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미풍
왜「엄마(おっ母さん)」라고 말하며 죽는가? 왜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이라고 말하는가? 본문
아래의 말은, 2013년 8월의 글입니다.
아주 오랜 만에, 가르침에 글에 새로운 글을 올립니다.
여러 권의 책도 있지만, 시간이 많이 걸려서 미룬 것도 있고, 아주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하며, 번역 중, 글자 특히, 고유명사(특히 지명이나 숫자) 상에, 이건 아니다, 라고 해서, 거의 완성 직전에, 번역을 미룬 것도 있습니다.
전 한 글자라도 이상하면, 아에 블로그에 올리지 않습니다.
제가 읽어 보고, 이건, 신지님의 말씀도, 그 분의 수제자이신 전생에 사리불님이, 글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올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기존에 올린 수십권의 내용이 글들이, 가르침의 글에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블로그가 존재하므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2013년 8월 25일 새벽 5시 반.
이 당시는, 만 8년, 그리고 정확히 10년 동안, 중증 빙의로, 고생하다가, 완전히 100% 완치된 후, 약 20개월 후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 오셔서, 2016년 이전의 글들이나, 2015년 이전의 글들은, 훨씬 이전에, 빙의로 아플 때,
따로 따로 나뉘어져 올렸던 것을, 합본으로 올린 글들이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男の役割と女の役割 - 1 ・・・・・ キリストの言葉から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 1 ・・・・・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男の役割と女の役割 - 2 ・・・・・ 釈尊の教えから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 2 ・・・・・ 석존(釋尊)의 가르침에서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선생님의 수제자
소노가시라 히로치가(園頭廣周)선생님
본래의 제목입니다, 사람들이 잘 안 보시는 것 같아서, 제목을 엄마, 에 대한 것으로 올렸습니다.
男の役割と女の役割 - 1 ・・・・・ キリストの言葉から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 1 ・・・・・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園頭広周先生(소노가시라 히로치카)선생님
そのがしら ひろちか(소노가시라 히로치카)선생님 생전의 모습
1.心温まる話 (마음이 흐뭇해지는 이야기)
2.心が寒くなる話、恐ろしくなる話(마음이 오싹해지는 이야기, 무서워지는 이야기)
3.結婚・離婚 (결혼과 이혼)
4.なぜ、女は長い髪を誇りとするのであるか(왜,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것일까?)
5.聖書と私(성서[성경]나 나)
6.男女は平等ではないのか(남녀는 평등하지 않은 것인가?)
心温まる話
마음의 흐뭇해지는 이야기
昨年11月、筑波の研修会が終わって私はある所に行った。
작년 11월, 쓰쿠바(筑波)의 연수회가 끝나서 나는 어떤 곳으로 갔다.
その時そこのご主人が次のような話をして下さった。
그맘때 가장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そこの家族構成は次の通りである。
그 가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父/母/長男-高校1年/長女-小学校6年/次女-小学校4年/三女-小学校2年 ・・・ 合計6人
아버지/어머니/장남-고등학교 1학년/장녀-초등학교 6학년/차녀-초등학교 4학년/막내딸-초등학교 2학년 ・・・ 합계 6명
今頃子供4人はめずらしい方である。
요즘 아이 4명은 좀처럼 보기 힘든 편이다.
「家内が研修会に行ったその翌日、長男はいつも弁当を持って行くんですが家内がいないので、「お前は明日はパンでも買って食べなさい」と言ったら、あの女の子たちが、「お父さん、それはダメ、私達がお弁当作る」と言うんです。「いや、お兄ちゃんは朝が早いから、お前達は寝ていなさい」と言ったんですが、あの三人が六時に起きてお兄ちゃんの弁当を作って持たしてやったんです。我が子ながら立派なものだと思いました。そうして言うのです。「女は男に、お昼にパンを食べさせるようじゃダメ、朝もチャンとご飯を食べさせてやらなければ」そのお母さんは言われた。「長男は、あの小さな妹達が弁当を作ってくれたことにすっかり感激して、学校で「俺はいい妹達を持って幸せだ。妹達が弁当作ってくれた」と言ったら同級生達が「その弁当を見せろ」とみんな寄って来たと言うのです」と。私が泊まったその日の夕食も、その女の子達が作ってくれたのであった。
「아내(家内)가 연수회에 간 그 다음날, 장남은 도시락을 가지려 갔지만 아내(家内)가 없어서, 「너는 내일은 빵이라도 사서 먹으라」고 말했더니, 저 여자 아이들(딸들이), 「아버지, 그건 싫어요, 저희들이 도시락을 만들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냐, 오빠는 아침 일찍이니까, 너희들은 자라」고 말한 것인데요, 저 세 사람(세 자매)이 6시에 일어나서 오빠 도시락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 아이지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점심에 빵을 먹이는 식은 좋지 않다, 아침도 제대로 밥을 먹여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어머니는 말했다. 「장남은, 저 어린 동생들이 도시락을 만들어 준 것에 몹시 감격하여, 학교에서「나는 좋은 여동생들을 가져서 행복해. 여동생들이 도시락을 만들어 주었어」라고 말하자 동급생들이「그 도시락을 보여줘」라며 모두 다가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제가 묵었던 그 날 저녁밥도, 그 여자 아이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そのお母さんという人は、高校二年生までは、お父さんが早く亡くなられたせいもあって親に反抗期であったのが、私が研修会を開いて「汝の父母に感謝せよ」という話をして以来、すっかり考え方を変えて、結婚してからはずっと「女の正しい生き方とは」ということを追及して来て四人の子の母親である。
그 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도 있고 부모에게 반항기였던 것이었지만, 제가 연수회를 열고 「네 부모에게 감사하라」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완전히 사고방식을 바꾸고, 결혼하고 나서 줄곧「여자의 올바른 생활태도란」이라고 하는 것을 추급해 온 4명의 자녀의 어머니이다.
そのお母さんは言うのである。
그 어머니는 말하는 것이다.
「今のお母さんたちの考えは間違っていると思うのです。子供が小学校へ行くようになったから暇になったから働きに出ると言っている。子供が小学校、中学校へ行っている時分が一番家庭的な躾や家事、特に女の子は女の役割を教える時期だと思うのです。PTAの役員を今しているんですが、殆んどのお母さんたちが働きに行っていて、働きに出ていないのは私だけです。少しばかりの金を求めて家を出て子供を台なしにする。私は主人の給料はそんなに多くないですが、それでも結構家族六人が幸せにやって行けます。
「지금의 어머니들의 사고방식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학교에 간 후에 짬이 났기 때문에 일하려 나간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중학교에 가 있는 때쯤의 가장 가정적인 가정교육(躾:예의범절)이나 가사(家事:집안 일), 특히 여자 아이는 여자의 역할을 가르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PTA (Parent-Teacher Association :학부형회)의 역원을 지금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일하려 가 있고, 일하려 가 있지 않은 것은 저뿐입니다. 약간의 돈을 벌려고 집을 나가서 아이을 망칩니다(子供を台なしにする :자식을 요절냅니다). 저는 남편의 급료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런데도 나무랄 데 없는 가족 6명이 행복하게 지내려 합니다.
ある時、私の家にPTAの婦人幹部四人が集まったのです。その中に一人、ご主人が一流商社に勤めている人があったんですがその集まりが終わった後、その人から電話があったんです。
어느 때, 제 집에 PTA (Parent-Teacher Association :학부형회)의 부인 간부 4명이 모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바깥양반이 일류상사(一流商社)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모임이 끝난 후,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있었습니다.
「あなたの家は瞬間湯沸かし器もないし電気炊飯器もないし、あなたのバイタリティーは全く魅力的だわ」と。女というものは、夫を生かし子供を生かして行く事の中に女の幸せはあると思うのです」と。
「당신의 집은 순간 온수기도 없고 전기 밥솥도 없지만, 당신의 바이텔러티(vitality :생기)는 완전히 매력적이예요」라고. 여자라고 하는 사람은, 남편을 살리고 아이(자식)을 살려 가는 일 속에 여자의 행복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その人は、夫や四人の子供にかかりきりでいる訳ではない。PTAの役員もすれば勿論正法会で世話もして、人が集まる時には二十人分位の昼飯は電気炊飯器なしでもサッと作って出すし、趣味として絵や刺しゅうなども立派に勉強しているし全く感心する。
그 사람은, 남편이나 4명의 자식에게 꼬박 붙어 있는(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PTA (Parent-Teacher Association :학부형회)의 역원도 하면서 물론 정법회에서 도움도 주고, 사람이 모일 때에는 20인분 정도의 점심밥은 전기 밥솥이 없어도 즉시 만들어 내고, 취미로 그림이나 수를 놓는 일 등도 훌륭하게 공부하고 있으며 완전히 탄복했습니다.
そのご主人は言われる。
그 바깥양반은 말한다.
「男が客を連れて帰った時、女に嫌な顔をされることほど癪に障ることはないと思うのですが、
その点うちの家内は感心ですな。何人連れて帰っても、ひとつも嫌な顔をせずもてなしてくれますから、
これはありがたいです」
「남자가 손님을 데리고 귀가했을 때, 여자가 싫은 기색을 하는 것만큼 부화가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점에 있어서 우리 집사람은 기특하지요. 몇 명이나 데리고 귀가해도, 전혀 싫은 기색을 하지 않고 대접해 주니까, 이 점은 고맙습니다」
心が寒くなる話、恐ろしくなる話
마음이 오싹해지는 이야기, 무서워지는 이야기
結婚してまだ半年にもならないというのにその妻は、朝の食事も作らず寝床の中から「行ってらっしゃい」と言うということである。駅で牛乳瓶を片手にパンの立ち喰いをやったり、ソバをすすったりしている人が相当に多いのは、殆んどがそういう奥さんを持っているのではなかろうか。夫にそんなことをやらせていたのでは、若いうちこそそれでいいかもしれないが夫の体は早くくたびれてしまうのではなかろうか。夫が早くダメになって困るのはその妻なのではなかろうか。
결혼하고 아직 반년도 안 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내는, 아침 식사도 만들지 않고 침상(잠자리) 안에서 「다녀오세요(行ってらっしゃい)」라고 말한다고 하는 일이다. 역에서 우유병을 한쪽 손에 들고 빵을 서서 먹거나, 메밀국수를 후루룩거리며 먹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것은, 대부분이 그러한 부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남편에게 그런 짓을 하게 하고 있던 것은, 젊을 때만은 좋을지도 모르지만 남편의 몸은 빨리 지쳐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남편이 일찍 못쓰게 되어 애를 먹는 것은 그 아내가 아닌가요?
夫のことも考えないエゴの固まりである若い妻たちに、お兄ちゃんに朝の食事をさせてちゃんと弁当を持たせてやった三人の小学生の話を聞かせてやりたい。
남편의 일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 덩어리인 젊은 아내들에게, 오빠에게 아침 식사를 먹이고 어김없이 도시락을 들려 보내 준 3명(세자매)의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私は今の若い妻たちが吸血鬼に見えたことがあった。
저는 지금의 젊은 아내들이 흡혈귀로 보인 적이 있었다.
ある所へ講演に行った。その時に聞いた話である。その人は長男に嫁をもらった。その奥さんは銀行に十年勤めていた人だそうであるが、新婚旅行から帰って来たその翌日、そのお母さんに「あの人の生命保険はいくら描けてあるんですか」と聞いたのだそうである。生命保険というものは、夫の側が、もし万一ということを考えて妻への愛情として自発的に掛けるのは美しいと思うが、妻の側から要求するのは夫の心を寒くさせるのではなかろうか。気の強い妻から強制的に保険を掛けさせられて「私は生命保険を掛けるために働いているようなものです」とやけ酒を飲んでいる人の話を聞いた事がある。その人の奥さんはそのご主人の身内の人達に「うちのお父ちゃんが死んでも保険が何千万円掛けてあるから、私は生活に困らないからいいですよ」と言っているのだそうである。無神経というのか非常識さにも程がると思うことであった。
어떤 곳으로 강연하려 갔다. 그 때에 들은 이야기이다. 그 사람은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그 부인은 은행에 10년 근무하고 있던 사람이라는데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 다음날, 그 어머니에게 「저 사람의 생명보험은 얼마나 그리고 있나요?」물었다고 한다. 생명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남편 측이, 만약 만일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서 아내에 대한 애정으로서 자발적으로 드는 것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아내측에서 요구하는 것은 남편의 마음을 오싹해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고집 쎈 아내에게서 강제적으로 보험을 들게 해서 「저는 생명보험금을 불입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홧김에 술을 들이키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사람의 부인은 그 바깥양반의 집안 사람들에게 「내 남편(うちのお父ちゃん)이 죽어도 보험이 몇 천만엔 불입하고 있으니까, 나는 생활에 걱정이 없으니까 좋아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무신경(無神経)이라고 하는 것인지 몰상식해도 분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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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っと腹立たしい悲しい思いをしたのはある新聞の「定年前の夫を持った妻の中には夫の退職金を目当てに離婚をして、その退職金を慰謝料としてもらって優雅な暮らしをしようと待ち構えている妻が増えつつある」という記事を読んだ時であった。定年で仕事も辞め、退職金を妻に巻き揚げられた男はその後の人生をどうやって生きて行くのであろうか。
더 화가 나는 슬픈 기분이 든 것은 어느 신문의 「정년전의 남편을 가진 아내 중에는 남편의 퇴직금을 표적(목표)으로 삼고 결혼을 해서, 그 퇴직금을 위자료로 받아서 우아한 생활을 하겠다고 하며 기다리고 있는 아내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라고 하는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정년으로 일자리를 해고당하고, 퇴직금을 아내에게 빼앗긴 남자는 그 후의 인생을 어떻게 해서 살아갈 것인가?
ある人達は「そんな女はごく僅かですよ、気にすることはないですよ」と言うかも知れない。しかし、私は全国を歩いて、そういう妻が増えている事を聞いているのである。ある人も言っておられた。「応接セットを動かして掃除しているうちに、ギックリ腰になって動けなくなってしまった。近所にいる長男の嫁に電話して「ちょっと鍼灸医の所まで連れて行ってくれない」と言ったら、「私はお母さんのために嫁に来たんじゃありません。私は○○さんの嫁に来たんです。私は○○さんを独占したいんです」それを聞いて私は悲しくて悲しくて、嫁が私の家に来た時は、その日の夕方の分にと買って来た野菜や缶詰めも持たせてやったりしていたのに」と嘆いていられた。
어떤 사람들은 「그런 여자는 극히 적지요,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전국을 걸어서, 그러한 아내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말하고 계셨다. 「응접세트를 움직이며 청소를 하는 사이에, 갑자기 삐끗하여 생기는 요통(ギックリ腰)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근처에 있는 장남의 며느리에게 전화해서「잠깐 침구사(鍼灸医:침과 뜸을 뜨는 의사)가 있는 데까지 데려다 주지 않겠니?」라고 말했더니, 「저는 어머니 때문에 시집 온게 아닙니다. 저는 ○○씨에게 시집 온 거에요. 저는 ○○씨를 독점하고 있거든요」그것을 들은 저는 슬프고 슬퍼서, 며느리가 저의 집에 왔을 때는, 그 날 해질녘무렵에 사 왔던 야채랑 통조림도 들려 보내주거나 했었는데...」라고 하며 탄식(슬퍼)하고 계셨다.
どうしてこういう若い女達が増えて来たのであろうか。終戦後の民主主義、男女平等という風潮の中で、学校教育でも男の役割と女の役割は教育されず、特に家庭において、親は子供を甘やかすだけで女の役割が躾けられていない結果だとしか言いようがない。
어째서 이러한 젊은 여자들이 증가해 온 것일까요? 종전 후의 민주주의, 남녀평등이라고 하는 풍조 속에서, 학교 교육이라고 해도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은 교육시키지 않고, 특히 가정에 있어서, 부모는 아이(자식)이 응석을 받아 줄 뿐이며 여자의 역할이 가정교육(예의범절)을 가르치지 않은 결과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こんな話を聞かされるたびに昔の人が「嫁を貰うなら親を貰え」と言った言葉は真実だと思うことであった。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옛 사람이, 「며느리를 맞아들일 때는 부모를 보라(嫁を貰うなら親を貰え)」고 말한 말은 진실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そういう若い女の人達が増えて来ているのは、その人達が悪いというよりも、その人達は女の役割というものを教えられていないからだと思う。知っていればそういう事はなかったのに知らなかったばかりに不幸になった失敗したということは沢山ある。だからお釈迦さまは、「無明」即ち「知らない」と言うことが苦しみの根源であると説かれたのである。キリストは男と女の役割についてどのように教えていられたかを考えてみたい。
그런 젊은 여자들이 증가해 오고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기 보다도, 그 사람들은 여자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침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있으면 그런 일은 없을텐데 알지 못한 것만으로 불행하게 된 실패했다고 하는 일은 많다. 그래서 부처님(お釈迦さま)는,「무명(無明)」즉「모른다(知らない)」라고 말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원(苦しみの根源)이라고 설법한 것이다. 그리스도(Christ)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結婚 離婚
결혼 이혼
マタイ伝 第十九章
마태 복음 제19장
「人を造り給いしもの、元始より之を男と女とに造り、而(しか)して、かかる故に、人は父母を離れ、その妻に合いて、二人のもの一體(いったい)となるべし。されば、はや二人にはあらず一體なり。この故に神の合わせ給いし者は、人これを離すべからず」
「사람을 만드신 것은, 만물의 근원(元始)을 이용하여(より之を)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그리고나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人は父母を離れ)、그 아내와 합쳐져서(その妻に合いて)、두 사람 자체가 한 몸이 될 것이다(二人のもの一體(いったい)となるべし)。그런고로(されば)、본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はや二人にはあらず一體なり)。그러므로 신이 합쳐주신 사람은 (この故に神の合わせ給いし者は)、사람이 그것을 갈라 놓을 수 없다(人これを離すべからず)」
★마태복음 19장 4~6장과 비교해 보세요.
コリント前書 第七章
고린도전서 제7장
「われ婚姻したる者に命ず、命ずるものは我(キリスト)に非ず主(神)なり、妻は夫と別れるべからず。もし別れる事あらば、嫁がずしているか、又は夫と和らげ。夫もまた妻を去るべからず。女に不信者なる夫ありて偕(とも)にいることを可(よし)とせば、之を去るな。そは不信者なる夫は妻により潔(きよ)くなり、不信者なる妻は夫によりて潔くなりたればなり、然(さ)なくば汝らの子供は潔からず。然れば今は潔きものなり。不信者みずから離れ去らば、その離るるに任せよ。斯(かく)のごとき事あらば、兄弟または姉妹、もはや繋(つな)がるる所なし。神の汝らを召し給へるは平和を得させん為なり。妻よ、汝いかで夫を救い得るや否やを知らん、夫よ、汝いかで妻を救い得るや否やを知らん。唯おのおの主の分ち賜ふところ、神の召し給ふところに循(したが)ひて歩むべし」
「내가 결혼한 사람에게 명하니, 명하는 것은 내(그리스도)가 아니라 주(主)(신(神))이며,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헤어질 것이면, 시집가지 말고 있든지, 또는 남편과 누그려뜨려라. 남편도 또한 아내와 헤어지지(妻を去る:이혼하지) 말아야 한다. 여자에게 불신하는 마음을 가진 남편이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을 좋다고 하면, 이를 떠나지 말라. 그 사람은 불신하는 마음을 가진 남편은 아내로 인해 깨끗(떳떳)해지며, 불신하는 마음을 가진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떳떳(깨끗)해지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자식 또한 떳떳(깨끗)해지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지금은 맑고 깨끗하다. 불신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이혼하고자 하면(헤어지려고 하면), 그 헤어짐에 맡겨라.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형제 또는 자매, 이미 얽매일(이어질, 희망을 걸) 곳이 없다. 신의 너희를 부르심은 평화를 얻게 하기 위함이라. 아내여, 네가 어떻게 해서든 남편을 도울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라, 남편이여, 네가 어떻게 해서든 아내를 도울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라. 오직 각자의 신(主)의 나누어 주시는 곳, 신의 불러 주시는 곳에 따라서 걸어야 한다 」
キリストは独身であって夫婦生活の経験はない。聖書を読んで思うことは、夫婦生活の経験を持たれなかったキリストが、夫と妻の在り方について実に的確な教えをしていられることである。そうしてその教えられる所は、お釈迦様が説かれたことと全く一致していることである。またそれは、日本の古神道が教えている男女の在り方、夫婦の在り方とも一致している事である。この男女・夫婦の在り方の一致点から見ても神理は一つであるといえるのである。
그리스도는 독신이며 부부 생활의 경험은 없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부부 생활의 경험을 갖지 못한 그리스도가, 남편과 아내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 실로 적확(的確:초점을 벗어나지 않고 확실한)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가르쳐 주시는 바는, 부처님(お釈迦様)이 설법하신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일본의 고신도(古神道)가 가르치고 있는 남녀의 본연의 모습, 부부의 본연의 모습과도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이 남녀・부부의 본연의 모습의 일치점에서 봐도 신리(神理)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キリストの言葉を解説してみよう。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설해 보겠습니다.
マタイ伝 第十九章
마태복음 제19장
人を造り給いしものとは神のことである。神は元始にこの世界を陽と陰とに分けて造られ、人を男と女とに造られた。その男と女は夫となり妻となり、子を産んで父母となり子は成長して親と離れて結婚をし、二人は一体となる。だからその二人はもはや個々別々の二人ではなく一体である。このように結婚というものは、神のみ心によって結ばれたものなのであるから、自我をむき出しにして離婚をしてはならない。
사람을 만드신 분이란 신(神)이다. 신(神)은 원시(元始: 만물의 근원)에 이 세계를 양(陽)과 음(陰)으로 나누어 만드시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 남자와 여자는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며 아이(子:자식)은 성장해서 부모와 헤어져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일체(一体:한몸)이 된다. 그래서그 두 사람은 이제는 각자(個々別々)의 두 사람이 아니며 한몸(一体)이다. 이와 같이 결혼(結婚)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신(神のみ)의 마음에 의해서 정하신 바인 것이기 때문에, 자아(自我)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결혼해서는 안 된다.
二人は一体となるということは、夫と妻とは心を一つにして生きなく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夫と妻の心が個々バラバラでいつも争い対立しているような事で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夫が出掛けるのに朝食も準備せず寝床の中から「いってらっしゃい」という妻は、夫の心と一つになっていない利己主義者で自我ばかりが強い女である。
두 사람은 한몸(一体)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는 마음을 하나로해서(心を一つにして:한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며,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각자 제멋대로 늘 싸우며 대립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남편이 나가는데(夫が出掛ける출근하는데도) 아침밥도 준비하지 않고 침상(寝床) 속에서 「다녀오세요(いってらっしゃい)」라고 하는 아내는, 남편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이며 자아(自我)만이 강한 여자이다.
ともかく夫婦というものは心を一つにして生き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結婚というものは縁によって神が自然に結ばせられるのであるから、人が勝手に離縁させるという様な事はしてはならない。
그것은 그렇다치고 부부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해서(心を一つにして:한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인연(縁)에 의해서 신(神)이 자연히 맺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제멋대로 이혼(離縁:이연)시킨다고 하는 것과 같은 짓은 해서는 안 된다.
★이혼(離縁:이연)의 또 다른 뜻인, 파양(罷養)은, 양자로 입적하여 성립되었던 양친자(養親子) 관계를 끊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コリント前書 第七章
고린도전서 제7장
「われ婚姻したる者に命ず、命ずるものはキリストにあらず、神なり」
「내가 결혼한 사람에게 명하니, 명하는 것은 내(그리스도)가 아니라 주(主)(신(神))이니라」
この言葉の中に私はキリストが神の権威を持ってこれこそが神理であるといっていられるその権威を感ずる。
이 말 속에 저는 그리스도가 신(神)의 권위를 가지며 그야말로 신리(神理)이라고 말하고 계시는 그 권위를 느낀다.
妻は夫と別れてはならない。解れる位だったら最初から結婚しなければいいのである。結婚というものは、夫と心を一つにして、この人生の目的を果たして行く事を決心してするものなのであるから、一旦、そう決心して結婚したからには妻は別れてはならない。だから必ず夫と調和しなさい。夫もまた勝手に妻を離婚するというようなことをしてはならない。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된다. 헤어질 정도라면(解れる位だったら) 최초부터 결혼하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결혼(結婚)이라고 하는 것은, 남편과 마음을 하나로 합쳐서, 이 인생의 목적(目的)을 완수해 갈 것을 결심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결심(決心)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아내는 헤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남편(夫)과 조화(調和)하십시오. 남편도 또한 제멋대로 아내(妻)와 이혼(離婚)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妻が信仰を持っていて夫が信仰しない場合は、不信仰の夫は信仰している妻によって救われ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り、また、夫が信仰していて妻が不信仰である場合は、その妻は夫の姿を見て救われ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そのようにして、お互いに相手の姿を見て心の勉強、救いの体験によって魂を成長させ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が、そういう事をせずお互いに反目ばかりしていると子供が色々と問題を起こして子供のことで困らされることになる。だから相手の良きを素直に認めて向上を心掛けるならば必ず救われて幸せになるのである。
아내가 신앙(信仰)을 가지고 있으며 남편이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는, 불신앙(不信仰)의 남편은 신앙하고 있는 아내로 말미암아 구제되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또한, 남편(信仰)하고 있으며 아내가 불신앙인 경우는, 그 아내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구제되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상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공부(心の勉強), 구제의 체험(救いの体験)에 의해서 영혼(魂)을 성장시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하지 않고 서로 반목(反目)만 하고 있으면 자식(子供)이 여러 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며 자식(子供)의 일로 난처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의 좋음(良き)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향상(向上)을 명심하면 반드시 구제되어 행복해지는 것이다.
一方は正しい信仰をしているのに、一方は不信仰であるという場合、その不信仰をしている者が自ら進んで魂の勉強をしようとはせずに別れて行こうとする場合は、それは別れたいと言うままに分かれさせた方がよい。
한쪽은 올바른 신앙을 하고 있는데, 한쪽은 불신앙이라고 하는 경우, 그 불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진해서 영혼(魂)의 공부를 하려고는 하지 않고 헤어지겠다고 하는 경우는, 그것은 헤어지고 싶다고 하는 그대로 헤어지는 편이 좋다.
キリストは先に、別れるくらいだったら結婚しない方が良いのだし結婚した以上はどんなことがあっても夫婦和解しなさいと教えられたのであるが、信仰していない者が信仰している者の足を引っ張って信仰している者の向上意欲を阻害し、その不信仰者が別れると言い出した場合は、その夫婦は一緒にいる限りお互いの魂を傷つけ合っていささかも人間性の向上にならないのであるから、そういう場合は離婚してもいいと言っていられるのである。
그리스도는 앞서, 헤어질 정도라면 결혼(結婚)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고 결혼(結婚)한 이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부부가 화해하십시오라고 가르친 것인데, 신앙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신앙(信仰)하고 있는 사람의 발을 잡아당겨 신앙하고 있는 사람의 향상 의욕(向上意欲)을 저해(阻害)하고, 그 불신앙자(不信仰者)가 헤어지자고 말을 꺼낸 경우는, 그 부부(夫婦)는 옆에 있는 한(一緒にいる限り) 서로의 영혼(魂)을 서로 상처를 입히며 조금도 인간성(人間性)의 향상으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는 이혼(離婚)해도 좋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新婚旅行から帰ってくるとすぐ夫の母に、「あの人はいくら生命保険を掛けているんですか」と言ったその新妻の夫は、結婚してまだそう長くならないのに、「わしは男として色々夢があったが、あいつに足を引っ張られてもうなんにも出来ない」と嘆いているというのである。私はこれを聞いた時、交尾が終わると雄を食い殺す雌のカマキリを連想した。昔は「弱き者よ、汝の名は女なり」と言ったが最近は「汝の名は男なり」と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ようになって来たようである。ともに極端から極端でよろしくない。中道で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신혼 여행(新婚旅行)에서 돌아오자마자 남편의 어머니에게, 「저 사람은 얼마정도 생명보험(生命保険)을 들고 있나요?」라고 말한 그 신부(新妻)의 남편은, 결혼해서 아직 그렇게 오래살지 않았는데,「나는 남자로서 여러 가지 꿈이 있었지만, 저 여자에게 발목을 잡혀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들었을 때, 교미(交尾)가 끝나면 수컷을 물어뜯어 죽이는(雄を食い殺す) 암 사마귀(雌のカマキリ)을 연상(連想)했다. 옛날에는,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니라 」라고 말했지만 최근은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니라(汝の名は男なり)」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온 모양이다. 다 같이 극단(極端)에서 극단(極端)으로는 적당치 않다. 중도(中道)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魂を傷つけ合って結婚以前よりは心を暗くして一生を終わりそうであったら別れて独身でまた縁があったら再婚して、少なくとも結婚する以前よりは心を明るく大きくして一生を終わらないと生きていた甲斐がないのである。
영혼(魂)을 서로 상처를 주며 결혼 이전보다는 마음을 어둡게 해서 일생을 그렇게 끝내고 있다면 헤어져서 독신이며 또한 인연이 있으면 재혼해서, 적어도 결혼하기 이전 보다는 마음을 밝고 크게 해서 일생을 끝내지 않으면 살아온 보람이 없는 것이다.
たとえ夫婦の一方が信仰していないからと言って嘆く必要はないのである。もし不信仰の夫を持っているという人達は、そういう夫と結婚したことを嘆く必要はないのである。あなた方には、あなた方の心遣いと生活行為を通して如何にして夫を信仰の世界へ導くかという大事業が与えられてあるのである。その大事業に挑戦する事によってその妻の魂は向上していくのである。
비록 부부의 한쪽이 신앙하고 있지 않으니까라고 하며 탄식할 필요은 없는 것이다. 만약 불신앙의 남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남편과 결혼한 것을 탄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마음씀(心遣い:배려)와 생활 행위를 통해서 어떻게든 해서 남편을 신앙의 세계로 이끌까 라고 하는 대사업(大事業)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 대사업에 도전하는 것에 의해서 그 아내의 영혼(魂)은 향상되어 가는 것이다.
神が人を造られたのは、神は争いを起こすことを欲していられるのではなくして、平和を招来せんことを望んでいられるのであるから、妻である方々よ、あなた方はどうして夫の心を平和にして上げられるのであろうか。また、信仰を持つ夫よ、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妻の心を平和にしてや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ろうか。それは唯々、神が定められた男女・夫婦の役割に従って行く以外にないのである。
신(神)이 사람을 만드신 것은, 신(神)은 분쟁(争い:싸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니며, 평화를 초래하는 것을 바라고 계시는 것이므로, 아내인 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어떻게 남편의 마음을 평화(平和)롭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신앙을 갖고 있는 남편이여,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아내의 마음을 평화(平和)롭게 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로지, 신(神)이 정하신 남녀(男女)・부부(夫婦)의 역할(役割)에 따라 갈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なぜ、女は長い髪を誇りとするのであるか
왜, 여자는 긴 머리를 자랑하는 걸까?
女は古代から長い髪の毛を持つことを誇りとしてきた。女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長い髪の毛を持つものだと自然にそう思って誰も「なぜ女は男よりも長い髪の毛をし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に疑問を持たなかった。
여자는 고대부터 긴 머리카락을 갖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生まれながら:선천적으로) 긴 머리카락을 갖는 것이다 라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해서 누구나 「왜 여자는 남자보다도 긴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걸까?」라고 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日本では昔から「丈なす黒髪」とか「ぬば玉の黒髪」といって女は髪の毛を大事にして来た。昔の女性は、「夫に寝乱れた顔を見せてはならない」と、いつも夫より早く起きて寝乱れた髪をつくろい、ほんのりと薄化粧をして夫の起きるのを待ったものである。
일본(日本)에서는 옛부터「키만큼 긴 검은 머리카락(丈なす黒髪)」라든가「범부채 씨앗 같은 검은 머리카락(ぬば玉の黒髪)」이라고 말하며 여자는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겨 왔다. 옛날의 여성은, 「남편에게 잠자리에서 헝클어진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된다(夫に寝乱れた顔を見せてはならない)」라고 하며, 늘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서 잠자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발그스레하게 옅은 화장을 하고 남편의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終戦後、男女平等と言うようになって女はみどりの黒髪をバッサリと切ってしまった。その黒髪と共に切り捨ててはならない大事なものまで切り捨ててしまったようである。その切り捨てた物は何かとこの文の中から読み取って欲しいと思う。
종전(終戦:세계 제2차 대전) 후, 남녀 평등이라고 말하게 되어 여자는 푸른빛 머리카락(みどりの黒髪)을 싹둑 잘라 버렸다. 그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잘라서 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소중)한 것까지 잘라서 버려 버렸던 모양이다. 그 잘라서 버린 것은 무언가 하면 이 문장 속에서 내용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女が男よりも長い髪の毛を持つことについてキリストは次のように言っていられる。
여자가 남자보다도 긴 머리카락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계신다.
女が永い髪の毛を持っていることについて書かれたものは、このキリストの言葉以外には見当たらない。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쓰신 것은, 이 그리스도의 말 이외에는 눈에 뜨이지 않는다.
コリント前書 第十一章
고린도전서 제11장
我がキリストにならふ者なる如く、汝ら我にならふ者となれ。汝らは凡(すべ)ての事につきて我を憶え、且つ我が傳えし所をそのまま守るに因(よ)りて、我汝らを誉(ほ)む。されど我汝らが之を知らんことを願ふ。
내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처럼, 너는 나처럼 되어라, 너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기억하고, 한편으로 내가 전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는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를 칭찬한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이것을 알기를 바란다.
凡ての男の頭(かしら)はキリストなり、女の頭(かしら)は男なり、キリストの頭(かしら)は神なり。全ての男は祈りを為し、予言を為す時、頭に物を被るは其の頭を辱(はずかし)むるなり。全ての女は祈りをなし、予言を為す時、頭に物を被らぬは其の頭を辱むるなり。これ薙髪(ていはつ)と異なる事なし、女もし物を被らずば、髪をも剪(き)るべし。されど髪を剪り或いは薙(そ)ることを女の恥とせば、物を被るべし。男は神の像(かたち)、神の栄光なれば、頭に物を被るべきにあらず、されど女は男の光栄なり。男は女より出でずして、女は男より出で、男は女の為に造られずして、女は男の為に造られたればなり。この故に女は御使(みつか)い達の故によりて頭に権(けん)の徴(しるし)を戴(いただ)くべきなり。されど主に在りては、女は男に由(よ)らざるなく、男は女に由らざるなし。女の男より出でし如く、男は女によりて出づ。而(しか)して万物は皆神より出ずるなり。汝等(なんじら)自ら判断せよ。女の物を被らずして神に祈るは宜(よろ)しき事なのか。汝ら自然に知るにあらずや。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신(神)이니라.
모든 남자는 기도를 하고, 예언을 할 때, 머리에 물건을 쓰고 하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라.
모든 여자는 기도를 하고, 예언을 할 때, 머리에 물것을 쓰지 않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삭발(薙髪:머리털을 전부 깍음)과 다를 바 없고, 여자가 만약 물건을 쓰지 않으면, 머리카락을 깎아야 한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을 밀거나 혹은 깎는 것을 여자가 부끄럽게 여기면(수치스럽게 여기면), 물건을 써야 한다.
남자는 신(神)의 형상(像(かたち)), 신(神)의 영광(榮光)이기 때문에, 머리에 물건을 써서는 안 되며, 그렇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는 여자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여자는 남자에서 나오며,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만든게 아니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신불(神佛)의 사자들이기 때문에 머리에 권능의 증거(증표)를 머리 위에 얹어야 한다.
그렇지만 주(主)(신(神))에게 있어서는, 여자는 남자로 말미암지 않을 수 없고, 남자는 여자로 말미암지 않을 수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온 것과 같이, 남자는 여자로 말미암아 나온다. 그래서 만물은 다 신(神)에게서 나오느니라. 너희들은 스스로 판단(判斷)하라. 여자가 그것을 쓰지 않고 신(神)에게 기도함은 적절(적당)한 것인지? 너희들은 자연히 알지 못하겠느냐?
男、もし長き髪の毛あらば恥ずべきことにして、女もし長き髪の毛あらばその光栄なるを。それ女の髪の毛は被り物として賜りたるなり。
남자가, 만약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으면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것이며, 여자가 만약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으면 그것은 영광(光榮)인 것임을.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쓰개(被り物:머리에 쓰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내려 주신 것이니라.
3~15절
釈迦、キリストといわれる方は、神のみ心を誰よりも一番よく知って、その神の心を全人類に伝える使命を持たれた方であった。
석가(釈迦),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은, 신(神)의 마음(神のみ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며, 그 신(神)의 마음을 전인류에게 전하는 사명(使命)을 가지신 분이었다.
多くの宗教指導者達は誰々はこう言った。あの人はこう言ったといういい方をする。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개는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라고 하는 표현을 쓴다.
しかし釈迦、キリストは、それが神理である。神のみ心であると神の権能を持って言われるのである。それはまごう方なき(間違えようのない・確かな)絶対の神理である。
하지만 석가(釈迦), 그리스도는, 그것이 신리(神理)이다. 신(神)의 마음(神のみ心)과 신(神)의 권능을 가지고 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착각할게 없는(틀림없는・확실한) 절대의 신리(神理)이다.
我がキリストとは、イエス自身の内に内在する神であり全知全能である宇宙の創造主である神である。その神の前に私が願うと同じように、私がいうことは神のみ心なのであるからあなた方はまた私に願いなさい。
내가 그리스도란, 예수 자신 속에 내재하는 신(神)이며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주인 신(神)이다. 그 신(神) 앞에 내가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말하는 것은 신(神)의 마음인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또한 나에게 청하십시오.
あなた方は、私が知っていることを皆あなた方に伝えたように、そのことを守って実行してゆくならば私はあなた方を祝福する。色々と私が教えたうちで特に次のことは良く知ってもらいたい。
여러분들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여러분들에게 전한 것처럼, 그 일을 지키고 실행해 가면 나는 여러분들을 축복한다. 다양하게 내가 가르친 것 중에서 특히 다음의 것을 잘 알아 주었으면 한다.
男の頭(かしら)の上には救世主があり、女の頭の上には男がある。救世主の上には全知全能の神がある。男は神に祈る時、また予言をする時頭にかむりものを被るということは男の頭であるキリストを辱め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だから男は、そのままの心を持ってじかにキリストに、神に祈り且つまた予言をしなければいけない。
남자의 머리((かしら:머리털)) 위에는 구세주(救世主)가 있으며, 여자의 머리 위에는 남자가 있다. 구세주 위에는 전지전능한 신(神)이다. 남자는 신(神)에게 기도할 때, 또한 예언할 때 머리에 쓰개(かむりもの)를 쓴다고 하는 것은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대로 마음을 가지고 직접 그리스도에게, 신(神)에게 기도하며 한편으로는 또한 예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しかし、女は祈りをしたり予言をしたりする時に、頭にかむりものを被らないということは、キリストを汚し、神を汚すことになるのである。それは頭をつるつる坊主に剃ったことと同じことになるのであるから女はかむりものを被らなければならない。もし、かむりものを被るということが出来ないならば髪を剪(き)ってつるつる坊主にするべきである。しかし、髪の毛を剪ってつるつる坊主に男のようにすることは女として恥ずかしいことだと思うのであったならばかむりものを被りなさい。
하지만, 여자는 기도를 하거나 예언을 하거나 할 때에, 머리에 쓰개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럽히고, 신(神)을 더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중머리로 깎은 것과 같은 것이 되기 때문에 여자는 쓰개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쓰개를 쓴다고 하는 것을 할 수 없다면 머리를 반들반들한 중머리(坊主)로 깎아야 한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반들반들한 스님(坊主)인 남자처럼 하는 것은 여자로서 부끄러운(창피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쓰개를 쓰십시오.
男は神の姿に似せてつくられ、神の栄光を現わすためにつくられたのであるから頭にかむりものを被る必要はない。女は男の生命の栄光、尊厳の存在であって、男が女のために造られたことはないが、女は男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ある。
남자는 신(神)의 모습과 닮게 만들어졌고, 신(神)의 영광을 드러내기(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머리에 쓰개(かむりもの)를 쓸 필요는 없다. 여자는 남자의 생명의 영광(榮光), 존엄(尊嚴)의 존재이며,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キリストが出られたのはユダヤ教が大きな歪を持って説かれていた時代である。ユダヤ教では最初に男を造り、その男の肋骨を一本とって女をつくられたと説いていた。その為にこのような説き方をされたのである。しかしこの人間創造説は、男女の役割について説かれたものであって、男女ともに神の創造であり平等であることは直ぐ次にキリストが、男が女から生まれたということもなければ、女が男から生まれたということもない。女は男から生まれて来たのであるとこれまで永く伝えられてきたが、男もまた女からつくられたのであり、万物は皆神によってつくられたものであると言っていられることでわかる。
그리스도가 나온 것은 유대교가 큰 비뚤어짐(歪:왜곡)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던 시대이다. 유대교에서는 최초에 남자를 만들고, 그 남자의 늑골을 한개 취해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설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런 설교방식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인간 창조설은, 남녀의 역할에 대해서 설교한 것이며, 남녀 다 같이 신(神)의 창조이며 평등한 것임을 곧 이어서 그리스도가, 남자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일도 없으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일도 없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태어나온 것이라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전해져 왔지만, 남자도 또한 여자에게서 만들어진 것이며, 만물은 다 신(神)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キリストが出られた時代は、ユダヤ教が大きく歪められていて、キリストはそれを修正されるために出てこられたのであった。しかしやがてキリストはユダヤ教のラビの策略とローマ法王の命を奉ずる者によって磔刑になられるのである。そういう状勢の中で説かれたのであったから、なるべくユダヤ教徒達の反発を招かないように、かといって間違ったユダヤ教説に追随しないように苦心して説か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から、「されど主にありては」と前提して説か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だからしてまた、「汝ら自ら判断せよ」と言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
그리스도가 나온 시대는, 유대교가 크게 왜곡되어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것을 수정(修正)하기 위해서 나오신 것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랍비(Rabbi)의 책략(策略)과 로마 법왕의 명(命)을 받드는 자에 의해서 책형(磔刑:기둥에 묶어 찔러 죽이는 형벌)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한 정세(状勢) 속에서 설교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유대교도들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도록, 말하며 잘못된 유대교 설교에 추종(追随)하지 않도록 고심(苦心)하며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렇지만 주(主)에게 있어서는(されど主にありては)」이라고 전제(前提)하며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한,「너희들은 스스로 판단하라(汝ら自ら判断せよ)」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女の頭は男なりということは、妻という者は、神に祈る時に、自分の夫の生命を通し、夫に感謝し、夫を尊敬して祈らないと、その妻の祈りは効かれない。妻が夫を馬鹿にして夫を尻に敷いて祈ってもその祈りが効かれることは絶対にないということであり、それがウソであるかホントであるかは自分の廻りを見渡して見よ、そうすれば自然にそのことが判るであろうと言われるのである。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내라고 하는 사람은, 신(神)에게 기도할 때에, 자신의 남편의 생명을 통하고, 남편에게 감사하고, 남편을 존경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그 아내의 기도는 효력이 없다. 아내가 남편을 바보취급하며 남편을 깔아 뭉개며(남편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기도를 해도 기도가 효력이 있다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거짓인지 정말인지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라, 그렇게 하면 자연히 그 것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女という者は、必ず夫の生命を通して祈ら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であることの象徴として女は長い髪の毛を生まれながらにして自然に尊んで大事にすること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だから、男が女みたいに長い髪の毛を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男として恥ずべきことであるが、女が長い髪の毛を持っていることは誇りであり光栄とすべきであり、女は髪の毛を切るのを恥とするのである。
여자라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남편의 생명을 통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상징(象徴)으로서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중히 여기며 소중히 여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처럼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남자로서 부끄러운(창피한) 일이지만,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이며 영광(光榮)으로 알아야 하며, 여자는 머리카락을 짜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이다.
女が夫を無視して何かを為したとしてもそのことの成功に反比例して、そのことの成功では償うことの出来ない不幸を背負い込んでしまっている例は私達の周りに沢山ある。
여자가 남편을 무시(無視)하며 뭔가를 이루었다(했다)고 해도 그 일의 성공에 반비례하며, 그 일의 성공으로는 보상을 받을 수 없는 불행(不幸)을 떠맡고 말았다고 하는 예는 우리들의 주변에 많다.
子供は親の後ろ姿を見ている。父を無視して何でもやってしまう母を子供は絶対にいい母とは思わないのである。また子供が小さいうちは良いが、その子供が一人前になって来るとその子供は必ずそういう母親に反抗するようになる。
아이(子供: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아버지를 무시하며 무엇이건 해 버리는 어머니를 아이(子供:자식)은 절대로 좋은 엄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아이(子供:자식)이 어릴 동안은 좋지만, 그 아이(子供:자식)이 제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시작하면 그 자식(子供)은 틀림없이 그러한 모친(母親)에게 반항(反抗)하게 된다.
終戦後、女が短く髪を切るようになって女らしくない女が増え、男が髪を長く伸ばすようになって男らしくない女みたいな男が増えてきた。女らしくない女は、夫や子供をダメにして自分が不幸になっているし、男らしくない女らしい男は女に甘えて女をダメにしている。自分は働かないで年上の女に働かせている女々しい男が増えて来ているがなまじっか男らしく振る舞って優しい男を食べさせている内に、子供まで出来てからその年下の優しい男に捨てられて泣いている年上の女を私は沢山知っている。
종전(終戰:세계 제2차 대전) 후, 여자가 짧게 머리를 깍게 되어 여자답지 않은 여자가 증가하고,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게 되어 남자답지 않은 여자 같은 남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여자답지 않은 여자는, 남편이나 아이(子供:자식)을 망쳐놓고 자신이 불행해지고 있고, 남자답지 않은 여자다운 남자는 여자에게 기대며(甘えて:응석을 부리며) 여자를 망치고 있다. 자기는 일하지 않으며 연상의 여자에게 일을 시키고 있는 여자들 같은 남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섣불리 남자답게 행동하며 상냥한 남자(優しい男)를 먹여 살리고 있는 사이에, 자식까지 태어나고 나서 그 연하의 상냥한 남자(優しい男)에게 버림을 받고 울고 있는 연상의 여자를 나는 많이 알고 있다.
男女平等と言う言葉に騙されて男が男らしさを、女が女らしさを捨ててしまった代償は余りにも大きかった。
남녀평등이라고 하는 말로 속여서 남자가 남자다움을, 여자가 여성스러움을 버려 버린 대상(代償:대가)은 너무나도 커졌다.
やる気のある能力を持った男が魅力を感ずるのは女らしい優しさを持った女である。まじめな女の人はまた、男らしさのない女々しい男には魅力を感じない筈である。
할 의욕이 있는(やる気のある) 능력을 가진 남자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여성스러운 상냥함(優しさ)을 가진 여자이다. 착실한 여자(성실한 여자)는 또한, 남자다움의 없는 여자들 같은 남자에게는 매력(魅力)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夫と別れてもいいと思っている女の人はやる必要はないが、夫と共に生きたいと思っていられる女の人はキリストが教えていられるように、夫の生命を拝み、キリストの生命を拝み、そうして大宇宙大神霊たち神に祈って見られることである。その結果は必ず出て来る筈である。
남편과 헤어져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여자는 할 필요는 없지만, 남편과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여자는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계시는 것처럼, 남편의 생명을 마음에서 소망하고(生命を拝み), 그렇게 해서 대우주대신령(大宇宙大神靈)들 신(神)에게 기도해 보시는 것이다. 그 결과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子供のことで悩んでいるという女の人は、その子供を妊娠した時から現在まで、夫を夫として、親を親として立てなかったことを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そのことに気づいて反省し、すべてに感謝できるようになれば治るべき病気は治るし勉強嫌いな子供は分相応に勉強もするようになるし家庭が明るくなり夫も生き甲斐を感ずるようになって来るのである。
자식(子供)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고 하는 여자는, 그 자식(子供)을 임신(妊娠)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남편을 남편으로서, 부모를 부모로서 세우지 않았던(立てなかった) 일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반성하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나아야 할 병(病氣)은 치료되고 공부하기 싫은 자식(子供)은 조화롭게 공부도 하게 되고 가정(家庭)이 밝아져서 남편도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어 오는 것이다.
研修会の帰りに寄ったその人にとっては、子供が四人あっても、湯沸かし器や炊飯器はなくても、夫がお客を連れて来ても、とにかく何が起ころうと、ひとつも苦にならないばかりか、むしろ一つ一つが人生勉強として楽しみなのである。
연수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4명이고, 온수기나 전기밥솥은 없어도, 남편이 손님을 데려와도, 어쨓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괴롭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하나가 인생공부로서 낙(樂:즐거움)인 것이다.
釈迦・キリストが説かれた正法は、この人生を楽しみながら生きて行く極意の教えなのである。
석가(釈迦)・그리스도가 설교하신 정법(正法)은, 이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 가는 극의(極意:비결, 비법)의 가르침인 것이다.
「女の頭は男なり」と言われたキリストの教えが間違いである。男女同権だからそんなバカなことはないと言われる人々は、この神理が事実であるかないか実験してみられるといいと思う。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잘못이다. 남녀 동권(男女同權:남녀의 권리가 서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신리(神理)가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신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夫をバカにし、夫の言うことを聞かず、夫を軽蔑して祈って見られるといいのである。どう結果が出て来るか。それに反して、夫に感謝し、夫の心を尊重し、夫の意見に素直になって祈った時にどういう結果が出て来るか正法は日常生活を大事にして行くのであるから事実を以て知ることである。
남편을 바보취급하고(バカにし), 남편의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 남편을 경멸(軽蔑)하며 기도해 보신다면 좋을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것에 반해서, 남편에게 감사하고, 남편의 마음을 존중(尊重)하고, 남편의 의견에 솔직(素直)해져서 기도했을 때에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정법(正法)은 일상생활을 소중하게 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을 몸소 아는 것이다.
聖書と私
성경(聖書)과 나(私)
私が教会の門をくぐったのは十八歳の時であった。
내가 교회의 문을 두드린 것은 18세 때였다.
父の病気によって向学の想いは断念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鹿児島商業を卒業した仲間達はそれぞれ進学し就職して行った。病気の父を抱え、七人の弟妹たちを養っ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責任が小さな肩にのしかかっていた。その責任の重大さは感じていても、同級生達はそれぞれ飛び立って行ったのに、自分だけが鹿児島に残って家を継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何か自分一人だけが取り残されたような気がして淋しかった。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향학의 꿈(向学の想い: 학문에 마음을 쏟을 꿈)은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고시마 상업 고등학교(鹿児島商業)을 졸업한 동료들은 각자 진학하고 취업해 갔다. 병이 든 아버지를 껴안고, 7명의 제매(弟妹:남동생과 여동생)들을 양육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責任)이 어린 어깨에 덮쳐 눌러 있었다. 그 책임의 무거움은 느끼고 있어도, 동급생들은 각자 떠나 날아갔는데, 나 혼자만 가고시마(鹿児島)에 남아 가업을 잇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웬지 나 혼자만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어 쓸쓸했다.
潜在的には鹿児島商業三年の時、女をこしらえて家を出た父を旅先で発見して背負い投げで投げつけた親不孝の罪の呵責があり、思秋期ではあるし恋愛、結婚という問題も考えない訳にはゆかなかった。病気の父と七人の弟妹を抱えて私の人生には絶対に失敗は許されないのであった。もし失敗すれば私は父の病気を治してやることが出来ないのは勿論、弟妹達を一人前にしてや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ある。どうして自分だけがこんな運命に生まれついたのであろうか。運命はどうして決めらえるのであろうか。絶対に失敗しない生き方はどうすればいいのであろうか。この心の重荷を軽くする方法はないのであろうか。得意先の大人達に「人間は何のために生きるのか」を聞いてみても誰一人としてはっきり教えてくれる人はなく「まあ生まれて来たから死ぬ訳にはゆかないし、仕方なしに生きているのだ」
잠재적으로는 가고시마 상업 고등학교(鹿児島商業) 3학년 때, 여자 애인을 만들어(女をこしらえて:정부를 두어) 집을 나간 아버지를 여행지에서 발견하고 업어치기로 매어 꽂았던 불효의 죄의 가책(呵責)이 있고, 추수기에 접어들어 연애, 결혼이라고 하는 문제도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이 든 아버지와 7명의 제매(弟妹:남동생과 여동생)을 안고 나의 인생에는 절대로 실패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릴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제매(弟妹:남동생과 여동생)을 제몫을 할 수 있게끔 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째서 나 혼자만 이런 운명(運命)으로 태어난 것일까? 운명(運命)은 어떤 식으로 정해지는 것일까?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생활 방식(生き方)은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이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단골 거래처(得意先)의 어른들에게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건가요?」를 들어 봐도 누구 한 사람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고,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없고, 하는 수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そうした人生の悩みを求めて教会へ行ったのであった。
그러한 인생의 고민(悩み:괴로움)을 해결할 길을 찾아서 교회로 갔던 것이었다.
牧師さんは主としてマタイ伝の山上の垂訓「幸いなるかな、心の貧しき者、天国はその人のものなり、幸福なるかな、悲しむ者、その人は慰められん・・・・・・」と「天にいます我らの父よ、願わくば御名の崇められんことを・・・・・・」という主の祈りをせよと教えられ、キリスト教以外の宗教は邪教である。キリストを信じない者は永遠の地獄の火に投ぜられるのであると説かれるのであった。私は次のことに疑問を持った。「キリストだけが、人類の罪を贖うことが出来る救世主であったとしたら、神はなぜ人類がこの地上に誕生したその最初にキリストを降誕せしめなかったのであろうか。長い年月、人類が罪を犯すままに放置して置いて、なぜ今から二千年前にキリストを出して罪を救おうということをされたのであろうか。
목사님은 주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山上の垂訓)「행복한 자는, 마음의 가난한 자이며, 천국은 그의 것이며, 행복한 자는, 슬퍼하는 자이며, 그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늘에 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여, 원컨데 아버지의 이름을 우러러 받드는 것을・・・・・・」라고 하는 주의 기도(주기도문)을 하라고 가르쳐 주며,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宗敎)는 사교(邪敎)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지옥불(地獄の火)에 던져질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음의 것에 의문(疑問)을 가졌다.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죄를 속죄할 수가 있는 구세주(救世主)였다고 하면, 신(神)은 왜 인류가 이 지상에 탄생한 그 최초에 그리스도를 강탄(降誕:거룩한 사람이 세상에 탄생함)시키지 않았던 것일까? 오랜 세월, 인류가 죄(罪)을 범한 그대로 방치해 놓고, 왜 지금까지 2천년 전에 그리스도를 나오게 해서 죄악(罪)을 구하라(救おう)라고 하는 일을 시켰던 것일까?
キリストが誕生する以前の人類の罪はどうしたら救われるのであろうか。キリスト教が日本に入ってきてから五百年にしか過ぎない。そうすれば我々日本人の祖先の全部はみな地獄だということになる・・・・・・」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이전의 인류의 죄(罪)는 어떻게 하면 구제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들어온지 5백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들 일본인의 조상(祖先)의 전부는 모두 지옥(地獄)에 있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저 역시,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교회에 20년 동안 다닐 때요. ^^
「私が教会に行くことには父はご先祖様に申し訳ないと言って反対した。 するとこの父もキリストによって地獄へ堕とされるのか」「キリストを信ずる者は天国へ救うが、信じない者は永遠のゲヘナの火に投ずるという愛憎のはげしい神を自分は神とするわけに行かぬ」。
「내가 교회에 다니는 일로는 아버지는 조상님들에게 할 말이 없다고 말하며 반대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옥(地獄)에 떨어지는 건가?」「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서 구원받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게헨나(영어 Gehenna, 그리스어 γεεννα(게헨나))의 불(火)에 던진다고 하는 애증(愛憎)의 격렬한 신(神)을 나는 신(神)으로 여길 수 없다」。
キリスト教で説く神とキリストの愛が私には納得できなかった。私が求めている神はどんな人でも救う普遍的な愛の神であった。だから私は教会で説くキリスト教に疑問を持ってやめた。
그리스도교에서 설교하는 신(神)과 그리스도의 사랑(愛)이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찾고 있는 신(神)은 어떤 사람이라도 구제되는(도움을 받는 救う)보편적인 사랑의 신(愛の神)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그리스도교에 의문을 가지고 그만뒀다.
それから間もなく父のすすめで軍隊に行くことになって聖書を読む機会もなくなった。再び聖書を読み始めたのは、昭和二十一年四月に戦地から復員し、廃墟となった鹿児島市の露店で大正十二年印刷の小型の聖書を買った時からであった。今も私はこの古びてすり切れた聖書を大事にしている。
그 후 곧 아버지의 권유로 군대에 가게 되어 성경(聖書)을 읽을 기회도 없어졌다. 다시 성경(聖書)을 읽기 시작한 것은, 쇼와(昭和) 21년(1943년) 4월에 전쟁터에서 복원(復員:전시 체제에서 평상 체제로 돌려져 복무가 해제됨)되어, 폐혀가 된 가고시마 시(鹿児島市)의 노점에서 다이쇼(大正) 12년(1923년)에 인쇄된 소형 성경을 샀을 때부터였다. 지금도 나는 이 낡고 닳아 해어진 성경(聖書)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復員してみたら父母も弟妹も米軍の空襲で全部死んでしまっていた。孤独のさみしさに堪え難くなると私は聖書の中から本当のキリストの愛を見出そうとひたすらに読んだ。読んで行く内に私には現在キリスト教会で説いている教えの中に大きな誤りがあるのがわかってきた。そうして牧師の人達がどんなに聖書を読んでいないかがわかってきた。日本のクリスチャンは本当はキリストの教えを知っていないといえる。
복원(復員)되어 봤더니 부모도 남동생과 여동생도 미군의 공습(空襲)으로 전부 죽어버려 있었다. 고독한 서글픔에 참기 어렵게 되자 나는 성경(聖書)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내려고 한결같이 읽었다. 읽어 가는 도중에 나로서는 현재 그리스도교에서 설교하고 있는 가르침 속에 큰 잘못(誤り)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목사(牧師)인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聖書)을 읽고 있지 않은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크리스천(Christian:기독교 신자)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家庭生活の経験を持たないキリストが、夫婦の道をはっきりと説いていられることに驚いた。
가정 생활의 경험을 갖지 않은 그리스도가, 부부의 도리(道)를 분명하게 설교하고 계시는 것에 놀랐다.
キリストが説かれたその夫婦の道は東洋の道徳とも一致するのである。夫婦の道だけではない親子の道も一致するのである。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그 부부의 도리(道)는 동양의 도덕(道德)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부부의 도리(道)뿐만이 아닌 친자(親子:부모와 자식)의 도리(道)도 일치하는 것이다.
東洋と西洋と、悉(ことごとく)正反対の立場に立つと思われていたものが、神理の面においては一致するもの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知ったのは二十九才の時であった。この考えが間違いなく正しいもの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と知ることが出来たのは、昭和四十三年三月、高橋信次先生の教えを受けた時であった。
동양과 서양과, 모조리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고 여기고 있던 것이었는데, 신리(神理)의 면에 있어서는 일치(一致)하는 것인 바를 확실히 안 것은 29세 때였다. 이 판단(考え)이 틀림없이 올바른 것인 바를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쇼와(昭和) 43년(1968년) 3월,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였다.
神道と仏教とキリスト教が同じ神理を説いているのである。
신도(神道)와 불교(佛敎)와 그리스도교(教)가 똑같은 신리(神理)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수한 神道, 즉 古神道(고신도) : 일본
「男と女の役割」の中で私はそのことをお知らせしようと思うのである。
「남자와 여자의 역할(男と女の役割)」중에서 나는 그 일을 알려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はっきりいえることは現在キリスト教会で説いているものは真のキリスト教ではな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 그리스도 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교(敎)가 아니다.
仏教とキリスト教が一致していることについて、ある有名な仏教学者が書いていられるものがあるが、これはパウロと親鸞聖人の言行が一致点が多いことを書いたもので真の意味において仏教とキリスト教の一致を説いたものとはいい難い。
불교(佛敎)와 그리스도교(Christianity)가 일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느 유명한 불교학자가 저술하고 있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바울(영어 Paul,그리스어 Paulos·라틴어 Paulus·포르투갈어 Paulo)과 신란 성인(親鸞聖人:가마쿠라[鎌倉]시대 초기의 승려, 정토진종[浄土真宗]의 개조)의 언행이 일치점이 많은 것을 쓴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는 불교(佛敎)와 그리스도교(Christianity)의 일치를 설교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高橋信次先生が、説かれた転生輪廻の話しを聞かれた方には、キリストの弟子であったパウロが後に日本に親鸞聖人として生まれられた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られるであろう。パウロと親鸞聖人といってもそれは同一人物であったのであるから、説いたことが同一であるのは当然のことである。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 설교하신 전생윤회(轉生輪廻)의 이야기를 들으신 분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바울(Paul)이 후에 일본에 신란 성인(親鸞聖人, 1173년-1263년)으로 태어난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바울(Paul)과 신란 성인(親鸞聖人)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설교한 것이 동일(同一)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약 1천년 후, 환생한 것임. 인간은 보편적으로, 1천년에 한 번 환생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2천년에 한 번 환생하며, 특수한 사명이 있을 때 혹은 부득이하게 지구상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는, 몇 백년에 한 번 태어나기도 한다.
キリストは「天にいます我らの父よ」と、じかに神に祈ることを教えられたが、パウロは、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個人のみ名を通さ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説いた。これは親鸞聖人が、念仏を唱えるという手段を通して阿弥陀如来に頼まないと救われないといわれたことと同じである。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여(天にいます我らの父よ)」라고, 직접 신(神)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지만, 바울(Paul)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개인의 이름(個人のみ名)을 통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라고 설교했다. 이것은 신란 성인(親鸞聖人)이, 염불을 외운다(念佛を唱える)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의지하지 않으면(頼まない: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 것과 똑같다.
お釈迦さまは夫婦の道をどのように説かれたかはキリストが説かれた夫婦の道が終わってから書くことにする。この文を読んで行かれるうちに仏教とキリスト教は違うということで閉ざされていたあなた方の心は大きく開かれていくであろう。
부처님(お釋迦さま)은 부부의 도리(夫婦の道)를 어떻게 설법하신 것인지는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부부의 도리(夫婦の道)가 끝난 후에 쓸 예정이다. 이 문장을 읽어 가는 동안에 불교(佛敎)와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다르다(틀리다)고 하는 것으로 닫아버리고 있던 여러분들의 마음은 크게 열리어 갈 것입니다.
男女は平等ではない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女は、夫の生命を拝んで神に祈らないと女の祈りは効かれないのである」と前に書いたことに対して、 男女平等が正しいと主張する人達は正法は男女を差別すると思われたかもしれない。
「여자는, 남편의 생명을 마음에서 소망하고(生命を拝んで) 신(神)에게 기도하지 않으면 여자의 기도는 효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앞에 쓴 것에 대해서, 남녀평등이 올바르다고 주장(主張)하는 사람들은 남녀를 차별(差別)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キリストはどのように教えていられるのかを見てみよう。
그리스도는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지를 봐 봅시다.
エペソ書 第五章
에베소서 제5장
「詩と賛美と霊の歌とをもって語り合い、また主に向かいて心より且(かつ)うたひ、かつ賛美せよ、
凡(すべ)ての事に就きて常に我ら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りて父なる神に感謝し、キリストを
畏(かしこ)みて互いに服(したが)へ。 妻たる者よ、主に服ふごとく己の夫に服へ。教会のキリストに服ふがごとく、妻も凡てのこと夫に服へ。夫たる者よ、キリストの教会を愛し、之(これ)がために己を捨て給いしごとく、汝らも妻を愛せよ。夫はその妻を己の體(からだ)のごとく愛すべし。妻を愛するは己を愛するなり」
「시(詩)와 찬미(贊美)와 영혼(靈)의 노래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또한 주(主)을 향하여 마음으로 또한 노래하고, 또한 찬미(贊美)하라, 모든 일에 임해서 늘 우리들의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인 신(神)에게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며((경외(敬畏)하며)) 서로 순종하라(서로 순순히 따르라). 아내인 자여, 주(主)를 복종(순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하라. 남편인 자여,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이것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시듯이, 너희들도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은 그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
19~22,24,25, 28절
コロサイ書 第三章
골로새서 제3장
「妻たる者よ、その夫に服へ、これ主にある者のなすべき事なり。
夫たる者よ、その妻を愛せよ、苦(にが)きをもて之をあしらふな」
「아내인 자여, 그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주(主) 안에 있는 사람이 행하여야 할 일이니라.
남편인 자여, 그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의 괴로움(소태같은 고통을 겪는 것[苦き])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아내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말라 : 모질게 대하지 말라).」
★골로새서 제3장 19절의 번역은, 상당히 난해합니다. 그래서 깊게 파고 들어 보았습니다.
18~19
Wives, submit yourselves unto your own husbands, as it is fit in the Lord.
<흠정역, 개역한글,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일본어 신공동역,
Husbands, love your wives, and be not bitter against them. <kjv : 킹제임스버전>
夫たちよ, 妻を 愛しなさい. つらく當たってはならない. (아내를 사랑하라, 모질게 굴어서는 안 된다)
Husbands, love your wives and do not be harsh with them.<niv>
Husbands, love your wives and do not be embittered against them.<nsnv>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모든 한글 성경에 나와 있는 번역)
영어에 표기된, 괴롭다, 로 번역된 부분들입니다.
※bitter[bítər]
견디기 어려운, 모진; 쓰라린, 비통한, (상대방에 대하여) 심한 적의를 가진, 가증스러운,격렬한, 통렬한; 신랄한, 쓴맛; 괴로움, 비통; 쓴 것, 뜻이 있으며.
※つらい[辛い] ① 괴롭다 ② 힘들다 ③ 고통스럽다 의 뜻이며,
원래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혹독하고 매정한 처사에 관해 말하고, 그것을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게 느끼는 뜻도 나타낸다.
※ harsh [haːrʃ]
[사람·벌 등이] 호된, 엄한, 가혹한, 모진, 사나운; [사람·말이] 무자비한, 비정한, 의 뜻이 있으며.
※embittered[imbítərd] : 적의[증오심]를 품은; 까탈스러운.
※참고로 바로 위에 ★ にがき[苦木]★가 있는데요.
소태나무(학명;Picrasma quassioides). 소태나뭇과의 낙엽교목. 산지에 자생. 길이 약 6m. 잎은 다수의 쌍으로 이루어진 우상복엽(羽状複葉). 여름에 잎겨드랑이에 황록색의 가는 꽃이 취산꽃차례로 핀다. 가지와 잎은 쓴맛이 나며 수액은 구충제‧건위약(健胃薬)으로 사용. 목재는 세밀하고 섬세하여 기구(器具) ‧세공품용으로 사용.
★<예문>그냥 이렇게 지내다가는 우리의 꿀 같은 행복이 끝내 소태 같은 고통으로 변할 것 같아요.
テトス書 第二章
디도스서 제2장
「若き女に夫を愛し、子を愛し、謹慎(つつしみ)と貞操(みさお)とを守り、家の務めをなし、
仁慈(なさけ)をもち、己が夫に服はんことを教えしめよ。これ神の言葉の汚されざらん為なり」
「젊은 여자에게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근신(謹愼)과 정조(貞操)를 지키고, 가정에서의 역할(務め)을 다하고, 인의(仁慈:어질고 의로운 도리,なさけ(인정, 동정))을 가지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라. 이것은 신(神)의 말씀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5절
コリント前書 第七章
고린도전서 제7장
「夫はその分を妻に尽くし、妻もまた夫に然(しか)すべし。妻は己が身を支配する権をもたず、
之(これ)を持つ者は夫なり。斯くの如く夫も己が身を支配する権を有(も)たず、之を有(も)つ者は妻なり」
「남편은 그 의무(본분)를 아내에게 다하고, 아내도 또한 남편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아내는 자기 몸을 지배할 권한을 갖지 못하고, 그 권리를 갖는 자는 남편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지배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고, 이것을 가지는 자는 아내이니라」
3~4절
神理を求めるお互いの間で話し合われ、語り合われるものは、自然の美と真実とが言葉となって迸(ほとばし)り出た詩と、その自然の神秘さを讃える言葉と、天上界より発する霊の啓示の歌とでなければならない。
신리(神理)를 찾는 것에 서로 간에 상의하고, 의논할 수 있는(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이 말이 되어 감격하여 나온 시(詩)와, 그 자연의 신비(神秘)를 찬송하는 말과, 천상계(天上界)에서 발하는 영혼(靈)의 계시(啓示:깨우쳐 보여줌)의 노래가 아니면 안 된다.
イエス・キリストが説かれたものは父なる神、宇宙の大神のみ心なのであるから、キリストの言葉に服従して実行しなさい。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것은 아버지인 신(父なる神), 우주의 대신(大神)의 마음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에 복종(服從)하고 실행하십시오.
妻たる者は、人々が主なる神のみ心に素直に従うと同じように自分の夫に素直に従いなさい。
아내인 자는, 사람들이 주(主)인 신(神)의 마음에 솔직하게 따르는(従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남편에게 솔직하게 따르십시오.
夫たる者は、キリストが多くの人々のために自分を捧げられたと同じようにあなた方も自分の妻を愛しなさい。夫が妻を愛するのは、夫が自分の身体を大事にいたわると同じように妻を愛しなさい。妻を愛するということは実際は夫が自分を愛し大事にすると同様であって同じことなのである。
남편인 자는,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남편의 자신의 신체를 소중히 여기듯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김과 마찬가지며 똑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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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といえども精神異常者でない限り、自分で自分の身体を傷つける者はいない。みな自分の身体を大事にする。妻を愛するということは自分で自分の身体を大事にするのと同じであるということはもっとはっきり言えば、妻を愛するということは自分を愛することであり、夫が自分を愛するというその愛の心と、妻を愛するという心に距(へだた)りがあってはならない。妻もまた自分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
남자라고 할지라도 정신이상자(精神異常者)가 아닌 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다치게 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모두 자기 몸(身體)을 소중히 여긴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자기의 신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의 마음과,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마음에 거리(距り)가 있어서는 안 된다.
だからしてコロサイ者の中では、夫たる者は、妻の心を悲しませたり、怒らせたり、不安にしたり、ともかく妻が苦い思いをするようなことは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のである。
그래서 골로새(Colossian) 사람 중에서는, 남편인 자는, 아내의 마음을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불안하게 하거나, 어쨌든 아내가 언짢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多くの夫婦の不調和というものが従来は夫が妻を苦しめるというものが多かった。男子中心の武家政治の社会体制は、女に忍従を強いることが多かった。女は男の横暴に堪えることが女の徳とされた。このようなあり方は夫が我が身の如く妻を愛するということにならない。終戦時の民主主義、男女平等が確かに女性の心を開放させたという事実は否定できない。女性の心、立場を無視した男性の横暴は批判されても仕方のないものがあった。「二号、三号持つのは男の甲斐性だ」ということによってどれだけ妻が悲しい思いをさせられてきたか。終戦前は夫が二号を連れて来ても本妻はニコニコして出迎えるのがいい妻だといわれていたが、顔で笑って心で泣いてということも辛かったことであろう。
대부분의 부부의 부조화(夫婦の不調和)라고 하는 것이 종래는 남편이 아내를 괴롭힌다고 하는 것이 많았다. 남자 중심의 무가정치(武家政治)의 사회체제는, 여자에게 인종(忍從:묵묵히 참고 따름)을 강요하는 일이 많았다. 여자는 남자의 횡포(橫暴)를 참는 것이 여자의 미덕으로 여겼다. 이러한 현실(あり方)은 남편이 내 몸처럼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종전(終戰:세계 제2차 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 후의 사회 당시의 민주주의, 남녀평등이 확실히 여성의 마음을 개방시켰다고 하는 사실은 부정(否定)할 수 없다. 여성의 마음, 입장을 무시(無視)한 남성의 횡포(横暴)는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첩(二号)、두번 째 첩(三号)을 가지는 것은 사나이의 패기(男の甲斐性)다」라고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아내가 슬픈 생각을 해 왔는가? 세계 2차 대전 전의 사회(終戰前)는, 남편이 첩(二号)을 데리고 와도 본처(本妻)는 생글생글 웃으며 마중 나가는 것이 좋은 아내(いい妻)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얼굴로는 웃고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다고 하는 일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しかし終戦後の女性解放が行き過ぎて、現在は女が強くなって男が弱くなり、子供まで巻き添えにして大きな社会問題となって来た。右に大きく振れていた振り子が反動的に大きく左へ振れたままであっては中道ではない。現在の男女夫婦のあり方が行き過ぎだからといって戦前の状態に戻していいとは誰も考える人はあるまい。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후의 여성 해방이 지나가서, 현재는 여자가 강해지고 남자가 약해져서, 자식(子供)까지 말려들게 되어 큰 사회 문제가 되어 왔다. 오른쪽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던 진자(振り子:흔들이)가 반동적으로 크게 왼쪽으로 흔들린 채로 있어서는 중도(中道)가 아니다. 현재의 남녀 부부의 현실(あり方:본연의 모습)이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해도 전전(前戰:세계 2차 대전 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좋다고는 아무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ではどうすればいいのか。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それにはコリント前書の言葉を味わうべきである。
이것에는 고린도전서의 말을 음미해야 한다.
「夫はその分を妻に尽くし、妻もまた夫に然かすべし」
「남편은 그 의무(본분)를 아내에게 다하고, 아내도 또한 남편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戦前は、夫がたとえどんな無理難題を言おうと、妻はただ黙って一切逆らわずにハイハイと素直に従うことが女の美徳とされた。こうした戦前型の女の美徳が正しいものであると説いているある教団では「夫が泥棒するといったら妻も一緒に泥棒すればよい」と教えていた。
세계 2차 대전 전에는, 남편이 설령 어떤 생트집을 잡아도, 아내는 그저 묵묵히 일절 거역(반항)하지 않고 예예, 알았어요(ハイハイ)라고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 여자의 미덕(美德)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세계 2차 대전 전의 유형의 여자의 미덕이 올바른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는 교단에서는 「남편이 도둑질하겠다고 하면 아내도 같이 도둑질을 하면 좋다(夫が泥棒するといったら妻も一緒に泥棒すればよい)」고 가르치고 있었다.
「夫はその分を・・・」と書いてあるがその分をということはどんなことであろうか。
「남편은 그 본분(의무)를・・・」라고 쓰여 있지만 그 본분(分:의무)를 다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夫婦の縁は天上界からこの地上界に生まれて来る時の待機所で結ばれる。夫の魂は今度は地上に出て行ってどういう勉強をしなければならぬかをよく知っている。その魂の勉強をするのに一番ふさわしい人を自分の妻として選ぶのである。夫にとっては、妻のいい所、悪い所の全てが夫の魂を磨く勉強の資料なのである。いい所は愛するが、悪い所は愛さないというのであってはいけないのである。いい所も悪い所も全て含めてそのまま愛し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その分をとは、是非善悪、愛憎も全て超えた所の愛を以ってということであり、妻もまた夫をそ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ある。
부부의 인연(夫婦の縁)은 천상계(天上界)에서 이 지상계(地上界)에 태어나올 때의 대기소(待機所)에서 인연이 맺어진다. 남편의 영혼(魂)은 이번에는 지상으로 나와서 어떠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 영혼(魂)의 공부를 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사람를 자신의 아내로 선택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있어서는, 아내의 좋은 점(いい所), 나쁜 점(悪い所)의 전부가 남편의 영혼(魂)을 닦는 공부의 재료(資料)인 것이다. 좋은 점은 사랑하지만, 나쁜 점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전부 포함해서 있는 그대로 사랑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본분(分:의무)이란, 시비선악(是非善惡), 애증(愛憎)도 전부 초월한 사랑으로 라고 하는 것이며, 아내도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私が不調和であった時、妻のいい所はいいとしても、妻の欠点が鼻持ちならないほど嫌であった。だから、その悪い所を指摘してそこを良くさせようとしていた。そういう気持ちでいる間は上手く行かなかった。
제가 부조화했을 때, 아내의 좋은 점은 좋다고 해도, 아내의 결점이 아니꼽고 빕살맞을 정도로 싫었다. 그래서, 그 나쁜 점을 지적해서 그것을 잘 고치라고 했다. 그러한 기분으로 있는 동안은 잘 되지 않았다.
所がある時、妻が悪いと言っているのは実は私自身の心の中に妻を裏切っている心があることの、反省であるということに気がついたのであった。
집(所)에 있을 때, 아내가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실은 제 자신의 마음속으로 아내를 배반(배신)하고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반성(反省)하라고 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던 것이었다.
私には妻と結婚する前に初恋の人があった。婚約までしていたのであったが、私はその人を忘れることが出来ないでいた。事毎にその人と妻とを比較していた。
저로서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첫사랑(初戀)의 사람이 있었다. 약혼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전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사 건건 그 사람(첫사랑의 여자)과 아내를 비교하고 있었다.
妻を愛せないという原因は実は自分自身の心の中にあることに気づいたあのであった。
아내를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원인은 실은 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깨닫고 있던 것이었다.
だから相手を愛せないという人は、その原因は自分自身の心の中にもあるのであることを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그래서 상대를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원인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인 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私が沢山の人をこれまで個人指導した体験では、夫婦の不調和の原因の80%は結婚前に好きな人があってその人のことを忘れられないということにあった。後の20%は、嫁と姑との関係で夫に不信感を持っているとか、金の問題、子供の問題等であった。しかしそれらの問題も夫婦がしっかり愛し合っていさえすれば解決できる問題である。
제가 많은 사람을 지금까지 개인 지도를 했던 경험으로는, 부부의 부조화의 원인의 80%는 결혼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과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20%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에서 남편에게 불신감(不信感)을 갖고 있다든가, 돈 문제, 자식 문제 등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도 부부(夫婦)가 상당히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初恋の人の写真やラブレターを、夫に隠してこっそり持っているという人もあった。
첫사랑의 사람의 사진이나 러브 레터(love letter:연애 편지)를, 남편에게 숨기고 몰래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私自身の体験と、私が指導した体験から知ったことは愛情は純粋でなっ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った。純粋に愛し切った時、人間はその人の為には命を捧げても悔いはないと思うものであるし、純粋に愛する男性は、愛する女に自分の子供を産ませたいと思うし、純粋に愛する女性は、愛する人の子供を生みたいと思うものである。
저 자신의 체험과, 제가 지도했던 체험에서 안 것은 애정(愛情)은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다 사랑했을 때, 인간은 그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후회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남성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자신의 자식(子供)을 낳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子供:자식)을 낳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その分を尽くし・・・とは、全身全霊を持って純粋にということである。
그 본분(分:의무)를 다하고・・・란, 전신 전령(全身全靈:전심 전력)을 품고 순수하게 라고 하는 것이다.
しかし最近はこうした愛の自覚なしに性の享楽遊戯が行われている。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사랑을 자각하지 않고 성(性)의 향락 유희가 이루어지고 있다.
「妻は己が身を支配する権を持たず これを持つものは夫なり」とあるが、妻は自分の身体は自分のものだと思って、夫の心を無視して自分の好き放題に勝手に自分の身体を使ってはならない。妻は自分自身の身体を動かす時、その行為は夫の心に叶うものであるかを考え、夫の心に添う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何かをしようとするときは常に、夫に聞いて夫の心に添う形で行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ある。
「아내는 자기 몸을 지배할 권리를 갖지 못하고 이것을 갖는 사람은 남편이니라」이지만, 아내는 자기의 몸(身體)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의 마음을 무시(無視)하고 자기 멋대로 제멋대로 자기 몸(身體)을 써서는 안 된다. 아내는 자기 자신의 몸(身體)을 움직일 때, 그 행위(行爲)는 남편의 마음에 맞는(들어맞는)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하고, 남편의 마음에 들도록(心に添う)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하려고 할 때는 항상, 남편에게 들어보고 남편의 마음에 드든(따르는心に添う) 상태로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妻が夫の心を無視して働きに出たために、家族が滅茶苦茶に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例は沢山ある。夫だけではない、少しばかりの金を欲したばかりに子供をダメにしてしまったという例も多い。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무시(無視)하고 일하려 나갔기 때문에, 가족이 엉망진창(滅茶苦茶)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예는 많이 있다. 남편뿐만 아니라, 약간의 돈을 탐냈기 때문에 자식(子供)을 망쳐놓아 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예도 많다.
これだけだとキリストの教えは戦前の封建的な婦徳(ふとく・女子の守るべき道徳)と同じだということになる。
이것뿐이라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세계 2차 대전 전의 봉건적인 부덕(婦德・여자가 지켜야 할 도덕[덕성])과 같게 된다.
しかしキリストはまた次のように言っておられるのである。
하지만 그리스도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계신다.
「斯くの如く、夫も己が身を支配する権を持たず、之を有(も)つものは妻なり」と、だから夫は何かをしようとする時は、そのことが妻の心に叶うものであるかどうかを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自分がしたいからといって妻の考えを無視し、妻が喜ばないことを夫はし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지배할 권리를 갖지 못하고, 이것을 갖는 사람은 아내니라」라고, 그래서 남편은 뭔가를 하려고 할 때는, 그 일을 아내의 마음에 맞는 것인지 어떤지를 곰곰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해서 아내의 의사(考え:생각, 뜻)을 무시(無視)하고, 아내가 기뻐하지 않는(달가워하지 않는喜ばない) 것을 남편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鹿児島は封建制の極端に強い所であったし、私自身軍隊生活が長いこともあって、今まで書いたような聖書の言葉はよく知っていても、実際生活となると妻の心を無視した横暴なことが多かった。そんなことは失敗するといえばなお反動的に意地を張って、今にもの見せてやると強行した。妻が言う通り失敗すそれだけではいけないのである目が覚めたのであった。
가고시마(鹿児島)는 봉건제가 극단적으로 강한 곳이었고, 제 자신이 군대 생활을 오래 한 것도 있고, 지금까지 쓴 것 처럼 성경(聖書)의 말씀은 잘 알고 있어도, 실제 생활이 되자 아내의 마음을 무시(無視)한 횡포(横暴)한 짓을 한 일이 많았다. 그런 것은 실패한다고 하면 여전히 반동적으로 오기(意地;고집)을 부리며, 지금에라도 보여주고 말겠다며 강행했다. 아내가 말한대로 실패하자 「당신이 실패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실패한 거야」라고 여전히 고집(意地:오기)를 부렸다. 결과는 아내가 말하는 대로 전부 실패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적수 공권(裸一貫:맨손)이 되고서 겨우 정신을 차렸던 것이었다.
妻の心を無視してやることで成功することは一つもない。一時成功するかのように見えたとしても、それは尚一掃手痛い打撃を受けて大きく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ためのものでしかなかった。こうした失敗の反省から夫というものは妻の心を無視し、妻の心を苦しめては何事も成功しないとキリストが言われた神理の正しさを知らされたのであった。嘘だと思う人は妻の反対を押し切ってやってみられるといい。どういう結果が出るか。
아내의 마음을 무시(無視)해서 행한 것으로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잠시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혹심한 타격을 받고 크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실패의 반성에서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내의 아내의 마음을 무시(無視)하고, 아내의 마음을 괴롭혀서는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그리스도가 말씀한 신리(神理)의 올바름을 알게 된 것이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 보신다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かくして夫と妻とは平等にお互いに愛し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が、妻の役割については、女というものは夫を愛し、子供を愛し、貞操を守り、慎み深く、慈しみをもって家事万端を整え、夫をして家のことは心配させ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ぬ。それが神が定め給うた他女の道だというのである。
이리하여 남편과 아내는 평등하게 서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아내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자라고 하는 사람은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子供)을 사랑하고, 정조(貞操)를 지키고, 고분고분하고(공손하고 부드럽고, 愼み深く= 공순(恭順)), 사랑(자애:慈しみをもって)으로 가사(家事) 모두를 정돈하고, 남편으로 하여금 집안 일로 걱정을 시키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신(神)이 정해주신 다른 여자의 길(他女の道)이라고 하는 것이다.
※愼み深く= 공순(恭順) <중국어사전>
고분고분하다, 공손하고 온순하다, 공손하다
謙(へ)り恭(いやま)ひ慈(うつくし)び順ふ <顕宗紀>
자신을 낮추어 공경하며 사랑하여 따르다
昔から妻が夫に従うのは女の道として当然だという考え方があった。キリストはそれだけではいけないのである。夫もまた妻の心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教えていられるのである。]
옛부터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여자의 길(道:도리)로서 당연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라며. 또한 남편도 역시 아내의 마음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不信者なる夫は妻によりて潔くなり、不信者なる妻は夫によりて潔くなりたればなり、然なくば汝らの子供は潔からず」とあるように、お互いが共に向上することをせず争ってばかりいたならば「汝らの子供は潔からず」とあるように、子供が病気をするか死ぬか、また子供が健康で元気であれば非行暴力というようなことで子供のことで苦労することになるというのである。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남편은 아내로 인해 깨끗해지고(떳떳해지고:潔くなり),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깨끗(떳떳)해지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자식(子供) 또한 떳떳(깨끗)해지지 않는다」라고 있듯이, 서로가 함께 향상하는 일을 하지 않고 다투기만(싸움만) 한다면「너희 자식(子供)은 깨끗(떳떳)해지 않는다」라고 있듯이, 자식(子供)이 병이 들든가 죽든가, 또한 자식(子供)이 건강(健康)하고 활력이 넘치면 비행 폭력(非行暴力)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로 자식(子供)의 일로 애을 먹게(고생을 하다:苦労する)게 되는 것이다.
子供が大きな病気をした時、子供が思いがけず死んだりケガをしたりした時、夫婦が調和していたかどうかを考えて見られるといい。キリストの言葉がまさしく真実であることを知られるであろう。
아이(子供;자식)가 큰 병이 들었을 때, 아이(子供:자식)가 뜻밖에 죽거나 부상을(상처를) 입거나 했을 때, 부부(夫婦)가 조화(調和)하고 있었는지 어떤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신다면 좋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틀림없이 진실한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この世の中に偶然ということは絶対にないのである。そのことが起こる為には必ずそのことの原因があるのである。ただ原因と結果との関係を知らないために偶然といっているだけのことである。
이 세상에 우연(偶然)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絶代)로 없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일의 원인(原因)이 있는 것이다. 그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偶然)이라고 말할 뿐인 것이다.
テモテ前書 第二章
디모데전서 제2장
「神は凡ての人の救われて、真理を悟るに至らんことを欲し給ふ。この故にわれ望む、男は怒(いか)らず争わず、何れの処にても潔き手をあげて祈らんことを。また女は恥を知り、慎みて宜(よろ)しきに合(かな)う衣にて己を飾り、編みたる頭髪(かみのけ)に金と真珠と値貴き衣とを飾とせず、善き業をもて飾りとせんことを。これ神を敬はんと公言する女に適える事なり。女は凡てのこと従順にして静かに道を学ぶべし。われ女の教ふることと男の上に権を執ることを許さず、ただ静かに為すべし。それアダムは前に造られ、エバは後に造られたり。アダムは惑わされず、女は惑わされて罪に陥りたるなり。然れど女もし慎みて信仰と愛と潔とに居らば、子を生むことによりて救はるべし」
「신(神)은 모든 사람의 구제되며, 진리(真理)를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라고 계신다. 이러므로 나는 바란다, 남자는 화내지 않고 다투지(싸우지) 않고, 어디에 있든지 깨끗한(떳떳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또한 여자는 부끄러움을 알고(깨닫고:恥を知り), 삼가하고 호감이 가는 맞는 옷으로 자신을 꾸미고, 땋은 머리카락(頭髮)에 금(金)과 진주(眞珠)와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선행(善き業)으로 단장하기를. 이는 신(神)을 공경한다고 공언(公言:professing)하는 여자에게 적합한 일이니라. 여자는 모든 것에 순종(從順:고분고분함, 잘 따름)하면서 조용하게 도리(道)를 배워야 한다.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 위에 권력(權)을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오직 조용히 해야 한다. 이는 아담(アダム:Adam)은 먼저 만들어지고, 에바(エバ:Eva[라틴어]:이브)는 그 후에 만든 것이니라. 아담은 현혹되지 않고, 여자는 현혹되어 죄(罪)에 빠진 것이니라. 그렇지만 여자가 만약 삼가하고 신앙과 사랑과 정결(潔)하게 있으면, 아이를 낳는 것에 의해서 구제(구원받게)되느니라. 」
4,8~15절
「神は凡ての人の救われて、真理を悟るに至らんことを欲し給ふ」とあるようにキリストを信ずる人だけを救えばいいとはいっていられないのであるが、しかしそれには真理を正しく知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間違ったことを信じていたのでは救われないのである。
「신(神)은 모든 사람의 구제되고(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라고 계신다」라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을 구제하면 좋다고는 말하고 계시지 않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것에는 진리를 올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믿고 있어서는 구제될(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キリストの弟子達がキリストを信ぜよといったのは、当時においてはキリストのみが正しい真理を説いていたからであるが、我々が救われるのは、キリストという人を通して救われるのではなくて、キリストが説かれた神理を信じ実践した時に救われるというのである。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한 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만의 올바른 진리를 설교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우리들의 구제될(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구제(구원을 받는)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신리(神理)를 믿고 실천했을 때에 구제(구원을 받는다)된다고 하는 것이다.
それ故に、男は怒ってはならず、争ってもいけない。どこにいようが潔らかな心で神に祈りなさい。
그러므로, 남자는 화를 내서는 안되고, 싸워서도 안 된다. 어디에 있든지 깨끗(떳떳)한 마음으로 신(神)에게 기도하십시오.
しかし、女は女としての分を知ってそれを逸脱せず、慎ましやかな自分に相応(ふさわ)しい衣服を身に着けて、髪の毛を編んで、その髪に金や真珠の高価な飾りをつけたり、またきらびやかな高価な衣服を着て派手に振舞ったりせず、善い行いをすることによってそれを自分の飾りとすればよいのである。
하지만, 여자는 여자로서의 본분(分:의무)를 알고 그것을 일탈하지 않고, 음전한(조신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복을 몸에 걸치고, 머리카락을 땋고, 그 머리에 금이나 진주의 고가인 장식을 붙이거나, 또한 화려한 고가인 의복을 입고 야단스럽게 행동하거나 하지 않고, 선행을 하는 것으로 그것을 자신의 꾸미면 좋은 것이다.
それが神を正しく信ずる女のあり方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女というものはいつも慎ましやかに従順で、立居振舞も静かにして神理を学ぶべきである。
그것이 신(神)을 올바르게 믿는 여자의 본연의 모습(あり方)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여자라고 하는 사람은 늘 음전(얌전하고 점잖음)하며 순종(順從)하고, 행동거지도 조용하게 하며 신리(神理)를 배워야 한다.
ここでキリストがまたはっきり言っていられることがある。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또한 확실하게 말하고 계시는 것이 있다.
それは、女が男の上に立って権力を握って男を自分の思うままに支配しようとしたり、また、男の上に立って女が神理を説くというようなことは絶対に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のである。この二つのことを犯すことは「われ、これを許さず」という当非常に強い言葉を以って言っていられることに注目すべきである。
그것은, 여자가 남자의 위에 서서 권력(權力)을 잡고 남자를 자기 생각대로 지배(支配)하려고 하거나, 또한, 남자 위에 서서 여자가 신리(神理)를 설교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절대(絶代)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것을 범하는 것은 「내가,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われ、これを許さず)」라고 마땅히 대단히 강한 말로 말하고 계시는 것에 주목(注目)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제2장 12절 <영어사전 및 KJV>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일반 성경상의 번역)
But I suffer not a woman to teach, nor to usurp authority over the man, but to be in silence.
하지만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 위에 서서 권한을 침해하는 것을 참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있어야 한다. (나의 번역)
われ女の教ふることと男の上に権を執ることを許さず、ただ静かに為すべし。<본문의 디모데전서>
내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 위에 권력을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느니, 오로지 조용히 해야 한다.
キリストのこの言葉に照らして見る時に、女が教祖になっていたり、女が実権を握っている宗教団体は、神の意志に叛いている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り、ましてその女達が、きらびやかな服装をして信者の前に表れることなどは全く神を無視した行為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여자가 교조(敎祖)가 되어 있거나, 여자가 실권(實權)을 쥐고 있는 종교 단체는, 신(神)의 의지(意志)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더구나 그 여자들이, 현란한 복장(きらびやかな服裝)을 하고 신자(信者) 앞에 나타나는 것 등은 완전히 신(神)을 무시(無視)한 행위(行爲)라고 하는 것이다.
日本の宗教界の現状を見る時に、女が実権を握っている教団がいくつかある。男の教祖が亡くなって、その未亡人が、または娘が跡を継いでいる教団もある。そういう所は必ず混乱分裂が起こっている。
일본의 종교계의 현상을 볼 때에, 여자가 실권을 쥐고 있는 교단이 몇 개인가 있다. 남자 교조(敎祖)가 죽고, 그 미망인이, 또는 딸(娘)이 뒤를 잇고 있는 교단도 있다. 그러한 곳은 반드시 혼란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女が教祖になって男が組織指導の責任者を持っている教団もあるがその教団も分裂している。こうした実情を見る時に、キリストが説かれたことは真実であると信じない訳にゆかないのである。
여자가 교조(教祖)가 되고 남자가 조직 지도의 책임자를 가지고 있는 교단도 있지만 그 교단도 분열(分裂)하고 있다. 그러한 실정을 볼 때에,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것은 진실(眞實)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どうして女が男の上に立って権力を握るということはいけないのであるか。
어째서 여자가 남자 위에 서서 권력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인가?
それは、神が人をつくられる時に、神はまずアダム(男)を先につくられ、そののちにエバ(女)をつくられたからであり、アダムは蛇の誘惑に惑わされなかったが、エバは惑わされて罪に陥(お)ちたからであると。
그것은, 신(神)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 신(神)은 먼저 아담(Adam)(남자:男))를 먼저 만드시고, 그 후에 에바(Eva)(여자:女))를 만드셨기 때문이며, 아담(Adam)은 현혹되지 않았지만, 에바(Eva[라틴어], Eve[영어])는 현혹되어 죄(罪)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蛇は地を這うもの、地に密着して生きるものである。だから蛇とは、物質に対する欲望、執着を意味するのである。物質的な欲望や執着を持った女が上に立つと、その欲望執着があるために正しい判断ができず、まして神理を説くというようなことは絶対に出来ないのであるという事である。
뱀(蛇)은 땅을 기는 것, 땅에 밀착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뱀(蛇)이란, 물질(物質)에 대한 욕망(欲望), 집착(執着)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욕망(欲望)이나 집착을 가진 여자가 위에 서면, 그 욕망 집착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判斷)을 할 수 없고, 더구나 신리(神理)를 설교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절대(絶對)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そうして最後にキリストは、女はどうあるべきかを説いていられる。
그리하여 최후에 그리스도는, 여자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설교하고 계신다.
女は慎み深くして、心を潔くし、愛深くあり、そうして正しい信仰をして、そうした心で、子供を生み育ててゆくならば女は救われるのであると。即ち女の役割は、家を守り立派な子供を育てることにあるというのである。
여자는 고분고분하고(공손하고 부드럽고, 愼み深く= 공순(恭順))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사랑을 깊이 하고, 그렇게 해서 올바른 신앙(信仰)을 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자식(子供:아이)을 낳고 길러 가게 되면 여자는 구제되는(구원을 받을 수 있다) 것이다 라고. 즉 여자의 역할(役割)은, 가정을 지키고 훌륭한 자식(子供)을 키우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女が子供を育てることはいらない、女も男と同様に社会の第一線立って活動すべきであるという女があるが、特別の使命と才能を持った女が男に伍(くみ)して活動することはいいが、だからといって世界中の女がみな子供を産むことを放棄して男と同様に働くということになったら、子供は一人も生まれないから世界は破滅することになる。
여자가 자식(子供:아이)를 키우는 것은 필요 없으며, 여자도 남자처럼 사회의 제1선에 서서 활동해야 한다고 하는 여자가 있지만, 특별한 사명(使命)과 재능(才能)을 가진 여자가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활동(活動)하는 일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속의 여자가 다 자식(子供:아이)를 낳는 것을 방기(放棄)하고 남자처럼 일한다고 하게 되면, 아이(子供:자식)은 한 명도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세계(世界)는 파멸(破滅)하게 된다.
★2106년 현재 대한민국을 보시면, 위 내용이 이해가 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기[放棄] 어떤 책임과 의무 따위를 내버리고 돌보지 않음<국어 및 한자사전> ...[동의어] 포기(抛棄)
男と同様に働くという女よりも、慎ましく家庭を守り、子供を育てることに喜びを感ずる女の人の方がずっと多いのであるから、新聞や婦人雑誌などで、特殊な例外的存在である一部の婦人活動家だけのことを載せないようにすべきである。
남자처럼 일한다고 하는 여자보다도, 음전하게 가정을 지키고, 자식(子供)을 키우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여자 쪽이 훨씬 많은 것이기 때문에, 신문(新聞)이나 부인 잡지(婦人雜誌) 등에서, 특수한 예외적 존재인 일부의 부인 활동가(婦人活動家)만의 일을 싣지 않도록 해야 한다.
男が現実の社会を改造し建設してゆくこともすばらしいことであるが、女が子供を生み、その子供がやがて成長して社会とどう関わってゆくか、未来社会を理想的に建設する人間をつくり上げることは、男が現実社会に関わる以上にすばらしいことなのである。
남자가 현실 사회를 개조하고 건설해 가는 일도 훌륭한 일이지만, 여자가 아이(子供)을 낳고, 그 아이(子供)가 머지않아 성장해서 사회에 어떻게 관계되어 가는지, 미래 사회를 이상적(理想的)으로 건설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남자가 현실 사회에 관계하는 이상(以上)은 훌륭한 일인 것이다.
子供が小学校に上がるようになって暇になったからといって、少しばかりの金を目当てに職を求めると、やがてその子供のために泣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も起こって来るであろう。
아이(子供)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서 짬이 났다고 하며, 약간의 돈을 목표로 일자리를 찾아 다닌다면, 머지않아 그 자식(子供)으로 인해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では母子家庭はどうすればいいのか。母子家庭では母親が働きに出ない訳にはゆかない。こういう場合にこそ、援護は政府の仕事だといわないで、夫が働いている家庭の主婦達が同じ女性の立場として、その母親を援助してやればよいのである。
그럼 모자 가정(母子家庭)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모자 가정(母子家庭)에서는 모친(母親)이 일하려 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우에야말로, 원호(援護)는 정부의 할 일이라고 말하지 말고, 남편이 일하고 있는 가정(家庭)의 주부들이 같은 여성의 입장으로, 그 모친(母親)을 원조(援助)해 주면 좋은 것이다.
※원호[援護]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도와서 보살핌.<국어사전>
ところが本来愛が深いとされ、またそう思われている女が、同性の弱い人、恵まれない人を見ると、以上に興奮して惨虐性(さんぎゃくせい・むごたらしくいじめること)をむき出しにしてそれらの同性を虐めて、自分よりもすぐれて恵まれて才能があるという女性に対しては全く猫みたいに柔順になって奉仕するという傾向があるように思える場合がある。
그런데 본래 사랑이 깊다고 하시며, 또한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 여자가, 동성(同性)의 약한 사람, 축복 받지 못한 사람(풍요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으로 흥분하며 참학성((慘虐性 비참(처참, 참혹)하게 괴롭히는(못살게 구는 것,이지메하는 것)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그러한 동성(同性)을 학대(虐待)하며, 자기 자신보다도 뛰어나고 재능(才能)이 있다고 하는 여성(女性)에 대해서는 완전히 고양이(猫)처럼 유순(柔順)해져서 봉사(奉仕)한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참학[慘虐] <국어/한자/일본어/중국어 사전>에 없어서, <영어사전>을 참고.
① cruelty (잔인함, 학대) ② atrocity(잔악 행위, 극악, 잔인성) ③ brutality(잔인성, 무자비, 만행)
※いじめ[苛め] <이지메>
① 괴롭히는 것 ② 약한 입장의 사람에게 언어‧폭력‧무시‧따돌림 등의 행위로 정신적‧신체적인 고통을 주는 것
※학대[虐待] ①사람이나 동물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괴롭히고 가혹하게 대함.
弱い人、恵まれない人々をこそ助けてやるべきである。しかしまた反面、女性は、同じ女性から助けられることを望まないようにも見える。同じ同性から助けられることは軽蔑侮辱されていると思うのであろうか。そうした意固地な心が実際は自分を不幸にしているのであるから、そういう心をなくしてもっと素直にすべてに感謝できるようにならないといけないのである。
약한 사람, 축복 받지 못한 사람(풍요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도와 줘야 한다. 하지만 또한 반면에, 여성(女性)은, 같은 여성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같은 동성(同性)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은 경멸(輕蔑)과 모욕(侮辱)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러한 고집스러운 마음(외고집을 부리는 마음:意固地な心)이 실제는 자신을 불행(不幸)하게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을 없애고 조금 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素直)로 모든 것에 감사(感謝)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新年号では「女の頭は男なり、されば女は長き髪の毛を賜りたるなり」ということで、男と女の縦の役割を主として書き、この二月号では「夫は己の身体を愛するが如く妻を愛し、妻もまた然かすべし」という男女平等のあり方を書いた。
신년호에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니라, 그렇지만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내려 주신 것이니라(女の頭は男なり、されば女は長き髪の毛を賜りたるなり)」라고 하는 것으로, 남자와 여자의 역할(縦の役割)을 주로 쓰고, 이 2월호에서는 「남편은 자기 몸(身體)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夫は己の身体を愛するが如く妻を愛し、妻もまた然かすべし)」고 하는 남녀평등의 본연의 모습(あり方)을 썼다.
これが正しいかどうかは実践してみればわかるし、また何もわざわざ間違ったことを実践しなくとも、周囲の人を見れば成る程とわかられるであろう。
이것이 올바른지 어떤지는 실천해 보면 알 수 있고, 또한 굳이 일부러 잘못된 것을 실천하지 않더라도, 주위의 사람을 보면 과연 그렇구나라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男は男として女は女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時に幸福になるのであり、その役割を怠り逸脱する時に不幸になるのである。それが神理なのである。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역할을 할 때에 행복(幸福)하게 되는 것이며, 그 역할(役割)을 게을리 하고 일탈할 때에 불행(不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리(神理)인 것이다.
- 以上 -
- 끝 -
月刊誌 正法29号 (1981.01月)월간지 정법 29호 (1981년, 01월)
月刊誌 正法30号 (1981.02月) より월간지 정법 30호(1981년. 02월)에서
2013.07.10 UP ←
2013.7.13-14 hwan san kensyukai sanka ← 표시는, 일본 원본 사이트에서 위 글을 올려주신 분이, 표기한 것입니다.
★불신자(不信者)를,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으로 번역했습니다.
★기존의 한글로 된 여러 번역본의 성경상의 내용과 상당히, 다른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밑에, 숫자로,
표시했습니다.
다음에 번역하여 올릴 예정인 것은,
男の役割と女の役割 - 2 ・・・・・ 釈尊の教えから남자와 역할과 여자의 역할-(석존의 가르침에서)
月刊誌 正法 월간지 정법
第31号(1981.03月)/第32号(1981.04月)/第33号(1981.05月)/第35号(1981.07月) より
제32호(1981년 3월)/제32호(1981년 4월)/제33호 (1981년 5월)/제35호 (1981년 7월)에서
입니다.
★ 2013년 8월 25일에 최초에 올렸습니다.
★ 2016년 11월 26일 날짜로 두 곳에 나뉘어진 것을, 한 개로 합칩니다.
※출처 : http://www.shoho2.com/s2-11otokonoyakuwari.html
高橋信次先生・園頭広周先生が説かれました正法・神理を正しくお伝えいたします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 ・소노가시라 히로치가 선생님이 설법하신 정법・신리를 올바르게 전혀 드립니다.
男の役割と女の役割 - 2 ・・・・・ 釈尊の教えから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 2 ・・・・・ 석존(釋尊)의 가르침에서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선생님의 수제자
소노가시라 히로치가(園頭廣周)선생님
そのがしら ひろちか(소노가시라 히로치카)선생님 생전의 모습
★시간이 날 때마다, 글자들마다 색깔을 입히고 있습니다만, 이 번의 글은, 그 어느 때의 글보다도, 현대적인 입장에서, 아니 더 자세히 말하면, 가정내의 남녀의 심리적인 상황까지를 포함한, 인간 그 자체의 남녀의 특성을 명확하게 알고 계신, 2500여년 전에, 인도에서 사리불(사리자)로 계시었던, 소노가시라 히로치가님께서, 현생에 다카하시 신지 선생님(2500여년 전, 인도에서의 석가모니부처님이셨던) 그 분의 수제자로, 같이 환생하시어, 1976년 6월에 부처님이셨던 신지님이 승천하신 후, 약 4년 후 부터, 홀로 국제정법회를 만들어, 단 혼자만의 회원으로 매달 정법지를, 발간하시었는 데, 그 중에서도, 이 글은, 단 한 글자도, 소중하지 않고, 귀중하지 않은, 가장 값진 보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반드시 읽어 보셔야 할 글입니다. ★
★일단 읽어 보신다면, 스스로 그 말의 진의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 ★
1.原始キリスト教団と原始仏教教団の共通性
1.원시(原始) 그리스도 교단(敎團) 원시불교(原始佛敎)의 공통성(共通性)
2.釈尊は男女夫婦のあり方をこう説かれた
2.석존(釋尊)은 남녀 부부(男女夫婦)의 본연(本然)의 모습을 이렇게 설법(說法)하셨다.
3.釈尊は恋愛の純粋性について説かれた
3.석존(釋尊)은 연애(戀愛)의 순수성(純粹性)에 대해서 설법(說法)하셨다.
4.釈尊の教えから ・・・ 1
4.석존(釋尊)의 가르침에서 ・・・ 1
5.霊の段階の高い人はより多く奉仕しなければならない
5.영혼(霊)의 단계(段階)가 높은 사람은 보다 많은 봉사(奉仕)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6.性と結婚
6.성(性)과 결혼(結婚)
7.釈尊の教えから ・・・ 2
7.석존(釋尊)의 가르침에서 ・・・ 2
8.妻のあり方
8.아내(妻)의 본연(本然)의 모습
9.永遠の父性と永遠の母性
9.영원(永遠)한 부성(父性)과 영원(永遠)한 모성(母性)
10.なぜ「おっ母さん」といって死ぬのかなぜ「瞼の母」というのか
10.왜「엄마(おっ母さん)」라고 말하며 죽는가? 왜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이라고 말하는가?
11.夫がなぜ自分の妻を「かあちゃん」とよぶのか
11.남편(夫)의 왜 자기 아내(妻)를 「여보, 마누라(かあちゃん:속어 처, 엄마)」라고 부르는가?
1.原始キリスト教団と原始仏教教団の共通性
1.원시 그리스도 교단과 원시 불교 교단의 공통성
新年号と二月号に於いて、聖書の中に示されている男女、夫婦のあり方を書いた。キリストは独身者であったが、正法神理を悟られた方であったから男女夫婦のあり方も正しく説いていられるのである。
신년호와 2월호에서, 성경(聖書)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을 썼다. 그리스도는 독신자(獨身者)이였지만, 정법 신리(正法神理)를 깨달으신 분이셨기 때문에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도 올바르게 설교하고 계시는 것이다.
およそ人間というものは、男と女という区別があり、その男と女は大部分が結婚をして子供を生むのであり、人間的に生きるということは、男か女か、また結婚をして生きるのであり、男でもなければ女でもないどちらでもないとう生き方は出来ないのであり、その、人として生きる道を説かれると使命を持たれた方が男女夫婦の道を説かれるのは当然であり、説かれなかったと考える方がおかしい訳である。しかし、現在、教会において牧師が聖書の中に示されてある男女夫婦の道を説くことはほとんどない。そればかりか「性欲は罪悪である」と説いている。私の青春時代の悩みの大部分は「なぜ性欲が罪悪なのであるか、性欲が罪悪であるならば、なぜ神は人間が性欲を持たず罪を犯すことがないようにつくられなかったのであるか」という煩悩に費やされたのであった。
대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구별(區別)이 있으며. 그 남자와 여자는 대부분이 결혼(結婚)을 하고 자식(子供)을 낳는 것이며, 인간적(人間的)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역시 결혼을 하고 사는 것이며, 남자도 아니면서 여자도 아닌 어느쪽도 아니라고 하는 본연의 모습은 불가능한 것이며, 그렇게, 사람으로 살아 나갈 길을(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설법하신다고 하는 사명을 가지신 분이 남녀 부부의 길(道:도리)를 설법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설법하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교회(敎會)에서 목사가 성경(聖書) 안에 제시하고 있는 남녀 부부의 도리(道)를 설교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성욕(性欲)은 죄악(罪悪)이다」라고 설교하고 있다. 저의 청춘시절(青春時代)의 고민(悩み)의 대부분은「왜 성욕(性欲)이 죄악(罪悪)인 것인가, 성욕(性欲)이 죄악(罪悪)이라면, 왜 신(神)은 인간이 성욕(性欲)을 갖지 않고 죄(罪)를 저지를 수가 없도록 만들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하는 번뇌(煩惱)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었다.
キリストは未亡人について次のように説いていられる。
그리스도는 미망인(未亡人)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고 계신다.
「夫と別れた妻は、夫への貞淑さを守ってその子供を正しく育てることである。もし、その妻が、性の問題を処理し切れないならば姦通の罪を犯さないように再婚すべきである」
「남편과 헤어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정숙함(貞淑さ)을 지키고 자식(子供)을 올바르게 키우는 것이다. 그 아내가, 성(性)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는 경우라면 간통(姦通)의 죄(罪)를 범하지 않도록 재혼(再婚)해야 한다.」
このようにキリストは親切に愛深く教えていられる。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친절하게 정답게 가르치고 계신다.
二月号「高橋信次先生随聞記、大日如来と卑弥呼」の所に書いたように、釈尊が強く説かれなかった「愛」を正しく説くために大日如来が出現され、さらにキリストを出して愛を説かしめられ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のであり、聖書の中には男女夫婦のあり方も正しく説かれているのであるのに、なぜ教会の牧師はそれを説かなかったのであるか。それは「潔くなければ神は救い給わない」と考えた聖職者達が性いうものを罪悪視して独身であったために、性の問題で苦悩し性の純潔を守るために必死であった男女夫婦のあり方にまで心を及ぼす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が原因だとしか考えられない。
2월호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의 수문기(随聞記)、대일여래(大日如来)와 히미코(卑弥呼)」에 쓰신 것처럼, 석존(釈尊)이 강하게 설법하지 않았던「사랑(愛)」을 올바르게 설법하시기 위해서 대일여래(大日如来)가 출현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내보내어 사랑(愛)을 설교하시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성경(聖書) 안에는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도 올바르게 설교하시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의 목사(牧師)는 그것을 설교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떳떳(깨끗)하지 못하면 신(神)은 도와주시지 않는다(구제해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한 성직자(聖職者)들이 성(性)이라고 하는 것을 죄악시(罪悪視)하고 독신(獨身)이었기 때문에, 성(性) 문제로 고민(苦悩)하고 성(性)의 순결(純潔)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있었던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 원인(原因)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ひみこ[卑弥呼:卑彌呼] 발음 "히미코"
①3세기 중엽 무렵에 일본에 잇었던 나라인, 야마타이코쿠(邪馬台国:사마태국)의 여왕인 히미코(卑弥呼:卑彌呼). 「기시와지덴魏志倭人傳: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약 30국이 여왕의 통치하에 있었고 239년에 위(魏)에 사자(使者)인 나시메(難升米:나승미)를 보내어 명제(明帝:중국 후한의 황제:28~75년)로부터 신기와오우(親魏倭王;친위왜왕)의 칭호를 받았다.
★[明帝] <국어사전>
[明帝] [인명] 중국 후한(後漢)의 황제(28~75). 성은 유(劉), 이름은 장(莊)이다. 재위 기간 중에 불교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흉노족을 평정하여 북방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확립하였다.
しかし、聖書には、はっきりとその道が残されているのであるから、たとえ聖職者であってもキリストが説かれたことを正しく伝えようとした人があったわけである。正しくそのように伝えた人があっても、現在、教会ではそのことについて説かれていないのは、その間の聖職者達が敢えてそこは見ぬふりをしてか或いは全く見逃して歪めて説いてきたとしか考えられない。
하지만, 성경(聖書)에는, 분명하게 그 길(道:도리)가 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령 성직자들이더라도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것을 올바르게 전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올바르게 그렇게 전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어도, 현재, 교회(敎會)에서는 그 일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 간의 성직자들이 일부러 그것은 보고도 못 본 척 하든가 혹은 실로 알면서도 그대로 두고 진실을 왜곡시켜 설교해 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中世期、トルコがキリストの聖地エルサレムを占領した。その聖地奪還の戦争がローマ法王によって計画された。それが十字軍戦争である。ヨーロッパからの遠征軍はことごとく敗れた。最後にローマ法王が考え出したことは、「大人は性によって汚れているから神が味方されなかったのである。だから性の汚れを知らない十才から十五才位の少年をやったら、その少年達を神が祝福されて必ず戦いは勝つであろう」ということで少年十字軍が送られたのである。そういう少年達がトルコの勇敢な大人の軍隊に勝つはずがない。見事に敗れ去った。
중세(中世) 무렵, 투르코(포르투칼어 Turco:터키)가 그리스도의 성지(聖地)인 예루살렘(Jerusalem)을 점령했다. 그 성지탈환(聖地奪還) 전쟁이 로마 법왕(Roma法王: ‘로마 교황’의 이전 말)에 의해서 계획(計劃)되었다.
그것이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이다. 유럽(Europe:구라파)에서의 원정군(遠征軍)은 모조리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로마 법왕(Roma法王)이 생각해 낸 것은, 「어른(大人)은 성(性)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있기 때문에 신(神)이 우리편(味方:아군)이 되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性)의 더러움을 모르는 10살부터 15살정도의 소년(少年)을 보내면, 그 소년들을 신(神)이 축복(祝福)하시고 틀림없이 전쟁(戰い)은 이길 것이다」라고 하는 일로 소년 십자군(少年十字軍)이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한 소년들이 투르코(Turco:터키)의 용감한 어른(大人)의 군대를 이길 도리가 없다. 완전히 패퇴했다.
★십자군 전쟁 [十字軍戰爭] <국어사전>
① 서기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회교도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 유럽 그리스도 교회가 주도한 원정 전쟁
★소년 십자군 [少年十字軍] <국어사전>
① 1212년에 프랑스 및 독일의 소년, 소녀들이 일으킨 십자군
この時にヨーロッパのキリスト教徒達はローマ法王の間違いに気付き、歪められたキリスト教の教えに気付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歴代のローマ法王自身もこのことについては反省しなかった。少年十字軍を遠征させた原因は「性は罪悪だ。神は純潔を尊ばれる」とローマ法王が考えたことにあったのであるが、依然としてその考え方の間違いは修正されずに、牧師は独身であることが定められ、キリストに全てを捧げる修道女の制度がつくられた。性生活の経験者は道を説き道に奉仕することは出来ないという訳である。
이 때에 유럽(Europe:구라파)의 그리스도교도들은 로마 법왕(Roma法王:로마 교황)의 잘못을 깨닫고, (도리‧진실)을 왜곡시킨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역대(歷代) 로마 법왕(Roma法王) 자신도 이 일에 대해서는 반성(反省)하지 않았다. 소년 십자군(少年十字軍)을 원정(遠征)하게 된 원인은「성(性)은 죄악(罪悪)이다. 신(神)은 순결(純潔)을 중히 여기신다」고 로마 법왕(Roma法王)이 생각한 것에 있었다고 하는 것인데, 여전히 그 사고방식의 잘못을 수정(修正)하지 않고, 목사(牧師)는 독신(獨身)이어야 한다고 제정하고, 그리스도교에 모든 것을 바치는 수도녀(修道女:nun:수녀:수도니[修道尼])의 제도(制度)가 만들어졌다. 성생활(性生活)의 경험자는 사람의 길(道:도리)을 설교하는 길(道)에 봉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性というものがこのように罪悪視されることになったのは、キリストが独身であったために、そのキリストにあやかりキリストに学びたいという気持ちがあったと同時に、その当時の社会状態が性に対しては非常にルーズであり、性に対して超然とした姿勢を持つ者でないと大衆から尊敬されなかったという事情もある。
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죄악시(罪惡視)되게 된 것은, 그리스도가 독신(獨身)이었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닮았으면 하고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싶다고 하는 기분이 있었다고 하는 것과 동시에, 그 당시의 사회 상태(社会狀態)가 성(性)에 대해서 상당히 루스(loose:느슨함)하고, 성(性)에 대해서 초연(超然)한 자세를 갖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중(大衆)으로부터 존경(尊敬)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정(事情)도 있다.
これと同じ状態が原始釈迦教団の中でもあった訳である。
이것과 똑같은 상태가 원시석가교단(原始釋迦敎團) 안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釈尊は出家された。インドには五千年前から出家して法を求めるという習慣があった。菩提樹の下で悟りを開かれた釈尊は、妻やショダラと一子ラフラを迎え入れようと考えられたこともあったがしかしそれは出来られなかった。釈尊の下に帰依する人達が次第に多くなり、独身者ばかりの釈迦教団がつくられていった。そのうちに釈迦の育ての母親パジャパテー外カピラの女性達が帰依して比丘尼の集団が出来た。出家したとはいえ男の集団と女の集団が同じ所にいれば、当然男女関係が生まれてくる。その度に厳しい戒律がつくられて行った。戒律は最初からつくられたのでなかった。問題が起こる度に釈迦教団全体の統制を保つために後からつくられて行ったのである。だから最初から間違いがなければ戒律など必要はないのである。
석존(釋尊)은 출가하셨다. 인도(印度)에는 5천년 전부터 출가해서 법을 찾는다고 하는 습성(習慣)이 있었다. 보리수(菩提樹:pippala) 아래에서 득도(得道)하신 석존(釋尊)은, 아내인 야쇼다라(Yasodharā, 耶輸陀羅)와 아들인 라훌라(Rāhula,羅睺羅)를 맞아들이려고 생각하신 적도 있었지만 하지만 그것은 할 수 없었다. 석존(釋尊)의 밑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독신자(獨身者)뿐인 석가교단(釋迦敎團)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석가(釋迦)를 양육한 모친(母親) 파자파티(pajāpati, 波闍波提) 외 카필라(Kapila)의 여성들이 귀의(歸依)해서 비구니(比丘尼)의 집단이 완성되었다. 출가(出家)했다고는 하지만 남자 집단과 여자 집단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당연히 남녀 관계가 생기게 된다. 그 때마다 엄격한 계율(戒律)이 만들어져 갔다. 계율(戒律)은 최초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석가교단(釋迦敎團) 전체의 통제(統制)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후에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잘못이 없으면 계율(戒律) 따위는 필요는 없는 것이다.
「たとえ毒蛇の口の中に男子の性器を入れても、女の陰部にそれを入れてはならぬ」ということを釈尊が言われたのは、余程目に余るような比丘と比丘尼の交際があったからである。そう言われてその迷いの源を断つといって自分の性器を切り取った比丘もあったのである。
「설령 독사(毒蛇)의 입 속에 남자의 성기(性器)을 넣더라도, 여자의 음부(陰部)에 그것을 넣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석존(釋尊)이 말씀하셨던 것은, 상당히 눈꼴 사나울(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심한,目に余る) 정도로 많은 비구(比丘)과 비구니(比丘尼)의 교제(交際)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고 그 미혹(迷い:미망)의 근원(源)을 끊겠다고 하며 자신의 성기(性器)를 잘라 낸 비구(比丘)도 있었던 것이다.
釈尊自身がカピラ城内での自分を取巻く女性達の確執を見られ、その煩悩の浅ましさを感じられ、釈迦教団のそういう状態があり、また当時の社会情勢が性的に乱れている中においては、性に関して、性に関して、男女夫婦のあり方については極力説くことをされなかったことは充分に考えられる。
석존(釋尊) 자신이 카필라성(Kapila城) 안에서의 자신을 둘러싸는 여성들의 확집(確執:갈등, 불화)를 볼 수 있고, 그 번뇌(煩惱)의 비참함(淺ましさ:비열함,한심스러움)을 느낄 수 있고, 석가교단(釋迦敎團)의 그러한 상태가 있고, 또한 당시의 사회 정세가 성적(性的)으로 문란해져 있는 와중에 있어서는, 성(性)에 관해서, 성(性)에 관해서,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는 힘껏(極力:있는 힘을 다하여) 설교할 수 없었던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また独身の弟子達が、各地に散って法を説くという場合、男女夫婦のあり方について説くと言う事になれば当然、性の問題に触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になるし、禁欲の生活をしている弟子達がそのことを説くと言う事になればこれまた当然、そのことについて心が怪しく揺れ動くであろうし、常に心の安らかさをモットーとしている者としては極力そのことには触れまいとすることもまた無理からぬことである。
또한 독신(獨身)인 제자(弟子)들이, 각지에 흩어져서 법(法)을 설법한다고 하는 경우,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 설법한다고 하는 경우가 되면 당연히, 성(性) 문제에 닿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되고, 금욕(禁欲)의 생활을 하고 있는 제자들이 그 일을 설법한다고 하는 일이 되면 이 또한 당연히, 그 일에 대해서 마음이 끌려서 흔들리게 될 것이고, 항상 마음의 평안을 모토(motto:신조)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힘껏(極力) 그 일에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또한 무리한 일이다.
そうして代々、法を説く者は釈尊に倣(なら)って出家した。日本の坊さんも本来は出家であった。この出家の禁を破ったのが親鸞聖人であった。今でも禅宗の坊さんは独身が多い。スリランカ、タイの坊さんは出家である。
그리고 대대(代代)로, 법(法)을 설법하는 사람은 석존(釋尊)을 따라서 출가했다. 일본의 스님도 본래는 출가했다. 이 출가의 금기(禁)를 어긴 것이 신란성인(親鸞聖人, 1173년- 1262년)이었다. 지금도 선종(禪宗)의 스님은 독신(獨身)이 많다. 스리랑카(Sri Lanka), 타이(Thai)의 스님은 출가하고 있다.
★신란성인(親鸞聖人1173년- 1262년), 가마쿠라시대 전반에서 중기에 걸친 일본의 승려. 정토진종(浄土眞宗의 종조 ★신란의 아내의 이름은, 에신니[恵信尼, 1182~1268년] ※<위키일본어백과 사전>
★선종(禪宗) ① 그 교지(教旨)는, 불교의 진수는 좌선에 의해 직접 체득된다고 하는 종파.
★스리랑카 [Sri Lanka] ①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
★타이 [Thai(<Thailand)] ①인도차이나 반도 중앙부에 있는 입헌 군주국
キリスト教の牧師が独身であると同じように坊さんも独身であるのが伝統であった。だから教会で男女夫婦のあり方が説かれなかったと同じように、日本のお寺でも説かれなかった。それだけでなく「女はおなごといって、男よりも女は業が深いのである」とか「女人禁制」といって女は汚れたものとして扱われて来た。
그리스도교의 목사(牧師)가 독신(獨身)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님도 독신(獨身)인 것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교회(敎會)에서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을 설교하지 않았던 것처럼, 일본(日本)의 절(お寺)에서도 설법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자는 하녀라고 하며(女はおなごといって), 남자보다 여자는 업(業)이 많은 것이다」라든가「여인 출입 금지(女人禁制: 승려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여성의 입산을 금하는 것)」라고 하며 여자는 더러운 사람(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해 왔다.
原始仏教教団の僧達は女は救われざるものとして説いてきた為に、大乗仏教時代になるとさすがにこの誤りに気付き、それを修正しようとして「女は女のままでは救われない。女は一ぺん男に生まれ変わってからでないと救われない」という「変成男子」ということが言われ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この「変成男子」という考え方の中にはやはり女は救われないという女性蔑視の考えが潜んでいる。
원시 불교 교단의 스님들은 여자는 구제될 수 없는 사람(救われざるもの)이라고 하며 설법해 왔기 때문에, 대승불교 시대가 되자 그렇게는 생각하지만 이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수정(修正)하려고 해서「여자는 여자 그 상태로는 구제될 수 없다. 여자는 한 번 남자로 환생하지 않고서는 구제될 수 없다」
라고 하는 「헨조난시(變成男子:변성남자, 여자가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변성남자(變成男子)」라고 하는 사고방식 속에는 역시 여자는 구제될 수 없다(やはり女は救われない)고 하는 여성 멸시(女性蔑視)의 생각이 숨어 있다.
★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참고삼아 올립니다★
※변성남자[變成男子] へんじょうなんし(헨조난시)라고 읽음. <일본어 사전>
<불교> ① 변성남자. ②여자가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여자에게는 오장(五障)이 있어서 그대로는 성불(成仏)이 곤란하기 때문에 남자의 몸이 되어 성불하는 것을 한 말.
★ <불교> 오장[五障] <일본어 사전>
①여성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장애, 즉 여성은 수행해도, 범천왕(梵天王;ぼんてんのう) ‧제석천(帝釈天;たいしゃくてん) ‧마왕(魔王;まおう) ‧전륜성왕(転輪聖王;てんりんじょうおう) ‧불신(佛身;ぶっしん)은 될 수 없다는 것. 법화경제바달마품(法華経提婆達多品: 법화경 28품 중 제12, 데바닷타의 성불, 8살의 용녀가 성불한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에 나와 있다. ( 이 때, 용녀가, 순식간에 남자로 변해서, 천상계로 올라가서 설법하는 모습이 설명되어 있으며,
어리석은 스님들과 재가신도들과 수행자들이, 놀라는 모습이 나옵니다. ㅎㅎㅎ)
釈迦教団と原始キリスト教団のあり方を比較してみると、同じ過ちを犯している事がよくわかるが、そうしたあり方をしないとその当時にはそうでないと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という社会的背景を考えなければいけない。
석가 교단(釋迦敎團)과 원시 그리스도 교단(原始Christ敎團)의 본연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지만, 그러한 본연의 모습을 하지 않으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는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そのことを考えると、正法が説かれるには正法が説かれるに相応しい時代があるということを考えさせられる。だからといって釈尊が男女夫婦のあり方について説かれなかった訳ではない。キリストがその道を説かれたと同じように釈尊もその道を説かれているのである。ただその彼の弟子達が説かなかっただけのことである。
그 일을 생각하면, 정법(正法)을 설법하는 데에는 정법(正法)을 설법하는 데에 상응하는 시대가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석존(釋尊)이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 설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Christ)가 그 길(道)을 설교하신 것처럼 석존(釋尊)도 그 길(道)를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의 제자(弟子)들이 설법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私が「男の役割と女の役割」について書こうと思ったのは、単にその各々の役割を説こうというだけではなく、釈尊もキリストも同じ正法神理を説いていられる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もらうためでもある。
제(소노가시라 히로치가)가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쓰려고 생각한 것은, 단순히 그 각자의 역할을 설하려고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석존(釋尊)도 그리스도(Christ)도 똑같은 정법 신리(正法神理)를 설법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神理は一つである神理が二つだとしたらもはやそれは神理ではない。
신리(神理)는 하나이며 신리(神理)가 둘이라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신리(神理)가 아니다.
私はこのことを書きながら思うことは ・・・
あの思春期に「性」ということについて、「恋愛と結婚」について、血の浸むような悩みを持って教会へ行き、聖書を読み、またいろいろな坊さんお話を聞いたのも、結局は今になって「釈尊・キリストは説かれたことは同じ一つの神理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知るための準備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つくづくと思わされるのである。
저는 이 일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은 ・・・
저 당시의 사춘기에 「성(性)」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피나는 고민(悩み)을 가지고 교회로 가서, 성경(聖書)을 읽고, 또한 여러 스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도, 결국은 이제 와서 「석존(釋尊)・그리스도(Christ)는 설법(설교)하신 것은 똑같은 하나의 신리(神理)였다」고 하는 것을 알기 위한 준비(準備)였다고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この頃、栄養がよくなったために、小学校五年生の女の子が初潮を見るという。ある若いお母さんから聞いたことであるが、五年生になると生理の教育があり、どうして子供が生まれるかを教えられるという。だから今の子供は昔の子供と違うというのである。ある日、兄の男の子供と一緒に風呂に入れたら、その男の子の一物をしげしげと眺めながら「あんたのはりっぱね」とその女の子が言ったというのである。それでその若い母親はびっくりしてそれ以来、男の子とも、父親とも一緒に風呂に入れるということはしないようにしたと言うことであった。
요즈음은, 영양(榮養)이 좋아졌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생의 여자 아이가 초조(初潮:초경,첫 월경)을 한다고 한다.
어떤 젊은 엄마에게서 들은 것이 있는데, 5학년생이 되자 생리(生理) 교육(教育)이 있고, 어떻게 아이(子供)가 태어나는지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아이(子供)는 예전의 아이(子供)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오빠(兄:시아주버니)의 남자 아이(子供)와 같이 목욕을 시켰더니, 그 남자 아이(子)의 고추(一物)을 찬찬히 쳐다보면서 「네 것은 훌륭하네(あんたのはりっぱね)」라고 그 여자 아이가 말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 모친(母親)은 깜짝 놀라서 그 이후로, 남자 아이와도, 부친과도 같이 목욕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하지 않게 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まだ一人前に知性も理性も持たない子供に、教えればいいからということで唯単に生理的にのみ教えるから、それに興味を持って不純異性交遊に走る中学生達が出てくるのである。そうした事件を起こしている中学生達は恐らくそういう事がいけないことだという道徳的判断は全くなく、そうすることがなぜいけないのかという反省などをするということも全く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う。
아직 어른다운 지성(知性)도 이성(理性)도 갖지 않은 아이(子供)에게, 가르쳐 주면 좋으니까 라고 하는 일로 그저 단순히 생리적(生理的)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그것에 흥미(興味)를 가지고 불순한 이성 교제(交遊)에 빠지는 중학생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중학생들은 필시 그러한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하는 도덕적 판단은 전혀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좋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는 반성(反省) 등을 한다고 하는 일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だから教育というものは、子供の精神と肉体の発達のバランスを考えて、教えなければならない。また教えてはならないことと時があるということも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그래서 교육(敎育)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이(子供)의 정신(精神)과 육체(肉体)의 발달(發達)의 밸런스(균형)을 생각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때가 있다고 하는 것도 알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男女夫婦生活の秩序ということを教えられずに、単に生理的にのみ機械的にのみ性行為の結果、子供が生まれることを教えられた子供達が、男女の秩序を全く考えずに乱交をしても、それに対しては全く罪の意識を持たないのは当然である。だから「人は、教育によってのみ人となり得る」ということが言えるのである。
남녀 부부 생활의 질서(秩序)라고 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 단지 생리적(生理的)으로만 기계적으로만 성행위(性行為)를 한 결과, 아이(子供)가 태어나는 것을 배운 아이(子供)들이, 남녀의 질서(秩序)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난교(亂交: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교함)를 해도,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죄의식(罪意識)을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이 될 수 있다(人は、教育によってのみ人となり得る)」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子供に性教育をする場合は、
아이(子供:자식)에게 성교육(性教育)을 하는 경우는,
1.宇宙創造の原理、天地陰陽の理(ことわり)
1.우주 창조의 원리, 천지 음양의 이치(理)
2.男の役割と女の役割
2.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3.結婚の意義、夫婦生活の秩序
3.결혼의 의의(意義), 부부 생활의 질서
4.子供の誕生は神の計画と天上界の計画による
4.아이(子供:자식)의 탄생은 신(神)의 계획과 천상계(天上界)의 계획에 의한다
ということを教え、その神理と秩序に反した時にそれを「悪」「不道徳」といい、その責任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事を教えるべきである。
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그 신리(神理)와 질서(秩序)에 반했을 때에 그것을 「악(惡)」「부도덕(不道徳)」라고 하며,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このような点において、テレビのメロドラマの害毒もまた大だと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だから、子供の健全な生育を願う親達はテレビのメロドラマは見てはならないし、メロドラマを放送するスポンサーの販売する商品は買わないという良識を示すべきである。商品は買って儲けさせて、その上に子供の精神的な発達を妨害されて、それでもなお喜んでいるという親はよほど頭がどうか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ざるを得ない。
이러한 점에서, 텔레비젼의 멜로드라마의 해독(害毒)도 역시 크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아이(子供)의 건전한 생육(生育)을 바라는 부모들은 텔레비젼의 멜로드라마(melodrama:통속적이고 감상적인 극)는 봐서는 안 되고, 멜로드라마를 방송하는 스폰서(Sonsor:광고주, 후원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사지 않는다고 하는 양식(良識)을 보여야 한다. 상품을 사서 득을 봤다며, 게다가 아이(子供)의 정신적인 발달을 방해하게 하며, 그런데도 여전히 기뻐하고 있다고 하는 부모(親)는 어지간히 머리가 좀 이상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해독[害毒] 어떤 일을 망치거나 파괴하여 해를 끼치고 나쁜 작용을 함.
前にも書いて置いたが、ユダヤ教徒は小さな男の子供に「割礼」の儀式を施して包皮を切り取る。男の子供は小便をするたびに自分のものを見、手に触れて、「これは神さまから授けられたものである。正しい関係においてのみ行使すべきものである」と親から教えられたことを何時も思い出すように躾けられてあるのである。これはユダヤ民族が神の選民であることを自覚し、神の子たるに相応しい秩序ある生活を営むために考え出した何千年来のユダヤ民族の智慧なのである。
전에도 써 놓았지만, 유대교도는 어린 남자 아이(子供)에게 「할례(割禮)」의 의식을 시행해서 포피(包皮)를 도려 낸다. 남자 아이(子供)는 소변을 볼 때마다 자기 것을 보고, 손으로 만지며, 「이것은 하느님(神さま)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올바른 관계에 있어서만 행사(行使)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부모님(親)에게 배운 것을 언제나 생각하도록 예의 범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 신(神)의 선민(選民:선택받은 백성)인 것을 자각하고, 신(神)의 자식(子)된 상응한 질서 있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몇 천년 전 부터의 유대 민족의 지혜(智慧)인 것이다.
中・高校生の不純異性交遊がもっと多くなり、男女の性の秩序がもっと乱れて来るようになると、そのうちに日本でも男の子供に割礼を施したらどうだろうかという意見が出されるようになって来るかもしれない。
중・고등학생의 불순한 이성 교제(交遊)가 더욱 많아지고, 남녀의 성(性)의 질서가 더욱 문란해져 오게 되자, 그 사이에 일본에서도 남자 아이(子供)에게 할례(割禮)을 시행하면 어떨까? 라고 하는 의견이 나오게 되어 올지도 모른다.
私が「男の役割と女の役割」を書くことにしたのは、今の日本の現状を見て、何とかこれを修正し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ったからでもある。
제가「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쓰게 된 것은, 오늘날의 일본의 현재의 상황(現狀)을 보고, 웬지 이것을 수정(修正)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新年号に、女が生まれつきなぜ長い髪の毛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キリストがいわれたことは、女の子が小学校一年生になったら教えられることである。
신년호에, 여자가 선천적으로 왜 긴 머리 카락을 갖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Christ)가 말씀하신 것은, 여자아이(女の子)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배우는 것이다.
「○○ちゃん、入学おめでとう。あなた誰と一緒に座ることになったの。同じクラスに幼稚園で一緒だった男の子がいる?ところで、男の子は髪をのばしているといっても、女の子よりは短いでしょう。大人になると、お父さんの髪の毛は、お母さんの髪の毛よりもうんと短いでしょう。どうして男の人は髪の毛が短くて、女の人は長いのでしょうね。日本人だけでなくて、アメリカもフランスも、中国も、世界中の人達がみんなそうよ。あなたそのことをふしぎだとおもわない?」
そう話しかけて、
「○○군, 입학을 축하해요. 넌 누구랑 같이 앉을거니? 같은 학급에 유치원에서 같이 온 남자 아이(男の子)가 있니? 그런데, 남자 아이(男の子)는 머리를 기르고 있다고 해도, 여자 아이(女の子)보다도 짧아요. 어른이 되면, 아빠의 머리 카락은, 엄마의 머리 카락보다도 훨씬 짧아져요. 왜 남자 아이(男の人)는 머리 카락이 짧고, 여자 아이(女の人)는 긴 걸까요. 일본인 뿐만 아니라, 미국도 프랑스도, 중국도, 세계 속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거든요. 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니?」
그렇게 말을 걸고서,
「それはね、神さまが人間を男と女とにつくられたの。そうして男の役割と女の役割が決められたの。その時、神さまが、「男の頭は神なり、女の頭は男なり・・・・・・と教えて下さったの。そのことの印として女は大昔から長い髪を大事にするようになったの。だから、おうちでも、お母さんは「お父さん、お父さん」とお父さんを大事にしているでしょう。あなたが学校へ行けるのも、みんなああして、お父さんが毎日元気で会社で働いて下さるお陰よ。だから、お母さんはいつもお父さんに感謝しているの」
そう教えればいいのである。
「그것은 말이에요. 하느님(神さま)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정해진 것이고요. 그 때, 하느님(神さま)이, 「남자의 머리는 신(神)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男)이니라・・・・・・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에요. 그 것에 대한 표시(印:증거)로 여자는 먼 옛날부터 긴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집에서도, 엄마는「아빠(お父さん)、아빠(お父さん)」라고 아빠를 소중히 하는 것이에요. 네가 학교에 갈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렇게, 아빠가 매일 건강(元氣)하게 회사에서 일해 주시는 덕분이에요. 그래서, 엄마는 항상 아빠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가르쳐 주면 좋은 것이다.
「だから、あなたもお父さんに感謝してね」とか「しましょうね」ということは絶対に言わないことである。そこは子ども自身に考えさせないといけないのである。母親が、子供が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所まで先に言ってしまうから、頭の回転のきかない子供に育ってしまうのである。こうして女の子は自然に、女のあり方、妻のあり方、母としてのあり方を勉強させられ、躾られて行くのである。
「그래서, 너도 아빠에게 감사해요」라든가「감사하자(しましょうね)」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子ど)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친(母親)이, 아이(子供)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까지 먼저 말해 버리기 때문에, 머리 회전의 둔한 아이(子供)로 자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 아이(女の子)는 자연히, 여자의 본연의 모습, 아내의 본연의모습, 어머니(母)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공부하도록 시키고, 예의 범절을 가르쳐 가는 것이다.
(聖書では、男の頭はキリストなり、キリストの頭は神なり、といっているが、これはキリストの弟子達がキリストを神の一人子であるとして言った事であって「男の頭はキリストなり」ということは必要ないのである。キリストも我々と同じ人であって、ただ我々に比べてより深く神の心を知っていられる光の大指導霊であるという方であって、神の子であるという霊の本質においてはキリストも我々も平等である。)
(성경(聖書)에서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신(神)이며,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弟子)들이 그리스도를 신(神)의 독생자(一人子)라고 여겨서 말한 것이며,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男の頭はキリストなり)」라고 하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이며(キリストも我々と同じ人であって), 다만 우리들에 비해서 보다 깊게(보다 많이) 신(神)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빛(光)의 대지도령(大指導靈)이라고 하는 분이며, 신(神)의 자녀(子)라고 하는 영혼(靈)의 본질(本質)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도 우리도 평등(平等)하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색을 입힐까 합니다.>
2.釈尊は男女夫婦のあり方をこう説かれた
2.석존(釋尊)은 남녀 부부의 본연의 모습을 이렇게 설법하셨다.
さて、釈尊はどのように説かれたか。中村元著「原始仏教、その思想と生活」の中から書いてみよう。とかく仏教学者の文は難しく判りにくい点が多いので判り易く解説したい。
그럼, 석존(釋尊)은 어떻게 설법하셨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1912년~1999년)씨의 저서「원시불교(原始佛教), 그 사상과 생활(その思想と生活)」 중에서 써 보겠습니다. 아무튼 불교학자의 문장(文)은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므로 알기 쉽게 해설해 보고 싶습니다.
「原始仏教、その思想と生活 ・・・ 性の倫理と結婚生活」 中村元著
「원시불교(原始佛教), 그 사상과 생활 ・・・ 성(性)의 윤리와 결혼생활」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저서(著)
原始仏教では出家した者に対しては、異性との交渉は全て断つように規定したが、在家の人々に対しては正しい性の倫理が説かれた。
원시불교에서는 출가한 자에 대해서는, 이성(異性)과의 교섭(交渉)은 전부 끊도록 규정했지만, 재가(在家)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올바른 성(性) 윤리(倫理)가 설법되었다.
「知者は淫行を回避せよ。誰も赤熱した炭火の坑(あな・土中の穴の意)の中に入って行く者はなかろう。人々はそこを避ける。それと同じように不倫な性行為をするな。正しく魂の修行をしようとして出家した者が、その不倫な男女関係を避けることが出来なければ在家となって結婚をせよ。結婚した者の心得るべきことは他人の妻を犯してはならないことである」
「지자(知者:사리를 잘 판단‧판별하는 사람)는 음행을 회피하라. 누구도 빨갛게 달군 숯불의 구덩이((구덩이(あな)・땅속의 구덩이를 뜻함(土中の穴の意))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피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불륜(不倫)한 성행위(性行為)를 하지 말라. 올바르게 영혼(魂)의 수행(修行)을 하려고 해서 출가(出家)한 사람이, 그 불륜(不倫)한 남녀관계를 피할 수가 없다면 재가(在家)하여 결혼을 해라. 결혼한 사람의 이해해야(心得る:조심해야) 할 일은 타인의 아내(妻)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この釈尊の考えは、キリストが未亡人に対して「性生活に対する執着があるならば、むしろ再婚をして心を安らかにすることである」と説かれたことと同じである。正法即ち正しい信仰の道は、心を安らかにすることなのであるから、表面上、夫に操を立てて貞節を尽くしているように見えていても、心の中であれこれと性のことが煩悩となって心を乱しているようであったらそれはいけないのである。それよりは再婚をしてそのことについて思い煩うことがないようにして生きて行くことが大事であると教えていられる。さらに、先夫との間に子供があって再婚する場合は、自分が性について悩まなくなった代償として子供のことで悩むことになるのはやむをえない事であると言っていられる。
이 석존(釋尊)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미망인(未亡人)에 대해서「성생활(性生活)에 대한 집착(執着)이 있다면, 차라리 결혼(再婚)을 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설교하신 것과 똑같다. 정법(正法) 즉 올바른 신앙(信仰)의 길(道)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일인 것이기 때문에, 표면상, 남편에게 정조(貞操)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어도,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성(性)의 일로 번뇌(煩惱)가 되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식으로 있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그것보다는 재혼(再婚)을 해서 그 일에 대해서 걱정(번민)하는 일이 없도록 해서 살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더욱이, 전남편과의 사이에 자식(子供)이 있고 재혼(再婚)하는 경우는, 자신이 성(性)에 대해서 고민(괴로워)하지 않게 된 대가(代償)으로서 자식(子供)의 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라고 말하고 계신다.
だからキリストはいっていられるのである。
그래서 그리스도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されど、わが心にては、夫を亡くした妻は、夫を守るべし。
されば汝の子は清く直(なお・真っ直ぐ、素直の意)からん」と。
「그렇지만, 내 마음으로는, 남편을 잃은(여읜) 아내는, 남편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네 자녀(汝の子)는 깨끗하고 곧게(역시(なお)・마음이 곧음(眞っ直ぐ:정직함)、솔직(素直)의 뜻(意))된다」라고.
私達は周囲に、夫を亡くした後、きれいに身を守り、夫を立てて、苦労した末に子供達がみな素晴らしくなって、安心して老後を送るようになった人も見ているし、再婚して経済的には安定していても子供のために泣いているという人をも見ている。しかしまた、先夫や先妻の子供も、また再婚した人との間に生まれた子供も、それぞれ立派に育てていられる人もまた知っている。そういう人はまたそれなりの努力をしていられるわけである。
우리들은 주위에, 남편을 잃은(여읜) 후, 깨끗하게 몸을 지키며, 남편을 끝까지 지키며, 고생한 끝에 자식(子供)들이 모두 훌륭하게 되어, 안심(安心)하게 노후(老後)을 보내게 된 사람도 보고 있고, 재혼(再婚)해서 경제적으로는 안정(安定)하고 있어도 자식(子供)때문에 울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보고 있다. 하지만 또한, 전남편이나 전처의 자식(子供)도, 또한 재혼한 사람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식(子供)도, 저마자 훌륭하게 키우고 계시는 사람도 또한 알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그 나름의 노력(努力)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釈尊もキリストも、人間のあり方の全てを知られて教えを説いていられるから、私は仏典を読み聖書を読むとその愛の心の深さに泣かされるのである。
석존(釋尊)도 그리스도(Christ)도, 인간의 본연의 모습의 모든 것을 아시고 가르침(教え)을 설법(설교)하고 계시기 때문에, 저는 불교 경전(佛典)을 읽고 성경(聖書)을 읽고서 그 사랑(心)의 깊음(많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貞婦は二夫に見(まみ)えず」という儒教の道徳に縛られて表面上は夫に操を立てているように世間体を繕いながら、陰に隠れて浮気をしている女の人を見ているとかわいそうで気の毒でしようがない。道徳観の犠牲、これまでの日本の習俗の犠牲になって心を苦しめているのである。そういう人にはキリストの言葉を、釈尊の言葉を教えてあげて再婚をすすめた方がよい。
「정조가 곧은 아내(貞婦)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貞婦は二夫に見(まみ)えず)))」고 하는 유교(儒教)의 도덕(道徳)에 매여서 표면상으로는 남편에게 정조(操)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에 대한) 체면(體面))을 차리면서, 그늘에 숨어서 바람을 피우고 있는 여자(女の人)을 보고 있으면 불쌍하고(가엾고: かわいそう)고 딱하지(氣の毒) 않을 수 없다. 도덕관(道德觀)의 희생(犠牲), 지금까지의 일본의 습속(習俗:예로부터 어떤 사회나 지역에 내려오는 고유한 관습과 풍속)에 희생(犠牲)이 되어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 드리고 재혼(再婚)을 권하는 편이 좋다.
高橋信次先生が「道徳では人は救えない」といわれたのはもっともである。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도덕(道徳)으로는 사람을 구제할 수 없다(救えない)」고 말씀하신 것은 지당하다.
夫に先立たれた女が再婚するのを軽蔑する風習がこれまであったのは、日本が儒教の道徳観を中心してきたからである。心を安らかにしてこの人生を生きて行くために再婚する人があったら、我々はその人を祝福すべきであるし、夫を守って女一人で強く生きて行こうという人があったら、尚のことその人を祝福し協力できる立場にあって、助けを求められたら喜んで協力してあげるべきである。
남편이 앞서 간(남편을 여읜:夫に先立たれた) 여자가 재혼(再婚)하는 것을 경멸(輕蔑)하는 풍습이 지금까지였던 것은, 일본(日本)이 유교(儒教)의 도덕관(道德觀)을 중심으로 해 왔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이 인생(人生)을 살아 가기 위해서 재혼(再婚)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들은 그 사람을 축복(祝福)해야 할 것이고, 죽은 남편에 대한 정조를 끝까지 지키며(夫を守って) 여자 혼자서 강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더 그 사람을 축복(祝福)하고 협력(協力)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도움을 요청하시면 기꺼이 협력해 줘야 한다.
再婚する女に子供があり、その子供が大きかったら子供を納得させるべきであり、子供が小さくて話してもわからなかったら、その子供が大きくなってから充分に話をすべきである。夫たる者が妻を亡くして後妻をもらう場合でも、妻が夫を亡くして再婚する場合でも、子供は親に純潔であってほしいと願って反対する場合がある。その子供を無視し気付かずに再婚をすると、子供達は自分の父、また母は不貞を働いた、いやらしい、不潔だという見方をするのである。年頃の子供がいて再婚する場合は、よくこの事に気を付けて充分に子供と話し合って再婚の必要性を認めてもらうということをしないと、再婚したとたんに子供が親に反抗的な態度に出たりするものである。
재혼(再婚)하는 여자에게 자식(子供)이 있고, 그 자식(子供)이 컸다면 자식(子供)을 납득시켜야 하며, 자식(子供)이 어려서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한다면, 그 아이(子供)가 크고 나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남편된 자가 아내를 잃은 뒤 후처(後妻)을 얻을 경우라고 해도, 아내가 남편을 잃은 뒤 재혼(再婚)하는 경우라고 해도, 자식(子供)은 부모(親)가 순결(純潔)하기를 바라고 반대(反對)하는 경우가 있다. 그 자식(子供)을 무시(無視)하고 깨닫지 않고 재혼(再婚)을 하면, 자식(子供)들은 자기 아버지(父), 또는 어머니(母)는 부정(不貞)한 짓을 하였다, 불쾌하다(역겹다: いやらしい), 불결(不潔)하다고 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혼 적령기(年頃)의 자식(子供)이 있는데 결혼하는 경우는, 잘 이 일에 조심(주의)해서 충분히 자식(子供)과 의논해서 재혼(再婚)의 필요성(必要性)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재혼(再婚)하자마자 자식(子供)이 부모(親)에게 반항적인 태도(態度)로 나오거나 하는 것이다.
だからキリストは再婚をする場合でも「主にありてせよ」と言っていられる。主にありてするということは、真理正法に則ってせよということで、この人生は魂の修行のためにあるのであり、そのために夫と妻とは一体となって協力すべきであり、単に性の満足のためにだけ、すべき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그래서 그리스도는 재혼(再婚)을 하는 경우라고 해도「주 안에서 하라(主にありてせよ)」고 말하고 계신다. 주(主) 안에서 한다고 하는 것은, 진리(眞理) 정법(正法)를 따라서 하라고 하는 것이며, 이 인생(人生)은 영혼(魂)의 수행(修行)을 위함에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남편과 아내는 한몸(一體)이 되어 협력(協力)해야 하며, 단지 성(性)의 만족(満足)을 위해서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私は恋染めし頃、自分の全てを彼女に捧げたいと思った。彼女は私にとっては理想の女性であった。自分はその理想の女性にふさわしい理想の男性でありたいと願いそのための努力をした。そうして彼女に、この世界の他のどの男性と結婚するよりも「あなたと結婚した方が幸せです」と思って喜んでもらいたいと思った。彼女との間で性的な関係を持つことは彼女の魂の純粋さを汚すものだと考えた。清浄な神聖な彼女にふさわしい男性でありたいと私は願った。そうは思っても性の疼きを感じない訳にはゆかなかった。霊と肉との闘いに悩んだ。このような心理的な体験を得ることによって愛するものは一体となり、そこに理想と現実との一致を見出してゆくのである。夫婦となることによって人はみな、そこに理想と現実、霊と肉との一致を見出して心を安らかにし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それが神が定められた人の道なのである。
저는 연애를 하며 마음을 한창 빼앗겼을 때, 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저에게 있어서는 이상적(理想)인 여성이었다.
저는 그 이상적(理想)인 여성에게 어울리는 이상적(理想)인 남성이고 싶다고 바래서 그러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이 세계(世界)의 다른 어느 남성과 결혼(結婚)하는 것 보다도「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행복합니다(あなたと結婚した方が幸せです)」라고 생각하며 기뻐하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성적(性的)인 관계를 갖는 것은 그녀의 영혼(魂)의 순수함(純粹さ)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정(清浄:맑고 깨끗한)한 신성(神聖)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성이고 싶다고 저는 바랬다. 그렇게는 생각해도 성적인 통증(性の疼き)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영혼(霊)과 육체(肉)와의 싸움으로 괴로웠다. 이러한 심리적인 체험(體驗)을 얻는 것에 의해서 사랑하는 것은 한몸(一體)이 되어, 거기에 이상(理想)과 현실(現實)과의 일치를 발견(찾아내서)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神)이 정하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길(人の道:사람의 도리)인 것이다.
しかし、そう思いながらもなお心で苦しまざるを得なかったのは、お寺でも教会でも「性は罪悪だ、煩悩だ」と教えていたからそれを信じていた私は、愛する者が一体となり夫婦となることは自然であり素晴らしいことであると思いながら、一方では夫婦となって罪を犯したくはないという心があって霊と肉との不一致に悩ん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역시 마음의 갈등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절(お寺)에서도 교회(敎會)에서도「성(性)은 죄악(罪惡)이다, 번뇌(煩惱)다」라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있던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한몸(一體)이 되어 부부(夫婦)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부(夫婦)가 되어 죄(罪)를 짓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영혼(霊)과 육체(肉)와의 불일치(不一致)로 싸움으로 괴로워했다.
仏教もキリスト教も、実に永い間間違った事を説いてきたものである。正式の夫婦の間における性生活すらも罪悪だというのであったら、釈尊やキリストが夫婦生活の在り方について説くようなことはされなかったはずである。男と女は絶対に結婚してはならないと説かれたはずである。しかし、夫婦の在り方、愛する者の在り方について説いていられる。ということは愛する者の間における性生活は神聖で正しいものだと考えていられた証拠である。
불교(佛敎)도 그리스도교(教)도, 실로 오랫동안 잘못된 것을 설법(설교)해 왔던 것이다. 정식 부부(正式の夫婦) 사이에 있어서의 성생활(性生活)조차도 죄악(罪惡)이다라고 하는 것이라면, 석존(釋尊)이나 그리스도가 부부생활(夫婦生活)의 본연의 모습(在り方)에 대해서 설법(설교)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로 결호해서는 안 된다고 설법(설교)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夫婦)의 본연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서 설법(설교)하고 계신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게 있어서의 성생활(性生活)은 신성(神聖)하며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는 증거(證據)이다.
★ 현대 한국을 보라, 부부간의 강간?? 이란 이상한 것을 만들지 않았는가?
3.釈尊は恋愛の純粋性について説かれた
3.석존(釋尊)은 연애(戀愛)의 순수성(純粹性)에 대해서 설법했다.
「愛する者がだれであろうと、例え賎民の子であろうとも、すべての人は平等である。愛に差別なし」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하더라도, 비록 천민(賤民)의 자식(子)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すべての人)은 평등(平等)하다. 사랑에 차별이 없다(愛に差別なし)」
★참고로, 좋은 말이 있어서, 올려 봅니다★
人と万物の差別しゃべつを置かずは、鳥類畜類に同前ぢや <天草本伊曾保物語>
사람과 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은 새나 짐승과 마찬가지다
<천초본이증보물어(天草本伊曾保物語): 16세기 말(1594년 간행) 서양식 인쇄기로 천주교의 아마쿠사(天草)에서 출판한 활자본 간행본인 이솝우화집(伊曾保物語) >
如何なる階級に属する人でも、愛が純粋であればそれは尊ば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て結婚生活を承認していられる。そうして夫婦以外の男女関係はいけないと言っていられる。
어떠한 계급(階級)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랑(愛)이 순수(純粹)하면 그것은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결혼생활(結婚生活)을 승인(承認)하고 계신다. 그렇게 해서 부부(夫婦) 이외의 남녀관계는 나쁘다고 말하고 계신다.
「己が妻に満足せず、遊女に交わり、他人の妻に交わる。それは破滅に至る道である」
また
「자기 아내에게 만족(満足)하지 못하고, 창녀(遊女)와 남녀가 교합하며, 타인의 아내와 교합한다(他人の妻に交わる)。그것은 파멸(破滅)에 이르는 길(道)이다.」
또한,
「女に溺れ、酒にひたり、賭博にふけり、得たものを得るたびに失う人がある。これは破滅への門である」
と説いていられる。
また
「여자에 빠지고, 술독(酒)에 빠지고, 도박(賭博)에 빠지서, 얻은 것을 얻을 때마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破滅)로의 문(門)이다.」
라고 설법하고 계신다.
또한,
「盛年を過ぎた男が、盛り上がった乳房のある若い女を誘(ひ)き入れて、彼女への嫉妬の思いで夜も眠られぬ。これも破滅への門である」と。
「혈기가 왕성한 한창때의 나이(盛年:성년)가 지난 남자가, 부풀어오른 유방(乳房)이 있는 젊은 여자를 꾀어 들여서, 그녀를 향한 질투(嫉妬)의 생각으로 밤에도 잠들지 못한다. 이것도 파멸(破滅)로의 문(門)이다.」라고.
この言葉は年甲斐もない老年の男が、若い女を求めてさまよう愚かさを警告していられるのである。台湾、フィリピン、韓国などに国際的な××ツアーに参加する男たちに聞かせたい言葉である。
이 말(言葉)은 나잇값도 못하는 노년(老年)의 남자가, 젊은 여자를 찾아서 헤매는 어리석움을 경고(警告)하고 계시는 것이다. 대만(臺灣), 필리핀(Philippines), 한국(韓國) 등에 국제적인 ××투어(xx여행)에 참가하는 남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釈尊は、人間生活の在り方のすべてを知っていられたのである。大乗仏典に現わされている釈尊は、人間世界を全く超越した悟り澄ました礼拝の対象のみの釈尊であって人間味は全く感じられない。しかし、多くの人が求めているのは人間味豊かな釈尊であろう。
석존(釋尊)은, 인간 생활의 본연의 모습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대승불전(大乘佛典)에 나타나 있는 석존(釋尊)은, 인간 세계를 완전히 초월(超越)한 완전히 깨달은 예배(禮拜)의 대상(對象)만의 석존(釋尊)이며 인간미(人間味)는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은 인간미(人間味)가 풍부한 석존(釋尊)일 것이다.
ヴエーダ聖典の抒情詩には「妻子は自分の身体である」と説かれている。インドには古来そのような考え方があった。それは正しいのであるから釈尊は「妻は最上の友である」と説かれている。
베다 성전(Veda聖典:인도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이며, 브라만(婆羅門:Brahman)의 근본 성전)의 서정시(抒情詩)에는「처자(妻子:처와 자식)는 자기 자신의 몸(身體)이다 」라고 설법하고 있다. 인도(印度)에는 예로부터 그러한 사고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석존(釋尊)은 「아내(妻)는 최상(最上)의 벗(友)이다」라고 설법하시고 있다.
宗教的に「愛」ということを心理学的には「相手に対する全面帰投」という。全面帰投とは前に書いたように愛する人に自分のすべてを投げ出したいという純粋な思いである。
종교적으로「사랑(愛)」이라고 하는 것을 심리학(心理学的)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전면(全面)적인 귀투(歸投)」라고 한다. 전면적으로 귀투(歸投)한다는 것은 전에 쓴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다고 하는 순수(純粹)한 생각이다.
真に愛する者はただ相手に自分を捧げたいとのみ思うものであって、相手を自分に奪う、相手を自分に奉仕させたいとは絶対に思わないものである。真に愛する者は、愛する人の喜びのためにはどんなつらいと思われることであっても、つらいと思わずに愛する人を喜ばせ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상대에게 자신을 바치고 싶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며, 상대를 자기 자신에게 빼앗고, 상대를 자기에게 봉사하게 하고 싶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夫を独占したい」とか「夫を奉仕させたい」と言っている若い妻達があることを聞いたが、それは単なる功利主義、自己中心主義であって愛でもなんでもない。現在ほど「愛」と言う言葉が混乱している時代はないのではないのか。大恋愛の末、結婚した人達が簡単に別れて行くのは、それは真の恋愛ではなかったのである。
「남편을 독점(獨占)하고 싶다」든가「남편에게 봉사를 받고 싶다(夫を奉仕させたい)」고 말하고 있는 젊은 여자들이 있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공리주의(功利主義)이며, 자기중심주의(自己中心主義)이며 사랑(愛)도 아무것도 아니다. 현재만큼, 「사랑(愛)」이라고 하는 말이 혼란(混亂)한 시대는 없는 것이 아닌가? 대단한 연애(大戀愛) 끝에, 결혼한 사람들이 간단히 헤어져 가는 것은, 그것은 진실한 연애(戀愛)가 아니었던 것이다.
★공리주의(功利主義) ①공명(功名)과 이욕(利慾)을 생활의 궁극적 기준으로 삼으려는 생각이나 태도.
★자기중심주의(自己中心主義) ①자기나 자기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남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
今、若い人達に強く教え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愛とは相手に対する全面帰投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子を愛する親は、子供の喜びのためには何の苦しみもいとわない。親を愛する子供は、親の喜びのためにはどんな苦労でも忍ぶものである。それと同じように夫を愛する妻は、夫のためにはどんな苦労も惜しまないし、妻を愛する夫は、妻の喜びのためにはどんな苦労もするものである。
오늘날이,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사랑이란 상대에게 전면(全面)적인 귀투(歸投)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식(子)을 사랑하는 부모(親)는, 자식(子供)의 기쁨을 위해서는 어떤 고생(苦しみ)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모(親)를 사랑하는 자식(子供)은, 부모님(親)의 기쁨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생(苦勞:수고)도 숨기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妻)는, 남편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고(苦勞:고생)도 아끼지 않고, 아내(妻)를 사랑하는 남편(夫)은, 아내의 기쁨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생(苦勞:수고)도 하는 것이다.
私が事業に失敗して宗教家として報いを求めない伝道活動に入ろうとした時、私を勇気づけたのは妻の「あなたが乞食されるなら、私も子供の手を引いて一緒に乞食します」と言う言葉であった。生長の家の本部講師になって初めてボーナスをもらった時、そのボーナスの半分を投げ出して私は妻のオーバーを買った。そうして子供の物を買った。
제가 사업에 실패해서 종교가로서 보답(報い)을 요구하지 않는 종교활동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저에게 용기(勇氣)를 북돋아준 것은 아내(妻)가「당신이 걸식(乞食)하신다면, 저도 아이(子供)의 손을 이끌고 같이 걸식(乞食)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이었다. 세이쵸우노이에(生長の家:생장의 가)의 본부 강사가 되어 처음으로 보너스를 받았을 때, 그 보너스의 절반을 사용해서 저는 아내(妻)의 오버(외투)를 샀습니다. 또한 자식(子供)에게 줄 것을 샀습니다.
★세이쵸우노이에 [ 生長の家 ] <일본어 사전>
신도(神道;しんとう) 계열의 신종교. 谷口雅春(타니구치 마사하루, 1893~1985)가 大本教(오오모토) 교(敎)에서 떠나, 1929년 신의 계시를 받았다 하여, 이듬해 고우베(神戸)에서 창간한 개인잡지 「세이쵸우노이에(生長の家)」를 통해 포교. 우주를 구원(久遠)한 생명의 보금자리로 여겨, 만교귀일(万教帰一)과 텐노우(天皇:천황) 절대(絶対)를 강조. 본부는 도쿄(東京)에 있다.
( 이 종교는, 한국에도 있습니다. )
「妻子は最上の友である」と言う釈尊の言葉を私はそのまま実践していたのであった。
「처와 자식(妻子)은 최상(最上)의 벗(友)이다.」라고 하는 석존(釋尊)의 말을 저는 그대로 실천(實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夫が苦境に立った時、夫と苦しみを共にしようとしない妻は夫を愛していないのである。夫を失望させている妻が幸福になることは絶対にない。夫婦は愛の故に一体となるべきであって単に経済的な安定のためにだけ一体となるべきではない。
남편이 곤경(苦境)에 처했을 때, 남편과 고통(苦しみ)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 아내(妻)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남편을 실망(失望)시키고 있는 아내(妻)가 행복(幸福)하게 되는 일은 절대(絶對)로 없다. 부부(夫婦)는 사랑으로 한몸(一體)이 되어야 하며 단지 경제적인 안정(安定)을 위해서만 한몸(一體)가 되어서는 안 된다.
釈尊はまた次のように説いていられる。
석존(釋尊)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계신다.
「もしも妻が貞節であって、他人の威しに屈することなく、夫の願うことに従順で愛(いと)しくあるならば、良いことも、悪いことも、妻を誉めることも、また妻に反省を求めることも、どんな秘密なことでも妻に打ち明けることである」と。
「만약에 아내(妻)가 정절(貞節)하고, 타인의 위협(威脅)에 굴하지 않고, 남편이 바라는 것에 순종(順從)하고 사랑스럽다고 하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내를 칭찬하는 일도, 또한 아내에게 반성(反省)을 요구하는 일도, 어떤 비밀(秘密)한 일도 아내에게 털어놓는 것이다. 」라고.
ということは、夫婦は良く話し合うべきであってお互いに秘密を持ってはならない。妻は夫から何でも打ち明けられるような信頼される妻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もし、夫は私に何も話してくれないと、夫を責めている妻があったとしたら、私は夫から何でも打ち明けられる程信頼され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を反省してみ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しかし、妻を愛し信頼している夫が、すべてを妻に打ち明けない場合がある。それは成功すると思っていたことが思わぬ失敗となり、その失敗の事実をそのまま妻に話をすればどんなに妻が苦しむであろうかと思うと、妻を愛するが故に事実を話さず、その苦しみは自分一人の胸にしまって自分一人が苦しめばいいと思う場合である。そういう場合は賢明な妻は夫の心に感謝し、なぜ夫が自分に話してくれないのかと夫を責めないことである。
그렇다고 하는 것은, 부부(夫婦)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며 서로가 비밀(秘密)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아내(妻)는 남편에게서 무엇이든지 털어 놓게 할 수 있는 신뢰(信頼)를 받는 아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남편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며, 남편을 다그치는 아내가 있다고 하면, 나는 남편에게서 뭐든지 털어 놓게 할 수 있는만큼의 신뢰를 받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것을 반성(反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는 남편이, 모든 것을 아내에게 털어 놓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공(成功)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생각지도 않은 실패가 되어, 그 실패(失敗)의 사실을 그대로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아내가 괴로워할까라고 생각하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괴로움은 자기 혼자 가슴에 묻어두고 내 혼자만 괴로워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경우는 현명(賢明)한 아내는 남편의 마음에 감사(感謝)하고, 왜 남편이 자기에게 이야기주지 않느냐고 남편을 다그치지 않는 것이다.
以上のように釈尊は結婚生活の在り方も説かれた。性生活は罪悪だから、結婚しても性生活はしてはならないとはどこにも説いていられない。
이상과 같이 석존(釋尊)은 결혼 생활의 본연의 모습도 설법하셨다. 성생활(性生活)은 죄악(罪惡)이기 때문에, 결혼해도 성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는 어디에도 설법하고 계시지 않는다.
これまで正式な夫婦の性生活まで煩悩であると説いてきた日本の坊さん達は、釈尊の教えを間違って説いて来たことを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지금까지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의 성생활(性生活)까지 번뇌(煩惱)라고 설법해 온 일본(日本)의 스님들은,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잘못(틀리게) 설법해 온 것을 반성(反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また釈尊は、夫の役割と妻の役割が違うことも説いていられる。
또한 석존(釋尊)은,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이 다른 점도 설법하고 계신다.
4.釈尊の教えから ・・・ 1
4.석존(釋尊)의 가르침에서 ・・・ 1
これまで日本の仏教は、大乗仏教であって女は救われ難いものであるという取扱いしかして来なかった私達が子供の頃、お寺に行って話を聞いていた時でも、「女はおなご・・・・・・と言うてな、業が深いもんじゃ」という説教をしていられたし、比叡山・高野山が女人禁制であったことから、一般的に女は業が深いものとして説かれて、女はこのように生きなければならぬという説法は全くしていなかった。
지금까지 일본의 불교(佛敎)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이며 여자는 구제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는 취급해 왔던 것은 우리들이 어린 시절, 절에 가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때에도, 「여자는 하녀(女はおなご)・・・・・・라고 말하며, 업(業)이 많은(깊은) 것이야」라고 하는 설교(説教)를 하고 계셨고, 히에이쟌(比叡山)・고야산(高野山)이 여인 출입 금지(女人禁制: 승려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여성의 입산을 금하는 것)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여자는 업(業)이 깊은(많은) 사람이라고 설교하며, 여자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설법(說法)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人間は、男と女から成り立っているのであるのに、インドから中国を経て日本にまで仏教が伝わって来ている間に、男が救われる道は説いてあるのに、女はか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ような女の道が説かれてないことに疑問を持つ人はなかったのであろうかと不思議に思わざるを得ない。現在でも坊さん達の説法は、人間一般としては説いても、男と女の役割について説くことはしなかった。大乗仏教のそのような説き方が間違いであることは、原始経典である阿含経こそが釈尊の最も根本の、一番最初の教えであるということに気づくまでは誰も気づかなかったのである。阿含経に最も根本的な教えが書かれてあるということが仏教学者の間で意見が一致し認められた最後の年が昭和五十年なのである。
인간(人間)은, 남자와 여자로 성립(구성)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도(印度)에서 중국(中國)을 거쳐서 일본(日本)에까지 불교가 전파되어 오는 동안에, 남자가 구제되는 길은 설법하고 있는데, 여자(女)에게는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여자의 길(女の道)을 설법하고 있지 않은 것에 의문(疑問)을 갖는 사람은 없었던 것일까 라고 하는 불가사의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까지도 스님들의 설법(説法)은, 인간이 일반적으로는 설법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役割)에 대해서 설법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그러한 설법 방식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원시불전(元始佛典)인 아함경(阿含經)이야말로 석존(釋尊)의 가장 근본의, 제일 최초의 가르침이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에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 쓰여져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 학자 사이에서 의견(意見)이 일치하고 인정한 최후의 연도(年)가 쇼와 50년(1975년)인 것이다.
明治維新以前の日本人は、お釈迦さまとは、もう一切人間味を超越した、人間世界と関わりのない宇宙の本仏として教えられて来たのである。生々しいドロドロした人間的な悩みを自ら悩みながら悟られた方だとは誰も思っていなかったのである。しかし、実際は我々普通の人間が悩むような悩みも体験されたのであるということがはっきりなったのは極最近のことなのである。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의 일본인(日本人)은, 부처님(お釋迦さま)이란, 이미 일체의 인간미(人間味)를 초월한, 인간 세계와 관계가 없는 우주(宇宙)의 본불(本佛)이라고 하며 가르침을 받아 왔던 것이다. 생생한 무시무시한 인간적인 고민(惱み:괴로움)을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깨달은 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우리들 보통의 인간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민(惱み:괴로움)도 체험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인 것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국어사전>
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 천황 때, 에도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의 과정
そういう時期に高橋信次先生が出て来られて「人間釈迦」を書かれたから読む人が多く出て来たのであるが、もしこの出版が終戦前であったとしたら、恐らく、この本は釈迦を汚しているといって誰も読む人はなかったであろうと思う。私はこのことを思う時、つくづくといい時期に生まれ合わせたと思うのである。
그러한 시기에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 나오셔서 「인간석가(人間釋迦)」를 쓰셨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많이 나왔던 것이지만, 만약 이 출판이 종전(終戰:세계 2차 대전 전) 전이었다고 하면, 필시, 이 책은 석가(釋迦)를 더럽히고 있다(모독하고 있다)고 하며 아무도 읽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일을 생각할 때, 자세히 말할 시기에 때맞추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以上のような次第であるから、私がここに書くことは「阿含経」と「人間釈迦」の中からの要約である。
이상과 같은 이유(사정)이 있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쓰는 것은 「아함경(阿含經)」과 「인간석가(人間釋迦)」의 내용에서의 요약(要約)이다.
お釈迦さまは結婚もし、子供もありまた、自分を取巻く女官達が多くいたのであるから、性の経験もあるし、自分を取巻く女達の嫉妬の争いも充分に見、聞きしていられる訳である。また、出家されてからでも、そうしたことについて在家の人々から指導を求められたことも多かったであろうことを考えない訳にゆかない。
부처님(お釋迦さま)은 결혼하고, 자식(子供)도 있고 또한, 자신을 에워싸는 여관(女官:궁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성(性)의 경험도 있고, 자신을 에워싸는 여자들의 질투(嫉妬)의 싸움도 충분히 보고, 듣고 계시는 것이다. 또한, 출가하시고 나서도, 그러한 것에 대해서 재가(在家)의 사람들에게 지도(指導)를 청하신 일도 많았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キリストが「死別した女が再婚する方がいいのは、性の問題を処理し切れなくなった時だ」と言っていられるが、亡き夫に誠を捧げて独りで生きるということは、性に関係なく生きるということでる。性に関係なく生きるということは釈迦教団の出家した人達もそうである。お釈迦さまが出家した弟子達に説いていられることと、キリストが説かれたことは同じである。
그리스도가 「사별(死別)한 여자가 재혼(再婚)하는 쪽이 좋은 것은, 성(性)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을 때이다」라고 말하고 계시지만, 죽은 남편에게 정성(誠)을 바치며 홀로 산다고 하는 것은, 성(性)에 관계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이다. 성(性)에 관계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석가교단(釋迦敎團)의 출가한 사람들도 그렇다. 부처님(お釋迦さま)이 출가한 제자들에게 설법하고 계시는 것과,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것은 똑같다.
「智者は淫行を回避せよ。誰も赤熱した炭火の坑の中に入って行く者はなかろう。人々はそこを避ける。それと同じように出家修行者は女を裂けよ。もし、そうすることが出来ないならば在家になって結婚し、わが妻を求めよ。他人の妻を犯してはならない。」
「지자(知者:사리를 잘 판단‧판별하는 사람)는 음행(淫行)을 회피(回避)하라. 누구도 빨갛게 달군 숯불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피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출가 수행자(出家 修行者)는 여자를 피하라(멀리)하라. 만약, 그렇게 할 수가 없으면 재가(在家)하여 결혼하고, 자기 아내를 찾아라. 타인의 아내(妻)를 범해서는 안 된다.」
古代エジプトの時代からこの方、いつの時代、どこの国においても姦通が罪とされて来たのは何故であるか。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이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간통(姦通)이 죄(罪)라고 여겨왔던 것은 왜인가?
妻は夫の所有物であって、その妻を盗むということは物を盗むのと同じだという考え方をしていた時代があるがそれは正しくない。夫と妻とは完全一体となって神の子として霊を向上し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し、そのことを約束して夫婦となったのである。その愛の結びつきが、男が他の妻に心を移し、また妻が他の男に心を移すことは、愛の一体性が破壊され心に大きな悩みと曇りをつくり、人間がこの世に生まれたその使命と目的に反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ある。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所有物)이며, 그 아내를 훔친다고 하는 것은 물건을 훔치는 것과 똑같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던 시대가 있지만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남편과 아내는 완전히 한몸(一體)이 되어 신(神)의 자녀(子)로서 영혼(霊)을 향상시켜 가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일을 약속(約束)해서 부부(夫婦)가 된 것이다. 그 사랑의 결합(愛の結びつき)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또한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사랑의 일체성(一體性)이 파괴되어 마음에 큰 고민(惱み:괴로움)과 우울함(曇り:떳떳하지 못함)을 만들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사명(使命)과 목적(目的)에 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くもり[ 曇(り) ]★
일전에, 번역 글에, "구름"이라고 번역한 적도 있고, 나중에, 수정하면서, 마음의 흐림(우울함)이라고도 번역했고요, 최근에 보니, "떳떳하지 못함"이라는 뜻도 있네요.
「愛とは全面的な自己帰投である」と言う言葉がある。「惜しみなく愛は奪う」という言葉は、その全面的な自己帰投を裏返しに言った言葉である。全面的な自己帰投とは「愛する人に自分の全てを捧げ、愛する人が欲する通りにしたい。自分のことはなんにも考えない、自分の身も心も、すべて愛する人に捧げて何の悔いもない」という状態である。だから愛する人に捧げてお互いに相手が自分の欲する通りになってくれることを求めるのである。妻を愛する夫は、妻が自分の欲する通りになってくれることを求める。その時、妻は、心に何の抵抗も持たずに夫の言いなりになった時に初めて夫は「妻の愛を得た」と心が全面的に満足するのである。
「사랑(愛)이란 전면적인 자기 귀투(自己歸投)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아낌 없이 사랑은 빼앗는다(惜しみなく愛は奪う)」고 하는 말은, 그 전면적인 자기 귀투(歸投)를 뒤집어서 말한 말이다.
전면적인 자기 귀투(自己歸投)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대로 하고 싶다. 자기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도, 전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고 아무런 후회도 없다」고 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고 서로 상대가 자신의 원하는 대로 되어 주기를 바란다. 아내(妻)를 사랑하는 남편(夫)은, 아내가 자신의 원하는 대로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 때, 아내(妻)는, 마음에 어떤 저항(抵抗)도 갖지 않고 남편의 말하는 대로 되었을 때에 비로서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얻었다(妻の愛を得た)」고 하며 마음이 전면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そういう時に妻が全面的な自己帰投せずに、自我意識が強く自己主張ばかりをして夫のいいなりにならない時、夫は「妻は自分を愛していない」と感じて心さびしく、悲しくなるのである。妻が全面的な自己帰投をし,夫が妻の愛を確認することが出来るとまた、夫も妻も全面的な自己帰投をして妻のいいなりになるのである。だからして、夫が自分の言うことを聞いてくれないと嘆いている妻は、その前に自分が夫に全面帰投し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を反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그럴 때에 아내(妻)가 전면적인 자기 귀투(自己歸投)를 하지 않고, 자아 의식(自我意識: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에 대한 의식)이 강하고 자기 주장(自己主張)만을 하며 남편의 말하는 대로 하지 않을 때, 남편은 「아내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妻は自分を愛していない)」고 느끼고 마음이 외롭고(울적하고, 허전하고:心さびしく), 슬퍼지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전면적인 자기 귀투(自己歸投)를 하고,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확인(確認)할 수 있으면 역시, 남편도 아내도 전면적인 자기 귀투(自己歸投)를 하며 아내가 말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있는 아내는, 그 전에 자신이 남편에게 전면적으로 귀투(歸投)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을 반성(反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その全面帰投は双方から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って、夫が妻にだけ全面帰投を要求するのも片寄っているし、夫が夫としての主体性をなくし全ての実権を妻が握り、夫だけが妻に全面帰投をするのも間違いである。
그 전면적인 자기 귀투(自己歸投)는 쌍방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남편이 아내에게만 전면 귀투(全面歸投)를 요구(要求)하는 것도 불공평하고, 남편이 남편으로서의 주체성(主體性)을 잃고 모든 실권(實權)을 아내가 쥐고, 남편만이 아내에게 전면 귀투(全面歸投)를 하는 것도 잘못이다.
終戦前は、夫が一方的に妻に全面帰投を要求することが多かった(封建性)し、戦後は女性上位で妻が夫に全面帰投を要求することが多いようである。海外への新婚旅行の添乗員をしている人が言っていられたが、最近は、十組の内七組までが女上位で男が優しいということであった。女上位で女を大事にし、女の言いなりになってくれる男は女にとって好ましいことであるかも分からないが、そういう男は、若いうちにこそ好ましいと思うかもわからないが、男としてたいした仕事も出来ず、中年以上になって女にべたべたして主体性を持たない男を女は好ましいと思うであろうか、私の言いなりになってくれる優しい夫を持ったと喜んでいる若い妻達が、今のその喜びが一生続くものであるかどうかは、後少なくとも三十年の評価を待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のである。可もなく不可もなく、ただ食って生きて死ねばそれでいいと思っている人はそれでいいと思っている人はそれでいいともいえるが、しかし、人生のある時期に「自分に人生はこれで良かったのか?」という自分の生き方に対する疑問が怒って来たとしたらその人生は失敗だといえる。色々失敗もし苦労もあったが、しかし自分の人生はやはり生き甲斐があったといえるような生の充実感のある人生であってこそ、その生活は霊の向上のための生活、即ち人生であったといえるのである。
세계 2차 대전 전(終戰前)에는,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전면 귀투(全面歸投)를 요구(要求)하는 일이 많았던(봉건성) 것이고, 전후(戦後:세계 2차 대전 후)는 여성상위(女性上位)로 아내가 남편에게 전면 귀투(全面歸投)를 요구(要求)하는 일이 많은 듯 하다. 해외에서의 신혼여행(新婚旅行)의 수행 안내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고 계셨지만, 최근에는, 10조(十組:열쌍) 중에 7조(七組:일곱쌍)까지가 여성 상위(女上位)이며 남자가 다정하다(優しい)고 하는 것이었다. 여성 상위(女上位)로 여자를 중요시 여기고, 여자가 말하는 대로 되어 주는 남자는 여자에게 있어서 마음에 드는(호감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남자(男)는, 젊을 때만은 호감이 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남자로서 사소한 일(仕事)도 하지 못하고, 중년 이상이 되어 여자에게 찰싹 달라붙어 주체성(主体性)을 갖지 못하는 남자를 여자는 마음에 든다고 생각할지, 자기가 말하는 대로 되어 주는 다정한 남편(優しい夫)을 가졌다고 기뻐하는 젊은 여자들이, 지금 그 기쁨이 일생 계속되는 것인지 어떤지는, 후에 적어도 30년의 평가(平價)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상태로, 그저 먹고 살다가 죽으면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좋다고도 말하지만, 하지만, 인생(人生)의 어느 시기에, 「내 자신에게 인생은 그것으로 좋았나?(自分に人生はこれで良かったのか?)라고 하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의문(疑問)이 들고서 화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인생(人生)은 실패(失敗)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실패도 하고 고생(苦勞)도 있었지만, 하지만 내 자신의 인생(人生)은 역시 산 보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生)의 충실감(充實感)이 있는 인생이어야만 비로소, 그 생활은 영혼(霊)의 향상(向上)을 위한 생활, 즉 인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そういう人生を送るために夫婦という者はお互いに良きパートナーとな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一方が一方の犠牲になったり、自我意識を助長させるような生活であってはいけないのである。
그러한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 부부(夫婦)라고 하는 사람은 서로 파트너(partner)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한쪽이 한쪽의 희생(犠牲)이 되거나, 자아의식(自我意識: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에 대한 의식)을 조장(助長)하게 하는 것과 같은 생활(生活)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5.霊の段階の高い人はより多く奉仕しなければならない
5.영혼(霊)의 단계가 높은 사람은 보다 많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夫婦生活や集団生活その他、人間関係において我々が心得て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霊の段階の高い者は低い者に比して多く働き多く奉仕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부부생활(夫婦生活)이나 집단생활(集團生活) 그 밖의, 인간관계(人間關係)에 있어서 우리들이 조심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영혼(靈)의 단계(段階)가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에 비해서 많이 일하고 많이 봉사(奉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あなた方は小学校か中学校があるいは高等学校等で、或いは集団で、何か協同で仕事をしたという時に「ああいつも自分は損をする、あの人達はいつも遊んでいるのに何で自分だけが何時もこんなに働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ろうか」と思う人があったとしたらあなたは喜びなさい。それはあなたが高級霊である証拠である。そう思って「よし、この次は自分も働かないぞ、いつも自分は損をする」と思うことはあっても、いざ又何か仕事をするとなると、そう思っているのに「また、あの人は遊んでいる」と思ってもあなたは遊んでい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ある。また一生懸命仕事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ある。夫婦喧嘩をして、自分は悪くないのにいつも先に謝るのは自分だ、と思う人も霊の段階の高い人である。
당신은 초등학교라든 중학교라든가 혹은 고등학교 등에서, 혹은 집단에서, 이래저래 협동(協同)하고 일을 했다고 할 때에「아 늘 나는 손해를 보고, 저 사람들은 늘 놀고 있는데 왜 나만 늘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당신은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고급령(高級靈)인 증거(證據)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좋아, 이 다음에는 나도 일하지 않을 거야, 늘 나는 손해를 받어」라고 생각하는 일은 있어도, 정작 또 일을 하게 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는 있어도,「또, 저 사람은 놀고 있네」라고 생각해도 당신은 놀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열심히 일(仕事: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는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늘 먼저 사과하는 것은 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영혼(靈)의 단계(段階)가 높은 사람이다.
★ 이 부분 참 대단하지 않으신가요?
高橋信次先生が正しさの基準は心にある、といっていられた。霊の段階の高いという人は低い人よりも善悪に対する判断が厳しいし、心の中に何時までもこだわりを持ってはいられないのである。そうして赦すということの大事さを知っている。だから、もういい、いつまでもこんなことにこだわってはいられないと思うのである。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 올바름의 기준(基準)은 마음(心)에 있다, 고 말하고 계셨다. 영혼(靈)의 단계(段階)가 높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낮은 사람보다도 선악(善惡)에 대한 판단(判斷)이 엄격하고,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맺힌 것(구애되는 것:こだわり)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赦す)한다고 하는 중요성(大事さ: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젠 괜찮아(もういい)하며, 언제까지나 이런 일로 맺힌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また、霊の段階が高いということは、その人は人よりも多く輪廻転生の経験を積んで智慧が豊かであるのであるから、色々な事に良く気が付くのである。低い段階の人は過去の経験が少ないからそれだけ物の道理も分からず自己本位で気が付かないのである。低い段階の人が気が付かないようなことでも高い段階の人は良く気が付く。低い段階の人は別に怠けている訳ではなくそれでいいと思っているが、高い段階の人から見るとそれは欠点として悪として見えるのである。夫婦というものは、必ず一方が高くて一方が低いものである。低い段階の者は高い段階の者に学んで自分も早くそのようになるように努力することによって霊は向上するのであるし、高い段階の者は低い段階の欠点を責めることなくそれを赦して、その者が早く成長するように手を貸してや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또한, 영혼(靈)의 단계(段階)가 높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남보다도 많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경험을 쌓고 지혜(智慧)가 풍부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에 잘 깨닫는 것이다. 낮은 단계(段階)의 사람은 과거의 경험이 적기 때문에 그만큼 사물(物)의 도리(道理)도 알지 못하고 자기본위(自己本位:자기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낮은 단계(段階)의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라도 높은 단계(段階)의 사람은 잘 깨닫는다. 낮은 단계(段階)의 사람은 특별히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높은 단계(段階)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결점(缺點)으로 나쁘게 보이는 것이다. "부부(夫婦)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은 것이다." 낮은 단계(段階)의 사람은 높은 단계(段階)의 사람에게 배우고 나도 빨리 그렇게 되도록 노력(努力)하는 것에 의해서 영혼(靈)은 향상(向上)하는 것이고, 높은 단계(段階)의 사람은 낮은 단계(段階)의 결점(缺點)을 나무라지 말고 그것을 용서하고, 그 사람이 빨리 성장(成長)하도록 거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男女平等と言う言葉の魔術に引っ掛かって霊の次元の低いものが、自分よりも高い段階の者を自分の次元まで引きずり降ろそうとするような生活態度を取ると夫婦喧嘩に発展する場合が多い。
남녀평등(男女平等)이라고 하는 말의 마술(魔術)에 걸려서 영혼(靈)의 차원이 낮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단계(段階)의 사람을 자신의 차원까지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생활태도(生活態度)를 취하면 부부싸움으로 발전(發展)하는 경우가 많다.
ともかく霊の段階の高い者は、より多く赦し、より多く人のために働き、食べるものも少ない。いざとなると仕事をしないで遊んでいることは出来ない。人よりも多く仕事をしてしまうという人は、自分の心を低い段階の人に合わせないように、そうある自分を自分で喜びとして益々霊の向上に励むことである。霊の段階の高い者は心に安らかさの基準を多く持っているからいつまでも腹を立てていることが出来ない。悪い傾向性を持つものに対しては執念深くないが、善なる傾向性のものについてはひた向きにそれを求める。だからある面においては、非常に頑固に我が強く見える。
어쨌든 영혼(靈)의 단계가 높은 사람은, 보다 많이 용서하고, 보다 많이 남을 위해서 일하며, 먹고 사는 것도 적다. 막상하려면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남보다도 많이 할 일(仕事:일)을 해 버린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낮은 단계(段階)의 사람에게 맞추지 않도록, 그렇게 있는 자신을 스스로 기뻐하고 더욱더 영혼(靈)의 향상(向上)에 힘쓰는 것이다. 영혼(靈)의 단계가 높은 사람은 마음에 평안의 기준(基準)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화를 내고 있을 수가 없다. 나쁜 경향성(傾向性)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집념(執念)이 얕지만, 착한 경향성(傾向性)의 것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경향(向き:방향)으로 그것을 찾는다. 그래서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완고(完固)하고 자아가 강하게(고집이 세게:我が強く) 보인다.
カラオケを歌って、隠し芸をやって、みんな酒を飲んで大騒ぎしているのに、どうしてもその中にとけ込めない。これでは皆と調和が取れないから皆と仲良くするためには、皆の中にとけ込まないといけないと思ってたまに歌ったり踊ったりして見ても、そうした後に何か自分を偽っているような寒々とした空しさが残って仕方がない、という人があったらその人は霊の向上への傾向性の強い人であるから、皆の中にとけ込めないということで悩む必要はない。普通に付き合っていればいい。霊の段階の高い人は孤独になり勝ちであり、低い段階の人はよく群れたがる。孤独に耐える厳しさを越えて大きな愛を学ん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夫婦生活でも以上のようなことを心得ていれば上手く調和が出来てゆく。
가라오케에서 노래하며, 숨은 재주를 보이며, 모두가 술을 마시며 법석을 떠는데, 아무리 해도 그 속에 융화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모두 조화(調和)가 잡히지 않기 때문에 모두 사이좋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 하나가 되(융화되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가끔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해 보아도, 그렇게 한 후에 웬지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 듯한 썰렁한 공허함이 남아서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혼(靈)의 향상(向上)으로의 경향성(傾向性)의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무리 속에 융화되지 않는다고 하는 일로 괴로워할(고민할) 필요는 없다. 보통으로 같이 하고(교제하고) 있으면 좋다. 영혼(靈)의 단계(段階)가 높은 사람은 고독(孤獨)해지기 쉽상이며, 낮은 단계(段階)의 사람은 자주 떼지어 있고 싶어한다. 고독(孤獨)을 견디고 엄격함을 초월하여 큰 사랑을 배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부부생활(夫婦生活)도 이상과 같은 것을 조심하고 있으면 능숙하게 조화(調和)가 되어 간다.
6.性と結婚
6.성(性)과 결혼(結婚)
お釈迦さまは出家しないと救われないと言われた訳ではない。在家のままで救われる道も説いていられる。カースト制度の厳しい社会制度の中で、愛は純粋で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説いていられる。
부처님(お釋迦さま)은 출가하지 않으면 구제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재가(在家)한 그 상태로 구제될 수 있는 길(道)도 설법하고 계신다. 카스트제도(caste制度:인도 특유의 세습적 신분 계급 제도)의 엄격한 사회제도(社會制度) 속에서, 사랑은 순수(純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설법하고 계신다.
「愛する者の愛する人は誰であろうとも、たとえ奴隷の女であろうとも、すべての人は平等である。
愛に差別はな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랑은 누구라할지라도, 설사 노예(奴隸)의 여자라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평등(平等)하다.
사랑에 차별(差別)은 없다」
そうして、夫婦以外の男女関係は否認される。
그리고 나서, 부부(夫婦) 이외의 남녀관계는 부인(否認)하셨다.
「己が妻に満足せず、遊女に交わり、他人の妻に交わる、これは破滅への門である」
「자기 아내(妻)에게 만족하지 않고, 창녀(遊女)와 남녀가 교합하고, 타인의 아내와 교합하는, 그것은 파멸(破滅)에 이르는 길(道)이다」
「女に溺れ、酒にひたり、賭博にふけり、得るにしたがって得たものをその度に失う人がいる。
これは破滅への門である」
「여자에 빠지고, 술독(酒)에 빠지고, 도박(賭博)에 빠지서, 얻는 대로 얻은 것을 그때마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破滅)로의 문(門)이다.」
宗教的立場においては、相手の人間性(神の子として)の尊厳さを傷つけ、相手の心を傷つけ悩ませるものは正しくないとするのである。だから我々の行為は、相手の人間性を高め、相手の心に安らぎを与えるような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訳である。そういうことでこのようなことをお釈迦さまは否認されたのである。私はお釈迦さまの夫婦の倫理についての教えが、キリストの教えと全く同じであることに驚く。
종교적 입장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인간성(人間性)((신(神)의 자녀(子)로서))의 존엄(尊嚴)을 훼손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고통을 주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행위(行爲)는, 상대방의 인간성을 높이고, 상대방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로 이와 같은 것을 부처님(お釋迦さま)은 부인(否認)하셨던 것이다. 저는 부처님(お釋迦さま)의 부부(夫婦)의 윤리(倫理)에 대한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완전히 같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何ものが人々のすみかであるか、この世で最上の友は誰ぞ」
「子らは人々のすみかである。妻は最上の友である」
「무엇(何もの)이 사람들의 처소(すみか)냐? 이 세상에서 최상(最上)의 벗(友)은 누구냐?」
「아이들(子ら)은 사람들의 처소(すみか)이다. 아내(妻)는 최상의 벗(友)이다.」
インドには昔から「妻は友である」という教えがあった。ヴェーダの叙事詩の中には「妻子は自分の身体である」と説かれている。
인도(印度)에는 예로부터 「아내(妻)는 벗(友)이다」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었다. 베다 성전(Veda聖典:인도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이며, 브라만(婆羅門:Brahman)의 근본 성전)의 서정시(敍情詩)의 내용에는, 「처자(妻子:처와 자식)는 자기 자신의 몸(身體)이다.」라고 설법되어 있다.
キリストが「夫は己自らの身を支配する権利を持たず、その権利を持つ者は妻なり」「かくの如く、妻もまた己自らの身を支配する権利を持たず、その権利を持つ者は夫なり」と説かれたことと同じである。
그리스도가「남편은 스스로 자신의 몸(身)을 지배할 권리(權利)를 갖지 못하며, 그 권리를 갖는 자는 아내(妻)이니라.」「이와 같이, 아내도 또한 자기 몸(身)을 지배할 권리를 갖지 못하며, 그 권리(権利)를 갖는 자는 남편(夫)이니라.」라고 설교하신 것과 똑같다.
我々は、やはり自分の家に帰ると、ほっとして心が安らぐ。「すみか」というものは、我々の身も心も安らかにさせる。そのように、妻子というものはまさしく我々の心を安らかにし休ませてくれる「すみか」である。夫が妻子を愛することは、夫が自分の身体を自分で大事にするのと同じようでなければならないし、また妻が夫を愛する事もまた、そのよう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ある。
우리들은, 역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한숨 돌리며 마음(心)이 편안해진다. 「처소(すみか)」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몸(身)도 마음(心)도 편안하게 해 준다. 처자(妻子:처와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틀림없이)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쉬게 해 주는「처소(すみか)」이다. 남편이 처자(妻子:처와 자식)를 사랑하는 것은, 남편이 자기 자신의 몸(身體)를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다름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この教えが教えるものは、夫が自分の傍に来た時に、夫の身と心を休ませ安らぎを与える事が出来ないような妻は落第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妻が夫の心を休ませ安らぎを与えないとしたら、夫はどこかにそれを求めたくなるであろう。これまで多くの宗教団体は、夫が浮気をするのは妻が悪いからだ、と夫の浮気を正当化してきた。それは間違いである。たとえ妻がそうであったとしても、妻がそうであることを口実にして夫は浮気をし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そのような妻を赦し、良く妻と話し合って調和してゆく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妻がそうであることを口実にして自分の浮気を正当化しようとしてみても、そういう関係で心が悩みをつくり苦しむのはその夫自身であり、その悩み苦しみをなくするのも夫であるからである。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立場に多く立たされる人は、それだけ厳しくこの人生を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霊の段階の高い人である。
이 가르침이 가르치는 것은, 남편이 자기 옆에 왔을 때에, 남편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평안을 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아내(妻)는 낙제(落第)라고 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쉬게 하고 평안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남편(夫)은 어딘가에서 그것을 찾고 싶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종교 단체(宗敎團體)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내(妻)가 나쁘기 때문이다, 라고 바람기(浮氣)를 정당화(正當化)해 왔다. 그것은 잘못이다. 설령 아내(妻)가 그렇게 했다고 해도、아내(妻)가 그렇다는 것을 구실(口實) 삼아서 남편은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아내(妻)를 용서하고, 좋게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조화(調和)해 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내가 그렇다는 것을 구실 삼아 자신의 바람기(浮氣)를 정당화(正當化)하려고 해 봐도, 그런 관계로 마음이 고민(惱み:걱정:병)을 만들어 괴로워하는 것은 그 남편 자신이며, 그 번민(惱悩み苦しみ)을 없애는 것도 남편이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立場)에 자주 서게 되는 사람은, 그만큼 혹독하게 이 인생(人生)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영혼(靈)의 단계(段階)가 높은 사람이다.
夫婦間における愛の純粋さについてこう教えていられる。
부부 사이에 있어서의 사랑의 순수함(純粹)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계신다.
「もしも妻が貞節であって、他人の威に屈せず、夫の欲することに従順で愛ほしくあるならば、良いことも悪いことも、全て秘密の事柄を妻に打ち明けてよい」
「만약 아내(妻)가 정절(貞節)하고, 타인의 위협(威脅)에 굴하지 않고, 남편의 바라는 것에 순종(順從)하며 사랑스럽다고 하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든 비밀(秘密)한 사정(내용:事柄)을 아내에게 털어놓으면 좋다. 」라고.
我々は、全面的にその人を信頼するならば、どんな事でもその人に打ち明けて相談したいと思うものである。もし夫が、自分には何にも相談してくれないと嘆いている妻があったとしたら、その妻は何故打ち明けてくれないのか、自分自身のあり方をまず反省しなければいけない訳である。
우리들은, 전면적으로 그 사람을 신뢰(信賴)하게 되면, 어떤 일이라도 그 사람에게 털어놓고 상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남편이, 자기에는 아무것도 상담해 주지 않는다며 탄식하고 있는 아내가 있었다고 하면, 그 아내는 왜 고백해 주지 않는 것인지,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우선 반성(反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キリストが「不信仰なる夫(妻)は、信仰ある妻(夫)によって、浄くなりたればなり」と教えていられる事と、お釈迦さまが教えていられる事も同じである。
그리스도(Christ)가,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진(不信仰なる) 남편(夫)(아내(妻))는, 신앙하는 아내(妻)((남편夫)으로 인해서, 떳떳(깨끗)해지느니라.」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도, 부처님(お釋迦さま)이 가르치고 계시는 것도 똑같다.
★不信仰なる夫(妻)は、을, 앞서 올린,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1---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불신앙인 남편을, 을...믿지 않는 마음을 가진 남편, 으로 일부러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참고하세요.
この様に見て来ると、キリストが説かれた真理もお釈迦さまが説かれた真理も同じであると言える。
이렇게 보게 되면, 그리스도가 설교하신 진리(眞理)도 부처님(お釋迦さま)이 설법하신 진리(眞理)도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常識的に考えてみても、悪い人が立派な人のマネをして立派になってゆくのが自然であり当然であるし、また、人間は、不安な生活よりも安定した、心の安らかな生活、人間関係を求めるのも自然であり当然である。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나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의 흉내를 내며 훌륭하게 되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당연하고, 또한, 인간은, 불안정한 생활보다도 안정된, 마음의 편안한 생활, 인간관계를 찾는 것도 자연스러우며 당연하다.
真理に則った生活というものは、極めて自然な当然な生活なのであって、常識的な誰にも納得できるような生活なのである。だからもしその人の信仰生活が非常識的で納得出来ないものであったとしたら、そういう信仰生活は正しくないのであることを考えなればならない。
진리(眞理)를 따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당연한 생활인 것이며, 상식적인 누구든지 납득(納得)할 수 있는 생활인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비상식적이며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올바르지 않은 것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7.釈尊の教えから ・・・ 2
7.석존(釋尊)의 가르침에서 ・・・ 2
ある時、阿難が釈尊に問うた。
「なぜ婦人は公会のうちに坐さないのですか。なぜに職業に従事しないのですか。
職業により生計を立てないのですか」
어느 날, 아난(阿難)이 석존(釋尊)에게 물었다.
「왜 부인(婦人)은 공회(公會:공중의 집회, 공적인 집회, 중요한 국제회의) 에 가시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입니까?
직업에 의해 생계(生計)를 꾸리지 않는 것입니까?」
釈尊は答えられた。
「阿難よ、夫人は怒り易い、夫人は嫉妬深い、婦人は物惜しみする。夫人は愚かである。
これこそ、婦人が公会の内に坐せず、職業に従事せず、職業により生計を立てない理由である」
석존(釋尊)은 대답하셨다.
「아난(阿難)이여, 부인(夫人)은 화내기 쉽고, 부인(夫人)은 질투가 심하고, 부인(婦人)은 인색하다. 부인(夫人)은 어리석다.
이야말로, 부인(婦人)이 공중의 모임(公會:공중의 집회, 공적인 집회, 중요한 국제회의) 에 가지 못하고,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직업으로 생계(生計)를 꾸리지 않는 이유(理由)이다.」라고.
釈尊のこの女性に対する考え方は、キリストが「女は男の上に立って法を説いてはならぬ」と言われた事と同じである。この言葉だけを以て直ちにこれは女性蔑視であると言ってはならない。
석존(釋尊)의 이 여성(女性)에 대한 사고방식은, 그리스도가「여자는 남자 위에 서서 법(法)를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말만으로써 곧바로 이것은 여성멸시(女性蔑視)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どんなに正しいことでも、そのことを直ちに実行しえない場合は、そこに至る過程として必要な方便を使い、現実生活にマッチするようなあり方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理想が実現出来ないから駄目だと反対行動を執って混乱を起こしてしまったのでは安心して生活できなくなる。また個人的には不幸になる。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도, 그 일을 즉시 실행(實行)할 수 없는 경우는,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 필요한 방편(方便)을 쓰며, 현실생활에 맞는(match:어울리는) 본연의 모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理想)이 실현되지 않으니까 소용없다며 반대행동을 취하며 혼란(混亂)을 야기해 버린 것으로는 안심(安心)하고 생활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불행(不幸)해진다.
終戦後、労働組合運動が起こった時、「人間は平等だ、社長も労働者も平等だ」という悪平等論を全ての新聞が書いた。これと同じ発想で「先生も生徒も平等だ、先生は先生だといって高くとまっていてはいけない、先生と生徒は友達でないといけない」と書き「親も、親だと思ってはいけない、親と子は友達でないといけない」と盛んに書いた。日教組の先生達は自分でそう言った。最近の新聞の社説解説を見られるとよい。この頃はどの新聞も盛んに「中・高校生の校内暴力は、先生が先生としての権威を持たず、家庭で父親が父親としての権威を持っていないからである。父親よ、もっとしっかりしろ」と書いている。
종전(終戰:세계 2차 대전) 후,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을 때, 「인간은 평등하다, 사장도 노동자도 평등하다」라고 하는 악평등론(惡平等論:불공평론)을 모든 신문이 썼다. 이것과 같은 발상으로「선생도 학생도 평등하다, 선생은 선생이라고 말하며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 선생과 학생은 친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쓰고, 「부모(親)도, 부모(親)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모(親)와 자식(子)은 친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활발히 썼다. 일교조(日教組:일본 교직원 조합)의 선생들은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최근 신문의 사설해설(社説解説)을 볼 수 있으면 좋다. 요즘에는 어느 신문도 활발하게「중・고등학생의 교내폭력(校内暴力)은, 선생이 선생으로서의 권위(權威)를 갖지 못하고, 가정(家庭)에서 부친이 부친(父親)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친(父親)이여, 좀 더 똑똑히 해라」라고 쓰고 있다.
♨♨♨♨ 참 재미나죠? 바로 윗글^^, 1981년의 일본의 현실, 우리나라 역시 씁쓸합니다. 요즘 방송에서 난리가 났죠, 교내폭력과 왕따 문제로 ♨♨♨♨
世の中には当てにならないものが一杯あるが、その中に新聞の社説解説がある。終戦後からの各新聞社の社説解説を通読して見られると分かられると思う。如何にその場当たりの、左翼的思想傾向を持つ読者層に迎合した社説が多いか、だから私は新聞は見ることは見るが、社説は一切信じないことにしている。新聞などのマスコミに引きずり廻され「先生も生徒も平等だ、親と子は友達だ」と言って来た結果は今のように、教育現場は全く混乱して先生は手をつけられず、警察力を導入しているではないか。ストに対して警察官が出動した時、これまではいつも日教組は「政府は警察力を導入して鎮圧する」と政府のやり方を攻撃してきた。その日教組が、今度は学校に警察力を導入しているのである。私は、日本の教育を正常化するためには、当分、どんなに学校から要請があっても、警察官は絶対に学校に介入しないで、先生達自身の力で解決するように仕向けることだと思っている。終戦後から一貫して日本の警察行政に反対して来た日教組が、今になって警察力に頼らなければ学校運営が出来ないと言って泣きつくのも不見識であるし、要請されたからと言ってすぐ出動する警察側もまた余りに考えが浅いし甘い。「日教組は、我々警察側に対して、これまでどう言って来たか反省しなさい」と突き放せばいいのである。
이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신문의 사설해설(社説解説)이 있다. 종전 후로부터의 각 신문사(新聞社)의 사설해설(社説解説)을 통독(通讀:건너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 읽음)해 보신다면 자연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그 즉흥적이며, 좌익적 사상 경향(傾向)을 가지는 독자층(讀者層)에 영합(迎合:아첨)한 사설(社説)이 많은지, 그래서 저는 신문은 읽을 것은 읽지만, 사설(社説)은 일체 믿지 않기로 하고 있다. 신문(新聞) 등의 매스컴에 억지로 끌려 다니며「선생도 학생도 평등(平等)하다, 부모(親)와 자식(子)은 친구들(友達)이다 」라고 말해 온 결과(結果)는 지금과 같은, 교육현장(教育現場)은 완전히 혼란(混亂)하고 선생은 손을 댈 수 없고, 경찰력을 도입(導入)하고 있지 않은가? 스트(罷業:파업:strike)에 대해서 경찰관이 출동했을 때, 지금까지는 늘 일교조(日教組:일본 교직원 조합)는, 「정부(政府)는 경찰력(警察力)을 도입(導入)해서 진압(鎭壓)한다」며 정부가 하는 방법을 공격(攻擊)해 왔다. 그러한 일교조(日教組)가, 이번에는 학교(學校)에 경찰력을 도입(導入)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일본(日本)의 교육(教育)을 정상화(正常化)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아무리 학교(學校)에서 요청(要請)이 있어도, 경찰관(警察官)은 절대로 학교에 개입(介入)하지 말고, 선생들 자신의 힘으로 해결(解決)하도록 만드는(유도하다)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종전 후부터 일관(一貫)하여 일본의 경찰행정(警察行政)에 반대해 왔던 일교조(日教組:일본 교직원 조합)가, 이제 와서 경찰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학교 운영(學校運營)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울며 매달리는 것도 몰상식(不見識)하고, 요청(要請)을 받았으니까 라고 하며 곧바로 출동(出動)하는 경찰측도 또한 너무나 생각이 모자라다. 「일교조(日教組:일본 교직원 조합)는, 우리들 경찰측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말해 왔는지 반성(反省)하십시오 」라고 내버려 두면(突き放せば:돌보지 않으면,뿌리치면) 좋은 것이다.
日本の経済力が世界一になって来たのは、毎年ストはあっても、経営者と労働者側の秩序が保たれて、社長になった人はそれなりに、また、働く側はそれなりに、きちんと役割を守って精一杯努力して来たからである。人間は平等だからと言って、社長としての能力のない人が社長になったら、一ぺんで会社は潰れてしまう。能力のある人は、その能力を生かして、その能力を充分に発揮できる役割を持って働くのが正しいし、経営の能力のない人はない人で、その能力に相応しい役割を与えて仕事をさせるのが正しいのである。悪平等は真理ではない。男と女は決して平等ではない。役割は違うが、しかし人間としては平等である。
일본의 경제력이 세계 제일(世界一)이 되어 왔던 것은, 매년 스트(罷業:파업:strike)가 있어도, 경영자(經營者)와 노동자(勞動者)가 질서(秩序)를 유지하며, 사장(社長)이 된 사람은 그 나름대로, 또한, 일하는 측은 그 나름대로, 정확히(어김없이) 역할(役割)을 지키고 힘껏(精一杯)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은 평등(平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사장으로서 능력(能力)이 없는 사람이 사장(社長)이 되면, 한 번에 회사(會社)는 파산해 버린다. 능력 있는 사람은, 그 능력(能力)을 살리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發揮)할 수 있는 역할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경영 능력이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으로, 그 능력에 상응(相應)한 역할을 주어 할 일(仕事:일)을 시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악평등(惡平等:불공평)은 진리(眞理)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결코 평등(平等)하지 않다. 역할(役割)은 다르지만, 하지만 인간(人間)으로서는 평등(平等)하다.
釈尊は決して女性を蔑視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
석존(釋尊)은 결코 여성(女性)을 멸시(蔑視)하신 적은 없었다.
ある時、コーサラ国王パセナディー王の妃マッリカーが王女を生んだが、王は王女が生まれたことを喜ばなかった。その時、釈尊は次のように教えられた。
어느 날, 코살라(Kosala,憍薩羅) 국왕(國王) 파세나디( (팔리어) Pasenadi, (범어)Prasenajit (한역)波斯匿王))의 왕비(王の妃) 맛리카(マッリカー,末利, Mallika)가 왕녀(王女:공주)를 낳았지만, 왕(王)은 공주(王女)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 때, 석존(釋尊)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 )안의, 인도어 및 한역, 팔리어, 범어의 표기는, 여기를 http://en.wikipedia.org/wiki/Pasenadi 참조함. 또한, 맛리카 부인을, 승만(勝鬘) 부인(夫人)이라고도.
「人々の王よ、婦人といえども、ある人々実には男子よりも優れている。知恵あり、戒めを保ち、姑を敬い、夫に忠実である。かの女の生んだ子は、英雄となり、地上の主となる。かくのごとき良き妻の子は、国家をも教え導くのである」
「사람들의 왕이여, 부인(婦人)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 사실은 남자보다도 뛰어나다. 지혜(知恵)로우며, 훈계(가르침:戒め)를 지키며,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남편에게 충실(忠實)하다. 저 여자가 낳은 자식(子)은, 영웅(英雄)이 되어, 지상의 주요한 사람이 된다(地上の主となる). 이와 같은 좋은 아내(良き妻)의 자식(子)은, 국가(國家)를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다. 」
釈尊は夫人の持つ素晴らしい才能を尊び、偉大なる聖者も英雄も、全て女から生まれるのであると、尊敬していられる。
석존(釋尊)은 부인(夫人)의 지니는 훌륭한 재능(才能)을 존중하고, 위대한 성자(聖者)도 영웅(英雄)도, 전부 여자(女)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존경(尊敬)하고 계신다.
そうして、夫は次の五つの在り方で妻に奉仕すべきであると教えていられる。
그리고 나서, 남편은 다음의 다섯가지의 본연의 모습으로 아내(妻)에게 봉사(奉仕)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一、尊敬する 二、軽蔑しない 三、道から外れない 四、権威を与える 五、装飾品を提供する
一、존경(尊敬)한다 二、경멸(輕蔑)하지 않는다 三、도리(道)에 어긋나지 않는다
四、권위(權威)를 준다 五、장식품(裝飾品)을 제공(提供)한다.
一、尊敬する
一、존경(尊敬)한다
神々に対すると同じ尊敬の念を以て妻を尊敬せよ。封建的な道徳的な男女観の中からは「妻を神と同じように尊敬せよ」という考え方は出て来ない。男女という肉体的な外見の相異はあっても、人間は皆神の子の霊性の本質は同じであることがわかると、妻をも神と同じように尊敬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わかってくる。平塚雷鳥さんが、「男は女の性の前に跪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たのも、この霊性の本質から言われた言葉である。平塚さんは「私はインドのお釈迦さまの話を聞いた比丘尼であったのかも知れない」と書いていられるが、それは事実であろう。その人の心の奥底から自然に起こってくる思いは、その人が過去世に体験したものが出て来るのである。
신(神)들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존경(尊敬)의 념(念)으로써 아내(妻)를 존경하라. 봉건적인 도덕적(道徳的)인 남녀관(男女觀) 중에서는, 「아내(妻)를 신(神)과 같이 존경(尊敬)하라」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나오지 않는다. 남녀(男女)라고 하는 육체적인 겉모습(外見)의 상이(相異:서로 다름)는 있어도, 인간(人間)은 모두 신(神)의 자녀(子)인 영성(靈性)의 본질(本質)은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내(妻)를 신(神)처럼 존경(尊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히라츠카 라이테우(平塚雷鳥:1886~1971년,여성)씨가, 「남자는 여자의 성(性) 앞에 무릎을 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이 영성(靈性)의 본질(本質)에서 말한 말이다. 히라츠카(平塚)씨는 「저는 인도(印度)의 부처님(お釋迦さま)의 말씀(話)을 들었던 비구니(比丘尼)였는지도 모른다. 」라고 쓰고 계시지만,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 자연히 일어나오는 생각은, 그 사람이 과거세(過去世)에서 체험(體驗)한 것이 나오는 것이다.
♬이 사람도, 제가 평소에 농담삼아 하는 말과 같은 말을 했었군요. "남자는 여자의 성(性) 앞에 무릎을 끓어야만 한다... " "그 어떠한 남자라 할지라도" ♬
私が青春時代、常に思い続けてきた言葉の中に、
「処女の純潔に逢うて、誰か浄化せざる者、あらざらむや」という言葉がある。その頃、私にとって女性は全て聖女であった。今もその思いは変わらない。世界中の全ての女性が聖女になれば男性社会は全て調和され平和になり犯罪もなくなるであろうという思いが今でもある。誠にも女性は尊敬すべきである。正しく女性は、男性からの尊敬に値するような女性にな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
제가 청년시절(青春時代)에, 줄곧 생각해 왔던 말 중에,
「처녀(處女)의 순결(純潔)을 만나서, 누구든지 정화(浄化)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 무렵에, 저에게 있어서는 여성(女性)은 성녀(聖女)였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세계 속의 모든 여성(女性)이 성녀(聖女)가 되면 남성사회(男性社会)는 전부 조화(調和)되어 평화롭게 되어 범죄(犯罪)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지금도 있다. 정말로 여성(女性)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존경해야 한다:誠にも女性は尊敬すべきである). 확실히 여성(女性)은, 남성(男性)에게서 존경(尊敬)을 받을 만한(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여성(女性)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二、軽蔑しない
二、경멸(輕蔑)하지 않는다.
尊敬するということは直ちに同時に軽蔑し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が、ここで釈尊が教えられたのは礼儀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女だから」といって女性の人格を無視して、手荒なことを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女性の感情は、男の感情よりも繊細であるから(中には男性以上に図太い神経を持っている女性もいるが)傷つき易い女の感情を大事にして、言葉や行動に気をつ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존경(尊敬)한다고 하는 것은 즉 동시에 경멸(輕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되지만, 여기에서 석존(釋尊)이 가르치신 것은 예의(禮儀)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자(女)이니까」라고 하며 여성(女性)의 인격(人格)을 무시(無視)하며, 난폭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성의 감정(感情)은, 남자의 감정(感情)보다도 섬세(纖細)하기 때문에((게중에는 남성 이상으로 대담한 성격을 가진 여성도 있지만(中には男性以上に図太い神経を持っている女性もいるが))상처를 받기 쉬운 여자의 감정(感情)을 소중히 하고, 말이나 행동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三、道から外れない
三、도리(道)에 어긋나지 않는다
ここで意味されているものは、姦淫も含めて、男の心が、妻以外の女性に移ることを戒めていられるのである。愛は純粋で純潔でなければならない。愛と言う言葉によって男女の生活が乱れて来ているのが現状であるが、真の愛からは心の安らぎが得られるが、ニセモノの愛からは、同じ愛と言う言葉は使っていても心の安らぎは得られない。愛情が分裂していることは大きな苦しみであり悩みとなる。釈尊の時代は、男が妻以外の女性と歩き廻ることも悪徳とされていた。今でもインドではこのことは守られている。最近のように、女性が職場に進出して来ると、男女が一緒に歩かなければならない機会も増えて来るが、しかし「道から外れてはならない」という心の掟は大事なことである。
여기에서 의미(意味)하시고 있는 것은, 간음(姦淫)도 포함하여, 남자의 마음이, 아내 이외의 여성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은 순수(純粹)하며 순결(純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한다고 하는 말로 남녀의 생활(生活)이 문란해지고 있는 현상(現狀:현재의 상태)이지만, 참된 사랑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지만, 가짜(ニセモノ) 사랑으로는, 똑같은 사랑(愛)이라고 하는 말은 쓰고 있어도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없다. 애정(愛情)이 분열(分裂)되고 있는 것은 큰 고통(苦しみ:괴로움)이며 병(悩み:걱정거리)가 된다. 석존(釋尊)의 시대는, 남자가 아내 이외의 여성(女性)과 걸어 다니는 것도 악덕(惡德)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도 인도(印度)에서는 이 일은 지켜지고 있다. 최근처럼, 여성이 직장(職場)에 진출하기 시작하게 되자, 남녀가 같이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기회(機會)도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그렇지만 「도리(道)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마음 자세(心の掟:마음의 규정)는 중요한 것이다.
四、権威を与える
四、권위(權威)를 준다
夫は社会的に家庭を外で活動するのであるから、家庭内のことはすべて妻に任せて夫は干渉しない。妻に自主性を持たせて権威を与えるということである。
남편은 사회적으로 가정(家庭)의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내의 일은 전부 아내에게 위임(委任)하고 남편은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아내(妻)에게 자주성(自主性)을 갖게 하고 권위(權威)를 준다고 하는 것이다.
男がいちいち家庭内のことまで細かく心を使っていたら、それだけ社会活動の力はそがれることになる。女性を尊敬している男性は決して台所に入らない。大きな仕事をしようとすればするほど男は家庭でも外でも勉強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ある。私は妻を尊敬しているから、家庭内のことはすべて妻に任せている。私がもし、近頃のような男女悪平等を主張して、亭主に料理も洗濯もさせ、日曜の度にどこかうまいものを食べに、また旅行に連れて行ってとせがむような悪妻を持っていたとしたら、私はこうした原稿を書くことも出来ないし、正法の活動など全く出来ないことになる。勿論、どこかへ食べに連れて行くような金もない。新聞や雑誌に登場している、はねっ返りの翔んだ女性から見れば、私など全く封建的な落第亭主の標本ということになろう。私の原稿はほとんど直観に導かれて書いている。書いている時に次から次へと書くことが先に頭に浮かんでくる。そういう原稿を書いている時に、いちいち「あれを手伝って、これをして、お風呂沸かして、料理して」と言われたら、折角の直感が中断されてとても書けるものではない。私は妻を尊敬しているから妻の立場を尊重して、妻の自主性を尊重して妻に権威を与えているのである。妻を愛していると言いながら、妻の領分にまで立ち入って料理や洗濯をしたりしている夫は、実際は妻に権威を与えていないことに気づ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し、妻はまた、夫を愛していると言いながら、社会的に大きく貢献しなければならない夫のエネルギーを家庭でロスさせて夫の将来性をダメにしてはいないかということを考えなければいけない。この頃、男性料理教室やら、男性育児教室が盛んだということであるが、一生を平凡に生きることだけで満足だという男性はそういう勉強をしてもいいであろうが、何かを成し遂げたいという目的を持って生きようとする男性はそういう所に行くべきではないと私は思う。
남자가 일일이 가정내의 일까지 자세히 마음을 쓰고 있으면, 그만큼 사회활동(社會活動)의 힘은 꺽이게 된다. 여성을 존경(尊敬)하고 있는 남자는 결코 부엌(台所:)에 들어가지 않는다. 큰 일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남자는 가정(家庭)에서도 밖에서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 저는 아내(妻)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 내의 일은 전부 아내에게 위임(委任)하고 있다. 제가 만약, 요즘과 같은 남녀악평등(男女悪平等:남녀 불공평)을 주장하며, 남편(亭主)에게 요리(料理)도 세탁(洗濯)도 시키고, 일요일 때마다 어딘가로 맛있는 것을 먹으려, 또한 여행(旅行)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악처(惡妻)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저는 이러한 원고(原稿)를 쓸 수도 없고, 정법(正法)의 활동 같은 것은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어딘가로 먹으려 데리고 갈 돈도 없다. 신문(新聞)이나 잡지(雜誌)에 등장하고 있는, 아가씨의 비상(はねっ返りの翔ん)이라는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저 따위는 완전히 봉건적인 낙제남편(落第亭主)의 표본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제 원고(原稿)는 거의 직관(直觀)에 이끌려 쓰고 있다. 쓰고 있을 때에 차례로 잇달아 쓸 것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한 원고를 쓰고 있을 때에, 일일이「저것을 도와줘, 이것을 하고, 목욕물을 데우고, 요리하고」라고 말한다면, 모처럼의 직감(直感)이 중단되어 도저히 쓸 수 없게 된다. 저는 아내를 존경(尊敬)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의 입장(立場)을 존중하고, 아내의 자주성(自主性)을 존중하고 아내에게 권위(權威)를 주고 있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愛)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아내의 영역(領分)에까지 간섭하며 요리(料理)나 세탁(洗濯)을 하거나 하고 있는 남편은, 실제는 아내에게 권위(權威)를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아내도 역시,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으로 크게 공헌(貢獻)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편의 에너지를 가정(家庭)에서 낭비시켜 남편의 장래성(將來性)을 못쓰게 해서는 안 되는가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 남성요리교실(男性料理教室)인가, 남성육아교실(男性育兒教室)이 활발하다고 하는 일이 있지만, 일생을 평범(平凡)하게 살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満足)한다고 하는 남성(男性)은 그러한 공부를 해도 좋지만, 뭔가를 이룩하고 싶다고 하는 목적(目的)를 가지고 살려고 하는 남성(男性)은 그런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妻が病気で寝込んだ時とか、或いはどこか用事で出掛けて料理する者がいないという時に、男が自分で料理して食べ、また、妻にも食べさせるのは当然だし、妻がどうしても外に手の離せない用事があるという時に赤ん坊のオムツを替えてやるのはこれまた当然で、夫婦生活する以上、夫婦は協力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が、最近は、限度を超えて家庭にのめり込む男子をいい亭主だと誉めるような風潮があるのは遺憾であると思っている。父親らしくないことが子供の家庭内暴力や、中学・高校生の校内暴力の原因となっているというのであるから、妻は夫をして、夫らしく又親らしくさせることが大事で、妻が夫をして夫らしく又親らしく振舞わせないで、夫に炊事や洗濯などさせていたら、親の言う事を聞かない子供に育て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
아내가 병(病気)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든가, 혹은 어딘가 볼일이 있어서 외출해서 요리(料理)할 사람이 없다고 할 때에, 남자가 스스로 요리해서 먹고, 또한, 아내에게도 먹이는 것은 당연하고, 아내가 아무리 해도 밖에서 손을 땔 수가 없는 볼일이 있다고 할 때에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것은 이 또한 당연하며, 부부생활(夫婦生活)을 하는 이상, 부부는 협력(協力)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최근에는, 한도(限度)를 넘어서 가정(家庭)에 열중하는 남자가 좋은 남편(亭主)이다 라고 칭찬하는 것과 같은 풍조(風潮)가 있는 것은 유감(遺憾)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친(父親)답지 않은 것이 아이(子供)가 가정내 폭력(家庭内暴力)이나, 중학교・고등학생의 교내폭력(校内暴力)의 원인(原因)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으로 하여금, 남편답게 부친(又親)답게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아내가 남편으로 하여금 남편답고 부친(又親)답게 행동하게 하지 않고, 남편에게 취사(炊事)나 세탁(洗濯) 등을 시키고 있다면, 부모(親)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 자식(子供)으로 키우고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五、装飾品を提供する
五、장식품(裝飾品)을 제공(提供)한다
インドから南アジア一帯の婦人達は、宝石貴金属等の装飾品をよく身につける。金が貯まると装飾品を増やし、金が必要になると少しずつ売るということをする。
인도(印度)에서 남아시아 일대(一帶)의 부인(婦人)들은, 보석귀금속(寶石貴金屬) 등의 장식품(裝飾品)을 자주 몸에 붙인다(지닌다, 걸친다:身につける). 돈(金)이 모이면 장식품을 늘리고, 돈(金)이 필요(必要)하게 되면 조금씩 판다고 한다.
日本のように安定した国では装飾品を身に付けるという事は余りしなかったが、常に戦乱が続いて、自分を守ることは自分がして、たとえ何処へ行っても生活が出来るように、何時でも金になる物は身に付けて置くというのが生活の知恵であった。妻に装飾品をつけさせるということは、妻への愛情の表現であると同時に貯金することでもあった。高価な宝石や貴金属でなくても、愛情の表現として夫が何かを妻に贈ることは自然であろう。
일본(日本)처럼 안정(安定)된 나라에서는 장식품(裝飾品)을 몸에 붙인다(지닌다, 걸친다:身に付ける)고 하는 일은 그리 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자기 스스로 하며, 설령 어디로 간다고 해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돈(金)이 되는 물건을 몸에 지녀 둔다고 하는 것이 생활(生活)의 지혜(知惠)였다. 아내(妻)에게 장식품을 몸에 지니게(걸치게)한다고 하는 일은, 아내에 대한 애정(愛情)의 표현(表現)임과 동시에 저금(貯金)하는 일이기도 했다. 고가(高價)인 보석(寶石)이나 귀금속(貴金屬)이 아니라 해도, 애정(愛情)의 표현(表現)으로 남편이 뭔가를 아내(妻)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以上のように釈尊は夫達に対して妻を尊敬せよと教えていられるのである。
이상과 같이 석존(釋尊)은 남편들에 대해서 아내(妻)를 존경(尊敬)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ではなぜ釈尊は、阿難が「夫人はなぜ公会のうちに坐さないのですか・・・」と質問したのに対して、「婦人が公会のうちに坐せず、職業に従事せず、職業によって生計を立ててはならぬ」と言われたのであろうか。
그럼 왜 석존(釋尊)은, 아난(阿難:석존 생존시 비서격인 제자:사촌 동생이기도 함)이 「부인(夫人)은 왜 공회(公會:공중의 집회, 국가의 집회, 공공단체의 집회) 안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부인(婦人)이 공회(公會) 안에 가지 못하고,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직업으로 생계(生計)를 꾸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신 것일까?
それは、夫人は怒り易く、嫉妬深く、物惜しみし、愚かで、知恵が足りないからであると言われたのである。ということは、その当時のインドの女性は、釈尊が心の内に願っていられたような女性の理想像とは程遠い愚かな状態にあったからである。
그것은, 부인(夫人)은 화내기 쉽고(怒り易く)、질투(嫉妬)가 심하고(深く)、인색하고(物惜しみし)、어리석고(愚かで)、지혜(智惠)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인도(印度)의 여성(女性)은, 석존(釋尊)이 마음속으로 바라고 계셨던 것과 같은 여성(女性)의 이상상(理想像: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좀 멀고 어리석운 상태(狀態)에 있었기 때문이다.
パセナディー王に言われたように「夫人といえども、ある人々は男子よりも優れて知恵あり、良き妻が育てた子供は、国家をも導く」と夫人の中には素晴らしい女性があることを知っていられたが、平均的に全女性を眺めた場合、どちらかと言えば劣った愚かな女性が多かったからである。
파세나디왕(王)(パセナディー王, (팔리어) Pasenadi, (산스크리트어)Prasenajit (한역)波斯匿王)) 에게 말했듯이,
「부인(夫人)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남자보다도 상냥하고(다정하고) 지혜(知惠)롭고, 좋은 아내(良き妻:양처)가 키운 자식(子供)은, 나라를 이끈다(國家をも導く)」라고 부인(夫人) 중에는 훌륭한 여성(女性)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평균적(平均的)으로 모든 여성(女性)을 바라본 경우, 어느쪽인가 하면 뒤떨어진 어리석은 여성(女性)이 많았기 때문이다.
釈尊は「婦人は公の場に出たり、公の仕事をしてはならぬ」と言われたが、キリストもまた「女は男の上に立って法を説いてはならぬ」と説いていられる。
석존(釋尊)은「부인(婦人)은 공적인의 장소(公の場:공공단체의 장소)에 나가거나, 공공단체의 일(公の仕事:국가의 일,공적인 일,공공단체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지만, 그리스도(Christ)도 또한「여자(女)는 남자 위에 서서 법(法)을 설교(說敎:説い)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하고 계신다.
これもまた、今から二千年前のあのイスラエル地方の多くの女性は、まだ無知な人が多かったからであろう。もし女性がもっと素晴らしい存在であったら釈尊もキリストもそのようには言われなかった筈である。
이 또한,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저 이스라엘 지방의 많은 여성은, 아직 무지(無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여성(女性)이 훨씬 훌륭한 존재(存在)였다면 석존(釋尊)도 그리스도(Christ)도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能力のない者が上の地位に就き、心の狭い者が広い見識を必要とする仕事に就くとしたら社会は混乱し没落するばかりである。だから、相応しい人が相応しい仕事をするということは大事なことなのである。
능력(能力)이 없는 사람이 높은 지위(地位:자리)에 앉고, 마음의 좁은 사람이 넓은 식견(識見)을 필요로 (必要)로 하는 직무(仕事:일)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면 사회(社會)는 혼란(混亂)하고 몰락(沒落)할 뿐이다. 그래서, 어울리는(相應:상응)하는 사람이 어울린(相應)한 일(仕事:직무)를 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이다.
夫に対しては以上のように教えていられるが、妻に対してはどう教えられたのであろうか
남편에 대해서는 이상과 같이 가르치고 계시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계셨던 것일까?
8.妻のあり方
8.아내(妻)의 본연의 모습(あり方)
妻は次の五つの在り方で夫を愛さなければならない。
아내(妻)는 다음의 다섯가지의 본연의 모습으로 남편(夫)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一、仕事をよく処理する 二、身内の人達をよく待遇する 三、道を踏み外してはならぬ
一、일(仕事)을 잘 처리(處理)한다. 二、집안(身内) 사람들을 잘 대우(待遇)한다. 三、사람으로서 지켜야 길(道:도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四、集めた財産をよく守る 五、妻として、女として、為すべき事柄について巧みで勤勉である
四、모은 재산(財産)을 잘 지킨다. 五、아내(妻)로서, 여자(女)로서, 해야 할 일(事柄:사항)에 대해서 능숙하게 근면(勤勉)해야 한다.
ここに教えてあることは、妻は妻の役割を果たさなければ良い妻とはいえ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여기에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내(妻)는 아내의 역할(役割)을 다하지 않으면 좋은 아내(良い妻:양처)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一、仕事をよく処理する
一、일(仕事)을 잘 처리(處理)한다
妻は家庭内の仕事を充分によく処理し、夫が外にあって安心して活動す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することである。それが夫を助ける道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
아내는 가정내의 일을 충분히 처리(處理)하고, 남편이 집 밖에서 안심(安心)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남편을 돕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妻が不出来で妻らしいことは何にも出来ず、子供が生まれても母親らしいことは何にも出来ないとしたら、夫は安心して外で仕事は出来ない。夫が仕事が出来なくなれば当然収入も少なくなる。このような場合愚かな不出来な妻は、自分が夫の足を引っ張った為に収入が少なったとは考えないで、夫の働きが悪いから少ないのであると言って夫を罵倒し、こんな人と結婚するのではなかったと言うかも知れない。そこまで行けばもう離婚ということになるであろう。日本は、アメリカ、ソ連に次いで離婚率は世界第三位である。女は結婚する前に、女は結婚してどういう仕事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と勉強して結婚すべきであろう。
아내(妻)가 변변치 못하고 아내답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못하고, 자식(子供)이 태어나도 모친(母親)다운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남편(夫)은 안심하고 집 밖에서 일은 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 어리석은 변변치 못한 아내는, 자신이 남편을 방해했기 때문에 수입(收入)이 적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남편이 일이 서툴어서(일이 나빠서:働きが悪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을 매도(罵倒)하고, 이런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가게되면 이제는 이혼(離婚)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일본(日本)은, 아메리카(미국), 소련(蘇聯) 다음으로 이혼률(離婚率)은 세계 제3위이다. 여자는 결혼(結婚)하기 전에, 여자는 결혼(結婚)해서 어떠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공부하고 결혼(結婚)해야 할 것이다.
二、身内をよく待遇する
二、집안(身内) 사람들을 잘 대우(待遇)한다
身内とは、夫と自分の親戚のことであり、良く待遇するということは一家の中心として、みなが不愉快な感情を抱いたり争ったりすることのないように良くまとめるということである。
집안(身内)이란, 남편과 자신의 친척(親戚)의 일이며, 잘 대우(待遇)한다고 하는 것은 일가 전체(一家)의 중심으로서, 모두가 불유쾌(不愉快)한 감정을 품거나 싸우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잘 통합한다고 하는 것이다.
釈尊の時代はインドは母系家族であった。日本も、奈良時代までは母系家族であった。女が夫の家に嫁ぐようになったのは武家社会が台頭してからである。母系家族においては尚更女は一家の中心として大家族をまとめ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現在の日本のように核家族になったとしても、女が、夫の家族に良くすることは大事なことである。全国を講演して歩くと、色々な人の話を聞くが、夫が自分の親戚の人には良くするが、妻の親には何にもしないという人があり、その反対に、妻が自分の親や親戚には良くするが、夫の方には何にもしないという人があり、これでは上手くゆかないのは当然である。それぞれの生活状態に相応しく良く待遇することは大事なことである。
석존(釋尊)의 시대는 인도(印度)는 모계가족(母系家族)이었다. 일본(日本)도, 나라시대(奈良時代:서기 710~794년)까지는 모계가족(母系家族)이었다. 여자가 남편의 집으로 시집가게 되었던 것은 무가사회(武家社會)가 대두(擡頭)하고나서이다. 모계가족(母系家族)에 있어서는 집안(家:가정) 중심으로 대가족(大家族)을 총괄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의 일본처럼 핵가족(核家族)이 되었다고 해도, 여자(女)가, 남편이 가족(家族)에게 좋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전국(全國)을 강연하며 돌아다니면,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만, 남편이 자신의 친척(親戚)인 사람에게 잘하지만, 아내(妻)의 부모(親)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로, 아내(妻)가 자신의 부모(親)나 친척(親戚)에게는 잘 하지만, 남편 쪽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는 원만하게 되어가지 않는 것은 당연(當然)하다. 저마다의 생활 상태(生活狀態)에 어울리게 잘 대우(待遇)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三、道を踏み外さない
三、사람으로서 지켜야 길(道:도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インドの女性は今でも貞淑である。夫を愛している貞淑な妻は、夫を神の如くみなして、夫の希望通りに行動し、夫の同意を得て家族一切の世話を引き受け、夫の両親、親戚、友人、兄弟姉妹、召使などに対して、それぞれに相応しい態度で応接し、庭には菜園を造り、芳香を発する木や花を植え、食事についても夫の好き嫌いや、何が体に良く、何が悪いかを良く心得、夫が帰宅する足音を聞いたらすぐ出て、自分でか、または召使に夫の足を洗わせるとか。夫が何か不始末をしでかした時、少し位嫌な顔をするのはいいが、徹底して悪く言い過ぎてはならない。口やかましい妻になってはならない。下品な言葉を口にしたり、ふくれっ面をしたり、獨り言を喋ったり、外でお喋りをしたりしてはならない。
인도(印度)의 여성(女性)은 지금까지도 정숙(貞淑)하다.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정숙(貞淑)한 아내(妻)는, 남편을 신(神)처럼 간주(看做)하고, 남편의 희망(希望)대로 행동하고, 남편의 동의(同意)을 얻어 가족일체의 돌봄(시중)을 떠맡고, 남편의 양친(兩親), 친척(親戚), 친구(友人), 형제자매(兄弟姉妹), 하인(召使:하녀) 등에 대해서, 각자에게 상응(相應)한 태도로 응접(應接:접대)하고, 뜰(庭)에는 채소밭(菜園)을 만들고, 향기(芳香:방향)을 풍기는 나무나 꽃을 심고, 식사(食事)에 대해서도 남편의 식성(好き嫌い:가림)이나, 뭐가 몸에 좋고, 뭐가 안좋지를 잘 터득하고, 남편이 귀가(歸家)하는 발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나가서, 자신이 하든가, 혹은 하인(召使:하녀)에게 남편의 발을 씻기든가 한다. 남편이 폐를 끼쳤을 때, 조금 정도는 싫은 기색을 보이는 것도 좋지만, 철저하게 불쾌하게 말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잔소리가 심한 아내(妻)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던지러운 말(下品な言葉)을 입에 담거나, 뿌루뚱한 얼굴을 하거나, 혼잣말을 지껄이거나, 집 밖(外)에서 잡담을 해서는 안 된다.
夫の側に近づく時は、いい甘い匂いのする香油や香料を用いて夫の喜ぶ衣装を身に付けよ。妻たる者は、夫に献身し、何事も夫の利益になるように努め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ようなことは五千年前から今に至るまでインドでは教えられていることである。
남편의 옆으로 다가올 때는, 달콤하게 말하고 향기(匂い:냄새)가는 나는 향유(香油)나 향료(香料)를 써서 남편의 기뻐하는 의상(衣裝)을 몸에 걸쳐라. 아내된 사람은, 남편에게 헌신(獻身)하과, 무슨 일이든지 남편의 이익(利益)이 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5천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印度)에서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道を踏み外さない」ということは、「夫以外の他の男性のことを、心の中でさえも求め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心の中で他の男性を求めることは肉体的には何の関係がなくても心の中では姦淫しているのである。思う事くらいは罪にならぬと多くの人は考えるが、人間の霊性の本質がわかると、心で思う事も罪になることがわかるのである。だからキリストも「汝ら心の中で姦淫してはならぬ」と教えられたのである。あなた方が心の中で姦淫の罪を犯さなくなったら、あなた方の運命は急激な好転をすることを私ははっきり言って置きたい。あなたの心が変わる時、世界が変わるのである。
「사람으로서 지켜야 길(道:도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道を踏み外さない)」라고 하는 것은, 「남편 이외의 다른 남성(男性)의 일을, 마음속으로까지도 찾지 않는다(夫以外の他の男性のことを、心の中でさえも求めない)」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다른 남성을 찾는 것은 육체적(肉體的)으로는 어떤 관계(關係)가 없더라도 마음속으로는 간음(姦淫)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 정도는 죄(罪)가 안 된다고 많은 사람은 생각하지만, 인간의 영성(靈性)의 본질(本質)을 알게 되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죄(罪)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Christ)도 「너희는 마음속으로 간음(姦淫)해서는 안 된다(汝ら心の中で姦淫してはならぬしてはならぬ)」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간음(姦淫)의 죄(罪)를 짓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운명(運命)은 급격한 호전(好轉)을 한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바뀔 때, 세계(世界)가 바뀌는 것이다(あなたの心が變わる時、世界が變わるのである).
四、集めた財をよく守る
四、모은 재산(財産)을 잘 지킨다
私がインドに学ば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があるとアニル教授に言ったのは、インドでは宗教と道徳が一体となって生きている面が沢山あるということもあった。
제가 인도(印度)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아닐교수(アニル教授)에게 말한 것은, 인도(印度)에서는 종교(宗教)와 도덕(道徳)이 한몸(一體)이 되어 살고 있는 면(面)이 많다고 하는 것도 있었다.
竹、薪、革製品、鉄鍋、塩、油などは、一年中で一番値段が下がる時期を見て買い込んで置く、その外日用品も必要に応じて買い整えて貯蔵室にしまう。季節になったら、大根、馬鈴薯、蕪、胡瓜、茄子、玉葱、にんにくなどの種子を買って来て自分で植える。要は自分の財産の額や、夫に打ち明けられた秘密を他人に洩らしてはならない。食卓の残りのミルクは捨てずにバターを作る。油と砂糖は自家製にし、糸紡(つむ)ぎとはた織りは家庭内で行い、縄、紐、紐を作る木の皮などは常時備えて置く。くず米やもみ殻は無駄なく利用する。使用人の手当を払い、田畑の耕作や家畜の世話を監督し、一日の収支の帳尻を合わせ、着古した衣類は使用人に与へ、夫の友人には花、香油、香料など贈って歓迎する。夫の両親を敬い、決して逆らわず、穏やかな口調で口数少なく話しかけ、彼らの前では大声で笑わず、そのうえ、妻は虚栄に憂き身をやつしたり、自分の楽しみだけに没頭したりしてはならない。使用人に対しては寛大な態度を示し、休暇や祭りの日にはその労をねぎらってやり、何か物を与える時は、まず夫に断わらなければならない。
대나무(竹), 섶나무(薪:장작:땔감), 가죽제품(革製品), 가마(鐵鍋:솥)、소금(鹽), 기름(油) 등은, 1년 중에서 가장 값(値段:가격)이 내려가는 시기(時期)를 보고 사들여 두며, 그 밖의 일용품(日用品)도 필요에 따라서 구입하고 정리하여 저장실(貯藏室)에 간수한다. 계절(季節)이 되면, 무(大根), 감자(馬鈴薯), 순무(蕪), 오이(胡瓜), 가지(茄子), 양파(玉葱), 마늘(にんにく) 등의 종자(種子)를 사 와서 스스로 심는다. 요는 자신의 재산액(財産の額)이나, 남편이 털어놓은 비밀(秘密)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漏泄:漏洩)해서는 안 된다. 식탁(食卓)에 남은 우유(ミルク)는 버리지 않고 버터(butter)를 만든다. 기름(油)과 설탕(砂糖)은 자가게(自家製:자기집에서 만든 것)으로 하고, 명주실로 짜는 것은 가정내에서 행하고, 밧줄(縄), 끈(紐), 끈을 만드는 나무껍질 등은 상시 갖추어 둔다. 싸라기(くず米)나 왕겨(もみ殻)는 쓸모있게 이용한다. 사용인(使用人)에게 수당(手當)을 지불하고, 논밭(田畑:전답)의 경작(耕作)이나 가축의 돌봄을 감독(監督)하고, 하루의 수지(収支:수입과 지출)을 계산을 맞추고, 입고 있던 의류(衣類)를 사용인(使用人:일하는 사람)에게 주고, 남편의 친구에게는 꽃, 향유(香油), 향료(香料) 등을 선물하며 환영(歡迎)한다. 남편의 양친(兩親)을 존경하고, 절대로 거역하지 않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수가 적게 말을 붙이고, 그들 앞에서는 큰소리로 웃지 않고, 게다가, 아내는 허영(虛榮)에 열중하거나, 자신의 즐거움만에 몰두(沒頭)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사용인(使用人: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寬大)한 태도(態度)를 보이고, 휴가(休暇)나 축제날(祭りの日:제삿날)에는 그 수고를 위로해 주거나(그 노고를 치하해 주거나), 뭔가 물건을 줄 때는, 먼저 남편에게 양해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以上は、ヴァーツヤーヤナ著「愛の格諺」という本に書かれていることであるが、ヴァーツヤーヤナという人は今から二千年位前に存在した人ではなかろうかいわれているが、はっきりした年代は不明で、どんなに新しいといっても千五百年以後の人ではないということははっきりしている。釈尊の教えが経典という形式にまとめられたのがやはり二千年前頃であることを考えると、ヴァーツヤーヤナが「愛の格諺」に書いてまとめたようなことは、釈尊は二千五百年前の方であるからその頃は口で言い伝えられていたに違いない。
이상(以上)은, 바츠야야나(Vātsyāyana) 저서「사랑의 격언(愛の格諺) 」이라고 하는 책에 쓰여 있는 것이지만, 바츠야야나(Vātsyāyana)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정도 전에 존재(存在)했던 사람이 아닐까? 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연대(年代)는 불명(不明)이며, 아무리 새롭다고 해도 1500년 이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 석존(釋尊)의 가르침이 경전(經典)이라고 하는 형식(形式)으로 완성된(통합된) 것이 역시 2천년 전 무렵인 것을 생각하면, 바츠야야나(Vātsyāyana)가, 「사랑의 격언(愛の格諺)」를 쓰고 완성한 것은, 석존(釋尊)은 2천 5백년 전의 분이기 때문에 그 무렵은 입으로 구전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버챠야나(ヴァーツヤーヤナ) 저서「사랑의 격언(愛の格諺) 」은, 요즘 말로, "카마수트라(Kamasutra)는 고대 인도의 성애(性愛)에 관한 문헌"을 뜻합니다. 정식적인 제목은, "Vātsyāyana Kama Sutra"가 된다.
集めた財というのは、農耕・商業などをして集めた財であって、それを守るということが妻の為すべき事の務めの一つとして挙げられていることは、家庭の経済の管理は妻に任せら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夫は妻に経済を全て任せる程妻を信頼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り、また妻は、夫の信頼に応えられるよう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모은 재산(財)이라고 하는 것은, 농경(農耕)・상업(商業) 등을 해서 모은 재산(財)이며, 그것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아내(妻)가 해야할 일인 의무(務め)의 하나로서 열거하고 있는 것은, 가정 경제(家庭の經濟)의 관리(管理)는 아내에게 맡겨져 있었다고 하는 것이며, 남편(夫)은 아내에게 경제(經濟)를 전부 위임할 정도로 아내를 신뢰(信賴)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아내(妻)는, 남편의 신뢰(信賴)에 부응(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재물 재[財]의 뜻은, "보물, 재물, 경제 활동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돈(물건) "으로 일본어는, 사용합니다.
五、妻として、女として、為すべき事柄について巧みで勤勉である
五、아내(妻)로서, 여자(女)로서, 해야 할 일(事柄:사항)에 대해서 능숙하게 근면(勤勉)해야 한다
このことについては前項でも書いたが、要は、妻は夫の収入の範囲内で上手くまかなっ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教えられたのである。
이 일에 관해서는 전항에서도 썼지만, 요는, 아내는 남편의 수입(收入)의 범위 내에서 능숙하게 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限られた夫の収入の範囲内でやってゆくということは、大変骨の折れる仕事であるかもしれないが、足りないからとサラ金に手を出して破滅してしまったという人の例はザラである。妻が夫の収入の範囲内でやってゆくということは、古代インドの時代であろうが今であろうが変わりないことである。ここでいわれた「巧み」とは「粥や食物をつくることなどにも巧みである」ということもある。同じ材料を使っても、作る人によって美味しかったり美味しくなかったりする。一番肝心なことは愛情を込めて作るということである。
한정된 남편의 수입(収入)의 범위 내에서 해 간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애를 먹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부족하다고 하며 샐러리맨 금융(サラ金:※ 무담보이지만 이자가 비싼 간이 금융(기관))에 손을 대서 파멸(破滅)해 버렸다고 하는 사람의 예(例)는 흔해 빠졌다. 아내가 남편의 수입(収入)의 범위(範圍) 내에서 해 간다고 하는 것은, 고대 인도(印度)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한 「능숙함(巧み)」とは「죽(粥)이나 식사(食事)를 만드는 일 등에도 능숙(巧み)하다.」고 하는 것도 있다. 같은 재료(材料)를 써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맛있거나 맛없거나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애정(愛情)를 가지고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アメリカのスターデリーという人がある。この人は、極悪な脱獄犯人であったが、獄舎の中でキリストの姿を見て反省し、キリストの教えを忠実に生き伝道者になった人である。この人が言っている。「刑務所や集団給食をする所の料理がうまくないのは、愛がこもっていないからである。愛のない食事を咀嚼するのには鉄の胃袋を必要とする」と。愛情のない食事は見ただけで寒々としている。
아메리카(미국)의 (スターデリー)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극악(極惡)한 탈옥범인(脫獄犯人)이었지만, 옥사(獄舍:감옥) 안에서 그리스도(Christ)의 모습을 보고 반성(反省)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忠實)하게 살며 전도자(傳道者)가 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말하고 있다. 「형무소(刑務所)나 집단급식(集團給食)을 하는 곳의 재료(材料)가 좋지 않은 것은, 사랑(愛:애정)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愛)이 없는 식사(食事)를 씹어 삼키는 데에는 철(鐵)의 밥통(胃袋:위장)를 필요(必要)로 한다.」라고. 애정(愛情)의 없는 식사(食事)는 보기만 해도 살풍경한 모습이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애정을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 는 말은, 늘 제가 하는 말입니다 ^^★
以上、書いたように、釈尊が結婚生活について説かれた夫の役割と妻の役割は至極当然のことを説いていられる訳で、別に奇異な事を説かれた訳ではない。
이상(以上), 쓴 것처럼, 석존(釋尊)이 결혼생활에 대해서 설법하신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은 지극(至極)히 당연한 것을 설법하고 계시는 것이며, 특별히 기이(奇異)한 것을 설법하신 것이 아니다.
この釈尊の教えは、原始仏教が伝えられた南伝仏教圏、ビルマ、タイなどでは最近まで生きていた。ビルマでは妻が財産を支配していた。夫婦の協力によって得た財産は共同財産であった。妻はみな貞淑で姦通による離婚は極めて稀であった。西洋思想が入って来てからインドでもビルマ辺りでも姦通が増えて来て、家庭内のことを放棄する女性が増えて来たというのであるが、しかしまだまだ原始仏教の教えは生きている。
이 석존(釋尊)의 가르침은, 원시불교(原始佛敎)가 전파된 남전불교권(南傳佛敎圈), 버마(Burma,緬甸[면전],지금의 미얀마의 구칭), 타이(Thai,泰, Thailand, 인도차이나반도 중앙부에 있는 왕국. 옛 이름 샴) 등에서는 최근까지 살아 있었다. 버마((Burma,緬甸)에서는 아내가 재산(財産)를 지배하고 있었다. 부부(夫婦)의 협력으로 얻은 재산(財産)은 공동재산(共同財産)이었다. 아내는 모두 정숙(貞淑)하며 간통(姦通)으로 인한 이혼(離婚)은 극히 드물었다. 서양사상(西洋思想)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인도(印度)에서도 간통(姦通)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가정(家庭) 내의 일을 방기(放棄)하는 여성이 증가해 왔다고 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아직도 원시불교(原始佛敎)의 가르침은 살아 있다.
しかし、釈尊は矛盾といえば矛盾したことを説かれた訳である。在家の人達には「お互いに愛せよ、妻子を愛すべし」と説かれ、出家した人達には「妻子に対する愛着から離脱すべし」と説かれた。これは在家と出家と分かれている以上仕方がないことであった。
하지만, 석존(釋尊)은 모순이라고 하면 모순(矛盾)된 것을 설법하신 것이다. 재가(在家)의 사람들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처자(妻子:처와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고 설법하시고, 출가(出家)한 사람들에게는 「처자(妻子:처와 자식)에 대한 애착(愛着)에서 이탈(離脫)해야 한다.」고 설법하셨다. 이것은 재가(在家)와 출가(出家)로 나눠져 있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ここで私は、高橋信次先生が言われたことをお伝えして置きたい。
여기에서 저는,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해 두고 싶습니다.
「園頭さん、インドの時は出家しないと法が説けなかった。僕がインドの時、一番心に掛かっていた事は、妻ヤショダラと、子供のラフラに対してすまないと思う思いであった。インドの時は仕方がなかったのである。インドではバラモンがあって出家が尊いこととされていた。しかし、神理からいえば、出家というのはやはり異状であって、本当は当り前の家庭生活をしていて、それで法を説か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ある。今度、日本に生まれる時に天上界で、実はインドの時のヤショダラに「お前、日本に一緒に生まれてくれないか」と頼んだのだ。そうしたら「私はインドの時にこりごりしました。今度は休ませて下さい」というのだよ。それなら仕方がないということになって今の家内の頼んだのだ。正法というものは、自分が正しい生活をしながら説かないといけないのだ」
「소노가시라(園頭)씨, 인도(印度)의 당시는 출가(出家)하지 않으면 법(法)을 설법할 수 없었죠. 내가 인도(印度)의 당시, 가장 마음에 걸려 있던 것은, 아내 야쇼다라(Yasodharā, 耶輸陀羅)와, 자식(子供)인 라훌라(Rāhula, 羅睺羅)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인도(印度)의 당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인도(印度)에서는 바라문(婆羅門)이 있고 출가(出家)가 존엄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하지만, 신리(神理)에서 보면, 출가(出家)라고 하는 것은 역시 이상(異狀:평소와는 다른 상태나 상황)이며, 사실은 보통(예사)의 가정생활(家庭生活)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법(法)을 설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죠. 이번에, 일본(日本)에 태어날 때에 천상계(天上界)에서, 실은 인도(印度) 당시의 아내였던 야쇼다라(Yasodharā, 耶輸陀羅)에게「당신, 일본에 같이 태어나 주지 않겠어요?」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저는 인도(印度)의 당시에 지긋지긋했습니다(私はインドの時にこりごりしました)。이번은 쉬게 해 주십시오(今度は休ませて下さい)」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게 되어 지금의 집사람(家内: 다카하시 카츠에(高橋一榮))에게 부탁한 것이죠.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올바른 생활(生活)을 하면서 설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高橋信次先生のこの言葉の意義は大きい。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의 이 말씀의 의의(意義)는 크다.
インドから中国を経て日本へ、その間、仏法を伝えて来られた沢山の僧、また仏法の求道者達は、出家された釈尊、三十二相を備えられた礼拝の対象とされてしまった釈尊を理想像としてひたすらに精進して来られたのである。日本の坊さん達が、男女夫婦の役割について説かれなかったことも無理もない。女人禁制として、女は信仰には無縁の存在として、いやそればかりでなくむしろ業の深い存在として扱われて来た事については、女の人達は永い間不満を持って来られたであろう。
인도(印度)에서 중국(中國)을 거쳐 일본(日本)으로, 그 사이에, 불법(佛法)을 전파해 왔던 많은 승려(僧), 또한 불법(佛法)의 구도자(求道者)들은, 출가(出家)하신 석존(釋尊), 32상(三十二相)을 갖추신 예배(禮拜)의 대상(對象)으로 삼아 버린 석존(釋尊)을 이상상(理想像: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기고 한결같이 정진(精進)해 오셨던 것이다. 일본(日本)의 스님(坊さん)들이, 남녀부부(男女夫婦)의 역할에 대해서 설법하지 않았던 것도 무리(無理)도 아니다. 여인 출입 금지(女人禁制: 승려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여성의 입산을 금하는 것)라고 하며, 여자는 신앙(信仰)에는 무연(無縁:아무 인인이 없음)의 존재라고 하며,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업(業)의 깊은(深い:많은) 존재로 취급해 왔던 것에 대해서는, 여자들은 오랫동안 불만(不滿)을 가져 오셨을 것이다.
考えてみると、今から二千五百年前、釈尊がクシナガラの地で入滅されてから世界は、男性中心の戦国時代に入る。戦いを中心とした封建社会は、否応なしに男性中心の社会とならざるを得ない。女が刀を擔(かつ)いで戦場を駈け廻る訳にはゆかない。女は家庭に引き籠って男の生き方のままに翻弄され従って生きざるを得ない。男性中心の封建社会で男性が生き抜いて行くためには、学問も男性中心のものとならざるを得ない。正常でない封建社会の中で法を伝えてゆくとすれば、やはり、男子から男子へとならざるを得ない。
생각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2천 5백년 전, 석존(釋尊)이 쿠시나가라 땅(영어:Kushinagar、타이어:कुशीनगर))에서 입멸(入滅)하신 후의 세계(世界)는, 남성 중심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든다. 전쟁(戰い)을 중심으로 한 봉건사회(封建社會)는, 다짜고짜로 남성 중심(男性中心)의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자가 칼을 차고 전장(戰場:전쟁터)을 누빌 수 없다. 여자는 가정(家庭)에 틀어박혀서 남자의 생활방식대로 농락(籠絡)당하며 따르며 살 수밖에 없다. 남성 중심(男性中心)의 봉건사회(封建社會)에서 남성이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학문(學問)도 남성 중심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정상(正常)이 아닌 봉건사회 속에서 법(法)을 전파여 간다고 하면, 역시, 남자에게서 남자로 될 수밖에 없다.
明治維新が天上界で計画されたのは寛永二年であったという。明治維新がなぜ計画されたのかといえば、徳川幕府の下では自由がない。男女共に自由を与える為には一ぺんまた天皇制に還さ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計画されたという。本当は明治維新で男女の自由が完全に得られる筈のものとして実現されたのだが、維新が実現してみると封建時代の道徳がそのまま残り、完全な男女の自由は与えられずに、日本は神国思想に凝り固まって、全世界が理想世界となってゆくためには、日本は世界各国から孤立するような愛国思想は除か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大東亜戦争もまた天上界で計画され、日本は敗戦することによって初めて男女平等の自由を得させるということになり、敗戦して混乱した日本を収拾するには偉大な徳を持った人を日本の天皇として生まれさせて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菩薩界の方であり、紀元前二八六年にマガダ国王として即位し、仏教を全インドに広められたアショカ王を日本に生まれさせ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大正天皇の皇太子として生まれさせるということになった。それが今の天皇陛下でいられる。
메이지유신(明治維新:개혁의 개시 기시는, 1867년 내지는 1868년)이 천상계(天上界)에서 계획(計劃)된 것은 간에이 2년(寛永二年:1625년)이었다고 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왜 계획되었는가 하면, 도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1603~1867 내지는 1868년) 하에서는 자유(自由)가 없다. 남녀(男女)에게 다 같이 자유(自由)를 주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또한 천황제(天皇制: 천황이 군주로서 통치하는 정치 체제)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일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남녀의 자유(自由)를 완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실현되었던 것인데, 유신(維新)이 실현되고 보니 봉건시대(封建時代)의 도덕(道徳)이 그대로 남아 있고, 완전한 남녀의 자유(自由)는 주어지지 않고, 일본(日本)은 신국사상(神國思想)에 집착하고(빠지고), 전세계가 이상적인 세계(理想世界)가 되어 가기 위해서는, 일본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고립(孤立)되는 것과 같은 애국사상(愛國思想)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일로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도 역시 천상계(天上界)에서 계획되어, 일본은 패전(敗戰)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남녀평등(男女平等)의 자유(自由)를 얻을 수 있게 되며, 패전하여 혼란(混亂)한 일본을 수습(收拾)하는 데에는 위대한 덕(德)을 가진 사람을 일본의 천황(天皇)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일로, 보살계(菩薩界)의 분이며, 기원전 286년 마가다 국왕(Magadha、मगध, 摩訶陀国)으로 즉위(卽位)하고, 불교(佛敎)를 전 인도(印度)로 보급시킨 아소카 왕(Ashoka, अशोकः、IAST:Aśokaḥ,阿育王)을 일본(日本)에 태어나게 하기로 계획하여, 다이쇼덴노우(大正天皇:타이쇼천황)의 황태자(皇太子)로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1981년 현재)의 덴노헤이카(天皇陛下:천황폐하)로 계신다.
★다이쇼덴노우(大正天皇:타이쇼천황)의 황태자(皇太子) ★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 바로 이 분인, 쇼와텐노우(昭和天皇)였던 히로히토(裕仁)입니다 ▼
★쇼와텐노우(昭和天皇(소화천황、1901년(메이지(明治34년))4월29일 - 1989년(쇼와(昭和) 64년)1월 7일))은、일본(日本)의 제124대 천황(天皇)이며, ((재위(在位) 기간은, 1926년(쇼와 원년(昭和元年))12월 25일 - 1989년(쇼와(昭和) 64년)1월 7일)이다.
위(諱)는 히로히토(裕仁:유인)。어린 시절의 칭호는 미치노미야(迪宮:적궁)、인장(お印:국새(國璽)는, 와카타케(若竹)★ 이며,
☆이름이 뜻이 참으로 좋네요. 히로히토(裕仁), 우리말로 풀면, 너그럽고 어질다. ^^
●日本国憲法公布 [編集]
1946年(昭和21年)11月3日、日本国憲法を公布した。
1946년(쇼와 21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을 공포했다.
『朕は、日本国民の総意に基いて、新日本建設の礎が、定まるに至つたことを、深くよろこび、枢密顧問の諮詢及び帝国憲法第七十三条による帝国議会の議決を経た帝国憲法の改正を裁可し、ここにこれを公布せしめる。』
『짐(朕)은, 일본국민의 총의(総意)에 기초하여, 신일본건설의 초석(礎)이, 정해진 것을, 매우 기뻐하며, 추밀고문(樞密顧問)의 자순(諮詢:자문) 및 제국헌법 제73조에 의한 제국회의(帝国議会)의 결의(議決)를 거쳐 제국헌법(帝国憲法)의 개정(改正)를 재가(裁可)하고, 여기에 이것을 공포(公布)한다。』
....중략....
●1946年(昭和21年)1月1日の年頭詔書(いわゆる人間宣言)により、天皇の神格性や「世界ヲ支配スベキ運命」などを否定し、新日本建設への希望を述べた。
1946년(쇼화 21년) 1월 1일의 연두초서(이른바 인간선언)에 의해, 천황의 신격성(神格性)이나 「세계를 지배해야 할 운명(世界ヲ支配スベキ運命)」등을 부정(否定)하고, 신일본건설로의 희망을 말했다.
...중략....
●日本国憲法が施行され、天皇は「日本国の象徴であり日本国民統合の象徴」(第1条)
일본국헌법이 시행되어,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총합의 상징」(제1조)로 위치하게 됨.
●1989年(昭和64年)1月7日午前6時33分、十二指腸乳頭周囲腫瘍(腺癌)により崩御(宝算87)。神代を除く歴代の天皇で最も長寿であった
1989년(쇼화 64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십이지장유두주변종양(선암)에 의해 붕어(천황의 연령(寶算) 87세).
신화시대(神代)를 제외한 역대의 천황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출처: http://ja.wikipedia.org/wiki/昭和天皇
그리고, 뒤를 이은 분이, ★아키히토(明仁, 1933년(쇼화8년) 12월 23일~ )은, 현재 재위 중이신, 일본의 천황입니다.
そうした準備が天上界で計画され、その通りに実現し、大東亜戦争が敗戦ということになって完全な自由が与えられた時になって、昭和四十三年、高橋信次先生は、自分が過去世に於いて、インドで釈尊として生まれていたことを悟られたのであった。
그러한 준비가 천상계(天上界)에서 계획되어, 그대로 실현(實現)되고,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 패전(敗戰)하게 되어 완전한 자유(自由)가 주어졌을 때가 되어, 쇼와 43년(昭和四十三年、1968년)에, 다카하시 신지(高橋信) 선생님은, 자신이 과거세(過去世)에서, 인도(印度)에서 석존(釋尊)으로 태어나 있었던 것을 깨달으신 것이었다.
「園頭さん、僕はインドで四十五年間掛かって説いたことを今度は七年間で全部説きつくした」
「소노가시라(園頭)씨, 나는 인도(印度)에서 45년(四十五年) 동안에 걸쳐서 설법한 것을 이번에는 7년 동안에 전부 설명했다」
「僕が説いたことを一から十まで、よくわかっているのは園頭さんだけだ」
「내가 설명한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소노가시라(園頭)씨 뿐이다.」
と言い残されて昭和五十一年(1976年)六月に高橋信次先生は昇天された。
라고 말을 남기시고 쇼와 51년(1976년) 6월에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은 승천(昇天)하셨다.
原始仏典に残されている男女夫婦の倫理と役割については今まで書いてきた。原始仏典に残されているものは、出家という立場で説かれたものである。
원시불전(原始佛典:원시 불교의 경전)에 남아 있는 남녀부부(男女夫婦)의 윤리(倫理)와 역할(役割)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써 왔다. 원시불전(原始佛典)에 남아 있는 것은, 출가(出家)라고 하는 입장(立場)에서 설법하신 것이다.
「正法は、自ら家庭生活を持って説かなければならない。インドの時は異状だったのだ」といって、この度、高橋信次先生という名を以て出生された嘗(かつ)ての釈尊は、今回は家庭を持って男女夫婦の倫理と役割をどのように説かれるのであろうか。次号からはそのことについて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
「정법(正法)은, 스스로 가정생활(家庭生活)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도(印度)의 당시에는 이상(異狀:평소와는 다른 상태나 상황)이었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번에,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출생(出生)하신 과거의 석존(釋尊)은, 이번에는 가정(家庭)을 가지고 남녀부부(男女夫婦)의 윤리(倫理)와 역할(役割)을 어떻게 설법하시는 것인지, 다음 호에서는 그 일에 관해서 쓸까 합니다.
言って置きたいことは、高橋信次先生が説いていられる女性像にまで到達するには、現在の女性の意識がまだまだ高ま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말해 두고 싶은 것은,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이 설법하고 계시는 여성상(女性像)에까지 도달(到達)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여성(女性)의 의식(意識)이 아직도 높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釈尊即ち高橋信次先生は、言い替えるならば「偉大なるフェミニスト(女性崇拝者)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석존(釋尊) 즉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은, 바꿔 말하면「위대한 페미니스트(feminist)((여성숭배자(女性崇拝者))였다(偉大なるフェミニスト(女性崇拝者)であった)」라고 하는 것이다.
★★feminist【명사,형용사】<영어사전> ① 페미니스트 ② 여권 신장론자 ③ 남녀 동권론자
페미니스트(의), 남녀 동권론자(의); 여권 신장론자(의)(※흔히 feminist를 「여성 숭배자」 「여성 예찬론자」의 의미로 쓰고 있는데 실제 영어에는 그런 뜻이 없음에 주의)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런 뜻으로, 사용하나 봅니다. ① 페미니스트 ② 여성 해방론자 ③ 여성 숭배가
....<일본어 사전상에 보면>※
★★★ 위 내용상의 페미니스트(feminist)를, ( ) 안에, 여성숭배자(女性崇拝者)라고 넣은, 사람이, 소노가시라 히로치가 선생님이신지, 이 글을 일본인이신, 그 분이 올리시면서, (여성숭배자)라고 첨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문의 내용상, 그 이전의 말씀들을 쭉 보면, 숭배자 라는 뜻 보다, 남녀평등, 하시니까, ① 페미니스트 ② 여권 신장론자 ③ 남녀 동권론자 , 라고 저는 봅니다.
★좀 이상합니다.
これまで世界の哲学者思想家達が「男女平等論」を唱えている。日本では左翼思想にかぶれた女性運動の思想家達が「男女平等」を唱えてきた。高橋信次先生即ち釈尊の女性論を知られるならば、その人達の男女平等論が如何に次元の低いものであるかが分かられるであろう。
지금까지의 세계의 철학자(哲學者) 사상가(思想家)들이, 「남녀평등론(男女平等論)」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日本)에서는 좌익사상(左翼思想)에 물들은 여성운동(女性運動)의 사상가(思想家)들이「남녀평등(男女平等) 」을 주장해 왔다.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 즉 석존(釈尊)의 여성론(女性論)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들의 남녀평등론(男女平等論)이 얼마나 차원(次元)의 낮은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この中で、私は青春時代「処女の純潔に合うて、誰が魂を浄化せられざる者あらむや」ということを思って来たと書いた。キリストは「不信仰なる夫は、信仰ある妻によって魂を直くせられるのである」と説かれた。私は女性が、もっと女性としての生命の尊さの本質を知ってもらいたいと熱願するものである。
이 내용에서, 저는 청년시절(青春時代)「처녀(處女)의 순결(純潔)을 만나서, 누구든지 영혼(魂)이 정화(浄化)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魂を浄化せられざる者あらむやせられざる者あらむ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왔다고 섰다. 그리스도(Christ)는「믿는 마음을 갖지 않은 남편(不信仰なる夫)은, 신앙(信仰) 있는 아내로 인해 영혼(魂)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魂を直くせられるのである)」라고 설교하셨다. 저는 여성(女性)이, 좀더 여성으로서의 생명(生命)의 존엄(尊さ)의 본질(本質)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열원(熱願:열렬히 원함)합니다.
釈尊やキリストの本当の女性観を知る時、全世界の女性は全て自分が女性として生まれて来たことを幸せだと思わざるを得ないであろう。この世で働き疲れた夫達は、その疲れた心と身体を優しい妻の傍(かたわ)らで癒したいと願うものである。
석존(釋尊)이나 그리스도의 진실한 여성관(女性觀)을 알 때, 전 세계의 여성(女性)은 모두 자신이 여성(自分)으로 태어나온 것을 행복(幸福)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로 지친 남편들은, 그 지친 마음과 몸(身體)를 부드러운 아내(상냥한 아내, 마음씨가 고운 아내 지친:優しい妻) 곁에서 달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이다.
世の女性達よ、どうぞあなたの傍らで夫の疲れた心と身体を憩(いこ)わせて下さいと、私は叫ばずにはいられない。
세상의 여성(女性)들이여, 부디 당신 곁에서 남편의 지친 마음과 몸(身體)을 쉬게 해 주십시오, 라고 저는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9.永遠の父性と永遠の母性
9.영원(永遠)한 부성(父性)과 영원(永遠)한 모성(母性)
「世の女性達よ、あなたの傍らで、夫の疲れた心と身体を憩わせて下さい」と私は前項で書いた。
「세상의 여성(女性)들이여, 부디 당신 곁에서 남편의 지친 마음과 몸(身體)을 쉬게 해 주십시오」라고 저는 전항에서 썼습니다.
これは私自身のこれまでの夫婦生活の体験からの叫びであり、同時代に東洋と西洋とを問わず世界の全男性の心からの願いであると思っているし、それが正法実践の道である。
이것은 저 자신의 지금까지의 부부생활의 체험(體驗)에서의 외침이며, 동시대에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을 막론하고 세계의 모든 남성(男性)의 마음으로부터의 바램(願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정법실천(正法實踐)의 길(道)이다.
婦人公論にある人が『「この妻が死んでくれたら」とか「この夫が死んでくれたら」とか一度も思わなかった人は居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う』と書いていた。死んでくれたらとは思わなくても「この妻の下から」「この夫の下から」逃げ出したい、そうして別な新しい生活をはじめたいと思った人は多いのではなかろうか。実際にそれを実行して蒸発する人達がいる。愛が憎しみに変わる時、人間は心の中で色々な事を想像する。しかし良心があるために、或いは刑を恐れて心に思った通りには実行出来ない。「どうせ結婚するんだったら、もっと素直な優しい妻と結婚するんだった。こんな、我の強い、ヒステリックな、人の心の優しさも理解できない女と結婚して自分は失敗した。今さら別れる訳にも行かないし、こういう女を一生喰わして養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女房の不作は一生の不作」と言う諺を実感として感じている夫も世には多いだろうし、またその反対に「夫の不作は一生の不作」と嘆いて、わずかに「今さら子供を捨てる訳に行かないし」と、夫によって満たされぬ思いを子供に託して悲しく生きているという妻も多いに違いない。「夫婦生活とは我慢の連続である」とか「忍耐の連続である」と言っている人もあるが、確かにそういう面もある。お互いが自己主張をして譲らなかったらいつも喧嘩ばかりでそういう夫婦生活は絶対に永続きしないであろう。どんな夫婦でも、結婚以来一度も我慢しなかったという人はないであろう。
부인공론(婦人公論)에 있는 사람(어떤 사람)이『「이 아내(妻)가 죽어 주었으면」라든가「이 남편(夫)이 죽어 주었으면」이라든가 한 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써 있다. "죽어 주었으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이 아내(妻) 밑에서」「이 남편(夫) 밑에서」도망치고 싶다, 그렇게 해서 특별한 새로운 생활(生活)을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을까? 실제로 그것을 실행(實行)해서 증발(蒸發)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愛)이 증오(憎しみ)로 바뀔 때, 인간은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일을 상상(想像)한다. 하지만 양심(良心)이 있기 때문에, 처벌(刑)을 두려워하여 마음으로 생각한 대로는 실행(實行)할 수 없다. 「어차피 결혼할 바에는, 좀더 솔직한 마음씨가 고운 아내(優しい妻:다정한 아내)와 결혼하는 건데, 이런, 고집 세고(我の強い), 히스테릭한(신경질적인), 사람의 마음의 다정함(優しさ)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나는 실패(失敗)했다. 이제 와서 헤어질 수도 없고, 이런 여자를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라고 하며, 「마누라를 잘못 얻으면 일생 일대의 실패다(女房の不作は一生の不作)」라고 하는 속담을 실감(實感)하며 느끼고 있는 남편도 세상에는 많을테고,
또 그와는 반대로「서방을 잘못 얻으면 일생 일대의 실패다(夫の不作は一生の不作)」라고 한탄하며, 간신히 「이제 와서 자식(子供)를 버릴 수도 없고」라고 하며, 남편에게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思い)을 자식(子供)에게 꿈을 걸며 슬퍼하며 살고 있다고 하는 아내(妻)도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부부생활(夫婦生活)이란 참음(我慢)의 연속(連續)이다.」라든가「인내(忍耐)의 연속(連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히 그런 면도 있다. 서로가 자기주장(自己主張)을 하며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늘 싸움만 하는 그런 부부생활은 절대로 영속(永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부부(夫婦)라고 해도, 결혼 이후 한 번이라도 참지(我慢)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私は昭和四十八年三月、高橋信次先生に帰依した時、これまでの自分の人生を偽らずに反省した。死んでくれたらと思ったことはなかったが、妻と二人の子供を置いて逃げ出したいと思ったことがあった。
저는 쇼와 48년(1968년) 3월에,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에게 귀의(歸依)했을 때, 지금까지의 저 자신의 인생을 거짓없이 반성(反省)했다. 아내가 죽어 주었으면 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아내(妻)와 두 명의 자식(子供)을 남겨두고 달아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もし、心をそのままに映し出す鏡があったとしたら自分でそれを見て自分の心の醜さあくどさに驚かない人はないであろうし(この世を終わってあの世に行くと、それを見せられるのであるが)もし、みんな人の心が見えるものであるとしたら、まともに人の中を歩ける人は一人もいないであろう。
만약, 마음을 그대로 비추어 내는 거울이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것을 보고 자신의 마음의 추악(醜惡)하고 악랄(惡辣)함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이 세상을 끝내고 저 세상으로 가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모든 사람이 마음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면으로 사람들의 모여 있는 곳(人の中)을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その頃どうして妻の下から逃げ出そうかと考えていた。「こんな我の強い女を・・・」という思いもあるにはあったがそれよりも強く私の心を苦しめたのは「こんな立派な女をとても自分は幸せにし得る力はない」という思いであった。妻の前に出ると、私は自分がみじめで仕方がなかった。立派であれば何も別れる必要はないではないかと多くの人は思うのである。しかし、当事者にしてみれば、表面立派だという姿の裏に夫の心をみじめにさびしくさせる何かがあるのである。夫の心が満たされない何かがあるのである。夫は、その何かがこれであるとはっきり口に出して言えないのである。それを言えば、尚一層妻から軽蔑されると思うから尚言えないのである。言えないだけに察してほしいと願うのである。
그 때는 어떻게 아내(妻)의 밑에서 달아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고집 센 여자를・・・(こんな我の強い女を)・・・」이라고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강하게 내 마음을 괴롭힌 것은「이런 훌륭한 여자를 도저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힘은 없다(こんな立派な女をとても自分は幸せにし得る力はない)」고 하는 생각이었다. 아내 앞에 나가면, 저는 제 자신이 비참해서 어쩔 수 없었다. 훌륭하다면 굳이 헤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라고 많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當事者)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표면상으로는 훌륭하다고 하는 모습 속에 아내(妻)의 마음을 비참(참혹)하게 하고 쓸쓸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남편의 마음이 충족되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 뭔가가 이것이라고 분명하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말하면, 오히려 더더욱 아내로부터 경멸(輕蔑)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표면상으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다.
夫が一人でいて、ふと吐息を洩らしたら、また、隣に寝ている夫が、もう寝ていると思ったのにふと溜息をつく夜があったとしたら、夫は心の中で「こんなことを口で言わせるような惨酷なことはしないでくれ、言わせないで、このわしの心をわかってくれ、わしの願いを叶えてくれ」と、胸が張り裂けるような切ない思いをしているのだとわかって欲しい、と思うのである。心の優しい、思いやりの深い、心の襞(ひだ)の細かい妻は直ぐにその夫の心に気づくのであるが、立派過ぎて、しっかりしている、自我の強い、自己本位の妻はその夫の心の動きに気がつかないのである。夫の惨めな切ない思いとは別に、妻が増々立派になると夫はその結婚生活に絶望的になり別れようと思うのである。
남편이 혼자서, 갑자기 한숨(吐息)을 쉰다면, 또,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이, 이미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한숨(溜息)을 쉬는 밤이 있었다고 한다면, 남편은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과 같은 참혹(慘酷)한 짓은 하지 말아 줘, 말하게 하지 말고, 이 내 마음을 알아 줘, 내 바램을 들어 줘」라고, 가슴이 메어 터질 것 같은 애달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고운(인정많은), 동정심(이해심)이 많은(사려 깊은, 배려가 있는), 마음의 주름(心の襞)의 세심한 아내(細かい妻)는 곧바로 그 남편의 마음을 눈치채지만, 너무 훌륭하고, 야무지고(빈틈이 없고), 고집이 쎄고(자아가 강하고), 자기본위(自己本位:자기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함)의 아내(妻)는 그 남편의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지(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남편의 참혹한 애절한 생각과는 달리, 아내가 더욱더 훌륭해지면 남편은 결혼생활이 절망적(絶望的)으로 되어 헤어지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男の悲しさは、男が心に抱いている優しい思い、切ない思いを、そのまま優しい言葉で表現出来ない事である。もし、そうするなら、益々妻から軽蔑されるであろうと思うから、その思いがそのまま言葉にならないと同時に、これまでの永い間の封建的な男尊女卑の生き方に制約されて、夫は妻に哀願出来ないのである。
남자의 슬픔은, 남자가 마음에 품고 있는 다정한 생각, 애절한 생각을, 그대로 부드러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더더욱 아내(妻)에게 경멸(輕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그대로 말이 되지 않음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오랫동안의 봉건적(封建的)인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생활방식에 제약(制約)을 받아, 남편은 아내에게 애원(哀願)하지 못하는 것이다.
だから、いうとすれば、これまでの永い間の世の中のしきたりに従って、心に思っている思いとは全く違った強い言葉と態度でしか表現出来ないのである。すると、夫の心の内面の優しさに気づかない我の強い気の強い妻は、夫の表面的な強い言葉と態度によって増々心を固くしてゆくのである。その妻の頑なな心と態度によって増々夫は悲しみを深くするが、それはまた妻に対しては強い言葉でしか表現されないという悪循環を繰り返してゆく事になる。別れるだけの勇気を持たず別れることは社会的に色々な面で損であると悲しく思い諦めた夫は妻に妥協してゆくことになる。
그래서, 말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오랫동안의 세상의 관례(선례)에 따라서,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강한 말(심한 말)과 태도(態度)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의 마음의 내면의 다정함(優しさ)을 깨닫지 못하는 쓸데없이 고집이 쎄고 기가 쎈 아내(妻)는, 남편의 표면적인 강한 말(심한 말)과 태도(態度)로 인해 더욱더 마음이 완고(頑固)해져 가는 것이다. 그 아내(妻)의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쎈 마음과 태도(態度)로 인해 점점더 남편(夫)은 슬픔이 깊어지지만, 그것은 또한 아내(妻)에 대해서는 심한 말(강한 말)밖에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는 악순환(惡循環)을 되풀이해 가게 된다. 헤어질만한 용기(勇氣)를 갖고 있지 않고 이혼하는(헤어지는) 것은 사회적으로 다양한 면에서 손해(損)라고 슬프게 생각하며 체념(諦念)한 남편은 아내에게 타협(妥協)해 가게 된다.
女心を理解しない頑固な夫に嫁いだ妻はまた、女であるがゆえになお一層悲しく思い諦めて夫に従ってゆくことになるのであろう。中には夫の横暴に敢然(かんぜん・思い切ってするさま)と立ち向かって成功したという人もいる。夫が「この妻とはとても一生は・・・」という思いを持つと同様に妻は「とてもこの人には一生頼れない」という思いを持つのである。
여심(女心:여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完固: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쎈)한 남편에게 시집을 간 아내는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이 슬프게 생각하며 체념(諦念)하며 남편을 따라 가게 될 것이다. 게중에는 남편의 횡포(橫暴)에 엄연히(감연히) 정면으로 맞서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남편이「이 아내(妻)와는 도저히 일생(一生)은・・・」라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처럼 아내는「도저히 이 사람에게는 일생(一生)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私達は夫婦喧嘩がすんだ後、それも四年も五年も経ってから、あの時はどういう考えであったか話し合った。本当は仲直りした直後すぐやれば良いと思うのであるが何か照れくさくて、それにお互いの欠点を、相手に対するその時の不満を言い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し、そんなことを再現しても、どちらももう心を動揺させいがみ合うことはないという完全な理解(愛とは相手に対する完全なる理解である)に到達するには、私達には四、五年という年数が必要であった。
우리들은 부부싸움을 한 후에, 그것도 4년이나 5년이나 지나고나서, 저 때는 어떤 생각이었냐고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은 화해(和解)한 직후에 바로 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웬지 서먹서먹하고, 그것에 서로의 결점(缺點)을, 상대에 대한 그 때의 불만(不滿)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런 일을 재현(再現)해도, 어느 것이나 이제는 마음을 동요(動搖)시켜서 짜그락거리는 일은 없다고 하는 완전(完全)한 이해(理解)((사랑(愛)이란 상대에 대한 완전(完全)한 이해(理解)이다))에 도달(到達)하는 데에는, 우리들에게는 4년, 5년이라는 햇수(年數)가 필요했다.
私が妻を「自分には立派過ぎる」と思ったのはこうである。
제가 아내(妻)를「저 자신에게는 너무 훌륭하다(自分には立派過ぎる)」고 생각한 것은 이러하다.
復員してみたら両親も弟妹も全部死んでいた。米軍による大空襲で鹿児島市は殆んど焼け野原になってしまった。昭和二十年六月十八日夜である。ついでにこのことも書いて置こう。その頃、私は中国広東省順徳県大良市にいた。マカオ近くにいて、決戦に備えるためにそこへ集結した。既に正月には日本は無条件降伏するというニュースがマカオから流れて来ていたから、私達は広東市を中心としての南支派遣軍の一大決戦の日を覚悟していた。ある晩、私は、上下の歯が全部抜けて、口の中で小さくジャリジャリになって、とても気色の悪い夢を見た。ハッと目が醒めると身体は疲れて寝汗をかいていた。歯が欠ける夢は身内の者が死んだ夢だということを聞いていたことがあったので「もしかしたら」と思ったが、まさか鹿児島が空襲を受けることはあるまいと心の中で否定した。それから数日経った。その夢がやはり気になって仕方がなかった。広東で発行している中国新聞が手に入った。見るとそこに「米軍の大空襲で鹿児島市は壊滅した」と書いてある。もしかしたらみな死んでいるのかもと思ったが、人間誰しも自分が不幸であるとか不幸なことは思いたくない。田舎には親戚もあることだし、出征する時既に父は糖尿病で寝たっ切りであったからそうなる前に田舎に疎開していたであろうと、良い方へ思い直していた。
복원(復員)해서 보았더니 양친(兩親)도 제매(弟妹:남동생과 여동생)도 전부 죽어 있었다. 미군(米軍:美軍)에 의한 공습(空襲)으로 가고시마 시(鹿兒島市)는 거의 초토화되어(허허 벌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쇼와 26년(1945년) 6월 18일 밤이다. 하는 김에 이 일도 써 두려고 한다. 그 무렵, 저는 중국 광동성 순덕현 대량시(大良市:Daliang City)에 있었다(私は中國廣東省順徳縣大良市にいた). 마카오(Macao;澳門) 근처로 가서, 결전(決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집결(集結)했다. 이미 정월(正月)에는 일본은 무조건항복(無條件降伏)한다고 하는 뉴스가 마카오(Macao)로 흘러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광동시(廣東市)를 중심으로 한 남지나해(南支:남중국해) 파견균(派遣軍)의 일대 결전(一大決戰)의 날을 각오(覺悟)하고 있었다. 하룻밤(어느날 저녁)에, 저는, 위아래 치아가 전부 빠져서, 입안에서 와그작거리게 되어, 아주 기분이 나쁜 꿈을 꿨다. 아하고 잠에서 깨자 신체(身體)는 피곤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치아가 빠지는 꿈은 한집안(身内) 사람이 죽는 꿈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혹시나(もしかしたら)」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가고시마(鹿兒島)가 공습(空襲)을 받을 일이야 없겠지라고 마음속으로 부정(否定)했다. 그리고나서 수일이 지났다. 그 꿈이 역시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광동(廣東)에서 발행하고 있는 중국신문(中國新聞)이 손에 들어왔다. 보자 거기에「미군(米軍:美軍)의 대공습(大空襲)으로 가고시마 시(鹿兒島市)는 파멸(壞滅)했다.」고 써 있다. 혹시나 모두 죽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불행하다든가 불행(不幸)한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는다. 고향(田舎:시골)에는 친척도 있고, 출정(出征)할 때 이미 아버지는 당뇨병(糖尿病)으로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전에 시골(田舎)로 소개(疎開:피난)하고 있을 것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 바꾸고 있었다.
※복원[復員] ①전시 체제에서 평상 체제로 돌려져 복무가 해제됨.
※공습[空襲] ①항공기를 이용하여 공중에서 총격이나 폭격을 함.
※마카오[Macao;澳門(아오먼)] ①중국 남동부 주장 강 하구 서쪽 연안에 있는 도시.
※소개[ 疎開:疏開] ①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
復員してみたら現実となっていた。妻だけが一人、実家の母の看病に帰っていて助かったのであった。帰る家もなくなってしまった。妻の実家に身を寄せるしか仕方がなかった。肩身の狭い思いをしながら世話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食糧事情の悪い時であり、農地改革があり、小作地を全部手放して義父も六十才になって初めて農業をすることになった。それまでは大きく商売をやり、その土地ではチョットした名士であったから自分で農業したことはなかったのが、六十才になって初めて鍬を持って農業を始めたのであるから辛かったに違いない。私も初めて義父を手伝って農業した。慣れない仕事であるしそれまで力仕事をしたことがなかったから少し腰をかがめて仕事をすると腰が痛くなって、身体は大きくても義父程にも仕事が出来なかった。「身体ばかり大きくて、たったそれだけしか仕事が出来ないのか」と言われると、出来ないながらも精一杯やっているだけにその言葉が情けなかった。両親が生きていてくれたら・・・・・・とまたしても思うのであった。
복원(復員)해서 보았더니 현실(現實)이 되어 있었다. 아내만 홀로, 친정집(實家)의 어머니를 간병(看病)하려 돌아가 있어서 목숨을 건졌던 것이었다. 돌아갈 집도 없어져 버렸다. 아내의 친정(實家)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쥐여지내면서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식량 사정이 나쁠 때이며, 농지개혁(農地改革)이 있고, 소작지(小作地)를 전부 남의 손에 넘기고 장인(義父)도 60세가 되어 처음으로 농사(農業)를 짓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크게 장사를 하며, 그 고장(土地)에서는 상당한 명사(名士:유명한 사람)였기 때문에 스스로 농업(農業)을 한 적은 없던 것이지만, 60세가 되어 처음으로 괭이(鍬)를 들고 농업을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저도 처음으로 장인(義父)을 도와 주며 농사(農業)을 지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고 육체노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자 허리가 아파서, 신체(身體)는 건장해도 장인(義父) 만큼도 일을 하지 못했다. 「덩치만 크고, 고작 이것밖에 일을 하지 못해? 」라고 말을 하자, 잘 하지 못하면서도 있는 힘껏 일하고 있는만큼 그 말이 몰인정했다. 양친(兩親)이 살아 있어 주었으면・・・・・・이라고 또다시 생각했다.
※소작지[小作地] ①소작인이 지주에게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급하는 땅.
義父も初めて農業をするのだし、食料はないのであるし、私が働き甲斐がないことが歯痒かったに違いない。そのことは充分に分かりながらも、出来ないながらも精一杯やっているだけに思いやりのない言葉が辛かった。人間は弱り目の時、失敗した時など叱られる言葉よりは励ましの優しい言葉が欲しいものである。農具の扱い方が分からずについ壊したりするとまた叱られるのであった。
장인(義父)도 처음으로 농사(農業)를 짓는 것이고, 식료(食料)는 없기 때문에, 제가 일하는 보람이 없는 것이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아서 마음이 초조해졌음에 틀림없다. 그 일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잘 하지 못하면서도 있는 힘껏 일하고 있는만큼 인정머리 없는 말이 괴로웠다. 인간은 어려울 때(설상 가상일 때:弱り目の時), 실패했을 때 등에 욕 먹는(꾸중을 듣는) 말 보다는 격려의 다정한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 농구(農具:농기구)의 취급방법을 알지 못하고 그만 부수거나 하면 또 꾸중을 듣는 것이었다.
会員の人でよく「私を叱って下さい」「何でもずけずけ言って下さい」という人がある。
회원의 사람으로 자주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私を叱って下さい)」「무엇이든(말하기 어려운 것을) 주저없이 말해 주십시오(何でもずけずけ言って下さい)」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しかし、私は叱らない、言わない。それはこの時の叱られた時の辛さ、づけづけと心の中にまで踏み込んであれこれ言われた時の悔しさ、悲しさが身に沁み込んでいるせいかも知れない。あまり悔しく悲しいと、夜、月を仰いで泣いたこともある。どんな人にでも、優しい励ましの言葉をかけて上げられるような人になりたいそう思うようになったのは義父のお蔭かも知れない。
하지만, 저는 꾸짖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때 꾸중을 들었을 때의 괴로움, 툭툭 잔소리를 퍼부우며(づけづけと) 마음속에까지 쑤셔 넣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들었을 때의 분함(분통), 슬픔이 마음(身)에 스며들어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너무 분하고 슬퍼서, 밤에, 달을 쳐다보며 울었던 적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라도, 다정한 격려의 말을 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장인(義父) 덕분인지도 모른다.
義父の為に、出来る限りのことはやってきたが長女が生まれて来ると、ただ食べさせて貰うだけということでは子供の必要な物も買ってやれないし、自分で生きて行く道を探さなければならなくなってきた。両親や弟妹達が死んだ防空壕のあった鹿児島の土地へは住むに耐えられなかった。
장인(義父)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일을 해 왔지만 장녀(長女)가 태어나자, 단지 먹고 살아가게 해 주는 것뿐이라고 하는 것으로는 자식(子供)에게 필요한 물건도 사 주지 못하고 해서, 나 스스로 살아 갈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게 되기 시작했다. 양친(兩親)이나 제매(弟妹:남동생과 여동생)이 죽은 방공호(防空壕)가 있던 가고시마(鹿兒島)의 고장(土地)에서는 살기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義父と叔父の協力によって未利用資源製粉工場を始めた。昭和二十三年、政府は食糧不足を解消するため、食べられる物は何でも食べようという姓策を決めた。サツマイモの茎を乾したもの、キュウリやカボチャの茎を乾したもの、よもぎの乾したもの等、それを高速度粉砕機で粉にして、メリケン粉に混ぜてパンにしたり、麺にしようと言うのである。政府の許可を貰って始めた。製粉にして食糧事務所に納入するのである。一年近くやっている内にアメリカの小麦が放出されて少し食糧事情も良くなりかけ、未利用資源の製粉は家畜飼料に回すということになったので、新しく機械を入れて昭和二十五年から製粉製米製麺向上に切り替えた。面白いように儲かった。設備を増やした。困った人にはタダで製品を上げたり食べさせたりした。
장인(義父)과 숙부(叔父)의 협력에 의해서 아직 이용하지 않은 자원제분공장(資源製粉工場)을 시작했다. 쇼와 23년(1948년), 정부(政府)는 식량부족을 해소(解消)하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으라고 하는 방책(姓策)을 결정했다. 고구마(薩摩芋) 줄기를 말린 것, 오이(胡瓜)나 호박(南瓜) 줄기를 말린 것, 쑥(蓬)을 말린 것 등, 그것을 "고속도 분쇄기(高速度粉碎機)로 갈아서, 밀가루(米利堅粉)에 섞어서 빵을 하거나, 면(麺:국수)로 하라"고 하는 것이다. 정부(政府)의 허가(許可)를 받기 시작했다. 제분(製粉)를 해서 식량사무소(食糧事務所)에 납입(納入)하는 것이다. 1년정도 하고 있는 사이에 미국의 소맥(小麥:밀)이 방출(放出)되어 조금 식량사정(食糧事情)도 좋아지지 시작하여, 아직 이용하지 않은 자원(資源)의 제분(製粉)은 가축사료(家畜飼料)로 돌리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계(機械)를 들여서 쇼와 25년(1950년)부터 제분제미제면(製粉製米製麺:밀가루나 쌀이나 국수를 만듦) 향상(向上)으로 바꾸었다. 쏠쏠하게 벌이가 되었다. 설비(設備)를 늘렸다. 가난하여 살기가 힘든 사람(困った人:딱한 사람)에게는 그냥 제품(製品)을 드리거나 먹고 살게 해 주거나 했다.
その頃、私は生長の家に熱心であった。講師を招いて講演会を開いた。費用は全部一人で出した。生長の家には 「無限供給の法則]という教義がある。「神はこの自然をタダで人間に与えていられる。与え放しである。それが愛である。報いを求めずに与える事である。呼吸も吸ってばかりいたのでは息が詰まってしまう。吐くからまた吸えるのである。食べる物でも、口から入れるばかりでお尻から出すことをしなかったら糞詰まりになって食うことが出来なくなる。食うためにはお尻から出さなければいけない。出せば入るのである。大いに出しなさい」
그 무렵에, 저는 세이쵸우노이에((生長の家:신도(神道) 계열의 신종교))에 열심이었다. 강사(講師)를 초빙하여 강연회(講演會)를 열었다. 비용(費用)은 전부 혼자서 내놓았다. 세이쵸우노이에((生長の家)에는, 「무한공급(無限供給)의 법칙(法則)]이라고 하는 교의(教義)가 있다. 「신(神)은 이 자연(自然)을 공짜(タダ)로 주고 계신다. 계속 주시고 있다. 그것이 사랑(愛)이다. 보답(報い)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호흡(呼吸)도 들이마시기만 하면은 숨이 막혀 버린다. 내쉬고나서 다시 들이마시는 것이다. 먹는 것도,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고 대변을 보지(お尻から出す) 않으면 변비에 걸려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똥누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을 내면 들어오는 것이다(出せば入るのである)。많이 돈을 내십시오(大いに出しなさい).」☜ 이상한 논리네요. ^^
今になると智慧が足りなかったと思うのであるが、その頃は全く疑うことをせずにそのまま信じていたから「出せば入るのだ」と気前良く私は出した。一人でも沢山の人を喜ばせるとその喜びは自分に返って来るという谷口教祖の言葉を信じてその通りにやった。入った金は困った人のためにみな出した。出した後で戦後第一回の税金攻撃の槍玉に挙げられた。これは同業者からの中傷投書に因るものでもあった。分不相応の税金だと思ったがしっかりした帳簿を付けていなかった為にそれを反論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日頃は助けられましたと言っていた人も金を貸してはくれなかった。ついに滞納で差押処分を受けた。「出せば入る」と信じて私と同じように失敗した人が沢山いる。
지금에 와서 보면 지혜(智慧)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전혀 의심(疑心)을 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돈을 내면 들어오는 것이다(出せば入るのだ)」라고 해서 후하게 저는 돈을 냈다. "혼자라도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 기쁨은 자기에게 되돌아온다"고 말하는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 교조(敎祖)의 말을 믿고 그대로 했다. 들어온 돈은 가난하여 살기가 힘든 사람(困った人:딱한 사람)을 위해서 모두 냈다. 돈을 낸 후에 전후(戰後:세계 제2차 대전 후) 제1회의 세금공격(稅金攻擊)의 대상(槍玉)으로 삼게 되었다. 이것은 동업자(同業者)로부터의 중상모략(中傷)의 투서(投書)에 의한 것이었다. 엉뚱한 세금(分不相応の税金:격에 맞지 않는 세금)이라고 생각했지만 착실하게 장부(帳簿)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반론(反論)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있던 사람도 돈(金)을 빌려 주지 않았다. 마침내 체납(滯納)으로 차압 처분(差押處分)을 받았다. 「돈을 내면 들어온다(出せば入る)」고 믿어서 저처럼 실패(失敗)한 사람이 많이 있다.
★종교 단체에 헌금을 많이 한 분이시네요^^★
工場からの収入だけでは間に合わなくなり、都城市の戦前の得意先に出掛けて品物を融通してもらって一週間ばかりの間に税金分を稼いだ。父が残してくれた信用のお蔭であった。
공장(工場)에서의 수입(收入)만으로는 돌려맞추지 못하게 되어, 미야코노죠우 시(都城市)의 단골 거래처에 가서 물품을 융통(融通) 받아서 일주일가량 동안에 세금분(税金分)을 벌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주신 신용(信用) 덕분이었다.
都城市からの帰途、私は車中で妻に対しては苦労を掛けるだけで何もしてやっていないことを思い続けていた。鹿児島駅の近くの易居町に行って大島紬の着物を買った。着物のない時分で易居町一帯は古着店が多かった。新しい物はスフで着ればすぐ破れ、靴下なども一ぺん穿くと穴が空いて穿けなくなったから、新しい着物よりも丈夫な古着をみなが喜んで買った。その頃、大島紬など着ている人はなかったが、母が私が二十才になった時、大島紬の上下の揃いを作ってくれて紬の良さを知っていたし、これなら妻も何を貰うよりも喜んでくれるであろうと、喜ぶ顔を想像して帰って妻の前に出した。包みを開けて「ああ、こんな高いものを・・・」と喜んでく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た。それが私のせめてもの妻に対する愛の表現であると思った。
미야코노죠우 시(都城市)에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차안에서 아내(妻)에 대해서는 고생만 시키고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가고시마역(鹿兒島驛) 근처의 야스이쵸(易居町:야스이쵸 마을)로 가서 오오시마츠무기(大島紬:오오시마 명주: 섬세한 무늬가 특징)인 기모노(着物:일본옷)를 샀다. 기모노(着物:일본옷)가 없을 때라서 야스이쵸(易居町) 일대는 헌옷집이 많았다. 새로운 물건은 스프(인조 섬유)라서 입으면 금방 찢어지고, 양말(靴下) 같은 것도 한 번 신으면 구멍이 나서 신을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기모노(着物:일본옷)보다도 튼튼한 헌옷을 모두가 기꺼이 샀다. 그 시절, 오오시마츠무기(大島紬:오오시마 명주) 등을 입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머니(母)가 제가 20살이 되었을 때, 오오시마츠무기(大島紬:오오시마 명주)로 짠 상하의 한벌(세트)를 만들어 주셔서 명주(紬)가 좋음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라면 아내(妻)도 무엇을 받는 것 보다도 기뻐해 줄 것이라고, 기뻐하는 얼굴을 상상(想像)하며 귀가해서 아내(妻) 앞에 내놓았다. 보따리를 풀고서「아아, 이렇게 비싼 것을 ・・・(ああ、こんな高いものを・・・)」이라고 하며 기뻐해 줄 것을 기대(期待)하고 있었다. 그것이 저의 최소한의 아내(妻)에 대한 사랑의 표현(表現)이라고 생각했다.
包みを開いた妻は喜ばなかった。つつっと私の前に押しやると、ぶすっとして「こんな物を買う金があるなら税金を払って貰えば良かったのに・・・」全く予期しなかった冷たい言葉に私は腹が立った。払わなければならない税金があることは充分に承知の上で、苦しいけれどもその中から、これまでの妻の苦労に報いよう。これだけ買ったからといって税金が払えない訳ではないと、充分に計算した上でのことであったが、妻は私の優しい思いやりを少しも理解しようとはしなかった。
보따리를 푼 아내는 기뻐하지 않았다. 쑥 제 앞으로 내밀며, 무뚝뚝하게「이런 것을 살 돈이 있으면 세금(税金)을 지불했으면 좋았을텐데・・・」전혀 예기치 않았던 냉담한 말에 저는 화가 났습니다.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금(税金)이 있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 괴롭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여태까지의 아내의 노고(고생)에 보답하겠다. 이것만 샀다고 하며 세금(税金)를 지불하지 않을 것은 아니라고, 충분히 계산(計算)하면서 산 것인데, 아내(妻)는 저의 배려를 조금도 이해(理解)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おおしまつむぎ [大島紬 ] 오오시마 명주(紬)★
가고미마 현(鹿兒島縣) 아마미오오시마(龍美大島) 및 가고시마 시(鹿兒島市) 주변에서 생산되는 명주. 오리시메(織締め, 방염 기술의 하나)에 의한 섬세한 무늬가 특징. 토속적인 다정큼나무(車輪梅, 쪽나무: 장미과의 상록관목)라고 불리는 식물의 추출액과 진흙 속의 철염(鉄塩)과 진갈색에 물들인 도로소메(泥染:진흙염색)가 전통적 기법. 지금은 남색이나 여러 색깔의 실을 사용한 오이오오시마(藍大島) ‧이로오오시마(色大島)도 있다. 모조품에 대해서 혼바오오시마(本場大島)라고도 함.
ともかくその頃、私の工場で働く女工さんの月給が九円であった頃の五万円という税金である。とてもその当時としては大変な金であった。どっちみちそれだけの税金を払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れば、大島紬代の三十五円という金はどうにでもなることであったし、苦しくてもここで愛の印として形に現わして表現して置くことは、これからも共に苦労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妻へのいたわりであり、また、共に苦労をして欲しいという心からの願いであったが、女というものは、全てを男に話させなくとも男の心を判ってくれる優しさを持つ者であるという先入観、それは女への買いかぶりであったかも知れないがそういう心を持っていた私は、生来の口下手もあってそういう気持ちを何も話さないままに「おい、いいものを買ってきたぞ」と言っただけで妻の前に差し出したのであったから、差押の白紙を張られて税金のことで「夫はこれだけの大変な税金をどうするんだろう」と心配していた妻にしてみれば、それまで困った人があると何でもかんでもくれてしまって後のことを考えない人の良い夫を「これでは一生頼りにならないかも知れない」と思っていただけに、ホイホイと何でも買って来る夫の気の良さがいささか不安にも感じられてそう言った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はそれからずっと後になってその時のことを話し合って分かったことであったが、しかし、折角の心遣いを素直にどうして受け入れてくれないのか、男心の優しさをどうしてこの女は判ってくれないのか、という思いが一瞬起きて来て、その時、私は「この妻と別れて、もっと男心のわかる女を探そう」と思ったことがあった。今でも「男心の優しさが判らない妻は愚妻である」と思ているが、女に言わせれば「妻の夫を思う心のいじらしさが判らない夫は愚夫である」というであろう。
어쨓든 그 시절에, 저의 공장(工場)에서 일하는 여공(女工さん)의 월급이 9엔이었던 당시의 5만엔이라고 하는 세금(税金)이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이었다. 어차피 그 정도의 세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면, 오오시마 명주(大島紬) 대금의 35엔이라고 하는 돈(넉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고급옷)은 어떻게든 되는 일이었고, 괴로워도 여기서 사랑의 증표(愛の印)로 모습으로 나타나며 표현해 두는 것은, 앞으로도 함께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내(妻)에 대한 위로(慰勞)이며, 또, 함께 수고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바램이었는데, 여자(女)라고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남자에게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알아 주는 알아 주는 다정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선입관(先入觀), 그것은 여자(女)에 대한 과대 평가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저는, 타고난 말주변도 없어서 그런 기분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로, 「당신(여보), 좋은 것을 사왔는데(おい、いいものを買ってきたぞ)」라고 하는 말만하며 아내 앞에 내밀었던 것이기 때문에, 차압 백지(差押の白紙:압류딱지)가 붙어 있는 세금(稅金)의 일로「당신(夫)은 이 정도의 큰 세금을 어떻게 할 거에요?」라며 걱정하고 있던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가난하여 살기가 힘든 사람(困った人:딱한 사람)이 있으면 이것저것 모조리 줘버리고 난 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좋은 남편을「이래서는 일생에 의지할 사람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これでは一生頼りにならないかも知れない)」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뭐든지 가볍게 사오는 남편의 기분의 좋음이 약간 불안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그 후 훨씬 뒤에 가서 그 때의 일을 서로 말하며 알았던 것이었지만, 하지만, 모처럼의 배려(配慮)를 속직하게 어째서 받아들여주지 않는가, 남자의 마음의 다정함(優しさ)을 어째서 이 여자는 알아주지 않는가, 라고 하는 생각이 한순간 일어나서, 그 때, 나는「이 아내(妻)와 헤어지고, 좀더 남자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여자를 찾겠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지금까지도)「남자의 다정함을 모르는 아내는 어리석은 아내이다(男心の優しさが判らない妻は愚妻である)」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자에게 말을 들으면,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의 애처러움을 모르는 남편은 어리석은 남편이다(妻の夫を思う心のいじらしさが判らない夫は愚夫である)」라고 말할 것이다.
私達夫婦の間にひびが入ってしまったのは、私が生長の家の教えをそのまま信じて「出せば増える」と、儲けた金も全部人にくれてしまったことにあった。私が施しをしたからといって、いよいよ私が税金で困った時に誰一人として「そんなに困っていられるのなら」と言って金を貸そうという人はなかった。私が盲目的に信じてしまったのが間違いであって、妻の判断が正しかったのであった。
우리들 부부 사이에 금이 가 버렸던 것은, 제가 세이쵸우노이에(生長の家)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돈을 내면 수입이 늘어난다(出せば増える)」고 해서, 번 돈을 전부 남에게 줘 버렸던 것에 있었다. 내가 보시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서, 점점 제가 세금(税金)으로 가난하여 살기가 힘들 때에 누구 한 사람도, 「그렇게 궁색한 거야(그렇게 돈에 쪼들리는 거야: 그렇게 생활이 곤란한 거야)」라고 하며 돈을 빌려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맹목적으로 믿어 버렸던 것이 잘못이며, 아내의 판단(判斷)이 올바른 것이었다.
この事は私に経済生活のバランス(調和)の大事さを教えてくれた。生長の家の「無限供給の法則」「人のために出せば増える」という収入と支出のバランスを全く考えない繁栄の法則を信じたがために失敗してしまったという人は非常に多い。信仰生活といっても経済の調和を大事にし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考えはこの時に持った。
이 일은 저에게 경제생활(經濟生活)의 밸런스(balance)((調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세이쵸우노이에(生長の家)의「무한공급의 법칙(無限供給の法則)」「남을 위해서 돈을 내면 수입이 늘어난다」고 하는 수입과 지출의 밸런스(조화, 균형)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번영(繁榮)의 법칙(法則)을 믿었기 때문에 실패해 버렸다고 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고 말해도 경제의 조화(調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은 이 때에 가졌다.
そうして高橋信次先生に昭和四十八年に帰依した時に「信仰には、心と肉体と経済の調和、健康が大事である」と教えられた時に「ああ、これが本当だ」とすぐその正しさを理解できたのであった。
그렇게 해서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에게 쇼와 48년(1973년)에 귀의했을 때에, 「신앙(信仰)에는, 마음(心)과 육체(肉體)와 경제(經濟)의 조화(調和), 건강(健康)이 중요(大事)하다.」라고 가르침을 받았을 때에, 「아아(ああ), 이것이 진짜(本當)이다.」라고 곧바로 옳음(正しさ:올바름)을 이해(理解)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そのことがあるまで、私は、特に鹿児島は男尊女卑の風の強い所であったし「女は黙って男について来ればいいのだ」「女は男のすることに口出しするな」という封建的な考えを強く持っていたのであったが「夫は妻のいう事を素直に聞かなければいけない、妻は夫のすることを冷静に客観的によく見ているものなんだな」ということを知ったのであった。
그 일이 있기까지, 저는, 특히 가고시마(鹿兒島)는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습(風)의 강한 곳이었고, 「여자는 잠자코 남자를 따라 오면 좋은 것이다(女は默って男について來ればいいのだ)」「여자(女)는 남자(男)가 하는 일에 말참견하지 마라」라고 하는 봉건적(封建的)인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던 것이었지만, 「남편은 아내가 말하는 것을 솔직하게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며、아내는 남편의 하는 일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잘 보고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었다.
信仰する人達の陥りやすい欠点がある。
それは、経済生活に失敗すると「まあ、金は損しても、心の勉強をしたからいいじゃないか」と安易に逃避してしまう事である。例えば「あの人は信仰に熱心だからと思って金を貸したが、結局返してもらえなかった」というような時、後になって、人に金を貸す時は社会の慣習と法律の定める所に従って賃借関係は明確にして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に気づく。また交通事故などあると「大難が小難で済んで良かった。信仰していなければ死ぬ所だった。信仰のお蔭だ」といって、事故を起こさないようにするにはどうすればいいかという、当然前もって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勉強せず、何時も問題が起こってしまってから後手々に物事を考えることが欠点である。それは「信仰していれば何事も良くなる」という間違った他力信仰の欠点である。
신앙(信仰)하는 사람들의 빠지기 쉬운 결점(缺點)이 있다.
그것은, 경제생활(經濟生活)에 실패하면, 「뭐, 돈은 손해를 봤어도, 마음 공부를 했으니 좋지 않느냐?」라고 안이(安易)하게 도피(逃避)해 버리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은 신앙(信仰)에 열심(熱心)이니까라고 생각해서 돈을 빌려 줬지만,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때, 나중에,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는 사회의 관습(慣習)과 법률(法律)의 정한 바에 따라서 임차관계(賃借関係)는 정확하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교통사고(交通事故)라도 일어나면, 「큰 재난(大難)이 작은 재난(小難)으로 끝나서 좋았다. 신앙(信仰)하고 있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다. 신앙(信仰) 덕분이다. 」라고 하며, 사고(事故)를 일으키지 않게끔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당연히 미리 주의(注意)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공부하지 않고, 언제나 문제(問題)가 일어나 버리고 난 후에 각각의 일(物事:일체의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 결점(缺點)이다. 그것은, 「신앙(信仰)하고 있으면 뭐든지 좋아진다」고 하는 잘못된 타력신앙(他力信仰)의 결점(缺點)이다.
釈尊は「苦しみの原因は無明にある」と言われた。「無明」とは「知るべきことを知らない」即ち「智慧が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いくら神仏を念じても、自動車の運転方法を知らなかったら、ただ信じているというだけでは自動車は動かない。経済には経済の法則がある。いくら信仰していても、経済、経営の法則を知らなければ失敗するに決まっている。だから、正しい信仰即ち正法を信ずる人達は、前向きに積極的に、人生に必要な諸問題についてはどしどし勉強して実践して行くのである。即ち自力で勉強することは勉強し、実践することは実践して、その上で天地創造の神を信ずることである。
석존(釋尊)은「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에 있다」라고 말했다. 「무명(無明)」이란「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知るべきことを知らない)」 즉, 「지혜(智慧)가 없다(智慧ない)」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신불(神佛)에게 빌어(念じる)도, 자동차(自動車)의 운전 방법(運轉方法)을 모른다면, 단지 믿고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자동차(自動車)는 움직이지 않는다. 경제(經濟)에는 경제의 법칙(法則)이 있다. 아무리 신앙(信仰)하고 있어도, 경제(經濟), 경영(經營)의 법칙(法則)을 모르면 실패(失敗)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信仰) 즉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들은, 진취적(進就的)으로 적극적(積極的)으로, 인생(人生)에 필요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공부하며 실천(實踐)해 가는 것이다. 즉 자력(自力)으로 공부할 것은 공부(勉強)하고, 실천(實踐)할 것은 실천하고, 게다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신(神)을 믿는 것이다.
他力信仰で、信じていれば何でも良くなると拝んでばかりいて、人生に必要な勉強はせず、何時も問題が起こってから後悔し、事前に知っていれば損害も損傷も受けずに済んだのに、これだけの損害、損傷で済んだのも信仰のお蔭だといっているような信仰は正しい信仰ではないのである。正法を信ずる人達は常に前向きで明るく積極的である。他力信仰の間違った信仰をしている人達は、逃避的で暗く消極的である。
타력신앙(他力信仰)이며, 신앙하고 있으면 뭐든지 좋아진다고 하며 합장 배례만하며, 인생에 필요한 공부(勉强)는 하지 않고, 언제나 문제가 일어난 후에 후회(後悔)하고, 사전에 알고 있으면 손해(損害)도 손상(損傷)도 입지 않고 끝날텐데, 이 정도의 손해(損害), 손상(損傷)으로 끝난 것도 신앙(信仰)의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신앙(信仰)은 올바른 신앙(信仰)이 아닌 것이다. 정법(正法)를 믿는 사람들은 항상 진취적(前向き)이며 밝고 적극적(積極的)이다. 타력신앙(他力信仰)의 잘못된 신앙(信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도피적(逃避的)이며 어둡고 소극적(消極的)이다.
私が妻に対して「夫の優しい心を理解しない出来過ぎた女だ」と思って、一時的にしろ
「こんな出来過ぎた立派な女とは別れたい」と恐れを感じたのは私が間違った信仰をしていたからであった。
妻にしてみれば、五万円の税金を早く払って差押の白紙を剥がして心を楽にして貰いたいという私に対する愛があるからこそ、「そんな着物は欲しくない、大島紬を着て、身を飾るような時でもない。そうする気にもなれない。早く税金を払って楽になって下さい」といった訳であった。
제가 아내(妻)에 대해서, 「남편의 다정한 마음(優しい心)을 이해하지 못하는 과분한 여자(女)다」라고 생각해서, 그때는 하려고(一時的にしろ)
「이런 과분한 훌륭한 여자와는 헤어지고 싶다」며 두려움(공포)를 느꼈던 것은 제가 잘못된 신앙(信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입장에에서 보면, 5만엔의 세금(税金)을 빨리 지불하고 차압 백지(差押の白紙:압류딱지)를 떼서 마음을 편안하게 지냈으면 싶다고 하는 저에 대한 사랑(愛)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모노(着物:옷)는 바라지 않고, 오오시마츠무기(大島紬:오오시마 명주)를 입고, 몸을 치장할 때도 아니다. 그럴 기분도 아니다. 빨리 세금(税金)을 지불하고 편안해지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永い夫婦生活の間には、お互いの考え方の違いから、どちらもがそれぞれ正しいと思っていながら考え方がずれて喧嘩することがある。お互いに譲らないで遂に別れるという人もあれば、すれ違ったままで一生を淋しく暮らすという夫婦もあるし、それでは何のために生きているのかわからない。
오랜 부부생활 동안에는, 서로의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둘 다 각자가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사고방식이 빗나가서 싸움을 하는 일이 있다. 서로가 양보(讓步)하지 않고 마침내 헤어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의견이 엇갈린 채로 일생을 쓸쓸하게 지낸다고 하는 부부도 있고, 그래서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一時、喧嘩して「こんな夫(妻)は死んでしまえ」と思ったり、また「別れたい」と思ったことはあったとしても、お互いに相手の気持ちを理解し(それが愛である)自分一人では成し遂げられない魂の成長をしてゆく所に人生の意義があり目的があり、そこに真の人生の喜びがあるのである。
한때(그때:잠시), 싸움(喧嘩:말다툼)을 하고, 「이런 남편(夫)(아내妻))는 죽어 버리면 좋겠다(死んでしまえ)」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헤어지고 싶다(別れたい)」고 생각한 적은 있다고 해도, 서로가 상대의 기분을 이해하고((그것이 사랑이다)), 자기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영혼(魂)의 성장(成長)을 해 가는 바에 인생(人生)의 의의(意義)가 있고 목적(目的)이 있으며, 거기에 참된 인생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前もって如何に良く知ろうとしていても、全てを知り尽くすということは出来ないから時には失敗するのもまた人生である。大事なことは同じ失敗を二度とし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失敗を失敗のままで終わらせ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사전에 아무리 잘 알려고 해도, 모든 것을 죄다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때로는 실패(失敗)하는 것도 또한 인생(人生)이다. 중요한 점은 똑같은 실패(失敗)를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실패(失敗)를 실패(失敗)인 채로 끝나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夫と妻とが、人間的に成長してゆくために心得なければならない大事なことがある。このことを知らない為に世の多くの夫婦は悩むのである。この事が分かったら、世の多くの夫婦の問題も、またそこから派生する子供の問題もみな解決してゆくであろう。
남편과 아내가, 인간적(人間的)으로 성장(成長)해 가기 위해서는 수칙(守則)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일(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많은 부부(夫婦)는 괴로워하는(고민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안다면, 세상의 많은 부부(夫婦)의 문제(問題)도, 또한 거기에서 파생(派生)하는 자식(子供)의 문제(問題)도 모두 해결(解決)해 가게 될 것이다.
それは何か。
그것은 무엇인가?
良く「女は母となって完成する」という言葉が使われる。女は結婚をして子供を持ち、母親となることによって女としての人格は完成されてゆくというのである。しかし、それはそうであるが、それだけではまだ足りないのである。女が女として完成されてゆくためには「妻は、夫にとっても母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자주 「여자(女)는 어머니(母)가 되고서 완성(完成)된다」고 하는 말을 사용했다. 여자는 결혼을 해서 자식(子供)을 갖고, 모친(母親)이 되는 것으로 여자로서의 인격(人格)은 완성(完成)되어 간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로서 완성(完成)되어 가기 위해서는, 「아내(妻)는, 남편에게 있어서도 어머니(母)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なぜか。・・・ それは、夫というものは、男というものは、絶えず心の奥底に「母なるもの」を追い求めている存在であるからである。その「母なるもの」は、自分を産んでくれた母親でもあり、またその母親を含めた母親としての全体的な母親の理想像でもある。
왜냐?・・・ 그것은,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은, 남자라고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속마음에(노상 속마음에)「어머니인 사람(母なるもの)」을 추구(追求)하고 있는 존재(存在)이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인 사람(母なるもの)」은, 자기를 낳아 주신 모친(母親)이며, 또한 그 모친(母親)을 포함한 모친(母親)으로서의 전체적인 모친(母親)의 이상상(理想像: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 母なる大地 "(만물의) 근원인 대지" "어머니인 대지" ★
母親が生きている時は、夫の心はその母親によって満たされる。しかし、その母親と遠く離れて住む時、またその母親が死んでしまってもういないという時、夫は無意識の内に妻の上にその母親の姿を追い求めているものである。会社で上役にひどく怒られたという時、また失敗をした時など「お母さん」と言って妻の膝の上に泣き崩れて慰めてもらいたいという衝動に駆られる夫は多いのである。子供が喧嘩して泣いて帰って来て「おかあちゃん」と言った時、母親は何と言って子どもを慰めるであろうか。
모친(母親)이 살아 있을 때는, 남편(夫)의 마음은 그 모친(母親)에 의해서 채워진다. 하지만, 그 모친(母親)과 멀리 떨어져 살 때, 또는 그 모친(母親)이 돌아가셔서 이제는 안 계신다고 할 때, 남편(夫)은 무의식(無意識) 속에 아내(妻)의 위(上)에 그 모친(母親)의 모습을 추구(追求)하고 있는 사람(것:もの)이다. 회사(會社)에서 상사(上役)에게 심하게 핀잔을 맞았다고 할 때, 또는 실패(失敗)을 했을 때 등「오카아상(お母さん:엄마)」라고 말하며 아내의 무릎 위에 쓰러져 울며 위로를 받고 싶다고 하는 충동(衝動)에 사로잡히는 남편(夫)은 많은 것이다. 자식(子供:아이)가 싸워서 울며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おかあちゃん)」라고 말했을 때, 모친(母親)은 뭐라고 하며 아이(子ども)을 달래실까?
★ 모친(母親)=おかあちゃん=엄마 입니다.
魂が傷ついた時、人はその慰めを求める。慰められた魂は勇気を得てまた外に向かって前進する。悲しみを、苦しさを、自分独りで耐え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つらいことである。正法を知っている人達はどんな事にも耐えて、なお明るく生きてゆく道を知っているが、まだ正法を多くの人が知らない現在の段階では人は慰めを外に求める。妻のその慰めを求めようとしても得られない時、夫の心は苦しむ。
영혼(魂)이 상처를 입었을 때, 사람은 그 위로(慰勞)를 찾는다(구한다). 위로를 받은 영혼(魂)은 용기(勇気)를 가지고 또다시 집밖(外)으로 향해서 전진(前進)한다. 슬픔을, 괴로움을, 자기 혼자서 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정법(正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에도 참고 견디며, 역시 밝게 살아가는 길(道)을 알고 있지만, 아직 정법(正法)을 많은 사람이 모르는 현재(現在)의 단계(段階)에서는 "사람은 위로(慰勞)을 집밖(外)에서 구한다(찾는다:求める)". "아내(妻)에게 그 위로(慰め)를 찾으려고 해도 얻을(받을) 수 없을 때, 남편(夫)의 마음(心)은 고통받는다(괴로워한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와 "어머니"의 일본어입니다.
[엄마!!!] (유아어) まま; おかあちゃん; かあちゃん; おっかあ.
[어머니] はは(母); おかあさん; 母親(おや;ははおや); お袋(ふく)ろ[속어].
海(うみ)より深(ふか)い母親(おや)の恩(おん) (바다보다 깊은 어머니의 은혜)
天(てん)より高(たか)く海(うみ)より深(ふか)い親(おや)の恩(おん)(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어버이의 은혜)
10.なぜ「おっ母さん」といって死ぬのか ・ なぜ「瞼の母」というのか
10.왜「어머니(おっ母さん)」라고 말하며 죽는가? 왜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이라고 말하는가?
「瞼の母」という言葉はあるが「瞼の父」という言葉はない。
我が子を愛しない父というのはいないのであるから「瞼の父」という言葉があってもよさそうであるがその言葉はない。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라고 하는 말은 있지만, 「눈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모습(瞼の父)」라고 하는 말을 없다.
자식(我が子)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父)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눈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모습(瞼の父)」이라고 하는 말이 있어도 좋을 것 같지만 그 말은 없다.
「瞼の母」という言葉は長谷川伸:作:「瞼の母」番場の忠太郎が生みの母を求めて旅鴉になる。その人が自分の母に間違いないと知って訪ねて行く。しかし、その母は既に再婚して娘があった。突然息子だと名乗られても、それが夫に知れると現在の幸せが吹き飛んでしまうことを恐れた母は、心の中では「我が子だ」と知っても「自分にはそういう子供がいたことはない。人違いだ」と言ってしまう。忠太郎はさびしく去ってゆく。「瞼を閉じりゃ、おいらのおっかさんは、いつもここにあらぁ」忠太郎は天を仰いで涙を流す。「瞼の母」の映画や芝居を観て涙を流さない人は居なかった。今、こういう映画を見たとしたら、今の若い人達も涙を流すに違いない。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이라고 하는 말은 하세가와 싱(長谷川 伸): 작품(作):「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한빠(番場:토목 공사나 광산 등의 현장에 있는 노무자 합숙소)의 츄타로우(忠太郎:이름)가 생모(生母)를 찾아서 뜨내기(旅鴉)가 된다. 그 사람이 내 어머니임에 틀림없다고 알고 찾아간다. 하지만, 그 어머니(母)는 이미 재혼(再婚)해서 딸(娘)이 있었다. 돌연 아들(息子)이라고 밝히면, 그것이 남편에게 들키면 현재의 행복이 단번에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을 두려워한 어머니(母)는, 마음속으로는「내 자식이다(我が子だ)」라고 알아도「나에게는 그런 자식(子供)이 있던 적은 없다. 딴사람이다(사람을 잘못 봤다).」라고 말해 버린다. 츄우타로우(忠太郎)는 쓸쓸하게 사라져 간다. 「눈(瞼)을 감으면(瞼を閉じりゃ), 내 어머니(おいらのおっかさん)는, 늘 여기에 있으니까(いつもここにあらぁ)」 츄우타로우(忠太郎)는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린다.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의 영화(映畵)나 연극(芝居)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날, 이런 영화를 봤다고 하면,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눈물을 흘릴 것임에 틀림없다.
★ 하세가와 싱(長谷川 伸、1884년(메이지 17년)3월 15일 - 1963년(쇼와 38년)6월 11일)은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이다. 본명은 하세가와 신지로우(長谷川 伸二郎)이다. ★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
(일본어발음:마부타노하하(まぶたのはは)는, 하세가와 싱(長谷川伸)의 희곡이며, 1930년『소인(騒人) : 시인과 문사 즉 문인지(文人誌)』 3・4월호 게재(掲載)。 <일본어 위키백과 사전>
人の心の奥底深い所から、止めどもなく涙を流させる「瞼の母」というその「女」なるものは一体何者なのであろうか。「母」ということを思う時、私の心から離れることがないのは戦地で「おっかさん」と死んで行った兵隊のことである。
사람의 속마음 깊은 곳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瞼の母)」라고 하는 그 「여자(女)」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머니(母)」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내 마음에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은 전쟁터(戰地)에서, 「옷카상(おっかさん:엄마)」라고 하며 죽어 간 군인들(兵隊)의 일이다.
☞ 계속 읽어 보세요. 왜, "엄마(어머니)" 라고 하며 죽는지를 알게 됩니다.
昭和十四年三月の南昌作戦が、私が小隊長としての初陣であった。武漢作戦後、武昌の近くの王家店に駐留していて二月に行動開始、九江の南の箸渓に集結、私の連隊は南昌攻撃の助攻方面として武寧を攻撃することになった。武寧の敵第一線陣地の攻撃は、軽爆、重砲、野砲、軽装甲車、工兵を加えての全くの模範的な陣地攻撃であった。
私は初陣であった薩摩の刀工波平行周:作の名刀を振りかざして突撃した。突撃体勢に入る為敵前五十メートルに前進した時「危ない」と、私は狙撃されようとしているのを直感した。位置を移動した瞬間に弾丸が飛んできた。敵が弾丸を発射しない前に私の直感はそれを知っていた。直観は大事にしなければいけない。突撃は成功した。一人の負傷者も出なかったが、その夜、敵の逆襲で戦死者が出た。「おっかさん」と言って死んだ。「天皇陛下万歳」と言っては死ななかった。その兵隊の火葬をしながら私は考えた。「なぜ、おっかさんと言って死んだか」と。
쇼와 14년(1939년) 3월 남창작전(南昌作戦: 중국 강서성[江西省))이, 제가 소대장으로서의 첫 출전(初陣)이었다. 무한작전(武漢作戰:중일전쟁의 싸움:1938년(昭和13年)6월 11일 - 10월 27일) 후, 무창(武昌:중국의 호북성(湖北省:후베이성) 부근의 왕가점(王家店)에 주류(駐留:주둔)하고 있었고 2월에 행동개시, 구강(九江:중국 강서성)의 남쪽의 저부(箸渓)에 집결, 저의 연대(連隊)는 남창공격(南昌攻擊)의 세력을 도와서 공격(助攻) 방면으로서 무녕(武寧)을 공격하게 되었다. 무녕(武寧)의 적군 제1선 진지(陣地)의 공격은, 경폭(輕爆), 중포(重砲), 야포(野砲), 경장갑차(輕裝甲車), 공병(工兵)을 더하여 완전한 모범적인 진지공격(陣地攻撃)이었다.
저는 첫 출전(初陣)이었던 사츠마(薩摩:현재의 가고미마 현[鹿児島県] 서남부)의 도공(刀工) 나미노히라 유키치카(波平行周)가 만든 명도(일본도:名刀)를 머리 위로 번쩍 쳐들고 돌격했다. 돌격 자세(突擊体勢)로 들어가기 위해 적의 있는 앞(敵前) 50미터로 전진했을 때 「위험하다(危ない)고, 나는 저격(狙擊)당하리라고 하는 것을 직감했다. 위치를 이동한 순간에 탄환(彈丸)이 날아 왔다. 적(敵)이 탄환을 발사하지 않기 전에 나의 직감(直感)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직관(直觀)은 중요(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돌격(突擊)은 성공했다. 한 사람의 부상자(負傷者)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날 밤, 적(敵)의 역습(逆襲)으로 전사자(戰死者)가 나왔다. 「옷카상(おっかさん:엄마)」라고 말하며 죽는 것이다. 「덴노우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천황폐하 만세)」라고 말하고는 죽지 않았다. 그 병사들(兵隊)의 화장(火葬)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なぜ)、옷카상(おっかさん:엄마)라고 말하며 죽는 건가?」라고.
※무한[武漢] ..중국어 발음으로, "우한" <중국어 사전>
[호북성(湖北省) 동부의 도시인 무창(武昌)·한구(漢口)·한양(漢陽)의 세 도시 즉 ‘武汉三镇’(무한 삼진)이 합병하여 된 시(市)로 호북성의 성도(省都)임]
私は内地を出征してからその日までの自分の心を振り返って、自分の心の中に起こった、父への思いと母への思いを思い出す限り思い出してみた。母のことは毎日思い出して懐かしんでいたのに、父のことを思い出すことの少ないことに驚いた。父親という者は、かほどまでに子供からは思い出されることの少ない存在なのであろうかと思うと、もし戦死せず無事に内地に帰ることが出来たら結婚をして、やがて父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寂しく思うのであった。申し訳ないと思うのであるが、父への思いは少なかった。そのことが、私が父となった時に「母親に劣らず、子供からも多く思い出される父親でありたい」と思う事になった原因であり、父親という者は、子供に厳しく躾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同時に、子供に奉仕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と思った原因である。子供の記憶の中に、父親との楽しい思い出を一つでも沢山つくって置くことが子供をも幸せにすることだと思った。戦争は終わった。復員した。戦地であれ程までに思った父も母も、そして弟も妹も空襲で死んでしまっていた。子に奉仕する父親でありたいと思っていた私に子供が生まれた。家族の全てを亡くしてしまった後であっただけに子供が生まれることは嬉しかった。人は、それは極端すぎるというかも知れない。しかし、私は、事実は事実として書かない訳にはゆかない。
저는 (식민지 등을 제외한) 본국(内地)를 출정(出征)하고나서부터 그날까지의 저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제 마음속에 일어났던,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기억해 낼 때까지 떠올려 보았다. 어머니의 일은 매일 생각해 내서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일을 생각해 내는 것은 적다는 것에 놀랐다. "부친(父親)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정도까지 자식(子供)으로서는 생각나는 일이 적은 존재인 것일까?"라고 생각하면, 만약 전사(戰死)하지 않고 무사히 (식민지 등을 제외한) 본국(内地)로 돌아갈 수가 있다면 결혼을 해서, 이윽고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쓸쓸하게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적었다. 그 일이, 내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 「모친(母親) 못지않게, 자식들(子供)까지도 많이 생각이 나는 부친(父親)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原因)이며, 부친(父親)이라고 하는 사람(者)은, 자식(子供)에게 엄하게 예의범절(躾)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됨과 동시에, 자식(子供)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원인(原因)이다. "자식(子供)의 기억 속에, 부친(父親)과의 즐거운 추억(思い出)을 하나라도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자식(子供)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전쟁(戰爭)은 끝났다. 복원(復員:전시 체제에서 평상 체제로 돌려져 복무가 해제됨)했다. 전쟁터(戰地)에서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남동생도 여동생도 공습(空襲)으로 다 죽어 있었다. 자식(子)에게 봉사하는 부친(父親)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자식(子供)이 태어났다. 가족(家族) 전부를 잃어 버린 뒤인만큼 자식(子供)이 태어난 것은 기뻤다. 다른 사람(人:남)은, 그것은 너무 극단적(極端)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사실(事實)을 사실(事實)로서 쓰지 않을 수 없다.
生まれた子供が女の子だと聞いた時、私はその子がやがて嫁ぎ行く日のことを一瞬の間に思った。誰がこの子の夫になるのか、それは分からない。嫁ぎ行くその日まで、その子が結婚して幸せになるように育てなければいけない。結婚して、夫たる人の気に入って、夫に喜ばれるような女に育てることが親の責任であると思った。母親には母親としての、同じ女であるという立場においてのわが子への願いがあるであろうが、私は父親として、夫に嫌われるような女に育ててはならないという気持ちがあった。よちよち歩けるようになり、いい着物や洋服を着せるととても喜んだ。終戦後の何もない時、そのデパートで戦前からの物でたった一枚残っていたという全部刺繍の可愛い服を買って着せた。四つになり五つになり、やがて小学校へ行くようになり、そこはかとなく女らしいそぶりを見せたりして一人前に育ってゆく娘を見て、いつもその娘の嫁ぎ行く日のことを思っていた。親の手許にいるのももうそう永くない。やがては親の下を離れ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娘であるから、せめて家にいる間に可愛がって置こうという心があった。私は娘が生まれたその日からそういうことを思って来たのであったが、それは極端だという人でも、娘が段々大きくなるにつれて何時の時にかわが娘の姿の上に、やがて嫁ぎ行く日の娘の花嫁姿を重ねて見たことはないという父親はいないであろうと私は思う。どこの父親も、娘に対しては甘いといわれるのは、父親の心の中にはそのような思いが秘められているからではないであろうか。
태어난 자식(子供)이 여자 아이라고 들었을 때, 나는 그 아이(子)가 머지않아 시집가는 날의 일을 한순간에 생각했다. 누가 이 아이(子)의 남편이 될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시집가는 날까지, 그 아이(子)가 결혼해서 행복해지도록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結婚)해서, 남편인 사람에게 마음에 드는, 남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여자로 키우는 것이 부모(親)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모친(母親)에게는 모친으로서의, 같은 여자라고 하는 입장(立場)에 있어서의 자식(わが子)에 대한 바램이 있을테지만, 저는 부친(父親)으로서, 남편에게 미움을 받는(기피당하는) 여자로 키워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아장아잘 걸을 수 있게 되어, 좋은 옷(着物)이나 양복을 입혀 보니 아주 기뻤다. 세계 제2차 대전 후(終戰後) 아무것도 없을 때, 그 백화점에서 세계 제2차 대전 전(前戰)부터의 물건(物)이며 달랑 한 장 남아 있었다고 하는 전부 수를 놓은(刺繡:자수)한 귀여운 옷을 사 입혔다. 4살이 되고 다섯 살이 되어, 이윽고 초등학교로 가게 되어, 어딘지 모르게 여자다운 태도(態度)를 보이거나 해서 어엿한 한 사람의 여자(一人前)로 성장해 가는 딸을 보며, 늘 그 딸이 시집가는 날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부모 곁에 있는 것도 이제 그리 길지 않다. 머지않아서는 부모 슬하(親の下)를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딸이기 때문에, 하다 못해 집에 있는 동안에 귀여워해(애지중지해) 두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딸이 태어난 그 날부터 그러한 것을 생각해 온 것이지만, "그것은 극단적(極端)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도, 딸이 점점 자람에 따라 언제나(何時の時に) 내 딸이 모습에, 머지않아 시집가는 날의 딸인 새색시(花嫁:신부)의 모습을 거듭해서 본 적은 없다고 하는 부친(父親)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에 있는 부친(父親)이라도, 딸에 대해서는 너그럽다고 하는 것은, 부친(父親)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생각이 숨겨져(간직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娘に対しては甘いといわれる父親が、息子に対しては厳しいといわれる。いや現在では息子に対しても甘い父親が増えて来た。それは終戦後、民主主義ということで「父親は厳しくしてはいけない。子供と友達とならなければいけない」と教えて来た日教組の先生達や、そういうことを書いたマスコミの罪である。この頃のように暴力非行問題が起こってくると、マスコミは一斉に「父親の躾が甘いからだ。父親が家庭での権威を失っているからだ」と書き立てている。マスコミの主張には一貫性がないのであるから、マスコミが書くことをそのまま信ずることは危険である。父親は息子と遊ぶ時は裸になって遊ばなければいけない。
딸에 대해서는 너그럽다고 하는 부친(父親)이, 아들(息子)에 대해서는 엄하다고 한다. 아니 현재로는 아들(息子)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부친(父親)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계 제2차 대전 후(終戰後), 민주주의(民主主義)라고 하는 것으로「부친(父親)은 엄해서는 안 된다. 자식(子供)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가르쳐 온 일교조(日教組:일본 교직원 조합)의 선생님들이나, 그러한 것을 쓴 매스컴의 죄(罪)이다. 요즘처럼 폭력비행(暴力非行)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매스컴은 일제히 「부친(父親)의 가정교육(躾:훈육)이 너그럽기 때문이다. 부친(父親)이 가정(家庭)에서의 권위(權威)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써대고 있다. 매스컴의 주장(主張)에는 일관성(一貫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매스컴이 쓰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은 위험(危險)하다. 부친(父親)은 아들(息子)과 놀 때는 벌거승이(裸)이가 되어 놀지 않으면 안 된다.
しかし、父親としては厳しい躾、教育、人生に対する男としての気構えを教えなければならない責任がある。父親は息子に対しては甘いばかりではいけないのである。何故なら、男の一生というものは甘いばかりでは決して生きられないからである。
하지만, 부친(父親)으로서는 엄한 가정교육(躾:훈육), 교육(教育), 인생(人生)에 대한 남자(男)로서의 마음가짐(気構え)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責任)이 있다. 부친(父親)은 아들(息子)에 대해서는 너그럽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何故なら), 남자(男)의 일생(一生)이라고 하는 것은 너그럽기만 해서는 결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心の中では嫌いだと思っている相手とであっても喧嘩せず、仲良くとまではゆかなくても調子を合わせて仕事を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社会的な制約、会社の規約、あるいは不文律の慣習などあって、この世の中は決して自分一人の思うようになる世の中ではない。耐えなければならない時には耐えなければならないし、辛抱する時は辛抱することなしには生きられないということも沢山ある。成功すると思っていたことが失敗することもある。女もそうであるかも知れないが、男の生きて行く道には耐え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多いことは、父親が自分自身の体験から一番よく知っているはずである。私は事業に失敗してこれからどうしようかと思った時、これが自分一人だったらどんなにラクに現状を切り抜けることが出来るであろうかと、妻子がいることをうとましく思ったことがある。成功している時はそうでないが失敗した時は妻子が重荷に感ぜられてくる。だからといって妻子を捨てて逃げ出す訳にゆかないのである。(中にはそういう男もいないではないが)
"마음속으로는 싫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가 있어도"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까지라고는 되지 않더라도" 호흡을 맞추어서 일을 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적인 제약(制約), 사회의 규약(規約), 혹은 불문율(不文律)의 관습(慣習) 등이며, 이 세상은 결코 자기 혼자의 생각처럼 되는 세상이 아니다. 참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참지 않으면 안 되고(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 하고: 耐えなければならない時には耐えなければならないし), 참을 때는 참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辛抱する時は辛抱することなしには生きられないということも澤山ある)。 성공(成功)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실패(失敗)하는 경우도 있다. 여자(女)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남자(男)가 살아가는 길에는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많은 것은, 부친(父親)이 자기 자신의 체험(體驗)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사업(事業)에 실패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했을 때, 이것이 "나 혼자라면 천하없이 편안하게 현상(現狀:현재의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처자(妻子:처와 자식)가 있는 것을 역겹게 생각한 적이 있다. 성공(成功)하고 있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실패(失敗)했을 때는 처와 자식(妻子)이 무거운 짐(부담스러운 짐)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처자식(妻子)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게중에는 그런 남자도 없지는 않지만(中にはそういう男もいないではないが))
息子の一生が必ずしも順調であるとばかりは限らない。色々な苦労に負けてしまっては男として一生を生きられないのである。長男が生まれたのは私が三十四才の時であった。私の三十四年という人生においても色々な苦しいことがあった。私はその苦しさに耐えて生きてきた。だから息子には、娘とは全く違ってどんな逆境にも負けない、どんな環境からでも逃避しない人間に育て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ってき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ていなかった時には叱った。めそめそしている時も「そんなこと位でどうするか」といって叱った。私は私自身の生い立ちの貧しさを隠さずに話をした。男の子供に対する私の眼は、いつも、妻子を背負って立ち向かって行く子供の未来に注がれていた。息子達は、父親である私の優しさを感じている反面に私の厳しさを見ている。
아들(息子)의 일생이 반드시 순조(順調)롭다고는 할 수 없다. 여러가지 고생(苦勞)에 패배(져) 해 버려서는 남자로서 일생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장남(長男)이 태어난 것은 내 나이 34살 때였다. 나의 34년이라고 하는 인생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괴로운 일이 있었다. 나는 그 괴로움을 참으며 살아 왔다. 그래서 아들(息子)에게는, 딸(娘)과는 전혀 다르게 어떠한 역경(逆境)도 지지 않는, 어떠한 환경(環境)에서도 도피(逃避)하지 않는 인간으로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하고 있지 않았을 때에는 꾸짖었다. 걸핏하면 훌쩍거리고 있을 때에도「그런 일 정도로 어떻게 할거냐(そんなこと位でどうするか)!」라고 하며 꾸짖었다. 나는 내 자신의 성장 과정의 가난함(貧しさ)을 감추지(숨기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남자 아이(子供)에 대한 나의 눈은, 늘, 처자(妻子:처와 자식)를 짊어지고 대처해 가는 자식(子供)의 미래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자식들(息子達)은, 부친(父親)인 나의 다정함을 느끼고 있는 반면에 나의 엄함을 보고 있다.
子供のことで苦労しているという親は「自分の小さい時のような苦労は子供にはさせたくない」と思って子どもを甘やかした親であるはずである。
자식(子供)의 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는 부모(親)는, 「자신의 어릴 때와 같은 고생은 자식(子供)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이(子ども)를 응석받이로 기른 부모(親)가 있을 것이다.
苦労することは決して恥ではない。苦労することによって魂が向上することが多い。恥ずべきは、苦労を恥だと思うその心の在り方である。何も自分から苦労を求める必要はないが、起こってきた苦労から逃げ出せば自分の負けであり一生をメチャメチャにしてしまうのであるから積極的に苦労を乗り越え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自分の小さい時のことを考えて「子供には同じような苦労はさせたくない」と考えている父親は、自分の小さい時と子供のことばかりが頭の中にあって、その息子が生き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一生に眼が注がれていない。すなわち思慮の浅い父親が暴力非行の子供をつくってしまうのである。きちっ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きちっとさせること、子供自身に出来ることを子供自身にさせることは、それが愛であって、そうさせないことは子供を愛しているようであって実際は子供を不幸にしているのである。
고생하는 것은 결코 수치(羞恥:부끄러움, 창피)가 아니다. 고생하는 것에 의해서 영혼(魂)이 향상(向上)하는 경우가 많다. 부끄러움(恥ずべき)은, 고생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다. 굳이 스스로 고생을 바랄 필요(必要)는 없지만, 일어난 고생에서 도망치면 자기가 지는 것이며 일생(生)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積極的)으로 고생을 뚫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어릴 때의 일을 생각해서, 「자식(子供)에게는 똑같은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친(父親)은, 자신의 어릴 때와 자식(子供)의 일만이 머리속에 있고, 그 자식(息子)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생에 시선(眼)이 집중되어 있지 않다. "즉(다시 말하면) 생각(思慮:사려)가 얕은 부친(父親)이 폭력비행(暴力非行)의 자식(子供)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깔끔히(제대로,어김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제대로(어김없이) 하게 하는 것, 자식(子供)이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식(子供:아이)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랑(愛)이며, 그렇게 하게 하지 않는 것은 자식(子供)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자식(子供)를 불행(不幸)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昔の父親は厳しかった。最近は母親の方が厳しいという子供が増えて来た。その母親の厳しさもまた日常茶飯のことだけであって子供の一生に注がれていない。注がれていると強弁する母親もいるであろうが、それは母親の思う通りの学校へ行かせようという子供の心を無視した一方的な母親の欲望からである場合が多い。
예전(昔:옛날)의 부친(父親)은 엄했다. 최근은 모친(母親) 쪽이 엄하다고 하는 자식(子供)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친(母親)의 엄함도 역시 일상다반(日常茶飯)의 일일뿐이며 자식(子供)의 일생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지 않다. 집중되어 있다고 강변(强辯)하는 모친(母親)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모친(母親)의 생각대로 학교로 보내려고 하는" "자식(子供)의 마음을 무시(無視)한 일방적인 모친(母親)의 욕망(欲望)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강변[强辯]하다. <국어사전>
①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주장하거나 굳이 변명하다 ★<일본어 사전> 같은 뜻으로, 억지를 부리다.
母親は娘に女としての生き方を教えるべきであるし、父親は息子に男としての生き方を教える責任がある。
모친(母親)은 딸에게 여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가르쳐야 하고, 부친(父親)은 아들(息子)에게 남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가르칠 책임(責任)이 있다.
家庭の中で父親の影が薄くなって母親が強くなってくると、娘は女としての間違った在り方を学ぶことになるし、息子は男としての生き方を学ぶチャンスがなくなってくる。男としての力強い生き方を学ばされないだけでなく、母親に甘やかされるから、優しいかもしれないが自分からは男らしく積極的に何かをしようというたくましい男にはならない。
가정(家庭) 안에서 부친(父親)의 존재가 희미해지고(影が薄く) 모친(母親)이 강해지게 되면, 딸(娘)은 여자로서의 잘못된 본연의 모습을 배우게 되고, 아들(息子)은 남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배울 찬스(기회)가 없어지게 된다.
"남자로서의 마음이 든든한(힘찬:力強い) 본연의 모습"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친(母親)에게 응석부리기 때문에, 다정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으로서는 "남자답게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늠름한 남자"로는 되지 않는다.
★影(かげ)が薄(うす)い ①기운이 없어 보이다. ①존재가 희미하다 는 뜻임.
★★ あまったれる [甘ったれる ] <속어> 응석부리다, 어리광부리다. = 甘やかされる (본문에서의 표현)
あるツーリストの人が、新婚旅行で、行き先を決めたり、旅行先でいつも先に立つのは女で、十組の内七組が女性上位であるという話を聞いた事があるが、そのように、いつも女性にリードしてもらわないと何もできないという男性が出来上がってしまうのである。
어떤 투어리스트(tourist:관광객)인 사람이, "신혼여행(新婚旅行)에서, 목적지를 정하거나, 여행지에서 늘 앞에 서는 것은 여자(女)이며, "10조(十組:열쌍) 중에 7조(七組:일곱쌍)까지가 여성상위(女性上位)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처럼, 늘 여성(女性)이 리드를 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는 남성(男性)이 완성되어 버리는 것"이다.
父親が自分で満たされなかったものを息子によって満たそうとする場合がある。例えば、自分は高校だけしか出ずに苦労したからせめて息子は大学までは出そうとか、自分が成功しなかったことを子供にやらせようとか、或いは自分の跡を継がせようとか、そういうことを思っている父親はやはり息子を厳しく強く育てようとするであろう。しかし、どうするかは子供の自発性を第一にしないと、後になって「したくないことを強制された」といって反抗的になる場合がある。
부친(父親)이 스스로 채우지 못했던 것을 아들(息子)로 하여금 채우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자기는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서 고생했기 때문에 적어도 아들(息子)은 대학교까지는 나오게 한다"든가, "자신이 성공(成功)하지 못한 것을 자식(子供)에게 하게 하려고 한다"는가, 혹은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한다"든가,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부친(父親)은 역시 아들(息子)을 엄하고 강하게 키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는 자식(子供)의 자발성(自発性)을 첫째로 삼지(여기지) 않으면", 나중에(뒤에 가서)「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제(強制)로 시켰다」고 하며 반항적(反抗的)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最近の一部の愚かな父親を除いて、常識的な普通一般の父親の眼は、息子の一生に注がれているはずである。だからこそ父親は息子を厳しく育てよう、どんな困難にも負けない立派な男にしようとして叱ったり怒ったりするのであるが、父親が厳しく息子を育てようとしていることに対して反対する母親がいる。妻に対する不満を、妻にはよう言えずに子供に向けて発散する父親がいるがこれも夫として父親としては最低である。この場合に叱り方は感情的で、子供が同じことをしても、ある時は何にも言わないのにある時は顔色を変えてということになるからよくわかる。そういう時をも含めて父親が息子を叱る時には激しく夫を憎む妻がいる。それは「こんな夫と一緒になるんじゃなかった」とか、とにかく夫に失望し、失望させられている妻である。期待していたようには夫が出世しなかったというように、夫によって欲望を達せられなかった妻は、夫によって満たされなかったものを息子によって満たそうとして、息子に必要以上の期待をかける場合がある。こうなると妻の心は夫から離れて子供の方に注がれてゆく。そういう家庭が多い証拠には、大抵の中年の夫達が「自分は家庭に中では孤独だ」「家内と子供がグルになって俺をのけ者にしている」と愚痴っているのを見ても分かる。
최근의 일부의 어리석은 부친(父親)을 제외하고, 상식적인 보편 일반의 부친(父親)의 시선(眼)은, 아들(息子)의 일생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친(父親)은 "아들(息子)을 엄하게 키우자, 어떠한 곤란(困難)에도 지지 않는 훌륭한 어른(성인)으로 만들겠다고 하며(男にしようとして)" "꾸짖거나 화를 내는 것"이지만, 부친(父親)이 엄하게 아들(息子)을 키우려고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반대(反對)하는 모친(母親)이 있다. "아내(妻)에 대한 불만(不滿)을, 아내(妻)에게는 말하지 못하면서" "자식(子供)을 향해서 발산(發散)하는 부친(父親)이 있지만" 이것도 남편으로서는 최저(最低)이다. 이 경우에 꾸짖는 쪽은 감정적(感情的)이며, "자식(子供)이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해도, 어느 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떤 때는 안색(顔色:얼굴빛)을 바꿔" 라고 하기 때문에 잘 알 수 있다. 그런 때를 포함해서 부친(父親)이 아들(息子)을 꾸짖을 때에는 심하게 남편(夫)을 미워하는 아내(妻)가 있다. 그것은「이런 남편과 같이 살지 않는 건데(こんな夫と一緒になるんじゃなかった)」라든가, 어쨓든 남편에게 실망(失望)하고, 실망했다고 하는 아내(妻)이다. 기대(期待)하고 있던 식으로는 남편이 출세(出世)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처럼, 남편(夫)에게서 욕망(欲望)을 채우지 못했던 아내(妻)는, 남편에 의해서 충족되지 못했던 것을 아들(息子)에 의해서 채우려고 하며, 아들(息子)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期待)를 거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아내의 마음은 남편에게서 멀어지고 자식(子供) 쪽으로 기울여간다. 그러한 가정(家庭)이 많은 증거(證據)로는, 대개의 중년의 남편들이, 「나는 가정 안에서는 고독(孤獨)하다(自分は家庭に中では孤獨だ)」「집사람(家内)과 자식(子供)이 한통속이 되어 나를 따돌리고 있다(家内と子供がグルになって俺をのけ者にしている)」고 투덜대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ぐちる [ 愚痴る ] <속어> 넋두리하다, 푸념하다, 투덜대다.
妻子の幸せの為にと一生懸命に夫達は働くのに、夫に孤独の淋しさを味あわせてそれで平気でいられる妻の心の恐ろしさを私は嘆かずにはいられない。家に帰っても満たされぬ心のわびしさ、さびしさを笑いにまぎらわせ、酒にまぎらわせている。ピエロのような夫。顔で笑って心で泣いて、男であるだけに涙を見せられない男のつらさを、なぜ心優しいといわれるそれが天性であるべき女がどうして理解してやらないのであろうか。
"처자식(妻子)의 행복을 위함이라고 하며 열심히 남편들은 일하는데", "남편에게 고독(孤獨)의 쓸쓸함을 겪게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있을 수 있는 아내의 마음의 무서움을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귀가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쓸쓸함(외로움), 고독감(淋しさ)을 웃음으로 달래게 하고, 술로 달래게 하고 있다. "삐에로와 같은 남편". 얼굴로는 웃으며 마음으로 울며, 남자이기 때문에 눈물을 보일 수 없는 남자의 괴로움을, 왜? "마음이 곱다(마음이 비단결 같다:心優しい)고 하는" "그것이" "천성(天性)이어야 할 여자"가 어째서 이해(理解)해 주지 않는 것일까?
「うちの子は、私がいないとさっぱりだめなんです」といって息子自慢をしている母親がいる。その母親は、その息子がいつまでも、「お母さん、お母さん」と言ってくれるであろうと思っているがそういう訳にはゆかない。やがて、愛し信じ切っていた息子からその母親は裏切られ捨てられ泣かされるのである。小さいうちはよい。しかし、その息子がだんだん思春期になり、女というものを意識し出すようになり、そうして結婚の相手を選ぼうというような頃になると、母親が父親にとっては悪妻であったことに気がつく。「あんな気の強い、優しさの欠けた女は貰いたくない」と、今まで「お母さん、お母さん」と言っていた母親を軽蔑して、母親の傍に行かないようになり、母親が近づくと怒ったりするようになる。中には母親を殴ったりする者もいる。そうして父親に同情するのである。しかし、父親との対話は簡単には出来ない。父親と息子との間に割って入った母親によって父親と息子の対話は永い間中絶している。父親は父親なりに孤独な心を守って家族を近づかせまいとする。また近づこうとしてもそれを避ける習慣が身についてしまっていて、自分でも不甲斐ないと思う程で対話が出来なくなってしまっている。
「우리집 아이(うちの子)는, 내가 있지 않으면 전혀 안돼요」라고 하며 아들 자랑(息子自慢)을 하고 있는 모친(母親)이 있다. 그 모친(母親)은, 그 아들(息子)이 언제까지나「엄마(お母さん)、엄마(お母さん)」라고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럴 수 없다. 머지않아, 사랑스럽고 완전히 믿고 있던 아들(息子)에게서 그 모친(母親)은 배신당하고 버림받아서 애를 먹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괜찮다. 하지만, 그 아들(息子)이 차츰 사춘기(思春期)가 되어, 여자라고 하는 사람을 의식(意識)하기 시작하게 되어, 그리고 나서 결혼할 상대를 선택하려고 하는 무렵이 되면, "모친(母親)이 부친(父親)에게 있어서는 악처(悪妻)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렇게 고집이 세고, 다정함이 없는(마음씨가 곱지 않은:優しさの欠けた) 여자는 맞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하며, 지금까지「엄마(お母さん)、엄마(お母さん)」라며 말하고 있던 모친(母親)을 경멸(輕蔑)하며, 모친 곁으로 가지 않게 되며, 모친이 다가오면 화를 내거나 하게 된다. 게중에는 모친(母親)을 때리거나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부친(父親)을 동정(同情)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친(父親)과의 대화는 간단히는 할 수 없다. "부친(父親)과 아들(息子)과의 사이에 끼어든 모친(母親)으로 인해 부친(父親)과 아들(息子)의 대화(對話)는 오랫동안 끊어져 있다." 부친(父親)은 부친나름대로 고독(孤獨)한 마음을 지키며 가족(家族)에게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다가가려고 해도 그것을 피하는 습성(習慣)이 몸에 베어 버려 있어서, 스스로도 한심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대화(對話)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있다.
母親に失望し母親を軽蔑しているとはいっても、母親に去勢されてしまった息子は自分では何にも出来ない。永い間母親にやってもらっていた習性があるので、選ぶとすれば母親のように何でもかでもやってくれる女性を無意識の内に選ぶことになる。このようにして母親を忌避している息子は母親と似たような女を妻として選んでしまって似たような気の強い嫁と姑とが、一人の男性を中にして争うということになる。
모친(母親)에게 실망(失望)하고 모친을 경멸(軽蔑)하고 있다고는 해도, 모친(母親)에게 거세(去勢)당해 버린 아들(息子)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오랫동안 모친(母親)이 해 주었던 습성(習性)이 있기 때문에, 택하려고 하면 모친(母親)처럼 무엇이든지 해 주는 여성(女性)을 무의식(無意識) 속으로 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모친(母親)을 기피(忌避)하고 있는 아들(息子)은 모친과 닮은 여자를 아내(妻)로 택해 버리고 비슷한 고집이 센 며느리(嫁)와 시어머니(姑)가, 한 명의 남성(男性)을 가운데에 두고서 싸우게 된다.
息子に、優しい心の嫁を貰ってやろうと思うならば、母親が優しくなることである。自分は夫を軽視していながら、嫁にだけは息子を大事にして貰いたいと望んでも、この世界は「類は類をもって集まる」という世界なのであるから、自分に似たような嫁しか来ないのである。
아들(息子)에게, "정다운 마음(優しい心:마음씨가 고운)의 며느리(嫁)를 얻어 주겠다고 생각한다면", 모친(母親)이 다정해질 것이다. 자신은 남편(夫)을 경시(輕視)하고 있으면서, 며느리만큼은 아들(息子)을 소중하게 여겨주었으면 한다고 바래도, 이 세계는,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類は類をもって集まる:유유상종)」고 하는 세계(世界)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닮은 며느리(嫁)밖에 오지 않는 것이다.
★ "어머니"를 일본어로는, "하하:母(はは), 오카아상(お母(かあ)さん)=옷카아상(おっ母さん),하아오야(母親(ははおや)"
또한, "엄마"라고 하며 부를 때, "お母(かあ)さん=おっ母さん" 라고, 이 단어도 씁니다.
★ 또, 어머니= 하하오야: 母親(ははおや)를, "엄마"라고 쓸 때는, 母親(ははおや)にむしゃぶりつく(엄마에게 힘껏 달라붙다), 또는, 母親(ははおや)に付(つ)き纒(まと)う(엄마에게 매달리다) 등.
☞11항에서는, 단어가 조금 다릅니다. ★ "여보 마누라" 카아챵(かあちゃん) ★이라고,
그리고 <아이같은 표현> "엄마: 카아챵(かあちゃん)" = 오카아챵(おかあちゃん)"」라고 씁니다.
다른 예로는, "네 어미는 어디 갔니? " 할 때는, お前(まえ)の母(かあ)ちゃんはどこへ行いったの. 등 입니다.
11.夫はなぜ自分の妻を「かあちゃん」と呼ぶのか
11.남편(夫)의 왜 자기 아내(妻)를 「여보 마누라 엄마(카아챵((かあちゃん)):속어 처)」라고 부르는가?
最初はお互いに名前を呼び合っていた夫婦でも、子供が一人でき、二人生まれして来ると夫は子供が「かあちゃん」「おかあちゃん」と呼ぶからという訳でもないであろうに、いつの間にか自分の妻を「かあちゃん」と呼んでしまっている。これは夫自身もどうしてそう呼ぶようになったのか、気がつかないうちに呼んでしまっているのである。「ママ」と呼ばしている所では「ママ」と呼んでいるのかもしれない。
처음에는 서로 이름을 서로 부르고 있던 부부(夫婦)라고 해도, 아이(子供)가 한 명 생기고, 두 명 생기기 시작하게 되면 남편(夫)은 아이(子供)가 「카아챵(かあちゃん:엄마)」「오카아챵(おかあちゃん:엄마)」라고 부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자기 아내(妻)를「카아챵(かあちゃん:여보 마누라)」라고 불러 버리고 있다. 이것은 남편 자신도 어째서 부르게 되었던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불러 버리고 있는 것이다. 「마마(ママ:Mamma)」라고 부르고 있는 곳에서는「마마(ママ:Mamma)」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마마(Mamma) :미국식 발음[마머(mάːmə)] 영국식 발음[머마(məmάː)]
1. (구어·유아어) 엄마. 2. (속어) 마누라, 여편네; 여자.
★★우리나라에서는, 아기들에게 엄마들이, "우리 애기, 자 맘마(Mamma) 먹자" 고 합니다. ^^
私もまた、いつの間にか妻を「かあちゃん」と呼んでしまっていた。結婚当初、私は他の鹿児島の男性と同じように自分の妻を「おい」とか「こら」とか呼んでいた。名前を呼ぶのは何か気恥ずかしくて、女にデレデレしているみたいで呼べなかった。それがいつの間にかしら、何時の頃からだったのか気づかないうちに妻を「かあちゃん」と呼んでいた。
저 역시, 어느샌가 아내(妻)를「카아챵(かあちゃん:여보 마누라)」라고 불러 버리고 있었다. 결혼 당초에, 저는 다른 가고시마(鹿兒島)의 남성(男性)과 마찬가지로 제 아내(妻)을 「어이(이봐;おい)」라든가「여봐(こら)」라든가로 부르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웬지 부끄럽고, 여자에게 따리를 붙이며 느물거리고 있는 것 같아서 부르지 않았다. 그것이 어느새인지, 어느 때부터였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내(妻)를「카아챵(かあちゃん:여보 마누라 )」라고 부르고 있었다.
そしてある日、妻を「かあちゃん」と呼んでいるその言葉の響きの中に、生みの母の姿を求めている事に気がついてびっくりした。
그리고 어느 날, 아내(妻)를 「카아챵(かあちゃん:여보 마누라)」라고 부르고 있는 그 말의 느낌(響き) 속에서, 생모(生みの母)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講演の旅を終わって家に帰って行く。玄関を開けると子供達が「お帰りなさい」と出て来る。私はその子供達の姿の後ろに妻の姿を求めている。「かあちゃんは・・・・・・」とつい言ってしまう。帰った時、妻が玄関に出て来た時のほっとした安らかな気持ちにひきかえて、妻の姿が見えなかった時の何となき心の寂しさ。それは小さい時、学校から「お母ちゃん」といって帰った時、母が居た時の嬉しさに比べて、母が居なかった時の悔しいような寂しいような腹立たしいような、何とも言えないあの心と同じであった。男というものはかほどまでに母を恋しくも思うものであろうか。であればこそ、妻も子もある男が、いまわの際に「おっかさん」と母の名を呼んで死んでゆくのであろうか。頭は禿げても、歯は欠けても、男が心の中で求めているものは母の姿である。母が健在である時はよい。その母と遠く離れて住んでいる時とか、また、母が死んでしまった時、男は自分の妻の上に母の姿を追い求めるのである。
강연(講演) 여행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현관(玄關)을 열면 아이들(子供達子供)이「오카에리나사이(お帰りなさい:어서 오세요) 」라며 나온다. 나는 그 아이들(子供達)의 모습 뒤로 아내(妻)의 모습을 찾고 있다. 「카아챵(かあちゃん:여보 마누라 엄마)는・・・・・・」라고 그냥 말해 버린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妻)가 현관(玄關)에 나왔을 때 한숨 돌리고 편안한 기분이 들며, 아내(妻)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의 왠지 모르게 마음의 허전함(寂しさ). 그것은 어릴 때, 학교(學校)에서 「오카상(お母ちゃん:엄마)」라고 하며 돌아왔을 때, 어머니(母)가 계실 때의 기쁨에 비해, 어머니(母)가 안 계실 때의 분함과 같은 허전함과 같은 화가 난 것은 같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저 마음과 똑같았다. 남자(男)라고 하는 사람은 이 정도까지로 어머니(母)를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아내(妻)도 자식(子)도 있는 남자가, 임종 때에「옷카상(おっかさん:엄마)」라고 어머니(母)의 이름(名)을 부르며 죽어 가는 것일까? 대머리가 되어도, 이는 빠져도, 남자(男)가 마음속으로 찾고 있는 것은 "어머니(母)의 모습(姿)"이다. 어머니(母)가 건재(健在)할 때는 괜찮다. "그 어머니(母)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라든가, 또는, 어머니(母)가 돌아가셨을 때", 남자(男)는 "자기 아내(妻) 위에서 어머니(母)의 모습(姿)을 추구(追求)하는 것이다.
男の世界は厳しい。上役に叱られ、同僚や部下に足を引っ張られ、自分の責任でもないのに誤解されて叱られることもあればまた侮辱されることもある。時には上役の頬ぺたの一つも殴って会社を辞めたいと思う事があっても、そんなことをしたら妻や子供を路頭に迷わせると思うと、男は必死に涙と怒りを堪えて我慢するのである。あるいは、上手く行くと思っていた仕事が全く失敗し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もある。得意の時は得意の時で妻の喜ぶ顔を早く見たい、早く妻を喜ばせたいといって帰りを急ぐものであるが、そうした失意の時、失敗の時程妻の慰めを求めてしおしおと男は家に帰るのである。
남자의 세계(世界)는 냉엄(嚴しい)하다. 상사(上役)에게 욕 먹고, 동료(同僚)나 부하(部下)로부터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책임(責任)도 아닌데 오해(誤解)를 받아서 욕 먹는 일도 있고 또한 모독(侮辱)당하는 일도 있다. 때로는 상사(上役)의 귀싸대기를 한 대라도 후려갈기고 회사(會社)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도, 그런 짓을 하면 아내(妻)랑 자식(子供)을 길거리에 헤매게 하게 된다(살기가 몹시 어려워지게 된다)고 생각하고는, 남자는 필사적으로 눈물(涙)을 삼키며 노기(怒り)를 꾹꾹 참으며 참는(我慢する) 것이다. 때로는, 잘 해 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완전히 실패(失敗)해 버렸다고 하는 일도 있다. 득의(得意)할 때는 득의(得意)할 때라서 아내(妻)가 기뻐하는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 빨리 아내(妻)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하며 귀가를 서두를 테지만, 그렇게 실패(失敗)를 했을 때, 실패할 때만큼은 아내(妻)의 위로(慰勞)를 바라며 맥없이 남자(男)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日頃から夫の心を良く察している理解の深い妻は、夫の顔色や態度を見て、夫を励まして夫の心をねぎらう術を知っている。妻によって慰められた夫は気持ちを取り直してまた翌日は元気で出掛けるのである。夫はこのような思いやりの深い優しい妻を不幸にする事だけはしたくないと思うのである。ところが自我の強い、我儘な、自分本位の考え方しかしない思いやりのない妻は、夫の職場や外での色々な苦労を思いやることなど毛頭なく「別にあんな不景気な顔をしなければならぬ原因もないのに、何をあんなにふさぎ込んでいるのであろう」と、夫が必死に世の中の辛さに耐えているのも知らずに勝手に夫が塞いでいると思ってしまうのである。妻に失望した夫は「こんな女の為に何で働いてやるものか」と思うのである。そうすることは自分にとっても損だと思うのであるが妻と別れられないのは仕方がないとしても「この女を幸せにはしたくない」という思いだけはつのるのである。そういう心が夫を失敗に導くのである。また妻が余りにも虚栄心に満ちていると、その妻の虚栄心に引きずられて良くないことに手を出して失敗することもある。
평소부터 남편(夫)의 마음을 잘 관찰하고 있는 이해심(理解)의 깊은 아내(妻)는, 남편(夫)의 안색(顔色)이나 태도(態度)를 보고, 남편(夫)를 격려하고 남편(夫)의 마음을 위로하는 기술(術)을 알고 있다. 아내(妻)에게 위로를 받은 남편(夫)은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고(기분을 새로이 하고) 또 다음날은 활기차게 나가는 것이다. 남편(夫)은 이러한 사려 깊은 다정한 아내(妻)를 불행(不幸)하게 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가 강하고(自我の強い:고집이 세고), 방자한(我儘な:이기적인, 제멋대로 구는), 자기본위(自分本位:자기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함)의 사고방식밖에 하지 않는 이해심 없는(매정한) 아내(妻)는, 남편(夫)의 직장(職場)이나 집밖에서의 여러 가지 수고(고생: 苦勞)를 알아주는 것 따위는 털끌만큼도 없고,「그다지 저렇게 시무룩한 얼굴을 해야 할 원인도 없는데, 뭔 일로 저렇게 울적해 하고 있는 거지?」라며, 남편(夫)이 필사적으로 세상의 괴로움을 참고 견디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제멋대로 남편(夫)이 우울해 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아내(妻)에게 실망(失望)한 남편(夫)은 「이런 여자를 위해서 뭐하려 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자기에게도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妻)와 헤어질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이 여자(女)을 행복하게는 해주고 싶지 않다」고 하는 생각만은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心)이 남편(夫)을 실패(失敗)로 이끄는 것이다. 또 아내(妻)가 너무나도 허영심(虛榮心)에 차 있으면, 그 아내(妻)의 허영심에 끌려서 좋지 않은 것에 손을 대서 실패(失敗)하는 일도 있다.
正法を知っている人達は、人生は魂の勉強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から夫の魂を傷つけるようなことは言わないが、物質欲や名誉欲や虚栄心などにとらわれている妻は、そういうものだけで夫を評価するから夫はそれに耐えられなくなってくる。「犯罪の陰に女あり」というのは本当である。しかし、世の中にはどうしようもないという男もいるがそれは稀であって私は今この場合、普通の常識的な一般的な夫婦を対象にして書いているのである。
정법(正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인생(人生)은 영혼(魂)의 공부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남편(夫)의 영혼(魂)에 상처를 주는 그런 것은 말하지 않지만, 물질욕(物質欲)이나 명예욕(名譽慾)이나 허영심(虛榮心)에 등에 사로잡혀 있는 아내(妻)는, 그런 것만으로 남편(夫)을 평가(評價)하기 때문에 남편(夫)은 그것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범죄(犯罪)의 그늘(陰)에 여자(女)가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남자(男)도 있지만 그것은 드물고 저(※소노가시라 히로치가((園頭廣周))는 지금 이 경우, 보통(普通)의 상식적(常識的)인 일반적인 부부(夫婦)을 대상(對象)으로 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夫の心の奥底に潜む、夫自身さえあらわには知らない切ないまでに母を思う心、この心を満たしてやるのは、妻が母になる以外にない。
남편(夫)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潛在)하는, 남편 자신조차도 명백하게 모르는 애달픔에 이르기까지 어머니(母)를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心)을 채워주는 것은, 아내(妻)가 어머니(母)가 되는 이외(以外)에는 없다.
妻は子供のためだけの母であっ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夫にとっても母となり、夫が母を慕うその心を満たして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妻が唯単に、子供の母としてだけ、夫に仕える一人の妻としてだけであったのではその妻を、可愛いとは思うがそれだけでは夫の心は満たされないのである。もし何かあったとしたら私に任せて下さいと言ってくれるような頼り甲斐のある、あたかも子供が母親を頼りに思うような頼もしさを夫はいつの間にかしら妻に求めているのである。そうして、良い所も悪い所も、全てひっくるめて夫を温かく包んでくれる母のような妻を夫は心の底で望んでいるのである。夫の良い所を認めることもなく、欠点だけを言い立てるような妻であったとしたら、夫は家に帰っても心が安らぐことがない。人が求めているのは心の安らかさである。妻の前で心が安らかでないと、その夫はどこかで何かで心の安らかさを求めて妻を悲しませることになるであろうが、夫の心を安らがせることのなかった妻は、夫がそうしたことが自分の責任であったことには気がつかないのである。
아내(妻)는 자식(子供)을 위해서만의 어머니(母)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편에게도 어머니(母)가 되어, 남편(夫)이 어머니(母)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채워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내(妻)가 단지, 아이(子供)의 어머니(母)로서만 있고, 남편(夫)을 섬기는 한 사람의 아내(妻)로서만 있어서는 그 아내(妻)를, 사랑스럽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남편(夫)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저에게 맡겨 주세요"라고 말해 주는 그런 의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마치 아이(子供)가 모친(母親)을 의지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믿음직함을 남편(夫)은 어느샌지 모르게 아내(妻)에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전부 합해서 남편(夫)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어머니(母)와 같은 아내(妻)을 남편(夫)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남편(夫)의 좋은 점을 인정하는 일도 없고, 결점(缺點)만을 들먹이는 그런 아내(妻)였다고 한다면, 남편(夫)은 집으로 돌아와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이 없다.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은 마음의 편안함이다. 아내(妻) 앞에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그 남편(夫)은 어딘가에서 뭔가로 마음의 편안함을 찾아서 아내(妻)을 서글프게 하게 될 테지만, 남편(夫)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 했던 아내(妻)는, 남편(夫)이 그러한 것이 자기 책임(責任)이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男は外で職場で、何かあった時、思いっきり泣きたいと思うことがある。思いっきり慰められたいと思うことがある。しかし、男はそれが出来ない。もし妻の前でそんなことをしたら、妻から軽蔑されると思い、また、妻にだけはこの様な辛さは味あわせてはならないと思うから、そういうことがあった時程かえって何事も無かったかの様に振舞うのである。しかし、賢明な妻は、かねてとは違った夫のそぶりから敏感に夫の苦労を知って夫の心を休ませるのである。
남자(男)는 집밖에서 직장(職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때, 마음껏 울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마음껏 위로를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남자(男)는 그것을 할 수 없다. 만일 아내(妻)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면, 아내(妻)에게 경멸(輕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또, 아내(妻)에게만은 이와 같은 괴로움은 맛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었을 때 일수록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명(賢明)한 아내(妻)는, 평소와는 다른 남편(夫)의 기색(거동)에 민감(敏感)하게 남편의 고생을 알고 남편(夫)의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私が事業に失敗して収入がなくなった時、妻は何にもいわずに自分から働きに出て少ない収入に何一つ不平も言わずに家事をやってくれた。そのことがどれ位有り難かったことか。私は心の中で手を合わせて感謝した。その時の妻には後光がさしていた。
내가 사업(事業)에 실패해서 수입(収入)이 없었을 때, 아내(妻)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일하려 가고 적은 수입(收入)에 무엇 하나 불평(不平)도 하지 않고 집안 일(家事)을 해 주었다. 그 일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나는 마음속으로 손을 모아서 감사(感謝)했다. 그 때의 아내(妻)에게는 후광(後光)이 비치고 있었다.
「こんなはずじゃなかった」「こんな金では生活できない」「全く甲斐性がない」など妻に言い立てられたとしたら、そんな妻の前で平気でいられる夫は一人もいないであろう。怒って妻を殴り倒すか、黙ってその妻から逃げ出すであろう。
「이럴 리가 없어(こんなはずじゃなかった)」「이런 돈으로는 생활할 수 없어(こんな金では生活できない)」「완전히 주변머리가 없어(全く甲斐性がない:전혀 주변 없는 사람이야)」등등 아내(妻)에게 일일이 들 먹이며 잔소리를 듣는다면, 그런 아내(妻) 앞에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남편(夫)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화를 내는 아내(妻)을 때려눕히든가, 조용히 그 아내(妻)로부터 도망갈 것이다.
どこの家庭でも年老いた夫は老妻に世話を焼かせる。老妻から何と言われようとも少しも気にせずに言われるが儘に動いている。年老いた夫は、年とともに子供に帰ってしまう。老妻が居なくなると淋しくて仕方がなくなる。仲の良い老妻は夫のことを「手の掛かる孫だ」という。
어느 가정(家庭)이라도 늙은 남편(夫)은 늙은 아내(老妻)에게 신세를 질 것이다. 늙은 아내(老妻)가 뭐라하든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늙은 남편(夫)은, 새해와 더불어 자식(子供)에게 돌아가 버린다. 늙은 아내(老妻)가 없으면(죽으면) 쓸쓸해서 견딜 수 없게 된다. 사이 좋은 늙은 아내(老妻)는 남편(夫のこと)을「손수 돌보아야 할 손자(手の掛かる孫だ)다」라고 말한다.
夫が、男が、心の中で求めているものは「永遠の母性」である。女は、妻は、夫にとっても母となった時その人格は完成されてゆく。男は、夫は、妻の内なる永遠の母性を頼りに生きてゆく。
남편(夫)이, 남자(男)가, 마음속으로 찾고 있는 것은 「영원한 모성(永遠の母性)」이다. 여자(女)는, 아내(妻)는, 남편(夫)에게도 어머니(母)가 되었을 때 그 인격(人格)은 완성(完成)되어 간다. 남자(男)는, 남편(夫)은, 아내(妻) 속에 있는 영원한 모성(母性)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私は男であるから、男としての立場を書き過ぎたかも知れない。戦前はこんなことは聞かなくても多くの女性は母となって人格を磨いて行った。健気な妻が多かった。
나는 남자(男)이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입장(立場)을 너무 썼는지도 모른다. 세계 제2차 대전 전(戰前)에는 이런 것은 듣지 않아도 많은 여성(女性))은 어머니(母)가 되어 인격(人格)을 닦아 갔다. 갸륵한 아내(妻)가 많았다.
終戦後は民主主義ということで男女平等ということばかりが強調されて「母となる事の大事さ」は全く説かれなくなってしまった。この文章を読んで、初めて男心というものがわかった。女が母として生きることの大事さ、女心というものがわかったという女の人があるはずである。
세계 제2차 대전 후(終戰後)는 민주주의(民主主義)라고 하는 것으로 남녀평등(男女平等)이라고 하는 것만이 강조(強調)되어, 「어머니가 되는 것의 중요함(母となる事の大事さ)」은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문장(文章)을 읽고, 처음으로 남자의 마음(男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여자(女)가 어머니(母)로서 사는 것의 중요함(大事さ), 여자의 마음(女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하는 여자(女の人)가 있을 것이다.
★아래는 편지입니다, 헌데 정중한 표현의 일본어가 서툴어서 죄송합니다.★
正法誌五月号の「男の役割と女の役割」を読まれたある方から次のような手紙が寄せられた。
정법지(正法誌) 5월호의「남자의 역할과 남자의 역할」을 읽으신 어느 분에게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私は高橋信次先生にお目にかかり、突然、心を開いて頂き、父をはじめ一族お救い頂いた者でございます。信次先生懐かしさの思いだけでこれまで一年余り正法誌を読ませて頂いておりましたが、毎月の正法誌によってどれだけ心を救って頂いているかを今になって改めて感じさせて頂いております。信次先生の遺された教えを守っていれば、心の指針は失ってはいないはずだと思っておりましたのに、自己中心の高ぶった心は常に揺れ動き、正法誌にふれると正常に戻る状態でございます。夫を尊敬出来ないばかりか、軽蔑の思いに満ち満ちて、離婚まで考えておりましたが、五月号の正法誌によってその間違いに気づかせて頂きました。この出来の悪い女を、一言の文句を言う事もなく耐えてくれていた夫こそ、天上界の使いの方かも知れません。これまで夫から悪く言われまい、言われまいとばかり思い、優しい心を掛けること一つせず見下してばかりおりました。恥知らずとは私のことだと思います。現在は心も安定して、生きてゆく希望が湧いてくる思いが致します。本当に正法誌のお蔭でございます。感謝の心の一端を記させて頂きました。本当に有り難う御座いました」
「저는 다카하시 신지(高橋信次) 선생님을 뵙고, 돌연, 마음을 열어 주셔서, 아버지를 비롯한 한가족이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지(信次)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생각만으로 지금까지 1년 남짓 정법지(正法誌)을 읽게 하고 있었습니다만, 매월 정법지(正法誌)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에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이제 와서 세삼스럽게 느끼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신지(信次) 선생님의 후세에 남겨주신 가르침을 지키고 있으면, 마음의 지침(指針)은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중심(自己中心)이 되어 격해진 마음은(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흥분된 마음은) 항상 흔들리고, 정법지(正法誌)을 접하면 정상(正常)으로 돌아오는 상태입니다. 남편(夫)을 존경(尊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멸(軽蔑)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이혼(離婚)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5월호의 정법지(正法誌)로 인해서 그 잘못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 반편이인 나쁜 여자를,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참고 견뎌 주고 있던 남편(夫)이야말로, 천상계(天上界)의 사자(使者)일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욕을 먹지 않고, 헐뜯지 않는다고만 생각하고, 다정한 마음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멸시하고만 있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파렴치한 사람은) 바로 저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마음도 안정(安定)되어, 살아가는 희망(希望)이 솟아나는 생각을 하겠습니다. 정말로 정법지(正法誌) 덕분입니다. 감사의 마음의 일단을 적었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この様な喜びの手紙を頂くと、私も正法誌を出して本当に良かったと嬉しくてならない。
이런 기쁨의 편지를 받고, 저도 정법지(正法誌)을 실어서 정말로 좋았다고 생각하며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この七月号ではまた喜んで下さる方が出て来るであろう。
이번의 7월호에서는 역시 기뻐해 주시는 분이 나올 것입니다.
この手紙の方の夫のような人を「永遠の父性」を備えた人という。
이 편지에 있는 남편(夫)과 같은 사람을 「영원(永遠)한 부성(父性)」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
★반편이 명산 폐묘한다
① 못난 것이 잘난 체를 하다가 도리어 명산을 모르고 묘를 폐한다는 뜻으로, 못난 사람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투르게 재주를 부리다가 일을 그르친다는 말
男が、夫が、妻に求めるものは「永遠の母性」であるが、女が、妻が、夫に求めるものは「永遠の父性」である。妻が夫にとって良き母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同じように、夫は妻にとって良き父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夫は父となってその人格は完成されてゆく。
남자가,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영원한 모성(永遠の母性)」이지만, 여자가,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영원한 부성(永遠の父性)」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있어서 좋은 어머니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에게 있어서 좋은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남편은 아버지가 되어 그 인격을 완성시켜 간다.
妻がどんなことを言おうと、どんなことをしようと、妻を愛する夫は父となって妻のすることを赦している。
아내가 어떤 것을 말하려고, 어떤 것을 하려고 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버지가 되어 아내가 하는 것을 용서하고 있다.
父が娘を可愛がるのと同じように、夫は父となって妻を愛してゆく。
아버지가 딸을 귀여워하는 것처럼, 남편은 아버지가 되어 아내를 사랑해 간다.
妻はその夫の頼り甲斐を感ずればこそ、そこに頼もしさを感じて心を憩わせる。妻がどんな失言をしても、それを笑って過ごす夫に妻は頼り甲斐を感ずる。妻の言う事に一々目くじらを立ててあげつらっているような夫は、賢い夫だとは思うが何故か夫に頼り切れない不安が残る。妻が母となって夫の過ちを赦すと同じように、夫は父となって妻の過ちを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過ちを赦された妻は、その夫をどんなにか尊くありがたく思う事であろうか。
아내는 그 남편의 의지할 만한 가치를 느껴야만 비로소, 거기에 믿음직함을 느끼고 마음을 쉬게 된다. 아내가 어떤 실언(失言)을 해도, 그것을 웃으며 지나가는 남편에게 아내는 의지할 만한 가치를 느낀다. 아내가 말하는 것에 일일이 트집을 잡고(쌍심지를 켜고) 따지고 있는 것과 같은 남편은, 현명한 남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웬지 남편에게 의지할 수 없는 불안이 남는다. 아내가 어머니가 되어 남편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처럼, 남편은 아버지가 되어 아내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을 용서받은 아내는, 그 남편을 어찌 존경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습니까?
職場で知り合った男性と駆け落ちしたものの、その男性に捨てられて困っている妻を迎えに行った夫の話を聞いた事がある。
"직장(職場)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남성과 도망쳐 행방을 감춘 사람의, 그 남성에게 버림을 받아 난처(곤란)해 하고 있는 아내를 맞이하려 갔던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頼って行った男に捨てられたあの妻は、腕に職がある訳でもないのに、これから永い先の一生をどうやって暮らしてゆくであろうか。あの妻の疲れた心を憩わせ、安らかな心を持たせることが出来るのは自分以外にはないであろう。自分から逃げた女を迎えに行ってと軽蔑されるかも知れないがそれでもいい」その人は妻の全てを赦したという。その人は永遠の父性を自覚していたのである。
「의지하려 갔던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저 아내는, 기량(腕)에 직업이 있을 리도 없는데, 앞으로 오랜 장래의 일생을 어떻게 해서 살아갈까? 저런 아내의 피곤한 몸을 쉬게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은 나 이외에는 없을 테니까. 나에게서 달아났던 여자를 맞이하려 가면 경멸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그 사람은 아내의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영원한 부성(父性)"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キリストの祈りは「天に在します我らの父よ」という言葉で始まる。一切の罪を赦すのは父である。夫は父となって妻を守り妻の全てを生かし妻の全てを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妻が夫の心を憩わ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同じように夫は妻の心を憩わせなければならない。
그리스도(Christ)의 기도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시여(天に在します我らの父よ)」라고 하는 말로 시작했다. 일체의 죄(罪)를 용서하는 것은 아버지(父)이다. 남편은 아버지가 되어 아내를 지키고 모든 것을 발휘하여 아내의 전부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쉴 수 있게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쉴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人間は、ある時は男に生まれ、ある時は女に生まれて父となり母となりして、神の性である永遠の父性と永遠の母性を体験して人格を完成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男性的ではあるが女心の優しさは分からないという男性はまだ男性としては未熟であるし、女性的ではあるが男心の逞しさが充分に分からないという女性もまた女性としては未熟である。
인간(人間)은, "어느 때는 남자로 태어나고, 어느 때는 여자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거나 하며", 신(神)의 성품(性)인 영원한 부성(父性)과 영원한 모성(母性)을 체험(體驗)하며 인격을 완성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남성적이기는 하지만 여자의 마음의 다정함을 모른다고 하는 남성은 아직 남성으로서는 미숙(未熟)하고, 여성적이기는 하지만 남자의 마음의 강인함(늠름함:逞しさ)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하는 여성도 또한 여성으로서는 미숙(未熟)하다.
★"어느 때는 남자로 태어나고, 어느 때는 여자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거나 하며",빨간 글씨로 표시한 부분을(ある時は男に生まれ、ある時は女に生まれて父となり母となりして),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자는 남자로만, 여자는 여자로만 태어납니다.★ 본체와 분신의 관계를,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 2016년 11월 26일 현재, 본체와 분신이 모두 남성인 경우는, 예수님, 모세님,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님)이며,
본체와 분신이 모두 여성인 분은, 성모 마리아,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등이며, 또한 본체와 분신 3명이 남자이며 분신 3명이 여자인 경우, 본체와 분신 3명이 여자이며, 분신이 남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영혼(의식)은 신불의 자녀로서, 엄연히 개체(개인)이지만, 신불의 입장에서 볼 때, 즉 우주의 진리로 볼 때, 남이 아니며, 본체와 분신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어느 때는 남자로 태어나고, 어느 때는 여자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거나 하며"
라고 하는 것입니다.) ★ 이해가 안 되실지도 모릅니다만, 그러합니다.
神の心をそのまま知ることが出来た方を如来というのであるが、如来の持ち賜う慈悲は、永遠の女性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るし、如来の智慧は、永遠の男性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り、如来が智慧と慈悲とを一身に兼備していられるのは、神が智慧そのものであり慈悲そのものであり賜うからである。人は男心も女心も良くわかるようになってゆかなければ人格を完成す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ある。
"신(神)의 마음을 그대로 알 수가 있는 사람을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이지만, "여래(如來)가 지니신 자비(慈悲)는, 영원한 여성에게서 탄생한 것이고", "여래(如來)의 지혜(智慧)는, 영원한 남성에게서 탄생한 것이며", "여래(如來)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한몸(一身)에 겸비(兼備)하고 계시는 것은, 신(神)이 지혜(智慧) 그 자체이며 자비(慈悲)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자의 마음도 여자의 마음도 잘 알게 되지 않으면 인격을 완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家庭生活とは、夫婦が単に調和するだけでなく、夫は女心を良く理解し、妻は男心を良く理解して、ともに人格(実際は神格の顕現)を完成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である。妻は夫をして、子供達だけの父とならしめるだけでなく、自分にとっても良き父たらしめる(そのようなこと(存在)にさせるという意)べく夫と話を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し、夫は妻をして、子供達だけの母たらしめるだけでなく、自分にとっても良き母たらしめるべく妻と話をしてゆかなければならない。
가정생활(家庭生活)이란, 부부(夫婦)가 단순히 조화(調和)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남편은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아내는 남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함께 "인격(人格)((실제는 신격(神格)의 현현(顯現))"을 완성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으로 하여금, 아이들(자식들)만의 아버지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서도 좋은 아버지가 되게 하려고((그와 같은 것((존재((存在))로 여긴다고 하는 뜻))남편과 이야기를 해 가지 않으면 안 되고, 남편은 아내로 하여금, 아이들(자식들)만의 어머니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서도 좋은 어머니가 되게 하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男と女と、夫と妻と、父と母と、この間にたゆとう(ゆらゆらと揺れ動いて定まらないという意)愛の心の不可思議さを、余す所なく味わい尽くして行く所に人生の喜びがあり、人格の完成がある。何と不思議な人生であることよ。神の摂理の不思議さに私は哭(な)く。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이 사이에 흔들리는((흔들흔들 흔들려서 불안정하다는 뜻(ゆらゆらと揺れ動いて定まらないという意))사랑의 마음의 불가사의함을, 남김없이 음미하며 진력해 가는 데에 인생의 기쁨이 있고, 인격이 완성이 있다. 정말로 불가사의한 인생이롤세. 신(神)의 섭리(攝理)의 불가사의함에 나는 운다.
今生は今生で、尽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愛を尽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し、来生は来生でまた愛を尽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限りなく愛を尽くして神に至るのである。
금생은 금생(今生)이며,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내생(來生)은 내생(來生)이며 역시 사랑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없는 사랑을 다해서 신(神)에게 이르는 것이다. (限りなく愛を尽くして神に至るのである).
人間は、永遠の父性、永遠の母性となるべきことを知った時、釈尊が説かれる男女の道、結婚生活の在り方もまた良く理解できるのである。私がこの様な事を書いたのは、釈尊の教えを良く皆さんに理解して頂きたいがためである。
인간은, 영원한 부성(父性), 영원한 모성(母性)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석존(釋尊)이 설법하신 남녀의 길(道:도리), 결혼생활(結婚生活)의 본연의 모습을 또한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제가 이러한 것을 쓴 것은,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잘 여러분에게 이해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 完 - 끝
月刊誌 正法 (월간지 정법)
第31号(1981.03月)/第32号(1981.04月)/第33号(1981.05月)/第35号(1981.07月) より
제31호(1981.03월)/제32호(1981.04월)/제33호(1981.05월)/第35호(1981.07월)에서
2013.07.28 (日曜日)22:37 UP
2013.07.28 (일요일)22:37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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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hoho2.com/s2-11otokonoyakuwari.html
http://www.shoho2.com/s2-12otokonoyakuwari-2.html
위 날짜는, 위 글을 올려 주신 현재 2016년 11월 26일, 연세가 67세가 되시는, 본인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으시는,
프로필에, 1950년, 이라고 하시며, 후쿠오카현(福岡県)에 살고 계시다는 분께서 올려주신 날짜입니다.
이 분이 글이, 전부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
※저는, 2013년 09월 15일 일요일 오후 18:31에 올립니다.
글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급하게 올렸습니다. 2013년 09월 15일 19시 30분에.
또한, 바로 윗글에, 빨강색을 입힌, 부분 때문에, 본문 전체를 안 올리려 하다가, 올립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확연히 알고 있기에, 올립니다.
또한, 오셔서 읽으시는 분들은, 그냥 읽으시면 되지만, 글을 읽다 보면, ()안의 표시 처리가, 틀리거나, 한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 만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굴림체로 된 일본어를, 차후에 바탕체로 바꿀 것입니다. 그래야 글을 읽으시는데, 눈이 덜 피로하실 것이니까요. 그리고 글씨 크기는, 크게 일부러 했습니다. 눈시력이 안 좋은 분들을 위함입니다.
추석 선물입니다. ^^
2013년 9월 15일에 최초에 올렸던 것을
2016년 11월 26일 토요일로, 날짜를 바꿔서 올리며,
둘로 나뉘어진 것을, 합본으로 올리며, 몇 군데 번역상의 오타 및 약간의 오역을 정정하였습니다.
※출처 : http://www.shoho2.com/index.html
http://www.shoho2.com/s2-11otokonoyakuwari.html
http://www.shoho2.com/s2-12otokonoyakuwari-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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