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제 5장 마음의 기능을 파악하는 방식」마음과 행위를 정화하는 광명으로의 길『반성의 요점』 [절판] 본문

가르침의 글(高橋信次)

「제 5장 마음의 기능을 파악하는 방식」마음과 행위를 정화하는 광명으로의 길『반성의 요점』 [절판]

어둠의골짜기 2012. 2. 29. 15:00


反省のかなめ 【絶版】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


--책 제목에는 마음과 행위를 정화하는 광명으로의 길 이라고 쓰여 있네요 ----------------------

 

 

 

第五章 心の機能の捉え方

제 5장 마음의 기능을 파악하는 방식


 



  八正道の「正定」―反省は、どのようにして行なうか。反省の目的、仕方について、詳説してみたい。    
 팔정도의 「정정」-반성은, 어떻게 행하는가.  반성의 목적,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보고 싶다. 

 

 まず、反省の目的―。
 反省とは、止観である。想念をとめ、過去をふりかえり、自分がなした行為、想念をあらためて、みつめる。そうして、その想念行為をみつめた結果、その想念行為が八つの規範である八正道に、適っていたかどうか。もし、適っていなければ、その原因を追究、原因、結果の正体を見極める。そうして、その正体がわかったならば、二度と再び、その原因に翻弄されない想念と行為、八正道に適った生活を、実践してゆくことである。
  우선, 반성의 목적―。
  반성이란, 지관[止觀]이다.  상념을 멈추고, 과거를 되돌아보고, 자신이 행한 행위, 상념을 고치고, 직시한다. 그렇게 해서, 그 상념행위를 직시한 결과, 그 상념행위가 여덟 가지의 규범인 팔정도에, 적합한가 어떤가. 만약, 적합하지 않으면, 그 원인을 추구(근본(根本)을 캐어 들어 연구(硏究)함), 원인, 결과의 정체를 끝까지 지켜본다.  그렇게 해서, 그 정체가 알았다면, 두번 다시, 그 원인에 농락당하지 않는 상념과 행위, 팔정도에 적합한 생활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次に、心について、ふれてみる。
 心の姿については、これまで『心の原点』などの拙著のなかで述べてきたので、重複するところもあるが、想念を中心とした五つの精神構造 理性、知性、感情、本能、意志について、述べてみたいと思う。
  다음에, 마음에 대해서, 접해 본다.
  마음의 모습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마음의 원점』등의 졸저의 내용에 기술해 왔는데, 중복되는 곳도 있지만, 상념을 중심으로 한 다섯 가지의 정신구조 이성, 지성, 감정, 본능, 의지에 대해서, 기술해 보고자 합니다.

 

 心の姿は、太陽が、地球が、金星がまるいように、円型をなしている。また、太陽を中心とした九つの惑星、三十二の衛星についても、それぞれ円運動を描いて、それぞれの生命活動を行なっている。素粒子(そりゅうし)の世界でも、核を中心として、陰外電子が円運動を行なっている。大宇宙も円型である。現代科学は、まだそこまで証明する手がかりを得ていないが、円型である。やがて、その事実が、証明される時がくるであろう。
  마음의 모습은, 태양이, 지구가, 금성이 둥근것과 같이. 원형을 이루고 있다. 또, 태양을 중심으로 한 아홉 개의 혹성, 32개의 위성에 대해서도, 저마다 원운동을 그리며, 저마다의 생명활동을 행하고 있다.  소립자의 세계에도, 핵을 중심으로 해서, 음외전자가 원동을 행하고 있다.  대우주도 원형이다.  현대과학은, 또 그것까지도 증명하는 단서[실마리]를 얻고 있지 않지만, 원형이다.  이윽고, 그 사실이, 증명될 때가 올 것이다.

 

  円型である心の姿が、円型として保たれている場合は、もっとも強烈に、その生命活動が行なわれる。なぜかというと、円の姿は、神の姿であるからである。眼に見える私たちの五体の姿は、決してまるくはない。ところが、五体の背後にある後光は、まるいのである。仏像、仏画の後光をみればわかるように、私たちの心の姿は、意識は、後光という姿となって、この五体を維持し、動かしているのである。同時に、日々の私たちの心の所在が、後光に反映する。五体の姿は、この現象世界に、適応し得るようにつくられているにすぎない。大宇宙がまるく、太陽がまるく、人間の心もまるい。この世の一切のものは、神の創作であり、したがって、まるいということは、神の意思に適ったものであり、心の姿は、当然、神の子の姿を現わしていることになるわけである。
  원형인 마음의 모습이, 원형으로서 유지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강렬하게, 그 생명활동을 행할 수 있다. 왜인가 하면, 원의 모습은, 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우리들의 온몸의 모습은, 결코 둥글지 않다.  그런데, 온몸의 배후에 있는 후광은, 둥근 것이다.  불상, 불화의 후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의 마음의 모습은, 의식은, 후광이라고 하는 모습이 되어, 이 온몸을 유지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날의 우리들의 마음의 소재가 , 후광에 반영한다.  온몸의 모습은, 이 현상세계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대우주가 둥글다, 태양이 둥글다, 인간의 마음도 둥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창작이며, 따라서, 둥글다고 하는 것은, 신의 의식에 적합한 것이며, 마음의 모습은, 당연히, 신의 자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また円型物は、凹凸(おうとつ)のあるものからみれば、もっとも抵抗が少ない。そうして、もっとも容積が充足される。
  또 원형물은, 요철의 있는 것에서 보면, 가장 저항이 적다. 그렇게 해서, 가장 용적이 충족된다.

 

 心の姿は、円型になってはじめて、その本領を発揮することができるわけだ。
  마음의 모습은, 원형으로 되어야 비로소, 그 본래의 특색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では、その心について、円型であるべきはずのその心が、いびつになったり、三角になったり、四角になった原因は何か、すなわち、八正道から離れた原因は何か、不幸の原因は何か、それを追究してゆくのが、反省である。反省にはいる前に、若干のか説明を加えてみたいと思う。
  그럼, 그 마음에 대해서, 원형이어야 하는 것의 그 마음이, 타원형[비뚤어짐]이 되거나, 삼각이 되거나, 사각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즉, 팔정도에서 벗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추구해 가는 것이, 반성이다.  반성에는 있기 전에, 약간의 설명을 보태 보고자 합니다.

 

 心の姿についてコマにたとえてみることにしよう。コマは、その中心から円周に至る半径の各部分は、相等しく、均等に円が描かれていると運動エネルギーが完全(かんぜん)に消滅するまでまわり続ける。ところが、その円周の一部が欠けたり、でっぱっていたり、あるいは円周自体が円周でなく、三角であったり、四角であると、空気抵抗が強くなって運動エネルギーに等しい回転数を発揮することができない。人間の心もこれと同じように、知性の部分がへこみ、本能の分野が出たりすると、コマの回転(心の在り方)が十分にゆかず、意志を通した行為もちぐはぐとなり、心と行為はバランスを失い、悪い病気にかかったり、粗野な人間ができ上がることになる。心と行為が、いうなればコマがコマとして、その効用を完全に果たすためには、凹凸のない円型をした形がもっとも理想であり、また、人間の心というものは、本来そのように、できているものである。それが、長い転生輪廻の過程において、円型であるべき心の姿が、三角、四角、六角あるいはいびつになってしまい、本来の機能を果たす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しまっているのである。
  마음의 모습에 대해서 팽이로 예를 들어 봅시다.  팽이는, 그 중심에서 원주에 이르는 반경의 각부분은, 서로 동등하게, 균등하게 원을 그리고 있다고 하면 운동에너지가 완전하게 소멸하기까지 계속해서 회전한다. 그런데, 그 원주의 일부가 흠지거나, 툭 튀어나오거나, 혹은 원주자체가 원주가 아니고, 삼각이거나, 사각이거나 하면, 공기저항이 강하게 되어 운동에너지를 동등하게 회전수를 발휘할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지성의 부분이 음푹 들어가서, 본능의 분야가 나오게 되면, 팽위의 회전(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충분하게 가지 않고, 의지를 통한 행위도 조화가 안되며, 마음과 행위는 균형을 잃고, 나쁜 병에 걸리거나, 거칠고 버릇없는 인간이 되어 가게 된다. 마음과 행위가, 말하자면 팽이가 팽위로서, 그 효력을 완전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요철의 없는 원형을 이룬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며, 또,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그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랜 전생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당연히 원형이어야 할 마음의 모습이, 삼각, 사각, 육각 혹은 타원형이 되어 버린다, 본래의 기능을 완수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もっとも、あの世からこの世に出生するおりには、あの世で千年、二千年と訓練をうけているから、心の姿も、前生時代のいびつを修正しているが、しかしそれでも、完全に修正しきってはいない。修正しきっていないから、この世の修行の目的があるのであり、原罪という人間の自我とカルマが、私たち人間についてまわっているわけである。
  가장, 저 세상에서 이 세상에 출생하려면, 저 세상에서 1천년, 2천년이나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모습도, 전생시대의 모양이 일그러짐[비뚤어짐]을 수정하고 있지만, 하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완전히 수정해서 오지 않는다.  수정해서 오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의 수행의 목적이 있는 것이며, 원죄라고 하는 인간의 자아와 카르마[업]이, 우리들 인간에 대해서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もう一つは、同じ円型でも、大きくわけて、大、中、小に区分できる。太陽のような大きな球体もあれば、太陽と比較すればずっと小さい地球という球体もある。したがって、同じ球体、円型にしても、大小のそれがあるし、その段階も、無限にある。前生で容積五の球体にした人は、今生では六の球体にすべく修行の目的で生まれる。六の人は七に。したがって、これでよしとする限度はないのである。こういうと、人間とは、なんて因果な生物なのであろうと思う人があるかも知れない。この人生は楽少なく、苦労が多(おお)いというのが、大部分の人の感慨だろうと思う。そうして、出来得るならば二度と人間稼業はしたくないと思っておられるだろう。
  또 한 가지는, 같은 원형이라도, 크게 나누어서, 대, 중, 소로 구분할 수 있다. 태양와 같은 큰 지구도 있으면, 태양과 비교하면 훨씬 작은 지구라고 하는 지구도 있다.  따라서, 같은 지구, 원형으로서도, 크고 작음의 그것이 있고, 그 단계도, 무한하게 있다. 전생에서 용적 5의 지구로 한 사람은, 금생에서는 6의 지구에....수행의 목적으로 태어난다.  6의 사람은 7에.  따라서, 그래서 좋다고 하는 한도는 없는 것이다. 이렇다고 하면, 인간이란, 어떤 인과(因果: 원인과 결과=업보]한 생물인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인생은 즐거움은 적고, 노고가 많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의 감개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다면 두번 다시 인간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ところが九〇%の各人の意識は、転生輪廻に大きな生きがいと喜びと、人間としての誇りをもっていることを知ってもらいたいと思う。
  그런데 90%의 각자의 의식은, 전생윤회에 크나큰 삶의 보람과 기쁨,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게다고 생각한다.

 

 以上、心の姿の概要を述べたので、今度は心の内部にある想念をはじめとした理性、知性などの五つの機能とその構造について述べてみることにする。
  이상, 마음의 모습의 개요를 기술한 것인데, 이번에는 마음의 내용에 어떤 상념을 시작으로한 이성, 
지성 등의 다섯 가지의 기능과 그 구조에 대해서 기술해 보려고 한다.                           pgae  117~125

 

 


  [想念 상념]  

 

 想念は、円である心の中心部に位置している。ふつう想念というと、さまざまな想像、空想、雑念、正念など、いろいろな想いを指していう。したがって想念と一口にいっても、その想念の概念をとらえることは非常にむずかしいものである。そこで、ここでいう想念とは、理性、本能、知性、感情、意志にまで発展する以前の、エネルギー活動の場としてとらえるとわかり易くな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まず、人間が肉体という乗り舟を誤りなくあやつっていくには、その肉体を運用するところの魂、意識がなければならない。私たちは、昼めざめている時は、肉体は自分自身であると思いこんで生活している。ところが夜寝み、眠ってしまうと、そうした考えは消えてしまう。つまり、なにもわからなくなってしまう。このことはなにを意味するかといえば、肉体をあやつる魂意識は、夜寝む時に、次元のちがうあの世で、明日のエネルギーを補給するために肉体から離脱するのである。そうして翌朝目がさめるまで、あの世にいる。もちろん、肉体と意識は、霊子線を通してつながっているから、肉体に危険がある場合は意識はめざめる。しかし普通は、夜が明けるまで何もわからず眠り続ける。そうして、朝がきて、目がさめ、肉体と意識が密着して、はじめて一日の生活活動を行なうわけである。
  상념은, 둥근 마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 상념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상상, 공상, 잡념, 정념 등, 여러 가지 생각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상념이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도, 그 상념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상념이란, 이성, 본능, 지성, 감정, 의지로까지 발전하기 이전의, 에너지 활동의 장소로서 파악하면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우선, 인간이 육체라고 하는 승선한 배를 착오없이 저어 가는데에는, 그 육체를 운용하는 곳의 영혼, 의식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낮에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육체는 자기 자신이라고 몰두하고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편안하게, 잠들어 버리면, 그러한 생각은 없어져 버린다.  즉,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린다.  이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육체를 조종하는 영혼 의식은, 밤에 잘 때에, 차원의 다른 저 세상에서, 내일의 에너지를 보급하기 위해서 육체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저 세상에 있다.  물론, 육체와 의식은, 영자선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에 위험이 있을 경우는 의식은 눈을 뜬다.  하지만 보통은, 날이 샐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잠을 잔다.  그렇게 해서, 아침이 와서, 눈을 뜨고, 육체와 의식이 밀착하고, 비로서 하루의 생활활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そこで、人間の魂、意識をして意識たらしめているものはなにかというと、意識の中心であるところの想念という場であり、その想念の場に、あの世で補給したエネルギーが貯えられ、その貯えたエネルギーを放出しながら想念活動をしてゆくわけである。このためどんな超人でも、仮に、一週間一睡もとらず働いたとすれば、その人は死を招こう。なぜなら、肉体というものは、口から補給した食物以外に、想念の場から放出されるエネルギーによって維持されているので、そのエネルギーが消(き)えれば肉体の持続は不可能になってしまうからである。
 그래서, 인간의 영혼, 의식으로 하여금 모두 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의식의 중심인 곳의 상념이라고 하는 장소이며, 그 상념의 장소에, 저 세상에서 보급한 에너지를 비축해 두고, 그 비축해 둔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상념활동을 해 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초인이라도, 반대로, 일주일 동안 한번도 자지 않고 일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죽음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육체라고 하는 것은, 입으로 보급한 식물 이외에, 상념의 장소에서 방출된 에너지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인데, 그 에너지가 없어지면 육체의 지속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ここで重大なことは、あの世の人のエネルギーの消費量と、この世の人の消費量とでは大きなへだたりが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この世の人は肉体を持っているために、その消費量は非常に大きいのである。それだけに眠ることによるエネルギーの補給は絶対に欠かせない人間の行事の一つといえる。否、この世の一切の生物は、すべてそうした睡眠によるエネルギーの補給を受けるように仕組まれている。
  여기에서 중대한 것은, 저 세상의 사람의 에너지의 소비량과, 이 세상의 사람의 소비량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은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소비량은 상당히 큰 것이다. 그만큼 잠을 자는 것에 따른 에너지의 보급은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간의 행사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さて、想念は、このように生命活動に必要なエネルギーを補給する場としてとらえられた。そうして補給され貯えられたエネルギーを、今度は、想念という形に変えてゆく場所でもあるわけだ。エネルギーがエネルギーのままではなんの作用も効用も生まれてこない。エネルギーが動力にかわり、機械を動かす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そのエネルギーの真価が生まれてくるように、人間の想念も、神から与えられたエネルギーを動力とし、肉体を動かし、意識活動ができるように仕組まれている。したがって想念という場は、あらゆる意識活動、行為根源であるといえよう。それ故想念は、本来、美醜、善悪、黒白のない透明な、自由な、創造的なエネルギーの場であるはずである。
그럼, 상념은, 이와 같이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급하는 장소로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보급되어 비축해 둔 에너지를, 이번에는, 상념이라고 하는 형태로 바뀌어 가는 장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에너지의 그대로서는 어떠한 작용도 효과도 낳고 있지 않다.  에너지가 동력으로 바뀌어, 기계를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비로소 그 에너지의 가치가 만들어져 가는 것처럼, 인간의 상념도, 신에게서 주어진 에너지를 동력으로 하고, 육체를 움직이고, 의식활동을 가능하게 짜여져 있다. 따라서 상념이라고 하는 장소는, 온갖 의식활동, 행위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상념은, 본래, 미추, 선악, 흑백의 없는 투명한, 자유로운, 창조적인 에너지의 장소인 것이다.

 

 ところが人間は、幼児から子供に子供から青年、壮年に進んでいくと、外界から入ってくるもろもろの諸現象に反応を示し、想念の場は、いろいろ変色し、勝手な作動をはじめてゆく。すなわち、五官を通して入ってきた外界の諸現象にたいして、想念(そうねん)はそれを受けとめ、本能や感情、知性にエネルギーを送(おく)る。するともしその人が、本能や感情にたいして知性が遅れているとすれば、本能や感情が異常にふくらみ、動物的、衝動的な性格を形作ってゆくことになるだろう。同じ物を見、同じことを聞いても、人によってその反応の仕方はちがっている。これは、知性、感情などの各々の分野が、転生輪廻という魂の遍歴と同時に、今世において作り出した意識の姿が、想念という場を通して活動する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人それぞれの想念の姿はみなちがっているであろうし、想念の浄化ということは非常に大事になってくるのである。
  그런데 인간은, 유아에서 아이로 아이에서 청년, 장년으로 진행해 가면, 외계에서 들어오는 본래의 여러 현상에 반응을 보이고, 상념의 장소는, 다양하게 변색하고, 제멋대로인 작동을 시작해 간다.  즉, 오관을 통해서 들어 온 외계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 상념은 그것을 받아 들이고, 본능이나 감정, 지성에 에너지를 보낸다.  그렇다면 만약 그 사람이, 본능이나 감정에 대해서 지성이 늦어지고 있다고 하면, 본능이나 감정이 이상하게 팽창하여, 동물적, 충동적인 성격을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고, 같은 것을 들어도, 사람에 따라서 그 반응의 방식[방법]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지성, 감정 등의 각각의 분야가, 전생윤회라고 하는 영혼의 편력[널리 각지로 돌아다님]과 동시에, 금세에 있어서 만들어 낸 의식의 모습이, 상념이라고 하는 장소를 통해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 저마다의 상념의 모습은 모두 다르고 있을 것이고, 상념의 정화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대사로 되어 오는 것이다.

 

 反省とは「止観」である。「止観」とは、浮かんでは消えてゆくさまざまな動きをみせる想念の動きをとめて、まず、自分の過去をふりかえり、過去の想念の動きが、本能にたいして、知性にたいしてより強く、弱く働きかけていなかったかどうか。強く働いた理由はなんであるのか、弱い原因はどんな理由からかということをみつめることである。
  반성이란 「지관(止觀)」이다. 「지관」이란, 의식속에 떠올라서 없어져 가는 다양한 활동을 보이는 상념의 활동을 멈추고, 우선,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고, 과거의 상념의 활동을, 본능에 대해서, 지성에 대해서 보다 강하게, 약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았는가 어떤가.  강하게 움직인 이유는 무엇에 있는 것인가, 약한 원인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하는 것을 멈추어서  직시하는 것이다.

 

  そうして、円型であるべき心の姿が、凹凸があったり、三角であるとすれば、その部分を修正し、二度と再び想念化しないようにすることである。想念化とは、想念は行為を伴なうので、凹凸をつくる想念の芽を育てないようにすることである。聖書の中に「色情をいだきて女を見るものは、すでに心のうち姦淫したるなり」と書かれてあるように、想念は行為を意味する。箸一本上げおろしするにも意識の命令なくては行なえないのである。それ故、神の道は、現実の行為以前の想念が問題になる。この世の法律では、想像は自由で、行為があってはじめて罰せられるが、神の道は、ちがう。 
 그렇게 해서, 원형으로 있어야할 마음의 모습이, 요철이 있었다거나, 삼각으로 있다고 하면, 그 부분을을 수정하고, 이번에 다시 상념화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상념화란, 상념은 행위를 동반하는 것인데, 요철을 만드는 상념의 싹을 자라지 않게 하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에 「색정을 품어서 여자를 보는 것은, 이미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이라.」라고 적혀 있듯이, 상념은 행위를 의미한다.  젓가락 한짝을 젓가락질하는데에도 의식의 명령이 없어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길은, 진실한  행위 이전의 상념이 문제가 된다.  이 세상의 법률에서는, 상념은 자유이며,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벌을 받지만, 신의 길은, 다르다.

 

  心の中で悪を思ってもいけないし、悪とは調和を乱す想念であるからだ。
  마음 속으로 악을 생각해도 안 되고, 악이란 조화를 어지럽히는 상념이기 때문이다.

 

 人間は神の子であるので、慈悲、愛、寛容、勇気、協調などの想念から離れると、その離れた想念の分量だけ、自分で自分を痛め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
  인간은 신의 자녀이므로, 자비, 사랑, 관용, 용기, 협력 등의 상념에서 벗어나면, 그 벗어난 상념의 불량만큼, 스스로 자신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

 

 以上の説明から想念を要約すると、想念とは、神からいただくエネルギーのいわば蓄電器の役目を果たす場であり、そうして、その充電されたニネルギーを放出しながら生活活動を行なう大事なもう一つの機能を持つ場であるということがわかった。
  이상의 설명에서 상념을 요약하면, 상념이란, 신에게서 받은 에너지인 말하자면 축전기의 임무를 다하는 장소이며, 그렇게 해서, 그 충전된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생활활동을 행하는 중대사한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지는 장소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人間の心を称して、それは発信器であり、受信器であるというのも、こうした想念の場を通していえるわけである。以心伝心とか、精神感応(テレパシー)というものも、想念という発信装置、受信装置が活動されではじめていえるのであり、これがなければ、人間の意識活動は不可能になってしまう。
  인간의 마음을 가리켜, 그것은 발신기이며, 수신기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상념의 장소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라든가, 정신감응이라고 하는 것도, 상념이라고 하는 발신장치, 수신장치가 활동되어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인간의 의식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다.

 

 もう一つ、想念について大事なことは、人間の心は発信、受信器のほかに発電装置という自らがその生命活動を行なうエネルギーを生み出す場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植物、動物にも心はある。けれども植物、動物には、創造エネルギーを生み出す場は与えられていない。なぜかというと、植物、動物は神の創造物であるからだ。人間も、神の創造物にちがいないが、人間は、神の子である。神の子ということは、宇宙即我という神の心を具有しているからにほかならない。神は自らその叡知と無限のエネルギーを生み出し、貯え、放出してこの大宇宙をつくられた。そうして、その創作した天地に、中道という「法」に生命をふきこみ、そのなかに、姿をかくされた。万生万物は、中道という「法」を通して生かされ、生きてゆく生命体となったのである。しかし人間は神の子として、神の意を体し、この地上を仏国土とすべく、何千何万という人類が誕生したのである。人類の目的は、仏国土という「法」の具現化であり、心の王国をうつした社会をつくることである。神がその姿を万生万物を生かすエネルギーにかえると同時に、人類という姿にかわられたわけである。人間が神の子であるというその事実は、天地創造と同時に生まれたものである。
  또 하나, 상념에 대해서 중대사한 일은, 인간의 마음은 발신, 수신기 외에 발전장치라고 하는 스스로가 그 생명활동을 행하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장소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식물, 동물에도 마음은 있다.  그렇지만 식물, 동물에는, 창조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장소는 주어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식물, 동물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신의 장초물에 틀림없지만, 인간은, 신의 자녀이다.  신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우주즉아라고 하는 신의 마음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이다.  신은 스스로 그 예지와 무한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비축하고, 방출해서 이 대우주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 창작한 천지에, 중도라고 하는 「법」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안에, 모습을 보인다[발휘한다].   만생만물은, 중도라고 하는 「법」을 통해서 움직이고, 생존해 가는 생명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의 자녀로서, 신의 뜻을 품고, 이 지상을 불국토로 하기 위해, 몇 억 몇 만이라고 하는 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인류의 목적은, 불국토라고 하는 「법」의 구현화이며, 마음의 왕국을 투영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인간을 신의 자녀라고 하는 그 사실은, 천지창조와 동시에 태어난 것이다.      


 しかし、人類の歴史は暗く悲惨なものであった。・・・・・時に応じて、さまざまな天使がこの地上に誕生して神の道を説いていった。人類が神の子にあるまじき想念ふりまわされるにしのびず、人類を救うという立場から、その折り折りの時代に合わぜ、それぞれの目的にそって光をかかげてきたわけである。神は必要とあれば、その姿を現わす。  しかし、人類と神との距離はあまりにもかけ離れ、あの世とこの世を含めた地球人類のなかで、神と直接交信を持ち得る天使は、そう多くはない。一升のマスには一升の水しか入らないように、それ以上入れようとすれば水はあふれ出てしまうからである。神と人類とのかけ橋の役をされるのが大天使といわれる人びとである。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어둡고 비참한 것이었다. ・・・・・시기에 응해서, 다양한 천사가 이 지상에 탄생해서 신의 길을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이 신의 자녀로서 있을 수 없는 상념에 휘둘림에 참을 수 없고, 인류를 구원한다고 하는 입장에서, 그때 그때의 시대에 맞춰서,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빛을 내걸고 왔던 것이다.  신은 필요하다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인류와 신과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지고, 저 세상과 이 세상을 포함한 지구 인류 가운데서, 신과 직접 교신을 가질 수 있는 천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한 말들이 되에는 한 말들이 되의 물밖에 들어가지 않듯이, 그 이상 들어가려면 물은 넘쳐 흘러나와 버리기 때문이다.  신과 인류와의 가교의 역학을 맡은 것이 대천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人間が神の子であるという事実は、ブッタの宇宙即我によって証明されるところであるが、さらには、天地創造の過程と人間の役割を一べつすることによっても、おおよその見当がついたと思う。人間の想念という場は、神の子としてのエネルギーを生み出す発電所であるという意味がおわかりいただけたと思う。
  인간이 신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은, 붓타의 우주즉아(
宇宙即我)에 의해서 증명한 바가 있지만,  나아가서는, 천지창조의 과정과 인간의 역할을 한번 흘낀 보는 것에 의해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상념이라고 하는 장소는, 신의 자녀로서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발전기라고 하는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こうみてくると、想念という場は、発電所であり、発信所であり、受信所の三つを兼ね備えた場所であるともいえる。そうして、想念は、心と肉体を維持する大事な役目をも同時に持っているといえる。それはエネルギーとしてとらえられるからである。
  이렇게 보게 되면, 상념이라고 하는 장소는, 발전기이며, 수신기이며, 수신소의 세가지를 겸비한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상념은, 마음과 육체를 유지하는 중대사한 임무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에너지로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ところで想念が想念として働いている場合は、単なるエネルギーだから問題はない。問題は知性、感情、本能といった心の機能に働いた場合に、理性というあの世の意識が中和されている時はいいが、そうでないとエネルギーに色がついてくる。
  그런데 상념이 상념으로서 일하고 있는 경우는, 단순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문제는 지성, 감정, 본능이라고 하는 마음의 기능으로 일한 경우에, 이성이라고 하는 저 세상의 의식이 중화되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에너지에 물들게 된다.

 

 想念の流れを水に譬えてみると、水は無色透明である。次々と湧き出る水はあくまで無色無臭の水だ。その清水に、知性という青色の染料、感情という赤色の染料、本能という黄色の染料があって、それぞれが意志を通して勝手な行動をとり、青や赤や黄色の染料が流れ出たとすれば、水はそれぞれの色に染まってゆくであろう。そうして無色透明の水は次第に清水としての機能を失ってゆく。しかし、水がいろいろな色彩をつけたからといっても、水そのものの本質にはかわりはないはずだ。清水に色が付着したということにすぎないからである。水はどんどん流れ出ており、青、赤、黄の染料の流出をとめれば、ただちに元の清水にかえるであろう。青、赤、黄の染料の流出を、誰がセーブしてゆくか。つまり、清水にもどしたり、中和させる働きは、どの部門かといえば、それは理性なのである。理性という中和剤が、三つの染料を清水にかえ、あるいは清水に近いものにして意志に働くときに、人間の想念と行為は、本来の姿に戻ってゆくのである。
 상념의 흐름을 물에 비유해 보면, 물은 무색투명이다.  연이어 솟아 나오는 물은 어디까지나 무색무취의 물이다.  그 맑은 물에, 지성이라고 하는 청색의 염료, 감정이라고 하는 적색의 염료, 본능이라고 하는 황색의 염료가 있고, 저마다가 의지를 통해서 제멋대로인 행동을 취하고, 청색이나 적색이나 황금색의 염료가 솟아 나온다고 하면, 물은 저마다의 색에 물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색투명한 물은 차츰차츰 맑은 물로서의 기능을 잃어 간다.  하지만, 물을 여러 가지 색체를 띠었다고 해도, 물 그대로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맑은 물에 색이 부착했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은 점점 흘러 나오고, 청, 적, 황의 염료의 유출을 멎게하면, 즉시 본래의 맑은 물로 돌아올 것이다.  청, 적, 황의 염료의 유출을, 누가 막아 가는가.  즉, 맑은 물로 되돌리거나, 중화시키는 작용은, 어느 부문인가 하면, 그것은 이성인 것이다.  이성이라고 하는 중화제가, 세가지의 염료를 맑은 물로 바꾸고, 혹은 맑은 물에 가까운 것으로 해서 의지로 움직일 때에, 인간의 상념과 행위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中道の心は、私心のないことである。色のつかない心だ。まるく大きい、そして、理(り)性(せい)の働きが各部門に万遍なくゆきわたり、それぞれの染料を中和させてしまう状態をいう。こうした時に、心全体を蔽っていた諸々の色彩がうすれて、神から直接の光を(ひかり)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いうなれば無色透明な水に還ってゆくのである。
  중도의 마음은, 사심의 없는 것이다.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둥글고 큰, 그리고, 이성의 활동이 각 부분에 만편하게 고루 미치고, 저마다의 염료를 중화시켜 버리는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했을 때에, 마음 전체를 덮고 있던 여러 가지의 색채가 엷어지고, 신으로부터 직접 빛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색투명한 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このように想念という清水、エネルギーは、人間の心と肉体を形作っている源であり、想念の浄化こそ神の子にかえる唯一の道であ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
  이와 같이 상념이라고 하는 맑은 물, 에너지는,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형성하고 있는 근원이며, 상념의 정화야말로 신의 자녀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page  126~140

 


 

[本能  본능]

 

 本能については、現代医学、心理学の面でかなり追及され、本能とはこういうものだと明らかにしているが、ここで述べる本能については、こうした既成の学問上の見方、とらえ方、考え方と多少ちがっているので、その点、あらかじめご諒承願いたい。
  본능에 관해서는, 현대 의학, 심리학의 면에서 상당히 추급되어, 본능이란 다양한 것이다라고 밝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 기술할 본능에 대해서는, 이러한 기성의 학문상의 견해, 파악하는 방식, 사고방식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그 점, 미리 양해를 바랍니다.

 

 本能とは一切の生物がこの地上で生きてゆく上において神が与えた最低の必須条件である。
  본능이란 모든 생물이 이 지상계에서 생존해 가는데에 있어서 신이 부여한 최저의 필수요건이다.

 

 もしも本能というものを、神が生物に与えなかったとすれば、生物の生活、種族の保存は不可能)となる。したがって、人間も動物も、この本能を身につけて地上に誕生している。
  만약 본능이라고 하는 것을, 신이 생물에게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생물의 생활, 종족의 보존은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도 동물도, 이 본능을 몸에 받아서 지상에 탄생하고 있다.

 

 本能を大別すると第一次本能と第二次本能がある。第一次本能とはある心理学者がいうように真性本能であり、第二本能は仮性本能と名づけられる。真性本能とは、人間も動物も等しく持ち合わせているところの純粋本能、つまり飲食本能と性本能である。学者によっては、母性本能を加えている人もいるが、これは食と性本能から生まれた本能といった方がいいかも知れない。また学者によっては性本能は真性本能ではないという見方をとる人もいるようである。動物実験の結果、環境説を唱えて、これは教育された本能ではないかとみる人もいるが、野性で生きるべき動物を一定の実験室という枠内でとらえようとするところに無理があるようである。こうした方法では本当は、一〇〇%の結果を出すことはできない。野生の動物は野生のなかで生活し得るようにつくられているので、したがって動物の本能を正確に知ろうとするには、実験室という枠内から離れてみるより方法がない。
  본능을 크게 나누면 제 1차 본능과 제 2차 본능이 있다.  제 1차 본능이란 어느 심리학자가 말하듯이 진성본능(真性本能)이며, 제 2차 본능은 가성본능(仮性本能)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진성본능(真性本能)이란, 인간도 동물도 동일하게 서로 가지고 있는 순수본능, 즉 음식본능과 성본능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모성본능을 더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음식과 성본능에서 태어난 본능이라고 말한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성본능은 진성본능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를 잡는 사람도 있는 듯 하다.  동물실험의 결과, 환경설을 외치고, 이것은 교육된 본능이 아닐까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야성에서 살아가야 할 동물을 일정한 실험실이라고 하는 테두리에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있는 듯 하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진실은, 100%의 결과를 도출할 수는 없다.  야생의 동물은 야생의 가운데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므로, 따라서 동물의 본능을 정확하게 알려면은, 실험실이라고 하는 한정된 테두리에서 떨어져 보는 방법밖에 없다.

 

 また本能のなかには、食、性の二大本能以外に、闘争、逃避、拒否、好奇、服従、獲得、建設、誇示、群居、母性などの本能があるとみる人もいるが、これらは、何れも二大本能を軸にして動いているとみていいのである。たとえば、食本能からは、闘争、逃避、拒否、獲得、建設、誇示といった本能が導き出せるし、性からは、好奇、建設、群居、服従、あるいは闘争、獲得などの本能が容易に引き出せる。
  또 본능 중에는, 음식, 성의 2대 본능이외에, 투쟁, 도피, 거부, 호기심, 복종, 획득, 건설, 과시, 군거[무리를 지어 생활함], 모성 등의 본능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아무래도 2대 본능을 축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식본능에서는, 투쟁, 도피, 거부, 획득, 건설, 과시라고 말한 본능이 이끌리고, 성에서는, 호기심, 건설, 무리를 지어 생활함, 복종, 혹은 투쟁, 획득 등의 본능이 쉽게 이끌어 낸다.

 

 食、性の二大本能を第一次本能あるいは真性本能と名づけるとすれば、闘争、逃避、拒否などの本能は、いわば生活習慣からくるところの第二次本能、仮性本能であり、ここで問題にする本能にもとづく欲望である。第一次本能というものは、一定量以上求めれば、ある時間必要を感じなくなるものである。食べものは腹一杯食べれば、しばらくは欲しくはない。性本能にしても、目的を果たせば中断する。ところが第二次の本能的欲望は無限に広がっていく。ここに一次と二次本能の大きなちがいがあるわけである。
  음식, 성의 2대 본능을 제 1차 본능 혹은 진성본능(真性本能)이라고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면, 투쟁, 도피, 거부 등의 본능은, 말하자면 생활습관에서 기인한 제 2차 본능, 가성본능(仮性本能)이며, 여기에서 문제로 삼는 본능에 바탕을 둔 욕망이다.  제 1차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량 이상 요구되면, 어느 시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음식물인 것은 배가 부르면, 조금도 욕심내지 않는다.  성본능에 대해서도, 목적을 완수하면 중단한다.  그런데 제 2차의 본능적 욕망은 무한으로 넓혀간다.  여기에 1차와  2차 본능의 큰 차이가 있는 이유이다.

 

 動物たちの生活の基本は一次本能のみで行なわれている。もちろん、本能だけではなく、動物によってはごくわずかな知性、感情も加わって行動の態様を形作ってゆくが、本能の部門だけを抜き取ってみると、二次本能の働きは、人間をのぞいてはほとんどみられない。またそのように作られているものだ。であるから、彼らは、人間のように欲望を発展させ、他を侵略するということはない。生きるのに必要量の食べ物を得れば、もうそれ以上他を襲うことをしない。足ることを知っている。このため彼らの生活は、人間が侵さないかぎり、永遠に続いてゆくだろう。
  동물들의 생활의 기본은 1차 본능 만으로 행해지고 있다.  물론, 본능만이 아니라, 동물에 따라서는 그 중 소수인 지성, 감정도 가미해서 행동의 기능을 형성해 가지만, 본능의 부문만을 뽑아 내어 보면, 2차 본능의 활동은, 인간을 없애고는 대부분 볼 수 없다.  또 그와 같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은, 인간과 같이 욕망을 발전시키고, 남을 침략한다고 하는 일은 없다.  생존하는 데에 필요량의 음식물을 얻을 수 있으면, 이미 그것 이상 남을 습격하는 일은 행하지 않는다. 만족함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동물들의 생활은, 인간이 침범하지 않는 한, 영원히 이어져 갈 것이다.

 

 さて食、性の一次本能にもとづく二次的本能、つまり無限に発展する欲望は、人間にだけ与えられている。動物にはほとんどない。なぜか。それは人間が神の子として、それらの欲望をコントロールし、理性と智慧によって、本能にもとづいたその原動力を調和に志向させるように仕組まれているからなのだ。
  그런데 음식, 성의 1차 본능에 바탕을 둔 2차적 본능, 즉 무한으로 발전하는 욕망은, 인간에게만 주어지고 있다.  동물에게는 대부분 없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이 신의 자녀로서, 그들의 욕망을 통제하고, 이성과 지혜에 의해서, 본능에 바탕을 둔 그 원동력을 조화로 지향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すなわち、本能が持つ機能というものは、食、性の、生活の基本形を軸に、この地上をより調和さぜてゆくための欠(か)かせない原動力となっているからだ。生活のない調和はあり得ない。調和とは生活を土台にしてはじめて成り立つものである。原野を切りひらいて道をつくり、鉄道を敷き、列車を走らせる。物の流れがスムーズにいけば、人びとは必要なものを簡単に手に入れることができる。動物と同じように、その場かぎりの生活では、自然を開拓し、自然の恩恵と慈悲を本当に知ることはできない。与えられた環境を整備し、住み良くし、草花を植え、米麦、野菜を耕作することによって自然と人間の調和が一層促進されてくるものである。本能は、それ故に生活の基本である。ここを出発点として人間は人間らしい生活を創り上げてゆくものである。したがって本能の領域は、調和の基礎で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だ。この意味で、本能の領域は極めて重要な意味を持ち、生活の原動力であるといえる。ところが、その原動力が意外な方面に発展していくというのが現状なのである。
  즉, 본능이 갖는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음식, 성의, 생활의 기본형을 축으로, 이 지상을 보다 조화시켜 가기 위한 빠뜨릴 수 없는 원동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없는 조화는 있을 수 없다.  조화란 생활을 토대로 해서 비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개척하지 아니하여 인가가 없는 벌판과 들을 자르고 날라서 길을 만들고, 철도를 깔고, 열차를 달리게 한다.  모든 것의 흐름을 원할하게 하면,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에 한정된 생활로는, 자연을 개척하고, 자연의 은혜와 자비를 진실로 알 수는 없다.  주어진 환경을 정비하고, 살기 좋고, 화초를 심고, 곡물, 야채를 경작하는 일에 의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한층 촉진되어 오는 것이다.  본능은, 그러므로 생활의 기본이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인간은 인간다운 생활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본능의 영역은, 조화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이 의미에서, 본능의 영역은 다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고, 생할의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원동력을 뜻밖인 면으로 발전해 간다고 하는 것이 현상인 것이다.

 

 闘争がそうであり、誇示がそうである。拒否、またしかり。これらの本能的欲望は、地位、名誉、金に走ってゆく。逃避とか好奇といった欲望は、怠惰、愛欲などに形をかえてゆくだろう。
  투쟁이 그렇고, 과시가 그렇다.  거부, 또한 그렇다.  이들의 본능적 욕망은, 지위, 명예, 돈에 질주해 간다.  도피라든가 호기심이라고 말한 욕망은, 나태[게으름], 애욕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갈 것이다.

 

 もちろん、これらの欲望は本能の領域のみではなく、感情、知性の影響をうけて動いていくが、食、性の本能がもっとも強烈に刺激するためにおこる欲望である。こうした、本能にもとづく、生存を発展させる欲望があるために、人類社会の混乱が続いているわけである。
  물론, 이들의 욕망은 본능의 영역 만이 아니라, 감정, 지성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여 가지만, 음식, 성의 본능이 가장 강렬하게 자극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욕망이다.  이러한, 본능에 바탕을 두고, 생존을 발전케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인류사회의 혼란이 이어지고 원인이다.

 

 一次本能の食と性について、もう少し説明を加えてみよう。
 まず食について。これは生物がこの地上に生存するかぎりは絶対に欠かすことのできない本能である。生まれたばかりの赤子が誰も敎えもしないのに母親の乳房をさぐる。このことはあの世の習性、前世の習慣が生まれたばかりの赤子をしてそうさせるのである。ある学者は食本能を原始本能といっている。原始でもなんでもない。人間以外のあらゆる生物はすべてこうした習性を持ってこの地上に生まれてきている。したがって、食べる本能は生物が生きてゆく上に欠くことのできない第一の条件であり、あらゆる生物に平等に与えられている本能である。食べる本能を停止すれば、生物の生存の維持は不可能になってくる。
  1차 본능의 음식과 성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더해 봅시다.
  우선 음식에 대해서.  이것은 생물이 이 지상에 생존하는 한은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본능이다.  태어났을 뿐인데 갓난아기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엄마의 유방을 빤다.  이 일은 저 세상의 습성, 전세의 습성이 태어났을 뿐인데 갓난아기로 하여금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식본능을 원시본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시도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 이외의 온갖 생물은 이미 이러한 습성을 가지고 이 지상에 태어나서 오고 있다.  따라서, 먹는 본능은 생물이 생존해 가는데에 빠뜨릴 수 없는 제 1의 조건이며, 온갖 생물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는 본능이다.  먹는 본능을 정지하면, 생물의 생존의 유지는 불가능하게 되어 온다.

 

 次ぎに性本能。性本能は種族を保存するということから、神が一切の生物にこれまた平等に与えた。人間も動物も、ある一定の年齢に達すると、性本能がめざめてくる。やがて子を生み、子孫を残してゆく。
  다음에 성본능, 성본능은 종족을 보존한다고 하는 것에서, 신이 모든 생물에게 이것 역시 평등에게 부여했다.  인간도 동물도, 어떤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성본능이 눈을 떠 온다. 이윽고 자녀를 낳고, 자손을 남기어 간다.

 

 ここで性本能と愛についてふれながら、食本能との関連を述べてみよう。
 愛は寛容、包容という神の光であり、調和の姿である。性本能を通して精子と卵子が結合する姿は調和の結晶である。性本能のみで子を生む動物たちもいる。感情や若干の知性が加わって子孫を残す動物もいる。性本能と感情、知性、理性が加わって調和の結晶として子を生み育てる生物もいる。これは人間である。
  여기에서 성본능과 사랑에 대해서 접해보면, 식본능과 관련을 기술해 봅시다.
  사랑은 관용, 포용이라고 하는 신의 빛이며, 조화의 모습니다.  성본능을 통해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모습은 조화의 결정이다.  성본능 만으로 자녀를 낳은 동물도 있다.  감정이나 약간의 지성을 가미해서 자손을 남기는 동물도 있다.  성본능과 감정, 지성, 이성을 가미해서 조화의 결정으로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생물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다.

 

 人間の、性本能を通した愛の姿というものは、こうした理性や知性の機能の充足を経て為されるものを最上とする。もし官能の満足のみで性本能を働かせ、それが愛だと思ったら大きな間違いである。これでは最低の動物と少しもかわらない。愛でもなんでもない。愛はたがいに扶け合い、補い合い、はげまし合い、そうして時には峻厳なものである筈である。結婚の根本は魂向上のための社会生活における最少の単位である。家庭は社会の原型であり、出発点であり、調和の基礎である。こうしたことを忘れて、性本能の満足が愛であると考えたら大変である。第一、愛という情緒はなにも男女の関係のみではない。隣人愛、友人愛、親子の愛、師弟の愛、社会の愛というように、もっと広く、多面的である。ただ愛の基本は男女から始まる。したがって男女の愛は、社会愛の基礎的条件として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ることは否定できない。しかし、性本能の満足が愛とされたらお終いである。
  인간의, 성본능을 통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성이나 지성의 기능의 충족을 거쳐서 행해지는 것을 최상이라고 한다.  만약 관능의 충족 만으로 성본능을 움직여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이것으로는 최저의 동물과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사랑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격려하고, 그렇게 해서 때로는 준험한 것일 것이다.  첫째로, 사랑이라고 하는 정서는 아무래도 남녀의 관계 만은 아니다.  이웃사랑, 친구의 사랑,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 스승과 제자의 사랑. 사회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처럼, 더욱 더 넓고, 다면적이다.  단 사랑의 기본은 남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남녀의 사랑은, 사회애의 기본적 조건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성본능의 충족을 사랑이라고 강요한다면 끝장이다.

 

 戦争と平和―。人類の歴史はこの両極の間を何千年となく往復してきたようである。殺し合いがなけれは性が乱舞する。平和は女の世界。男は戦士であることが誇りだった。
  전쟁과 평화 ―.  인류의 역사는 이 양극의 사이를 몇 천년이나 왕복해 온 듯 하다.  서로 죽임이 없으면 성이 난무한다.  평화는 여자의 세계.  남자는 전사인 것을 긍지로 했다.

 

 食と性の二大本能が、戦争と平和という両極の世界を創り出し、欲望の渦をひろげてゆく。現代は地上の一部を残して表面は平和である。平和が続くと、性本能が頭をもたげ、見るもの、聞くもの、これに結びつけてゆく。芝居も、小説も、風俗も、より強烈な刺激を求めて、あたかもそれが当然の成り行きのように動いてゆく。性の狂宴は、天災か戦争でも起こらぬかぎりブレーキがきかなくなる。ソ連では、性病が蔓延しだしたため、性病者の性行為にきつい罰則を設けたといわれている。日本やアメリカは、この点自由だから、方向転換がむずかしい。 
  음식과 성의 2대 본능이, 전쟁과 평화라고 하는 양극의 세계를 창조해 내고, 욕망의 소용돌이를 넓혀간다.  현대는 지상의 일부를 남기고 표면은 평화이다.  평화가 계속되면, 성본능이 고개를 들고, 보는 것, 듣는 것, 이것에 묶여 간다.  연극《흔히, 가부키(歌舞伎)·분라쿠(文楽)등 일본 고유의 연극을 가리킴》도, 소설도, 풍속도, 보다 강렬한 자극을 요구하고, 어디까지나 그것을 당연의 성행하듯이 움직여 간다.  성의 광연은, 천재지변이라든지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소련에서는, 성병이 만연했기 때문에, 성병이 걸린 사람의 성행위에 강력한 벌칙을 마련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일본이나 미국은, 이 점에서 자유이기때문에, 방향전환이 어렵다.

 

 食と性本能が動物の姿のような形で人間を動かしてゆくと、いきつくところは動物以下の最低の地獄である。動物の本能には限界がある。人間の本能には限界がない。本能を欲望に転化させてゆく能力が与え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だから本能の衝動が動物的になると、手がつけられなくなってくる。
 
 음식과 성본능이 동물의 모습과 같은 모양으로 인간을 움직여가면, 마지막 상태에 이르는 장소는 동물이하의 최저의 지옥이다.  도움의 본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본능에는 한계가 없다.  본능을 욕망으로 전화시켜 가는 능력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능의 충동이 동물적이 되면, 손을 쓸 수가 없게 된다.  

 

 たとえば、食についていえば、動物たちは単純で、その場その場で満足している。越冬する動物は越冬するに必要なものを確保する、あるいはそれに耐え得るカロリーをとればそれ以上求めることをやめる。しかも彼らは同じ種族を侵してまで自分が生きようとはしない。昆虫のなかには、冬が近づき死が迫るとメスがオスを食べてしまうのもいるが、これは種族保存の儀式として彼らに与えられた習性である。ところが人間の食本能は無限に広がってゆく欲望が表裏一体をなしているから、動物にもみられないような同族の殺傷をしてまでも、自己保存を遂げようとする。
  예를 들면, 음식에 대해서 말하면, 동물들은 단순해서, 그 장소 그 장소에서 충족하고 있다.  월동하는 동물은 월동하는데에 필요한 것을 확보한다, 혹은 월동에 견딜 수 있는 칼로리를 취하면 그이상 요구하는 것을 멈춘다.  게다가 그들은 같은 종족을 침략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는다.  곤충 중에서는, 겨울이 가까워지고 죽음이 닥치면 암컷이 숫컷을 먹어 버리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종족보존의 의식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습성이다.  그런데 인간의 식본능은 무한하게 넓혀가는 욕망이 표리일체를 낳고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동족의 살상을 하기도 하며, 자기보존을 성취하려고 한다.

 

 戦争は、その最たるものである。
   전쟁은, 그 으뜸가는 것(그 정도가 심한 것)이다.

 

 現代は、経済競争だ。自社が生きるためには、他社のことなど構ってはいられない。産業スパイを放ち、あらゆる知恵をしぼり、才謀をめぐらして他社をだし抜き、利益を独占しようとする。そうして同業の他社を、ことごとく傘下におさめることが企業の最高の目標になってくる。最低の費用で最大の利益をあげる。これが企業人の鉄則であり、この鉄則を貫いた者が偉大な経営者といわれ多くの人びとの賞賛を博している。
  현대는, 경제전쟁이다.  자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타사의 일 등을 상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스파이를 풀어 놓고, 온갖 지혜를 짜내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사를 빼앗고, 이익을 독점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같은 업종의 타사를, 모조리 산하에 두는 것이 기업의 최고의 목표가 되어 온다.  최저의 비용으로 초대의 이익을 올린다.  이것이 기업인의 철칙이며, 이 철칙을 관철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들의 상장을 받고 있다.

 

 欲望、競争、発展、成功・・・・・・。
   욕망, 경쟁, 발전, 성공 ・・・・・・。

 

 信長は自己の欲望を満足させるために天下統一という大義名分を旗印に、他国に侵略する。現代も、戦国時代と少しも変わらないようである。変わったのは直接、人殺しをするか、しないかのちがいだけのようである。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시 위해서 천하통일이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기치로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현대로, 전국시대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듯 하다.  바뀐 것은 직접, 사람을 죽이든가, 죽이지 않는 것이 차이일 뿐인 것 같다.

 

 こうみてくると、食と性の本能に人間がいかに支配され動いているかが分かる。そうして、その本能に支配された人間のゆきつくところは、憎しみ、悲しみ、そして苦悩があるだけである。本能そのものは肉体生命の保存がその目的であるが、欲望という怪物は己自身を破壊するばかりか、動物や自然をも同時に破壊してゆく。人間はそれでも満足なのであろうか。
  이렇게 보게 되면, 음식과 성의 본능에 인간이 어떻게 지배되고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본능에 지배된 인간의 마지막 상태에 이르는 곳은, 증오, 슬픔, 그리고 고뇌가 있을 뿐이다.  본능 그 자체는 육체생명의 보존이 그 목적이지만, 욕망이라고 하는 괴물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자연을 동시에 파괴해 간다.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하는 것일까.

 

 私共は、人間の欲望、執着についてよくよく考えてみ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
  우리들은, 인간의 욕망, 집착에 대해서 자주 자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本能の概念について一応締めくくってみたいと思う。
 既述のように、食と性の二大本能は人間が地上で生存するかぎり、これを切り離すことはできない。切り離したら死滅である。死滅は神の心に適うものではない。神は生存に必要な心を人間に与え、生存にふさわしい環境を与えているからである。
  본능의 개념에 대해서 일단 결말을 지어 보려고 한다.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음식과 성의 2대 본능은 인간이 지상에서 생존하는 한, 이것을 때어낼 수는 없다.  분리한다면 죽어서 없어진다. 사멸[죽어서 없어짐]은 신의 마음에 맞는 것은 아니다.  신은 생존에 필요한 마음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생존에 상응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動物と人間のちがいは、人間には豊かな心があるということ。動物は本能のままに生かされている。人間はその本能を自らコントロールしながら、本能から生じてくる地上生活の原動力を活かしながら、自然と人間の調和を進めてゆくものである。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인간에게는 관대한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  동물은 본능대로 생존되고 있다.  인간은 그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본능에서 생존해 가는 지상생활의 원동력을 활용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진행해 가는 것이다.

 

 その本来あるべき調和の目的が、争いや性本能に翻弄されるということは、一口にいって、知・情・意の知と意に自分の心をゆだねてしまうからである。知とは知性のごく一部の表面の部分。意とは、我欲を生む表面的な本能的意思と感情の一部分である。もちろん意志も入るこの問題については後でふれるとして、ともかく心の領域の極めて表面的な知と意に左右されるため、人の世は調和とは反対の方向に走ってしまうわけである。もし知と意に情が加われば、たとえ知性が表面的な働きしかしなくても感情、理性が作用して、まるみのある人間性が生まれてくるであろう。意についても、意思(心の全体)から意志に向かう場合でも、もっと豊かに作用するはずである。本能、感情でも、表面意識が独立して働くときは、その部分が異常なふくらみを見せ、まるく大きな心が変形して人間本来の円満な人格は期待できなくなってくる。
  그 본래 있어야 할 조화의 목적이, 투쟁이나 성본능에 농락된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知]・정[情]・意[의]의 지와 의에 자신의 마음을 맡겨 버리기 때문이다.  지(知) 지성의 다섯가지의 괴로움의 일부의 표면의 부분.  의(意), 아욕을 낳는 표면적인 본능적 의사와 감정의 일부분이다.  물론 의사도 들어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접하기고 하고, 어쩼든 마음의 영역의 대단히 표면적인 지와 의에 좌우되기 때문에, 인간 세상은 조화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 버리는 이유이다.  만약 지와 의에 정이 가미할 수 잇으면, 가령 지성이 표면적인 활동뿐만이 아니라해도 감정, 이성이 작용하고, 원만함의 있는 인간성이 탄생할 것이다.  의에 대해서도, 의사(마음의 전체)에서 의지로 향하는 경우에도, 더욱 풍요롭게 작용할 것이다.  본능, 감정에도, 표면의식이 독립해서 활동할 때는, 그 부분이 이상한 팽창을 보이고, 둥글고 큰 마음이 변형해서 인간 본래의 원만한 인격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本能的な欲望は、こうした理性、感情、知性、意志の円満な作用から離れて、特に、理性のコントロールから独立して、表面的な知と意が本能に乗っかって動いてゆくというのが実情である。
  본능적인 욕망은, 이러한 이성, 감정, 지성, 의지의 원만한 작용에서 벗어나서, 특히, 이성(
理性)의 통제에서 독립해서, 표면적인 지(知)와 의(意)가 본능에 갈아타서 움직어 간다고 하는 것이 실정이다.

 

 戦争と平和はその最たるものであろう。この境合の平和とは、真の平和ではなく、欲望に翻弄された戦争の変形した姿をいう。したがっていつ戦争が始まるかわからない。現代がそういう姿である。争いの元は、生活の維持である。利益追求である。食べることである。食べることがさまざまに変化し、発展して、その発展の途上に国と国あるいは人と人との利害が相反してくると、血で血を洗う争いに飛躍してゆくのである。戦争が終り、物が出回り、生活が楽になってくると、今度は情欲が頭を持ち上げ、性の狂躁曲がくりひろげられてくる。
  전쟁과 평화는 그 으뜸가는 것(그 정도가 심한 것)일 것이다.  이 경우의 평화란, 참된 평화가 아니라, 욕망에 농락된 전생의 변형한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언제 전쟁이 시작될지 모른다.  현대가 그러한 모습이다.  투쟁의 근본은, 생활의 유지이다.  이익추구이다.  먹는 것이다.  먹은 것이 가지각색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그 발전의 도상에 나라와 나라 혹은 사람과 사람의 이해가 상반해 오면, 피로 피를 씻는 투쟁에 비산해 가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나돌고, 생활이 즐겁게 되어 오면, 이번에는 정욕이 머리를 쳐들고, 성의 광조곡[미친듯이 날뛴다]이 벌어져 온다.

 

 そこで、人間から欲望を切り離すことができないものかどうかである。経済学の第一ページに「経済は人間の欲望を土台にして動く」としてあり、欲望のない経済は考えられぬというわけである。人間が肉体を持つかぎり、肉体維持の本能はしかたがない。しかし人間は肉体だけではない。精神という心を所有している。その心の一部の作用が人間の全人格を動かしているとしたら、これほど愚かしい、これほど浅薄な話はないであろう。心という精神をフルに働かせば、そこからあらゆる能力が生まれ、人間同志がツノつき合わせる無意味さを悟ることができるはずである。しかも、経済と欲望という危険極まりない相互関係から、人間は、はじめて解放され、調和という、本来の人間目的のレールに乗る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
  그런데, 인간에게서 욕망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이 어째서 일까이다.  경제학의 제 1페이지에 「경제는 인간의 욕망을 토대로 해서 움직인다」라고 하고 있고, 욕망의 없는 경제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이다.  인간이 육체를 가지는 한, 육체 유지의 본능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만은 아니다.  정신이라고 하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  그 마음의 일부의 작용이 인간의 모든 인격을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면, 이 정도로 생각이 모자라는[어리석은], 이 정도로 천박한 말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을 규칙에 움직이게 하면, 거기에서 온갖 능력이 태어나서, 인간끼리가 사사건건 다투는 무의미함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경제와 욕망이라고 하는 위험한 끝이 없는 상호관계에서, 인간은, 비로서 해방되어, 조화라고 하는, 본래의 인간 목적의 규칙에 탑승할 수가 있을 것이다.

 

 欲望の元凶は肉体にまつわる執着であり、それも食と性の二つに代表されるといってもいいだろう。したがって、人間は大低あの世に戻ってから後悔するのである。あの世では、食と性はこの世のような切実さはない。食べることも、性も、現象界とは異質である。食べる心配もなければ、性に翻弄されることもないのである。もちろん、地獄は別である。彼らは、その想念のなかで、想いを遂げ、想いに翻弄されている。地上の何倍もの苦しみのなかで、その強欲のとりことなり、それを果たそうとしている。クタクタになって、精も根もつきはてる。彼らは、その無意味さを知るまで、そうした我欲の渦から抜け出すことができない。哀れというほかはない。
  욕망의 원흉은 육체에 휘감기는 집착이며, 그것도 음식과 성의 두가지로 대표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대저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다.  저 세상에서는, 음식과 성은 이 세상과 같은 절실함은 없다.  먹는 일도, 성도, 현상계와는 성질이 다르다.  먹을 걱정도 없다면, 성에 농락되는 일도 없는 것이다. 물론, 지옥은 별개이다.  그들은, 그 상념 속에서, 생각을 이루고, 생각에 농락되고 있다.  지상의 몇 배의 괴로움 속에서, 그 강한 욕망에 붙들리게 되어, 그것을 결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기진맥진해서, 정력과 끈기가 바닥난다.  그들은, 그 무의미함을 알기까지, 그러한 아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애처롭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現代の物質文明下に、人間から欲望をとり去れということは酷であろう。また、人間は、心と肉体という二つの機構と異質のボディーを持って現象界で生活しているわけだから、あの世の規準をそのまま当てはめることはできないし、現代の意識社会ではそれは不可能であろう。
  현대의 물질문명하에, 인간에게서 욕망을 제거한다고 하는 일은 혹독할 것이다. 또, 인간은, 마음과 육체라고 하는 두가지의 기구와 성질이 다른 신체를 가지고 현상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 세상의 올바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고, 현대의 의식사회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そこで大事なことは、精神と肉体の調和、つまり、そのどちらにも片寄らない生活態度が現象界の人間に課せられた生き方ということになろう。
  그래서 중대사한 일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 즉, 그 양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생활 태도가 현상계의 인간에게 과제인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될 것이다.

 

 すなわち、足ることを知った生活、感謝と報恩の生活、協調、協力の生活ということになる。
   즉, 만족함을 아는 생활, 감사와 보은의 생활, 협조, 협력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足ることとは、与えられた現在の環境を最善に生かし、度を越えないこと。度とは欲望の発展である。協調、協力とは共存である。たがいにないものを補い合い、助け合う。
  만족함이란, 주어진 현재의 환경을 최선으로 활용하고, 도를 넘지 않는 것.  법도란 욕망의 발전이다.  협조, 협력이란 공존이다.  다 함께 서로 없는 것을 서로 보충하고, 서로 돕는다.

 

 こうした生活態度は、そのまま中道の生活であり、本能の機能が円満な姿で働いていることを意味する。本能がこうした円満さを得るには、知性、感情、理性、それに意志という五つの各領域が万遍なく働いて、はじめて実現するものである。それも、人の才能とか、知識とか、背が高いとか低いに関係なく、子供には子供の、大人には大人の姿で整えられてゆくものである。
  이러한 생활 태도는, 그대로 중도의 생활이며, 본능의 기능이 원만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잇는 것을 의미한다.  본능이 이러한 원만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성, 감정, 이성, 그것에 의사로 하는 다섯가지의 각 영역이 만편하게 움직이고, 비로서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의 재능이라든가, 지식이이라든가, 배경이 높다든가 낮음에 관계 없이,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성인에게는 성인의 모습으로 가지런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

 

 人間が動物と異なり、その本能の領域を生かし、調和の原動力たらしめてゆくことこそ、人間らしい生き方であり、そこがまた動物とは大いにちがいのある性質を持つ生物であるといえよう。 
  인간이 동물과 달리, 그 본능의 영역을 활용하고, 조화의 원동력을 삼는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며, 거기에 또 동물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성질을 갖는 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人間の真の幸せはなにか。物が沢山あっても幸せにはなれない。反対に物がなくても困る。ほどほどにあって、そうして、心は空に浮ぶ雲のように、とらわれのない毎日が送れることが大切なことなのである。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물질이 많이 있어도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물질이 없어도 곤란하다.  정당히 있고, 그렇게 해서, 마음은 하늘에 뜬 구름과 같이, 잡히지 않는 매일을 보내는 것이 중요[소중]한 것이다.

 

 ここでいう心の分析は、今日の医学や心理学の分野で扱っている見方、とらえ方、考え方とは趣を多少異にしているので、この点をご承知おき願いたい。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의 분석은, 오늘날의 의학이나 심리학의 분야에서 취급하고 있는 견해, 파악하는 방식, 사고방식은 취지를 다소 달리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pgae 139~160   

 


 

 

[感情  감정]

 

 さて人間を称して、俗に、感情の動物といわれている。つまり人間は、感情によって動かされ、感情によって価値判断をしているというわけである。
 그런데 인간을 가리켜, 속담에, 감정의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은,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고, 감정에 의해서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心理学でも「行動には、物事(情況)にたいする主体の態度、あるいは価値づけを伴っている。これを感情という」とある。
  심리학에서도 「행동이란, 사물(정황)에 대한 주체의 태도, 혹은 가치를 동반하고 있다. 이것을 감정이라고 말한다」라고 한다.

 

 それほど、人間の感情というものは、日常生活の上で大きなウエイトを占めているのである。それはまた本能の領域と同じように、感情の領域は、実は非常な重要性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もしも、人間から感情を抜き取ったとするとどうなるであろうか。芝居や映画に出てくるロボット、あるいは想像上の知だけしかない宇宙人がいい例であろう。SFに出てくる知だけの宇宙人は目的のためには手段を選ばず、残虐行為も平気で行なう。地上の建物を平気で破壊し、人間や動物を殺してゆく。彼等はそうした行為になんの自責も感じない。彼等には地球征服という目的だげがあって、そのためには障害となるものは一切合切取り払ってゆく。愛情とか、悲しみとか、怒りというような感情などは露ほどもないからなのだ。
 그 정도로, 인간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 위에 큰 무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본능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영역은, 실은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서 감정을 뽐아 냈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연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로보트, 혹은 상상상의 미지의 우주인이 좋은 예일 것이다.  SF에 나오는 미지의 우주인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잔혹행위도 태연히 행한다.  지상의 건물을 태연히 파괴하고, 인간이나 동물을 죽여 간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에 어떤 자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지구정복이라고 하는 목적만 있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장해가 되는 것은 남김없이 제거해 간다.  애정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분노라고 하는 것과 같은 감정등은 이슬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感情のない人間―。これほど恐ろしい、変形した生物はない。時おりこうした冷血漢が新聞の社会面に姿を現わし読者を仰天させるが、人間には感情があるために、人間らしい人間社会の秩序が維持されているといってもいいであろう。
  감정의 없는 인간―. 이 만큼 무서운, 변형한 생물은 없다. 가끔 이러한 냉혈한이 신문의 사회면에 모습을 드려내고 독자를 매우 놀라게 하지만,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인간다운 인간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話は前に戻るが、人間は、本能的欲望に動かされると同時に、感情によってもその行為を決めている。
  이야기를 전으로 되돌리지만, 인간은, 본능적 욕망으로 움직이게 됨과 동시에, 감정에 따라서도 그 행위를 결정하고 있다.

 

 人間が環境に適応する行動には、異性に近づく、引きつけられる、また、危険から遠ざかる、離れるという二種の反応があり、これは換言すれば快、不快の反応である。そうしてそのどちらかに態度を決める。つまり、価値判断を下しているのは感情の領域であろう。そうしてその人にとって、快、不快はそのまま有益になる、ならないということにもなるであろう。しかしながら良薬口に苦がしであり、自分の肉体上の良し悪しが、快、不快とは反対方向に結びつく場合もあると思う。このため、その人にとって、快、不決がそのまま、その人に有益であるか有害かは、ひと口には言えないと思う。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행위에는, 이성에 다가가고, 끌릴 수 있다.  또, 위험에서 멀리 물러가고, 벗어나려고 하는 두가지 종류의 반응이 있고,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쾌, 불쾌의 반응이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쪽으로 태도를 결정한다. 즉,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감정의 영역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유쾌, 불쾌는 그대로 유익이 된다, 되지 않는다라고 하게도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양약은 입에 쓰고, 자신의 육체상의 좋고 나쁨이, 유쾌, 불쾌와는 반대방향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유쾌, 불쾌가 그대로, 그 사람에게 유익일까 유해일까는, 한 마디로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つまり人間の感情は、単純なものと複雑なもの、浅いものと深いものとに大別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즉 인간의 감정은,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 얊은 것과 깊은 것과 크게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もう一つ重大なことは、人間の魂である。
  또 하나의 중대한 일은, 인간의 영혼이다.

 

   魂という概念はさまざまに解釈されているが、ここでいう魂とは、人間の心であり、そうしてその心の波動をうけた意識の全体を指す。しかし狭義には、人それぞれの前世、過去世あるいはこの世の生活を記録した想念帯と表面意識を意味する。このため現世においては、生れつき、あるいは後天的感情がまざり合ってその人を支配してゆくのである。そうしてこれはなにも感情ばかりでなく、本能、知性、理性、意志についてもいえるのである。ともかく、人はそうした感情を持って、この地上界で修行するので、同じ兄弟でもその現われ方はちがってくる。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이란, 인간의 마음이며, 그렇게 해서 그 마음의 파동을 받은 의식의 전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사람 저마다의 전생, 과거세 혹은 이승의 생활을 기록한 상념대와 표면의식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현세에 있어서는, 선천적, 혹은 후천적 감정이 서로 섞이어 그 사람을 지배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것은 조금도 감정만이 아니라, 본능, 지성, 이성, 의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이 지상계에서 수행하는 것이므로, 같은 형제라도 그 표현방식은 달라져 온다.

 

 たとえば、同じこわいものをみても姉は恐怖におののくが、妹は平気で、むしろおかしさがこみ上げてくることすらある。また兄は内気だが、弟は外向的で強気であるという場合もあるであろう。このように、同じ精子と卵子の結合にもかかわらず、成長するにしたがい、感情の起伏がまったくちがってくる。これが俗に他人同士の場合は、もっとはっきりしてくるであろうし、たとえば、兄弟でも意見が合わないのに他人である友人、先輩の方がウマが合うという現象すら出てくる。
  예를 들면, 같은 무서운 것을 봐도 언니는 공포에 떨지만, 여동생은 태연하며, 오히려 재미가 붙어서 확인해 보려고까지 한다.  또 형은 내성적이지만, 남동생은 외향적으로 강렬한 기질이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갘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성장함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을 속담에 남남끼리의 경우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고, 예를들면, 형제라도 의견이 맞지 않는데 타인인 친구, 선배 쪽이 의견이 맞는다고 하는 현상조차도 나온다.

 

 こういうように、人それぞれの魂の遍歴によって、感情にも密度の濃いもの、浅いもの、変化のあるもの、少ないものがあると思う。
 이와 같이, 사람 저마다의 영혼의 편력[널리 각지를 돌아다님]에 따라서, 감정에도 밀도가 짙은 것, 얇은 것, 변화가 있는 것, 적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概して、前世で命令の執行者であった者は、感情が激しく動く。今世でその感情を修正するために前世とは反対の被執行者の位置におかれた場合は、内面の葛藤は想像以上であり、社会生活からのがれたいという欲望に襲われることが間々(まま)あるのである。反対に、被執行者が今世で命令を発する立場に立つと人の感情を無視した言動に左右されがちである。
 대체로, 전생에 명령의 집행자로 있던 사람은, 감정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이승에서 그 감정을 수정하기 위해서 전생과는 반대의 피집행자의 위치에 놓여진 경우는, 내면의 갈등은 상상 이상이며, 사회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 욕망에 습격당하는 일이 간혹 있다.  반대로, 피집행자가 이승에서 명령을 내리는 입장에 서면 사람의 감정을 무시한 말에  주로 좌우되는 경향이 많다.
 

 一方現世は男性だが、守護霊が女性の場合は、表面至って男性的で女性との交際はさぞぎごちないと思われるが、それがまことにスムーズにゆく。一見、武骨者のようにみえ、男らしい感覚を備えていながら、よく観察すると女性らしい何かをそなえている男性をよくみかける。しかし表面、女性のような人ざわりだが、つき合っていくと、どうして、なかなかテコでも動かぬという人もいる。こういうのは守護霊も男である。 
  한편 이승에서는 남성이지만, 수호령이 여성의 경우는, 겉으로는 남성적이며 여성과의 교제는 틀림없이 어색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참으로 순조롭게 한다.  얼뜻 보면, 무골장대하게 보이고, 남성다운 감각을 겸미하면서도, 잘 관찰하면 여성스러운 뭔가를 갖추고 있는 남성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교제하다 보면, 어떻게,  한번 주장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한 사람도 사람도 있다.

 

 反対に守護霊が男性で現世は女性の場合は、女性らしい細やかな神経がゆき届かないキライがあるようである。姿は女性でも、態度、言葉の端し端しが男に似ているといった具合いに。もちろん、現世における人それぞれの環境、生活態度、努力によってこうした傾向は修正されてゆくが、普通は表面的な態度とはウラ腹に、その感情の起伏には、異性の色彩をつけているのである。
  반대로 수호령이 남성이며 현세[이 세상]에는 여성의 경우는, 여성스러운 섬세한 신경으로 자상하게 마음을 쓰지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는 듯 하다.  모습은 여성이라도, 태도, 말투가 사소한 부분이 남자를 닮고 있다고 하는 상태로.  물론, 현세에 있어서 사람 저마다의 환경, 생활 태도, 노력에 따라서 이러한 경향은 수정되어 가지만, 보통은 표면적인 태도라는 속 마음에, 그 감정의 기복에는, 이성의 색체를 띠고 있는 것이다.

 

 ともかくこのように、人の感情には、さまざまな動きがとらえられ、しかもその感情は、他の動物にはみられぬ人間特有の精神活動が行なわれており、その感情を大事に育てるか、あるいは感情のおもむくままに自分を動かしてゆくかによって、人の品性、情操も、高くもなり、低くもなってくるのである。
 어쨌든 이와 같이, 사람의 감정에는, 다양한 움직임이 파악되고, 게다가 그 감정은, 다른 동물에게는 볼 수 없는 인간특유의 정신활동이 행해지고 있고, 그 감정을 큰일로 키우든가, 혹은 감정의 향하여 가는대로 자신을 움직이든가에 따라서, 사람의 품성, 정조[(가치 판단의 기초가 되는) 인간이 지닌 가장 높고 복잡한 감정. 정서]도, 높아지게 되고, 낮아지게도 되어 오는 것이다.

 

 感情を表わす言葉に次のようなものがある。
 直接的には、快・不快、激情、情熱、情動、情緒、情操など。
 間接的、直接的な言葉を含むものとしては衝動、義理、人情、義務、献身、感動、感激、感謝、善、美、愛といったもの。
  감정을 표현하는 맡투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직접적으로는, 유쾌・불쾌, 격정, 정열, 정동, 정서, 정조 등.
  간접적, 직접적인 말투를 포함한 것으로서는 격동, 의리, 인정, 의무, 헌신, 감동, 감격, 감사, 아름다움, 사랑이라고 하는 것.

 

 感情の特質としては、ある行為にたいして、第三者では容易に理解できない面が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たとえば、男女の愛情問題は、その典型であろう。どうしてあんな男にあのような女が・・・・・。またはその反対の例。このほか、義理とか、義務、感動といった情動にたいしても、第三者では、類似の体験を持っているか、あるいは当事者にならないかぎりは、なかなかその行為を理解できないものだ。
  감정의 특질로서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제 3자로서는 용이하게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자의 애정문제는, 그 전형일 것이다.  어떻게 저런 남자에게 저와 같은 여자가・・・・・。 또는 그 반대로의 예이다.  그 외에, 의리라든가, 의무, 감동이라고 하는 정동에 대해서도, 제 3자로서는, 같은 종류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당사자에게 해당되지 않는 한은, 꽤 그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정동 : [체육과학] 신체에 기본적인 생명활동에 관한 자극이 가해졌을 때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
※정동 : [심리] 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일어나는 감정. 진행 중인 사고 과정이 멎게 되거나 신체 변화가 뒤따르는 강렬한 감정 상태이다
※정동 : [한자사전] 감정(感情) 중(中) 노공 희비(怒恐喜悲)와 같이 갑자기 생기는 일시적(一時的)인 급격한 감정(感情). 손이 떨리거나 심장(心臟)이 두근거리며, 박동(搏動)이 빨라졌다 늦어졌다 하여 불안정(不安定)된 신체적(身體的) 현상(現狀)을 나타내는 성질(性質)

 

 これが本能の領域になると、誰でも理解できる。性とか食はもちろんのこと、母性本能、あるいは建設、群居、好奇、等々、理解できないものはわりあい少ない。
  그것이 본능의 영역이 되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성(
性)이라든가 음식은 물론, 모성본능, 혹은 건설, 함께 모여 사는 것, 호기심,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율은 적다.

 

 また知性の領域である科学する心の精神活動も計数的に割り切れてくるから第三者でも容易に理解することができよう。
  또 지성의 영역인 과학하는 마음의 정신활동도 계수적으로 나머지 없이 나누어지기[충분히 납득이 되기] 때문에 제 3자라도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ところが人の感情ばかりは、ふつうはなかなかつかめない。
 ここに、感情の大きな特徴があるといえるし、他の動物にみられぬ人間の特質があるといえる。
 感情を大別すると二種にわけられる。 
  그런데 사람의 감정만은, 보통은 좀처럼 눈치 챌 수 없다.
  여기에, 감정의 큰 특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다른 동물에게 볼 수 없는 인간의 특질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감정을 크게 나누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すでに述べたように、それは、単純なものと、複雑なものである。
 単純なものは、動物にみられる、怒り、恐れ、といったもの、または幼児の泣き笑いがあろう。
 複雑なものは、次元が高くなると道徳的、宗教的なものになってこよう。
   이미 기술한 것 처럼, 그것은,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이다
   단순한 것은, 동물에게 볼 수 없는, 분노, 공포, 라고 하는 것, 또는 유아의 울다가 웃는게 있을 것이다. 
   복잡한 것은, 차원이 높아지면 도덕적, 종교적인 것이 되어 온다.

 

 単純なものは極めて衝動的であり、利害得失の自己保存から出てこよう。単純な喜怒哀楽の感情はその一例である。持続的なものとしては、恨み、憎しみ、嫉妬、といったものがあろう。

  단순한 것은 극히 충동적이며, 이해득실의 자기보존에서 나아 온다.  단순한 희로애락의 감정은 그 한 예이다.  지속적인 것으로서는, 원망, 증오, 질투, 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複雑なものには、美とか善、愛、そして喜び、悲しみ、哀れみ、怒り、といったものもあるであろう。

복잡한 것으로는, 미(美)라든가 선(善), 사랑, 그리고 기쁨, 슬픔, 가련함, 분노, 라고 말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서의 글에서 번역이 누락된 부분입니다.  참고하세요. 죄송합니다.   


 ここで、喜怒哀楽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
 喜怒哀楽という感情は、一見して、いかにも表面的なものと考えられ勝ちであるが、必ずしもそうとはいえない。
   여기에서, 희로애락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희로애락이라고 하는 감정은, 얼핀 보면, 매우 표면적인 것이라고 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たとえば音楽について考えてみると、交響曲とジャズ音楽、あるいは流行歌にはそれぞれの持味があり、持味からいえばその良し悪しは区別できないが交響曲を聴きなれて、さて、流行歌やジャズ音楽を聴こうとすると抵抗がでてくる。ジャズや流行歌はいかにも感覚のみの旋律で、心の中までひびくものは少ない。ベートーベンの「第九」と「リンゴの歌」を比較すると、その旋律の厚み、深さ、美しさというものに、非常なひらきがある。つまり同じ音楽という音の旋律から受ける喜び、悲しみ、楽しさ、というものに、かなりの相違があることに気づく。
 예를 들면 음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교향곡과 재즈음악, 혹은 유행가에는 저마다의 지닌 맛이 있고, 그 음악에 독특한 맛에서 말하면 그 좋고 나쁨은 구별할 수 없지만 교향곡을 듣고서, 그럼, 유행가나 재즈음악을 들으려고 하면 저항이 밀려 온다. 재즈나 유행가는 자못 감각 만의 선율이며, 마음 속까지 울려 퍼지는 것은 적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 단조》 (Op. 125)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잃고 청각장애인이 될 무렵 작곡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1824년에 완성함」와 「사과의 노래=일본 패망 후 상영된 영화 미풍의 주제가」를 비교하면, 그 선율의 중후함, 깊음,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에, 상당한 격차가 있다.  즉 같은 음악이라고 하는 음의 선율에서 받는 기쁨, 슬픔, 즐거움, 이라고 하는 것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 [사과의 노래] : 焼け跡の虚脱状態のなかで,「リンゴの歌」(サトウ・ハチロウが灯火管制の暗幕の下で,敗戦の2カ月前に作詩した)が大ヒットした(戦後のヒット歌謡曲第1号)。平易な歌詞と軽快なリズムを松竹歌劇団出身の並木路子が明るく歌いあげた。この歌は,1945(昭和20)年10月10日に封切られた戦後映画第l作目(GHQの検閲映画第1作でもある)となった「そよかぜ」(松竹・佐々木康監督作品)の主題歌(レコードは翌1946{昭和21}年1月発売)であった。映画の内容は楽屋番の母親の手伝いをしていた少女(並木路子)が楽団員たちに助けられながら歌手になっていくという一種のスター誕生物語。映画はヒットしなかったが,主題歌は大ヒットした。

이 내용은 원문에 없지만, 사과의 노래가 뭔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이후에 전쟁에서 패한 후 일반인들이 불탄 곳을 바라보면서 허탈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사토우 하치로우란 분이 등화관제의 어둠 속에서 패전 2개월 전에 만든 시인데, 이것이 히트하였고, 평이한 가사와 경쾌한 리듬을...송죽가극단 출신의 로꾜라는 여성이 밝은 목소리로 부른 이 곡은 1945년 10월 10일에 개봉된 전후 영화제 첫번째 작품으로 영화의 제목은 「미풍」이라네요.

유트브에.....,「リンゴの歌」라고 입력하면, 내용을 볼 수 있어요. 사과의 노래는, 미풍이라는 영화의 주제가라네요.


 絵画にしても、映画館の看板絵や、装飾絵のそれと、美術作品とではこれまた比較にならないし、美術品には、心に訴える喜び、美しさがあるだろう。
  회화[그림]에 대해서도, 영화관의 간판 그림이나, 장식회의 그것과, 미술작품과는 그 역시 비교가 안 되고, 미술품에는, 마음에 호소하는 기쁨,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喜怒哀楽という感情は、このように単に、自己の表面的な都合や波動から生まれるものと、そうでないものとが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
  희로애락이라고 하는 감정은, 이와 같이 단순히, 자기의 표면적인 형편이나 파동에서 탄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なんてあんなバカなことをするのだろう、何故ひと言相談してくれなかったのだろう」
 親が世間知らずの子供の行為に、怒り、悲しむ感情と、
「어째서 저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혼자는 상담해 주지 않았던 것일까」

   부모가 세간에 알 수 없는 아이의 행위에, 분노, 슬퍼하는 감정과,

  

「俺の足を踏んでスイマセンの挨拶(あいさつ)もしない。このヤロウ・・・・・・」
 という怒りとでは、同じ怒りでもその質がちがうのである。
「내 발을 밟고서 미안하고 인사도 하지 않느군, 이 자식이 ・・・・・・」
  라고 화를 내서는, 같은 성냄이라도 그 질이 다를 것이다.

 

 一方は子を思う愛情からくる怒りであり、いわば救いの怒り。後者は肉体的な快不快、いわば利害得失からくるものである。
  한편은 아이(자식)를 생각하는 애정에서 오는 성냄이 있고, 말하자면 구제의 분노.  후자는 육체적인 유쾌 불쾌, 말하자면 이해득실에서 오는 것이다.

 

 こうみてくると、喜怒哀楽の感情には、深い、浅いがあることに気付く。
  이렇게 보면, 희로애락의 감정에는,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愛の感情は、救いの感情なのである。一般的には、宗教的、道徳的感情を指して情操といっているが、その心情は、広く、大きな包容力を持ったものである。
  사랑의 감정은, 구제의 감정인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종교적, 도덕적 감정을 가리키고 정조[정서]라고 하고 있지만, 그 심정은, 넓고, 큰 포용력을 가진 것이다.

 

 イエス・キリストは気性の激しい方であった。その激しい気性は、しばしば爆発した。爆発の相手は魔王である。つまり当時は魔王の心を持った人々があまりにも多く、このため善良な人々の苦しみを救う意味で愛の怒りが燃えたのである。
  예수 그리스도는 기질이 격력한 분이었다.  그 격렬한 기질은, 자주 폭발했다.  폭발의 상대는 마왕이다.  즉 당시는 마왕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고, 이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의 괴로움을 청하는 의미에서 사랑의 분노가 불탄던 것이다.

 

 釈迦は老いた父シュット・ダーナーや妻であるヤショダラ、そして子であるラフラをおいて出家した。現代なら無責任のそしりはまぬがれないであろう。しかし、当時の社会的背景等を考慮に入れると、もしもカピラに残り、その中から「生老病死」のナゾを解こうとした場合はどうであったか。第三者の結果論としては、やればできたという人もあると思うが、やはり食うや食わずの六年の修行が、人類の迷いを解く礎になったことは否定できない。人類を救うか、父と妻子そしてその一族のみの幸せを願うか。こうしたことから釈迦は決然と出家した。かくして、正法が人類の前に明らかにされ、人類に光明を与えることになった。釈迦も広く、大きな愛の行為に、立ち向っていったわけである。
  석가는 늙은 아버지 슈도다나왕이나 아내인 아쇼다라, 그리고 자식인 라후라를 두고 출가했다.  현대라면 무책임의 바난을 면할 수 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배경등을 고려하면, 만약 카비라성에 남고, 그 속에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원인[이유]를 풀려고 했을 경우는 어떠했을까.  제 3자의 결과론으로서는, 한다면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먹는 것조차 만족지 못하는 6년의 수행이, 인류의 방황[미혹]을 푸는 초석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류를 구원할까, 아버지와 처자 그리고 그 일족 만의 행복을 바랄까.  이러한 일에서 석가는 결연히 출가했다.  이리하여, 정법을 인류 앞에 뚜렷하게 밝혀내고, 인류에게 광명을 주게 되었다.  석가도 넓고, 큰 사랑의 행위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

 

 こうした釈迦やイエスという神の子の愛の行為から、足を踏まれてカッとなる感情まで、その領域の巾の広さは大変なものである。
  이러한 석가나 예수라고 하는 신의 자녀의 사랑의 행위에서, 발을 힘차게 딛고 활발한 감정까지, 그 영역의 폭의 넓이는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しかも人の感情は、先天的なもの、そして後天的な生活環境からもさまざまに変化していくものであり、そして、その波動は決して停止しないのが特徴である。体の調子、気分の置きどころによってもかわってくるし、天気の変化にも左右されるというシロモノである。さらに性別の相違からもその起伏の状態がちがってくるであろう。
  게다가 사람의 감정은, 선천적인 것, 그리고 후천적인 생활환경에서도 다양하게 변화해 가는 것이며, 그리고, 그 파동은 결코 정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몸의 컨디션, 기분이 상태에 따라서도 알 수 있고, 기상의 변화에도 좌우된다고 하는 사람이다.

 

 一念三千の心の動きは、本能と同時に感情の領域が占めているウェイトの大きさを知ることができる。
  일념삼천의 마음의 활동[움직임]은, 본능과 동시에 감정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무게의 크기를 알 수가 있다.

 

 苦しみ、楽しみ、悲しみ、恨み、怒り、そしり、ねたみ、嫉妬、憎しみ、悩みなどの動きは、すべて感情の領域がなしている精神活動である。
  괴로움, 즐거움, 슬픔, 원망, 분노, 비난, 시샘, 질투, 증오, 고뇌 등의 활동[움직임]은, 모조리 감정의 영역을 낳고[이루고] 있는 정신활동이다.

 

 さて、人間の行動や思考の土台をなすものはなにかといえば、それはさきに説明した本能であり、次いで物を感じる感受性にあるわけである。しかしながら日常生活の行動や思考の大半は感情によって左右されているといっても過言でなく、感情の果たす役割の大きさを痛感せざるを得ない。本能(一次本能)は目的を果たせば内にかくれてしまうが、感情の波は四六時中動いているのである。
  그럼,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思考]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이미 설명한 본능이며, 다음으로 사물[현상]을 느끼는 감수성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일상 생활의 행동이나 사고의 태반은 감정에 따라서 좌우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감정을 완수하는 역할의 크기를 통감할 수에 없다.  본능(1차적 본능)은 목적을 완수하면 안으로 숨어버리지만, 감정의 파도는 하루종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 사고[思考] : ①생각하고 궁리(窮理)함 ②사유(思惟) ③어떠한 문제(問題)나 과제(課題)에서 출발(出發)하여 결론(結論)으로 이끄는 관념(觀念)의 과정(過程). 상징적(象徵的)인 것이 그 특징(特徵)임. 또는, 개념(槪念)이나 말 등(等)에 의(依)한 문제(問題) 해결(解決)의 과정(過程) ④상징적(象徵的)이어야 하는 관념(觀念). 경험(經驗) ⑤또는, 상징적(象徵的) 경험(經驗)의 연쇄(連鎖)

 

 そこで感情の純化はどうずればよいかである。それにはまず、知性、理性、意志などの万遍ない共同作業によって、感情の奥深い神の子の自分である愛、義務、責任、善、美といった豊かな情操をひき出し、行為の上に表わしてゆくことである。そうしてその万遍ない共同作業は「反省」という行為を通して実現されるものであり、「反省」のない共同作業は作業として成立し得ないものである。
  그래서 감정의 순화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이다.  그것에는 우선, 지성, 이성, 의지 등의 만편하지 않는 공동작업에 따라서, 감정의 심오한 신의 자녀의 자기 자신인 사랑, 의무, 책임, 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풍요로운 정조를 이끌어 내고, 행위의 상에 표현해 가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그 만편하지 않은 공동작업은 「반성[反省]」이라고 하는 행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며,「반성」의 없는 공동작업은 작업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感情という意識にも、表面意識と潜在意識がある。通常私たちの生活の上で動いている感情意識は、表面意識の感情である。このため、自己保存の感情がどうしても強く現われ、こうした傾向が強く動き出すと、この領域が異常なふくらみをみせてくることになり、知性、理性の働きが弱くなってくるのである。そうすると、悲しみ、恨み、そしり、ねたみ、嫉妬、憎しみといった感情想念が我者顔でその人の心を占領し、自分で自分が制御できなくなってきてしまう。
  감정이라고 하는 의식에도,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이 있다.  통상 우리들의 생활 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감정의식은, 표면의식의 감정이다.  이 때문에, 자기보존의 감정이 반드시 강하게 나타나고,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영역이 이상한 팽창을 보여 오게 되며, 지성, 이성의 활동[움직임]이 강하게 되어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슬픔, 원망, 시샘, 질투, 증오라고 하는 감정상념이 아자안[我者顔=자기 중심의 사고방식에 얽매여,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스스로 자신이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아자안[我者顔] : が‐しゅう〔‐シフ〕【我執】 아집
がしゅう」を大辞林でも検索する 1 自分中心の考えにとらわれて、それから離れられないこと。我を通すこと。また、その気持ち。「―にとらわれる」 2 仏語。人には常住不変の実体があるとする誤った考え。我見。 

이 단어는 한국어 사전에 없어서요. 일본 야후, 국어사전에서 옮겨 왔습니다. 가장 가까운 검색 단어입니다. 

1. 자기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혀,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것.  나를 통하는 것.  또, 그 기분.  

2. 불교 용어.  사람에게는 상주 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 아견(我見)


 
 霊的には、こうした場合は、その人の背後に動物霊(主にキツネ)や地獄霊、魔王が憑き、その人の意識をあやつることになる。つまり感情の領域が異常なふくらみをみせ、知性や理性の共同作業の働きがにぶくなると、自分の意識の中に他界の悪霊が入ってきて、その人の肉体を支配してしまうのである。これは本人にとっても、家族にとっても不幸なことである。
  영적으로는, 이러한 경우는, 그 사람의 배후에 동물령(주로 여우)나 지옥령, 마왕이 빙의하여, 그 사람의 의식[意識]을 조종하게 된다.  즉 감정의 영역이 이상한 팽창을 보이고, 지성이나 이성의 공동작업의 활동[움직임]이 둔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 다른 세계의 악령[惡霊]이 들어와서, 그 사람의 육체를 지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도, 가족에게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다.

 

 そう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は、さきにふれたように、各領域の共同作業が常に円滑に行なえるように、反省という行為を欠かさないようにすべきなのである。
 그렇게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접했듯이, 각 영역의 공동작업을 항상 원할하게 행할 수 있도록, 반성이라고 하는 행위를 빠뜨리지 않게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ただここで注意したいことは、感情の成因は人によって皆ちがうということである。 人の行動様式を決める性格(主として感情の働きによる)はなかなか変えにくい反面を持っているが、しかし変化しやすい要素をも備えている。つまり、性格は環境に左右されるし、この意味では極めて後天的であるともいえるのである。もっとも人間には先天的な気質というものが内在されているが、性格は年令の進行と環境の変化によって変ってくる。小さい頃はドモリであった者が成人するにしたがってそのドモリが治り、大政治家になったり、説教家になった例は、洋の東西を問わない。反対に陽気な子供が幾多の失敗を重ねて、やがて陰気な気弱な大人に変化していった例も非常に多いのである。このほかさまざまな人生経験を経るにしたがって、その人の性格が作られてゆく。先天的気質は、多分に前世の性格が今世に持ち越されている。もっとも人によっては前世の気質とはまったく反対な性格を形作っている場合もあるのである。これはあの世の生活が前世の気質をかえてしまったためである。いずれにせよ今日の心理学ではこの気質の類形を分裂質、躁欝質、テンカン質、などにわけているが、こうした気質が後天的な性格とまざり合い、複雑な形態をつくっているといえよう。
  단 여기에서 주의하고 싶은 것은, 감정의 이루어지는 원인은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성격(주로 감정에 활동[움직임]에 따른다)은 매우 심하게 변하는 반면[반대의 면]을 가지고 있지만,  하지만 변화기 쉬운 요소도 역시 겸비하고 있다.  즉, 성격은 환경에 좌우되고, 이 의미로는 후천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더 인간에게는 선천적인 기질이라고 하는 것이 내재되어 이지만, 성격은 연령의 진행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어 온다. 어릴적에는 흙을 가지고 성을 쌓고 있던 사람이 성인이 됨에 따라서 그 흙쌓기를 수습하고, 대정치가가 되거나, 설교가로 되는 예는, 동서양을 불문한다.  반대로 밝고 쾌활[명량]한 아이가 숱한 실패를 거둡하고, 이윽고 음울[침울한]한 무기력[마음이 약한=배짱이 없는]한 어른으로 변하여 갔던 예도 상당히 많은 것이다.  이 외에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침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만들어져 간다.  선천적인 기질은, 대개 전세[전생]이 성격이 금세[이승=이 세상]에 가져오고 있다.  더욱 더 사람에 따라서는 전생의 기질과는 완전히 반대인 성격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저 세상의 생활이 전생의 기질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흔히 오늘날의 심리학에서는 이 기질의 류형을 분열질, 조울질, 전환질, 등으로 나누고 있지만, 이러한 기질이 후천적인 성격과 서로 섞여서, 복잡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さて、反省という止観は、人の性格に合わせてやっていきたいものである。たとえば内気で、非社交的、興奮性の者が反省の仕方を間違えることによって、かえってその内向的性格をますます内向性にしてしまう恐れがある。反対に、陽気で活発で、ユーモアに富み、社交的な人が、反省を怠れば、自己の内面を正しく把握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反省の目的は、心の凹凸を修正し、そうしてそれがひいては健全な肉体をつくると同時に、家庭、友人、職場、隣人との調和をはかることにあるわけである。また反省の功徳は、心の内面にかくされた智慧の宝庫をひもとくカギを握っており、これをひらくことによって、人生の目的がいっそう明らかとなり、人間として生まれてきた生きがいを知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その極点が仏智である。人間は誰しも幸せを求めているはずである。幸せを求めない者は一人もいないと思われる。その幸せとは、円満な人格と、誰からも好かれる自分自身であろうし、しかも、人生の目的を知り、智慧の宝庫をひもといた自分自身ではないだろうか。
  그럼, 반성이라고 하는 지관은, 사람의 성격에 맞춰 행해 주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내성적이며, 비사교적, 흥분성인 사람이 반성의 방식을 잘못하는 것에 의해서, 변해서 그 내향적 성격을 점점 내향성으로 해버릴 우려가 있다.  반대로, 명랑하며 활발하며, 유머가 풍부하며, 사교적인 사람이, 반성을 게을리하면, 자기의 내면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성의 목적[目的]은, 마음의 요철을 수정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나아가서는 건전한 육체를 만듬과 동시에, 가정, 친구, 직장, 이웃과의 조화를 그리는 것에 있는 것이다.  또 반성의 공덕[功徳]은, 마음의 내면에 숨어버린 지혜의 보고를 끄집어내는 열쇠를 쥐고 있고, 이것을 여는 것에 의해서, 인생의 목적을 더욱 뚜렷하게 밝혀지며, 인간으로서 태어나온 삶의 보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극점이 불지[仏智 부처의 지혜]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행복이란, 원만한 인격과, 누구에게라도 좋아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일 것이고, 게다가, 인생의 목적을 알고, 지혜의 보고를 끄집어 낸 자기 자신은 아닌 것일까요.

 

 感情の領域は、こうした円満な人格を形成させるもっともゆるがせにできない分野であり、この領域をうまくこなせる者は、やがて智慧の宝庫をひもとくカギを与えられるといってもいいのである。なぜなら、人格形成にとって感情の領域ほど複雑多岐にからみ合い、これほどその前進をはばむ分野は少ないからである。第一次本能は目的を果たせば終息する。二次本能は一次本能だけで働くものではなく、感情の作用が大きく物をいう。人に使われペコペコするのは嫌だ。人の上に立って号令をかけたい。いいところをみせたい。金が欲しい。金さえあれば面白おかしく世渡りができる。こうした欲望は二次本能と感情がまざり合ってできたものである。さらに感情はねたみ、そねみ、憎しみといった自己保存がもっとも強く働く分野でもある。また感情は人の先天的気質(先天的性格)を内に押しこめ、性格を後天的に変えてしまう働きをも持っている。
  감정의 영역은, 이러한 원만한 인격을 형성시키는 가장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야이며, 이 영역을 제대로 행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지혜의 보고를 끄집어내는 열쇠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 형석에 있어서 감정의 영역만큼 복잡하게 여러 갈래로 얽힌, 이 정도 그 전진을 가로막는 분야는 적기 때문이다.  제 1차 본능은 목적을 완수하면 종식한다.  2차 본능은 1차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작용이 크게 효력·효과가 나타난다.  남에게 고용되어 굽실굽실하는 것은 싫다.  사람 위에 서서 호령을 하고 싶다.  괜찮은 장소를 보고 싶다.  돈을 원한다.  돈마저 있으면 재미있고 우스운 세상살이가 가능하다.  이러한 욕망은 2차적 본능과 감정이 서로 뒤썩여 온 것이다. 더욱더 감정은 질투, 시기, 증오라고 하는 자기 보존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또 감정은 사람의 선천적 기질(선천적 성격)을 마음속에 숨기고 입 밖에 내지 않으며, 성격을 후천적으로 바뀌어 버리는 활동[작용]도 가지고 있다.


 こうした意味で感情の領域ほど反省を重ねることが必要であるし、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その円満さが養われてゆくわげなのだが、前述のように、人にはそれぞれ後天的な性格があるから、自分の性格に合わせた反省の仕方を工夫することが、もっとも望ましいのである。反省するようになってかえって人間が小さくなったのでは反省の意味はない。
  이러한 의미로 감정의 영역만큼 반성을 거듭하는 것이 필요로 하고,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 그 원만함을 길러 갈 것이지만, 앞에서 기술한바와 같아. 사람에게는 저마다 후천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에 합해져서 반성의 방식을 골똘이 궁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바뀌어 인간이 작아지는 것은 반성의 의미는 없다.    page  160~182

 


 

 

[知性 지성]

 

 端的にいって知性の機能は、ものごとの認識であり、判断能力である。換言すれば科学する心でもある。
   단적으로 말해서 지성의 기능은, 사물[세상사]의 인식이며, 판단능력이다.  말을 바꿔서 말하자면 과학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文明の基礎はこの知性による機能によって生み出されてきた。動物の世界は百万年経っても同じ生活が続いている。知性は人間の大きな特徴であり、これの働きなくして私たちの文明はない、と断言してもいい。
  문명의 기초는 이 지성에 의한 기능에 의해서 탄생되어 왔다.  동물의 세계게는 백만년이 경과해도 같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지성은 인간의 큰 특징이며, 이것의 작용하지 않고서 우리들의 문명은 없다, 고 단언해도 좋다.

 

 ある人は人間の知性に絶対の信頼を置き、混乱と争いの人類社会は、やがて秩序と平和をもたらすであろうとみている。みようによってはそうかも知れない。是非そうあって欲しいと願うし、知性に肩入れする識者の希望に私たちも後押ししたいと思う。
  혹은 인간의 지성에 절대의 신뢰를 두고, 혼란과 투쟁의 인류사회는, 머지않아 질서와 평화를 가져오리라고 보고 있다. 보고자하는 것에 의해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이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지성에 가세하는 식자[識者=지식이 깊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의 희망에 우리들도 후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しかし、知性のそうしたそれ自体の単独の機能によって、人類に秩序と平和をもたらすことができるかどうかとなると甚だ疑問であるといわざるを得ないのである。知性そのものは、いわば科学する心であり、したがってこれ自体から、心全体を働かす機能を導き出すことは、どうしても困難であるといわざるを得ないのである。
 하지만, 지성의 그러한 그 자체의 단독의 기능에 의해서, 인류에게 질서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가능할까 어떨까 그렇게 되면 매우 의문이 들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지성 그 자체는, 말하자면 과학하는 마음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부터, 마음 전체를 움직이는 기능을 도출하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하다고 하지 아닐 할 수 없는 것이다. 

 

  鉄道、道路、自動車、ビル、テレビ、飛行機、工場、都市、水道、ガス等々、これらの文明の利器は、とりもなおさず知性の機能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る。人類の生活はたしかに便利にはなったが、文明は一方において多くの弊害を与えている。経済文明の発展は公害を生み出し、自然を破壊して、人間を窒息死させようとしている。
  철도, 도로, 자동차, 빌딩, 텔레비젼, 비행기, 공장, 도시, 수도, 가스 등등, 이러한 문명의 이기[利器]는, 즉 바꾸어 말하면 지성의 기능으로 부터 탄생한 것이다.  인류의 생활은 확실히 편리하게 놓여졌지만, 문명은 한편에 있어서는 많은 폐해를 제공하고 있다.  경제문명의 발전은 공해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고,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질식사시키려고 하고 있다.
 
 知性の機能は、あるものを追究し、掘り下げ、それによって認識を深めることはあっても、人間のもっとも重要な位置を占める愛、慈悲の働き、あるいは全体的な是非判断となると、知性は甚だ不得手になってくる。つまり知性には、ある一つのことを追究する能力はあっても、全体の調和という能力に欠ける面があるわけなのである。したがって、知性の単独の機能によって秩序と平和を願おうとしても、土台無理な要求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지성의 기능은, 어떤 것을 추구, 깊이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서 인식을 깊게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랑, 자비의 작용, 혹은 전체적인 옳고 그름의 판단이 되면, 지성은 매우 서투르게 되어 온다.  즉 지성으로는, 어떤 한가지의 것을 추구하는 능력은 있어도, 전체의 조화라고 하는 능력에 모자라는 면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성의 단독의 기능에 의해서 질서와 평화를 바란다고 해도, 기초적으로 무리한 요구는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公害を防ぐには、もちろん知性の能力を必要とする。しかしこれを防ごうとする働きは知性の分野からではなく、むしろ感情、理性の機能から生まれてくるものである。
  공해를 막는데에는, 물론 지성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것을 막으려하는 작용[일]은 지성의 분야에서는 아니며, 오히려 감정, 이성의 기능으로 부터 태어나오는 것이다.

 

 最近の学生は頭でっかちである。これは試験地獄にも原因があり、家庭や社会の責任でもあろう。が、さらに重大なことは、戦後の教育の在り方が、唯物思想一辺倒の感があり、知性の開発のみに力点をおき、人間のもっとも大事な情操、道徳、精神のあり方を軽視した結果であろうと思われる。東大事件、連合赤軍事件、イスラエルの空港事件は、このことを端的に語っている。彼らの行為には余情というものが感じられない。維新前夜の浪士たち、あるいは終戦間際の特攻隊員には国を思う責任とか義務、プライドというものがあった。目的とその行動には彼らなりの理性が働き、滅(めっ)私の勇気は人の心をうった。ところが、現代の学生気質はいたって自己本位で理論はそれをかばうための方便としてくっつけられている格好である。目的と手段がテンデンバラバラであり、何を求め、どうしようというのか、さっぱりわからない。しかし数学を解かせれば戦前の学生などかなわないであろう。論文を書かせれば理路整然として立派なものを書く。視覚的、現実的能力は確かによいのであるが、心とか、情操、人間性、神の存在ということになると、全くお手上げというのが現状のようである。心理学は単位をとるための勉強であり、歴史は見聞を広げるための知識としかうけとられていないようである。
  최근의 학생은 대갈장군이다. 이것은 시험지옥에도 원인이 있고, 가정이나 사회의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보다 더 중대한 일은, 전후의 교육의 올바른 자세[본연의 모습]가, 유물사상 일변도의 느낌이 있고, 지성의 개발만으로 역점을 두고, 인간의 가장 중대사한 정조[情操=(가치 판단의 기초가 되는) 인간이 지닌 가장 높고 복잡한 감정. 정서], 도덕, 정신의 올바른 자세[본연의 모습]를 경시한 결과일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동경대의 사건, 연합적군 사건, 이스라엘의 공항사건은, 이 일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들의 행위에는 여운이라고 하는 것을 느껴지지 않는다.  유신 전야의 낭사들, 혹은 종전 직전의 특정대원에게는 나라를 생각하는 책임[責任]이라든지 의무[義務], 프라이드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목적과 그 행동에는 그 사람들과 같은 이성이 활동[작용],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하여 힘쓰는 용기는 사람의 마음을 두르렸다.  그런데, 현대의 학생 기질은 대단히 자기본위이며 이론은 그것을 감싸기 위한[비호하기 위한, 두둔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서 들이대고 있는 모습이다.  목적과 수단을 각자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으며, 무엇을 구하고,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후련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수학을 풀려고 하면 전쟁 전의 학생 등은 못 당할 것이다.  논문을 쓰라고 하면 이로가 정연하게(논리가 정연해서) 훌륭한 것을 쓴다.  시각적, 현실적 능력은 확실히 괜찮은 것이지만, 마음이라든가, 정조[情操=(가치 판단의 기초가 되는) 인간이 지닌 가장 높고 복잡한 감정. 정서],  인간성, 신의 존재라고 하게 되면, 완전히 두손을 들어버린다고 하는 것이 현상인것 같다. 심리학은 단위를 잡기위한 공부이며, 역사는 견문을 넓히기 위한 지식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 듯 하다.

 

 天才教育や才能教育こうした片寄った人間像を生み出し、世情をますます混乱と不安に巻き込んでゆく。
  천재교육이나 재능교육은 이러한 치우친 인간상을 창출해 내고, 세정[世情=세상의 사정이나 형편. 또는 세상 사람들의 인심]을 점점 더 혼란과 불안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知性が重要視され、才能のある者を社会が要求してくると、人間社会は次第にコンピューター化され、冷血人間がふえてくる。冷血人間がふえれば、愛とか情などというものは機械では裁断できないので、人間は物を生産するための一つの道具と化し、感情の交流、不合理の理が分からなくなり、孤独やエゴが横行するようになるだろう。こうなると、人間は、人間のために創り出した文明に、自らが縛られ、文明の奴隷となってゆく。さらに目的のためには手段を選ばなくなり、かつてのヒットラーやスターリンのような奇怪な人間ができるようになってくるだろう。
  지성이 중요시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사회가 요구해 온다면, 인간사회는 차례로 컴퓨터화 되고, 냉혈인간이 늘어난다.  냉혈인간이 증가하면, 사랑이라든가 정[情]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로는 재단할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바뀌고, 감정의 교류, 불합리의 이치를 모르게 되어, 고독이나 이기심이 횡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인간을 위해 창출해 낸 문명에, 스스로가 속박되어, 문명의 노예로 되어 간다. 더욱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되어, 일찍이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기괴한 인간이 새로 생겨나올 것이다.

 

 現代の人類にとって、頭痛の種はなんといってもこの知性の機能であると思われる。
  현대의 인류에 있어서, 두통의 씨앗은 뭐라고 해도 이 지성의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工場の生産形態がおいおいコンピューター化され、人の働く場が失われつつある。このため、人間の主体制と生産との関係をどう理解したらいいか模索する時代に突入してきている。
  공장 생산 형태가 차츰차츰 컴퓨터화 되고, 사람의 작업장이 없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주제체와 생산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모색하는 시대가 돌입해 오고 있다.

 

 学問や行政機関にしても次第にセクト化され、自派の立場を容認しないものは容赦なく排斥する自己主張にこり固まっている。学問の分極化、専門化はそのまま社会の分業化、専門化に拍車を加えている。なにが善でなにが悪かということよりも、発明とか発見に人々の関心(かんしん)が集中し利益と享楽、自己保存とセクショナリズムが人生の目的であるかのようになってきている。
  학문이나 행정기관이라고 해도 차례로 sect화 되고[파벌이 되고], 자파의 입장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않고 배척하는 자기주장에 푹 빠져 버리고 있다. 학문의 분극화[分極化=서로 대립되는 두 입장으로 갈라지거나 가름], 전문화는 그대로 사회의 분업화, 전문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라고 하는 것 보다도, 발명이라든가 발견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하고, 이익과 향략, 자기보존과 섹셔널리즘[sectionalism 분파주의. 파벌주의]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되어 오고 있다.

 

 一方において殺人兵器の開発はとどまるところを知らない。原子爆弾、殺人光線等々。また工場の廃液、モーターリゼーションの普及による大気汚染、孤独とエゴ、闘争とゲバ。右を向いても、左を見ても、安らぎなど見当らない。
  한편에 있어서의 살인병기의 개발은 멈출줄을 모른다.  원자폭탄, 살인광선 등 등.  또한 공장의 폐액[廃液=폐수], motorization[자동차의 대중화 현상]의 보급에 의한 대기오염, 고독과 이기심, 투쟁과 게바[독 Gewalt==ゲバ.《위력·폭력의 뜻》 국가 권력에 대한 실력 투쟁]. 오른쪽을 향해도, 왼쪽을 보아도, 편온함 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いったいなにがそうさせるのであろうか。いうまでもなく、人間の知がこれらを生み出してきたのである。もちろん、こればかりではない。人間の意、つまり本能にまつわる欲望と好き嫌いの感情が知性をそそのかし、知性の機能を突っ走らせたことにその原因がある。そのために、今日ではその知性にたずなをひきたくとも、知性には理屈という宝刀があるから、いうことをなかなかきかない。あれよあれよという間に、文明は先へ先へと進んでおり、人間はこれに追いかけまわされているというのが現状である。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인간의 지성이 이들을 창출해 내어 온 것이다.  물론, 이 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意], 즉 본능에 달라붙은 욕망과 차별[=좋아함과 싫어함]의 감정이 지성을 꼬드기고, 지성의 기능을 질주하게 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  그 때문에, 오늘에는 그 지성에 고삐를 잡으려해도, 지성으로는 이치[그럴 듯한 논리]라고 하는 보도[宝刀=수단]가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을 좀처럼 잘 듣지 않는다.  어리둥절해서 아니 저런 저런 하는 사이에, 문명은 앞으로 앞으로 라고 진행해 가고 있고, 인간은 그것을 뒤쫓아가며 회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현상이다. 

 

 私たちはこれまで人間の知能というものは、脳の働きによると考えてきた。大脳生理学はさまざまな方向から、大脳と知能について研究されている。そうして俗に脳は大きく重いほど知能がすぐれているともいわれている。日本人の平均的脳の重さは、男で一三五〇~一四〇〇グラム、女では一二〇〇~一二五〇グラムであるとされている。このため、知能の点では女は男より劣るとみてしまうようである。著名人の死亡時の脳の重さをみると、ナポレオン三世が一五〇〇グラム、ビスマルク一八〇七グラム、カント一六五〇グラム、桂太郎一六〇〇グラム、夏目漱石一四二五グラム、内村鑑三が一四七〇グラムだ。日本人の平均的脳の重さからみると、こうした著名人のそれははるかに重い。ところがブンゼンという化学者は一二九五グラム、文学者のアナトール・フランスは一〇一七グラムであり、平均値よりずっと軽い。知能が脳の重さに比例するとすれば七〇〇〇グラムのクジラや四〇〇〇グラムの象の方が、人間より数倍優れ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ところが事実はまったく逆である。
  우리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지능이라고 하는 것은, 뇌의 작용에 의한다고 생각해 왔다.  대뇌생리학은 다양한 방향에서, 대뇌와 지능에 대해서 연구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속담에 뇌는 크고 무거울수록 지능이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의 평균적 뇌의 무게는, 남자는 1350~1400그램, 여자는 1200~1250그램이라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지능의 점에서는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봐 버리는 것 같다.  저명한 사람이 사망시의 뇌의 무게를 보면, 나폴레옹 3세가 1500그램, 비스마르크 1807그램, 칸트[カント??]  1650그램, 카즈라 타로우[桂太郎] 1600그램, 나쯔메 소우세키[夏目漱石] 1425그램, 우찌무라 칸죠우[内村鑑三] 1470그램이다.  일본인의 평균적 뇌의 무게에서 보면, 이러한 저명인의 뇌는 훨씬 더 무겁다.  그런데 로버트 윌리암 분젠(Robert Wilhelm Bunsen)이라고 하는 화학자는 1295그램, 문학자인 애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1017그램이며, 평균치보다 훨씬 가볍다.  지능이 뇌의 무게에 비례한다고 하면 7000그램의 고래나 4000그램의 코끼리의 쪽이, 인간 보다 수배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반대이다.

 

 また人間の脳の成長期は男は二〇才、女は一七・八才までといわれている。したがって脳の働きを物理的に考えるならば、この年令時がいちばん柔軟で、大抵のことは消化し得る、いわば知能のピーク時とみられるであろう。ところがどうだろう。韓国のキム少年はわずか七、八才で微分積分など高等数学を解いている。大学生でも解けないものをこの天才児はアッという間に解いてしまうのである。脳の発達過程と、こうした天才(てんさい)といわれる少年の脳の働きの関係をどう説明したらいいのか。物理的な脳の発達や成長だけでは割り切れない何かがあるといえるだろう。
  또한 인간의 뇌의 성장기는 남자는 20세, 여자는 17・8세까지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뇌의 작용을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 연령기가 가장 유연하며, 대부분의 일을 소화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능의 peak[정점, 최고조, 절정]의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떨까요.  한국의 김소년은 겨우 7, 8세에 미분적분 등 고등수학을 풀어내고 있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풀 수 없는 것을 이 천재아는 아! 하는 사이에 풀어 버리는 것이다. 
뇌의 발달과정과, 이러한 천재라고 불리우는 소년의 뇌의 작용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 것일까.  물리적인 뇌의 발달이나 성장만으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また脳そのものが知能や感情、記憶をつかさどるとすれば、就眠時のそれをどう説明するかである。心臓や肝臓は動いているが、聴覚、視覚、臭覚神経などは全然(ぜんぜん)きかない。目がさめて、はじめてこうした感覚がよみがえり、記憶も息を吹き返すのである。
  또한 뇌 그 자체가 지능이나 감정, 기억을 담당한다고 하면, 취침시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것이다.  심장이나 간장은 움직이고 있지만, 청각, 시각, 취각신경 등은 전연 듣지 않는다.  잠이 깨어, 비로서 이러한 감각이 되살아 나고, 기억도 되살아나고 냄새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脳の働きは、五体を維持するための中枢機能であることにちがいはないが、脳細胞そのものに、私たちの意識があるわけではないといえる。私たちの意識は脳細胞とは別に、同じような姿で、もう一人の自分が、脳の機関を通して、働きかけているのである。つまり、肉体のほかに光子体という意識体があって、肉体と意識体の間を霊子線、脳神経(しんけい)を通(とお)して、連絡し合っているわけである。
  뇌의 작용[활동]은, 오체를 유지하기 위한 중추기능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뇌세포 그 자체에, 우리들의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의 의식은 뇌세포와는 별개로, 같은 모습이며, 또 한 사람의 자신이, 뇌의 기관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의 외부에 광자체[光子体]라고 하는 의식체[意識体]가 있고, 육체와 의식체의 사이를 영자선[霊子線], 뇌신경을 통해서, 서로 연결하고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であるから意識体である光子体と脳神経の連絡が極めてスムーズに、しかも光子体の奥(潜在意識)に連絡できるようになると、脳の重さや脳の成長に関係なく、キム少年のような天才的な機能が可能になってくるのである。
  그렇기 때문에 의식체인 광자체와 뇌신경의 연결이 극히 원활하게, 게다가 광자체의 깊은 곳(잠재의식)에 연결할 수 있게 되면, 뇌의 무게나 뇌의 성장에 관계없이, 김 소년과 같은 천재적인 기능이 가능하게 되어 오는 것이다.

 

 人の心がわかったり、予知能力、あるいは天才的能力というものは、現世で学んで得たものは少なく、過去世やあの世で学んだ潜在意識に、表面意識が同通することによって生まれるものである。そうしてこうした能力は、人間誰しも内在されており、その能力が自由にひき出せるようになれば、現世を、不安と混乱に巻き込んでいる現実的知能にふりまわされている知性の独走を防ぐことができるわけである。
  사람의 마음을 안다거나, 예지능력, 혹은 천재적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현세에서 배워서 얻은 것은 적고, 과거세나  저 세상에서 배운 잠재의식에, 표면의식이 동통하는 것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능력은, 인간 누구나 내재되어 있고, 그 능력을 자유롭게 끌어내게 되면, 현세를,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들어가고 있는 현실적 지능에 휘둘리고 있는 지성의 독주를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学問的に非常にすぐれた人たちが集まる階層が、あの世にはある。学者、科学者グループによる集団である。この世界の人びとは、ある一つの事柄を徹底的に追究してゆく人たちである。他のことはあまり考えない。またそうでなければ研究もできないだろう。
  학문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사람들이 집합하는 계층이, 저 세상에는 있다.  학자, 과학자 그룹에 의한 집단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어떤 하나의 사항을 철저히 추구해 가는 사람들이다.  다른 일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지 않으면 연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あの世での研究なら、あまり問題はおこらない。研究成果の使用は、人間生活全体を考えて行なわれるからである。ところが現世は欲望の世界である。社会主義も資本主義も、その根本は人間の欲望をふまえて成立している。このため、科学者が、自己の本意でなくとも、その研究成果が戦争の道具に使われたり、企業の利益に参加するようになると、文明の反作用は、もっとも顕著になってくるわけである。
  저 세상에서 연구하면, 그다지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연구성과의 사용은, 인간생활 전체를 진지하게 생각해서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세는 욕망의 세계이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그 근본은 인간의 욕망을 힘껏 밟고 성립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과학자가, 자기의 본의가 아닐지라도, 그 연구성과가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기업의 이익에 참가하게 되면, 문명의 반작용은, 훨씬 현저하게 되어 오는 것이다.

 

 今日の文明社会は、こうした学者や科学者の企業参加によって、自然破壊という結果を招来しつつある。学問や科学は人間生活をより豊かにするための基礎で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だ。欲望を満足させるための豊かさを求めてきているところに、今日、いろいろな問題が提起されてきているわけである。
 오늘의 문명 사회는, 이러한 학자나 과학자의 기업참여에 의해서, 자연 파괴라고 하는 결과를 계속해서 초래하고 있다.  학문이나 과학은 인간 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한 기초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욕망을 총족시키기 위한 풍요로움을 구해 오고 있는 것으로 인해, 오늘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재기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人間の知性、その知性を働かせているこれら学者や科学者にたいして、その働きを放棄させたり、研究をとめさせたりすることはできない。むしろ、その長所をのばしてもらうべく、第三者はつとめるべきである。
  인간의 지성, 그 지성을 작용시키고 있는 이들의 학자나 과학자에 대해서, 그 작용을 방치하거나, 연구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장소를 늘려주어야 하며, 제 삼자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問題の在り方は、私たちの知性というものが、感情や理性、あるいは本能というものから離れて、単独行動をとったときには、とりかえしのつかない破局を招くであろうということである。SF小説は未来社会を予測して、人類の終末や科学社会のさまざまな弊害なり矛盾を書いている。少なくとも私たちが住む現実的未来社会は、そうした科学というものが、人間生活の基礎として、成り立っていなければならぬと思うものである。
  문제의 올바른 자세[본연의 모습]은, 우리들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감정이나 이성, 혹은 본능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떨어져서], 단독 행동을 취했을 때에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SF소설은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인류의 종말이나 과학사회의 폐해와 같은 모순을 쓰고 있다.  적어도 우리들이 주거하는 현실적 미래사회는, 그러한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생활의 기초로 해서, 성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文学者や芸術家の中には、自殺をする人が、かなり多いようであるが、本来その作品と、人となりとは同一線上にあることが理想と思われるし、そうあらねばならないと思う。何故なら、芸術の目的は、自然の美や人間の真実(人間神の子の真実)を追究し、それを、画布に、旋律に、文字に、客観的に表わしてゆくものだと思うからである。それだけに、真の芸術家は、物を見る、考える、思うことが、正しくなされていなければ成立しないし、その高まりは、神の子の自覚にまで発展し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である。
  문학자나 예술가 중에는, 자살을 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지만, 본래 그 작품과, 사람과는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 이상[理想=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술의 목적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진실(인간은 신의 자녀인 진실=人間神の子の真実)을 추구하고, 그것을, 화포[캔버스]로, 선율로, 문자로, 객관적으로 표현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참된 예술가는, 물질을 본다, 진지하게 생각한다,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고, 그 고조[높아짐]은, 신의 자녀의 자각으로 까지 발전해 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ところが今日の現状そうではなく、いわゆる、職人芸術という小手先器用の技術屋が歓迎され、独りよがりの、人の意表を衝くものが受け入れられているようである。
  그런데 오늘의 현상은 그렇지 않고, 흔히 말하는, 직인예술[職人芸術=직인예술]이라고 하는 손재주가 좋은 기술자[장인(匠人)] 환영을 받고, 독선적인, 남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これは才能と人格を同一視する傾向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り、欲望からくる感覚美しか受け入れられないところに問題があるようだ。ともかく、芸術と人格というものは本来一線上を歩くものであろうし、またそうした芸術が迎えられる環境づくりがな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것은 재능과 인견을 동일시 하는 경향에서 탄생한 것이며, 욕망으로 부터 오는 감각미 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은 것 같다.  어쨌든 간에, 예술과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일선상을 걸어가는 것일 것이고, 또한 그러한 예술을 환영하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まず仏智とか大知識というものは、どこから生ずるのであろう。仏智は神の意識につながって、初めてその光を現わすわけである。正法は体験を基礎としており、学問や哲学から仏智を求めようとしても、得ることはできない。
  우선 불지[仏智]라든가 대지식[大知識]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돋아나는 것일까.  불지는 신의 의식에 연결되어, 비로서 그 빛을 드려내는 것이다.  정법은 체험을 기초로 하고 있고, 학문이나 철학에서 불지를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私たちの心が、大宇宙が丸く、太陽が丸(まる)く、地球が円型であるように、まるく大きなひろがりを持っていることは事実なのである。大宇宙の姿と人間の本質に相違があっては、正法ではないからである。心の中には知性、本能、感情、理性といったものがあって、それらが相互に関連し合いながら、想念と行為がなされるならば、私たちの心は、大自然と同じように、丸く大きくなっているはずである。ところが、知性だけが他の機能と離れて、特別に働いているとすれば、丸い心は変形してくるであろう。どんな理屈を吐いたとしても、破壊や無益な殺生、自殺とか独善がよいはずはない。万生万物は、中道という調和を目的として生かされ、生きているからである。
   우리들의 마음이, 대우주가 둥글고, 태양이 둥글고, 지구가 원형인 것처럼, 둥글고 큰 확대[전개, 넓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대우주의 모습과 인간의 본질에 서로 다름이 있어서는, 정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는 지성, 본능, 감정,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들이 상호 관련하고 일치하면서, 상념과 행위를 행하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은, 대자연과 마찬가지로, 둥글고 크게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성만이 다른 기능과 떨어져서, 특별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면, 둥근 마음은 변형해 올 것이다. 어떤 이치를 토해낸다고 해도, 파괴나 무익한 살생, 자살이라든가 독선이 유익할 수는 없다.  만생만물, 중도[中道]라고 하는 조화를 목적으로 해서 살리우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ここで調和について考えてみると、調和には高低がある。調和の極点は宇宙即我であり、低次元は自我我欲である。自我我欲は調和(ちょうわ)とはいえないが、自我我欲におぼれる者は、それが調和(ちょうわ)とみているかも知れない。現実の想念、行為は、客観的に(きゃくかんてき)善い事だと知りながらも、自分の都合で是非判断を下している場合が多いからである。そこで、調和であるかないかの一線(いっせん)は、自分の欲得のみで知性が動いているかどうか。物(もの)の効用のみに執心し、物の成り立ちを忘れていないかどうか。たとえば、心臓移植は医学の進歩に欠かせないが、殺人を犯してまでその成功)を求めていやしないかどうか。目的と手段がバランスを欠くようでは調和にはならない。しかし一方において、自分では調和だと思いながら、無意識のうちに、自己保存で知性を動かしていることもある。またたちの住む世界は欲望の世界(かい)であるし、社会制度も、これに準じて決められている。したがって、妥協を無視しては、かえって面倒になる場合がある。社会生活は複雑である。このために私たちはまず自分の足下から、できることから一つ一つ調和をめざしてつとめてゆくことである。それには、そうした努力と勇気と智慧というものが必要だろう。私たちが調和を目的として働いていると  きは知性が智慧として湧いてくるものである。
  여기에서 조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조화에는 고저가 있다.  조화의 극점은 우주즉아[宇宙即我=우주가 곧 자기 자신]이며, 낮은 차원은 자아아욕[自我我欲]이다.  자아아욕은 조화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자아아욕에 빠지는 사람은, 그것이 조화라고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상념, 행위는, 객관적으로 선한 일[좋은 것]이라고 알지라도, 자신의 형편으로 시비판단을 내리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화일까 아닐까의 분명한 구분은, 자신의 이해타산만으로 지성이 움직이고 있는가 어떤가.  물질[사물]의 효용만에 집착하고, 물질의 성립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어떤가.  예를 들면, 심장이식은 의학의 진보에 모자람이 없지만, 살인을 범하기 까지 해서 성공을 찾고 치유할까 어떨까. 목적과 수단이 균형을 깨뜨려서는 조화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에 있어서, 자기 자신은 조화라고 생각하면서, 무의식 속에, 자기보존으로 지성을 움직이고 있는 일도 있다.  또한 우리들의 주거하는 셰계는 욕망의 세계이고, 사회제도도, 이것에 준해서 결정되고 있다.  따라서, 타협을 무시해서는, 도리어 귀찮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회생활은 복잡하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우선 자신의 발 차래에서, 가능한 일에서 부터 하나 하나 조화를 목표로 해서 노력해 가는 일이다.  그것에는, 그러한 노력과 용기와 지혜라고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들이 조화를 목적으로 해서 작용하고 있을 때는 지성이 지혜로 해서 용솟음쳐 나오는 것이다.


 調和を目的として知性が働くとき、守護・指導霊の導きがある。これは何も知性だけではない。感情、本能、理性についても勿論のことである。あることについて追究し求めていると、私たちはしばしばヒラメキや直感というものが働く。また、まったく関係のない事柄がアッという間に結びつき、成功につながる経験を誰しも持っていよう。
  조화를 목적으로 해서 지성이 작용할 때, 수호・지도령의 인도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성뿐만이 아니다. 감정, 본능, 이성에 대해서도 물론인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 추구하고 구하고 있으면, 우리들은 자주 번뜩임이나 직감이라고 하는 것이 작용한다.  또한, 전혀 관계가 없는 사정[형편]이 아! 하는 사이에 연결[결합]하고,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これらの作用は、もちろん本人の努力の結果であるが、しかしその努力にたいする守護・指導霊の示唆があるからなのだ。自ら努力しないでタナボタ式に何かを求めようとしても、こうした作用は働かない。だいいち知性を通して知識という縁が結ばれていないので、智慧も湧いてこないわけである。前世で学んだものは今世でも何らかの形で同じものを学ぶ機会があるものだ。だから、今世でそうした縁をつくると、本人の心のひろがりに応じて知識が智慧と化してゆく。
  이들의 작용은, 물론 본인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그렇지만 그 노력에 대한 수호・지도령의 시사[示唆=귀띰, 암시(暗示)]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뜻밖의 행운식으로 무엇인가를 구하려 해도, 이러한 작용은 작용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지성을 통해서 지식이라고 하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 것으로써, 지혜도 솟아나오지 않는 것이다.  전세에서 배운 것은 금생이라 해도 어떠한 형태로 같은 것을 익힐 기회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금생에서 그러한 인연을 만들면, 본인의 마음의 넓이[확대]에 응해서 지식이 지혜로 바뀌어 간다.

 

 昔から、一をきいて十を知る、ということわざがあるが、これは一という縁が十の知識のひろがりとなることをいったものであり、それには物事の追究と同時に、調和という本来の在り方にそった生き方をしているならば、守護・指導霊の応援が得られ智慧として湧いてくるのである。
  옛날부터, 하나를 들으면 10을 안다, 고 하는 속담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라고 하는 인연이 10의 지식의 확대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것에는 사물[세상사]의 추구와 같을 때에, 조화라고 하는 본래의 본연의 모습[올바른 자세]에 따른 삶의 방식을 하고 있다면, 수호・지도령의 응원을 얻어 지헤로서 솟아 나오는 것이다.
 
 知識と智慧というものは同質のものではない。知識は外的なものであり、智慧はその外的な知識が心の中で濾過され、体験という努力を通して現われてくるものである。この点を間違え、知識の吸収がそのまま智慧になると考えてはならない。
  지식과 지혜라고 하는 것은 동질의 것은 아니다.  지식은 외적인 것이며, 지혜는 그 외적인 지식이 마음속에서 여과되어, 체험이라고 하는 노력을 통새서 드러나오는 것이다.  그 점을 잘못하여, 지식의 흡수가 그대로 지혜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また、慈悲の心で人に接するときには、自分でも想像もつかないような智慧が湧いて くる。これは霊道が開いている、いないにかかわらず、要は本人の心次第であり、神は愛の手をさしのべてくれるということである。
  또한, 자비의 마음으로 남에게 대접할 때에는, 스스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지혜가 솟아 나온다.  이것은 영도가 열리어 있다, 열리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부분은 본인의 마음먹기[마음가짐]이며, 신은 사랑의 손길을 뻗쳐 온다고 하는 것이다.

 

 知性が他の心の機能から離れて単独に働く場合は、どんなに見事な発明発見でも弊害が出てくるだろう。しかし、心の円満さを心がけ、中道に適う努力を重ねるならば、くめどもつきない智慧が湧いてきて人類の平和に大きな貢献をするであろう。
  지성이 다른 마음의 기능에서 벗어나서[떨어져서] 단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아무리 훌륭한[뛰어난] 발명 발견이라 해도 폐해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원만함을 노력하고, 중도에 들어맞는 노력을 거듭하면, 끊임없는 지혜가 솟아나와 인류의 평화에 큰 공헌을 할 것이다.

 

「冷やかな頭で新しい事を口にするよりも、熱した舌で平凡な説を述べる方が生きている・・・・・・」
「싸늘한 머리로 새로운 것을 입에 올리는 것 보다도, 뜨거워진 혀로 평범한 이야기를 말하는 쪽이 살아 있다・・・・・・」

 

 これは夏目漱石の「こころ」という小説の一節である。
  이것은 나쯔메 소우세키[夏目漱石]의 「마음」이라고 하는 소설의 일절이다.

 

 私たちは、ややもすると、このことを忘れ、才能のある者、天才や人の真似のできない奇人に憧憬の念を抱きたくなるものであるが、それよりもまず、熱した舌で平凡な説が述べられるような、心の広がりを持ちたいものである。
 우리들은, 흔히,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재능의 있는 사람, 천재나 남의 흉내를 할 수 없는 기인을 동경하는 염원을 품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 보다 먼저, 뜨거워진 혀로 평범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과 같은, 마음의 넓이[확대]를 지니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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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性 이성]

 

 これまで本能、感情、知性について述べてきたので、意志を見る前に理性について見て行きたいと思う。  
   지금까지 본능, 감정, 지성에 대해서 말해온 것으로써, 의지를 보기 전에 이성에 대해서 보려 가보고 싶습니다.

 

 まず理性の概念から考えてみよう。
 辞書を調べると、理性とは「物事を道理によって判断する能力」としている。まさにそのものズバリの解釈である。
 
 우선 이성의 개념부터 생각해 봅시다.
  사전을 조사하면, 이성이란 「사물[세상사]의 도리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하고 있다.  사물의 핵심을 정확히, 단도직입으로 지적한 해석이다.

 

 理性の機能は、総合力がその特徴であり、総合された能力は、幾多の経験の上に積みあげられて発揮されるものである。経験は道理という尺度を生む。さらに毎日の経験は、より一層高度の道理へと進んでいくものである。
  이성의 기능은, 종합력이 그 특징이며, 종합된 능력은, 숱한 경험 위에 쌓아 올아 올려져서 발휘되는 것이다. 경험은 도리라고 하는 척도를 낳는다. 더욱 더 매일의 경험은, 보다 한층 고도의 도리[道理]로 진행해 가는 것이다.

 

 であるから、経験の乏しい子供の判断と多くの人生経験を踏んできた老人のそれとは比較にならないファクターのちがいをみ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그러므로, 경험의 부조한 아이들의 판단과 숱한 인생의 경험을 쌓아 온 노인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factor[요소]의 차이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もちろん、べんべんと年を重ねた老人もあるだろう。天才的ヒラメキを持つ少年もいる。したがって一概に年令だけで是非判断は下せないが、最大公約数で考えるならば、子供と老人では比較にならない相違をみることができよう。
  물론, 헛되이 나날을 보내고 나이를 먹은 노인도 있을 것이다.  천재적 번뜩임을 지니는 소년도 있다. 따라서 한 마디로 연령만으로 시비판단은 내릴 수 없지만, 최대공약수로 생각하면, 아이들과 노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차이를 볼 수가 있겠지요.

 

 ここで大事なことは、理性は経験という土壌を母体としながらも、反省によって、その機能)がより大きく豊かに育まれる、ということである。反省と経験はいわば相互関係にあって、両者はたがいに相補いながら理性の機能を、より一層たしかなものにしてゆくものである。
  여기에서 중대사한 것은, 이성은 경험이라고 하는 토양을 모체로 하면서도, 반성에 의한, 그 기능이 보다 크게 풍요롭게 성장된다고, 하는 것이다.  반성과 경험은 말하자면 상호관계에 있고, 양자는 서로 메우고 서로 도우면서 이성의 기능을, 보다 한 층 확실한 것으로 해 가는 것이다.

 

 それでは理性は、現実的に、どういう場合に働くのだろう。
 たとえば「怒り」についてみると、怒りを発すると相手の感情を刺激するばかりか、自分の気分まで悪くしてしまう。心臓をドキドキさせた怒りは、血液の血行を悪くし、ものを食べても消化が悪い。自分の肉体にとっても、気分にしても、そして人にも悪影響を及ぼすとなれば、「怒り」の損得勘定はプラスになるものが一つもない。ならば、怒ることはやめにしよう、と考えるのが理性の働きである。しかし、人間にはそれぞれ持って生まれた気質なり、後天的な性格がある。気質の転換は時間を要するにしても、生活環境によってつくられた第二の個性、いうなれば性格は、本人次第で変えることができる。短気でなかった者が、人の上に立ち、人生が思うようになってくると、思うようにならないとわがままが出てつい気短になり「怒り」が習性になってしまう。こういう人は「怒り」は損得勘定で損だとわかっていても、「怒り」の感情を修正することがむずかしいものである。しかし「怒り」の感情を修正しないことには、心の平安はいつになっても得られない。そこで「怒り」の原因はどこにあり、何がそうさせるのだろう、と堀り下げて行くのが、これまた理性の働きなのである。
  그러면 이성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경우에 작용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분노」에 대해서 보면, 화를 내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분까지도 나빠져 버린다.  심장을 두근두근케 하는 분노는, 혈액의 혈행을 나쁘게 하고, 무엇을 먹어도 소화를 불량하게 한다. 자신의 육체에 있어서도, 기분이라 해도, 그리고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고 하면,「분노」의 손득감정은 플러스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다면, 화를 내는 것은 그만두려고 하자,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의 작용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각자가 갖고 태어난 기질, 후천적으로 성격이 있다. 기질의 전환은 시간을 요한다고 해도, 생활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두 번째의 개성, 말하자면 성격은, 차차 바꿀 수가 있다. 성급한 성격이 아니었던 사람이, 남의 위에 서서, 인생을 생각하게 되면, 생각처럼 안 된다면 남의 생각은 않고 제 주장만 하는 사람[제멋대로 구는 (방자한) 사람]이 나아서 마침내 성질이 급하게 되어 「분노」가 습관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람은 「분노」는 손득감정으로 손해라고 알고 있어도, 「분노」이 감정을 수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분노」이 감정을 수정하지 않는 것에는, 마음의 평안은 언제까지나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분노」의 원인은 어디에 있고,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일까, 라고 속을 파내려 가는 것이, 그 역시 이성의 작용인 것이다.

 

 経験を土台にして、道理に適った心の修正を求めて行くのが理性の機能なのである。
  경험을 토대로 해서, 도리에 들어맞는 마음의 수정을 구해 가는 것이 이성의 기능인 것이다.

 

 理性が洗練されてくると、予想される事態に対して、「待った」をかけたり「促進」したりするようになる。
   이성이 세련되어 오면, 예상되는 사태에 대해서, 「일이 진행을 중지」중지하거나 「촉진」하거나 하게 된다.

 

 これこれのことはやってもよい。
 これこれのことはやってはいけない。
 というように、自分の行動に対して、ブレーキの役目をしたり、促進したりする。
  이러이러한 일은 해도 좋다.
  이러이러한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제동의 담당[역할]을 하거나, 촉진하거나 한다.

 

 ある指導霊が、「心の制御装置」という表現を使っていたが、「心の制御装置」とは私たちの心に内在しているところの「理性」であったわけである。
  어느 지도령이, 「마음의 제어장치」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마음의 제어장치」란 우리들의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것인 「이성」이었던 것이다.

 

 理性というものは、行動に移す意志を固める前の働きとして、非常に重要な役目を担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를 굳히기 전의 작용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理性の機能は経験と反省によって強化されてくるわけだが、このことは心の内面から見ると、本能(ほんのう)、感情、知性、意志といった相互の働きを通して育まれてくるといえる。もともと、理性の機能は、人間である以上先天的に備わっているものであり、他の動物とはハッキリ区別することができる。しかし、子供から大人に成長するにしたがって、理性の働きは、一層顕著になってくるものであり、この意味では、本能、感情、知性といったものに比べると、ズッと後になって動き出してくるといえる。
  이성의 기능은 경험과 반성에 의해서 당연히 강화되어 오지만, 이 것은 마음의 내면에서 보면, 본능, 감정, 지성, 의지라고 하는 상호의 작용을 통해서 성장되어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이성의 기능은, 인간인 이상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며, 다른 동물과는 확실하게 구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이성의 작용은, 한층 현저하게 되어 오는 것이며, 이 의미로는, 본능, 감정, 지성이라고 하는 것에 비교하면, 훨씬 나중에 이루어 움직여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ちょうど、大脳の発育が旧皮質、古皮質、新皮質という順序を経て終るように、理性の機能は新皮質が出来上がってから十分な活動をはじめるといってもいいだろう。
   정확히, 대뇌의 발육이 구피질, 고피질, 신피질이라고 하는 순서를 거쳐서 끝나는 것처럼, 이성의 기능은 신피질이 완성되고 나서 충분한 활동을 시작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理性は経験を土台としているだけに、経験が乏しいと、理性の働く範囲も自然と小さくなってくることは否めない。こういう比較は一部から異論が出るかも知)れないが、男子と女子とではその経験の成り立ちがちがってくるために、女性は男性よりも、この点では一歩ゆずることになるようである。理性は経験と同時に、全体的な面から判断を下して行く能力であるから、経験する範囲が多様化するほど理性を培う下地が多くできるからである。
  이성은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는 만큼, 경험이 부족하면, 이성의 활동범위도 자연히 적어진다고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비교는 일부에서 이론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남자와 여자에게서는 그 경험의 성립이 다르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도, 이 점에서는 한 발 양보하게 되는 것 같다. 이성은 경험과 동시에, 전체적인 면에서 판단을 내려 가는 능력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범위가 다양화할수록 이성을 소중히 기르는 소양[본래의 성질, 소질]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さて、理性は経験を土台にはしているが、人間の魂は、この世だけではなく、あの世があり、過去世があってこの世に在るわけだから、この世の経験だけで人それぞれの理性の度合いを判断することはできない。ここに、唯物論的な学問に限界があるといえるし、心の機能の是非判断がおいそれとは下せない悩みがあるわけである。
  그럼, 이성은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이 있고, 과거세가 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경험만으로 사람 각자의 이성의 형편[사정]을 판단할 수는 없다.  여기에, 유물론적인 학문에 한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마음의 기능의 시비판단을 그렇게 간단히는 내릴 수 없는 고민이 있는 것이다.

 

 理性は経験という人生の様々な体験の上に養われる心の機(き)能であるが、しかしこの世だけの経験で、人の理性を推し計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のが、その特徴の一つといえよう。
  이성은 경험이라고 하는 인생의 다양한 체험 위에 길러지는[양육되는] 마음의 기능이지만, 하지만 이 세상만의 경험으로, 사람의 이성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그 특징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すなわちあの世の経験、いうなれば過去世に学んだ経験によって、人それぞれの理性の働きがちがってくるということである。
  즉 저 세상의 경험, 말하자면 과거세에 배운 경험에 의해서, 사람 각자의 이성의 작용이 달라져 온다고 하는 것이다.

 

 小学校、中学、高校、大学と進み、同じ職場に働き、社会人になったとしても、ものの判断がそれぞれちがうことは、誰しも経験するところであろう。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고, 같은 직장에 일하고, 사회인의 되었다고 해도, 사물의 판단이 각자 다른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同じ精子と卵子が結合して生まれた我が子でありながら、兄弟姉妹の個性が皆ちがう。
時代や環境、親の年齢にも影響されるであろうが、それだけでは律し切れない何かがあるようである。
 같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태어난 내 자식이면서, 형제자매의 개성이 모두 다르다.  시대나 환경, 부모의 연령에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 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Aという人は学校は出ていないが、道理をわきまえ、人格的に、社会的に優れている。反対にBという人は、最高学府を出て社会人となり人もうらやむエリートコースを歩みながら、家庭や部下たちに毛嫌いされている。このような例をよく見かける。
  A라고 하는 사람은 학교는 안 나왔지만, 도리를 잘 알고 있고,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두드려지고 있다.  반대로 B라고 하는 사람은, 최고학부를 나와서 사회인이 되어 남들도 부러워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가정이나 부하들에게서 까닭 없이 싫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また、さまざまな人生経験が、かえってその人の素直な性格をゆがめ 、理性の成長の芽を潰してしまう人もいる。
  또한, 다양한 인생 경험이, 도리여 그 사람의 솔질한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이성의 성장의 싹을 으깨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こうみてくると、理性の機能は、この世だけの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いえる。
 極論すれば、理性あの世の意識であり、あの世の経験が、この世に持ち込まれているといえるのである。また、前世、過去世の魂の遍歴が、あの世の経験を豊かにし、あるいは様々なものにしているともいえる。
  이렇게 보면, 이성의 기능은, 이 세상만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성은 저 세상의 의식이며, 저 세상의 경험이, 이 세상에 갖고 들어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세, 과거세의 영혼의 편력이, 저 세상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고, 혹은 다양한 것으로서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あの世のある階層以上に行くと、女性の数がグンと少なくなるが、なぜそのように少なくなるかというと、地上界での経験がせまいために、理性を働かす機会に恵ま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のようである。地上界社会の通例として、男は外に出て働き、女は家にいて家庭を守る、という長い習慣のせいかも知れない。敷居を一歩外に出ると、男には七人の敵がいるといわれ、外の生活は、いやでも応でも四方八方気を配る習性を強いられる。こうした生活の連続が、人との摩擦をさけ、自分を知り、相手を見る習慣を身につける理性の機能を発達させる素因になったのかも知れない。
  저 세상의 어느 단계 이상으로 가면, 여성의 숫자가 훨씬 적어지는데, 왜 그렇게 적어지는가 하면, 지상계에서의 경험이 좁기 때문에, 이성을 작용하는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고 하는 것인 듯 하다.  지상계 사회의 통례로서, 남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여자는 집에 있어서 가정을 지킨다, 고 하는 오랜 습관 탓인지도 모른다.  

문지방을 한 발 밖으로 내밀면, 남자가 사회에 나가 활동할 때는 많은 경쟁 상대를 만난다고 하며. 바깥의 생활은, 싫든 좋든 사방방팔 두루 마음을 쓰는 습성을 강요받는다.  이런 생활의 연속이, 사람과의 마찰을 일으키고, 자신을 알고, 상대를 보는 습성을 익히는 이성의 기능을 발달시키는 소인[근본이 되는 원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ともかく、女性の数が少ないために、その階層の男性は、女性が必要なとき、女性のいる階層にまで来て、仕事を手伝ってもらうことになる。
  어쨌든 간에, 여성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그 계층의 남성은, 여성이 필요할 때, 여성의 있는 계층에까지 와서, 일을 도와 달라고 하게 된다.

 

 ちょっと横道に入いるが、あの世にはこの世的な結婚生活というものはない。低い階層にあっては、そうした地上の想念を、そのまま持ち込んだ世界を造り出しているが、天上界では、こうした行為はなされていないのである。親子は一世(この世だけ)夫婦は二世(この世とあの世)といい、この世で仲の良い夫婦は二世まで続くようにいわれているが、仲は良くてもあの世で一緒になれるとは限らない。魂の在り方によってあの世の生活を別々にしてしまうからである。また、この世で結ばれず、あの世で華を咲かせるなどということも、夢のまた夢なのである。ただ、この世で仲のよい夫婦、あるいは事情)があって添うことの出来なかった二人、あるいは一方が、来世(来るべき現世)で結ばれることを強く誓えば、その思いは大抵遂げられるように仕組まれている。
  잠시 이야기는 본 줄거리에서 벗어나지만, 저 세상에는 이 세상적인 결혼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낮은 계층에 있어서는, 그러한 지상의 상념을, 그대로 갖고 들어온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천상계에서는, 이러한 행위는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부모 자식의 인연은 이 세상(현세뿐)이고, 부부간의 인연은 내세까지 이어진다 (이 세상과 저 세상)고 한다, 이 세상에서 사이가 좋은 부부는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관계는 좋다고 해도 저 세상에서 함께 한다고 하는 제한은 없다. 영혼의 본연의 모습에 따라서 저 세상의 생활을 따로 따로 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맺어지면[결혼하면,육체관계를 가지면], 저 세상에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등이 말하는 것도, 꿈의 또한 꿈인 것이다. 다만, 이 세상에서 사이가 좋은 부부, 혹은 사정이 있어서 부부가 되어서 함께 살 수 없었던 두 사람, 혹은 한 쪽이, 내세(도래할 현세)에서 맺어질[결혼할] 것을 굳게 맹세하면, 그 생각은 대부분 이루어지게 짜여져 있다.[그 생각은 대부분 성취되게 조직[구성]되어 있다]

 

 いずれにせよ、男と女の理性の度合いは、地上での長い生活経験、転生輪廻の過程が、そうした相違を生み出したようである。
  어차피, 남과 여의 이성의 사정[형편]은, 지상에서의 오랜 생활 경험, 전생윤회의 과정이, 그러한 차이를 창출해 낸 듯 하다.

 

 もっともなかには、素晴らしい女性もいる。男が束になってかかっても、歯が立たない、という理知の優れた女もいるが、こうした人は、まれである。非常に限られてくる。
  더욱 개중에는, 매우 훌륭한 여성도 있다. 남자가 떼지어 덤벼도, 감당할 수 없다[당해낼 수 없다], 고 하는 이지[理知]가 뛰어난 여성도 있지만, 이러한 사람은, 드물다.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이지[理知]=理性と知恵。また、本能や感情に支配されず、物事を論理的に考え判断する能力.
한국어 사전에 없어서.일본 야후 사전 참고합니다...
이성과 지혜, 또는, 본능이나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사물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理性は、経験を土台にしているからこれを発達させるためには、反省と行為(経験)しかないのである。
  이성은,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반성과 행위(경험) 밖에 없는 것이다.

 

 本能、感情、知性、意志の働きは、行)為という経験を踏むことによって、ますます磨きがかけられることになる。
  본능, 감정, 지성, 의지의 작용은, 행위라고 하는 경험을 밟는 것에 의해서, 차츰 연마될 수 있게 된다.

 

  理性に磨きがかかると、心の循環が円滑になってくる。つまり、各種の機能の凹凸が丸くなり、行為に自然さを増して来る。なぜかというと、理性は、八正道のもっとも大事な「反省」役をする、もう一人の自分でもあるからである。
  이성으로 연마되어지면, 마음의 순환이 원활하게 되어진다. 즉, 각종의 기능의 요철이 둥글[원만]게 되어, 행위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왜냐하면, 이성은, 팔정도의 가장 중대사한「반성[反省]」담당한다, 또 한 사람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もう一人の自分には、知性や感情、意志もあるが、反省という機能の主役は理性の分野に強く表れるからである。
  
또 한 사람의 자신에게는, 지성이나 감정, 의지도 있지만, 반성이라고 하는 기능의 주역할은 이성의 분야에 굳건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感情の最深部は、慈悲と愛である。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은, 자비와 사랑이다.

   知性の最深部は、智慧の宝庫である。
   지성의 가장 깊은 부분은, 지혜의 보고이다.

 意志の最深部は、中道の我であり、行為である。
   의지의 가장 깊은 부분은, 중도의 자기이며, 행위이다.

 本能の最深部は、義務と責任である。
   본능의 가장 깊은 부분은, 의무와 책임이다.

 

 理性の最深部は、もう一人の自分、つまり前記四つの機能を円滑にする鏡であるわけである。したがってこの鏡を絶えずきれいに磨いておかないと、通常は表意識の知が走り、感情が飛び出し、本能がへこんでしまうことになるであろう。
  이성의 가장 깊은 부분은, 또 한 사람의 자신, 즉 앞의 4가지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거울인 것이다.  따라서 이 거울을 끊임없이 깨끗하게[곱게, 아름답게] 닦아 두지 않으면, 통상은 표면의식의 지식이 질주하고, 감정이 갑자기 뛰어나오고, 본능이 움푹 들어가 버리게 될 것이다.

 

 理性が働くことにより、各種の機能は、まずその凹凸を修正し、そうして、表面的な働きから次第に内部へと進み、潜在された意識を表面に浮び上がらせることになる。
  이성이 작용하는 것에 의해서, 각종의 기능은, 우선 그 요철을 수정하고, 그렇게 해서, 표면적인 작용에서 차츰 내부로 진행해 가며, 잠재된 의식을 표면에 드러나게 하게 된다.
 
 食、性の本能は、建設、調和という義務と責任の自覚を呼び起こすであろう。あの世の天上界の人々の本能は、調和という神の子の自覚が強く出てきているので、食、性にわずらわされず、義務と責任の献身の行為しか生じてこないのである。

  음식, 성[性]의 본능은, 건설, 조화라고 하는 의무와 책임의 자각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저 세상의 천상계(天上界)의 사람들의 본능은, 조화라고 하는 신의 자녀의 자각이 굳건히 나오고 있는 것으로써, 음식, 성[性]을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의무와 책임의 헌신의 행위을 맞아들일 뿐이다.

 
 ねたみ、そねみ、怒りという感情は、人をいつくしみ、助け合う心を育てることになる。
  질투, 시기, 분노라고 하는 감정은, 남을 사랑하고[소중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애지중지하고],
서로 돕는 마음을 기르게 된다.

 

 知識の吸収と、特定の事柄を追究する習性を持っている知性は、こんどは外に向って智慧の噴出口となり、偉大な力を発揮するであろう。
  지식의 흡수와, 특정한 사항을 추구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지성은, 이번에는 밖으로 향해서 지혜의 분출구[솟구쳐서 뿜어 나오는 구멍]가 되며, 위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小我の温床と行為を決める意志の働きは、神の心で)ある中道の行為を促す役目を果たしてくれるであろう。
  
소아[小我=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좁은 자아(自我). 혹은 진실도 없고 자재(自在)도 없이, 개인적인 욕망과 망집에 사로잡힌 나. 혹은 우주(宇宙)의 절대적(絶對的)인 나와 구별(區別)한 자아(自我) ②육체적(肉體的)인 나 ]의 온상과 행위를 결정하는 의지의 작용은, 신의 마음인 중도의 행위를 촉구하는 역할을 완수해 올 것이다.

 

 このように理性の機能は、右のような各種の機能を、丸く大きく、そうして内在されている真の人間性を引き出す役目を受け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いえる。
  이와 같이 이성의 기능은, 오른쪽과 같은 각종의 기능을, 둥글고 크게, 그렇게 해서 내재되고 있는 참된 인간성을 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理性は経験を土台にして反省することによって、ますますその働きを増して行く。理性の機能は、極めて客観性を持った働きにあるということが、これまでの説明でおわかりいただけたと思う。
  이성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차츰 그 기능을 늘려 간다.  이성의 기능은, 극히 객관석을 지닌 작용에 있다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한다.

 

 理性はあくまで総合された意識であり、それだけに、あの世の意識であり、過去世の経験的意識を持って働いているといえる。
  이성은 어디까지나 종합된 의식이며, 그런 만큼, 저 세상의 의식이며, 과거세의 경험적 의식을 가지고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そこで、では私たちの理性を、具体的に、どのように向上させていけばいいか、理性は各種の機能)と平行して育られるものであるが、各種の機能に先行して、各種の機能を引き上げさせるための努力、効果は期待できないものかどうか。
  그래서, 그러면 우리들의 이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향상시키면 좋을까, 이성은 각종의 기능과 평행해서 길러지는 것이지만, 갖종의 기능에 선행해서, 각종의 기능을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 효과는 기대할 수 없을가 어떨까.

 

 理性は、心の機能の中の一つにすぎないし、それだけに、理性だけ大きくなっても、変に道学者じみて来て格好がつかない。知性、感情がいたって幼稚にもかかわらず、道学者的な理屈をいう人に出会うことがあるが、これではおかしい。やはり、知性、感情も洗練され、しかも道理をわきまえているのでないと、なんとなくチグハグである。
  이성은, 마음의 기능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고, 그런 만큼, 이성만이 크게 되어도, 이상하게 도학자[道学者=도학을 수련한 사람, 도학을 설명하는 사람]처럼 되어가며 부끄러움을 모른다. 지성, 감정이 매우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도학자적인 이치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지만, 그래서는 이상하다.  역시, 지성, 감정도 세련되고, 게다가 도리를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뒤죽박죽이다. 

 

 結局、理性も心の一部であるから、相互に働き合いながら育てられて行くものである。
  결국, 이성도 마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상호 서로 작용하면서 길러져 가는 것이다.

 

 理性の機能を知って理性を高めて行くのと、漫然とした態度ですごして行くのとでは、理性の光り方がちがってこよう。
  이성의 기능을 알고 이성을 높여가는 것과, 막연한 태도로 생활해 가는 것과는, 이성을 빛내는 방식이 차이가 올 것이다.

 

 こうした意味から、理性を高めてゆくことは非常に大切なことであります。理性をテストするには、次のような問題が出たときに、自分の心の動きが、どのように反応するかによってある程度、評価することができよう。
 이러한 의미에서, 이성을 높여가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성을 테스트하는 데에는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올 때에,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르고 있는 정도, 평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たとえば、利害が相反した問題にぶつかったとする。人に金を貸したが返してくれない。人から中傷された。怪我をさせられた、というような場合に、つい人の責任にしてしまう。自分は悪くない、相手が悪い、一切(いっさい)の責任は自分ではなく相手にあると思い込んでしまう。そうかと思うと、自分もかつてはそうしたことがないとはいえない、あったかも知れぬ。プラス、マイナスすると、まあトントンだから、あきらめよう、という人(ひと)もいる。また人によっては、自分になにかしらの落度があったからそうなったのではないか。火のないところに煙は立たないというから、自分のどこかに欠陥があって、それが今出て来た。二度とそういうことのないように努めよう、といって自己反省する。
  예를 들면, 이해가 상반한 문제에 부딛쳤다고 합시다.  남에게 돈을 빌려 주었지만 돌려 주지 않는다. 남으로부터 중상모략을 당했다.  재난을 당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 결국 남의 책임으로 해 버린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 상대가 나빴다. 일체의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에게 있다고 고집해 버린다.  그럴까라고 생각하면, 자신도 예전에는 그러한 경우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혹시라도 모른다. 플러스, 마이너스라면,깜짝 놀라 버려서, 어찌할 수 없어 체념해 버리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에게 무엇이지,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불꽃이 없는 경우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고 하니까, 내 자신이 어딘가 결함이 있어서, 그것이 지금 나온 것이었다.  두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자, 라고 말하며 자기 반성을 한다.

 

 理性の働きは、三番目の人のような考え方によって光を増して来る。その善悪は別として、責任の所在をすぐさま相手に課したり、プラス、マイナス、ゼロだというような態度では、理性の機能は働いてはこない。
  이성의 작용은, 세번 째의 사람과 같은 사고방식에 의해서 빛을 늘리어 간다.  그 선악은 별개로서, 책임의 소재를 당장 상대에게 전가하거나,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는, 이성의 기능은 작용하지 않는다.

 

 自己反省は、正法の重大な課題の一つである。もし会員の方で、こうした自己反省が不得手だという人があれば、その人は会員としての資格に疑問がある。会員の資格は正法を信じ行なうことにあるのだから、理性を育てることを拒否する方は、やめてもらう以外にないのではないか。
  자기 반성은, 정법의 중재한 과제의 하나이다.  만약 회원이, 이러한 자기 반성이 서투르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회원으로서의 자격에 의문이 있다.  회원의 자격은 정법을 믿고 실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므로, 이성을 기르는 것을 거부하는 분은, 그만두라고 하는 이외에는 없는 것은 아닐까.

 

 自己反省は、あまり度が過ぎると、かえってマイナスになる。年がら年中、反省反省で、反省ばかりしていると、理性の機能は反対に働かなくなってきて、小さな人間が出来上がってしまう。
  자기 반성은, 너무나 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  웬종일, 반성 반성하며, 반성만을 하고 있으면, 이성의 기능은 반대로 작용하지 않게 되어, 작은 인간이 완성되어 버린다.

 

 反省も中道である。反省は自分をいじめることではなく、第三者の立場で、客観的に自分を眺めることである。相手の心になり、相手の心から自分を見ることである。そうすると、自分の欠陥がいろいろとわかってくる。
  반성도 중도이다.  반성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이 되어, 상대의 마음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결함을 여러 가지로 알게 된다.

 

 よく商売上の問題で聞かれることがあるが、正法を知ってしまうと商売ができなくなる。なんとなれば、慈悲と愛の心を持てば、商売して儲けることは愛の心に欠けることになるからだという。たしかにそういえないことはないかも知れない。ところが私たちが置かれている環境は自由主義経済、物を売買して、それで生活を立てている経済社会である。もし、利潤のない商売をすれば、家族や従業員の生活が出来なくなってしまう。
神は人間を生かすために地球をつくっている。だから商売で儲けることは少しも差支えないのである。時代が進み人間の意識が向上されてくると、その仕組も変わってくるであろう。要は正法を行ずる者とそうでない人の相違は、足ることを知った生活であり、儲けた金を自分のフトコロにしまい、自分だけのために使うか、それとも家族や従業員の生活を豊かにするために使うか、進んでは、困った人びとのために使うかによってちがってくるのである。

  자주 판매상의 문제로 듣는 일이 있지만, 정법을 알아 버리면 판매를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판매해서 벌어들이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 부족해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하게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경우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들이 처해 있는 환경은 자유주의 경제, 물건을 판매하고, 그것으로 생활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경제사회이다.  만약, 이윤이 없는 장사를 하면, 가족이나 종업원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신은 인간을 살려 두기 위해서 지구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장사로 이익을 보는 것은 적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시대가 진보하고 인간의 의식이 향상되어 오면, 그 일도 바뀌어 올 것이다. 중요한 부분은 정법을 실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만족함을 아는 생활이며,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품 속으로 해버리고,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아니면 가족이나 종업원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가, 나아가서는, 생활이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져 오는 것이다.

 

 理性の機能は、こうした問題についても働いてくる。そうして、では「足る」とはどこまでをいうのか、というように進んでいくであろう。
  이성의 기능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그렇게 해서, 그러면 「만족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라고 하는 것처럼 진행해 갈 것이다.

 

「足る」ことの一線は、人それぞれの考え方があって、金額的に、一人当りここまでとはいい切れない。家族数や職業上の立場や環境などが加わってくるので、一線を引けないからである。「足る」ことの一線は各人の判断にかかっているのである。
 「만족한다」는 것의 분명한 구별은, 사람 각자의 사고방식에 있고, 금액적으로, 한 사람을 당연하다고 여기에서는 단언할 수 없다.  가족의 수나 직업상의 입장이나 환경 등이 더해지는 것으로써, 분명한 구별을 끌러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족한다」는 것의 분명한 구별은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一億円あっても足りない、また百万円で充分だという人もいる。人それぞれの心の持ち方で「足る」ことの線が決まってくるが、ここでは図式的な結論は出せない。要は、本人の自覚を待つ以外にないのである。
  1억 엔의 있어도 만족하지 않는다, 또한 1백만엔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 각자의 마음의 소유한 방식으로 「만족한다」것의 구별을 결정되지만, 여기에서는 도식적인 결론을 낼 수 없다.  중요한 부분은, 본인의 자각을 가지는 것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いずれにせよ、理性の機能は、私たちの精神生活のバランスを保つ上に、非常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といえる。理性のない人間を想像することはできない。想像するとすれば、その世界は、おそらく争いに満ちた、腕力の世界であり、力だけの動物の世界になっているであろう。現実の社会では理性が働いていない、というより、理性を腹中深く押し込めて、ムリムリ世間に立ち向っているといえるかも知れない。誰も彼も、心の中では、この世は狂っている、と思っても、逃げることができないし、放っておけばおいてきぼりにされるので、やむなく、人を押しのけ、あるいは強い者について行くという格好になっている。
  
 어차피, 이성의 기능은, 우리들의 정신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상당히 큰 역할을 완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성의 없는 인간을 상상할 수는 없다. 상상한다면, 그 세계는, 무서운 싸움으로 가득찬, 완력이 세계이며, 힘만의 동물의 세계로 되어 있을 것이다.  현실의 사회에서는 이성이 작용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 보다, 이성을 배 속 깊이 억지로 밀어 넣고, 우르르 우찌끈 뚝딱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 마음 속으로는, 이 세상을 미쳐버리고 있다, 고 생각해도, 도망칠 수가 없고, 방치하고 있으면 따돌림을 당하는 것으로써, 어찌할 수 없이[부득이하게], 남을 밀어내고, 혹은 강한 사람에 대해서 함께 하려고 하는 모습이 되고 있다.

 

 理性を持った人間社会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現代は、強い者が勝つ力の社会である。経済は欲望を主体にし、政治は金で動いている。
  이성을 지닌 인간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강한 사람이 승리하는 힘의 사회이다.  경제는 욕망을 주체로 하고, 정치는 돈으로 움직이고 있다.     page  203~225



 


 [意志 의지]

 

 まず意思―意志の概念から。
 意思と意志。この両者は、もともと別物の機能ではない。意思とは意志に至る心の全体の「思う」「考える」それであるし、意志はそれにもとづく行動に通ずる意識の働きといってもよい。意思も精神作用なら、意志も精神作用である。
  우선 의사[意思]― 의지[意志]의 개념부터.
  의사와 의지.  이 양자, 본래 별개의 것[다른 것]의 기능이 아니다.
의사[意思]란 의지[意志]에 이르는 마음의 전체의「정서적 감정적으로 생각한다」「지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바로 그것이며, 의지[意志]는 그것에 바탕을 두고 행동으로 통하는 의식[意識]의 작용이라고 말해도 좋다. 의사[意思]도 정신작용이라면, 의지[意志]도 정신작용이다. 
 

 この二つの精神作用は、私たちが日常生活を営むための欠かせない心の機能であり、これの働きがないと、行動という、もっとも動的な、物質での生活が不可能になってくる。意思―意志のない生活、行動というものは考えることはできないし、もし私たちの心の中に、こうした作用が働かないとすれば、私たちは混乱の中であえぐことになるだろう。意思―意志は目的に向う行動の原動力であり、始動機関であるといえるからだ。
  이 두 가지의 정신작용[精神作用]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빠질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이며, 그것의 작용이 없으면, 행동[行動]이라고 하는, 가장 동적[動的]인, 물질[物質]로의 생활이 불가능[不可能]하게 되어 온다.  의지[意志] - 의사[意思]가 없는 생활,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없고, 만약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러한 작용이 작용[활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혼란[混乱] 속에서 허덕이게[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의사[意思] - 의지[意志]는 목적[目的]으로 향하는 행동[行動]의 원동력[原動力]이며, 시동기관[始動機関]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動物のそれは、本能と意志が密着し与えられたその範囲内で生活を営むものである。
   동물의 그것은, 본능과 의지가 밀착하고 주어진 그 범위 내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人間は本能のほかに、感情、知性、理性の働きを経て、意志によって行動して行(ゆ)く。しかも、その行動はある目的をもって、為されるものである。目的のない行動はあり得ないし、目的を設定して、それに向って行動して行くのが意志である。
  인간은 본능 외에, 감정, 지성, 이성의 작용을 거쳐서, 의지[意志]에 따라서 행동해 간다.  게다가, 그 행동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행동은 있을 수가 없고, 목적을 설정[設定]하고, 그것을 향해서 행동[行動]해 가는 것이 의지[意志]이다.

 

 意志と目的、この二つは、それ故に切っても切り離せない。
 それでは目的は、どうして生れるか。また目的を設定さぜる意志は、何にもとづいて働いてくるのだろう。
   의지[意志]와 목적[目的], 이 두 가지는, 그런 까닭으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목적은, 어떻게 태어날까.  또한 목적을 설정하게 하는 의지[意志]는, 무엇에 바탕을 두고 작용해 오는 것일까.

 

 ふつうは自我の意識である。自我があるために、私たちは意思し、意志をもって行動している。したがって、自我―意思がなければ意志(いし)することはできない。
  보통은 자아[自我]의 의식[意識]이다.  자아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의사[意思]하고, 의지[意志]를 갖고 행동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自我] ― 의사[意思]가 없다면 의지[意志]할 수 없다.

 

 そうすると目的は、おのずと明らかなように、通常は、自我にもとづく欲求によって目的が設定され、その目的に向って意志され、行動につながっている、といえる。
  그렇다면 목적은, 저절로 분명한 것처럼, 통상은, 자아[自我]에 바탕을 두는 욕구[欲求]에 따라서 목적이 설정되며, 그 목적을 향해서 의지[意志]하게 되며, 행동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私たちの意思―意志は、このような精神作用を通して心の中で常に働き、行動しているわけである
   우리들의 의사[意思] ㅡ 의지[意志]는, 이러한 정신작용을 통해서 마음 속에서 항상 작용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ここで現実に眼を向けてみよう。
 現実は経済競争という形を変えた戦場である。ベトナム戦争のようにむごたらしい殺し合いはなしが 企業を単位とした修羅場が現実の姿である。金のない者はある者に仕え、人々は金を求めて、自分の意志に反した生活を強いられている。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현실은 경제투쟁[経済競争]이라고 하는 형태을 바꾼 전쟁터이다.  베트남 전쟁과 같이 비참하게[참혹하게] 서로 죽이는 일을 행하지만, 기업을 단위로 한 수라장[阿修羅場]이 현실의 모습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섬기고[시중을 들고], 사람들은 돈을 구하고, 자신의 의지에 반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何がこうした現実を作っているのであろうか。間違いなく、それは欲望の結果である。生きるための欲望、五官を満足させるために、人々は意思し、意志を持って行動している。同じ自我でも善なる自我ではない。偽我の自我が意志している、といえる。
   무엇이 이러한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틀림없이, 그것은 욕망[欲望]의 결과[結果]이다.  생존하기 위한 욕망, 오관[五官]을 충족시키시 위해, 사람들은 의사[意思]하고, 의지[意志]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같은 자아[自我]라고 해도 선한 자아가 아니다.  위아[偽我:자기본위(어두운 마음)]의 자아가 의지[意志]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修羅とは地獄である。弱肉強食の世界が修羅である。このため人々の心は片時も安心するヒマがない。何時どんな不幸が襲ってくるか分からない。不幸を未然に防ぐためには、常に人より先に進み、夢を先取りするか、人の夢を横取りするか、それともいっそのこと夢(ゆめ)を捨て、大樹の影となって安住するか、ほどほどに先取りし、ほどほどに休むか、ともかく、欲望と意志のぶつかりあいが、現実を修羅場と化しているようである。
  수라[阿修羅]는 지옥[地獄]이다.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世界]가 수라[阿修羅]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잠시도 안심[安心]할 틈이 없다.  언제 어떠한 불행[不幸]이 엄습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남보다 앞서 가며, 꿈을 남보다 먼저 차지할까, 남의 꿈을 가로챌까, 아니면 차라리 꿈을 버리고, 세력이 큰 쪽에 의지하여 안주[安住]할까, 적당히 남보다 먼저 차지하고, 적당히 쉴까, 어쨌든 간에, 욕망과 의지의 충돌이 있지만, 현실을 수라장으로 바꾸고 있는 것 같다. 
 
 地上界を修羅場にしているのは各人の欲望のせいであるが、欲望のモトは自我であり、自我の発現は肉体だけに局限した人生観、一寸先不明の心の働きにあるといえるだろう。
  지상계를 수라장으로 하고 있는 것은 각자의 욕망[欲望]의 탓이지만, 욕망의 근본은 자아[自我]이며, 자아의 발견[発現]은 육체[肉体]만으로 국한한 인생관[人生観], 인생의 앞 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もし、人間の魂が永遠に生き続け、地上界の生活は永遠の一駒であり、魂修行の場であると理解されてくれば、欲望に翻弄されるバカバカしさが身にしみてくると思(おも)われる。
   만약, 인간의 영혼이 영원토록 삶을 이어가고, 지상계의 생활은 영원의 한 장면이며, 영혼의 수행[魂修行]의 장소라고 이해되어 오면, 욕망에 농락되는 어리석음을 절실하게 느껴 오리라고 생각이 든다.

 

 もう一つ、キリスト教では人間の偽我・業を称して原罪といっている。業とは長い転生輪廻の過程において作り出されてきた執着のリンネである。 
   또 한가지,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위아[偽我]・업[業]을 가리켜 원죄[原罪]라고 말하고 있다.  업[業]이란 오랜 전생윤회[転生輪廻]의 과정에 있어서 만들어 내어 온 집착[執着]의 윤회[輪廻]이다.

 

 頭では「いけない」と思いながら、体の方がそれについて行けず、同じことを繰り返してしまう。酒は体に毒と分かっていても、宴席や酒のにおいをかぐと、一杯やりたくなってしまう。怒っちゃ損だと常々思っているが言葉のはずみで、どなってしまう。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몸의 쪽이 그것에 대해서 따르지 않고, 같은 것을 반복해 버린다.  술은 육체에 독이라고 알고 있어도,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나 술 냄새를 맡으면, 한 잔 하고 싶게 되어 버린다.  화를 내 본들 손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말 뿐으로, 끝나 버린다. 
 
 分かっちゃいるけどやめられない。それが「業」のリンネというものである。
   알겠다고 하지만 그만두지 않는다.  그것을 「업[業]」의 윤회[輪廻]라고 하는 것이다.

 

 ここで業について、もう少し突っこんでいくと、人間の業とは、心の魔から生れる。一念三千の人の心は、天国にも地獄にも通じ、その自由な心が、執着にとらわれると、魔の世界を作って行くわけである。それゆえに、業(カルマ)とは魔である。自分の心の中から生ずる魔の働きである。キリスト教でいう原罪は、厳格には心の魔である。魔をつくり出すものは自己本位のエゴである。
   여기에서 업[業]에 대해서, 잠시 돌진해 가면, 인간의 업[業]이란, 마음의 마귀[악령]에게서 태어난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사람의 마음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통하고, 그 자유로운 마음이, 집착에 사로잡히면, 마귀[악령]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業](카르마)이란 마귀[악령]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돋아나는 마귀[악령]의 작용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는, 엄격하게는 마음의 마귀[악령]이다. 마귀[악령]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기본위[自己本位]의 ego[자아(自我)=이기심]이다.

 

 この地上界は、各人の人生観のほかに、こうした業のリンネがついてまわるため、ますます物事の本質が不明確となり、認識でき得る五官に、物事の規準を置かざるを得ない、というのが実情のようである。
    이 지상계[地上界]는, 각자의 인생관[人生観] 이외에, 이러한 업[業]의 윤회가 어디까지나 따라다니기 때문에, 차츰 사물[세상사]의 본질이 불명확하게 되어, 인식할 수 있는 오관[五官]에, 사물[세상사]의 규준[規準=행위 따위의 기준이 되는 규칙]을 두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는 것이 실정[実情]인 것 같다.

 

 しかし、こうした状況を常にくりかえしていたのでは、自分自身も、またその周囲も、決して、良い環境を生み出すことが出来ない。業に打ち克ち、五官にふりまわされる自分自身から脱皮して行く以外には調和された自分も、環境もつくることはできない。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항상 반복해 오고 있어서는, 자기 자신도, 또한 그 주위도, 결코, 좋은 환경을 창출해 낼 수가 없다. 업[業]을 극복하고, 오관[五官]에 휘둘리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탈피[脱皮]해 가는 것 이외에는 조화된 자기 자신도, 환경[環境]도 만들 수는 없다.  

 

 知恵と、勇気と、努力―。これを裏付け促進させて行くものは、ほかならぬ強靱な意思と忍辱である。
   지혜[知恵]와, 용기[勇気]와, 노력[努力]―.  이것을 뒷받침하고 촉진[促進]시켜 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강인[強靱]한 의사[意思]와 인욕[忍辱]이다.

 

 本能、感情、知性、理性というものは、人間としての立場を明(あき)らかにし、万物の霊長としての働きを示す心の機能であるが、一方、意志については、そうした心の機能を、いかに具体的に現実的に、動的に表わしていくかの大事な機能を司どっているといえる。
   본능[本能], 감정[感情], 지성[知性] 이성[理性]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입장[立場]을 뚜렷하게 하고, 만물[万物]의 영장[霊長]으로서의 작용을 나타내 보이는 마음의 기능이지만, 한 편, 의지[意志]에 대해서는, 이러한 마음의 기능을, 어떻게 구체적[具体的]으로 현실적[現実的]으로, 동적[動的]으로 나타내어 가는가의 중대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正法が自力とすれば、意志のウエイトは極めて大きなものがあるといえよう。
   정법자력[正法自力]이라고 하면, 의지[意志]의 무게는 극히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意志の強弱が正法を自分のものとするか、しないかの分岐点になってくるからである。
   의지[意志]의 강약[強弱]이 정법[正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분기점[分岐点]이 되어 오기 때문이다.

 

 正法の理屈を、いくら頭で理解したとしても、実行のない正道は描かれたモチにすぎない。
   정법의 이치[理致]를, 아무리 머리로 이해[理解]했다고 해도, 실행[実行]이 없는 정도[正道]는 그림에 떡에 지나지 않는다.

 

 そうだとすれば、私たちは、この意志の機能というものを、もう一度、あらためて見直すことが大事ではないかと思うわけである。
   그렇다고 하면, 우리들은, 이 의지[意志]의 기능[機能]이라고 하는 것을, 또 한번, 다시 재검토하는 것이 중대사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意思とは、自我の全体をいう。
   의사[意思]란, 자아[自我]의 전체[全体]를 말한다.

 意志とは、行動の原動力である。
   의지[意志]란, 행동[行動]의 원동력[原動力]이다.

 

 自我の全体である意思は、本能、感情、知性、理性、意志を含めた精神活動である。
   자아[自我]의 전체인 의사[意思]는, 본능[本能], 감정[感情], 지성[知性], 이성[理性], 의지[意志]를 포함한 정신활동[精神活動]이다.
 

   意志は、その全体の一部といえよう。
   의지[意志]는, 그 전체의 일부[一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意思が、ものを考え、思い、行動の決定権を司どっているとすれば、意志は、その命をうけて、形の上に現わし具象化して行く機能である。この意味で意志は心の各機能からみると受け身といえよう。
   의사[意思]가, 사물을 지적으로 생각하고, 정서적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행동의 결정권[決定権]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면, 의지[意志]는, 그 명령을 받아서, 형태 상으로 나타내고 구상화[具象化]해 가는 기능[機能]이다.  이 의미로 의지[意志]는 마음의 각 기능에서 보면 수동적[受動的]인 자세[姿勢]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意思は人間にだけ与えられた特権である。動物は本能と意志がストレートにつながっている。ここに人間と動物の大きな相違がみられよう。
  의사[意思]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特権]이다.  동물[動物]은 본능[本能]과 의지[意志]가 straight[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心の(こころ)各(かく)機(き)能(のう)が意(い)志(し)に直接的に(ちょくせつてき)つながるとどうなるか。
   마음의 각 기능이 의지[意志]에 직접적[直接的]으로 연결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感情的意志は、その時々の感情の変化でクルクルと変わる。朝のうちはこうだと思い行動しながら、夕方になると、その行動に疑問を持ち、朝とは違った方向にいってしまう。
   감정적[感情的] 의지[意志]는, 그때 그때의 감정[感情]의 변화[変化]로 뱅글뱅글 변한다. 아침에는 이렇다하고 생각하고 행동[行動]하면서, 저녁이 되면, 그 행동에 의문[疑問]을 갖고, 아침과는 다른 방향[方向]으로 가 버린다.

 

 本能的意志は、ガムシャラで、人の気持などおかまいなく、目的さえ通ればそれでよいという幼稚なもの。
   본능적[本能的] 의지[意志]는, 앞뒤 생각 없이 무턱대고 하며, 사람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 하지않고, 목적[目的]만 통하면 그럼 괜찬다고 하는 유치[幼稚한 것.

 

 知的な意志は、理論的、合理的、持久的ではあるが、独善的、算術的であり、本能的意志に似て、人の感情などあまり気にしない。
   지적[知的]인 의지[意志]는, 이론적, 합리적, 지구적[持久的]이지만, 독선적[独善的], 계산적이며, 본능적[本能的] 의지[意志]와 흡사하고, 남의 감정[感情] 따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こういうように、心の機能の一部が意志につながると、こうした片寄った行動が表面に現われてくるのである。
   이와 같이, 마음의 기능의 일부[一部]가 의지[意志]로 연결되면, 이러한 치우친 행동[行動]이 표면[表面] 드러나오는 것이다.

 

 これまでの私たちの行動は、心の機能を働かせながらも、欲望から切り離して物を考えることが出来ず、また欲望の概念すらアイマイであったとさえ言える。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행동[行動]은, 마음의 기능을 작용시키면서도, 욕망으로 부터 끊기 어렵고 사물을 생각할 수가 없고, 또한 욕망[欲望]의 개념[槪念]조차 애매 모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欲望については、本能の機能のところで触れたように、それは性と食の第一次本能にもとづく諸々の執着心がもっともつよい。動物を含めたあらゆる生物には生きて行く本能があり、その本能の作用がなければ、私たちは一瞬たりとも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
   욕망[欲望]에 대해서는, 본능의 기능 편에서 접했던 것처럼, 그것은 성[性]과 음식의 제 1차의 본능[本能]에 바탕을 두고 여러 가지 집착심[執着心]이 가장 강하다.  동물을 포함한 온갖 생물[生物]에게는 생존해 가는 본능이 있고, 그 본능[本能]의 작용[作用]이 없다면, 우리들은 잠시라도 생존할 수는 없다.

 

 欲望にはこのほか感情の快、不快によるそれがあるし、知的な欲望もある。欲望の根源は自分さえよければ他はどうでもよいという自己本位のエゴにある。この自己保存のエゴがさまざまに発展し、業をつくり、不調和をもたらしている。
  욕망[欲望]에는 이 외의 감정[感情]의 유쾌, 불쾌에 의한 그것이 있고, 지적[知的]인 욕망도 있다. 욕망의 근원[根源]은 자기만 좋으면 남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자기본위[自己本位]의 ego[자아(自我)=이기심]이다.  이 자기보존[自己保存]이 이기심이 가지각색으로 발전[発展]하고, 업[業]을 만들고, 부조화[不調和]를 초래하고 있다.

 

   欲望を土台にして意志するときは自分も周囲も常に不調和になってくる。
   욕망[欲望]을 토대[土台]로 해서 의지[意志]할 때는 자기 자신도 주위[周囲]도 항상 부조화[不調和]어 온다.

 

 意志そのものは受け身であり、それ自体問題はないが、問題は本能、感情、知性、理性から生まれる意思がそれぞれ単独で動き、意志に通じると、前述のように、また、すでに心の機能の要約のところで記述したように、本能の働きが意志されると、愛欲、エゴ、闘争に流れる。
  의지[意志] 그 자체는 수동적 자세이며, 그 자체[自体]에 문제는 없지만, 문제[問題]는 본능[本能], 감정[感情], 지성[知性], 이성[理性]에게서 태어나는 의사[意思]가 각각 단독으로 작용[활동]하고, 의지[意志]로 통하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또한, 이미 마음의 기능의 요약 편에서 기술한 것처럼, 본능[本能]의 작용을 의지[意志]하게 되면, 애욕[愛欲], ego[자아(自我)=이기심],투쟁[闘争]으로 흘러간다.

 

 感情の)働きが意志されると、争い、怒り、憎しみなどの心の思いが行動になって現われてくる。
   감정[感情]이 작용이 의지가 되면, 투쟁, 분노, 증오 등이 마음의 생각이 행동[行動]으로 되어 드러나온다.

 

 知性の働きが意志されると、情操が失われ目的のためには手段を選ばなくなってくる。
   지성[知性]의 작용이 의지가 되면, 정조[情操=(가치 판단의 기초가 되는) 인간이 지닌 가장 높고 복잡한 감정. 정서]를 잊고 목적[目的]을 위해서는 수단[手段]을 가리지 않게 되어 온다.

 

 理性の働きが意志(いし)されると、独善的になってくる。という風になってくる。
   이성[理性]의 작용이 의지가 되면, 독선적[独善的]으로 되어 온다. 라고 하는 식으로 되어 온다.

 

 したがって、意志を正しく機能させるためには、意思する全体の心の各機能を十分に働かせ、意志につなぐ工夫がなければならない。
   따라서, 의지[意志]를 올바르게 기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사[意思]하는 전체의 마음의 각 기능을 충분히 작용케 하고, 의지[意志]에 묶어 드는 궁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強靱にして柔軟性ある意志は全体の意思の働きにしたがって、忍耐力, 持久力、自制力といったもっとも理想的な形をとってくるだろう。
  강인하고 유연성이 있는 의지[意志]는 전체의 의사[意思]는 전체의 의지의 작용에 따라서, 인내력, 지구력, 자제력이라고 하는 가장 이상적[理想的]인 형태[形態]를 가져 올 것이다.

 

 ふつう意志が強い、弱という違いはどこからくるのだろう。
 それはたいてい自我の強弱に左右される場合が多いものだ。自我の強い人はその欲望)を果すため初志を貫こうとする。弱い人は、それでは自我が少ないかというと、これも周囲の思惑や自分に甘えて弱くなる。
  보통 의지가 강하다, 약하다라고 하는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대개 자아의 강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그 욕망을 완수하기 위해서 초지[初志=최초에 품은 뜻]를 관철하려고 한다.  약한 사람은, 그런 상태로는 자아가 적을까라고 하면, 뭐든지 모두 주위의 평판[소문]이나 자기 자신에게 응석부려서 약해진다.

 

 どちらも欲望に根ざしているが、欲望に根ざした意志は最終的には強い人でも弱くなろう。意志の根底に、損得の基準があるから、損と分かれば変えざるを得ないからである。
  둘 다 욕망에 기인하고 있지만, 욕망에 기인한 의지는 최종적으로는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약해질 것이다.  의지의 밑바탕에, 손실과 이익의 기준[基準]이 있기 때문에, 손해라고 생각하면 바꾸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意志の強さは、本来、人間としての自覚にめざめた時に本当に発揮される。
   의지[意志]가 강함은, 본래, 인간으로서의 자각에 눈을 떴을 때에 진실로 발휘된다.

 

 信仰の意志はどうか。これは堅いだろう。しかし、盲信、狂信に走ると、平気で人と争うことをしてしまう。
  신앙의 의지는 어떨까. 이것은 견고할 것이다.  하지만, 맹신, 광신으로 달리면태연하게 남과 다투는 짓을 해 버린다.

 

 信仰の意志は感情の意志に入るだろう。
   신앙의 의지는 감정의 의지에 들어갈 것이다.

 

 信仰の意志も感情の奥底(潜在意識)から出てくる場合は理性を通して、全体の意思として働くので、柔軟、強靱なものとなり、人と争うことはまずあり得ないだろう。
  신앙의 의지도 감정의 가장 깊은 곳[속마음=본심](잠재의식[潜在意識])에서 나오는 경우는 이성을 통해서, 전체의 의사[意思]로 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써, 유연, 강인한 것이 되며, 남과 다투는 일은 우선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心の奥底は、潜在意識に入っているため、これらの機能は一つにまとまっているからだ。丁度、水面に現われた一つ一つの島でも海底が陸続きであるように、心の奥底は、一つにまとまっているからである。
  마음이 가장 깊은 곳[속마음=본심]은, 잠재의식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기능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수면에 드러나 하나 하나의 섬이라고 해도 해저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意志のない行動として、無意識の行動がある。これはどうかというと、本来無意識の行動というものはないのである。無意識以前に意識されたものがあって、それが無意識の行動として現われるといえるからである。
  의지가 없는 행동으로서, 무의식의 행동이 있다.  이것은 어떨까라고 하면, 본래 무의식의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무의식 이전에 의식된 것이 있고, 그것이 무의식의 행동으로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まかぬ種は生えない。
 さて、以上のように、私たちの行動は、すべて心の反映として、現われる。
   뿌리지 않은 씨앗은 자라지 않는다.
   그럼, 이상과 같이, 우리들의 행동은, 모두 마음의 반영으로서, 나타난다.

 

 私たちの一つ一つの行動は、誰の責任(せきにん)でもない。皆自分から発し、自らの責任で為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が分かってくる。この意味では行為はその人を評価するもっとも良(よ)いバロメーターということになってくる。
  우리들의 하나 하나의 행동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자기의 책임[責任]으로 행해지고 있다, 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의미로는 행위[行爲]는 그 사람을 평가[評価]하는 가장 좋은 파라미터(parometer[지표=상태・정도를 헤아리는 기준])라고 하게 된다.

 

 行為がその人の表現体であるとすれば、行為の一切はその人の意思にもとづくそれであるといえよう。
   행위가 그 사람의  표현[表現]이라고 하면, 행위의 일체는 그 사람의 의사[意思]에 바탕을 두는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ただここで注意を要することは、想念と行為が必ずしも一致せず、いうなれば偽善、偽悪という人の目をごまかしたそれも実際には起こり得るので、目に見えた行為が、すべてその人の意思であるかどうかは普通は分かりにくい。しかし、偽善、偽悪の場合は、いっ時は人の目をごまかせても、長いうちには馬脚を現わし、結局は本性本来の意思を現(あら)わしてしまう。
  단지 여기에서 주의[注意]를 요하는 것은, 상념과 행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말하자면 위선, 위악이라고 하는 사람의 눈을 속인 그것도 실제로는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써, 눈에 보인 행위가, 모두 그 사람의 의사[意思]일까 어떨까는 보통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위선[偽善], 위악[偽悪=일부러 악한 체함]의 경우는, 잠깐은 사람의 눈을 속여도, 머지 않아서는 마각[馬脚]을 드려내고, 결국은 본성 본래의 의사[意思]를 드려내어 버린다.

 

 神の目は、自分の心にウソのいえない厳正なものだし、そうして正法は、善なる行為にちがいないが、いちばん重要視されるのは心という想念の在り方である。
  신[神]의 눈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엄정[厳正]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 정법[正法]은, 선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지만, 가장 중요시[重要視]되는 것은 마음[心]이라고 하는 상념[想念=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의 본연의 모습[올바른 자세]이다.

 

  女を見て色情を抱くは姦淫したと同じであるとするイエス様の言葉を想起すれば、この点の意味合いが明らかになるであろう。
  여자를 보고 색정[色情]을 품음은 간음[姦淫]한 것과 같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 이 점의 동기나 이유로서 배후에 있는 사정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しかし正法は、正しき心と、正しい行為を求めるものであるし、正しい行為は、勇をふるって努めるしかない。正しき心は正しい行為によって、はじめて実を結ぶものであるし、知性に内在する智慧は、そうした行為の中から湧いてくるであろう。
  하지만 정법[정법]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마음과, 바른 행위를 구하는 것이고, 바른 행위는, 용기를 떨치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마음은, 바른 행위에 의해서, 비로서 열매를 맺는 것이며, 지성에 내재하는 지혜[智慧]는, 그러한 행위 가운데에서 솟아 나올 것이다. 
 
 智慧は、経験という貴重な体験から生まれ、頭脳遊戯にふけっている間は、湧いてこないであろう。智慧は、腹からほとばしり、知識は頭を大きくするだけである。私たちの意思は、心の各機能の万遍ない働きの下で、よりよく育まれ、そうしてそれは、正しき善なる意志として、行為されてくるであろう。
  지혜[智慧]는, 경험이라고 하는 귀중한 체험[体験]에서 태어나고, 두뇌유희에 탐닉[耽溺]하는 동안은, 솟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혜[智慧]는, 배속에서 용솟음치고, 지식[知識]은 머리를 크게할 뿐이다.  우리들의 의사[意思]는, 마음의 각 기능의 빠짐없는 작용 하에서, 여력[余力=역량]이 소중이 길러지고, 그렇게 해서 그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선한 의지[意志]로서, 행위되어 올 것이다.

 

 ところで、意志の強さは、行為の持続性を意味する。あきやすく、クルクル変わるのは持続性の欠除である。持続性は記憶の連続としてとらえられるが、一方また信念という言葉に裏打ちされるであろう。
  그런데, 의지가 강함은, 행위의 지속성[持続性]을 의미한다. 금방 싫증을 내고, 뱅글 뱅글 돌면서 바뀌는 것은 지속성의 결여[欠除]이다. 지속성은 기억의 연속으로 해서 붙잡을 수 있지만, 한편 또한 신념[信念]이라고 하는 말에 내실을 기하게 될 것이다.

 

 この意味で念と意志は不可分である。すでに述べたように、目的のない意志はあり得ないからだ。念は願いであり、目的意識である。ああしたい、こうしたい、あれが欲しい、これが欲しいという目的が意志となり、行為になっていく。
   이 의미에서 생각[念]과 의지[意志]는 불가분[不可分]이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목적[目的]이 없는 의지[意志]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염원이며, 목적의식[目的意識]이다.  저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 저것이 갖고 싶다, 이것이 갖고 싶다고 하는 목적[目的]이 의지[意志]가 되어, 행위[行為]로 되어 간다.

 

 そうした念は、正しきものであればある程、持続性を伴うであろう。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지속성을 동반할 것이다.

 

 八正道に正念がある。正念とは、慈悲と愛から生まれてくる目的意識であり、また、現実的行為の中では足ることを知ることである。足こととは欲望の限度を知ることであり、進んでは人間としての目的を悟れば、残るは義務と責任しか残らない。
  팔정도[八正道]에 정념이 있다.  정념[正念]이란, 자비[慈悲]와 사랑[愛]으로 부터 태어나오는 목적의식[目的意識]이며, 또한, 현실적 행위 중에서는 만족함을 하는 것이다.  만족함이란 욕망의 한도[限度]를 아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의 목적을 깨달으면, 남는 것은 의무[義務]와 책임[責任]밖에 남지 않는다.

 

 私たちの意志はそうしたときに、本当に発揮されてくるであろう。
   우리들의 의지[意志]는 그렇게 했을 때에, 정말로 발휘[発揮]되어 올 것이다.

 

 八正道の正(ただ)しさは、客観性にある。それぞれの立場や、自我や執着からこれを求めようとしても出てこない。問題が生じたときに、相手を批難する前にまず自己を省み、問題の所在を公平厳正な尺度で、もう一辺見直すことである。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름은, 객관성[客観性]에 있다. 각자의 입장[立場]이나, 자아[自我]나 집착[執着]으로 부터 이것을 구하려고 해도 나오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상대를 비난[批難]하기 전에 우선 자기를 살피고, 문제[問題]의 소재[所在]를 공평하고 엄정한 척도[尺度]로, 또 한편 재검토하는 것이다.

 

 あの世の姿をもって、正しさの尺度をみると次のようになる。
   저 세상의 모습을 가지고, 올바름의 척도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幽界の正しさは、自己本位であり、ご都合主義である。自分が主体で、人のことは構わない。こういう人は世間によくみられる。
  유계[幽界]의 올바름은자기본위[自己本位]이며, 형편주의[都合主義]이다.  자신의 주체이며, 남의 일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세간에 자주 볼 수 있다.

 

 霊界の正しさは、相対的である。私はあの人にあれだけのことをしてやった、だからあの人は私にこれだけのことをしても良い、という考え方。こういう人は非常に多(おお)い。
  영계[霊界]의 올바름은, 상대적相対的이다. 나는 저 사람에 그 만큼의 것을 해 줬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나에게 이 만큼의 것을 해도 좋다, 라고 하는 사고 방식.  이러한 사람은 상당히 많다. 
  
  ある社会の裏側(うらがわ)をみると、こうした判断が大半を占め、そうした考えで動いているといえる。外交の尺度は幽界ないしは霊界的である。よく新聞をみればこの点がひじょうにはっきりする。だから戦争も絶えない。

  어떤 사회의 이면[안쪽]을 보면, 이러한 판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러한 사고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외교[外交]의 척도[尺度]는 유계[幽界] 내지는 영계적[霊界的]이다.  자주 신문을 보면 이 점이 매우 분명하다.  그러니까 전쟁[戦争]도 끊이지 않는다.

 

 神界の尺度は、人を批難する前に自己を反省する。そうして自分に落度がなかったか。落度があればそれを修正する。落度がなければ批難する前に誤解を解くために話し合う。話し合って誤解が解けねば仕方がない、相手のために祈心を忘れないものである。
  신계[神界]의 척도[尺度]는, 남을 비난[批難]하기 전에 자기를 반성[反省]한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에게 과실[過失]이 없었는가.  과실[過失]이 있다면 그것을 수정[修正]한다.  과실이 없으면 비난하기 전에 오해[誤解]를 풀기 위해서 서로 대화한다.  만약 서로 대화해서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상대를 위한 기도하는 마음[祈心]을 잊지 않는 것이다.

 

 八正道の正しさは、まず神界の尺度から出発する。見方を変えれば、八正道とは最低の修行である。なぜなら、中道の心は、神界から始まり、神界以下では通用しないからである。
  팔정도의 올바름은, 우선 신계[神界]의 척도에서 출발[出発]한다.  견해[관점]을 바꾸면, 팔정도는 최저의 수행[修行]이다.  왜냐하면, 중도[中道]의 마음은, 신계에서 시작되고, 신계[神界] 이하에서는 적용[通用]하지 않기 때문이다. 

 

 菩薩の正しさはどうかといえば、一口にいえば慈悲と愛の心である。人の喜びを喜びとし、悲しみがあればその悲しみを取り除いてゆこうとする心である。愛という相互扶助の心が強く自我心が稀薄で、上段階に行けば行くほど、全なる心に近づき、大自然の意思である慈悲と愛の心になって行く。 
   보살[菩薩]의 올바름은 어떤가 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자비[慈悲]와 사랑[愛]의 마음이다.  남의 기쁨을 기뻐하고, 슬픔이 있으면 그 슬픔을 없애주려고 하는 마음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상호부조[相互扶助]의 마음이 굳건하고 자아심[自我心]이 희박[稀薄]하며, 상단계로 가면 갈 수록, 온전[穩全=흠·결점이 없는]한 마음에 가깝고, 대자연[大自然]의 의사[意思]인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되어 간다.

 

 如来は、衆生済度のみとなり、慈悲の心しかない。慈悲は大自然の心である。太陽、空気、水、大地・・・・・。生物が生きるに必要な環境を与え、与えて生かすのみしか知らないのが如来の正しさだ。
  여래[如来]는, 중생제도[衆生済度]만이 되며, 자비의 마음 밖에 없다.  자비는 대자연의 마음이다. 
태양, 공기, 물, 대지・・・・・。 생물이 생존하는데에 필요한 환경을 제공하고, 제공하고 소생시키는 것 밖에 모르는 것이 여래[如來=부처]의 올바름이다.

 

 幽界、霊界、神界、菩薩界、如来界の各階層には数多くの段階がつくられ、神界一つとっても、上段と下段ではものの考え方に相当なひらきがある。下段は知が先行し、上段は行ないにめざめてくる。
  유계, 영계, 신계, 보살계, 여래계의 각 계층에는 수 많은 단계가 만들어져 있고, 신계 하나에 있어서도, 상단과 하단에는 자체의 사고방식에 상당한 격차이 있다.  하단은 지식이 선행[다른 일에 앞서 행(行)함]하고, 상단은 실천에 눈을 떠 간다.

 

   意志の強さは、正しさの判断をどこにおいているかによって、大分ちがってくるだろう。
   의지가 강함은, 올바름의 판단[判断]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의해서, 대부분 달라져 올 것이다.

 

 目的と意志は、このような背景によって、私たちの心と行為を形作り、人それぞれの人格をつくっている。
   목적과 의지는,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를 형성하고, 사람 각자의 인격[人格]을 만들고 있다.

 

 客観的な判断力は、心の各機能の相互の働き、すなわち反省によって培われてくるだろう。正しさと客観性はこうした中から次第に向上し、神界から菩薩界へと進んでいくわけである。
   객관적인 판단력은, 마음의 각 기능의 상호의 작용, 즉 반성에 의해서 북돋아 올 것이다. 올바름과 객관성은 이러한 가운데에서 차례로 향상하고, 신계[神界]에서 보살계[菩薩界]로 진행해 가는 것이다.

 

 こうみてくると意志をどう働かすことが必要かが理(り)解(かい)された思う。
   이렇게 보면 의지[意志]를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 필요한지가 이해된다고 생각한다.

 

 心の各機能の凹凸をなくし、心の全体を通して意志につなぐ、こうす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の意志は仏国土建設にたいする深い自覚がうながされ、神の正しい意志として行為されてくるのである。 
  마음의 각 기능의 요철[凹凸]을 없애고, 마음의 전체[全体]를 통해서 의지[意志]로 연결하고, 이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들의 의지는 불국토 건설[仏国土建設]에 대한 깊은 자각[自覚]이 촉구되며, 신[神]의 올바른 의사[意思]로서 행위[行為]되어 오는 것이다.   Page 225~246


★참고로 우주계(9차원, 다른말로 하면 태양계), 여래계(8차원), 보살계(7차원), 신계(6차원), 영계(5차원), 유계

(4차원)입니다.
 



 結語 맺음 말

 

 次に、心の各機能と八正道との関係はどうなるのであろうか。
  다음에, 마음의 각 기능과 팔정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心が丸く大きく豊かであることは、それはそのまま八正道に適った心であるといえる。
   음이 둥글고 크고 풍요롭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대로 팔정도에 꼭맞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本能や感情が五官を通して想念行為されるとすれば、ものを正しく見ることも、思うことも、語ることもできないはずだ。知性にしても、これが単独で働き意志に伝わり行動すれば、これまた愛情のない冷たい人間になり、八正道の規範に反してくる。
   본능이나 감정이 오관을 통해서 상념 행위된다고 하면,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것도, 정서적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이라고 해도, 이것이 단독으로 작용해서 의지로 전해져서 행동하면, 이것 또한 애정의 없는 냉정한 인간이 되며, 팔정도의 규범에 반하여 온다.

 

 つまり、心が丸いということは八正道の規範に適っているわけであり、反対に、八正道の規範に合わせて反省し、その想念と行為を改めてゆくならば、心も丸く、豊かになってゆくということだ。
  즉, 마음이 둥글다고 하는 것은 팔정도의 규범에 들어맞고 있는 것이며, 반대로, 팔정도의 규범에 합해서 반성하고, 그 상념과 행위를 고쳐가게 되면, 마음도 둥글고, 풍요롭게 되어 간다고 하는 것이다.

 

 心の機能は魂そのものの機能であり、心の機能を理解しておかないと人間の正しい在り方を把握)することはできない。
  마음의 기능은 영혼 그 자체의 기능이며, 마음의 기능을 이해해 두지 않으면 인간의 올바른 본연의 모습[올바른 자세]을 파악할 수가 없다.

 

 その意味で、八正道の理解と同時に心の機能の把握が必要になってくるわけである。
   그 의미에서, 팔정도의 이해와 동시에 마음의 기능의 파악이 필요하게 되어 오는 것이다.

 

 また、八正道の尺度に照らして反省する場合に、まず円満な心の姿を想像することが大事になってくる。なぜかというと、ものを心に描く場合と、描かない場合では念の働きがちがってくるからである。
  또한, 팔정도의 척도에 비추어서 반성하는 경우에, 우선 원만한 마음의 자세를 상상하는 것이 중대사하게 되어 온다.  왜냐하면, 사물을 마음에 그리는 경우와, 그리지 않는 경우에는 생각의 작용이 달라져 오기 때문이다.

 

 発明発見には必ずその前に心に描く作業がなされている。飛行機や自動車、電車、その他あらゆる具体化されたモノには、そのモノをつくる前に発明者の心の中で具体化されているはずである。具体化されていなければ形の上に表現されようがないからである。
  발명 발견에는 반드시 그 전에 마음에 그리는 작업이 행해지고 있다.  비행기나 자동차, 전차, 기타 온갖 구체화된 물건[물질]에는, 그 물건을 만들기 전에 발명자의 마음 속에서 당연히 구체화되어 있을 것이다.  구체화되어 있지 않으면 형태 상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想念はモノを作る。
   상념은 사물[물질 물건]을 만든다.

 想念は行為である。
   상념은 행위이다.


 神は行為以前のその人の心を見て裁く。
 という意味がこれで理解されるであろう。
   신은 행위 이전의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심판한다[판가름한다].
   라고 하는 의미를 이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すでに触れたように行為の前には想念の働きがある。想念の働きのないものに行為はありようがないからだ。魔が働くとか、無意識の行為というものがあるが、これとても無意識以前に心に描いた意識活動があり、それを因として、ある瞬間に縁となって行為になって出てくるのである。
  이미 접한 것처럼 행위 전에는 상념의 작용이 있다. 상념의 작용이 없는 것으로 행위는 사물의 모양[상태 진상 실상 실정]이 없기 때문이다.  마귀[악령]이 작용이라든가, 무의식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있지만, 이렇다고 해도 무의식 이전에 마음에 그려진 의식활동이 있고,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어느 순간에 인연이 되어 행위로 되어 나오는 것이다.

 

 憎み、そしり、怒りの感情をいだきながら、表面はいかにも信心深い人もあるが、心を誤魔化すことは、やはり、できないものだ。心に描いたものは行為になって必ず現われてくるので、時の経過とともに形を変えてその人を苦しませる。
  증오, 비난, 분노의 감정을 품는다고 하면, 표면은 아무래도 신심이 깊은 사람도 있지만, 마음을 속이고 부정을 행하는 것은, 역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에 그려진 것은 행위로 되어 반드시 나타나는 것으써, 시간의 경과와 함께 형태를 바꿔서 그 사람을 괴롭혀 버린다.

 

 こうした意味から、想念はそのまま行為であるともいえるわけである。
   이러한 의미에서, 상념은 그대로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こういうように、丸い心を心の中で想像し描くことは非常に大事なことであり、そうして、その丸い心が何時どこで歪を作ったかを反省していくと、冷たい人間になっていたとすれば、知性の部分だけが発達して大きくなり、他の機能が小さくなっていたことが理解されてくる。
  이와 같이, 둥근 마음을 마음으로 상상하고 그리는 것은 상당히 중대사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 둥근 마음이 언제 어디에서 비뚤어짐을 만들었는가를 반성해 가면, 냉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고 하면, 지성의 부분만이 발달해서 크게 되어, 다른 기능이 작아지게 되어 있던 것이 이해되어 온다.

 

 意志が強く、人の言うことをきかない人というのは、知性が強く、愛情(感情)の少ない人に多い。つまり、感情の部分がカサカサに枯れていて、うるおいのなくなっている人である。
  의지가 강하다, 남의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이 강하고, 애정(감정)의 적은 사람이 많다.  즉, 감정의 부분이 바싹 말라 있고, 마음의 여유[인정미. 정감(情感)]가 죽어 있는 사람이다.

 

 反対に意志が弱く、人の意見で心がコロコロ変わる人は知性の働きより感情で動く人が多く、知性の部分が活動を停止しているといえる。
  반대로 의지가 약하다, 남의 의견에 마음이 대굴대굴 바뀌는 사람은 지성의 작용보다 감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많다, 지성의 부분이 활동을 정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何れも、八正道のどの部分に照らしても正道に適っていないわけである。
  어느 사람이나 모두, 팔정도의 어느 부분에 비추어도 정도[正道]에 들어맞고 있지 않은 것이다.

 

『心行の言魂』の八正道の解説の部分と照らし合わせながら、心の動きを正しく把握し、反省の資料とされたい。
『심행의 말』의 팔정도의 해설 부분에 비추어 맞추면서, 마음의 움직임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반성의 자료로 삼고 싶다.


  

 총  PAGE 151- 252



--------이것으로 마음의 기능편 상념, 본능, 감정, 이성, 지성, 의지편을 마칩니다.-------------


 

★예전에 마음의 기능을 나누어서 올렸던 것을, 한데 묶었습니다.   <열림>이란 번역한 것을 수정하였습니다.  격차로...






※출처 : 高橋信次(다카하시 신지)의 『反省のかなめ』【絶版】「第五章 心の機能の捉え方」「想念」本能感情理性知性理性意志

 

※출처 : http://yuki0hanseinokaname.seesa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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