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般若心経の解説 반야심경의 해설[총정리] 다카하시 신지/편집 다쿠지항 이사무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般若心経の解説 반야심경의 해설[총정리] 다카하시 신지/편집 다쿠지항 이사무

어둠의골짜기 2011. 5. 18. 13:00


2017년 11월 04일 현재, 다시 제가 2011년에 번역했던 곳을 와 보았습니다. 중복되는 부분들이 있지만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시시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더라도, 읽어 보시면, 전혀 알지 못했던, 당신 자신의 누구인지, 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충북 청주시 안덕벌에서 )


般若心経の解説 

반야심경의 해설

                                                                                                다카하시 신지(高僑信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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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お彼岸 

[피안]



彼岸」とは「かの岸」とも読めます。
ご存知の方もあると思いますが、彼岸という文字の根拠を少しばかりご紹介させて頂きます。
「피안」이란 「가안」이라고도 읽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피안이라고 하는 문자의 근거를 조금만 소개 하겠습니다. 

 

これはもちろん、仏典に由来する言葉です。皆さんの誰もが、一度は部分的にも聞いたことがある般若心経です。
(テレビドラマ!などの葬式の場面で、坊さんが詠んでいるお経はだいたいこれです。笑)
이것은 물론, 불전에 유래한 말입니다.  여러분의 누구든지, 한번은 부분적으로도 들었던 적이 있는
반야심경입니다.
(텔레비젼 드라마 ! 같은 장례식의 장면에서, 스님이 염불하고 있는 경문은 대개 이것입니다. 웃음)

 

般若心経の末尾に彼岸について出てまいります。般若心経の末尾をあげてみます。
반야심경의 말미에 피안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말미를 올려보겠습니다.

 

是無上呪(시무상주)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真実不虚(능제일체고진실불허)
故説般若波羅蜜多呪(고설반야바라밀다주)
即説呪日(즉설주왈) 羯諦羯諦(게제게제[아제아제]) 
波羅羯諦(바라게제[아제]) 波羅僧羯諦(바라승게제[아제]) 
菩提薩婆訶(보제[보리]살바하) 般若心経(반야심경) 

 

ではここからは、私が以前に親交させて頂いた、岩手県にお住まいでありました故田口恒勇氏が作成された冊子を元に引用させて頂きます。
この冊子の冒頭には、高橋信次先生の原説般若心経の続編であると記載されています。
高橋信次先生のことばによる「序文」、最後には「あとがき」もあります。
그럼 여기에서는, 제가 이전에 친교해서 물러받은, 이와테현에 주거하고 있었던 고 타구치항 이사무씨가 작성하신 책자를 바탕으로 인용 하겠습니다.
이 책자의 머리말에는,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원설반야심경의 속편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말씀에서 「서문」, 마지막으로는 「후기」도 있습니다.
 

「高橋信次先生による般若心経のまとめ」  編集 田口恒勇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에 의한 반야심경의 총정리」편집 다쿠지항 이사무

 

  ―中略― -중략-

 


 

釈迦は、36才で悟った。
悟ることによって、現象の奥に隠された一切の道理を知った。そうして、よどみなくあふれる智慧によって、多くの衆生を導いていった。36年間の経験だけではこうはいかない。偉大なる悟りを得、心の窓を開き、過去世の集積された経験と全能の智慧が、正法流布の大事業を完成させたのである。
석가는, 36세에 깨달았다.
깨닫는 것에 의해서, 현상의 속(奧)에 감추어진 일체의 도리를 알았다. 그렇게 해서, 막힘 없이 가득차셔 흘러 넘치는 지혜에 의해서, 많은 중생을 이끌고 있었다.  36년 간의 경험만으로는 그렇게는 안 된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창을 열고, 과거세의 집적된 경험과 전능의 지혜가, 정법유포의 대사업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是無上呪(ぜ む じょう しゅ)とは、これ以上のものはないというのであり、
是無等等呪(ぜ む とう どう しゅ)は、釈迦の悟りは他と比較するものがない、という意味である。
能除一切苦真実不虚(のう じょ いっ さい く しん じつ ふ こ)とは、生老病死という一切の苦しみから解き放たれ、それは中身のある真実なものなのだ、とここではいっている。
시무상주란, 이것 이상의 것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시무등등주는, 석가의 깨달음은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의미이다.
능제일체고진실불허란, 생노병사라고 하는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그것은 내용의 있는 진실한 것이다, 라고 여기서는 말하고 있다.

 

釈迦の悟りは、余人は近づけない。経験しないものはわからない。わからないだけに、第三者はつい、疑ってかかる。
そこで般若心経は、その境地を、いたるところで繰り返し述べている。本物はこっちだ。迷ってはいけない。釈迦の悟りとはこうだよと、その半分近くの文字は、悟りの中身をさまざまな角度から述べているのである。
석가의 깨달음은, 다른 사람은 다가갈 수 없다. 체험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만큼, 제 3자는 무심코, 의심해서 걸린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그 경지를, 여러곳에서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다.  진짜는 이쪽이다. 헤매서는 안 된다.  석가의 깨달음이란 이런것이다 라고, 그 반쯤의 가까운 문자는, 깨달음의 내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羯諦(ぎゃてい)とは古代インド語でガーテというが、この意味は「岸」ということである。
釈迦は、ガンガー(ガンジス)の川を背にして、よく説法をした。また、説法の中に、人間の苦悩と悟りを、川をはさんだ両岸をたとえて話した。
게제(아제)란 고대 인도말로 가테라고 하지만, 이 의미는 「언덕(기슭)」이라고 하는 것이다.
석가는, 강가(겐지즈)의 강을 배경으로 해서, 자주 설법을 했다.  또, 설법 속에, 인간의 고뇌(괴로움)과 깨달음을, 강을 끼워 좌우 기슭을 예를들어 설명했다.

 

中インドから北にかけて、文明が栄えた。古代でも哲学、文学、技術、科学の分野が進み、東西両文明に影響を与えている。ことに冶金、天文、医学、数学などの諸分野は、世界的水準に達しており、五世紀頃には代数が発達して、ゼロ、負数、二次方程式などが考案され、十五世紀には微分、塁乗級数展開などが考案され、西洋文明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のである。
また舞踏や音楽なども、その一つだろう。
중인도로부터 북으로 걸쳐서, 문명이 번창했다. 고대에서 철학, 문학, 기술, 과학의 분야가 진보하고, 동서 양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야금, 천문, 의학, 수학 등의 여러 분야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고 있고, 5세기 무렵에는 대수가 발달하고, zero, 부수(음수), 2차방정식 등이 고안되어, 15세기에는 미분, 루승급수 전개 등이 고안되어, 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ところが当時のインドは、カースト制度がきびしく、こうした文明に参画できる者は、ほんの少数の人々であったのである。
このため、大部分の人は無学文盲であり、ゴーダマ・ブッタ(釈迦)は自然の状況をとらえて、説法していったのである。
그런데 당시의 인도는, 카스트 제도가 엄하고, 이러한 문명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참으로 소수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배움이 없는 문맹이며, 고다마 붓타(석가)는 자연의 상황을 붙잡아, 설법하고 있었던 것이다.

 

またブッタ・ストラー(釈迦の法)は、大自然の法が目的であり、「自然と人間」との関係を明らかにするのが根本なので、学問に関係なく、誰にも理解できた。
しかしもともと学問そのものも、「自然と人間」を知る手だてとして盛んになってきたものであり、芸術や文学も、自然や人間を、いかに客観的にその真実を表現するかにあるのであり、したがって学問があろうとなかろうと、人間であれば、ブッタ・ストラーは理解できるものであった。
또 붓타 스트라(석가의 법)은, 대자연의 법이 목적이며,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근본인 것이며, 학문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학문 그 자체도, 「자연과 인간」을 아는 수단으로서 키워왔던 것이며, 예술이나 문학도, 자연이나 인간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그 진실을 표현하는가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학문이 있을지라도 없을 지라도, 인간이라면, 붓타 스트라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現在のインドは六月から十月が雨期に当たり、十一月から五月が乾期になる。三月から五月はいわゆるモンスーン気候といわれ、暑熱の時期に入るようだ。
当時も、雨期ともなれば、ガンガー川は満水となり、対岸に渡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
人が住み、平地の多いこちらの岸は、雨期が半ば過ぎになると食べ物が少なくなり、食糧難に陥ってくる。
현재의 인도는 6월부터 10월이 우기에 해당하고, 11월에서 5월이 건기가 된다. 3월에서 5월은 즉 몬슨 기후라고 하는, 뜨거운 열의 시기로 들어온다.
당시도, 우기라도 되면, 겐지스 강은 만수가 되어, 건너편 기슭에 건널 수 없게 된다.
사람이 주거하는, 평지가 많은 이쪽의 물가는, 우기가 반정도 지나게 되면 음식물이 적게 되어, 식량난에 빠져 온다.

 

対岸である彼岸は緑が多く、マンゴの実や他の果物が沢山なっているが、川が増水しているためにそれを取りに行くことができない。
ブッタは、それをたとえて、こちらの岸を苦界とよび、対岸である彼(か)の岸を悟りの境涯として説いた。
また川の水は深いところは静かに流れ、浅瀬は流れが激しく、ざわざわしている。
人の心も、五官にとらわれると雑音が激しく、落ち着きがなくなる。深い心、つまり潜在意識に同通している人の心は、守護・指導霊の導きがあるので、諸現象の動きにまどわされることなく、平静であると説いた。
강 건너편 기슭인 건너편 강변은 초록이 많아, 망고의 열매나 다른 과일이 많이 열려 있지만, 강이 물이 불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러 갈 수 없다.
붓타는, 그것을 예로해서, 이쪽의 강변은 괴로움의 세계로 보고, 강 건너편 기슭인 건너편 강변을 깨달음의 경지로서 설명했다.
또 강물은 깊은 곳은 고요하게 흐르고, 수심이 얕은 곳은 흐름이 격렬하고, 꽐꽐(물소리^^)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도, 오관에 사로잡히면 잡음이 격렬하고,침착성이 없어진다.  깊은 마음, 즉 잠재의식에 같이 통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수호・지도령의 인도가 있음에도 불과하고, 여러 현상의 움직임에 정신을 혼란시키는 일 없이, 평정이라고 설명했다.

 

クシナガラの地で、八十余年の生涯を閉じようとするブッタの下に、シュバリダというバラモン教出身の最後の弟子がみえる。
そのときブッタは、シュバリダにこういった。
쿠시나가라의 땅에서, 80여년의 생애를 끝마치려고 하는 붓타의 밑으로, 슈바리다라고 하는 바라몬교 출신의 최후의 제자가 보인다.
그 때 붓타는, 슈바리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グリグドラクターの修行場は天変地異によって大きな亀裂を生じ、幾日も幾日も豪雨に見舞われた。その裂け目に雨水が流れ込み、川となった。片方の岸は広々と開けていたが、一方の岸は峻厳(しゅんげん)な山にさえぎられ、逃げ場を失った動物達が右往左往していた。一匹の巨象が広々とした向こう岸に渡ろうとあたりを見まわしていた。巨象はしばらくたたずんでいたが、遂に裂け目に我が巨体をすべらせ、己の体を橋代わりにして、小さな動物達を救った。巨象は力尽きて、自らの巨体は裂け目の底に沈んでいった。いま、自分は四十五年の間、迷える衆生にいろいろと悟りの道を説いてきたが、さらにこの老体を足場として悟りの彼岸へ導いてやりたい」
言い終わると、ブッタは静かに瞼を閉じた。
「구리도라구타의 수행장은 천재지변에 의해 큰 균혈을 생기나고, 며칠이나 며칠도 호우에 휩쓸렸다.  그 갈라진 곳에 빗물이 흘러들어, 강이 되었다.  다른 한쪽의 기슭은 널찍이 열고 있었지만, 한쪽의 기슭은 험준한 산에 가로막혀, 도피처를 잃은 동물들이 우왕좌앙하고 있었다.  한마리의 큰 코끼리가 넓은 건너편 물가로 건너려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큰 코끼리는 얼마동안 멈추어 서 있었지만, 갈라진 곳에 자신의 큰 몸을 끼워넣어, 자기의 몸을 다리로 대신해서, 작은 동물들을 구원했다.
큰 코끼리는 힘을 다하여, 스스로의 큰 몸은 갈라진 틈새의 밑으로 빠져 갔다.  지금, 자신은 45년 동안, 방황하는 중생에게 여러가지로 깨달음의 길을 설명해 왔지만, 한층 더 늙고 쇠약해진 자신의 몸을 발판으로 해서 깨달음의 강 건너의 물가로 인도하고 싶다.」
말을 끝내자 마자, 붓타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ブッタは、最後の瞬間まで自然の中で生活し、人びとに慈悲を説いたのである。
神の心は慈悲である。慈悲の心は衆生済度の心しかないのである。
私たちは、地球という大神殿、つまり神の体のなかで生活している。地上という大地も、水も、空気も、陽の光も、私たちに生きるに必要な環境を、神は無償で提供している。この事実を知らなくてはなるまい。この事実を悟らなくてはいけないのだ。
붓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연 속에서 생활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설명한 것이다.
신의 마음은 자비이다. 자비의 마음은 중생제도의 마음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구라고 하는 큰 신의 집(大神殿), 즉 신의 몸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상이라고 하는 큰 땅도, 물도, 공기도, 태양의 빛도, 우리들에게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환경을, 신은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을 깨닫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羯諦羯諦(ぎゃ てい ぎゃ てい) 波羅羯諦(は ら ぎゃ てい) 波羅僧羯諦(は ら そう ぎゃ てい) 菩提薩婆訶(ぼ じ そ わ か) 般若心経(はん にゃ しん ぎょう)
원래 한자음으로 ☞게제게제 바라게제 바라승게제 보제살바하 반야심경
(기존방식으로...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살바하 반야심경)

 

「岸だ、岸だ、向こうの岸に到達するのだ。仏弟子達が向こうの岸へ到達し、悟りに達すれば、すべてが調和され成就する。調和の姿こそ般若心経なのだ」
「물가다, 기슭이다, 건너편의 기슭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불제자들이 건너편의 기슭으로 도달하고, 깨달음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조화되어 성취한다. 조화의 모습이야말로 반야심경인 것이다.」

 

仏弟子というと特殊な階級を意味するが、本来は地球人類を指している。
特殊な修行をし、行を積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ものでは本来ない。
行を積むという意識は、人間が長い転生輪廻の過程において積み重ねた業があるために、神の子の自分を忘れた考えから生ずるそれが言わしめるのである。
불제자라고 하면 특수한 계급을 의미하지만, 본래는 지구 인류를 가리키고 있다.
특수한 수행을 하고, 행을 쌓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본래 아니다.
수행을 쌓는다고 하는 의식은, 인간이 오랜 전생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겹쳐 쌓은 업이기 때문에, 신의 자녀인 자신을 깨닫지 못한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는 그것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彼岸とは、神の子のふるさとである。そのふるさとを忘れているのである。
正法は誰のためでもない、皆自分のためにあるのだ。
仏教というと堅苦しく、難しいもののように聞こえるし、実際に中国を経て来た経文を見ると、たしかに何が書いてあるのか解らない。
解らないはずである。そのほとんどは梵語が漢字の当て字になってしまったため、文字の解釈を追及すると何をいっているのか、迷路にはまりこんでしまうからである。
피안이란, 신의 자녀의 고향이다.  그 고향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법은 특정한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려운 것처럼 여겨지고, 실재로 중국을 거쳐 온 경문을 보면, 하여간 무엇이 적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부분은 범어가 한자의 취음자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문자의 해석을 추궁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미로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しかし仏教とは釈迦の説いた教えであり、それはまた自然の成り立ち、理法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求める心さえあればどんな人でも理解できるものである。
肉体人間は欲が深く、つい目先のことにとらわれるために、本来自分のためにある仏教、正法を理解しようとせず、これから離れていってしまう。
그러나 불교란 석가의 설명한 가르침이며, 그것은 또 자연의 성립, 리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 인간은 욕심이 깊고, 바로 눈앞의 일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본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불교, 정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여기에서 떨어져 가 버린다 .

 

喜怒哀楽は人間だから当たり前、人間だから病気もする、人間だから悪いこともする、聖人ばかりになったらこの世は味も素っ気もない、という見方をする人がいるが、いったい人間とは何か、である。
こういう考えでは動物になってしまう。動物は本能のままに生かされているので、それなりの生き方が与えられ、コントロールされているが、人間は考える能力を持ち、自由意志が与えられているために、こうした生き方をすると、ズルズルと動物以下になり下がってしまう。
희노애락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병도 들고, 인간이기 때문에 나쁜 일도 한다, 성인만으로 된다면 이 세상은 무미건조하다, 라고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다.
이런 생각으로는 동물이 되어 버린다. 동물은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나름의 삶의 방법이 주어져 컨트롤 되고 있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져, 자유 의지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삶의 방법을 하면, 슬금 슬금 동물 이하로 전락해 버린다.
 
一つの家庭で悩みがない、という人は比較的少ないのではあるまいか。経済的に恵まれている家庭は子どもがいないとか、夫婦間がバラバラとか、子供がグレて手を焼くとか・・・・・・。一見平和に見える家庭でも、ひと度その家の中に入ると、いうにいわれぬ問題をかかえているようだ。
하나의 가정에서 고민이 없다는, 사람은 비교적 적은 것이 아닐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은 자녀가 없다든지, 부부 사이가 뿔뿔이라든지, 아이가 그레해서 애를 먹는다든지・・・・・・。 언뜻 보기에는 평화롭게 보이는 가정이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그 집안에 들어가면, 서로가 대화도 없고 문제를 껴안고 있는 것 같다.

 

しかしそれも人生、あれも人生ということで、その場その場でツギハギし、みて見ぬふりをしてその日、その日を送っているのが大半の人びとのようである。
人間は生活の歯車が曲りなりにも回転している時は、なかなか正法に入りずらく、縁にふれてもおざなりになってくるようだ。
그러나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자리가 그 자리로 거시기해서, 봐도 못 본척 하고 그 날, 그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생활의 톱니바퀴가 그럭저럭 회전하고 있을 때는, 좀처럼 정법에 들어가지 않고, 인연이 닿아도 대충대충 되어 가는 것 같다.

 

しかしひと度、生活の歯車が土台から揺れ動くと、こんどは血眼になって慌てふためく。
なぜだろう。欲が深いのだ。もともと・・・・・・。
欲の深さは、何でも手にいれたいというのもあれば、現状に甘んじ、自己陶酔に陥るのも同じことである。
自己陶酔、自己満足、現状に甘んじるというのは、偽我が強いからそうなるのである。
偽我とは、本来の自分でない自分である。
그러나 어떨게라도, 생활의 톱티바퀴가 토대로부터 끊임없이 흔들리면, 이번은 혈안이 되어 당황하고 부산을 떤다. 왜 이런거야.  욕심이 깊은 것이다. 원래・・・・・・。
욕심의 깊이는, 무엇이든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이 있으면, 현상에 만족해하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도 같은 것이다.
자아도취, 자기보존, 현상에 만족해 한다는 것은, 거짓된 자기가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거짓된 자기란, 본래의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이다.

 

*********
本来の自分は善我であり、それは神の子の自分である。
神の子の自分に立ち帰れば、正法の絶対性と中道の神理については、否も応もなく、これを生かした生活をしなければ、その反した分量だけ苦しみを味わう、ということを知るはずである。
悟りの彼岸は誰のためでもないのだ。みんな自分のためである。
自分を悟れば、この地上界は慈悲と愛によって成り立っており、調和の要は神の姿でもあるので、愛、慈悲の行為を顕現(けんげん)してゆかね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が自覚されてくる。
そうして、己の幸せを他に及ぼして行くというのが正法なのだ。
ゴーダマ・シタルダー(釈迦)は、それを説いた。
본래 자기 자신은 선한 자기이며, 그것은 신의 자녀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신의 자녀로서의 자기 자신에 입장으로 돌아가면, 정법의 절대성과 중도의 신리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않고, 이것을 살린 생활을 해나가면, 그에 반한 분량만큼 괴로움을 맛본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깨달음의 피안은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기 잣신을 깨달으면, 이 지상계는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고, 조화의 필요는 신의 모습인 것이며, 사랑, 자비의 행위를 분명히 드려내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자각케 되어 간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행복을 남에게 미쳐 간다고 하는 것이 정법인 것이다.
고다마・싯타르다(석가)는, 그것을 설명했다.

 

*******
当時のブッダは、主に慈悲を説いた。
慈悲とは仏の心だ。
慈悲は至高の大宇宙の心である。
本当の慈悲の心を理解できる者は、ホンの小数の限られた人達だったようである。
ただし当時は、心の中はともかくとして、形の上にそれを表わそうとすれば比較的容易に行えたようである。
インドの人たちは布施心も強く、野や山は食べ物が豊富にあったので、サロモンとしての修行も容易であったし、欲望に打ち克ち、人びとに救いの手を差しのべることもできた。
しかし、自己を宇宙に拡大し、神の心となって、人々の心の中に仏を呼び起こすことのできた人はブッタしかいなかった。
당시의 붓타는, 주로 자비를 설명했다.
자비란 부처의 마음이다.
자비는 지고의 대우주의 마음이다.
진실한 자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소수의 한정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다만 당시는, 마음 속은 어쨌든 간에, 형태 상에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비교적 용이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더해서, 욕망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칠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를 우주에 확대하고, 신의 마음으로 되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처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사람은 붓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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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ッタは、今まさに涅槃(ねはん)に入らんとする時、弟子の阿難(あなん)に答えてこう言った。
「私がこの世を去ったとしても、私を思えば、私はその人の心の中で生きている」と・・・・・・。
붓타는, 지금 확실히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할 때, 제자 아난에게 대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나를 생각하면, 나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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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と仏は、この大宇宙に、そして人びとの心の中に、生き通しの大光明であり、絶対にして唯一つの大生命であり、言葉を変えれば、それは慈悲そのものであったのである。
慈悲は、法であり、大自然であり、万生万物に調和を与える神の大生命であった。
신과 부처는, 이 대우주에,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고 안내하는 큰 광명이며, 절대로서 오직 하나의 큰 생명이며, 바꿔서 말하면, 그것은 자비 그 자체이었던 것이다.
자비는, 법이며, 대자연이며, 모든 생명 모든 물질(만생만물)에게 조화를 주시는 신의 큰 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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釈迦滅後、五百年の後に、イスラエルにイエス・キリストが愛を説いた。
人びとは釈迦が説いた慈悲の心を本当に理解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からといえよう。
これを理解できる者は、釈迦在世の時代でも僅かだったし、時が経つにしたがって、次第に形骸化されてきたからでもあった。
イエスは愛を説いた。
석가 입멸 후, 500년 후에, 이스라엘에 예수・그리스도가 사랑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석가가 설명한 자비의 마음을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석가가 이 세상에 살아 있던 시대에도 조금 뿐이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점차로 형체만 있을 뿐 내용이 없는 빈 껍데기로 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イスラエルという地は愛を説かねばならぬ土地柄でもあった。
インドと違い、砂漠が多く、緑が少ない。支配者と被支配者が雑居し、被支配民族は、その日暮しの生活であった。貧しい多くの人たちは、明日に希望もなく、救世主を待ち望んでいたのである。
そうした環境の中で人々を救うには、相互扶助の愛を説かねばならなかった。
地上に人類が増え、限られた土地と多くに人間が生きていくには、相互に扶け合う、人類はみな兄弟という愛の行為しかないのである。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땅은 사랑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방 풍습이기도 했다.
인도와 달리, 사막이 많고, 초록이 적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혼합해서 주거하고, 피지배 민족은,  하루 벌어 하루 꾸러 나가는 생활이었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은, 내일에 희망도 없고, 구세주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데에는, 상부상조의 사랑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상에 인류가 증가하고, 제한된 토지와 많은 인간이 살아 가는데에는, 서로가 서로 돕고, 인류는 모두가 형제라고 하는 사랑의 행위밖에 없는 없는 것이다.

 

愛の教えは今日、全世界に伝わり「聖書」は、かくれた永遠のベスト・セラーになっているのも、もとはといえば愛の行為は人間的行為に帰着するからである。
사랑의 가르침은 지금, 전 세계에 전해져 「성서(성경)」숨은 영원한 베스트 셀러가 되어 있는 것도,
원인이라고 하면 사랑의 행위는 인간적인 행위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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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の心、愛の行為ならば、誰でもできよう。
この地上界は、いろいろな魂を持った集団社会である。
男女の別、能力の別、体力の別・・・・・・。すべてが相対的であり、さまざまである。
そうしたさまざまな魂が共に同じ場で修行し、調和という神の意思を顕現してゆくには扶け合い、補い合う強調協力の相互関係を欠くことはできない。
自分さえ良ければよいとするエゴイズムは地上界の人間を含めた、与えられた慈悲の環境を破壊するものであるからだ。
사랑의 마음, 사랑의 행위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지요.
이 자상계는, 다양한 혼을 지닌 집단사회이다.
남녀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체력의 다르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가지 각색이다.
그러한 다양한 혼이 함께 같은 장소에서 수행하고, 조화라고 하는 신의 의사를 분명히 드려내 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 보충하고 강조 협력의 상호관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만 좋으면 괜찮다라고 하는 이기주의는 지상계의 인간을 포함한, 주어진 자비의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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釈迦が遺した仏教が今日、東洋の限られた人々にしか伝わらず、イエスが説いたキリスト教が全世界に広まったのも、慈悲の心は神に直結し、近寄り難いし、愛はもともと地上の光であり、横に広がる性質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る。
석가가 남긴 불교가 오늘날, 동양의 제한된 사람들에게 밖에 전해지지 않고, 예수가 설명한 그리스도교가 전 세계에 퍼져있는 것도, 자비의 마음은 신에 직결하고, 접근하기 어렵고, 사랑은 원래 지상의 빛이며, 옆으로 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慈悲も愛も、ともに神の光であることには変わりない。
しかし肉体をまとった人間にとって、どちらが親近感を覚えるかといえば、愛であろう。
慈悲といい、愛といっても、その本質を知って、その通りに生きている人は少ないといえよう。
人がこれを実行しようとすれば、恵みを与えることの出来る自分を、まずつくらなければなるまい。
慈悲は神仏の心だとして、盲目的にこれを為そうとすると、自分が苦しくなり、周囲に波紋を起こすことさえ出てくる。
자비도 사랑도, 다 같이 신의 빛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육체를 걸친 인간에게 있어서, 어느 쪽이 친근감을 느끼는가 하면, 사랑일 것이다.
자비라고 해도, 사랑이라고 해도, 그 본질을 알고, 그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적은 것 같아요.
사람이 이것을 실행하려고 하면, 은헤를 줄 수 있는 자신을, 우선 말들지 않으면 되지 않겠지요.
자비는 신불의 마음으로서, 맹목적으로 이것을 행하려고 하면, 자신이 괴롭게 되고, 주위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나온다.

 

さきにもふれたように、年老いた巨象は多くの小動物を天変地異による洪水から救うために、自らその巨体を岩の裂け目にすべらし、橋代わりとなって小動物を対岸に渡らせる。渡り終えると巨象は力尽き、裂け目深く沈んでいった。
먼저도 접한 것처럼, 늙은 큰 코끼리는 많은 작은 동물을 천재지변에 의한 홍수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그 거대한 몸을 바위의 갈라진 곳에 끼워넣어, 다리의 역활이 되어 작은 동물을 반대편 물가로 건너게 한다. 건너는 것이 끝나면 거대한 코끼리는 힘이 다해, 갈라진 곳 깊게 가라앉아 갔다.

 

巨象のこうした行為は慈悲の心を知り、自分を悟っていたから出来たのである。巨象以外の他の小動物がこうしたことをしたいと思えば、あたらその生命を裂け目に落とし、その悲鳴にかえって混乱を巻き起こしたに違いない。
거대한 코끼리가 이러한 행위는 자비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코끼리 이외의 다른 작은 동물이 이러한 행위를 하고 싶다고 행각하면, 애석하게도 그 생명을 갈라진 틈새에 떨어뜨리어, 그 비명소리에 오리혀 혼란을 불러 일으킬 것임에 틀림이 없다.

 

この地上界は、相互作用の働き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植物は動物のために、動物は植物に。草食動物は肉食動物に身を供養し、肉食動物は植物が枯れないように、絶えず死と隣り合わせに生きている
人間だけが植物や動物、あるいは鉱物資源を勝手放題に使ったり、食べ散らかしていいというものではない。
이 지상계는, 상호작용의 활동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다. 식물은 동물을 위해서, 동물은 식물을 위해서,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게 몸을 공양하고, 육식동물은 식물이 말라죽지 않토록, 끊임없이 죽음과 이웃하여 살고 있다.
인간만이 식물이나 동물, 혹은 광물질원을 제 멋대로 사용하거나, 먹고 어질러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自然界の循環は、すべてに渡って適用され、それは他を生かすこと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
しかし動物、植物の自然界は、巨象のように法を悟って為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このため、相互作用のバランスを、しばしば失い、植物も動物も絶滅寸前に追い込まれることすらあるのである。
자연계의 순환은, 모든 것에 건너서 적용되고, 그것은 남을 살리는 것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러나 동물, 식물의 자연계는, 거대한 코끼리처럼 법을 깨닫고 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상호작용의 밸런스를, 누차 상실하고, 식물도 동물도 멸종 직전으로 몰아넣어 버리는 것마저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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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は万物の霊長なので、こうした不調和な状態にならないよう、慈悲の心、そして愛を持って、調和の範を示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それには神理を知った想念と、自覚された行為が自然に出来るように、反省と中道の生活を送るようにつとめなければなるまい。
こうすることによって、やがて巨象のような慈悲の心が広がり、多くの人々を生かす自分に到達できるの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 것이며, 이러한 부조화한 상태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 자비의 마음,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조화의 범위를 제시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에는 신리를 인식한 상념과, 스스로 느낀 행위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반성과 중도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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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の本質も慈悲の心と変らない。愛も人々を生かす行為であるからだ。
助け合い、補い合い、許し合う寛容の心は神の心だ。
自分にあるものを他に与え、人びとの喜びを喜びとする調和にある。
仏の慈悲、神の愛を求める人は少なくない。仏教は経文をあげ、キリスト教は祈りがすべてと考えられている。
사랑의 본질도 자비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사랑도 사람들을 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은 신의 마음이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남에게 주고, 사람들의 기쁨을 기쁨으로 하는 조화에 있다.
부처의 자비, 신의 사랑을 찾는 사람은 적지 않다.  불교는 경문을 외우고, 그리스도교는 기도가 전부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ところが仏教もキリスト教も、自ら助ける者に与えられるのだ。
今日、あらゆる宗教が他力に変貌し、偶像崇拝という神仏と人間を切り離した信仰が広まったがために、神仏は人々に救いの『めぐみ』も『心の安らぎ』も与えることが出来ないでいる。
他力信仰が勢力を張り出してくると、偽りの神が人々に憑き、ますます混乱した信仰形態をつくり出してゆく。
그런데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스스로 돕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온갖 종교가 타력으로 변모하고, 우상숭배라고 하는 신불과 인간을 단절시킨 신앙이 퍼졌기 때문에, 신불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 은혜 』도 『마음의 평온함』도 주는 일이 불가능하고 있다.
타력신앙이 세력을 뻗어 나가면, 거짓의 신이 사람들에게 빙의하여, 점점 더 혼란한 신앙 형태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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仏教もキリスト教も、もともと一つなのだが、全世界に分布されている仏教、キリスト教の教え(分派)は何千何万に及んでいよう。
新興宗教といわれる宗団の経典は、たいていは仏教、キリスト教の教えを食いちぎり、他のものと混ぜ合わせ、もっともらしくつくり変える。
それでは真の安らぎも、救いも与えられようがない。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원래 하나인 것이지만,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불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분파)는 몇 천 몇 만에 달하고 있지요.
신흥종교라고 불리우는 종단의 경전은, 대개는 불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뜯어 먹어, 다른 것과 혼합하여, 그중에서 제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어 바꾼다.

 

神理は自力である。神の子の自力に生きている者に、神仏は慈悲と愛を与えて下さる。
自分が中道に適ってくると、神仏はその者に智慧を与え、霊力を与え、奇蹟を与えてくれよう。そうして他の縁遠き者をも救える慈悲、愛の行為が自然に行えるようにして下さるのだ。
般若の境涯は、五体の人間では考えられないような、想像を超えた悦びの世界である。
巨象の行為が自然に行えたのも、その魂は三次元を超えて、安らぎの境地に常に住していたから出来たのであった。
신리는 자력이다.  신의 자녀인 자력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신불은 자비와 사랑을 주고 계시다.
자기 자신이 중도에 맞추어 가면, 신불은 그 사람에게 지혜를 주시고, 영력을 주시고, 기적을 주고 주신다.  그렇게 해서 다른 인연이 먼 사람까지도 구원하는 자비, 사랑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행하여 지게 해 주시는 것이다.
반야의 경애(경지)는, 오체의 인간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상을 초월한 기쁨의 세계이다.  거대한 코끼리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행해진 것, 그 혼은 3차원을 초월해서, 평온함의 경지에서 늘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転生輪廻の繋縛(けいばく)から解脱し、大宇宙に行き通しの自分を発見し、人びとに慈悲と愛の光を与えることのできた人を仏といい、如来ともいい、神の使者ともいうのである。
般若心経は、それを語り、仏智の偉大さ、悦びを述べている。
전생윤회의 계박(=얽매임 ^^)에서 해탈하고, 대우주로 통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의 빛을 주는 것이 가능한 사람을 부처라고 하며, 여래라고도 한다, 신의 사자라고도 하는 것이다.

本稿で般若心経の解説を一応終えることにする。
본 원고로 반야심경의 해설을 일단 끝내기로 한다.

 


 

 

[あとがき] [후기]


さまざまな角度から解説を試みて来たが、般若心経は全文二百七十六文字から成り、経文の中でも短い方に属していよう。
다양한 각도에서 해설을 시도해 왔지만, 반야심경은 전문 276문자로 이루어지고, 경문의 속에도 짧은 방식으로 들어 있지요.

 

しかし、その書かれている内容は、悟りの中身であり、悟りとはこういうものだと説明している。
その説明の仕方はそれこそ、これでもか、これでもかと、くどいように説明している。
これは漢文の性質上そうならざるを得ないであろう。
그러나, 그 쓰여있는 내용은, 깨달음의 내용(알맹이)이며, 깨달음이란 이러한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설명은 방법은 이것이야말로, 이것이다 라든지, 이것이 아니라든지라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한문의 성질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たとえば・・・色即是空(しきそくぜくう) 空即是色(くうそくぜしき) 受想行識(じゅそうぎょうしき) 亦復如是(やくぶにょぜ) 舎利子(しゃりし) 是諸法空相(ぜしょほうくうそう)と書いて、そのあと不生不滅(ふしょううめつ)からはじまって、以無所得故(いむしょとくこ)まで。
ここは是諸法空相(ぜしょほうくうそう)の説明といっていい。
したがって、是諸法空相で終わってもこれらの説明は導き出せるものだ。
예를 들면・・・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이라고 쓰고, 그 다음 불생불멸부터 시작해서, 이무소득고까지.
여기는 시제법공상의 해설이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시제법공상에서 끝내도 이들의 설명은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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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っとも諸法空相(しょほうくうそう)については主観的体験なり、あの世の説明ができない場合は、空相を「無」と見てしまい、すべては無いと考えてしまう。そうでなくとも、不生不滅などの説明があっても色即是空の空を「無い」としてしまう人もあるのだから、人の『意』が加わると、とんでもない方向に解釈が進んでしまう。
더욱 더 제법공상에 대해서는 주관적 체험이고, 저 세상의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는, 공상을 「없음」으로 봐 버린다, 모든 것은 없다 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불생불멸 등의 해설이 있어도 색즉시공의 공을 「없다」라고 해 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意=뜻=의지』가 가미되면, 어쩔 도리가 없는 방향으로 해석이 진행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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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じ中国から伝わった仏教用語でも「諸法無我」(しょほうむが) 「諸行無常」(しょぎょうむじょう) 「寂滅為楽」(じゃくめついらく) は、僅か十二文字にすぎないが、これらの言葉は深遠な神理を端的に表現しており、漢文でなければ、こううまくは、まとまらないと思われる。
私は仏教のことは全くの素人であり、解釈の仕方も仏教哲学を学ばれた方々とは違うかもしれない。
같은 중국에서 전해진 불교용어에도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숙멸위락」(숙멸위락)은, 불과 12문자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의 말은 심원한 신리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한문이 아니라면,  이렇게 편리하게는, 정리될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しかし文字も知らない当時の人たちに説いたブッタ・ストラー(神理)は、主に方便をもってしたが、衆生が理解できないような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そうした意味で、私は私なりに、解説を進めてきたわけである。もし私の解釈に異議のおありの方があれば、そのお説をおきかせ願いたいものである。
그러나 한문도 모르는 당시의 사람드에게 설명한 붓타・스트라(신리)는, 주로 방편을 가지고 했지만, 중생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의미로, 저는 제 나름대로, 해설을 진행해 왔던 것이다.  만약 저의 해석에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이 있으면, 그 의견을 들려주시를 바라는 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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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心経は「般若波羅蜜多」の内容、つまり悟りの中身を述べているが、ではどうすればそれに到達できるの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は触れていない。
書かれた動機が般若の内容にあったようだが、やはり目的に至る手段も書いて欲しかった。そうすれば般若心経の中身は一段と光彩を放ち、解釈も在来のものとはだいぶ違ってきたと思う。
在来のものは、文字にとらわれ、解説者の意によって進められる。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의 내용, 즉 깨달음의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그럼 어떻게 하면 그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풀어내고 있지 않다.
기록한 동기가 반야의 내용에 있었던 듯 하지만, 마찬가지로 목적에 이르는 수단도 썻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면 반야심경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광채를 발하고, 해석도 재래의 것과는 상당히 달라져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래의 것은, 문자에 사로잡혀, 해설자의 의지(意)에 의해서 진행할 수 있다.

 

心の問題は、頭では理解できないものだ。
なぜかといえば、心は次元の異なる世界に属し、その世界を体験し、心と肉体の相関関係を理解しなければわからないからである。
마음의 문제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고 하면, 마음은 차원의 다른 세계에 속하고, 그 세계를 체험하고, 마음과 육체의 상관관곅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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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説はそうした意味で、悟りの中身以外に、手段についても折に触れ加筆してきたが、般若心経の文面だけでは、こうした解釈は出てこないであろう。
해설은 그러한 의미로, 깨달음의 내용 이외에, 수단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필해 왔지만, 반야심경의 문면(=문장에 나타나 있는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해석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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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に到来した経文の数は非常に多いと思うが、何れまた機会をみて、これ以外の経文についても解説をしてみたいと考えている。(終り)
일본에 도래한 경문의 수는 매우 많다고 생각하지만, 무엇 또 기회를 봐서, 이것 이외의 경문에 대해서도 해설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끝)

 


 

 


 



般若心経の解説 

반야심경의 해설

 

                               
                                                       by  高橋信次先生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

 

 

「序文」 「서문」

 

「編集にあたって」  編集 田口恒勇

「편집에 임하면서」    편집 다쿠치항 이사무

 

私は高橋信次先生に師事し、お側近く教えを受けた者です。
信次先生のお説きくださったことをそのまま伝えたくまとめました。
저는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에게 사사(스승으로 공경하고 가르침을 받음)하고, 측근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지 선생님의 설명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 한데 모았습니다.

 
この「般若心経の解説」は、1972年9月より1973年10月までの間、我々弟子たちにお説き下さったことを纏めたものです。
「原説般若心経」の第一刷が出版されたのが1972年(昭和47年)12月15日です。「原説般若心経」の「はしがき」を11月にお書きになっておられます。
すなわち、この解説は「原説般若心経」の原稿を書き終わるとすぐ、引き続き説かれたものです。
それゆえ、この解説は「原説般若心経」の続編であるとともに、般若心経の要約書でもあり、悟りへの手引書でもあります。

이 「반야심경의 해설」은, 1972년 9월에서 1973년 10월까지의 사이, 우리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신 것을 일괄 정리한 것입니다.
「원설반야심경」의 제 1쇄가 출판된 것이 1972년(소화 47년) 12월 15일입니다.  「원설반야심경」의 「 머리말」을 11월에 쓰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즉, 이 해설은 「원설반야심경」의 원고를 다쓰자마자, 잇따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고는 「원설반야심경」의 속편인 것과 동시에, 반야심경의 요약서이기도 하며, 깨달음으로의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また、お経は総て宇宙の仕組み、天上界のあり方、天上界と人間との関係、意識界、あの世とこの世との関係、この世の人は如何にあるべきかを説かれたものです。
先生の教えを噛み締めますと、お説き下さったことは、総てお経の真髄であることに気づくはずです。
古くから般若心経は素晴らしいお経であるといわれているゆえんも理解できます。

또 , 경전은 모든 우주의 시스템, 천상계의 본연의 자세, 천상계와 인간과의 관계, 의식계, 저 세상과 이 세상과의 관계, 이 세상의 사람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선생의 가르침을 곰곰히 생각하여 이해하면, 설명해 주신 것은, 모든 경전의 진수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반야심경은 매우 훌륭한 경전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내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原説般若心経」さらに「この解説」を読み、理解し、それを日々の考え方に、行為として現わそうとしたときに智者に巡り会ったり、また、心の中から仏智が湧き出てくるものです。
仏智は、神の子として万物の霊長であることを自覚し、気根を正し、心を綺麗にして、善なることを思い、生活に仕事に励んだときに、その人なりに己の心を通して教え導かれるものです。世俗的な表現をすると、気付く、気がする、何となく、等と表現され、またヒント、アイデア等とも言われております。
言い換えると守護・指導霊の導きを得られるのです。
「원설반야심경」더욱더 「이 해설」을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매일 매일의 사고방식에, 행위로서 나타내려고 했을 때에 슬기롭고 사리에 밝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거나, 또, 마음 속으로부터 불지가 솟아 나올 것입니다.
불지는, 신의 자녀로서 만물의 영장인 것을 자각하고, 정신력를 올바르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선한 것을 생각하고, 생활에 일에 힘썼을 때에, 그 사람 나름대로 자기의 마음을 통해서 가르쳐 인도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표현을 하면, 깨닫고, 생각이 나고, 웬지 모르게, 등으로 표현되어, 또 힌트, 아이디어 등이라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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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の散歩のお供をしたときのことです。私が「今度は大丈夫でしょうね」とつぶやいたことがあります。
先生はすかさず「今度は大丈夫だよ。釈迦のときもイエスのときにも本人の書いたものは何ひとつないからね。今度は本人が本も書いたし、ビデオもテープもあるから、今度は大丈夫だよ。心ある人が見ればすぐわかるよ。」と申されました。
선생님이 산보의 동행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이번은 괜찮겠지요.」라고 중얼거린 일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즉시 「이번에는 괜찮아.  석가모니의 때도 예수의 때에도 본인의 쓴 것은 무엇 하나 없으니까. 이번에는 본인이 책도 썼고, 비디오도 테이프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괜찮아.  분별있는 사람이 보면 곧 이해하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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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時の先生の楽しそうなお気持ちが私の心に伝わってくるのです。
このことは「昨日のように」という表現がありますが、私にはそのときのお言葉が今朝のことのように思い出されます。

이 때의 선생님의 즐거워하는 기분이 저의 마음에 전해지는 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제처럼」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 때의 말씀이 오늘 아침의 일처럼 생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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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のご遺稿を遺族の方がまとめて下されば良いのですが、信次先生が説かれたビデオテープも販売しなくなりました。
それゆえ、先生の教えを学ぼうとする方は先生の遺して下さった著書、原典をよく味わい実践の糧としていただきたいと思い編集しました。
もし、神の子として人生の使命と目的を自覚し、その使命と目的に対し、日々実践努力しているなかで理解できないことがあったときには、疑問をそのまま自分の善なる心に問いますと何らかのかたちで納得できるように、気付かせて貰えるものです。
선생님이 유고를 유족이 정리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만, 신지 선생님이 설명하신 비디오 테잎도 판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분은 선생님의 남겨주신 저서, 원전을 자주 맛있게 실천의 양식으로 먹어주시라고 생각하며 편집했습니다.
만약, 신의 자녀로서 인생의 사명과 목적을 자각하고, 그 사명과 목적에 대해서, 매일 매일 실천 노력하고 있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에는, 의문을 그대로 자신의 선한 마음에 물으면 어떠한 형태로든지 납득할 수 있게, 깨닫게 얻는 것입니다.

 

―以下、田口恒勇の「編集にあたって」は、略―
-이하, 다쿠치항 이사무의 「편집에 임하면서」는, 생략-

 


 

序文(서문)


一般に伝えられ、難解といわれている「般若心経」について解説してみたいと思う。
일반적으로 전해지며, 난해하다고 하는「반야심경」에 대해서 해설해 보고자 합니다.

 

般若心経は文字にして全文二百七十六文字からなる。文字こそ少ないが、そのいっている神理は人間の悟りを説いている。
「悟り」とはどういうもので「悟る」と人間はどうなるかを、二百七十六文字で語っている。悟りの状態を言葉で表わそうとすると、どうしても無理がでる。受け取る人によって違ってくる。それだけに般若心経の解説は、これまでもけっこう行われてきたようだが、その真意を伝えているものは少ないようだ。
반야심경은 문자로서 전문 276자로 되어 있다. 문자야말로 적지만, 그 말하고 있는 신리는 인간의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며,「깨닫다」와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를, 276문자로 말하고 있다.
깨달음의 상태를 언어로 나타내려고 하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런만큼 반야심경의 해설은, 지금까지도 꽤 행하여져 온 것 같지만, 하지만, 그 참뜻을 전하고 있는 것은 적은 것 같다.


般若心経を書いた人は中国唐時代の僧、玄奘(げんしょう)である。
六世紀の頃、インドに渡り、霊場、仏典を求めて各地を行脚した。
かくして、今から二千三百年ほど前に、梵語によって書き遺された仏陀の教え大般若経を漢訳し、要約したのが「般若心経」である。

それだけに、神理を伝えている。ただ漢文は表現がオーバーで、ややもすると事実を誇張する傾向があるようだ。  いずれにせよ、この経文は、人間の悟りを説いたものであり、数ある経文の中でも、ひときわ際立っているといえよう。
반야심경을 쓴 사람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스님, 현장이다.
6세기 경, 인도에 건너가, 영장, 불전을 구하려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렇게 하여, 지금으로 부터 2천 3백년 정도 전에, 범어로 해서 기록하고 남겨진 부처님의 가르침인 대반야경을 한역하여, 요약한 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런 만큼, 신리를 전하고 있다.  단지 한문은 표현이 Over해서, 흔히 사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경문은, 인간의 깨달음을 설명한 것이고, 수많은 경문 중에서도, 한층 더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註:中国唐時代の僧、玄奘(げんしょう)とあるのは、一般には玄奘(げんじょう)三蔵、不空三蔵(ふくうさんぞう)ともいわれている方であります。この解説では「玄奘」(げんしょう)と、かな付けされました
※주: 중국 당나라 시대의 스님, 현장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현장삼장, 불공삼장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는 분입니다.  이 해설에서는 「현장」이라고, 사용하겠습니다. 


  


 

ご覧いただいた方、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ここからは以前に書きました、「般若心経のまとめ」の続きです。
とても長くなりますので、ご関心がおありの方だけ、お付き合いください。

봐주신 분,고맙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이전에 쓴, 「반야심경의 총정리」가 이어집니다.
아무래도 길지만, 관심이 있는 분은, 소개해 주십시오.

 


 

※개인적으로 고(故) 다쿠치항 이사무씨에게 감사을 올립니다. 이렇게 소중한 고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의 글을, 생전에친분이 있던, 유키씨라는 분에게 기록을 넘겨주시어, 제가 유키씨의 블로그를 통해, 고(故)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이 글을 소개할 수 있어, 유키란 분이 말씀처럼, 감사를 드립니다. 신선한 미풍입니다.

 


2017년 11월 04일 토요일 밤 10시 38분에, 첨가합니다.

2011년 05월 18일 당시에는 아래처럼, 한국어 발음으로 올렸습니다.

일본어 발음으로 된 내용을 첨부합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まかはんにゃはらみたしんぎょう


観自在菩薩かんじざいぼさつ 行深般若波羅蜜多時ぎょうじんはんにゃはらみたじ 照見五蘊皆空しょうけんごうんかいくう 度一切苦厄どいっさいくやく 舎利子しゃりし


色不異空しきふいくう 空不異色くうふいしき 色即是空しきそくぜくう 空即是色くうそくぜしき 受想行識じゅそぎょうしき 亦復如是やくぶにょぜ 舎利子しゃりし


是諸法空相ぜしょほうくうそう 不生不滅ふしょうふめつ 不垢不浄ふくふじょう 不増不減ふぞうふげん 是故空中無色ぜこくうちゅうむしき 無受想行識むじゅそうぎょうしき 無眼耳鼻舌身意むげんににびぜつしんい


無色声香味触法むしきしょうこうみそくほう 無眼界むげんかい 乃至無意識界ないしむいしきかい 無無明むむみょう 亦無無明尽やくむむみょうじん 乃至無老死ないしむむろうし 亦無老死尽やくむろうしじん


無苦集滅道むくしゅうめつどう 無智亦無得むちやくむとく 以無所得故いむしょとくこ 菩提薩埵ぼだいさつた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はらみたこ 心無罣礙しんむけいげ 無罣礙故むけいげこ


無有恐怖むうくふ 遠離一切顛倒夢想おんりいっさいてんどうむそう 究竟涅槃くきょうねはん 三世諸仏さんぜしょぶつ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みたみたこ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とくあのくたらさんみゃくさんぼだい 故知般若波羅蜜多こちはんにゃはらみた 是大神呪ぜだいしんしゅ 是大明呪ぜだいみょうしゅ 是無上呪ぜむじょうしゅ 是無等等呪ぜむとうどうしゅ


能除一切苦のうじょいっさいく 真実不虚しんじつふこ 故説般若波羅蜜多呪こせつはんにゃはらみたしゅ 即説呪日そくせつしゅわつ 


羯諦羯諦ぎゃていぎゃてい 波羅羯諦はらぎゃてい 波羅僧羯諦はさそうぎゃてい 菩提薩婆訶ぼじそわか


般若心経はんにゃしんぎょう




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まかはんにゃはらみたしんぎょう)



 

仏説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 불설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観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度一切苦厄 舎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즉이색 색즉시공
空即是色 受想行識亦復如是 舎利子 是諸法空相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不生不滅 不垢不浄 不増不減 是故空中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声香味触法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無無明亦 無無明尽 무한계 내지무의시계 무무명역 무무명진
乃至無老死 亦無老死尽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 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礙 無礙故 無有恐怖 遠離一切顛倒夢想 심무애 무애고 무유공포 원리일체전도몽상
究竟涅槃 三世諸仏 依般若波羅蜜多故 구공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蜜多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真実不虚 故説般若波羅蜜多呪 제능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即説呪日 羯諦 羯諦 波羅羯諦 波羅僧羯諦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菩提薩婆訶 般若心経 보리살바하 반야심경

 

(※以上、般若心経全文)
(※이상, 반야심경 전문)

 



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by 高橋信次先生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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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訶(まか)とは古代インド語のマーハーの音訳である。マーハーとは、偉大なとか、大いなるの尊称の意味に使われている。
仏弟子である目連(もくれん)のことをモンガラアナーといったが、天眼(てんがん)が優れていることと、同一の姓が多かったため、大目連、つまりマーハー・モンガラアナーと尊称していわれた。
またゴーダマ・シタルダーの義母を弟子たちはマーハー・パジャパティーと呼んでいた。
마하(摩訶)란 고대 인도어의 마하의 음역이다.  마하란, 위대한이라든지, 커다란의 존칭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제자인 목련의 일을 몽가라나 라고 말했지만, 천안이 뛰어난 것과, 동일의 성(姓)이 많았기 때문에, 대목련, 즉 마하 몽가라아나 라고 존칭하였습니다.
또 고다마 싯타르다의 의모를 제자들은 마하 파쟈파티라고 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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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はんにゃ)とは、仏智のことである。魂の転生輪廻の過程において体験し、学んで得たいわば智慧の極点であって、その極点が意識の中に記録されているのである。
반야(般若)란, 불지이다. 혼의 전생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체험하고, 배우고 얻은 말하자면 지혜의 극점이며, 그 극점이 의식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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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の一生は五十年、百年ではない。何億、何十億もの人生経験を経て、現在ある。その経験から学び取った智慧が意識のかなに収まっている。
사람의 일생은 50년, 100년이 아니다. 몇 억, 몇 십억도 인생체험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취한 지혜가 의식속에 제대로 들어가고 있다.

 

それ故に、無為徒食(むいとしょく)した者に、そうした意識が収まるわけがない。最善をつくし、その一生を努力と奉仕のなかにあった者の善知識が記録されているのである。
그런고로, 무위도식한 사람에게, 그런 의식이 제대로 들어갈리가 없다.  최선을 다하고, 그 일생을 노력과 봉사 속에 행한 사람의 선지식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医学を学ばないで医術を施すことはできないのと同じように、意識の記録は、現象界で学んだこと、経験して得た人生の正道が収められているのである。
의학을 배우지 않고서 의술을 베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기록은, 현상계에서 배운 것,
경험하고 얻은 인생의 정도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もちろん、それだけではない。私たちの人生は、この世だけではなく、実はあの世もある。あの世でも修行があるのである。
あの世の修行は長い。千年、二千年である。ただこの現象界の利点は、玉石混淆(ぎょくせきこんこう)の世界だけに、数多くのことを、同時的に学び得ることができる。
したがってあの世の十年は、この世の一年で足りよう。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이 세상뿐이 아니고, 사실은 저 세상도 있다. 저 세상에서도 수행이 있는 것이다.
저 세계의 수행은 길다. 1,000년, 2,000년이다. 단지 이 현상계의 이점은, 옥석혼효(좋은 것과 나쁜것을 동일시함)의 세계뿐으로, 수많은 것을, 동시적으로 배우고 얻을 수가 있다.
따라서 저 세상의 10년은, 이 세상의 1년으로 충분하다.

 

何れにせよ、そうした人生経験から得た知識、善知識が意識のなかに記録されている。
人生の記録だから正道に反した想念と行為についても記録される。それだけに、それが業(かるま)となって同じところを行きつ戻りつする魂も出てくるわけだ。
결국, 그러한 인생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 선지식이 의식속에 기록되어 있다.
인생의 기록이므로 정직에 반한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도 기록된다. 그런만큼, 그것이 업이 되어 같은 곳을 왔다갔다하는 혼(魂)도 나오는 것이다.

 

人間の意識には表面意識(ひょうめんいしき)と潜在意識(せんざいいしき)がある。過去世の記録は潜在意識のなかにかくされている。
偉大な発明発見が、最善の努力を重ねているうちに、思わぬ結果となって生まれてくる。
新しいアイデア、あるいは人生の危機を回避できた発想というものは、ほとんどが、潜在意識の作用によるものである。
인간의 의식에는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이 있다. 과거세의 기록은 잠재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다.
위대한 발명 발견이, 최선의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결과가 되어 생겨난다.
새로운 아이디어, 혹은 인생의 위기를 회피한 발상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잠재의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般若の智慧は、こうしたものも含めて、いわば最高最智の智慧であり、その仏智は、正道を悟ることによって、潜在意識と表面意識が調和されたときに生じてくるものである。
般若の智慧については後で詳述する。
반야의 지혜는, 이러한 것도 포함하고, 말하자면 최고최지(最高最智)의 지혜이며, 그 불지는, 정도를 깨닫는 것에 의해서, 잠재의식과 표면의식이 조화되었을 때에 생겨나오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에 대해서는 후에 상세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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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に、波羅蜜多(はらみった)であるが、これはバラモン教典のパラミターがその原語である。
パラ(波羅)とは到着するという意味であり、ミター(蜜多)とは、この場合智慧ともいい、通常は彼岸という風に解釈している。
다음에, 바라밀다이지만, 이것은 바라몬 교전의 바라미타가 그 원어이다.
바라(波羅)란 도착하다라고 하는 의미이며, 밀타(蜜多)란, 이 경우 지혜라고 해도 좋고, 통상은 피안이라고 하는 경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二千五百有余年前のインド、それも中インドでは蜂蜜は貴重品であった。蜂蜜は栄養価も高く、容易に口に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のため仏陀は説法の際に、蜂蜜を例にとって、波羅蜜多の説明をしたのである。
2천 5백여년 전의 인도, 그것도 중인도에서는 벌꿀은 귀중품이었다.  벌꿀은 영양가도 높고, 용이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부처는 설법할 때에, 벌꿀을 예를 들어, 바라밀다의 설명을 했던 것이다.

 

すなわち、智慧とは蜜の一杯つまった最も栄養価の高い至上のものであり、これを得るには正道にそった生活行為しかないということを説いたのである。
즉, 지혜란 꿀의 가득 찬 가장 영양가가 높고 최상의 것이며, 이것을 얻는데에는 정도에 따른 생활행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このように彼岸は智慧の宝庫を指しているわけです。
「彼岸」がある以上「此岸」がある。此岸とは業生の世界であり、彼岸とは業生を解脱した悟りの境涯(きょうがい)をいう。
이와 같이 피안은 지혜의 보고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피안」이 있는 이상 「차안」이 있다.  차안이란 업생의 세계이며, 피안이란 업생을 해탈한 깨달음의 경애를 말한다.

 

ところで、バラモンの経典はイグヴェダー、ウパニシャドを中心として成り立っている。
バラモン教は長い歴史を持っており、その発生は約四千余年の昔にさかのぼる。バラモンの教えはエジプトから伝わり、インドで教典化された。
그런데, 바라몬의 경전은 이 이구웨다-,우바니샤도를 중심으로 해서 성립되고 있다.
바라몬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발생은 약 4천 여년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라몬의 가르침은 이집트로부터 전해지고, 인도에서 교전화되었다.

 

一万二千年前のアトランテス時代のアガシャーより伝えられて、のちエジプトで神理が説かれたのは今から約四千二百年ほど前にさかのぼる。クレオ・パローターやアモンという人々が説いたものである。モーゼより以前である。
バラモン教典の中身はそれだけに神理が書かれており、観自在菩薩(かんじざいぼさつ)についても触れている。
1만 2천년 전의 아틀란티스시대의 아가샤에게서 전해지고, 후에 이집트에서 신리가 설명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2백년 정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라몬 교전의 내용은 그런만큼 신리가 쓰여져 있고, 관자재보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本来、バラモン教は、クレオ・パローターが説いたその神理を教典としているのだから、教典そのものには過ちが少ないが、月日が経つにしたがって形骸化(けいがいか)され、階級制度がバラモン教を支配する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
본래, 바라몬교는, 크레오 바로타가 설명한 그 신리를 교전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전 그 자체에는 실수가 적지만,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서 형해화(빈 껍데기) 되어, 계급제도가 바라문교를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仏教が二千五百有余年後の今日、哲学となり、学問になった。僧侶の世界はいつしか階級制度が採られ、檀家や寺院を維持するための職業と化している。しかし、仏典の中身は、この般若心経にしても仏陀の説法が説かれているのであり、間違いは少ないのである。
불교가 2천 5백여년 후의 지금, 철학으로 되어, 학문이 되었다. 승려의 세계는 어느덧 계급제도가 채택되어, 시주나 사원을 유지하기 위한 직업화 하고 있다.  그러나, 불전의 내용은, 이 반야심경에 있어서도 부처의 설법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며, 잘못은 적은 것입니다.

 

ただ、古代インド語が漢文になり、その漢文も音訳が多いために、漢字の意味と事実との間のかなりの隔(へだ)たりがあって、ますますその真意が解らなくなってしまったことは否定できない。
ともかく、こういうように、バラモンの教典そのものは、神理を説いているが、今日の仏教と同様な経過を辿(たど)っていったのである。
단지, 고대 인도어가 한문으로 되어, 그 한문도 음역이 많기 때문에, 한자의 의미와 사실과의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고, 더욱 더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렇게, 바라몬의 교전 그 자체는, 신리를 설명하고 있지만, 오늘의 불교와 다름없는 경과를
더듬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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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経(しんぎょう)とは、文字通り、心の経である。経とは梵語のストラーを翻訳(ほんやく)したもの。その意味は心の核、つまり核心(かくしん)ということになろうが、心という言葉ほど掴(つか)み難く、それでいて今日、これほど簡単に使われているものも少ないようである。
吾人はよく心の調和を口にするが、それだけに現世の人間関係は不調和であり、それを願う気持ちが大きいといえる。
심경(心經)이란, 문자대로, 마음의 경(經)이다.  경(經)이란 범어의 스트라를 번역한 것.  그 의미는 마음의 핵, 즉 핵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마음이라고 하는 말만큼 잡기 어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렇까지 간단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도 적은 것 같다.
우리들은 자주 마음의 조화를 말하지만, 그것만큼 현세의 인간관계는 부조화하고, 그것을 바라는 기분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しかしながら、心の実体、実相というものを知らずして、それを願うことは不可能ではないだろうか。
では、いったい心とは何だろうか。心とはどういう機能を持って私たちを動かしているのだろう。心経で教える心とは何を意味するのだろう。
그렇기는 하지만, 마음의 실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서, 그것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까요. 그럼,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이란 어떠한 기능을 가지고 우리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심경에서 가르치는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一口にいって、それは永遠に変わることのない魂の中心が心なのである。
結論を急げば、心とは、人間と宇宙を貫く同一の意識である。
同一の意識とは、万生万物を生かし続けているところの大自然の偉大な叡智(えいち)、慈悲、愛の意識である。
한마디로 말하서, 이것은 영원히 변하는 것이 아니고 혼(魂)의 중심이 마음인 것이다.
결론을 서두르면, 마음이란, 인간과 우주를 꿰뚫는 동일한 의식이다.
동일한 의식이란, 만생만물을 살리고 이어가게 하고 있는 대자연의 위대한 예지, 자비, 사랑의 의식이다.

 

言葉をかえれば、それは私たちの心の中に内在されている仏智であり、心経は、心の極点であるその仏智を教えているものである。
바꿔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 내재되어 있는 불지이며, 심경(心経)은, 마음의 극점인 그 불지(仏智)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こういうと、いかにもむずかしく、ますますその意味を解しかねる向きもあると思うが、要は赤子のような素直な感情と、それでいて、何もかも見通せる能力と、泉の如く湧き出でる無限の大智識を内に包んだ状態であるといえる。
이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고, 더욱 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방향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요점은 갓난아이와 같은 솔직한 감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환히 들여다보게 하는 능력과, 샘물과 같이 솟아나는 무한의 대지식을 안에 감싼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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魂の存在を否定する人が多くなっている。
理由は死後の生活が解らないということと、科学の発達が未知な分野を解明してきているからだ。
しかし、死後の生活が解らないから否定する、科学がナゾ解きをしてくれるから、魂がないと、どうしていえるだろう。
혼(魂)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유는 사후의 생활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과학의 발달이 미지한 분야를 해명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후의 생활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하며, 과학이 수수께끼풀이를 해주기 때문에, 혼이 없으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死者がよみがえって、生きている人と談笑した例は、枚挙にいとまがない。
私などは、霊的には、年がら年中、死者と話している。だから、死者の霊というものは存在し、あの世で生活していると、声を大にしていえるのである。しかし人は、なかなか信じてはくれない。そこで、いろいろ例を挙げて説明するが、それでも信じない人がいる。
사망자가 되살아나고, 살아 있는 사람과 담소한 예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나와 같은 경우는, 영적으로는, 일년 내내,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죽은자의 영(靈;혼령)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고, 저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지만, 그런데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こういう人は不幸な人である。あの世を信じられない人は、どうしても、この世の常識での枠内でしか、ものを見る目を養われないからである。
이러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저 세상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 세상의 상식으로의 테두리 안에서 밖에, 사물을 보는 눈을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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霊媒者(れいばいしゃ)は世界各地に散在している。霊媒とは、あの世の霊が霊媒者の意識と肉体を借りて、ものを語ったり、物品を移動したり、念写をしたりする人のことである。
영매자(霊媒者)는 세계 각지에 산재하고 있다.  영매란, 저 세상의 영혼이 영매자의 의식과 육체를 빌려서, 사물을 말하거나, 물품을 이동하거나, 염사(→심령 현상으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만으로 간판이나 필름을 감광시켜, 풍경이나 인물의 상을 찍어낸다는 것)를 하거나 하는 사람의 일이다.

 

物理的には到底考えられないことが、霊媒を通すと、それができるのである。その状況は奇術か手品に似ている。ところが奇術や手品は、チャンとした仕掛けがある。その仕掛けをおぼえれば誰にでもできる。が、霊媒現象はそうはいかないのだ。万事、あちらまかせだからである。しかし、そうした非物理的(この世から見た場合に)なことが可能であるという事実は、三次元以外の次元のちがった世界が存在し、その世界からの働きがあるからでき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のである。
물리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지만, 영매를 통하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상황은 마술이나 속임수와 흡사하다. 그런데 마술이나 속임수는, 쇠사슬(Chain)으로 된 장치가 있다.  그 장치를 기억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매현상은 그렇게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을, 저쪽에 맡겨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물질적(= 이 세상에서 본 경우에)인 일이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은, 3차원 이하의 차원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로부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霊媒者の背後には、必ず、一人ないしは数人の霊人が立っている。次元の低い霊媒者には、動物霊が姿を見せている。そうして、こうした背後の霊が、灰皿を空中に浮かしたり、本人が語れないようなことを語ったり、念写を実現させている。現実にまったく無いものを生み出す物質化現象については、霊媒者の意識が高くないとできないものだ。物質化現象は、ある意味では物品移動に相違いないが、他の天体の物質を、地球の物質に変え、現わすことだってできるのであり、こうしたことは低次元の霊にはできないことだ。物品移動は、家のなかである物を、A点からB点に移動させる、家の中から百メートル離れたある地点に移動させることである。こういうことは動物霊でもよくやるのである。
영매자의 배후에는, 반드시, 한 사람내지는 몇 사람이 영인이 서 있다. 차원의 낮은 영매자에게는, 동물령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해서, 이러한 배후의 영혼이, 재털이를 뜨게 하거나, 본인이 말할 수 없는 듯한 것을 말하거나, 염사를 실현시키고 있다.  물질화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물품 이동에 틀림이 없지만, 다른 천체의 물질을, 지구의 물질로 바꾸어, 나타내는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일은 저차원의 영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물품 이동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A점에서 B점으로 이동시키고, 집 안에서 100m 떨어진 어느 지점에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동물령(動物靈)이라도 잘 하는 것이다.

 

何れにしても、こうしたことは、三次元的物の見方では考えられないことであろう。しかし、こうした実験は、アメリカ、イギリス、フランス、インド、日本でも、霊媒と称する人を通して行われている。
問題は、こうしたことができても、その客観的説明になると、現在の科学ではまだそれは不可能に近く、霊媒者という特殊(本来そうではないが)な人でないとできないところにあるようだ。
어차피, 이러한 일은, 3차원적 사물의 견해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일본에서도, 영매로 칭하는 사람을 통해서 행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해도, 그 객관적 설명이 되려면, 현재의 과학에서는 아직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영매자라고 하는 특수(=본래 그렇지 않지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경우에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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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あの世に霊が存在しないといい切れるものではないのである。
アインシュタインの相対性原理以前の宇宙像は、宇宙は二つの異なった要素、つまり物質とエネルギーをいれる容器であるというものであった。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 세계에 영혼(靈=혼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윈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이전의 우주상은, 우주는 두 개의 다른 요소, 즉 물질과 에너지를 넣을 수 있는 그릇(容器)라고 하는 것이었다.

 

ところがアインシュタインは、質量とエネルギーは同等であり、物質はエネルギーの集中したものであるとみたのである。物質が質量を持たずに光速で走っていれば、それを幅射とか、エネルギーと呼ぶことができようし、反対にエネルギーが凝結して別の形をとれば、これを物質と呼べ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この理論によって、光、熱、音、運動などについても同様にエネルギー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물질과 에너지는 동등하며, 물질은 에너지의 집중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물질이 질량을 가지지 않고서 광속으로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복사라든지, 에너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과 같이, 반대로 에너지가 응결해서 다른 모양을 보이면, 이것을 물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해서, 빛, 열, 소리, 운동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에너지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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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とエネルギーはこのように同一の要素からできているが、同時に、エネルギーそのものは永遠にして不滅なのである。よく引き合いに出すが、水の性質がこれを最もよく物語っている。
물질과 에너지는 이와 같이 동일의 요소에서 나오고 있지만, 동시에, 에너지 그 자체는 영원으로서 불멸한 것이다.  잘 증거로 내세우지만, 물의 성질이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氷も、水も、ともに物質であり、前者は固体として、後者は液体として人間の視覚にはっきりとらえられる。ところが熱粒子にあたためられると、氷や水はやがて、気体となって蒸発してしまう。目に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しかし蒸発した水が無くなった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く、天空高く舞い上がった目に見えない水滴は、天空で冷やされ、雨や雪となって落ちてくる。つまり、地球上の水の質量は、こうした循環をくりかえしながらも、決して、減ることも、増えることもないのである。
얼음도, 물도, 같이 물질이며, 전자는 고체로서, 후자는 액체로서 인간의 시각에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열입자에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면, 얼음이나 물은 이윽고, 기체로 되어 증발해 버린다.  눈으로 볼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증발한 물이 없어진 것인가 라고 하면 그렇지는 않고, 하늘 높이 춤추듯 너울거리며 날아 올라간 눈으로 볼 수 없는 물방울은, 하늘에서 얼어버리고, 비나 눈이 되어 떨어진다.  즉, 지구상의 물의 질량은, 이러한 순환을 거듭해 가면서도, 결코, 줄어드는 일도, 증가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一切の物質は、このように時にはエネルギーとして空中に存在し、そうして、さまざまな条件の組み合わせによって、動、植、鉱の物質として生まれ変わっている。
こうみてくると、物質とエネルギーは形を変えた不滅(ふめつ)の連続体としてとらえる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連続体とはつながっていることを意味している。
アインシュタインは、天空に広がる大宇宙を、時間と空間とからなる四次元の世界として、これをながめている。
일체의 물질은, 이와 같이 때로는 에너지로서 공중에 존재하고,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 조건의 조합에 의해서, 동물, 식물, 광물의 물질로서 태어나고 변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물질과 에너지는 모양를 바꾼 불멸의 연속체로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연속체와는 이어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物質の実像は、四次元にあって、はじめて、実在性を伴うとしている。
たしかに、大宇宙を三次元の主観的な空間としてとらえるだけでは、明滅する星の距離も判らず、客観的な実在性も伴っては来ない。ただ、空間に、物が、在る、ということにすぎない。そこで、これに一つの次元の時間を加えることによって銀河系は、はじめて、その全貌を現わすことができよう。すなわち、秒速五万六千キロの早さで、無限の彼方に遠ざかる巨大な星雲、五億光年も離れた島宇宙のきらめきをキャッチする望遠鏡にしても、時間という測定単位が加わることによって、宇宙の生命、星雲の実体というものが認識されてこよう。
물질의 실상은, 4차원에 있고, 비로소, 실재성을 수반한다고 하고 있다.
분명히, 대우주를 3차원의 주관적인 공간으로서 파악하는 것으로는,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별의 거리도 알 수 없고, 객관적인 실재성도 수반해서는 오지 않는다. 단지, 공간에, 물질이,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에 하나의 차원의 시간을 더하는 것에 의해서 은하계는, 비로소, 그 전모를 나타낼 수가 있다.  즉, 초속 5만 6천km의 속도로, 무한의 저쪽으로 사라지는 거대한 성운, 5억 광년도 떨어진 섬 우주의 반짝임을 포착하는 망원경으로도, 시간이라고 하는 측정단위를 더하는 것에 의해서, 우주의 생명, 성운의 실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物が運動するとは、時の経過を意味している。時間のない運動はあり得ない訳である。その意味では、時間は、物体が点から点に移る連続体として、これをとらえることもできよう。
물질이 운동하는 것이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고 있다.  시간의 없는 운동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 의미로는, 시간은, 물체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연속체로서, 이것을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私たちの肉体と意識についても、さきほどの物質とエネルギーとしてみることができるし、人間がこの地上に存在するということは、そのこと自体、そのまま、四次元の世界を形成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過去、未来という時の流れのない人間がもしあるとすれば、それは死した化石にすぎないといえるだろう。
우리들의 육체도 의식에 대해서도, 조금 전 물질과 에너지로서 볼 수 있다고 하고, 인간이 이 지상계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일 자체, 그대로, 4차원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의 없는 인간이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죽은 화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何れにせよ、私たちが、現在、肉体を持って、地上に存在するということは、存在する以前に自分があったであろうし、肉体は死しても、エネルギーは不滅の法則通り、自分自身は、なおも存在し続けるものである。人間以外の他の物質が、エネルギーにとってかわって時間の流れにそって、永遠に生き続けるというのに、人間だけが、「死して灰(※なんにもなくなる)になる」ということはあり得ないではないか。
人の存在はそのまま四次元を形成し得ることは、実は、重大な意味を持っている。
어차피, 우리들이, 현재, 육체를 가지고, 지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존재하기 이전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고, 육체는 죽어도, 에너지는 불멸의 법칙대로, 자기 자신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어지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물질이, 에너지로 변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영원히 삶을 이어간다고 하는데, 인간만이, 「죽어서 재(※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가 된다 」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닌가.


四次元がある以上は、五次、六次元もあるわけであり、そうした連続体の中に、人は呼吸し続けている。この点については、後でまた詳述したい。
ここで述べたいことは、肉体と意識、肉体と魂が次元を異にしながらも、同時に存続し、肉体が大気に還元される(死ぬ)時には、人の魂はその肉体から抜け出し、なおも行き続け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4차원이 있는 이상은, 5차원, 6차원도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연속체 속에, 사람은 호흡하고 이어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상세히 설명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육체와 의식, 육체와 영혼(魂)이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동시에 존속하고, 육체가 대기에 환원할(죽을) 때에는, 인간의 영혼(魂)은 그 육체에서 빠져 나가, 여전히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現代の科学が、人間の死後の生活や魂の存在を認めようとしているのに、その一方では科学がこれを否定してくれると思われているところに、問題がある。科学者は科学する心を広めれば広めるほど、生命の驚異(きょうい)に畏敬(いけい)の念をいだく。これを逆にいえば科学を学ばない人ほど、生命を軽んじるようである。
현대의 과학이, 인간의 사후의 생활이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데, 그 한편으로는 과학이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문제가 있다.  과학자는 과학하는 마음을 넓히면 넓힐수록, 생명의 경이에 외경을 품는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과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 정도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魂の存在は、以上の簡単な説明でも容易に理解されると思う。
魂は、肉体舟をあやつるところの、己の意識である。個性を持った意識である。したがって、その魂は千差万別であり、成仏する魂もあれば、迷える魂も出てくるわけである。
영혼(魂)의 존재는, 이상의 단순한 설명으로도 용이하게 이해된다고 생각한다.
영혼(魂)은, 육체배를 움직이기 위한, 자기의 의식이다.  개성(個性)을 가진 의식(意識)이다.  따라서, 그 영혼(魂)은 천차만별이며, 성불(成仏)하는 영혼(魂)도 있다면, 헤매는 영혼(魂)도 나오는 것이다.

 

そうして、その魂を魂として機能化させているものが心なのである。心は、魂の中心にあって、魂を永遠に生かし続けているものである。心経とは、その心の教えなのである。
그렇게해서, 그 영혼(魂)을 영혼(魂)으로서 기능화시키고 있는 것이 마음인 것이다.  마음은, 영혼(魂)의 중심에 있고, 영혼(魂)을 영원히 살게하고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심경(心經)이란, 그 마음의 가르침인 것이다.

 

 

 


 

前記事、「般若心経のまとめ」の続きです。今回からその本文に入ります。
以下、紹介させて頂きます。転載です。
앞의 기사, 「반야심경의 총정리」가 이어집니다.  이번부터 본문에 들어갑니다.
이하, 전재합니다.

 

 


 


観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舎利子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この意味は、一般の立場からみると、その行(生活行為)が深まっていくと、五蘊(ごうん=色、受、想、行、識)は皆空なり、と観ぜられ、一切の苦厄から離れることができる。即ち、波羅蜜多(はらみった=彼岸)の般若(はんにゃ=無限の智慧)、観自在菩薩の境涯に至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になる。
이 의미는, 일반의 입장에서 보면, 그 행위(생활행위)가 깊어지면,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은 모두 공(皆空)이고, 자세히 살펴 보게 되어, 일체의 고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즉, 바라밀다(波羅蜜多=피안)의 반야(般若=무한의 지혜), 관자재보살의 경애에 이를 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된다.

 

観自在(かんじざい)という言葉は、ヴェダーやウパニシャドの経典に「アポロキティ・シュバラー」として載っており、その意味は、過去、現在、未来の三世を自在に見ることのできる超能力のことである。
ところで、ここでいっている観自在菩薩は、仏陀を脳裏に描きながら、仏陀を指していっているのである。このため、その解釈は、大分ちがってくるのである。
관자재(観自在)라고 하는 말은, 우다나 우바니샤드의 경전에 「아포로키티 슈바라」로서 기재되어 있고, 그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자재로 볼 수 있는 초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관자재보살은, 부처님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부처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 해석은, 상당히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仏陀が、般若の智慧をもって行じる(法話する)時は、五蘊(五官六根)に迷う衆生は、その迷いからさめ光明世界(皆空)に、第一歩(度一切苦厄)を印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부처님이, 반야의 지혜를 가지고 행하는 (법을 설명하는) 때는, 오온(오관육근)에 헤매는 중생은,
그 미혹으로부터 깨달은 광명세계(개공)로, 제일보(도일체고액)을 남길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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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行深般若波羅蜜多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いったい般若の智慧とは、どうすれば得られるか、深く行ずるといって、何をどう行ずればよいのか、と誰しも疑問をもたれるであろう。
그럼, 행심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반야의 지혜란, 어떻게 하면 얻을수 있을까, 깊게 행한다고 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면 좋은걸까, 라고 누구라도 의문을 기대는 것이다.


ふつう「行」というと、厳しい肉体行を考えてしまう。二千五百余年前のインドでも、肉体をいじめることによって、悟れると考えられた。バラモンも、ヨガも、拝火教にしても、必ず、厳しい肉体行がついて回った。
釈迦の弟子のなかにも、色情の心を絶つために肉体の一部を切り落とした者もいたほどであった。
しかし、肉体の一部を切り落としても、その想念が色情に包まれていれば、意味がない。肉体は悟りの大事な因子であり、これが損なわれれば精神も不健康になってくる。
肉体と精神というものは、現象界にある間は、不可分の関係にあって、どちらも大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보통 「행」이라고 하면, 엄격한 육체수행을 생각해버린다.  2천 5백여년 전의 인도에서도, 육체를 괴롭히는 것에 의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라문도, 요가도, 배화교에서도, 반드시, 엄격한 육체행이 붙어 다녔다.   석가모니의 제자 중에도, 색정의 마음을 끊기 위한 육체의 일부를 끊어버린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육체의 일부를 끊어버려도, 그 상념이 색정에 휘감겨버리면, 의미가 없다.  육체는 깨달음의
소중한 근본 요소이며, 이것이 손상되면 정신도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육체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계에 있는 동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어느쪽이라도 소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もちろん、正道を知って、自分の意思なり肉体を試す意味での肉体行は、決して悪いことではない。
しかし、正道を知らずして、肉体遠離(にくたいおんり)の考えだけで、悟れると思ったら、大間違いである。行者の末路が尋常でないのも、正道を知らずして空観(くうかん)のみを求めるために、魔に浸(おか)されるからである。
물론, 정도를 알고, 자신의 의사가 되고 육체를 시험하는 의미로의 육체행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도를 알지 못하고, 육체원리의 생각만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행자의 말로가 심상치 않은 것도, 정도를 알지 못하고 공관(空觀)의 열매를 구하기 때문에, 마귀에 빠지게 되는 이유이다.

 

「行」とは、生活である。調和をめざした生活行為を「行」というのである。
大自然は調和されている。そうして永遠の調和をめざして、春夏秋冬の「行」を行じている。
正道は、こうした大自然の「行」を教典として成り立っており、生活行為を離れては「行」は存在しないのである。

弦の音は、強くしめれば糸は切れ
弦の音は、弱くては音色が悪い
弦の音は、中ほどに締めて音色がよい
弦の音に 合わせて踊れ 踊れや踊れ

「행」이란, 생활이다.  조화를 목표로 한 생활행위를 「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자연은 조화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영원한 조화를 목표로 해서, 춘하추동의 「행」을 행하고 있다.   정도(正道)는, 이러한 대자연의 「행」을 교전으로서 성립하고 있고, 생활행위를 벗어나서는 「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현의 소리는, 강하게 조이면 줄은 끊어지고,
현의 소리는, 약해서는 음색이 나쁘고,
현의 소리는, 중간 정도로 조이면 음색이 좋고,
현의 소리에 맞추어 춤추고 춤추고 춤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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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唄を耳にしたとき、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釈迦)は、過去六年の肉体行に決別した。
中道こそ、人の道であり、自然に即した生き方である、と悟ったのである。
この唄をきいてから、ゴーダマは生臭い牛乳も口にした。これをみた五人のクシャトリヤは、ゴーダマは「行」を捨てたといって離れてゆく。
しかしゴーダマは、その信ず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その後は、栄養になるものは、何でも口にした。そうして、骨と皮とになった肉体の回復をはかっていった。
이 노래를 들었을 때에, 고다마 싯타르다(석가)는, 과거 6년의 육체행에서 결별했습니다.
중도야말로, 사람의 길(道)이며, 자연에 입각한 삶의 방식이다,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이 노래를 듣고서, 고다마는 비릿한 우유도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다섯 명의 크샤트리야는, 고마다는 「행」을 제거했다라고 말하며 떠나 갑니다.
그러나 고다마는, 그 행하는 것에 따라서, 그 후에는, 영양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뼈와 가죽만 남은 육체의 회복을 도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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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とは、調和であり、右にも、左にも偏らない想念と行為である。すなわち、正しい想念行為(八正道)が、弦の音色をよくすることを知ったのである。
중도란, 조화이며,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념과 행위이다.  즉, 올바른 상념행위(팔정도)가, 현의 음색을 능숙하게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このように中道の精神は、肉体と精神、あの世とこの世についてもいえるのであり、五官六根に執着した肉体保存のみの考え方では、人間は悟れないのである。勿論、あの世については、普通はわからない。しかし、肉体と精神というものが個々バラバラには存在していないし、両者のバランスのとれた状態が、もっとも気分を爽快にし、能率を高めるとは、誰しも経験するところであり、そうしたバランスのとれた状態を続けることによって、やがて、その奥にかくされた、あの世とこの世の関係というものが、明らかにされてくるのである。
이와 같이 중도의 정신은, 육체와 정신, 저 세상과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오관육근에 집착한 육체보존의 열매의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저 세상에 대해서는, 보통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각각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양자의 균형의 잡힌 상태가, 좀 더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이윽고, 그 안쪽에 감추어진, 저 세상과 이 세상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観自在の心は、こうした正道に適った生活、反省による日常生活のバランスと執着を絶つことが大きな前提としていることを、ここではいっているのである。
ここで執着について考えてみると、大抵の人は、執着を絶てば、人間は生きていけない、と思っているようだ。
관자재의 마음은, 이러한 정도에 적합한 생활, 반성에 의한 일상생활의 균형과 집착을 끊는 것이 큰 전재로 하고 있는 것을, 여기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집착을 끊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ところが、生きる、ということと、執着とは、次元の異なった想念なのである。
執着とは、とらわれであり、生きるとは、調和なのである。
とらわれるとは、これは俺のものだ、俺はこれこれのことをした、あの子は私のものだ、金がすべてだ、地位が高ければ肩身が広い、といった想念である。
그런데, 산다, 라고 하는 것과, 집착이란, 차원의 다른 상념인 것이다.
집착이란, 얽매임이며, 산다는 것은, 조화인 것이다.
얽매인다라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의 것을 했다. 저 아이는 내 것이다. 돈이 전부다, 지위가 높아지면 체면이 넓다, 라고 하는 상념이다.

 

こうした想念が自分を支配してしまうと、その自由な心を自分がしばってしまい、苦しみが始まる。腹を痛めた子がそばにいないと悲しいし、地位が低いと肩身が狭く感じてくる。
自分の心を大きくし、安らぎのあるものにするには、こうした執着を絶たねば、いつになっても心の重荷は取れないし、悟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る。
이러한 상념이 자신을 지배해 버리면, 그 자유로운 마음을 자신을 묶어 버리고, 괴로움이 시작된다.
배 아프고 난 자식이 곁에 없으면 슬프고, 지위가 낮아지면 체면이 좁게 느껴진다.
자신의 마음을 크게 해, 평온함이 있는 것으로 하려면, 이러한 집착을 끊지 않으면, 언제가 되어도 마음의 무거운 짐은 사라지지 않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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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は、生きるためにはどうすればいいか。この地上の目的は調和にある。万生万物を調和させるために、人間は、この世に生を得ている。大自然は、その生命を維持するために、我々人間に、必要なものを与えている。これは俺のものだ、ここからここまでは俺の地所だと肩意地を張るから、争いが生じてくる。足ることを知らないからなのである。
그럼,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지상의 목적은 조화에 있다. 만생만물을 조화시키기 위해서,인간은, 이 세상에 생명을 얻고 있다.  대자연은,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있다.  이것은 내 것이다.  여기로부터  여기까지는 내 땅이다라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生きるに必要なものは、神は平等に与えているのだから、その心にしたがった生活を送れば、何の不足も、不満も生じてはこないはずである。執着を持たなくとも、人間は立派に生きて行けるのである。建設もできるのである。建設と執着は別物である。この点を混同すると、執着がないと生きてゆけない、という想念に支配されてしまう。
사는데에 필요한 것은, 신은 평등하게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에 따른 생활을 보내면, 무엇의 부족해도, 당연히 불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집착을 갖지 않더라도, 인간은 훌륭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건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건설과 집착은 별개의 것이다.  이 점을 혼동하면, 집착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다, 라고 하는 상념에 지배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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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ように心を軽くするには、まず、その一つひとつの執着の根を外してゆくことである。とらわれをなくして行くことが大事である。そうすると、中道の心が次第に明瞭になってき、観自在心(かんじざいしん)に到達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이와 같이 마음을 가볍게 하는 데에는, 우선, 그 하나 하나의 집착의 뿌리를 떼어내 가는 것이다.  얽매임을 없애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중도의 마음이 다음에 명료하게 되어 오며, 관자재의 마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の五蘊とは、色、受、想、行、識の五つ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その根源は、五官六根であるところの、眼、耳、鼻、舌、身、意である。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의 오온이란, 색, 수, 상, 행, 식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 근원은, 오관육근인 곳의,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다.

 

まず色(しき)とは、現象世界のこの世であり、受とは、それを受け入れる感覚、想とは、その感覚にもとづいた想念、行とは、それの想念行為、識とは、そうした想念行為から生まれた業想念、考え方を指す。
こうした想念と行為というものは、とりもなおさず五官六根から生まれるのである。五官六根がなければ、五蘊の発生する余地がない。したがって五官六根こそ問題であり、生老病死の苦悩も、ここから出てくるわけである。
우선 색(色)이란, 현상세계의 이 세상이며, 수(受)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 상(想)이란, 그 감각에
의거한 상념, 행(行)이란, 그것의 상념행위, 식(識)이란, 그러한 상념행위에서 태어난 업상념,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념과 행위라고 하는 것은, 움켜쥐고도 바로 잡지 않으면 오관육근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오관육근이 없으면, 오온의 발생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오관육근이야말로 문제이며, 생노병사의 고뇌도,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肉体は人生行路の大事な舟であり、五官がなければ現象界での生活はできない。
問題は、これに意(想念)が加わり、その意は、色、受、想、行、識というものを形作っているために、煩悩にふりまわされてしまう。
육체는 인생행로의 중요한 배이며, 오관이 없으면 현상계에서의 생활은 할 수 없다.
문제는, 이것에 의(상념)가 더해져, 그 의(意)은, 색, 수, 상, 행, 식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번뇌에 휘둘리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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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官六根の浄化は、これまでいろいろな面から繰り返し述べているように、中道を根本とした生活、つまり想念と行為の中道化、それは八正道にもとづく実践と反省によって進められてくるわけである。
오관육근의 정화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면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바와 같이, 중도를 근본으로 한 생활, 즉 상념과 행위의 중도화, 이것은 팔정도에 바탕을 둔 실천과 반성에 의해서 진행시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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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舎利子(しゃりし)」という言葉が出てくる。舎利子とは釈迦の弟子シャリー・プトラーのことである。観自在心について釈迦が、その弟子の舎利仏(しゃりほつ=シャリー・プトラー)に、五蘊を含めて、その意味を説明しているが、舎利仏が舎利子に変化したのは、舎利仏は仏弟子の代表格であり、さらにここでは「諸々の衆生よ」という意味も込めているため、舎利子となったのである。
여기에서 「사리자(舎利子)」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사리자란, 석가의 제자 샤리 부트라인 것이다.
관자재의 마음에 대해서 석가가, 그 제자인 사리불(舎利仏=샤리 부트라)에게, 오온을 포함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지만, 사리불이 사리자로 변화한 것은, 사리불은 불제자의 대표젹이며, 더욱더 여기에서는 「여럿의 중생이여」라고 하는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에, 사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しき)は空(くう)に異ならず、空は色に異ならず、色はすなわち是れ空なり、空はすなわち是れ色なり、と読む。
색(色)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은 즉 공이고, 공은 즉 색이다,라고 읽는다.

 

この詩句はあまりにも有名であり、色即是空に至っては、仏教の中心テーマのように受けとられている。
さて、色とか空とはいったい何をいっているのだろう。
今日ではすでに、さまざまな解釈がなされているが、空については十人十色であり、その実相を衝いているのは甚だ少ないようである。
이 싯구는 너무나도 유명하며, 색즉시공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중심 테마와 같이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색이라든지 공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에는 이미,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공에 대해서는 가지각색이며, 그 실상을 찌르고 있는 것은 매우 적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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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の実相を知るには、正法を実践するしかない。実践とは正道に適った自らの生活行為である。そうしてそうした中から、空の実相が認識されてくる。
さきの行深般若波羅蜜多時である。深く行ずることである。
공의 실상을 아는데에는, 정법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실천이란 정도에 맞는 스스로의 생활행위이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가운데에서, 공의 실상이 인식되어 간다.
앞의 행심반야바라밀다시이다.  깊게 행하는 일이다.


 

したがって仏教は自力である。神の子として、めざめた自力である。自力というと、自我を通した生活行為を連想しがちだが、そうではない。業生の自分から、神仏の子として脱皮してゆく実践行為を指すのである。
따라서 불교는 자력이다.  신의 자녀로서, 눈뜨는 자력이다.  자력이라고 하면, 자아를 통한 생활행위를 연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업생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불의 자녀로서 탈피해 가는 실천행위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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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日、仏教は他力本願になっている。だが釈尊の教えは、他力については一言も触れていない。もし他力について書いてある仏典があるとすれば、途中で書き替えられたものである。それは正道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改めて断言したい。
오늘의, 불교는 타력본원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석가의 가르침은, 타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타력에 대해서 적혀 있는 불전이 있다고 한다면, 도중에 바꿔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재차 언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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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くう)とは何か。
空とは、物質にあってはエネルギーの世界のことであり、魂にあっては実在界を指すのである。
まず、物質についてみると、水の三態(気体、液体、固体)で述べたように、物質は熱粒子の縁によって、集中、分散をくりかえし、たえず循環している。そこで、空とは、俗にいう可視範囲外の状態であるといっていいのである。
공(空)이란 무엇인가?
공이란, 물질에 있어서는 에너지의 세계의 일이며, 혼에 있어서는 실재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선, 물질에 대해서 보면, 물의 세가지 모습(기체, 액체, 고체)에서 말했듯이, 물질은 열입자의 인연에 의해서, 집중, 분산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  그래서, 공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가시범위 외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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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点について、もう少し考えてみよう。
水は熱粒子に温められると蒸発し、眼に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が、無にはならない。
エネルギーとして空中に在る。熱が冷え、水滴となる条件が満たされてくると、雲となり、雨となる。
要するに、物質についての空とは物質化(液体、固体)される前の状態であるといえる。
もっとも厳格には気体も物質であるといえるだろう。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물은 열입자로 따뜻해지면 증발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지만, 무(無)로는 되지 않는다.
에너지로서 공중에 존재한다.  열이 얼어서, 물방울이 되는 조건이 충족되어 가면, 구름이 되고, 비가 된다.   요컨데, 물질에 대해서의 공이란 물질화(액체, 고체)되기 전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 제일, 엄격하게는 기체도 물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ただここで見逃してはならない重大な問題がある。それは、気体となった水粒子は、必ずしも雨や雪となって落ちてくるとは限らない。気体となった水粒子は、水以外の鉱物、植物、動物の組成の一員として、物質界に再びよみがえってくるものもあるのである。ちなみに、あらゆる物質には、何がしかの水分を含んでいるのである。水分を含まない物質は、皆無といってもいい。
단지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체가 된 물입자는, 반드시 비나
눈이 되어 떨어져 내린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기체가 된 물입자는, 물 이외의 광물, 식물, 동물의 조성의 일원으로서, 물질계에 다시 되살아나오는 것도 있는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면, 온갖 물질에는,
약간의 수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수분을 포함하지 않은 물질은, 전혀없다라고 말해도 좋다.


 

このように気体となった水粒子は、他の物質粒子と組み合わさって、いわば形を変えて現象化されている。

이와 같이 기체로 된 물입자는, 다른 물질입자로 짜여 합쳐지고, 말하자면 형태를 바꿔서 현상화되고 있다.

 

こうみてくると物質の空の状態とは、万生万物を生み出す素因を内在せしめているのであり、それはまた言い方を変えると、空の世界は、万生万物の投映の場になっている、ともいえるのである。
空の世界は、あらゆる物質のエネルギー粒子が集まっており、そうしてそれらは熱、電気、磁力、重力などの相互作用、つまり縁によって、さまざまな物質を創り出して行くのであるからエネルギーの世界は、そのまま、万物投映の元の世界であるといえるのである。
이렇게 보게 되면, 물질의 공의 상태란, 만생만물을 창출해 내는 근본이 되는 원인을 내재하게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 말의 방식을 바꾸면, 공의 세계는, 만생만물의 투영의 장소로 되어 있다. 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의 세계는, 온갖 물질의 에너지 입자가 모여 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열, 전기, 자력, 중력 등의 상호작용, 즉 인연에 의해서, 다양한 물질을 창출해 내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세계는, 그대로, 만물 투영의 근원의 세계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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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に魂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魂の空の世界とは、あの世を指すのである。この世のことを現象界、ないしは物質界というが、あの世は実在界、意識界ともいう。
다음에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영혼의 공의 세계란, 저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세계의 것을 현상계, 내지는 물질계라고 하지만, 저 세계는 실재계, 의식계라고도 한다.


 

なぜ空の世界を実在界というかといえば、「物」が実際に存在する世界だからである。
この世、現象界は一切の「物」は、時が経つと変化してしまう。どんな立派な建物でも、発明品でも、時がくれば土になり、風化してしまう。
왜 공의 세계를 실재계라고 하는가 하면, 「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 현상계는 일체의 「물질」은, 시간이 경과하면 변화해 버린다.  어떤 훌륭한 건물이라해도, 발명품이라해도, 시간이 가면 흙이 되어, 풍화해 버린다.

 

ところが、実在界の「物」は、時が経っても消えていかない。必要と認められた「物」は、何千年、何億年も、そのまま減ることも増えることもなく存在し続けているのである。
この世では、どんなに価値のある「物」でも、人々の願望を叶えてはくれない。時が経てば否応なしに崩れ去ってしまう。この点が大いにちがうのである。
그런데, 실재계의 「물질」은, 시간이 경과해도 소멸되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인정된 「물질」은, 몇 천년, 몇 억년도, 그대로 줄어드는 것도 늘어나는 것도 없이 존재하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가치가 있는 「물질」이라해도, 사람들의 소원을 실현해 주지 않는다.  시간이 경과하면 다짜고짜로 무너져 가 버린다. 이 점이 매우 다른 것이다.

 

たとえば木製の机があるとする。この現象界では木製の机は使用しておれば、どんなに大事に扱っても千年と持つまい。それを持たせるには真空に近い暗室に保存し、熱や光や湿気から守ってやらないと朽ちてしまう。

예를들어 목재의 책상이 있다고 한다.  이 현상계에서는 목재의 책상은 사용하고 있으면, 아무리 소중하게 다루어도 천년까지는 소유하지 못하리라. 그것을 갖게 하려면 진공에 가까운 암심에 보존해서, 열이나 빛이나 습기로부터 지켜주지 않으면 썩어버린다.

 

ところが実在界では、一万年でも二万年でも使いながら持たせ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人や動物でもそうである。この世では人は百年、動物なら五十年生きるには、条件が整わないとむずかしい。だが、実在界は千年はおろか、二千年、三千年はザラである。いくらでも実在界で生き永らえることが出来る。しかし循環の法にしたがい、現象界に生まれ変わるが、魂の実在性は変わらない。
그런데 실재계에서는, 1만년이더라도 2만년이라도 사용하면서 소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물질이라해도 그렇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은 백년, 도물이라면 50년 사는데에는, 조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어렵다.  그렇지만, 실재계는 천년은 물론이고, 2천년, 3천년은 흔합니다. 얼마든지 실재계에서는 삶을 언제까지나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환의 법에 따라, 현상계에 환생하지만, 영혼의 실재성은 변하지 않는다.

 

要するに、あの世は「物」が半永久的に実在するから実在界というのである。半永久とは必要がなくなれば、何時でも古いものを新しいものに変えることができ、必要なら何時でも残す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る。 ではなぜ、こういうことが可能かというと、実在界は魂の世界だからである。魂とは心の世界、つまり意識の世界、意識界であるから、心のままの世界が展開されているのである。
요컨데, 저 세계는 「물질」이 반영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에 실재계라고 하는 것이다.   반영구적이란,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라도 오래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가 있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남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라고 하면,  실재계는 영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혼이란 마음의 세계, 즉 의식의 세계, 의식계이기 때문에, 마음대로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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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現象界は空の世界の投映であるということについて触れると、たとえば実在界に木製の机なら机があって、その机が現象界に写し出されているからそういうのである。
では、あの世には電車や汽車、戦車や大砲、航空機、原子爆弾、ミサイルなどもあるのかと問われるだろう。
여기에서, 현상계는 공의 세계의 투영이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면, 예를 들어 실재계에 목재의 책상이라면 책상이 있고, 그 책상이 현상계에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럼, 저 세계에는 전차나 기차, 장갑차나 대포, 항공기, 원자폭탄, 미사일 등도 있는건가 라고 묻을 수 있을 것이다.

 

これに対する答えは、あるものもあるし、ないものも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
どうしてこういう答えになるかというと、核ミサイルに執着を持つあの世の科学者が、そのミサイルの愚を知って、ミサイルの研究を辞めたとする。
그것에 대한 대답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 된다.
어째서 이런 대답이 되는가 라고 하면, 핵 미사일에 집착을 가지고 저 세계의 과학자가, 그 미사일의 어리석음를 알고, 미사일의 연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ところが、現象界のミサイル科学者は、あの世の科学者のミサイル研究の辞める前の想念波動をうけて、それを創り上げたために、あの世になくともこの世にあるという結果になったからである。

그런데, 현상계의 미사일 과학자는, 저 세계의 과학자의 미사일 연구를 그만두기 전의 상념 파동을
받고, 그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저 세계에 없더라도 이 세계에 있다라고 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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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をもう少し詰めて説明すると、あの世の心の世界、心の世界とはどんな想像も可能な世界である。どんな想像も可能だということは、言葉をかえると何でも在る、ということになる。想像は創造につながり、創造は文字通り、「物」を作り出すことである。
万生万物は、ことごとく「心」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り、心を基本にして、相互作用の縁によってさまざまな物質が生産されるのである。
이것을 좀 더 채워서 설명하면, 저 세계의 마음의 세계, 마음의 세계란 어떤 상상도 가능한 세계이다.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라도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이 된다.  상상은 창조로 이어지며, 창조는 문자대로,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생만물은, 모조리 「마음」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며, 마음을 기본으로 해서, 상호작용의 인연에 의해서 다양한 물질이 생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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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し、人間に思うこと、考える能力を抜き取ったなら、どうなるか。動物と同じように、一万年、十万年経っても進歩はないだろう。歩くより早く目的地に着くためには、電車や飛行機が便利だということで、まず最初に人々の心の中で考えられ、そうして各種の材料を集めてきてつくられた。
만약,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사고하는 능력을 빼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동물과 마찬가지로, 1만년, 10만년 경과해도 진보는 없을 것이다.  걸어가는 것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전차나 비행기가 편리하다라고 하는 것으로, 우선 최초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각해내어, 그렇게 해서 각종의 재료를 모아 와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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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世は、こうした創造が無限に広がっており、この世の想像の範囲をまったく越えている世界なのである。
だから、この世にあるものは、あの世にあり、しかし、形としてはないものも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저 세상은, 이러한 창조가 무한으로 넓혀져 있고, 이 세계의 상상의 범위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저 세상에 있고, 그러나, 형태로서는 없는 것도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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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話しを前に戻して、物質の世界は万物を生み出す素因として宇宙に存在し、魂の空の世界がこれらの素因を集め、形あるものに創造して行く能力を秘めている世界であるといえる。同時に魂の世界は、心と創造の世界なのだから、そのことはそのまま「もの」を実在せしめている世界でもあるといえるのである。

그런데, 말을 앞으로 되돌려서, 물질의 세계는 만물을 창출해 내는 근본이 되는 원인으로서 우주에 존재하고, 혼의 공의 세계가 이들의 근본이 되는 원인을 모아, 형태있는 것으로 창조해 가는 능력을 감추고 있는 세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영혼(魂)의 세계는, 마음과 창조의 세계인 것이기 때문에,
그 것은 그대로 「물질」을 실재하게 하고 있는 세계이라고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こうした意味から、空の世は、実在界、意識界というわけである。

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세계는, 실재계, 의식계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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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次に色(しき)とは何かといえば、私たちの眼にとまる現象界、物質界のことである。物質界は色彩に富んでいる。これは平面的な生活を補い、私たちに修行しやすい環境をつくるためである。
では、空の世界は色彩がないかというと、もちろんある。ただ、「心」に応じた意識界をつくっているので、階層によっては灰色の世界もあり、霧におおわれて色彩が不鮮明なところもある。
그런데 다음에 색(色)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면, 눈에 잡히는 현상계, 물질계인 것이다.  물질계는 색채가 풍부해 있다.  이것은 평면적인 생활을 보충하고, 우리들에게 수행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 공의 세계는 색채가 없는가 라고 하면,  물론 있다.  단지, 「마음」에 응한 의식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며, 계층에 따라서는 회색의 세계도 있고, 안개에 가려져 색채가 불선명한 곳도 있다. 

 

しかし天上界は、この世の世界とまったく同じであるが、次元が高くなるのしたがって、その色彩は明るく、そうして次第に安らぎのあるものとなっている。
그러나 천상계는, 이 세상의 세계와는 완전히 같지만, 차원이 높아짐에 따라서, 그 색채는 밝고, 그렇게 해서 차원에 평온함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この世は人の心に関係なく、神は、さまざまな色彩をつくって、平面的な地上の生活を補ってくれている。つまり修行しやすい環境を与えているのである。
この点からも私共は、神に対して感謝し報恩の行為である「調和」という目的に向かって進ん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이 세상은 사람의 마음에 관계없이, 신(神)은, 다양한 색채를 만들어, 평면적인 지상의 생활을 보충해주고 있다.  즉 수행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에도 우리들은, 신(神)에 대하여 감사하고 보은의 행위인 「조화」라고 하는 목적를 향하여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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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界の成立は、実在界の縁によってなされている。
縁とは、交わりである。あらゆる物質は相互に関連し合い、動、植、鉱の物質をつくり、生命活動に必要な基礎的環境を形成している。
물질계의 성립은, 실재계의 인연에 이루어지고 있다.
인연이란, 사귐이다.  온갖 물질은 상호간에 서로 관련되어, 동물, 식물, 광물의 물질을 만들어, 생명활동에 필요한 기초적인 환경을 형성하고 있다.

 

私たちの親子兄弟姉妹、夫婦、知人、友人にしても、そうした実在界の約束によってこの現象界で縁が結ばれている。偶然に縁が結ばれたのではない。
ちなみに地上の人類は現在三十七億にのぼっている。その三十七億余のなかから、一対の夫婦が選ばれ、親子が生まれ、兄弟姉妹ができ、友人、知人、そうしてそれ以上の目的を共にする同志が結ばれる。
우리들의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부부, 지인, 친구에 대해서도, 그러한 실재계의 약속에 의해서 이 현상계에서 인연을 맺어지고 있다.  우연으로 인연이 맺어진 것은 아니다.
덧붙여 말하면, 지상의 인류는 현재 37억의 달하고 있다.  이 37억여의 속으로부터, 한 쌍의 부부가 선택되어, 부모와 자녀가 태어나고, 형제자매가 생기고, 친구, 지인, 그렇게 해서 그것 이상의 목적을 함께 하는 동지가 맺어진다.

 

偶然として片づけるには出来すぎているし、だいいち現象的にみて、不思議と思えない人はどうかしているといいたい。
우연으로서 처리하기에는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고, 맨처음 현상적으로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있다고 하고 싶다.

 

もし、こうした現象が偶然であり、生命がアメーバーから生まれるとすれば、この世の成立は不可能だし、太陽も地球も人間も生かされ、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
自然界の秩序、人間界の秩序は神の意思にもとづいてつくられており、人間界の苦しみ悲しみの混乱は、人間が神の子としての能力を持ちながら、その能力を好き勝手に使っているために起こっている現象である。自分の好みで好き勝手にその能力を持て遊んでいるから、めくら千人となり、必然か偶然かの判断すらできなくなっているのである。
만약, 이러한 현상이 우연이며, 생명이 아메바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면, 이 세계의 성립은 불가능하고, 태양도 지구도 인간도 소생시키고, 살 수 없습니다.
자연계의 질서, 인간계의 질서는 신의 의사에 입각하여 만들어져 있고, 인간계의 괴로움 슬픔의 혼란은, 인간이 신의 자녀로서의 능력을 가지면서, 그 능력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자신의 취향대로 제멋대로 그 능력을 가지고 놀고 있기 때문에, 장님 천사람이 되어, 필연인지 우연인지의 판단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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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の実相を知ったときには、この世の一切のものは「縁」によって生じ、「縁」によって生かされ、「縁」によって万物が調和されていることを悟るであろう。
공의 실상을 알았을 때에는, 이 세계의 일체의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서 소생하고, 「인연」에 의해서 만물이 조화되고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불이공 공즉시색


これを直訳すると、現象界は実在界の投映であり、実在界があって現象界があるのだ、ということになる。さらにもっと突っ込んでいくと物質はエネルギーであり、エネルギーは物質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くる。
이것을 직역하면, 현상계는 실재계의 투영이며, 실재계가 있어 현상계가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된다.  더욱 더 날카롭게 지적해 나가면 물질은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물질이다, 라고 하는 것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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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象界と実在界は、もともと一つであり、別々ではないのである。現在の自分の想念と行為が死後の実在の自分自身を現わしていることになる。
현상계와 실재계는, 원래 하나이며, 따로따로가 아닌 것이다.  현재의 자신의 상념과 행위가 사후의 실재의 자기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된다.

 

現象界が実在界の投映という意味は、一つには人間の心は一念三千であり、天国にも地獄にも、自分が意識を向けたところにつながるのでそういうのである。
人間は天国と地獄のちょうど中間に位置している。
현상계가 실재계의 투영이라고 하는 의미는,  한 가지는 인간의 마음은 일념삼천이며, 천국에도 지옥에도, 자신이 의식을 향한 곳에 연결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천국과 지옥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なぜ中間に位置しているかといえば、人間の心は天国と地獄に通ずる自由(一念三千)な心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る。
왜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가라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에 통하는 자유(일념삼천)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慈悲と愛の心を持てば天国に、煩悩に心を奪われれば地獄に通じ、自分自身の生活環境を通じた世界と同じような形で現わして行く。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천국에, 번뇌에 마음을 사로잡히면 지옥에 통하고, 자기 자신의 생활환경을 통한 세계와 동일한 형태로 나타내어 간다.

 

つまり、実在界の投映という形をつくるのである。それほど心というものは、重大な要素を持っており、人間はその心の在り方によって、鬼にも天使にもなり得るのである。
実在界に鬼が住むような地獄がもともとあったかどうかである。
즉, 실재계의 투영이라고 하는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만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중대한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인간은 그 마음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귀신으로도 천사로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재계에 귀신이 살고 있는 지옥이 원래 있었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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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創造の初めはなかったのである。実在界はエデンの園であり、天国のみであった。
ところが人間がこの地上の生活になれ、五官に左右され、六根が生ずるようになってからは、実在界の一隅に、暗黒の世界をつくるようになった。人間は自らの想念と行為によって、そうした闇を生み出していったのである。
천지창조의 처음은 없었던 것이다.  실재계는 에덴의 동산이며, 천국뿐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이 지상의 생활에 길들여지고, 오관에 좌우되어, 육근이 생겨나게 되고 나서는, 실재계의 한 구석에, 암흑의 세계를 만들게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에 의해서, 그러한 암흑을 새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すなわち、実在界に、光と陰の世界が出来上がってしまった。
そうして、地上の人間は、光と陰、善と悪の混合された世界で修行するような環境をつくり出し、その中でなければ、何が善で、何が悪であるかを知ることが出来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もともと実在界があって現象界があるのだが、現象界の人間の心が実在界に闇の世界を創り出してきたのである。
즉, 실재계에, 빛과 그늘의 세계가 완성되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지상의 인간은, 빛과 그늘, 선과 악의 혼합된 세계에서 수행하는 환경을 만들어 내고, 그 중에서 없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こうみてくると、現象界と実在界の姿がはっきりしてこよう。そうして、色と空の関係が、もともと別ものではなく、同時的に成立している、という意味が釈然としてきたと思う。
色は空に異ならず、空は色に異ならずとは、こうした意味がこめられているのである。
이렇게 보게 되면, 현상계와 실재계의 모습이 확실해져 온다.  그렇게 해서, 색(色)과 공(空)관계가, 원래 다른 것이 아니고, 동시적으로 성립하고 있다, 라고 하는 의미가 석연으로 해 왔다고 생각한다.  색(色)은 공에 다르지 않고, 공(空)은 색에 다르지 않다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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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即是空、空即是色――。
これの解釈は通常文字にとらわれる場合が多い。あると思えばない、ないと思えばある、といってみたり、色即是空は往相(悟りに向かう)空即是色は還相(人々を救う)と説明している人もいる。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것의 해석은 통상문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다, 라고 말해 보거나, 색즉시공은 왕상(깨달음에 향해간다) 공즉시색은 환상( 사람들을 구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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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当の意味は、転生輪廻なのである。あの世とこの世の循環を、色と空、空と色という表現で、ここでは説明し、そうしてこう表現することによって、魂の転生輪廻の永遠性をうたっているのである。

진실한 의미는, 전생윤회인 것이다.  저 세계와 이 세계의 순환을, 색과 공, 공과 색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 의해서, 혼의 전생윤회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大抵の人は、人間が生まれ変わるとは信じられないようだ。まず十人が十人死んだらお終いと思って生きている。だから、生きているうちが華であり、生に執着を持ってしまう。死は不幸を意味し、葬式は概ね暗く、陽気はタブーとされている。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이 환생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 같다.  우선 열 명이 열 명이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가 아름답다고 하여, 생에 집착을 가져 버린다.  죽음은 불행을 의미하고, 장례식은 대체로 음울하고, 명랑함은 금기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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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が、人間は生まれ変わり、この世よりも、生前の魂の在り方によっては、あの世の方が住み良い、ということがわかれば、死は不幸ではなく、人生の卒業式として、生まれたときと同じように、祝杯をあげてもよいということになる。
그런데, 인간은 환생하여, 이 세계보다도, 생전의 영혼의 본연의 자세에 따라서는, 저 세계의 방식이
살기 좋다, 라고 하는 것을 알수 있다면, 죽음은 불행이 아니고, 인생의 졸업식으로서,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로, 축배를 들어도 좋다라고 하는 것이 된다.

 

死に対する人間の根本的な誤謬(ごびゅう)は「あの世がわからない」ところにあるようだ。
人は生まれると同時に、あの世と断絶し、通信を途絶えてしまうからである。お先真っ暗の人生を、それこそ手探りで歩いているようなものだからだ。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오류(誤謬)는「저 세계를 모른다」라는 원인에 있는 것 같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저 세계와 단절되고, 통신을 도중에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눈앞이 아주 캄캄한 인생을, 그것이야말로 손으로 더듬어 걷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しかし、怒ったり、ねたんだり、悲しんだりすると気分を悪くし、人にも害を与え、反対に陽気や笑い、助けあったり、はげましあうことの喜びは、どんな場合でも気持ちがいい。その事実を私たちは日常のなかで経験しながらも、自然にふりまわされてしまうものだが、しかしそうした愛に生きたときの喜びを発見し、認識するならば、あの世があろうとなかろうと、現実の自分とその周囲を光明に化することができるはず。
그러나, 화내거나, 질투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면 기분을 나쁘게 하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고, 반대로 명랑함이나 웃음, 서로 돕거나, 격려하며 만나는 것의 기쁨은, 어떠한 경우라도 기분이 좋다.  그 사실을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경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남용되어 버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랑으로 살았을 때의 기쁨을 발견하고, 인식한다면, 저 세상이 있어도 없어도, 현실의 자신과 그 주위를 광명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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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しみを取り除き、喜びをわかち与える慈悲の心、助け合う愛の心というものは、人間は、皆持っている。そうして、そうした生き方を、誰しも望んでいる。しかし、現実は、そうできない。気持ちよい生活、平和な世界を希求しながらも、それから遠のいてゆく。これは、自我がそうさせ、執着が次第に広がって行くために、本来の目的から人は離れていってしまうのだ。ウソつきが得をし、正直者はバカを見る、ということを鵜呑みにした結果ではあるまいか。
슬픔을 없애고, 기쁨을 나누어 주는 자비의 마음, 서로 돕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삶의 방식을, 누구라도 바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기분이 좋은 생활, 평화로운 세계를 희구해가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것은, 자아가 그렇게 시켜서, 집착이 다음 순서에 넓혀져 가기 때문에,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사람은 벗어나가 버리는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이득을 보고, 정직한 사람을 바보로 취급한다, 고 하는 것을 뜻도 모르고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에 있지 않을까.

 

己の心にウソはつけぬ大自然の条理を知って神の心に近づこうと努力するものに対しては、神は、色即是空の生命の扉をひらいてくれよう。なぜなら、神は、自ら助ける者を、決して放っておくようなことはしないからである。
자기의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연의 조리(=사물의 도리)를 알고 신의 마음에 근접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색즉시공의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신다. 
왜냐하면,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결코 방치해 두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人は色即是空の認識を得る前に、大抵は根負けし、肉体世界に妥協してしまう。妥協の上にあぐらをかいて、ああでもない、こうでもないと逃げをうつ。人生はますます解からなくなり、迷路にはまりこんで行くのだ。
사람은 색즉시공의 인식을 얻기 전에, 대부분은 끈기에 부쳐서, 육체 세계에 타협해 버린다.  타협한 이상에 책상다리를 걸치고, 저렇지도 못하고, 이렇지도 못하면 도망을 친다.  인생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 버리거나, 미로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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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ず人は、怒ったり、ねたんだりすることよりも、陽気に笑い、助け合う愛の心を、しっかりと抱いて、そうして、その心を持続するならば、「あの世がわからない」という迷信に陥るようなことはあるまい。
우선 사람은, 화내거나, 질투하거나 하는 것 보다도, 명랑하게 웃고, 서로 돕는 사랑의 마음을, 제대로 품어, 그렇게 해서, 그 마음을 지속한다면, 「저 세상을 모른다」라고 하는 미신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은 있을 일 없다.

 

アメリカのある新聞社が、「あなたは、あの世を信ずるか」について世論調査をした。結果は、調査の八割までが、あの世を信ずる、と答えていた。答えた人八割があの世をみたわけではない。信仰が生活のなかに溶け込み、日曜になると、教会にいって話をきかないと一日が終わらない気持ちが、そうした回答となったのであろう。聖書が教える愛の心を教会で教えられ、愛の心を持ち続けることは人間として当然であり、そ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ているからである。
미국의 있는 신문사가, 「당신은, 저 세상을 믿는가」에 대해서 여론 조사를 했다.  결과는, 조사의 8할 까지만, 저 세상을 믿는다, 고 대답하고 있었다.  대답한 사람이 8할이 저 세상을 본 것은 아니다.  신앙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루가 끝나지 않는 기분이, 그러한 회답이 된 것일 것이다.  성서가 가르치는 사랑의 마음을 교회에서 가르쳐주고, 사랑의 마음을 지속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日本人について世論調査をしたら、どんな結果がでよう。あの世があると答える人は一割あるかないかであろう。
일본인에 대해서 여론 조사를 하면, 어떤 결과가 될까.  저 세상이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1할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일 것이다.

 

ともあれ、私たちの住む世界は、立体の世界である。人が地上に存在することは、そのまま、あの世につながった存在者として、存在するのである。ただ、あの世がわからないために、そう思えないだけの話である。
하여간, 우리들의 사는 세계는, 입체의 세계이다.  사람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대로, 저 세상으로
이어진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단지, 저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ここからは前回からの高橋信次先生による 「般若心経のまとめ」 のなかの 『色即是空 空即是色』 の続きです。
여기에서는 앞 회에서의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에 의한  「반야심경의 총정리」의 중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어집니다.



 

ところで私たちの生きている世界は一応三次元の世界である。
一次元とは、A点からB点を結ぶ線、つまり、海面と思えばよい。
二次元とは、海面を航行する船である。船は前後、左右に動くので、一次元より自由である。
三次元とは、空中に浮かぶ飛行機と思えばいいし、飛行機は、二次元、一次元の姿を自由に見ることができる。つまり三次元は立体の世界であり、大宇宙の空間と明滅する星の姿は、そのまま三次元の世界を形成している。
그런데 우리들의 살고 있는 세계는 일단 3차원의 세계이다.
1차원이란, A점으로부터 B점을 연결하는 선, 즉, 해수면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2차원이란, 해수면을 항해하는 선박이다.  선박은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며, 1차원 보다 자유롭다.
3차원은, 공중에 뜨고 있는 비행기라고 생각하면 좋고, 비행기는, 2차원, 1차원의 모습을 자유롭게 볼 수가 있다.  즉 3차원은 입체의 세계이며, 대우주의 공간과 반짝하고 사라지는 별의 모습은, 그대로 3차원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物質の世界は、三次元までを限度とし、それ以上については、認識ができない。
ところでアインシュタインは、三次元の空間のほかに、時間という一次元を加えた。そうして、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三次元の実相をとらえることができると考えた。
アインシュタインは、時間を四次元に位置づけしている。
물질의 세계는, 3차원까지를 한도로 해서, 그것 이상에 대해서는, 인식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3차원의 공간 정도에, 시간이라고 하는 1차원을 더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 3차원의 실상을 파악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4차원에 위치로 붙이고 있다.

 

つまり、物の実態というものは、時の流れを把握する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意味づけが出来るというのだ。三次元の立体像を単に主観的にとらえるだけでは、実在性は伴ってこない。実在性は客観的把握を前提とするというわけである。
즉, 물질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3차원의 입체상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만으로는, 실재성은 수반해 오지 않는다.  실재성은 객관적인 파악을 전재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空中に飛行機が飛んでいる。つまり三次元のみの思考ではその飛行機が、いったい何の目的でどこへ、どう飛んで行くのか、また離陸した飛行場はどこなのかについての認識がむずかしい。
しかし、こうした状況を、時間という運動の経過を通して調べることによって、空中を飛んでいる飛行機の目的なり、動機がはっきりしてくるというのだ。
공중에 비행기가 날고 있다.  즉 3차원의 사고로는 그 비행기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어디로, 어떻게 날아 가는 건가, 또 이륙한 비행장은 어느곳인가에 대한 인식이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시간이라고 하는 운동의 경과를 통해서 조사하는 것에 의해서, 공중을 날고 있는 비행기의 목적이든지, 동기가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この世の一切の物は、一刻の休みもなく運動している。運動のない物体というものはあり得ない。とすると、三次元の認識だけでは、これをとらえようとしても、とらえることはできない。つまり、物の価値づけ、実在性は把握できない。
이 세계의 일체의 물질은, 일각의 휴식도 없이 운동하고 있다.  운동의 없는 물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라고 하면, 3차원의 인식만으로는, 이것을 파악하려고 해도, 파악할 수가 없다.  즉, 물질의 가치를 부여해, 실재성은 파악할 수가 없다.

 

人間の心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四次元の働きを内在している。現れの世界は三次元だが、心は四次元にあるいは多次元に通じている。だから、文明も文化も進んできたのである。動物にはこうした機能は与えられていない。だからこの世に在る動物達の生活は百万年前も今もそう変わらない。
인간의 마음은, 선천적으로, 4차원의 기능(능력)을 내재하고 있다. 현상의 세계는 3차원이지만, 마음은 4차원에 혹은 다차원의 통하고 있다.  그래서, 문명도 문화도 진보해 온 것이다.  동물(動物)에게는 이러한 기능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동물들의 생활은 백만 년 전에도 지금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もっとも人間社会は、栄えては滅び、滅びてはまた発展し、そうしたくりかえしを続けてきているが、こうした悪循環を絶とうと思えば、何時でも絶つことが出来るのである。そこが動物と人間の本質的な相違である。
무엇보다 인간 사회는, 번영하고는 멸망하고, 멸망하고는 또 발전하고, 그러한 되풀이를 계속해 가고 있지만, 이러한 악순환을 끊으려고 하면, 언제라도 끊을 수가 있다.  그 점이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인 서로 다름이다.


アインシュタインの四次元は、時間に焦点を合わせているが、四次元の世界は、実は、あの世の世界を意味している。物理的な次元論からいえば、四次元は、三次元を越えた自由自在の意識のそれであり、物質を貫通して、ものを見る超能力の世界である。あの世の人たちは、四次元以降多次元の住者である。あの世の霊は壁をつき抜け、あるいは壁の向こう側からこちらが見えるのである。
아인슈타인의 4차원은,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4차원의 세계는, 사실은, 저 세상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물리적인 차원론으로 말하면, 4차원은, 3차원을 초월한 자유자재의 의식의 그것이며, 물질을 관통해서, 사물을 보는 초능력의 세계이다.  저 세상의 사람들은, 4차원 이후 다차원의 주민이다.  저 세상의 영혼은 벽을 통과하고, 혹은 벽의 맞은 편에서 이쪽이 보이는 것이다.


人間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こうした能力を内在させて生活している。そうしてその一形態が創造活動であり、私たちの文化でもある。芸術にしろ科学にしろ、知識だけでは生まれてはこない。大学を出れば、誰も彼もが発明家になり、偉大な政治家になり、芸術家になれるかというと、そうはいかない。見えざる努力と、求める心が、筆を走らせ、絵を描かせ、生活を豊かにするよう科学させ、発明させてきたのである。マルクスのあの膨大な資本論は、今日、いろいろと問題はあるが、あの時代には、あの理論が必要だったのである。だから彼は書かされた。求めつつ、書かされた。資本論を知識だけで書けといっても書けるものではない。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내재시켜 생활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 한 형태가 창조활동이며, 우리들의 문화이기도 하다.  예술로 해라 과학으로 해라, 지식만으로는 태어나서는 오지 않는다.
대학을 나오면, 누구든지 발명가가 되고,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 예술가 될 수 있다고 하면, 그렇게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노력과, 구하는 마음이, 붓을 달리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고, 생활을 풍족하게 하도록 과학을 하게 하고, 발명하게 해온 것이다.  마르크스의 저 방대한 자본론은, 오늘날, 여러가지로 문제는 있지만, 저 시대에는,  저 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쓰게 되었다. 구하면서, 쓰게 되었다.  자본론을 지식만으로 쓴다고 해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こうした創造活動は、絶えざる求める心が内在意識をひらかせ、四次元以降、多次元の心と同通することによって起こるものなのである。偶然とか知識とか、その場限りの発見からこうしたものが生まれることは絶無といってよい。
이러한 창조활동은, 끊임없는 구하는 마음이 내재의식을 열려서, 4차원 이후, 다차원의 마음과 동통하는 것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연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그 때뿐인 발견에서 이러한 것이 태어나는 것은 조금도 없다라고 해도 좋다.


何れにせよ、人間は、こうした多次元の心を持って生活している。三次元しか通常は認識できないが、しかし人間の意識は常に四次元以降多次元に同通しており、人間はそうした中で生活し呼吸しているのである。
어차피, 인간은, 이러한 다차원의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3차원밖에 보통은 인식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항상 4차원 이후 다차원에 같이 통하고 있고, 인간은 그러한 속에서 생활하고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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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四次元以降多次元の意識の自由さについて述べると次のようになる。
여기에서 4차원 이후 다차원의 의식의 자유로움에 대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四次元の自由さは、三次元を貫通し、物質にさまたげられることなく、ものを見ることができる。
4차원의 자유로움은, 3차원을 관통해서, 물질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일 없이, 물질을 볼 수 가 있다.


 

五次元は、四次元世界はもちろん見ることができると同時に、地上界と地獄界の比較が容易に出来る。四次元の自由さは、ある限られた物質的障害を乗り越えられるのにたいして、五次元は、幾層もの物質を貫通して見ることができる。
5차원은, 4차원 세계는 물론 볼 수가 있는 것과 동시에, 지상계와 지옥계의 비교를 용이하게 할 수 있다.  4차원의 자유로움은, 어떤 제한된 물질적 장애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에 대해, 5차원은, 여러 겹의 물질을 관통해서 볼 수가 있다.

 

六次元は、四次元、五次元の世界は勿論のこと、地球の隅々まで見ることができる。
善悪の判断が正確となり、人を導く自由さを持つようになる。
6차원은, 4차원, 5차원의 세계는 물론이고,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볼 수가 있다.
선악의 판단이 정확하게 되고, 사람을 인도하고 자유로움을 가지게 된다.

 

七次元は、六次元は勿論、他の天体にまで瞬時にみてくることができる。物質の成り立ち、天体の動き、人間の生い立ちが、七次元の意識が進むにしたがって、明らかとなってくる。したがって、物質のなかを覗き、生命普遍の認識を深めることができる。
7차원은, 6차원은 물론, 다른 천체에까지도 순간에 보고 올 수가 있다.  물질의 성립되어, 천체의 활동, 인간의 성장 과정이, 7차원의 의식이 왕성해짐에 따라서, 뚜렷해진다.  따라서, 물질의 속을 들여다 보고, 생명 보편의 인식을 깊게 할 수가 있다.

 

八次元は、宇宙全体を認識できる自由さを持つ。万生万物の生命の根源が神の意識によって動いていることを知り、神の意思をうけついで、慈悲と愛の広く高い心のひろがりを持つ。過去、現在、未来を見通す心は八次元の頂点にある。
8차원은, 우주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진다.  만생만물의 생명의 근원이 신의 의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며, 신의 의사를 계승하여, 자비와 사람의 넓고 높은 마음의 넓어짐을 가진다.  과거, 현재, 미래를 견통하는 마음은 8차원의 정점에 있다.

 

九次元は、神の意識であり、全(まっとう)なる心である。
9차원은, 신의 의식이다.  흠이나 결점이 없는(정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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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私たちの住む世界は三次元の世界であるが、四次元以降多次元の世界が、感覚的に解らないとしても、前述の説明で概略理解されたと思う。
그런데 우리들의 사는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이지만, 4차원 이후 다차원의 세계가,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앞에 말한 설명으로 개략 이해되었다고 생각한다.

 

そうして、四次元以降の意識界の働き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り、そうしてその意識が、私たちの生活にどう働いているかも、ほぼ納得出来たと思われる。
ところが人によっては、それでも四次元以降の世界はない、三次元で十分だ、四次元は飛躍だという人もいる。
그렇게 해서, 4차원 이후의 의식계의 기능(능력, 활동)이, 어떠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 의식이, 우리들의 생활에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거의 납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4차원 이후의 세계는 없고, 3차원으로 충분하다, 4차원은 비약(飛躍)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しかし飛躍であるかないか経験がないのに、どうしてないといえるだろう。経験のない人が多くいて、経験がある人が少ないから否定する、というのはおかしい。
私たちの眼で見える範囲は、約7~4オングストログまでである。赤外線、紫外線、X線、γ線、電波については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
그러나 비약(飛躍)이 있는가 없는가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경험의 없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부정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는, 약 7~4옹그스트롬까지이다.  적외선, 자외선, X선, γ선, 전파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가 없다.

 

しかし確認できなくとも、実在していることには間違いないのである。
그러나 인식할 수 없다고 해도, 실재하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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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即是空、空即是色――。

つまり私たちの魂(意識)は、現象界に肉体をまとって生きている間は、主に三次元的感覚(10%の意識)で生活しているが、肉体が滅びれば、魂だけが肉体から抜けて、あの世で生活する。四次元以降多次元の意識を持って・・・・・・。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우리들의 영혼(魂)(의식[意識])은, 현상계에 육체를 걸치고 살고 있는 동안은, 주인으로 3차원적 감각(10%의 의식)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魂)만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저 세상에서 생활한다.  4차원 이후 다차원의 의식을 가지고・・・・・・。

 

そうして再び、この現象界に現れ、生活する。
この事実は、否定しようがしまいが、あることに変わりないものだ。
万生万物はすべて、転生輪廻の法から逸脱できない。なぜかというと、生命と物質は、そのように作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
그렇게 해서 다시, 이 현상계에 나타나서, 생활한다.
이 사실은, 부정하려 하든지 않하려 하든지,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만생만물은 전부, 전생윤회의 법으로부터 일탈할 수 없다.  왜인가 하면, 생명과 물질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地球が太陽の周囲を循環することによって、春夏秋冬の季節をつくり、生命がすこやかに育つように出来上がっている。原子の世界も、核の周囲を陰外電子が循環することによって、原子全体を維持している。この理法を崩せといっても崩せな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순환하는 것에 의해서, 춘하추동의 계절을 만들고, 생명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완성되어 있다.  원자의 세계도, 핵의 주의를 음외전자가 순환하는 것에 의해서, 원자 전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이법(理法)을 무너뜨리려고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この点については、また順を追って説明するが、色即是空、空即是色は、転生輪廻の実相をいっていることを理解して欲しい。
이 점에 대해서는, 또 순리을 쫓아서 설명하지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전생윤회의 실상을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これまで何度かに亘って「高橋信次先生による般若心経のまとめ」 編集者 田口恒勇氏がまとめられた冊子(非売品)の転載は、今回で残りの全部を紹介させて頂きますので、これが終了となります。般若心経では一番重要な箇所でもある「色即是空 空即是色」の色心不二(しきしんふじ)については前回紹介させて頂きましたので、今回はこれまでよりも、ますます長文ですが一気にその続きを載せております。
여기까지 몇 번인가 「다카하시 신지 선생에 의한 반야심경의 총정리」 편집자 다쿠치 이사무가 일괄 정리한 책자(비매품)의 전재는, 이번에서 남은 전부를 소개하는 것이며, 이것이 종료됩니다.  반야심경이란 가장 중요한 개소이기 때문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색심불이에 대해서는 전재는, 이번은 여기에서 보다, 훨씬 더 장문이지만 이어서 개제합니다.


以下、転載です。
이하, 전재입니다.

 

 


 


                                                          

受想行識(じゅそうぎょうしき)亦復如是(やくぶにょぜ)舎利子(しゃりし)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사리자(舎利子)


 

これを直訳すると「行為は心の反映であり、心は行為に影響される。つまり、色即是空、空即是色と同じ意義を持っている。舎利子よ」ということになる。
이것을 직역하면 「행위는 마음의 반영이며, 마음은 행위에 영향을 받는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리자여 」라고 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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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の世界である意識界は次元の異なる四次以降の世であり、総てのものの根本である空(くう)の世界、実在界である。
一方、現象界である色(しき)の世界は、実在界の投映にはちがいない。しかし現象界の動きは、実在界に影響を与えるのである。
마음의 세계인 의식계는 차원의 다른 4차원 이후의 세계이며, 모든 것의 근본인 공(空)의 세계, 실재계이다.
한편, 현상계인 색(色)의 세계는, 실재계의 투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현상계의 활동은, 실재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実在界の地獄は、既述したように、現象界の人々の想念と行為がつくり出したものである。この様に、心と行為、意識と肉体というものは、常に相関関係にあって、個々バラバラに独立したものではない。
また私達の肉体は現象界に適応した心の乗り舟であり、それは子孫を保存させるために、神が人間に代々にわたって本能という機能を与えたものである。その本能は、人間が肉体を持った時に、付与されるのである。
실재계의 지옥은, 이미  말한 것처럼, 현상계의 사람들의 상념과 행위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과 행위, 의식과 육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상관관계에 있어, 개개로 뿔뿔이 흩어져 독립한 것은 아니다.  또 우리들의 육체는 현상계에 적응한 마음의 승선한 배이며, 그것은 자손을 보존시키기 위하여, 신이 인간에 대대로 걸쳐서 본능이라고 하는 기능을 준 것이다.  그 본능은, 인간이 육체를 가졌을 때에 부여되는 것이다.

 

私達は、意識と肉体を持って生活している。いうなれば、あの世とこの世、実在界と現象界を合わせ持って生活していることになる。
우리들은, 의식과 육체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말하자면, 저 세상과 이 세상, 실재계와 현상계를 겸비하여 생활하고 있는 것이 된다.

 

仏教でいう色心不二とは、この実相を悟った状態をいうのである。調和された姿を色心不二という。ここでの項は、心と肉体というものは、相互に関係し合っているのだ、といっているのである。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란, 이 실상을 깨달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조화된 모습을 색심불이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항목은, 마음과 육체라고 하는 것은, 서로 관계하고 합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是諸法空相(ぜしょほうくうそう)不生不滅(ふしょうふめつ) 
不垢不浄(ふくふじょう)不増不減(ふぞうふげん)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浄)  부증불감(不増不減)


是諸法空相の諸法をそのままうけとると、法は沢山の数を成していると考えがちである。
そうして、その場合の法とはなにを意味するか、と思うでしょう。
시제법공상의 여러 법(諸法)을 그대로 해석하면, 법은 많은 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상이다.  그렇게 해서, 그 경우의 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고 생각하겠지요.

 

法は本来一つしかない。それは中道(ちゅうどう)という調和の心である。
ただ、この地上世界は動、植、鉱の三種の形態から成っており、また天台宗をひらいた天台智顗(てんだいちぎ)は地・水・火・風・空から出来ているともいっており、姿、形がさまざまである。
법은 본래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중도(中道)라고 하는 조화의 마음이다.
단지, 이 지상 세계는 동물, 식물, 광물의  3종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천태종을 연 천대지의(天台智顗)는 지, 수, 화, 풍, 공으로부터 되어 있다고도 말하고 있고, 모습, 형태가 다양하다.

 

そのさまざまの物質は、それぞれの体質にしたがって転生輪廻しているため、個々の体質をみていると、法はいくつもあるとみえてくる。だから、諸法は・・・・・となったのである。
그 여러 가지의 물질은, 각각의 체질에 따라서 전생윤회하고 있기 때문에, 개개의 체질을 보고 있으면, 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러 법(諸法)・・・・로 되었던 것이다.

 

しかし、さまざまの物質がその体質にしたがって維持されているにしても、転生輪廻という法の体質と、その法を支えている中道の心は少しも変わってはいない。
그러나, 여러 가지의 물질이 그 체질에 따라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전생윤회라고 하는 법의 체질과, 그 법을 유지하고 있는 중도의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生命も物質も、中道の調和から外れると、バランスを失い、不調和を来たす。破壊である。 
したがってここでいう空相とは、諸法の中にかくされている中道の神理(タルマー)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諸法は空相によって支えられると解釈する。
생명도 물질도, 중도의 조화로부터 벗어나면, 균형을 잃는다, 부조화를 초래한다.  파괴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공상(空相)이란, 여러 법(諸法) 속에 감추어져 있는 중도의 신리(達磨=달마)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여러 법(諸法)은, 공상에 의해서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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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の不生不滅―― のくだりについては、その中道(ちゅうどう)の心は、「生れず滅せず、垢(あか)つかず、浄(きよ)らかでなく、増えることも、減ることもない」と、なってくる。
さあ、こうなると、中道の意味が解らなくなってくる。中道とは大自然の心である。
다음의 불생불멸---의 대목에 대해서는, 그 중도(中道)의 마음을,「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때가 붙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는 일도, 줄어드는 일도 없다 」라고, 된다.
그럼, 이렇게 되면, 중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중도란 대자연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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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の魂は、この世を終えれば、あの世に帰る。生死の境を、さまようこともない。
本来、そのように出来ている。
物質についても、その物質が分裂しても、粒子エネルギーは、この大宇宙に存在し、形はなくとも、無になることはない。いわんや、増えたり、減ったりすることも、もちろんない。
인간의 영혼(魂)은, 이 세계를 끝내면,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 생사의 경계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일도 없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
물질에 대해서도, 그 물질이 분열해도, 입자 에너지는, 이 대우주에 존재하고, 형태는 없어져도, 무(無: 없음)로 되는 일은 없다.  하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일도, 물론 없다.

 

このように、あらゆる生命、エネルギーは、生き通しのものである。垢もつかない。不浄でもない。
地上世界をみていると、死んだり、生きたりで大変いそがしい。
親子兄弟でも、性格も考えもちがっている。同じ精子と卵子の結合物であるのだから、親に似ていい筈だが、ちがう。なぜだろう。
이와 같이, 온갖 생명, 에너지는, 삶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때도 뭍지 않는다. 부정하지도 않다.
지상세계를 보고 있으면, 죽거나, 살거나하는 일로 몹시 어수선하다.
부모와 자식 형제라해도, 성격도 생각도 다르다.  같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물이니까, 부모를 닮는게 당연한 것인데, 다르다.  왜일까?

 

それは生き通しの、魂がちがうからである。懐妊すると、食べ物が変ってくる。今まで甘いものが好きだった人が、すっぱいものを口にする。そうかと思うと、妊婦の性格までちがってくる。気持が荒々しくなったから、お腹の子は、さぞ男の子だろうと思っていたら、案の定、男子が生れたなど。こうした現象は、お腹の子の魂がちがうから妊婦の趣向や性格まで複雑にしてくる。懐妊すると二重人格者にしてしまう。一つの躰に、二つの魂が同居するから、いたしかたがない。
腹を痛めた我が子と思うと、親は、自分の思う通りに子が動いてくれないと面白くない。
たとえば、白といえば黒という場合すら出てくる。
그것은 삶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에 관한, 영혼(魂)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임을 하면, 음식물이 바뀌어간다.  지금까지 단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시큼한 것을 입에 댄다.  왜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임산부의 성격까지도 달라진다.  기분이 몹시 거칠어졌기 때문에, 뱃속의 아이는, 아마 사내 아일것이야라고 생각하면, 아니나다를까,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등.  이러한 형상은, 뱃속의 아이의 영혼(魂)이 다르기 때문에 임산부의 취향이나 성격까지도 복잡해진다.  회임을 하면 이중 인격자로 되어 버린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魂)이 동거하기 때문에, 별 수 없다.
친자식이라고 생각하면, 부모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식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  예를 들면, 백이라고 하면 흑이라고 하는 경우마저 나온다.

 

しかし、魂がちがうのだから、いくら腹を痛めても、子は自由にならない。自由思想が氾濫(はんらん)する現代では親子の断絶、相剋がいっそう激しさを加えている。
当り前といえば当り前だが、しかし、親子の約束、人間としての条理を外した末法の考え方がそうさせるもので、魂がちがっても、そういうものではないのである。
그러나, 영혼(魂)이 다른 것 때문에, 아무리 친자식이라해도,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  자유사상이 범람하는 현대에는 부모 자식의 단절, 서로 다툼이 한층 더 격렬함을 더하고 있다.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약속,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벗어난 말법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고, 영혼(魂)이 다르다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ただ、ここでは、親子といえども、魂はちがう。いわんや兄弟姉妹においては、なお更ちがうということを知って欲しい。
魂はちがっても、肉体遺伝はある。たとえば胃腸が弱い、胸が悪い、心臓病にかかりやすい、という体質をうけたとすると、そうした病気に、その子がかかりやすい。もちろん、心の調和をはかっていれば、肉体遺伝は克服して行く。
단지, 여기에서는, 부모와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영혼(魂)은 다르다.  하물며 형제자매에 있어서는, 역시 다르다라고 하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영혼은 달라도, 육체 유전은 같다.  예를 들면, 위장이 약하다, 폐가 안좋다, 심장병에 걸리기 쉽다, 라고 하는 체질을 타고났다고 하면, 그러한 병에, 그 자식이 걸리기 쉽다.  물론, 마음의 조화를 도모하고 있으면, 육체 유전은 극복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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メンデルの遺伝の法則は、魂については全然無関係である。肉体的には避けられぬ因子のあることは前に述べた通りであり、細胞学の面でもその事実が発見されつつある。現代人もそうであるように、多くの人々は遠い昔から、肉体先祖と魂を、いっしょくたに見てきた習慣からなかなか抜け切れない。その理由は、死後が不明なことと、生れてくる前の状況が皆目見当がつかないからである。進化論が幅をきかすのも、無理はないのである。
멘델의 유전의 법칙은, 영혼에 대해서는 전연 관계가 없다.  육체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원인이 있는 것은 전에 말한 대로이며, 세포학의 면에서도 그 사실이 발견되고 있는 중이다.  현대인도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육체 선조와 혼(魂)을,  뒤범벅으로 봐 왔던 습관에서 좀처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후가 불명한 것과, 태아나기 전의 상황이 전연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폭을 들어주는 것도, 무리는 없는 것이다.

 

しかし、さきにもふれた通り、親子の魂の相違というものは、昔も今も変らない。自由放任の現代思想がそうさせたものでは決してないのである。
もっとも、遺伝学的に、学者の家系は学者が多く、浮浪者や酒のみの家系は犯罪者、自殺者が出る、という傾向はたしかにあろう。しかしこれらは体質遺伝というより、魂の転生輪廻における業が、そうさせてしまう場合が多いのである。
그러나, 앞에서도 접한 대로, 부모와 자식의 영혼(魂)의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자유방임의 현대사상이 그렇게 시켰던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유전학적으로, 학자의 가계는 학자가 많고, 부랑자나 술꾼의 가계는 범죄자, 자살자가 나온다, 라고 하는 경향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육체유전이라고 하기 보다,
영혼(魂)의 전생윤회에 있는 업(業)이, 그렇게 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まず、人間の出生について述べていこう。             
親子は、現象界に出生する前に実在界(あの世)で約束を交す。親になる者は、子よりも二十年も三十年も前にこの世に出生してくる。この世に出た親となる魂は、幼少から少年、青年に進むにしたがって、自我が芽生え、環境に流される。もちろん環境に負けない魂もある。やがて、結婚し、子をもうける。
우선, 인간의 출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현상계에 태어나기 전에 실재계(저 세상)에서 약속을 맺는다.  부모가 되는 사람은, 자식보다도 20년이나 30년도 전에 이 세상에 출생해 온다.  이 세상에 나온 부모가 되는 영혼은,어린이에서 소년으로, 청년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자아가 싹이트고, 환경에 맞겨버린다.  물론 환경에 지지않는 영혼도 있다.  이윽고, 결혼하고, 자녀를 설계한다.

 

その時、親となる魂が環境に負けて、実在界で学んだ目的と役目を忘れたとする。約束を交した子の魂は、四次元以降多次元の世界から親の行動を見て知っているが、一旦約束をした親子の交わりを破約し、他の子になるというわけにはゆかない。混乱が起こるからだ。
그 때, 부모가 되는 영혼이 환경에 져서, 실재계에서 배운 목적과 역할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약속을 맺은 자식의 영혼은, 4차원 이후 다차원의 세계에서 부모의 행동을 보고 알고 있지만, 일단 약속을 한 부모와 자식의 교분을 취소하고, 다른 사람의 자식이 될 수는 없다.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親となるその人が、約束通りの行動をしている場合はいいが、そうでない時には、その子となる魂は苦痛そのものである。俗に、親の罪は子にない、ということがあるが、本当に子に罪はないのである。
부모가 되는 그 사람이, 약속대로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는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자식이 되는 영혼은 고통 그 자체이다.  흔히, 부모의 죄는 자식에게 없다, 라고 하는 일이 있지만, 정말로 자식에게 죄는 없는 것이다. 

 

親が環境に負けたのは、過去世の業にひかれたためである。過去世で酒に失敗し、あの世で酒に負けない自分をつくり、その自分を試すために現象界で修行をする。修行のあり方は酒がのめるような環境が本人が知らぬ間につくられてくるのである。本人が知ってしまっては修行にならないからだ。
부모가 환경에 진 것은, 과거세의 업(業)에 끌렸기 때문이다.  과거세에서 술에 실패하고, 저 세계에서 술에 지지않는 자신을 만들고, 그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현상계에서 수행을 한다. 
수행의 본연의 자세는 술을 마실 수 있는 환경이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져 오는 것이다.  본인이 알아버리면 수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子の方も、過去世で酒で失敗している。そこであの世で、親と子になる魂同士が、たがいに、それに負けない自分を磨き、今度はしっかりやってこようといって、まず親が出、次いで、子が出生してくる。ところが、前述の通り、親は再び酒で失敗し、子となる魂がそれを出生する前にあの世でこれを見て、困ったと思っているが、しかし、親子の約束を交わした以上、他にくらがえするわけにはゆかない。失敗している親の下に出生し、再び、自分もその渦中におぼれていく場合が非常に多いのである。
この例は、親子の一つの型を示したにすぎない。
자식도, 과거세에서 술로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저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이 되은 영혼의 동지가, 서로, 그것에 지지않은 자신을 연마하고, 이번에는 확실히 하고 오자라고 해서, 우선 부모가 태어나고, 다음으로, 자식이 출생해 온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대로, 부모는 다시 술에 실패하고, 자식이 되는 영혼이 그것을 출생하기 전에 저 세상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약속을 맺은 이상,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옮길 수가 없다.  실패하고 있는 부모 밑에 출생하고, 다시, 자신도 그 소용돌이 속에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이다.
이 사례는, 부모와 자식의 하나의 모형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現象界は性が混乱し、産児制限が流行しており、親となる魂の安定性が非常に困難になってきている。そこで親子の約束は、時間的にも、実際的にも、果たさずじまいに終る場合も多い。
현상계는 성(性)이 혼란하고, 산아제한이 유행하고 있고, 부모가 되는 영혼의 안정성이 매우 곤란하게 되어 버리고 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약속은, 시간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완수하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다.

 

また、子となる魂があの世でまだ修行中であるが、親となる魂の無節操な行動によって、現象界に引きづられて出生してくる。こういう場合は、犯罪や混乱を起こしやすい。
또, 자식이 되는 영혼이 저 세상에서 아직도 수행하고 있지만, 부모가 되는 영혼의 무절제한 행동에 의해서, 현상계에 이끌려서 출생해 온다.  이러한 경우는, 범죄나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実際的な面では、当然生れて来たにもかかわらず、さまざまな理由をつけて、あの世にトンボ返りさせてしまう。つまり、受胎した子をおろす。
실제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태어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유를 붙여서, 저 세상으로 목적지에 닿자마자 바로 되돌아가게 해 버린다.  즉, 수태한 자식을 낙태시킨다.

 

こうしたことで、親子の約束がその通りに行く例は、限られてくる。夫婦の約束にしてもそうなのだから、現象界での魂の修行は、見様によっては容易ではないといえよう。
이러한 일로, 부모와 자식의 약속이 그대로 진행하는 예는, 한정되어 온다.  부부의 약속으로 해도 그러한 것 때문에, 현상계에서의 영혼(魂)의 수행은, 보는 방법에 따라서는 용이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요.

 

しかし人は縁によって、縁を通じて自らを修行する者であるし、その縁も、自らが求めてつくられて来たものであるから、与えられた環境、境遇に負けない自分をつくっ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
그러나 사람은 인연에 의해서, 인연을 통해서 스스로를 수행하는 것이며, 그 인연도, 스스로가 찾아서 만들어 온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 경우에 지지않는 자신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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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話は前に戻して、肉体遺伝はさけられないが、魂については、こういうことで、親子であっても全然異なるし、親が酒のみだから、子も酒のみというのは、類似の業がそれをさせるのである。
魂と肉体を、いっしょくたに見ることは皮相も甚だしいといわざるを得ない。
그런데, 이야기는 앞으로 되돌려서, 육체유전은 피할 수 없지만, 영혼(魂)에 대해서는, 이러한 일로,
부모와 자식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전연 다르고, 부모가 술꾼이기 때문에, 자식도 술꾼이라고 하는 것은, 유사한 업(業)이 그것을 시키는 것이다.
영혼(魂)과 육체를, 뒤범벅으로 보는 것은 표면만으로 판단하는 것도 매우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しかし、現象界の人達は、あの世が解らないし、過去世も忘れている。そうした中で生活しているのであるから、世襲(せしゅう)が社会組織の中核を為してきたのも、いたしかたがない。
그러나, 현상계의 사람들은, 저 세상를 알 수 없고, 과거세도 잊어버리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습(世襲)이 사회조직의 핵심을 행해 온 것도, 어쩔 수 없다.

 

しかし、世襲が社会制度的に矛盾を含み、混乱のモトをつくってきたので、こうした矛盾は、時代が進むにしたがって訂正されつつあることは喜ばしい。
그러나, 세습이 사회제도적으로 모순을 포함하고, 혼란의 근원를 만들어 왔던 것으로, 이러한 모순은, 시대가 나아감에 따라서 정정되어 가는 것은 경사스럽다.

 

ともかく、魂こそ、生れることもないし、滅することもない。魂の内面は、神の子としての光で輝き、そこは垢もつかず、浄らかであるということもないのだ。ましてや増えたり、減ったりすることもない。全(まっとう)なる自分があるだけである。
어쨌든 간에, 영혼(魂)이야말로,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다.  영혼(魂)의 내면은, 신(神)의 자녀로서의 빛으로 빛나고, 거기는 때도 뭍지 않고, 깨끗하다라고 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것도 없다.  흠이나 결점이 없게(정직함) 되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是故空中無色(ぜこくうちゅうむしき) 無受想行識(むじゅそうぎょうしき) 
無眼耳鼻舌身意(むげんじびぜっしんい) 無色声香味触法(むしきしょうこうみしょくほう) 
無眼界(むげんかい) 乃至無意識界(ないしむいしきかい)
시고공중무색(是故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声香味触法)
무안계(無眼界)  내지무의식계(乃至無意識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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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は、「これの故に空(実在界)の世界は、色もなし、想行識を受けることもない。眼耳鼻舌身意もない。色も声も香も味も感触も、肉体的現象の法もない。眼で見える境界も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
空中の電波、空気、紫外線、赤外線などは目で確めることが出来ない。ただ、碧(あお)い空のみが映る。
이것은, 「그런고로 공(空)(실재계[實在界])세계는, 색도 없고, 상행식[想行識]을 받는 일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다.  색깔도 소리도 맛도 촉감도, 육체적 현상의 법도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도 없다.」라고, 하는 것이 된다.  공중의 전파, 공기, 자외선, 적외선 등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단지, 파아란 하늘 만의 비친다.

 

が、大気中にはあらゆる物質を構成するところの分子、元素が分散されている。そしてすべての物質は仕事をなし得る能力、エネルギーを含んでいるのだが、これとて見ることができない。
五官で感知する範囲は大したことでないことを知るべきだ。
五官に意を加えたものを六根という。
하지만, 대기중에는 온갖 물질을 구성하는 장소의 분자, 원소가 분산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물질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으로서 볼 수가 없다.
오관으로 감지하는 범위는 대단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오관(五官)에 意(의식)를 첨가한 것을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通常その意は、五官を通して働いているが、五官を離して働くようになると、五官で感知出来ない世界を覗くことができる。これを心眼という。
心眼が開くと、次元の異なる空の実在界を見ることが出来、現象界と形態がちがうことを知る。
통상 그 의식은, 오관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지만, 오관을 때어 놓아 작용하게 되면, 오관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을 심안이라고 한다.
마음의 눈을 열면, 차원의 다른 공의 실재계를 보는 것이 가능하고, 현상계와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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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とえば、この世は平面的だ。あの世は段階的にできている。
段階的とは心に応じた世界をつくっているのである。自分より意識の低いところは見えても高い世界を見ることが出来ない。この世は、意識が高い低いにかかわらず、誰とでも会える。それ故、平面的なのだ。
この点をもう少しみていくと、あの世は、ビルの生活と思えばよい。一階、二階、三階、四階と、それぞれの階層をつくり、一階から二階に行くには階段を上らないと上には行けない。エレベーターは全然ないのである。階段の一段一段は、修行を意味する。心のひろがりが広がることによって上に進むのである。
예를 들면, 이 세상는 평면적이다.  저 세상은 단계적으로 되어 있다.
단계적이란 마음에 응한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의식의 낮은 장소는 볼 수 있어도 높은 세계을 볼 수가 없다.  이 세상은, 의식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평면적인 것이다.  이 점을 좀더 보고 있으면, 저 세상은, 빌딩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1층, 2층, 3층, 4층과, 저마다의 계층을 만들어, 1층에서 2층으로 가려면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위로는 갈 수 없다.  엘레베이터는 전연 없는 것이다.  계단의 한층 한층은, 수행(修行)을 의미한다.  마음의 넓이가 넓어짐에 의해서 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各階層は、それぞれに応じた地域社会をつくっている。丁度この地上の下町、山の手というように、いわば類をもって集まっているのである。
각 계층은, 저마다의 응한 지역사회를 만들고 있다.  정확히 이 지상의  서민층(낮은 지대의 시가지 상공인의 많이 사는 지역), 상류층(높은 지대의 주택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하자면 동류를 가지고 모여 있는 것이다.

 

このようにあの世は、それぞれの心の世界をつくっている。眼耳鼻舌身の五官と、それにもとづく意が働く、この世とはまるでちがう。そうした意味で「是故空中無色」という言葉になってくる。
「・・・・・無意識界」というのは、五官の働く意識を越えているということで、意識界が無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
이처럼 저 세상은, 저마다의 마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오관과, 그것에 바탕을 둔 의식이 작용하고,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의미로 「시고공중무색(是故空中無色)」이라고 하는 말이 되어 온다.
・・・・・무의식계(無意識界)」라고 하는 것은, 오관의 작용하는 의식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의식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現代人は多忙である。その多忙さは物質的過剰欲求によって生じているが、これは肉体が絶対という考え方が強いからである。世の混乱は、不変的な魂、そうしてその魂の中心である心を忘れることによってつくり出される。
현대인은 바쁘다.  이 바쁨은 물질적 과잉욕구에 의해서 생기고 있지만, 이것은 육체가 절대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혼란은, 불변적인 혼(魂), 그렇게 해서 그 혼(魂)의 중심인 마음을 잊어버리는 것에 의해서 만들어 낸다.

 

                                

無無明(무무명) 亦無無明尽 (역무무명진) 
乃至無老死(내지무사노) 亦無老死尽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無智亦無得(무지역무득) 
以無所得故(이무소득고)  菩提薩埵(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罣礙(심무괘애)無罣礙故(무괘애고)無有恐怖(무유공포)
遠離一切転倒夢想(원리일체전도몽상)究竟浬槃(구경열반)

 

無無明とは、無明がないということで、迷いのない世界。
亦無無明尽は、無明のない光に満ちた、そうしてその光が尽きることのない世界を、ここでは強調している。
무무명(無無明)이란, 무명이 없다고 하는 것으로, 미혹의 없는 세계.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은, 무명이 없는 빛의 충만한, 그렇게해서 그 빛의 다함의 없는 세계를, 여기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あの世は波動の細かい世界である。この世のように荒くない。
この世は、人間の意識を含めて、10%の波動で成り立っている。動物も鉱物も植物も、すべて10%の波動で現象界が出来上がっている。だから、回転が遅い。思うこと、考えることの結果が、一定の時間をかけないと出てこない。それがまた現象界の救いになっている。
저 세상은 파동의 세밀한 세계이다.  이 세상처럼 거칠게 없다.
이 세상는, 인간의 의식을 포함해서, 10%의 파동으로 성립하고 있다.  동물도 광물도 식물도, 모든 것이 10%의 파동으로 현상계가 완성되고 있다. 그래서, 회전이 늦다.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것, 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결과가,  일정한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또 현상계의 구원으로 되고 있다.

 

しかし人はそのために、心を見失う原因にもなっている。この世は一見して、悪が栄え、善が日陰にちぢこまっているようにみえる。正直者がバカを見、悪徳がのさばっている。
悪とは人のモノを盗む、人を殺める、人が困っていても見て見ぬふりをするなどであるが、その根本は、自己保存、自我我欲から生じてくる。悪の根源は自己保存である。人のことを構っていれば食べていけない、ということから、人は次第に、欲望の渦中にはまりこんでゆく。
그러나 사람은 그 때문에, 마음을 잃는 원인으로도 되고 있다.  이 세상은 대충 봐서, 악이 번창하고, 선이 그늘로 오그라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직한 사람이 바보취급을 당하고, 악덕이 제멋데로 날뛰고 있다. 
악이란 사람의 물건을 움치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보고도 못 본척 하는 등이지만, 그 근본은, 자기보존, 자아아욕에서 생겨 온다. 악의 근원은 자기보존이다.  사람의 일을 상관하고 있으면 먹고 살아 갈 수 없다. 라고 하는 것 때문에, 사람은 점차,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어 간다.

 

労使の闘争、物質至上の思想が幅をきかし、不安と競争が生活をエンジョイすると錯覚してしまう。
こうして自己保存の悪は、人々の心をむしばみ、自己保存が文明の支柱のように見えてくるから不思議である。しかし、こうした人々が、この世では栄えているように見えても、あの世に行けば地獄である。
노사의 투쟁, 물질지상의 사상이 폭을 가르치고, 불안과 투쟁이 생활을 즐긴다고 착각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자기보존의 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고, 자기보존이 문명의 지주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이상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번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져도, 저 세상에 가게 되면 지옥이다.

 

この世は波動が荒いため、自己保存の悪はスグにはハネ返ってこないからだ。怒りや、ねたみ、心配事が重なると、血の循環を悪くし、食欲が減退する。感情が肉体に及ぼす影響は極めて早いが、知的な悪の反作用には時間がかかる。
이 세상은 파동이 거칠기 때문에, 자기보존의 악은 금방은 튀어서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나 질투, 걱정거리가 겹치면, 혈액 순환을 나쁘게 하고, 식욕이 감퇴한다.  감정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빠르지만,
지적인 악의 반작용에는 시간이 걸린다.

 

男より、女に病人が多いのは、感情に心が奪われるからといってもいいが、知的な悪は、十年、二十年の長期を経て、ジワジワと自分に返ってくる。だから、こうした例は在世中に結果を見ずに終る場合が多いので、悪人志願が後を絶たないといってもいいかも知れない。
남자 보다, 여자에게 환자가 많은 것은, 감정에 마음이 빼앗겨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지적인 악은, 10년, 20년의 오랜 기간을 거쳐, 차근차근히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례는 생전에 결과를 보지않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써, 어떤 일이나 조직에 뜻을 두어 끼이길 바라는 악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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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吉という男は草履(ぞうり)取りから、位人身を極めた。今日、秀吉の魅力は大分半減したようだが、それでも出世主義は男の生甲斐になっている。
秀吉は謀略(ぼうりゃく)の名人で、敵対する者は、ことごとく殺し、我が世の春を謳歌(おうか)する。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하는 남자는 짚신(끈을 단 일본식)을 잡아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히데요시의 매력은 상당이 반감한 것 같지만, 그래도 출세주의의 남자의 사는 보람이 되고 있다.
히데요시는 모략의 명인으로
, 적대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고, 전성시대를 노래(謳歌)한다.

 

しかし、その反動は死の数年前から現われ、彼は自分の悪を清算できず、あの世に帰った。
人のうらみ、ねたみもあって、彼は地獄で、今でも苦しみ、暗い世界でまだ号令をかけている。ところが号令をかけると、在世中、憎しみをいだいて死んでいった多くの人々の呪いの顔が彼の眼前に現われ、彼を苦しめる。
그러나, 그 반동(反動)은 수년 전부터 나타나, 그는 자신의 악을 청산하지 않고, 저세상으로 돌아갔다.
사람의 원한(원망), 시샘(질투)도 있고, 그는 지옥에서, 지금까지도 괴롭고, 어두운 세계에서 아직도 명령(号令)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명령을 내리면,
생전에, 미워하는 마음(증오)를 품고 죽어 간 사람들의 저주하는 얼굴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고, 그를 괴롭힌다.

 

彼の謀略は、地獄では通じないのである。謀略の想念がスグ様自分にハネ返って来て、謀略で倒された人々の怨念が、彼の身と心を八つ裂きにするからだ。八つ裂きにされても、彼は死ぬことは出来ない。息をふきかえし、我にかえると、また彼は号令をかける。また八つ裂きに合う。こうした繰り返しの中で、身も心も細る生活を続けている。
그의 모략은, 지옥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모략의 상념이 곧 어떤 모습으로 자신에게 튕겨서 되돌아 오고, 모략으로 쓰러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긴 원한이, 그 몸과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갈기갈기 찢기어도, 그는 죽을 수는 없다.  멈추었던 숨을 다시 쉬고,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면,  재차 그는 명령을 내린다. 재차 갈기갈기 찢기움를 맞이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몸도 마음도 여위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現象界では謀略によって、天下人になっても、あの世に帰れば、一転して地獄である。その地獄も、自分の想念と行為の清算のみでなく、人々の怨念がプラスされる。
현상계에서는 모략에 의해서, 천하의 권력을 쥔 사람이 되어도, 저 세상으로 돌아가면, 완전히 바꿔서 지옥이다.  그 지옥도, 자기자신의 상념과 행위의 청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새긴 원한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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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方、歴史の上では悪の代名詞のようにみられてきた明智光秀は、神界にあって、自適の生活を送っている。
殺された信長も秀吉同様、今以って地獄にあるのに、殺した光秀が神界に在るとは、誰しもげ解せぬであろう。
한편, 역사상으로는 악의 대명사처럼 보여져 왔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는, 신계(神界)에 있고, 속박을 받지 않고 여유있게 즐기며 지내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살해당한 노부나가(信長)도 히데요시(秀吉)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지옥에 있는데,
살해한 미쓰히데(光秀)가 신계에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殺された信長は権力の盲者であり、殺戮(さつりく)に快感を覚える精神異常者であった。
殺した光秀は平和主義者であり、このため信長を討つことに随分と迷う。
살해당한 노부나가(信長)는 권력의 눈 먼 자이며, 살육(殺戮)에 쾌감을 느끼는 정신 이상자였다.
살해한 미츠히데(光秀)는 평화 주의자이며, 이 때문에 노부나가(信長)를 토벌하는 것에 상당히 갈피를 못 잡는다.

 

しかし世の混乱のモトは信長にあり、逆臣(ぎゃくしん)の汚名を着せられても信長打倒に意を決し、本能寺を襲う。
그러나 세상의 혼란의 근원은 노부나가에게 있고, 역신(逆臣)의 오명을 씌울 수 있어도 노부나가 타도에 뜻을 결정해, 혼노지(本能寺)를 습격한다.

 

勿論、こう決心するには、秀吉の奸計(かんけい)が裏で働いていた。彼は、信長に光秀謀反(むほん)を伝え、光秀には信長打倒を促(うな)がしている。
光秀はこれに感づいてはいたが、敢えて信長打倒に踏み切ったのである。
本能寺の変を知った時の秀吉の喜びようは大変であった。彼はこの時、天下人の夢を我がものにしたのである。
물론, 이런 결심을 하는데에는, 히데요시의 간계(奸計)가 뒤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노부나가에게 미츠히데의 모반(謨反)을 전하고, 미츠히데에게는 노부나가 타도를 재촉을 하고 있다.
미츠히데는 이것를 느끼고는 있었지만, 무리하게 노부나가 타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혼노지(本能寺)의 변를 알았을 때의 히데요시의 기쁨은 큰 일이었다.  그는 이 때, 천하의 권력을 쥔 사람의 꿈을 이루었던 것이다.

 

謀略によって、戦国の覇者になっても、落ち行く先が地獄では間尺に合うまい。栄誉栄華の期間は短かく、地獄が何百年も続いては、どう転(ころ)んでも計算が合わないからである。
모략에 의해서, 전국의 무력이나 권력으로 천하를 정복한 사람이 되더라도, 떨어지는 목적지가 지옥에서는 수지가 맞지 않으리라.  영예 영화의 기간은 짧고, 지옥이 몇백년도 계속되어서는, 아무리 굴려봐도 계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このように、この世に悪が栄えても、そうした悪は続くものではないし、悪を犯した人々の行き先は、この世で結果をみなくてもあの世で 清算させられることを知って欲しいものである。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악이 번창해도, 그러한 악은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목적지는, 이 세상에서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저 세상에서 청산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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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着を離れたあの世の世界は、光明のつきることのない平和な楽土である。田園の緑は太陽の光を浴びて生々と育ち、人々の生活は、自由に、明るく、伸び伸びとしている。食生活に心をわずらわされることもなく、仕事に追いまくられることもない。信頼と友情によって人々は結ばれ、科学者は科学を、絵画きは絵を、建築家は建築の仕事に、一心を傾ける。
집착을 벗어난 저 세상의 세계는, 광명이 다하는 일이 없는 평화로운 낙원이다.  전원의 푸르름은 태양의 빛을 계속해서 받아 생생하게 자라고, 사람들의 생활은, 자유롭고, 밝고, 구김살 없이 생활하고 있다.  식생활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도 없고, 일에 쫓기는 일도 없다. 
신뢰와 우정에 의해서 사람들은 결속하고, 과학자는 과학을, 화가는 그림을, 건축가는 건축의 일에, 한 마음을 쏟는다.

 

人によっては守護霊となって、現世に修行する魂の兄弟を守り導く者もいる。また守護霊になって、そうした魂の努力に応援をする人もある。
사람에 따라서는 수호령이 되고, 현세에 수행하는 영혼(魂)의 형제를 지키고 인도하는 자도 있다.  또 수호령이 되어, 그러한 영혼(魂)의 노력에 응원하는 사람도 있다.

 

あの世にあって、あの世の諸霊を、より向上させるため、正法にもとづいた政治、経済、教育、科学などを教える人もいるが、安らぎと慈愛の生活は、そのまま光明となって、いつまでも続いていく。光明の毎日が、尽きることがないのである。
저 세상에 있어서, 저승의 여러 영혼을, 보다 향상시키기 위해, 정법에 바탕을 둔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등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평안과 자비의 생활은, 그대로 광명이 되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어 간다. 
광명의 일상이, 다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こういうと、人によっては、喜怒哀楽(きどあいらく)、善悪混合の変化のない世界はつまらぬ、という人がいるかも知れない。
이렇게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희노애락(喜怒哀楽), 선과 악의 혼합의 변화가 없는 세계는 시시하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ところが、こうした世界でも、ちゃんと感情があり、変化があるのだ。感情や状況の変化は、地上のそれとはちがった次元で存在し、あきたり、退屈するなど全然ないのである。
もっとも、あきたり、退屈するような人々は、こうした世界に住することはできないが。
그런데, 이러한 세계에서도, 분명히 감정이 있고, 변화가 있는 것이다.  감정이나 상황의 변화는, 지상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하고,
싫증나고, 지루함 따위는 전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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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次に無老死とは、年老いて死ぬことがない、亦無老死尽とは、老いることも、死ぬことも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그럼 다음에 무노사[無老死]란, 늙어서 죽는 일이 없다, 역무노사진[亦無老死尽]이란, 늙는 일도, 죽는 일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秀吉が死ぬことが出来ないのは、あの世というものは、実在の世界であり、心の世界でもあるので、苦しみの責めをうけても、死ぬことが出来ないのである。
히데요시가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은, 저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의 세계이며, 마음의 세계라고도 하는 것으로,
괴로움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아도,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思うこと、考えることがスグ様現われ、そのことが何時までも続くのである。だから地獄に堕ちると大変だ。謀略策士(ぼうりゃくさくし)の心が変らぬ限り、そうして、人々を泣かせた怨念(おんねん)が晴れるまで、秀吉の苦しみは続く。苦しみの連続だから反省ができない。誰しもそうであろう。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것, 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금방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일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옥에 떨어지면 큰 일이다.  모략책사(謀略策士)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몹시 괴롭혀서 마음에 깊이 새겨진 원한이 풀어질 때까지, 히데요시의 괴로움은 계속된다. 
괴로움의 연속이기 때문에 반성을 할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러한 것이다.

 

ひどい腹痛や頭痛の際に、どうしてこうなったかと、反省できるだろうか。反省できる心の持主なら、そうした事態に見舞われることは、まず少ないだろうが・・・。
지독한 복통이나 두통이 있을 때에, 어째서 이렇게 된건가 라고, 반성할수 있을까,  반성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그러한 사태를 당하는 일은, 우선 적을 것이지만・・・.

 

天上界の無老死、亦無老死尽も、これと同じで、調和された世界では、そうした状況の中で、老いることも、死ぬこともないのである。働きやすい年齢が、半永久的に続き、仕事も、能率も上がるのである。
천상계의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尽]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조화된 세계에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늙는 일도, 죽는 일도 없는 것이다.
활동하기 쉬운 연령이, 반영구적으로 계속되고, 일도, 능률도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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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老死、亦無老死尽は、主に天上界についていっているが、しかし前にも触れたように、地獄に堕ちた魂についても、その苦しみは果しなく続く。これはあの世の世界が、実在の世界であり、思うこと、行なうことが、そのままスグ様現われ、しかもこの世とちがって、すべてが消えて無くならないように出来ているからである。
무노사[無老死]、역무노사진[亦無老死尽]은, 주로 천상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 영혼(魂)에 대해서도, 그 괴로움은 다하지 않고 계속된다
이것은 저 세상의 세계가, 실재의 세계이며,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이, 그대로 금방 모습으로 나타나서, 게다가 이 세상과 달라서, 모든 것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토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この世は、肉体的に苦痛であれば、麻酔によって、その苦痛からのがれることも出来るが、あの世は、心のままの世界をつくっているので、その心を変えない限り、苦痛から解放されることがない。
老いた気持が心を支配していれば、何百年経っても老人である。光子体の肉体は若さをとり戻すことは出来ない。
이 세상은, 육체적으로 고통이 있으면, 마취에 의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저 세상은, 마음대로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늙은 기분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면, 몇 백년이 경과해도 노인이다.  광자체의 육체는 젊음을 회복할 수는 없다.

 

ともかく、あの世は「心のまま」の世界をつくっているが、この世は、心と肉体の三次元の世界であり、無老死、亦無老死尽は、あの世の姿を端的に述べていることを知って欲しい。
어쨌든 간에, 저 세상은「마음대로」의 세계를 만들고 있지만, 이 세상은, 마음과 육체의 3차원의 세계이며, 무노사, 역무노사진은, 저 세상의 모습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無苦集滅道は、文字通り、あの世の天上界は、生死の苦しみから解脱する正しい道を悟っているため、常に神の意識と通じ、調和されていて、迷いは無いのである。迷いのあるのは、あの世の地獄と現世の肉体を持った人間である。よくよく心しなければならない。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문자 그대로, 저 세상의 천상계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올바른 길(道)
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항상 신(神)의 의식과 통해서, 조화되어 있고, 미혹은 없는 것이다.  미혹의 있는 것은, 저 세상의 지옥과 현세의 육체를 지닌 인간이다아주 신중하게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無智亦無得(むちやくむとく) 以無所得故(いむしょとく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天上界にあっては、才能によって得る所得、つまりは、地位や名誉や財産というものは、一切無い。神の子としての自覚と責任しかない。その自覚や責任も、無理無理そうするのではなく、当然のこととして現われてくるのである。
천상계에 있어서는, 재능에 의해서 얻는 소득, 결국은, 지위나 명예나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없다.  신(神)의 자녀로서의 자각과 책임밖에 없다.  그 자각이나 책임도, 무리하고 무리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自然法爾(じねんほうに)という言葉がある。この意味は、法のままに生きる、ということであり、神の意識が、その、心に同通されて、無理なく行える心と行為を指すのである。
あの世、天上界もこれと同じであり、すべてが自然にそって生かされ、生きている。
あの世の経済について大分類すると、大体、三段階ぐらいにわけられよう
자연법과 같다(自然法爾)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의미는, 법대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이며, 신(神)의 의식이, 그, 마음에 함께 통하게 되어, 무리없이 행할 수 있는 마음과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저 세상, 천상계도 이것과 같고, 모든 것이 자연에 따르며 살리고, 살고 있다.
저 세상의 경제에 대해서 크게  분류하면, 대체로, 3단계 정도로 나눌 수 있지요.

 

第一段階は、純然たるバーター制である。欲しいものがあれば、自分の持物を相手に渡し、その相手方から求めるものを得る。
제 1단계는, 순수한 물물교환에 의한 무역제도(barter system)이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자신의 소유물을 상대에게 건내고, 그 상대방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얻는다.

 

第二段階は、この世の流通機構と、やや似ており、物々交換の媒体として貨幣(この世とは異なるが)が使われている。第一段階より、経済組織が複雑であり、この世的にいう文明は、現世より進んでいる。
제 2단계는, 이 세상의 유통기구와, 약간 비슷하고, 물물교환의 매체로서 화폐(이 세상과는 다르지만)가 사용되고 있다.  제 1단계 보다, 경제 시스템이 복잡하며, 이 세상적으로 말하는 문명은, 현세 보다 진보하고 있다.

 

第三段階は、物々交換も、貨幣も使われず、必要なものは何時でも得られる世界である。この世界は、いうなれば天使が住んでいる階層であり、心と物とが忽然と溶け合っている。
제 3단계는, 물물교환도, 화폐도 사용하지 않고, 필요한 것은 언제라도 얻을 수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말하자면 천사가 살고 있는 계층이며, 마음과 물질이 홀연히 용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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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智亦無得という世界は、この中の第三段階を指し、したがって、智による所得を必要としないのである。地上でも、衣、食、住が十分であり、満たされておれば、金銭の欲望は起きてこないだろう。
それと同じという意味ではないが、必要なものは何時でも得られるので、金銭的媒体物、あるいは物々交換の必要に迫られることがないのである。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고 하는 세계는, 이 안의 제 3단계를 가리키고, 따라서, 지혜에 의한 소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지상에서도, 의, 식, 주가 충분하며, 채워지고 있으면, 금전의 욕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같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지만, 필요한 것은 언제라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금전적인 매개물, 혹은 물물교환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일은 없다. 

 

ここで、第一、第二の世界が、それぞれ物や金を対象としているので、この世の金が使えないだろうか、と思う向きもあろうが、次元がちがうのでもちろん役立たない。
「冥土の沙汰も金次第」というが、これはもともと貧に対する苦悩から出た言葉なので、問題にならない。
実在界は、すべて心の調和度にかかっている。調和度とは、神の心に適った心の状態をいうのである。
神が地上の人類に望まれることは、右のような第三段階の世界の心に、人々の心が同通されることであり、五官六根に左右されない、正道に適った生活である。
여기에서, 제 1, 제2의 세계가, 저마다의 물건이나 돈을 대상으로하고 있는데, 이 세상의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지만, 차원이 다르므로 물론 쓸모가 없다.
「지옥에서 선악을 가르는 재판도 돈에 좌우된다」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원래 가난에 대한 괴로움에서 나온 말인 것으로,
문제가 안 된다.

실재계는, 모든 것의 마음의 조화도에 달려 있다.  조화도란, 신의 마음에 꼭 맞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신(神=God)이 지상의 인류에게 바라는 일은, 오른쪽과 같은 제 3단계의 세계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함께 통하게 되는 일이며, 오관 육근에 좌우되지 않는, 정도에 꼭 맞는 생활이다.

 

 

菩提薩埵(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罣礙(심무괘애) 無罣礙故(무쾌애고) 無有恐怖(무유공포) 
遠離一切顛倒夢想(원리일체전도몽상) 究竟浬槃(구경열반)

 

無罣礙とは、心にとらわれがない、ひっかかりがない、わだかまりがない、ということだ。だから恐怖の念がない。正道に反した、さかさまの物の見方、考え方がないから、神の心に通じ、もっとも偉大なる悟りに達している。それを菩提薩埵という。
무괘애[無罣礙]란,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거리낌이 없는, 응어리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포의 생각(念)이 없다 정도에 반한, 거꾸로 된 사물을 보는 견해, 사고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그것을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한다.

 

一切の諸現象は心から生ずる。丸く大きな豊かな心を有しておれば、恐れも、慢心も起きない。とらわれが多く、肉体の自分が自分であると思うから、苦しみ、悲しみがついてまわる。夢をみていてはいけないのだ。我々は白昼夢を見ている。腕をツネれば痛いし蚊にさされればかゆいので、つい肉体の全部が自分であると思ってしまう。しかし、本当は、肉体の自分以外に、もう一人の自分がいて、その自分が肉体と一緒に生活しているのである。無情の現世をみると、誰しもが薄々感じられるのではあるまいか。
일체의 여러 현상은 마음에서 생긴다.  둥들고 커다란 풍요로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으면, 공포도, 교만스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얽매임이 많고, 육체의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 슬픔이 따라 다닌다.  꿈을 꾸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백일몽을 꾸고 있다. 팔뚝을 꺽으면 아프고 모기에 물리면 가렵기 때문에, 무심코 육체의 전부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육체의 자기 자신 이외에, 또 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있고, 그 사람 자신이 육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무정한 현세를 보면, 누구든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無罣礙の心は、何も人間だけではない。導体に電気を流すと、その導体に抵抗が多いと電気のエネルギーは熱エネルギーに変わってしまう。電気の役を果たすことが出来ない。
血管にコレステロールがたまると、血行が思うようにゆかず、血管が破裂したり、血液の流通をとめてしまう。
무괘의[無罣礙]의 마음은, 무엇도 인간 만이 아니다. 도체에 전기를 흘리면, 그 도체에 저항이 많으면 전기의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변해 버린다.  전기의 역할을 다할 수 가 없다.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쌓이면, 혈액순환[血行]이 생각처럼 되지 않고, 혈관이 파열하거나, 혈액의 유통을 멈추어 버린다.

 

万事がそのように出来ているのだ。自然は、私達人間に、神理を教えている。その神理を一つ一つ悟る必要があろう。
만사가 그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들 인간에게, 신리(神理=신의 섭리,뜻)를 가르치고 있다. 그 신리를 하나 하나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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究竟涅槃とは、表面的な解釈は釈迦の入滅を指している。つまり、不生不滅の状況を「涅槃」といっている。
구경열반[究竟涅槃]이란, 표면적인 해석은 석가의 입멸을 가리키고 있다.  즉, 불생불멸의 상황을 「열반(涅槃)」이라고 말하고 있다.

 

現世からみると、入滅(実在界に帰る)は、永遠への回帰にちがいはないが、本当は肉体を持ちながら私達の魂は永遠の中にあるのである。ただ現世は、肉体と共に魂があるために、極めて不安定な、そうして有限の迷いの多い、それのように思ってしまうだけである。
현세에서 보면, 입멸(실재계로 돌아간다)은, 영원으로의 회귀임에 틀림이 없지만, 사실은 육체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들의 영혼(魂)은 영원함 속에 있는 것이다.  단지 현세는, 육체와 함께 영혼(魂)이 있기 때문에, 지극히 불안정한, 그렇게 해서 유한(有限)의 미혹의 많은, 그것과 같이 생각해 버릴 뿐이다.

 

釈迦は三十六歳で「宇宙即我」を悟った。悟ったとは人間の魂は不生不滅であり、死ぬことも、生きることも区別できない、そして、大宇宙と倶にあるということを知った。この時点で、釈迦は、涅槃の境涯をつかんでいたのである。四十余年後の肉体的な死が涅槃というのではない。
석가는 36세에 「우주즉아(우주가 바로 나다)」을 깨달았다.  깨달았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魂)은 불생불멸이며, 죽는 일도, 사는 일도 구별할 수 없다, 그리고, 대우주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 시점에서, 석가는, 열반의 경애(境涯)를 파악했던 것이다.  40여년 후의 육체적인 죽음이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ただし、三十六歳で大いなる悟りに達し、その後、その悟りの内容が次第に幅広く、深く、濃密になって、入滅の瞬間に人間としての全きを得たといえる。
다만, 36세로 크나큰 깨달음에 이르고, 그 후, 그 깨달음의 내용이 서서히 폭을 넓히고, 깊고, 농밀하게 되어, 입멸의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したがって、この意味からすれば、釈迦の入滅は、人類が待ち望みながらも、容易に果し得なかった最高の悟りに達したといえなくはない。
따라서, 이 의미 때문이라고 한다면, 석가의 입멸은, 인류가 용이하게 달성할 수 없었던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しかし普通の解釈は、肉体の迷いから、永遠の生命に帰られ、二度とこの世に生れることがないと考えられている。生命の転生輪廻を黙殺する。解らないためである。同時に、不安定な現世に対する人々の希望が、そう解釈し、そう解釈させて欲しい、と願うからでもあろう。
그러나 보통 석가는, 육체의 미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서, 두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의 전생윤회를 묵살한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안정한 현세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이,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何れにしても涅槃の解釈は、頭では割り切れない。物理的現象のみでは誤った方向にゆきやすい。心の問題は、心を本当に理解しないと間違いを犯そう。
어느 쪽이라고 해도 열반의 해석은, 머리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물리적 현상만으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마음의 문제는, 마음을 정말로 이해하지 않으면 잘못을 저지른다.

 

話しは変るが、大抵の人はもう二度とこの世に生れ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だろう。あるいはそう思うことがあるだろう。これは、あの世の生活とこの世の生活に大きなズレがあるためであるし、10%の表面意識の自我にもとづく我侭な心がそうした想念を生み出している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魂の転生輪廻と聞いて、人によってはウンザりしている者もあろう。ところがあの世にいる魂のグループ、つまり魂の兄弟達は、そうは思っていないのだ。むしろ自分のためとして、現世におるその兄弟を守り、無事に修行を終える事を願っている。魂の前進は、現世に出て、はじめて可能だからである。あの世の修行は、先が見通せるだけ修行にならない。原因と結果が解ってしまうからだ。現世はそれが解らない。解らないから価値があり、魂の前進は人間である以上、さけることの出来ない天命といってもいい。
이야기는 바뀌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더이상 두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저 세상의 생활과 이 세상의 생활에 큰 엇갈림이 있기 때문이고, 10%의 표면의식의 자아에 바탕을 둔  아진(我侭=자기만을 생각하는)한 마음이 그러한 상념을 창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魂)의 전생윤회한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에 따라서는 억! 그럴수가 라고 놀라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세상에 있는 영혼(魂)이 그룹, 즉 영혼(魂)의 형제들은,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목적으로서, 현세에 있는 그 형제를 지키고, 무사히 수행을 끝내는 것을 바라고 있다.  영혼(魂)의 전진은, 현세에 나와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세상의 수행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훤히 저절로 알기 때문에 수행이 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를 깨달아 알아 버리기 때문이다.  현세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영혼(魂)의 전진은 인간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천명(天命)이라고 말해도 좋다.


 

三世諸仏(삼세제불) 依般若波羅蜜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고지반야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시대명주) 是大明呪(시대명주) 
是無上呪(시무상주)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真実不虚(능제일체진실불허) 
故説般若波羅蜜多呪(고설반야바라밀다주) 即説呪曰(즉설주왈)
掲諦掲諦(게제게제) 波羅掲諦(바라게제) 波羅僧掲諦(바라승게제) 
菩提薩婆呵(보리살바아) 般若心経(반야심경)

 


読者はこれまでの解説で、大体おわかり戴いたと思う。あとは、これを生活の上に生かして行くかどうかによって、本当に理解されるか、頭の遊戯に終るかの分れ目になろう。
さて、最後の解説に入るが、これを直訳すると次のようになる。
「三世の諸仏は、般若波羅蜜多に依るが故(ゆえ)に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得ることができた。それ故、般若波羅蜜多は是れ大神呪なり。是れ大明呪なり。是れ無上呪なり。是れ無等等呪なり。よく一切の苦しみを除き、うつろなることのない真実のもの般若心経の神理を説くことにしよう。
即ち呪を説いて曰く。掲諦掲諦 波羅掲諦 波羅僧掲諦 菩提薩婆呵 般若心経」
책을 읽는 사람(讀者)은 지금까지의 해설로, 대강 아~그렇구나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생활해 가면서 되살려 가든지 어떤지에 따라서, 정말로 이해되는지, 지식으로(頭)의 유희만으로 끝날지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럼, 최후의 해설에 들어가지만, 이것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삼세(三世)의 여러 부처(諸佛)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Anuttara-samyak-sambodhi)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런고로,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이니라.  이것이 대명주이니라.  이것이 무상주이니라.  이것이 무등등주니라.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공허하게 되는 일이 없는 진실한 것의 반야심경의 신리를 설명하려는 것이지요.

즉 주문을 설명하고 말하기를.  게제게제(아제아제) 바라게제 바라승아제 보리살타가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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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ず三世の諸仏だが、これは過去、現在、未来を通して悟られた、あるいは悟られる人びと、仏を指している。
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古代インド語でアーヌクターラーサンミャクサンボディーと発音する。漢字はこの発音に当て字したものである。
우선 삼세(三世)의 여러 부처이지만,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혹은 깨닫게 되는 사람과, 부처를 가리키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Anuttara-samyak-sambodhi)를 고대의 인도어로 아누쿠타라삼먀쿠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 라고 발음한다.  한자는 이 발음에

취음자(=음이나 훈을 빌려서 표기하는 한자. 잘못된 한자의 표기)인 것이다.

 

この意味は、光明に満ちた金剛界あるいは無色界という光一色の世界、色のない世界、欲望のない世界、慈悲と愛の世界、如来の住する大天使の心の境地をいっているのである。
ボディーとは悟りの意で、ゴーダマが背にし瞑想に耽ったピパラの大木をとって「悟りの樹」、つまり悟り、菩提ということになる。
이 의미는, 광명에 충만한 금강계 혹은 무색계라고 하는 빛 일색의 세계, 색의 없는 세계, 욕망의 없는 세계, 자비와 사람의 세계, 여래가 주거하는 대천사의 마음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디란 깨달음의 뜻으로, 고다마가 등지고 명상에 빠졌던 비바라의 큰 나무을 잡고 「깨달음의 나무」, 즉 진리를 깨닫고, 보리(菩提)라고 하는 것이 된다.

 

サンミヤクサンボディーの三は、三という数はどこまていっても割り切れない数、無限大を意味する。三千世界、一念三千という言葉もある通り、昔の中国では三を取って、その大きさを表わした。三菩提とは、それゆえに「大きな悟り」「偉大なる悟り」ということになる。
삼먀쿠삼보디의 3(三)은, 3이라고 하는 숫자는 어디에 가더라도 나머지 없이 나누어지지 않는 숫자로, 무한대를 의미한다.  삼천대천세계, 일념삼천이라고 하는 말도 있는대로, 옛날 중국에서는 3을 취해서, 그 크기를 나타냈다.  삼보리란, 그러므로「큰 깨달음」「위대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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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偉大なる悟りを、是れ大神呪 是れ大明呪 是れ無上呪 是れ無等等呪 と賛美している。中国の表現は、みようによってはオーバーだが、しかし釈迦の悟りはそれほど大きなものといっているのである。
大明呪とは、偉大な智慧をいっている。仏智である。
그 위대한 깨달음을, 이것이 대신주다.  이것이 대명주다.  이것이 무상주다.  이것이 무등등주 라고 찬미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오버[Over]이지만, 그러나 석가의 깨달음은 그만큼 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명주란, 위대한 지혜를 말하고 있다. 불지(佛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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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知識と智慧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ふつうはこの両者を混同しがちである。ところが、中身がちがう。どう違うかというと、平たくいえば、知識とは今世で学んだものだが、智慧とは、過去世に蓄積された人生経験である。    
学者は智慧者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い。
여기에서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보통은 이 양자를 혼동하기 쉽상이다.  그런데, 내용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알기 쉽게 말하면,
지식이란 이승에서 배운 것이지만, 지혜(智慧)란, 과거세에 축적된 인생경험이다.

 

学者に政治や実業をやらせたら、おそらく失敗するだろう。大きな組織の中で動いている時はいいが、一朝コトがあると判断を誤まる。政治や実業というものは、理屈通りにゆかない場合が多いからだ。
학자에게 정치나 실업(實業)을 시키면, 어쩌면 실패할 것이다.  큰 조직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는 좋지만, 하루아침에 일이 생기면 판단을 잘못한다.  정치나 실업(實業)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대로는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知識は私達の狭い日常生活における経験をある程度補ってはくれる。が、役立たぬことの方が多い。大学で学んだ知識、新聞や本で得たことを実生活に応用しようとすると、間違いや人との意志の疎通を欠くことがしばしばだ。
지식(知識)은 우리들의 좁은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경험을 어느 정도 보충해 준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많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 신문이나 책에서 얻은 것을 실생활에 응용하려고 하면, 잘못(실수)이나 사람과의 의사의 소통을 깨는 일이 자주 있다.

 

私達の個人個人の一生における生活経験というものは非常に狭い。サラリーマンは、家と会社の間を往復し、商人は商売の筋道は解っても、人の商売の善し悪し、苦労は解らない。家庭の主婦は、家の中のことは解るが、外で働く夫のさまざまな経験は、想像は出来てもその範囲を越えることが出来ない。
우리들 개개인의 일생에 있어서의 생활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좁다.  샐러리맨은, 가족과 사회의 사이를 왕복하고, 상인은 장사의 절차는 알아도, 다른 사람은 장사의 좋고 나쁘고, 고생은 모른다.  가정의 주부는, 집안의 일은 잘 알지만, 밖에서 일하는 남편의 다양한 경험은, 상상은 할 수 있어도 그 범위를 넘을 수가 없다.

 

しかし何れにしても、実生活で私達がアテに出来て頼りになるものといえば、狭いながらも人生で経験した事柄であろう。経験ほどたしかなものはないし間違いも少ない。智慧というのは、そうした経験して得たもの、過去世で蓄積したものが、私達の心の中に内在されているものである。そうして、その内在された生きた経験が心の窓を開くと、流れ出てくるのである。
그러나 어느 쪽이라고 해도, 실생활에서 우리들이 목표로 할 수 있고 힘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하면,
좁으면서도 인생에서 경험한 사항(사정)일 것이다.  경험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실수도 적다.  지혜(智慧)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 과거세에서 축적한 것이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내재된 생긴 경험이 마음의 창을 열면, 흘러나오는 것이다.

 

智慧は知識の範囲を超越している。私達の過去世は、王であったり、医者であったり、武士であったり、坊主であったり、農夫であったり、科学者であったり、文学者であったり、政治家であったりしたこともある。そうした人生の生々流転の経験が、心の窓をひらくことによって、現世における狭い経験を補ってくれる。
지혜(知慧)는 지식의 범위를 초월하고 있다.  우리들의 과거세는, 왕으로 있었거나, 의사(医者)로 있었거나, 무사(武士)로 있었거나, 절의 주지로 있었거나, 농부로 있었거나, 과학자로 있었거나, 문학가로 있었거나, 정치가로 있었거나 했던 일도 있다.  그러한 인생의 생생한 유전의 경험이, 마음의 창을 여는 것에 의해서, 현세에 있어서의 좁은 경험을 보충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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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にぶつかった時、何をどうずれば良いか。
それは智識では得られない示唆に富んだ指示が得られる。その人の過去世がバラエティであればある程、あらゆる諸問題に対して、解決を与えてくれる。今世の経験が、仮りに商人であったとする。商売はあきずに商いすることだといった、ついこの間までのやり方では、今日では落伍するかも知れない。目先きをきかし、政治や全体の問題に常に関心を払ってゆかなければ損をする。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것은 지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시를 얻을 수 있다.  그 사람의 과거세가 버라이어티해 있으면 있을 만큼, 온갖 여러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제공해 준다.  금세의 경험이, 가령 상인으로 있었다고 가정하면, 장사는 싦증이 나지 않고 장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로 요전까지의 태도로는, 오늘날에는 낙오할지도 모른다. 앞일을 잘 내다보고, 정치나 전체의 문제에 늘 관심을 두고 진행해 가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そうした時に、その人の過去世が政治や経済家として生きた経験があれば、その経験が、その人を導いてくれるだろう。
그러한 때에, 그 사람의 과거세가 정치나 경제가로서 살았던 경험이 있으면, 그 경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줄 것이다.

 

要するに智慧というものは知識ではない。生きた経験の集積なのだ。そうした経験が、折りにふれ、縁に触れ、ひらめいてくるのである。人によってはもっと具体的に流れてこよう。
요컨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살았던 경험의 집적이다.  그러한 경험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연에 접하여, 순간적으로 번뜩여 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흘러 올것이다.

 

では過去世で未経験の者はどうか。経験のない者は、いつの世でも泣いて暮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い。経験のない場合は、経験のある人が、その人を指導してくれる。つまり、指導霊がその人の背後にいて指示を与えてくれるのだ。
그럼 과거세에서 경험의 없는 사람은 어떤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어느 세상에서도 시달리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경험이 없는 경우는, 경험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지도해 준다. 
즉, 지도령이 그 사람의 배후에 있고 지시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指導霊がつくには、それだけの努力と一念が必要だ。何もしないで、天から湧いてくることを願っていては、何も教えてはくれない。与えられた環境、立場に対して、精一杯努力するところから教えられる。
지도령이 나라에는, 그것만큼의 노력과 일념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하늘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바라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주어진 환경, 입장에 대해서, 있는 힘껏 노력하는 그 과정에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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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た心の窓を開く、開かないについても、開いたから何んでもわかる、開かないから不明というものでもない。問題は、現実を怠たらず、努めるところに、智慧の泉をひもとくきっかけをつくるのである。                   
또 마음의 창을 여는, 열리지 않음에 대해서도, 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알수 있고,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치 않다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현실을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하는데, 지혜의 샘을 끌어내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よく悪知慧が働くというのがある。秀吉なぞはその最たる者だ。こういう場合は、悪魔が背後にいて、それを教える。蛇とか悪魔というのは、自分のことしか考えない。しかし才覚は働く。蛇にもいろいろあり、悪魔もさまざまである。病気をさせあの世に引き取るもの。殺人を犯すもの。人をおどし喜ぶもの、人を拝(おがま)せ得々(とくとく)とするもの。才覚を働かし、威張りたがるもの。その種類は千差万別だ。
자주 나쁜 지혜가 작용한다고 하는 것이 있다.  히데요시 등은 악의 으뜸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경우는, 악마가 배후에 있고, 그것을 가르친다.  뱀이라든지 악마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일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치는 발휘한다.  뱀에도 여러 가지 있고, 악마도 다양하다.  병들게 하고 저 세계로 물러나는 것 살인을 범하는 것.  사람을 협박하고 기뻐하는 것사람을 절(두꺼비)하게 하고 득의양양해 하는 것.  재치를 활용하고, 뽐내며 으스대고 싶어하는 것.  그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本来の智慧はこうではない。正道に適った智慧なのである。人の心を豊にし、周囲を明るくし、たがいに扶け合い、笑い合って、調和という神の意思に励むなかから生れる。したがって暗さがない。明朗そのものだ。
본래의 지혜는 이렇지 않다.  정도에 꼭 맞는 지혜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주변을 밝게 하고, 서로가 서로 돕고, 서로 웃고, 조화라고 하는 신(神)의 뜻(意思)에 힘쓰는 가운데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어두움이 없다.  명랑 그 자체다.

 

仏智の智慧は、過去世の経験された調和の集積であり、神の心に同通した全能(の智慧である。
불지의 지혜는, 과거세의 경험된 조화의 집적이며, 신의 마음에 동통한 전능의 지혜이다.

 

 


 

 

(※ここからは以前に紹介しました、「般若心経のまとめ」の最初の記事と重複します)
(※이 다음에는 이전에 소개한、「반야심경 총정리」의 최초의 기사와 중복합니다)

 


 

 

釈迦は、三十六才で悟った。
悟ることによって、現象の奥にかくされた一切の道理を知った。そうして、よどみなくあふれる智慧によって、多くの衆生を導いていった。三十六年間の経験だけではこうはいかない。偉大なる悟りを得、心の窓をひらき、過去世の集積された経験と全能の智慧が、正法流布の大事業を完成させたのである。
석가는, 36세에 깨달았다.
깨닫는 것에 의해서, 현상의 속(奧)에 감추어진 일체의 도리를 알았다. 그렇게 해서, 막힘 없이 가득차셔 흘러 넘치는 지혜에 의해서, 많은 중생을 이끌고 있었다.  36년 간의 경험만으로는 그렇게는 안 된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창을 열고, 과거세의 집적된 경험과 전능의 지혜가, 정법유포의 대사업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転載以上。
 전재 이상.

 

 


 

★끝까지 읽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이미 앞서 2010년 2월달에 올린 내용을 한데 묶어, 옮겼습니다.

제1장『원설반야심경』원문에 100페이지 분량과, 제2장 종교와 과학 30페이지 분량,제3장 석가의 탄생과 바라몬의 시대는,차차 올리겠습니다.

★직접 한자를 넣고, 일본어를 넣고, 풀어야 하기에 삼중고의 시간의 소요됩니다. 양해바랍니다.

또한, 마음의 발견 현증편과 과학편도, 뜻 있는 지인께서 빌려 주시어, 역시 소개하겠습니다.

마음의 벌견은, 국내에 모 출판사에서 발간되었지만, 직접 풀어 보고 싶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 워드패드 문서로 약 76페이지 분량입니다.

 


※출처: http://yukis0000.blog78.fc2.com/?tag=%B9%E2%B6%B6%BF%AE%BC%A1%A1%A7%C8%CC%BC%E3%BF%B4%B7%D0%A4%CE%A4%DE%A4%C8%A4%E1
  
 



 

2011년 11월 04일 밤 11시 20분에, 위에 올려진 내용과 같은 글이 있는 곳이 글을 일본어 원본으로, 올립니다. 


般若心経 解説   高橋信次


                     GLA誌1972年8月号 ~ 1973年10月号 掲載


序文


 一般に伝えられ、難解といわれている「般若心経」について解説してみたいと思う。般若心経は文字にして全文二百七十六文字からなる。文字こそ少ないが、そのいっている神理は人間の悟りを説いている。

「悟り」とはどういうもので「悟る」と人間はどうなるかを、二百七十六文字で語っている。悟りの状態を言葉で表わそうとすると、どうしても無理がでる。受け取る人によって違ってくる。それだけに般若心経の解説は、これまでも結構行われてきたようだが、その真意を伝えているものは少ないようだ。

 般若心経を書いた人は中国唐時代の僧、玄奘(げんしょう)である。六世紀の頃、インドに渡り、霊場、仏典を求めて各地を行脚した。かくして、今から二千三百年ほど前に、梵語によって書き遺された仏陀の教え大般若経を漢訳し、要約したのが「般若心経」である。それだけに、神理を伝えている。ただ漢文は表現がオーバーで、ややもすると事実を誇張する傾向があるようだ。いずれにせよ、この経文は、人間の悟りを説いたものであり、数ある経文の中でも、ひときわ際立っているといえよう。






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まかはんにゃはらみたしんぎょう


観自在菩薩かんじざいぼさつ 行深般若波羅蜜多時ぎょうじんはんにゃはらみたじ 照見五蘊皆空しょうけんごうんかいくう 度一切苦厄どいっさいくやく 舎利子しゃりし


色不異空しきふいくう 空不異色くうふいしき 色即是空しきそくぜくう 空即是色くうそくぜしき 受想行識じゅそぎょうしき 亦復如是やくぶにょぜ 舎利子しゃりし


是諸法空相ぜしょほうくうそう 不生不滅ふしょうふめつ 不垢不浄ふくふじょう 不増不減ふぞうふげん 是故空中無色ぜこくうちゅうむしき 無受想行識むじゅそうぎょうしき 無眼耳鼻舌身意むげんににびぜつしんい


無色声香味触法むしきしょうこうみそくほう 無眼界むげんかい 乃至無意識界ないしむいしきかい 無無明むむみょう 亦無無明尽やくむむみょうじん 乃至無老死ないしむむろうし 亦無老死尽やくむろうしじん


無苦集滅道むくしゅうめつどう 無智亦無得むちやくむとく 以無所得故いむしょとくこ 菩提薩埵ぼだいさつた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はらみたこ 心無罣礙しんむけいげ 無罣礙故むけいげこ


無有恐怖むうくふ 遠離一切顛倒夢想おんりいっさいてんどうむそう 究竟涅槃くきょうねはん 三世諸仏さんぜしょぶつ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みたみたこ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とくあのくたらさんみゃくさんぼだい 故知般若波羅蜜多こちはんにゃはらみた 是大神呪ぜだいしんしゅ 是大明呪ぜだいみょうしゅ 是無上呪ぜむじょうしゅ 是無等等呪ぜむとうどうしゅ


能除一切苦のうじょいっさいく 真実不虚しんじつふこ 故説般若波羅蜜多呪こせつはんにゃはらみたしゅ 即説呪日そくせつしゅわつ 


羯諦羯諦ぎゃていぎゃてい 波羅羯諦はらぎゃてい 波羅僧羯諦はさそうぎゃてい 菩提薩婆訶ぼじそわか


般若心経はんにゃしんぎょう




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まかはんにゃはらみたしんぎょう)



 摩訶(まか)とは、古代インド語のマーハーの音訳である。マーハーとは、偉大なとか、大いなるの尊称の意味に使われている。仏弟子である目連(もくれん)のことをモンガラアナーといったが、天眼(てんがん)が優れていることと、同一の姓が多かったため、大目連、つまりマーハー・モンガラアナーと尊称していわれた。またゴーダマ・シタルダーの義母を弟子たちはマーハー・パジャパティーと呼んでいた。


 般若(はんにゃ)とは、仏智のことである。魂の転生輪廻の過程において体験し、学んで得たいわば智慧の極点であって、その極点が意識の中に記録されているのである。


 人の一生は五十年、百年ではない。何億、何十億もの人生経験を経て、現在ある。その経験から学び取った智慧が意識のかなに収まっている。それ故に、無為徒食(むいとしょく・何もしないで、ただ無駄に毎日を過ごすこと)した者に、そうした意識が収まるわけがない。最善をつくし、その一生を努力と奉仕のなかにあった者の善知識が記録されているのである。


 医学を学ばないで医術を施すことはできないのと同じように、意識の記録は、現象界で学んだこと、経験して得た人生の正道が収められているのである。もちろん、それだけではない。私たちの人生は、この世だけではなく、実はあの世もある。あの世でも修行があるのである。あの世の修行は長い。千年、二千年である。ただこの現象界の利点は、玉石混淆(ぎょくせきこんこう・すぐれたものと劣ったものが区別なく入り混じっていることのたとえ)の世界だけに、数多くのことを、同時的に学び得ることができる。したがってあの世の十年は、この世の一年で足りよう。何れにせよ、そうした人生経験から得た知識、善知識が意識のなかに記録されている。人生の記録だから正道に反した想念と行為についても記録される。それだけに、それが業(かるま)となって同じところを行きつ戻りつする魂も出てくるわけだ。


 人間の意識には表面意識と潜在意識がある。過去世の記録は潜在意識のなかにかくされている。偉大な発明発見が、最善の努力を重ねているうちに、思わぬ結果となって生まれてくる。新しいアイデア、あるいは人生の危機を回避できた発想というものは、ほとんどが、潜在意識の作用によるものである。般若の智慧は、こうしたものも含めて、いわば最高最智の智慧であり、その仏智は、正道を悟ることによって、潜在意識と表面意識が調和されたときに生じてくるものである。般若の智慧については後で詳述する。


 次に、波羅蜜多(はらみった)であるが、これはバラモン教典のパラミターがその原語である。パラ(波羅)とは到着するという意味であり、ミター(蜜多)とは、この場合智慧ともいい、通常は彼岸という風に解釈している。


 二千五百有余年前のインド、それも中インドでは蜂蜜は貴重品であった。蜂蜜は栄養価も高く、容易に口に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のため仏陀は説法の際に、蜂蜜を例にとって、波羅蜜多の説明をしたのである。すなわち、智慧とは蜜の一杯つまった最も栄養価の高い至上のものであり、これを得るには正道にそった生活行為しかないということを説い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に彼岸は智慧の宝庫を指しているわけです。「彼岸」がある以上「此岸」がある。此岸とは業生の世界であり、彼岸とは業生を解脱した悟りの境涯をいう。


 ところで、バラモンの経典はイグヴェダー、ウパニシャドを中心として成り立っている。バラモン教は長い歴史を持っており、その発生は約四千余年の昔にさかのぼる。バラモンの教えはエジプトから伝わり、インドで教典化された。一万二千年前のアトランテス時代のアガシャーより伝えられて、のちエジプトで神理が説かれたのは今から約四千二百年ほど前にさかのぼる。クレオ・パローターやアモンという人々が説いたものである。モーゼより以前である。バラモン教典の中身はそれだけに神理が書かれており、観自在菩薩についても触れている。本来、バラモン教は、クレオ・パローターが説いたその神理を教典としているのだから、教典そのものには過ちが少ないが、月日が経つにしたがって形骸化され、階級制度がバラモン教を支配する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仏教が二千五百有余年後の今日、哲学となり、学問になった。僧侶の世界はいつしか階級制度が取られ、檀家や寺院を維持するための職業と化している。


 しかし、仏典の中身は、この般若心経にしても仏陀の説法が説かれているのであり、間違いは少ないのである。ただ、古代インド語が漢文になり、その漢文も音訳が多いために、漢字の意味と事実との間がかなりの隔たりがあって、ますますその真意が解らなくなってしまったことは否定できない。ともかく、こういうように、バラモンの教典そのものは、神理を説いているが、今日の仏教と同様な経過を辿(たど)っていったのである。


 心経(しんぎょう)とは、文字通り、心の経である。経とは梵語のストラーを翻訳したもの。その意味は心の核、つまり核心ということになろうが、心という言葉ほど掴(つか)み難く、それでいて今日、これほど簡単に使われているものも少ないようである。吾人はよく心の調和を口にするが、それだけに現世の人間関係は不調和であり、それを願う気持ちが大きいといえる。しかしながら、心の実体、実相というものを知らずして、それを願うことは不可能ではないだろうか。


 では、いったい心とは何だろうか。心とはどういう機能を持って私たちを動かしているのだろう。心経で教える心とは何を意味するのだろう。


 一口にいって、それは永遠に変わることのない魂の中心が心なのである。


 結論を急げば、心とは、人間と宇宙を貫く同一の意識である。同一の意識とは、万生万物を生かし続けているところの大自然の偉大な叡智、慈悲、愛の意識である。言葉をかえれば、それは私たちの心の中に内在されている仏智であり、心経は、心の極点であるその仏智を教えているものである。こういうと、いかにもむずかしく、ますますその意味を解しかねる向きもあると思うが、要は赤子のような素直な感情と、それでいて、何もかも見通せる能力と、泉の如く湧き出でる無限の大智識を内に包んだ状態であるといえる。


 魂の存在を否定する人が多くなっている。理由は死後の生活が解らないということと、科学の発達が未知な分野を解明してきているからだ。しかし、死後の生活が解らないから否定する、科学がナゾ解きをしてくれるから、魂がないと、どうしていえるだろう。死者がよみがえって、生きている人と談笑した例は、枚挙にいとまがない。私などは、霊的には、年がら年中、死者と話している。だから、死者の霊というものは存在し、あの世で生活していると、声を大にしていえるのである。しかし人は、なかなか信じてはくれない。そこで、いろいろ例を挙げて説明するが、それでも信じない人がいる。こういう人は不幸な人である。あの世を信じられない人は、どうしても、この世の常識での枠内でしか、ものを見る目を養われないからである。


 霊媒者は世界各地に散在している。霊媒とは、あの世の霊が霊媒者の意識と肉体を借りて、ものを語ったり、物品を移動したり、念写をしたりする人のことである。

 物理的には到底考えられないことが、霊媒を通すと、それができるのである。その状況は奇術か手品に似ている。ところが奇術や手品は、チャンとした仕掛けがある。その仕掛けを覚えれば誰にでもできる。が、霊媒現象はそうはいかないのだ。万事、あちらまかせだからである。


 しかし、そうした非物理的(この世から見た場合に)なことが可能であるという事実は、三次元以外の次元のちがった世界が存在し、その世界からの働きがあるからでき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のである。霊媒者の背後には、必ず、一人ないしは数人の霊人が立っている。次元の低い霊媒者には、動物霊が姿を見せている。そうして、こうした背後の霊が、灰皿を空中に浮かしたり、本人が語れないようなことを語ったり、念写を実現させている。現実にまったく無いものを生み出す物質化現象については、霊媒者の意識が高くないとできないものだ。


 物質化現象は、ある意味では物品移動に相違いないが、他の天体の物質を、地球の物質に変え、現わすことだってできるのであり、こうしたことは低次元の霊にはできないことだ。物品移動は、家のなかである物を、A点からB点に移動させる、家の中から百メートル離れたある地点に移動させることである。こういうことは動物霊でもよくやるのである。何れにしても、こうしたことは、三次元的物の見方では考えられないことであろう。


 しかし、こうした実験は、アメリカ、イギリス、フランス、インド、日本でも、霊媒と称する人を通して行われている。問題は、こうしたことができても、その客観的説明になると、現在の科学ではまだそれは不可能に近く、霊媒者という特殊(本来そうではないが)な人でないとできないところにあるようだ。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あの世に霊が存在しないといい切れるものではないのである。


 アインシュタインの相対性原理以前の宇宙像は、宇宙は二つの異なった要素、つまり物質とエネルギーをいれる容器であるというものであった。ところがアインシュタインは、質量とエネルギーは同等であり、物質はエネルギーの集中したものであるとみたのである。

物質が質量を持たずに光速で走っていれば、それを幅射とか、エネルギーと呼ぶことができようし、反対にエネルギーが凝結して別の形をとれば、これを物質と呼べ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この理論によって、光、熱、音、運動などについても同様にエネルギー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物質とエネルギーはこのように同一の要素からできているが、同時に、エネルギーそのものは永遠にして不滅なのである。


 よく引き合いに出すが、水の性質がこれを最もよく物語っている。氷も、水も、ともに物質であり、前者は固体として、後者は液体として人間の視覚にはっきりとらえられる。ところが熱粒子にあたためられると、氷や水はやがて、気体となって蒸発してしまう。目に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しかし蒸発した水が無くなった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く、天空高く舞い上がった目に見えない水滴は、天空で冷やされ、雨や雪となって落ちてくる。つまり、地球上の水の質量は、こうした循環を繰り返しながらも、決して、減ることも、増えることもないのである。一切の物質は、このように時にはエネルギーとして空中に存在し、そうして、さまざまな条件の組み合わせによって、動、植、鉱の物質として生まれ変わっている。こうみてくると、物質とエネルギーは形を変えた不滅の連続体としてとらえる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連続体とはつながっていることを意味している。アインシュタインは、天空に広がる大宇宙を、時間と空間とからなる四次元の世界として、これをながめている。


 物質の実像は、四次元にあって、はじめて、実在性を伴うとしている。たしかに、大宇宙を三次元の主観的な空間としてとらえるだけでは、明滅する星の距離も判らず、客観的な実在性も伴っては来ない。ただ、空間に、物が、在る、ということにすぎない。そこで、これに一つの次元の時間を加えることによって銀河系は、はじめて、その全貌を現わすことができよう。すなわち、秒速五万六千キロの早さで、無限の彼方に遠ざかる巨大な星雲、五億光年も離れた島宇宙のきらめきをキャッチする望遠鏡にしても、時間という測定単位が加わることによって、宇宙の生命、星雲の実体というものが認識されてこよう。物が運動するとは、時の経過を意味している。時間のない運動はあり得ない訳である。その意味では、時間は、物体が点から点に移る連続体として、これをとらえることもできよう。


 私たちの肉体と意識についても、さきほどの物質とエネルギーとしてみることができるし、人間がこの地上に存在するということは、そのこと自体、そのまま、四次元の世界を形成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過去、未来という時の流れのない人間がもしあるとすれば、それは死した化石にすぎないといえるだろう。


 何れにせよ、私たちが、現在、肉体を持って、地上に存在するということは、存在する以前に自分があったであろうし、肉体は死しても、エネルギーは不滅の法則通り、自分自身は、なおも存在し続けるものである。


 人間以外の他の物質が、エネルギーにとってかわって時間の流れにそって、永遠に生き続けるというのに、人間だけが、「死して灰(なんにもなくなる)になる」ということはあり得ないではないか。人の存在はそのまま四次元を形成し得ることは、実は、重大な意味を持っている。


 四次元がある以上は、五次、六次元もあるわけであり、そうした連続体の中に、人は呼吸し続けている。この点については、後でまた詳述したい。


 ここで述べたいことは、肉体と意識、肉体と魂が次元を異にしながらも、同時に存続し、肉体が大気に還元される(死ぬ)時には、人の魂はその肉体から抜け出し、なおも生き続け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現代の科学が、人間の死後の生活や魂の存在を認めようとしているのに、その一方では科学がこれを否定してくれると思われているところに、問題がある。科学者は科学する心を広めれば広めるほど、生命の驚異に畏敬の念をいだく。これを逆にいえば科学を学ばない人ほど、生命を軽んじるようである。魂の存在は、以上の簡単な説明でも容易に理解されると思う。


 魂は、肉体舟を操るところの、己の意識である。個性を持った意識である。したがって、その魂は千差万別であり、成仏する魂もあれば、迷える魂も出てくるわけである。そうして、その魂を魂として機能化させているものが心なのである。


 心は、魂の中心にあって、魂を永遠に生かし続けているものである。心経とは、その心の教えなのである。




観自在菩薩(かんじざいぼさつ) 行深般若波羅蜜多時(ぎょうじんはんにゃはらみつたじ)

照見五蘊皆空(しょうけんごうんかいくう) 度一切苦厄(どいっさいくやく)

舎利子(しゃりし)



 この意味は、一般の立場からみると、その行(生活行為)が深まっていくと、五蘊(色、受、想、行、識)は皆空なり、と観ぜられ、一切の苦厄から離れることができる。即ち、波羅蜜多(彼岸)の般若(無限の智慧)、観自在菩薩の境涯に至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になる。


 観自在という言葉は、ヴェダーやウパニシャドの経典に「アポロキティ・シュバラー」として載っており、その意味は、過去、現在、未来の三世を自在に見ることのできる超能力のことである。ところで、ここでいっている観自在菩薩は、仏陀を脳裏に描きながら、仏陀を指していっているのである。


 このため、その解釈は、大分違ってくるのである。仏陀が、般若の智慧をもって行じる(法話)時は、五蘊(五官六根)に迷う衆生は、その迷いからさめ光明世界(皆空)に、第一歩(度一切苦厄)を印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さて、行深般若波羅蜜多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いったい般若の智慧は、どうすれば得られるか、深く行ずるといって、何をどう行ずればよいのか、と誰しも疑問をもたれるであろう。ふつう「行」というと、厳しい肉体行を考えてしまう。


 二千五百余年前のインドでも、肉体をいじめることによって、悟れると考えられた。バラモンも、ヨガも、拝火教にしても、必ず、厳しい肉体行がついて回った。釈迦の弟子のなかにも、色情の心を絶つために、肉体の一部を切り落とした者もいたほどであった。しかし、肉体の一部を切り落としても、その想念が色情に包まれていれば、意味がない。肉体は、悟りの大事な因子であり、これが損なわれれば精神も不健康になってくる。


 肉体と精神というものは、現象界にある間は、不可分の関係にあって、どちらも大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もちろん、正道を知って、自分の意思なり肉体を試す意味での肉体行は、決して悪いことではない。しかし、正道を知らずして、肉体遠離の考えだけで、悟れると思ったら、大間違いである。行者の末路が尋常でないのも、正道を知らずして空観のみを求めるために、魔に侵されるからである。


「行」とは、生活である。調和をめざした生活行為を「行」というのである。

 大自然は調和されている。そうして永遠の調和をめざして、春夏秋冬の「行」を行じている。

 正道は、こうした大自然の「行」を教典として成り立っており、生活行為を離れては「行」は存在しないのである。



 弦の音は、強くしめれば糸は切れ 弦の音は、弱くては音色が悪い

 弦の音は、中ほどに締めて音色がよい 弦の音に合わせて踊れ 踊れや踊れ



 この唄を耳にしたとき、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仏陀)は、過去六年の肉体行に決別した。中道こそ、人の道であり、自然に即した生き方である、と悟ったのである。


 この唄をきいてから、ゴーダマは生臭い牛乳も口にした。これをみた五人のクシャトリヤは、ゴーダマは「行」を捨てたといって離れてゆく。しかしゴーダマは、その信ず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その後は、栄養になるものは、何でも口にした。そうして、骨と皮とになった肉体の回復をはかっていった。


 中道とは、調和であり、右にも、左にも偏しない想念と行為である。


 すなわち、正しい想念行為(八正道)が、弦の音色をよくすることを知っ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に中道の精神は、肉体と精神、あの世とこの世についてもいえるのであり、五官六根に執着した肉体保存のみの考え方では、人間は悟れないのである。勿論、あの世については、普通は分からない。しかし、肉体と精神というものが個々バラバラには存在していないし、両者のバランスのとれた状態が、もっとも気分を爽快にし、能率を高めるとは、誰しも経験するところであり、そうしたバランスのとれた状態を続けることによって、やがて、その奥にかくされた、あの世とこの世の関係というものが、明らかにされてくるのである。


 観自在の心は、こうした正道に適った生活、反省による日常生活のバランスと執着を絶つことが大きな前提としていることを、ここではいっているのである。


 ここで執着について考えてみると、大抵の人は、執着を絶てば、人間は生きていけない、と思っているようだ。ところが、生きる、ということと、執着とは、次元の異なった想念なのである。執着とは、とらわれであり、生きるとは、調和なのである。


 とらわれとは、これは俺のものだ、俺はこれこれのことをした、あの子は私のものだ、金が全てだ、地位が高ければ肩身が広い、といった想念である。こうした想念が自分を支配してしまうと、その自由な心を自分がしばってしまい、苦しみが始まる。腹を痛めた子が側にいないと悲しいし、地位が低いと肩身が狭く感じてくる。

 自分の心を大きくし、安らぎのあるものにするには、こうした執着を絶たねば、いつになっても心の重荷はとれないし、悟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ある。


 では、生きるためにはどうすればいいか。


 この地上の目的は調和にある。万生万物を調和させるために、人間は、この世に生を得ている。大自然は、その生命を維持するために、我々人間に、必要なものを与えている。これは俺のものだ、ここからここまでは俺の地所だと肩意地を張るから、争いが生じてくる。足ることを知らないからなのである。生きるに必要なものは、神は平等に与えているのだから、その心にしたがった生活を送れば、何の不足も、不満も生じてはこないはずである。執着を持たなくとも、人間は立派に生きて行けるのである。建設もできるのである。建設と執着は別物である。この点を混同すると、執着がないと生きてゆけない、という想念に支配されてしまう。


 このように心を軽くするには、まず、その一つひとつの執着の根を外してゆくことである。とらわれをなくして行くことが大事である。そうすると、中道の心が次第に明瞭になって来、観自在心に到達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の五蘊とは、色、受、想、行、識の五つ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その根源は、五官六根であるところの、眼、耳、鼻、舌、身、意である。


 まず色とは、現象世界のこの世であり、受とは、それを受け入れる感覚、想とは、その感覚にもとづいた想念、行とは、それの想念行為、識とは、そうした想念行為から生まれた業想念、考え方を指す。


 こうした想念と行為というものは、とりもなおさず五官六根から生まれるのである。五官六根がなければ、五蘊の発生する余地がない。したがって五官六根こそ問題であり、生老病死の苦悩も、ここから出てくるわけである。


 肉体は人生行路の大事な舟であり、五官がなければ現象界での生活はできない。問題は、これに意(想念)が加わり、その意は、色、受、想、行、識というものを形作るために、煩悩にふりまわされてしまう。

 五官六根の浄化は、これまでいろいろな面から繰り返し述べているように、中道を根本とした生活、つまり想念と行為の中道化、それは八正道にもとづく実践と反省によって進められてくるわけである。


 ここで「舎利子」という言葉が出てくる。舎利子とは釈迦の弟子シャリー・プトラーのことである。観自在心について釈迦が、その弟子の舎利仏に、五蘊を含めて、その意味を説明しているが、舎利仏が舎利子に変化したのは、舎利仏は仏弟子の代表格であり、さらにここでは「諸々の衆生よ」という意味も込めているため、舎利子となったのである。





色不異空(しきふいくう)  空不異色(くうふいしき)

色即是空(しきそくぜくう) 空即是色(くうそくぜしき)



 色は空に異ならず、空は色に異ならず、色は即ち是れ空なり、空は即ち是れ色なり、と読む。


 この詩句はあまりにも有名であり、色即是空に至っては、仏教の中心テーマのように受けとられている。


 さて、色とか空とはいったい何をいっているのだろう。今日ではすでに、さまざまな解釈がなされているが、空については十人十色であり、その実相を衝いているものは,甚だ少ないようである。


 空の実相を知るには、正法を実践するしかない。実践とは正道に適った自らの生活行為である。そうしてそうした中から、空の実相が認識されてくる。先の行深般若波羅蜜多時である。深く行ずることである。したがって仏教は自力である。神の子として、目覚めた自力である。自力というと、自我を通した生活行為を連想しがちだが、そうではない。業生の自分から、神仏の子として脱皮してゆく実践行為を指すのである。


 今日、仏教は、他力本願になっている。だが仏教は、他力については一言も触れていない。もし他力について書いてある仏典があるとすれば、途中で書き替えられたものである。それは正道でない、ということを改めて断言したい。


 空とは何か。空とは、物質にあってはエネルギーの世界であり、魂にあっては実在界を指すのである。

まず、物質についてみると、水の三態(気体、液体、固体)で述べたように、物質は熱粒子の縁によって、集中、分散を繰り返し、たえず循環している。そこで、空とは、俗にいう可視範囲外の状態であるといっていいのである。


 この点について、もう少し考えてみよう。水は熱粒子に温められると蒸発し、眼に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が、無にはならない。エネルギーとして空中に在る。熱が冷え、水滴となる条件が満たされてくると、雲となり、雨となる。要するに、物質についての空とは物質化(液体、固体)される前の状態であるといえる。もっとも厳格には気体も物質であるといえるだろう。ただここで見逃してならない重大な問題がある。それは、気体となった水粒子は、必ずしも雨や雪となって落ちてくるとは限らない。気体となった水粒子は、水以外の鉱物、植物、動物の組成の一員として、物質界に再びよみがえってくるものもあるのである。ちなみに、あらゆる物質には、何がしかの水分を含んでいるのである。水分を含まない物質は、皆無といってもいい。このように、気体となった水粒子は、他の物質粒子と組み合わさって、いわば形を変えて現象化されている。


 こうみてくると物質の空の状態とは、万生万物を生み出す素因を内在せしめているのであり、それはまた言い方を変えると、空の世界は、万生万物の投映の場になっている、ともいえるのである。空の世界は、あらゆる物質のエネルギー粒子が集まっており、そうしてそれらは熱、電気、磁力、重力などの相互作用、つまり縁によって、さまざまな物質を創り出して行くのであるからエネルギーの世界は、そのまま、万物投映の元の世界であるといえる訳である。


 次に魂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魂の空の世界とは、あの世を指すのである。この世のことを現象界、ないしは物質界というが、あの世は実在界、意識界ともいう。なぜ空の世界を実在界というかといえば、「物」が実際に存在する世界だからである。この世、現象界は一切の「物」は、時が経つと変化してしまう。どんな立派な建物でも、発明品でも、時がくれば土になり、風化してしまう。ところが、実在界の「物」は、時が経っても消えていかない。必要と認められた「物」は、何千年、何億年も、そのまま減ることも増えることもなく存在し続けるのである。この世では、どんなに価値のある「物」でも、人々の願望を叶えてはくれない。時が経てば否応なしに崩れ去ってしまう。この点が大いに違うのである。


 たとえば木製の机があるとする。この現象界では木製の机は、使用しておれば、どんなに大事に扱っても千年と持つまい。それを持たせるには真空に近い暗室に保存し、熱や光や湿気から守ってやらないと朽ちてしまう。ところが実在界では、一万年でも二万年でも使いながら持たせ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人や動物でもそうである。この世では人は百年、動物なら五十年生きるには、条件が整わないとむずかしい。だが実在界は、千年はおろか、二千年、三千年はザラである。いくらでも実在界で生き永らえることが出来る。しかし循環の法にしたがい、現象界に生まれ変わるが、魂の実在性は変わらない。

 要するに、あの世は「物」が半永久的に実在するから実在界というのである。半永久的とは必要がなくなれば、何時でも古いものを新しいものに変えることができ、必要なら何時までも残す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る。では何故、こういうことが可能かというと、実在界は魂の世界だからである。魂とは心の世界、つまり意識の世界、意識界であるから、心のままの世界が展開されているのである。


 ここで、現象界は空の世界の投映であるということについて触れると、たとえば実在界に木製の机なら机があって、その机が現象界に写し出されているからそういうのである。

 では、あの世には電車や汽車、戦車や大砲、航空機、原子爆弾、ミサイルなどもあるのかと問われるであろう。これに対する答えは、あるものもあるし、ないものも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どうしてこういう答えになるかというと、核ミサイルに執着を持つあの世の科学者が、そのミサイルの愚を知って、ミサイルの研究を辞めたとする。ところが、現象界のミサイル科学者は、あの世の科学者のミサイル研究の辞める前の想念波動を受けて、それを創り上げたために、あの世になくともこの世にあるという結果になったからである。

 これをもう少し詰めて説明すると、あの世は心の世界、心の世界とはどんな想像も可能な世界である。どんな想像も可能だということは、言葉をかえると何でも在る、ということになる。想像は創造につながり、創造は文字通り、「物」を作り出すことである。


 万生万物は、ことごとく「心」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り、心を基本にして、相互作用の縁によってさまざまな物質が生産されるのである。

 もし、人間に思うこと、考える能力を抜き取ったなら、どうなるか。動物と同じように、一万年、十万年経っても進歩はないだろう。歩くより早く目的地に着くためには、電車や飛行機が便利だということで、まず最初に、人々の心の中で考えられ、そうして各種の材料を集めてきてつくられた。あの世は、こうした創造が無限に広がっており、この世の想像の範囲をまったく越えている世界なのである。だから、この世にあるものは、あの世にあり、しかし、形としてはないものもあ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さて、話しを前に戻して、物質の世界は万物を生み出す素因として宇宙に存在し、魂の空の世界がこれらの素因を集め、形あるものに創造して行く能力を秘めている世界であるといえる。同時に魂の世界は、心と創造の世界なのだから、そのことはそのまま「もの」を実在せしめている世界でもあるといえるのである。こうした意味から、空の世は、実在界、意識界というわけである。


 さて次に色とは何かといえば、私たちの眼にとまる現象界、物質界のことである。


 物質界は色彩に富んでいる。これは平面的な生活を補い、私たちに修行しやすい環境をつくるためである。

では、空の世界は色彩がないかというと、もちろんある。ただ、「心」に応じた意識界をつくっているので、階層によっては灰色の世界もあり、霧におおわれて色彩が不鮮明なところもある。しかし天上界は、この世の世界と全く同じであるが、次元が高くなるにしたがって、その色彩は明るく、そうして次第に安らぎのあるものとなっている。


 この世は人の心に関係なく、神は、さまざまな色彩をつくって、平面的な地上の生活を補ってくれている。つまり修行しやすい環境を与えているのである。この点からも私共は、神に対して感謝し報恩の行為である「調和」という目的に向かって進ん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物質界の成立は、実在界の縁によってなされている。縁とは、交わりである。あらゆる物質は相互に関連し合い、動、植、鉱の物質をつくり、生命活動に必要な基礎的環境を形成している。私たちの親子、兄弟、姉妹、夫婦、知人、友人にしても、そうした実在界の約束によってこの現象界で縁が結ばれている。偶然に縁が結ばれたのではない。


 ちなみに地上の人類は現在三十七億にのぼっている。その三十七億余の中から、一対の夫婦が選ばれ、親子が生まれ、兄弟姉妹ができ、友人、知人、そうしてそれ以上の目的を共にする同志が結ばれる。偶然として片づけるには出来過ぎているし、第一現象的に見て、不思議と思えない人はどうかしているといいたい。もし、こうした現象が偶然であり、生命がアメーバーから生まれたとすれば、この世の成立は不可能だし、太陽も地球も人間も生かされ、生きることは出来ない。


 自然界の秩序、人間界の秩序は神の意思にもとづいてつくられており、人間界の苦しみ悲しみの混乱は、人間が神の子としての能力を持ちながら、その能力を好き勝手に使っている為に起こっている現象である。自分の好みで好き勝手にその能力を持て遊んでいるから、めくら千人となり、必然か偶然かの判断すらできなくなっているのである。


 空の実相を知った時には、この世の一切のものは「縁」によって生じ、「縁」によって生かされ、「縁」によって万物が調和されていることを悟るであろう。


 色不異空、空不異色、これを直訳すると、現象界は実在界の投映であり、実在界があって現象界があるのだ、ということになる。さらにもっと突っ込んでいくと物質はエネルギーであり、エネルギーは物質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くる。


 現象界と実在界は、もともと一つであり、別々ではないのである。現在の自分の想念と行為が、死後の実在の自分自身を現わしていることになる。現象界が実在界の投映という意味は、一つには人間の心は一念三千であり、天国にも地獄にも、自分が意識を向けたところにつながるのでそういうのである。人間は天国と地獄のちょうど中間に位置している。


 なぜ中間に位置しているかといえば、人間の心は天国と地獄に通ずる自由(一念三千)な心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る。慈悲と愛の心を持てば天国に、煩悩に心を奪われれば地獄に通じ、自分自身の生活環境を通じた世界と同じような形で現わして行く。つまり、実在界の投映という形をつくるのである。それほど心というものは、重大な要素を持っており、人間はその心の在り方によって、鬼にも天使にもなり得るのである。


 実在界に鬼が住むような地獄がもともとあったかどうかである。天地創造の初めはなかったのである。実在界はエデンの園であり、天国のみであった。ところが人間がこの地上の生活になれ、五官に左右され、六根が生ずるようになってからは、実在界の一隅に、暗黒の世界をつくるようになった。人間は自らの想念と行為によって、そうした闇を生み出していったのである。すなわち、実在界に、光と陰の世界が出来上がってしまった。そうして、地上の人間は、光と陰、善と悪の混合された世界で修行するような環境をつくり出し、その中でなければ、何が善で、何が悪であるかを知ることが出来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もともと実在界があって現象界があるのだが、現象界の人間の心が実在界に闇の世界を創り出してきたのである。

 こうみてくると、現象界と実在界の姿がはっきりしてこよう。そうして、色と空の関係が、もともと別ものではなく、同時的に成立している、という意味が釈然としてきたと思う。色は空に異ならず、空は色に異ならずとは、こうした意味がこめられているのである。


 色即是空、空即是色、これの解釈は通常文字にとらわれる場合が多い。あると思えばない、ないと思えばある、といってみたり、色即是空は、往相(悟りに向かう)空即是色は還相(人々を救う)と説明している人もいる。本当の意味は、転生輪廻なのである。あの世とこの世の循環を、色と空、空と色という表現で、ここでは説明し、そうしてこう表現することによって、魂の転生輪廻の永遠性をうたっているのである。


 大抵の人は、人間が生まれ変わるとは信じられないようだ。まず十人が十人死んだらお終いと思って生きている。だから、生きているうちが華であり、生に執着を持ってしまう。死は不幸を意味し、葬式は概ね暗く、陽気はタブーとされている。


 所が、人間は生まれ変わり、この世よりも、生前の魂の在り方によっては、あの世の方が住み良い、ということがわかれば、死は不幸ではなく、人生の卒業式として、生まれた時と同じように、祝杯をあげてもよいということになる。

 死に対する人間の根本的な誤謬(ごびゅう)は「あの世がわからない」所にあるようだ。人は生まれると同時に、あの世と断絶し、通信が途絶えてしまうからである。お先真っ暗の人生を、それこそ手探りで歩いているようなものだからだ。しかし、怒ったり、ねたんだり、悲しんだりすると気分を悪くし、人にも害を与え、反対に陽気や笑い、助けあったり、励まし合うことの喜びは、どんな場合でも気持ちがいい。その事実を私たちは日常の中で経験しながらも、自然に振り廻されてしまうものだが、しかしそうした愛に生きた時の喜びを発見し、認識するならば、あの世があろうとなかろうと、現実の自分とその周囲を光明に化することができるはず。


 悲しみを取り除き、喜びを分かち与える慈悲の心、助け合う愛の心というものは、人間は、皆持っている。そうして、そうした生き方を、誰しも望んでいる。しかし、現実は、そうできない。気持ちよい生活、平和な世界を希求しながらも、それから遠のいてゆく。これは、自我がそうさせ、執着が次第に広がって行くために、本来の目的から人は離れていってしまうのだ。ウソつきが得をし、正直者はバカを見る、ということを鵜呑みにした結果ではあるまいか。


 己の心にウソはつけぬ、大自然の条理を知って神の心に近づこうと努力するものに対しては、神は、色即是空の生命の扉をひらいてくれよう。なぜなら、神は、自ら助ける者を、決して放っておくようなことはしないからである。


 人は色即是空の認識を得る前に、大抵は根負けし、肉体世界に妥協してしまう。妥協の上にあぐらをかいて、ああでもない、こうでもないと逃げをうつ。人生はますます解からなくなり、迷路にはまりこんで行くのだ。

 まず人は、怒ったり、ねたんだりすることよりも、陽気に笑い、助け合う愛の心を、しっかりと抱いて、そうして、その心を持続するならば、「あの世がわからない」という迷信に陥るようなことはあるまい。


 アメリカのある新聞社が、「あなたは、あの世を信ずるか」について世論調査をした。結果は、調査の八割までが、あの世を信ずる、と答えていた。答えた人八割があの世を見た訳ではない。信仰が生活のなかに溶け込み、日曜になると、教会にいって話を聞かないと一日が終わらない気持ちが、そうした回答となったのであろう。聖書が教える愛の心を教会で教えられ、愛の心を持ち続けることは人間として当然であり、そ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ているからである。日本人について世論調査をしたら、どんな結果がでよう。あの世があると答える人は一割あるかないかであろう。ともあれ、私たちの住む世界は、立体の世界である。人が地上に存在することは、そのまま、あの世につながった存在者として、存在するのである。ただ、あの世がわからないために、そう思えないだけの話である。



ところで私たちの生きている世界は一応三次元の世界である。


一次元とは、A点からB点を結ぶ線、つまり、海面と思えばよい。

二次元とは、海面を航行する船である。船は前後、左右に動くので、一次元より自由である。

三次元とは、空中に浮かぶ飛行機と思えばいいし、飛行機は、二次元、一次元の姿を自由に見ることができる。

      つまり三次元は立体の世界であり、大宇宙の空間と明滅する星の姿は、そのまま三次元の世界を

      形成している。


 物質の世界は、三次元までを限度とし、それ以上については、認識ができない。ところでアインシュタインは、三次元の空間のほかに、時間という一次元を加えた。そうして、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三次元の実相をとらえることができると考えた。


 アインシュタインは、時間を四次元に位置づけしている。つまり、物の実態というものは、時の流れを把握する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意味づけが出来るというのだ。三次元の立体像を単に主観的にとらえるだけでは、実在性は伴って来ない。実在性は客観的把握を前提とするという訳である。空中に飛行機が飛んでいる。つまり三次元のみの思考ではその飛行機が、いったい何の目的でどこへ、どう飛んで行くのか、また離陸した飛行場はどこなのかについての認識がむずかしい。しかし、こうした状況を、時間という運動の経過を通して調べることによって、空中を飛んでいる飛行機の目的なり、動機がはっきりしてくるというのだ。


 この世の一切の物は、一刻の休みもなく運動している。運動のない物体というものはあり得ない。とすると、三次元の認識だけでは、これを捉えようとしても、捉えることは出来ない。つまり、物の価値づけ、実在性は把握出来ない。


 人間の心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四次元の働きを内在している。現れの世界は三次元だが、心は四次元に、あるいは多次元に通じている。だから、文明も文化も進んできたのである。動物にはこうした機能は与えられていない。だからこの世に在る動物達の生活は百万年前も今もそう変わらない。もっとも人間社会は、栄えては滅び、滅びてはまた発展し、そうした繰り返しを続けて来ているが、こうした悪循環を絶とうと思えば、何時でも絶つことが出来るのである。そこが動物と人間の本質的な相違である。


 アインシュタインの四次元は、時間に焦点を合わせているが、四次元の世界は、実は、あの世の世界を意味している。物理的な次元論からいえば、四次元は、三次元を越えた自由自在の意識のそれであり、物質を貫通して、ものを見る超能力の世界である。あの世の人たちは、四次元以降多次元の住者である。あの世の霊は壁をつき抜け、あるいは壁の向こう側からこちらが見えるのである。

 人間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こうした能力を内在させて生活している。そうしてその一形態が創造活動であり、私たちの文化でもある。芸術にしろ、科学にしろ、知識だけでは生まれてはこない。大学を出れば、誰も彼もが発明家になり、偉大な政治家になり、芸術家になれるかというと、そうはいかない。見えざる努力と、求める心が、筆を走らせ、絵を描かせ、生活を豊かにするよう科学させ、発明させてきたのである。マルクスのあの膨大な資本論は、今日、いろいろと問題はあるが、あの時代には、あの理論が必要だったのである。だから彼は書かされた。求めつつ、書かされた。資本論を知識だけで書けといっても書けるものではない。こうした創造活動は、絶えざる求める心が内在意識をひらかせ、四次元以降、多次元の心と同通することによって起こるものなのである。偶然とか知識とか、その場限りの発見からこうしたものが生まれることは絶無といってよい。

 何れにせよ、人間は、こうした多次元の心を持って生活している。三次元しか通常は認識できないが、しかし人間の意識は常に四次元以降多次元に同通しており、人間はそうした中で生活し呼吸しているのである。


 ここで四次元以降多次元の意識の自由さについて述べると次のようになる。


 四次元の自由さは、三次元を貫通し、物質にさまたげられることなく、ものを見ることができる。


 五次元は、四次元世界はもちろん見ることができると同時に、地上界と地獄界の比較が容易に出来る。

      四次元の自由さは、ある限られた物質的障害を乗り越えられるのにたいして、

      五次元は、幾層もの物質を貫通して見ることができる。


 六次元は、四次元、五次元の世界は勿論のこと、地球の隅々まで見ることができる。

      善悪の判断が正確となり、人を導く自由さを持つようになる。


 七次元は、六次元は勿論、他の天体にまで瞬時にみてくることができる。

      物質の成り立ち、天体の動き、人間の生い立ちが、七次元の意識が進むにしたがって、

      明らかとなってくる。したがって、物質のなかを覗き、生命普遍の認識を深めることができる。


 八次元は、宇宙全体を認識できる自由さを持つ。万生万物の生命の根源が神の意識によって、動いている

      ことを知り、神の意思を受け継いで、慈悲と愛の広く高い心の広がりを持つ。

      過去、現在、未来を見通す心は八次元の頂点にある。


九次元は、神の意識であり、全(まっとう)なる心である。


 さて私たちの住む世界は三次元の世界であるが、四次元以降多次元の世界が、感覚的に分からないとしても、前述の説明で概略理解されたと思う。そうして、四次元以降の意識界の働き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り、そうしてその意識が、私たちの生活にどう働いているかも、ほぼ納得出来たと思われる。ところが人によっては、それでも四次元以降の世界はない、三次元で十分だ、四次元は飛躍だという人もいる。しかし飛躍であるかないか経験がないのに、どうしてないといえるだろう。経験のない人が多くいて、経験がある人が少ないから否定する、というのはおかしい。私達の眼で見える範囲は、約7~4オングストログまでである。赤外線、紫外線、X線、γ線、電波については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しかし確認できなくとも、実在していることには間違いないのである。


 色即是空、空即是色 ――― 。

 つまり私たちの魂(意識)は、現象界に肉体をまとって生きている間は、主に三次元的感覚(10%の意識)で生活しているが、肉体が滅びれば、魂だけが肉体から抜けて、あの世で生活する。四次元以降多次元の意識を持って。そうして再び、この現象界に現れ、生活する。この事実は、否定しようがしまいが、あることに変わりのないものだ。万生万物は全て、転生輪廻の法から逸脱できない。何故かというと、生命と物質は、そのように作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地球が太陽の周囲を循環することによって、春夏秋冬の季節をつくり、生命が健やかに育つように出来上がっている。原子の世界も、核の周囲を陰外電子が循環することによって、原子全体を維持している。この理法を崩せといっても崩せない。この点については、また順を追って説明するが、色即是空、空即是色は、転生輪廻の実相をいっていることを理解して欲しい。





受想行識(じゅそうぎょうしき) 亦復如是(やくぶにょぜ) 舎利子(しゃりし)



 これを直訳すると「行為は心の反映であり、心は行為に影響される。つまり、色即是空、空即是色と同じ意義を持っている。舎利子よ」ということになる。


 心の世界である意識界は次元の異なる四次以降の世であり、総てのものの根本である空の世界、実在界である。一方、現象界である色の世界は、実在界の投映には違いない。しかし現象界の動きは、実在界に影響を与えるのである。実在界の地獄は、既述したように、現象界の人々の想念と行為がつくり出したものである。この様に、心と行為、意識と肉体というものは、常に相関関係にあって、個々バラバラに独立したものではない。また私達の肉体は現象界に適応した心の乗り舟であり、それは子孫を保存させるために、神が人間に代々にわたって本能という機能を与えたものである。その本能は、人間が肉体を持った時に、付与されるのである。私達は、意識と肉体を持って生活している。いうなれば、あの世とこの世、実在界と現象界を合わせ持って生活していることになる。


 仏教でいう色心不二とは、この実相を悟った状態をいうのである。調和された姿を色心不二という。ここでの項は、心と肉体というものは、相互に関係し合っているのだ、といっているのである。





是諸法空相(ぜしょほうくうそう) 不生不滅(ふしょうふめつ)

不垢不浄(ふくふじょう) 不増不減(ふぞうふげん)



 是諸法空相の諸法をそのままうけとると、法は沢山の数を成していると考えがちである。そうして、その場合の法とは何を意味するか、と思うでしょう。


 法は本来一つしかない。それは中道という調和の心である。ただ、この地上世界は動、植、鉱の三種の形態から成っており、また天台宗を開いた天台智顗は地・水・火・風・空から出来ているともいっており、姿、形がさまざまである。そのさまざまな物質は、それぞれの体質にしたがって転生輪廻しているため、個々の体質をみていると、法はいくつもあると見えてくる。だから、諸法は・・・・・・という名称になったのである。

 しかし、さまざまの物質がその体質にしたがって維持されているにしても、転生輪廻という法の体質と、その法を支えている中道の心は少しも変わってはいない。生命も物質も、中道の調和から外れると、バランスを失い、不調和を来たす。破壊である。したがってここでいう空相とは、諸法の中にかくされている中道の神理(タルマー)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諸法は空相によって支えられると解釈する。


 次の不生不滅 ― のくだりについては、その中道の心は、「生れず滅せず、垢つかず、浄らかでなく、増えることも、減ることもない」と、なってくる。


 さあ、こうなると、中道の意味が解らなくなってくる。


 中道とは大自然の心である。

 人間の魂は、この世を終えれば、あの世に帰る。生死の境を、さまようこともない。本来、そのように出来ている。物質についても、その物質が分裂しても、粒子エネルギーは、この大宇宙に存在し、形はなくとも、無になることはない。いわんや、増えたり、減ったりすることも、勿論ない。このように、あらゆる生命、エネルギーは、生き通しのものである。垢もつかない。不浄でもない。地上世界を見ていると、死んだり、生きたりで大変忙しい。


 親子兄弟でも、性格も考えも違っている。同じ精子と卵子の結合物であるのだから、親に似ていい筈だが、違う。何故だろう。


 それは生き通しの、魂が違うからである。懐妊すると、食べ物が変ってくる。今まで甘いものが好きだった人が、すっぱいものを口にする。そうかと思うと、妊婦の性格まで違ってくる。気持が荒々しくなったから、お腹の子は、さぞ男の子だろうと思っていたら、案の定、男子が生れた――。こうした現象は、お腹の子の魂が違うから、妊婦の趣向や性格まで複雑にしてくる。懐妊すると二重人格者にしてしまう。一つの躰に、二つの魂が同居するから、いたしかたがない。腹を痛めた我が子と思うと、親は、自分の思う通りに子が動いてくれないと面白くない。例えば、白といえば黒という場合すら出てくる。

 しかし、魂が違うのだから、いくら腹を痛めても、子は自由にならない。自由思想が氾濫する現代では親子の断絶、相剋がいっそう激しさを加えている。当り前といえば当り前だが、しかし、親子の約束、人間としての条理を外した末法の考え方がそうさせるもので、魂が違っても、そういうものではないのである。ただ、ここでは、親子といえども、魂は違う。いわんや兄弟姉妹においては、なお更違うということを知って欲しい。

 魂は違っても、肉体遺伝はある。たとえば胃腸が弱い、胸が悪い、心臓病にかかりやすい、という体質を受けたとすると、そうした病気に、その子がかかりやすい。もちろん、心の調和をはかっていれば、肉体遺伝は克服して行く。


 メンデルの遺伝の法則は、魂については全然無関係である。肉体的には避けられぬ因子のあることは前に述べた通りであり、細胞学の面でもその事実が発見されつつある。現代人もそうであるように、多くの人々は遠い昔から、肉体先祖と魂を、一緒くたに見てきた習慣から中々抜け切れない。その理由は、死後が不明な事と、生れてくる前の状況が皆目見当がつかないからである。進化論が幅をきかすのも、無理はないのである。

 しかし、先にもふれた通り、親子の魂の相違というものは、昔も今も変らない。自由放任の現代思想がそうさせたものでは決してないのである。もっとも、遺伝学的に、学者の家系は学者が多く、浮浪者や酒のみの家系は犯罪者、自殺者が出る、という傾向は確かにあろう。しかしこれらは体質遺伝というより、魂の転生輪廻における業が、そうさせてしまう場合が多いのである。


まず、人間の出生について述べていこう。


 親子は、現象界に出生する前に実在界(あの世)で約束を交す。親になる者は、子よりも二十年も三十年も前にこの世に出生してくる。この世に出た親となる魂は、幼少から少年、青年に進むにしたがって、自我が芽生え、環境に流される。もちろん環境に負けない魂もある。やがて、結婚し、子をもうける。その時、親となる魂が環境に負けて、実在界で学んだ目的と役目を忘れたとする。約束を交した子の魂は、四次元以降多次元の世界から親の行動を見て知っているが、一旦約束をした親子の交わりを破約し、他の子になるという訳にはゆかない。混乱が起こるからだ。親となるその人が、約束通りの行動をしている場合はいいが、そうでない時には、その子となる魂は苦痛そのものである。

 俗に、親の罪は子にない、ということがあるが、本当に子に罪はないのである。親が環境に負けたのは、過去世の業(カルマ)にひかれたためである。過去世で酒で失敗し、あの世で酒に負けない自分をつくり、その自分を試すために現象界で修行をする。修行のあり方は酒が飲めるような環境が本人が知らぬ間につくられてくるのである。本人が知ってしまっては修行にならないからだ。子の方も、過去世で酒で失敗している。そこであの世で、親と子になる魂同士が、互いに、それに負けない自分を磨き、今度はしっかりやってこようといって、まず親が出、次いで、子が出生してくる。ところが、前述の通り、親は再び酒で失敗し、子となる魂がそれを出生する前にあの世でこれを見て、困ったと思っているが、しかし、親子の約束を交わした以上、他にくらがえする訳にはゆかない。失敗している親の下に出生し、再び、自分もその渦中におぼれていく場合が非常に多いのである。

この例は、親子の一つの型を示したにすぎない。


 現象界は性が混乱し、産児制限が流行しており、親となる魂の安定性が非常に困難になってきている。そこで親子の約束は、時間的にも、実際的にも、果たさずじまいに終る場合も多い。また、子となる魂があの世でまだ修行中であるが、親となる魂の無節操な行動によって、現象界に引きずられて出生してくる。こういう場合は、犯罪や混乱を起こしやすい。実際的な面では、当然生れて来たにもかかわらず、さまざまな理由をつけて、あの世にトンボ返りさせてしまう。つまり、受胎した子をおろす。こうしたことで、親子の約束がその通りに行く例は、限られてくる。夫婦の約束にしてもそうなのだから、現象界での魂の修行は、見様によっては容易ではないといえよう。しかし人は縁によって、縁を通じて自らを修行する者であるし、その縁も、自らが求めてつくられて来たものであるから、与えられた環境、境遇に負けない自分をつくっ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さて、話は前に戻して、肉体遺伝は避けられないが、魂については、こういうことで、親子であっても全然異なるし、親が酒飲みだから、子も酒飲みというのは、類似の業がそれをさせるのである。魂と肉体を、一緒くたに見ることは皮相(ひそう・ものごとのうわべ)も甚だしいといわざるを得ない。しかし、現象界の人達は、あの世が解らないし、過去世も忘れている。そうした中で生活しているのであるから、世襲が社会組織の中核を為してきたのも、致し方がない。

 しかし、世襲が社会制度的に矛盾を含み、混乱のモトをつくってきたので、こうした矛盾は、時代が進むにしたがって訂正されつつあることは喜ばしい。ともかく、魂こそ、生れることもないし、滅することもない。魂の内面は、神の子としての光で輝き、そこは垢もつかず、浄らかであるということもないのだ。ましてや増えたり、減ったりすることもない。全(まっとう)なる自分があるだけである。





是故空中無色(ぜこくうちゅうむしき) 無受想行識(むじゅそうぎょうしき) 

無眼耳鼻舌身意(むげんじびぜっしんい) 無色声香昧触法(むしきしょうこうみしょくほう) 

無眼界(むげんかい) 乃至無意識界(ないしむいしきかい)



 これは「これの故に空(実在界)の世界は、色もなし、想行識を受けることもない。眼耳鼻舌身意もない。色も声も香も味も感触も、肉体的現象の法もない。眼で見える境界も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


 空中の電波、空気、紫外線、赤外線などは目で確めることが出来ない。ただ、碧(あお)い空のみが映る。が、大気中にはあらゆる物質を構成するところの分子、元素が分散されている。そして全ての物質は仕事をなし得る能力、エネルギーを含んでいるのだが、これとて見ることができない。五官で感知する範囲は大したことでないことを知るべきだ。


 五官に意を加えたものを六根という。通常その意は、五官を通して働いているが、五官を離して働くようになると、五官で感知出来ない世界を覗くことができる。これを心眼という。心眼が開くと、次元の異なる空の実在界を見ることが出来、現象界と形態が違うことを知る。


 たとえば、この世は平面的だ。あの世は段階的にできている。

段階的とは心に応じた世界をつくっているのである。自分より意識の低い所は見えても高い世界を見ることが出来ない。この世は、意識が高い低いにかかわらず、誰とでも会える。それ故、平面的なのだ。


 この点をもう少しみていくと、あの世は、ビルの生活と思えばよい。一階、二階、三階、四階と、それぞれの階層をつくり、一階から二階に行くには階段を上らないと上には行けない。エレベーターは全然ないのである。階段の一段一段は、修行を意味する。心のひろがりが広がることによって上に進むのである。各階層は、それぞれに応じた地域社会をつくっている。丁度この地上の下町、山の手というように、いわば類をもって集まっているのである。このようにあの世は、それぞれの心の世界をつくっている。眼耳鼻舌身の五官と、それにもとづく意が働く、この世とはまるで違う。そうした意味で「是故空中無色」という言葉になってくる。


「・・・・・無意識界」というのは、五官の働く意識を越えているということで、意識界が無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


 現代人は多忙である。その多忙さは物質的過剰欲求によって生じているが、これは肉体が絶対という考え方が強いからである。世の混乱は、不変的な魂、そうしてその魂の中心である心を忘れることによってつくり出される。





無無明(むむみょう) 亦無無明尽(やくむむみょうじん) 

乃至無老死(ないしむりょうし) 亦無老死尽(やくむろうしじん)

無苦集滅道(むくしゅうめつどう) 無智亦無得(むちやくむとく) 

以無所得故(いむしょとくこ) 菩提薩埵(ぼだいさった)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はらみったこ) 

心無罣礙(しんむけいげ) 無罣礙故(むけいげこ) 無有恐怖(むうくふ)

遠離一切転倒夢想(おんりいっさいてんどうむそう) 究竟涅槃(くきょうねはん)



 無無明とは、無明がないということで、迷いのない世界。亦無無明尽は、無明のない光に満ちた、そうしてその光が尽きることのない世界を、ここでは強調している。


 あの世は波動の細かい世界である。この世のように荒くない。

 この世は、人間の意識を含めて、10%の波動で成り立っている。動物も鉱物も植物も、すべて10%の波動で現象界が出来上がっている。だから、回転が遅い。思うこと、考えることの結果が、一定の時間をかけないと出てこない。それがまた現象界の救いになっている。


 しかし人はその為に、心を見失う原因にもなっている。この世は一見して、悪が栄え、善が日陰に縮こまっているようにみえる。正直者がバカを見、悪徳がのさばっている。

悪とは人のモノを盗む、人を殺める、人が困っていても見て見ぬふりをするなどであるが、その根本は、自己保存、自我我欲から生じてくる。


 悪の根源は自己保存である。

 人のことを構っていれば食べていけない、ということから、人は次第に、欲望の渦中にはまりこんでゆく。労使の闘争、物質至上の思想が幅をきかし、不安と競争が生活をエンジョイすると錯覚してしまう。こうして自己保存の悪は、人々の心をむしばみ、自己保存が文明の支柱のように見えてくるから不思議である。しかし、こうした人々が、この世では栄えているように見えても、あの世に行けば地獄である。この世は波動が荒いため、自己保存の悪はスグにはハネ返ってこないからだ。


 怒りや、ねたみ、心配事が重なると、血の循環を悪くし、食欲が減退する。感情が肉体に及ぼす影響は極めて早いが、知的な悪の反作用には時間がかかる。男より、女に病人が多いのは、感情に心が奪われるからといってもいいが、知的な悪は、十年、二十年の長期を経て、ジワジワと自分に返ってくる。だから、こうした例は在世中に結果を見ずに終る場合が多いので、悪人志願が後を絶たないといってもいいかも知れない。


 秀吉という男は草履(ぞうり)取りから、位人臣(くらいじんしん)を極めた。今日、秀吉の魅力は大分半減したようだが、それでも出世主義は男の生甲斐になっている。秀吉は謀略の名人で、敵対する者は、ことごとく殺し、我が世の春を謳歌する。しかし、その反動は死の数年前から現われ、彼は自分の悪を清算出来ず、あの世に帰った。人のうらみ、ねたみもあって、彼は地獄で、今でも苦しみ、暗い世界でまだ号令をかけている。ところが号令をかけると、在世中、憎しみをいだいて死んでいった多くの人々の呪いの顔が彼の眼前に現われ、彼を苦しめる。彼の謀略は、地獄では通じないのである。謀略の想念がスグ様自分にハネ返って来て、謀略で倒された人々の怨念が、彼の身と心を八つ裂きにするからだ。八つ裂きにされても、彼は死ぬことは出来ない。息を吹き返し、我にかえると、また彼は号令をかける。また八つ裂きに合う。こうした繰り返しの中で、身も心も細る生活を続けている。


 現象界では謀略によって、天下人になっても、あの世に帰れば、一転して地獄である。その地獄も、自分の想念と行為の清算のみでなく、人々の怨念がプラスされる。


 一方、歴史の上では悪の代名詞のようにみられてきた明智光秀は、神界にあって、自適の生活を送っている。殺された信長も、秀吉同様今以って地獄にあるのに、殺した光秀が神界に在るとは、誰しもげ解せぬであろう。殺された信長は権力の盲者であり、殺戮(さつりく)に快感を覚える精神異常者であった。殺した光秀は平和主義者であり、このため信長を討つことに随分と迷う。しかし世の混乱のモトは信長にあり、逆臣(ぎゃくしん)の汚名を着せられても信長打倒に意を決し、本能寺を襲う。勿論、こう決心するには、秀吉の奸計(かんけい・よくない計画。わるだくみ)が裏で働いていた。彼は、信長に光秀謀反(むほん)を伝え、光秀には信長打倒を促(うな)がしている。光秀はこれに感づいてはいたが、敢えて信長打倒に踏み切ったのである。本能寺の変を知った時の秀吉の喜びようは大変であった。彼はこの時、天下人の夢を我がものにしたのである。謀略によって、戦国の覇者になっても、落ち行く先が地獄では間尺に合うまい。栄誉栄華の期間は短かく、地獄が何百年も続いては、どう転んでも計算が合わないからである。


 このように、この世に悪が栄えても、そうした悪は続くものではないし、悪を犯した人々の行き先は、この世で結果をみなくてもあの世で清算させられることを知って欲しいものである。執着を離れたあの世の世界は、光明のつきることのない平和な楽土である。田園の緑は太陽の光を浴びて生々と育ち、人々の生活は、自由に、明るく、伸び伸びとしている。食生活に心を煩わされることもなく、仕事に追いまくられることもない。信頼と友情によって人々は結ばれ、科学者は科学を、絵画きは絵を、建築家は建築の仕事に、一心を傾ける。人によっては守護霊となって、現世に修行する魂の兄弟を守り導く者もいる。また指導霊になって、そうした魂の努力に応援をする人もある。あの世にあって、あの世の諸霊を、より向上させるため、正法にもとづいた政治、経済、教育、科学などを教える人もいるが、安らぎと慈愛の生活は、そのまま光明となって、いつまでも続いていく。光明の毎日が、尽きることがないのである。


 こういうと、人によっては、喜怒哀楽、善悪混合の変化のない世界はつまらぬ、という人がいるかも知れない。ところが、こうした世界でも、ちゃんと感情があり、変化があるのだ。感情や状況の変化は、地上のそれとは違った次元で存在し、あきたり、退屈するなど全然ないのである。もっとも、あきたり、退屈するような人々は、こうした世界に住することはできないが。


 さて次に無老死とは、年老いて死ぬことがない、亦無老死尽とは、老いることも、死ぬことも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秀吉が死ぬことが出来ないのは、あの世というものは、実在の世界であり、心の世界でもあるので、苦しみの責めを受けても、死ぬことが出来ないのである。思うこと、考えることがスグ様現われ、そのことが何時までも続くのである。だから地獄に堕ちると大変だ。

 謀略策士の心が変らぬ限り、そうして、人々を泣かせた怨念が晴れるまで、秀吉の苦しみは続く。苦しみの連続だから反省ができない。誰しもそうであろう。ひどい腹痛や頭痛の際に、どうしてこうなったかと、反省できるだろうか。反省できる心の持主なら、そうした事態に見舞われることは、まず少ないだろうが。

 天上界の無老死、亦無老死尽も、これと同じで、調和された世界では、そうした状況の中で、老いることも、死ぬこともないのである。働きやすい年齢が、半永久的に続き、仕事も、能率も上がるのである。


 無老死、亦無老死尽は、主に天上界についていっているが、しかし前にも触れたように、地獄に堕ちた魂についても、その苦しみは果てしなく続く。これはあの世の世界が、実在の世界であり、思うこと、行なうことが、そのままスグ様現われ、しかもこの世と違って、全てが消えて無くならないように出来ているからである。この世は、肉体的に苦痛であれば、麻酔によって、その苦痛から逃れることも出来るが、あの世は、心のままの世界をつくっているので、その心を変えない限り、苦痛から解放されることがない。老いた気持が心を支配していれば、何百年経っても老人である。光子体の肉体は若さを取り戻すことは出来ない。ともかく、あの世は「心のまま」の世界をつくっているが、この世は、心と肉体の三次元の世界であり、無老死、亦無老死尽は、あの世の姿を端的に述べていることを知って欲しい。


 無苦集滅道は、文字通り、あの世の天上界は、生死の苦しみから解脱する正しい道を悟っているため、常に神の意識と通じ、調和されていて、迷いは無いのである。迷いのあるのは、あの世の地獄と現世の肉体を持った人間である。よくよく心しなければならない。


 無智亦無得(むちやくむとく) 以無所得故(いむしょとくこ)

 天上界にあっては、才能によって得る所得、つまりは、地位や名誉や財産というものは、一切無い。神の子としての自覚と責任しかない。その自覚や責任も、無理無理そうするのではなく、当然のこととして現われてくるのである。


 自然法爾(じねんほうに)という言葉がある。この意味は、法のままに生きる、ということであり、神の意識が、その、心に同通されて、無理なく行える心と行為を指すのである。

あの世、天上界もこれと同じであり、すべてが自然にそって生かされ、生きている。あの世の経済について大分類すると、大体、三段階ぐらいに分けられよう。


 第一段階は、純然たるバーター制である。欲しいものがあれば、自分の持物を相手に渡し、

       その相手方から求めるものを得る。

 第二段階は、この世の流通機構と、やや似ており、物々交換の媒体として貨幣(この世とは異なるが)

       が使われている。第一段階より、経済組織が複雑であり、この世的にいう文明は、

       現世より進んでいる。

 第三段階は、物々交換も貨幣も使われず、必要なものは何時でも得られる世界である。

       この世界は、いうなれば天使が住んでいる階層であり、心と物とが忽然と溶け合っている。


 無智亦無得という世界は、この中の第三段階を指し、したがって、智による所得を必要としないのである。地上でも、衣、食、住が十分であり、満たされておれば、金銭の欲望は起きてこないだろう。それと同じという意味ではないが、必要なものは何時でも得られるので、金銭的媒体物、あるいは物々交換の必要に迫られることがないのである。

 ここで、第一、第二の世界が、それぞれ物や金を対象としているので、この世の金が使えないだろうか、と思う向きもあろうが、次元が違うので勿論役立たない。「冥土の沙汰も金次第」というが、これはもともと貧に対する苦悩から出た言葉なので、問題にならない。


 実在界は、全て心の調和度にかかっている。調和度とは、神の心に適った心の状態をいうのである。


 神が地上の人類に望まれることは、右のような第三段階の世界の心に、人々の心が同通されることであり、五官六根に左右されない、正道に適った生活である。


菩提薩埵(ぼだいさった)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はらみったこ) 

心無罣礙(しんむけいげ) 無罣礙故(むけいげこ) 無有恐怖(むうくふ) 

遠離一切顛倒夢想(おんりいっさいてんどうむそう) 究竟涅槃

(くぎょうねはん)


 無罣礙とは、心にとらわれがない、ひっかかりがない、わだかまりがない、ということだ。だから恐怖の念がない。正道に反した、逆さまの物の見方、考え方がないから、神の心に通じ、もっとも偉大なる悟りに達している。それを菩提薩埵という。


 一切の諸現象は心から生ずる。丸く大きな豊かな心を有しておれば、恐れも、慢心も起きない。とらわれが多く、肉体の自分が自分であると思うから、苦しみ、悲しみがついてまわる。夢をみていてはいけないのだ。我々は白昼夢を見ている。腕をツネれば痛いし蚊にさされればかゆいので、つい肉体の全部が自分であると思ってしまう。 しかし、本当は、肉体の自分以外に、もう一人の自分がいて、その自分が肉体と一緒に生活しているのである。無情の現世をみると、誰しもが薄々感じられるのではあるまいか。


 無罣礙の心は、何も人間だけではない。導体に電気を流すと、その導体に抵抗が多いと電気のエネルギーは熱エネルギーに変わってしまう。電気の役を果たすことが出来ない。血管にコレステロールがたまると、血行が思うようにゆかず、血管が破裂したり、血液の流通をとめてしまう。


 万事がそのように出来ているのだ。

 自然は、私達人間に、神理を教えている。その神理を一つ一つ悟る必要があろう。


 究竟涅槃とは、表面的な解釈は釈迦の入滅を指している。つまり、不生不滅の状況を「涅槃」といっている。

現世からみると、入滅(実在界に帰る)は、永遠への回帰に違いはないが、本当は肉体を持ちながら私達の魂は永遠の中にあるのである。ただ現世は、肉体と共に魂があるために、極めて不安定な、そうして有限の迷いの多い、それのように思ってしまうだけである。


 釈迦は三十六歳で「宇宙即我」を悟った。悟ったとは人間の魂は不生不滅であり、死ぬことも、生きることも区別できない、そして、大宇宙と倶(とも)にあるということを知った。この時点で、釈迦は、涅槃の境涯をつかんでいたのである。四十余年後の肉体的な死が涅槃というのではない。ただし、三十六歳で大いなる悟りに達し、その後、その悟りの内容が次第に幅広く、深く、濃密になって、入滅の瞬間に人間としての全きを得たといえる。

 従って、この意味からすれば、釈迦の入滅は、人類が待ち望みながらも、容易に果し得なかった最高の悟りに達したといえなくはない。しかし普通の解釈は、肉体の迷いから、永遠の生命に帰られ、二度とこの世に生れることがないと考えられている。生命の転生輪廻を黙殺する。解らないためである。同時に、不安定な現世に対する人々の希望が、そう解釈し、そう解釈させて欲しい、と願うからでもあろう。何れにしても涅槃の解釈は、頭では割り切れない。物理的現象のみでは誤った方向にゆきやすい。心の問題は、心を本当に理解しないと間違いを犯そう。


 話しは変るが、大抵の人はもう二度とこの世に生れ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だろう。あるいはそう思うことがあるだろう。これは、あの世の生活とこの世の生活に大きなズレがあるためであるし、10%の表面意識の自我にもとづく我侭(わがまま)な心がそうした想念を生み出している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魂の転生輪廻と聞いて、人によってはウンザリしている者もあろう。ところがあの世にいる魂のグループ、つまり魂の兄弟達は、そうは思っていないのだ。むしろ自分のためとして、現世におるその兄弟を守り、無事に修行を終える事を願っている。


 魂の前進は、現世に出て、はじめて可能だからである。あの世の修行は、先が見通せるだけ修行にならない。原因と結果が解ってしまうからだ。現世はそれが解らない。解らないから価値があり、魂の前進は人間である以上、避けることの出来ない天命といってもいい。





三世諸仏(さんぜしょぶつ) 依般若波羅蜜多故(えはんにゃはらみったこ)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とくあのくたらさんみゃくさんぼだい)

故知般若波羅蜜多(こちはんにゃはらみった)

是大神呪(ぜだいしんしゅ) 是大明呪(ぜだいみょうしゅ)

是無上呪(ぜむじょうしゅ) 是無等等呪(ぜむとうどうしゅ)

能除一切苦(のうじょいっさいく) 真実不虚(しんじつふこ)

故説般若波羅蜜多呪(こせつはんにゃはらみったしゅ)

即説呪曰(そくせつしゅわく)掲諦掲諦(ぎゃていぎゃてい)

波羅掲諦(はらぎゃてい) 波羅僧掲諦(はらそうぎゃてい)

菩提薩婆呵(ぼうじそわか) 般若心経(はんにゃしんぎょう)



 本誌の解説も今回で十二回を数える。もう一、二回で終えるが、本誌の読者はこれまでの解説で、大体おわかり戴いたと思う。あとは、これを生活の上に生かして行くかどうかによって、本当に理解されるか、頭の遊戯に終るかの分れ目になろう。


 さて、最後の解説に入るが、これを直訳すると次のようになる。


「三世の諸仏は、般若波羅蜜多に依るが故に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得ることができた。それ故、般若波羅蜜多は是れ大神呪なり。是れ大明呪なり。是れ無上呪なり。是れ無等等呪なり。よく一切の苦しみを除き、うつろなることのない真実のもの般若心経の神理を説くことにしよう。即ち呪を説いて曰く。掲諦掲諦 波羅掲諦 波羅僧掲諦 菩提薩婆呵 般若心経」


 まず三世の諸仏だが、これは過去、現在、未来を通して悟られた、あるいは悟られる人びと、仏を指している。


 阿耨多羅三藐三菩提を古代インド語で発音すると、アーヌクターラーサンミヤクサンボデイーとなる。

漢字はこの発音に当て字したものである。この意味は、光明に満ちた金剛界あるいは無色界という光一色の世界、色のない世界、欲望のない世界、慈悲と愛の世界、如来の住する大天使の心の境地をいっているのである。

ボディーとは悟りの意で、ゴーダマが背にし瞑想に耽ったピパラの大木をとって「悟りの樹」、つまり悟り、菩提ということになる。

サンミヤクサンボデイーの三は、三という数はどこまていっても割り切れない数、無限大を意味する。三千世界、一念三千という言葉もある通り、昔の中国では三を取って、その大きさを表わした。三菩提とは、それゆえに「大きな悟り」「偉大なる悟り」ということになる。


 その偉大なる悟りを、是れ大神呪 是れ大明呪 是れ無上呪 是れ無等等呪 と賛美している。中国の表現は、見ようによってはオーバーだが、しかし釈迦の悟りはそれほど大きなものといっているのである。大明呪とは、偉大な智慧をいっている。仏智である。


 ここで知識と智慧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普通はこの両者を混同しがちである。ところが、中身が違う。どう違うかというと、平たくいえば、知識とは今世で学んだものだが、智慧とは、過去世に蓄積された人生経験である。学者は智慧者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い。

学者に政治や実業をやらせたら、おそらく失敗するだろう。大きな組織の中で動いている時はいいが、一朝コトがあると判断を誤る。政治や実業というものは、理屈通りにゆかない場合が多いからだ。


 知識は私達の狭い日常生活における経験をある程度補ってはくれる。が、役立たぬことの方が多い。大学で学んだ知識、新聞や本で得たことを実生活に応用しようとすると、間違いや人との意志の疎通を欠くことがしばしばだ。私達の個人個人の一生における生活経験というものは非常に狭い。

 サラリーマンは、家と会社の間を往復し、商人は商売の筋道は解っても、人の商売の善し悪し、苦労は解らない。家庭の主婦は、家の中のことは解るが、外で働く夫のさまざまな経験は、想像は出来てもその範囲を越えることが出来ない。


 しかし何れにしても、実生活で私達がアテに出来て頼りになるものといえば、狭いながらも人生で経験した事柄であろう。経験ほど確かなものはないし間違いも少ない。智慧というものは、そうした経験して得たもの、過去世で蓄積したものが、私達の心の中に内在されているものである。そうして、その内在された生きた経験が心の窓を開くと、流れ出てくるのである。


 智慧は知識の範囲を超越している。私達の過去世は、王であったり、医者であったり、武士であったり、坊主であったり、農夫であったり、科学者であったり、文学者であったり、政治家であったりしたこともある。そうした人生の生々流転の経験が、心の窓をひらくことによって、現世における狭い経験を補ってくれる。

 問題にぶつかった時、何をどうずれば良いか。それは智識では得られない示唆に富んだ指示が得られる。その人の過去世がバラエティであればある程、あらゆる諸問題に対して、解決を与えてくれる。今世の経験が、仮りに商人であったとする。商売はあきずに商いすることだといった、ついこの間までのやり方では、今日では落伍するかも知れない。目先をきかし、政治や全体の問題に常に関心を払ってゆかなければ損をする。そうした時に、その人の過去世が政治や経済家として生きた経験があれば、その経験が、その人を導いてくれるだろう。


 要するに智慧というものは知識ではない。生きた経験の集積なのだ。そうした経験が、折りにふれ、縁に触れ、閃いてくるのである。人によってはもっと具体的に流れてこよう。


 では過去世で未経験の者はどうか。経験のない者は、いつの世でも泣いて暮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い。経験のない場合は、経験のある人が、その人を指導してくれる。つまり、指導霊がその人の背後にいて指示を与えてくれるのだ。指導霊がつくには、それだけの努力と一念が必要だ。何もしないで、天から湧いてくることを願っていては、何も教えてはくれない。与えられた環境、立場に対して、精一杯努力するところから教えられる。また心の窓を開く、開かないについても、開いたから何んでも分かる、開かないから不明というものでもない。問題は、現実を怠たらず、努めるところに、智慧の泉を紐解くきっかけをつくるのである。


 よく悪知恵が働くというのがある。秀吉などはその最たる者だ。こういう場合は、悪魔が背後にいて、それを教える。蛇とか悪魔というのは、自分のことしか考えない。しかし才覚は働く。蛇にもいろいろあり、悪魔もさまざまである。病気をさせあの世に引き取るもの。殺人を犯すもの。人をおどし喜ぶもの、人を拝(おがま)せ得々とするもの。才覚を働かし、威張りたがるもの。その種類は千差万別だ。

 本来の智慧はこうではない。正道に適った智慧なのである。人の心を豊にし、周囲を明るくし、互いに扶け合い、笑い合って、調和という神の意思に励む中から生れる。したがって暗さがない。明朗そのものだ。仏智の智慧は、過去世の経験された調和の集積であり、神の心に同通した全能の智慧である。


 釈迦は、三十六歳で悟った。悟ることによって、現象の奥に隠された一切の道理を知った。そうして、よどみなくあふれる智慧によって、多くの衆生を導いていった。三十六年間の経験だけではこうは行かない。偉大なる悟りを得、心の窓を開き、過去世の集積された経験と全能の智慧が、正法流布の大事業を完成させたのである。


 是無上呪(ぜむじょうしゅ)とは、これ以上のものはないというのであり、是無等等呪(ぜむとうどうしゅ)は、釈迦の悟りは他と比較するものがない、という意味である。


 次に、能除一切苦 真実不虚(のうじょいっさいく しんじつふこ)とは、生老病死という一切の苦しみから解き放たれ、それは中身のある真実なものなのだ、とここではいっている。


 釈迦の悟りは、余人は近づけない。経験しないものは分からない。分からないだけに、第三者はつい疑ってかかる。そこで般若心経は、その境地を、至る所で繰り返し述べている。本物はこっちだ。迷ってはいけない。釈迦の悟りとはこうだよと、その半分近くの文字は、悟りの中身をさまざまな角度から述べているのである。


 羯諦(ぎゃてい)とは古代インド語でガーテというが、この意味は「岸」ということである。釈迦は、ガンガー(ガンジス)の河を背にして、よく説法をした。また、説法の中に、人間の苦悩と悟りを、河をはさんだ両岸をたとえて話した。


 中インドから北にかけて、文明が栄えた。古代でも哲学、文学、技術、科学の分野が進み、東西両文明に影響を与えている。ことに冶金、天文、医学、数学などの諸分野は、世界的水準に達しており、五世紀頃には代数が発達して、ゼロ、負数、二次方程式などが考案され、十五世紀には微分、累乗級数展開などが考案され、西洋文明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のである。また舞踏や音楽なども、その一つであろう。ところが当時のインドは、カースト制度が厳しく、こうした文明に参画できる者は、ほんの少数の人々であったのである。

 このため、大部分の人は無学文盲であり、ゴーダマ・ブッタ(仏陀)は自然の状況をとらえて、説法していったのであった。またブッタ・ストラー(悟りへの道)は、大自然の法が目的であり、「自然と人間」との関係を明らかにするのが根本なので、学問に関係なく、誰にも理解できた。しかしもともと学問そのものも、「自然と人間」を知る手だてとして盛んになってきたものであり、芸術や文学も、自然や人間を、いかに客観的にその真実を表現するかにあるのであり、したがって学問があろうとなかろうと、人間であれば、ブッタ・ストラーは理解できるものであった。


 現在のインドは六月から十月が雨期に当たり、十一月から五月が乾期になる。三月から五月はいわゆるモンスーン気候といわれ、暑熱の時期に入るようだ。当時も、雨期ともなれば、ガンガー河は満水となり、対岸に渡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人が住み、平地の多いこちらの岸は、雨期が半ば過ぎになると食べ物が少なくなり、食糧難に陥ってくる。対岸である彼岸は緑が多く、マンゴの実や他の果物が沢山なっているが、河が増水しているためそれを取りに行くことができない。ブッタは、それを例えて、こちらの岸を苦界と呼び、対岸である彼(か)の岸を悟りの境涯として説いた。


 また河の水は深いところは静かに流れ、浅瀬は流れが激しく、ざわざわしている。人の心も、五官にとらわれると雑音が激しく、落ち着きがなくなる。深い心、つまり潜在意識に同通している人の心は、守護・指導霊の導きがあるので、諸現象の動きに惑わされることなく、平静であると説いた。


 クシナガラの地で、八十余年の生涯を閉じようとするブッタの下に、シュバリダというバラモン教出身の最後の弟子がみえる。その時ブッタはこういった。


「グリグドラクターの修行場は天変地異によって大きな亀裂を生じ、幾日も幾日も豪雨に見舞われた。その裂け目に雨水が流れ込み、河となった。片方の岸は広々と開けていたが、一方の岸は峻厳(しゅんげん)な山にさえぎられ、逃げ場を失った動物達が右往左往していた。一匹の巨象が広々とした向こう岸に渡ろうとあたりを見まわしていた。巨象はしばらくたたずんでいたが、遂に裂け目に我が巨体を滑らせ、己の体を橋代わりにして、小さな動物達を救った。巨象は力尽きて、自らの巨体は裂け目の底に沈んでいった。

 いま、自分は四十五年の間、迷える衆生にいろいろと悟りの道を説いてきたが、さらにこの老体を足場として悟りの彼岸へ導いてやりたい」言い終わると、ブッタは静かに瞼を閉じた。ブッタは、最後の瞬間まで自然の中で生活し、人びとに慈悲を説いたのである。


 神の心は慈悲である。慈悲の心は衆生済度の心しかないのである。


 私たちは、地球という大神殿、つまり神の体のなかで生活している。地上という大地も、水も、空気も、陽の光も、私たちに生きるに必要な環境を、神は無償で提供している。この事実を知らなくてはなるまい。この事実を悟らなくてはいけないのだ。


 私達が欲望に振り廻される時は、公害、戦争という苦界に落ち込んでいこう。そしてなお目覚めなければ、天変地異となって、大地は怒り、人々に反省を促そう。本当は大地が怒るのではない。人びとの自我が、大地に震動を与えるのである。想念は、ものを生み出すことを忘れてはいけない。私達は神の慈悲によって生活ができ、その慈悲に感謝しなければならない。感謝の心を忘れ、報恩という奉仕の心をおろそかにするために、さまざまな苦悩が生じるのである。誰も彼もが、仏の慈愛一筋の心になることは難しかろう。しかし愛の心なら、誰しも理解できよう。愛も神の光である。助け合い、補い合い、許す心が愛なのだ。


 地上の生活は分業である。文明が進むほどに分業専門化が盛んになり、分業が盛んになると、いよいよ一人では生きられない。食べ物一つとっても、多くの人達のリレー作業によって、初めて食卓に上る。金さえ出せば何でも食べられる。という考えがはびこると、今、全世界の関心事となっている食糧と人口のバランスが崩れていこう。


 愛の出発は、男と女からはじまろう。男は生産的、能動的な仕事に、女は消費的な家庭を築いていく。もしも、一方にウエイトがかかり、男でなくては、または女でなくてはという考えが強くなれば、人類は百年と続くまい。男と女が、それぞれの特質を生かし、助け合い補い合っているから、人類は滅びることがないのだ。


 神は一夫一婦を望み、その中で調和という心の安らぎを求めるよう意思されている。家庭は社会の原型であり、人間生活はそうした家庭から育まれる。


 愛は、まず、男女の助け合う感情からはじまり、家庭に、隣人に、社会に、人類に、発展していくものである。男と女が、立場が逆さまになり、女が生産的な仕事に就いていくと、社会は混乱してこよう。男と女では、転生輪廻の生活経験がまるで違っており、一時期の、ものの考え方で、経験の乏しい者が経験を必要とする仕事につくことは、もともと無理がるからだ。またこうした考え方が生ずるのも、ものの見方が五官や自我に根ざしているために起こって来るといえるようだ。


 神の意志は調和である。中道という安らぎを人類に求めている。もしもアダムだけが存在し、エバがいないとすれば、調和という助け合う愛の行為は成就できまい。

 調和は、個性を持った複数の関係が生じた時からはじまるのである。また一切の生物は、そうした複数の中で育ち、環境を調和していくものだ。神が与えてくれた自然という慈悲の環境は、私共に愛の助け合いを促している。


 神の慈悲に対して、私共がそれに応えることを愛というのである。

愛の行為は誰にでも出来よう。何故なら愛の環境の下で私達は育ち、生きて来たからである。

愛は地上という横の光ならば、慈悲は神の無償の縦の光である。

人びとの心が、縦と横の十字に交わるときに、永遠の悦びを知ることが出来よう。


羯諦羯諦(ぎゃていぎゃてい) 波羅羯諦(はらぎゃてい) 

波羅僧羯諦(はらそうぎゃてい) 菩提薩婆訶(ぼじそわか) 般若心経(はんにゃしんぎょう)


「岸だ、岸だ、向こうの岸に到達するのだ。仏弟子達が向こうの岸へ到達し、悟りに達すれば、すべてが調和され成就する。調和の姿こそ般若心経なのだ」


 仏弟子というと特殊な階級を意味するが、本来は、地球人類を指している。特殊な修行をし、行を積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ものでは本来ない。行を積むという意識は、人間が長い転生輪廻の過程において積み重ねた業があるために、神の子の自分を忘れた考えから生ずるそれが言わしめるのである。


 彼岸とは、神の子のふるさとである。そのふるさとを忘れているのである。

 正法は誰のためでもない、皆自分のためにあるのだ。


 仏教というと堅苦しく、難しいもののように聞こえるし、実際に中国を経て来た経文を見ると、確かに何が書いてあるのか解らない。解らない筈である。そのほとんどは梵語が漢字の当て字になってしまったため、文字の解釈を追及すると何をいっているのか、迷路にはまり込んでしまうからである。

 しかし、仏教とは釈迦の説いた教えであり、それはまた自然の成り立ち、理法をいっているのであり、求める心さえあるならば、どんな人でも理解できるものである。

 肉体人間は欲が深く、つい目先のことにとらわれるために、本来自分のためにある仏教、正法を理解しようとせず、これから離れていってしまう。

 喜怒哀楽は人間だから当たり前、人間だから病気もする、人間だから悪いこともする、聖人ばかりになったらこの世は味も素っ気もない、という見方をする人がいるが、いったい人間とは何か、である。こういう考えでは動物になってしまう。動物は本能のままに生かされているので、それなりの生き方が与えられ、コントロールされているが、人間は考える能力を持ち、自由意志が与えられているために、こうした生き方をすると、ズルズルと動物以下になり下がってしまう。


 一つの家庭で悩みがない、という人は比較的少ないのではあるまいか。経済的に恵まれている家庭は子どもがいないとか、夫婦間がバラバラとか、子供がグレて手を焼くとか。一見平和に見える家庭でも、ひと度その家の中に入ると、いうにいわれぬ問題をかかえているようだ。しかしそれも人生、あれも人生ということで、その場その場でツギハギし、見て見ぬ振りをして、その日その日を送っているのが大半の人びとのようである。人間は生活の歯車が曲りなりにも回転している時は、なかなか正法に入りずらく、縁にふれてもおざなりになってくるようだ。しかしひと度、生活の歯車が土台から揺れ動くと、こんどは血眼になって慌てふためく。

なぜだろう。欲が深いのだ。もともと・・・・・・。

欲の深さは、何でも手にいれたいというのもあれば、現状に甘んじ、自己陶酔に陥るのも同じことである。自己陶酔、自己満足、現状に甘んじるというのは、偽我(ぎが)が強いからそうなるのである。


 偽我とは、本来の自分でない自分である。

 本来の自分は善我であり、それは神の子の自分である。


 神の子の自分に立ち帰れば、正法の絶対性と中道の神理については、否も応もなく、これを生かした生活をしなければ、その反した分量だけ苦しみを味わう、ということを知るはずである。悟りの彼岸は誰のためでもないのだ。みんな自分のためである。


 自分を悟れば、この地上界は慈悲と愛によって成り立っており、調和の姿は神の姿でもあるので、愛、慈悲の行為を顕現(けんげん)してゆかね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が自覚されてくる。そうして、己の幸せを他に及ぼして行くというのが正法なのだ。


 ゴーダマ・シッタルダーは、それを説いた。

 当時の仏陀は、主に慈悲を説いた。慈悲とは仏の心だ。慈悲は至高の大宇宙の心である。

 本当の慈悲の心を理解できる者は、ホンの少数の限られた人達だったようである。ただし当時は、心の中はともかくとして、形の上にそれを表わそうとすれば比較的容易に行えたようである。インドの人たちは布施心も強く、野や山は食べ物が豊富にあったので、サロモンとしての修行も容易であったし、欲望に打ち克ち、人びとに救いの手を差しのべることもできた。しかし、自己を宇宙に拡大し、神の心となって、人々の心の中に仏を呼び起こすことのできた人はプッタしかいなかった。


 プッタは、今まさに涅槃に入らんとする時、弟子の阿難に答えてこう言った。

「私がこの世を去ったとしても、私を思えば、私はその人の心の中で生きている」と・・・・・・。


 神と仏は、この大宇宙に、そして人びとの心の中に、生き通しの大光明であり、絶対にして唯一つの大生命であり、言葉を変えれば、それは慈悲そのものであったのである。


 慈悲は、法であり、大自然であり、万生万物に調和を与える神の大生命であった。


 釈迦滅後、五百年の後に、イスラエルにイエス・キリストが愛を説いた。人びとは釈迦が説いた慈悲の心を本当に理解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からといえよう。これを理解できる者は、釈迦在世の時代でも僅かだったし、時が経つにしたがって、次第に形骸化されてきたからでもあった。


 イエスは愛を説いた。イスラエルという地は愛を説かねばならぬ土地柄でもあった。インドと違い、砂漠が多く、緑が少ない。支配者と被支配者が雑居し、被支配民族は、その日暮しの生活であった。貧しい多くの人たちは、明日に希望もなく、救世主を待ち望んでいたのである。そうした環境の中で人々を救うには、相互扶助の愛を説かねばならなかった。地上に人類が増え、限られた土地で多くに人間が生きていくには、相互に扶け合う、人類はみな兄弟という愛の行為しかないのである。


 愛の教えは今日、全世界に伝わり「聖書」は、かくれた永遠のベスト・セラーになっているのも、もとはといえば愛の行為は人間的行為に帰着するからであった。


 愛の心、愛の行為ならば、誰でもできよう。この地上界は、いろいろな魂を持った集団社会である。男女の別、能力の別、体力の別・・・・・・。すべてが相対的であり、さまざまである。そうしたさまざまな魂が、共に同じ場で修行し、調和という神の意思を顕現(けんげん)してゆくには、扶け合い、補い合う協調協力の相互関係を欠くことはできない。自分さえ良ければよいとするエゴイズムは、地上界の人間を含めた、与えられた慈悲の環境を破壊するものであるからだ。


 釈迦が遺した仏教が今日、東洋の限られた人々にしか伝わらず、イエスが説いたキリスト教が全世界に広まったのも、慈悲の心は神に直結し、近寄り難いし、愛はもともと地上の光であり、横に広がる性質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る。


 慈悲も愛も、ともに神の光であることには変わりはない。

 しかし肉体をまとった人間にとって、どちらが親近感を覚えるかといえば、愛であろう。


 慈悲といい、愛といっても、その本質を知って、その通りに生きている人は少ないといえよう。人がこれを実行しようとすれば、恵み与えることの出来る自分を、まずつくらなければなるまい。慈悲は神仏の心だとして、盲目的にこれを為そうとすると、自分が苦しくなり、周囲に波紋を起こすことさえ出てくる。

 さきにもふれたように、年老いた巨象は多くの小動物を天変地異による洪水から救うために、自らその巨体を岩の裂け目にすべらし、橋代わりとなって小動物を対岸に渡らせる。渡り終えると巨象は力尽き、裂け目深く沈んでいった。巨象のこうした行為は慈悲の心を知り、自分を悟っていたから出来たのである。巨象以外の他の小動物がこうしたことをしたいと思えば、あたらその生命を裂け目に落とし、その悲鳴に、かえって混乱を巻き起こしたに違いない。


 この地上界は、相互作用の働き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植物は動物のために、動物は植物に。草食動物は肉食動物に身を供養し、肉食動物は植物が枯れないように、絶えず死と隣り合わせに生きている。人間だけが植物や動物、あるいは鉱物資源を勝手放題に使ったり、食べ散らかしていいというものではない。自然界の循環は、全てに渡って適用され、それは他を生かすこと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しかし動物、植物の自然界は、巨象のように法を悟って為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このため、相互作用のバランスを、しばしば失い、植物も動物も絶滅寸前に追い込まれることすらあるのである。


 人間は万物の霊長なので、こうした不調和な状態にならないよう、慈悲の心、そして愛を持って、調和の範を示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それには神理を知った想念と、自覚された行為が自然に出来るように、反省と中道の生活を送るように努めなければなるまい。こうすることによって、やがて巨象のような慈悲の心が広がり、多くの人々を生かす自分に到達できるのだ。


 愛の本質も慈悲の心と変らない。愛も人々を生かす行為であるからだ。助け合い、補い合い、許し合う寛容の心は神の心だ。自分にあるものを他に与え、人びとの喜びを喜びとする調和にある。

仏の慈悲、神の愛を求める人は少なくない。仏教は経文をあげ、キリスト教は祈りがすべてと考えられている。ところが仏教もキリスト教も、自ら助ける者に与えられるのだ。

今日、あらゆる宗教が他力に変貌し、偶像崇拝という神仏と人間を切り離した信仰が広まったがために、神仏は、人々に救いの『めぐみ』も『心の安らぎ』も与えることが出来ないでいる。他力信仰が勢力を張り出してくると、偽りの神が人々に憑き、ますます混乱した信仰形態をつくり出してゆく。


 仏教もキリスト教も、もともと一つなのだが、全世界に分布されている仏教、キリスト教の教え(分派)は何千何万に及んでいよう。新興宗教といわれる宗団の経典は、大抵は仏教、キリスト教の教えを食いちぎり、他のものと混ぜ合わせ、もっともらしくつくり変えている。それでは真の安らぎも、救いも与えられようがない。


 神理は自力である。神の子の自力に生きている者に、神仏は慈悲と愛を与えて下さる。

自分が中道に適ってくると、神仏は、その者に智慧を与え、霊力を与え、奇蹟を与えてくれよう。そうして他の縁遠き者をも、救える慈悲、愛の行為が自然に行えるようにして下さるのだ。


 般若の境涯は、五体の人間では考えられないような、想像を越えた悦びの世界である。

巨象の行為が自然に行えたのも、その魂は三次元を越えて、安らぎの境地に、常に住していたから出来たのであった。


 転生輪廻の繋縛(けいばく)から解脱し、大宇宙に生き通しの自分を発見し、人びとに慈悲と愛の光を与えることのできた人を仏といい、如来ともいい、神の使者ともいうのである。

般若心経は、それを語り、仏智の偉大さ、悦びを述べている。


本稿で般若心経の解説を一応終えることにする。





あとがき


 十五回にわたって、さまざまな角度から解説を試みて来たが、般若心経は全文二百七十六文字から成り、経文の中でも短い方に属していよう。しかし、その書かれている内容は、悟りの中身であり、悟りとはこういうものだと説明している。その説明の仕方はそれこそ、これでもか、これでもかと、くどいように説明している。これは漢文の性質上そうならざるを得ないのであろう。


 例えば ・・・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舎利子 是諸法空相 と書いて、そのあと不生不滅からはじまって、以無所得故まで。ここは是諸法空相の説明といっていい。したがって、是諸法空相で終わってもこれらの説明は導き出せるものだ。


 もっとも諸法空相については主観的体験なり、あの世の説明ができない場合は、空相を「無」と見てしまい、すべては無いと考えてしまう。そうでなくとも、不生不滅などの説明があっても色即是空の空を「無い」としてしまう人もあるのだから、人の『意』が加わると、とんでもない方向に解釈が進んでしまう。


 同じ中国から伝わった仏教用語でも「諸法無我」(しょほうむが)「諸行無常」(しょぎょうむじょう)「寂滅為楽」(じゃくめついらく)は、僅か十二文字にすぎないが、これらの言葉は深遠な神理を端的に表現しており、漢文でなければ、こううまくは、まとまらないと思われる。


 私は仏教のことは全くの素人であり、解釈の仕方も仏教哲学を学ばれた方々とは違うかもしれない。しかし文字も知らない当時の人たちに説いたプッタ・ストラー(神理)は、主に方便をもってしたが、衆生が理解できないような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そうした意味で、私は私なりに、解説を進めてきたわけである。もし私の解釈に異議のおありの方があれば、そのお説をお聞かせ願いたいものである。


 般若心経は「般若波羅蜜多」の内容、つまり悟りの中身を述べているが、ではどうすればそれに到達できるの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は触れていない。書かれた動機が般若の内容にあったようだが、やはり目的に至る手段も書いて欲しかった。そうすれば般若心経の中身は一段と光彩を放ち、解釈も在来のものとは大分違ってきたと思う。在来のものは、文字にとらわれ、解説者の意によって進められる。心の問題は、頭では理解できないものだ。何故かといえば、心は次元の異なる世界に属し、その世界を体験し、心と肉体の相関関係を理解しなければわからないからである。


 解説はそうした意味で、悟りの中身以外に、手段についても折に触れ加筆してきたが、般若心経の文面だけでは、こうした解釈は出てこないであろう。


 日本に到来した経文の数は非常に多いと思うが、何れまた機会をみて、これ以外の経文についても解説をしてみたいと考えている。


- 完 -



高橋信次先生著 「原説般若心経」も併せてお読みください。― 三宝出版 発行




이 정법지에 소개하시면서 소노가시라 히로치카님께서 첨부한 글이 아래에 이어집니다.

이 내용을 나중에 제가 제 블로그에 소개했는지 안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혹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아래의 사리불(전생에. 소노가시라 히로치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댓글을 누군가 달으시면, 

번역해 드리겠습니다. 



 現代の釈尊高橋信次師と共に―5


  舎利子が語る真説般若心経講義  園頭広周先生 著書 より




なぜ経というのか


 お経はお釈迦様の教えを書いたものを「経」というのであるといって、誰も「経」の意味を解釈していない。「経」をなぜ「経」というのであるかというその意味を理解することは大事なことである。「経」をなぜ「経」というかというその意味がわかったら、お経は何べんでも余計に読誦した方がよいとか、写経しなさいとかいえない筈である。


「経緯(けいい)」という言葉がある。

「いきさつ」、「次第を立てて治めととのえること」という意味もあるが、普通に多く使われているのは、「たてとよこ、たて糸とよこ糸」ということである。地図上で位置を示すのに「東経○度、北緯○度」という。本来は「たて糸とよこ糸」ということで、織物を織るのにはまず「経(たていと)」をしっかりと歪まないように張って、その「経(たていと)」が上下する間を「緯(よこいと)」を通して締めるわけである。「緯(よこいと)」は少々切れても使えるが、「経(たていと)」が切れたらその反物は使いものにならない。「経(たていと)」は切れてはいけないし、代わりもない、それはそのままに真直ぐに歪みなく張られ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ういうところから、宇宙の永遠に変わらない、絶対に変わってはならない神理(法)、変わるものは神理(法)ではないので、その永遠不変の神理が書かれてあるものというので「経」とつけられたのである。


 だから「お経」というものは、そのなかにどういう神理(法)が示されているか、ということを知るためには読まなければならないが、書かれてある神理(法)がわかったら、それを日常生活に実践し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だから「般若心経」も、読誦したり写経したりしないで、書かれてある神理(法)を実践してゆか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毎日実践してゆくと、執着を断ち、苦しみから離れ、心の不調和がなくなり、心の曇りが晴れ、偉大な神の慈愛の光に包まれている自分を発見することができる。


 一人一人が心の中につくり出したスモッグはどうしたら消えるであろうか。公害は人間がつくり出したものである。題目や念仏を唱えたり、お経を読んで、そうして祈って公害がなくなるであろうか。公害をなくするには、どこの会社が公害を出しているか、その発生源を調べて、そこが出さないようにしない限り公害はなくならないであろう。

それと同じように、その人が自分で心の悩みをつくり出しているのであったら、その人が、どうして悩むことになったのか、その原因を反省して、心の持ち方を変えない限り、その悩みはなくならないであろう。だから自分では何もせずにいてただお願いをすればいいという他力信仰では絶対に救われることはないのである。


 正しく神理を悟っていられた私の師高橋信次先生は、

 「般若心経に示されてある神理を知って、心と生活を正しくする以外に悟る道はない。般若心経によってご利益を得ようと読誦することは、発声練習と自己逃避、自己満足にしか過ぎない。仏陀はそうせよとは教えていない」といわれたのである。


 私達の心の中には、転生輪廻してきた過去と、そうしてこの世に生まれてからのすべてが記憶されているのであるが、心に不調和な思いを持ち、不調和な行為をすることにより心に曇りを生ずると、自ら神の光を閉ざしてしまい、過去世で体験したあらゆる智慧を思い出すことが難しくなってくる。

 それを思い出すためには、一切の執着を断って反省し、足ることを知り、八正道を実践して正しく生きることを誓うことである。そうすると心の窓が開かれてくる。


パニャー パラー ミター、即ち仏智に到達する心の教え、内在された偉大な智慧に到達する、即ち到彼岸の境地に到達するためには、まず過去のことをよく反省して、「いつ死んでもよい」という心境になって生活を正しくすることである。

 この智慧の宝庫を開かせる道が教えてあるのが、この般若心経である。


- 以上 -






2013.06.25 UP


http://www.shoho2.com/t2-7hannyasingyoukoug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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