖에 없다. 석가가 말하는 팔정도, 예수가 설명하는 사랑의 마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동하지 않음이란 어떠한 의미인가 하면, 화합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차원의 낮은 세계에 있고 사람들과 교제하면서도 결코 그 세계에 물들지 않는 마음이다. 그것 뿐일가, 신불의 마음을 함부로 사람들에게 강압[강요]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이 되면서, 조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을 향상시켜 간다. 군자, 즉 여래[부처], 보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온화함이며,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주는 것이다.
※和 =>화하다(和--: 서로 뜻이 맞아 사이 좋은 상태가 되다) ㉡화목하다(和睦--) ㉢온화하다(溫和--) ㉣순하다(順--) 기타 등등 많아요.
일부 내용☆・・・화하되 같지 않다[和而不同], 라고 하는 공자의 말이 있다. 화합이란, 온화[누그러짐, 부드러움]함, 평화, 여래[부처], 보살의 마음을 말한다. 그보다 훨씬 깊은 신불의 마음, 우주의 마음이다, 의 번역상의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人間の意識(いしき)(この場合は主として想念(そうねん))は無限(むげん)に變化(へんか)する。これを佛敎で一念三千という。三千とは無限という意味。サテ、人間の意識は變化變(へんかへん)滅(めつ)するようにできている。なぜかというと、意識というものは、本來(ほんらい)自由であり、なんらの束(そく)ばくのないように出來ているからである。この意識は人間にだけに与えられた特權(とっけん)でもある。そこで、意識と憑依(ひょうい)の關係についていうと次のようになる。まず、ある人が自我(じが)我欲(がよく)の意識にとらわれたとする。すると、その意識―想念は、幽界(ゆうかい)(地獄(じごく))で苦しむ我欲の亡者(ぼうじゃ)に通じ、亡者はその意識に乘(の)って、その人に憑依(ひょうい)する。
☆・・・ 인간의 의식(이 경우는 주로 상념)은 무한하게 변화한다. 이것은 불교에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말한다. 삼천(三千)이란 "무한(無限)하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럼, 인간의 의식은 변화 변멸하게 되어 있다. 왜냐 하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자유이며, 아무런 속박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식(意識)과 빙의(憑依)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선, 어떤 사람이 자아아욕의 의식에 사로잡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의식―상념은, 유계(지옥)에서 괴로운 아욕의 망자에게 통해서, 망자는 그 의식에 탑승하여, 그 사람에게 빙의한다.
つまりその人に憑(つ)くのである。これを憑依作用という。憑依作用は、靈的(れいてき)には、あたかも、その人の体についているように見えるものだが、肉体そのものにつくのではない。意識に憑(つ)くのである。意識に憑(つ)くと、肉体にもつくようにみえてくる。これは、意識も肉体ももともと波動(はどう)(エネルギー)から出來ており、したがって幽界(ゆうかい)に意識が通(つう)ずると肉体もまた幽界に通ずるといった格好(かっこう)になるため、あたかも肉体に憑依(ひょうい)したようにみえるのである。しかし、肉体は、同じ波動(はどう)といっても、意識とは本質的(ほんひつてき)に異(こと)なり、意識をエネルギーとすれば肉体は、それを生(い)かす有機体(ゆうきたい)であるにすぎない。
즉 그 사람에게 빙의하는 것이다. 이것을 빙의작용이라고 한다. 빙의작용은, 영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몸에 관해서 있듯이 보이는 것이지만, 육체 그 자체에 빙의한 것이 아니다. 의식에 빙의한 것이다. 의식에 빙의하면, 육체에도 빙의한듯이 보여진다. 이것은, 의식도 육체도 다함께 파동(에너지)로 되어 있고, 따라서 유계에 의식이 통하면 육체도 또 유계에 통한다고 하는 모양[모습]이 되기 때문에,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의식을 에너지라고 하면 육체는, 그것을 살리는(활용하는)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다.
それほどに、意識と肉体では相違(そうい)がある。地獄(幽界)に落(お)ちた亡(もう)者(じゃ)は、我欲の意識がそこに落ちているわけであり、そこに肉体を持っている者の意識が通(つう)ずればわけもなく同じてしまう。憑依(ひょうい)とは、このような作用によって具体化される。地獄(じごく)靈(れい)の憑依のほかに、動物靈の憑依(ひょうい)も同様である。ある人が動物的本能、たとえば、鬪爭的(とうそうてき)、排他的(はいたてき)、自己中心などに陷る(おちい)と、動物靈が憑依する。動物靈は、本能のままに生かされているから、人間がそのような生活態度になってくると、動物靈が憑依する。神信心(かみしんじん)についても、ご利益(りやく)本位(ほんい)は動物靈が憑(つ)きやすい。
그만큼, 의식과 육체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지옥(地獄)(유계幽界)에 떨어진 망자는, 아욕의 의식이 그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며, 그곳에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의식이 통하면 까닭도 없이 같아져 버린다. 빙의란, 이러한 작용에 의해서 구체화된다. 지옥령의 빙의 외에, 동물령의 빙의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동물적 본능, 예를 들면, 투쟁적, 배타적, 자기중심 등에 빠지면, 동물령이 빙의한다. 동물령은, 본능대로 살게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러한 생활 태도가 되어 오면, 동물령이 빙의한다. 신을 믿는 마음에 대해서도, 이익본위[= 이익이나 공덕을 바라는 마음]는 동물령이 빙의하기 쉽다.
信仰の對象である何何の神、佛、あるいは信者の信仰を一身に集めている敎祖(きょうそ)にしても、動物靈が背後(はいご)であやつっている場合は、①常識的でない ②やたらと人をおどろかす ③神理(しんり)が不自然 ④ 敎祖自身が病気がち ⑤信者同士の意見が合わない ⑥敎理を信者に押しつける ⑦罰(ばち)が當る等の現象が出てくる。
신앙의 대상인 여러 여럿의 신, 부처, 혹은 신자의 신앙을 한몸으로 모으고 있는 교조에 대해서도, 동물령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경우는, ①상식적이지 않다. ② 몹시 사람을 놀라게 한다. ③ 신리[=신의 섭리, 신의 뜻]가 부자연. ④ 조교 자신이 병이 잦다[병이 드는 일이 많다] ⑤신자끼리의 의견이 맞지 않는다. ⑥교리를 신자에게 강압[강요]한다. ⑦ 벌 받는다 등의 현상이 나온다.
したがって、神信心も、こうした背景(はいけい)をよく考えないでやっていると、動物靈が憑依し、やがて、その人の意識を支配し、いろいろな病氣や災難(さいなん)の原因をつくってゆく。地獄靈も動物靈も、このように、肉体を持った人間にたいして、いろいろな惡さをするが、憑依の根本原因は何にかというと、それは、他人でも環境で(かんきょう)もなく、みんな自分の責任である。地獄靈、動物靈は、こちらが意識をその方面に向けなければ憑(つ)いてこないのである。その意識とは、自分本位、他人はどうなっても、自分さえうまくゆけば、自分さえ健康で利益が上がれば、という考え。また、自己滿足に陷(おち)って、自分で自分のカラの中に閉(と)じこもるのも同樣である。 pa
따라서, 신을 믿는 마음도, 이러한 배경을 잘 생각하지 않고 행하고 있으면, 동물령이 빙의하고, 이윽고, 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고, 다양한 질병이나 재난의 원인을 만들어 간다. 지옥령도 동물령도, 이와 같이, 육체를 지닌 인간에 대해서, 다양한 나쁜 짓을 하지만, 빙의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하면, 타인도 환경도 아니라, 모두 자신의 책임이다. 지옥령, 동물령은, 이들이 의식을 그 방면으로 향하지 않으면 빙의하여 오지 않는 것이다. 그 의식이란, 자기본위, 타인은 어떻게 되어도, 자신만 잘 되면, 자신만 건강하고 이익이 상승하면, 이라고 하는 생각. 또, 자기만족에 빠져서, 스스로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聖書の中に「人もし汝の(なんじ)右の頰(ほほ)をうたば、左をも向けよ」という一節(いっせつ)がある。これは佛敎でいう如(にょ)來(らい)(上段階光の大指導靈)の心をいったもの。キリスト敎的には、光の天使である。この意味は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と、如來には自他(じた)の觀念(かんねん)がない。すべてが自分であり、宇宙は己自(おのれ)身だからである。指(ゆび)先(さき)にトゲがさされば全身これ痛みを感ずる筈。その痛みから解放するには、まずそのトゲを拔かなければならない。トゲに向って怒(いか)るとすれば、痛みはますます深くなるばかり。如來、光の天使は、この心を悟(さと)っているから、慈悲(じひ)と愛で相手の心をいやすことに力をそそぐ。形にとらわれない。相手の心の淨(じょう)化(か)につとめる。右の頰(ほほ)を打ち、それで相手の心が和(な)ごめば、休まれば、その行爲を許(ゆる)すのである。人間は神の子、佛の子である。みんな兄弟である。一つである。自分自身である。自分に愛があれば、相手の行爲にめくじりは立たない筈である。愛とは許(ゆる)しであり、愛なくして、どうして、人と人とが和合(わごう)し得よう。調和できよう。愛は人間社會に欠(か)くことの出来ぬ神の光である。
☆・・・ 성경 속에 「누가 너의 오른쪽 빰을 때리면, 왼쪽 빰도 내어 주라 」라고 하는 한 귀절이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상단계 빛의 대지도령)의 마음을 말한 것. 그리스도교적으로는, 빛의 천사이다. 이 의미는 어떠한 것인가 하면, 여래(如來)에게는 자타(自他)의 관념(觀念)이 없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며, 우주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을 다치면 전신(全身)으로 이 고통을 느끼는 까닭. 그 고통에서 해방(解放)하는 데에는, 우선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처로 인해서 화를 낸다면, 고통은 심해질 뿐이다. 여래(如來), 빛의 천사는, 이 마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비와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힘을 쏟는다. 형식(形)에 얽매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의 정화(淨化)에 힘쓴다. 오른쪽 뺨을 때리며, 그것으로 상대방이 마음이 누그러지면, 심신이 평안해지면, 그 행위를 용서하는 것이다. 인간(人間)은 신(神)의 자녀(子)이며, 부처(佛)의 자녀이다. 모두 형제(兄弟)이다. 하나이다. 자신 자신(自分自身)이다. 자기자신에게 애정이 있으면, 상대의 행위에 흠을 잡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란 용서하는 것이며, 사랑없이, 어떻게, 사람과 사람을 화합(和合)할 수 있을까? 조화(調和)할 수 있을까? 사랑은 인간사회(人間社會)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神)의 빛(光)이다.
★"형식(形)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두 형제(兄弟)이다." 까지는, 번역상의 누락 부분임을,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 현재 알게 되어, 첨가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自由ということを、よく人は口にする。また、自由の觀念が氾濫(はんらん)するほどさまざまな自由があるようである。ところが、本當の自由というのは、心の自由を指(さ)すものである。小我の自分、小さな想念から脫皮(だっぴ)し、大我(だいが)を得(え)た時、人は、はじめて、自由を悟(さと)る。その自由とはどういうものかというと、座(ざ)していながらすべてが判(わか)る。佛敎でいう觀自在(かんじざい)、つまり觀自在心(かんじざいしん)というのが、自由な心だ。肉体は家にあっても、必要とあれば日本國中、世界の國國、宇宙のはてまで見てくることが可能なのだ。しかも、自由な心は、肉眼でみるよりも、よりいっそう正確(せいかく)であり、ゆがみがないのだから、これほど樂しく、たしかなことはない。
☆・・・자유라고 하는 것을, 자주 사람은 말합니다. 또, 자유의 관념이 범람(氾濫)할수록 다양한 자유가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아(小我)의 자신, 작은 상념에서 탈피하고, 대아(大我)를 얻었을 때, 사람은, 비로서, 자유를 깨닫는다. 그 자유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앉아 있으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자재(觀自在), 즉 관자재심(觀自在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마음이다. 육체는 집에 있어도, 필요하면 일본국에서, 세계 여러 나라, 우주의 끝까지 보고 오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자유로운 마음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보다도, 보다 더욱 정확(正確)하며, 마음이 비뚤어짐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만큼 즐겁고, 확실한 것은 없다.
☆・・・人間の心は、その人自身のものである。他人のものでもなければ、その人を守っている守護(しゅご)霊(れい)、あるいは指導(しどう)霊(れい)のものでもない。それ故、その人が、守護靈、指導靈の指導を仰がないかぎり、その人の心の中にこれらの靈は入ることも出來ない。それほど、各人の心というものは誇(ほこ)り高く、絶對的な性格を持っている。これはなぜかというと、人間の心は、神佛そのものであり、神佛が神佛を犯(お)かすことはあり得ないからである。また、そのように、人間の心はつくられている。したがって、己の心は、森(しゆん)羅万象(らばんしょう)、なんでも知っている。人が想念にとらわれ迷(まよ)った時、己の心に聞くことである。氣持を沈(しず)め、精かな環境の中で、ジッと耳を澄(す)ますと、心の聲がきこえてくる。その聲は、今の自分にとって快よくないかも知れない。現象的に面白くないかも知れない。しかし、その聲は、その人にとって、それ以上の回答は、少なくとも、その時点では與えられないものである。回答の八○%までは苦しいにちがいない。しかし、その人の心は、その人の全運命を熟知(じゅくち)しており、そのうえで指示するので、決して、失望を与えたり、二度と立ち上がれないようなことはしない筈である。
☆・・・인간의 마음은, 그 사람 자신 그 자체이다. 타인 자체도 없다면, 그 사람을 지키고 있는 수호령(守護靈) 혹은 지도령(指導靈) 자체도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수호령(守護靈), 지도령(指導靈)의 지도(指導)를 받는 일이 없는 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러한 영혼(靈)은 들어 올 수도 없다. 그만큼, 각자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긍지가 높고, 절대적(絶對的)인 성격(性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왜냐하면, 인간(人間)의 마음은, 신불(神佛) 그 자체이며, 신불(神佛)이 신불(神佛)을 범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와 같이, 인간(人間)의 마음(心)은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자기의 마음은, 삼라만상(森羅萬象),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 사람이 상념(想念)에 사로잡혀 방황했을 때, 자기의 마음(心)에 듣는 것이다. 기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한 환경 속에서, 지그시 귀를 귀울이면, 마음의 음성(聲)이 들려온다. 그 음성(聲)은, 지금의 자기 자신에 따라서 기분이 좋지 않을지도(호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상적(現象的)으로 재미없고 시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음성(聲)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회답(回答)은, 적어도, 그 시점(時点)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회답의 80%까지는 괴로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모든 운명(運命)을 숙지(熟知)하고 있고, 게다가 지시(指示)하는 것이며, 결코, 실망(失望)을 주거나, 두번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人間を含(ふく)めた全宇宙(ぜんうちゅう)は、絶(た)えず転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を続けている。そうしてその輪廻(りんね)は、はじめもなければ終りもないのである。人間の生と死をみていると、いかにも初めと終りがあるようで、宇宙もそうだと考えがちだが、そんなことはない。輪廻(りんね)は、無限(むげん)に續いてゆく。それが〃生〃あるものの運命であり、天(てん)命(めい)なのだ。なぜこうなっているかといえば、宇宙は神佛によってつくられている。神佛そのものである。人間の本体(ほんたい)である心も神佛である。神佛そのものが死滅(しめつ)することはないし、だいいち空氣に死はあるだろうか。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は、それ故に、生あるものの運動である。生あるものに停止(ていし)はない。したがって、心(人間)は神佛であり、生あるものの運動が當然とすれば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も當然ではないか。
☆・・・인간(人間)을 포한한 전우주(全宇宙)는, 끊임없이 전생윤회(轉生輪廻)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윤회(輪廻)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인간(人間)의 삶(生)과 죽음(死)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나 처음과 끝이 있는듯 하고, 우주(宇宙)도 그렇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러한 일은 없다. 윤회(輪廻)는, 무한(無限)히 계속해 간다. 그것이 “생명(生)” 있는 것의 운명(運命)이며, 천명(天命)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면, 우주(宇宙)는 신불(神佛)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다. 신불(神佛) 그 자체이다. 인간(人間)의 본체(本體)인 마음(心)도 신불神佛이다. 신불(神佛) 그 자체가 죽고 없어지는 일은 없고, 무엇보다도 공기(空氣)에 죽음은 있는 것일까? 전생윤회(轉生輪廻)는, 그러므로, 목숨이 있는 것(살아 있는 것)의 운동(運動)이다. 목숨이 있는 것(살아 있는 것)의 정지(停止)는 없다. 따라서, 마음(인간)은 신불(神佛)이며, 목숨이 있는 것(살아 있는 것)의 운동(運動)이 당연(當然)하다고 하면 전생윤회(轉生輪廻)도 당연(當然)하지 않은가?
☆・・・天は人に二物を与えず、という言葉がある。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いうと、相對(そうたい)の世界で己を(おのれ)知れということである。この現象界は、善もあれば惡もある。天があれば地もある。男もおれば女もいる。一枚の紙にも表(おもて)と裏(うら)がある。つまり相對的(そうたいてき)に出來ている。出來ているというより、そうした環境の中にこそ、人間の修行(しゅぎょう)が可能なのである。そうして、そうした環境の中で、自分の心を磨て(みがい)ゆく。己れ自身を知る。もしも、天が、人に二物を与えたとする。その結果はどうなるだろう。得(う)るものはなにもなく、無意味に生きて、無意味にあの世にゆくだけにすぎない。ある人は、それで結構(けっこう)というかも知れない。
☆・・・하늘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주지는 않는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의미(意味)인가 하면, "상대(相對)의 세계(世界)이며 자기자신(己)를 알라"고 하는 것이다. 이 현상계(現象界)는, 선(善)도 있으면 악(惡)도 있다. 하늘(天)이 있으면 땅(地)도 있다. 남자(男)도 있으면 여자(女)도 있다. 한장의 종이(紙)에도 겉(表)과 속(裏)이 있다. 즉 상대적(相對的)으로 되어 있다.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환경(環境) 속에서 비로소, 인간(人間)의 수행(修行)이 가능(可能)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환경(環境) 속에서, 자기 자신(自分)의 마음(心)을 연마해 간다. 자기 자신(己れ自身)을 안다. 만약, 하늘(天)이, 사람(人)에게 많은 재능이나 자질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 결과(結果)는 어떻게 될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의미(無意味)하게 살아가고, 무의미(無意味)하게 저 세상으로 가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괜찮다(다행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てんはにぶつをあたえず[天は二物を与えず]★
하늘은 (공평하여) 한 사람에게 많은 재능이나 자질을 주지 않는다.
しかし、この世を終えて、あの世に生(せい)をうけた時、無意味に生きたその人のあの世での生活は、それは想像(そうぞう)を絶(ぜっ)するほど過酷(かこく)なものとなるだろう。なんとなれば、リンネの原則は宇宙の法則であり、善にたいして善、惡にたいして惡があるように、樂すれば苦は當然ハネ返(か)えってくるものだからである。相對(そうたい)のなかにあって、善惡(ぜんあく)美醜(びしゅう)、さまざまな經驗を通じて、己を(おのれ)知った時、人は、はじめて、相對界(そうたいをい)から飛躍(ひやく)するのである。即ち、宇宙(うちゅう)即我(そくわれ)である。眞の自由である。その時、人は、天と地をつなぎ、二物どころか、万物(ばんぶつ)を手中に(しゅちゅう)收(おさ)めることが出來るのである。 page 148~150
하지만, 이 세상을 끝내고, 저 세상에 생명을 받았을 때(태어났을 때), 무의미(無意味)하게 살았던 그 사람의 저 세상에서의 생활(生活)은, 그것은 상상(想像)을 불허한 정도로 과혹(過酷)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윤회(輪廻)의 법칙(原則)은 우주(宇宙)의 법칙(法則)이며, 선(善)에 대해서 선(善)으로, 악(惡)에 대해서는 악(惡)이 있듯이, 즐거우면 괴로움은 당연(當然)히 되돌아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相對)의 속에 있고, 선악미추(善惡美醜), 다양한 경험(經驗)을 통해서, 자기(己)를 알았을 때, 사람(人)은, 비로서, 상대계(相對界)에서 비약(飛躍)하는 것이다. 즉, 우주즉아(宇宙即我=우주가 바로 자신이다)이다. 진정(眞)한 자유(自由)이다. 그 때, 사람(人)은, 하늘(天)과 땅(地)을 연결하고, 많은 재능이나 자질뿐만 아니라, 만물(萬物)을 수중(手中)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ある〃ひとしずく〃の水の一生
☆・・・어느 “한 방울”의 물의 일생
私と同じ仲間は、天の命(めい)に從っ(したが)て、いつでも地上に降(お)りる準備が出来ていた。誰の顔にも悲壯觀(ひそうかん)みたいなものがただよっている。天上界の生活とちがって、地上の生活は、一列(いちれつ)というわけにはゆかない。あるものは海に、山に、川に、土中に、あるいは泥(どろ)水(みず)の一群(いちぐん)に身を投(とう)じて、身も心もモミクチャにされるかも知れない。
나와 같은 동료는, 하늘의 명에 따라서, 언제나 지상에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비장한 모습 같은 것이 떠돌고 있다. 천상계의 생활과 달라서, 지상의 생활은, 일렬(같은 무리, 같은 동아리)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바다로, 산으로, 강으로, 땅 속으로, 혹은 흙탕물의 한 무리로 몸을 던지고, 몸도 마음도 구겨질지도 모른다.
私は、できれば海が好きなので海に投じたい。少なくとも泥水だけは御免(ごめん)だ、と思った。けれどもそうはいってはいられない。人間とちがって、自分の欲(ほ)するところえ降(お)りたいと願(ねが)っても、そうはさせてはくれないのだ。私達には全(ぜん)という意思(いし)はあっても、個(こ)という意思(いし)はないのである。私達は宇宙の生命と一つなのだ。宇宙の意思、宇宙の命(めい)に従うのみである。
나는, 가능하면 바다가 좋은데 바다에 뛰어들고 싶다. 적어도 흙탕물만은 질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 인간과 달라서, 자신의 원하는 장소에 내리고 싶다고 기원해도, 그렇게는 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완전이라고 하는 의사는 있어도, 개체라고 하는 의사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주의 생명과 하나인 것이다. 우주의 의사, 우주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誰かが降(お)りるぞといった。私はハッと我れに返(か)えった。もうどこえなりともいいと思った。
あれこれいったところではじまらない。私達の一群(いちぐん)は驟雨(しゅうう)となって、地上に向って突(つ)っこんでいった。どこえ降(お)りるか見當(けんとう)もつかない。私は眼をつぶり、運を天にまかせた。私の降(お)りたところは、ごうごうと音をたてて流れる谿谷(けいこく)だった。
누군가가 내려온다고 했다. 나는 짠하고 나에게 돌아갔다. 이제 어디에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로 갔던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한 무리는 소나기가 되어, 지상을 향해서 돌진해 갔다. 어디로 떨어질는지 예측도 할 수 없다. 저는 눈을 감고, 운을 하늘에 맡겼다. 제가 떨어진 곳은, 꽐꽐하고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이었다.
隣(とな)りにいた仲間(なかま)は、もう十米もさきの方に流されていた。岩に當り、水中深くもぐったかと思うと、また水面に浮(うか)び出る。天上界と(てんじょうかい)ちがって、地上はたしかに荒(あら)っぽいと思った。水面に浮(うか)び四方(しほう)を眺(なが)めると、同じ仲間が大木の繁(しげ)みをぬらし、悠悠(ゆうゆう)としているものもいた。ちょっとうらやましいと思った。數時間もすると、あいつは天上界に舞(ま)い戾(もど)ってしまうからだ。
옆에 있었던 동료는, 벌써 10미터나 멀리 흘러 갔다. 바위에 부딪치고, 물 속 깊히 잠수했다고 생각하면, 또 수면에 나타난다. 천상계와 달라서, 지상은 확실히 난폭하다고 생각했다. 수면에 떠서 사방을 눈여겨보면, 같은 동료가 큰 나무의 수풀을 적신다. 유유자적하고 있는 동료도 있었다. 잠시 부럽다고 생각했다. 수시간이나 지나면, 저 녀석은 천상계로 되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谿谷(けいこく)の岩に當って悲鳴(ひめい)をあげて飛(と)び散(ち)る仲間もいた。氣の毒だけど仕方がない。私を運んでいる水の一群(いちぐん)は、やがてゆるやかな溪流に(けいりゅう)たどりついた。天を仰(あお)ぐと太陽が顔を出し、もう仲間達は降(お)りてはこなかった。夜が來て朝眼をさますと、地上は春の陽氣(ようき)だった。岸の方をみると若い男女六、七人がキャンプを張(は)っている。我我を使って、顔を洗(あら)ったり、口をすすいだり、米をといだりしていた。近くへいってみたいと思ったが、距離(きょり)がありすぎてゆけない。そのうち、私の周圍(しゅうい)が急ににぎやかになった。小石が岸の方からさかんに飛んでくるのである。私はたまらんと思った。
계곡의 바위에 부딪쳐서 비명을 지르며 날아 흩어지는 동료도 있었다. 불쌍하지만 방법이 없다. 저를 운반하고 있는 물의 한 무리는, 이윽고 완만한 계류에 고생 끝에 겨우 당도했다. 하늘을 우러러보면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더 이상 동료들은 내려오지는 않았다. 밤이 되어 아침에 눈을 떠보니, 지상은 봄의 양기였다. 기슭(물가) 쪽을 보면 젊은 남녀 6, 7명이 야영막사를 치고 있다. 우리들을 사용해서, 세수를 하거나, 입을 헹구거나, 쌀을 씻거나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거리가 너무 지나쳐서 갈 수 없다. 불원간, 내 주위가 갑자기 떠들썩해 졌다. 작은 바위가 언덕 쪽에서 맹렬히 날아오는 것이다. 나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다
もし私の体(からだ)にあの石がまともにあたったら、私の体は飛散(ひさん)し、春の陽気にあたって、私の一部は天上界に蒸發し(じょうはつ)てしまうからだ。折(せっ)角(かく)地上に降(お)りてきたのだから、もう少し經驗を積(つ)みたい。水中にもぐりたいと思うが、仲間が一パイいて身動(みうご)きができない。こういう時は本當に弱(よわ)ってしまう。幸い、私には石はあたらなかった。
만약 제 몸을 저 바위가 정면으로 부딪치면, 제 몸은 날아 흩어지고, 봄의 양기에 부딪쳐서, 저의 일부는 천상계로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모처럼 지상에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경험을 쌓고 싶다. 물속에도 잠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동료가 잔뜩 있어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이런 때에는 정말로 약해져 버린다. 다행히, 저에는 돌은 부딪치지 않았다.
こうしているうちに湖(みずうみ)に出た。小舟がいくつも浮(うか)んでいる。周圍(しゅうい)の山は靜かに眠(ねむ)っている。その眠りをさますように、木立(こだち)の間から鳥のさえずりが聽(きこ)えてくる。キコリの斧(おの)が生(せい)あるものの証(あか)しを自然(しぜん)に訴え(うった)ているかのように谷間をふるわせる。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호수로 흘러갔다. 작은 배가 언제나 떠 있다. 주위의 산은 조용하게 잠들어 있다. 그 잠을 깨우려는 듯이, 나무숲의 사이에서 새의 지저귐이 들려 왔다. 나무꾼의 도끼가 살아 있는 것의 증명을 자연스럽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골짜기를 떨게 한다.
一幅(いっぷく)の繪である。大變に美しい。我々の住む天上界は、靑一色。地平線の彼方から太陽が昇る圖(づ)は、ちょっと形容(けいよう)の出來ないほど壮大(そうだい)で、安らぎがある。ここの湖の(みずうみ)雰(ふん)圍氣(いき)も、それなりの美しさ、靜けさ、安らぎがある。人間と自然。鳥と自然。そこには、こんぜんいったいとした調和がみられる。だいち空氣がきれいだ。澄(す)んでいる。みにくい争い、葛藤(かっとう)があるとすれば、空氣も草木も汚(よ)ごれ、いじけてしまうにちがいない。
한폭의 그림이다. 매우 아름답다. 우리들의 살고 있는 천상계는, 청 일색. 지평선의 저쪽에서 태양이 올라오는 그림은, 잠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며, 평온함이 있다. 여기의 호수의 분위기도, 그런대로의 아름다움, 고요함, 평온함이 있다. 인간과 자연. 새와 자연. 거기에는, 혼연일체가 된 조화를 볼 수 있다. 첫째로 공기가 깨끗하다. 탁한 것이 없어지고 깨끗해지고 있다. 보기 흉한 싸움, 갈등이 있다고 하면, 공기도 초목도 더러워지고, 움추러들어 버림에 틀림없다.
しかしこの谷間には、湖には、そうした気が流れていない。人も、自然も、鳥も、のびのびとして一つにとけ合っている。調和している。地上界にも、まだこうした美しいところがあるとは知らなかった。心ない若い男女の投げた石にあたらなくて本当によかったと思った。私達は人間にたいして、地上のあらゆるものにたいして、好(す)き嫌(きら)いの感情を出してはいけないことになっている。なぜかというと、感情は宇宙の法則(ほうそく)を乱(みだ)すからだ。もしも私達が感情をむき出しにしたとしたらどうなるだろう。人間も動物も植物も、死に絶(た)えてしまうだろう。
하지만 이 골짜기에는, 호수에는, 그러한 기운이 흐르고 있지 않다. 사람도, 자연도, 물고기도, 구김살없이 무럭무럭 자람[=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모습]으로서 하나로 화합하고 있다. 조화하고 있다. 지상계에도, 또 이러한 아름다운 곳이 있는지는 몰랐었다. 분별[철] 없는 젊은 남녀가 던진 돌에 맞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인간에 대해서, 지상의 온갖 사물에 대해서, 좋고 싫음의 감정을 드려내서는 안 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인가 하면, 감정은 우주의 법칙을 어지렵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감정을 드려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일까.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멸종해 버릴 것이다.
なぜなら、地上と天上界を比(くら)べてみると、天上界は、多くの神神が私達を本當に祝福し(しゅくふく)てくれるばかりか、私達を慈し(いつく)み、私達の心を御存(ごぞん)じなので、どれほど住みよく、地上に降(お)りたいというものが一滴(いってき)もいなくなるからだ。ところが地上はどうだろう。私達の一滴(いってき)の水、生命にたいして、あたかも當然のことのようにふるまい、感謝(かんしゃ)の心を持ってはくれない。私達はなにも感謝の心を持てとはいわない。しかし、私達の一滴一滴が地上の生命(せいめい)を生かし、維持(いじ)し、生きる喜びを与えている。
왜냐하면, 지상과 천상계를 비교해 보면, 천상계는, 많은 신들이 우리들을 진실로 축복해 주는 만큼,우리들을 자애, 우리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임으로, 어느 정도 잘 사는, 지상에 내려오고 싶다고 하는 것이 한 방울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상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들의 한 방울의 물, 생명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처럼 행동[대접]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주지 않는다. 우리들은 조금도 감사의 마음을 가져라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한 방울 한 방울이 지상의 생명을 살리우고, 유지하고, 사는 기쁨을 제공하고 있다.
何日も雨が降(ふ)らないと、草木は枯(か)れ、人間は悲鳴(ひめい)をあげるではないか。そんな時ほど、本當に、人間て勝手(かって)なものだと思う。しかし私達は地上の生物(せいぶつ)にたいして感情はタブーとなっている。宇宙の法則(ほうそく)にしたがって、ただひたすら低(ひ)くきに流れる。低くきに流れることによって、私達の生命は常に保(たも)たれ、宇宙の意思(いし)に合一(ごういつ)するのである。
몇일이라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초목은 말라버리고, 인간은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그런 때만큼, 정말로, 인간이 제멋대로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서 감정은 말하거나 행해서는 안되게 되어 있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단지 한결같이 낮은곳으로 흐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에 의해서, 우리들의 생명은 항상 유지될 수 있고, 우주의 의상에 합일하는 것이다.
私は仲間に押されて水中にもぐった。水中は水面とちがって深い靜けさを保(たも)っていた。私はこの水中で何日も過(す)ごしたらしい。もうこれからは水面に出ることはないのかなと思うと一抹(いちまつ)の淋(さび)しさが胸をかすめた。
나는 동료를 누르고 물속에 잠수했다. 물속은 수면과 달라서 깊고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는 이 물속에서 몇일이라도 살았으면 했다. 여기에서는 수면으로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쓸쓸함이 가슴을 훔쳤다.
ところが、急にまわりがさわがしくなった。私は友人達と一緒(いっしょ)に、まるい管(くだ)の中を通(とお)って、勢よ(いきおい)く落下(らっか)している。やがて物凄(ものすご)い轟音(ごうおん)が聞(きこ)え、五(ご)体(たい)をふるわせる。次の瞬間、私の体は厚(あつ)い鐵板にあたったかと思うと、一回轉(かいてん)し、空中に放(ほう)り出されていた。この時はじめて、ことのなりゆきを知った。私達の仲間は、水力發電(すいりょくはつでん)のタービンを回(ま)わす役目(やくめ)でダムという湖で(みずうみ)何日も滯っ(とどま)ていたのである。空中に飛び出した私の体は霧(きり)となって液体(えきたい)から気体(きたい)となり蒸發し(じょうはつ)ようとしている。とうとう地上での生活にピリオドを打つ時がきたようであった。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저는 친구들과 함께, 둥근 관속을 통해서, 힘차게 낙하하고 있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리고, 온몸을 떨게 한다. 다음 순간, 제 몸은 두꺼운 철판에 부딪쳤다고 생각하면, 한 바퀴 돌고, 공중에 방출되고 있었다. 이 때 비로소, 일의 경과를 알았다. 우리들의 동료는, 수력발전의 터빈을 돌리는 역활로 댐이라고 하는 호수에서 몇일이나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중에 뛰어나간 저의 몸은 안개가 되고 액체에서 기체가 되고 증발하고 있다. 마침내 지상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듯 했다.
その時、私は私の轉生(てんせい)輪廻(りんね)と過去(かこ)を知った。それは何千何万回の轉生輪廻のある時点でイエス樣の頭を(こうべ)濡(ぬ)らした時のことである。私はヨルダン川の水の一滴(いってき)となって旅(たび)をしていたが、ふと前方をみるとパプテストのヨハネ樣とイエス樣が立っておられる。私はなつかしさに胸(むね)がふさがれ、いっときも早くお近くにゆきたいと思った。願いが叶(かな)ってお側(そば)に近づいた時、ヨハネ樣が私を含(ふく)め、何滴(なんてき)かの水をすくわれた。その水の一滴がイエス樣の頭を(こうべ)濡(ぬ)らした。
그 때, 나는 나의 전생윤회와 과거를 알았다. 그것은 몇억 몇만 번의 전생윤회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님의 머리를 적셨던 때의 일이다. 나는 요로단의 강물의 한 방울이 되어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문득 전방을 보면 침례[세례]요한님과 예수님이 서 계신다. 나는 정겨움에 가슴이 메었고, 잠시 급히 가까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원이 이루어서 곁에 가까워졌을 때, 요한님이 저를 포함해서, 몇 방울인가의 물을 떴다. 그 물 한 방울이 예수님의 얼굴을 적셨다.
洗禮(せんれい)という儀式(ぎしき)に、私の一滴(いってき)が選(えら)ばれたことは、私の生涯に(しょうがい)忘れ得ぬ喜びであり、光榮(こうえい)だった。一滴の水の一生ははかなく、哀(あわ)れなものだが、この時ほど生(いき)甲(が)斐(い)と希望と光榮に滿(み)ちたことはなかった。今、私自身は水力發電のタービンを回(ま)わし、電力をおこし、地上に光を與える役目を終て、天上界にのぼろうとしている。時代はかわり、いろいろの輪廻(りんね)を重(かさ)ねてきた私だったが、私は水の生命と誇(ほこ)りだけは失(うし)ないたくないと、この時、强よく、思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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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라고 하는 의식에, 저의 한 방울이 선택되었던 것은, 저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이었다. 한 방울의 물의 일생은 덧없다(무상하다), 애처러운 것이지만, 이 때만큼 삶의 보람과 희망과 영광으로 충만한 적은 없었다. 지금, 제 자신은 수력발전의 터빈을 돌리고, 전력을 일으키고, 지상에 빛을 주는 역할을 마치고, 천상계로 올라가려고 하고 있다. 시대는 변하고, 여러 가지의 윤회를 거듭해 온 저였지만, 저는 물의 생명과 긍지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고, 이 때, 굳건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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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분의 글을 한 데 모았습니다.
☆・・・깨달음이란☆・・・진선미[真善美]. ☆・・・각자의 운명[運命]은☆・・・...정사[正邪=옳고 그름, 선악]의 정(正), ☆・・・화하되 같지 않다[和而不同], ☆・・・ 인간의 의식(이 경우는 주로 상념)은 무한하게 변화한다.☆・・・ 「누가 너의 오른쪽 빰을 때리면, 왼쪽 빰도 내어 주라 」☆・・・어느 “한 방울”의 물의 일생 등 세편으로 나눈 것을.
用語解釋
[용어해석]
Page 155~157의 내용은, 일부분의 글씨를 알아 볼 수가 없어서, 올리지 말까 하다가, 올립니다.
특히, 5명의 분신 중에서..입니다.
五人の分身
[5명의 분신]
人間の生命、魂は核を本體に五分身からできています。 生命體はすべてこうした組織機構を備え、現象界と實在界をかわるがわる轉生輪廻しています。人間の體が、 ?、頭、 手(二つ)足(二つ)の六つから成なっているのもこのためです。
인간(人間)의 생명(生命), 영혼(魂)은 핵(核)을 본체(本體)로 5명의 분신(五分身)으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체(生命體)는 전부 이러한 조직기구(組織機構)를 갖추고, 현상계(現象界)와 실재계(實在界)를 번갈아 가며 전생윤회(轉生輪廻)하고 있습니다. 인간(人間)의 몸(體)이, ?, 머리(頭), 손(手)(2개), 발(足)(2개)의 6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靈子線
[영자선]
人間は、靈の絲によって現象界(この世)と實在界)(あの世)がつながれています。その絲を靈子線といいます。靈子線が切れると人間は死にます。自我我欲が强よいと靈子線に黑い塊りができ、死を早めます。逆に人のために奉仕する者は、靈子線の絲が太くなり、光の保護をうけ天壽を?うします。
인간(人間)은, 영혼(靈)의 실(絲)로 현상계(現象界)(이세상)과 실재계(實在界)(저세상)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 실(絲)을 영자선(靈子線)이라고 합니다. 영자선(靈子線)이 끊어지면 인간(人間)은 죽습니다. 자아아욕(自我我欲)이 강하면 영자선(靈子線)에 어두운 덩어리가 생겨, 죽음을 재촉합니다(앞당깁니다). 반대로 남을 위하여 봉사(奉仕)하는 사람(者)은, 영자선(靈子線)의 실(絲)이 굵어져서, 빛(光)의 보호(保護)를 받고 천수(天壽:타고난 수명)를 누립니다.
守護、指導靈
[수호령, 지도령]
守護靈は、 現象界に出ている一人の分身あるいは本體にたいし、實在界に殘っている五分身あるいは本體の一人がなります。指導靈は、六つの生命のグループの友人ないしは、知人を指していいます。また時には守護靈が指導靈として指導することもあります。上段階にいきますと、こういう傾向を强よめます。
수호령(守護靈)은, 현상계(現象界)에 나와 있는 한 사람(一人)의 분신(分身) 혹은 본체(本體)에 대하여, 실재계(實在界)에 남아 있는 5명의 분신(五分身) 혹은 본체(本體)가 한명(一人)이 됩니다. 지도령(指導靈)은, 6개의 생명(生命)의 그룹(집단)의 친구(友人) 내지는, 지인(知人)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때로는 수호령(守護靈)이 지도령(指導靈)이 되어 지도(指導)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단계(上段階)로 가면, 이러한 경향(傾向)이 짙어집니다.
靈道
[영도]
人間の表面意識と潛在意識が貫通し想念帶という層に窓がひらくことをいいます。靈道が開くと靈子線の絲が次第に太くなります。が、心が亂れると、普通人以上に惡魔や動物靈に支配されやすい缺點もあります。
인간(人間)의 표면의식(表面意識)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이 관통(貫通)하고 상념대(想念帶)라고 하는 층(層)에 창(窓)이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도(靈道)가 열리면 영자선(靈子線)의 실(絲)이 점점(次第) 굵어집니다. 하지만, 마음(心)이 흐트러지면(냉정을 잃으면), 보통 사람 이상(以上)으로 악마(惡魔)나 동물령(動物靈)에게 지배(支配)되기 쉬운 결점(缺點)도 있습니다.
苦集滅道
[고집멸도]
苦とは生老病死の迷い。集は人間の五官や六根,滅は五官,六根をなくすこと。道はそのためには中道を步むしかないという意味。
고(苦)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미혹(迷惑)이다. 집(集)은 인간(人間)의 오관(五官)이나 육근(六根)이며, 멸(滅)은 오관(五官), 육근(六根)을 없애는 것.이다. 도(道)는 그러기 위해서는 중도(中道)를 걷는 길밖에 없다고 하는 의미(意味)이다.
煩惱卽菩提
[번뇌즉보리]
煩惱とは人間の迷い、自我。菩提とは、その煩惱があるからこそ、反省も出來,悟りを得ることができます。そこで煩惱すなわち悟りの道といっているのでる。
번뇌(煩惱)란 인간(人間)의 미혹(迷惑), 자아(自我)이다. 보리(菩提)란, 그 번뇌(煩惱)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반성(反省)도 가능하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번뇌(煩惱) 즉 깨달음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一念三千
[일념삼천]
人間の想いは本來に自由にできています。したがってどこえでも通じます。三とは割り切れない數で三千とは無限ということです。
인간(人間)의 생각(想い)은 본래(本來) 자유롭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디로든지 통합니다. 3(三)이란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숫자(數)이며 3천(三千)이란 무한(無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阿修羅界
[아수라계]
權力欲、鬪爭欲などの自己本位の亡者の集まる地獄。意識がここに通ずると、その人柄が急にかわり、刃のようなつめたさと、人の惡口を平氣でいうようになり、始末に負えなくなります。
권력욕(權力欲), 투쟁욕(,鬪爭欲) 과 같은 자기본위(自己本位)의 망자(亡者)가 모이는 지옥(地獄)이다. 의식(意識)이 이곳에 통하면, 그 인품(사람됨)이 갑자기 바뀌며, 칼날(刃)같은 냉정함과, 남(人)의 험담(惡口:욕)을 거침없이(태연하게) 하게 되어, 처치 곤란하게 됩니다(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됩니다)..
惡魔
[악마]
爭いを好み、血をみるとますます狂奔する。最低地獄の意識層。もともとこの層は本來あるものではなく、人間の長い地上生活と業想念がつくり出した念の集積。
써움을 좋아하고, 피를 보면 더욱더 광분(狂奔)한다. 최저(최하) 지옥(最低地獄)의 의식층(意識層)이다. 본래 이 층(層)은 본래(本來)는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人間)이 오랜 지상생활(地上生活)과 업상념(業想念)이 만들어 낸 생각(念)의 집적(集積)이다.
動物靈
[동물령]
その大半はギツネ。ギツネは動物のなかでも利巧で、犬や馬以上に役に立つが、もともと本能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ため、現象界の人間に憑さをします。人間に利益を與えたり、神の姿をみせたりする。ヘビはギツネ以上にどう猛であの世のヘビが人間に憑くと、頭は切れるが變人や奇人,神がかり的になり、ギツネつき同樣、自殺、難病、災難、變死にみまわれるようになります。
그 대부분(大半)은 기츠네(여우:狐)이다. 여우(狐)는 동물(動物) 중에서도 영리(利巧)하며, 개(犬)나 말(馬) 이상(以上)으로 쓸모가 있지만, 원래 본능적(本能)으로 특성을 충분히 살리기 때문에, 현상계(現象界)의 인간(人間)에게 빙의(憑依)를 합니다. 인간(人間)에게 이익(利益)을 주거나, 신(神)의 모습(姿)으로 둔갑을 하기도 한다. 뱀(蛇:Snake)은 여우(狐) 이상(以上)으로 영악(獰惡:모질고 악착스러움; 사나우며;매우 공격적)하며 저 세상의 뱀(蛇:Snake)이 인간(人間)에게 빙의(憑依)하면, 머리(頭)는 잘 돌아가지만(영민하지만) 괴짜(變人:성질(性質)이나 모습이 여느 사람과는 다른 사람)나 기인(奇人), 신지피적이 되어(접신적이 되어:神懸(か)り·神憑り), 여우에게 홀려서 난다는 정신병(狐憑き)과 같은, 자살(自殺), 난병(難病:난치병), 재난(災難), 변사(變死:비명 횡사:뜻밖의 사고로 사람이 죽음)를 당하게 됩니다.
圓通無碍
[원통무애]
宇宙も人間の精神もたえず轉生輪廻を續けています。つまり圓運動を續けており、人が悟るとその運動は、丁度、人工衛星のようになんのさわりもなく、法則のままに、地球のまわりをまわるように轉生輪廻をつづけることをいいます。
우주(宇宙)도 인간(人間)의 정신(精神)도 끊임없이 전생윤회(轉生輪廻)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즉 원운동(圓運動)을 계속하고 있고, 사람이 깨달으면 그 운동(運動)은, 마치(丁度), 인공위성(人工衛星)처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법칙(法則)대로, 지구(地球)의 둘레를 돌듯이 전생윤회(轉生輪廻)를 계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實在界
[실재계]
ある一定の場所、空間を占めた世界です。別名意識界ともいいます。大別して天國と地獄に分かれ、各人の光子量(善行爲,善意識)によって死後、人間はこのどちらかの世界に魂が住むようになります。むろん、その段階は無數に分れます。こちら(この世- 物質界)は時が經つと消えて大氣に還元されますが、實在界(あの世)は何萬年たっても消えてなくなりません。それ故,實在界といいます。
어떤 일정(一定)한 장소(場所), 공간(空間)을 차지하는 세계(世界)입니다. 딴 이름(別名)은 의식계(意識界)라고도 합니다. 대별(大別)해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으로 나뉘고, 각자(各人)의 광자량(光子量)((선한 행위(善行爲), 선한 의식(善意識))에 따라서 사후(死後), 인간(人間)은 이 어느쪽의 세계(世界)에서 영혼(魂)이 살게 됩니다. 물론, 그 단계(段階) 무수(無數)하게 구별됩니다. 이쪽(이세상- 물질계((この世- 物質界))은 시간이 경과하면 사라지고 대기(大氣)로 환원(還元)됩니다만, 실재계(實在界)((저세상))은 몇 만년(何萬年)이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재계(實在界)라고 합니다.
如是我聞
[여시아문]
これは漢文であり、その讀み方は、我れかくの如くきくといいます。釋迦の弟子達が、釋迦滅後にお釋迦樣の法語を各人がリポートとして書いたものがそのはじまりで、支那(今の中國)に渡って、經文の形式になったのが、この如是我聞です。この意味では聖書の內容も漢文になおすと如是我聞となります。
이것은 한문(漢文)이며, 그 읽는 방법은, 와레카쿠노고토쿠키쿠토이이마스(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합니다). 석가(釋迦)의 제자들(弟子達)이, 석가 멸후(釋迦滅後)에 부처님(お釋迦樣)의 법어(法語)를 각자(各人)가 리포트(report)해서 쓴 것이 그 시작이며, 지나(支那)(오늘날의 중국)으로 건너가, 경문(經文)의 형식(形式)이 된 것이, 이 여시아문(如是我聞)입니다. 이 의미(意味)로는 성서(聖書:성경)의 내용(內容)도 한문(漢文)으로 옮기면 여시아문(如是我聞)이 됩니다.
Page 155~157
あ と が き
(끝맺음 말)
今回の小冊子は、宇宙(うちゅう)の神理(しんり)、人間の心とはいったい、どのようなものであるかということを、ごく槪念的(がいねんてき)に書いたものです。したがいまして、この小冊子をもって、心の存在がわかり、人間とは、肉体だけではなく、精神(生命)の乘り舟として、現象界を(げんしょうかい)渡ってゆく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ただくだけで、本書の目的はなかば達せられたと考えるものです。同時に、本書を讀まれて、非常に數多くの疑問(ぎもん)を抱(いだ)かれた方もおありかと思います。私のいう生命と物質、八正(はっしょう)道(どう)の解說、人間の精神(せいしん)構造(こうぞう)にしても、學問的にはいろいろと問題があろうかと思います。けれども、人間そのものを探究し(たんきゅう)ていきますと、物質科學では到底(とうてい)割(わ)り切れない面が多多あるのであります。
이번의 소책자는, 우주의 신리, 인간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극히 개념적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를 가지고, 마음의 존재를 알고(이해하고), 인간이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精神)(생명(生命))의 타는 배(乗り舟)로서, 현상계를 건너 가는 것인 것임을 알아 주시는 것만으로, 본서(本書)의 목적은, 절반은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동시에, 본서를 읽으시고, 상당히 수많은 의문(疑問)을 품고 계신 분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생명과 물질, 팔정도의 해설, 인간의 정신구조라 해도, 학문적으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인간 그 자체를 탐구해 가시면, 물질과학으로는 도저(到底)히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면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原子の世界、一つをのぞいてみても、核、ニュー・プロトンとプロトンと陰外電子の間の空間について、これを物質とみ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か。電波エネルギーにしてもそうです。もしも、こうしたものまで、それも物質であり、物質の作用だといわれる方がおありならば、是非とも、その御意見をおうかがいしたい。
원자(原子)의 세계, 하나를 들여다 보더라도, 핵(核), 뉴프로톤(새로운 양성자,New Proton)와 프로톤(양성자(陽性子))과 음외전자(陰外電子)의 사이의 공간(空間)에 대해서, 이것을 물질로 볼 수가 있을까? 전파에너지(電波Energe)라 해도 그렇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까지, 그것도 물질(物質)이며, 물질의 작용(作用)이다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필히, 그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一方、釋迦のいう八正道については、佛敎學的に、その見方、考え方がいろいろあろうかと思います。しかし、一枚の紙にも表と裏があるように現象界(この世)がある以上、實在界(あの世)もあるのであります。人間が、心の存在を知りますと、この兩方の世界を見通すことができます。私は、こうした体驗を通じて、八正道というものをあらためて見直したのであります。
한편, 석가(釋迦)가 말하는 팔정도에 대해서는, 불교학적으로, 그 견해, 사고방식이 여러가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장의 종이에도 겉과 속이 있는 것처럼 현상계(現象界)(이세상=この世)가 있는 이상(以上), 실재계(實在界)((저세상=あの世))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마음의 존재를 알게되면, 이 양쪽(兩方)의 세계를 꿰뚫어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직시(見直)했던 것입니다.
精神科學は現在、アメリカ、イギリス、ソ連などでいろいろな角度(かくど)から硏究が進められています。けれども、こうした精神科學についても、心の解明(かいめい)に到達(とうたつ)しないかぎり、人間の存在、人間と宇宙の關係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この意味におきまして、本書によって幾多の疑問を抱(いだ)かれ、學問的にも、また自分自身を、あらためてふりかえっていただくならば、望外(ぼうがい)の幸せであります。
정신과학(精神科學)은 현재(現在=1970년), 아메리카(America), 영국(Inglez), 소련(蘇聯:소비에트 연방) 등에서 다양한 각도(角度)로 연구(硏究)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신과학(精神科學)에 대해서도, 마음의 해명(解明)에 도달(到達)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재(存在), 인간과 우주(宇宙)의 관계(關係)를 알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意味)에 있어서, 본서(本書)에 의해서 수많은 의문(疑問)을 품으시고, 학문적으로도, 또한 자기 자신을, 새삼스럽게 뒤돌아보아 주신다면, 기대 이상(望外)의 기쁨입니다.
なお本書作製にあたって堀田和成氏の絶大なる協力を心から感謝致します
더구나 본서 제작에 있어서 홋타 키즈나리(堀田和成)씨의 절대(絶大)한 협력(協力)을 진심으로 감사(感謝)드립니다.
編 者(편집자 : 엮은이)
Page 158
이것으로, 천사의 재래는 마칩니다. -끝-
최초에 올렸던 날짜는, 2010년 3월 26일이었으며
다시 2011년 11월 7일 월요일에 미완결판이었던 것을 재번역하였으며, 역시 빙의상태였으며,
오늘, 빙의가 없어진, 온전한 정신상태로, 2016년 10월 26일 목요일에 완전체로 한데 묶어서, 중간 중간에 빠졌던 내용을, 재발견하여, 완전체로 올립니다.
중간 중간에 조금 표현이 이상한 부분이나, 한문체가 섞이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정도까지 정리하는 데, 2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출처 :「生きる道」(あなたにも過去世がある)改題 『天使の再來』<高橋信次>, 「如是我聞」<K・H 生>
※출처 : http://tenshinosairai.seesa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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