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색심불이(色心不二)..이말은 천태지의란 분이 말이다.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색심불이(色心不二)..이말은 천태지의란 분이 말이다.

어둠의골짜기 2009. 11. 18. 01:57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영혼이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색심불이(色心不二), 즉 육체와 영혼이나 물질과 정신은 하나이다. 영혼과 육체는 각기 차원이 다른 세상의 존재이지만 이세상에서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서 육체 혼자 존재할 수가 없고 영혼만 존재할 수도 없다. 전혀 차원이 다른 두 존재가 결합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영혼이 육체라는 배를 타고 삶의 항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에너지와 물질의 관계와 같지만, 다른 점은 에너지는 물질이 없으면 자율적인 의지를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가 되는 세포 집단으로 각 세포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고, 그 세포들은 에너지의 보급을 받아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의 세포들은 저마다 의식을 갖고 있지만 단독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점이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 않고 공중에 떠다니는 전파 에너지는 수신기라는 물질을 만나야만 그 기능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이치와 같다.
 

  그처럼 육체 역시 지배자인 의식이 작동해야 비로소 그 의지에 따라 몸의 기능을 할 수 있다. 그처럼 육체는 어디까지나 영혼의 나룻배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을 수행하는 인생의 나룻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신불과의 약속에 따라 여자의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조화를 이루어 생명이 형성된다.

 

  그렇게 탄생된 육체는 신불의 뜻에 따라 생식 본능이 부여되어 자손 보존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이세상에 수행을 위해 내려운 것인만큼 육체라는 나룻배를 타지 않고서는 인생을 항해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신은 자신의 몸체인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마음과 마음의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도록 만물을 조성해 주었다. 그 이유는 조화로운 삶을 이루라는 뜻이다. 따라서 투쟁과 파괴는 신의 뜻이 아니다. 사람은 전생에서 지은 자신의 업보를 이세상에서 치르고 바꾸어, 보다 고차원의 세계로 진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이유와 죽는 이유가 있다.

 

  아주 중요한 대목이므로 다시 한 번 정리하겠다.
 
  인간이 이세상, 즉 우리가 사는 현상계에 태어나는 이유는 각기 전생에서 지은 죄의 업보를 치르고 보다 향상된 저 세상, 즉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실재계에 가기 위해 수행을 하려 육체라는 껍데기를 빌러 이세상에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의 진짜 삶은 현상계 이후의 내세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육안에 보이는 육체적 현상에서 신앙의 대상을 구해 왔다. 그 결과 육체 조상이 전부인양 생각하여 영혼까지도 육체 조상이로부터 물러 받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신앙은 조상에게 멋진 묘지와 성대한 제사를 통해서 조상을 성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손들도 덕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불교는 장례 불교, 재(齋) 의식에 빠져버렸다.

 

  일종의 교주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런 좁은 소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엉터리 교리를 광신하고 있는 신자들 역시 많다. 신앙심이란 어떤 특정 장소에 가서 특정한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나 절에 가서 예배를 보거나 예불을 올리는 것이 신앙심이 아닌 것이다.

 

  생활 속에서 생각과 행위를 늘 반성하면서 감사와 은혜의 보답으로 중용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예수나 석가가 조상을 예배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우리들은 조상과 부모의 인연에 의해서 육체를 부여 받고 있으므로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되지만 그 감사의 표현은 보은의 행위로써 보답해야 한다.

 

  형제, 자매가 의좋게 생활하는 것도 그 효행의 하나요, 정신적, 경제적으로 조화된 생활을 누리는 것도 보은의 하나다. 죽은 육체 조상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좋은 묘지와 융숭한 불공을 바라는 조상이 있다면 이런 조상은 100% 지옥에 있다.

 

  만일 조상이 지옥에 떨어져 있을 경우에도, 살아 있는 자손들이 그 조상을 향하여 육체 생활을 하던 당시의 마음 상태, 사명, 목적 등을 잘 설명해 줌으로써 그 조상의 방황하는 마음의 구제, 천도해 줄 수 있다. 불경의 뜻도 모르는 죽은 분들에게 어려운 경문을 외워 공양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 상대를 이해시키지 않고서는 개과, 천도시킬 수 없다.

 

  이세상에 널리 있는 묘지나 불단, 제단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영들은 100% 지옥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들이기 때문에 가족의 부조화한 상념에 빙의해서 집안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

 

  그럴수록 살아 있는 가족들이 신리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안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 조화가 깨져 악령을 불러들이게 된다. 죽은 조상의 영에게 이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으뜸 가는 공양이다.

 

  가족들이 정법에 귀의해서 빛이 충만한 즐거운 가정을 꾸미게 되면 죽은 망령들도 이것을 보고 깨닫게 된다. 불단만이 공양의 장소가 아니다. 한편 깨달은 조상의 영은 현상계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아무 재앙이 없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생활해야 하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이세상에 집착하여 방황하고 있는 영들에게 우리는 빙의되어서는 안 된다.

 

  정법을 실천하고 있으며 몸은 신불의 빛에 싸여 보호를 받게 되므로 부조화한 영들에게 빙의될 리 만무하다. 악령에게 빙의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 진심으로 명상적 반성을 실천할 때 우리의 의식은 신불의 빛에 싸이므로 부조화한 영들도 그 빛에 의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조상은 예배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대상으로 보은의 공양이 바람직하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도,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은의 공양인 것이다. 현대 종교의 많은 부분이 조상 신앙으로 타락하여 신심의 근본도 흐려져 버렸다. 그 원인은 오랜 세월 동안 신리에 인간의 지식과 의지가 가미되어 타력 신앙으로 변질해 버린데 있다. 여기 따른 종교 산업이 인간이 마음을 더욱 신리에서 멀어지게 했다.

 

  많은 학자들 중에는 이 책을 읽고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내가 설법하고 있는 정법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종교에 대한 기성 관념을 버릴 것, 이것이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또 교주를 자칭하는 자들 중에도 언젠가는 정법에 귀의하게 되는 자들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불교나 기독교의 원리를 잘 깨닫고 있는 목자들 중에도 내가 말하는 신리가 자신들이 탐구하는 법과 일치한다는 데 확신과 기쁨을 가지는 분들도 많이 나타나리고 본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신리를 설법하던 당시 푸르나 가샤파, 아지타 케사가바리, 막가리 고사라, 니간다 부다, 파구다 캇차냐,산쟈 등이 대표적인 교조들이었다. 그 교리는 차원이 낮았으며 그들의 제자들은 싫증이 나서 불법에 귀의해 버렸다. 가챠나, 푸르나 가샤파, 샤리부트라 등도 한 교단의 지도자 혹은 그 제자들이었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나의 수호 천사로부터 설명을 들어서 알고 있다. 이 정법은 과거 예수와 고타마가 말했던 신리와 일치한다는 것도 아울러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의 잘못된 점은 사람이 사는 목적과 사명감의 상실에 있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과 파괴와 전생의 역사였다. 당대의 권력자들은 무력으로 봉건 사회를 만들어 자신의 번영과 안전한 삶을 중생들의 희생

위에 구축했다.

 

  권력자와 손을 잡은 사인들은 물질과 경제력으로써 자신들이 사회적 지위를 다져 나갔다. 하지만 봉건 사회는 결국 자신이 뿌린 씨앗인 폭력에 의해서 이웃의 침공을 받고 무너진다. 권력은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다.

 

  장사꾼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터전을 닦고 변함없이 돈을 벌기 위해 서민들의 희생을 강요했으며 자기 보존과 자아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서 서민 대중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약자의 단결이란 기치를 들고 자본가와의 대립 투쟁에 몸을 던진다.

 

  한편 지주들 역시 소작인을 움켜주기고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엇다. 약자가 반발할 수 없는 사회 제도는 계속된다. 인간은 물질 문명의 환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든 환경 속에서 더욱 물욕의 불꽃을 태우면서 노사 모두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도(餓鬼道)에 빠져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다.

 

  많은 인간들은 본심을 잃고 본능이 원하는 대로 사회악을 저리르고 있으며 매스컴은 또한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자극하는 기사에 열을 올려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길을 외면하고 있다.

  교육자들 중에도 극단적인 사상에 마음을 빼앗겨 제자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이 아주 많아졌다. 그것을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을 상실한 사회를 말법의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전 인류는 각성할 때다.

 

  마음을 상실한 물질 경제 지상의 자본주으나 사회주의로는 조화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물질 경제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선결 문제다. 노사의 투쟁은 양쪽에 다 고통을 더하고 있다. 공해 문제를 비롯하여 물가의 불안정, 동물적 본능, 사회의 무질서 등이 인간의 목을 죄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큰 조화의 틀을 만드어 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끼리의 상호 대화로써 해결할 수 있다.

 

  경영의 합리화만으로는 경제 사회의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노사의 대립도 임금의 해결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신리를 깨닫고 인간은 모두 형제이며 같은 시대에 태어난 동기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지금의 환경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임을 상기하여 서로 인연으로 묶여 다 함께 인생 수행장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노동자는 일할 수 있는 일터에 대해서, 고용주는 노동자에 대해서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의 근거이자 영혼의 수행장인 일터에 최선의 땀을 쏟아야 한다. 땀을 흘려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보은 행위다. 노사 쌍방이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은의 실천을 하고 있는 일터에 투쟁과 파괴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할 때 물가도 안정되고 공해라는 부조화한 현상도 소멸될 수 있다. 노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리를 따르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자신을 멸망으로 몰고 가게 될 것이다. 투쟁과 파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택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날이 있을 것이다.
 

  양보하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으로 구현해야 한다. 몽매한 어린 양 떼들을 양 극단의 사상으로 선동해서는 안 된다. 그 선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부조화한 상념이 되어 평화스러운 마음을 잃게 만든다.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나 명예 따위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 그것이 지름길이다. 인간답게 즐거운 일생을 보내는 것이 행복에의 길이며 불국토,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처 : 우리가 이세상에 살게된 7가지 이유 저자 :다카하시 신지. 옮긴이 : 김해석

예수와 붓다가 우리를 사랑한다 편의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영혼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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