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마음에 법이 있으니(『心に法ありて』) 다카하시 신지( 高橋信次), 다카하시 카즈에(高橋一榮) 1976년 본문
본 책은, 최초에 2010년 03월에, 한 개씩 제가 빙의로 인해서, 제 병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노트 형식으로,
제 블로그에 올렸던 것인지라, 오타 및 오역이 약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인 2016년 11월 04일 금요일에 32가지 주제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기존에 스크랩 및 복사를 해 가신 분들은, 참고하여,
이것을, 다시 한번 잘 봐 주시길 바랍니다.
『心に法ありて』
高橋信次(たかはし・しんじ),高橋一榮(たかはし・かずえ) 1972
『마음에 법이 있으니』
다카하시 신지( 高橋信次), 다카하시 카즈에(高橋一榮) 1972년
((두 분은 부부(夫婦)입니다. "신지"는 남편이고, 뒤에 있는 "카즈에"는 아내의 이름입니다)
((책 표지의 글입니다))
太陽は東からのぼり,水は低きに流れる.自然はその條理を,無言のうちに敎えている.人が苦しみ,世情が騷然となるのは,自然の條理に反したがゆえである.作用といい反作用というのも,神理が常にそこに現われているのである。
태양(太陽)은 동쪽(東)에서 뜨며, 물(水)은 낮은 데로 흐른다. 자연(自然)은 그 조리(條理:도리)를, 무언(無言) 중에 가르치고 있다. 사람(人)이 괴로움, 세상 인정(世情:세정)이 소연(騷然:시끄럽고 수선함)해지는 것은, 자연(自然)의 조리(條理:도리)에 반(反)했기 때문이다. 작용(作用)이라고 하며 반작용(反作用)이라고 하는 것도, 신리(神理)가 항상 그곳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高橋信次のことば"より
"다카하시 신지님의 말씀"에서
ま え が き
[머리말]
「さあ、起こしてくれ。上衣を出してくれ。私は行かねばならない。みんなが待っている」
主人は、床のなかで、そう私に叫びつづけます。
自分の体が自由にならないのに、気持だけは、明日に迫った関西講演に、早や心は飛んでいるようでした。
「어서, 일으켜 줘, 윗도리 꺼내 줘, 난 가지 않으면 안돼. 모두 기다리고 있어.」
남편은, 침대에서, 그렇게 나에게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한데도, 기분만은, 내일 있을 간사이 강연에, 벌써 마음은 가 있는듯 했습니다.
私は、黙って主人の顔を凝視(みつめ)ていますと、
「なにを愚図愚図している。はやくしないか。上衣を持って来てくれ」
そういって、自分の力で床から起き上がろうとします。
나는, 조용히 남편의 얼굴을 응시하자,
「무엇을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하지 않고? 윗도리 가져다 줘」
라고 말하며, 자기 힘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합니다.
しかし、主人は、もう何日も物を食べていません。それどころか、山形講演ですっかり体を使い果たし、そのうえ、つい一日前、ある方が八起ビルに訪ねてくるというので、わざわざ出かけて行き、夜の十時すぎまで話し合い、その無理がたたったのでしょう。両足にむくみが出るほど体に異常をきたし、立っていることさえできず、玄関に入るなり倒れてしまったのです。
하지만, 남편은, 언제나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야마가타(山形) 강연에서 완전히 체력을 소진하고, 게다가, 바로 어제는, 어떤 분이 야오키 빌딩(八起ビルに)에 방문해 온다고 하면서, 일부러 나가서, 밤 10시까지나 서로 대화하고, 그렇게 무리한 탓이겠지요. 양쪽 다리가 부어오를 정도로 몸에 이상을 일으키고, 서 있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고, 현관에 들어오자 마자 쓰러졌던 것입니다.
もともと主人は、体には自信があったようです。病気らしい病気はしたことがないので、体が疲弊し切っていても、気力だけは少しも衰えず、講演会に行くといってきかないのです。
원래 남편은,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듯 합니다. 병같은 병은 걸린 적이 없는데, 몸이 피폐하고 소진하고 있어도, 기력만은 조금도 쇠약해지 않고, 강연회에 간다고 하며 말을 듣지도 않습니다.
今にして思えば、あのときの主人は、家族の者の理解を越えたある使命感だけに己れの魂を燃焼させて生きていたと思います。
지금 생각해보면, 저 당시의 남편은, 가족들이 이해를 초월한 어떤 사명감만으로 자기의 혼을 불태우며 살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それから十日余りして主人は昇天しましたが、主人のこうした行動なり、考え方は、いったいどこからきていたのでしょう。
그리고 나서 10여일 후에 남편은 승천했지만, 남편의 이러한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それは、主人の著書『心の発見』(神理篇)三十一ページの〃心中の魔王〃の冒頭に「その後、一九五三年に、私は許婚者の女性に、自分の将来について四十八歳までのことを予言し・・・・・・」とありますように、四十八歳までに、やるべきことをやっておきたいの一念だけだったと思います。
그것은, 남편의 저서 『마음의 발견』(신리편) 31페이지 “마음속의 마왕”의 머릿말에 「그 후, 1953년에, 나는 약혼자인 여성에게,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48세까지인 것을 예언하고 ・・・・・・」라고 하고 있듯이, 48세까지로, 당연히 해야할 것을 해내고 싶다는 일념 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四十八歳以後のこの世の計画は、すべて白紙であり、自分のいのちはそれまでしかないと知っていたので、いのちのあるかぎり、講演をつづけたかったのでしょう。
主人の行動を支えるもう一つのバックボーンであり、信念は、人びとに人間の真実を知ってもらいたい、ということだったと思います。
48세 이후의 이 세상의 계획은, 전부 백지이며, 자신의 생명은 그것까지 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으므로, 숨이 붙어 있는 한, 강연을 계속하고 싶었겠지요.
남편의 행동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중추적인 지주이며, 신념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진실을 알려 주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人間は、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死とは何か、生きるとは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ことを、一人でも多くの方に理解して欲しい、ということでした。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어떠한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분에게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主人の考え方は、十余冊の著作のなかに述べられておりますが、人間は、肉体ではなく魂であり、そのため心を失うと、争いや苦しみが襲ってくると訴えてきたわけです。
남편의 사고방식은, 10여 권의 저작의 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인간은, 육체가 아닌 영혼이며,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잃으면, 다툼과 괴로움이 덮쳐 온다고 호소해 왔던 것입니다.
もちろん、人間にとって肉体は必要です。肉体のない人間は、この世に存在しませんから。
しかし、ものの考え方が、肉体に片寄るから、苦しみ、悲しみが、つきないわけでしょう。
물론,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는 필요합니다. 육체가 없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하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이, 육체에 치우치기 때문에, 괴로움, 슬픔이, 다하지 않는 원인이겠지요.
仏教の言葉に、諸行無常というのがあります。この意味は、この世は、時々刻々変化し、一つとして永久不変のものはない。にもかかわらず、人は、その無常を有常と見て、事を構えてしまう。そこに悲劇があり、苦悩があると思います。
불교의 말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의미는, 이 세상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하나라도 해도 영구불변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무상(無常)을 유상(有常)이라고 보며, 일을 감행해 버린다. 거기에 비극이 있으며, 고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永久不変の真実は、人の魂であり、生き通しの心です。これこそが有常の姿なのです。
영구불변의 진실은, 사람의 영혼이며, 삶 그대로의 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유상의 모습(有常の姿)인 것입니다.
ですから、この世の生活は、物事が相対的にできていますから、たがいに助け合い、補い合って、苦悩をつくらない生活をしよう、といっているのです。
그러므로, 이 세상의 생활은, 사물(세상사)가 상대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고, 고뇌를 만들지 않는 생활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主人の訴えてきたことを詰めていうと、以上のように要約されると思いますが、本書は、これらのことを、過去七年間にわたって毎日書きつづけて来た、いわば時事評論です。
人間生活の在り方を、いろいろな角度からながめ、訴えてきた小論です。
남편의 호소해 왔던 것을 매듭지어 보면, 이상과 같이 요약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책은, 이러한 것을, 과거 7년간에 걸려서 매일 꾸준히 기록해 왔던, 말하자면 시사 평론입니다.
인간생활의 본연의 자세를, 다양한 각도에서 지그시 보고, 호소해 왔던 짤막한 논문입니다.
我田引水になるかも知れませんが、本書を読んでいますと、高橋信次は、今もなお、これを書きつづけ、私たちに訴えているかのようです、そして、人間らしい調和の生活を一日も早く実現してほしいと、叫んでいるかのようです。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는, 지금도 여전히, 이것을 계속 기록하며, 저희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인간다운 조화의 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외치고 있는 듯 합니다.
★我田引水[아전인수]
자기(自己) 논에만 물을 끌어넣는다는 뜻으로,
①자기(自己)의 이익(利益)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行動)함
②또는 억지로 자기(自己)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
息を引きとるまで、真実に生きようとつとめた高橋信次の小論集によって、一人でも多くの方が開眼され、明るい、楽しい、そして正しい生活に立ち直っていただくよう希望いたします。
숨을 거둘 때까지,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의 작은 논집에 의해서, 한 사람이라도 많은 분이 진리를 깨닫게 되어, 밝은, 즐거운, 그리고 올바른 생활을 회복해 주었으면 하는 희망입니다.
読者のみなさまのなかには、高橋信次の本は、もう世に出ないと思われた方がおありだったと思いますが、本書によって、今なお元気よく生きつづける高橋信次のけいがい謦咳を感じていただくならば、私の幸せ、これに過ぎるものはございません。
독자 여러분 중에는,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의 책은, 더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책에 의해서,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게 잘 계속 살고있는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의 존경하는 이의 말을 가까이에서 듣는다고 여겨주시면, 저의 행복, 이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一九七二年十月 1972년 10월
高 橋 一 榮 (다카하시 카즈에)
▷ 서문에 들어가면서, 아내의 입장에서 서문을, 해석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부인입니다.
참고로, 제 블로그에서 신지님의 글을 읽어보시지 않으신 분은, 어떤 분이신지 모를 것입니다.
이분은 1976년 6월 24일에 귀천하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아내의 입장에서. 몸을 혹사하면서, 강연하는 것을 지켜본 입장에서..남편의 가르침을 짧은 문장으로..32가지의 주제로 엮은 글인 듯 합니다.
◈ 기존에 올려 놓았던, 흩어진, 주제별로 따로 따로 올려져 있던 것은, 비공개로 처리하거나, 혹은 그대로 보존할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2016년 11월 04일, 음력 생일날에, 완전체로, 한 권을 다 올립니다.
차례를 알기 쉽게 올려 놓습니다.
1.輪 廻[윤회]
2.勞使協調[노사협조]
3.組織と個人[조직과 개인]
4.天 職[천직]
5.食糧問題[식량문제]
6.出家と悟り[출가와 깨달음]
7.地 震 [지진]
8.法[법]
9.魔の跳梁[악마의 도량(악마의 날뜀)]
10.罪障消滅[죄장소멸]
11.原 罪[원죄]
12.己心の魔[자기 마음의 악마]
13.憑依と靈道[빙의와 영도]
14.精神病[정신병]
15.言葉と魔[말과 악마]
16.天の心を[하늘의 마음을]
17.合掌[합장]
18.價値の基準[가치의 기준]
19.[安らぎ][평안]
20.反省について[반성에 대해서]
21.八正道[팔정도]
22.自己の確立[자기의 확립]
23.止 觀[지관]
24.執着から離れた生活[집착에서 떠난 생활]
25.良き友を[좋은 벗을]
26.[奇 跡][기적]
27.[信は力][믿음은 힘]
28.助 力[조력]
29.[調和と妥協][조화와 타협]
30.[自由と愛][자유와 사랑]
31.[知識と知慧][지식과 지혜]
32.[愛][사랑]
輪 廻
[윤회]
仏教学者の間では、如来となって大悟した者は二度と再び地上に生まれ出ることがないと考えられている。果たしてそういうものかどうか。こうした見方は一つには地上の生活は苦の世界であり、カルマ(業)の虜となるために、如来の悟りを得ないと、カルマが手枷足枷となって、それが輪廻をくりかえすとみるからであろう。
불교학자 사이에서는, 여래가 되어 깨달은 사람은 두번 다시 지상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아닐까. 이러한 견해는 한가지로 지상의 생활은 괴로움의 세계이며, 카르마(업)의 사로잡히기 때문에, 여래의 깨달음을 깨닫지 않으면, 카르마가 자유로운 행동을 속박당하게 되어, 그것이 윤회를 반복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輪廻というものは万生万物に永遠に付いてまわるものである。生命も物質も、いずれも神の光によって創られており、神の光は永遠に消滅しないものであるからだ。これをもっとわかり易くいうならば、生命は休みなく運動を続けており、その運動は工ネルギー不滅の法則の通りつづいているからである。
윤회라는 것은 만생 만물에 영원히 달라붙어 도는 것이다. 생명도 물질도, 모두 신의 빛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신의 빛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말한다면, 생명은 쉬지 않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고, 그 운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대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物質としてこの地上にあったものは、やがて、エネルギーと化し、天空や地下の目に見えないエネルギーに同化してしまう。同化したとしても、形を失なったその物質は無になった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く、物質として蘇えるまでエネルギーとして、あるいは意識として温存されているのである。
물질로서 이 지상계에 있던 것은, 이윽고, 에너지로 변하고, 하늘이나 지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동화해 버린다. 동화했다고 해도, 모양을 잃어버린 그 물질은 없어졌을까라고 하면 그렇지 않고, 물질로서 소생하기 까지 에너지로서, 혹은 의식으로서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人の魂もこれと同様に、こうした大自然のルールにしたがって、転生を輪廻している。すべては円運動を通して、物質も生命も輪廻を重ねている。
사람의 영혼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전생을 윤회하고 있다. 모든 것은 원운동을 통해서, 물질도 생명도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ただ、魂によっては輪廻のテンポは遅く、あの世実在界に永くとどまる生命もあるが、それはいろいろな理由からそうなるので、通常は悟ったから、悟らないからということはない。
단지, 영혼에 따라서는 윤회의 템포는 느리고, 저 실재계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생명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며, 통상은 깨달았기 때문에, 깨닫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人が悟るとカルマからおんり遠離する。遠離するとはカルマに心が動かされないということだ。カルマというものは過去世と今世のものが混合されてその人を動かして行くが、それは、悟りとは関係なく、ある期間、その運動を停止することがない。
사람이 깨달으면 카르마에서 멀리 벗어난다. 멀리 벗어남(遠離する:원리한다)이란 카르마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카르마라고 하는 것은 과거세와 현세의 것이 혼합되어 그 사람을 움직여 가지만, 그것은, 깨달음과는 관계없고, 어느 기간, 그 운동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다.
それはイエスが十字架の人となり、苦渋を味わったが、十字架はイエスのカルマがそうさせたといえよう。しかし、イエスはすでに悟っていたので、十字架の苦痛を乗り越え心を動か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復活がそのことを証明していよう。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사람이 되고, 고배를 맛보았지만, 십자가는 예수의 카르마가 그렇게 시킨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예수는 이미 깨닫고 있었으므로, 십자가의 고통을 뛰어넘은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일은 없었다. 부활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このように、ものにはすべて慣性の法則が働き、カルマ自体循環の運動をつづけているので、本人の意思にかかわらず動くものだからである。しかし、正しい意思が内在され、神の光が表われるようになると、カルマの運動は急速に停止をはじめる。・・・・・・といってカルマの運動が停止されても、魂の輪廻は停止することはないのである。これは大自然の法則であるからだ。
이와 같이, 현상(물질)에는 전부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고, 카르마 자체순환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므로, 본인의 의사(意思)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바른 의사가 내재되어, 신의 빛이 나타나게 되면, 카르마의 운동은 급속히 정지를 시작한다. ・・・・・・라고 하며 카르마의 운동이 정지되어도, 영혼(魂)의 윤회는 정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대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私たちは学者の推測にとらわれてはならない。
저희(우리)들은 학자의 추측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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究竟涅槃とは、表面的な解釈は釈迦の入滅を指している。つまり、不生不滅の状況を「涅槃」といっている。
구경열반[究竟涅槃]이란, 표면적인 해석은 석가의 입멸을 가리키고 있다. 즉, 불생불멸의 상황을 「열반(涅槃)」이라고 말하고 있다.
現世からみると、入滅(実在界に帰る)は、永遠への回帰にちがいはないが、本当は肉体を持ちながら私達の魂は永遠の中にあるのである。ただ現世は、肉体と共に魂があるために、極めて不安定な、そうして有限の迷いの多い、それのように思ってしまうだけである。
현세에서 보면, 입멸(실재계로 돌아간다)은, 영원으로의 회귀임에 틀림이 없지만, 사실은 육체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들의 영혼(魂)은 영원함 속에 있는 것이다. 단지 현세는, 육체와 함께 영혼(魂)이 있기 때문에, 지극히 불안정한, 그렇게 해서 유한(有限)한 미혹의 많은, 그것과 같이 생각해 버릴 뿐이다.
釈迦は三十六歳で「宇宙即我」を悟った。悟ったとは人間の魂は不生不滅であり、死ぬことも、生きることも区別できない、そして、大宇宙と倶にあるということを知った。この時点で、釈迦は、涅槃の境涯をつかんでいたのである。四十余年後の肉体的な死が涅槃というのではない。
석가는 36세에 「우주즉아(우주가 바로 나다)」을 깨달았다. 깨달았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魂)은 불생불멸이며, 죽는 일도, 사는 일도 구별할 수 없는, 그리고, 대우주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 시점에서, 석가는, 열반의 경애(境涯)를 파악했던 것이다. 40여년 후의 육체적인 죽음이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ただし、三十六歳で大いなる悟りに達し、その後、その悟りの内容が次第に幅広く、深く、濃密になって、入滅の瞬間に人間としての全きを得たといえる。
다만, 36세로 크나큰 깨달음에 이르고, 그 후, 그 깨달음의 내용이 서서히 폭을 넓히고, 깊고, 농밀하게 되어, 입멸의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したがって、この意味からすれば、釈迦の入滅は、人類が待ち望みながらも、容易に果し得なかった最高の悟りに達したといえなくはない。
따라서, 이 의미 때문이라고 한다면, 석가의 입멸은, 인류가 용이하게 달성할 수 없었던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しかし普通の解釈は、肉体の迷いから、永遠の生命に帰られ、二度とこの世に生れることがないと考えられている。生命の転生輪廻を黙殺する。解らないためである。同時に、不安定な現世に対する人々の希望が、そう解釈し、そう解釈させて欲しい、と願うからでもあろう。
그러나 보통 석가는, 육체의 미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서, 두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생명의 전생윤회를 묵살한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안정한 현세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이,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何れにしても涅槃の解釈は、頭では割り切れない。物理的現象のみでは誤った方向にゆきやすい。心の問題は、心を本当に理解しないと間違いを犯そう。
어느 쪽이라고 해도 열반의 해석은, 머리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물리적 현상만으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마음의 문제는, 마음을 정말로 이해하지 않으면 잘못을 저지른다.
話しは変るが、大抵の人はもう二度とこの世に生れ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だろう。あるいはそう思うことがあるだろう。これは、あの世の生活とこの世の生活に大きなズレがあるためであるし、10%の表面意識の自我にもとづく我侭な心がそうした想念を生み出している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魂の転生輪廻と聞いて、人によってはウンザりしている者もあろう。ところがあの世にいる魂のグループ、つまり魂の兄弟達は、そうは思っていないのだ。むしろ自分のためとして、現世におるその兄弟を守り、無事に修行を終える事を願っている。魂の前進は、現世に出て、はじめて可能だからである。あの世の修行は、先が見通せるだけ修行にならない。原因と結果が解ってしまうからだ。現世はそれが解らない。解らないから価値があり、魂の前進は人間である以上、さけることの出来ない天命といってもいい。
이야기는 바뀌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더이상 두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저 세상의 생활과 이 세상의 생활에 큰 엇갈림이 있기 때문이고, 10%의 표면의식의 자아에 바탕을 둔 아진(我侭=자기만을 생각하는)한 마음이 그러한 상념을 창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魂)의 전생윤회한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에 따라서는 "억! 그럴수가" 라고 놀라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세상에 있는 영혼(魂)이 그룹, 즉 영혼(魂)의 형제들은,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목적으로서, 현세에 있는 그 형제를 지키고, 무사히 수행을 끝내는 것을 바라고 있다. 영혼(魂)의 전진은, 현세에 나와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세상의 수행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훤히 저절로 알기 때문에 수행이 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를 깨달아 알아 버리기 때문이다. 현세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영혼(魂)의 전진은 인간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천명(天命)이라고 말해도 좋다.
((본문 내용의 추가 설명 부분))
원리한다..멀리 벗어난다=원리일체전도몽상(遠離一切顚倒夢想) (究竟涅槃).
▼보세요. 추가설명을올렸습니다. 이세상은 꿈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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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が悟るとカルマからおんり遠離する.사람이 깨달으면 멀리 벗어난다..이부분을, 따로 올리겠습니다.
원리일체전도몽상 구경열반..의 설명을 보시어야 할 것 같습니다. 遠離한다.이 단어의 설명을 위해서.
이 부분은..이미 앞에 있습니다. 원설반야심경 해설에..윤회 바로 앞의 遠離(원리)하다..란 말을 이해하시라고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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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提薩埵(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罣礙(심무괘애) 無罣礙故(무쾌애고) 無有恐怖(무유공포)
遠離一切顛倒夢想(원리일체전도몽상) 究竟浬槃(구경열반)
無罣礙とは、心にとらわれがない、ひっかかりがない、わだかまりがない、ということだ。だから恐怖の念がない。正道に反した、さかさまの物の見方、考え方がないから、神の心に通じ、もっとも偉大なる悟りに達している。それを菩提薩埵という。
무괘애[無罣礙]란,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거리낌이 없는, 응어리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포의 생각(念)이 없다. 정도에 반한, 거꾸로 된 사물을 보는 견해, 사고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그것을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한다.
一切の諸現象は心から生ずる。丸く大きな豊かな心を有しておれば、恐れも、慢心も起きない。とらわれが多く、肉体の自分が自分であると思うから、苦しみ、悲しみがついてまわる。夢をみていてはいけないのだ。我々は白昼夢を見ている。腕をツネれば痛いし蚊にさされればかゆいので、つい肉体の全部が自分であると思ってしまう。しかし、本当は、肉体の自分以外に、もう一人の自分がいて、その自分が肉体と一緒に生活しているのである。無情の現世をみると、誰しもが薄々感じられるのではあるまいか。
일체의 여러 현상은 마음에서 생긴다. 둥들고 커다란 풍요로운(느긋한, 관대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으면, 공포도, 교만스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얽매임이 많고, 육체의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 슬픔이 따라 다닌다. 꿈을 꾸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백일몽을 꾸고 있다. 팔뚝을 꺽으면 아프고 모기에 물리면 가렵기 때문에, 무심코 육체의 전부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육체의 자기 자신 이외에, 또 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있고, 그 사람 자신이 육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무정한 현세를 보면, 누구든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無罣礙の心は、何も人間だけではない。導体に電気を流すと、その導体に抵抗が多いと電気のエネルギーは熱エネルギーに変わってしまう。電気の役を果たすことが出来ない。
血管にコレステロールがたまると、血行が思うようにゆかず、血管が破裂したり、血液の流通をとめてしまう。
무괘의[無罣礙]의 마음은, 무엇이든 인간만이 아니다. 도체에 전기를 흘리면, 그 도체에 저항이 많으면 전기의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변해 버린다. 전기의 역할을 다할 수 가 없다.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쌓이면, 혈액순환[血行]이 생각처럼 되지 않고, 혈관이 파열하거나, 혈액의 유통을 멈추어 버린다.
万事がそのように出来ているのだ。自然は、私達人間に、神理を教えている。その神理を一つ一つ悟る必要があろう。
만사가 그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들 인간에게, 신리(神理=신의 섭리,뜻)를 가르치고 있다. 그 신리를 하나 하나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설반야심경에서.........원문의 저자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7.무무명~반야심경에..내용이 있습니다.
勞使協調
[노사협조]
インフレと不況という相反した二重苦の中で、誰しも不安と見通し難のため、戸惑っていると思う。いったいこれから先、どうなるのだろう。景気はよくなるのか、悪くなるのか。悪くなったらどうしよう。よくなるとすれば、いつ頃よくなるのか。誰しも知りたいところであろう。しかし、いったい、なにがこうした事態を招いたのか。自分とはかかわりない他人が、こうした事態を待ち込んできたものなのか――。
인플레이션과 불황이라고 하는 상반된 이중고 속에서, 누구나 불안으로 장래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일까? 경기는 좋아질까, 나빠질까? 나빠지면 어떻게 할까? 좋아진다고 하며나, 언제쯤 좋아질까? 누구나 알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했는가?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이, 이러한 사태를 한결같이 기다려 온 것일까?
経済は単独では成り立たない。経済ほど相互依存の強いものはない。インフレの悩みはなにも西側だけではなく、東側も同じだ。ただ東側は国家の強力な統制下にあるので、西側から輪入したインフレを、国の財政が背負っているだけである。国の財政とは国民の金である。西側は、これが個々の企業に直接ひびき、市場が自由なので、すぐさま価格にハネ返っているだけである。
경제는 단독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경제만큼 상호의존의 강한 것은 없다. 인플레이션의 걱정은 모두 서방측(서유럽 여러나라)만이 아니라, 동측((유럽에서) 구 소련 및 구 소련에 동조한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다. 단지 동측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는 것이며, 서측에서 수입한 인플레이션을, 국가의 재정이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국가의 재정이란 국민의 돈이다. 서측은, 이것이 개개인의 기업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시장이 자유롭기 때문에, 즉각 가격으로 되미치고 있을 뿐이다.
しかし、その苦しみは独り我が国のみならず、アメリカも西独も、そして束欧諸国も同じだ。アラブ諸国だけが利益を独り占めするわけにはゆかない。アラブだけが利益を得、他の世界諸国が不利益をこうむるという昨代ではないからである。つまり、経済は単独では成りたたないし、勝者敗者が生ずる仕組みは、世界が小さくなった今日では、もはや通らなくなりつつあるからである。ことに我が国の場合は、世界経済の中軸を占めており、小さな枠の中で自己保存にひたることは許されなくなってきている。
하지만, 그 고통은 단지 우리나라(일본)뿐만 아니라, 아메리카(미국)도, 그리고 동구권(束欧諸国:유럽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랍의 여러국가만이 이익을 독점할 수는 없다. 아랍만이 이익을 얻고, 다른 세계 여러 나라가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경제는 단독으로는 성립되지 않고, 승자와 패자가 발생하는 구조는, 세계가 작아진 오늘날에는, 이미 통하지 않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일본)의 경우는, 세계경제의 중심(中軸)을 차지하고 있고, 작은 틀 속에서 자기보존에 젖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ここで大事なことはなにかといえば、労使の協調である。限られたパイを互いに、より多く分捕ろうとすると争いになる。争いは破壊につながる、企業は潰れ、労働者は職場を失うことになる。我が国がこういう状態になれば、世界経済にも大きく影響してゆこう。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노사의 협조이다. 한정된 파이(자원)을 서로, 보다 많이 노힉하려고 하면 싸움이 된다. 싸움은 파괴로 이어진다, 기업은 망하고, 노동자는 직장을 잃게 된다. 우리나라(일본)이 이러한 상태가 되면, 세계경제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지 될 것이다.
個々の労使協調が、世界経済にどうつながるかといえば、双方が協調し企業が安定してくれば、やがて価格も安定し、需要と供給がノーマルになってくる。反対に、争いが激しくなり、企業倒産すれば、失業者があふれ、需要は減退して、輪出国の産業も衰微してこよう。したがって、まずもって労使の協調である。それには双方が裸になって、譲るべきところはゆずり、話し合うことだ。
개개(個個)의 노사협조가, 세계경제에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면, 쌍방이 협조하고 기업이 안정되어 가면, 이윽고 가격도 안정되고, 수요와 공급이 정상이 되게 된다. 반대로, 싸움이 격렬해져서, 기업이 도산하면, 실업자가 넘쳐나고, 수요는 감퇴(減退)하고, 수출국의 산업도 쇠미(衰微)해져 올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우선 노사의 협조(協調)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쌍방이 알몸뚱이가 되어(탁 터놓고), 양보해야 할 것은 양보하고, 서로 의논하는 것이다.
今回の危機(石油ショック)を招いたものはなにかというと、その根本は経済主体のものの考え方にある。経済は人間生活の手段であって、目的ではない。我々の目的は、仕事を通して、その魂をより豊かに、広く磨くことであり、そうして、その心を地上に反映させることにある。すなわち、他を生かす愛の仏国土をつくることである。現在の危機は、その反作用というべきであろう。
이번의 위기(석유쇼크)을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근본은 경제주체를 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에 있다. 경제는 인간생활의 수단이며, 목적이 아니다. 우리들의 목적은, 일을 통해서, 그 영혼(魂)을 보다 관대하게(풍요롭게), 넙게(마음이 너그럽게) 갈고 닦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 그 마음을 지상(地上)에 반영시키는 것에 있다. 즉, 남을 살리는 사랑의 불국토를 만드는 것에 있다. 현재의 위기는, 그 반작용(反作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경제주체[經濟主體] : 가계(家計), 기업(企業), 정부(政府) 따위처럼 자기(自己)의 의사(意思)와 판단(判斷)으로 경제(經濟) 활동(活動)을 하는 자(者)
★작용반작용의법칙 (作用反作用-法則) <물리> 뉴턴의 세 가지 운동 법칙 가운데 하나. 모든 작용력에 대하여 항상 방향이 반대이고 크기가 같은 반작용 힘이 따른다는 법칙이다.
組織と個人
[조직과 개인]
組織の中でも会社組織は、今日もっとも強力、かつ巨大なものの一つである。大部分の人たちは、どこかの会社に所属し、そこで仕事をする。その会社の盛衰はそのまま家庭生活の盛衰につながってくる。したがって会社の利益は、個人の利益につながり、会社の目的は個人の目的につながるのが当然であろう。
조직 중에서도 사회 조직은, 오늘날이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하며, 동시에 거대한 것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가의 사회에 소속해서, 그곳에서 일을 한다. 그 회사의 성쇠(盛衰)는 그대로 가정생활의 성쇠(盛衰)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사회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으로 이어지며, 사회의 목적은 개인의 목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ここであげる問題点は、会社の目的が正法にそぐわない、つまり、中道にそわないために、働く者の悩みをどう解決するかということである。具体的にいうと、会社の経営者は自己中心、利益中心であるのに対して、そうした会社で働く者が正法を信じ、正法を仕事の上に活かしたいと思っても活かせないという悩みである。
이 때 제기되는 문제점은, 사회의 목적이 정법(正法)에 맞지 않는, 즉, "중도(中道)에 맞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働く者:일하는 사람)의 고민(悩み)을 어떻게 해결할까" 라고 하는 것이다. 구제적으로 말하면, 사회의 경영자는 자기중심(自己中心), 이익중심(利益中心)인 것에 있는 반면에, 그러한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정법(正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일을 하는 도상에 활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처럼) 그것을 살리지 못한다고 하는 고민(苦悶)이다.
つい一、二年前の経済界にあっては、こうした悩みが非常に多かったと思う。ところが石油ショックを境にして、自己中心的な会社経営にさまざまな問題が浮彫りにされ、利益のためには手段を選ばぬという経営は、次第に行き詰まってきたようである。産業中心の政治目標にしても、今や大きな曲り角に立っている。
마지막 하나는, 2년전의 경제계(經濟界)에 있어서는, 이러한 고민이 상당히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석유 파동(石油波動 :Oil Shock: 석유쇼크; 유류 파동)를 경계로,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인 사회경제에 각양각색의 문제가 부각(浮彫)되어,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手段)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 경영(經營)은, 차츰 정돈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다. 경영중심(經營中心)의 정치(政治)를 목표(目標)로 하는 경우에도, 이제는 큰 전환점에 서 있다.
個人の目的と会社の目的とが必ずしも一致しないことは、今日のような自由社会にあっては当起然こってこようが、しかし、作用・反作用の法則というものは、前述のようにどんな場合にも働いてくるものなので、目的が異なるからといって仕事そのものを加減してはならないだろう。
会社は利益を目的として動いており、会社で働く者は、その環境に感謝し、報恩の行為が必要であろう。また、労使の感情を除き、対話をもととした調和された環境をつくって行くことに意をつくすことも当然である。問題はその利益をどう処理してゆくかが、その会社の経営なり、従業員の考え方にかかってくる。つまり、正法に適っているかどうかである。
개인의 목적과 사회의 목적이 반드시 일치(一致)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과 같은 자유사회(自由社會)에 있어서는 당연히 일어난 듯 하지만, 그렇지만,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의 법칙(法則)이라고 하는 것은, 전술(前述)한 것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작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目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서 일(仕事) 그 자체를 가감(加減)해서는 안 될 것이다. 회사(會社)는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고, 회사(會社)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환경(環境)에 감사(感謝)하고, 보은(報恩)의 행위(行爲)가 필요(必要)한 것이다. 또한, 노사(勞使)의 감정(感情)을 버리고, 대화(對話)를 바탕으로 한 조화(調和)된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 또한 당연(當然)하다. 문제(問題)는 그 이익을 어떻게 처리(處理)해 가는가가, 그 회사의 경영(經營)이며, 종업원(從業員)의 사고방식에 달리게 된다. 즉, 올바른 정법(正法)에 맞고 있는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個人の悩みは大低、肉体的不調和と生活苦、環境に対する不満、責任の転嫁、逃避などが多い、会社と個人の目的はしばしば一致しないことが起こってこようが、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その組織を離れては家庭を破壊し、自分を失うことにもなってこよう。
개인(個人)의 고민(悩み)은 대체(大低)로, 육체적 부조화(肉體的不調和)와 생활고(生活苦), 환경(環境)에 대한 불만(不滿), 책임(責任)의 전가(轉嫁), 도피(逃避) 등이 많으며, 회사와 개인의 목적(目的)은 종종 일치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조직(組織)을 떠나서는 가정(家庭)을 파괴(破壊)하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게 될 것이다.
組織は地上生活にとって欠くことのできないものであり、組織は肉体とみればよいのである。肉体を否定すれば人間を否定することにもなるので、要は、これにふり回されず、そうした環境の中で己の魂をどれほど磨いてゆくかが修行の大きな目的である。
조직(組織)은 지상생활(地上生活)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조직(組織)은 육체(肉體)로 보면 좋은 것이다. 육체를 부정(否定)하면 인간을 부정(否定)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要)은, 이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기(己)의 영혼(魂)을 얼마만큼 닦아 가는가가 수행(修行)의 큰 목적(目的)이다.
自分が変わると周囲が変わってくるものであり、環境が変わる必要がおこれば変わらざるを得なくなるものである。どんな場合にも、まず自分をつくることに意をつくすことが正法のかなめ要といえよう。
자기 자신이 바뀌면 주위(周圍:주변)가 바뀌게 되는 것이며, 환경이 바뀔 필요가 생기면 바뀌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선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에 생각한 바를 모두 나타내는 것이 정법(正法)의 가장 중요한 요체 중의 요점(かなめ要)이라고 할 수 있다.
天 職
[천직]
人は誰しも才能と職業、あるいは趣味と職業が一致したら、人生がどんなに仕合わせかと考えたことがあるだろう。ことに男子の場合は、職業の選択には若い時分は迷ったり、悩んだりするものである。
"사람은 누구나 재능(才能)과 직업(職業), 혹은 취미(趣味)와 직업(職業)이 일치(一致)하면, 인생(人生)이 얼마나 행운(기쁨)일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남자의 경우는,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는 젊을 때는 갈피를 잡지 못하거나, 고민하거나 하는 것이다.
人生の生きがいというものは、仕事や職業から切り離しては、ふつうでは容易に考えられないし、人生から仕事を外したり、職業を持たない人間などはありえないのだから、なおさらである。また人間は職業を通して、仕事を通して、己れの魂を磨いていくものであれば、職業の選択、仕事の内容によっては、その人を明るくもし、暗くもしていくだろう。
인생의 사는 보람(人生の生きがい)이라고 하는 것은, 일(仕事)이나 직업(職業)에서 분리되면, 보통은 용이(容易)게 생각하지 못하고, 인생에서 일을 떼어 내거나, 직업을 갖지 않은 인간 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또한 인간은 직업을 통해서, 일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닦아 가는 것이라면, 직업의 선택, 일의 내용에 따라서는, 그 사람을 밝게도 하고, 어둡게도 해 갈 것이다.
学生や若い人たちの相談といえば、たいてい仕事の問題、職業選択である。自分はどの道に向いているか、どんな才能を持っているか。過去世においてどんな職業を得、仕事をしてきたか。できたら、過去世で学んできた職業、仕事を今生でも持つことができれば、まず間違いなく失望や落胆の人生を歩まなくても済むだろうと考える。まさしく、その通りにちがいない。過去世においてそうした経験を積んでいれば、その経験なり、才能を表面に出すことができるからだ。
しかしながら不思議なことに、過去世で経験した仕事というものは、どんな人でも自然と心に浮かんできて、こうしたことをしたい、ああもしたいと考えられてくるものなのだ。全然無縁の事柄というものは心に浮かばないものである。したがって、現在、職業の選択にこうした点で迷っているとすれば、今、考えられる範囲の職業を選び、仕事に打ち込んでみることである。
もしちがった方向に進んでいるとすれば、その職業は永くはつづかないだろうし、転換のチャンスがやがて訪れてくる。また、才能にしても、その仕事に打ちこむことによって生まれてくるものだし、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守護・指導霊の応援も得られるのである。
학생(學生)이나 젊은 사람들이 상담(相談)이라고 하면, 대개 일(仕事)의 문제(問題), 직업선택(職業選擇)이다. 나는 어떤 진로(道)를 향할까? 어떤 재능을 갖고 있을까? 과거세(過去世:과거 세상)에 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을 해 왔을까? 가능하면, 과거세(過去世)에서 익혀 온 직업, 일을 금생(今生:현생)에서도 갖을 수가 있다면, 우선 틀림없이 실망(失望)이나 낙담(落膽)의 인생을 걷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대로임에 틀림없다. 과거세(過去世:과거 세상)에 있어서 그러한 경험(經驗)을 쌓고 있다면, 그 경험대로, 재능(才能)을 표면(表面)으로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불가사의(不思議)한 일로, 과거세(過去世)에서 경험한 일(仕事)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마음에 떠올 수 있으며, 이런 일을 하고 싶다, 저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 것이다." 전연(全然) 인연이 없는(無縁:관계가 없는) 일(事柄)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現在), 직업 선택에 이러한 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화고 있다고 하면, 생각되는 범위(範圍)의 직업을 선택하고, 일(仕事)에 열중(熱中)해 보는 것이다. 만약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면, 그 직업은 아주 오랫동안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고, 전환(転換)의 찬스(기회)가 이윽고 찾아오게 된다. 또한, 재능(才能)이라고 해도, 그 일(仕事)에 몰두(沒頭)하는 것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인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 수호령(守護靈)과 지도령(指導靈)의 응원(應援)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天職といわれる職業、あるいは仕事の内容というものは、職業や仕事そのものをいうのではなく、その仕事に真に自分が打ち込めるか、どうかにかかっている。人がうらやむ職業や地位に就いたとしても、その人が真に心の底から、その仕事に励むことができなければ、それは天職とはいえなくなる。
천직(天職)이라고 불리는 직업(職業), 혹은 일(仕事)의 내용(内容)이라고 하는 것은, 직업이나 일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 일에 정말로 자신이 몰두(열중)하는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사람이 부러워하는(선망하는) 직업을 얻고 지위(地位)에 올랐다고 해도, 그 사람이 진심으로 마음속으로, 그 일에 힘쓸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직(天職)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職業に貴賤はないのだ。いやしい職業というものはないのだ。仕事は魂の向上のためにする。そしてそれは同時に愛の行為に通じるもの。この点を誤解し、才能のみを追って職業選択をすると老いてから後悔しよう。
직업(職業)에 귀천(貴賤)은 없는 것이다. 천한 직업(職業)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일(仕事)은 영혼(魂)의 향상(向上)을 위한 목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同時)에 사랑의 행위로 통하는 것이다. 그 점을 오해(誤解)하고, 재능(才能)만을 쫓아서 직업선택(職業選擇)을 하면 늙어서 후회(後悔)할 것이다.
まず、与えられた、あるいは選択した仕事に打ち込んでみることである。嫌いだった職業でも好きになることができ、天職として世の中に立派に貢献することになってくる。
우선, 주어진, 혹은 선택한 일에 열중(몰두)해 보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직업이라고 해도 좋아질 수가 있고, 천직(天職)으로서 이 세상에(世の中)에 훌륭하게 공헌(貢献)하게 되어 간다.
食糧問題
[식량문제]
異常気象、食糧危機、人口問題、この三つは相互に関連し合って動いているが、これについて、さまざまな見方がなされているので取り上げてみたい。
이상기후, 식량위기, 인구문제, 이 세 가지는 상호 서로 관련해서 작용하고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기 때문에 취급하고 싶다.
まず気象については、太陽、月、地球の自転公転によって、その条件の基礎がつくられている。だがしかし、寒波、風、雨、晴天のいずれかの一方に片寄ると地上の営みに狂いが出てくる。
우선 기상에 대해서는, 태양, 달, 지구의 자전공전에 의해서, 그 조건의 기초가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파, 바람, 비, 맑은 하늘의 어느 쪽의 한편으로 치우치면 지상의 일에 이상이 온다.
かって地上に人類が住む以前は、火山爆発と雨のくりかえしがつづき、氷河時代を何度も現出した。これは火山爆発の降灰が天空に舞い上がり、層をつくり、太陽の熱光を遮断したため地上の気温を下げたからである。
일찍이 지상에 인류가 살기 이전은, 화산폭발과 비의 되풀이가 계속되고, 빙하시대를 몇 번이나 현출했다. 이것은 화산폭발의 화산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층을 만들어, 태양의 열광을 차단했기 때문에 지상의 기온을 내려가게 했기 때문이다.
今日、冷害や干バツが各地におこっている。原因の一つは熱消費の増大であり、煤煙、排気ガスの塵が天空にのぼり、層をつくりはじめているからである。もう一つは地上に住む人類の想念行為によって、地軸の位置、自転のリズムを変化させていることもあろう。
오늘날, 냉해나 한파가 각지에 일어나고 있다. 원인의 하나는 열소비의 증대이며, 매연, 배기가스의 먼지가 하늘로 올라가, 층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지상에 사는 인류의 상념행위에 의해서, 지축의 위치, 자전의 리듬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에도 있을 것이다.
このように気象の基礎条件は少しも変わらないが、地上に住む人類の想念行為が人口の増大に比例して、さまざまな異常気象を生み出している。アフリカの大干バツ、ソ連、中国、インドなどの食糧不足。これはいったいなにがそうさせたかといえば、それは前述の説明を理解されれば自ずと明らかであろう。
이와 같이 기상의 기초조건은 적어도 변함이 없지만, 지상에 사는 인류의 상념행위가 인구의 증대에 비례해서, 다양한 이상기상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다. 아메리카의 대한파, 소련, 중국, 인도 등의 식량부족.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시킨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설명을 이해하게 되면 저절로 명백해 질 것이다.
気象は天然の産物であり、人間の生活行為と直接無関係と思われるが、例を今日の公害をみれば、気象も人為的に左右されることは説明を要しないと思う。
기상은 천연의 산물이며, 인간의 생활행위와 직접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오늘날의 공해를 보면, 기상도 인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人口問題は、食糧生産と密接に結びつき、地球は満員という見方もあるが、しかしまだその余力は十分ある。問題は現時点の人びとの意識構造(政治理念、民族意識、人種差別、経済の考え方など)に問題があり、バランスを欠いているので、歪みが生じているのだ。一方の国は食糧があり余り、他の国では餓死者が発生すること自体、調和された地上とはいえないだろう。
인구문제는, 식량생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만원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하지만 단 그 여력은 충분하다. 문제는 현시점의 사람들의 의식구조(정치이념, 민족의식, 인종차별, 경제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고, 밸런스(균형)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에, 비뚤어짐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국가는 식량이 여유가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 자체, 조화된 지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こうしたアンバランスがなくなり、天然の気象条件に適した方法で食糧生産が行なわれ、技術開発を平均的に進めていけば、地球の人口許容量はまだまだひろげられる。
이러한 언밸런스(불균형)이 없어지고, 천연의 기상조건에 들어맞는 방법으로 식량생산이 거행되어, 기술개발을 평균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면, 지구의 인구 허용량은 점점 넓힐 수 있다.
異常気象、食糧危機、人口問題は地球人類の責任である。
이상기후, 식량위기, 인구문제는 지구인류의 책임이다.
それぞれの責任において調和された生活、つまり人類はみな兄弟という人間の原点に立って処理していくならば、この問題は明日にも解決していくであろう。しかし、今のままの状態が続けば、食糧危機を発生せしめ、問題を深めていくことになりかねない。
저마다의 책임에 있어서 조화된 생활, 즉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하는 인간의 원점에 서서 처리해 가면, 이 문제는 내일에도 해결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대로 상태가 계속되면, 식량위기를 발생시키고, 문제를 깊게 해 갈지도 모른다.
出家と悟り
[출가와 깨달음]
一部の間に出家に対する渇望のようなものがあって、インド時代と現代とを比較する向きが多いようである。二千五百有余年前は仕事や家庭を捨てて出家したのに、現代は在家の修行であるため、容易に自分が悟れぬということらしい。
일부의 세간에 출가에 대한 갈망과 같은 것이 있고. 인도 시대와 현대를 비교하는 경향이 많은 듯 하다. 2천 5백년여년 전은 일이나 가정을 버리고 출가했는데, 현대는 재가의 수행이기 때문에, 용이하게 자신이 깨달을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たしかに在家の場合は家庭や社会に対する責任や義務の問題が心をしばり、出家は身軽で自分だけのことを考えれば済むからであろう。ことに人間は環境に流される性質を持っているので、心をしばるもろもろのわずらわしさから逃れたいと誰しも思う。
분명히 재가의 경우는 가정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의 문제가 마음을 묶고, 출가는 홀가분하고 자신만의 일을 생각하면 해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인간은 환경에 휩쓸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음을 붙들어 매는 여러가지의 번거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だが、よく考えて欲しい。人間は社会的生物なのだ。社会を離れて人間の生活はなく、だいいちそれでは生きる資格すらないだろう。
하지만 , 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사회적인 생물인 것이다. 사회를 벗어나서 인간의 생활은 없고, 제일 그래서는 사는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悟るということは終局的には個人と全体とのつながりを知り、それにもとづいた生活行為をいうのだ。社会生活からはみ出して個と全の関係を知ったとしても、それは本物とはいえない。その関係を理解し社会生活の中で生かさなければなんにもならないからだ。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종국적으로는 개인과 전체와의 관계을 알고, 그것에 입각한 생활 행위를 말한다. 사회 생활에서 벗어나서 개인와 전체의 관계를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진짜라고는 할 수 없다. 그 관계를 이해하고 사회 생활 속에서 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이다.
インド時代の出家にはさまざまな理由があった。まず当時は戦乱の時代で今日のように治安が保たれた家庭生活を営むことがむずかしかった。この点、武士も商人も農民についてもみな同じで、いつその生活を追われ一家離散の憂き目をみるか計り知れなかった。
인도시대의 출가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는 전란의 시대로 오늘과 같이 치안이 유지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웠다. 그 점, 무사도 상인도 농민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로, 언제 그 생활에서 내쫓겨 이산가족의 쓰라린 체험을 맛볼지 예측할 수 없었다.
このため家庭を持つよりは独身で、一般生活よりは出家によって身を守り安らぎを求めた。しかも当時はサロモン、サマナー(僧)に対する畏敬の念が強かった。それは僧は平和の使いであり、民衆に幸福をもたらすという思想があったので、カースト制度の頂点に僧の位置がおかれていたのである。
이 때문에 가정을 가지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일반 생활보다는 출가에 의해서 몸을 지켜 평온함을 추구했다. 게다가 당시는 사로몬(수행자), 사마나(승려)에 대한 외경의 생각이 강했다. 그것은 승려는 평화의 사도이며, 민중에게 행복을 가져온다고 하는 사상이 있었으므로, 카스트제도의 정점에 승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山に入れば果物や野草が食を満たしてくれたし、世俗の願望を絶つ者はみな出家し、サマナーとして厳しい修行に身を投じていったわけである。
산에 들어가면 과일이나 야생초가 허기를 채워 주었고, 세속의 소망을 끊는 사람은 모두 출가하고, 사마나(승려)로서 어려운 수행에 몸을 던져 간 것이다.
こうしたことから出家は男子のみとはかぎらず、女子も出家した、釈迦教団が女子の出家を認めたのも、こうした社会的事情があったからである。
이러한 것 때문에 출가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출가했고, 석가재단이 여자의 출가를 인정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出家の目的は己れ一個の悟りだけではない。在家の人たちに積極的にその神理を伝えてゆくことにあった。決して山にこもって俗世間から隔離し、仙人の生活に終始したわけではない。釈迦教団にあっては伝道が大きな仕事であった。
출가의 목적은 자신 한 개인의 깨달음 만이 아니다. 재가의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그 신리를 전해 가는 것에 있었다. 결코 산에 틀어박혀서 속세로부터 격리해서, 선인의 생활로 시종일관한 것은 아니다. 석가 교단에 있어서는 전도(傳道)가 큰 일이었다.
今日の時代は前述のように出家の必要はないし、家庭や社会生活の中で己れを悟り調和した世界をつくってゆくことにある。出家の本来の意味は物理的に家を捨てることではなく、五官六根に翻弄されぬ調和された心と、それにもとづく日常生活の行為の中にあ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ほしい。
오늘의 시대는 앞의 설명과 같이 출가의 필요는 없고, 가정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자기를 깨닫고 조화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다. 출가의 본래의 의미는 물리적으로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관 육근에 농락되지 않는 조화된 마음과, 그것에 바탕을 둔 일상생활의 행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보충 설명으로 올리는 내용입니다))
「行ずることの真意」「행하는 것의 참 뜻」
高橋一榮(다카하시 카즈에)
「私が霊道を開いたのは一昨年の十一月(昭和四十三年)。この正月で、丁度、一年と一寸になります。この間、いろいろな体験をしましたが、昨年の八月頃だったと思います。私は、仏教でいう苦集滅道の苦をなくすには……中略…… 己を静かにみつめ、静かに行動してゆくことも、一つの悟りの方法だと思うのでございます。」
「제가 영도(靈道)를 연 것은 작년 11월 (소화 43년=1969년). 정월에, 정확히, 1년에 불과합니다. 그 사이, 다양한 체험을 했는데, 작년 8월 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집멸도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중략------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조용히 행동해 가는 것도, 하나의 깨달음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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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の手記から 昭和四十四年(一九六九)
C・A의 수기(手記)에서 쇼와44년(1969년)
過日、信次はこう言っている。女性はせいぜい菩薩界まで。女性は、ネックレスはしたい、イヤリングはする。このように本質的に身を飾ろうとする。赤ちゃんを生み育てるので、どうしても保身、保守的である。その点、如来は身を構わない。どのような服装でも気にしない。だから女性はせいぜい菩薩界まで、でも菩薩になるためにはなかなか難しい、と。それで、釈迦やイエスの教える「夫の妻に対する心構え」は、妻を尊敬する、妻を軽蔑しない、道からはずれない、妻に権威を与える、装飾品を与える、ということになる。しかし、いくら飾り物といっても、ほどほど。ダイヤモンドより心の錦。」
지난 번, 신지(信次)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성은 힘껏 노력해도 보살계(菩薩界:7차원의 극락)까지라고. 여성은, 목걸이를 걸고 싶고, 귀걸이를 한다.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치장을 하려고 한다. 아기를 낳고 기르므로, 아무래도 몸을 보호하고, 보수적이다. 그 점에서, 여래(如來)는 치장에 신경을 안 쓴다. 어떠한 복장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성은 힘껏 노력해도 보살계(菩薩界:7차원의 극락)까지라고, 그래도 보살(菩薩)이 되기 위해서는 꽤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석가(釋迦)나 예수님의 가르치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마음가짐」은, 아내를 존경(尊敬)하라, 아내를 경멸(輕蔑)하지 말라, 도리를 벗어나지 말라, 아내에게 권위(權威)를 주어라, 장식품(装飾品)을 주어라, 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장식품를 하더라고, 적당히. 다이아몬드 보다는 마음의 비단같아야(마음이 아름다워야).」
★みにはぼろをまとっていても心(こころ)は錦(にしき)だ
"몸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마음은 비단 같다"
***위의 글을 읽고 오해하지 않으시길, 머리로가 아닌, 마음으로 잘 생각해보세요.
관세음보살이나, 미륵보살님은, 이미 부처이며 여래입니다. 여래계에는 남성들이 많아서..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다가온 분이십니다. 불상이나 그림에 보면, 보살들은, 거의다 치장을 하죠,
부처의 불상을 보면, 그냥 옷 달랑? ㅎㅎㅎ
---------(가정주부의 글) 昭和四十四年(一九六九)(쇼와 44년(1969년)
五月、N・T子、信次の力によって霊道を開く。一万二千年前のアトランティス時代から男に生まれたり、女に生まれたりして仏教やキリスト教に縁があった人。
1969년 5월, N・T子(N・T子)란 분이, 신지(信次)의 힘에 의해서 영도를 열렸다. 1만 2천 년전의 아틀란티스 시대에서 남자로 태어나거나, 여자로 태어나거나 하며, 불교나 그리스도교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
後日談「私は高橋先生の力によって霊道を開き、転生輪廻の証明役として過去世の〃ことば〃を、皆様の前で語りました。ところが、いつか私は先生と呼ばれるようになり、全国から手紙をもらうようになりました。私はただの主婦でございます。このようなことで皆様を誤らせてはいけないと考え、身を引いたのです。」霊道をひけらかし、増上慢になってしまった人の多い中で、まさしく霊の段階を思いしらされる事実である。」
후일 이야기로 「저는 다카하시 신지의 힘에 의해서 영도를 열고, 전생윤회의 증명역할로서 과거세상의 “말(언어)”를, 여러분(모임에 있던 분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저는 선생이라고 불리우게 되어, 전국에서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이러한 일로 여러분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탈퇴했던 것입니다. 」영도를 열고나서, 뽐내고 거만해져 버렸던 사람의 많은 중에서, 확실히 영의 단계를 생각하게 되는 사실이다.」
「男として生まれたり、女として生まれたり?」
「남자로서 태어나거나, 여자로서 태어나거나???」
「そういう場合もある。人間は、釈迦やイエスのように、いつも男として生まれる人、マリヤ様やマヤ様のように、いつも女として生まれる人、そして男として生まれたり、女として生まれたりする人がいる。多くは男に生まれたり、女に生まれたり。しかし、男らしい女、女らしい男もいるように、今世に男として生まれたからには男の使命が、女として生まれたからには女としての使命がある。男として生まれていながら失敗した人は、来世も男として修業することになる。女の場合も同じ。男は男らしく、女は女らしくが一番」
「그러한 경우도 있다. 인간은, 석가나 예수님과 같이, 언제나 남자로서 태어나는 사람, 성모 마리야나 마야부인과 같이, 언제나 여자로서 태어나는 사람, 그리고 남자로서 태어나거나, 여자로서 태어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남자로 태어나거나, 여자로 태어나거나 한다.
하지만,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도 있듯이, 이번 생에 남자로서 태어난 경우에는 남자의 사명이, 여자로서 태어나는 경우에는 여자로서의 사명이 있다. 남자로서 태어나서 실패한 사람은, 다음 생에도 남자로서 수행하는 것이 된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남자 답고, 여자는 여자다운 것이 가장 좋다.」
※출처 :-------人間・高橋信次師の経時的記録(인간 다카하시 신지의 경시적 기록)
...http://www.shoho.com/newpage18.htm
((2016년 11월 04일 금요일 현재, 위 사이트는, 없어졌으며)),
http://www.shoho2.com/ (쇼호 : 정법(正法)2)라는, 사이트로 변경되었습니다.
地 震
[지진]
マグニチュード5以上の地震が、東海地方を襲うかもしれないとの噂がひろまっているようだ。また、伊豆半島もその危険性が増大しているともいわれ、地震不安がまたもや太平洋岸ベルト地帯一帯を蔽っているようである。
마그니튜드 5 (지진의 규모(magnitude 5)) 이상의 지진이, 동해지방을 덮쳐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확산되어 있는 것 같다. 또, 이즈반도(伊豆半島)도 그 위험성이 증대하고 있다고도 하며, 지진불안이 또다시 태평양 연안 belt지대 일대를 덮고 있는 것 같다.
★이즈반도(일본 혼슈[本州] 시즈오카 현[靜岡縣]에 있는 반도.서쪽의 스루가 만[駿河灣]과 동쪽의 사가미 만[相模灣] 사이에서 태평양 쪽으로 60㎞가량 뻗어나와 있다. 전지역이 후지[富士] 화산대에 속한다)
そこで、地震はあるのか、もしあるとすればその対策をと誰しも思う。気象庁のある退職者は、関東以西はいつでも地震が起こり得るとして、地震の少ない東北地方に隠棲してしまったようだ。関東はこわくて仕方がないというのだ。地震のない土地に行けば、老後は安心して生活できるということのようだが、この人には病気の心配はないらしい。ただただ地震だけがこわいらしい。地震がくる前に心臓発作で倒れるなど夢にも考えないらしい。
그런데, 지진은 있을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대책은 누구라도 생각한다. 기상청의 어떤 퇴직자는, 간토우 이세이(關東以西)는 언제나 지진이 일어날 수 있고, 지진의 적은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에 은서(隱棲:은둔)해 버렸다고 한다. 칸토우(關東) 지방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진의 없는 토지에 가면, 노후는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지만, 이 사람에게는 질병의 걱정은 없는 듯 하다. 흔들리는 지진만큼은 무서운 듯 하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심장발작으로 쓰러지는 따위는 꿈이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칸토우(關東) 지방: 도쿄(東京) 지방의 일컬음;
특히 도쿄(東京)·이바라키(茨城)·도치키(栃木)·군마(群馬)·사이타마(埼玉)·치바(千葉)·카나가와(神奈川)의 1도(都) 6현으로 이루어지는 지방.
★이서(以西) 일본말로 이세이 : (특히, 어업에서는 동경(東經) 130도 이서 곧, 남중국해·서해를 가리킴).(↔以東)
地震はなぜ起きるのか、それは大地も生きているからである。人間の体内には血管が縦横に走っている。そして、絶えず血液が流れている。大地の下もまた血管が無数に走り、火山に見られる何千度に熱せられた溶岩が、地表のはるか下を流れている。火山はこの溶岩が地表に現れたものだが、なぜ火山活動がおこるかである。それは地上の圧力が地下に加わり、いわば血管を圧迫するためである。地震もまた、地上の圧カによって血管が収縮するため、それをハネ返そうとしておこるものだ。
지진은 왜 일어날까, 그것은 대지(大地)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체내에는 혈관이 종횡으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끊이없이 혈액이 흐르고 있다. 대지의 밑에도 또한 혈관이 무수히 달리고, 화산에 볼 수 있는 몇 억도에 뜨거워진 용암이, 지표의 먼 아래를 흐르고 있다. 화산은 이 용암이 지표에 드러난 것이지만, 왜 화산활동이 일어날까이다. 그것은 지상의 압력이 지하에 더해져서, 말하자면 혈관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지진도 또한, 지상의 압력에 의해서 혈관이 수축하기 때문에, 그것을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では地上の圧力とはなにかである。それは人間の心の在り方にかかっている。地表をとりまく人間の生活意識が大地に圧力をかけている。この圧力は、人間一人一人の偽我(自己保存)によって作られるものだ。つまり、地震や火山を生み出すエネルギーを地下にたくわえているのである。だから、一定の時期がくると、もとに戻ろうとして揺れ動く。こういっても人は信じないであろう。現代科学はさまざまな見方で地震や火山をとらえようとしているが、物理現象の背後には、常に人間の意識が強力に働いているということを理解するようになれば、万象の姿がハッキリととらえられ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그러면 "지상의 압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본연의 자세에 달려 있다. 지표를 둘러싸는 인간의 생활의식이 대지에 압력을 걸고 있다. 이 압력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아(자기보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지진이나 화산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지하에 비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정의 시기가 도래하면, 원래상태로 복원하려고 흔들린다. 이렇게 말해도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다. 현대과학은 다양한 견해로 지진이나 화산을 잡으려고 하고 있지만, 물리현상의 배후에는, 항상 인간의 의식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만상의 모습을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ちなみに月や火星に大地震や火山活動がおこっているだろうか。月や火星も地球と同じように何千度に熱せられた溶岩が活動しているのだ。しかし、大地震もなければ火山の大爆発もおこっていない。地表はいたって平静そのものであり、平和であろう。地球だけが常にさわがしく、さまざまな災害をくりかえしている。
덧붙여서 말하면 달이나 화성에 대지진이나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달이나 화산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몇 억도로 뜨거워진 용암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지진도 없으면 화산의 대폭발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표(地表)는 매우 평정(平靜:평안하고 고요함) 그 자체이며, 평화롭지요. 지구(地球)만이 항상 소란스럽고, 다양한 재해(災害)를 반복하고 있다.
中国大陸は日本と異なり、地震はめったにおこらない。それが各地で頻発した。被害も大く、犠牲者も相当にあった。動物の動きで地震を事前にキャッチし、避難したというが、そうだろうか。政情不安の火に油をそそがないための工作だったようだ。
중국 대륙은 일본과 달리, 지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각지에서 자주 일어났다.
피해도 크고, 희생자도 상당히 있었다. 동물의 움직임으로 지진을 사전에 포착하고, 피난했다고 하지만, 그럴 것일까요. 정황 불안의 불에 기름을 씻지 않기 위한 공작인것 같다.
アトランティス大陸は火山の噴火と大地震で海底に沈んだ。ポンペイの町も同じである。また、その昔に栄えたエジプト、メソポタミアの文明も、洪水、大地震、火山の降灰によって埋没している。当時の文明の手がかりは、地下から発掘した建物、青銅、土器、石板、壁画によってしのぶことができよう。
아틀란티스 대륙은 화산의 분화와 대진진으로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봄베이(뭄바이[Mumbai])의 시가지도 마찬가지이다. 또, 그 옛날에 번영했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문명도, 홍수, 대지진, 화산의 폭발하여 분화된 화산재로 매몰되어(파뭍혀) 있다. 당시의 문명의 단서는, 지하에서 발굴한 건물, 청동, 토기, 석판, 벽화에 의해서 추정할 수 있지요.
いずれにせよ地震は地上の人びとの想念行為によるのである。地震や火山を防ぐにはどうするか。その手がかりをつかむには、大地震がおきたその時代の人びとの社会生活を知ることが理解を早めるカギとなろう。いたずらに地震を恐れ、転居しても地震は追いかけてくるだろう。
어쨌든 지진은 지상의 사람들의 상념행위(想念行爲)에 의한 것이다. 지진이나 화산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할까. 그 단서를 파악하려면, 대지진이 일어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사회 생활을 아는 것이 이해를 앞당기는 열쇠가 될 것이다. 쓸데없이 지진(地震)을 무서워해서, 이사해도 지진(地震)은 뒤쫓아 올 것이다.
法
[법]
法とは正しい秩序をいう。
법이란 올바른 질서를 말한다.
法という文字は、(さんずい)に去ると書く。(さんずい)は水だから、法とは、水が去るということになる。
법이라고 하는 문자는, 氵(삼수변)에 갈 거(去)라고 쓴다. 氵(삼수변)은 물이므로, 법(法)이란, 물이 간다라고 하는 것이 된다.
水は低きに流れ、高きに流れることはない。低きに流れることによって、自然の理に適い、自然の秩序にしたがっている。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리고, 높은 곳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으로, 자연의 이치에 맞는다, 자연의 질서에 따르고 있다.
水が去るとは、水自体が自然の条理に適って生きているので、水の姿は、自然の秩序を表わし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
물이 간다란, 물 자체가 자연의 도리(道理)에 맞게 살고 있는 것이므로, 물의 모습은, 자연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水が去る=물이 흐른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한자의 파자(破字)를 의미해서 물이 간다고 해석합니다.
漢字は自然のさまざまな形を型どってつくられただけに、事物や事象を実によく表わしているといえよう。さて水は低きに流れることによって、常に清らかだ。山水の流れは、冷たく、清い。自然の条理にしたがい、低きに流れるから清く、澄んでいる。もし、この水が流れを止め、一ヵ所にとどまるとすれば、水質はよごれ、飲み水の用にさえたたなくなってくる。
한자는 자연의 다양한 형태를 본떠 만들어졌던 만큼, 사물이나 사상(관찰(觀察)할 수 있는 형체(形體)로 나타나는 사물(事物)이나 현상(現象))을 실로 잘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에 의해서, 항상 맑다. 산수의 흐름은, 차고, 맑다. 자연의 도리에 따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므로 맑고, 물이 맑아진다. 만약, 이 물이 흐름을 멈추고, 한 곳에 머문다고 하면, 수질은 더러워지고, 식수로 사용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人の心も、これと同じなのだ。物に執着し、とらわれが多くなると、心は汚れ、ものの用に役立たなくなってくる。ねたみ、ぐち、そしり、いかり、足ることの知らぬ欲望は、執着の表われである。執着があるから、心にこだわりができ、苦しみをつくる。
사람의 마음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물질에 집착하고, 얽매임이 많아지면, 마음은 더러워지고,
마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질투, 푸념(게정;우는 소리, 불평,궁한소리, 넋두리), 비방, 분노, 만족함을 모르는 욕망은, 집착의 표현이다. 집착이 있으므로, 마음에 구애되는 일이 생기고, 괴로움을 만든다.
★ものの用ように立たたない
급한 때에 도움이 안 된다[소용이 닿지 않는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法とは、心に執着をもたぬことだ。とらわれをつくらぬことである。
법이란, 마음에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다. 얽매임(구애됨)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ここで注意したいことがある。それは、とらわれについてである。知識が先行すると、とらわれという意味を曲解し、好き勝手なことをしても、とらわれなければよいというふうに考えるようだ。ここでいうとらわれとは、物に執着しないことであるが、同時にそれは、法にしたがうことを意味している。ところが人によって、文字の観念に酔い、とらわれなければ、したい放題、やりたい放題してもよい、という風に考えてしまう。とんでもないことである。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얽매임에 관한 것이다. 지식이 앞서면, 얽매인다고 하는 의미를 곡해하고, 자기 마음대로인 행동을 해도, 얽매이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얽매임이란,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법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문자의 관념에 취해서, 얽매이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하고,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해도 괜찮다라고, 하는 식으로 생각해 버린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다(당치도 않은 일인 것이다).
法とは秩序だ。循環の秩序をいっている。秩序とは調和であり、中道の心であり、慈悲と愛の神の心をよりどころにして、維持されている。身勝手なことをすれば、相手が迷惑をするだろう。その迷惑の波動は、身勝手な人にハネ返ってこよう。本人はとらわれがないといっても、身勝手な波動は発信者に返ってくるのが法の掟でもあるからだ。他力的信仰者は、えてしてこういう考えになり勝ちである。よくよく自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
법이란 질서이다. 순환의 질서를 말하고 있다. 질서란 조화이며, 중도의 마음이며, 자비와 사랑인 신의 마음을 근거로해서, 유지되고 있다. 자기 멋대로인 행동을 하면,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다. 그 민폐의 파동은, 자기 멋대로인 사람에게 되돌아 옵니다. 본인은 얽매임이 없다고 말해도, 자기 멋대로인 파동은 발신자에게 원상태로 돌아온다는 것이 법의 규칙인 것이기 때문이다. 타력적 신앙자는, 흔히 이러한 사고방식이 되는 경향이 많다. 아주 신중하게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正法は自力である。その自力も我欲をもとにした自力ではない。八正道という反省をもとにした自力行であることを胆に銘じてほしい。
정법은 자력이다. 그 자력도 아욕을 함께한 자력이 아니다. 팔정도라고 하는 반성을 근본으로 한 자력행위라고 하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魔の跳梁
[악마의 도량(악마의 날뜀)]
いつの時代でもそうだが、法が世に伝えられ、広がってくると、その法を潰そうとする魔が跳梁する。さまざまな噂を流し、中傷や批難が、あたかも真実のようなひびきをもって、人びとの心を撹乱する。その戦術は外部からくるものもあれば、撹乱を意図して内部から突き上げてくるものもある。彼らにとって、法は大敵なのである。
어느 시대에도 그렇지만, 법이 세상에 전해지고, 넓혀져 가면, 그 법을 무너뜨리려 하는 악마가 함부로 날뛴다. 여러 가지의 소문을 유포하고, 중상모략이나 비난이, 마치 진실한 것처럼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교란한다. 그 전술은 외부에서 오는 것도 있으면, 교란을 의도하고 내부에서 압박해 오는 것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법(法)은 대적(강적)인 것이다.
☜출처: http://yuki0syouron.seesaa.net/
法が広がると、なぜこうした魔が競い立つのであろう。以前にも触れたが、それは彼らの地上での生活の場を失うからならだ。闘争、破壊、独占、増上慢、権勢欲、怒り――こうした想念は魔の働きによる。魔は混乱を喜び、破壊を望む想念であるために法とは根本的に相入れないのである。
법이 퍼지면, 왜 이러한 악마가 싸움을 일으키는 것일까. 이전에도 말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지상에서의 생활의 장을 잃기 때문이다. 투쟁, 파괴, 독점, 우쯜대고 거만해짐, 권세욕, 분노 ----이러한 상념은 악마의 작용에 의한다. 악마는 혼란을 기뻐하고, 파괴를 바라는 상념이기 때문에 법과는 근본적으로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光と影の相関関係は、この物質界ではさけられぬ現象の一つかも知れない。ある物体に光を当てると、光の当った部分は明るくなるが、その反対側は影が映る。光が強いほど影も色濃く映る。
빛과 그림자의 상관관계는, 이 물질계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어떤 물체에 빛을 비추면, 빛의 비춰진 부분은 밝아지지만, 그 반대측은 그림자가 비친다. 빛의 강하면 강할 수록 그림자도 농도가 짙게 비친다.
人の心もこれと同じように、光が当った部分は明るく、一方は暗い影を落す。そうしてその影の部分が大きいと、現象が起こり、憑依しているあの世の生物や地獄霊が浮き出てくる。五官にほんろうされた人の心は、こうして影の部分が大きく、常に不安と迷いの生活を送っている。
사람의 마음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비춰진 분야는 밝아지고, 한편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렇게 해서 그 그림자의 부분이 커지면, 현상이 일어나고, 빙의하고 있는 저 세상의 생물이나 지옥령이 표면에 떠오릅니다. 오관(=눈,코,귀,혀,몸)에 농락당한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해서 그림자의 부분이 커지고, 항상 불안과 방황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
しかしその心も、法という中道の神理にめざめ、内在せる神性を求めつづけるならば、心は透明になり、天上からの光を吸収し、影の部分は消え、光に満たされるのだ。つまり、明暗の物質界から脱皮し、明のみの心となるのである。
하지만 그 마음도, 법이라고 하는 중도의 신리에 눈을 뜨고, 내재된 신성을 계속해서 추구해 가면, 마음은 투명하게 되고, 천상으로부터의 빛을 흡수하고, 그림자의 부분은 소멸하고, 빛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명암의 물질계로부터 탈피하고, 밝음 뿐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法に対する真の自覚は、この時、はじめて生まれ、人は悟りの法悦にひたることができる。
人間の偽我が生み出した魔の世界は、法の中では成立しない。そこで、手をかえ品をかえて、人の心に食い入り、心の中に巣をつくろうとする。
법에 대한 참된 자각은, 이 때, 처음으로(비로서) 태어나고, 사람은 깨달음의 법열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위아(거짓된 자기=자기보존)가 창조해 낸 악마의 세계는, 법의 안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써서, 사람의 마음을 잠식하고, 마음 속에 소굴을 만들려고 한다.
法の歴史をみてもわかる通り、二千五百有余年前のブッタの時代も魔が跳梁した。その前のエジプ時代もそうであったし、アトランティスのときも魔が跋扈した。この時は、多くの天使が犠牲となり、肉体の生命をちぢめた。しかし、その反作用がやがて起こって、魔に加担した者はことごとく、海底の藻屑となった。
법의 역사를 보아도 아는바와 같이, 2천 5백여년 전의 붓타(불타)의 시대도 악마가 함부로 날뛰었다. 그 전의 이집트시대에도 그렇게 했고, 아틀란티스의 당시도 악마가 발호했다.=(악마가 설쳤다). 그 때는, 많은 천사가 희생이 되고, 육체의 생명(수명)을 단축시켰다. 하지만, 그 반작용이 머지않아 일어나서, 악마에게 가담한 사람은 깡그리, 바다 속에 빠져 죽었다.=(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正法はその名の通り、正しい法をいう。正しい法とは自然の摂理をいい、慈悲と愛の神の意思を指す。噂や中傷を耳にしても、心を動かしてはならない。まず己れの正しい心に問い、判断を下すことだ、人の口車に乗り、自分を失わないようにしたいものである。
정법은 그 이름 그대로, 올바른 법을 말한다. 올바른 법이란 자연의 섭리를 말하며, 자비와 사랑의 신의 의사(뜻)을 가리킨다. 소문이나 중상모략을 들어도,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선 자기의 올바른 마음에 묻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남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자신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罪障消滅
[죄장소멸]
蒔かぬ種は生えぬ、蒔いた種は刈り取ることは自然の摂理であり、この摂理は人為的に変えることはできない。正法はこうした自然の原則をもとに循環されて行くので、私たちの生活もまたこれから外れることはないのである。
심지 않은 씨는 자라지 않고, 심은 씨는 거둬들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이 섭리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정법은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바탕으로 순환되어 가는 것이며, 우리들의 생활도 또한 이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ところが信仰が他力的となり、さまざまな宗教が派生してくると、きまって先祖供養が罪障消滅の理由づけになったり、ひどいものになると、教祖が信者の罪障を肩代わりして救ってくれるというのまであるようだ。これはいったいどういうことなのだろう。
그런데 신앙이 타력적으로 되어, 다양한 종교가 파생해 오면, 늘 선조공양이 죄장소멸의 이유가 붙게 되거나, 지독한(가혹한) 것이 되면, 교조가 신자의 죄장을 짊어져서 도와 준다고 하는 것까지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도대체 어떠한 일인 것일까?
人の業をかぶる、人の罪障を背負うということが人間の魂において可能なのかどうか。おそらく、そういう宗教家は、人間の本質を知らないばかりか、自然の仕組みというものを認識していないために、そのように考えるのではあるまいか。
남의 업을 짊어진다, 남의 죄장을 짊어진다고 하는 일이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가능한 것인가 어떤가? 틀림없이, 그러한 종교가는,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구조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人間の心――魂は、それぞれ小宇宙をつくっている。天を仰いで大宇宙の広さを感ずるのは、大宇宙の広さを知っているからであり、大宇宙に感応できる心があるから、そう思うのである。また、大宇宙の広さを理解できるのは、自分という存在があるからであり、自分という存在がなければ、大宇宙さえ認めることができないではないか。これを換言すれば宇宙は自分であり、生きているのは自分しか本来ないのである。
인간의 마음――영혼은, 저마다 소우주를 만들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대우조의 넓이를 느끼는 것은, 대우주의 넓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대우주에 감응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 대우주의 넓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없으면, 대우주조차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것을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주는 자기 자신이며, 살아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본래 없는 것이다.
こうみてくると、蒔いた種は刈り取るということが理解され、一方において、人の業をかぶる、人の罪を背負うということが、いかに、人間の本性から逸脱しているかが納得されよう。
이렇게 보게 되면, 심은 씨는 거둬들인다고 하는 것이 이해되며, 한편에 있어서, 남의 업을 짊어지고, 남의 죄를 짊어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서 일탈하고 있는지가 납득되어 올 것이다.
もっとも、人の心は以心伝心といって、他に伝わって行き、人の悲しみが自分の苦しみにつながる場合もある。あるいは、人の罪を背負って犠牲を払うこともあろう。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이심전심이라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서, 남의 슬픔이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혹은, 남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을 치르는 일도 있을 것이다.
ところが、人の悲しみや罪を背負ったとしても、やっぱり、肩代わりはできないものなのだ。人に罪をきせても、悲しみを他に移しても、本人の心は少しも休まらないばかりか、すべてはもともと自分という宇宙の中のできごとなので、自分で処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だ。
그런데, 남의 슬픔이나 죄를 짊어졌다고 해도, 역시, 짊어질 수는 없는 것인 것이다.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도, 슬픔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도, 본인의 마음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본래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우주 속의 일어난 일인 것이며, 자기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人の業をかぶって病気をするとすれば、戦争を職業とする世の将軍たちや反対派の憎しみを常にうけている為政者は、みんな半病人になって野たれ死にする筈である。ところが現実はそうではなく、彼らはいたって元気である。
남의 업을 짊어지고 병에 걸린다고 하면,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세상의 장군들이나 반대파의 미움을 늘 받고 있는 위정자는, 모두 반병신이 되어 길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들은 매우 건강하다.
こうみてくると業はかぶるのではなく、自分がつくるものである。信者の業を教祖が背負い、そのため重病に陥り、信者が安心立命するなどということが、いかに真実から離れているかがわかろう。
이렇게 보게 되면 업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신자의 업을 교조가 짊어져, 그 때문에 중병에 빠져, 신자가 안심입명한다는 등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진실에서 벗어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騙されてはいけない。自分を救う者は自分しかいないことを――。
속아넘어가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돕는(구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임을――。
原 罪
[원죄]
人類の祖先は旧約聖書に象徴的に描かれている。
인간의 선조는 구약성서에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エデンの園でアダム(男)とエバ(女)が神の保護のもとに楽しい日々を送る。そのうち、神の楽園に蛇が現われ、エバに禁断の木の実を食べよという。エバは好奇心にさそわれ、蛇のささやきをきいてしまう。禁断の実を口にしたエバは、その実をアダムにもすすめる。アダムは神の怒りを恐れ、食べまいとするが、エバのすすめで、彼までもそれを食べてしまう。
에덴 동산에서 아담(Adam=남자)와 에바(Eva=라틴어,Eve=여자=기독교)가 신(God)의 보호속에 함께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 그 안에, 신의 낙원에 뱀이 나타나서, 에바에게 금단의 나무의 열매을 먹어라고 한다. 에바는 호기심에 이끌려, 뱀의 속삭임을 들어 버린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에바는, 그 열매을 아담에게도 권한다. 아담은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먹지 않으려 하지만, 에바의 권유에, 그마저도 그것을 먹어 버린다.
二人は禁断の実を食べると、今まで経験もしない自分を意識する。二人がそれぞれ自分を意識するいとまもなく、神の怒りが始まる。エデンの園に雷がとどろき、二人は楽園にとどまることができず、ついに楽園を追われ、流浪の旅がはじまる。
두 사람은 금단의 열매을 먹자, 지금까지 체험하지 않은 자신을 의식한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을 의식할 짬도 없이, 신의 분노가 시작된다. 에덴의 동산에 천둥 번개가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은 낙원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어, 마침내 낙원에서 추방되어, 유랑의 여행이 시작된다.
人間の原罪は、こうして伝えられた。そののち、イエスが出て、その原罪をあがな贖うことになり、贖いの象徴が十字架となる。
인간의 원죄는, 이렇게 해서 전해졌다. 그 후, 예수(Jesus)가 나와서, 그 원죄를 속죄하게 되고, 속죄의 상징이 십자가가 된다.
さて、人間には、アダムとエバにみられるように、もともと原罪というものがついてまわるものかどうか。イエスが十字架で贖ったとすれば、のちの世の人々に平和と安らぎが訪れ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ところが、事実は戦乱と混乱のくりかえしであり、罪の意識は止むことを知らない。
그럼, 인간에게는, 아담과 에바에게 보여지듯이, 원래 원죄라고 하는 것이 붙어다니는 것일까 어떨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속죄했다고 하면, 후에 사람들에게 평화와 평온함이 당연히 방문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사실은 전란과 혼란의 반복하고 있고, 죄의식은 그치는 것을 모른다.
エデンの園とはなにかといえば、それは実在界であり、かつての地上天国を指す。禁断の実とは、肉体にまつわる想念であり、自己本位の意識である。蛇は執念、執着の動物であり、体をくねらせ、左右に波形をつくらないと前に進めない。つまり、前進の波形は運動を表わす。それゆえ、蛇は執念の波動、運動を意味するのである。
에덴 동산이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실재계이며, 일찍이 지상천국을 가리킨다. 금단의 열매란, 육체에 달라붙은 상념이며, 자기본위의 의식이다. 뱀은 집념, 집착의 동물이며, 몸을 구불구불하게 하여, 좌우로 파형을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즉, 전진의 파형은 운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뱀은 집념의 파동,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エデンの園は神の国である。そこに、どうして蛇がおり、禁断の実があったのだろう、すべては象徴的に語られている。
에덴 동산은 신의 나라이다. 거기에, 어째서 뱀이 있고, 금단의 열매가 있었던 것일까? 모든 것은 상징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すなわち、人が自己本位(自我意識)に陥ると、その意識の波動の渦に巻きこまれ、なかなか、そこから抜け出すことができない。これがカルマの循環である。カルマの循環は蛇の波形であり、執念、執着の波動に陥ると、真実が不明となり、なにが善で、なにが悪か、人間の目的すら見当がつかなくなってくる。
즉, 사람이 자기본위(자아의식)에 빠지면, 그 의식의 파동의 소용돌이게 휘감기고, 좀처럼,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것이 카르마의 순환이다. 카르마의 순환은 뱀의 파형이며, 집념, 집착의 파동에 빠지면, 진실이 불명하게 되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인간의 목적조차 짐작할 수 없게 된다.
原罪とは、五官にまつわる六根であり、煩悩だ。これを断ち切るには、祈るだけでは断ち切れない、正道に照らした生活行為しかないのである。八正道を規準にした毎日の正しい反省の生活、反省後の努力の生活、心を正定にした調和の生活。自己保存の悪の思いは、悪としてかえってくる。悪の循環、運動から解放されるには、悪を思わないこと、原罪の種を蒔かないことである。
원죄란, 오관에 달라붙은 육근이며, 번뇌이다. 이것을 귾어버리기 위해서는, 기도만으로는 끊어지지 않고, 정도에 비추어진 생활행위 밖에 없는 것이다. 팔정도를 올바른 기준으로 한 매일의 올바른 반성의 생활, 반성 후의 노력의 생활, 마음을 정정(正定)으로 한 조화의 생활. 자기보존의 나쁜 생각은, 악으로 바뀐다. 악의 순환, 운동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 원죄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것이다.
己心の魔
[자기 마음의 악마]
魔についてはたびたびふれてきた。それは、正法が流布されてくると、きまって魔が跳梁し、表面に現われてくるからである。なぜ現われるかというと、光(法灯)が強くなれば、陰(暗黒)の部分も鮮明になるからである。
악마에 대해서는 자주 접해 왔다. 그것은, 정법이 유포되게 되면, 늘 악마가 도량하고, 표면에 나타나오기 때문이다. 왜 나타나는가 하면, 빛(법등)이 강해지면, 그림자(암흑)의 부분도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ある物体に光を当てたとする。するとその光が強くなると陰の部分も黒く映り、光が弱まれば陰も不鮮明になってこよう。人の心もこれと同じ理屈で、光が強く当ると、その陰影も大きく描かれる。心がもし、その陰影に傾斜して行くと、陰影に巣を食う魔が暴れ出し、さまざまな現象がおこってくる。
어느 물체에 빛을 비췄다고 하자. 그러면 그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의 부분도 어둡게 비추고, 빛의 약해지면 그림자도 선명하지 않게 되어 올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이것과 같은 이치이며, 빛이 강하게 비추면, 그 음영도 크게 그려진다. 마음이 만약, 그 음영에 경사해 가면, 음영도 둥지를 틀고 악마가 날뛰기 시작하고, 다양한 현상이 발생해 온다.
こういうと、人は、魔が働くとは光が強烈なのだから、魔という光の反対現象は、人より偉いのだと早合点しがちである。しかし、これは間違いである。人間は誰しも、こうした光と陰を合わせ持っているので、心いかんでは誰にも働く。
이렇게 말하면, 사람은, 악마가 활동한다는 것은 빛이 강렬한 것이기 때문에, 악마라고 하는 빛의 반대현상은, 남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곧잘 지레 짐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빛의 그림자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며, 마음 여하에 누구나 활동한다.
学生運動の内ゲバをみればこの点は明らかであろう。魔はしょせん、偽我の産物であり、悪のエネルギーなので、念の作用が強い者ほど強く働くということだ。
학생운동의 폭력 사태를 보면 이 점은 명백할 것이다. 악마는 결국, 위아(자기보존)의 산물이며, 악마의 에너지인 것이며, 염(念) 작용이 강한 사람일수록 강하게 활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善といい、悪といっても、すべては想念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る。つまり、心の在り方だ。その心の在り方が、念のエネルギーの強弱によって、形の上に現象化されてくる。
선이라고 해도, 악이라고 해도, 모든 것은 상념에 의해서 빚어진다. 즉, 마음의 본연의 모습(올바른 자세)이다. 그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염(念)의 에너지의 강약에 의해서, 형태 상으로 현상화되어 온다.
人の心は天国と地獄とに通じている。これを別な言葉でいうと、心は自由だということである。どちらにも通ずる。地獄の不調和な心の働きや行為をすれば地獄に、天国を思えば天国に、しかし、一方通行で地獄のみに通じ、天国に通じることが少ないと心は不自由になる。天国に通じてこそ、私たちの心は明るく、正しく、生きられる。偽我は地獄に、善我は天国にである。
사람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에 통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은 자유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어느 쪽에도 통한다. 지옥의 부조화한 마음의 작용(활동)이나 행위를 하면 지옥에, 천국을 생각하면 천국에, 하지만, 일방통행으로 지옥만으로 통하고, 천국에 통하는 일이 적으면 마음은 부자유하게 된다. 천국에 통해야만 비로소, 우리들의 마음은 밝아지고, 살아갈 수 있다. 위아(자기보존)은 지옥에, 선아(善我)는 천국에 있다.
しかし、この両面をさらに超えると、真我の境涯に達し、人の心は真の自由を得ることになる。仏教でいう如来の境地である。ここに至ると、魔に己れの心をゆだねることはない、魔に悩まされることもない。それはカルマの緊縛を離れるからである。
하지만, 이 양면을 더욱 초월하면, 진아(眞我)의 경지에 도달하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의 경지이다. 여기에 이르면, 악마에게 자기의 마음을 내맡기는 일은 없고, 악마에게 휘말리는(괴로움을 당하는) 일도 없다. 그것은 카르마의 긴박(결박)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心がカルマに揺れる間は、魔は常に背中合わせについてまわる。つまり、光にたいする陰である。真我に至ると、陰があるようで陰はない。
마음이 카르마에 흔들리는 동안은, 악마는 늘 등을 맞대고 어디까지나 따라다닌다. 즉, 빛에 대한 그림자이다.
진아(眞我)에 이르면, 그림자가 있는 듯해도 그림자는 없다.
肉体があるようで肉体はない。肉体とは、心を光とすれば陰のようなもので、肉体に心がほんろうされることはないので、光があっても陰はないということになろう。ところが通常は、光と陰がついてまわる。
육체가 있는 듯해도 육체는 없다. 육체란, 마음을 빛이라고 하면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육체에 마음이 농락당하는 일은 없는 것이며, 빛이 있어도 그림자는 없다고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통상은, 빛과 그림자는 어디까지나 따라다닌다.
そして、偽我の心の中には魔は常に伏在するということになる。これを別な言葉でいうと、こしん己心のま魔という。己の心の魔である。
그리고, 위아(자기보존)의 마음속에는 악마는 항상 잠재(잠복)한다고 하게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기심(己心:자기 마음)의 마(악마)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의 악마이다.
魔の世界は、いつもいうように、怒り、憎しみ、そねみ、足ることを知らぬ欲望、愚痴、怠楕、増上慢などに通じており、ことに怒り、憎しみ、増上慢に心が揺れてくると、魔は、ただちに働き出す。自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
악마의 세계는, 늘 말하는 것처럼, 분노, 증오(미움), 시기(질투),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우치(푸념), 증상만(자만) 등에 통하고 있고, 특히 분노, 증오(미움), 증상만(자만)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악마는, 즉시 활동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憑依と靈道
[빙의와 영도]
最近、異言を語る者があると、ちょいちょい耳にする。しかし正しい異言と、そうでない異言があることを知ってほしい。そこで、ここで霊道と憑依現象についてふれておきたい。
최근, 방언(異言)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따금 듣는다. 하지만 올바른 방언(異言)과, 그렇지 않은 방언(異言)이 있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기에서 영도와 빙의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싶다.
霊道とは心が調和され、守護・指導霊と同通したときにのみ使われるもので、憑依現象とは区別したい。霊道と憑依は全く別な次元のもので、同じ異言を語るといっても内容がまるでちがうことを知って欲しい。
영도란 마음이 조화되어, 수호・지도령과 동통(함께 통함)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빙의 현상과는 구별하고 싶다. 영도와 빙의는 전연 다른 차원의 것이며, 같은 방언(異言)을 말한다고 해도 내용이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霊道は心が調和され潜在意識が開かれた時におこる。潜在意識は自分自身の意識であり、己れの意識だから当然過去世で経験し学んだことが表面意識に流れてくる。潜在意識が流れてくれば今生で学ばないことでも理解され、さまざまな智慧があふれてくる。
영도는 마음이 조화되어 잠재의식이 열렸을 때에 일어난다. 잠재의식은 자기 자신의 의식이며, 자기의 의식이기 때문에 당연 과거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이 표면의식에 흘러나온다. 잠재의식이 흘러나오면 이번 생에서 배우지 않은 것도 이해되어, 다양한 지혜가 넘쳐흐르게 된다.
守護・指導霊はこうした潜在意識の中に存在している。異言(過去世の言葉)は守護・指導霊の働きによって行われる。したがって、霊道現象による異言は、自分自身の過去世の記憶がひもと紐解かれたときにおこり、別人格の憑依によるそれではないのである。
수호・지도령은 이러한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 방언(異言)(과거세의 말)은 수호・지도령의 작용(활동)에 의해서 행해진다. 따라서, 영도 현상에 의한 이상한 말은, 자기 자신의 과거세의 기억이 끈을 풀었을 때에 일어나고, 다른 인격의 빙의에 의한 그것이 아닌 것이다.
霊道者を霊視すると後光が出ている。霊道者の心の高低によってその後光の輝きも大きさも異なる。普通の人が霊道者を評価する場合はその人の日常生活をみることである。
영도자를 영시(마음의 눈으로 보면)하면 후광이 나오고 있다. 영도자의 마음의 고저에 의해서 그 후광의 빛(광명)도 크기도 다르다. 보통 사람이 영도자를 평가하는 경우는 그 사람의 일상생활을 보는 일이다.
アラハンという霊道者は怒りや憎しみ、増上慢や欲望にほんろうされることがない。日常生活は極めて常識的であり、その霊道を使って人に恐怖感を与えたり、おごり高ぶることはしない。霊道は心の安らぎがなければ開けないからだ。心は明るく、愛念をもとにしている。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하는 영도자는 분노나 증오(미움), 증상만(자만)이나 욕망에 농락당하는 일이 없다. 일상생활은 극히 상식적이며, 그 영도를 사용해서 남에게 공포감을 주거나, 교만하고 뽐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영도는 마음의 평안이 없으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밝고, 애념(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霊道をひらきながら心を動かす者も中にはあるであろう。そうした場合は守護・指導霊は語らない。語る場合は悪魔か憑依霊と思えばよい。
영도를 열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도 그 중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수호・지도령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경우는 악마가 빙의령(憑依靈)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霊道があるなしにかかわらず、いちばん大事なことは、現在のその人の思念と行為であり、その人が法に適って生活しているかどうかが大切である。これを規準にすれば真の霊道か、憑依かが判別できよう。
영도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점은, 현재의 그 사람의 사념(思念)과 행위이며, 그 사람이 법에 들어맞게 생활하고 있는가 어떤가가 중요하다. 이것을 규준으로 삼으면 진정한 영도인지, 빙의인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憑依は自分の意識ではない。もちろん自分の現在の意識が憑依者を呼ぶので、その人の生活行為もチグハグになってくる。憑依霊にはさまざまなものがいて、外人もおれば蛇もいる。外人が憑依すればあたかも過去世の言葉のように異言となって語り出すだろう。
빙의는 자기 자신의 의식이 아니다. 물론 자기 자신의 현재의 의식이 빙의자를 부르는 것이며, 그 사람의 생활행위도 뒤죽박죽이 되게 된다. 빙의령에게는 여러 가지 있는데, 외국인도 있으면 뱀도 있다. 외국인의 빙의하면 어디까지나 과거세(過去世)의 말처럼 방언(異言)이 되어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もっとも意識が通じないものは憑依することはないのでこれなどは特異な例といえようが、しかし最近こうした例が多くなっているので注意が肝要だ。
무엇보다도 의식이 통하지 않는 것은 빙의하는 일은 없는 것이며 이런 예는 특이한 예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지만 최근 이러한 예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憑依は執着の念によるもので、危険このうえもない。霊道と憑依を見分けるには、その人の想念行為が現実的に法に適っているかどうかであることを、繰り返し強調したい。
빙의는 집착의 념(念)에 의한 것이며,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 영도와 빙의를 분별하는 데에는, 그 사람의 상념행위가 현실적으로 법에 들어맞고 있는가 어떤가에 있는 것임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싶다.
精神病
[정신병]
拙著『悪霊』のⅠ・Ⅱ部が世に出て、さまざまな反響を与えたようだが、この種の病気、つまりノイローゼ、精神病は憑依霊を除いたからといって、パッとよくなる、一夜にして恢復するというものではない。憑依霊は、自分が呼びこむのであり、したがって呼びこまない心に変わらないかぎり、病気は、またもとに戻ってしまうからだ。
졸저 『악령』의Ⅰ・Ⅱ부가 세상에 나와서, 다양한 반향을 준 것 같지만, 이러한 종류의 질병, 즉 노이로제, 정신병은 빙의령을 제거했다고 해서, 짠~하고 좋아지고, 하룻밤에 회복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빙의령(憑依靈)은, 자신이 불러 들인 것이며, 따라서 불러 들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뀌지 않는 한, 질병은, 또 원래대로 되돌아 와 버리기 때문이다.
拙著をよく読んでもらえばこの点はよく理解できるはずだし、大事なことは、この場合、当事者よりも周囲の人たちの愛情が欠かせない要素をなしているということだ。
졸저를 잘 읽어 보시면 이 점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이 경우, 당사자보다 주위의 사람들의 애정(愛情)을 빠뜨릴 수 없는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病気の原因は本人にある。が、しかし、その遠因は、まず十人が十人、子どものときに、すでに病気の芽を宿している。つまり、家庭環境なり、周囲の状況にあったといえる。本人をはじめ、その周囲が、ものを正しく見る、中道にそった生活をしていれば、不調和な病気にならなかったはずだし、子供の性格に暗さをしのびこませることもなかったであろう。
질병의 원인은 본인에게 있다. 그렇지만, 하지만, 그 원인은, 우선 10명이면 10명, 어린 시절에, 이미 질병의 싹을 키우고 있다. 즉, 가정환경이나, 주위의 상황에 있었던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본인은 처음, 그 주위가, 현상(사물)을 올바르게 보고, 중도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 부조화한 질병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아이의 성격에 어둠을 숨어 들게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子どもに毒を食うなといっても、いう方が無理であり、毒を与えない家庭生活がなにより大事なわけである。成人し、自らをかえりみるようになって、はじめて、ものの道理が理解でき、人の運命がなにによって運ばれ、また執着の苦悩、心の重要さがわかってくるといえよう。
"아이에게 독을 먹지 말라" 라고 해도, 말하는 것이 무리이고, 독(毒)을 주지 않는 가정 생활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성인(成人)이 되어,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되고, 비로소, 현상(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의 운명이 무엇에 의해서 옮겨지고, 또 집착의 고뇌, 마음의 중요함을 이해해 온다고 말할 수 있지요.
病気の原因は本人にあるのであるが、しかし、ノイローゼ、精神病の場合は、子どものときに病気の芽を宿し、知らず知らずのうちにそれがふくらみ、長い間のうちに、暗い性格をつくり上げてきているので、まず、その内向的性格を修正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には、本人の自覚も大事だが、周囲の環境、家庭生活がなによりも大事になってくる。
질병의 원인은 본인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노이로제, 정신병의 경우는, 어린 시절에 질병의 싹을 키우고,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팽창하여, 오랜 기간의 동안에, 어두운 성격을 새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써, 우선, 그 내양적 성격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의 자각도 중요하지만, 주위의 환경, 가정 생활이 무엇 보다도 중대사이다.
患者が出た家庭は、本人だけにそれを望まず、一家全員でその原因を究明する心構えが必要であろう。そうして、家族全員が息者の治療に当ると同時に、家族成員一人一人が明るい生活になり得るよう努力する必要がある。
환자가 생긴 가정은, 본인에게만 그것을 바라지 않고, 일가 전원이 그 원인을 구명하는 마음가짐(각오)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족 전원이 자식의 치료를 담당하는 것과 동시에, 가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밝은 생활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患者によって、家と病院の間を往復するというのも、患者の家庭が旧態依然の生活であり、患者が帰っても患者を受け入れる体制ができておらず、いわば、厄介者扱いになっているからである。
환자로 인해서, 집과 병원의 사이를 왕복한다는 것도, 환자의 가정이 구태 의연의 생활이며, 환자가 돌아와도 환자를 받아 들이는 체제가 되어 있지 않고, 말하자면, 애물단지 처럼 취급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この際、はっきりいいたいことは、こうした家庭にあっては、一人一人が明るい生活になり得るよう正道の生活に切りかえ、患者を正常に戻す努力をしてもらいたいということである。
이 때에,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가정에 있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밝은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정도(正道)의 생활로 전환하고, 환자를 정상(正常)으로 되돌리는 노력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관심과 사랑을 주십시오. 빙의 환자가 있는 가정은---제 경험이에요.
言葉と魔
[말과 악마]
八正道の中に「正語」というのがある。
팔정도 중에 「정어(바르게 말한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これは冷静、誠実、愛の心をもって語れということなのだ。心を歪んだままにしておいて語れば、その言葉は、人の心を動揺させ、混乱のモトになるからである。
이것은 "냉정, 성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말하라" 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뚤어진채로 해서 말하면, 그 말은, 사람의 마음을 동요케하고, 혼란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神は「光あれ」と言われた。すると光があった。
신(God)은 「빛이 있어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水の間におおぞらがあって、水と水とを分けよ」と言うと、水は、水と空とに分けられた。
これは旧約聖書に出てくる創世記の冒頭のくだりである。
「물의 사이에 너른 하늘이 있고, 물과 물에서 나눠져라 」라고 하면, 물은, 물과 하늘로 나뉘어졌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세기의 서론의 대목이다.
天地創造は、神のこうした言葉によって完成された。
천지창조는, 신(God)의 이러한 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これは何を意味するかといえば、言葉は神であり、言葉は生きており、言葉は、ものを創造する力を持っていることをいうのである。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하면, 말은 신(God)이며, 말은 살아 있고, 말은, 물질을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人の中傷をしたとする。すると、第三者はその中傷に心を動かされ、中傷されている人を色メガネで見るようになろう。しかも、人の口は、それこそ、自由に語られるので、言葉は生き物として、人の心を動揺させ、人から人へ中傷が伝えられると、混乱は、一層深くなってゆく。
남을 중상모략을 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제 3자는 그 중상에 마음을 움직여서, 중상되고 있는 사람을 색안경으로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소문은, 그야말로, 자유롭게 말해지므로, 말은 생물로서,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중상이 전해지게 되면, 혼란은, 한층 깊게 되어 간다.
善悪にかかわらず、言葉は、それ自体、生き物として生き、ものを形造って行く。
선악에 관계없이, 말은, 그 자체, 생물로서 살고, 물질을 창조해 간다.
憎悪の言葉、中傷の言葉、怒り、愚痴、さまざまな悪の言葉、すなわち、人心を混乱に導く言葉は、神がつくられたこの地上を、悪の毒で汚すことになる。
증오의 말, 중상모략의 말, 분노, 푸념, 다양한 나쁜 말, 즉, 인심을 혼란하게 이끄는 말은, 신이 창조한 이 지상을, 나쁜 독으로 오염시킨다.
悪の言葉を語るそのときは、悪魔がかたわらにいて、その人をそそのかしている。
나쁜 말을 말하는 그 때는, 악마(惡魔)가 곁에 있고, 그 사람을 부추기고 있다.
過日、関西での研修会の折に、悪魔に心を乱された人がいた。一部の人びとは、その人の言葉を信じ、心が揺れた。
지난 번, 간사이(關西) 지방에서의 연수회 때에, 악마에게 마음을 어지럽혀진 사람이 있었다. 일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마음이 흔들렸다.
悪魔に乱されたその人は、わずかばかりの霊力や自分の能力を過信し、増上慢になっていた。そのため、本来の自分を見失い、自分は真実を語っているかのような錯覚に陥り、苦悩をつくった。幸い、大事に至らず、本人も、そして、その周囲も、平静を取り戻すことができたが、私たちの周囲には、たえず魔の波動が送られ、極めて巧妙なうちに私たちの心の中にすべりこんでくる。そうして、言葉を通して、人の心を混乱に陥れる。
악마에게 어지럽혀진 그 사람은, 쥐꼬리만한 영력(신비스러운 힘)이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뽐내고 거만해졌다. 그 때문에, 본래의 자신을 잃고,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고뇌를 만들었다. 다행히, 큰일이 되지 않고, 본인도, 그리고, 그 주위도, 평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지만, 저희들의 주위에는, 끊임없이 악마의 파동이 보내져서, 지극히 교묘한 와중에 저희들의 마음 속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말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혼란에 빠진다.
忘れてはならない。私たちが平常心を失い、心が不安になり、人を憎んだり、気が滅入ったりしたときは、心を落ち着かせ、平常心に戻るまで、みだりに語ってはならない。言葉は、それ自体、生き物として、人の心を動かし、人びとの行動を規制するからである。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저희들)이 평상심을 잃고, 마음이 불안하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기분이 우울해졌을 때는, 마음을 침착하게 해서, 평상심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말은, 그 자체에, 생물로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때문이다.
天の心を
[하늘의 마음을]
人が集まり、行動が組織的になってくると、その組織や人の行動が気になり出す。そうして、肝心かなめの法がどこかへ行ってしまう傾向になりやすい。
사람이 모이고, 행동이 조직적으로 되어 오면, 그 조직이나 사람의 행동이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중요한 법이 어딘가로 가 버리는 경향이 되기 쉽다.
人の噂や中傷に気をとられ、その噂や中傷に心をゆだねると、もはや、法を学ぶ者とはいえなくなってくる。なんとなれば、法を学ぶ者は、いつどんな場合でも、法を尺度に、生活の中に実践して行く者であるからだ。
남의 말(소문)이나 중상에 정신이 팔리고, 그 말(소문)이나 중상에 마음이 그 말(소문)이나 중상에 마음을 내맡기면, 이제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법을 배우는 사람은, 언제 어떠한 경우라 해도, 법을 척도로, 생활 속에 실천해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集団生活や組織というものは、この地上界に生きて行くうえで欠かせないものだが、さりとて、これにウェイトがかかると、自分を失いがちとなる。
집단생활이나 조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계(地上界)에 살아 가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에 무게를 두면, 자신을 곧잘 잃게 된다.
なぜなら、自分の周囲に現われる諸現象は、自分の心を育む材料にすぎないからだ。これはどんなに世の中が進み、調和された姿が現われたとしても、その基本的態度を変えてはならないものである。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주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키우는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세상이 진행되고, 조화된 모습이 나타났다고 해도, 그 기본적 태도를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다.
調和の姿というものは、これが完全というものは本来望み得ないものだし、調和が進めば進むほど、より高度の調和が私たちを待ちうけているからだ。
조화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조화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보다 고도한 조화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また、この宇宙を認識し得る意識はなにかというと、ほかならぬ各人の意識であり、心である。そうして、その宇宙の存在を理解できるのも各人の魂だ。
또, 이 우주를 인식하고 얻는 의식은 뭔가 하면, 다름 아닌 각자의 의식이며,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그 우주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각자의 영혼이다.
これをもっと平易に説明すると、私たちは眠っている時は、鼻をつままれても、体をつつかれてもわからない。めざめてはじめて、自分の存在を認識し、昨日のこと、今日のことが理解できる。
이것을 조금 더 평이하게 설명하면, 우리들은 잠자고 있을 때는, 코를 잡아도, 몸을 콕콕 찔러도 모른다. 잠에서 깨고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어제의 일, 오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다.
つまり、自分という意識があって宇宙の存在が理解できる。これを逆にいうと、宇宙は自分がなければ存在しない。さまざまな諸現象は自分があるからそれをとらえることができる。
즉,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야 우주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우주는 자기 자신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든 현상은 자기 자신이 있으므로 그것을 파악할 수가 있다.
こうみてくると、自分以外の諸現象は、自分の心を育む材料であり、その材料の中に、自分を没入させると、自分を失ってくることになろう。
이렇게 보게 되면,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현상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키우는 재료이며, 그 재료 속에, 자기 자신을 몰입시키게 되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自己という存在は、大自然という中道の法のなかにこそ生きているものなのだ。人の噂や組織に気をとられ、それに心をふり回される愚を、法を学ぶ者は犯してはならない。つまり、私たちの大事な対象は、人や組織ではなく、法なのである。
자기라고 하는 존재는, 대자연이라고 하는 중도의 법 안에서야말로 살아 있는 것인 것이다. 입방아(남의 말)이나 조직에 정신이 말려, 그것에 마음을 휘둘리는 어리석음을, 법을 배우는 사람은 범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들의 중요한 대상은, 남이나 조직이 아니라, 법인 것이다.
ある人はこんな名言を吐いている。「天は人の上に人をつくらず、人の下に人をつくらず」これは平等をいっているようだが、もう一歩進めて、人(この場合偽我)を相手とせず、天の心を心とするとき、人の心は大きく広いものとなり、人を赦し、自己に厳しい法の実践者になってくるものである。
어떤 사람(후쿠자와 유키치(福澤 諭吉), (1835년 1월 10일)-(1901년 2월 3일))은 이런 명언을 말하고 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이것은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더욱 한걸음 나아가서, 사람(이 경우의 위아<자기보존>)을 상대로 삼지 않고, 하늘의 마음을 마음으로 할 때, 사람의 마음은 크고 넓은 것이 되며, 남을 용서하고, 자기에게 엄격한 법의 실천자가 되어 오는 것이다.
合掌
[합장]
合掌について説明しよう。
합장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合掌というのは中道の心を形の上に表わした姿である。合掌すると精神の統一がしやすいというのもその辺の事情を語っている。
합장이라고 하는 것은 중도(中道)의 마음을 형태상으로 표현한 모습이다. 합장하면 정신 통일을 하기 쉽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사정(事情)을 말하고 있다.
まず、人間の肉体を見てほしい。胴を中心に、手足も、耳も、鼻の穴も、目も、左右二つついている。これがもし一つだけだったらどうであろう。不便このうえもなく、バランスを保つのに非常に骨が折れよう。卑近な例が眼である。眼にゴミが入り、眼帯をしたときのことを思い出してほしい。片目だと遠近感がつかめず疲労も激しく、不便このうえもない。口は一つしかないが、これはどうかと疑問をいだく向きがあるかも知れない。口は一つだが、出口が下の方にある。これも揃っている。つまり、私たちの肉体は胴を中心にして、ちゃんとバランスされるようにつくられている。
우선, 인간의 육체를 보아 주었으면 합니다. 몸통을 중심으로, 수족도, 귀도, 콧구멍도, 눈도, 좌우 두 개 붙어 있다. 이것이 만약 하나뿐이었다면 어떨 것인가?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하고, 밸런스(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매우 힘들 것이다. 비근한 예가 눈이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안대를 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내었으면 좋겠다. 한쪽 눈만으로 원근감을 파악할 수 없고 피로도 극심하고,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하다. 입은 하나밖에 없지만, 이것은 어떤가라고 의문을 마음에 품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입은 하나이지만, 출구가 아래쪽에 있다. 이것도 모여 있다. 즉, 우리들의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가지런히 균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右にも、左にも片寄らず、中道に沿っているのが人間の肉体であり、小宇宙を形造っている。宇宙は中道という意思の下にバランスを保っている。
왼쪽으로,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 따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육체이며, 소우주를 형성하고 만들어져 있다. 우주는 중도라고 하는 의사 하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合掌は、こうした精神的、肉体的構造の集約した姿を意味し、中道の象徴といえよう。
합장은, 이러한 정신적, 육체적 구조가 집약한 모습을 의미하고, 중도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また合掌は大自然――神への祈りでもあり、合掌によって、神と人、人と人との精神的交流がはかられる。神とは中道の意思であり、人と人との円滑な交流も片寄らない中道の心しかないはずであるからだ。
또 합장은 대자연――신을 향한 기도이기도 하며, 합장에 의해서, 신과 인간, 사람과 사람과의 정신적 교류를 도모할 수 있다. 신이란 중도의 의사이며, 사람과 사람의 원활한 교류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마음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ここで手のひら療法についていうと、通常は合掌し、精神を統一してから行うと、治療効果は一層顕著になろう。理由は前述の意味合いから容易に理解できよう。
여기에서 손바닥 요법에 대해서 말하자면, 통상은 합장하고, 정신을 통일하고 나서 행하면, 치료효과는 한층 현저하게 될 것이다. 이유는 앞에서 말한 의미와 부합하기 때문에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手のひら療法の物理的説明をすると、肉体はまず細胞から成り立っている。病気は細胞の新陳代謝が十分に行われないためにおこるもので、細胞活動が不活発なのだ。
손바닥 요법의 물리적 설명을 하면, 육체는 우선 세포로 성립되어 있다. 병은 세포의 신진대사가 충분하게 거행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세포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이다.
病気を治すには細胞を活発にすればよい。
병을 고치는 데에는 세포를 활발하게 하면 좋다.
つまり、手のひらから発散する生体エネルギーを患部に充電するのだ。手のひら療法はこうしてその効果をあげるわけだが、生体エネルギーの発散の度合いは、人によって個人差がある。それは前述の中道の精神にそった生活をしているかどうかによって、ちがってくる。
즉, 손바닥에서 발산하는 생체에너지를 환부에 충전하는 것이다. 손바닥 요법은 이렇게 해서 그 효과를 올리는 것이지만, 생체에너지의 발산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서 개인 차가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중도의 정신에 들어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어떤가에 의해서, 달라지게 된다.
合掌はこうした意義を持っているが、形だけのそれではなんにもならない。要は、中道の精神を生かした生活がなによりも先決なのである。
합장은 이러한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형태만의 그것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중요한 점은, 중도의 정신을 살린 생활이 무엇보다도 선결인 것이다.
[価値の基準]
[가치의 기준]
日本を含めて、いまや全世界は不況とインフレに悩んでいる。いかにしてこの危機から脱出するかとさまざまな研究、討論がなされているが、物に価値の基準をおくかぎり、経済の歯車はあらぬ方へと進んでいくであろう。現在の危機意識は経済を主体としたものの考え方に原因があり、小手先の改革ではその反動はいっそう大きなものとなるであろう。
일본을 포함해서, 오늘 날 전세계는 불황과 인플레이션으로 고생(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 위기에서 탈출할지 다양한 연구,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물질에 가치의 기준을 두는 한, 경제의 톱니바퀴는 생각지도 않았던 방면으로 진행해 갈 것이다. 현재의 위기의식은 경제를 주체로 한 것의 사고방식에 원인이 있고, 손끝(잔재주)의 개혁으로는 그 반동은 한층 더 큰 것이 될 것이다.
いったいこうした状況をつくり出したものはなんであろうか。ほかならぬエゴと欲望とその体制にある。私たちをとりまく生活環境は欲望の発展を基礎として、個人の利益追求が社会の発展につながるという思想を背景に組み立てられている。
도대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인 것일까? 다름이 아니라 에고(이기주의)와 욕망 그 체제에 있다. 우리들은 둘러싸는 생활환경은 욕망의 발전을 기초로 해서, 개인의 이익추구가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상을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この三本の柱はうまくかみ合い数量文明はたしかに開花をみせた。物が豊富に出まわり、金さえ出せばなんでも求め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が、私たちに必要なパイ(資源)は無限ではなくて有限であり、そのパイを奪い合えばつぎに来るものは死しかない。かくて生産をセーブし消費を節約せざるを得なくなった。
이 삼체의 기둥은 엇물린 수량문명은 확실히 개화를 보게 했다. 물질이 풍부하게 나돌고, 돈만 내면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도록 되었지만, 우리들에게 필요한 파이(자원)은 무한하지 않고 한정되어 있으며, 그 파이(자원)을 서로 빼앗으면 다음에 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이리하여 생산을 도와 주고 소비를 절약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少なくとも科学や技術が今後、形を変えて、飛躍的な転換を遂げぬかぎり、私たちの未来は先が見えてきたといえる。しかし、一度ふくらんだ生産機構を縮少することはむずかしい。不況とインフレ、危機意識が全世界を蔽いはじめたのはこのためである。
적어도(최소한) 과학이나 기술이 금후, 형태를 바꾸고, 비약적인 전환을 이루지 않는 한, 우리들의 미래는 앞이 보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부풀은 생산구조를 축소하는 것은 어렵다. 불황과 인플레이션, 위기의식이 전세계를 덮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私たちの住む世界を称して相対界ともいう。天と地、昼と夜、男と女、善と悪というようにすべてが相対的にできあがっている。この相対的な仕組みを一方に片寄らせたならばどうなるであろうか。相対の世界は崩壊するしかない。現在の数量文明は、心より物に、質より量にそのウエイトがかかっている。つまり価値の尺度が物の多寡で計られているのだ。
우리들의 사는 세계를 가리켜 상대계(相對界)라고도 한다. 하늘과 땅,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이라고 하도록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이 상대적인 구조를 한편으로 치우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대의 세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수량문명은, 마음보다 물질에, 물질보다 그 무게(중점)에 달려 있다. 즉 가치의 척도가 물질의 다과로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これは間違いだと思いながらも人びとの心は物に執着を寄せている。危機がくるのは当然である。
이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에 집착을 두고 있다. 위기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相対界の価値の基準は調和である。調和とは一方に偏しない生き方を指し、相対の世界をいわば止揚しながらより高次の調和へと高めていく。現実的には愛の行為である。助け合い、補い合い、許し合える連帯の中に調和の理念が生かされてくるのだ。
상대계(相對界)의 가치의 기준은 조화이다. 조화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생활태도를 가리키며, 상대의 세계를 말하자면 지향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조화로 높여(향상시켜) 간다. 현실적으로는 사랑의 행위이다. 서로 돕고,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연대 속에 조화의 이상(理想)이 되살아나오는 것이다.
物に偏して生み出されてきた現在の危機を乗りきるには、全世界が協調互恵の精神を呼び起こし、人類はみな兄弟である、という神の子の自分に還ることである。エゴと足ることを知らぬ欲望を捨てぬかぎり、危機の輪は広がってゆくであろう。
물질에 치우쳐 창출되어 온 현재의 위기를 뚫고 나아가는 데에는, 전세계가 협조 호혜의 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인류는 모두 형제이다, 라고 하는 신의 자녀인 자신으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에고(이기주의)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없애지 않는 한, 위기의 바퀴는 확대되어 갈 것이다.
[安らぎ]
[평 안]
心の安らぎは正法の悟道の境地から生まれてくる。どうして悟道の境地から生まれるかというと、生死を超えているからである。生老病死の迷いを離れているから心が平安になる。
마음의 평안은 정법의 오도(불도를 깨달음)의 경지에서 태어난다. 왜 오도 (悟道)의 경지에서 태어나는가 하면, 생사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의 미망(迷妄)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평안하게 된다.
具体的にいうと、死後の自分の行くべき場所を知っている。人間の目的が何であるかわかっている。心と肉体は別々であることも理解している。自分の意思によって、自分の肉体をコントロールすることもできる。同時に、自然現象はどんな作用でどう運ばれているか、そして時として、その自然現象を調整することも可能である。こうなると、心が安らいでない方がおかしいといえよう。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후의 자기 자신의 가야 할 장소를 알고 있다.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마음과 육체는 별개인 것도 이해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수도 있다. 동시에, 자연현상은 어떤 작용이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그 자연현상을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편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なかでも、いちばん大事なことは生老病死の迷いから離れることだ。この関門を通ると、心は安らぎ、不退転の心が備わってくる。すると、諸々の智慧が湧き出してくる。必要があれば、その智慧はさまざまな角度から湧現してくる。そうして、森羅万象の姿が神の意思の下に動いていることが、はっきりと理解できる。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생로병사의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관문을 통하면, 마음은 평안하고, 불퇴전의 마음이 갖추어지게 된다. 그러면, 여러 여럿의 지혜가 샘솟게 된다. 필요하면, 그 지혜는 다양한 각도에서 솟아나오게 된다. 삼라만상의 모습이 신의 의사 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心の中のパラミタは、こうしてさまざまな形でその扉をひらいてくれる。
마음속의 파라미타(지혜;波羅蜜多)는, 이렇게 해서 다양한 형태로 그 문을 열어 준다.
しかし、肉体を持ち、この地上で生活する以上は、努力と修行をやめることはできない。たとえ心は安らいでいても、正道という日々の生活から離れることはできないものだ。それが肉体を持つ者の天命であり、修行でもあるからだ。
하지만, 육체를 가지고, 이 지상에서 생활하는 이상은, 노력과 수행을 그만둘 수는 없다. 설령 마음은 편안해도, 정도라고 하는 매일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를 소유한 자의 천명이며, 수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生老病死の迷いから解脱しても、人間としての修行は休むことなく続いて行くのが、人間である。大自然が休みなく運動しているのと似ている。
생로병사의 미망에서 해탈해도, 인간으로서의 수행은 쉬지 않고 계속해 가는 것이, 인간이다. 대자연이 쉬지 않고 운동하고 있는 것과 닮았다.
心の安らぎは、執着の心からは決して得られない。どんなに力んでも、知識が豊富でも得られない。心の安らぎは、思念と行為を通してしか得られないものであるからだ。法という調和の規範をかなめにして、実践する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物事の道理がわかり、価値ある真実が理解できてくる。
마음의 평안은, 집착의 마음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용써 보아도, 지식이 풍부해도 얻을 수 없다. 마음의 평안은, 사념(思念)과 행위를 통해서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라고 하는 조화의 규범을 주축으로 해서,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人によっては仕事をしているときが、いちばん安らいでいるという。仕事が精神を統一させ、心を安定にさせるからだ。
사람에 따라서는 일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고 한다. 일이 정신을 통일시키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때문이다.
だが、老いてその仕事が青年の手に移ると、その人はその途端に心が不安定になってこよう。仕事は生きがいと安心を与えるが、仕事そのものは心の真の支えから、まだほど遠いものであるからだ。
하지만, 늙어서 그 일이 청년의 손에 넘어가면, 그 사람은 그러자마자 마음이 불안정하게 되어 올 것이다. 일은 삶의 보람과 안심을 주지만, 일 그 자체는 마음의 지주에서, 아직 먼 것이기 때문이다.
私たちは、もう一歩進めて、仕事の中の自分ではなく、仕事も自分もすべてを含めて、神理をよりどころ
とした安らぎであって欲しいのである。生老病死の迷いと執着は、そうした中から、はっきりと超えることができ、不退転の心の安らぎは、そこから生じてくるものである。
우리들은, 이제 한걸음 나아가서, 일 속의 자기 자신이 아닌, 일도 자신도 모든 것을 포함해서, 신리를 지주(支柱)로 한 평안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생로병사의 미망과 집착은, 그러한 가운데에서, 분명히 초월할 수가 있고, 불퇴전의 마음의 평안은, 거기에서 돋아나는 것이다.
反省について
[반성에 대해서]
拙著『人間・釈迦』など一連の著書を読まれ理解されるならば、反省の目的、仕方、その在り方というものがおのずと明らかになると思うが、人によってはその反省が反省のための反省になったり、反省に心がしばられたり、精神分析に陥ったり、物事に神経質になったり、欲望充足の霊道を目的としたり、思い出に耽る者もあったりして、反省の目的から外れている場合があるように思われる。
졸저『인간・석가』 등 一 일련의 저서를 읽으시고 이해되신다면, 반성의 목적, 방법, 그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저절로 밝혀지리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반성이 반성을 위한 반성이 되거나, 반성에 마음이 속박되거나, 정신분석에 빠지거나, 매사에 신경질이 되거나, 욕망 충족의 영도를 목적으로 하거나, 추억(회상)에 빠지는 사람도 있거나 해서, 반성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いったい、反省とはなにかというと、一口にいえば、心のわだかまりを取ることにある。自分のクセなり欠点、業の原因をハッキリと自覚し、生活の場において、正道に反した生活に流されないようにすることにある。言葉をかえれば、安らぎある自分自身に立ちかえることである。反省したから、もうただちに心が晴れて恐いものがなくなり、欠点が消え、業が飛んでなくなるというものではない。
도대체, 반성이란 뭔가 하면,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거리낌(응어리)를 푸는 데에 있다. 자신의 버릇 내지는 결점, 업의 원인을 확실히 자각하고, 생활의 장에 있어서, 정도에 반한 생활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평안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에 있다. 반성했다면, 곧바로 마음이 명랑해지고(상쾌해지고) 무서운 것이 없어지고, 결점이 사라지고, 업이 날아가 버린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もちろん、これまで不明だった原因が明らかとなり、ものの見方、思い方が変ってくるので、反省それ自体にも大きな意義があるわけだが、反省の目的は反省後の実生活に反省の結果がどう生かされるかにかかっているわけである。
물론, 지금까지 불명했던 원인이 밝혀지고, 사물의 견해, 사고방식이 변하게 되는 것이며, 반성 그 자체에도 큰 의의가 있을 터이지만, 반성의 목적은 반성 후의 실생활에 반성의 결과를 어떻게 살리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一方、反省の尺度は八正道という中道に心の在り方を軌道修正するもので、それはまた慈悲と愛に集約される。別ないい方をすれば、生かされている現実に感謝する気持と正しく生きる報恩の行為ということになろう。
한편, 반성의 척도는 팔정도라고 하는 중도의 마음의 본연의 모습을 궤도 수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자비와 사랑으로 집약된다. 다른 좋은 식으로 말하면, 되살리고 있는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과 올바르게 살아가는 보은의 행위라고 하게 될 것이다.
八正道以前の私たちは自己本位の自分の立場に執着し、その立場からものをながめ、思い、語り、念じ、仕事をしてきたはずである。
팔정도 이전의 우리들은 자기본위의 자기 자신의 입장에 집착하고, 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염원하고, 일을 해 왔을 것이다.
だが、八正道という中道を尺度に反省すると、こうした立場のおろかさを知り、自己本位のエゴを捨てて行くようになってくる。すなわち、心の大きな転換が図られてくる。反省の大きな意義は心の転換なのである。エゴの自分から調和の自分に立ちかえる。感謝と報恩に心が充実してくるものなのだ。
하지만, 팔정도라고 하는 중도를 척도로 반성하면, 이러한 입장(立場)의 어리석음을 알고, 자기본위의 에고(이기주의)를 버려가게 되게 된다. 즉, 마음의 큰 전환을 도모하게 된다. 반성의 큰 의의는 마음의 전환인 것이다. 에고(이기주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조화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감사와 보은에 마음으로 충실해져 오는 것이다.
反省して自責の念や感謝の心が湧いてこないようでは、まだ本当の反省には至っていない。思い出に耽ったり、精神分析をやっていたのでは反省の目的から外れてくる。
반성해서 자책의 염(念)이나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오지 않고서는, 아직 참된 반성에는 이르지 않고 있다. 추억(회상)에 빠지거나, 정신분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는 반성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된다.
また、反省、反省で、いつも心がしばられ、気持ばかりあせるのも感心しない。周囲の雰囲気にのまれ、ある種の虚栄心に心をゆさぶられているのとあまり変らないからだ。
또, 반성, 반성하며, 늘 마음이 속박되어, 기분(마음)만 조급하게 구는 것도 탐탁하지 않다. 주위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떤 종류의 허영심에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는 것도 그다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心の安らぎは、まずもって他人でなく自分自身にあるのだから、自己満足にならない自分のペースを早く見出し、そのぺースに自分を乗せることだ。正法は、感謝の自覚と、報恩の行為につきる。
마음의 평안은, 우선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만족이 안 되는 자기 자신의 페이스(보조)를 일찍 흐트러뜨리고, 그 페이스에 자신을 싣는 것이다. 정법은, 감사의 자각과, 보은의 행위밖에는 없다.
八正道
[팔정도]
太陽の熱・光は一定の温度を保って地上に放射している。地球の運動も一定のリズムを持って自転、公転している。どちらもバランスを崩さないから常に安定している。安定しているから万物が育ち、生命の循環がさわりなくつづけられる。
태양의 열・빛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지상에 방사하고 있다. 지구의 운동도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자전, 공전하고 있다. 둘 다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늘 안정되어 있다.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만물이 성장하고, 생명의 순환이 지장 없이 계속될 수 있다.
このように、大自然界は中道という最も安定された軸を中心として、相互に調和を保ちながら、それぞれを生かしあっている。ゆえに、中道の精神は万物を生かす調和の心であり、調和とはそれゆえ、慈悲と愛が根底に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慈悲と愛の心になって、はじめて、私たちは大自然界の中道のリズムと一致し、安定した心が得られることになる。
이와 같이, 대자연계는 중도라고 하는 가장 안정된 축을 중심으로 해서, 상호 조화를 유지하면서, 각자를 되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중도의 정신은 만물을 살리는 조화의 마음이며, 조화란 그런 까닭에, 자비와 사랑이 근저(근본)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들은 대자연계의 중도의 리듬과 일치하고, 안정된 마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八正道というものは、大自然界の中道を目標として、換言すれば大自然界の安定した心と合致するための規範である。人間は、自由な心と創造力が与えられ、肉体を持っているので、どうしても一方に片寄る傾向を持つ、地上にさまざまな思惑が乱れ、闘争と破壊がつきないのもこのためなのだ。
팔정도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계의 중도를 목표를 해서, 말을 바꿔 말하면 대자연계의 안정된 마음과 합치하기 위한 규범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마음과 창조력이 주어져,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한편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가지고, 지상에 다양한 생각(속셈)이 혼란해져, 투쟁과 파괴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それゆえ、八正道は人間生活にとって守るべき最低の規準である。生かされ、生きて行くための大自然界の掟でもあり、正しく見る、思う、語る、ということは当然のことである。しかしその当然の規準に、どういうわけか、人は迷い、これに心を縛られるようだ。迷う人は、八正道はむずかしいという。心を縛る人は文字にとらわれ、心の柔軟性、自由性を堅く閉ざす傾向がある。
그러므로, 팔정도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저의 규준이다. 소생되며, 살아가기 위한 대자연계의 규정(법도)이기도 하며, 올바르게 보고,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규준에, 어떠한 까닭인지,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이것에 마음이 속박되는 모양이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팔정도는 어렵다고 말한다. 마음을 남을 속박하는 사람은 문자에 사로잡혀, 마음의 유연성, 자유성(自由性)을 굳게 닫는 경향이 있다.
たしかに、正しくものを見るには知識も必要、考えることも必要、体験も必要である。しかし、人には老若男女、職業のちがい、教育や思想の相違がある。これらの相違をどこで一致させるか、物理的に考えると、それは到底不可能なことであろう。早い話が、インフレ問題一つとっても、政治家の見方、学者の見方、経営者の見方、その他さまざまの見方はみな異なるであろう。
틀림없이(확실히), 올바른 것을 보는 데에는 지식도 필요하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고, 체험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노약남녀, 직업의 차이, 교육이나 사상의 상위가 있다. 이러한 상위를 어디에서 일치시킬지,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플레이션 문제 하나를 가지고도, 정치가의 견해, 학자의 견해, 경영자의 견해, 그 외 다양한 견해는 모두 다를 것이다.
なにが正しく、なにが正しくないかは相対的なものになってこよう。また、こうした現象に正見の目的を求めようとすれば、一生かかっても誰一人として求めることはできないかもしれない。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은지는 상대적인 것이 되어 올 것이다. 또, 이러한 현상에 정견의 목적을 찾는다고 하면, 평생이 걸려도 누구 한 사람이고 해서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八正道の目的は冒頭にふれたように、慈悲と愛の心なのである。これまで自己本位の見方で見てきた不調和な見方、生活の誤りを正すことある。
팔정도의 목적은 모두(말이나 글이 첫머리)에 접한 것처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인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본위의 견해로 봐왔던 부조화한 견해, 생활을 잘못(실수)을 바로잡는 일이다.
調和とは他を生かすことであり、それは菩薩につきる。反省を通じて慈悲と愛の見方、思い方、語り方が大事なのである。この点から外れると八正道はまことにむずかしく、時には心をしばることになろう。
조화란 남을 살리는 것이며, 그것은 보살밖에는 없다. 반성을 통해서 자비와 사랑의 견해, 사고방식, 말하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다. 이 점에서 벗어나면 팔정도는 참으로 어렵고, 때로는 마음을 속박하게 될 것이다.
八正道の本旨を誤らないようにしたい。
팔정도의 본지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고 싶다.
自己の確立
[자기의 확립]
人生においてなにをなすべきか、ということも大事だが、その前に、人生とはなんであるか、ということを知る方が人間にとって、より重要な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마땅히 이루어야 할까? 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인생이란 무엇인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을 아는 편이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私たちの住む世界は間違いなく競争社会であり、力の社会である。そこでは常に、若さと、活動とが尊ばれ、常により多くのことをなすことに目標がおかれている。いうなればなんでも世界一であることが自慢であり、強調され、そうしたことに過度の称賛がおくられているのが現代だ。
우리들의 사는(주거하는) 세계는 틀림없이 투쟁사회이며, 힘의 사회이다. 거기에는 늘, 젊음과, 활동이 중히 여겨지며, 늘 보다 많은 것을 이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뭐든지 세계 제일인 것이 자만이며, 강조되며, 그러한 것에 과도한 칭찬이 주어지는 것이 현대이다.
しかし、こうした若さが強調される文化には、勝者と敗者という過酷な運命が待ってるとえよう。
하지만, 이러한 젊음이 강조되는 문화에는, 승자와 패자라고 하는 가혹(過酷) 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人はいつまでも若くはない。やがて壮年になり、老年になっていく。老年になり体の自由がきかなくなれば、若さが強調される社会であればあるほど、人は、必ず敗北という憂目をみることになるであろう。
사람은 언제까지나 젊음은 없다. 이윽고 장년이 되어, 노년이 되어 간다. 노년이 되어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 젊음이 강조되는 사회라고 하면 할 수록, 사람은, 반드시 패배라고 하는 쓰라림을 겪게 될 것이다.
人生の価値の規準が、なにをなすかにウェイトが置かれると、現代のような若者の時代となり、老人をおろそかにする社会が生まれてくる。だか人生を謳歌した若者といえども、やがて次代の若者に同じような仕打ちをうけ、悲哀をなめることになるだろう。
인생의 가치의 규준이, 무엇을 이루는가에 무게(중점)을 두게 되면, 현대와 같은 젊은 사람의 시대가 되어, 노인을 소홀히 하는 사회가 태어난다. 하지만 인생을 구가한 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윽고 다음 세대의 젊은 사람에게 똑같은 처사(취급)을 당하고, 비애를 맛보게 될 것이다.
この意味において、〃人生、なにをなすか〃ということより〃人生とはなにか〃を知ることの方がより重要であるといえよう。
이 의미에 있어서, 〃인생, 무엇을 이룰까〃라고 하는 것보다〃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また、心の安らぎは〃人生とはなにか〃との問いの中から、その問いを通じて己れを知ることによって、初めて得られるものであり、なすことのみを追う人生には、安らぎも調和も与えられないことを知る必要があろう。
또, 마음의 평안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와의 물음 중에서, 그 물음을 통해서 자기를 아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이루는 것만을 쫓는 인생에는, 평안도 조화도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己れを知るには厳しい自己反省を通してしか道はないだろう。反省を通して己れの実相を知り、その実相が理解されれば、より創造的な自己を啓発することが可能であり、愛に生きることの喜びを体験することができよう。
자기를 아는 데에는 엄격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밖에 길은 없을 것이다. 반성을 통해서 자기의 실상을 알고, 그 실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보다 창조적인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 가능하며, 사랑으로 사는 것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つまり、自己の確立ということが望まれよう。私がいいたいことは、常にたゆまざる反省と努力を重ねてほしいということである。人間は正しい反省がないかぎり、自己を本当に知ることはできないし、安らぎと調和も得られない。果物を沢山実らせた木は風にゆれることがないのと同じように、反省は、パラミタ(仏教でいう智慧の宝庫)という得がたい宝を手にすることであり、ゆるぎない不動心を結実させるものである。
즉, 자기의 확립이라고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늘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반성과 노력을 거듭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올바른 반성이 없는 한, 자기를 정말로 알 수는 없고, 평안과 조화도 얻을 수 없다. 과실을 많이 열매를 맺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성은, 파라미타(波羅蜜多)(불교에서 말하는 지혜의 보고)라고 하는 얻기 힘든(귀중한) 보물을 손에 넣는 것이며, 확고한 부동심을 결실케 하는 것이다.
止 観
[지 관]
この言葉は天台大師が使った。その意味は簡単にいえば〃止まって観る〃ということである。つまり、想いを沈め、反省をこらすことによって、これまで五官でとらえてきたさまざまな諸現象が心で見えてくる、正しく判断できるということだ。
이 말은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사용했다. 그 의미는 간단하게 말하면 〃멈추어 본다〃라고 하는 것이다. 즉, 생각(想い)을 가라앉히고, 반성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에 의해서, 지금까지 오관에 사로잡혀 왔던 다양한 모든 현상이 마음으로 보게 되며,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止観の止は、観を止めるということだから、ものを見る前提である想念を、まず、止めねばなるまい。したがって止とは想念をとめることになる。しかし正法・仏教は現実否定の虚無主義ではない。現実に生き躍動する生命の守り方が目的だから、五官にふりまわされず正しく生きることであり、この意味からとどまる止とは、正定(八正道の最後の規範)を通してこれまでの生き方を反省するということになる。
지관(止観)의 지(止)는, 생각(観,관점,견해)을 멈춘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전제인 상념을, 우선, 멈추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止)란 상념을 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법・불교는 현실부정의 허무주의가 아니다. 현실에 약동하는 살아있는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 목적이기 때문에, 오관에 농락당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며, 이 의미에서 멈춘다는 지(止)란, 정정(正定:올바르게 선정에 들어감)(팔정도의 최후의 규범)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생활태도를 반성한다고 하는 것이다.
そして、つぎに止観の観がつづいているので、反省を通してこれまでの誤った想念の動きを正しく軌道修正し、その結果、正しい見方が生じてくるということだ。止観の観はこの意味から二つの働きを指している。一つは、反省のための働きと、その結果の働きである。
그리고, 다음에 지관(止観)의 관(観)이 이어지고 있는데, 반성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잘못된 상념의 움직임을 올바르게 궤도수정하고, 그 결과, 올바른 견해가 생겨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지관(止観)의 관(観)은 이 의미에서 두 가지의 작용(활동)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는, 반성을 위한 작용(활동)과, 그 결과의 작용(활동)이다.
こうみてくると、止観の文字は大変な意味を含んでいることになる。それは心の安らぎ、不動心をもたらす智慧である。その智慧の涌現は、反省の正定を通さぬかぎりわき出てこ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이렇게 보게 되면, 지관(止観)의 문자는 대단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부동심을 가져오는 지혜이며, 그 지혜의 용현(샘솟음)은, 반성의 정정(正定:올바르게 선정에 들어감)을 통하지 않는 한 솟아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人間の行動の七、八割は感情によっている。怒り、憎しみ、嫉妬、愚痴、足ることを知らぬ欲望など。みな感情想念の働きである。感激、感動、感謝なども同じく感情だ。しかし、感情でもその出どころはちがう。自己本位の感情は前者であり、博愛の感情は後者である。
인간의 행동의 7할, 8할은 감정에 따르고 있다. 분노, 증오(미움), 질투, 우치(푸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등. 모두 감정상념의 작용(활동)이다. 감격, 감동, 감사 등도 똑같은 감정이다. 하지만, 감정이라고 해도 그 출처(출구)는 다르다. 자기본위의 감정은 전자이며, 박애의 감정은 후자이다.
毎日の私たちの行動をみると、自己本位の感情に左右されているところが非常に多い、努力の原動力が怒りや憎しみであったり、嫉妬であったりしている。
매일 우리들의 행동을 보면, 자기본위의 감정에 좌우되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노력의 원동력이 분노나 증오(미움)이거나, 질투이거나 하고 있다.
また、好き嫌いや人情で間違った方向に走ったり、虚栄や名誉、自己の立場にこだわり、苦しみをつくっている場合がいかに多いことか。そのために私たちは、心をますます曇らせ、正しい見方、考え方から離れている。
또, 호오(선호)나 인정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거나, 허영이나 명예, 자기의 입장에 구애되어, 괴로움을 만들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때문에 우리들은, 마음을 점점 흐리게 만들고, 올바른 견해, 사고방식에서 떠나 있다.
正しい見方とは智慧がわきでることである。止観の意義はそこにある。正定の反省を通して、苦しみ悲しみをつくり、心の眼をふさいでいる波立ちの多い感情を静め、博愛の感情を育てることなくして、どうして智慧が生じるだろう。
올바른 견해란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지관의 의의는 거기에 있다. 정정(正定)의 반성을 통해서, 괴로움 슬픔을 만들고, 마음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술렁임의 많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박애의 감정을 키우는 것을 잃고, 어떻게 지혜가 생길 것인가?
行動の大半を占める感情を調和させるには反省の正定しかない。〃とどまって観る〃止観こそ、心と生活を安定させ、調和させる唯一の道である。自分を愛するならば、まず生活の中に止観を生かして欲しい。
행동의 대부분을 점하는 감정을 조화시키는 데에는 반성의 정정(正定)밖에 없다. 〃멈추어 본다(멈추어 사물의 존재를 파악한다)〃는 지관(止観)이야말로, 마음과 생활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우선 생활 속에 지관(止観)을 살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執着から離れた生活
[집착에서 떠난 생활]
あの世とこの世のちがいは、この世の執着の有無にあるといえよう。本来、人の魂は生き通しの永遠の生命であり、思うことが現われる自由と創造の世界だけである。人の魂が肉体という乗舟に乗ると、肉体にまつわる執着に心がとらわれ、その執着心が魂を汚し、心の眼をふさいでしまう。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차이는, 이 세상의 집착의 유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사람의 영혼은 줄곧 사는 영원한 생명이며, 생각하는 것이 나타나는 자유와 창조의 세계뿐이다. 사람의 영혼이 육체라고 하는 배(乗舟)를 타면, 육체에 휘감기는(달라붙는) 집착에 사로잡혀, 그 집착심이 영혼을 더럽히고, 마음의 눈을 가로막아 버린다.
人の魂が、出生と同時に、盲目同然となるのは、周囲の状況、人の心の在り方が肉中心の生活に流されているためであり、幼い心もそれに染まり、盲目となってゆくからである。もし人びとの心が魂の永遠を知り、執着の重荷を悟るようになり、さまざまな習慣、思想、環境、教育がそうした方向に向けられるようになると、幼い心はそれに眼をひらき、盲目の人生を歩まないで済むようになろう。
사람의 영혼이, 출생과 동시에, 맹목(盲目, 사리에 어두운 눈)이나 다름없이 되는 것은, 주위의 상황, 사람의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육체 중심의 생활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며, 유치한 마음도 그것에 물들어, 맹목(盲目)이 되어 가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의 마음이 영혼의 영원함(永遠)을 알고, 집착의 무거운 짐을 깨닫게 되어, 여러 가지 관습, 사상, 환경, 교육이 그러한 방향으로 돌리게 되면, 유치한 마음은 그것에 눈을 뜨고, 맹목의 인생을 걸어가지 않고 해결이 될 것이다.
子どもの心は白紙であり、赤にも青にも染まってゆく。染めてゆく者は、ほかならぬ両親の生き方であり、大人たちの考えや行動にある。日和見の親には日和見の子ができようし、愚痴の家庭は不満分子を育てよう。子が親に似るのは、子が親の生き方を真似るからだ。
아이의 마음은 백지이며, 빨갛게도 파랗게도 물들어 간다. 물들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양친의 생활태도이며, 어른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있다. 기회주의의 양친에게는 기회주의의 자식이 완성되어 가고, 우치(푸념)의 가정은 불만분자를 키우게 된다. 자식이 부모와 닮은 것은, 자식이 부모의 생활태도를 모방하기(흉내내기) 때문이다.
こうしたさまざまな執着は、やがて人びとのカルマをつくり、肉体を脱ぎ去っても容易に離れることがない。苦しみはあの世に行ってからもつづく。その苦痛はこの世よりひどいものだ。なぜかというと、肉体があると肉体の環境が心の負担を軽くし、いっときまぎらわしてくれるからだ。たとえば、心配ごとがあって夜寝られないとする。すると、睡眠薬が心を眠らせる役を果たしてくれよう。また、あることに心が執着し苦しくなっても、環境が変わり視界が変わると、心の負担を忘れることができるではないか。こうしたことは根本的な心の転換にはならないが、しかし心を替える療法には役立つであろう。
이러한 여러 가지 집착은, 이윽고 사람들의 카르마(업)을 만들고, 육체를 벗어나도 용이하게 벗어날(떠날) 수가 없다. 괴로움은 저 세상으로 가고 나서도 계속된다. 그 고통은 이 세상보다 혹독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있으면 육체의 환경이 마음이 부담을 가볍게 하고, 잠시 얼버무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걱정하는 일이 있어서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수면제가 마음을 잠들게 역할을 다해 줄 것이다. 또, 어떤 일에 마음이 집착하고 괴롭게 되어도, 환경이 바뀌고 시계(視界:시야)가 바뀌면, 마음의 부담을 잊을 수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것은 근본적인 마음의 전환으로는 되지 않지만, 하지만 마음을 바꾸는 요법(치료법)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ところが、肉体のない心の世界は、心だけがすべてであり、肉体の習慣、執着を持ちこめば、その波動の渦のなかに自己を置くことになり、肉体の便法を借りたくても借りることができない。腹痛で苦しみながら死後の世界に入れば、その腹痛の苦しみがついてまわる。肉体のない自己を発見するまでその苦しみはつづく。肉体の苦しみ、心の悩みは、ほかならぬ肉の身を通しての執着め現れであり、これがあるうちは人の生命はすこやかに生きられないし、死後の世界は執着の分量に応じて厳しいものとなろう。
그런데, 육체가 없는 마음의 세계는, 마음만이 전부이며, 육체의 관습, 집착을 가지고 들어오면, 그 파동이 소용돌이 속에 자기를 두게 되어, 육체의 편법을 빌어 쓰고 싶어도 빌릴 수가 없다. 복통으로 시달리면서 사후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 복통의 괴로움이 어디까지나 따라다닌다. 육체가 없는 자기를 발견하기까지 그 괴로움은 계속된다. 육체의 괴로움, 고민(걱정)거리는, 다름 다인 육체의 몸을 통해서 집착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있는 동안은 사람의 생명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고, 사후의 세계는 집착의 분량에 응해서 엄격한 것이 될 것이다.
また、自己を愛するごとく人をいかに愛したか。これもまた、死後の世界の生き方を決めてゆこう。
또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이것도 또한, 사후의 세계의 생활태도를 결정해 갈 것이다.
人の生命は、肉体の生死にかかわりなく、生き通しの魂である。肉の世界には肉の生き方もあろうが、肉は心の映し世であり、肉のなかにあっても心に影をつくらぬ生き方が大事であろう。
사람의 생명은, 육체의 사후에 관계없이, 줄곧 사는 영혼이다. 육체의 세계에는 육체의 생활태도도 있을 것이지만, 육체는 마음을 비추는 세계이며, 육체 안에 있어도 마음에 그늘을 만들지 않는 생활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心に影をつくらぬ。つまり執着から遠離する。愛深き自己を悟る。そうするには、生まれてから今日までの想念と行為を洗い直し、執着の原因となるものを取り去ることだ。反省を通して心を軽くすることは、肉体をも軽くし、いまの生活を安心にし、死後の生活の安らぎにも通じてくる。
마음에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즉 집착에서 멀리 떠나간다. 사랑이 깊은 자기를 깨닫는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태어나고 나서 오늘까지의 상념과 행위를 재검토하고, 집착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반성을 통해서 마음을 가볍게 하는 데에는, 육체를 또한 가볍게 하고, 지금의 생활을 안심하게 하고, 사후의 생활의 평안에도 통하게 된다.
反省と調和の生活を忘れてはならない。
반성과 조화의 생활을 잊어서는 안 된다.
良き友を
[좋은 벗을]
日本は戦後の復興から平和と経済大国の二つを得たが、これから先もそうだとは必ずしもいえまい。経済大国であるがゆえに世界の耳目は日本に向けられ、世界の動きがそのまま日本の政治、経済、文化にハネ返ってくるからだ。
일본은 전후의 부흥에서 평화와 경제대국의 두 가지를 얻었지만, 앞으로도 그렇다고는 반드시 말할 수 없다. 경제대국이지만 고로 세계의 이목은 일본으로 향하고, 세계의 움직임이 그대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周恩来、毛沢東の死、朝鮮半島の不穏な動き、国内にあってはロッキードをめぐる政治の堕落。石油ショック以来低迷をつづける景気の先行きも、いっとき明るさを見せてはいるが、いつまた反動がやってこないともかぎらない。流動してやまない最近の動きは、ネコの目のようにめまぐるしい。
주은래(周恩来), 모택동(毛沢東)의 사망, 조선반도의 불온한 움직임, 국내에 있어서는 록히드(Lockheed)를 둘러싸는 정치의 타락. 석유쇼크 이래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을 계속하는 경기의 전망(장래)도, 일시 밝은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언제 또 반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몹시 유동하는 최근의 움직임은, 에고(이기주의)의 눈처럼 눈이 팽팽 돌 정도이다.
こうした激しい外界の動きを見ると、心まであわただしくなろう。
이러한 엄격한 세계의 움직임을 보면, 마음까지 분주하게 될 것이다.
ことに米・ソの軍備競争はますますエスカレートし、ボタン戦争の可能性を再び強めている。戦争は両国ばかりか、世界人類の破滅につながるが、経済と政治がからみ合い、そのうえ軍備競争による相互の不信感がつのってくれば、早い者勝ちの心理が働き、新兵器を駆使した戦争に突入するかもしれない。大戦を経験し、そのにがさを知った指導者が次々と交代している時期だけに、戦争の危険性はいちだんと強まったといえるだろう。
특히 미국・소련의 군비경쟁은 더욱더 단계적으로 확대해 가고, 재차 강화하고 있다. 전쟁은 양국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의 파멸로 이어지지만, 경제와 정치가 서로 관계되어, 더구나 군비경쟁에 의한 상호 불신감이 심해져 오면, 선착순(먼저 한 자가 유리한 심리)가 작용하고, 새로운 병기를 구사한 전쟁으로 돌입할지도 모른다. 대전(세계 2차대전)을 경험하고, 그 쓰라린 경험을 안 지도자가 잇달아 교대되고 있는 시기였던 만큼, 전쟁의 위험성은 한층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また異常気象による食糧生産の悪化は、これまた人を盲目にさせ、阿修羅、餓鬼に変えてしまう。人の心――想念はモノを創造するので、心の不安定なところほど食糧問題も深刻になろう。このように異常気象もまた戦争の引き金になる可能性をはらんでいる。
또한 이상기상(異常氣象)에 의한 식량생산의 악화는, 이일 또한 사람을 맹목(盲目)으로 하게 하고,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로 변해 버린다. 사람의 마음――상념(想念)은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며, 마음의 불안정한 때일수록 식량문제도 심각(深刻)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이상기상도 또한 전쟁의 원인(계기)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大戦防止の策は、地上の心ある人びとだけではない、実在界でも全神経をその面に向けており、一触即発の動きがあれば、それを防止する対応策が練られている。
대전(大戰: 특히 세계대전) 방지(防止)의 대책(策)은, 지상의 마음 있는(양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재계(実在界)에서도 모든 신경을 그 면으로 돌리고 있고, 일촉즉발의 움직임이 있으면, 그것을 방지할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다.
地上界は、このようにいたるところで黒雲が立ちのぼっているが、これを見て心まで曇らせてはならない。
지상계(地上界)는, 이와 같이 도처에 암운이 피어 오르고 있지만, 이것을 보고 마음까지 흐려져서는 안 된다.
正法を学ぶ者にとってなにより大事なことは、心を豊かにし、主体性ある調和の自己をつくるということである。さまざまな現象の動きに目を奪われ、耳をそばだてる前に、なにものにも動じない不動の心をつくることだ。外界の動きに心を失い、あわてふためくことがあれば、魔の跳梁にまたとない機会をあたえることになろう。
정법을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누긋하게 하고, 주체성이 있는 조화된 자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현상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기고(넋을 잃고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기 전에, 무엇에도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의 마음을 만드는 일이다. 외계(外界)의 움직임에 마음을 잃고, 허둥지둥하는(당황하는) 일이 있으면, 악마의 도량에 다시없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正法の基本は個を確立し、調和の心を周囲に及ばすことにある。人によってはこれが至難のワザとなるかも知れない。日常の場は業が渦巻く社会生活のなかにあるので、一人歩きはいよいよむずかしいものとなろう。
정법의 기준은 개인을 확립하고, 조화의 마음을 주위로 파급하는 데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지난(至難: 지극히 어려운)의 일(業)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장소는 업(業)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생활 속에 있는 것이며, 혼자 걷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そこで、心が通じ合う良き友を得ることがなにより大事なのだ。同志的つながりによって、たがいに切磋琢磨し合う場が必要なのである。また正法伝道の核として、神の意を全世界の人びとに理解してもらうためにも、そうした場が必要である。自己を向上させ周囲を調和させる唯一のよりどころとして、これを育て、エデンの園とされるよう人びとに求めたい。そして、なににもまして己れの心にエデンの園をつくり、永遠の生命を体得されたいのである。
그래서, 마음이 서로 통하는 좋은 벗을 얻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동지적(同志的)인 관계에 의해서, 서로 서로가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곳이 필요한 것이다. 또, 정법 전도의 핵(중심)으로서, 신의 뜻을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이해시켜 주기 위해서도, 그러한 곳이 필요하다. 자기를 향상시키고 주위를 조화시키는 유일한 지주(支柱)로 삼아, 이것을 키우고, 에덴 동산으로 삼도록 사람들에게 청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마음에 에덴 동산을 만들고, 영원한 생명을 체득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절차 탁마(切磋琢磨)
*학문과 덕행을 닦음, 서로 격려하고 노력함,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하다
人の心に死はない。肉体は無常だが、心は永遠に生き通しであり、常に向上してやまないものだ。激動常なき地上であっても、また戦争が人の心まで奪うことはない。全人類が外界の無常を悟り、心の安らぎを理解するよう働きかけねばならないだろう。
사람의 마음에 죽음은 없다. 육체는 무상하지만, 마음은 영원히 줄곧 살며, 늘 향상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덧없고 격동한 지상에서 있더라도, 또한 전쟁이 사람의 마음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 전인류가 외계의 무상함을 알고, 마음의 평안을 이해하도록 손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ボタン-せんそう ―さう 4 【―戦争】
ミサイル発射装置などのスイッチ-ボタンを押すことで開始し、かつ終了するような形態の戦争。軍事機構の高度な機械化・スピード化と核兵器などの発達により生じた戦争形態。
★버튼 전쟁
미사일발사장치 등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으로 개시하고, 동시에 종료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전쟁. 군사기구의 고도한 기계화・스피드화와 핵병기 등의 발달에 의해 생겨난 전쟁형태.
[奇 跡]
[기 적]
「汝の信仰、汝を救えり」
「너의 신앙으로, 너를 구제하라」
これはイエスの言葉である。いざり男がイエスに救いを求めた時に、イエスは立って歩けといった。いざり男は、長年歩けず苦しんでいる者が、どうして、立って歩けるかと、いぶかった。しかし、イエスはなおも「立て、歩け」と強くいった。いざり男は、イエスの言葉に心を動かされ、勇気をふるい起こして立ち上がり、そして歩き出した。いざり男は感激した。一生不具者として暗い生活を予想していたのに、奇跡が起こり、光明が五体を包んだからだった。
이것은 예수의 말이다. 앉은뱅이 남자가 예수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에, 예수는 서서 걸으라고 말했다. 앉은뱅이 남자는, 긴 세월 걸을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서서 걸을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예수는 더욱더 「서서, 걸어라」라고 강하게 말했다. 앉은뱅이 남자는, 예수의 말에 마음을 움직여, 용기를 불러일으켜서 일어서서,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앉은뱅이 남자는 감격했다. 일생 불구자로서 어두운 생활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기적이 일어나, 광명이 오체(온몸)를 걸치게 되었다.
「あなたは救世主だ。神だ――」
「당신은 구세주다. 신이다――」
いざり男は感激のあまり、そう口走った。ところがイエスは、
앉은뱅이 남자는 감격한 나머지, 그렇게 엉겁결에 지껄였다. 그런데 예수는,
「そなたの心がそなたを救った。わたしが救ったのではない」
「그대의 마음이 그대를 구원했다. 내가 구제한 것이 아니다」
と、いった。イエスの言葉にもかかわらず、いざり男は、
라고, 말했다. 예수의 말에도 불구하고, 앉은뱅이 남자는,
「でも、こうしてあなたの力とわざによっていざりが治った。どんな祈祷師もまじない師も、わたしの体を治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だから、あなたは神だ。あなたによって救われた」
と、いい張った。イエスは、静かにいった。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당신의 힘과 일(기법)로 인해서 앉은뱅이가 나았다. 어떠한 기도사(祈禱師)도 주술사(呪術師)도, 제 몸을 고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신(神)이다. 당신에 의해서 구원받았다」
と、いい張った。イエスは、静かにいった。
라고, 주장했다. 예수는, 조용히 말했다.
「いざりで苦しむ者はほかにもたくさんいるだろう。しかし、それらの者は今なお苦しんでいる。自らの病を治そうとしないからだ。そなたは勇気をもって、それをした。そなたの信仰が、そなたを救ったのだ」
「앉은뱅이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여전히 고생하고 있다. 스스로 병을 고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했다. 그대의 신앙이, 그대를 구원한 것이다」
イエスは、こうして、多くの人を救い、病をいやした。
예수는,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병을 고쳤다.
さて、今回のテーマは奇跡についてである。いざり男は奇跡によって救われたが、奇跡は自らを救う者にあたえられ、奇跡を求める者にあたえられ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点だ。病気になるには病気になる原因がある。原因・結果の関係は、太陽が東から昇り、西に没するのと同じように、やはり順序を経て現れるものである。したがって、病気という結果に対して、いたずらに、そこから逃れようとしてもダメであろう。
그래서(그런데), 이번의 테마(주제)는 기적에 관해서이다. 앉은뱅이 남자는 기적에 의해서 구제되었지만, 기적은 스스로를 돕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기적을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병에 걸리는 데에는 병에 걸리는 원인이 있다. 원인・결과의 관계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순서를 거쳐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병이라고 하는 결과에 대해서, 공연히, 거기에서 달아나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病気を治すには病気の原因を取り除く必要があるだろう。この場合のいざり男に奇跡が現れたのは、これまで、自分の心の中で「自分はいざりで立つことも、歩くことも出来ない」というかたくなな観念が支配していたからである。イエスは、その観念を男から取り除いてやった。それが奇跡となって現われた。
병을 고치는 데에는 병의 원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의 앉은뱅이 남자에게 기적이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 「나는 앉은뱅이로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다」라고 완고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관념을 남자에게서 제거해 주었다. 그것이 기적이 되어 나타났다.
ここで、なぜこのような問題を提起したかというと、信仰者の弊害として、いたずらに奇跡を求める傾向があるようであり、奇跡のない信仰は信仰でないような錯覚に陥っては困るからである。奇跡は、ある意味において、物の先取りである。したがって、奇跡を得た者は、ある意味では借財を背負ったことになり、その借財分だけ、人より多くの奉仕をしなければ奇跡の反作用が伴ってくるといえるからだ。
여기에서, 왜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했는가 하면, 신앙자의 폐해로서, 헛되이 기적을 구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여, 기적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닌 것처럼 착각에 빠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사물의 이자 등을 미리 받음이다. 따라서, 기적을 얻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빚(부채)을 짊어진 것이며, 그 빚뿐만 아니라, 남보다 많은 봉사를 하지 않으면 기적이 반작용이 동반해 온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奇跡には、原因・結果のプロセスを飛び越えたある要素が加味されており、未清算の部分が残されていることを知る必要があるだろう。いざり男が奇跡におぼれ、過信すると、前よりひどいいざりに舞い戻ってしまうだろう。いたずらに奇跡を求めず、法に通った生活こそが、奇跡のなかの奇跡ということを知ってもらいたい。
기적에는, 원인・결과의 프로세스(공정)을 뛰어넘는 어떤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아직 청산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앉은뱅이 남자가 기적에 정신이 팔려, 과신하면, 전보다 혹독한 앉은뱅이로 되돌아와 버릴 것이다. 헛되이 기적을 구하지 말고, 법에 맞는 생활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信は力]
[믿음은 힘]
人は誰しも目的をもって生きていよう。目的のない人は、まずいないと思われる。人の目的はさまざまであろうが、その要約された目的は仏国土ユートピアの建設である。もしも、この目的から外れた独善なり、野望なり、あるいは混乱と争いの不調和に陥るならば、目的が達成される前に、あるいは後において、目的に対する反作用が起こり、その目的に対して自覚をうながすことになるだろう。
사람은 누구든지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이다. 목적이 없는 사람은, 우선 없다고 생각된다. 사람의 목적은 다양할 것이지만, 그 요약된 목적은 불국토 유토피아의 건설이다. 만약, 이 목적에서 벗어난 독선이든지, 욕망이든지, 혹은 혼란과 싸움의 부조화에 빠진다면, 목적이 달성되기 전에, 혹은 나중에, 목적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 그 목적에 대해서 자각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作用と反作用は、法の定めによるからである。
작용과 반작용은, 법의 규정에 위하기 때문이다.
ともあれ、人は目的をもって生活するが、その目的達成の原動力はなにかといえば、ほかでもない、それは信であり、念である。つまり信念だ。信念は行為の原動力である。ものの成否のカギを握っていよう。信念がなければ、いかなる目的も、理想も果たし得ないし、人生という大目的からも外れてくるだろう。
어쨌든, 사람은 목적을 가지고 생활하지만, 그 목적달성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면, 다름 아닌, 그것은 믿음이며, 념(念)이다. 즉 신념이다. 신념은 행위의 원동력이다. 사물의 성부(성패)의 열쇠를 쥐고 있다. 신념이 없으면, 어떠한 목적도, 이상도 완수할 수 없고, 인생이라고 하는 큰 목적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ではなにゆえに、信は力なのであろう。信とは、エネルギーが集中されたものであり、カはすべて、エネルギーの集中の度合いを示すものだからである。
그럼 무엇 때문에, 믿음은 힘인 것일까? 믿음이란, 에너지가 집중된 것이며, 힘은 모든, 에너지의 집중의 정도(程度)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信が強ければ、力も強い。弱ければ、力もまた弱い。信の強弱によって、ものごとの成否が決められてゆく。このことは読者も日常経験されるところであろう。つまり、こうなると思うと、そうなってゆくだろう。これはなにも、肩をいからせ、がむしゃらに振舞うことではない。若いうちはそうなり勝ちだが、心の法を知り、安らいだ心が広がるほど、エネルギーが集中され、物事が成就してゆくものなのである。事実、信念をもって、こうなると力んでみても、心の片隅に不安があると、その力は減殺される。また、不安があると、肩をいからす恰好になってこよう。不安を打ち消すために、そうなってくるからだ。であるから、信念の要諦は、目的に向って、そうなると堅く思い、安らいだ心で行為するときに、いかんなく発揮されよう。
믿음이 강하면, 힘도 강하다. 약하면, 힘도 또한 약하다. 믿음이 강약에 의해서, 일체의 사물의 성부(성패)가 결정되어 간다. 이 일은 독자도 일상에서 경험을 하시는 바일 것이다. 즉,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고, 어깨에 힘을 주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젊을 때는 그러한 경향이 많지만, 마음의 법을 알고, 평안해진 마음이 확대될 수록, 에너지가 집중되어, 사물이 성취되어 가는 것인 것이다. 사실, 신념을 가지고, 이렇게 되려고 힘써 보아도, 마음의 한구석에 불안이 있으면, 그 힘을 감쇄된다. 또한, 불안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된다. 불안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의 요체는, 목적을 향하여, 그렇게 된다고 굳게 생각하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행위를 할 때에,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다.
信念は、往々にして、盲信や独善に陥る。信念はもともと、個人の心の問題であるからだ。そのため、自己の信念に対して、常に前進への反省が必要になってくる。
신념은, 이따금, 맹신이나 독선에 빠진다. 신념은 본래, 개인의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기의 신념에 대해서, 항상 전진하기 위한 반성이 필요하게 되어 온다.
私たちの生活は、人と人との関係のなかで行なわれるので、自己の信念が正しいものであるかどうか。その目的意識が人との調和を乱すとすれば、改めねばなるまい。
우리들의 생활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실시되는 것이며, 자기의 신념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지. 그 목적의식이 남과의 조화를 흐트러뜨린다고 하면, 좋게 고쳐야 할 것이다.
人の心を乱すとすれば、それはやがて、自分にふりかかってくるからである。
사람(남)의 마음을 흐트러뜨린다고 하면, 그것은 머지않아, 자기 자신에게 재난 등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こうして、人の信念は、反省を通して、いよいよ強固となり、不動のものとなってくるだろう。このときにおいて、私たちの信念は、偉大なる力を発揮し、人びとを教化してゆくだろう。
이래서, 사람의 신념은, 반성을 통해서, 점점 강고하게 되어, 부동의 것이 되어 올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우리들의 신념은,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사람들을 교화해 갈 것이다.
正法に裏打ちされた信念は、何者をも恐れぬ大きな輪となり、力となって、自信と勇気とを与えてくれるだろう。
정법에 뒷받침된 신념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큰 바퀴가 되어, 힘이 되어, 자신감과 용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正法は、信と行との生活である。信のない生活行為は、浮草同様、世のカルマの波に絶えず揺り動かされ、大事な一生を無為のうちにすごしてしまう。正法の理解が深まれば深まるほど、法の真実にふれ、まず、正しい調和の因果律にそった生き方をとるであろう。なぜなら、自分の未来は、現在の信と行との生活にかかっているからだ。
정법은, 믿음과 행위의 생활이다. 믿음이 없는 생활행위는, 부초와 같이, 세상의 카르마의 파도에 끊임없이 흔들리게 되어, 중요한 일생을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 버리게 된다. 정법의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법의 진실에 접하고, 우선, 올바른 조화의 인과율에 따른 생활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미래는, 현재의 믿음과 행위의 생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この意味において、反省を通した正しい信念をもって、毎日の生活を送って欲しいものである。
이 의미에서, 반성을 통한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매일의 생활을 보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助 力
[조력]
正法は自力である。なぜなら、人間は神の子であり、原因・結果の因縁因果は、すべて自分の想念と行為にあるからである。因縁因果を超えるには、善念を起こし、勇気と努力をもって自分を変えていくしかない。守護霊の助力は、そうしたときに働き、私たちを導いてくれる。
정법은 자력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자녀이며, 원인과 결과의 인연인과는, 전부 자신의 상념과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인연인과를 초월하는 데에는, 선한 생각을 일으키고, 용기와 노력을 가지고 자신을 바꿔가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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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近、ややもすると、こうした自力の精神を忘れ、いたずらに固有の天使の名を呼び、助力を求める傾向があるのは遺憾である。もちろん、天使の名を心に思い、求めれば、手を貸し与えてくれることもあろうが、しかしそれによって奇跡が起こり、急場をしのいだとしても、病気の原因を根本的に改めないかぎり、また同じような、あるいは、ちがった形で病いをつくり出していくだろう。
최근, 흔히, 이러한 자력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공연히 고유의 천사의 이름을 부르고, 도움을 청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유감이다. 물론, 천사의 이름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청하면, 도와 주는 일도 있을 것이지만, 하지만 그것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나고, 위기를 넘긴다고 해도, 질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 한, 또 같은, 혹은, 다른 형태로 병을 다시 만들어 갈 것이다.
自身をかえりみることなく、固有の天使の助力を求めることは、それはとりもなおさず他力の所業であり、他力はやがて欲望充足の道具と化してしまう。このことは、自身を守っている守護霊をいたずらに口にする場合も同じことである。
자신을 돌이켜 보는 일 없이, 고유(固有)의 천사(天使)의 조력(도움)을 청하는 일은, 그것은 곧 타력의 소행이며, 타력은 이윽고 욕망충족의 도구로 변해 버린다. 이러한 일은, 자신을 지키고 있는 수호령(수호천사)을 공연히 입에 올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ただ守護霊の場合は、その人を専任で守護し、指導をしているので、純然たる指導霊ないしは天使とは趣きが異なる。したがって、なにかあった場合、助力を求めたいときは守護霊の名なり、祈願文を唱えるなりして助力を求め、決して固有の天使の名を口にし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
다만 수호령의 경우는, 그 사람을 전임(專任: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맡음)해서 수호(守護)하고, 지도(指導)를 하고 있는 것이고, 순연한(純然:순전)(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아니하고 제대로 온전한) 지도령(指導靈)내지는 천사(天使)와는 느낌[분위기]이 다르다. 따라서, 무슨일이 있는 경우,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는 수호령의 이름, 소원문을 외우거나(소리내어 읽거나)해서 도움을 청하고, 절대로 고유의 천사의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원문은 ☜ 이미 올렸습니다. 여러분^^「心行」심행에 대해서..『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高橋信次) 2010/2/23 제목입니다. 이 안에 있습니다.
ユダヤ教のヤーヴェー(キリスト教ではエホバともいう)も、このことを再三注意している。注意の趣旨は、自身をかえりみることなく、いたずらに助力を求める傾向が強くなると、信仰自体が他力と化してしまうこらである。
유대교의 야훼(그리스도교에서는 에호바[여호와]라고도 말한다)도, 이름을 부르는 것을 누차 주의하고 있다.
주의(注意)의 취지(趣旨)는 자신을 돌이켜보는 일(반성) 없이, 공연히 도움을 청하는 경향이 강하게 되면, 신앙 자체가 타력으로 변해 버리는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너희는 망령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귀절이 있습니다>
また、天使も地上の人びとが求めれば、他の重要な仕事をおいても、その声に耳をかさねばならなくなり、それが時には、より多数の人びとを犠牲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も起きてくるからだ。それだけに、自分の都合のみを願って、固有の天使の名を口にし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
또, 천사도 지상의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다른 중요한 일을 재쳐두고, 그 음성에 귀를 귀울리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이 때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정(형편;편의)만을 바래서, 고유의 천사의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人の心は一つにつながっている。そのつながりは、自身の守護霊であり、ついでその守護霊の親しい友人、先輩なりの指導霊であり、さらにそれにつながる天使の指導霊、そして大指導霊とつながる。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맺어지고[통하고] 있다. 그 관계는, 자신의 수호령(守護靈)이며, 뒤이어 그 수호령의 친한 친구(友人)이며, 선배(先輩)인 지도령(指導靈)이며, 나아가 그것으로 이어지는 천사(天使)의 지도령(指導靈),그리고 대지도령(大指導靈)과 연결된다.
こうして人の心は、光の子として、すべて一つにたばねられている。それゆえ、助カを求める手順は、まず自身の守護霊であり、守護霊が経験不足の場合は、守護霊から指導霊なり天使なりに連絡される。そうして、本人が知らない間に(自覚している者もあろう)、指導霊なり天使の助力が行なわれ、それが時として奇跡となって現われたり、智慧の発現として、その人を助けるようになる。
이렇게 해서 사람의 마음은, 빛의 자녀로서, 모두가 하나로 묶어져 있다. 그러므로, 도움을 청하는 절차는, 우선 자신의 수호령이며, 수호령이 경험 부족의 경우는, 수호령에게 지도령이 되는 천사로 연결된다. 그렇게 해서,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자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도령이 되는 천사의 도움이 행해지고, 그것을 시점으로 해서 기적이 이루어져 나타나거나, 지혜의 발현으로서, 그 사람을 돕게 된다.
しかし、こうした助力というものは、日頃の本人が努力しているか、誠実、真実に生きているかどうかによって、大いに変わってくる。つまり、指導霊の助力の根底にあるものは、他力でなく自力の精神であるからだ。他力の行き方は、本来の人間性を否定し、神の子の創造力を曇らせる。
하지만, 이러한 도움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의 본인이 노력하고 있는가, 실천,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 어떤가에 의해서, 크게 바뀌어 온다. 즉, 지도령의 도움의 밑 바탕에 있는 것은, 타력이 아닌 자력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타력의 행동방식은, 본래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신의 자녀로서의 창조력을 흐리게 한다.
神は、自分を愛する者を愛し、自己の神性を否定する者を拒否する。人は神の子であり、自分を愛せない者は神を否定し、人を愛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だ。この意味においていたずらに現実の現象、奇跡のみに心をとらわれ、自らを省みない行為は、厳に慎んでもらいたいものである。
신(神)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자기의 신성(神性)을 부정(否定)하는 자를 거부(拒否)한다. 사람은 신(神)의 자녀(子)이며,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신(神)을 부정(否定)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쓸데없이 현실의 현상(現象), 기적(奇跡)만에 마음을 얽매여,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지 않는(반성하지 않는) 행위(行爲)는, 엄중히 조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調和と妥協]
[조화와 타협]
私たちがこの世で生きて行くうえには、さまざまな心理的な苦悩なり喜びがある。調和か妥協か。あるいは自分の意を通そうとして空中分解か。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다양한 심리적인 고뇌(苦惱)라든가 기쁨이 있다. 조화라든가 타협이든지. 혹은 자기 자신의 뜻을 통하게 하려고 공중분해하든가.
そこで、調和と妥協の是非について、あらためて見直し、正法を生かすうえに、どのようにして人間関係をみつめ、魂の進化に役立てるかについて、簡単にふれてみたいと思う。
그래서, 조화와 타협의 시비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살펴보고, 정법을 되살리는 데에, 어떤 식으로 해서 인간관계를 주시하고, 영혼의 진화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해 보고 싶은 생각이다.
調和と妥協を天秤にかけると、調和とは双方の比重が同じ重さにバランスされ、均衡を保っている状態を指すものと思うし、妥協はそのどちらかに比重がかかり、重さがアンバランスになっている状態と考えられる。調和は、おのおのが譲り合った、心に抵抗のない、そして仮にあったとしても重さが平均化され、共通の立場に常に立つことをいうのであろうし、妥協は、その重さの分だけ、いつかは一方に返さ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意味していよう。
조화와 타협을 저울질하면, 조화란 쌍방의 비중이 같은 무게에 균형이 잡히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타협은 그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무게가 불균형하게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조화(調和)는, 각자가 서로 양보하고, 마음에 저항(抵抗)이 없는, 그리고 설사 있었다고 해도 무게가 평균화(平均化)되어, 공통(共通)의 입장(立場)에 항상 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타협(妥協)은, 그 무게의 부분만큼, 언젠가는 한 방향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의미(意味)하고 있는 것이다.
もう少し具体的にいうと、たとえば、若い頃は夫や家族に妥協してきた妻が、歳をとるにしたがって、心の中に詰めこんだ重荷を外にはき出すことによって、夫や家族に激しく当たり、家の中を暗くしてゆく。これは妥協のヒズミが生じてきたのである。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를 들어, 젊은 시절은 남편이나 가족에게 타협해 왔던 아내가, 나이가 듦에 따라서, 마음속에 쑤셔 넣었던 무거운 짐을 밖으로 내뱉는 것에 의해서, 남편이나 가족에게 심하게 대하고, 집안을 어둡게 해 간다. 이것은 타협의 비뚤어짐이 생겨나왔던 것이다.
最近は、妻の立場が強くなり、男のワンマンの弊害が少なくなったが、しかし、双方が言いたいことを言い、調和も妥協すらもないわがままが、一方通行のかたちで激しく通り過ぎていくケースが多い。
최근에는, 아내의 입장이 강하게 되어, 독재적인 남편의 폐해가 적어졌지만, 하지만, 쌍방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조화도 타협조차도 않고 제멋대로 굴지만, 일방통행의 형태로 심하게 지나가는 케이스(경우)가 많다.
妥協には心理的な我慢が伴い、苦しみとなって、その人を責める。妥協の全然ない生活が望ましいが、現実は、なかなかそうはいかない。
타협에는 심리적인 아만(참음, 눈감아줌)이 따르고, 괴로움이 되어, 그 사람을 닦아세운다(그 사람을 책망한다).
타협의 전연 없는 생활이 아쉽지만, 현실은, 좀처럼 그렇게는 안 된다.
というのは物事は相対的であって、調和も妥協もその中でしか発生しない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ある時は理解できず、ある時は不満が心に残り、またある時は怒りに揺れよう。問題はそうしたときに、いつまでも妥協の気持を心に残すか、残さぬかにかかってくる。
그렇다고 하는 것은 사물은 상대적이며, 조화도 타협도 그 속에서밖에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때는 이해할 수 없고, 어떤 때는 불만이 마음에 남고, 또한 어떤 때는 분노로 동요하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때에, 언제까지나 타협의 기분을 마음에 남겨 두는가, 남겨 두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妥協の重荷をかかえ、苦しみを持続させるとそれがいつかは爆発し、争いになるであろう。人間生活の賢い生き方は、妥協すべきときは妥協すべきだ。だがその妥協をいつまでも心の中に持ち込まず、それを材料に自分の心の調和に持って行くべきである。相手と調和されれば理想だが、物事によってはそうはいかない。人相がちがうようにその考え方も十人十色であるからだ。
타협의 무거운 짐을 안고, 괴로움을 지속시키면 그것이 언젠가는 폭발하고, 싸움이 될 것이다. 인간생활의 현명한 생활태도는, 타협해야 할 때는 타협해야 한다. 하지만 그 타협을,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끌고 가지 않고, 그것을 재료로 자기 자신의 조화로 가져 가야 할 것이다. 상대와 조화할 수 있으면 이상적이지만, 매사에 있어서는 그렇게 안 된다. 인상(人相)이 다른 것처럼 그 사고방식도 십인십색(十人十色)이기 때문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 색깔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사람마다 생김새, 기호, 취미, 생각 등이 제각기 다름을 이르는 말
そこで、物事の成り立ち、不満の原因、怒りの理由を平静にながめ、相手を許せる愛の心、調和に昇華させることである。調和は主観的には忍辱という柱が基本になるが、理想は、たがいに譲り合える共通の心にある。だが、実際には忍辱というかたちになるであろうし、その忍辱も、妥協の気持を材料に進化させれば、妥協の重荷は調和に変わっていくであろう。
그래서, 일체의 사물의 성립, 불만의 원인, 분노의 이유를 평온하게 바라보고, 상대를 용서하는 사랑의 마음, 조화(調和)로 승화(昇華)시키는 것이다. 조화는 주관적으로는 인욕(忍辱)이라고 하는 지주(支柱)가 기본이 되지만, 이상(理想)은, 서로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공통의 마음에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욕(忍辱)이라고 하는 형태가 될 것이고, 그 인욕(忍辱)도, 타협의 기분을 재료로 진화시키게 되면, 타협의 무거운 짐은 조화로 바뀌어 갈 것이다.
[自由と愛]
[자유와 사랑]
日本国憲法にはさまざまな自由が保証されている。いわく思想の自由。信教の自由。集会、結社、言論、出版の自由。居住、移転、職業選択の自由。外国への移住、学問の自由。このほかさまざまな権利が保証されている。
일본국 헌법에는 다양한 자유가 보증되어 있다. 가라사대 사상의 자유. 신교(신앙)의 자유.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 거주, 이전, 직업 선택의 자유. 외국으로의 이주, 학문의 자유. 이 외에 다양한 권리가 보증되어 있다.
わが国は世界でも例をみないほどの人間尊重の自由な国である。憲法という国の基本法によって私たちの生活は誰からも、どこからも拘束されず、自由を享受するよう保証されている。
우리나라(일본)은 세계에서도 예를 볼 수 없을 정도의 인간 존중의 자유로운 나라이다. 헌법이라고 하는 나라의 기본법에 의해서 우리들의 생활은 아무에게도, 어디에서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를 향수하도록 보증되어 있다.
しかし、さて、現実の生活において、それでは憲法で保証されるほど自由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い。家を建てるにも大変な金がかかる。引越しを三度もつづけようものならサラリーマンなら貯金を使い果たしてしまうだろう。職業選択の自由といってもそう簡単にはゆかない。
하지만, 그런데, 현실 생활에 있어서, 그렇다면 헌법으로 보증되는 만큼 자유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다. 집을 짓는 데에도 상당한 돈이 든다. 이사를 두 번이나 연달아 하는 것이라면 봉급 생활자라면 저금(貯金)을 다 써버릴 것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라고 말해도 그렇게 간단하게는 안 된다.
実際の生活は憲法の保証にもかかわらず、不自由であるというのが実情である。このように私たちの実際の生活は不自由であり、本質的に不自由にできているのが人間なのである。憲法の保証は、人間は法の前に平等であるがゆえに人間固有の権利と自由性を認めようとしているわけである。
실제의 생활은 헌법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부자유하다고 하는 것이 실정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실제의 생활은 부자유하며, 본질적으로 부자유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헌법의 보증은,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한 상태로 인간 고유의 권리와 자유성(自由性)을 인정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本来、人間の自由性は心の姿をいうのであり、肉体はもともと不自由なものである。この不自由な肉体と自由な心を持って人間は生活するものだから、ここにさまざまなギャップが生じ、混乱が絶えないわけである。つまり、憲法の保証を文字通り解釈し、肉体生活の上に現わそうとすると、随所に衝突が起こり争いになってくる。
본래, 인간의 자유성은 마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육체는 본래 부자유한 것이다. 이 부자유한 육체와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인간은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여러 가지 갭(gab, 격차)이 생기고, 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즉, 헌법의 보증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육체 생활의 상에 나타내려고 하면, 도처에 충돌이 발생해서 싸움이 되게 된다.
肉体を持つ人間がこの地上界において、心の自由性を肉体の上に百パーセント発揮することは通常は絶無である。そうするには肉体から魂が抜け出すか、あるいはあの世に帰らないかぎり不可能だろう。奇跡として、いっときはできても永続的には不可能なことなのだ。
육체를 가지는 인간이 이 지상계(地上界)에서, 마음의 자유성을 육체 위에 백 퍼센트 발휘하는 것은 통상은 전혀 없다. 그렇게 하려면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 나오든가, 혹은 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기적이라고 해서, 잠시는 가능해도 영속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とすると、不自由な肉体人間が法に適った調和をめざすにはどうすればよいかといえば、それは、愛しかないといえる。つまり不自由な人間同志が互いに助け合い、補い合う生活である。相手を認めて、互いに他を生かし合う相互扶助の生活である。
그렇다면, 부자유한 육체 인간이 법에 들어맞는 조화를 목표로 하는 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면, 그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자유로운 인간 동지가 서로가 서로 돕고, 서로 모자란 것을 채워주는 생활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서로가 다른 사람을 서로 되살리는 상호협조의 생활이다.
こうすることによって、不自由な人間社会は着実に個の自由性を生かすことになってくる。愛の生活もなく、それぞれが自己主張し合う社会は、たがいに相手を傷つけ、自分もまた傷つき、得るものはなにもない、ということになろう。
이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 부자유한 인간사회는 착실하게 개인의 자유성을 발휘하게 된다. 사랑의 생활도 없고, 각자가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사회는, 서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 자신도 또한 상처를 받고,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하게 될 것이다.
自由思想の動機が圧政からの解放にあったとしても、その根本をなすものはやはり人間の解放であり、その解放はまず愛の行為から始まるということを認識すべきであろう。
자유사상의 동기가 압정에서의 해방에 있었다고 해도, 그 근본을 이루는 것은 역시 인간의 해방이며, 그 해방은 우선 사랑의 행위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知識と知慧]
[지식과 지혜]
新年を迎えると誰しも新春にふさわしい気慨に心が引きしまるものだ。少なくとも正法を信じ、正法こそ人間の生き方と思い至れば、自己の向上を願うのは当然のことである。
신년을 맞이하면 누구나 신춘에 어울리는 마음이 긴장되는 것이다. 적어도 정법을 믿고, 정법이야말로 인간의 생활태도라고 생각이 이르면, 자기의 향상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そこでみなさんに希望したいことは、これまで得た知識を智慧に変えて欲しいということである。知識が知識のままではなんの意味も持たない。知識が智慧に変わってこそ、正法が身についたといえる。
그래서 여러분에게 희망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얻은 지식을 지혜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 지식이 지식인 채로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지식이 지혜로 바뀌어야만, 정법이 몸에 베었다고 말할 수 있다.
いったい智慧とはなにかというと、物事を正しく処理する能力をいう。普通は正しく処理する能力に欠けるために、迷いや、苦しみがおこってくる。私たちの周囲は時々刻々変化してやまない。歴史は繰り返すというが、今日は昨日の延長ではないために、新しい事象に右往左往してしまう。正しい智慧が働けば、ネコの目のように変わる世事に心を動かすことは少なくなるであろう。
도대체 지혜란 무인가 하면, 사물의 현상(일, 매사)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능력을 말한다. 보통은 올바르게 처리하는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방황이나, 괴로움이 일어난다. 우리들의 주위는 시시각각 몹시 변화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만, 오늘날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사실과 현상)에 우왕좌왕해 버린다. 올바른 지혜가 작용하면, 몹시 변덕스러운 세상의 일에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적어질 것이다.
知識とは文宇通り、物事に対する認識である。認識が深まれば物事に対処できると思いがちだが、この認識は思慮分別の認識であり、これでは智慧とはなり得ない。知識が智慧となり得るには、その知識を実際に応用しなければ智慧として身につかない。
지혜란 문자 그대로, 사물의 현상(일, 매사)에 대한 인식이다. 인식이 깊어지면 사물에 현상에 처리할 수 있다고 곧잘 생각하지만, 이 인식은 사려분별의 인식이며, 그래서는 지혜란 것을 얻을 수 없다. 지식이 지혜가 될 수 있는 데에는, 그 지식을 실제로 응용하지 않으면 지혜로서 익숙해지지 않는다..
換言すれば実践によってのみ、知識が智憲に変わってくる。
바꾸어 말하면 실천에 의해서만, 지식이 지혜로 변하게 된다.
ふつう物事を考える、思うことは頭脳で行なう。その考えがいろいろ多くのことにおよぶと頭のシンが痛くなり、疲れを覚えよう。ところが、パラミタ(智慧)はそうではない。頭ではなく、腹部のあたりから泉のように湧いてくるものだ。それこそ今世で学ばなかったことでも湧いてくる。
보통 사물의 현상을 지적으로 생각하고,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두뇌로 행한다. 이 생각이 여러 가지 많은 것에 이르면 머리의 (종교상 도덕상의) 죄(Sin)가 아프게 되어, 피로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파라미타(波羅蜜多)((지혜智慧)는 그렇지 않다. 머리가 아니라, 복부 근처에서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번 생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이라 해도 솟아나온다.
昔の人は頭で考えるな、肚で考えよといった。いかにも東洋人的な言いまわしだが、智慧というものも、頭でなく腹から浮んでくるものだ。智慧は知識の範囲をはるかに超えて、それこそ、自由自在である。その応用は多岐にわたり、無限の広さを持っている。百年かかって博学を身につけても智慧にはなり得ない。智慧は心から湧き出ずるものだし、知識は頭で理解するものだからである。
옛날 사람은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배꼽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과연 동양적인 표현이지만, 지혜라고 하는 것도, 머리가 아니라 배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고, 그것이야말로, 자유자재이다. 그 응용은 여러 갈래에 걸쳐, 무한한 범위를 가지고 있다. 백 년 걸려 박학(博学)을 습득해도 지혜로는 될 수 없다. 지혜는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이고, 지식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私たちが正法を頭(知識)で理解したならば、まず現実の生活にそれを活かしてみることだ。八正道という法を心と行ないで実践することだ。そうすると、知識では割り切れない智慧が浮んできて、物事を正しく処理できる能力が自然と備わり、迷うことが少なくなってくる。
우리들이 정법을 머리(지식)으로 이해했다면, 우선 실천의 생활에 그것을 활용해 보는 일이다. 팔정도라고 하는 법을 마음과 행위로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지식으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지혜가 떠올라, 사물의 현상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자연히 갖추어져, 방황하는 일이 적어지게 된다.
知識を智慧に変える実践に努力して欲しい。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실천으로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
[愛]
[사랑]
愛とはなにかというと大抵観念的、抽象的、あるいは幻想的に考えがちだ。近頃はまた肉体的行動が愛だと思っている者も相当にいるようである。そこでいったい愛とはなにかということを追求してゆくと、愛とは助け合うことであり、他を生かすということにつきる。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면 대체로 관념적, 추상적, 혹은 환상적으로 곧잘 생각한다. 최근은 또 육체적 행위가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추구해 가면, 사랑이란 서로 돕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되살린다고 하는 것밖에는 없다.
この地上界は自分独りでは立つことができない。常に複数の関係の中で相互に働きかけながら他を生かすこと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現われの世界(地上界)は意識界とは異なり、こうした相互作用の関係の中で生かされ、それは否定しようとしても否定できないものなのだ。
이 지상계(地上界)는 자기 혼자서는 설 수가 없다. 항상 복수(複數;둘 이상의 수)의 관계 속에서 서로가 손쓰면서 남을 살리는 것에 의해서 성립하고 있다. 모습의 나타난 세계(지상계地上界)는 의식계(意識界)와는 달리, 이러한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 소생되며, 그것은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인 것이다.
他を生かすとは自分の身を他に供養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私たちは動物、植物、鉱物を口に入れることによって生きている。つまり、それらの身の供養がなければ、私たちは一日として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魚や野菜、飲料水は、これみなことごとく生命を待ち、私たちにその身を投げ出している。私たち人間関係についても、さまざまな職業、仕事を通して他を生かしている。
"남을 살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他)에게 공양(供養)한다", 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동물(動物), 식물(植物), 광물(鑛物)을 먹는 것에 의해 살고 있다. 즉, 그들의 몸의 공양이 없으면, 우리들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다. 생선이나 야채, 음료수는, 이 모든 전부가 생명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그 몸을 내던지고 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직업, 일을 통해서 남을 살리고 있다.
この地上に混乱が絶えないのは、これに欲望がからみ、欲に心が奪われるからである。他を生かす、助け合う愛の行為に心が定まれば、明日にでもこの地上は仏国土となろう。
이 지상에 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것에 욕망이 얽혀, 욕심에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이다. 남을 살리고, 서로 돕는 사랑의 행위에 마음이 정해지면, 내일(明日)이라도 이 지상(地上)은 불국토(佛國土)가 될 것이다.
愛というとイエスがすぐ浮かぶ。イエスが十字架の露となったのは、愛の行為を示すためであった。他を生かすための死は愛の極限だからである。
사랑이라고 하면 예수(Jesus)가 곧 떠오른다. 예수가 "십자가(十字架)의 이슬(露)"이 된 것은, 사랑의 행위를 내보이기 위함이었다. 남을 살리기 위한 죽음은 사랑의 극한(極限: 맨 끝)이기 때문이다.
イエスは愛を説き、人々にそれを求めた。愛は慈悲という神の心を行為によって現わすことなのだが、当時の人たちはそれをいくら語っても理解してくれなかった。
예수(Jesus)는 사랑을 설법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청했다. 사랑은 자비(慈悲)라고 하는 신(神)의 마음을 행위(行爲)로 나타내는 것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리 말해도 이해(理解)해 주지 않았다.
死は間近に迫ったが、それをさけようとすればいくらでもさけられた。だが、イエスは敢てそれをしなかった。愛の証しはその身を供養(死)することによって果たされるからだった。
죽음은 곧 임박했지만, 그것을 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감히 그것을 하지 않았다. 사랑(愛)의 증명(証し)은 그 몸을 공양(사망)하는 것에 의해서 달성되기 때문이었다.
十字架の人となったときイエスは、罪人を含めて地上の人たちに、神の恵みと許しを求めている。イエスの愛はかくして全世界に伝わるが、この言葉によってイエスが全人類の罪を背負ったと喧伝されることになる。そうしてイエスを信ずる者は救われるとなってしまった。
십자가의 사람이 되었을 때 예수는, 죄인을 포함해서 지상의 사람들에게, 신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고 있다. 예수의 사랑은 이리하여 전세계에 전해지지만, 이 말에 의해서 예수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졌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고 해 버렸다.
イエスを信ずるとは、愛を信ずることである。愛を信ずれば、愛の行為がなければ観念の遊戯になってしまう。愛は行為だからである。胸にいくら十字を切ったところで救いにはならない。イエスの行為をみればわかるはずである。また信は念を生み出し、念は行為につながってくる。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다. 사랑을 믿으면, 사랑의 행위가 없으면 관념의 유희가 되어 버린다. 사랑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아무리 십자가를 그려보았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믿음은 염원(念)을 낳고, 염원(念)은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それゆえ、愛を信ずるならば、行為が生まれてくる。行為のない信などというものは、ないのである。
그러므로, 사랑을 믿는다면, 행위가 태어나게 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출처 : http://yuki0syouron.seesaa.net/
이것으로, 2016년 11월 04일 금요일 오전 7시 20분에, 올립니다.
청주시(淸州市) 안덕벌(安德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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