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세상은 남에게 주는 것에 의해 모든 것이 잘 되도록 되어 있다. 본문

일기형식

세상은 남에게 주는 것에 의해 모든 것이 잘 되도록 되어 있다.

어둠의골짜기 2013. 2. 17. 21:27


이것 저것 그 때 그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번쩍하고 생각이 나곤 한다.

몇 일 전에, 감사하는 것에 의한다...라고 하는, 

생각이 났었는데 글을 올리지 못한 채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그 글귀가 어디에 있었나를, 오늘 재차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내가 올린 글들 중에서 찾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 올렸던 글에서, 다음의 핵심 귀절을 다시 올려 봅니다.



「正法(しょうほう)は愛に始まって、愛に終わるものです。」

「정법(正法)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愛の献身によって、人は生かされ生きています。

사랑의 헌신에 의해서, 사람은 소생되며 살고 있습니다.


「愛多ければ、成すこと多し」 もう一度申し上げます。 「愛多ければ、成すこと多し」

「사랑이 많으면,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랑이 많으면,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



   愛の原点  父母への反省と感謝(사랑의 원점 : 부모에 대한 반성과 감사)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先生)






이 분은, 1968년부터 1976년 6월 향년 48세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바로 이틀 전인가 삼일 전까지 하루에 세시간 정도밖에 잠을 잘 시간도 없이, 정법을 전하려 전국으로 강연하려 가시거나, 빙의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분들이 내방하거나 하면, 빙의치료 및 재차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정법을 간곡히 자세히 알기 쉽게, 설명하시느라 바로 앞 전생인,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인도에서의 석가모니로 계실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법의 되어버린 현세에 다시 정법을 설법하시었습니다.


현 시대에서의 불교는, 밀교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바뀌고 변질된 바인, 내가 알기로도 죽은 자들의 무덤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말법화된, 그릇된 불교가 변질되어 왔다.


장례식 문화만 보아도,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치르고는, 절에다가 위패를 모시는 그런 일들이 많다.  또한 사후에 좋은 곳, 즉 극락으로 잘 가게 하기 위해서, 천도제를 지낸다.

천도란, 바로 극락행이 아닌, 길 안내를 해 주기 위해, 불교 경전을 읽어 주는 것이다.  등등 얼마나, 

변질되어 버렸는지 새삼 난 알 수 있다.


또한, 유교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치르며 한식날이나 중추절에나 설명절에 성묘를 간다, 이 역시, 유교식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 분들이 생전에, 죽으면 무덤으로 간다고 굳게 믿어 왔고, 제삿날에는 제사를 먹으려 올 수 있다고 믿어 왔던 분들이다.


그래서, 죽은 후 무덤이란 곳을 아주 신성시하게 여겨 왔다.  과연, 그 죽어 버린, 고 다카하시 신지님의 말씀처럼, 죽은 시체를 버리는, 장소인, 무덤을 죽은 후 머무는 곳이라 믿기에, 그렇게 믿어 버린 사람들은, 실제로 그 무덤에 집착을 하고 있다.


내게 빙의로 있을 때, 공동묘지를 여러 차례 다녀봐서 안다.  시험을 하기 위해서, 실제로 내 병의 원인은, 저승에 있는 지옥에 있는 령들이 소행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어떤 무덤 앞에 서면, 나를 강한 힘으로 밀어내거나 했으며, 어떤 무덤을 고요하고 편안했다.

그리고 실제로 사이한 기운을 뿜어대는, 묘에는, 실제로 귀신이라 칭하는, 죽은 후 그 무덤에 집착한, 즉 없어져 버릴 자연으로 돌아갈 육신에 썪어버린 몸에 집착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편안한 묘는, 그 묘에 이승에 살다 죽은 이가 없었다.  그 무덤은, 말그래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살이 썪고 섞어 토양으로 변하고 뼈 역시 100년이 지나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다.  


내게 쓰고자 하는 글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 

곰곰히 이리저리 요리조리 생각해 보곤 한다, 과연 나는 감사하는 인간이었는가를!

그런 인간이 아니었었기에, 종말에 한창 때인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기나긴 7여년이란 시간동안,

병마에 시달렸었다.


이 세상에서는, 마음에 품은 생각이 바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운이라고 하는 운은, 

불운과 행운이 있는데, 시간이 걸린다.

농사의 예를 들면, 벼의 씨앗을 땅에 심자 말자, 바로 벼가 되어 수확하는 게 아닌 게 이 세상의 질서이며, 법이다. 

반대로 저세상은, 벼를 심자고 생각하자 마자 심은 상태이며 바로 수확이 되어버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세상은, 생각하자마자 바로 눈앞에 짠 하고, 현상으로 나타나 버린다.

그런 현상이, 이 세상에서 순식간에 뭐든지 생각하자마자 바로 현상화 되어 버린다면,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화를 내며, 질투를 하며, 비난(비방)을 하며, 지칠줄 모르는 욕망에 질주하며, 자아 아욕과 자기본위의 삶을 사는 분들이 상당수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이런 마음에 품은 의지나 의도를 품자 말자, 바로 형상으로 만듥어지지 않도록 신불은, 배려해 주신 곳이 바로 이 지구이다.


그래서, 그 유예기간을 주신 것이다.

잘못된 의지를 수정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으로, 행동으로 나쁜 짓(자아 아욕, 자기본위)를 했을 때, 바로 그 결과로, 나쁜 인, 즉 불행이라고 하는 운이 없는, 재수없는 일이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유예기간을 주신 것이다.

반성을 할,  그런데 그런 나쁜 짓을 했는데도 당분간 몇 달 혹은 적어도 2~3년간은, 잘 나간다. 그렇지만, 대부분 3년 혹은 5년 혹은 7년 정도에, 완전히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하여, 사업이 망하면서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럴 때, 욕을 한다.  난, 말이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아왔어,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불운이 닥칙단 말이야 하면서, 자신이 믿어왔던 그 무엇인가에 대해 강한 분노를 뿜어 대기 시작한다.


위의 글상자 형태로 색깔을 입혀 놓았듯이, 정법은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나며, 사랑이 많으면,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고 고 다카하시 신지님은, 말씀하시었다. 


사법이 있고, 정법이 있다.

사법(邪法) 말그대로 그릇된 법이고, 정법(正法) 올바른 법이다. 

자연은 늘 말없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인간이 손을 댄 자연은, 늘 망가지고 아파한다.

인간에 의해 멸종된 동식물은 상당하다. 

인간이 자기 몸둥아리를 뜯어먹고 있는 것이다. 제 살 파먹기다. 

무한대로 파이(자원)이 무궁무진한 것이 아닌 데 막 쓰고 있다.

그러면서, 불평하며 화를 낸다.  전혀 감사할 줄 모른다.  그래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럼 빙의된다.

즉,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去)........고로 법(法)이다.

물이 간다..........어디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그 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법이 없다.  거꾸로 흐른다고 하면 억지춘향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다.  一과 一, 한 사람과 한 사람, 그 둘이 하나가 된다.  서로 기대어 서 있다(人).

또 다른 사람이 옆에 있다.  인과 인과 함께 간다.  행(行)이다.  사람이 서로 기대고 함께 돕고 도우며 살기위해선, 서로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서로에게 속이지 않는 믿는 마음이 함께하며 함께 걸어간다.  함께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순조롭게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다.  그럼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싹이 돋아나게 된다. 


믿음이 있어야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그게 선한 의도의 믿음이건 악한 의도의 믿음이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그 마음속의 생각이 명령한다.

그 마음의 명령은, 바로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이다. 

그것을 변명하며, 이런저런 주변이 상황이 어쩌구 저쩌구, 형편이 어쩌구 하면서, 변명을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거짓말을 섞어서 말하게 된다.

이러니, 무슨 좋은 일이 집안에, 자기 자신에게 있을까?  당연히, 운수가 나쁘게 되어 버린다.


이 세상은, 행위에 의한 결과만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저울질하는 세상인 물질 문명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성과제라 하여, 성과를 많이 올려야만 유능한 사원이라고 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조금도 인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기 자신을 갈아먹는 배속의 위산과다처럼, 상처를 스스로에게 입히고 있다.


당신은, 이 세상에 1천년 만에 태어난 소중한 존재입니다, 라고 제가 말씀드린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마도, 웃고 말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당신은, 1천 5백년만에 태어났어요.  혹은 2천년만에 태어났어요. 하고 말한다면.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 블르그의 이름은, 신선한 미풍, 즉 산들바람입니다. 

말로 좋은 기운을 주며

마음으로 존중하며

행동으로 사랑을 품어 꼬옥 안아보세.....라고 글귀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중증빙의일 때,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굳은 마음으로, 소망으로, 생각해 낸, 내 미래의 모습이고 싶은 마음의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수행 수행한다고 합니다.  수(修) 닦다, 행(行) 행한다.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다, 혹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가꾼다, 는 의미로 전 해석하고 싶습니다. 

행위 이전에 생각이 먼저 있어야만, 행위로 나타나는 게 이 세상인 것처럼, 우리의 주변 모든 상황들이, 나를 시험합니다.


늘 시험하는 곳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신약성서에 나왔지만, 

저는, 반대로, 오히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라고,,,,,,,,,,,,,,,,,,,,,,,,,,,,,,,,,,라는 식으로 변경하고 싶습니다.


늘, 의지하려는, 그런 말귀들이 글귀들이 솔로몬의 애가나 잠언이나 시편에 보면, 그 외에 보면, 많이 보입니다.  도와달라, 달라고만 하는, 말들이, 글귀들이...그래서 그런지, 성경은, 거의 안 봅니다.


그래서 그랬나요.

구약성서가 기록된 연대는, 기원전 약 4000년 경이었죠. 

지금이 시대가 기원 후 2000년이니,  인간의 역사는, 이 대로 보면, 7000년도 못 되는 짧은 시기가 되는데, 

이런 논리로 본다면, 현대의 기독교는, 윤회를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기록상의 글귀가 되게 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리 믿어 왔으니까요.


불가사의한, 있을 수 없는, 망상이나 다름없는, 나약한 자의 불평인 듯한, 현상들을 수년 동안 경험하고 보니, 세상은 크고 넓구나 아!~ 마음이 세계는, 무한대로구나.  하는 것을.


제 글을, 제 블로그의 가르침의 글의 내용들을 절대로 믿으라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읽어보고 생각으로만 끝나는 사람, 

행동으로 옮겨보는 사람 등등 각자의 자유의지가 있으니까요. 

이 자유의지는, 신불의 주신 고유한, 신불자신조차도 침범할 수 없는, 숭고하고 고귀한 창조의 능력이니까요.


~

이제야 생각이 글을 쓰다보니, 납니다.

신앙에 대해서요.

누구나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카하시 신지님께서, 그게 사실입니다. 

그게 우리들은 흔히 종교라는 이름이, 신을 향한, 눈에 안 보이는, 이 세상에서 두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못한, 그런 신들이라 칭하는 그런 존재를 믿고 의지하며 빌고 비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음악가는 음악을 신앙으로, 

학자는 그 분야에 신앙을.

기술자는 자기분야의 그 기술에 신앙을.

주부는 자녀돌보기에 신앙을

수전노는 돈에 신앙을.

장사꾼은 그 장사가 잘되길 바라는 믿음으로 행하는 신앙을.

등등

모든 삶에 자기들이 꿈꾸면서 행하는 그 모든 행위가 바로 신앙이라고 풀어서 말하고 싶습니다. 

과연,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요즘 세상엔, 상처를 입고 사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길어야 몇 달이면, 다 완쾌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말로 들은, 그 상처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도 새살이 돋아나지 않은 채 다음세상까지 가져가서 다시 복습하며,

다시 새살이 돋아나길 바라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윤회합니다. 

환생만 윤회가 아니며, 생각도, 감사도, 미움도, 비방도, 비난도, 질투도, 모든 것이 윤회합니다.


제가 출사, 사진찍으려 다니던 2~30대 초반까지, 숲속길이나 길가 시골길이나 바닷가길이나, 여러 곳은 다녀 보았는데, 그 중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 죽어버린 오래된 세월이 흐른 듯한, 내 나이보다 더 몇 배는 될 듯한 썩은 나무에서, 싹이 돋아나는,

새싹을 볼 때, 아~ 하고 감탄을 하곤 했습니다.

다 죽어버린 그 나무에서, 그 나무의 원래 모습과 똑같은, 새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움을.


내 딸 서영이가 시작되는 시간부터, 방송은 보지 않고, 들으면서, 지금에 왔습니다. 방금 전 9시 15분경에 끝났나 봅니다.  


끝맺는 말로, 입으로 말로 나타내는 말로도 사람을 상처를 주거나, 혹은 화를 복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더 더욱, 더 무서운 일을 초래하기도 하고, 기적을 생기게 하는 것은, 그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다름 아닌 그것이란 것을, 끝맺는 말로 오늘은 마치려 합니다.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년에 말씀하시길, 행위 이전에 생각을 늘 경계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생각을.

생각은 곧 그 사람이 마음이며, 그 사람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선천적 장님은, 기감이 아주 뛰어난다고 합니다.

사물을, 마음의 파동으로 느끼고 보는 듯 합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걸으라 하면, 옴짝달짝도 못 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사는 분들이 많은 이 세상입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안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Epitaph(묘비명)이라고 하는, 제가 17살인가 일 때, 주로 듯던 우울한 장속곡같은 리듬이 이 곳을 즐겨 듣곤 했습니다.


당시에 내가 죽을 때 과연 묘비에 뭐라고 쓸까?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수전노의 묘비명은 아니길...나는 과연 그럴까 생각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개그 콘서트에서 웃고 떠들고 하고 있네요.

순간의 웃음도 릴렉스하게 하여 좋지만, 늘 흐믓하게 미소짓는 나날이 되는 날이고 싶습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발견하여, 그 맑은 물을 한 모금 마실 때,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스며듭니다.

그런 옹달샘과 같은, 님들이 되어 보는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배경음악은, 새벽 발걸음 이라는 12분 분량이 곡입니다. 

12분 동안이라도 차분이 감상해 보세요. 

새벽녘에 숲속에 오솔길을 아침햇살을 맞으며, 호젓하게 걷는 그대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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